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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쉬운 詩 좋은 詩

사라진 밍크이불 - 이진심

by 이성근 2013. 7. 24.

 

 

사라진 밍크이불

 

                                           이진심

 

 

그 시절, 어지간한 집엔

장롱마다 그 놈이 살고 있었다

반듯하게 펴려 해도

꼭 어딘가 한 군데는 주름져 있던

털이 여러 군데로 쓸려져

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이 달랐던,

가을철에 장롱에서 기어 내려와

겨울 지나 봄까지

방바닥에서 온갖 게으름을 피우며

개켜지는 법 없이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또르르 또르르

몇 년이 지나도 빨지 않아

털이 송곳처럼 딱딱해지던 밍크이불,

말뿐인 밍크이불

한번 물을 먹으면 너무 무거워

빨랫줄에 걸 수 없었던 짐승,

장사하는 엄마 따라 시장에 나가

한겨울 사과를 덮다가 배추를 덮다가

털갈이를 끝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밍크이불,

너무 순해서 내 동생 같았던

진짜 밍크 같았던

 

 

   

1966년 인천출생

1993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2년《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불타버린 집』『맛있는 시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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