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의 친 동생인 김덕종씨는 시인을 참 바람 같은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대부분 고무신을 신으면 동네 마실 정도의 가벼운 거리를 산책하는 정도라 생각하지, 고무신 신고 광주로 서울로 가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했다. 반대로 양복을 입고 등산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시인의 성격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는 기억이었다. 꽂히면, 생각하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김남주 시인 24주기 추모제... 그의 '노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김성훈오마이뉴스 18.2.12
"우리는 그를 물봉이라 불렀어. 세상 물정 모른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었지. 눈빛은 9살짜리 착한 소년, 웃을 땐 짓궂은 개구쟁이, 토론할 때면 갑자기 체 게바라가 되기도 했어. 사회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거의 도사급이었지. '너 왜 그렇게 많이 똑똑해?'라고 심술을 부리면 '감옥에서 할 일이 책 읽은 것밖에 없어서'라며 뒤통수를 긁었어."
"김남주가 감옥에 있을 때 나는 작가회의 상임이사였어. 대학에서는 축제 때마다 남주의 시를 읽으며 석방을 촉구했지. 서강대학 때는 나도 참석해서 촛불 순례를 했어. 여러 대학에서 남주를 위한 강연을 하고 석방운동을 했지만 정작 얼굴을 본 것은 그가 석방하던 날이었어. 그의 첫인상은 충격이었어. '나의 칼, 나의 피' 같은 어마무시한 시를 쓴 혁명가 시인의 얼굴이 글쎄, 어리바리한 촌놈 같더라니깐.
어떤 봄날이었을 거야. 그날은 국회에 김영현이랑 김남주랑 함께 갔어. 봄꽃이 눈처럼 날리던 날이었지. 남주가 다가가 만져보고 냄새 맡으면서 '와, 진짜 꽃을 보네' 그러더라고. 감옥에 10년 가까이 있으면서 꽃을 한 번도 못 봤다며... 그때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팠어."
'어리바리한 촌놈' 김남주를 기억하며 [딸이 묻고 엄마의 삶이 답하다 ⑩] 우리가 사랑했던 김남주 중 -윤솔지 20.4.4 / 오마이뉴스
돈 앞에서
김남주
돈 앞에서
흘리지 않는 웃음 없고
걷어올리지 읺는 치마 없지요
우리나라 좋은 나라지요
돈 앞에서
굽히지 않는 허리 없고
꿇지 않는 무릎 없지요
우리나라 좋은 나라지요
돈이면 다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장에서는 섹스도 인격도 사고 팔지요
요즈음
들리는 바로는 요즈음
얼굴 밴밴하고 다리 미끈한 여자는
거개가 서어비스업으로 몰린다지
좀 삼삼하다 싶은 여자에게 물으면
너 이담에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을라치면
모델이 되고파요
스튜어디스가 됐으면 해요
탤런트가 될 거예요
이런 대답이 십중팔구라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게 상품이지 섹스도 상품이지
웃음 팔고 몸 팔아 먹고 입는 게 아냐
허벅지와 유방이 쾌락의 도구로 팔리고
밤이면 그것을 팔아 여자들이 입고 먹고 사는 거지
요즈음 술집에는 홀랑 벗고 팔지 않으면 손님이 오지 않는다지
이발소에서는 한낮에도 여자가 그것을 팔아 돈을 번다지
나라에서 관광자원의 활성화를 위해
유흥업소의 근대화와 전 여성의 창녀화를 불사하겠다지
1994년 2월 암으로 세상을 뜬 김남주 시인의 유고시집'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에 실린 시다. 1992년 생전의 마지막 시집이었던 ' 이좋은 세상에' 이후 1994년깢디 발표와 미발표시를 한자리에 모은 시집이다. 시간이 꽤 경과했지만 그가 보았던 출감 후의 세상은 그다지 바뀐 것 없고 오히려 후퇴한 것 같다.
처음 내가
서울 구경을 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할 때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사돈네 팔촌도 없는 나에게
'따뜻한 방 있어요'
친절하게 말을 건네주고는
'참한 아가씨 있어요'
앞장일랑 서서는 길까지 안내해준 사람은
서울역 뒷골목의 아줌마였다
살냄새 땀냄새 입냄새 사람냄새에 끼여
그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친절을 받았다
하나같이 그들은 제 속에 잇속을 갖고 있었다
잇속 없이 나를
밀어주고 이끌어주고 감싸준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지금 감옥에 있다
하나아 두울 세엣 네엣... ...
아이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셈을 하고 있다
네살배기 아이가 앙증맞게도
밤의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서
토일아 너 거기서 뭘 세고 있니
어미가 아들 곁으로 다가가서 하늘을 쳐다보며 묻는다
아이가 지금 세고 있는 것은 별이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십자가일 것이다
회색의 대기 속을 뚫고 우뚝우뚝 솟아 있는
시뻘건 시뻘건 십자가들일 것이다
한 집 건너 또는 한 건물에도 두 개씩 솟아 있는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
서울에 살면서 그런 시뻘건 십자가들을 볼 때마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나는 가슴이 섬뜩했다
어릴 적에 툇마루에 앉아 별을 헤며
셈을 하고 구구단을 외운 적이 있었던 나에게
밤의 서울은 흡사 거대한 공동묘지와 같았다
요즘 나는 먹고 사는 일에 익숙해졌다
어제도 오늘도 밤의 술집에서 즐겁고
나는 이제 새벽의 잠자리에서 편하다
체포
구금
고문
감옥
그따위 어둠의 자식들은 내 기억에서조차 멀다
나는 마누라가 건네주는 수화기에 짜증을 내며 귀를 댄다
멀리서 내 이름을 확인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소리의 주인공을 기억하지 못한다 낭패한 목소리가
그 이름을 밝히고 나서야 나는 그 목소리가
감옥의 출구에서 갓 나온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나는
갑자기 지난날의 나로 되돌아가고 싶다
숙박계에 가짜이름을 적어놓고 뜬눈의 밤을 새웠던 싸구려 여인숙들
날이 새는 것을 두려워했던 어둠의 골목들
불편한 하룻밤을 신세져야 했던 신혼 부부의 단칸셋방
뒷주머니에 지폐를 찔러주며 어색해했던 가난한 문인들
지난날의 기억들을 나는 이미 잊고 살아도 되는 것인가
아직도 수백의 사람들이 도피와 투옥의 세계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데
나는 누구인가 그 이름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차라리 어둡고 괴로운 시절이라면
가시덤불 속에서 깜박깜박 어둠을 쫓는 시늉이나 하다가
날이 새면 스러지고 마는 개똥벌레라도 될 것을
차라리 춥고 배고픈 시절이라면
바람 찬 언덕에서 늙은 상수리나무쯤으로 떨다가
나무꾼의 도끼에 찍혀 땔감으로라도 쓰여질 것을
밤이 대낮처럼 발가벗은 이 세상에서는
배가 터지도록 부어오른 이 거리에서는
이제까지 내가 쓴 시 참 보잘것 없다. 내 나이 마흔다섯, 이제 시작이다.
내년부터는 생활 속으로 들어가자. 거기 가서 끝간 데까지 사랑하고 증오하자. 중용은 시가 아니다. 그것은 성자들이나 할 일이다.
시인은 성자가 아니다. 혁명하는 사람 그가 시인이다.
新허기진 군상] 10.28 경향
(6) 병원 가기 두려운 사람들-건보 우산 밖 빈곤층에 의료비는 ‘재난’…몸도 삶도 무너졌다
큰 병이나 난치병에 걸리는 것은 늪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행히 한국 의료진 수준은 눈부시게 발달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적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고 약물을 복용하면 늪에서 빠져나오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역시 ‘돈’이 문제다. 전 국민이 국민건강보험을 적용받지만 난치병으로 인한 ‘재난적 의료비’를 감당하기엔 보호망이 너무 성기다.
◆ 돈 없어 치료 못 받는 미선씨 이야기
“제가 움직이기가 좀 어려워서요. 이쪽으로 좀 와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15일 서울 성동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미선씨(35)는 희귀성 질환인 다발성경화증 환자다. 작은 배낭을 메고, 등산용 지팡이처럼 생긴 물건을 손에 쥐고 카페에 들어선 김씨는 얼핏 보기에 여느 평범한 30대 중반 여성과 다를 바 없었다. 이리저리 벽을 짚던 김씨가 자리에 앉으며 “앞이 잘 안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그제야 ‘움직이기 어렵다’는 말이 실감났다.
희귀성 질환인 다발성경화증을 앓고 있는 김미선씨가 27일 서울 성동구 금호동 자택에 누워 쉬고 있다. 그가 복용하는 약 봉지가 옆에 수북하게 놓여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김씨는 17년째 다발성경화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다발성경화증은 온몸의 여러 부위가 점차 굳어가는 병이다. 평소엔 큰 문제가 없지만 증상이 시작되면 극심한 통증이 엄습해 일상생활을 하기 어렵다. 김씨는 두 팔을 양쪽으로 펼치며 “집에 병원 차트가 이렇게 많이 쌓여 있다. 언제 어디가 아팠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특별히 어디가 아픈 게 아니라 수시로 온몸이 쑤셔오는 그런 병”이라고 말했다.
다섯 자매 중 맏이인 김씨는 고등학생이던 1997년 2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동생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였다. 화학약품과 금속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동생들을 생각하며 묵묵히 일했다. 1998년 말 김씨는 갑자기 목이 뻐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출근하기 위해 옷을 챙겨입으려 했지만 손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회사에 병가를 내고 병명을 알아보러 다녔다. 김씨는 다시는 일을 하지 못했다
“엄마랑 여기저기 한의원을 다니며 침을 맞았는데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며칠 사이에 몸 왼쪽에 마비가 왔어요. 유명한 병원을 가봐도 정확한 병명은 모른대요. 2000년으로 넘어와서야 다발성경화증이란 진단을 받고 퇴사했어요.”회사를 나온 김씨는 동생들과 한집에 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다 2005년 김씨는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얻었다. 부양자가 있으면 수급자가 될 수 없다는 말에 임대아파트를 얻어 홀로 살게 됐다. 김씨가 현재 국가로부터 받는 급여는 매달 49만원. 아파트 관리비로만 매달 15만원가량 나간다. 치료비를 부담하고 나면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하다.
“2000년부터 베타페론 주사를 맞았어요. 건강보험이 적용되기 때문에 돈은 별로 나가지 않았지만 효과가 별로였어요. 그래서 담당 의사 선생님 권유로 베타페론을 끊고 5년 전부턴 감마글로불린 주사를 맞고 있어요. 전보다 확실히 재발은 줄어들었지만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이라 매달 47만원이 꼬박꼬박 나갑니다.”
다발성경화증 외에도 사소한 질병들이 김씨를 괴롭힌다. 병에 걸린 이후 김씨는 툭하면 말이 어눌해지고 앞이 갑자기 잘 보이지 않는 증상에 시달렸다. 2005년부터는 왼쪽 눈이 거의 멀었고, 오른쪽 눈에도 증상이 이어졌다. 병원에선 시신경이 굳어지며 나타나는 현상이라 안경으로 바로잡을 수도 없다고 했다. 집안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체중이 늘었고,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과도 잘 만나지 않게 됐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지금도 김씨는 알약을 아침에 10알, 저녁에 6알씩 먹는다.
급하게 눈에 증상이 와 병원 응급실을 찾은 적이 있다. 입원해서 증상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치료받는 것이 최선이지만, 병원은 1·2인실 외에는 비어있는 입원실이 없다고 했다. 감마글로불린 비용을 대기도 어려운 김씨에게 하루 20만~30만원 들어가는 1·2인실은 ‘현실의 공간’이 아니었다. 결국 김씨는 입원을 포기하고 지팡이에 의지한 채 1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통원했다. 시각장애인 등급을 받은 이후 장애인콜택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진짜 이 사람들이 나한테까지 돈을 벌려고 했던 거구나 싶었어요. 몸이 아파 입원을 할 때는 맘 편히 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어렵네요.”
김씨는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지난해부터 서울 관악구에 있는 생활복지관을 다니며 커피 내리는 기술과 제빵 기술을 배운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자격증을 따도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커피숍 말고는 일할 곳이 없었다. 몸상태도 일하기에 버거웠다. 올해 초 김씨가 복지관에서 제빵 기술을 배울 때, 점점 보이지 않던 오른쪽 눈에 또 재발이 왔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김씨가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창 밖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김씨의 눈에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비칠 뿐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20살 때는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 속상해서 눈물이 났는데 그것도 참 오래전 일이네요.”
◆ 남편 암에 집안 무너진 명주씨 이야기
대전에 사는 보험설계사 남명주씨(45·가명)는 6년 전 남편이 간암을 앓다 사망한 이후 인생이 ‘마이너스’로 접어들었다. 그의 남편은 2009년 1월 간암 선고를 받았다. 대학병원 의사는 “살려거든 간을 이식받아야 한다”고 했다. 큰돈이 들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남편을 살릴 유일한 끈을 붙잡았다.
첫 수술을 하던 달에만 치료비와 입원비로 5000만원이 들었다. 두번째 수술 때는 400만원이 추가로 필요했다. 어려서부터 간이 약했던 남씨의 남편은 간암까지 보장해주는 사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다. 남씨의 직업은 보험설계사였지만 정작 남편을 위한 보험은 찾지 못했다. 남편의 수술을 앞두고 조직 검사, 혈액 검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생돈’이 나갔다. 국민건강보험은 ‘큰 병’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남씨는 “건강보험은 보장되는 질병이나 횟수에 제약이 많아 별 도움이 안된다”고 말했다.
닥치고 보니 ‘온갖 것이 다 돈’이었다. “수술을 하다 보면 혈액 팩으로 피를 공급하는데, 팩 하나당 비용이 들어가죠. 이식수술을 한 번 하면 그런 팩이 몇 백 개가 필요한데 다 수술비에 포함되죠. 조금이라도 수술비를 아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조카들이 헌혈증을 모아준 적도 있어요.” 남씨는 간을 이식해주겠다는 후보자 2명을 찾았다. 후보자들의 전신 암 검사, 조직 검사, 간 수치 검사 비용을 합치면 그가 남편 치료비에 쓴 돈은 1억5000만원이 넘는다.
남씨의 남편이 수술을 받고 입원했던 병원은 대전과 떨어진 경기도 수원에 있었다. 가장이 집을 비운 5개월 동안 남씨는 15살 딸과 11살 아들을 홀로 먹여살렸다. 주중에는 대전에서 일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주말이면 수원으로 향했다. 200만원이 채 안되던 남씨의 월급 전부가 간병인 비용으로 나갔다. “일을 해야 하니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진 간병인을 썼는데 기본으로 200만원을 줬어요. 식비나 교통비는 따로 계산했기 때문에 다섯 달 동안 1000만원이 넘게 들어갔죠.”
간병인 비용과 치료비 전부를 남씨 홀로 마련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시댁과 친정 식구들에게 손을 벌렸다. 시어머니, 시누이, 동생 등 여기저기의 도움을 끌어모으고도 부족한 부분은 남몰래 빚을 졌다. 남씨는 “가족 중에 암 환자가 있으면 굉장한 타격이고, 완전히 빚더미에 앉는다.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고 말했다.
1억원을 넘게 들여 두 차례 이식 수술을 받은 남씨의 남편은 2차 수술을 받고 오래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사람은 가고 없지만 6년이 지난 지금까지 빚은 남아 있다. 맞벌이를 하다 남씨 혼자 경제활동을 하자니 자연스레 가세가 기울었다. 텔레비전 수신이 끊긴 적도 있다.
“주변에 말은 안 했지만 아직도 빚을 다 못 갚았어요. 여자가 사회생활을 해서 월급을 받아봤자 200만원을 넘기기 어려워요. 세 가족 생활비에 두 아이 교육비만 해도 매달 200만원이 넘게 들어 마이너스예요. 중·고등학생인 자식들 사교육을 안 시킨다면 월 150만원으로도 먹고살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다 빚으로 안고 가는 거죠.”
정부는 암 등 4대 중증질환의 건강보험 보장률을 올해 말까지 95%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남씨는 이 말을 믿지 못했다. “하나도 보험이 안돼요. 전부 생돈을 내고 했어요. 직접 겪어보니 건강보험은 큰 질병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치료비, 입원비, 검사비까지 개인의 돈이 많이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돈이 곧 목숨인 현실
200만원 건보 체납자 “한꺼번에 납부 힘들어 건보 포기했어요”
치료비가 없어 죽어야 하는 상황만큼 야만적인 것은 없다. 그때 ‘돈이 곧 목숨’이라는 말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 건조한 사실관계를 나타낸다. 대한민국은 공적 건강보험 체계가 비교적 잘 자리 잡은 나라로 평가받지만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저소득층은 건강보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고, 가족 한 명이라도 큰 병을 앓으면 어지간한 중산층 가정도 기둥뿌리가 흔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수익성’ 논리를 앞세워 의료기관의 영리화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그치지 않는다. 서민과 중산층은 그저 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체납자에겐 건강보험 ‘그림의 떡’
서울 영등포구의 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배모씨(53)는 건강보험료 체납자다. 10년 전 남편의 공장이 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2008년 9월부터 현재까지 건강보험료를 못 내고 있다. 2011년 120만원이던 체납액은 200만원을 넘긴 지 오래다. 배씨 부부의 한 달 수입은 50만원을 넘기 힘들다. 관절염이 심한 배씨는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아파도 병원에 가기 어렵고, 보험료 체납으로 통장이 압류돼 현금으로 치료비를 내야 한다”고 했다. 병원에 가면 20만~30만원이 한 번에 나간다. 배씨는 “돈을 낼 땐 건강보험을 적용 받지만 나중에 갚아야 해서 결국 치료비 100%를 내는 셈”이라고 말했다. 배씨는 “그동안의 체납액을 한번에 내야 통장도 풀어주고 건강보험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건강보험은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탈퇴할 수도 없고, 탈퇴한다 해도 일단 갚을 건 갚아야 하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며 “아픈 사람 도와주려고 건강보험 하는 건데 아프고 돈 못 내는 사람은 건강보험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27일 서울의 한 병원 응급의료센터 앞을 병원 내방객과 의료진이 분주하게 지나가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차별 대우 받는 에이즈 환자
40대 직장인 박모씨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이다. 그는 병원에 갈 때마다 일반 진료실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안내받는다.
박씨는 “얼마 전 스케일링을 받으러 치과에 갔는데, 진료 자체를 다른 곳에서 했다. 보통의 진료 공간과는 다른 장소였다”고 말했다. 그가 진찰대에 눕기에 앞서 의료진은 의자와 치료기기, 주변 사물 전체를 비닐로 감쌌다. 그는 “집에 페인트칠을 할 때처럼 다 덮어놨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요란하게’ 준비된 스케일링은 5분 만에 끝났다.
박씨는 “평소에도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치료를 소극적으로 하는 경험을 많이 한다”면서 “HIV는 B형 간염과 감염되는 경로가 거의 똑같다. 간염 환자들은 치료를 해주는데 유독 HIV 환자한테만 안된다고 한다”고 말했다. 병원에 입원해도 의사들이 “어디가 아프냐”가 아니라 “언제부터 에이즈에 걸렸느냐. 동성연애를 한 적이 있느냐”를 먼저 물어 서러울 때도 있다. 박씨는 “‘병원에서까지 그런 대우를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약을 먹지 않고 버티다 실명한 친구도 있다”면서 “그 친구는 ‘죽으면 죽었지 병원은 안 가겠다. 자다가 쓰러지더라도 절대 나를 병원에 보내지 말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믿고 찾을 의사·병원 없어
경남 진주시에 사는 서모씨(69)는 자신의 몸을 “고물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고혈압과 당뇨가 있으며 간과 신장, 뇌가 안 좋다. 관절도 아프고, 백내장 수술도 했다. 그는 “혈압과 간이 가장 문제다. 온몸에 영향을 미치는 간이 굳어들어 가니까 생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온몸이 아픈 서씨는 늘 다니던 진주의료원이 폐업한 뒤로 마땅히 갈 만한 병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의료원이 사라지고 생긴 종합병원은 치료비가 비싸다. 오랜 시간 그를 지켜봤던 의사와 간호사가 뿔뿔이 흩어지고 새로 만나게 된 의사는 비싸고 불필요한 검사를 권유하기 일쑤여서 영 믿음이 안 간다.
형편이 어려운 서씨는 입원을 안 하고 견디고 있다. 의료원 시절에는 얼굴을 알고 지내는 간병인들이 다른 환자를 봐주고 남는 시간에 서씨를 돌봐주기도 하고, 몸이 다 나을 때까지 의사가 재량껏 입원기간을 연장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서씨는 “대학병원에서 관절염 수술을 했다. 20일 금식하고 이틀 미음을 주고는 얼른 퇴원하라고 하더라”면서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겨우 기어서 퇴원했다”고 말했다. 서씨에게 의료원은 “마음도 고치는 병원”이었다. 서씨는 “새로운 병원의 의료진이 잘 해준다고는 해도 친구같은 사람이 있던 예전의 분위기와 다르다”고 말했다. 믿음직한 병원을 찾지 못한 그는 “그냥 오늘 밤에라도 죽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의료비 불안 큰 은퇴·고령자
대전에 사는 직장인 이모씨(51)는 ‘언제 큰 병에 걸려 가계가 어려워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산다. 그는 현재 별다른 질병을 앓고 있지 않지만 2012년 자궁근종으로 자궁을 절제한 수술이력 때문에 의료실비보험 가입을 거절당했다. 이씨는 “요즘엔 나이 들면서 병하고 같이 간다고 하더라”면서 “무병장수가 아니라 유병장수 시대라는데 은퇴 후 실비보험 가입이 안될까 불안하다”고 말했다. 그나마 직장에 다니는 지금은 소득이라도 있지만 은퇴한 뒤에 질병이 찾아오면 치료비를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이다. 그가 건강보험 외에 따로 가입해둔 보험은 암보험뿐이다. 이미 수술을 한 경력이 있고, 나이가 들수록 보험 가입이 까다로워진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이씨는 고혈압이나 당뇨 등 만성질환이 있어도 가입이 되는 보험상품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알아보는 중이다. 간병인보험과 노인요양보험에도 가입할 생각이다. 그가 보험을 찾는 이유는 ‘큰 병’이 걸릴 경우 건강보험만으로는 버겁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씨는 “한국이 질병에 대한 국가 보장이 큰 나라이긴 하지만 건강보험에서 90%를 내고 내가 나머지 10%를 낸다 하더라도 질병에 따라 내가 부담하는 금액이 커질 수 있다”면서 “비급여 항목도 많고 나머지 10%에 해당하는 금액도 만만찮을 텐데 나중에 결국 연금으로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병에 걸리면 어려워질 것이 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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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서민 ‘치료의 역사’
“남편의 병을 치료해주신다면 눈이라도 팔겠습니다.” 1966년 7월23일자 경향신문에 3년째 늑막염을 앓는 남편의 치료비를 위해 눈을 팔겠다는 이종희씨(당시 35세)의 사연이 실렸다. 파지 장사를 하다 늑막염에 걸린 남편 최필준씨(43세)의 수술비 때문에 집이 저당잡히고 이씨는 머리카락을 팔아 치료비를 마련해왔다는 이야기였다.
치료비 몇 푼이 없어 병원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도 흔했다. 1969년 11월 경향신문은 술에 취해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입원비 1만원이 없어 치료를 거절당한 후 집으로 돌아와 17시간 만에 숨진 정균철씨(48세)의 사연을 전했다.
이 시기 아프고 가난한 이들 곁에는 국가가 아닌 ‘독지가’와 ‘이웃’이 있었다. 급우들이 돈을 모아 친구를 살리고 독지가의 후원이나 독자 성금으로 치료비 문제를 해결했다는 미담은 단골 기삿거리였다. 1971년 3월19일 경향신문은 “‘어머니 치료비 마련 위해 눈 팔겠다’는 기사를 보고 감동한 독자들의 성금이 답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콩나물 병실 1969년 전북 군산 도립병원에 몰려든 콜레라 환자들이 입원실이 모자라 바닥에 누워 있다.
■‘경제발전’에 밀린 의료서비스
의료인프라가 크게 부족했던 1960~1970년대에는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민간요법이 성행했다. 의사와 병원은 멀고 ‘돌팔이’는 가까웠다. 1971년 1월 “수은으로 각종 병을 고친다”며 편도선염을 앓는 환자에게 끓는 수은에서 나오는 김을 코로 들이마시게 해 4일 만에 수은중독으로 숨지게 한 돌팔이 의사의 얘기가 언론에 실렸다. 이듬해 2월 “신병을 고쳐준다”며 환자의 다리를 소금물에 매일 30분씩 담그게 하고, 왼손 넷째 손가락을 실로 동여매는 엉터리 치료를 한 돌팔이 의사가 적발됐다. 당시 경향신문은 “이처럼 돌팔이들이 날뛰게 되는 이유는 국민의 무지와 빈곤도 있지만 의사 수가 적다는 데도 있다”면서 “68년 말 현재 한국의 의사 수는 1만1869명. 이는 의사 한 사람에 인구 3300여명으로, 일본의 920 대 1과 미국의 690 대 1에 의하면 그 부담은 너무 크다”고 진단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저소득층이 병에 걸렸을 때 신속히 치료할 수 있는 대책이 국민의 관심사”라고 밝히기에 이른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4차 5개년 계획이 달성되면 국민생활이 전반적으로 향상될 것”이라고 말한 것에서 보듯 의료보험과 의료인프라 정비는 경제성장보다 후순위로 밀려났다. 1978년이 돼도 “병원 문턱이 높다”는 언론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기생충 예방 활동 1969년 보건소 관계자들이 거리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기생충 예방 무료 상담활동을 펼치고 있다.
■늘어가는 ‘직업병’
1980~1990년대엔 ‘직업병’이라는 새로운 병이 생겨났다. 1988년 7월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던 문송면군(15세)이 수은중독으로 숨졌다. 앞서 금속 제련소 용광로 작업장에서 일하던 김신용씨는 중금속복합중독에 의한 신경계통 마비로 식물인간이 됐고, 그의 몸에선 국내 첫 카드뮴중독으로 숨진 고상국씨보다 15배나 많은 카드뮴이 검출됐다. 1985년엔 경남 온산 공업단지 내 어촌 주민 500여명이 진폐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기도 했다.
산업재해는 경제성장에 매몰돼 사람을 챙기는 데 소홀했던 사회가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될 결과였다. 산업재해 증가는 ‘직업병 전문병원’을 탄생시켰다. 1988년 원진레이온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사망하자 사측은 직업병 의혹을 제기한 노동자 4명에게 600만원을 주며 무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원진 직업병 피해자 및 가족협의회’가 구성됐고 ‘원진 직업병 관리재단’이 설립됐다. 재단은 2003년 직업병 전문병원을 세워 산업재해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검사받는 진폐증 환자 1990년 8월 진폐증 환자들이 직업병 전문병원에서 심폐기능 검사를 받고 있다.
■전 국민 건강보험 명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은 절대빈곤에서 상당 부분 탈피하게 됐다. ‘학우 ○○를 살려주세요’ ‘아들을 담보로라도 아내의 병을 고쳐주십시오’ 식의 호소나 병원에서 쫓겨나는 일은 30년 전에 비해 확연히 줄었다.
1989년에는 전 국민 의료보장제가 확립됐다. 현재의 건강보험과 유사한 틀을 가진 의료보험제도가 갖춰진 것이다. 1999년 의료보험법이 국민건강보험법으로 개정됐고, 2003년 국민의료보험공단과 직장의료보험조합이 재정적으로 통합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이로써 ‘한국은 건강보험만큼은 잘 갖춰진 나라’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한국의 건강보험은 모든 의료기관에 ‘당연지정제’를 적용한다. 건강보험 가입자라면 어느 병원·약국에 가더라도 건강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고, 모든 의료기관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건강보험 가입자 및 피부양자의 진료를 거부할 수 없다.
무료 진료 서비스 2004년 1월 서울의 대형병원 의료진이 관악구 봉천동에서 무료 진료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지역 간 의료격차는 여전히 심각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요양기관(병·의원) 현황 통계를 보면, 2013년에 비해 요양기관 수는 증가했으나 전체 요양기관의 절반에 가까운 49.7%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요양기관이 가장 많은 서울 강남구(2761개소)는 가장 적은 경북 울릉군(10개소)에 비해 약 276배가 더 많다.
건강보험 미가입자 등 사각지대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김정숙 빈곤층건강권팀장은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은 제도적 피해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비급여 항목(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 항목)이 많아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떨어지는 문제도 있다. 김 팀장은 “본인이 내야 하는 비급여 항목은 중산층에게도 부담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해방 이후 70년이 흐르는 동안 한국은 ‘인간다운 삶’과 ‘복지’를 논할 수준의 경제규모를 마련했다. 그러나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된 사람들의 탄식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다.
新허기진 군상] 1025경향
(5) 빚 권하는 사회-70년대 ‘농어촌 고리채’…80년대 ‘경제깡패’ 등장…90년대 첫 ‘소비자 파산’
“넓은 평야에 산더미처럼 쌓인 볏더미를 쳐다보는 농부들은 자기 몫을 계산하고 이맛살을 찌푸린다. 대부분이 ‘남의 농사’이기 때문이다. 벼종자까지 남의 돈으로 시작해서 일체의 영농비를 농협 융자가 아니면 이웃의 사채를 끌어대어 썼다.” 경향신문은 1964년 11월 ‘소리없는 아우성, 오늘의 농촌 현지를 가다’ 연재기사에서 빚더미에 신음하는 농촌의 현실을 고발했다. 농민들은 비료값을 마련하려고, 흉년 때 먹을 것을 구하려고 월 5부(5%) 이상의 고리채를 끌어다 쓰곤 했다.
사채 동결 조치 1972년 8월3일 정부가 사채 동결 조치를 내리자 시민들이 은행에서 현금 다발로 돈을 한가득 빌려가고 있다.
농촌 고리채와 ‘무진회사’
1970년대 농어촌 고리채 미상환액은 당시 돈으로 20억원에 달했다. 빚더미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파라티온’ 같은 농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는 사례가 속출했다.
제도권 금융기관의 문턱이 높기는 농민이나 도시 서민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출이 필요한 서민들은 제도권 금융의 바깥에서 돈을 끌어다 썼다. 금융기관보다는 ‘계(契)’에 가까운 이런 사금융업체들을 ‘무진회사’라고 불렀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긴급경제조치를 통해 무진회사들을 ‘신용금고’라는 이름으로 법 테두리 안에 끌어들였다.
폭력주식회사 등장 1986년 인천 뉴송도호텔 황익수 사장 피습사건의 주범 김태촌과 일당이 목포에서 붙잡혀 인천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해결사 ‘폭력주식회사’ 등장
1980년대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경제깡패’ ‘폭력주식회사’라 불리는, 채무만 전문적으로 받아내는 범죄조직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1980년 7월 서울 관악경찰서는 모 부동산개발주식회사 이사에게 채권 400만원을 위임받아 채무자인 중소기업 사장을 콜택시로 납치, 감금하고 폭행해 숨지게 한 혐의로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과 부두목 2명을 검거했다. 1986년 3저호황을 맞아 시중에 돈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주가도 급등했다. 하지만 은행 창구엔 찬바람이 불었다. 통화량이 늘어나면서 1987년 통화당국이 통화환수정책을 강력히 시행했기 때문이다. 서민과 영세기업들은 은행 대신 신용금고 같은 제2금융권이나 사채시장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학생 등 신용카드 무차별 발급 2001년 서울의 한 대학교 정문 앞에서 신용카드사 직원들이 대학생들을 상대로 카드 회원을 모집하고 있다.
속출하는 개인파산
1990년대엔 개인파산이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1996년 대학교수를 남편으로 둔 주부 현모씨(당시 48세)는 “카드대금과 은행대출로 빚을 졌지만 갚을 능력이 없다”며 “국민신용카드 등 12개 금융기관과 사채업자에게 진 빚 2억6000여만원을 면제해달라”고 법원에 파산선고 신청을 냈다. 1962년 개인파산 관련법 제정 이후 처음 있는 ‘소비자 파산’이었다. 이듬해 법원은 현씨의 파산 신청을 받아들였다. 현씨를 시작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는 개인파산자가 약 10만명에 달했다.
신불자 채무조정 시작 2005년 4월 서울 신용회복위원회 사무실이 채무 재조정을 받으려는 신용 불량자들로 붐비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민 10명 중 1명 신용불량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1998년 이자제한법을 폐지했다. 이전까지 연 40%로 제한돼 있었던 최고이자율 이상으로 폭리를 취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정부는 신용카드 소득공제 제도 등을 도입해 카드 사용을 적극 권장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부자 되세요” 같은 광고 문구가 사람들을 현혹했다. 카드사들은 미성년자, 기초수급자, 노숙자, 심지어 사망한 사람의 명의로도 카드를 발급했고, 신용불량자가 속출했다. 카드 돌려막기, 카드깡 등의 용어가 생겨났다. 카드 발급 열기는 2003년 신용불량자 증가로 카드사들에 유동성 위기가 닥칠 때까지 계속됐다. 2003년 전국의 신용불량자는 400만명에 육박했다.
‘하우스푸어’ 등장
2002년 대부업법 제정으로 사채업이 합법화됐다. 법정 최고이율은 66%로 고정됐고, 서류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나 대부업자로 등록할 수 있게 됐다. 법의 맹점을 이용해 수백%, 수천%의 폭리를 챙기는 대부업체들도 등장했다. 저축은행들도 연 40~50%대의 고리대금 영업을 시작했다. 1999년 A&O크레디트(러시앤캐시의 전신)를 시작으로 산와머니, 원캐싱 등 일본계 대부업체들이 국내 시장에 진출했다. 극단적이고 엽기적인 채권추심 행위가 일상화됐다. 채무자에게 신체포기각서를 받아 실제로 콩팥 등 장기 매매대금을 받아내거나 채무자의 아내를 유흥업소로 팔아넘기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2000년대 중반 부동산시장에 폭등기가 찾아오면서 부동산 열풍이 불었다. 사람들은 주택담보대출을 끼고 부동산 투기 열풍에 가담했다. <2000만원으로 20억 부동산 부자 되기> 같은 재테크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나 미몽(迷夢)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부동산 가격이 폭삭 내려앉았고, ‘하우스푸어’라는 용어가 일상화됐다. 2014년 주택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버는 돈의 20% 이상을 대출 갚는 데 쓰는 ‘하우스푸어’가 248만가구에 달했다.
비료대금이 없어, 자녀 대학 등록금 때문에, 부동산을 구입하기 위해… 지난 50년간 한국의 서민들은 다양한 이유로 빚을 지고 살아왔다. 국내 가계부채 규모는 현재 1350조원에 이른다. 특히 지난해 정부의 부동산 활성화 대책 이후 100조원 가까이 증가했다. 가계부채는 한국 경제의 시한폭탄이 된 지 오래다. 빚 때문에 목숨을 끊고 가정이 파탄나는 사례는 더 이상 뉴스거리도 못된다. 우리는 ‘빚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방 얻으려 200만원 빌린 게 1000만원…
”흔들바위 아세요? 커다란 돌덩이를 가슴 안에 올려두고 사는 기분이에요. 돈에 쫓기다 보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흔들바위가 내려앉는 것 같아요. 제가 옛날에는 밝고 잘 웃었어요. 지금은… 웃지를 못해요, 자꾸 초췌해지고. 빨리 갚아야 되는데….”
지난 16일 서울 신림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민규씨(가명·23)의 겉모습은 다른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게임 캐릭터 머리 위에 화살표가 떠 있잖아요. 제 머리 위에도 ‘대출 1000만원’이라는 말풍선이 떠 있는 것 같아요. 빚 없는 사람들과 저를 구별하는, 다 갚기 전엔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이라고 했다.
지방의 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소에서 일하던 한씨는 코미디작가가 되고 싶어 그때까지 모은 300만원을 들고 지난해 9월 상경했다. SNL(케이블방송의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병재 같은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몇몇 방송사 공채에서 낙방하자 생계가 막막해졌다. 고졸인 한씨가 구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한 카드사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한씨는 “영업엔 소질이 없어서 실적이 거의 없었어요. 처음 대출을 받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어요”라고 말했다.
150만~200만원 월급은 서울에 의지할 곳 없는 한씨가 살림을 꾸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4평짜리 원룸 보증금 500만원을 만들려고 올해 초 한 대부업체에서 2년 상환조건으로 200만원을 빌렸다. 이자는 연 34.9%였다. ‘이자가 비싸 봐야 얼마나 되겠나, 일해서 갚으면 되겠지’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TV에 광고도 자주 나오니까 ‘다들 받는구나’라고 쉽게 생각했다.
이자 납부일은 칼같이 돌아왔다. 대부업체 가상계좌가 적힌 문자메시지를 처음 받고서야 한씨는 ‘나도 빚쟁이가 됐구나’하고 실감했다. 납부해야 할 금액은 이자와 원금을 합쳐 30여만원. 한 달치 월세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아무리 아껴 써도 납부일을 꼬박꼬박 지키려다 보면 통장은 마이너스가 됐다. 연체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납부일만 되면 대부업체에서 전화와 문자가 몇 통씩 왔다. 고객 앞에서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 하루에 적게는 2~3번, 조금만 이체가 늦을 기미가 보이면 최대 8번까지 연달아 독촉 문자가 날아왔다. 휴대폰 울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적성에 맞지 않는 영업을 그만두고 콜센터 아웃소싱업체에 취직했다. 카드사나 저축은행에 용역으로 고용돼 고객들에게 대출을 권하는 일이었다. 하루에도 수백통씩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카드 한민규입니다. 회원님, XX카드 보유하고 계신데 실적이 좋으셔서요, 저희가 낮은 금리로 제공해드리는 금융상품이 있는데…’ 상냥한 말투로 고객한테 ‘돈 빌리라’고 권했다. “정작 빚 때문에 죽을 것 같은 사람은 난데, 고객한테 빚을 지게 해야 제가 사는 거죠.”
악순환이 시작됐다. 주말에는 회사가 쉬었기 때문에 급여는 영업사원 때보다도 적었다. 적은 급여로는 생활비와 월세를 대기도 빠듯했다.
이자와 원금을 제때 내려고 대출받고, 불어난 이자를 감당하려고 또 대부업체를 찾았다. 연체보다 신용등급 떨어지는 게 더 무서웠다. 카드사에서 일하는 한씨는 연체 기록이 쌓여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미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린 것만으로 신용등급이 두 단계 떨어진 상태였다.
8개월 동안 3곳의 대부업체에서 총 1000만원을 빌렸다. 이곳저곳에서의 독촉 연락에 시달리다 대출금을 한군데로 묶기 위해 대출 알선업체를 찾았다. 한씨는 “한꺼번에 1000만원을 빌리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안돼요. 그런데 (알선업체가) 대출에 필요한 서류를 ‘가짜’로 꾸며줄 테니 달라는 수수료가, 따져보니까 대출금의 절반이 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나왔는데 생각해 보면 제가 얼마나 막장에 몰렸으면 그런 곳까지 찾았겠어요”라고 했다. 지난 9월 한씨는 ‘이자만’ 2년 동안 납부하는 조건으로 모 저축은행에서 1000만원을 대출받아 흩어진 대출금을 하나로 묶었다. 한 달에 30만원씩, 2년간 총 720만원의 이자를 내야 한다.
20대 초반의 청년에게 1000만원의 빚은 무겁기만 하다. “남들이 보기엔 작은 금액일지도 모르지만, 저한테는 건물 한 채나 다름없는 정말 큰 금액이에요. 돈 아끼려고 퇴근길에는 걸어서 집에 오곤 하는데, 한강 건널 때마다 뛰어내릴까 고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한씨는 이튿날 공장 생산직 면접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 회사만 합격하면 정말 개같이 벌어서 내년 생일 때까지는 빚 갚을 돈을 모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규모는 작아도 부채 느는 정도 청년층 가장 심각”
대학 입학과 동시에 청년들은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을 떠안는다. 전국 4년제 대학들의 올해 평균 등록금 636만원. 학교를 마치기까지 학비로만 최소 2500만원가량이 필요하다. 여기에 생활비, 주거비까지 합쳐 수천만원의 빚을 떠안고 시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중소기업에 취직해 학자금을 상환하고 있는 김지해씨(가명·28·여)는 “급여가 많지도 않은데 학자금 대출이 공제되니 집은 더 좁은 곳으로, 밥도 더 저렴한 것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다”며 “빚이 있다는 건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진 상태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단계로 빠진 청년들도 있다. 김하용씨(가명·27)는 2013년 돈을 벌기 위해 지인의 소개로 다단계 업체에 들어갔다. 다단계 업체는 건강식품이나 알뜰폰을 팔면서 지인을 데려오도록 하고 성과가 낮으면 대출을 받게 했다. 대출을 쉽게 하는 알선업체를 통해 대출 심사 시나리오를 받았다. 대부업체에서 전화로 대출심사를 하면 대본 읽듯이 줄줄 읽고 대출을 받는 식이다. 네 군데에서 총 1200만원을 빌렸다. 연이율이 35~36%나 되는 고금리였다. 200만원가량의 한 달 급여 중 절반 이상이 이자로 빠져나갔다. 김씨는 “대출을 받고 나서 공황상태에 빠졌다”며 “빚은 있고 돈 값을 능력은 안되고, 걱정만 쌓여서 잠도 설쳤다”고 했다. 다단계를 그만둔 김씨는 아직까지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빚을 갚고 있다. 김덕영 청춘희년운동본부 사무처장은 “지금 청년들은 다른 시대에 비해서 받는 구조적 압력이 크고 그것이 부채문제로 드러나고 있다”며 “빚의 규모로만 따지면 다른 세대보다 적지만 부채가 늘어나는 정도는 청년층이 가장 심각하다”고 말했다. 청년은 출발부터 ‘족쇄’
-“장사하며 낸 대출이 카드로, 사채로…” 중산층도 한순간 ‘추락’
2015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 ‘빚’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학자금 대출, 전세자금 대출은 기본이다. “전화만 하면 빌려드립니다”라는 유혹에 생활비나 사업자금을 마련하려는 서민들은 불법 사금융에도 발을 들이게 된다.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40·50대는 “빚이 더 늘어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취업의 벽에 부딪힌 20대는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족쇄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 자영업자 권선영씨 이야기
지난 14일 오후 부산에서 만난 권선영씨(60·가명·여)는 5년 전 일을 떠올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당시의 두려움을 완전히 잊지 못한 듯했다. 양쪽 눈에 눈물이 흥건했다.
권씨는 “빚은 죽음”이라고 했다. 그는 “빚은 늪처럼 빠지면 헤어날 길이 없어요. 희망도, 계획도…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어요.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을 해도 갚을 수 없는 게 빚이었어요. 가도가도 끝이 없어요. 지옥 속이었어요.”
시작은 카드론이었다. 4년제 대학을 나와 전문직종에 종사했던 권씨는 자영업으로 직종을 바꿨다. “돈을 벌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열심히 해서 조금이나마 사회에 기여한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장사가 안돼 가게 위치를 다섯 번이나 옮겼다. 그때마다 권리금과 인테리어 비용을 대기 위해 권씨는 대출을 받아야 했다. 은행 대출한도를 초과해 이자율이 연 15%인 카드론도 받았다. 매달 돌아오는 카드결제 대금과 이자를 합치면 월 수입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2010년 어느 날 평소 가게에 자주 오던 남자 손님에게 사정을 털어놓자 손님은 대뜸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 “빌릴 수 있는 데가 다 있어요.” “다른 사람이면 이자율을 더 높게 받는데 사장님은 잘 아는 분이니까 특별히 생각해서 15%에 해드릴게요. 얼마 하실래요?” 이자율은 좀 높지만 잠깐만 빌렸다 갚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권씨는 솔깃했다. “그럼 2000만원만….” 알고보니 그 남자 손님은 사채업자였다
카드 값을 막기 위해 빌린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빌린 돈에서 15%를 ‘선이자’ 명목으로 제하고 카드 값을 막고, 또 빌리고 15%를 이자 명목으로 제하고 카드 값을 막고, 그러다 카드 값도 막지 못하게 되자 또 2000만원을 빌리고…. 나중에 추산해보니 거래된 돈만 50억원이 넘었다. “이것만 막아야지” 하는 생각에 남편, 자녀들 카드도 썼다. 그렇게 해도 원금은 고스란히 남았다. 이자를 갚는 것도 힘들었다. 가게마저 적자가 났다. 지난 2월에는 밀린 이자만 8000만원이었다. 이자를 갚기 위해 빌린 2억원의 원금은 별개였다.이자를 제대로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는 협박을 했다. 본인의 자금운용에도 문제가 생겼다며 가게로 찾아와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돈을 안 갚아서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지금 돈을 주면 모든 게 해결된다니까.” “계속 이렇게 돈 안 갚으면 남편에게 알릴 거예요. 식구들이 다 알게 만들어줄까요?” 심장이 두근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권씨는 가족 몰래 돈을 빌린 터였다.
지난 5월 말 사채업자는 가게에 여자 한 명을 데려왔다. 권씨에게 돈을 빌려준 ‘사모님’이라고 했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이런 식이에요?” “나도 바쁜 사람인데 당신 때문에 여기에 왔잖아요. 장사 계속하고 싶으면 이렇게 하면 안되죠! 똑바로 하세요!” 이들이 소리를 지르자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은 밖으로 나갔다. “제발 나가서 이야기해요. 여기 직원도 있고 제발 나가서….” 권씨는 사정사정하며 이들을 가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이들은 권씨에게 A4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각서였다. 7월 말까지 돈을 반드시 갚겠다고 적혀 있었다. 권씨는 각서에 서명을 했다. 권씨는 “그때는 정말 죽고 싶었다. 죽음밖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사모님이라는 여자는 전주가 아니라 겁을 주려고 동원된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권씨가 돈을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는 집에 불쑥 찾아오기도 했다. 사채업자에게 가족이 무엇을 한다거나 집주소를 이야기한 적이 없지만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평범했던 권씨의 가정은 금이 갔다. 전화 벨소리만 울려도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가게 일을 하다가도 “내가 미쳤지”라는 생각에 맥이 풀렸다. 권씨는 “사는 게 아니었다. 인간적인 모멸감을 많이 느꼈다”고 했다. 빚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권씨도 몇 번이나 ‘죽어버릴까’ 생각했다. 권씨는 “차를 몰고 앞이 낭떠러지인 커브길을 돌 때면 여기서 떨어지면 끝나겠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불법사채 신고’라고 돼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 적도 있지만 결국에는 “경찰서로 가세요”라는 말만 돌아왔다. 권씨는 최근 다른 일자리를 얻었다. 개인회생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권씨는 그래도 희망을 찾을 거라고 했다. “빚이 없다면 행복해질 사람이 굉장히 많을 겁니다. 한 번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정말 빛과 소금처럼 살고 싶어요. 나 같은 사람에게 힘이 된다면요, 끝까지 도울 거예요.”
◆ 수렁에 빠진 사람들
박영모씨(가명·42)는 1990년대 말 경기가 좋을 때 보험 설계사를 하다가 돈을 모아 보험대리점을 차렸지만 2년도 안돼 망하면서 카드론 대출을 이용했다.
여러 개의 카드로 돌려막기를 해봤지만 3000만원 정도의 빚이 남았다.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박씨는 30대 중반에 식당에 취직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악착같이 생활한 끝에 3년 만에 카드론을 청산했다. 그러나 빚을 다 갚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아버지가 당뇨로 쓰러지면서 또 1000만원짜리 카드론을 받았다. 박씨는 “옷도 안 사고, 차도 없는데 월세와 카드론 이자만 매달 70만원”이라며 “더 이상 빚이 불어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영업자인 40대 신영태씨(가명)는 사업을 하면서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게 됐다. 처음에는 제1금융권 은행의 마이너스통장으로 충당이 됐지만 사업을 확장하자니 목돈이 필요했다. 제2금융권, 제3금융권으로 내려가더니 어느 순간 대출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해 허덕이게 됐다.
길을 걸어가다 벽에 붙어 있는 종이를 봤다. “대출해드립니다.” 다급한 마음에 문구 아래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심사 기간도 길고 대출 조건도 까다로운 은행과 달리 별다른 담보도 없이 돈을 빌려준다고 했다. 그렇게 신씨는 빚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자율이 무려 1000%였다.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더니 어느덧 쌓인 빚만 8억~9억원으로 늘어났다. 결국 신씨는 개인회생 신청을 했다.
중산층에게도 빚은 남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보증을 잘못 서거나 사채를 이용한 경우 고통은 가족 전체로 이어진다. 50대 최신혜씨(가명)는 전문직에 종사하던 남편이 보증을 선 빚을 갚기 위해 사채를 쓰면서 빚에 몰리게 됐다. 시작은 남편의 실수였지만 해결은 쉽지 않았다.
하루에 이자만 160만원이었다. 갚아야 할 돈은 점점 불어났지만 일을 아무리 해도 갚아지지 않았다. 최씨는 “일반적으로 돈을 벌어서 빚을 갚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고리대금업은 돈을 벌어서 빚을 갚을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며 “우리는 돈을 갖다 바치는 도구가 된 것”이라고 했다. 사채업자들은 가족들을 협박했다. 최씨는 “전화를 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고 직장에 와서 창피를 주겠다거나 자식들을 운운하며 협박을 했다”며 “휴일이 돼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감옥 같은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新허기진 군상] (4) 대한민국에서 집이란-판잣집부터 뉴타운까지 1020 경향
“아이들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찬서리를 맞으며 밤을 지낸 것이다. (중략) ‘나라 망신 강제철거’ 5살짜리 코쭐쭐이들은 아무도 그 뜻을 모른다.”(경향신문 1964년 11월18일)
전쟁이 멈춘 지 10여년이 지난 1964년, 한국의 가장 심각한 주거문제는 판잣집이었다. 그해 11월 경향신문은 ‘한국의 숙제’ 연재기사의 첫회로 판잣집 문제를 다뤘다. 한국전쟁은 수많은 가옥을 파괴했다. 서울의 경우 19만가구의 일반주택 중 3만4700여가구가 완전히 불타거나 무너졌다. 반쯤 부서져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집도 2만340여가구나 됐다. 전국적으로 파괴된 주택은 60여만가구로 추정됐다.
■판잣집 철거하는 정부
집을 잃은 사람들,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은 곳곳에 판잣집을 지었다. 변두리 하천가나 언덕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시작된 판잣집은 점점 도심지로 번졌다. 1964년 서울시는 서울에 판잣집이 최소 5만2543가구 있을 것으로 집계했다. 판잣집은 인적이 드문 곳에 있어 치안이 좋지 않았다. 수십 가구가 공동 우물과 화장실을 사용하므로 위생 여건도 나빴다. 가구주의 직업은 노점상, 행상, 날품팔이 등이 대부분이었다.
60년대 판자촌 달동네 1960년대 전남 순천의 판자촌 모습. 판자와 천막으로 벽을 가리고 짚으로 하늘을 가린 판잣집은 사실상 움막에 가까웠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박정희 정권은 이들의 주거 현실을 개선하기보다 ‘치우는’ 방식을 택했다. 1967년 서울시는 23만3000가구의 무허가 주택에 거주하는 127만여명을 서울시 밖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정부는 그중 50만여명을 경기 광주군(광주대단지)으로 옮기기로 하고, 1969년 5월2일부터 청소차와 군용차로 판자촌 주민들을 실어날랐다. 1971년 8월10일, 구호대책과 세금 면제 등을 요구하던 광주대단지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10만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3일간 격렬한 시위를 벌인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1977년 벌어진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 역시 당시의 주거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등산 판자촌에 살던 박흥숙은 집을 철거하러 온 철거반원 4명을 살해했다.
■철거민 몰아내고 들어선 아파트
정부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이촌향도(移村向都)’ 현상이 본격화되자 이를 대비하기 위해 서울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짓기 시작했다. 1961년 10월 착공해 2달 만에 완성한 마포아파트는 아파트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1967년부터 16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아파트를 소유한 이들은 단기간에 부자가 됐다. 서울 여의도의 아파트 값은 1971년 3.3㎡(1평)당 20만원에서 1982년 400만원까지 치솟았다.
70년대 투기·복부인 아파트 광풍 1974년 7월 서울 마포인터체인지 너머로 보이는 여의도 모습. 한강변에 고층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미 30여년 전에 사람의 목숨보다 ‘아파트값’을 걱정하는 집주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서울 영동의) 아파트에 사글세로 살고 있던 젊은 부인이 밀린 방값 때문에 쫓겨나게 되자 이를 비관해 19층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현장에 달려온 경찰과 기자에게 어느 주부가 죽은 사람의 딱한 얘기를 하려 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아주머니들이 ‘신문에 나면 아파트값이 떨어진다’면서 얘기하려는 아주머니를 말리려고 했다.”(경향신문 1981년 12월1일 독자투고)
1980년대는 합동재개발의 시대였다. 아파트 단지를 새로 짓는 과정에서 철거민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1987년 7월엔 철거민 단체의 효시인 서울철거민협의회가 결성됐다. 가수 한돌은 노래 ‘못생긴 얼굴’에서 당시 철거민의 정서를 “며칠 후면 우리 집이 헐리어진다/ 쌓아놓은 행복도 무너지겠지/ 오늘도 그 사람이 겁주고 갔다/ 가엾은 우리 엄마 한숨만 쉬네”라고 노래했다.
서울 동작구 사당2동에 있던 ‘가마니촌’에는 한때 3000여가구가 살았다. 주민 다수는 사대문 안에 살다가 1960년대에 쫓겨난 빈민들이었다. 1987년 말 가마니촌 땅주인들은 아파트 단지를 짓겠다며 용역을 동원해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고 주민들을 내쫓았다. 1988년 11월 철거용역 800여명과 주민 600여명이 충돌해 수십 명이 다쳤다.
1992년 출간된 책 <도시빈민의 삶과 공간>(조은·조옥라 공저)은 가마니촌에 살던 22가구를 5년간 추적한 내용을 담았다. 저자들이 기적적인 자수성가 사례로 꼽는 한 가구는 재개발 아파트 입주에 성공했지만, 나머지 가구는 서울 밖으로 밀려나거나 다른 재개발 예정지로 거처를 옮겼다.
■집값 폭등에 자살 속출
집 없는 사람들은 주거불안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단기간에 집값이 폭등하면서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전셋값 인상을 요구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세입자들은 세상을 등졌다. 1990년 4월, 집을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통보에 서울 강동구에 살던 일가족 4명이 자살했다. 가장 엄씨는 “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가난이 내게 물려졌고, 기적이 없는 한 자식들에게도 물려질 것”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언론은 엄씨를 전후해 2개월간 15명이 전셋값 문제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했다.
90년대 노숙자 내집 욕망1998년 5월 서울 서소문공원 담장에 노숙자들의 옷가지가 걸려 있다. 금융위기로 직장과 집을 잃은 가장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거리뿐이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7년 외환위기가 몰아치면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주거생활을 하던 중산층 일부가 길거리에 나앉기 시작했다. 언론에는 ‘노숙자’란 표현이 급격히 늘어났다. 당시 언론에 등장한 일반적인 노숙자의 모습은 이렇다. ‘서울역에서 만날 수 있는 노숙자 김모씨는 외환위기로 직장을 잃은 40대 초반 남성이다. 대학을 나온 김씨는 과장까지 무난하게 승진했다. 그는 집값이 금방 오를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빚을 내 집을 샀지만, 실직한 이후 이자를 갚지 못해 집이 넘어갔다. 아내와 아이들은 처가로 떠나보내고 자신은 채권자들을 피해 서울역에 숨어 지낸다.’
■집은 넘쳐나는데 ‘내 집’은 없어
2001년 8월 한국은 공식적으로 외환위기에서 벗어났다. 2002년부터 서울을 시작으로 지방 대도시에서 재정비 촉진사업, 즉 뉴타운 사업이 시작됐다. 뉴타운 사업은 부동산 투기 욕망에 노골적으로 편승하는 동시에 투기 욕망을 부채질했다. 2002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은평·길음·왕십리 3곳을 시범 뉴타운 지구로 지정했다. 은평뉴타운을 위해 그린벨트까지 일부 해제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때 뉴타운 지구는 35곳으로 늘어났다. 2008년 총선 당시 서울 출마자 중 한나라당 24명, 통합민주당 23명이 뉴타운 공약을 냈다. 박원순 시장이 들어선 2012년이 돼서야 뉴타운 출구전략이 시작돼 뉴타운 등 서울시내 재개발 지구 683개 중 절반가량이 지정 해제됐거나 해제될 예정이다.
2000년대 뉴타운 오포세대 2003년 가재울 뉴타운으로 지정된 서울 남가좌동 118번지 일대에 고층 아파트 단지를 짓기 위해 기존 가옥들을 철거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뉴타운 사업이 진행되면서 전국 각지에 많은 집이 지어졌다. 국토부 통계에 따르면 주택 보급률은 2008년 100%를 넘겨 2014년엔 103.5%를 기록했다. 그러나 뉴타운 사업은 집이 늘어난다고 해서 ‘삶의 공간’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국토부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자신이 소유한 집에 거주하는 이는 53.9%였다. 수도권의 자가점유율은 45.9%였고, 서울은 16개 광역시·도 중 최하위인 40.2%였다.
정부가 도시 빈민들을 판잣집에서 내쫓기 시작한 1960년대로부터 5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집은 ‘삶의 공간’이 아니라 개발과 투기, 욕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집은 넘쳐나지만 ‘전세 난민’은 오늘도 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고, 은행 빚을 내 아파트를 산 중산층은 금리가 오르고 집값이 떨어질까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집이란-집을 좇지만 집에 쫓기는 서민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요소의 하나인 집.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집은 ‘의식주’의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뛰어넘는 의미를 지닌다. 어떤 이에게 집은 재산이자 훈장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족쇄이자 고통이다. 대대로 ‘집 없는 설움’을 겪어온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집을 소유하는 데 매달린다. 그 결과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가 생겨났다. 그러나 극소수 ‘금수저’를 제외하고는 집이 있는 이도, 집이 없는 이도 삶의 한 구석이 편치 않은 것은 매한가지다.
◆ 50대 이씨 - “젊음을 바친 대가”
충남에서 근무하는 여성 공무원 이모씨(51)에게 집은 ‘인생의 한때를 고스란히 바친 대가’다. 그는 아파트를 한 채 갖고 있지만 돌이켜보면 집 때문에 고생한 시간이 아쉽다. 이씨는 “우리 세대에게는 ‘내집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어서 일찌감치 집을 사려고 마음먹었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니 집을 사기 위해 포기한 게 많더라”고 했다. 20년 전 당시 1억원이 채 안되던 아파트를 사며 필요한 자금 거의 전부를 대출받은 이씨는 한때 벌이의 70% 이상을 빚 갚는 데 썼다. 자연스럽게 가족여행이나 취미생활은 멀어졌다.
장을 보러 가선 몇 번이나 집었다 내려놨다 하며 오래 고민하고, 싸게 살 궁리를 했다. 이씨는 “가족을 위해 집을 샀는데 정작 그 집 때문에 가족과 함께 즐기는 시간이 줄었다”고 했다. 양가 경조사비도 아껴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그에게 시집 식구들은 ‘짠돌이 며느리’란 달갑잖은 별명을 붙여줬다. 이씨가 집에 ‘올인’한 것은 ‘내집’이 노후에 안정감을 보태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최근 먼저 은퇴한 선배들을 보며 생각이 흔들리고 있다.
이씨는 “은퇴 후 행복에는 취미생활이 있는지, 할 수 있는 운동이 있는지가 큰 영향을 미치더라”면서 “나는 젊어서부터 익혀 왔어야 할 그런 소소한 행복들을 집과 맞바꾼 셈”이라고 말했다. 노후 대비 자산으로서 집이 갖는 매력이 줄어든 것도 걱정이다. 이씨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려면 집이 팔려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평생을 벌어도 집을 사기 어려운 상황에서 요즘의 젊은 세대가 현재 행복을 뒤로 미루면서까지 자기 집을 마련하려고 애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교육의 수단”- 학부모 손씨
대전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손모씨(41)에게 집은 ‘교육수단’이다. 6개월 전 손씨는 큰 마음 먹고 학군이 좋다는 동네의 아파트를 사서 이사했다. 내년이면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입학할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 투자한 것이다. 손씨의 새집에선 입시학원이 즐비한 ‘사교육 1번지’가 가깝다. 비교적 입시 실적이 좋은 중학교와 외국어고, 일반고도 근처에 있다. 손씨는 “아이가 있으면 교육 여건을 기준으로 집을 알아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으로 20년 동안 매달 갚아나가야 할 1억원 이상의 은행대출을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번에 집을 사기 위해 그는 2억5000만~2억7000만원에 달하는 집값의 40% 정도를 대출받았다. 나머지 60%는 10년간 모아온 돈과 이전에 살던 집을 처분하고 남은 돈으로 메웠다. 그는 “교육비와 별개로 매달 60만~70만원 이상이 집값 대출 상환으로 나간다”면서 “대출이 남아있는 현재로선 내집이 아닌 ‘은행 집’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 월세 사는 김씨 - “고통”
경기 광명시에 사는 직장인 김모씨(34)에게 집이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10년 넘게 월세살이를 한 그는 수입이 적은 달엔 50만원을 벌어 30만원을 방값으로 지출한다. 단순히 ‘살 공간’을 위해 소득의 60%를 내놓은 달에는 수중에 남는 돈이 없다. 김씨는 “벌이가 불규칙하긴 하지만, 보통 수입의 30% 정도를 방값으로 내느라 저축하기 힘들다”면서 “벌이가 적은 달에는 필요한 것을 사고 사람을 만나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어차피 월세를 내야 한다면 차라리 이자를 감수하고 빚을 내서 작은 집이라도 사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김씨는 이것을 선택할 수도 없다.
그는 “지금 집값은 거품이 과도하게 끼어서 너무 비싸다”면서 “광명에서 아파트를 사려면 4억~5억원은 줘야 한다. 내집 마련은 엄두도 안 난다”고 말했다. 목돈을 모으려면 전셋집을 구하는 수밖에 없는데, 집주인들은 기존 전세를 월세로 바꾸려고 한다.
◆ “최후의 보루”- 70대 오씨
벌이가 없는 오모씨(79)에게 집은 ‘최후의 보루’다. 그는 매달 나오는 50만원 상당의 연금과 자녀들이 주는 용돈으로 생활하느라 빠듯하지만 지은 지 30년이 넘은 서울 도봉구의 집을 팔 생각이 전혀 없다.
“집을 담보로 주택연금을 받아 살림에 보태는 건 어떻느냐”는 주변의 권유도 그에겐 먹히지 않는다. 집을 팔아 현금화하거나 담보를 맡겨 연금을 받으면 상대적으로 여유있게 살 수 있지만 “나는 고생하더라도 자식들에게 집을 물려줘야 한다”는 게 오씨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의 한편에는 “집마저 없으면 자식들에게 외면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오씨는 “가진 것 없는 노인들이 자식이 있는데도 말년을 쓸쓸히 지내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봤다”면서 “죽을 때까지 집을 붙잡고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 전세 사는 임씨 - “없으면 죄인”
서울 양천구의 66㎡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는 임모씨(33)는 최근 ‘집 없는 죄인’이 됐다. 지난 7월까지만 해도 “10월에 전세기간이 만료되면 전세금을 3000만원 올려달라”고 했던 집주인은 9월 말 갑자기 “3000만원보다 더 올려 받아야겠다”고 말을 바꿨다. 계약 만료 3개월 전에 고지한 내용과 다르므로 불법이지만 임씨는 “집주인의 요구에 따라야만 재계약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맞벌이인 임씨 부부는 인근에 사는 친정어머니가 35개월 된 아들을 돌봐주기 때문에 이 동네를 떠나기 힘들다. 임씨는 결국 3000만원에 1000만원을 더 얹어 4000만원을 주고 2억3000만원에 재계약을 하기로 했다. 임씨는 “그래도 집주인이 배려한 덕에 4000만원 인상에 그쳤다”면서 “나로선 나름 ‘선방’한 것”이라고 했다. 그가 사는 단지의 전세가는 최근 1년 사이 1억3000만원 이상 올랐다. 매매가도 1억2000만원 정도 상승했다. 1986년에 지어져 재건축을 노린 기대심리가 작용했다. 임씨는 “요즘 전셋값을 1억원 올려달라는 집주인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더니 몇천만원 올려달라는 건 감사하게 생각되더라”면서 “더 올려드리지 못해 죄송하단 소리가 절로 나왔다”고 했다. 임씨는 “전셋값이 4000만원 오른 것을 ‘배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비합리적인 세상”이라며 “추가된 1000만원을 어떻게 마련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 “빌리는 것”- 대학생 김씨
대학생 김모씨(24)에게 집이란 ‘빌려 쓰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집은 실제 가치에 비해 거품이 크게 끼었다”면서 “집을 투자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소득 수준이 낮은 사람에게는 큰 부담”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집이 있으면 편하겠지만 주거 마련에 수반되는 비용이 너무 크다. 소유가 아닌 이용에 의미를 두고 싶다”고 했다. 집을 빌려 쓰면 삶의 안정감은 자연히 떨어진다. 고시촌에 사는 대학생 양모씨(23)는 “나도 안정적인 주거를 갖고 싶다. 빌리는 집에는 ‘내집’이라는 결속감이 들지 않는다”면서 “1년마다 집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는 건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신혼 홍씨 -“걱정과 불안”
결혼 후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지원을 받아 서울 노원구 전셋집에 사는 홍모씨(23)는 “집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금수저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수저는 ‘부유한 부모를 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이미 부동산 등 자산을 가진 사람과 그의 자손만이 대대로 ‘즐거운 나의 집’을 누릴 수 있단 뜻이다. 홍씨는 “주위를 보면 부모가 돈 많은 금수저들 아니고서야 집 사기가 쉽지 않다. 나처럼 일해서 번 돈을 모아서는 어림도 없다. 대출을 받아 수십년간 갚을 수밖에 없다”면서 “나 같은 경우 서울 강남에 있는 비싸고 좋은 집을 사려면 신라시대부터 돈을 모아야 했을 것”이라고 했다.
◆ ‘즐거운 나의 집’은 어디에…
2015년 한국에서 집은 투자와 투기의 대상, 자산 마련과 노후 대비의 수단, 사회적 지위와 계급 격차를 드러내는 표상이 됐다. 주택개발 정책대안 시민단체인‘주거복지연대’의 남상오 이사장은 “1960~1980년대 도시 개발 이후 땅 있는 사람 위주로 사회가 돌아가면서 집 없는 사람들은 이사비용 몇 푼 받고 쫓겨나는 행태가 수십년간
반복됐다”면서 “집은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됐다.돈 없으면 ‘삶의 공간’으로부터 소외되는 사회가 완성됐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집이란-월세·이사 부담 적은 ‘사회주택’ 아시나요
권혁씨(31)는 4년차 교사다. 취직한 이후 독립생활을 꿈꿨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권씨가 받는 월급 실수령액은 약 190만원. 4년간 2000만원을 저축했지만 이 돈으로는 서울 시내에서 전세를 도저히 구할 수 없었다.권씨는 “전세는 포기하고 월세 35만원 안팎의 방을 구하러 다녔는데 대부분 너무 좁거나 골목길에서 한참 들어가는 후미진 곳에 있었다”며 “딱 맞는 집을 겨우 찾았지만 방 안에 보일러가 놓여 있어 소음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권씨는 드디어 새집을 구했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함께주택’(사진)이다. 함께주택은 주거 문제 해결에 뜻을 모은 이들이 2013년 협동조합을 구성해 만든 사회주택이다. 조합원들은 서울시 기금의 지원을 받아 3층짜리 주택을 매입했고, 1인 가구주 10명에게 임대했다. 권씨는 “보증금인 거주출자금 1000만원에 월세 30만원을 내고 있다”면서 “개인 공간을 뺀 거실, 주방, 옥상을 모두가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이 돈에 이보다 여건이 좋은 집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주거의 안정성이다. 입주자들은 조합과 무기한 계약을 하기 때문에 쫓겨날 위험이 없다. 월세도 가급적 올리지 않는다.
사회주택은 민간이 공공의 지원을 받아 공급하는 일종의 임대주택이다. 함께주택협동조합과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 ‘소통이 있어 행복한주택’ 등이 서울 시내에 사회주택을 공급하고 있다. 민간과 지자체가 주도하는 방식이라 대량 공급은 어렵다는 점이 한계로 꼽힌다. 서울시는 사회주택 공급을 확대할 방침이지만 올해는 1차로 150여채만 공급할 뿐이다. 권씨는 “개인 수입의 10% 정도만 지출해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집이란-서울서 내집 마련 ‘점점 멀어지나 봐’
지난 4월 국토교통부는 2014년도 주거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생애 최초 주택 마련에 걸리는 연수가 기존 약 8년에서 6.9년으로 단축됐다”고 밝혔다. 국토부 발표대로 6.9년 만에 내 집 마련에 성공하려면 얼마를 저축해야 할까. 국토부의 지난 8월 서울시 부동산 실거래가 자료를 기준으로 살펴봤다.국토부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 아파트의 평균 매매 실거래가는 4억3363만원, 전·월세 실거래가는 3억1979만원이다. 연립주택 평균 매매 실거래가는 2억687만원, 전·월세 실거래가는 1억4498만원이다. 서울 시내 아파트를 6.9년 만에 자력으로 구입하려면 연간 약 6284만원, 매달 약 524만원을 저축해야 한다.
이번엔 노동자 평균 수입을 토대로 주택 구입에 걸리는 연수를 살펴봤다. 지난 7월 사업체노동력조사에 따르면 정규직 평균 월급은 340만4000원, 비정규직 평균 월급은 140만1000원이다. 올해 최저임금은 월 116만6620원이다. 평균적인 정규직 노동자가 서울 시내에 아파트를 사려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128개월(10년8개월)간 모아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309개월(25년7개월), 최저임금 노동자는 371개월(30년9개월) 동안 월급을 저축해야 한다.
정규직 노동자가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평균 매매가가 7억6872만원인 ‘강남3구’(서울 서초·강남·송파구)의 아파트를 구입하려면 226개월(18년10개월)간 모아야 한다. 서울시에서 가장 비싼 강남구 아파트를 사려면 270개월(22년6개월)이 필요하다. 최저임금 노동자는 787개월(65년7개월)간 한 푼도 쓰지 않고 월급을 저축해야 강남 아파트를 살 수 있다
[新허기진 군상](3)‘노동 천민’ 비정규직- 1015 경향
부모 세대는 ‘혹독한 노동’ 자녀 세대는 ‘불안한 고용’
ㆍ노동자의 삶, 어제와 오늘
“‘살찐 돼지는 사람보다 낫다’는 패라독스가 당연한 논리로 통하는 세상.”(1964년 5월26일자 경향신문 ‘허기진 군상-서울의 H동’). 도시 노동자에게 1960년대는 빈곤의 시기였다. 두부를 만들고 난 찌꺼기인 비지를 얻기 위해 새벽 2시부터 길게 줄을 섰다. “지게벌이를 해서 하루살이를 해나가는 노동자나 논밭을 팔고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이농민들이 단골 구입객”이었다.
내 자리는 어디에…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 그나마 생겨나는 일자리도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한 노동 유연화 정책 탓이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15일 열린 ‘2015 외국인 투자기업 채용박람회’를 찾은 취업준비생이 업체 소개 책자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 “사람값이 가장 싼 코리아”
급속한 산업화로 농촌을 떠나 일자리를 구하려는 농민들이 도시에 몰려들었다. 박정희 정권의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략은 주로 여성 노동력에 의존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많은 수가 섬유·전자 등 경공업 분야에 몰렸다. 대다수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반숙련 노동자였다.
이들은 공장 기숙사나 ‘벌집’이라고 불리는 자취방에 살며 월급으로 번 돈을 고향으로 부쳤다. “서른일곱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 <외딴방>에 묘사된 벌집의 모습이다. 수출산업을 떠받친 이들도 ‘여공’이었다. 경향신문은 1965년 1월25일자 ‘여적’에서 “여공 월당이 2000원에서 3000원 내라니 아마도 세계에서 사람값이 가장 싼 것이 ‘코리아’가 아닐지”라고 지적했다.
1974년 구로공단에 세워진 ‘수출의 여인상’은 “가난한 나라에서 수출한국의 명성을 만방에 알린” 여공을 잔다르크로 묘사했다. 그러나 공단의 노동 여건은 잔다르크도 감내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노동자들은 ‘타이밍’이라고 불리는 각성제를 먹어가며 하루 12~15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을 견뎠다. 한 여성노동자는 “우리들은 마치 돼지가 주인에게 자기 몸을 주기 위해 살찌우는 것과 같이 밥을 먹고 일하기 위해 잠을 잤다”고 회고했다.
김민기는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석정남이 쓴 <공장의 불빛>이라는 수기를 1978년 동명의 노래굿으로 만들었다. 그 안에 담긴 ‘야근’이라는 노래는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 실태를 이렇게 고발한다. “서방님 손가락은 여섯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뚝뚝 잘려서/ 한개에 오만원씩 이십만원에/ 술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래/ 울고짜고 해봐야 소용있나요/ 막노동판에라도 나가봐야죠/ 불쌍한 언니는 어떡하나요/ 오늘도 철야명단 올렸겠지요.”
1974년 신동아 11월호에 실린 ‘르포 근로자’는 마산수출지역에서 산재를 당한 뒤 자살한 노동자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철판을 자르는 일을 하던 노동자가 손가락 3개가 끊어졌는데 회사 측은 두 달치 월급과 치료비 3만원을 주고 해고시켰다. 이 노동자는 병신된 것을 비관해서 자살했다. ‘손가락 하나에 1만원’이라는 우울한 유행어가 나돌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구 평화시장의 어린 여공들이 1980년 4월 생존권 사수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 외환위기로 꺾인 노동권
처참한 노동환경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렀다. 1970년대 경공업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민주노조운동은 1980년대 중화학공업의 발전과 함께 대규모 노동자 집단이 형성되면서 본격적인 조직 노동운동으로 발전했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노동자 대투쟁’ 기간 중 3000건 이상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이전 20년간 발생한 전체 노동쟁의 발생 건수를 넘는 수치였다. 파업의 핵심 구호로 “인간답게 살고 싶다”가 내걸렸다. 1년간 4000여개의 노조가 새로 결성됐다.
1987년 6월 삼성중공업 창원공장 노동자들이 중장비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도입과 함께 노동의 사회적 발언권은 급격히 축소됐다. 1998년 2월 정리해고제가 도입됐고, 간접고용을 허용하는 파견법이 세상에 나왔다. 많은 노동자가 한꺼번에 거리로 내몰렸다. 1998년 10월8일자 경향신문 창간 52주년 기획 ‘IMF를 넘는다’ 기사는 “홍콩의 모은행 한국지점에 60명의 직원을 뽑는 데 무려 1만여명의 경력사원이 몰린 상황”을 소개하며 “평생직장의 개념은 여지없이 무너졌다”고 보도했다.
1998년 4월 선원 일자리를 얻으려는 실직자들이 부산 서구 충무동 부두에 모여 있다.
‘최대 유행어는 퇴출’이라는 제목이 달린 같은 날 기사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신년벽두부터 감원 바람에 떨었던 직장인들에게 ‘박카스’는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청소부 아버지를 도와 새벽일을 나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힘들지.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고 말하는 박카스 방송광고의 카피를 빗댄 것이었다. 해고통보를 받은 직장인은 ‘박카스를 마셨다’고 자조했다. 퇴근 무렵 ‘내일 또 봅시다’라며 주고받는 인사말에는 상투어 이상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
■ 839만명의 장그래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노동 유연화 정책의 결과는 ‘현대판 신분제’로 불리는 비정규직의 대량 양산이었다. 2001년 737만명으로 집계됐던 비정규직은 2015년 현재 839만명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말 비정규직의 직장 분투기를 담은 웹툰 <미생>과 동명의 드라마가 붐을 일으켰다. 청년 비정규직을 상징하는 ‘장그래’의 이름을 놓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하려는 정부와 반대하는 노동진영이 ‘이름 쟁탈전’을 벌였다. 올해 상반기에는 ‘내 꿈은 정규직’이란 모바일 게임이 직장인 사이에서 유행했다. 인턴에서 시작해 ‘갑’의 위치인 사장까지 도달하는 것이 목표인 이 게임의 사용자들은 “현실인지 가상인지 모를 웃픈 현실”을 자조했다.
갈 곳 없는 노동자들은 더 높은 곳으로 몰렸다. 농성 현장의 요구안은 1970~1980년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4년 타워크레인 기사 500명이 ‘근로계약서 체결’을 요구하며 전국 100여곳의 타워크레인에 올라 집단 고공농성을 벌였다. 2005년에는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 ‘화장실을 지어달라, 식당을 만들어달라’며 정유탑에서 고공농성을 했다.
2012년 4월 서울 덕수궁 앞에 마련된 쌍용자동차 해고 희생자 추모 분향소에 국화꽃이 놓여 있다.
2011년 대한민국 1호 여성 용접공 김진숙은 자신의 동료가 고공농성 129일 만에 목매 숨진 크레인 위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펼쳤다. 지난 4월 스타케미칼 해고노동자 차광호는 408일 농성을 벌여 고공농성 세계 최장기록을 갈아치웠다.
장그래 살리기 운동본부 회원들이 지난달 17일 서울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시국농성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의 집계에 따르면 2000년 이후 발생한 노동자의 고공농성은 총 108건. 기간을 모두 더하면 12년(4380일), 높이를 더하면 1389층 건물 높이(4166m)였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난쟁이는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를 꿈꾸었다. 작가 조세희는 더 이상 이 소설이 읽히지 않는 시대를 바란다고 했지만, 난쟁이가 꿈꾼 세상은 더욱 멀어져 버렸다. 비정규직 ‘미생’들은 오늘도 고공에 오른다. 난쟁이가 사다리를 타고 굴뚝에 올라 다른 세상을 꿈꿨던 것처럼.
-“계약직은 한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 덫…경력 인정도 안돼”
ㆍ비정규직 청년들 한탄
“5년 반 동안 7번 계약만료로 해고됐고 8번 재입사했어요. 군대도 2년이면 제대하는데, 이놈의 계약직은 몇년을 더 해도 끝이 안 보이니….” 김희근씨(35)는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5년 넘게 3개월짜리 단기계약직으로 일했다. 이 공장에는 정규직 1700여명, 사내하청 노동자 1000여명이 일한다. 사내하청 노동자 중 절반은 김씨와 같은 단기계약직이다. 회사는 단기계약을 반복·갱신하는 ‘쪼개기 계약’을 했다. 1개월·3개월·6개월 단위로 계약을 갱신했다. 무기계약직 전환을 미루고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는 사측의 꼼수였다. 김씨는 “계약서를 몇번 썼는지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한 하청업체는 ‘유령회사’를 만들어 계약직 직원의 소속을 잠시 옮겨놓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공장은 원청 정규직, 하청 무기계약직, 단기계약직이 서열화돼 있는 신분사회다. 같은 일을 해도 무기계약직의 급여는 정규직의 60~70%, 성과급은 정규직의 70% 수준이다. 6개월 미만 단기계약직의 성과급은 무기계약직의 절반 수준이다. 비정규직에게 노동3권은 ‘다른 세상’ 얘기다. 김씨는 “노동3권이 가장 절실한 사람들이 계약직이지만, 계약직에게 노조 가입은 꿈 같은 얘기”라고 했다. 그래서 단기계약직은 무기계약직이 되기 위해, 무기계약직은 정규직이 되기 위해 버틴다. 하지만 사다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김씨의 상황은 그나마 낫다. 3년 넘게 일한 하청업체에서 계약만료를 이유로 해고된 뒤,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내 지난해 2월 무기계약직으로 복직했다. 이 회사 비정규직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직장 생활 7년차인 이경주씨(가명·31)도 계약직이다. 수도권 4년제 대학을 졸업할 때쯤 미국발 금융위기로 취업시장이 얼어붙었다. 할 수 없이 선택한 곳이 한 중견기업의 계약직 사무직원이었다. 그 이후 4군데 직장을 거쳤지만 한 번도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 계약직 경력은 휴짓조각이었다. 김씨는 “정규직 앞에 붙은 ‘비(非)’자가 내게 붙은 꼬리표 같다”고 했다. “한 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 덫 같아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첫 직장을 그렇게 선택하지 않는 건데….”
한국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덫’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비정규직 이동성 국가별 비교(2013)’를 보면, 한국의 비정규직 중 1년 뒤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율은 11.1%에 불과했다. 비교 대상인 16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치로, 회원국 평균인 35.7%의 3분의 1에도 못미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는 “유럽에서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가는 디딤돌인 것과 다르게 한국에서는 덫이 될 위험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비정규직으로 오래 일할수록 정규직 전환이 더 어려워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대학원 김연아 박사는 한국복지패널 표본가구 조사자료(2006~2014)를 토대로 비정규직의 ‘근로기간별 생존표’를 추적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얻었다. 김 박사는 “비정규직 근로 기간이 늘어날수록 비정규직 탈출은 어려워지는 가운데 정규직 전환 확률도 낮아지고 실업으로의 이동 확률도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비정규직 근로기간이 늘어날수록 1차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은 점점 어려워지고 비정규직의 영속화가 촉진된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비정규직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사용기간이 연장되면 5년여간 ‘7전8기’식의 해고와 재입사를 반복해 왔던 김희근씨 같은 이들은 더 많은 계약서를 쓰는 대신 더 오래 비정규직에 묶여있을 공산이 크다.
“<미생>에서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이제 모르겠어요. 여기서 버티는 건 이제 미련한 짓이란 생각이 들어요.” 이경주씨의 말이다.
고교생 선호하는 교사·요리사·연주가…비정규직 문제 자유로운 직업 드물어
고등학생들이 희망하는 직업 중 의사, 법조인, 최고경영자(CEO) 등 일부 전문직과 경찰관 등 특수공무원을 제외하면 상당수 직업군이 비정규직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2014년 학교진로교육실태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교사였다. 고용 불안이 만연해 고등학생들도 안정적 직업인 교사를 선호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하지만 교육부 통계를 보면 2000~2014년 전국 초·중·고교의 정규직 교원은 32만명에서 37만명 규모로 1.17배 늘어난 반면, 기간제 교사와 시간강사를 포함한 비정규직 교원은 1만6000여명에서 5만4000명 규모로 3.35배 증가했다. 비정규직 교원의 증가세가 훨씬 빨라 ‘교사=안정적 직업’이라는 등식에 균열이 올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쿡방’ 열풍을 반영하듯 고등학생이 7번째로 선호한 조리사도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2015년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조사에 따르면 조리사가 포함된 ‘숙박음식점업’ 종사 노동자 131만명 중 109만명이 비정규직이다.
여학생이 선호하는 직업 중 10위를 차지한 ‘지휘자 및 연주가’가 포함된 예술스포츠여가서비스업도 비정규직 비율이 68.8%에 달한다. 음대 졸업생들이 선망하는 직장인 전국 20개 교향악단 단원의 65.1%는 평균 2400만원의 연봉을 받는 비정규직이다. 이들 대부분은 급여를 레슨비로 보충해 생계를 잇는다.
남학생 선호도 2위, 여학생 선호도 3위인 ‘박사, 과학자 등 연구원’도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 새누리당 조해진 의원실에 따르면, 최근 4년간 정부 출연연구기관에 신규 채용된 연구진 5903명 중 4197명(71.1%)이 비정규직이다.
남학생이 8위로 선택한 ‘컴퓨터 개발자·프로그래머’, 남녀 고등학생 모두 10위권에 꼽은 ‘연예인’도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직업군이다. 전문직과 특수공무원이 되는 데 성공하는 소수를 제외하면 꿈을 좇는 학생 대부분이 비정규직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는 얘기다.
월급 삭감·해고보다 무서운 건, 내 딸도 ‘비정규직’이라는 것
■‘학교 청소’ 매화씨 이야기
평생을 일했지만, ‘돌고 돌아’ 비정규직이었다. 조매화씨(49·여)는 인천 송도에 있는 연세대 국제캠퍼스의 청소노동자다. 매일 새벽 4시 반 시내버스 첫차를 타고 출근하는 그가 한 달 꼬박 일하고 쥐는 돈은 125만원 남짓.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일하던 남편(56)이 지난해 일을 그만둔 뒤 ‘가장’이 된 조씨가 가족에게 가져가는 한 달 생활비다.
이 돈으로는 3인 가족의 생계를 잇기가 벅차다. 대출금과 이자 상환에 매달 64만원이 빠져나간다. 나머지 60만원으로는 공과금과 교통비, 식비를 대기가 빠듯하다. ‘문화생활’은 엄두도 못 낸다. 노후 대비를 위한 저축도 남의 얘기다. “같이 청소일 하는 동료가 가계부 쓰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하더라고요. 저 역시 딱히 가계부라고 쓸 게 없어요. 어쩌면 가난의 증거일 수도 있고….”
급여도 급여지만, 조씨 같은 ‘용역노동자’에겐 고용 불안이 가장 큰 공포다. 지난해 11월부터 그가 속한 용역회사가 기숙사 청소용역 입찰의 우선 협상권을 따내려고 인원을 감축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노조가 항의하자 회사는 인원 감축 대신 근무시간을 8시간에서 5.5시간으로 줄이고 임금 역시 95만원으로 깎자고 제안했다. 세금을 내고 남은 월급으로 대출금 64만원까지 갚으면 먹고살 길이 없겠다 싶었다. 그 후에도 회사는 오전·오후조로 나누어 근무할 것, 다른 회사에 추천서를 써줄 테니 회사를 그만둘 것을 차례로 제안해왔다.
결국 회사는 올해 초 22명을 해고했다. 해고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조씨는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내가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랜 농성 끝에 회사는 지난 5월 해고자들을 순차적으로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런 위기가 일회성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엄연히 한 가족의 ‘밥줄’이지만 비정규직은 너무나 하찮게 취급된다. 대학 부총장은 ‘청소 아줌마’들의 농성장을 지나치며 “(복직을 원하면) 기도하라”고 했다. 청소일을 시작하기 전, 공항 기내용품 세팅 용역으로 일하던 그는 근무 중 팔을 다치자 “그만둘래요, 계속 일할래요?”라는 용역업체 팀장의 말을 듣고 실업자가 됐다. 일을 하다 다쳤지만 산재보험 처리는커녕 일자리마저 잃게 됐다. “다 쓴 휴지처럼 쓰고 버려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철소 사내하청, 건설업 일용직 등 평생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한 남편의 처지 역시 다르지 않다. 지난해 건설현장에서 철근이 떨어져 발을 다친 뒤 병원비도 요구하지 못한 채 일을 그만둬야 했다. “그쪽에도 그런 게 있나봐요. 다쳐서 병원비 청구하면 다음에 안 써주는 거…. 철근에 찔린 건데 집에서 그냥 약 바르고 말았어요. 지금은 일할 의욕이나 삶에 의욕이 없는 것 같아요.”
조씨의 딸 은영씨(27·가명)도 비정규직이다. 하루 13시간 태권도 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태권도 말고도 생활 줄넘기, 풋살까지 말 그대로 모든 ‘생활체육’을 가르치고 운전까지 하지만, 한 달에 2~3일 쉬고 월 120만원을 받는다. 근로계약서를 쓰자는 말은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간 거쳐온 관장들은 은영씨가 시급을 얘기할 때마다 “정신머리가 잘못됐다”는 얘기부터 했다.
은영씨는 비정규직 사범일에 ‘미래’가 없음을 안다. 언젠가 유소년 체육지도자 자격증을 따 직장을 옮기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는 엄마가 안타까워 딸은 엄마에게 자신의 신용카드 한 장을 건넸지만, 딸의 휴대전화에 뜨는 결제 내역은 단 한 번도 2만원을 넘긴 적이 없다.엄마 조씨가 처음부터 비정규직은 아니었다. 2012년까지 국내 유명 등산화업체에 다닐 때만 해도 정규직이었다.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는 바람에 10년간 일한 직장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뒤 그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비정규직밖에 없었다.
조씨는 돈을 벌며 학교를 마칠 수 있다는 얘기에 산업체고등학교에 입학해 17살 때부터 방적공장, 카펫공장, 봉제공장, 전자제품 부품공장 등 온갖 일터를 거쳤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자리는 스스로 “사람들의 생애 마지막 밥벌이”라고 부르는 청소 비정규직이다. 더 이상 정규직 시절에 미련을 두진 않지만, 가끔 길을 가다 정규직으로 일했던 회사의 등산화 간판이 보일 때면 조씨의 눈이 돌아간다. 군에 장교로 있는 아들이 가끔 집에 올 때면 “사회 나오지 말고 군에서 끝까지 버텨라”라고 얘기하곤 한다.
■‘교무실무사’ 순옥씨 이야기
서울 노원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무실무사로 일하는 용순옥씨(49·여)도 비정규직 바다로 밀려났다.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뒤 3년 만에 다시 구한 일자리는 비정규직이었다. 그 이후 꼬박 14년간 학교에서 일했지만 연차가 쌓여도 급여는 오르지 않았다.1년에 최소 두 달, 월급 30여만원이 월급통장에 꽂힌다. 방학 중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유독 비정규직에게만 적용된다. 용씨가 지난 1월 받은 급여는 37만4140원. 현재 살고 있는 빌라 월세 35만원을 내고 나니 2만4140원이 남았다. 14년차 직원인 그의 월급은 학기 중에도 150만~160만원이다. 용씨는 “어떤 사람이 월급 30만원으로 살 수 있겠느냐”면서 “내가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올해 초 이혼한 용씨에겐 전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떠안은 빚 6000만원이 있다. 법원에서 개인회생 결정을 받고 매달 40만원씩 상환해왔지만, 지난해 학교 비정규직 임금이 ‘월급제’로 바뀌면서 납기일을 맞추지 못해 다시 개인회생 절차를 밟아야 한다.
매달 월세 35만원에 대출금, 최소한의 생활비를 쓰고 나면 “적자 없이 살 수 없는 생활”이다. 다른 학교 비정규직들은 몰래 야간 식당일 등 아르바이트를 해 모자란 생계비를 충당하기도 한다. 학교 규정상 금지된 일이다.
“아무리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도, 명색이 교육기관인데 학교는 다를 줄 알았어요.” 용씨는 말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말 못할 차별을 수도 없이 겪었다.
“예전에 학교에 계셨던 교장선생님이 당뇨가 있었어요. 급식실에서 나오는 쌀밥은 못 드신다고 현미밥을 꼭 드셔야 한대요. 그래서 교무실 한쪽에서 제가 매일 교장선생님이 먹을 밥을 따로 해야 했어요. 제가 남의 밥까지 지으러 학교에 나온 건 아닌데….”
어떤 교사는 교무실에 커피가 떨어지면 팔짱을 끼고 서서 용씨만 바라봤다. 학교에 인사가 있거나 교직원들의 경조사 때 들어오는 떡을 나눠서 담아 돌리는 ‘떡 셔틀’도 용씨와 같은 비정규직 교무실무사 몫이었다.
서러웠던 기억은 끝이 없다. 용씨는 “어떤 교장은 자녀 혼사 청첩장 주소 적는 작업을 해달라고 하거나, 같은 동네에 사는 교무실무사에게 손녀 유치원 보내는 일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학교에서 교장·교감은 ‘황제’”라고 말했다.비정규직들은 밥을 먹을 때도 차별을 받았다. 정규직들은 월 13만원씩 받는 급식비를 용씨 같은 비정규직은 4만원만 받는다. 그나마 올해 초 노조가 파업을 해서 얻은 성과이지만, 초·중·고 학생들의 한 달 급식비인 5만~8만원보다 적은 액수다. “우리는 밥만 먹고 반찬은 먹지 말라는 건가요?” 용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올해 22살인 용씨 딸은 최근 대학을 자퇴했다. 딸은 엄마에게 “집안 형편도 안 좋으니 대학 졸업장을 따는 것보다 빨리 사회에 나가 돈을 버는 게 낫겠다”고 했다. 엄마는 말리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피자집, 편의점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거친 딸은 지금은 콜센터 비정규직으로 일한다. 엄마와 딸 모두 비정규직이지만, 비정규직으로서 겪는 불안이나 설움을 서로 이야기하진 않는다. 엄마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학교를 그만둔 것에 후회는 없는지 딸에게 묻지 못한다. 딸 역시 엄마에게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를 꺼린다. 용씨가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나이도 스물둘이었다. 그때는 ‘비정규직’이란 게 없었다. 그러나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다시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비정규직밖에 없었다.
꼬박 26년을 쉼없이 일해왔지만 가난은 용씨 가족을 비켜가지 않았다. “저는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 있지만, 딸에게 비정규직을 대물림한 것 같아서…. 그게 가장 속상해요.” 끝내 용씨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Drowning In The Sea Of Love / Eva Cassi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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