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을 때 나는 느려터진 굼벵이가 된다. 서유석의 황소걸음을 흥얼거리기도 한다. 사람이 빠르면 얼마나 빠를까? 사람이 느리면 얼마나 느릴까? 그때를 느끼며 온마음으로 걸어야지! 온마음으로 걷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길들이고 익숙해져야 한다. 안타깝게도 ‘빨리빨리’ 문화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들 삶 깊숙이 들어 와 있다. 길을 걷다가도 경보하듯 횡하니 앞서 가는 사람들을 보면 왜? 라고 물음을 던질 때가 많다. 한편 정다운 모습으로 도란거리며 걷는 분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귀동냥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런데 대화의 주제가 각종 투자정보와 부동산 등을 통한 재산 증식과 자녀의 진학과 관련된 학원이야기가 의외로 많았다. 솔직히 이 부조화스러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당혹스러웠다. 도대체 얼마나 풍족해야 만족할까. 여전히 빨리빨리를 주문하고 경쟁을 부추기면서 탐욕을 자극하는 이 뒤틀림은 길 걷기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빨리빨리는 일제의 시민치하와 전쟁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성장통(成長痛)이다. 결과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이제는 결별해야 할 흔적이다. 2010년 현재 대한민국은 지구촌 191개 국가 중에 경제력 10위권의 선진국이다. 양극화의 그늘이 짙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먹고 살만해졌다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일제의 수탈과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림도 회복기에 들었다. 사람들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자동차가 매개 역할을 했다. 도로가 사방팔방으로 나면서 사람들은 걷는 길 자체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차창 밖 풍경은 그야말로 스침에 불과하다. 길을 잃음과 동시에 다른 소중한 가치들도 시나브로 묻혀버렸다.
등정주의에 대한 반성이 제기될 즈음 수평적 길 걷기가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름난 길을 찾아 남의 나라까지 가서 발품을 팔고 있다. 만만치 않은 여정임에도 걷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새삼스러움, 정겨움, 새로움의 만남이 있기 때문이다. 고개마다 포구마다 마을이 열리고 고유한 문화를 만나게 된다. 그뿐인가 숲 가장자리마다 계절을 달리하여 얼굴을 내미는 야생초들이 반긴다. 한 아름 굴참나무나 서어나무, 팽나무를 껴안아 보기도 하며 간만에 그들이 들려주는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정성을 들인다는 것은 관심이다. 관심은 사랑의 시작이다. 그렇다. 걷는다는 것은 찬찬히 들여다보며 살피고 음미함을 통해 몸과 마음이 어떤 대상과 하나가 될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다.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다. 생명의 순환 그물 속에 한 코의 그물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걷기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사느라 무심했던 것, 스쳐왔던 것에 대해 뒤돌아봄이요 미처 몰랐던 세계의 발견이다. 그리하여 걷기는 시나브로 치유와 소통, 배려와 존중, 더불어 삶을 찾는 학교이자 병원이고 도서관이다.
우리가 추구하고 회복해야 할 걷기문화는 에코투어리즘에 입각한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자연친화적인 걷기가 되어야 한다. 하물며 그 길에서 더 많은 돈벌기 이야기 따위는 접어두자. 우울한 일이다. 지난 20년 대한민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국가 중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는 나라가 됐다. 과도한 교육 경쟁과 구직 경쟁 등 경쟁의 정점은 더 많은 부와 물질적 포만을 강요하는 개발과 성장 신화가 강요한 마약이다. 중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온마음으로 걷는 일은 진실로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가능하다. 나눔에 대해 인색하지 않고, 자족하고, 자연과 교감하고자 할 때 길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 행복한 길 걷기를 마다할 것인가. 제발, 느리게 온마음으로 걷자. (강원도민일보 2011. 6.30)
Comes Autumn-Falling 올드팝메니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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