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탱크를 응시하며 가토 슈이치 지음·서은혜 옮김 돌베개 | 412쪽 |
‘일본 마지막 지식인’의 시대를 찌르는 언어들
1968년 여름에 그는 프라하에 있었다. 도쿄를 떠나 모스크바와 바르샤바를 거쳐 한동안 빈에 머물렀다가 8월 초순에 도나우 강을 따라 남하했다. 애초에는 브라티슬라바 성을 목적지로 했던 것 같은데, 웬일인지 타트라 산맥 어디쯤에선가 길을 잃고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방향을 조금 틀어 모라비아 언덕을 넘고 보헤미아의 숲을 가로질러 당도한 곳이 프라하였다. 어쩌면 우연일 수 있는 행로였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양심적 지식인의 필연과도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다. “1968년 8월20일 밤 11시경, 소련군이 국경을 넘어 침입했다. 이튿날인 21일 새벽 6시경에는 이미 프라하의 정부 건물을 포위하고 전국 주요 도시 전부를 점령했다. (중략)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군대에 무저항을 지시했고 대중에겐 냉정을 유지하도록 호소했다. 점령군 병력은 50만에 이르고 탱크는 500대 이상에 달했다.”
일본의 ‘전후 지식인’을 표상하는 가토 슈이치(1919~2008·작은 사진)는 당시 49세였다. 지금의 우리가 다큐멘터리 필름, 혹은 <프라하의 봄> 같은 영화를 통해서야 만날 수 있는 당시의 상황을 그는 지근거리에서 목격했다. 사건을 겪은 직후인 1968년 가을, 가토는 일본의 진보적 지성을 상징하는 잡지 ‘세카이(世界)’에 ‘언어와 탱크’를 발표했는데, 이 글은 “그가 남긴 문장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문장”(역사학자 나리타 류이치·67)으로 손꼽힐 뿐 아니라 일본의 1950년대생 지식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에세이로 평가받는다.
‘언어와 탱크’는 수백대의 탱크로 상징되는 폭력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굳건한 ‘언어의 힘’을 피력한다. 신문사와 방송국이 점령됐음에도 비밀 인쇄된 신문들이 날마다 수만부씩 거리에 배포됐고 “거리의 벽들은 보이지 않는 손들이 적어놓은 커다란 글자들로 뒤덮였다.” 시위대의 확성기, 행진하는 청년들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자유’ ‘인권’ ‘민주주의’ 같은 말들이 터져나왔다. 프라하의 어느 꽃집은 이런 광고를 내걸었다. ‘이반이여, 너에게 줄 꽃은 없단다.’ 이반은 당시 점령군을 지휘했던 소련의 국방차관 이반 파블로브스키를 일컫는다.
1968년 8월21일 소련군 탱크와 무장 군인들이 체코 프라하 중심가를 점령한 모습. 프라하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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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 속에서 쓰인 가토의 글은 “언어가 탱크를 극복한 후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일부를 인용하자면 이렇다. “언어는 아무리 날카로워도 또한 아무리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도 한 대의 탱크조차 파괴하지 못한다. 탱크는 모든 목소리를 침묵하게 만들 수 있고 프라하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라하 길거리에 있는 탱크의 존재, 그 자체를 정당화하는 일만은 불가능할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어떻든 언어가 필요하다. (중략) 1968년 여름, 보슬비에 젖은 프라하 거리에서 마주 서 있던 것은 압도적이지만 무력한 탱크와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언어였다.”
이 책은 가토가 생전에 쓴 27편의 평론을 모았다. ‘언어와 탱크’를 한가운데 두고, 그 글을 둘러싸듯 가토의 다른 글들을 골라 한 권으로 엮었다. 종전 직후인 1946년에 27세의 가토가 쓴 ‘천황제를 논하다’는 격렬한 논평으로 손꼽힌다. “나는 결론짓는다. 천황제를 그만두어야 한다. 나는 봉건주의의 암담한 황혼에서, 인민과 이성과 평화가 찾아올 아침을 향해 소리친다. 무기여, 천황제여, 인민의 모든 적이여, 잘 가라!” 반면에 11년 뒤 발표한 ‘천황제와 일본인의 의식’은 냉정하고 분석적인 텍스트다. 천황에 대한 국민감정을 분석하는 이 글에서 가토는 천황제와 허무주의의 연관성을, 패전 이후 천황의 권위 실추에 따른 ‘정신의 폐허’와 그 위에 서 있는 ‘고독한 인간’의 탄생을 서술한다.
그는 애초에 의학자였다. 도쿄대 의학부를 졸업했고 1951년 프랑스로 유학해 파리대 등에서 혈액학 연구에 종사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잡지·신문 등에 문예평론을 쓰곤 했다. 귀국 직후인 1956년에는 ‘일본문화의 잡종성’을 발표했다. “나는 서양을 둘러보는 도중에 일본 문화에 대해 생각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일본을 서양화하고 싶다’는 근대주의와 ‘순수하게 일본적인 것만 남기고 싶다’는 국가주의 모두를 비판하면서 ‘논객’ 혹은 ‘지식인’으로서 그의 이름을 알린 계기였다. 그는 혈액학 전문가에서 문필가로 방향을 바꾼 까닭에 대해 “전문 영역을 바꾼 것이 아니라 전문화를 거부한 것”이라고 자서전 <양의 노래>(2015년 한국어로 번역 출간)에서 밝힌 바 있다.
1970년대부터 반전평화운동에 앞장섰던 가토는 생애 말년에 오에 겐자부로 등과 함께 평화헌법 9조를 지키자는 ‘9조 모임’을 만들어 전국 각지에서 강연회를 이끌었다. 28세 때 쓴 ‘지식인의 임무’에서, 무력한 일본 지식계급을 구원할 길이 “인민 속에 스스로를 던지고 인민과 더불어 다시 일어서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했듯이,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 마지막까지 불굴의 삶을 살았다. 재일한국인 2세인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학 교수(67)는 책의 추천사에서 2008년 타계한 가토를 “일본의 마지막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첫째 “그만큼 폭넓은 지성과 명석한 이성을 지닌 이는 앞으로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예상” 때문이고, 둘째로는 “적어도 일본에서는 유식자라든가 전문가는 존재하지만 지식인은 거의 절멸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Sailing (Rod Stewart)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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