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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by 이성근 2018. 12. 8.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캐스린 H 앤서니 지음·이재경 옮김반니 | 452| 2018.11

 

저자 : 캐스린 H. 앤서니

건축과 디자인에 얽힌 편견과 차별에 목소리를 내는 건축가. 2010년 미 의회 청문회에서 공중화장실의 성평등 문제에 관해 증언했고 이 증언을 힐러리 클린턴이 크게 지지한 바 있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이후 일리노이대학교 건축대학 교수, 디자인 프로그램의 학과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젠더 및 여성학과 교수, 조경학과 교수이기도 하다. 공간과 장소가 우리 삶을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연구하며 특히 현대 건축과 상업 디자인에 녹아있는 젠더와 인종의 사회적·행동적 요인에 몰두하고 있다.

 

2003년에 저술한 책, 다양성을 위한 디자인DESIGNING FOR DIVERSITY이 미국 건축가 협회(AIA)에서 상호협력상을 받았고 2005디자인 배심원단DESIGN JURIES on TRIAL이 환경디자인연구협회(EDRA)에서 공로상을, 2010년에는 건축 교육에 공헌한 공로로 건축대학생협회(ACSA)로부터 종신 석좌교수직을 받았다. 디자인 분야 이슈를 다루는 최고전문가로서 ABC, CNN, 타임, 가디언, 뉴욕타임스등 유력 매체들에서 논평하고 있다.

 

목차

서문 _ 에릭 슈미트(전 구글 회장)

들어가는 글: 모두를 위한 디자인

 

1부 패션 디자인

1. 나를 고문하는 옷들: 의류 디자인

 

2부 제품 디자인

2. 위험천만한 놀이: 어린이용품 디자인

3. 어른도 버거운 장난감: 하이테크와 하이터치

4. 포장의 폭력: 제품과 가구와 산업설비 디자인

5. 밀착 공포: 대중교통 디자인

 

3부 건물 디자인

6. 금기시된 주제: 화장실 혁명

7. 불편한 안식처: 집과 동네의 디자인

8. 권력만을 위한 공간: 교실, 직장, 법정 디자인

9. 쇼핑의 가혹한 대가: 상업 지역 디자인

10. 편안하게 아플 권리: 의료보건 환경 디자인

11. 행동 개시의 시간

 

찾아보기

 

멋진 디자인 뒤에 숨겨진 심리적, 신체적 편견의 불평등을 폭로하고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제안하다

 

기저귀 교환대 설치해주세요스쿼트 캠페인 나선 아빠들 (서울일보 2018.11.04.)

아빠도 기저귀 갈아요(국민일보 2018.11.05.)

아빠들도 육아 참여하라면서기저귀 갈 곳이 없어요” (아시아경제 2018.11.08.)

 

최근 회자되고 있는 기사들이다. 우리나라 정부는 오랜 기간 동안 출산 장려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이 정책이 일상에서 아이 키우는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꿀 길은 멀어 보인다. 여론은 비용쓰기에만 치중한 프로그램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환경 및 의식 변화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이 기사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실질적인 환경 설계가 변하지 않는다면 의식과 행동이 변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남자 화장실에 기저귀 교환대가 없다면, 아빠의 육아에 관한 의식 변화를 외쳐도 결국 육아는 온전히 엄마의 몫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의식이 변화한다 해도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 살고 있는 마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통근하는 사무실은 우리 인생의 물리적 배경에 불과한 듯 보인다. 이런 사물과 공간들의 설계나 디자인에 관해 안전 의식의 관점에서는 꾸준히 문제 제기가 이어져왔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과 정신, 생리 현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간과되어 왔다.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의 저자 캐스린 H. 앤서니는 이런 환경 디자인에 주목한다. 일상의 모든 제품과 장소의 디자인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특징짓고, 편견을 만들어내며, 일상생활의 틀을 만든다는 것을 밝혀낸다. 우리 사회의 젠더 균형, 연령 편견, 체형 편향을 조장하는 것은 흔히 생각하듯 미디어나 사회적 고정관념만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사 입는 옷의 치수표와 매장 구조는 남녀 양성 모두의 외모와 신체 치수에 관한 편견을 조장하고 강화한다. 학교 책상 모양과 각종 비품은 왼손잡이 차별을 당연시하고 있다. 여자 화장실에만 있는 기저귀 교환대나, 차가 있어야 학교에 갈 수 있는 교외 마을 구조 등은 육아와 가사를 엄마의 몫일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이렇듯 우리들 대부분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디자인들은 젠더, 연령, 체형, 계층 등에 관한 편견을 교묘하게 조장하고, 인간 불평등을 지속한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의류와 제품, 건물 설계의 개발과 생산에는 생산자의 편향이 개입한다. 이런 편향들은 단순히 사용 불편을 겪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심리, 사회, 문화, 세대 간의 간극을 넓히고, 특정 젠더와 연령, 체형에 대한 편견을 공고히 한다. 문제는 이런 편향적인 디자인 중 실패한 디자인으로 판명 난 것들도 있지만, 표준형으로 자리매김한 것들도 많다는 것이다.


잘못된 디자인의 폐해는 이뿐만 아니다. 이 디자인들은 사용자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유행에 맞추어 높고 거대해진 침대 매트리스는 노약자에게 침실을 가장 위험한 곳으로 만든다.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어린이 옷장과 TV는 툭하면 넘어지고, 한입에 쏙 들어가는 캡슐 세제는 그대로 아이 입속으로 들어갈 확률이 높다. 미국 평균 체형의 남성 운전자에게 맞춰 디자인된 자동차는 여성이나 평균 신장 이하인 남성들의 자동차 사고를 유발한다.


이런 안전사고는 일견 안전 불감증에서 나온 듯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사용 주체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디자인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단골 피해자는 주로 평균이 아닌 사람들, 즉 평균보다 키가 작거나 뚱뚱한 성인, 여성, 어린이나 노약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이들을 위해 설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이러한 세상에서 하루하루 더 많은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며 살고 있다.

캐스린 H. 앤서니는 우리를 둘러싼 온갖 것들에 어떤 식의 편향이 반영되어 있는지 그리고 이런 것들이 어떻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고 안전을 위협하는지를 폭로한다. 이를 통해 일상의 디자인에 관한 문제의식을 촉구한다. 나아가 우리가 디자인 주도권을 확립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책속으로

 

항상 특정 젠더만 디자인 편향에 따른 불이익을 당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젠더 편향 디자인의 피해는 유독 여성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크다. 항상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만 디자인 편향의 불이익을 당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디자인이 특정 연령대를 소외하는 경우는 주로 어린이와 노인에게 해당한다. 항상 특정 체형의 사람들만 디자인 편향에 따른 불이익을 받는 것 역시 아니다. 하지만 디자인이 특정 체형을 배제할 때, 소위 평균적이지 않은 사람들’-평균보다 키가 작거나 특대 체형, 가시적/비가시적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단골 피해자가 된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말했다. “공간은 이데올로기와 정치와 동떨어진 과학적 사물이 아니다. 공간은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_20

 

재앙이 닥치기 전까지는. 우리 몸에 부적합한 디자인의 옷과 신발이 초래하는 결과는 얼른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종종 우리의 건강과 안녕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다. 잘못된 디자인의 가장 명백한 피해 사례는 알고 보면 가장 작은 규모로 일어난다. 바로 옷이다. 패션 산업이 우리의 외양을 지시하고, 일상복의 요건과 옷장 속 내용물을 규정한다. 패션 산업의 변덕에 끌려다니는 건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소녀 시절부터 주입된 옷과 외모의 중요성 때문에 여자들이 보다 크게 영향받는다. _25

 

여성 운전자들은 여전히 가방 놓을 곳을 찾아야 하는 등의 따분한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다. 가방은 어디에 놓으면 될까? 조수석에 올려놓아야 할까? 조수석은 절도 위험에 가장 취약하다. 조수석 바닥? 하지만 거기는 손이 안 닿는데? 아니면 운전석 바닥? 그러다 가방이 페달 위로 넘어지면 사고로 이어진다. _93

 

공중화장실의 접근성과 디자인은 남녀를 차별하는 동시에 양쪽 모두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야기한다. 남자에게 공공의 적은 소변기다. 좋든 싫든 남들 있는 데서 자신의 가장 사적인 부위를 드러내야 한다. 교수와 학생, 매니저와 식당 보조가 나란히 서서 일을 본다. 딱 한 뼘씩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서로의 모습이 훤히 드러난다. 이 때문에 소년들이 화장실에서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직은 서서 일을 보며 자신의 장비를 내보일 정도로 남자가 되지 않았다는 등의 놀림을 받는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때 받은 무력감에서 기인한 문제들로 평생 고통받기도 한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아빠는 때로 어린 딸아이를 남자 화장실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다. 이때 밖에서는 엄마가 어린 아들을 혼자 화장실에 들여보내 놓고 애를 태운다. 그 옆에서 어느 노부인은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남편을 걱정한다. 어린아이를 대동한 부모와 조부모, 만성 질환이 있는 사람들, 특정 약물 치료 중인 사람들은 필요할 때 화장실을 찾지 못할까 봐 항상 전전긍긍한다. 접근이 거부되면 낭패를 보기도 한다. 10대들은 더러운 학교 화장실에 가기를 거부하고 참다가 귀가하기 바쁘게 화장실로 직행한다. _178--- 본문 중에서

 

미학만 충족시킨 디자인, 일상의 재앙이 되다

언제부터인가 공중화장실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심호흡부터 하게 된다. 실은 철저한 위생 관리로 집 화장실보다 더 쾌적한 느낌을 주는 곳들도 제법 있다. 그럼에도 화장실 출입을 할 때마다 잠시 주위를 살피게 되는 까닭은, 근래 한국 사회에서 화장실이 성평등 현실을 적나라하게 일깨우는 공간으로 부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 번화가의 남녀공용 화장실에 들어갔던 어느 여성은 모르는 남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화장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적발되는 불법촬영물의 온상이다.

 

화장실이 첨예한 성정치의 공간인 이유는 또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여자 화장실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선 풍경을 볼 수 있다. 여성이 평균적으로 화장실에서 좀 더 긴 시간을 보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공공장소의 여자 화장실 수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서 빚어지는 문제다. 젠더에 따라 화장실 접근권에서 차별을 받는 것이다.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의 저자인 건축학자 캐스린 H 앤서니(일리노이대)는 미국 내 화장실 성평등 문제를 줄곧 제기해 왔다. 20105월 미 하원 정부개혁위원회가 연방정부 건물의 화장실 젠더 평등 법안을 놓고 연 청문회에 출석한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어머니와 할머니, 딸과 손녀, 여자 형제, 이모와 고모, 조카딸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여자 지인들과 친구들을 대신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의 인종, 피부색, 종교, 나이, 신체 치수, 체형에 상관없이, 소속 정당에 상관없이, 민주당, 공화당, 무소속, 녹색당 중 어디에 속하든, 우리는 모두 하나의 절망적인 경험을 공유합니다.”

 

앤서니는 남성과 달리 여성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하는 원인을 잘못된 설계에서 찾았다. 여성의 공적 활동이 적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건물들은 여성의 니즈를 고려하지 않았다. 건축이나 건설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드물었던 것도 문제였다. 법안은 결국 위원회의 벽을 넘지 못했지만, 화장실이 여자들이 이 세상을 동등하게 누비는 것을 저해하는 붙박이 장애물”(워싱턴 첫 여성 시장 샤론 프랫)이라는 문제의식은 힘을 받았다.

 

여성들이 화장실 앞에 긴 줄을 서야 하는 이유는 잘못된 설계 탓

치마 속 비치는 유리 바닥·투명 계단배려 없는 디자인들에 경고

젠더·연령·체형 차별 대신 편향 제거한 포용적 디자인촉구

 

화장실의 표준적 설계는 남성들에게도 문제를 야기한다. 칸막이도 없이, 겨우 한 뼘씩 떨어져 있는 소변기에 서서 볼일을 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소년 시절에는 사적인 부위를 자신 있게 드러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공중화장실 사용을 기피해서 나타나는 수줍은 방광 증후군등은 건강에도 커다란 위협이다. ‘친절하지 않은화장실은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 장애인, 성소수자들에게도 불편을 초래한다.

 

이 책은 화장실을 포함해 우리 일상을 둘러싼 제품과 공간 디자인에 얼마나 많은 편향이 담겨있는지를 고발한다. , 구두, 침대 매트리스, 자동차 좌석, 지하철 손잡이, 장난감, 학교 비품, 놀이터, 일회용 포장용기, 레스토랑 의자. 사실 디자인에 젠더나 인종적 편견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은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수 없다. 기저귀교환대가 주로 여성 화장실에 마련되어 있어서 육아가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을 강화시킨다는 지적은 누구나 할 법한 이야기로 들린다. 그럼에도 책은 다루지 않는 사례를 떠올리기가 힘들 만큼 특정 젠더나 연령대, 체형의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나쁜 디자인을 종합적으로 망라한다.

 

2009년 해체주의 건축의 대표주자 베르나르 추미가 설계한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갤러리 바닥을 유리로 만들어 관람객들이 발아래로 고고학 유물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여성들의 치마 속을 훔쳐보기에 최적의 장소로 떠올랐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홈페이지

2009년 해체주의 건축의 대표주자 베르나르 추미가 설계한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갤러리 바닥을 유리로 만들어 관람객들이 발아래로 고고학 유물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여성들의 치마 속을 훔쳐보기에 최적의 장소로 떠올랐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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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핵심 메시지는 책의 원제(Defined by Design)에 응축되어 있다. 디자인은 매일매일의 우리 생각과 감정, 행동을 규정한다. 따라서 구축환경(built environment)’으로서 디자인이 우리 삶에 미치는 심오한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이힐은 신지 않으면 그만이고, 위험한 장난감은 사 주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불행히도 대다수 제품과 공간은 선택의 여지 없이 우리 옆에 놓여 있다. 남성용 정장 넥타이는 한 치수로만 생산된다. 키가 작거나 마른 남성은 허리띠 아래로 처지는 넥타이를 맬 수밖에 없다. 노인들이나 손가락이 불편한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과 촘촘한 키패드 때문에 애를 먹는다.

 

나쁜 디자인은 여성과 어린이, 노인, 그리고 표준 체형이 아닌 사람들에게 특히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불평등을 강화시킨다. 또한 심각한 부상이나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자동차는 일반적으로 평균 체형의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여성이나 평균적인 몸을 갖지 않은 남성들은 사고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생사가 오가는 보건의료 환경 디자인은 환자와 보호자는 물론 의료진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안전사고의 개념도 다시 짚어봐야 한다. 처음부터 잘 넘어지게끔 만들어진 옷장이나 TV라면, 사용자의 부주의만을 탓해도 될까.

 

책에는 편향을 제거한 포용적 디자인의 사례도 여럿 나온다. 높이 조절이 가능한 연단, 운동하면서 업무를 볼 수 있는 워크스테이션 등은 우리도 적용해볼 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서울의 지하철이 휠체어와 유모차 접근권에서 최고이며, 서울시를 젠더 친화적 도시로 선정한 것은 다소 의아하게 만든다.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여성 건축가인 저자가 걸출한 남성 건축가들을 저격하는 부분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1910년 시카고 교외에 지은 로비 하우스는 건축사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라이트는 널찍한 거실에 비해 부엌을 너무 비좁게 설계했고, 심지어 빨래를 하기 위해서는 옥외 계단을 올라가도록 했다. 한 마디로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은 여성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미스 반데어로에의 1950년작 유리주택은 그의 모더니즘 정신을 구현한 집이다. 그런데 실제로 집의 설계를 의뢰하고 거주한 여성은 엑스레이처럼 투명한 집 때문에 쓰레기통이나 옷걸이조차 마음껏 놓지 못했다. 2009년 해체주의 건축가의 대표주자인 베르나르 추미가 설계한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뜻하지 않은 오명을 얻었다. 관람객들이 발아래로 고고학 유물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유리 바닥 갤러리와 투명 계단 때문에,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무방비로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들은 젠더를 고려하지 않은 디자인이 미학적으로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실생활에서는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장 바람직하기는 더 많은 여성, 더 다양한 체형을 지닌 사람들이 건축·디자인계에 진출하는 것이다. 소외 계층을 위한 정책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회·정부·기업 등 각계에서 소수자들의 대표성을 확대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동시에 무심하게 디자인된 제품이나 공간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자신부터 목소리 내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더는 특정 집단에만 편향된 호의를 베풀고 불공평한 권한을 부여하는 디자인들을 참고 살지않겠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모두를 위한 디자인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젠더, 연령, 체형 편향을 줄이거나 최소화하거나 없애는 디자인이 모두에게 기회가 균등한 사회를 만든다. 우리가 힘을 합하면 인간의 다양성에 보다 훌륭히 대응하는 안전하고 건강한 디자인을 창조할 수 있다. 우리가 힘을 합하면 디자인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를 따돌리는 패션, 제품, 건물을 우리의 미래에서 퇴출할 수 있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You And Me (Alice Coo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