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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13.5.5.)

by 이성근 2013. 6. 9.

 

 

부자 감동 캠프에 아들이 신청을 했고, 아들의 담임선생이 참석여부를 물어 왔다. 뜬금없는 전화였지만 흔쾌이 수락? 했다.  빈손으로 가면 안된다며 사무처 활동가들이 꽃바구니를 만들어 주었다.  아들 학교는 집 뒤 언덕 너머에 있다. 가차이 있지만 가까이 하지 못했다.  으스럼 저녁 아들의 학교에 도착했다. 비슷한 사연의 아버지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부자 감동 캠프는 오후 6시 모여 11시가 넘어 마치는 프로그램이었다.  하기사 부자가 이런 이벤트를 통해 조금이라도 가까워 지고 이해 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1박2일이라도 수용할 용의가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외롭다. 식구들의 생활을 책임지는 단위라는 더욱 그렇다.  아들과 어울리는 법을 전수 받지도 못했고,  그런 경험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러워도 제 자식에게 만은 그러지 못했다. 

아들이 먹는 학교 밥을 먹어 보았다.  아들은 맛이 없어 했다.  아니 또래의 친구들이 보이는 공통된 반응이다. 학교에서 주는 찬의 대부분은 저염으로 자극성 많은 가공식품을 먹는 아이들에게는 싱겁다.  학교가 지켜 주지 못하는 것의 대표적인 사례다.   아버지인 나는 아들의 어떤 것을 지켜주지 못했든가.  그 어떤 것 조차 잘 모른다.  올해 들어 야단을 치기 보다 못본척하고 격려하고 지적하더라도 조용히 지적하는 편이다.

아무튼 시간이 되어 조별로 부자들이 모여 이벤트 팀이 만든  분위기 속으로 빨려 들었다.  아들이 조장이 되었다.  조원이 모두 나가  짧은 시간 즉석에서 만든 구호와 슬로건을 외치며 단결을 과시했다.  사회자가  제안했다. 이제부터는 호칭을 바꾸어 보자고 예컨데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 사랑하는 아들 이환용이라고 하고 사랑하는 저의 아버지 이성근님이라고 ...   

아들이 학교에서 꽤나 지명도가 있음을 이번 방문을 통해 일았다.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  아들은 아들대로 어딘가로 이동하여 그들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서로의 편지를 읽어 주는 시간 속에 눈물을 흠치는 여러 아버지와 아들,   ... 아들의 편지는 간결했다.  좋고 안좋은 기억들  패스하고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등이었다.  싱겁기는 ... 세족식이 있었다.  강당을 밝히던 조명이 꺼지고 노래가 흐르고 아들이 아버지의 발을 씻어 주는 세족식이 있었다.   긍금했다. 아버지 발을 씻으주면서 뭔 생각을 했을까. 준비된 프로그램이고 다른 아이들도 하니까 ...

어쨌든 결론은 그런 대로 좋았다.  언제 사진을 찍었는지 아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배경 삼아 수료패가 나누어 졌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나와 아버지, 그리고 내 아들과 나 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 해 보았다.    

어버이날 앞두고 본가에 모였다.  의무적인 ... 하기사 이런 날이 없으면 좀체 모이지 못한다. 제 각끔 살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본가에 가는 일은 늘 부담스럽다.  마음과 함께 수반되지 못하는 물질적 조건이 우울하다 못해 씁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근래들어 여기저기 안좋다며  이야기 할 때는 , 그렇다 아버지 이빨이 부실해져  뭘 먹으려 해도 먹지를 못한다.  흔히 말하는 임플란트는 머리 속에서만 맴돌 뿐이다.    

또 오랬만에 형제가 다 모였다.  멀리 인천 동생까지 왔다.  모인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준비했던 음식과 술을  나누었다.  막내 매제 성서방이 사회가 되어  즉석 공연이 이어졌다. 큰아들이 밖에서 잘논다는 이야기가 있어 부추겨 춤을 선보이게 했다. 여기에 상금도 걸었더니 ,, 허  대박이었다.

아버지가 손자들의 춤판에 가세했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 춤사위를 아이들이 따라하지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그렇게 재미난 밤을 보내고 다들 집으로 가기 전  그 분위기를 연장하여 가족 나들이를 제안했는데 집사람이 당혹스러워 했다.  이유인즉 당신은 처가집은 왜 배려하지 않느냐 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장인 장모 두 분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사람은 오늘은 시댁 내일은 김해로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집사람은 같이 동참 할 수 없음을 밝히고, 그러다 보니 또 분위기 뜨악개지고 ... 여동생들은 집사람의 입장에 적극 동조했다.  결국 우리집 식구만 빠지고 인천, 주례, 연지동이 아침 일찍 경주로 가기로 하고 본가에서 나왔다.  솔직히 집사람에게는 미안했다.  그리고 고스란히 원망을 들어야 했다.  

아버지를 생각한다.  지난 오십년, 아버지의  존재는  그냥 아버지일 뿐이었던 것 같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한 가족의 가장에 이르기까지  ... 나는 아버지에게 어떤 아들이었을까.  요즘은 아버지가 가엾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나름 식솔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것 저것 안해 본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풀리지 않았다.  연이는 사업의 실패로부터 회복되지 못한 채   늙그막에도 공사판을 전전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아들은 괴롭다.  활동가  또는 운동가 로서의 삶이 가족 앞에 형편없이  무너진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기대는 늘 열려 있다. 비록 벌이는 시원찮지만 어쩼든 '한 칼 할 놈인데'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니 갑갑하신 듯 하다.

 

지난간 세월을 돌아 본다. 나의 20대 참 가난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이념 전쟁 ... 그렇게 멀어 졌다. 

 

언덕위에서

배고픈 오후를 피해

가난한 가슴 햇볕에 데우려

언덕위 풀가에 누워 하늘을 본다

욕망의 눈길은 구름처럼 흘러가는데

바람결 먼 벌치 사람들은 설마

요즘도 그런 사람 있을까 한다

 

2

언덕위 풀가에 누워 하늘을 본다

너무도 맑다

우러나는 가슴속 그리움이

푸른하늘처럼 티 없는데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다

그러한 내 가슴에 하늘색 살점이 하나, 둘

툭,툭 떨어지고

감아버린 눈속에는 좀전에 보았던

태양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1984)

 

산25번지

소주 한잔 걸친 밤

전등 대신 촛불로 밝히고

낮에 보았던 태양을 이야기 한다

너무 밝아 바로 볼 수 없음을 서러워

눈에 상한 풍경은 어둠밖 던져 버린다

버려진 아픔은 산 아래

도시로 굴러가고

그렇게 밤이면 쌓이는 빈민의 슬픔은

밤이면 살아 움직이는 영혼처럼

불가에 모여들어 하루살이 마냥 타다간다

그것이 행복하기에

창밖 바람이 인다

누웠던 마음 바람따라 흔들리고

들고선 연필의 그림자는 춤을 춘다

그러나 이내 지친다

담배를

꽁초도 없다

그러한 사실은 눈 뜬 내일로 이어지는 것

저린 가슴 촛농같은 눈물이 흐르고

일어선 두눈은 별을 헤아린다

내일도 해는 떠오르는 것

꺼지는 어둠따라 촛불이 아리어 온다(1984)

냉 전

저녁을 먹으며

아버지와 나는 KBS 9시 뉴스를 본다

‘심각한 학원 문제 이대로 좋은가’

아나운스의 짧은 코멘트에 이어

오늘 시위전모가 보도되고

아버지와 나는 덩달아 흥분한다

화면은 투석과 최루탄으로 범벅된

데모현장으로 바뀌고

아버지와 나는 텔레비젼 속 노려보고 섰다

이놈 새끼 너도 빨갱이지

아버지, 제발

(......)

진실은 끝내 조작과 편협으로 매도되고

나는 눈물을 삼키며 퇴장한다

다시 밥상을 사이 아버지와 아들

더 이상 말이 없다(1985)

 

실제로 당시 한국반공연맹(현 자유총연맹)에서 완장을 차고 활동하던 아버지는 아들을 빨갱이로 취급했다. 그런 세월이었다.

 

최후통첩

집을 나가든지

노선을 바꾸든지 결정하라고 한다

이제는 못참겠다고

더는 못봐주겠다며

최후통첩이다

그런데 나는 바꿀 노선이 없다

어머니 울었다

팔을 잡고 흔들며

이놈아 이놈아 하시며

어머니가 우는데

내가 바꿀 노선이란 (1988)

근황 88-5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와서도

몇 달을 놀고 있는 내게

아버지 저녘 드시다 말고

급기야 울화통이 터졌다

이놈의 새끼야 대관절 넌 무엇 하는 놈이냐고

나는 나대로의 입장을 말해보지만

결코 나의 사정 따위는 통하지 않는 오늘

쓸만한 일자리는 초라한 이력서의 환상

신문 모집광고 보기 좋게 쏟아져도 외판 뿐

차라리 군대 말뚝이나 박을 걸

아, 내일은 어버이 날

카네이션이며 곱게 포장된 선물이

환장한 아버지 가슴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식어버린 저녁상 앞에

아버지는 돌아서 앉아 담배만 피우고

나는 고개 숙인채 말이 없다

                  * 류명선 - 일자리를 찾아서 중

 

그 시절 고향으로 가서  병든 조부를 수발 하기도 했고, 지역의 잡지사도 전전했다.  일당 6천원의 공장 노동자 생할도 했다. 그러다 1988년 현 환경운동연합의 모태 조직인 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를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얼추 30년 가까운 시간이다.  어찌보면 지금의 아내를 만나 두 아들을 키우며 산다는 게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늘 집사람에게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늘 마음 뿐이다. 

 

오해, 운동가

그들은 사람도 아니다

언제나 가난해야 하고

그게 당연한듯

그들은 로맨스도 연애도 못하고

그러면 안되는 것처럼

그게 당연한듯

목사보다, 스님보다

더 청렴해야 하는 것처럼

그게 당연한듯

에이 씨바

그런게 아닌데

그들은 사람도 아니다(2007)

 

이명박 정권이 들어 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부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고 나는 물러 났다. 운동가로서는 최고의 전성기에 나는 냉려야 할 곳이 아닌 간이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떠나가는 기차를 보면서 세월을 곱씹어야 했다.  그때 아버지는 아무 말 안했다.  물론 내 스스로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신문을 통해 대강의 상황은 읽은 듯 했다.  암담했다. 다행이 지인들의 도움으로 어려운 시절을 비켜 갈 수있었다. 

 

슬픈 설거지

실직이 가시화되고 침묵의 오전, 아즘을 먹으며

마누라 입을 열었다. 어떻게 살거냐고

대책을 세우는 중이지만

막막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건네지고

마누라는 억하심정 설거지를 한다

딱고 딱아도 윤나지 않던 생활

얼마를 더 딱아야 빛이 날까

달그락 달그락 빈그릇 부딪히는 소리

정오의 해가 위안처럼 낡은 아파트 거실을 밝힌다.(2009)

 

2009년 여름 후배들의 권유로 사)걷고싶은 부산을 만들고 갈맷길을 비롯한 길 걷기에  환경운동과 연계한 활동에 들었다.  그러나 지난 2012년 그도 인연이 아니었는지 떠나와야 했다.   몇 달간의 고전이 있었고 큰 아들이 딴에 가정 형편을 고려하여 학원다니기를  포기했다. 그 이야기가 어찌어찌 하여 아버지도 알게 되었고 때마침 지금의 그린트러스트와 공식적 인연을 맺기 위해 워크숍을 가는 날 공과금을 납부하러 왔던 아버지와 맞닥뜨렸다.  아버지 눈물 범벅으로 아들의 처지를 슬퍼했다.  당신이 해 줄것이 없음에 ...  그런 시간도 지나갔다.

 

 

승두말에서

다 저녁 그 바다에 서고 싶었다.

노을은 서편으로 비켜섰고

어둑살 내린 하늘가 개밥바라기 홀로 떳다.

언제나처럼

민물가마우지 자리다툼으로 소란한 오륙도 등대섬

벼랑끝 일박이 위태롭다

사는 게 뭐냐

뒤척임의 바다 끝

집어등 밝힌 불면의 수평선에 걸린 물음표

승두말 흘러내린 바위 비탈

모질게 뿌리내린 억새나 해국, 갯고들빼기처럼

오로지 살아남아 씨앗 품을 것인가

바람은

등대섬, 송곳섬, 솔섬, 방패섬 차례차례 건너와

돌아가라 등을 떠민다. (2012)

다시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 아버지 당신,

어버이날을 앞두고 작심했다. 주말 아내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분위기를 반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거 다 뒤로 미루고 처가집을 다녀오기로 .. 케익과 봉투를 마련하여  기차를 탔다.   차창으로 어둠이 내리는 낙동강을 보며 또 다른 아버지르 생각했다.  참 무심했다.  이 또한 변명으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내가 여유롭지 못해서다. 

대저 아버지란 저 어둠속의 불빛 같은 존재이어야 한다.  장인 장모는 예고 없는 사위의 방문이  뜬금없기도 했지만 반겨 주셨다.  반성할 일이다. 돈이 다는 아니지 않는가.  귀가길 어둠에 묻힌 김해들녁 불빛이 편안했다.

첨부파일 吾亦紅.mp3

 

성냥불을 켜려니 산바람이 불어

향불 피우기가 억시기 힘드네요.

 

가볍게 흔들리는 오이풀이

문득 당신의 한숨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늦여름휴가에도 못찾아뵈었습니다.

저의 변변찬음에 실망이 컸지요?

 

당신에게,, 당신에게 속죄하고싶었는데,,

일을 핑계로 찾아뵙지못한것을,,

 

당신에게,, 당신에게 속죄하고 싶어서,,,

이제사 가을의 산기슭,, 당신이 계신곳에 홀로왔습니다.

당신에게 사죄하고 싶어서요.

 

 

 

조그만 마을에 시집와 살면서

세상에 오로지 그동네밖에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로 살아오셨습니다.

 

전,, 그런 당신이 일면 부럽기도합니다.

 

지금은 사촌형이 살고있는 집에

그 옛날처럼 불이 환하게 켜져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가족을 멀리보내고

올곧게도 쓸쓸함을 혼자 견뎌오셨습니다.

 

당신의,, 당신의 미처 보이지않았던 상처가

몸서리치게 느껴집니다. 이제야 철들었나봅니다.

머저리같은 놈이라고 꾸짖어 주십시요.

 

 

 

부모 염려하고 생각하기보다는,,

나중에 후회없도록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거라. 라시던,,,

당신의 당신의 유언,,,

 

지켜보고자 노력조차 제대로 해본적이없지만

 

당신에게,, 당신에게 한가지 자랑삼아 내세우자면,,,

저 다음달에 이혼합니다.

처음으로 저의 의지대로 살아보려구요.

 

당신에게,,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이기 시작해도

저는,,, 죽을때까지 당신의 철부지 아들녀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