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음 시월 열 하루, 고향 경남 의령 유곡면 신촌을 찾았다. 벌초를 대행하면서 올해는 집안 행사로서는 첫 방문이다.
쌀쌀한 날씨 속 고향 신촌마을은 반가움보다 왠지 낮설었다.
가족묘원은 장군당 가는 길에 있다. 막실재로 넘어가는 골짝에는 큰골, 작은 골, 귀신 베짜는 골 등 많은 사연이 묻혀 있다.
다소 황량감 마저 있었는데, 소국과 쑥부쟁이가 반긴다.
옛날 유곡면은 정실(정곡,定谷), 미요(未要), 능인(能仁)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신촌마을은 능인(니인)에 속했던 지역이다. 분계와 양지(신상곡), 상촌(구상곡), 오목(작은 외에목으로 구오목), 평촌(신오목), 장군당(신촌 남서쪽 골안), 매미껄(신촌)등이 포함되었다. 정곡과 유곡의 경계지점인 막실재를 넘어 첫 동네가 신촌이고 이 마을 앞에서 유곡 소재지와 궁류로 이어지는 세갈래 길이다. 이 동네에서 서쪽으로 십리가 더 되는 깊은 골안이 능인촌(니인촌)이다. 매미껄이란 말은 가장밑(아래쪽)에 있는 동네란 뜻이다.
신촌 입구
마을입구에서 삼거리 방향
우체국장집 앞에서
사진출처: 다음 지도 2009년9월 판
마을을 중심으로 동네 뒤는 뒷동산인데 앞산은 겅구지니, 겅구지먼데(건구지산)이라 부른다. 유년시절 몇 번 올랐던 기억이 있다. 나무하러 가기도 했고, 취나물을 뜯으러 갈 때도, 그리고 마을에서 상이 났을 때 등 하마 40년 전이다. 한편 마을 동남쪽 골짜기를 장군댕이, 장군당으로 부르고 있는데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광복직후에도 10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장군당에는 영험이 있는 당산나무와 조산이 있었고 그 밑에 수구대장군(水口大將軍) 건륭46년(乾隆 46年) 안국서(安國瑞)라 새겨진 큰돌비가 서 있었다.
풍수적으로 수구장문(水口藏門) 인데, 골짜기 물이 멀리 돌아서 흘러가 저 밑 하류가 보이지 않게된 땅의 형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흔히 수구막이 또는 수구대장군이라는 글을 장승에 써서 세우거나 돌에 새겨 세우는 풍습에 결국 피재(避災)와 발복(發福)의 염원과 함께 허한지기를 비보하는 민속신앙의 한가지다. 이곳 장군당 뒷재를 넘으면 구오목마을이고 거기서 다시 큰외에목재를 넘으면 용소마을로 이어지게 되는데 지금은 동네도 없어지고 잿길도 없어진 채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신촌동네옆에 섬안들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는 한여름 장마가 지면 낮은 지대에 물이 들어서 꼭 섬처럼 되는 지역이라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마을 뒤편 산밑에 살갈덤이란 큰바위 밑에 약물새미가 있는데 이 물은 신기한 약수로 소문이 나 있으며 석달만 마시고 몸을 씻으면 오래된 마목도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살강덤은 바위의 모양이 부엌에 있는 살강(시렁을 말함)처럼 생겼다해서 그렇게 부르며 이 바위밑에서 물이 나온다.
골안으로 가면 길옆 산언덕에 애기를 엎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할망구덤, 물동이를 이고 있는 여인 같은 각시덤, 그옆에 좀 우람해 보이는 것이 신랑덤이 있다.
이 덤의 옆쪽 산버덩은 애장터였다.
마을 앞산자락에 달성 서(徐)씨문중의 경암재와 윤(尹)씨문중의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신창 표(表)씨라고 하며 지금은 달성 서(徐)씨가 가장 많고 박(朴)·윤(尹)·주(朱)·이(李)씨가 서너집이며 임(林)·전(田)·강(姜)씨가 두어집씩 있다. 하지만 그 집을 지키던 이들이 하나 둘 이승을 떠나고 있다.
마을 가운데 담장을 경계로 이웃해 살던 조부 합천이씨 네 형제분만 하더라도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이제 칠십대 아버지 사촌들이 제일 어른이 되었다.
묘역 입구에 조부의 산소가 있다. 혼백은 지난 2009년 조성된 묘역으로 모시긴 했지만, 아버지는 살강 덤 뒷산에 있는 조모의 산소 등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그곳에 계시는 할머니들 역시 이곳 집안 묘역으로 혼백을 모셔왔다. 현재 집안 묘역에는 합천이씨 전서공파 로서 이곳 신촌마을에 터잡고 그 자손들 모두 37세손까지 번성했다. 물론 전서공파 내에서도 여러 파가 있다. 이곳 신촌 입향조는 내게는 고조부 쯤 되려나... 족보를 펼쳐야 확인될 일이나, 아무튼 그 자손들 날을 잡아 객지나간 이들 한데 불러 모아 가을이라 문안인사 드리는 날이다. 오곡백과 거두어 감사드리고 안녕을 고하기 위함이지만 산업화를 거치고 도시화 된 후손들의 삶은 고달프다. 가장으로서의 권위는 이미 오래 전에 빛 바랬다. 모처럼 찾는 고향이지만 당대의 고향일 뿐, 자식들은 별로 관심있어 하지 않는다.
합천이씨는 고려 태조에게 불복하여 가수현장(嘉樹縣長)·합천호장(陜川戶長)으로 강등된 강양군(江陽君) 이개(李開)를 시조로 한다. 합천이씨는 경주이씨 알평의 후손으로 강양군 때 분적하였고, 그 세계는 11파로 대별되는데, 내가 속한 전서공파가 가장 번성하였고, 그외 목사공파, 참지공파, 전객령공파 등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씨는 김씨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성씨집단이다. 과거에는 546본까지 기록되었으나 지금은 약 100여 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연원을 계통별로 나누면 신라의 6부족 중 하나인 알천 양산촌의 촌장인 알평이 신라 유리왕으로부터 이씨를 사성받아 경주 이씨의 계통을 열어왔고, 나당연합군 때 신라로 귀화한 무(茂:연안이씨의시조) 계통, 역시 중국 계인 고성이씨, 김수로왕의 둘째 아들 후예인 허겸으로부터 비롯된 인천 이씨 계통, 원나라 출신으로 조선개국에 공이 큰 이지란의 후예로서의 청해 이씨 계통, 조선 왕조를 연 전주이씨 게통 등이 있다. 그 외 나머지는 대부분 경주이씨로 부터 분적하였고 합천이씨 역시 앞서 언급했듯 경주이씨에서 분적하였다.
올해는 참석율이 시원찮다. 진주, 서울의 참석이 적다. 부산에서도 몇이 보이지 않는다. 음식을 차려 놓고 누군가 오고 있다는 소식에 묘역 아래 길가로 시선들이 향하고 있다.
올해 음식장만을 하셨던 어머니의 수고가 빛났다.
삼촌 내외는 막간을 이용해 전송된, 손자 재롱에 빠졌다.
큰 아들 용이 육촌 아제뻘인 아우 강식과 담소하고 있다. 아들은 정말 따라오기 싫어 했고, 나중에는 한 소리 들어야 했다.
본격적인 조상님 모심의 시간, 유세차 임진 시월...합천이씨 전서 35대손...강양군...현고조학생부군..현증조학생부군...
술잔을 서너번 갈았든가
음복주를 나누어 마시고
산신제를 올리기 위해, 묘역 옆에 약간의 음식과 술을 준비했다.
문득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옛날 어느 여름이었든가. 조부를 따라 이곳에 왔다가 여름 더위를 피해 더운 몸 적시던 작은 물웅덩이 였다.
아버지 산신께 절올리며 무슨 생각하셨을까
아지메들은 아즘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어진 회의, 현재까지의 수입지출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지난 십여년 총무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왔던 진권아제, 보고를 마치고 새로운 집행부 구성을 제한한다
묘사날짜도 고정화 하여 참석율을 제고하도록 하자는 제안에서 부터, 년간 회비 규모와 납부방법, 음식장만 등이 거론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딱부러지게 결정된 것은 년간 납부 회비액과 묘사 날짜 뿐이었다. 아버지 사촌 12명에 그 자식들 8명(결혼한) 그리고 재종 정기할배네 3명을 더하면 모두 23명이 참석해야 하나, 이날 참석자는 이유권, 이강식, 이유도, 이성근, 이삼웅, 이성민, 이창도, 이용도, 이진권, 이창덕 그리고 11명이었다. 11명은 미혼과 묘사에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여성들이다. 참 구태의연하다, 묘사가 FUN하기 위해서는 집안 구성원 모두의 행사로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생활환경과 성장환경이 35대와 36대가 다르고 36대와 37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성이란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글쎄? 그들에게 강요된 '조상 섬김과 기림에 대한 정성'이기 보다 자발적 참여를 위한 컨텐츠의 발굴이 필요하다.
사실 나 역시 서울 삼웅 아제의 큰 아들 성문이든지 창도 아제 큰아들과는 이십년 전에 얼굴을 본 이후로 만난 적이없다. 자연 낯설어 질 수 밖에 없다. 밖에서 보면 모르는 사람이 되는 현실에서 무엇이 우선되야 할 것인가 자문 해 본다. 그렇다고 36대나 37대가 지안 결혼식인 상이 났을 때 부지른히 참석하며, 그 관계들을 확인할 수 있는 연배들도 아니고... 아무튼 고민이 필요하다.
기념촬영 후 내년을 기약하며 귀가길에 올랐다. 고향와서 귀가란 표현이 참 어울리지 않는다.
어머니 옛 집터를 한번 보고 싶다 하였으나, 아버지의 거부로 발길을 돌린다, 잘은 몰라도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듯하다, 아버지 어머니의 집은 곧 내가 태어난 집이기도 하다. 그 집은 지금 허물어지고 없다. 그 부재를 감당할 만큼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신촌 주막 삼거리에서 잠시 머문다. 방앗간이 있었고 유년시절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송산으로 가자면 방앗간에서 들려오는 탈탈거리던 소리가 아직도 귀가에 선하다.
집앞을 흐르던 시내가 상곡천이다. 이 시내물은 유곡천과 합류한 다음 낙동강과 다시 합류한다.
마두마을의 적벽이 보인다. 큰 도랑을 사이에 두고 양지편에 마두양지, 음달쪽에 마두음지마을이 있어서 두 뜸이 마주보고 있다. 옛 기록에는 괴성(槐城 :홰나무재), 괴산(槐山:홰나무산 )이고 일반적인 호칭은「기암재(개암재)」다. 아마 일제강점기 지명정비 때 마두(말대가리)로 바뀐 것으로 보이며 아직도 상노인들은「기암재」로 부르고 있다. 일설에는 이 동네 주위 산언덕이나 잿길에 깨끔(개암)나무가 많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기암나무(小枾 : 고욤나무)가 많아서라는 등 지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다. 다만 마두란 소지명은 근거가 확실하다. 동쪽을 감싸듯 흘러내린 산줄기가 말대가리 산이고 끄트머리가 묘하게도 말머리 모양이다.
마을 주위에는 말머리덤, 말머리쏘, 말대가리 꼭데이(꼭대기), 마등더러(등어리), 말질매등(길마등), 말꼬랭이(꼬리)등 말에 관한 땅이름이 많다. 옛날에는 조선종이, 뜨는 일도 많이 했던 종이곳이면서 삼농사도 많이 했다고 한다. 말꼬리 산고개를 넘으면 돌실이라서「돌실재」, 남동쪽 산길을 넘으면 오방촌이라고 재이름이「오뱅이재」다. 말머리쏘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고여 있고 사철 어른 한길 정도 깊이다. 동네앞 「서재골」은 옛날 여처사(여진선공)가 서당을 열고 인근 어린이들을 모아 글공부시키던 수회재(水廻齋)가 있었던 주변이다.
신안 주(朱)씨, 파평 윤(尹)씨가 먼저 자리 잡았고 뒤이어서 여러 성바지가 들어왔다고 한다. 박씨의 괴양재(槐陽齋), 성씨의 흥효당(興孝堂), 이씨의 경수재(敬修齋), 남씨의 우애정(友愛亭) 등 유서 깊은 재실과 정자도 여러 채다. 동구밖 산코숭이에는 「효자여양진병화공포행비」가 있다. 중.고등학교시절 송산2구 살던 또래들과 어울려 인근 옥동마을 등을 돌며 놀기도 했다.
섬안들 위로 송산과 궁류가 보이고 우측에 중장이 있다. 여름날 마두가는 길에서 이들을 바라보면 숨이 막힐 듯 아름답다. 특히나 바람이 불때면 나락을 건드리며 물결처럼 번져오던 바람의 몸짓이 보면, 절로 평화롭다.
암튼 송산이라면 신구송산마을을 통털어서 부르는 지명인데, 신송산을 다시 1.2.3 세동리로 나누어 었다. 신송산 즉 새마을 송산은 창땀, 중땀(중장)과 새터땀(새터)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 문헌상 미요리(美要里)에 북창(北倉:창땀(창고 있는 뜸) )이 있었던 곳이다. 북창은 관설곡물 저장과 대여기관으로 영세농민을 위한 진휼(賑恤) 정책으로 설립된 것인데 의령에는 신반(지금의 부림)의 임창(任倉), 박진에 강창(江倉)등 세 곳이었다.
동네 뒤로는 길게 뻗어 있는 산줄기가 있는데 그 생김새가 들논에 쌓아놓은 노적가리(露積, 즉 논바닥이나 논두룸(논두렁)에 쌓아둔 곡식더미를 말함)처럼 보여서 노적봉이라고 부른다. 또한 달리보면 큰누에가 기어가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창땀 바로 뒷산은 수리봉인데 덤위에 수리가 살아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간혹 겨울밤 수리부엉이 우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동네 뒤로 산고개 잿길이 있는데 북창재라 한다. 옻골(옥동)과 신반쪽 나들이 길이었는데 숲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옛시절에는 큰 냇물이 산밑 쪽으로 흘렀고 지금동네 뒤에 쏘(沼)가 있어으므로 쏘아래땀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중땀의 경우 중장(中檣)으로 통하는데, 큰이모댁과 종고모집이 있어 어릴 때부터 방학이면 이곳과 신촌 고향집을 오가며 살다시피 해다. 그래서 친구들도 많았다.
타성바지가 없는 박씨촌이라 흔히 송산박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장이란 지명은 풍수에 기초하고 있다. 예컨데 행주혈(行舟穴)이라 돛대가 있어야 된다는 믿음 때문에 정자나무를 심고 지명도 짐대장(檣)을 붙여서 중장(中檣)이라 했다. 하지만 넓은의미에서 본다면 도랑(유곡천) 건너 신송산마을 전체를 아우러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 보며 옛생각에 젖어 보기도 하였다.
생각보다 빨리 파한 묘사이기에 짬을 내어 호암 이병철의 생가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정곡면 소재지인 중교리(中橋里)에 속한 마을에는 문곡(文谷, 글골, 구곡)과 두곡(斗谷, 두실, 막실)과 장내 (墻內, 담안)가 있다. 이중 두곡의 막실은 막실재가 있는데 유곡면과 정곡면의 경계 고개다. 막실재는 진양(晉陽) 우봉지맥(牛峰枝脈)의 가운데 지점으로 한우산( 寒雨山) 동쪽에서 분기한 산줄기를 말하며 이는 한우산(766m)-응봉산(597m)-우봉산(372.3m)-장군당재(280m)-막실재(200m)-숫골산(285m)-긴등산(231,3m)-옥녀봉(341,9m)-(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기강나루까지의 33.7km를 말한다.
장내마을로 향한다. 원래 장내(墻內 또는 牆內)라는 지명은 「담안」이다. 기록은 없지만 그저 전하는 말로는 정경 벼슬을 했던 은진 송씨 부자 집이 이곳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8촌까지 수십가구가 한 곳에 모여 살았으며 주위에는 돌담부랑(돌담)을 쌓고 있어서 담부랑안 담안이란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송씨 부자가 부치던 논밭이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들 이름도 ‘정경들’이라고 부른다.
마을 안에는 삼성그룹의 총수였던 고 이병철 회장의 생가와 별장이 있고 경주 이씨 문중의 강원재(江沅齋), 도계재(陶溪齋)를 비롯하여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란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부모님에 대한 효행이 지극한 큰 선비로 널리 알려진 화헌(和軒) 이종욱(李宗郁) 공을 추모키 위한 중화당(中和堂)이 서산 밑에 있다.
장내마을로 들어서자 긴 담장이 매력적이다. 들리는 말로는호암이 결혼 후 신접살림을 한 곳인데 이후 일족이 휴가 때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 한다. 사실 고향을 오가며 차창 넘어 수없이 건너다 본 호암 이병철의 생가지만 직접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익히 알려져 있듯 호임 이병철은 삼성이란 기업을 일으켜 세워 세게적 기업으로 만든이다. 지척에 한국 최대의 기업인 이병철이란 사람이 살았던 생가가 있었지만 그다지 마음두지 않고 있었던 것은 일종의 편견이었던 것 같다. 삼성은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삼성이란 재벌기업의 성장의 이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존재했다.
아무튼 뭐 특별할 것이 있겠냐는 생각으로 골목을 지나 생가에 들어섰는데 안채 뒷쪽 동산을 보는 순간 참 아늑함을 느꼈다. 작은 대숲과 상수리 나무 줄지어 선 뒷동산은 한 사내의 생애를 지배했을 영원한 풍경이다.
호암은 1910년 유학을 숭상하던 집안에서 출생, 1031년 일본화세다대학 유학, 1938년 대구에 쌀 장사인 삼성회사를 설립, 1953년 제일제당 설립, 1954년 제일모집 설립, 1958년 안국화재 인수, 1961년 전경련 초대회장, 1963 동방생명과 신세계 백화점 인수, 1965년 삼성문화재단 설립 및 중앙일보사 설립, 1969년 삼성전자 설립, 1975년 용인자연노원개장, 1982 삼성라이온스 창단하는 한편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여 오늘의 세계적 삼성전자가 있게끔 터를 딱았다.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才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의 경영철학을 견지했다고 한다.
...치밀한 재정관리와 인사관리로 오늘날 삼성그룹의 놀라운 조직력을 다진 기업인이며, 미래지향적인 사업확장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1960년대말 20세기 후반의 첨단산업으로 부각되었던 전자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이 분야에 이미 진출해 있던 럭키금성그룹과 불화를 일으킬 만큼 기업의 발전을 위해 비정한 측면도 있었다. 1960년대 중반 한국비료공장 밀수사건과 관련하여 한때 삼성그룹 내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은퇴한 적이 있었으나 곧 복귀했다. 이때 그룹을 이끌어가던 맏아들 맹희와 경영이념상의 차이를 보였는데 끝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셋째 아들 건희에게 그룹 경영권을 물려주었다. 한국의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과 세계적으로 우수한 경영자에게 수여되는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우리가 잘 사는 길〉과 자서전 〈호암자전 湖巖自傳〉이 있다.(다음 백과전에서) 1987년 졸했다.
풍수에 따르면 곡식을 쌓아 놓은 노적가리 형상을 하고 있어 주변 산의 기가 이곳에 혈(穴)이 되어 모인다고 했다. 이밖에도 남강의 기운과 우물로 상징화 된 용이 등장한다. 호암이 한국의 대재벌이 되었기에 이런 해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 자산이 축적되어 있었고, 배움이 있었고, 정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집은 호암의 천석지기 조부가 1851년 지은 것으로 증개축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건축양식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일자배치 형식이다. 남서향의 사랑채와 안채가 있고 곳간과 우물 두 개가 있는 소담한 형태의 배치다. 어쨌든 이 집터는 풍수지리에 몸 담은 이들이 말하기를 명당 중에 명당이라 칭송하는 곳이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전착후광(前窄後廣 ) 전저후고(前低後高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된 곳인데 다 갖춘 곳이란다. 일반적으로 좋은 집터는 바람이 없고 온화하고 안정된 기운이 서린 곳이라 했다. 생각해 본다. 내 생가터는 ? 쓸어진 것은 다시 일어서기 위함이다.
출처: 매일경제
호암의 생가는 작다. 광에는 민속박물관에서 봄직한 농기구가 전시되어 있다. 정갈했다. 부지른함의 흔적이다. 호암은 어떤 부자인가? 옛부터 작은 부자는 개인적 노력의 결과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린다고했든가. 삼성의 창업주로서 한국 초유의 세계적 기업을 만들었지만 그의 가계가 사회적 책무를 얼마나 했는지는 의문이다.
장독대
안채 옆 면 5칸 짜리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에 내걸린 주련은 다음과 같다. 유학자 집안 답다
得句會應緣竹鶴 시 구절을 얻으려면 대나무와 학을 만나는 인연이 있어야 하고
著書不復窺園葵 저술을 하느라고 정원의 해바라기 다시 볼 여가가 없다
搜羅金石卑歐趙 금석문을 찾으니 歐陽詢과 趙孟頫의 글씨를 수준 낮게 보고
看領風騷辟杜韓 詩經과 離騷의 글을 보면서 杜甫와 韓愈의 글을 피한다네.
秋水爲神玉爲骨 맑은 가을물을 정신으로 옥을 뼈로 삼으며
詞源如海筆如椽 문장은 바다처럼 넓고 글씨는 석까래처럼 웅장하다.
많은 사람들이 복바위라부르는 노적봉 바위에서 부자의 기운을 받아 간다고 한다. 또 그것을 받으려고 먼데서 온다고도 했다.
함안 모지역 초등학교동창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였다. 식구들도 기념사진을 박았다.
호암의 이야기가 언급되거나 수록된 책들, 음택풍수의 소산이다. 집터와 무덤터를 통해 당대 발복이나 후손발복을 도모하기 위한 ....
돌아서 나오니 웃기는 장면이 있어 담아 본다. '기받고 부자되는 저금통' 이란다.
의령에는 부림면 입산리에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와 묘가 있다. 호암이 1910년생이고, 백산은 1885년생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안기종(安起宗)의 후손인 백산은 만석꾼으로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사용하고 오로지 나라를 되찾는데 일생을 헌신했던 분이다. "임정 자금의 6할은 백산이 댔다"라고 김구 선생이 말했을 만큼 백산선생의 공로는 크다. 백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회사인 백산상회를 창립, 민족자본을 육성해 그것을 고스란히 광복자금으로 돌렸다. 1943년 고문 휴유증으로 순국했다.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참 비교된다. 허나 사람들의 걸음은 정곡 장내로 향한다.
사진출처: 다음카페-하늘아래 첫동네
부림면 설뫼마을에 있는 백산의 생가다. 그런데 이 집터에 대한 풍수적 해석은 인색하다. 아니 거의 전하지 읺는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급하게 내려온 내룡맥이 펼쳐놓은 전형적인 양택혈장"의 텃 라는 것인데, 백산 안희제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 2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조와가 및 초가로 되어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구조이고 집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구조이다.
These Eyes - Guess W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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