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평화 /안태운
겨울
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
먼 등 /김성백
손잡이
첼리스트/김보나
동쪽과 서쪽 /이성미
접힌 우산/정현우
이후,/이미산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 /이기와
바퀴의 근성
유토피아' 정마담의 하루 6
비.풍.초 1
비.풍.초 2
번안곡
육체의 비밀/ 이민하
소년소녀
허밍 /전영관
하, 저 꽃잎은
시니컬
3월 / 박소란
그럼 나는 개를 풀거야 /황주은
쇄빙/이충기
폭염/이원숙
화이트아웃/배윤주
불량목/송승언
숨겨둔 기쁨 / 임승유
화양연화花樣年華/ 김륭
겹/김경미
엄마전화기
버킷 리스트,/손준호
입하立夏
안부
서머타임./전희진
엄마 진은영
아카이브-극지에서/송희지
간밤에
그 때가 좋았다/ 나태주
갈매나무에 뒤엉킨 / 박성현
적산가옥(敵産家屋),/이다희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필적감정 / 이동욱
식적息笛
간격/강영은
동물성
액화질소탱크/정우신
물끄러미/ 정상하
알 수 없는 음악가
백야의 시간/한영채
스피커/서영처
폐광촌(廢鑛村) /기형도
내 인생의 中世
닫히지 않는 입술처럼 /송종규
만추 조정인
https://www.youtube.com/watch?v=nqSnZv3JV0M
Tom waits - Closing time (1973)
<Martha>
Operator, number please
교환수님, 번호 부탁해요.
많은 시간이 지났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을 때의
내 목소리를 여전히 기억할까?
여보세요, 안녕 마타니?
나 오래 묵은 Tom Frost야
장거리 전화로 걸고 있어
요금은 걱정말구
40년도 더 지났잖니
얘 Martha 기억을 되돌려보렴
이리 나와 커피 마시며
옛날 이야기를 해보자
장미와 시, 줄글과 Martha만이 있는 나날들이었지
내가 가진거라곤 당신뿐, 당신이 가진건 나뿐이었지
내일은 없었고
우리는 평소엔 슬픔을 고이 접어
비오는 나날들을 위해 보관해두곤 했지
난 요즘 부쩍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느껴
너도 마찬가지겠지
남편은 잘 지내?
아이들은?
나도 결혼했다는 거 알고 있지?
당신이 편히 쉴만한 누군갈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그때 우린 너무 젊고 바보였으니까
하지란 지금의 우린 충분히 무르익었지
그리고 나는 항상 충동적이었지
여전히 그런 것도 같아
내가 남자라는 거
당시엔 그거 하나만 신경썼던거 같아
아마 그 날 함께 있던 우리는
함께 있지 못할 운명이었나봐
그리고 Martha, Martha...
난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도 느껴지니?
그리고 당신 곁에서 주체못하며 있던
그 때 고요한 석양 질 무렵이 떠올라
평화와 평화 /안태운
조도와 습도가 일정한 식물원을 당신과 걷는다 하나의 품종만이 심어진 온실 하우스는 고요하고 징그럽다
당신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를 앞서 걷는다 나는 모르고 당신은아는 말들 속에서 등을 보이며 걷는 당신의 뒷모습은 아름답고 엉망진창
식물원 밖엔 형체를 알 수 없는 석상과 이름 모를 식물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석상 앞에 선다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검다 순식간에 해가 지고사위가 어두워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당신은 자꾸 앞에 무엇인가가 있다고말한다 나는 뒤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은 저게 무엇이냐고 내게묻는다 밤눈이 어두운 당신을 위해 플래시를 켜고 걷는다 한발짝 나아가면
한 발짝 밝다
무엇이 보여요? 그저 밝고 텅 비어 있는데 나는 무엇이라도 말해야만 할 것같은 충동을 느낀다 뒤를 돌아보니 그림자가 있다 무섭도록 닮은 두 개의 그림자가 나란하게
나는 당신을 위해 한 발짝는 앞의 무엇을 향해 걷는다보면서 그러다 문득 내가 놓친
앞서 걷는다 두렵군요? 당신이 걸음을 멈춘다 나빛이 걸음을 만들면서 걸음이 길을 만드는 것을뒤가 신경 쓰이고
뒤를 돌아본다 당신에게 플래시 빛이 향한다 당신은 무릎을 꿇고 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토르소 빛이 너무 강렬해서 아주 텅 비어 있어서 당신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당신 앞에 내가 서 있다. 비로소 평화롭다
내가 안녕이라 말하면 당신은 안녕이라 말한다
겨울
그 겨울의 끝에서 피고 지는 것. 지고 피는 것. 그해 겨울은 눈이 잘 내리지 않았으므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눈은 점점 더 내리지 않기로 했나, 정말 그런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으므로, 사실 눈인가, 모든 게 눈인가, 하고 나는 걷다가 멈춰 섰다. 그 겨울에는 모든 게 눈이야. 모든 게 눈이다. 아 눈이 내린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 입을 벌리면서 아 눈이 내린다고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건너편에서 지나가는 이들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들고 있구나. 눈이 내리면. 그 사람을 모른다는 사실도 이후에나 알아차리는구나.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지. 하지만 올해에는 눈이 좀처럼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산으로 가야 할 것. 설피를 신고 올라가야 할 것. 높은 곳에는 눈이 쌓여 있을 테니까. 그곳이 과거라도 혹은 미래라도 가봐야 하지. 고지대로 진입해야 하지. 그곳에는 마을이 있고 마을에는 눈이 계속 내리고 쌓이는 눈으로 고립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한테 들을 수 있는 전언들이 있다. 멀리멀리 갈 수 있어요. 눈이 내리면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다는 말은 어디에서든 들을 수 있었는데, 그러니까 눈이 내리면 그때마다 정말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지니까, 멀리멀리 갈 수 있다고. 그 겨울의 끝에서 피고 지는 것. 지고 피는 것. 나는 설산에 있었지. 겨울의 방에 모여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문 밖에서 쏟아져 내리는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방은 눈으로 뒤덮여 있는데,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있었지. 그 겨울에는 많이 잡혔어요, 많이 잡혔습니다. 저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이 잡혔어요. 옆 사람이 말했고 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무엇이? 누가? 그게 나인지 너인지 모르니까. 잡힌 게 무엇인지. 단지 많이 잡혔다고만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는 이 밤만 지나면 설산에서 내려와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다시 들리는 대화 소리. 많이 낳았어요, 그해에는 이상하게도 많이 낳았습니다. 하지만 무엇을요? 무엇이 무엇을 무엇에게요. 어떻게. 그게 이상했지. 되물어도 단지 그 말만, 잡혔어요, 낳았어요, 하는 술어만 되풀이할 뿐이었으므로 나는 이 밤을 못 참고 한시라도 빨리 설산을 떠나 겨울 바다로 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겨울 바다. 겨울 바다에 내리는 눈. 그 눈을 바라보고 싶었나. 겨울 바다로 가면 어쨌든 눈 내리는 풍경을 마주할 수도 있겠지. 겨울 바다의 눈. 아스라한, 내리며 사라지는 모습 자체로 굳어진 형태. 끊임없이 움직이는 눈의 겨울 바다가 언뜻 어느 순간에는 또렷한, 흩어지지 않는 어떤 형태처럼 느껴졌다. 내가 내 몸을 온전히 깨닫지도 돌보지도 못할 때의 기억을 찾는 더듬거림처럼 느껴졌고, 겨울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이상한 생물들도 떠올랐다. 이내 그 생물은 내가 아니지, 고개를 저으며 다른 겨울 장면들도 떠올렸지. 어느 겨울, 지하철을 타려 지하에 들어서고 개찰구로 향하며 상점을 지나칠 때 마네킹은 쿵, 떨어졌는데, 나는 그게 무엇인지는 뒤늦게 알아챘다. 단지 무언가 쿵. 부딪침. 울림. 아래로 쿵. 떨어진 무언가가 있었고 바닥으로 떨어져 엎드려 있는 그것은 사람의 형태였으므로, 정적. 모든 사람이 얼어 있었다. 순간 아무도 그것에 다가가려 엄두도 못 내고 단지 바라보기만 했다.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마네킹을 보며 다들 심장이 철렁했으니까. 쓰러진 건 사람이라고 순간 착각했으니까. 다들 그 분위기 속에서 멈춰 있었고, 나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곧 상점 직원이 나와 그것을 일으킨다. 그 모습을 보고 몇몇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기도 했지. 마네킹이었어. 그래, 마네킹. 그건 내가 아니지. 그건 너도 아니야. 나도 다시 갈 길을 간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내내 그 분위기가 가시질 않았지. 밖에서는 그 시간에 눈이 내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겨울이었으니까. 잠깐 눈이 내렸다가 그쳤을지도. 내가 멀리 가려고 지하에서 이동하고 있는 그사이에. 겨울의 끝에서 피고 지는 것. 지고 피는 것. 그해 겨울은 추웠나. 아 춥다, 아 춥다고 연신 소리 내며 발걸음을 재촉한 기억은 나는데, 정말 추웠나. 쌓이는 눈에 대해서는 어떤 상념도 품지 않았는데. 그해에는 눈이 내려도 쌓이지 않고 다 녹아버렸나. 녹아버려서, 나는 무언가에 닿지 않고도 녹아버리는구나, 닿지 않고도 공기 중으로 스미듯 흩어지듯 사라지는구나, 하는 기분도 들었는데. 나는 그 겨울 그 눈들에 닿고 싶었나. 하지만 이미 사라졌지. 닿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사라졌지만 닿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작별 인사. 작별 인사가 어울린다. 이 겨울에 어울리는 작별인사는 무엇일까. 나는 어디선가 들었던 그 말이 떠올랐다. 잘 가 다음에 또 만나,가 아니라, 줄 건 없으니 다 기억하고 있을게요,라는 그 말. 줄 건 없으니 다 기억하고 있을게요. 헤어지면서. 그 말은 어디서 들었을까. 어디서 지나쳤을까. 나는 다만 기억하고 있다. 기억을 잘 못하는데도.
그리고 어디선가 들릴 것 같은 목소리.
눈이 내리면 멀리서 다독여주는 목소리.
그 마음 내 아오.
그 마음 내 아오.
그러니까 어디선가 눈이 내리면.
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
여러 날들에 대해
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에 대해 떠올리면
뉘에게, 그럴수록 그 장면과 감정이 낯설어지고
그 하루
그 이틀
우연히 그게 설렘 그게 각오 그게 우연히 꺼림칙함 그게 상충 그게 스밈 우연히
뉘에게, 생활을 하다가 문득 이 환경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면
돌아오는 길에 블루베리와 양말과 순두부를 사기도 하고 그 형태와 색감을 새롭다는 듯 바라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화폐를 오랫동안 써왔군, 생각해
화폐라는 게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면서 오랫동안 이어져 매개체라니 금융이라니
나도 화폐처럼 주고받으며 어느 손에 순간 닿았나 혹은 닿지 않는 형태로 어떻게든 이어졌나 하는 마음도 들고
뉘에게, 어떤 날들을 떠올릴 수 있을까
되비친다고
배어든다고
그게 놀라움 우연히 그게 결절 그게 섧음 우연히 그게 충일 그게 숙연함 우연히
훗날 생각날지도
동물원이 일터인 사람들에 대해
여러 양가감정을 느끼면서도 그곳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감당하며 하는
맡아 기울이고 자연에 가깝게 궁리하고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고 또 남아 지내면서 다른 인간을 말리기도 하면서
야생동물은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는다고도 감각하면서
그 하루
그 이틀
뉘에게, 잘 지내는지
나는 육교에서 숍에서 제방에서 공원에서 우리가 만든 공간을 지나가면서는 새삼 인간의 생활권이군, 생각해
휴일이 되어 또 다른 곳으로 가면 그 공간에 꽃이 있고 풀이 있고 잎이 있고 산책하는 동물이 있다고
어떤 동물은 인간을 피하지 않는군요 그게 낯설 때가 있는데 그들 중 어떤 동물은 직업이 있고
직업이 있는 개는 여러 인간의 생애를 마주 보며 이윽고 또 다른 인간들도 거쳐가는군요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고
여러 날들 속에서
뉘에게, 잘 살아가고 있는지
그러니까 어느 권역을 헤매고 있을지 궁금해
어떤 감정과 장면으로 이루어져갈지
나는 여기 있어
흐르는 일부로서 성긴 그물을 던지자며 성긴 그물 속에서 포획되자며 여기
취주악과 봄바람에 대해 멀리 있는 사람이 되어 과거를 상기해보기도 하고
죽은 사람의 영상을 미래에 되감아 보기도 하면서
여기 있어
먹으면 그 동물이 된다는 인간의 발상에 순간 소스라치기도 하면서
뉘에게, 어떤 것들은 불현듯 한꺼번에 저기 지나가는 듯도 하고
나는 순간 의지를 지닌 채 실행하기도 또 물러서기도 하고
기억을 지피는 사람이 되기도 해
인간으로서 잘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뉘에게, 나는 안부를 물으며
여기 있어
여기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문득 낯설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
먼 등 김성백
오십을 넘어서면
곁에는 떠날 사람들만 남는다
지구가 흔들려도 좋을
가을 다음에 다시 가을이 와도 좋을
너는 가끔이라고 했고
나는 자주라고 했다
불발탄이 터지는 날이면 전염병처럼
너의 얼룩이 내 귓등에 번졌다
봄은 늘 새것인데
가을은 늘 헌것 같은
불그스레한 사용감
우리는 서로의 등에 관해 이야기했다
전기가 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아주 잘못된 밤에
손금이 손을 갈라놓는 줄도 모르면서
식은 말들이 전등 사이를 오가면서
낙엽을 부여잡고 나는 지금
자수하러 간다
거대한 쓰레기통 속으로
그래서 가을은 사람 같다
내 편이 없는
사랑 같다
손잡이
손잡이는 잡았던 손을 전부 기억해요
철봉에 매달린 구백구십구 개의 손가락이 손을 놓을 무렵
장바구니를 버티는 아흔아홉 개의 손목이 동시에 끊어질 무렵
맨몸으로 하루를 여닫는 툭 튀어나온 골목 혀가 창백해질 무렵
달려가는 일보다 뜨거워지는 일보다 열리고 닫히는 일보다
손을 잡는 일이 더 중요한 그런 때가 있어
무엇의 일부가 아니라 기능이 아니라
전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버스를 대표하는 손잡이
냄비를 대표하는 손잡이
창문을 대표하는 손잡이
가방을 대표하는 손잡이
서로의 날씨를 증명하는 심장보다 더 뜨거운 언어
손가락과 손바닥이 만나는 수련(睡蓮)의
잠꼬대를 들어 보세요
손을 닮은 손잡이를 본 적 있나요?
나는 손잡이보다 더 종교에 가까운 말을 알지 못해요
힘겨운 방향을 보듬어 주는 자비
제 몸을 모두의 골격에 맞추어 주는 자비
오른손잡이든 왼손잡이든 양손잡이든 손이 없든
손가락이 네 개든 다섯 개든 여섯 개든 발가락이든
손잡이는 손에게 마중을 나가요
진화의 신은 손보다 손잡이를 더 사랑했으므로
중심을 잡아 주는 마중
공간을 열어 주는 마중
무게를 덜어 주는 마중
손이 쥘 수 있는 제일 좋은 것은 손이니까요
나도 누군가에게 손잡이가 되어
함께 흔들리며 함께 여닫으며 함께 버티며 함께 녹슬며
한길을 갈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한 사람, 어머니
마중 나온 당신을 만나면 나는 호미처럼 누울게요
세상의 모든 손잡이에는 그리움이 묻어 있어 전기처럼
찌릿찌릿한 것을
버림받은 손잡이만 모아 놓은 가게가 있다면 좋을 텐데
손잡이는 손잡이를 잡을 수 없는걸요
첼리스트/김보나
죽은 사람을 장지에 묻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악기를 하나쯤 다루고 싶어서
대여점에 들러
첼로를 빌렸다
48인치짜리 첼로는
생각보다 육중하였고
나는 그것을
겨우 끌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소파 옆에 세워 둔
첼로는
공습경보를 들은 사람처럼
창밖을 보고 있었다
첼로를 이루는 가문비나무는
추운 땅에서 자란 것일수록
좋은 음을 낸다고 들었다
촘촘한 흠을 가진 나무가
인간의 지문 아래
불가사의한 저음을 내는 순간
더운 음악회장에서 깨어난
소빙하기의 음표들이
빛을 향해
솟구치는 광경을
죽은 사람과 함께 본 적이 있었다
가슴에 첼로를 대고
활을 그었다
첼로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내 몸의 윤곽은 분명해지고 있었다
하얀 나방이 숲으로 떠나가는
깊은 밤
수목 한계선에서 빽빽하게 자란
검은 나무 아래
영혼의 손가락 끝에
홀연히 돋아나는 동심원들
숲의 한가운데에서
쉼 없이 악보가 넘어가고 있다
밤의 연주회지만
중단되지 않는다
동쪽과 서쪽 이성미
동쪽으로 이사하고 나서 봄은 서쪽에서 왔다. 비구름도 서쪽에서 친구들도 서쪽에서.
동쪽에서 나는 기다렸다. 서쪽에서 터진 목련꽃의 향기.서쪽에서 오는 비와 태풍.
서쪽 친구가 내게 비와 꽃과 바람의 소식을 전해주면, 비와 꽃과 바람이 도착했다. 비바람은 꽃보다 빨랐다. 나는하던 일을 멈추고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비바람을 기다렸다.
두 시간 전에 서쪽 친구의 이마에 물방울을 떨구었던 먹구름.
두 시간 후에 나의 이마에 떨어질 빗방울.
두 시간이라는 종이가
천천히
반으로 접힐 때.
빗소리가 들렸다.
들린 것 같았다
가을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갔다. 겨울도 친구들이 있는 서쪽으로.
나는 친구들에게 시든 잎을 예고했다. 아름다운 색으로 몰락할 거야. 겨울 여왕의 차가운 입김을 보냈다. 코트의 단추를 꼭 잠그길.
눈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 친구들이 말했다. 눈이 온다! 그래, 눈이 오겠구나. 나는 친구들의 말을 믿었다. 입을 벌린 채, 눈이 내 혓바닥 위에 떨어지길 기다렸다.
차가웠다. 차가운 것 같았다
접힌 우산/정현우
비는 아침부터 내리고 '개미인력' 대기실엔 인부들이 접힌 우산처럼 빼곡하게 꽂혀 있다. 하루는 노가다 잡부였다가 하루는 배추밭 농부였다가 하루는 산판 벌목꾼인 사람들. 나이도 사연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루살이 같은 한 시절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비 오면 우산이고 해 나면 양산인데 갈 곳이 없다.
이후,/이미산
그때 나는
그리움이 먼 곳에서 온다고 믿었다
바람이 부려놓은 냄새
눈가에 드리우는 실루엣
모르는 당신이 남기는 발자국
그리하여 내 안으로 당신을 들인 날
나는 눈물이 났다
우연이 우연의 옷자락에 닿아 오늘이라 불리듯
가까워도 닿을 수 없는
긴 팔을 키우는 가려운 등처럼
별빛을 당겨 제 몸을 식히는 지구처럼
한쪽 발을 물에 담그고 나의 전부를 생각했다
당신이라는 눈물만이 또렷해지는 즈음
다시 오지 않는 그날과
그리워하는 그곳 사이
이후가 시작되었다
미워지는 밤
잠들기 전 꺼내보는 얼굴 하나
여긴 종일 비가 왔어요 당신도 비를 맞았나요
어두워지면 불러보죠 그곳에 어울리는 표정으로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생의 매듭이 된 당신
미소로 시작된 우리의 처음이 있었고
미소로 주고받은 뜨거운 질문이 있었고
질문의 동굴에서 실패를 걸어놓고 사랑이라는 게임을 하며
수없이 들락거렸죠 물방울 뚝뚝 떨어졌죠 나는 어제 내린 빗물이라 하고 당신은 아담과 이브의 눈물이라 하고
언제나 동굴의 자세로 당신은 나를 안아주었죠
그리하여 우리는 각자의 동굴 이후라는 그리움
이제는 혼자 걷고 있죠 우리의 비 수억 년 떨어지는 그 물방울
한때 미치도록 궁금했던 모든 당신 자꾸만 희미해지는
이런 내가 미워지고 있죠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 /이기와
그의 속은 공갈처럼 비어 있었다
스프링도 스펀지도 안락을 제공할 그 어떤
소재도 내장돼 있지 않았다
바로크 문양의 유혹으로 겉치장을 했을 뿐
속을 들춰보면 널빤지 하나뿐인 부실한 골격이
내내 그의 영혼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의 잘 깎인 무르팍에 앉아봐도
그의 가슴에 내 가슴을 합체해봐도
밤마다 몇 시간씩 부둥켜안고 서로를 탐색해봐도 느껴지는 건 킹 사이즈의 허탈함뿐
내 생의 삼분의 일을 고스란히 바치고도
내 고절한 알몸을 통째로 상납하고도
단 한 번도 푹신한 꿈을 대접받지 못했다
날마다 무섭게 쏟아지는 졸음의 세계가 갈망한 건
서로의 시장기를 보충시킬 육체였을 뿐
탄력 있는 정신도 영구적 파트너도 아닌, 오직
깨어날 수 없게 서로를 마취하는 몽상의 침구였을 뿐
그의 관절 하나가 삐걱이기 시작한 것도
그의 몸 중앙이 맥없이 꺼져들고
내 욕망의 척추가 휘어져 고통이 시작된 것도
수면을 위한 단순한 용도가 아닌
그 외에 탁월한 용도로 서로를 탐미하려 했던 것
그렇게 오용하지 않으면 순순히 잠들 수 없는
워낙 속 재질이 부실한 싸구려 마네킹들이었던 것
바퀴의 근성
간혹 길이 아닌 길을 침범하고 싶다
누런 오줌발이 갈겨진 담벼락이나
길의 내장 속 같은 시궁창에 머리를 들이박고 싶다
제 무게에 눌려 끝내 균열되거나
부식된 속 여기저기 땜질한
일상의 전용도로를 벗어나
이정표 없는 노천으로
통행료 없는 다리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싶다
간혹, 건물과 건물의 가랑이 사이
매연으로 포장된 질(膣)속
그 침침한 내부에서 활보하는 폭주족들과
돌연 충돌하고 싶다
유턴할 수 없는 삶의 일방도로 복판에서
전복된 채, 몇 날 며칠 정신의 시동을 끄고 쉬고 싶다
쉴새없이 생산되고 폐기되는 철근의 희망 밖으로
견일될 때까지, 폐차장이나 고물상에 안전하게 처박혀
허방에 두 다리 뻗고 체류할 때까지
연거푸 돌발사고를 유도하고 싶은
그렇게 해서라도 이 초고속의 날들과 절교하고 싶은
몇 번이나 수리했어도 여전히 삐딱하게 굴러가는
개 같은 이 천성
유토피아' 정마담의 하루 6
급히 소변을 보려다
속옷에 끼워 둔 화대를 변기통에 빠뜨렸다
(제기랄, 하필...)
똥통에 빠진 찜찜한 만원권 과거를 건져 올린다
사내와 여인, 계집아이, 그렇게 세 명의 조난자들은
안개가 뒤덮인 심해에서
항해 지도를 펼쳐 들고 고혹의 섬으로 가는
최단거리를 구하고 있었따
그날 밤, 큰 해일이 일고
배의 상판까지 으르렁대는 파도의 이빨이 들이닥쳤다
사내의 거센 호흡 소리가 폭풍 쳐 오고
뒤따라 여인의 흐느끼는 신음소리가 표류했다
암흑의 대양 한복판에 구명 튜브처럼 떠다니는
그 절박한 교성을 어린 아이가 이해하기엔
너무도 난해한 기호였기에, 대체
어디까지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이 항해의 목적은 애당초 무엇이었는지
아이로선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여인의 몸이 찢긴 돛처럼 밤새 퍼덕이는 동안
사내의 몸이 여인의 수면 위에서 연신 노를 젓는 동안
아이는 악착같이 두 눈만은 꼭 감고
모르는 척, 아무런 참극도 목격하지 못한 척,
다만 이 고통의 방관 후에 배불리 얻어먹을
따끈한 순대국밥만을 냉정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빈민촌 똥물의 저잣거리를 항해하면서도
한사코 숟가락질만은 포기 하지 않았다
비.풍.초 1
힘껏 두들겨봐!
내 비닐 살갗에 니 비닐 살갗을 대고 후려쳐봐!
튀밥처럼 터지는 명쾌한 통곡을 들어봐!
톡, 톡, 톡, 치솟아오르는
탁, 탁, 탁, 내리꽂히는
피,
지상에 흥건히 깔린 피, 저 쌍피를
먹어봐!
내가 버린 나의 피를
피 묻은 나의 이 시간을
이 시간에 필요 없는 나의 멍든 꽃들을
매화와 난초와 국화를
치고 박고 다투어 먹어봐!
뭘 망설여?
움켜쥐어 봤자 쓸모 없는,
아껴두어 봤자 부질없는,
그 하찮은 희망 한 장 빼서 버려!
숨기고 있는 그것!
목숨을 버려!
퇴출당한 꿈속에서마저 독박 쓴 지금
니가 왕창 먹고 왕창 싸라고 내게 던져 준
이 굳은 피는,
독이야, 독(毒)!
비.풍.초 2
마음이 흐린날
젖은 시간을 접어 방바닥에 깔아놓고
어머니는 마흔 여덟장의 근심을 그위에 진열한다
오늘에서 어제로 아픔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녀의 눈앞이 침침해 있다
폐가처럼 허물어진 등을 내보이고
하나 둘씩 과거의 그림을 뒤집는
제주에서 목포에서 서울 외진 공사판까지
박씨 김씨 이씨의 품을 몇 바퀴 돌고 돌아
이제 삶보다도 죽음 쪽에 가까이 가 있는 그녀가
밤마다 두 손에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패는 무얼까
철없는 나의 손목을 끌고 철없이 여인숙을 들락거리던
사내와 동거한지 삼년이 못가 도로 과부가 되던
그 박복한 젊음을 섞고 또 섞고
남들이 모르게 자기 자신조차 모르게
뒤섞고 있는 미련은 무얼까?
달밤의 님 소식도 돈벌 횡재수도
손님이 올 기쁨의 알림조차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지
매번 떨어진 운세를 빡빡 밀어버리는 굳은 손마다
박씨 김씨 이씨의 새 아버지들과 아버지라 부르지 않은
세 아저씨들과 그 자식들과
한 이불속에서 마음의 등지고 자던
동거한지 삼년이 못가 도로 후레자식이 되던
과거의 나를 바닥에 깔아 놓고 밤마다 뒤집는 어머니는
연거푸 새 패를 떼고 또 떼고
그런 식으로 파투난 과거를 수정하고 싶은 것이다
그립다는 말도 없이
번안곡
빈방은 파동
닫으면
더 정확한 울음을 들을 수 있다
천장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변기 물을 내리고 그릇을 깨고 벽을 친다
물을 머금고 울얼거리는 듯한 대화가 거뭇한 방을 맴돌고 이따금 고함과 비명이 두 귀를 잡아당긴다
위에서 들리는 건지 아래에서 들리는 건지 헷갈려서 문고리를 돌리다 말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녹슨 경첩을 보고 있으면
저녁이 창문을 찢고 들어온다
벽지는 갈라지는 방식으로 숨겨진 틈을 찾는다
침대와 벽 사이에 끼어 있는 왼팔
누워 있는 것조차 버거울 때
안의 소리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먼저 밖으로 빠져나간 소리가
다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약한 방들이 많고
가까울수록 파장은 커진다
밤새 닫아 두었던 문을 열고
밖에 나오니
흰빛에 가까운 뒷모습들이 들썩이고 있다
육체의 비밀/ 이민하
눈을 감은 사람의 얼굴은 어디에 있나
눈꺼풀의 안쪽과 바깥
한 사람이 옷을 훌훌 벗는다면
부끄러움은 누가 뒤집어쓰나
벗은 몸의 안쪽과 바깥
당신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나는 당신 안에서 빠져 있는데
서로를 향하여 끝없이 멈추는 움직임 속에서
정지한 사람의 두 발은 어디에 있나
한 뼘과 천 길 사이
굳게 닫힌 눈과 입
실금이 간 얼굴로 시체처럼 누워
당신은 가장 가깝고
나는 가장 먼 곳에서
껍질과 수염을 벗겨내고 옥수수알을 씹는다
천 개의 알갱이를 입 안에서 터뜨리며
당신을 자꾸 귀에 대본다 깜깜한 백지처럼
입을 다문 사람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나
입술의 안쪽과 바깥
배시시 눈을 비비며 마주 보는 당신은
멀리서 불빛을 보고 숙소로 찾아든 이방인 같다
모호한 발음으로 인사를 나눠야 할 것 같다
눈빛을 껐다 켰다
유리문을 열고 닫으며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 같다
가장 투명한 곳에서
소년소녀
할머니는 절반만 날았다. 뼈만 남아 그네가 되었다. 업혀 있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나. 엄마는 하반신이 굳었다. 아이만 쑥쑥 낳다가 미끄럼틀이 되었다. 밑바닥부터 기렴. 빈손을 물려주었다. 모래로 집을 짓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나. 아빠는 얼굴이 퇴화해서 개미만큼 작아졌다. 어깨만 키워서 철봉이 되었다. 주먹을 꽉 쥐고 버티렴. 매달리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나.
코피가 터진 아이와 무릎이 깨진 아이가 아파트로 실려 갔다. 엘리베이터가 수혈 팩처럼 오르내렸다. 과묵한 의사는 밤에만 회진을 왔다. 앞치마를 두른 간호사가 아이들을 깨웠다. 따뜻하고 빨간 국물을 차례로 떠먹였다. 피를 나눈 사이란 걸 잊지 말거라. 배가 부르고 나면 입닦는 법도 배웠다. 피가 모자란 아이들은 어디로 갔나.
놀이터를 떠돌면 피냄새가 났다. 밤의 꽃잎들은 성냥불처럼 떨어졌다. 핏기가 없는 아이들이 어슬렁거렸다. 서로의 목에 이빨을 쑤셔 박으며 영원을 약속하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나. 모래성 안에 누워 엄마는 어둠의 틈새로 내다보았다. 실눈을 불빛처럼 뜨고 있었다. 꽃나무 밑에 아이를 묻고 우리는 어디로 갔나.
허밍 /전영관
풍경이 유리잔처럼 얇아서
10월은 쉽게 금이 간다
예민해져서 상심이 잦아진다
환절기의 그리움은
10월에 장미를 보러 가는 일
전부가 붉은 파도인 것 같아도
이파리를 손에 들고 보면 다른 것처럼
사랑은 보는 이에 따라 채도가 달라진다
함께 서 있던 나무를 보는 감정은
음정이 조금 틀린 허밍 같은 것
곁이 빈 나무 사진을 보냈다
단풍잎은
연애를 시작하던 심장같이 붉고 뜨거운데
날카로운 외면의 끝에 찔리고도 말하지 않았다
잠은 죽음만큼 깊었는데 꿈도 짧아서
새벽은 미완성인 채로 시작된다
연락도 없이 연락할 것 같아
10월엔 주말 약속을 머뭇거리게 된다
갈꽃은 진 후의 여운이 길어서 아프고
저 붉음이 퇴색할 거라는 상심만 진해진다
오르내리는 일기에 병열(病熱)도 앓는다
단풍은 잘 팔리면서 저평가되는 연애시
흔적만 남고 통증 없는 무릎의 흉터
나무에 걸린 은유
내 안의 꽃이다 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꽃이 보인다
만발해 너울거리는 자태보다
잔바람에 떨어져 낡아가는 꽃잎들이 먼저 보인다
하, 저 꽃잎은
어미를 잃고 헤멘 어린것의 발뒤꿈치
저를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한 청춘
이별을 참다가 뛰쳐나와 진흙 묻힌 버선
바람같이 근본도 없는 것들하고 섞이느라
평생이 한나절인 듯 녹슬어버린 몸
사랑 따위에 발목 잡혀 승천하지 못한 선녀들의 군무
왕자나 기다리는 신데렐라들의 순은 구두
죽음만큼 나른한 저승의 몸을 옮기는 나비 날개
하늘을 연모한 까닭에 나무에 피어난 수련(睡蓮)
다림질하며 오시는가 바라보다 태워버린 버선
삼천배 앞에 미소 짓는 애기보살의 무릎
세상에서 하나뿐인 백옥을 캐다 스러진 광부의 아내
거문고 없이 앉아만 있어도 취하는 기생 손목
이마에 붙이면 지옥도 면하는 부적
보름이면 달빛을 음미하는 신의 숟가락
전생을 돌고 돌아온 저 하뭇한 숭어리들을
목련이라 감탄하겠다
시니컬
당신의 포옹은 어색해
그 안부는 등받이 없는 의자 같아서
안온함이 지속되진 않는다
아무나 표절해도 되는 꽃말은
꽃을 선물해놓고 얼버무리는 핑계 같은 것
애인 앞에서의 눈물도
깨진 사랑을 수리해주는 천사의 접착제일 뿐
천 개의 퍼즐을 맞추는 일보다
그림 하나를 천 개로 나눈 사람이 대단해
운동화 끝이 자주 풀리는 것은
묶느라 구부리는 사이
내 안에 고인 것들이 흘러나가게 하라는
어린 귀신의 배려겠지
내일 당장의 일이면 불면으로 경고하는데
먼먼 일이라면 타인의 것인 양 잊어버리게 하는
신은 근시임에 틀림없어
내게 없다는 그 철학은
어른과 아이의 생각 차이를 화해시키는 일
3월 / 박소란
어쩌면 네게 전화가 오지 않을까
산책을 나와서도 휴대폰만 만지작대고 있구나
여기는 뒷산 숲이다
별안간 수화기를 타고 건너 온 아버지의 목소리에
기획서를 쓰다 말고 내다 본 도시의 창밖
기민한 이국종 나무처럼 번쩍 치솟은
타워크레인 금속성 가지 끝엔 웬 까치 한 마리가
언제부턴지 둥근 집을 짓고 있다
마냥 순전한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생을 무너뜨릴 허공의 아스라함마저
이리 온, 품속에 고이 들이려는 듯
한참 동안 대답도 없는 수화기를 쥐고 아버지는 말했다
어쩌면 네게 전화가 오지 않을까 오늘처럼 해가 좋은 오후엔
먼 안부를 묻지 않을까
여기는 겨울을 달게 치러낸 고향집 뒷산 숲이다
퇴근 전까지 제출해야 할 기획서는 아직
열없는 빈칸으로 남았는데 아버지는
그럼 나는 개를 풀거야 /황주은
서로의 후생을 생각한다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까
악착같이 너는 나를 찾을거라 말한다
그럼 알아보지 못하게 성형을 하고 죽어야지
그럼 너는 나의 스웨터를 숨겼다가
사냥개를 풀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물로 뛰어들어 추적을 따돌려야지
이런 생각 사이로 스며드는 물
중력에 순종하느라 매무새를 잃은 물
한 잔의 물만 6개월 동안 탐구한 프랑시스 퐁주를 떠올린다
물의 내밀한 이야기를 그는 들었겠지만
녹아 있는 냄새는 보이지 않아
세상은 강요된 절망의 놀이터라고만 적어 두었지
물고기로 변하면 흐름을 거스를 수도 있지
헤엄치는 나의 후생
수심을 물리친 몸이 파닥거린다
개 한 마리 눈알을 굴린다
침을 흘리며 이빨을 드러낸다
쇄빙/이충기
올해 겨울은 이상하게 너무 따뜻해
사막에 눈이 내리게 될 그 날을
우린 재앙이라고 떠들썩하게 볼 때
마리안 소만에서는
위협이 무엇인지 몸소 느끼는 인류가 자란다
너무나도 천천히
조금만 걸어가도
어떻게 해야 몸이 허우적거리는지 제일 먼저 알 수 있는 그들은 아마 바다가 점점 무서워질 것이다 꽁꽁 얼어가는 바다의 시간이 길어지니까
길을 잃을 수 없었던 서식지에서
펭귄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만 있다 이것이 구조신호인지 대비 행동인지 위험 감지인지 모르고 말을 할 수 없으니
어디로 가고 싶어도
어디로 갈 길이 점점 무너지고 있어서
어떤 마을에는
빙벽을 방패막이로 내세우지만
따뜻한 겨울을 누가 더 소망하는지
오갈 데 없는 인류의 서식지를
누군가는 계속 피해버린다
그나마 바다에 있었을 크릴조차 무너질 것이다
얼다 만 빙판을 건너다가
풍덩 빠져버리는 인류의 몸부림 앞에서도
1도의 차이가 미세하게 느껴지는 그 길을
아주 먼 곳에서의 우리도
이미 천천히 따라 하고만 있다
지구의 평균온도는 산업혁명 이후로 1도 이상 상승했다*
어쩌면 마지막 대멸종은 인간일지도 모른다
폭염/이원숙
풍경이 느려졌다
인평중학교가 훤히 보이고
화진빌라가 천천히 물러났다
객실 모니터엔 아마겟돈이 상영 중인데
안내방송이 잡음처럼 끼어든다
-폭염으로 인한 선로 과열로 서행하고 있습니다
도란거리던 남녀가 창밖을 내다본다
검푸른 수목 위로 불볕이 내리쬐는지
등 뜨거운 매미가 울어대는지
풍경에는 이렇다 할 징후가 없다
나란히 달리던 선로는 어디선가 헤어지고
객실 에어컨은 쉴새없이 돌아가고
SRT 336호는 발바닥이 뜨거운 고양이처럼
달궈진 레일 위를 살금살금 더듬는다
아마겟돈의 소행성은 지구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는데
- 폭염 아니고 폭음 아닐까?
- 숙취 덜깬 레일이 침목을 베고 퍼져버린 거라고?
여자의 웃음소리가 자동문 소리에 잘려 나간다
객실 에어컨은 여전히 돌아가고
선로는 열풍에 더욱 비틀거리고
다음은 종착지인 수서역,
화면 속 브루스 윌리스가 마지막 인사를 한다
곧 폭파될 소행성에 그는 홀로 남아
충돌 직전의 지구를 구하기로 했다는데
기차도 멈춰 세울 저 폭양은
누가 막아주나
삼복염천인데
샌들 속 맨발이 자꾸 시려온다
화이트아웃/배윤주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고는 아무 곳에도 없다
풀 소리로, 풀빛으로, 눈빛으로, 호흡으로, 무엇으로든 꽉 찬 여기
지구상에서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이는 오로지 사람뿐이라는 진심의 진실
욕망이 만들어 내는 부스러기의 거대한 지층
착시현상에 불과한 편리의 영역이 눈가에 쌓이고 풍요의 고통이 쓰나미로 되밀려 오고 있는 지금, 오롯이 다시 쓰는 플라스틱은 9%뿐.
생분해되지 않은 채 점점 더 작은 조각으로
더 정밀하게 파고들어 혈관 속까지
높임말로 박히는 미세플라스틱의 무경계
경계를 지우는 화이트아웃, 풀은 주검조차 드러내지 않으니
가물거리는 원시의 옛이야기에도 모두 되돌아가는 길 알고 있지
살았던 생명의 흔적조차 지우고 가는 지상에 쓰레기와 사람과 화이트아웃 되는 먹이사슬이 일상이라면, 사이클론 시즌의 휴가에서 생존은 기적이 될 거야.
풀은 고요하나 풀잎이 흔드는 진통이 심장을 찌를 거야
눈은 뜨고 있으나 휘어진 물고기의 등뼈가 숨구멍을 뚫고
끝없이 진화하는 변이 바이러스가 불꽃놀이처럼 화려해질 거야
붉어지는 속죄에 되돌아가는 길 모르는 우리는 호모사피엔스 9개월 10일을 지혜생성의 신비로만 읽을까
재생의 길목에서 순환하는 풀뿌리 순진하여
풀잎은 물 한방울도 넘치지 않고 이슬로 덜어내고
행동하는 황무지는
드러난 맨살 덮어주려 풀잎조차 품는 걸까
뽑지 마라, 풀 한 포기도
황야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 무성하여
풀잎은 풀씨로 야생을 겨누고 있으니
불량목/송승언
언덕을 올라가니 나무가 보였다. 반쯤 아름답고 반쯤 뒤틀린
어떻게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을 한 몸으로 할 수 있는지 이상했지만
말하고 나니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부분적으로 죽어가는 시간이 다르거나
본래부터 기형일 뿐이었을지도.
분명 저주는 아니었다.
어쩌면 어느 한쪽이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동행이 있었음에도 나는 잠시 말을 잃었고 나는 내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뒤틀린 나무에 기대어 언덕 아래를 보면 허허벌판이 펼쳐지다가
세대주 없는 건물들이 난립해 있었고
나무의 뒤는 완전히 썩어 있다.
속이 텅 빌 정도로 썩어들어간 그것을
치료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책임질 수조차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손을 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은 가지들 보며 핏줄 따위 떠올리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것도 솔직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바람이 불었다/안도현
네가 내 옆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팠다. 네가 보고 싶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바람이 불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물결이쳤다. 네가 보고 싶어서 물속의 햇살은 차랑차랑하였다. 네가 보고 싶어서 나는 살아가고 있었고, 네가 보고 싶어서 나는 살아갈 것이었다.
누군가가 보고 싶어 아파본 적이 있는 이는 알 것이다. 보고싶은 대상이 옆에 없을 때에 비로소 낯선 세계 속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고 싶은 호기심과 의지가 생긴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네게 가고 싶었다.
숨겨둔 기쁨 / 임승유
문 열고 나와
문밖에 내놓은 외투를 걸쳤다. 무겁고 두껍고 커다란 외투를 걸치고 앉아서
내가 감싼 안쪽을 생각했다. 생각하면 할 수록 깊어졌다. 멀어졌다. 멀어져 닿을 수도 없는 그곳을 생각하면 뭐하나 싶다가도 지금은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서
계속 생각했다. 계속 생각하다 보니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이르고 보면 더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외투를 벗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김륭
가게 밖을 청소하다 보니까 빤히 나만 쳐다보고 있더라구요, 달이
키가 훤칠한 기둥서방처럼 밤이 드나든 흔적은 없었지만 그녀에겐 그녀조차 모르는 비밀이 있는지 모른다
그날 밤 나는 나무가 된 기분이었고, 한 생을 건너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꼬리가 뭉툭 잘린 길고양이와 가로등 사이 그녀는 한 입가득 먹다 남긴 제 그림자를 어디다 쓸어 담는지
달은, 그녀를 사랑하는 나보다 더 궁금했던 거다
살을 문질러 물소리를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러니까 미인이란
더 이상 달에게 뿌리를 바칠 수 없는 나무가 되어서야 할 수 있는 말이지
겹/김경미
1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지금의 내게 수련꽃 주소를 옮겨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지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밖에는 때로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죽은자의 전화번호/ 이문재 시인
핸드폰 안에
죽은 사람의 전화번호
몇개씩은 있으리라
선뜻 지우지 못하는
차마 지워버릴 수 없는
몇몇 세상에 없는 사람 전화번호
유독 나만 그런 건 아니리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문상 다녀오는 길에
고인의 전화번호를 지운다는 사람
엄마전화기
엄마 전화기가
여전히 살아 있다
세상 떠난 지 일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원을 켜면 문자메시지가 와 있고
부재중전화도 제법 있다 어쩌다
진동이 울리면 받을까 말까 망설여진다
전화기가 죽으면 엄마가 또 죽을까 싶어
충전을 계속하는데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죽은 엄마 전화기를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살아 있는 나 때문임이 분명하다 며칠 전에도
너무 힘들어 엄마한테 문자를 보냈다
나도 거기로 가고 싶은데 엄마 나 가도 되나
답 문자 기다리는 대신 엄마 전화기 속으로
이니셜과 별명이 많은 엄마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 수백번 넘게 열어본 우리 엄마
그래서 그렇게 비상금이 필요했고 그래서
아빠와 매번 심하게 다퉜고 그래서 그래서
요양원에 있는 엄마의 엄마한테 달려갔고
그래서 그날 새벽 차를 몰고 동쪽 바다로 향했고
그래서 엄마가 그래서 엄마는 그래서 나도
그날 이후 눈을 들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엄마 전화기를 버리지 못하고 겨우 견뎌왔는데
이제는 안 되겠다 이렇게 한살 더 먹기 전에
죽은 엄마 두번째 생일이 오기 전에
전화기를 엄마한테 돌려줘야겠다
매번 다짐하곤 하는데 다짐하긴 하는데
버킷 리스트,/손준호
손깍지 베개로 풀밭에 누워 하늘 우러를 것
턱 괴고 앉아 먼산바라기 할 것
잠자리 편대의 비행을 따라 날갯짓해 볼 것
뻐꾹새 우는 방향으로 귓바퀴 굴릴 것
검은 고양이의 독백을 들어줄 것
말라 가는 지렁이의 혼을 주머니에 담을 것
회초리로 종아리 내리치고 길게 울 것
매에에에, 아기 염소처럼 어린양 부려 볼 것
아차, 등에 깔린 풀들의 심정을 헤아릴 것
벌떡 일어나 손등으로 살살 어루만져 줄 것
입하立夏
연이틀 비가 와서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
누군가 때 없이 찾아와 술 한잔 기울일 때
피잉 눈물 한 조각 가슴에 박히거든
핏줄 속으로 마음 한 가닥 돌고 있는 거라고
덩굴장미가 불타는 심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뒷산 뻐꾹새 듬성듬성 장난을 걸어오고
베란다에서 15년 키우던 거북이가 죽었다는
문자를 읽다가 문득 방생이란 단어를 떠올리며
비단개구리 폴짝거리는 마당에 나가 비를 맞았다
안부
여기 책상머리 앉아 있어도
네 눈물짓는 소리 아프게 들린다
그렇게 메시지 보내고 나니
나도 늙나 보다, 어느새 희끗한 귀밑머리
사람이 고픈 저녁이다
저무는 해가 애달파
어디 부뚜막에라도 붙들어 매고 싶은 세밑
여기 멀리 물병자리 앉았어도
네 들썩이는 어깨 보인다
별이 차가워서 나는 슬프다
또, 보자
서머타임./전희진
시간을 한 시간 앞으로 당기다가
두 시간 앞으로 당기다가
백 년이나 앞당기다가
한 시간 두 시간 짧아진
나의 잠은
백 년이나 짧아져서
꽃잎처럼 가벼워지고 얇아져서
사과나무 향기로 후루루, 오래된 잠들이 쏟아지는데
당신이 떠난 자리 그대로 흔들리는데
가벼워진 나의 잠이 당신을 백 년이나 지나칠까 봐
실수로 스치는 오늘 아침, 나는
손님들로 북적이는 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꽃술처럼 길게 늘어나는 지구의 이마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거기
당신은 사과처럼 붉게 익어가고
나의 잠은 백 년이 짧은 듯 그렇게 길어진다
엄마 진은영
세금을 내듯이 엄마를 만나러 간다. 엄마도 세금을 내듯 나를 돌봤을까? 묻지 않을 거다. 온몸을 떨며 헌금을 바치는 기분이었다고 말할 테니까. 엄마가 사랑하는 신이 사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 파란색이 내 눈 속에서 종소리처럼 울린다. 엄마가 날 사랑했다는 흔적을, 언젠가 호박화석 속의 검은 벌처럼 찾아 헤맨 적이 있었다. 곧 그만뒀다. 나는 고생물학자가 아니었으니까. 어딘가에 벌이 있었고 꽃들이 있었겠지. 나는 불량 체납자다
아카이브-극지에서/송희지
연인아, 우리는 얼어붙은 문가에 서 있구나. (1)
형이 무쇠 솥에 마크틱(2)을 삶는다. 창밖에 붉은 눈 내리고 있다. 풍경 칭칭 소리 내어 흔들린다. 익어가는 살갗의 냄새 맡는다. 우리는
겨우내 광야를 떠도는 한철 사냥꾼들, 털모자 그늘에 낯을 감춘 여행객들, 현지인식 나무별채에서 사냥한 고래 물범의 뼈를 들어내고 겨우살이를 짜 만든 가구 틈에서의 생활. 수조 속, 가지런히 담긴 짐승이 짖는다. 그것은 올해 가장 추운 날
형이 호수 둘레에서 주워온 알 속에서 태어난 것. 짐승은 겨우내 펄펄 검고 찬 영혼을 뱉다가. 이듬해 봄이 오면 늙은 몸을 토한 뒤 죽는다고 한다. 짐승의 인간만한 깃털이.가슴지느러미가 네 쌍 팔다리와 수만 개 겹눈이 햇빛을 받아 찬란 반짝이고 있다. 모두 형과
내가 길러낸 것들이다.
간밤에
쌓인 눈처럼. 붉고 깨끗한 꿈을 보았다고 형은 말했다. 우리는 내려다보고 있었고, 우리의 발밑에 피투성이 짐승이 있었다고. 그것이 모든 이빨을 허물고 꺼낸 몸을. 색색 괴괴한 모형을 우리가 다 봐버렸다고.「꿈이라서 다행이야」 짐승에게 귀한 것을 먹이며 형은 중얼거렸고,「꿈같은 거 영원히 꾸지 않았으면 좋겠어」덧붙였는데
꿈속에서 우리는
생면부지 타인이었고
기록되는 여백이었고
모국의 음식을 먹었고
모국의 뜻대로 살았다
고 한다.
넓디넓은 꿈의 차양
반투명
유리로 이루어진
수조 속에 담긴 물이 얼어가고 있다. 사각사각. 호수의 얼음과 얼음 등등 조우하고 서로를 그루밍 하는 소리. 파편과 잔여. 날마다
호수의 수위는 차오르고, 짐승은 꿈의 성조로 짖고, 형과 나는 때때로 흘러가는 것을. 고정되는 것을. 그러한 모양과 동작을 이해한다.
보이지 않아도
안다. 창밖에 붉은 눈 내리고 있다. 벽난로의 잉걸불 깨끗이 흩날린다. 사각사각, 무언가 타들어가는 것이 있고, 한철의 성교 끝나고, 다 벗은 우리는 그 앞에 앉아 몸을 녹여보려고, 보려고 한다.
low fidelity
보인다.
(1)제오르제 바코비아, 「겨울 풍경Tabloude land 변용
(2)고래의 껍질과 지방으로 만드는 이누이트의 요리.
그 때가 좋았다/ 나태주
그래도 그 때가 좋았다
촛불이든 호롱불이든
저만치, 그렇지 저만치
거리를 두고 어둠을 사이에 두고
바느질하고 계신 어머니
일기를 쓰고 계신 아버지
그 모습이 좋았는데
그래도 그 때가 그립다
그분들에게도 저만치
거리를 두고
어둠과 밝음을 사이에 두고
책을 읽고 있는 아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들
서울서 실연당하고 돌아와
흐느껴 울던 아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너무도 밝고 환하고
분명해져서 걱정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인들 몸인들
숨길 데가 도무지 없다.
갈매나무에 뒤엉킨 / 박성현
당신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백 년 만이라 얼굴조차 가물었습니다
녹슨 현관 열어 두고서
옥상으로 난 초록 계단에 앉았습니다
달이 구름에 가려 반쯤 지워졌습니다
반쯤 지워진 달이 계단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갈매나무에 뒤엉킨 바람을 풀고서는
꼭 멀리 가는 아버지 표정으로
나를 뒤척였습니다
혼자 비탈에 올랐습니다
가풀막이 심해 성긴 흙이라도 단단히 밟았습니다
녹슨 철근보다 무거운 젖은 재의 냄새들이 풍겼습니다
반쯤 지워진 달이 산마루에 걸쳐 있었습니다
너무 희미해서 그림자가 모조리 빠져나갔습니다
계단에 앉아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밤은 차갑게 식으며 서서히 물러갔습니다
폭설을 삼키며 비탈을 내려갔습니다
적산가옥(敵産家屋),/이다희
며칠 자주 가는 카페가 있다 딱딱한 바게트에 반숙으로 나오는 계란 노른자를 발라먹고 커피를 마신다 그렇게 한참을 먹고 있으면 오후 햇빛에 슬쩍 낮잠을 자고 싶기도 하다 눈으로는 가습기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사라지는 곳을 찾는다 사랑했던 남자들 모두 아버지 옆에 세워 두면 아버지는 어딘가 허약해 보였다 아버지는자신의 허약함을 딱히 변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반대했다 입천장이 까질 것같이 딱딱한 바게트를 씹는다 딱딱한 것을 이렇게 씹어삼키는 것이 지혜일 텐데 나에게는 아직 그것이 없다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카페에는 내가 항상 보는 두꺼운 책이 있다 2007년부터 2018년까지 초록의 기록을 모은 책이다 인간에게 짧지 않은 시간이겠고 초록에게는 그리 긴 시간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운동선수였다. 나는 그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땅을 나무로 덮을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²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쳐다본다 오늘의 페이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다 나는 하루에 한 페이지만 읽기로 한때 66⁵⁵⁵어제 읽었던 페이지가 기억에 없어도 들춰 보지 않으며 미리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도 않는다
발코니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제는 담배를 태우지 않지만 타고 있는 것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바닥이 큰 나사못 4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도 운동장이라면 어떤 초록이 가능할까 나는 건물의 소략한 설계도를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식민지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이 지었다는 이곳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지금은 카페가 되었다 발코니는 카페가 된 후에 만들어졌으니 설계도에는 발코니가 없는 것이 맞겠다 나는 머릿속 설계도 발코니에 큰 엑스 모양을 그린다
소문에 일본인은 여기에 악어를 기를 생각이었다고 한다 정원구석에 이유 없이 깊이 파인 구덩이가 있다 여기에 늪 같은 연못을 만들 생각이었나 소문이 사실이라면 물과 뭍을 모두 다닐 수있는 악어 때문에 연못 주위로 담장을 둘러야 했을 것이다 악어의 단단한 피부 사이에 촘촘하게 낀 물이끼가 오후의 햇빛에 말라 간다 집에 들인 정성을 보고 있자면 일본인이 꽤 긴 시간 동안 살 작정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구석에 놓인 풍금 앞에 앉는다 유일하게 길게 배운 것이 피아노였다 배우는 것을 그만둘 때 마음 어딘가에서 허전함을 느꼈던 것도
나는 조용한 흑백영화 같은 건반을 들여다본다 피아노는 풍금이 아니지만 발에 제대로 힘을 준다면 연주할 수 있을 것 같다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고 호흡을 정리한다 그런데 누군가의 손이 어깨 위로 올라오고 손을 따라 시선이 올라가면 주인은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난다고 도와달라며 울먹인다 나는 발코니로 뛰어 나간다
1) 적산(敵産)이란 적국 혹은 적국인의 재산을 뜻하며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물러나면서 국가에 귀속된 재산 가운데 일반에게 파는 것이 허용된 주택을 말한다.
2)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벽지는 방 안에 있었던 일을 모두 지켜봤다는 말이 있지
담배연기가 스며들면 환기를 해도 쉽게 가시지 않는다
페트병 안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병을 흔들어 한 입 마시고 책상 위에 올려 둔다
빨랫감이 별로 없어도 아침에는 세탁기를 돌리려고 한다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여기가 일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회오리 모양으로 꼬여 있는 빨랫감 사이에서
인형을 꺼낸다
빨래들은 서로를 쉽게 놓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역할놀이를 하는 것은 미래 연습이 아니다부모를 꺼내 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나는 엄마 너는 아빠 하고 내가 밥을 차려 놓으면
들어와 손을 씻고 밥을 먹어 이건 흙이지만 밥이니까
인형은 부드러운 조각
나는 내 속에 인간을 꺼내 보기 위해 인형을 샀다.
인간을 꺼내 놓고 부드럽게 스트레칭을 한다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어느 시절에는 머리카락을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곳에서는
피가 빠르게 도는 것 같다
신하들의 충성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리 눈을 들여다보아도 보이지 않네
나의 잘못으로 충성이 사라진다면 애초에
그대들에게 충성이란 무엇인가
왕관을 오래 쓰지 못하고 나는 옆으로 쓰러진다
나는 인형을 들어 올린다
왼손은 머리를 잡고 두 발은 오른손에 모아
힘껏 비틀어 물을 뺀다
필적감정 / 이동욱
여행지
모텔
동전
길고 짧은 머리카락을 주워보고 한쪽이 꺼진 침대에 누워 나는 젊은 아버지와 가난한 당신과 당신의 정부와 이내 우연의 음악과 불길한 계절이 밤새 뒤척였을 사연 속으로
결국,
타인의 필체 속에서
잠시 나를 죽은 혓바닥처럼 놓아보는 것인데
가장자리부터 색을 놓아버린 사진과 꽃이 피는 소리를 따라 자라는 곤충의 더듬이 혹은 열었던 문을 잠시 잡아주고 사라지는 손자국에 손을 겹치며
다시,
수챗구멍에 감긴 머리카락을 건져내고 바닥에 눌어붙은 치약 자국을 지운다 김이 서린 거울을 닦아낸 뒤
인연을 믿지 않던 여행자는
매일 아침 누군가 나보다 먼저 이 방을 다녀간 것 같다고 써야 한다
식적息笛
목소리는 물에 뜰 수 있나
내가 아는 목소리는 인간 몸속에 종양처럼 기생하는데, 같은 반향이 있을 때까지 숙주를 간섭하지 않은 채 성대 깊이 자신을 되새긴다
환청이라는 영역에서 목소리는 재생되기도 하지만 기생하는 목소리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겠지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의 피리처럼
관管을 통과한 목소리만이 음색이다
인간의 몸에는 대략 8개의 구멍이 있지만 스스로 그 구멍을 볼 수 없어서 서로의 몸을 핥고 빨고 이야기하고 우는 동안 어디에서 소리가 나는지 알 수 없지만
연주가 끝나자 단원들이 악기에서 손을 뗀다
그제야 나는 음악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간격/강영은
적금을 해약하고 근처 식당에서 월남쌈을 먹는다 피망과 오이처럼 당신과 마주앉아 느끼는 입맛은 미완성의 재료보다 높은 가성비價性比,
침묵과 침묵 사이에 놓여 있는 포크를 들었을 때 살아 있거나 죽어 있는 구간이 시작된 것처럼 당신은 자꾸 콧물을 훌쩍이고 돌기 돋은 혀는 쓰디쓴 미각을 꺼낸다
당신은 얼마나 먼 거리에 놓여 있는 포크인가,
포크 든 오른손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질 때 창자 속으로 떨어진 것은 재료들의 삶도 죽음도 아니었다 식용 꽃봉오리에 얹혀 있는 내 눈이었다
그때 나는 먹이사슬에 매달린 짐승처럼 휴지를 꺼내 조심조심 눈을 닦았지 손의 관습도 습관도 아닌, 포크에 묻어 있는 공포를 지우는 일이었지
바닥에 눕힐 때마다 당신은 나에게 죽여준다고 말했지 생의 절정을 바란 건 아니지만 당신보다 먼저 바닥이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고층빌딩 창문에 매달린 사람에게도 기중기에 목을 매단 사람에게도 공중보다 바닥이 먼저 다가왔을 뿐, 죽음을 바라보진 않았을 거야
우리는 진작 사후 세계를 보고 있었던 거야
계산하고 나가자,
오래전 외삼촌이 월남에서 돌아왔듯 우리는 쌈값을 내고 사지에서 돌아왔지 생이 불현듯 내게로 왔듯
죽음 또한 그렇게 온다면, 포크는 여전히 식탁 아래 남아 있을까, 바닥이 포크처럼 쥐어진다면 당신과 나의 간격은 얼마나 더 넓어지는 걸까,
동물성
구분되지 않는 우리를 무리라 부른다
당신과 헤어지면 나는 나라는 개인, 나를 꽃잎이라 부르면 당신은 바깥쪽은 무르고 속은 단단한 꽃잎
당신이 내게 보석이면 당신이 탄생시킨 나는 뼈대 있는 보석 중 하나가 된다
당신의 언약과 손가락을 사랑할 때 겨울과 봄이 동거하는 3월이 오고, 3월에 태어난 바람은 방황하는 개처럼 피부병을 앓지만
진실 되게 서로의 상처를 핥는 우리는 길을 잃고, 몰려드는 두 팔과 두 다리에 겁을 먹지만
우리끼리 있을 때 너울거리는 이, 격렬한 춤
이러한 감정을 적폐積弊라 부를 때 구태여 삼키지 않더라도 우리는 위태로운 절벽을 소화한다
꽃도 짐승도 아닌 이미지를 소화한다는 것,
식물적인 상상을 한입에 털어놓고 죽은 우리는 그저 골격이라 불리지만 통점을 자극하면 조금 더 크게 이빨을 드러내는 우리라는 무리
죽음에 이르러야 깨우치는 동물성에 대해 날마다 이별하는 당신과 나는 산호다 자웅이체다
액화질소탱크/정우신
분해되고 싶었지
우주처럼
척수가 뽑힌 채 이동 중이었지
피에 대해서는 늦게나마 깨달았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겠나
알 수 없는 바람이 불고
사랑이라는 말은 미래를 속이기 좋았네
당신은 일찍이 그걸 믿지 않았지
아니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눈을 내주었던가
한쪽 눈을 감으면
아직도 당신이 바라보던 세계가 보인다네
세계라는 말,
참 덧없지
우리의 욕망을
분배하기 좋았지
알 수 없는 꽃이 휘날리고
당신은 내 얼굴을 하고 미소를 짓고 있네
내가 비난했던 사람들
대부분 내 속성을 닮았지
덩어리가 완성되길
바라
과연 나는 먹음직스러운가
종교를 알아보게
피를 완전히 교체한 다음 날은
당신이 살던 집이
자꾸만 생각나
끔찍하다네
그럴 때면
샐러드를 만들고
술을 데우지
목숨이 하나밖에 없던 시절
불행을 물려줄 수 있었던 인간의 마지막 세기
나는 무슨 일이든 항상 여지를 두었으니
비겁해 보였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최선이었다네
당신을 지속시키기 위함이었지
우리에게 유전된 포유류의 낭만은 제법 쓸 만했다네
다음 새 떼를 아직도 기다리는지 당신은 긴 잠에서 깨어나질 않고
나는 절단된 다리가 있는 곳으로
기어가
군침을 흘려보는 것이네
물끄러미/ 정상하
나는 나로부터 먼 데 서 있었다
내가 비에 젖어도 나는 젖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았다
눈 속에 떨고 있는 내가 있고
눈발의 건너편에 서 있는 내가 있었다
지나가시는 하느님의 등이 허전했다
새 잎이 혼자 돋아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밤새 고양이가 울고
밤새 고양이가 남았다
나를 태운 기차가 떠나고 나는 남았다
마루는 마루끼리 멀고
벽은 벽끼리 멀었다
우리는 각각 제 발등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각 옷에 묻은 풀벌레 울음이나 뜯고 있었다
혼자 견디다가 혼자 죽는 것을 아득히 보고 있었다
누구도 누구를 흔들어 일으킬 말이 없었다
알 수 없는 음악가
매미들은 다른 매미를 맴돌며 울고 있는데
소리틀도 없고 울림통도 없는 매미는 어찌 우나
울음을 품고 있는 매미가 가여운데
나는 어찌 우나
더 이상 치지 않는 피아노의 뚜껑은 늘 열려 있었고
건반의 소리들은 먼지가 되었는데
건반은 어찌 우나
다른 매미를 부르지 않아 '매미들'이 될 수 없는
매미에게, 바닥에 놓인 물 한 사발 같은 울음은 없으리
소리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악기가, 아무리 신들려 울었어도
고물상에 가면 다 고물이 된다
먼지는 온 세상을 누르는, 소리 없는 건반이다
당신은 어찌 우나
백야의 시간/한영채
터널을 지나온 후 밤이 사라진다 나의 몸이 기울어진 후이다 긴긴 시간이 낮을 달린다 사라지지 않는 별을 보며 삼단 커튼을 닫는다 눈을 뜨고 잠을 청했으나 눈썹엔 서릿발이 내린다 눈이 부시다 밤이 깊었으나 전등이 필요치 않다 개미들은 영문도 모르고 집안을 맴돌았다 눈 깜빡할 사이 감청색 오로라가 휩쓸고 지난 뒤였다 뿌옇게 백야는 할 말을 잊었다 내가 걸어온 길을 잃어버렸다 다시 뒤돌아 황량한 풍경을 남긴 발자국을 보며 마지막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손잡이는 필요치 않았다 방금 스쳐 간 자리에 적막은 또 스쳐 지난다 꿈을 꾸듯 어떤 기억을 찾아가는 동안 풍경의 안쪽은 망각 속에서 자랐다 이대로 북쪽으로 북쪽으로 눈을 감고 종소리를 따라 들판을 걷는 시간이다 푸른 호숫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묵직하게 펜을 들었다 백지에 다시 점을 찍기 시작한다 지지 않는 태양 너머로 다시 여행을 떠난다
스피커/서영처
불도저가 잠든 자들의
봉분을 뭉개고
굴착기가 잠든 골목들의
꿈을 파헤쳤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 차례 악몽이 지나가고
우후죽순 솟아오르는 고층
숭숭 뚫린 구멍마다
자리를 잡고 인광을 뿜어내는
아픈 자들의 터, 아파트
하나의 표정밖에 없는
가면을 쓰고 가면에 든다
하나의 표정밖에 없는
가면을 바꿔 쓰고 팔다리를 흔들며 노래한다
이목구비를 잃은 얼굴들 어른거리는
창과 벽들의 세계
자기공명영상 같은 구멍과 구멍 속에서
사람들이 콘크리트를 갉아 먹는다
음향기기를 가득 세워 둔 도시
증강하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소음
의료용 시멘트로 때운 내 두개골에서도
불안한 음향이 빠져나온다
폐광촌(廢鑛村) 기형도
쉽사리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우리는 젖은 이마 몇 개 불빛으로 분별하였다.
밤은 기나긴 정적의 숯으로 우리를 속이려 들었지만
탐조등으로 빗발을 쑤시면
언제든지 두서너 개 은칼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후에 빗물을 털어버린 시간이
허기와 바람을 펄럭이며 다가오고
우리는 낄낄거리며
쉽사리 틈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잔등에
시뻘건 불의 구멍을 꿇곤 하였다.
누군가 불타는 머리 끝에서 물방울 몇 알을 훅훅 털며
낮은 소리로 군가를 불렀다. 후렴처럼.
누군가 불더미에 무연탄 한 삽을 끼얹었고
녹슬은 기적 몇 마디를 부러뜨렸다.
우리들 이미 가득
불길은 무수한 암호를 날리었으나
우리는 누구도 눈을 뜨지 않았다
번들거리는 무개화차 그림자 속을 일렁이며
아아, 고인 채 부릅뜬 몇 개 물의 눈들이
빛나며 또 사라져갔다.
우리도 한때는 아름다운 불씨였다.
적막이 어둠보다 더욱 짙은 공포임을
흰뼈만 남은 역사까지도 알고 있었다.
깊은 잠 한가운데 폭풍이 일어 우리가 식은 땀을 꺼낼 때마다
어둠의 깃 한쪽을 허물고
예리하게 잘린 철로의 허리가 하얗게 일어섰다.
그럴때면 밤의 절벽에 이마를 깨뜨리면서
우리는 지게의 멜빵을 달았다. 애초부터
우리에게 화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화강암 같은 시간의 호각소리가 우리를 재촉하고
새벽은 화차 속의 쓸쓸한 파도를 한 삽씩 퍼올렸다.
땅속 깊이 불을 저장하고 우리는 일어섰다.
날음식처럼 축축한 톱밥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곧이어 바람으로 불려갈 석탄에 삽날을 꽂으며 이제는
각자의 생을 퍼담아야 할 차례였다.
탐조등을 들고 일어서면 끓어오르는
피에 놀라 우리는
가만히 서로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욕망은
우리를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역사를 걸어나올 때
무개화차 위에서 타는 불꽃을
잠 깬 등뒤로 얼핏 우리는 빼앗았다.
아아, 그곳에는
아직도 남겨져야 할 것이 있었다.
폐광촌 역사에는
아직도 쿵쿵 타올라야 할 것이 있었다. (1981)
내 인생의 中世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너무 오래되어 어슴프레한 이야기
미류나무 숲을 통과하면 새벽은
맑은 연못에 몇 방울 푸른 잉크를 떨어뜨리고
들판에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나그네가 있었지요
생각이 많은 별들만 남아 있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나무들은 얼마나 믿음직스럽던지
내 느린 걸음 때문에 몇번이나 앞서가다 되돌아 오던
착한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나그네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았지요
닫히지 않는 입술처럼 송종규
꿈속에서 본 사람의 얼굴은 빛들의 얼룩으로 눈부셨지만 슬픔으로 터질 듯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오래된 액자였던 거 같기도 하다
넓은 들판에 사과나무가 있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커다란 접시였던 거 같기도 하고 풍차였던 거 같기도 하다 꿈속에서는 공원의 벤치들이 햇빛을 받고 있는 여름 한낮이었는데 아버지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나가셨다
방울토마토가 바구니 안에 소복한 꿈을 꾸었는데 그것은 햇살에 익어가는 맨드라미, 아니면 먼 바다 기슭의 하얀 포말이었던 거 같기도 하다
꿈속에서 본 풍경들은 자주자주 엉뚱한 방식으로 진화하거나 번져나간다, 마치 뜨거운 마가린처럼 녹아서 형체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그것은, 기억이나 환영 같은 거
그러므로 나는 꿈꾸는 구름
시간의 지층이 삐끗했거나 기억의 오류이거나 잘못 연결된 코드처럼
나는 불완전한 문장이다
영원이라고 발음하면 닫히지 않는 입술처럼
모든 구름에는 물기가 묻어있다
만추 조정인
덩치 큰 산짐승들이 내려와 인간의 살림을 뒤질 것이다
마음을 기꺼이 앓겠다는
각서라도 써야할 것이다
씻고 식탁을 정리하고 자정 넘어
잠자리에 들려는데 불현듯 행인1처럼 지나가는 생각
이 사랑은 무모하고 무용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들은 이유가 없다
바람은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 낮고 느리게 불었지
그날 발목을 감는 바람은 어딘가 익숙한 데가 있었지
그것은 지표면의 것이 아닌
지구 내부 맨틀로부터 뛰쳐나온 거대한 짐승의
미친 열정이 내뱉는 신음 같은 것
지독한 번민의 날들을 부러 게으르게 지나고 있다
나의 사랑
더, 더, 더 쓸모없어질 테다
여름의 빛과 어둠이 응집된 열매들은
자정 너머에서 부스럭거리고
그리운 곳으로부터 바람은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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