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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

by 이성근 2020. 12. 9.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1) 박일환 시인과 함께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 (3) 전사(戰士) 김사이와 뜨겁게 대화하다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 (5) 최종천 시인의 변모와 철학적 사유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1) 박일환 시인과 함께

이성혁 : 박일환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성혁입니다. 전엔 자주 뵈었는데 요즘은 자주 뵙지 못하네요. 웹진 <문화 다>에서 4월부터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이란 제목으로 작가들과의 인터뷰를 다달이 연재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순서로 선생님께 부탁드리게 되었습니다. 마침 등 뒤의 시간(반걸음 출간)이라는 시집을 막 출간하셨기 때문에 시집 출간 축하 인사도 드릴 겸 해서요. 선생님께서는 1997<내일을 여는 작가>로 시 추천을 받아 등단하셨지요. 이번 낸 시집은 다섯 번째 시집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집만 펴낸 게 아니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도 아주 많이 내셨어요. 다년 간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계셨으니까 교육 현장 경험을 살린 교육 서적을 많이 내셨습니다. 제가 선생님 소개를 드리는 것보다는 선생님께서 직접 자기소개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문화 다> 독자를 위해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박일환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시인을 꿈꾸기 시작해 경희대 국문과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흔히 말하는 범생이였고, 사회의식 같은 건 전혀 없었지요. 입학하자마자 문학회에 가입하고 싶어서 마침 신입회원 모집 공고문이 붙은 걸 보고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건 공고문의 문구가 변혁시대의 문학이라고 되어 있었다는 건데요. ‘변혁시대라는 말이 뭘 말하는 건지 알지도 못했거니와, 그보다는 뒤에 붙은 문학이라는 말만 보고 찾아간 거지요. 그때가 19803월이었습니다. 들어가서 선배들이 처음 읽으라고 권한 책이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였습니다. 그러면서 문학 공부보다는 사회과학 공부를 시키더군요. 이른바 이념서클이었던 셈인데요. 얼마 안 있어 광주가 터지고, 제 의식 속에도 서서히 운동권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시도 김지하의 황토부터 시작해 김수영, 신동엽, 김남주, 박노해를 비롯해 그 무렵 활동을 시작한 젊은 시인들이 만든 <시와 경제>, <오월시>, <분단시대> 동인들의 작품을 주로 찾아 읽었지요.

 

대학 졸업할 무렵 진로를 고민하다 마침 부전공으로 들었던 교직과목 덕분에 교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고, 얼마 후 전교조 창립 조합원이 되면서 해직교사라는 신분을 얻게 됐습니다. 그 무렵에는 교육운동을 위해서라면 문학도 포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는데, 복직 후에 시가 할 수 있는 역할과 힘에 대해 다시 고민하면서 습작에 몰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1997년에 비로소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교사와 시인의 길을 걷게 된 건 참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 관련 글들을 쓴 건 제가 가르친 학생들에게 빚진 게 많아서 조금이나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보려고 했던 거고요. 지금은 교단에서 물러나 이런저런 글들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성혁 : 선생님께서 등단하신 1997년이면 IMF가 시작되는 해군요. 이때부터 한국 사회는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사회로 돌입하게 된 것 같습니다. 90년대엔 문화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그 자유가 허상이었다는 건 IMF로 인해 드러났다고 봅니다. 말씀하셨듯이 선생님께서는 엄혹했던 80년대를 치열하게 사셨습니다. 정치적 의식도 뚜렷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등단 이후 선생님께서는 리얼리즘을 지금까지 견지하면서 시작에 임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등단 이전 어떤 시를 쓰고 싶으셨으며 등단 이후 어떤 시를 써오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박일환 : 앞서 말한 것처럼 격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80년대를 거쳐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고, 그런 의식의 연장선에 놓인 시를 쓰고자 했습니다. 당연히 시가 딱딱할 수밖에 없었지요. 더구나 교사라는 신분에서 오는 도덕적 강박 같은 것이 내면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를 자유롭게 풀어놓는 법을 몰랐습니다. 등단 전에 교사 문인들과 몇 년에 걸쳐 합평모임을 가졌는데, 그때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시는 관념이나 교훈이 아니다라는 것이었거든요. 그런 한계를 돌파하려고 상당히 애를 쓴 편이지만, 여전히 그런 습성이 조금은 남아 있을 거라고 봅니다.

 

문학이 선전 팸플릿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관념에만 기대는 것 역시 문학의 본령에서 어긋나는 태도라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90년대에 개인의 내면을 강조하면서, 80년대 문학과 단절을 시도하는 걸 보고 저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강했습니다. 물론 90년대 문학으로부터 언어를 부리는 기술이나 틀에 박힌 상상력의 틀을 깨는 힘 같은 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대를 뚫고 나가는 언어가 아니라 시대를 외면하는 언어는 거짓 위안 혹은 자기 기만에 가까울 수밖에 없으리란 판단을 했고,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시대에 밀착한 작품을 쓰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좋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건데요. 그런 점에서 기존의 언어와 낡은 형식에 기대려는 안이함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리얼리즘은 특정한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이라고 할 때, 그 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을 어떻게 빚을 것인가 하는 점은 저에게도 여전한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성혁 : 아마 말씀하신 리얼리즘의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시인으로서 사회 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신 듯합니다. 사회참여적인 문학 집단 <리얼리스트 100> 활동도 열심히 하셨죠. 등 뒤의 시간에도 나오지만 노동자들의 고공 농성장에 결합하시거나 희망버스에도 참가하셨습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현장에 문인들이 어떻게 결합해왔는지 간단하게나마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박일환 : 시인은 작품으로만 말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거짓 주문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하지만 언어라는 건 내가 발명한 게 아니고 뭇 대중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들의 삶을 일구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걸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생생한 언어로부터 멀어질수록 문학은 관념과 자족의 울타리에 갇히게 될 겁니다. 내가 모르는 걸 말할 수 없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사실을 그려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람들이 사는 곳, 그중에서도 지금 당장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을 직접 도울 수는 없지만 그들이 고통스럽게 내지르는 말을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작가들은 잘 쓰는 사람 이전에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리얼리스트100>이라는 문학 집단을 만들어 활동했던 건 그런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벗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지금은 내부동력이 떨어져 활동을 중지하게 됐는데, 언젠가는 비슷한 집단이 새로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성혁 : 그러면 시집 등 뒤의 세계의 시세계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질문 드리겠습니다. 해설을 쓴 노지영 평론가도 시집 맨 처음에 실린 시 핥아주는 혀를 언급하면서 해설을 풀어가던데요, 저도 첫 장을 열자마자 읽게 된 이 시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짧으니까 전문 인용할 수 있겠는데요, 이 인터뷰를 읽는 독자들을 위해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갓 태어나 송아지를 혀로 핥아주는

어미 소의 축축한 논망울 속에서

새끼 소가 천천히 뒷다리를 일으키고 있다

 

혀의 쓸모는 말을 할 때보다 핥아줄 때 더 빛난다

 

 

이 시는 선생님의 시론격인 시 아닐까 생각합니다. 노지영 평론가도 그렇게 보았던 것 같고요. 어미 소가 새끼 소를 핥아주는 것과 같은 시 쓰기. 결국 시인도 말을 하는 자이니까 그의 혀는 저 어미 소처럼 빛날 수는 없겠지만, 해당 구절은 그 어미 소의 마음으로 혀를 써서 말을 하겠다는 선생님의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작가께 작품을 해설해달라고 질문하는 것이 좀 어리석은 일일 수 있겠지만, 작가와의 대담이니까 이 시와 관련해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시의 역할에 대해 질문 드릴게요.

 

박일환 : 인간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불완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본질이나 진실을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다만 본질이나 진실의 일단을 보여주거나 그쪽으로 향하는 입구를 제시해 줄 수 있을 뿐이죠. 그래도 작가들이 계속 글을 쓰면서 헛된(?) 작업을 이어가는 건 본질과 진실의 밑바닥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꿈을 포기한다는 건 인간이길 포기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래서 계속 새로운 언어, 더 좋은 언어를 탐색하면서 지금보다는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거죠. 하지만 세상은 날로 비인간의 길로 접어드는 것 같고, 진실을 가리는 오염된 말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인터넷만 조금 들여다봐도 온갖 차별과 혐오의 말이 넘치는가 하면 정치인들의 말에서는 품위라는 것조차 찾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 중에서도 실제 삶의 양태는 그렇지 못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죠. 미투 국면에서 진보 인사나 예술가들의 추악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 게 그런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는 저는 정의로운 말보다 공감과 연민의 말이 훨씬 소중하고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신동엽 시인이 좋은 언어로 세상을 채워가자고 한 건 아마도 그런 뜻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시인은 올바른 언어를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내 곁에 있는 수많은 너를 끌어안고 핥아주거나 같이 아파해주는 울음과 같은 언어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성혁 : 이 시집의 좋은 작품 중에서 표제작인 등 뒤의 시간이 제겐 특히 좋은 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시의 뒷부분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므로 새순이 돋는 건/새로운 생명의 탄생이기도 하지만/그 앞에 무수한 죽음이 있었다는 걸/슬쩍 밀쳐내기도 한다우리는 보통 새 생명의 탄생만 주목하지만 생명의 탄생 뒤에 있는 죽음들은 외면합니다. 이 시를 읽고 우리가 얼마나 죽음들에 대해 무심했던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이 시를 표제작으로 정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박일환 시인

 

 

박일환 :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 다른 말로 발전한다는 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눈부신 기계문명의 발전 이면에 가려진 수많은 고통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발전이란 게 인간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 김용균 청년의 죽음이 큰 충격을 주었지만 세상은 별반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속도에 대한 숭상, 편리함과 쾌락만 추구하는 온갖 욕망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그런 욕망의 덫 안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헛된 희망을 속삭이는 거짓 언어가 주는 달콤함에 취해 있다고나 할까요?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소금기둥이 된다는 설화가 애초에 전승된 의도와는 달리, 우리 모두 뒤를 돌아보면 소금기둥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작용하고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불안감을 조성하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본과 권력을 지닌 이들이 우리에게 계속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있는 거 아닐까요? 앞만 보아서는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알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뒤돌아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봐야 똑바로 왔는지, 지그재그로 방황하며 왔는지, 혹은 엉뚱한 길로 왔는지, 나아가 길 중간에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이웃들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그렇게 뒤를 돌아보아야 하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독자들이 제 시를 읽고 잠시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성혁 : 이 시집에는 교육현장에서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시들이 적잖이 보입니다. 특히 학생들이 경쟁에 내몰리는 현실을 비판하고 마음 아파하시는 시들이 눈에 띄는데요, 다섯 편의 정글시대 약사연작이 그러한 현실에 대한 풍자적 비판을 가하고 있는 시들입니다. 중고등 학생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경쟁에 내몰려 생기를 잃어버리고 마는”(정글시대 약사 2)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교직 생활을 하시면서 보아 왔던 여러 문제들, 특히 안타까운 일들이 있었겠죠. 이에 대해 선생님께서 겪으신 경험이나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박일환 : 현대 사회는 모든 걸 숫자로 환산해서 평가하는 체제로 만들어 왔습니다. 점수로 학생들을 줄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교원능력평가라는 걸 실시해서 일정 점수를 얻지 못하면 재교육이나 퇴출을 시키고, 성과급 역시 업무평가 점수를 가지고 3단계로 나누어 차등지급합니다. 결근이나 조퇴 횟수, 연수 이수한 시간, 맡은 업무 등을 가지고 점수를 매기는데, 수업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아이들과 얼마나 친근하게 지냈는지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 다른 직종은 모두 경쟁을 하는데 교사들은 왜 경쟁 대상에서 빠져야 하느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일반 기업의 경쟁 시스템은 괜찮은 건가 하는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회 시스템이 강고하게 구축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작년에 대입제도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고, 결국 정시 비중을 높이는 걸로 결론이 났습니다. 정시 비중을 높인다는 건 수능을 강화한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결국 사교육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돈 많은 집 아이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로 강연을 간 적이 있는데, 그 학교에서는 정시로 대학을 가는 학생이 거의 없다고 하더군요. 수능으로는 도저히 대도시 학생들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거였어요. 결국 대입 문제에서 발언권이 큰 집단은 기득권을 가진 집단일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렇지 않은 계층에서도 수능이 제일 공정하다는 잘못된 신화에 물들어 있다는 겁니다. 무엇이 공정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포도 농장에서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급하는데, 농장 주인이 오후에 온 사람에게도 오전부터 와서 일한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주더라는 거죠. 사람들이 공정하지 못한 처사라고 농장주에게 항의하자 예수는 농장주 편을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늦게 온 사람에게도 집에 딸린 식구들이 있고, 그들을 먹여 살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같은 품삯을 주는 게 당연하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인데요. 공정함에 대해 다른 시각을 일깨워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기계적인 공정함이 아닌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진정한 공정함일 수 있다는 생각이 폭넓게 자리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에서도 그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요. 하지만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점수와 서열로 모든 것을 가리려는 방식은 교육의 본질과 거리가 멉니다.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들은 저마다 기숙사를 짓고 있습니다. 집에서 통학을 할 수 있는 학생들도 기숙사에 들어가려 하고, 부모들도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선호합니다. 고등학생들에게 기숙사가 꼭 필요한지 역시 묻지 않습니다. 기숙사에 붙잡아놓고 엄격한 규율에 따라 학생들을 관리하면 대학 진학률이 높아질 거라는 믿음만 붙들고 있습니다. 몇 해 전 모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고학년이 저학년을 지도하게 규칙을 만들었다가 저학년 학생이 고학년 학생에게 맞아 숨진 일이 있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아무도 기억하려 하지 않습니다.

 

모 대학교수가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써서 화제가 된 일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에게는 경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성혁 : 방금 드린 질문과도 연관되는 질문이기도 하겠습니다. 이제 4월이네요. 세월호 5주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시집에도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시편들이 있는데요, 팽목항에서라는 시가 제겐 뜨겁게 다가왔습니다. “누가 죽였는가?/끈질기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고 선생님께서는 쓰셨어요. 그리고 슬픔과 분노와 참회는 바로 누가 죽였는가?”라는 물음과 함께 해야 하고, 그렇게 물으면서 가는 길에 당신을 만나” “함께 물어야 한다고 쓰셨습니다. 마음을 찌르는 구절이었습니다. 여전히 세월호 참사의 진상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진상조사에 저 물음이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저 물음을 지금도 여전히 품고 계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아니 현재 선생님께서는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에 대해 전반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폭 넓게 질문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박일환 : 당연히 물음을 품고 있습니다. 세월호 진상조사위원회를 껍데기로 만들었던 세력이 있고, 2기 특별조사위원회 역시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이번에는 정말 성역 없는 조사가 이루어져야겠지만, 쉽지 않을 수 있겠다는 염려를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안산 화랑유원지에 추모공원을 만드는 일도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걸 보며, 암울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김용균 청년의 죽음은 더 이상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로 사회를 굴려 가면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이자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그런 명령에 응답할 자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게 솔직한 제 판단입니다. 말로만 생명과 안전을 외칠 게 아니라 제도와 의식으로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하는데,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입니다. 물론 아무리 멀고 험해도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그러자면 시민사회의 토대가 더 넓고 단단해져야 합니다. 거기에 작가들도 당연히 힘을 보태야 하고, 작가들 스스로 자각된 시민의식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작가이기 전에 시민이라는 걸 분명히 인식할 때,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을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성혁 : 세월호 참사, 그리고 김용균 청년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의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한국 사회 전반이나 국가에 대한 거시적인 비판을 보여주는 시편들이 적지 않습니다. 시의 정치적 참여를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요즘은 많이 수그러졌지만, 시와 정치에 대한 담론이 문단에 무성했습니다. 시와 정치 담론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궁금하고, 또 시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박일환 : 삶과 관계된 모든 행동과 태도를 정치라고 한다면,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선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도 하나의 커다란 제도라고 할 때, 모든 제도는 억압을 전제로 하며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감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도와 마주해서는 대화가 아니라 제도 자체를 깨뜨리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건 다른 세상을 꿈꾼다는 말과도 통하는 걸 텐데요. 작가들이 정치에 대해 말한다면 그건 지금과 다른 세상이 가능하고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게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식의 말을 하면 너무 이상적인 것 아닌가, 혹은 아나키스트가 되라는 건가 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군요. 하지만 깨뜨리지 않고 새로운 걸 만들 수는 없다는 점에서 저는 비판적 이성을 갖추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지금까지 없던 전혀 새로운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건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제 믿음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죠. 새로운 세상의 싹은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실 속에 숨어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탐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상상력의 뿌리도 현실이라는 땅에 깊게 내려야 합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순간 언어는 힘을 잃고 맙니다. 아무리 휘황한 광채를 뽐내는 말도 그저 장식용 언어 이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문학과 정치라고 할 때 작가가 정치적 발언을 하라는 말이 아님은 물론이려니와 작가가 직접 현실 문제에 개입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참여시나 목적시를 쓰라는 말은 더욱 아니고요. 모든 시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참여시라는 용어 자체가 지닌 협소함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겁니다.

 

낡은 것과 이별하기, 부정의 정신을 벼리기, 이런 것들이 저는 문학이 정치와 관계 맺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학은 정치적입니다. 기존 질서에 복무하거나 강화하는가, 반대로 기존 질서에 저항하거나 깨뜨리는가에 따라 정치성의 색깔이 결정되는 거겠죠. 물론 이때 질서라는 게 반드시 거대 구조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삶에서 부딪치는 무수히 많은 거미줄 같은 것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실은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꿔내는 게 정치제도를 바꿔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성혁 : 정치성에 대해 폭넓고 근본적으로 생각하시는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선생님의 독특한 혁명관이 조금 이해가 될 듯합니다. 이 시집에는 한국 역사에서 스러져간 혁명가들을 잊지 않고 호명하는 시도 눈에 띄는데요, 혁명에 대한 사유를 궁글리는 시편도 있고요. 이런 시편들을 보면 어떤 혁명의 비전을 통해 선생님 시의 사회 또는 국가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능소화가 그러한 비전을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되는데요, 저는 이 시집의 대표작 몇 편을 꼽으라면 이 시를 꼭 집어넣겠습니다. 전교조가 법외노조 판결을 받았을 때, 화자는 능소화에서 관능을 느끼고 관능적인 혁명과 혁명적인 관능에 대한 생각을 궁글립니다. 그리고는 혁명은 고독한 것이라는 김수영의 정의와는 달리 혁명은 서로 눈멀게 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계세요. 시의 마지막에는 악착같은 관능만이 이글거리는 태양의 눈빛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구절을 남기십니다. 이 구절이 무척 제겐 강렬했습니다. 시에 표현된 선생님의 혁명에 대한 비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박일환 : 관능이라는 말은 매혹이라는 말과도 통하는 지점이 있을 텐데요. 둘 다 강렬함과 끌림이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낱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궁극이 바로 이런 지점에 맞닿아 있는 거 아닐까요? 시에서도 썼지만 능소화 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눈이 먼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두려워서 능소화에게 다가가지 못한다면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자리에서 사랑과 혁명이 싹 트는 거라고 생각해 보았어요. 강렬한 끌림을 외면하지 않고 다가가는 마음, 비록 위험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말이죠. 그럴 때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거겠죠.

 

최근에 변홍철 시인이 펴낸 시집 사계를 펼쳐보던 중 시인의 말 마지막을 사랑의 영구혁명을 위하여라고 해놓은 게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혁명의 바탕은 사랑이며, 혁명도 사랑도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진짜 사랑, 진짜 혁명이라는 생각을 가만히 다시 새겨 봅니다.

 

이성혁 : 이젠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은 것은 현재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문제점은 무엇인지 듣고 싶고요,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시가 어떻게 나가면 좋겠는지 선생님의 희망사항을 듣고 싶습니다. 물론 후자의 질문은 선생님의 시작(詩作) 방향에 대한 질문도 되겠습니다.

박일환 : 앞에서 너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도 앞에서 웬만큼 이야기를 한 듯하고요. 한국 사회 혹은 한국 문단의 문제점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짧게 제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작업에 대한 이야기만 할까 합니다. 이번 시집 앞에 붙인 시인의 말에서 제가 앞으로 계속 시를 쓴다면 결합보다는 분리에 집중해야겠다는 말을 했는데요. 저는 우리 사회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비정상적인 결합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지점들에 대한 사유가 필요할 것 같고, 능력껏, 조금씩,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묵묵히 제 길을 걸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성혁 : 그 말씀 저도 시집에서 읽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다시 질문 드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군요. 하지만 이미 많은 질문을 내놓고 많은 답변을 하신 터라 여기서 인터넷 대담을 마치는 걸로 하겠습니다. 숙고할 만한 여러 좋은 말씀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구요, 그럼 오프라인에서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위 인터뷰는 웹진 "문화 다"에서 진행한 것으로, 웹진 문화 다와 뉴스페이퍼가 공동으로 게시하였습니다.

 

이성혁 평론가, 박일환 시인|2019.04.10.뉴스페이퍼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 (3) 전사(戰士) 김사이와 뜨겁게 대화하다

온전히 일하면서 시를 쓰고 시집을 묶는다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달라붙어 미친 듯이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은 듭니다. 그런데 그것 또한 내 삶의 조건이었으니 아쉬운 대로 가야지요. 세 번째 시집에 대한 내용을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여성의 노동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여성과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는 무엇일지 생각하는 중입니다.” -김사이 詩人

김사이 시인의 첫 시집에서는 두 힘이 공존한다. 살기 위해 밑바닥을 거닐었던 구로공단 이야기와 아버지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가족사가 그것이다. 구로공단에서 보낸 닭장 같은 생활은 그녀에게 부조리한 세상의 민낯을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고, 시인이 운용하는 언어를 악착같이 만들었다. 또 하나의 힘은 복잡한 가족사에서 시작된 의 정체성 문제이다. ‘에 대한 지독한 타자화는 그녀의 몸을 차갑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간혹 따뜻한 시편들도 확인되었지만, 이 시들은 시집을 통과하는 두 힘이 잠시 물러날 때 꿈틀거리는 순간의 여유일 뿐 지속적이지 않았다.

그녀의 두 번째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는 서정적인 문체를 바탕으로 부조리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는다. 이 힘에 오염된 를 회피하지 않고 표면에 드러낸다. 이 싸움은 첫 시집에서부터 예고되었다. 살갗으로부터 오는 긴장에서 시인은 마르크스도 레닌도 주먹도 법도 주변일 뿐 / 남자들의 철옹성 같은 연대에 / 홀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가 / 지난하고 더딘 시간으로부터 / 맞짱을 뜨며 진정 고독하게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겪은 수모와 무관하지 않다.

 

며칠 전 나는 그녀의 신간을 읽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웹진 <문화 다>에서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라는 주제로 특집을 준비하고 있으니 인터뷰에 응해줄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때 그녀가 나에게 했던 첫 대답은 오늘 짤렸어요. 시간 됩니다였다.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우리에게 다가올까.

 

그녀를 만나 보았다.

10

문종필: 첫 번째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2008912일에 발행되었고, 두 번째 시집이 2018127일에 발행되었습니다. 10년 만입니다. 10년 동안 무엇을 하시면서 지내셨나요? 10년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김사이: 여전히 먹고살 궁리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사람으로 죽어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10년의 시간이 까마득합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왔습니다. 일하고 사랑하고 시도 쓰면서 지냈지요. 어떤 때는 한없이 안으로 침잠하다가 또 어떤 때는 거리에서 농성장에서 놀기도 하면서, 사회가 변하는 시간에 따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을 마지막처럼 사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시 쓰기

문종필: 시인마다 개인차가 있어서 시집을 자주 내거나 늦게 내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펼쳐 보인 예술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빠르게 시집을 펴내는 시인들에 비해 속도가 늦어 보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작법과 관련이 있나요?

 

김사이: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제게 특별한 습관이나 기교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어서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서 영감을 얻자마자 바로 쓰지는 못합니다. 또 규칙적이지도 않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이 몸에 들어와야 시가 쓰이는 것 같습니다. 언어를 잘 다루는 시인들을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제가 그러지를 못하니 말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점들은 제 모습과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사는 방식과 시 쓰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생각입니다.

 

문종필: 시작과 관련해 고민이 되는 지점이 있을까요?

김사이: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 알 수 있고, 글을 보면 그 글을 쓴 사람이 보이듯이 나와 내 시는 어수룩하고 미련스러울 정도로 융통성 없는 점들이 닮았다고나 할까요. 나는 조직에 걸맞은 인간형이 못 됩니다. 예전에 조직 부적응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듯이 관계를 맺는 데에도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합니다. 나 스스로를 많이 괴롭히며 사는 편인데 시어에 그런 점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합니다. 시어가 경직돼 있는 건 아닌지, 그런 부분들이 사유의 폭을 제한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됩니다.

 

여성

찬밥 남은 밥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을 때 무조건 먹는다

내 밥 구하려고 남의 밥을 하러 와서

쉴 틈 없이 밥을 해도 내 밥은 불안정한데

나는 언제 사장의 가족이 되었을까

 

이모 띵동 엄마 띵동 아줌마 띵동 여기요 저기요 띵동

일용직 아줌마나 돈 벌러 온 이주민 아가씨나

어이 띵동 여보 띵동 미스 김 띵동 야 띵동

시간을 떠도는 대기번호

허공에 떠 있는 가족

 

삶이 근육통 관절통으로

삐거덕거리고 절룩거린다

언제부터 아팠는지 왜 아파야 하는지

이브가 여자로 기록되는 순간 불행은 시작되었는지 몰라

여자의 노동은 속절없이 떠도는 뜬구름 같은 사랑일지도

 

사랑 없는 섹스 같은 앨리스의 노동

아버지나라에서 찬밥 남은 밥처럼

먹을 수 있을 때 무조건 먹는

성실한 날들

- 성실한 앨리스전문

 

문종필: 선생님의 두 번째 시집에서 가장 묵직한 힘은 여성의 소외를 다루는 지점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주제에 힘을 쏟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사이 시인.

김사이: 어쩌면 이 사회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여성들은 수십 번 비슷한 생각을 해봤으리라 생각합니다.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물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렸을 때는 자각을 못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나는 나로 살고 싶은데 자꾸 안에서나 밖에서나 여성임을 일깨우며 끊임없이 강제하고 억압하면서 금을 긋고 있지요. 그래서 가 아닌 대상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끊임없이 분열한다는 것이지요.

 

문종필: 내 죄는 무엇일까, 예감, 너의 오랜 습관인 나, 성실한 앨리스, 보통 날들, 사랑하니까, 보온도시락통, 아무도 없었다, 균열, 교양의 나라, 단풍등에서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시편들 중 너의 오랜 습관인 나는 긍정과 부정 사이에 있는 습관의 영역을 다루고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아도

살아남은 세포들이 습관처럼 깨어나

용모를 단장해서 나를 지우고 너의 습관으로 간다

 

오늘은 나라는 시간이 무참하지 않기를

오늘은 내 여자씨가 무사하기를

오늘은 또 오늘은 그리고 늘 오늘은,

 

너의 오랜 습관이 된 일상

내 하루의 노동과 사랑도 오르가슴도 없는

원나이트 스탠드를 한다

- 너의 오랜 습관인 나전문

 

김사이: 습관을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바른 행동이나 좋은 생각의 습관은 본받을 일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잘못된 습관들이 만들어낸 문화나 풍토가 상식이 되고 도덕이 되고 제도가 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 또한 같은 시간에 살고 있으니 내 행동이나 생각들에도 그런 습관들이 무의식중에 녹아들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문종필: 선생님의 말씀처럼 부조리한 기계의 장에서 우리는 하나의 세포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씁쓸합니다.

 

아버지

문종필: 시집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양가적인 감정에 놓여 있습니다. 선생님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김사이: 바람둥이였습니다. 고인이 된 지 꽤 지났어도 애증이 뒤섞여 있을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집단은 어떤 일들이 있건 없건 간에 사랑으로 시작하지만 가장 폭력적이기도 하고 가장 아프게도 하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으로 풀어가기도 하지만 사랑만으로 풀 수 없는 아주 이상한 구성체인 것 같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표지.

 

문종필: 첫 번째 시집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억세게 그려졌던 반면에 두 번째 시집에선 틀니이부자리처럼 연민과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가족은 정말로 이상한 구성체인 것 같습니다. 하나의 감정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생사를 넘나들다 한 고비를 넘기자

병상에 일어나 앉은 아버지

틀니를 쏙 빼서 닦는다

이웃집 마실 갔다 돌아온 것처럼

평온한 모습으로 정성껏 닦는다

 

어린 시절에 늘 배가 고팠다고

난리 중에 피란 다니면서도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뭐든 먹고 보자던

그 긴 시간들이

신념처럼 굳게 들러붙었는지

정신 들자마자 틀니부터 닦는

 

달달 떠는 어눌한 손놀림

손가락이 자꾸 엇나가는데도

하나하나 정성들여 기도한다

살겠다고

한참을 바라보다 밥 먹으러 간다

살겠다고, 나도

- 틀니전문

 

-

문종필: 선생님의 시편 중에 나는 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여기, 묻지 마 따지지 마의 경우, 외부의 부조리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타자화시켜 를 일으켜 세우려고 합니다. 진정한 괴물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반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생님이 생각하는 는 누구인가요? 어떤 존재인가요?

김사이: 나를 가만 들여다보면 대체적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가면(假面), 이중적인 마음, 위선, 욕망 등 그런 요소들을 끄집어내고 싶었습니다. 이 사회에서 아직 반백을 살고 있으니 사람에 대한 존중이나 예의가 죽은 현실을 만든 데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누군가는 중심에서 비껴나 있다고, 누군가는 폭력이나 차별에 대해 글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또 누군가는 거리에 나가 힘을 보태고 있다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그런 저항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누군가들은 그 생각들이 실제 일상에서,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지켜지고 있는지는 스스로 지속적인 자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감각을 열어두지 않으면 조직이나 수직관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익숙해지는 건 순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과 자부심들이 폭력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도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지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더 아래로 밑바닥에까지 내려가 착취하면서 무시하거나 배제시키고 있지요.

괴물은 괴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괴물로 만들어지는데 사회가 만들기도 하지만 주변에서, 가까운 사람들 속에서 더 쉽게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를 부쩍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으로 죽어야겠는데 그건 무엇인지도 같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노동

문종필: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노동은 무엇인가요?

김사이: 제 깜냥으로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대부분의 노동은 원래 고되고 피로한 것이지요. 태어나면 살아야 하는 것처럼 노동은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여정이랄까. 세상으로 출근해서 무덤으로 퇴근하는 그런 것…….

 

한국사회는 더욱더 고단한 것 같습니다. 고용 불안에, 안전 불감증에, 최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씩 다치거나 죽거나, 하루아침에 싹둑싹둑 잘려 나가는.

 

죽음

알맞은 체온으로 알맞은 꿈을 꾸며 알맞게 살고 싶었다

나는 누구의 무엇의 부제가 아니라 나였어야 했다

머뭇거림과 두려움 사이에 망각의 강이 흘러

오랜 세월을 외면한 나는 뿌리 없는 씨로 떠돌았다

불행의 눈동자에 갇히니 삶이 대기발령이다

 

그늘의 딸로 태어나 그늘진 몸에 알록달록한 무늬들

나를 걸어 잠근 이번 생은 글러먹었다

오롯하게 내 죽음을 누리는 것

스스로 죽어가는 시간에 내가 마침표를 찍는 것

글러먹은 생에 대한 저항으로

- 저항의 방식부분

 

문종필: “오롯하게 내 죽음을 누리”(저항의 방식)는 방식은 무엇인가요?

김사이: 살면서 내 의지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는 건 착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유로운 것 같지만 자본주의의 질서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무엇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끊임없이 감시하고 감시당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거나 말거나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습니다. 자본과 권력은 자유로울까요? 죽음 또한 계급적이어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묻혀 산다면 행려병사나 고독사의 통계에 보태주고 가는 것 아닌가 싶어 내 죽음은 내가 정하겠다, 하는 소심한 저항이라고나 할까요. 아직 그 시기를 정하지 않아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포근함

문종필: 가끔은 기쁨을 읽으면서 무기력한 지금 이곳에서 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의 창작 과정을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따뜻하고 포근해서 반가웠습니다.

 

검은 얼룩이 천장 귀퉁이에 무늬로 있는 것

곰팡이꽃이 옷장 안에서 활짝 피어 있는 것

갈라진 벽 틈새로 바람이 드나드는 것

 

더우나 추우나 습한 부엌에서 벌레랑 같이 밥 먹는 것

화장실 바닥에 거무스름한 이끼들이 익숙한 것

검푸른 이끼가 마음 밑바닥을 덮고 있는 것

드러나지 않고 손길 닿지 않는 곳에

끈적끈적함이 붉은 상처럼 배어 있는 것

삶 한켠이 기를 써도 마르지 않는 것

 

바람 한점 없이 햇볕 짱짱한 날

지상의 햇살 모두 끌어모아

집 안을 홀라당 뒤집어 환기시킬 때면

기름기 쫘악 빠진 삶이

가끔은 부드러워지고 말랑말랑해져

고슬고슬해진 세간들에 고마워서

그마저도 고마워서 순간의 기쁨으로 삼고

또 열심히 살아가는

- 가끔은 기쁨전문

 

김사이: 이 시는 지하방에서 살다가 옥탑으로 옮기면서 느낀 생각과 감정들을 초고로 묵혀두었다가 한참 지나 쓴 것입니다. 지하방의 환경과 옥탑방의 환경이 아주 많이 다른 건 아니었습니다만, 햇살의 귀함을 아주 생생하게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우중충하고 우울한 날들이 지속되고 있을 즈음 햇살 좋은 날 빨랫줄에서 빳빳하게 말라 춤추는 빨래들과 바람이 왔다 간 집 안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순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살면서 맑아지는 마음이나 감정들은 돈이 많다거나 내 명의로 된 집이라거나 그런 것보다는 비록 옥탑방일지라도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에 얼마나 고마운지를 새삼 느꼈다는 것이지요. 제가 아마 이래서 돈을 못 버나 봅니다.

 

그리고 고층빌딩과 고층아파트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 낮은 층은 햇볕이 들지 않거나 또 건물들이 바짝 붙어 있어서 서로의 햇볕을 막아 늘 그늘져 있는 곳이 많지요. 이 햇볕 때문에 소송도 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출근하면 하루 종일 자신이 일하는 공간으로 들어갔다가 저녁에야 나오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썼던 것 같습니다.

 

가난

문종필: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가난은 무엇인가요?

김사이: 죄입니다. 더러운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비슷한 시점에서 묘한 느낌을 받은 일이 두세 번 있었습니다. 예로 노숙자에 대한 초등 저학년들의 반응은 더럽다였습니다. 일부 젊은 세대는 노동자라는 단어에 대해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전염병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노숙자들은 노동자를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일부분이라고 믿고 싶으나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예감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죄가 아니라고, 더러운 것도 아니라고 목소리를 내도 그 목소리는 세상 속으로 퍼지지 않고 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각자 방식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앞으로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가난은 단지 불편할 뿐이라고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점잖게 말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합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주변을 돌아보면 바로 옆에 있습니다.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 아닌데 사회가 방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편할 뿐이니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이 말은 정말 아무 쓸데없는 동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은 그냥 가난입니다.

 

나이

문종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김사이: 글쎄요. 다만 성숙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나이와 성숙이라는 것이 비례하지는 않더군요. 학식이나 부 또한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비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픈 역사를 지녔다고 해서 성숙한 사회가 아니듯 말입니다.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는, 본인의 경험치가 모든 판단의 기준인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느낍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저절로 성숙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경우들이 많아졌습니다. 나 또한 나이를 먹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

문종필: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희망은 어디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까요?

김사이: 사랑이라고 쓰고 염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염치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 ‘희망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다가옵니다.

 

 

세 번째 시집

문종필: 시집과 관련해서 아쉬웠던 적이 있었나요? 세 번째 시집은 어떻게 꾸며질 수 있을까요?

김사이: 대부분 그렇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온전히 일하면서 시를 쓰고 시집을 묶는다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달라붙어 미친 듯이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은 듭니다. 그런데 그것 또한 내 삶의 조건이었으니 아쉬운 대로 가야지요. 세 번째 시집에 대한 내용을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여성의 노동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여성과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는 무엇일지 생각하는 중입니다.

 

김사이 시인의 말 속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래서 믿을 수 있었다. 시인의 글을 읽고 질문을 덧붙이고 싶었으나, 이 몫은 독자들에게 열어두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한 시인을 인터뷰한 평론가가 바라는 것은 시인의 시집이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는 것뿐이다. 그녀가 출간한 두 권의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2008)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2018)가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길 바란다.

문종필 문학평론가, 김사이 시인|2019.06.17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 (5) 최종천 시인의 변모와 철학적 사유

인간과 달리 고통도, 피로도, 죽음도 알지 못하는 기계는 생명이 없는 대신 영원을 얻을 수 있다. 대신 기계는 사색하지 않는다. 죽음이 없으니 삶을 성찰할 필요가 없고 끝이 없으니 지나간 시간과 현재를 사유할 필요가 없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다. 인간은 갈대처럼 약하고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귀하다고. 최종천 시집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반걸음, 2018)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이 시집을 읽고 시인의 변모에 놀라워했다.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고 노동하는 이 가장 아름다운 이라고 말했던 그가 이 시집에서는모두가 다 노동 때문이다라고 쓰고, “긍지와 자부심으로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참 가엾은 사람들아 지구는 더워지고 있다./ 당신의 그 긍지와 자부심은 자본주의의 밑천이다./ 긍지와 자부심도, 넥타이도 다 풀어버려라.”(넥타이)라고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명과 미래에 대한 시인의 철학적인 사유가 워낙 깊고 심오하여 읽으면 읽을수록 질문만 늘어나게 되었다. 몇 번을 다시 읽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직접 최종천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이 궁금증과 목마름이 좀 해소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를 만났다.

 

김지윤: 안녕하세요. 인터뷰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심오한 책이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 두렵지만 제 짧은 소견으로는, 꾸준히 노동이란 주제에 천착해 오신 선생님께서 현재의 맥락에서 노동시를 다시 쓰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 시집이라 생각되었는데요. 삶 전체가 노동으로 전락해버린 시대에 노동자를 억압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통치 기술을 벗어나는 길로 근래에 포스트사회주의자들이 적극적 노동 거부(최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노동력의 흐름을 자본의 흐름으로부터 단절시키자는 취지로 노동거부를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런 주장은 가라타니 고진의 노동력 판매 거부 전략 등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이지만, 전면적인 노동 거부가 합의되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성사된다 해도 자본이 노동 거부의 유효성을 상실시킬 충분한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반론이 만만찮은 것이 사실입니다.)를 말하고 있는데요. 혹시 이러한 흐름에 대해 인지하시거나 동의하는 부분이 있으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의 부족한 이해를 보충하기 위해, 이 시집을 쓰실 무렵 선생님의 생각과 출간 후 1년이 지난 지금의 소감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시인의 말에서 노동해방은 원천 봉쇄되어 있는 세계이며 이 시집이 노동해방을 굳게 믿고 있는 노동계급에게 드리는 진혼곡이라고 쓰신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으며(노동의 종말)” “그를 찾으려면 집을 태울 것이 아니라 해체해야 한다”()고 쓰셨습니다. 노동의 폐기가 아닌 해체라는 뜻으로 보이는데 노동을 완전히 해체해버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최종천: 우선 노동해방의 문제부터 풀어봅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열심히 읽어온 책이 기독교 텍스트인 성경/성서입니다. 이 성경과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는 저술들이 있는데, 우선 노자의 도덕경. 화이트헤드의 이성의 기능.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입니다. 이성의 기능에서 화이트 헤드는 목적적 인과관계를 말하고 있는데, 동물의 몸은 목적적 인과관계에 의한 몸이라고 합니다. 동물의 몸은 어떤 특별하고 개별적인 목적에 맞게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원숭이는 나무를 잘 타고, 기린은 목이 길어서 높은 나뭇가지의 잎을 먹을 수가 있고, . 그런데 이러한 존재는 또 있습니다. 인간이 만드는 기계가 바로 그러한 것이죠. 목공기계는 목제의 가공에, 땅을 파는 기계는 땅을 파는 데에만 특수화된 기계죠. 화이트헤드는 이제 인간은 그러한 목적적 인과관계를 탈피한 보편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자신이 아주 보편적인 기계인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개별적인 기계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기계는 노동을 저축해 두고 꺼내서 쓰는 것입니다. 인간이 기계를 만드는 이유는 자신의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하는 육체의 진화를 반영한 것입니다.

 

김지윤: 김지윤 선생님 사진.jpg“몸 노동만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은 진화하게 되어 있는 것”(제곱이란 무엇인가?)이라는 선생님 시 속 구절처럼 로보칼립스에 대한 예감은 우리를 두렵게 하곤 합니다. 우리가 알던 노동이 점점 사라져버리는 세상에 대한 어두운 상상 때문이지요. 선생님께서는 노동의 미래 -더 나아가 어쩌면 인간의 미래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 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최종천: 성경을 읽어보면 인간의 미래가 보입니다. 지금 종교와 과학이 뜨겁게 대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은 자연의 진화와 일치합니다. 성경은 오로지 인간에 대하여 말합니다. 내가 창조한 자연의 법칙과 논리가 이러이러 하니 너희는 그 법칙에 복종하라! 요컨대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자연/세계에 너를 일치시켜라! 그것이 행복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사리질 것이다. 이거죠. 최근에 나온 스티븐 호킹의 거대한 질문에 대한 단순한 대답? 인가요? 읽어보면 앞으로 인간은 우주를 식민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아닌 인간이 제작한 기계를 먼저 행성에 보낸다. 이겁니다.

 

그는 앞으로 최단 시간 안에 인간이 지구를 떠나야 계속 인간이 우주 안에 생존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이 지구 밖의 행성을 식민지로 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또 인간의 개조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 여기서 생각해 보면 그러니까 이런 말은 호킹이 숨기고 있는데요, 미래에 지구 밖의 행성에 갈 수 있는 인간은 현생하고 있는 우리가 아니고 우리가 개조한 인간입니다. 자연의 진화를 돌이켜 보면 네안데르탈을 멸망시킨 존재가 바로 우리 사피엔스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개조하여 탄생시킨 인간, 그들이 우리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호킹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우주가 논리적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논리에 의하여 전개될 인간의 비참을 우리의 이성을 통하여 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기계/문명의 발전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면 아닙니다. 스피노자는 이 문제를 분명히 했습니다. 거부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이다.” 내가 이성을 통하여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죠. 오늘날 인류는 자신이 발전시키고 있는 기계문명으로 인해 지구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곧 원시 노동사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연으로 돌아가 노동을 하며 사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논리적입니다. 논리의 끝까지 가 봐야 합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또 다른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핵전쟁을 하여 인류의 절반 그 이상을 순간에 덜어 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삽시에 거의 모든 문제, 환경파괴나 오염 지구의 온난화 기온의 상승.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휴머니즘을 말하면서 그런 반 인간적은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 곳곳에서 전쟁을 하며 사람들을 죽이면서도, 인간이 얼마나 지겨운 존재입니까?

 

저러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자연을 일단 인간의 소용에 닿게 가공하는 노동이 있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바다 속의 고등어는 그대로 두면 사물이지만, 노동이 가해지면 사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물을 사실로 하는 것은 노동입니다. 논고에 의하면 이 세계는 논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논리의 밖은 우연입니다. 내가 논고를 읽으면서 두려움을 느낀 것은 가능성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그는 이 세계는 가능성의 총체로서 논리 공간.”이라고 합니다. 논리의 내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인간의 미래를 단언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인간이 발전시키고 있는 기계문명은 분명히 논리적이기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가능성은 어디까지 논리 내의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논리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신동엽 시인은 일찍이 시인정신론에서 원수성 차수성 귀수성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논리 안에서 맴도는 자연의 순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도 이 세계의 논리적 구조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계 3차 대전은 어떤 무기를 가지고 싸울지 알 수 없지만, 4차 대전은 분명히 망치와 도끼를 가지고 싸우게 될 것이다.” 인간이 기계를 통하여 무궁한 진화를 하고 있습니다. 이 진화가 일직선일까요? 직선으로 쭉 나가는 것이 아니라, 원을 그리고 있을 것입니다. 직선으로 쭉 나간다면 그것은 인류가 전멸하는 것이고, 논리의 안에서 원을 그린다면 인간은 전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이 지구의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김지윤: “예술의 완성은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에 몰두하는 이유이다.”(노동의 십자가현악사중주) 라고 쓰신 구절을 보면 노동의 예술화, 유희화에 대한 생각이 엿보입니다. 그간 노동하는 시인으로, 예술보다는 노동을 우위에 두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예술-노동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시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노동과 예술의 관계, 노동의 예술화에 대한 생각을 여쭤보아도 될지요.

 

최종천: 화이트헤드가 이성의 기능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까지의 진화를 견인 한 것이 바로 이성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성/정신의 총체인 인간은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진화론과는 정 반대의 견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이트헤드의 견해가 옳을 것입니다. 이성은 자기초월성, 자신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이겁니다. 이 저술은 전멸은 각오하고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문명을 추구하는 인류에 대한 조롱과 풍자 해학 서늘한 비애를 문체에 담아내고 있으며, 합리적인 순서로 말하지 않고 도치법을 사용하여 박진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아주 잘 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100쪽이 못 되는 극히 압축된 저술입니다.

 

성경의 에덴동산은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동해방은 노동을 손에서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자연으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에덴동산을 읽어보면 인간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노동을 하면서 득한 인식이 아직 막연한 대상인식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낙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창세기 2장 에덴동산을 말하고 있는 장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그러니까 이 이전에 이미 인간은 노동을 한 것이지요. 창세기는 자연을 대상으로 노동을 하면서 득한 인간의 인식이 발전해 가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것이 실제 인간 진화와 일치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를 통하여 자연과 노동으로부터 인간은 아주 멀리 도망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오직 인간이 문제입니다. 문학은 별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논리는 각각 따로 있지 않고 연쇄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논리에서 어떤 일은 일어나고 어떤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것이 없습니다. 논리가 이렇게 사슬로 되어있기 때문에 논리의 끝까지 인류가 문명의 진화를 밀어 붙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바로 바둑을 축으로만 두는 경우입니다. 결국에는 막혀서 모두 따내게 되지요. 논리의 끝에서는 논리는 전복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요.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은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합니다. 다른 모든 학문이 밖에다 자신의 전제를 두고 있지만, 논리학은 자신 안에 전제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끝에 가서는 전복되어 돌아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것을 알았다면 논고의 명제들의 행간에 나타냈을 것인데, 그걸 요즘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게 독서의 흥미입니다. 이것이 논리의 한계이고 세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문명의 진화도 그렇게 될 것이 확실합니다. 인류는 다시 원시사회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구를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이 지구는 금성 같은 초열지옥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이전에 지구는 자신에게 필요한 수만을 남겨 두고 인류를 도태시켜버릴 것입니다. 인류가 넓은 지구에 작은 마을 공동체 단위로 서로 떨어져 알지 못하는 상태로 산다면, 거대한 문명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노자는 마을들이 서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류의 수가 극히 적어진다면 이러한 문명의 건설은 불가합니다. 태양이 폭발하여 지구를 삼키는 그 순간까지 인류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문명이 진화함에 따라 자연이 임계점까지 축소되고 그러면 인류의 수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다시 자연이 풍요롭게 살아나고. 문명이 부흥하고 이렇게 반복하는 진화를 이어갈 것입니다.

 

김지윤: 2019년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일까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현실의 반영, 시에서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싶은 부분이 있으셨다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너무 추상적이고 어려운 질문일 수 있겠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이 사회에 뭘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최종천: 저는 시가 예리함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날카롭고 모나고 인간의 영혼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구박하고 처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를 읽어 보면 한심합니다. 대부분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두루뭉술하게 인간을 위로하고 걱정하고 자기 연민에 젖어 듭니다. 문학상을 받은 작품집을 모두 모아 놓고 보면 통달한 척 하거나, 가난을 간절히 노래하거나, 인생의 깊이를 말하거나 하는 작품집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시대의 문제를 다룬 작품은 적을 것 같습니다. 우리 문학은 이러한 협소성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언어가 동물의 언어와는 다른 분절음인 것은 인간이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메타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분절음은 논리입니다. 이 세계의 전제가 논리가 아니라면 신은 굳이 분절음을 이용하는 인간을 창조할 필요가 없었고, 자연의 진화도 인간을 창조한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우연히 나타난 존래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 만약에 논리가 이 세계의 전제가 아니라면 언어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인간도 없을 것입니다. 신은 이렇게 우리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는 자신을 본떠서 인간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이성의 자기초월성. 신이 인간을 창조했는데, 자기보다 더 좋지 않거나 더 못하다면 그건 창조가 아닙니다. 이 말은 즉 자신보다 더 좋은, 더 나은 존재로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이것을 자기지시/자기언급라고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돌본다.“ 이 격언의 본 의미는 우주의 제 존재는 스스로 자신을 창조한다. 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 태초에 논리가 있었다. 언어가 없다면 세계가 없다. 세계는 무엇인가? 인간에게만 물어지고 있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답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곧 언어다. 언어가 곧 세계다, 라고.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 -요한복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이는 언어가 곧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세계란 언어에 다름 아닙니다. 신은 언어를 통하여 이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빛이 있으라!; . 어둠. 이라는 대상을 통하여 형식/질서를 부여한 언어!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입니다.

 

김지윤: 평소에 어떤 취미 활동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선생님께서 최근 일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무언가가 있다면 말씀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최종천: 우선 노동은 지금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쓰고 읽고 듣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음악을 듣습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시장에 갑니다. 그리고 농담을 나눌 단골을 만들고 있고요. 복덕방 책방 카페 공방 같은 곳들을 찾아요. 하루 2킬로 걷기도 실천하고 있죠. 그리고 어린이들 만나러 일주일에 서너 번 이마트에 갑니다. 그곳에 애기들도 어린이도 많이 가족과 같이 옵니다. 요즘 젊은 어머니들 중에는 아이들을 카트에 싣고 다니면서 어른들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시키는 엄마들이 있습니다, 손을 쥐고 악수를 하고 그럽니다. 하루에 꼭 한번은 어린이얼굴을 보라! 이게 나의 신조입니다. 기족을 잃어버린 어린이를, 가족을 찾아주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하지말자! 지구의 수명을 늘리자. 노자적 무위의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다 끝내고 난 후에도 나는 내가 최종천 시인과 그의 시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놀라운 열정과 지식욕에 감탄하고, 깊은 사유와 독특한 시각을 담은 시인의 말에 빠져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지나버린 시간이었다. ‘세계의 한계에 해당하는 언어의 한계와 인간의 유한함을 성찰하는 시인은 오늘의 우리의 시가 시대의 문제에 파고들어 천착하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로지 인간만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라는 주제에 비하면 문학은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고까지 말했다. 시인이 시장 복덕방 책방 카페 공방..을 찾고 하루 2킬로를 걸으며 노자적 무위의 날들을 보내는 이유는 그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을 만나기 위함이다. 그는 리얼리스트란, “사물을 바르게 보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 시대의 드문 리얼리스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바르게 보는 눈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모두가 기울고 비뚤어질 때 똑바로 바라보기를 원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외로움과 두려움이 어둠처럼 드리운다. 그러나 그의 걸음과 시선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곁에서 걷는 사람들이 부디 점점 늘어나기를./  김지윤 문학평론가, 최종천 시인|2019.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