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스물 여덟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찾아 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처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
십 수 년이 지나 요 근래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내게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 있고
걷어 채인 좌판,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창비 2009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에서 -제12회 '천상병 시상' 수상작
돈
처 아버님은 빨치산이었다
3년을 산에서, 그리고 3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나왔다
평생 보안관찰로 고향에서도 살 수 없었고
수박등 장사 우산살 장사
안해본 것이 없다고 했다
결혼하겠다고 찾아뵌 첫날
노동자고 월세방에 살며
더더욱 생활을 돌이켜 반성할 마음이 없다 하자
노기 띤 음성으로
음, 돈이 있어야 하네돈이 하셨다
그때 정말 돈이 한푼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단 한번도
내게 돈 이야기 하시지 않았다
자신도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어
셋째 딸 집에서 여섯달 누웠다 가셨다
가끔 욕창이 나 등 긁어주고
손 다리 주물러 드리면 마냥 행복해하셨다
벽제 용미리 공동묘지에
봉분없이 깨끗히 묻히셨다
십수년이 흘러 나는 아직도 생활을 반성하지 않고
전문 시위꾼으로 집회현장을 쫒아다니지만
가끔 그의 어조로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하곤 한다
조금은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젠 장인어른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1967년 전남 벌교 출생. 2001년 『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못난 시인』(공저),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 『사람을 보라』(공저) 등이 있다. 송경동 시인의 시가 지니는 매력은 작품의 배경과 바탕으로 삼고 있는 현장과 생활의 구체성에서 나온다. 시인의 시는 배관공으로, 목수로, 용접공으로 살아온 시인이 노동 현장의 감각을 생생하게 그려낼 때 특히 빛난다.
그해 늦은 세 번의 장마
그해 늦은 세 번의 장마는 음울했다
벼락 맞은 나무처럼 쓰러져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고 수많은 이들이
눈물바람으로 남북을 오갔다
수천명의 목을 자른 한 자본가는 수천 마리 소떼를 몰고 가
영웅이 되었다 그때마다 거리에서 부딪쳤던
곤봉의 세월이 허리를 끊으며 떠오르곤 했다
3년째 천막농성을 하다 구속당한
전자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안부와 무관하게
양장 고운 『체 게바라 평전』은 불티나게 팔렸다
8․15 사면복권증을 받아온 한 선배는
넌지시 매문을 물어왔다
“기획출판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데……”
혜화경찰서에서
영장 기각되고 재조사 받으러 가니
2008년 5월부터 2009년 3월까지
핸드폰 통화내역을 모두 뽑아왔다
난 단지 야간 일반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혀왔을 뿐인데
힐금 보니 통화시간과 장소까지 친절하게 나와 있다
청계천 탐앤탐스 부근……
다음엔 문자메씨지 내용을 가져온다고 한다
함께 잡힌 촛불시민은 가택수사도 했고
통장 압수수색도 했단다 그러곤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
웃는 낯으로 알아서 불어라 한다
무엇을, 나는 불까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
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
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
트럼펫이나 아코디언도 좋겠지
일년치 통화기록 정도로
내 머리를 재단해보겠다고
몇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
나를 평가해보겠다고
너무하다고 했다
내 과거를 캐려면
최소한 저 사막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싸피엔스의
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
저 바닷가 퇴적층 몇천 미터는 채증해놓고 얘기해야지
저 새들의 울음
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
이게 뭐냐고
경계를 넘어
나는 내것이 아니다
오늘은 평택 쌀과 서산 육쪽마늘과
영동 포도와 중국산 두부와
칠레산 고등어를 먹었다
내 뼈와 살과 피와 내장과
상념도 실상 모두 이렇게
태어난 실뿌리가 다르다
그런 내가 한 가지 생각에만 집착한다는 것은
도의에 맞지 안는 일이다 이렇게만
바뀌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도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햇빛처럼 쟁쟁해졌다가
물안개처럼 서늘해졌다가
산간처럼 첩첩해졌다가
바다처럼 평원처럼 무한히 열리는
모든 생명이 내 안에 살아 있다
나만이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이것은 내 것이라고 움켜쥐는 일도
갸우뚱한 일이다 내 조국만이 잘되어야 한다는 일도
치사한 일이다 양파도 알고
대파도 알고 쪽파도 아는 일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학생이 아니다
졸업한 지 오래되었다
당신은 노동자다 주인이다
시민이다 국민이다 아버지다
가정에서 존경받는 남편이고
학부모며 집주인이다
환자가 아니고 죄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침이면 건강센터로 달려가 호흡을 측정하고
저녁이면 영어강습을 받으러 나간다
노동자가 아니기에 주조조정엔 찬성하지만
임금인상투쟁엔 머리띠 묶고 참석한다
집주인이기에 쓰레기매각장 건립엔 반대하지만
국가 경제를 위한 원전과 운하 건설은 찬성이다
한 사람의 시민이기에 광우병 소는 안되지만
농수산물 시장개방과 한미FTA는 찬성이다 학부모로서
학교폭력은 안되지만, 한 남성으로
원조교제는 싫지 않다 사람이기에
소말리아 아이들을 보면 눈물이 나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는 반대하지만
북한에 보내는 쌀은 상호주의에 어긋나고
미군은 절대 철수하면 안된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시 쓰기는 실존적인 행위다. 그가 활동가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마음먹게 된 것은 바로 ‘외로움’ 때문일 것이다. 즉 외로움에 대한 실존적인 감수성이, 그에게서 시 쓰기라는 실존적인 행위를 이끌어냈을 테다. 그런데 시 쓰기만을 통해서는, 그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송경동 시인은, 억압받고 착취받는 이들인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그리고 억압과 착취를 낳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행동을 통해서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행하는 송경동의 시 쓰기는 연대와 투쟁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실존적인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의지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그에게는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를 쓰면서 동시에 행동한다.
송경동은 투쟁하는 시인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쓴 시를 품고 투쟁 현장에 참여한다. 그의 투쟁은 거리에서 이루어진다. 잘 알려져 있듯이, 송경동 시인은 한국 사회의 잔인성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즉 삶의 박탈이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던 기륭전자 해고자들의 투쟁 현장이나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농성하고 있는 현장—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달려간다. 그는 연대하는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그 현장의 맨 앞자리에 선다.
그곳에서는 자본의 행동대가 되어버린 전투 경찰이나 회사가 고용한 깡패들이 저항하는 이들에게 갖가지 위협과 모욕을 가하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용역에게 맞고 전경에게 체포되어 경찰서로 끌려간다. 그 와중에 그의 시는 써진다.『꿀잠』에 실린 김해자의 발문에 따르면, “포클레인에 파헤쳐진 흙구덩이에 처박힌 사람들과 실신하는 농민들의 고함과 절규, 볏짚을 태운 뿌연 연기로 싸움터가 된 벌판과 거리가 바로 그의 시가 잉태한 자리”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한국 사회의 주류가 외면하고 있는 그 “고함과 절규”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송경동 시인은, 적어도 투쟁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현재 한국 시의 ‘뜨거운 상징’이 되고 있다. 매스컴의 조명이나 ‘문단 권력’의 ‘띄우기’에 의해 그가 그러한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가 ‘뜨거운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그는 항상 ‘앞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앞자리는 새로운 시적 표현과 같은 미학적 영역에 위치해 있지는 않다. 그곳은 생생한 실제 현장의 ‘앞’을 의미한다. 그 현장의 앞에서, 그는 몸을 던져 저항하는 동시에 고함과 절규의 시를 잉태한다.
그래서 그의 시작詩作 활동은 ‘시와 행동’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김수영이 “시는 행동”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시의 이념idea을 말한 것이다. 시가 행동 자체가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일 것이다. 송경동 시가 이러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아니다. 시와 행동이 일치한다는 것은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이자 이념인 것이어서 한 시인이 그러한 이상에 실제로 도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허나 그의 시는, 언제부턴가 한국 시단이 외면해버린 그 이념을 다시 부상시키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란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의 일부분만이 아닐 실제로 삶을 건 행동일 수 있다는 시의 이념을 잊지 않게끔, 그의 시는 우리를 자극한다. 이성혁,『미래의 시를 향하여』464~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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