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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오탁번 블랙홍 外

by 이성근 2016. 1. 30.

 

블랙홀 오탁번

훈련/ 박남수

도량(道場)/ 임보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진란

가족/ 윤제림

어머니/ 이시영

가기 싫은 천국 오영록

다음 생에 할 일들 안주철

불타는 글자들 박지웅

그림자 박재연

꽃밭에 누워 -심언주

완성은 지루하다 손현숙

안개 속에서 아버지와 나와 담배 박순호

이팝꽃 김석규

가벼운 빗방울 허형만

오늘 쓰는 편지나의 멘토에게 천양희

행선(行禪) 윤제림

사람의 바다 이경

서귀포 오일장에서 김지윤

불이론 문숙

소금꽃 완하

꽃의 기억 복효근

금대암金臺庵에서 압축파일을 풀다 정태화

작은홍띠점박이푸른부전나비 서윤규

운주사 와불 강우식

노독 이문재

보림사, 얼굴 없는 부처 이대흠

늙은 느티나무에 들다 곽효환

쫄딱 이상국

서정소곡(抒情小曲) 이시하

오월 안상학

복사꽃 아래 저녁 최재영

우리 마을 김명배

계요등(鷄尿藤) 박남희

아담과 이브처럼 장철문

각별한 사람 김명인

봄에 관한 어떤 추억 상희구

모든 가구는 거울이다 이승희

개 같은 사랑 최광임

가을은 송해월

관계 / 고정희

의관(衣冠)을 썼디야, 지게를 졌디야? / 박이도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 박제영

벌 초 / 오변세

바람 부는 날 / 윤강로

삼류 오변세

치마 문정희

팬티-문정희의치마를 읽다가 임보

풍경 소리 / 최새연

무섭다 / 허홍구

사람을 그리워 하는 일 오인태

아지매는 할매되고 / 허홍구

後日譚 조상기

넌 나처럼 살지 마라 / 박노해

새해 아침에 / 홍수희

친구에게 이해인

희망을 위하여 / 배한봉

불취불귀( 不醉不歸) / 허수경

세상의 불빛 - 김진경

어떤 미소 /김두경

너무 멀리 / 강은교

어쩌자고 / 최영미

어느새 / 최영미

그리움을 삭히는 법 / 이만섭

소달구지와 기차/김한주

등 뒤의 사랑 / 오인태

살다가 보면 / 이근배



블랙홀    오탁번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택과 함께

白雲池 아래 防鶴里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 갔다

멍석에 널린 고추가 뙤약볕 같이 따갑고

함석지붕에는 하양 박이 탐스러웠다

누렁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제 똥냄새 맡다가 꼬리를 쳤다

찰칵! 한 장 찍고 싶은

우리 농촌의 옛 풍경 속으로

재작년 추석 무렵에 무심코 쑥 들어갔다

 

안방에서 머리가 하얀 안노인네가 나왔다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어른들께 답작답작 큰절을 잘 했다

그러면 친구 어머니가 씨감자도 쪄주고

보리쌀 안쳐 더운밥도 해주곤 했다

종명이 어머니가 여태 살아계시는구나!

나는 얼른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몇 만 분의 1초의 시간이 딱 멈추었다

종명이가 제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우주에서 날아오는 초음파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 임자! 술상 좀 봐!

초등학교 동창 마누라에게 큰절할뻔 한 나는

블랙홀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

무중력 우주선을 타고

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 防鶴里에 왔으니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

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 그럼 그렇고 말고지, 네미랄!

光速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을 쫓아가다가

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

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

 

 

 

 

훈련/ 박남수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 앞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보고

국도 끓여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시집그리고 그 이후(문학수첩,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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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道場)/ 임보

 

시장 밑바닥에 굴러다니던 삼돌이란 놈이

세상이 시끄럽다고 큰 산을 찾았다

석파(石破) 스님이 된 삼돌이 그러나

절간도 소란스럽다고 암자에 나앉았다

하지만 암자의 목탁소리도 번거로워

토굴을 파고 그 속에 홀로 묻혔다

토굴의 벽을 맞대고 열두 달은 지났는데도

천만 잡념이 꼬리를 물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러구러 서너 해가 바뀌던 어느 여름날 밤

한 마리 모기에 물어뜯긴 석파 문득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제 몸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토굴을 박차고 다시 시중으로 내려와

팔도 잡패들이 득실거리는 시장 바닥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자신을 다스리기로 했다

조약돌을 닦는 것은 고요한 물이 아니라

거센 여물이 아니던가

수십 성상이 지나 석파의 머리도 세어졌다

어느 날 천둥이 그의 머리를 깨고 지나갔는데

세상을 내려다보니

모두가 다 부처요, 보살 아님이 없었다

 

- 시집눈부신 귀향(시와시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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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진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구름도, 바람도, 햇살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꽃도, 나무도, 별도 달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미움도, 원망도, 회한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사랑도, 미련도, 눈물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첫봄처럼 개나리봇짐을 메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타오르는 꽃불을 들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사람을 사랑한 사람들이

문을 열고 문을 통하여

손에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네, 사람 사는 세상이네

- 시집혼자 노는 숲(나무아래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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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윤제림

 

새로 담근 김치를 들고 아버지가 오셨다.

눈에 익은 양복을 걸치셨다.

내 옷이다, 한 번 입은 건데 아범은 잘 안 입는다며

아내가 드린 모양이다.

 

아들아이가 학원에 간다며 인사를 한다.

눈에 익은 셔츠를 걸쳤다.

내 옷이다, 한 번 입고 어제 벗어놓은 건데

빨랫줄에서 걷어 입은 모양이다.

 

- 시집그는 걸어서 온다(문학동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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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시영

 

어머니

이 높고 높은 아파트 꼭대기에서

조심조심 살아가시는 당신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듭니다

죽어 이곳으론 이사 오지 않겠다고

봉천동 산마루에서 버티시던 게 벌써 삼년 전인가요?

덜컥거리며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엘리베이터에

아직도 더럭 겁이 나지만

안경 쓴 아들 내외가 다급히 출근하고 나면

아침마다 손주년 유치원길을 손목 잡고 바래다주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하루 일거리

파출부가 와서 청소하고 빨래해주고 가고

요구르트 아줌마가 외치고 가고

계단청소 하는 아줌마가 탁탁 쓸고 가버리면

무덤처럼 고요한 147

당신은 창을 열고 숨을 쉬어보지만

저 낯선 하늘 구름조각말고는

아무도 당신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허리 펴고 일을 해보려 해도

먹던 밥 치우는 것말고는 없어

어디 나가 걸어보려 해도

깨끗한 낭하 아래론 까마득한 낭떠러지

말 붙일 사람도 걸어볼 사람도 아예 없는

격절의 숨막힌 공간

철컥거리다간 꽝 하고 닫히는 철문 소리

어머니 차라리 창문을 닫으세요

그리고 눈을 감고 당신이 지나쳐온 수많은 자죽

그 갈림길마다 흘린 피눈물들을 기억하세요

없는 집 농사꾼의 맏딸로 태어나

광주 종방의 방직여공이 되었던 게

추운 열여덟 살 겨울이었지요?

이 틀 저 틀로 옮겨 다니며 먼지구덕에서 전쟁물자를 짜다

해방이 되어 돌아와 보니

시집이라 보내준 것이 마름집 병신아들

그 길로 내차고 타향을 떠돌다

손 귀한 어느 양반집 후살이로 들어가

다 잃고 서른이 되어서야 저를 낳았다지요

인공 때는 밤짐을 이고 끌려갔다

하마터면 영 돌아오지 못했을 어머니

죽창으로 당하고 양총으로 당한 것이

어디 한두번인가요

국군이 들어오면 국군에게 밥해주고

밤사람이 들어오면 밤사람에게 밥해주고

이리 뺏기고 저리 뜯기고

쑥국새 울음 들으며 송피를 벗겨

저를 키우셨다지요

모진 세월도 가고

들판에 벼이삭이 자라오르면 처녀적 공장노래 흥얼거리며

이 논 저 논에 파묻혀 초벌 만벌 상일꾼처럼 일하다 끙

달을 이고 들어오셨지요

비가 오면 덕석걷이, 타작 때면 홑태앗이

누에철엔 뽕걷이, 풀짐철엔 먼 산 가기

여름 내내 삼삼기, 겨우내내 무명잣기

씨 부릴 땐 망태메기, 땅 고를 땐 가래잡기

억세고 거칠다고 아버지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머슴들 속에 서면 머슴

밭고랑에 엎드리면 여름 흙내음 물씬 나던

아 좋았을 어머니

그 너른 들 다 팔고 고향을 아주 떠나올 땐

나 죽으면 일하던 진새미밭 강 묻어 달라고 다짐다짐 하시더니

오늘은 이 도시 고층아파트의 꼭대기가

 

당신을 새처럼 가둘 줄이야 어찌 아셨습니까

엘리베이터가 무겁게 열리고 닫히고

어두운 복도 끝에 아들의 구둣발 소리가 들리면

오늘도 구석방 조그만 창을 닫고

조심조심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는

흰 머리 파뿌리 같은 늙으신 어머니

-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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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박재삼 문학상 수상 시집인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 2012)에는 이시영 시인의어머니 생각이란 시가 실려 있다.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출근할 때나 외출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을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밀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네

 

가기 싫은 천국 오영록

 

가기 싫다

내가 아는 천국은 정말 가기 싫다

그곳엔 배고픔도 없고

질병의 고통도 없단다

황금으로 치장된 침상에서

덥지도 춥지도 않고

천사가 늘 부채질을 해 준다니 난 가기 싫다

일 년이 천 년이라는 천국

난 싫다

비록 힘들어도 노동 뒤에 시원한 물 한잔이 있고

아픔 뒤에 환희

조금의 황금을 얻기 위해 흘리는 땀

그 땀 뒤에 허기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철철 비가 눈이 오고

새가 울어주는 이곳

나비가 춤추는 이곳

요리조리 마귀를 피해 다니는 걸음

가끔 헛디디기도 하고

마귀와 싸워 이길 수도 있는 그 힘을 소망하며

난 마귀 없는 그곳이 싫다

모두가 천사들만 있다는 그곳

영원히 산다는 그곳보다

죽음이 두려운 이곳이

천만 배 더 좋다.

 

 

다음 생에 할 일들 안주철

 

아내가 운다.

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

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

아내가 빠르게 눈물을 닦는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생에는 집을 한 채 살 수 있을 거야.

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

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 줌 만져보자.

아내는 피식 웃는다.

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

아내는 밥을 차리고

아이는 내가 되어 대신 반찬 투정을 한다.

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

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잘 안된다.

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른 손등같이 웃으며 말한다.

오늘 급식은 여기까지

 

계간작가들(2013. 여름)

 

불타는 글자들 박지웅

 

도서관에는 쓸데없이 많은 정숙이 근무하고 있다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은 그들을 선량한 직원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들은 국가에서 심어놓은 비밀요원이다

바닥에 매설된 요원 사이를 통과하지 못한 자들

힘차게 걷던 한 시민의 발목은 화단에서 발견되었다

보라, 우리가 국가를 불렀을 때

국가는 우리에게 와 꽃이 되어 주었다

캄캄한 꽃, 침통한 꽃이 피어 있는 국가

국가의 지하에서 자란 꽃들이 낭자하게 피어 있는 사월

깨어진 글자들이 유리조각처럼 깔려 있는 사월

우리는 격실에 갇혀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호출하였으나

정숙에 적의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사월에 국가는 묵음이었으니

사월에 국가는 침대에 누워 꽃이나 피웠으니

이제 누가 창을 깨고 들어가 침몰한 사월을 인양할 텐가

소곤거리는 사이에 정숙은 어김없이 나타나

엄숙하게 경고하고 바닥에 매복한다

경솔하게 움직이지 마라 제자리를 지키고 지시에 따르라

, 살아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불타는 글자를 종이컵에 담고 우리는 행진한다

적막이 낭자한 이 사월에

격월간시사사(2015. 5-6월호)

 

 

 

 

그림자   박재연

 

그늘진 곳이면 어디든 따라나서는

바닥만 고집하는 낮은 사람

수저를 들다 말고 문밖의 당신을 바라보면

충견처럼 내 신발을 품고 엎드린다

그가 있어 세상은 낯설지 않고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일에 힘이 실린다

눈물 글썽이는 젖은 상대를 만나면

슬그머니 물러나 몸을 감추지만

뙤약볕으로 이글거리는 상대를 만나면

자신을 더욱 분명히 하는 사람

그도 나처럼 나이가 들어

키가 줄어들고 허리가 뚱뚱하다

오늘은 늙은 그가 나를 데리고

팔이 부러진 목련에게 문병 가자고 한다

그가 말없이 그래왔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그의 충견이 되어 몸을 일으킬 때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 그의 뒤를 따라나선다

 

시집지네(문학의전당, 2015)

 

꽃밭에 누워 심언주

 

식물원에 손톱을 던지면

떡잎이 새로 돋는다.

마구 팔을 휘저으면 나무가 자라고

나무는 자주 말투를 바꾼다.

아카시아 꽃들

조금 희고 조금 검고

역류를 견디느라

비린내가 나는데

꽃이 꽃을 복사하고 있다.

꽃 노릇은 지루하다.

 

일간그림과 가 있는 아침(서울신문. 2014-06-20일 토요일)

 

완성은 지루하다 손현숙

 

당신은 내가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고 불만이지만

포장을 뜯어버린 선물상자에 누가 눈독을 들일까

나머지를 채우고 싶은 욕망이 활기를 불러오는 거다

 

새벽에 눈 뜨자마자 커피를 즐기셨던 내 아버지도

커피 잔의 커피는 딱 칠 부를 고집했던 이유

여백에 대한 사색은 꽃씨에서 열매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있다

 

그쯤에서 엄마는 얼떨결에 새끼 낳고 또 낳아

아버지 모자까지 슬쩍 버리는 척,

 

다 끝났다! 죽은 남편 사진 앞에서 완성을 외친 그날부터

웬일인지 하얗게 기화해버리는 햇살에 한바탕 버무려져 배경처럼

 

난분분 꽃잎의 하얀 머리, 하얀 얼굴, 하얀 눈썹, 하얀,

사랑을 다 마친 육체 지루하다 졸다, 깨다, 빽빽하다

 

계간시와 산문(2015년 여름호)

 

안개 속에서 아버지와 나와 담배 박순호

 

담뱃갑이 이천 원이나 올랐다

애연가들에게 비보를 안겨준 울림은

꽤나 커다란 북이었다

찢기지 않는 소가죽이었다

입술을 꿰매 버릴 수도 없는 상황

창 밖 안개를 내다보는 일이 겁났다

담배 연기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기 때문

그런데, 냄새가 났다 담배 연기가 뜻밖에,

1998년 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났다

검지와 중지에 걸린 담배가 다 타들어가도록

안개 속에 서 있었다

금단현상인가?

아버지 손을 떠나지 못했던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수의는 해지고 오동나무 관은 갈라지고

보랏빛 오동꽃이 피었다

사업 실패 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친척에게 격식을 갖출 줄 몰랐고

가족을 외면했다 그럴수록 나는 귀찮을 만큼

담배심부름을 가는 날이 늘어났다

안개처럼 짧았던 생

아버지에게 담배는 가족이었고 종교였고 직장이었다

그러므로 인생이 주는 그늘 아래에서도 울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니 딱 한 번 울었다

생선뼈처럼 뾰족하게 누운 채

온몸으로 전이된 암을 점자처럼 짚어가면서

내 손을 잡고 울었다

그 울음은 이제,

안개가 깊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을 코에 가져다 대본다

아버지의 냄새와 닮았다

 

월간유심(20153월호)

 

이팝꽃   김석규

 

어쩌려고 이러느냐 온 산 온 들에 허벅지게 피어나서

배 고픈 줄도 모르고 쌀자루마다 다 풀어 흩뿌리니

깊은 골짜기 그늘 속으로 산나물 뜯으러 갔던 사람들

보따리 보따리 머리 무겁도록 이고 내려올 때

누가 저녁 짓는 연기 오르는 걸 보았다 하느냐

보리밭 사이로 만장도 하나 없이 지게에 얹혀 가는 날

뽀오야니 김 오르는 이밥 고봉으로 퍼담아서 줄 걸 그랬네

눈물로 다 젖은 치마자락 또 앞앞이 말 못하고

하늘에 가서도 목청 피 터지는 뻐꾸기가 되었나

산천초목 징그럽게도 푸르러 오고 무덕무덕 꽃은 피어나서

 

시집홀아비꽃대(태산, 2015. 3)

 

가벼운 빗방울허형만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매달릴 수 없지

가벼워야 무거움을 뿌리치고

무거움 속내의 처절함도 훌훌 털고

저렇게 매달릴 수 있지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나뭇잎에 매달리고

그래도 매달릴 곳 없으면 허공에라도 매달리지

이 몸도 수만 리 마음 밖에서

터지는 우레 소리에 매달렸으므로

앉아서 매달리고 서서 매달리고

무거운 무게만큼 쉴 수 없었던 한 생애가 아득하지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문장이 될 수 없지

그래서 빗방울은 아득히 사무치는 문장이지

 

시집가벼운 빗방울(작가세계, 2015)

 

오늘 쓰는 편지나의 멘토에게 천양희

 

순간을 기억하지 않고 하루를 기억하겠습니다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습니다

영혼의 주름살을 늘리지 않겠습니다

우울이 우물처럼 깊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장 슬픈 날 웃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겠습니다

혼자 사는 자유는 비장한 자유라고 떠들지 않겠습니다

살기 힘들다고 혼자 아우성치지 않겠습니다

무인도에 가서 살겠다고 거들먹거리지 않겠습니다

술 마시고 우는 버릇 고치겠습니다

무지막지하게 울지는 않겠습니다

낡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젊은 것들 당장 따끔하게 침놓겠습니다

그러면서 나이 먹는 것 속상해 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습니다

결벽과 완벽을 꾀하지 않겠습니다

병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생의 전부인 듯 살겠습니다

더 실패하겠습니다

 

 

계간시산맥(2014년 여름호)

 

행선(行禪) 윤제림

 

신문지 두 장 펼친 것만한 좌판에

약초나 산나물을 죽 늘어놓고 나면,

노인은 종일 산이나 본다

하늘이나 본다

 

손바닥으로 물건 한번 쓸어보지도 않고

딱한 눈으로 행인을 붙잡지도 않는다

러닝셔츠 차림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부채질이나 할 뿐.

 

그렇다고 한마디도 없는 것은 아니다

좌판 귀퉁이에 이렇게 써두었다

"물건을 볼 줄 알거든,

사 가시오."

 

나도 물건을 그렇게 팔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노인을 닮고 싶은데

쉽지 않다.

 

시집새의 얼굴(문학동네, 2013)

 

사람의 바다 이경

 

어떤 돈을 맡아보면 확

비린내가 난다

 

비 오는 날

우산도 사치가 되는 시장 바닥에서

썩어 나가는 고등어 내장 긁어낸 손으로

덥석 받아 쥔 천 원짜리

 

날비에 젖고

갯비린내에 젖고

콧물 눈물 땀에 젖은 그런

돈이 있다

 

등록금으로 주려고

찬물에 씻어도

뜨거운 불에 다려도 영 안 가셔지는 그런

비린내가 있다

 

이런 돈이 손에 들어온 날은 가끔

지느러미가 찢어진 돈과

돈이 헤엄쳐 온

사람의 바다가 보인다

 

월간시와 표현(20155월호)

 

서귀포 오일장에서 김지윤(1980)

 

매일 비워졌다 또 밀물 차오르는 모래톱처럼

닷새마다 꼬박꼬박 열리는 오일장

 

가을감자 파는 좌판 할머니 앞에서

한 푼, 두 푼 버릇처럼 감자 값을 깎다

하영 주쿠다(많이 줄게요), 하며 감자 자루 내미는

부르튼 손 검은 흙 낀 손톱 보며

할머니 텃밭 감자 위로 하영 쏟아졌을

뙤약볕처럼 사뭇 낯 뜨거워져

 

바람이 차요, 남은 것 제가 다 사드리면 집에 가 쉬실래요?

, , 경허믄 고맙수다게(그러면 고맙지요)

할머니 말씀에 그만 감자를 한 무더기나 사서

한 바퀴 돌다 집에 가는 길

 

아까 그 자리 그대로

한 무더기 감자를 또 그만큼 앞에 내놓고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할머니

 

할머니의 좌판에 놓인 감자를 정녕

내가 모두 가져갈 수 있다고 믿다니!

늘 그만큼의 부피와 무게가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게, 삶이라고

좌판에 앉은 할머니 나를 조용히 꾸짖는 듯하다

 

그날 저녁 소반 가득 찐 감자를 내놓고

자꾸 먹어도 허기지다

 

한 입씩 베어 문 듯 자꾸 비워지는 초승달처럼,

어둠이 살라먹은 자리 다시금 채워지는 만월(滿月)처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3(20150610

 

불이론 문숙

 

강아지는

나쁜 놈과 착한 놈만큼의 거리다

낮과 밤만큼이나 멀고도 가까운 사이

욕과 칭찬만큼이나 적대적인 관계

개는 부정어의 접두사

강아지는 사랑의 대명사

천한 것은 개

자식이나 손주처럼 귀한 것은 강아지

 

세상의 모든 강아지는

개를 빌려 세상에 나왔고

세상의 모든 개들도

강아지를 거쳐서 왔다

밤이 낮을 품고 낮이 밤을 품듯

우리는 하나다

 

비틀비틀 취객 하나가 내 옆을 스치며

개새끼하고 지나간다

 

계간시작(2015년 봄호)

 

소금꽃 완하

 

먼 산에 뻐꾹새 울고

잔바람 속으로 여름이 필 때

 

소금은 온다

바다를 길어온 물에서

소금은 큰다

 

큰 바다를 재우고 재워서

그리움의 바닥에 가 닿을 때

피어나는 꽃

 

사월 오월은 송화 울음으로 가고

유월은 뻐꾹새 울음으로 남았다

햇살과 바람 사이로

소금꽃 핀다

 

바다는 비로소 제 안에 들어찬

구름의 알갱이 털어

금빛 사리를 쏟아낸다

 

계간시와 소금(2014년 가을호)

 

 

 

 

꽃의 기억복효근

 

어시장 꽃게들이 트럭에 실려 떠난 자리

꽃게들의 다리가 널려있다

 

몸통은 어디론가 다 떠났는데

남은 집게다리는 아직도

지켜야 할 그 무엇이라도 있다는 듯이 꼭 아물려 있다 더러는

이쯤이면 됐다는 듯

무엇을 기꺼이 놓아준 표정이다

 

제 몸을 먹여 살렸던 연장이며

제 몸을 지키던 무기였던 것

종내는 제 몸을 살리기 위해

제 몸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냈을 터

 

몸통이 두고 갔거나

다리가 몸통을 떠나보냈거나

한 쪽 손을 두고 떠난 이주 노동자처럼

꽃게에게 마음이 있다면

집게발에 들어있을 것이다

 

끝까지 버틴 흔적,

그래서 남겨진 꽃게의 집게다리엔

슬픈 꽃무늬가 있다

 

계간불교문예(2015년 봄호)

 

금대암金臺庵에서 압축파일을 풀다 정태화

 

(1)

높은 단위에 앉아 계시니 심심도 하시겠다.

그 사실 대책도 없이 물어서 오래 출출하신 당신을 찾아오신 대추벌 한 마리 불경스럽게 흐흐 그대 입술에 내려앉아 계시니 금동불상金銅佛像 당신의 입술이 야단스럽게 부으셨다

지리산 옆구리 깊숙이 좌정하고 계시는 당신이 대웅전 높은 단입술 위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참에 청상靑孀 어머니 오체투지五體投止의 절, 오호라 달게 받아 드시면서 아랫배 방긋 부풀고 있는 중인데 대리석 섬돌에서 심심하신 고무신 한 켤레 나른한 하품 졸고 계신다.

 

그 가슴 왈칵 실리는 햇살, 낮잠 한 번 길게 주무시는 섬돌을 찾아오신 바람이 처마 끝 매달린 풍경을 댕그랑 댕그랑 흔들고 계신다.

 

이곳 금대암 오늘의 처지가 이와 같으니

이쯤에서 당신의 입술이 무슨 말이든 한 말씀하셔야 하겠다.

 

(2)

천년 세월 비바람 비빔밥 비벼서 달게 잡수신 적송赤松 한그루, 어깨를 늘어뜨려 내려놓으신 팔다리 가지를 떠나오신 산비둘기 한 마리

 

또르르 굴러 떨어진 풍경의 말씀 한마디 부리에 물고 푸드득 날아오르다가, 금대암 사찰寺刹 앞마당 바람 많은 허공을 빙빙 돌다가

 

천년바위 바람 터진 잔등 뿌리 내리신 전나무, 그 놈 참 튼실하게 자라 싱그럽구나, 중얼거리면서

 

우듬지 휘날리는 머리칼 하산하는 당신이 있다.

…………,

 

지리산 산자락 이름도 그럴듯한 다래원多來園 식탁에 앉아 삼계탕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계시는 사내

 

 

감출 수 없는 포만감飽滿感 졸음에 몰리는 동자승童子僧 동행同行의 아이를

그윽한 눈빛 지켜보고 계신다.

 

(3)

그때부터 수 천 년 세월이 흘러 지리산 옆구리 금대암 찾아오시는 사내가

수선화 같은 아내 한 분 모시고 와서

오체투지五體投止의 절, 108를 달게 받아 드시다가

금동불상金銅佛像 하산下山하시다가

늙은 잣나무 그늘 드리우고 계신다.

그러니 그대는,

 

날 저문 뒤 차려지는 아내의 저녁 밥상에 여분의 수저 한 벌 올려야 하겠다. 사람의 뇌경색腦梗塞이 모시고온 실어증失語症을 만나야 하겠다.

 

높은 단허공에 계시는 입술에 오늘도 불경스럽게 대추벌 한 마리 날아드셨으니, 그 입술 야단스럽게 부풀어 오르신 사내를 위하여

 

아랫목 구들장을 장작불 뜨끈뜨끈 지피는 것도 모자라, 뜨거운 숯불 화로火爐를 당신의 머리맡 신주단지로 모셔들여야 하겠다.

 

시집내 사랑 물먹는 하마(시산맥사, 2015)

 

작은홍띠점박이푸른부전나비 서윤규

 

어느 해질 무렵의 산책길에서 나는

우리나라 나비 중 가장 긴 이름을 가졌다는

작은홍띠점박이푸른부전나비를 만났다

키 작은 꽃대 위에 앉아 있는 나비 앞에

나는 숨을 죽이며 두 무릎을 꺾으며

눈 높이를 낮추었다

나비의 날개 속에는 점과 선, 면들이

천만, 백만 분의 일로 축소해 놓은 지도처럼

아주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쩌면 그 누구도 모르는

보물섬으로 가는 비밀지도인지도 몰랐다

나비가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할 적마다

나는 마치 꿈을 꾸듯 날갯짓을 하며

비밀지도 끝의 한 점, 섬으로 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무거운 몸을 내려놓고

나비춤을 추며 나비꿈을 꾸었다.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양 날개 가득

아름다운 별자리들을 촘촘히 박아 넣고 있었다

어느 사이 나비는 날아가고 나는

나비가 남기고 간 짧고도 긴 메시지를

내 마음의 호주머니 안쪽 깊숙이 접어 넣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꽃그늘 아래 머무는 바람처럼 나직이

네 이름을 불러본다

작은홍띠점박이푸른부전나비!

시집두부는 비폭력 무저항주의자(시인동네, 2015)

 

 

운주사 와불 강우식

 

부처님도 남녀가 같이 누우니

아름다웠다.

온돌방 같은

돌판 위의 운주사 와불.

 

사랑이었다.

캄캄 눈먼 사랑이었다.

사랑도 눈먼 사랑이 좋았다.

부처님도 중생도 같았다.

 

나는 천리 먼 길을

이 와불 한 쌍을 보기 위해

그녀와 왔다.

 

사랑이 돌이 되어 변치 않고

그저 남녀가 누워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사랑이 돌이 되어 변치 않고

그저 일심동체면 되는 것을 보기 위해

사랑이 돌이 되어 변치 않고

그저 부처님도 남녀인 것을 보기 위해

 

사랑은 비움으로써 환해지는 것이 아니라

있음으로써 없음을 채우는

물상임을 보기 위해 예까지 왔다.

 

사랑은 둘이어야 됨을

부처님은 묵언하고

행실로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죽어서도 저 와불처럼

천만년 남아 있으리.

내 마음속 소망을 그녀에게

말없이 보여주기 위해 왔다.

 

그녀가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격월간유심(2010. 5-6월호)

 

노독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장석주 시배달 사이버문학광장 문장(20150526)

시집마음의 오지(문학동네, 2011)

 

보림사, 얼굴 없는 부처 이대흠

 

보림사에 가면 목이 뚝 잘린

부처가 있다니까

얼굴이 없으니 부처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사람 몸 같은 돌덩이 하나 있다니까

 

안타깝게도 두상이 사라져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장모창 학예사가 말을 하지만

사실은,

 

돌부처가 제 얼굴을 버린 거야

 

천 년을 묵언수행 했지만

도무지 제 눈도 밝힐 수 없어

자기 목을 그만 뎅겅 잘라낸 거지

 

얼굴이었던 돌멩이는

어느 집 죽담에 굄돌로 주고

 

기다렸던 거야

어디 살아 있는 부처가 없나 하고

 

월간유심(201505월호)

 

 

늙은 느티나무에 들다 곽효환

 

언제부터였을까

수령이 수백 년은 되었을

동리의 정자를 품은 느티나무

사방으로 가지를 곧게 뻗어

무성한 그러나 인적 없는 여름을 떠받치고 있다

 

비늘처럼 껍질이 듬성듬성 떨어져 나간

늙은 느티나무 그늘에

몸 들이고 기대었던 사람을 생각한다

그를 닮고 싶었던 혹은 닮았던

그처럼 살고 싶었던 더러는 그렇게 살았던

 

바람이 전하는 말과

시간이 쌓아둔 흔적,

무수히 드리웠다 사라지는 삶들을

그는 오랫동안 켜켜이

몸 안에 쌓아두었을 것이다

 

얼음처럼 투명한 세포들이 쌓은 나이테

이제 그는 단단한 풍경이다

나는 아버지처럼

쉽게 흔들리지도 그렇게

일찍 지지도 그렇게

흘러가지도 않을 것이다

 

시집슬픔의 뼈대(문학과 지성사, 2014)

 

쫄딱 이상국(1946)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2(20150515)

 

서정소곡(抒情小曲) 이시하

 

시 같은 건 쓰지 말 걸 그랬네 시인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걸 그랬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당신과 당신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내가 만나 강원도 두메 어디쯤에 흙집이나 지어 설렁설렁 살걸 그랬네 시간이 멈춘 그곳에는 아무 때나 밤꽃 향기 짙어오겠네 아무 때나 밥물냄새 넘쳐나겠네 아무 때나 갓난애 울음소리 들려오겠네

 

순한 아이들이 하나둘 감자알처럼 옹골지게 매달리면 허허허허, 당신과 나는 웃어대겠네, 까치며 멧새며 까투리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고, 달빛 서리서리 고운 밤이면 참나무나 너도 밤나무가 당신과 나의 서툰 사랑가를 엿들으며 킬킬대겠네 가끔 소나기 시원하게 퍼붓는 날이면 호박전도 부치고 옥수수도 삶으며 툇마루에 앉아 내리는 비나 시름없이 바라보겠네 아이들이 일찍 잠든 밤이면 어쩌면, 어쩌면 또 밤꽃 향기 하르르르 물오르겠네

 

시 같은 건 쓰지 말 걸 그랬네 시인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걸 그랬네

 

시집나쁜 시집(천년의 시작, 2010

 

오월 안상학

 

흰 꽃 많은 오월

이팝나무, 불두화, 아카시아, 찔레꽃

인디언 아라파호족은 이런 오월을

오래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이라고 불렀습니다

 

푸르기만 하던 나의 오월도

살면서

오래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로 바뀌었습니다

 

하필 5·18 기념일에 돌아가신 아버지,

임병호, 박영근 시인, 권정생, 박경리 선생,

달력에 치는 동그라미가 하나둘 늘어났습니다

 

올해는 또 한사람이 돌아가셨습니다.

5·18은 이제 어느 달력에나 있으니 안심하지만

내년 달력이 생기면

523일에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려야겠습니다

 

오래 지날수록 더 그리워질 사람들의 오월

흰 꽃송이 더미더미 조문하는 오월입니다

 

시집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2014)

 

복사꽃 아래 저녁 최재영

 

복사꽃 나무 아래서 고기를 굽는다

봄 기운 선연한 나무 그늘로

삼삼오오 사소한 추억들이 모여들어

상추쌈을 크게 한 입씩 우겨넣는다

우적우적 도화꽃의 지나는 청춘을 씹어대며

한잔 세월을 주거니 받거니

지나간 모든 날들이 폐허라고

당장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다고

입 안의 고기가 튀어나올 듯 떠들어댄다

매캐한 냄새를 들이마시며 꽃나무가 쿨럭거린다

한창 빛나는 시절을 피워내는 중이라며

한 잎의 생이 고깃점 위에 떨어진다

화들짝, 어느 적멸이 이리 가볍고 뜨겁더냐

열렬한 연애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후일담까지

 

지글지글 고기판 위에서 익어가는데

구름들은 죄다 역마살 낀 죄인이다

누군가 불콰해진 얼굴로 성토하자

끄덕이며 또 한 잎이 떨어져 내린다

향기로운 모가지 처연한 꽃나무 아래서

몇 생이 흘러간 듯

아니 누가 지나는 청춘이고

내게 오는 꽃시절인가 싶은,

 

월간우리시(20154월호)

 

우리 마을 김명배

 

허리 굽은 길과

느리고 게으른 시간이 졸고 있는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교회 아니면 암자 하나

있으면 좋고

산새가 찾아와서 놀고 가면

더 좋습니다

한 오백년쯤 된

앉은뱅이집 몇 채가

이마를 맞대고 졸고 있고

그 안에 그도 있고 나도 있고

그를 닮은 누구와 나를 닮은 누구

그리고 그 세월이 있으면 됩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없는 듯 있는 평온

청기 올려 백기 내려

이런 놀이를 해도 좋습니다

허리 굽은 길과

느리고 게으른 시간이 졸고 있는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9시집달팽이 외나무다리 건너기(오늘의문학사, 2015. 1)

 

계요등(鷄尿藤) 박남희

 

그녀에게서는 오줌 냄새가 났다

그녀는 아담하고 너무 예뻤다

아름다움과 냄새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오줌냄새로 치장했다

아름다움의 비법이라고 했다

그녀는 오줌냄새의 비밀을 알았으므로

바람의 손이 두려웠다

 

그녀는 오줌 냄새 속에서

예쁜 생식기 모양의 꽃을 피웠다

그녀는 오줌을 참는 법을 몰랐다

냄새가 늘 진동했다

그녀의 전생은 닭이라고 했다

목 아픈 지상의 새벽을 몇 번이고 날아오르다가

볕 비낀 저녁 숲에 내려 앉아 꽃이 되었다

몸이 무거운 날개보다 꽃이 좋았다

이상 야릇한 지상의 냄새가 좋았다

 

*계요등(鷄尿藤) : 꼭두서니과의 여러해살이 덩굴성 식물로 구렁내덩굴· 계각등이라고도 한다. 7~9월에 흰색 바탕에 자줏빛의 꽃이 피는데 예쁜 꽃 모양과는 달리 닭오줌 냄새가 난다하여 계요등(鷄尿藤)이란 이름이 붙었다.

 

계간예술가(2014년 겨울호)

 

아담과 이브처럼 장철문

 

내가 몸을 가졌고, 네가 몸을 가져서

너와 내가 누워 있다

개펄처럼 누워 있다

드러난 닻줄처럼

밑창처럼

녹슬어가는 몸이 누워 있다

 

말없이 밥상을 차려주고

앞에 앉듯이

서로에게 서로의 것을 용납하고

누워 있다

분비물을 용납하고 누워 있다

 

하릴없는 몸이 시키는 것을 알아서

허물처럼 널린 옷가지들과

쏟아진 내장 같이 엉킨

시트 곁에 누워서

치골과 터럭이 드러났다

 

열선처럼 감기던 숨결과

구멍 같은 눈빛을

지나와서

너와 내 숨결이

정갈한 금슬처럼 가지런하다

 

이제 곧 이 숨결이 낯설어서

부인하듯,

허물을 걸치고

이 내력을 그림자처럼 지우고 가겠지

 

계간 세계의 문학(2015년 봄호)

 

각별한 사람 김명인

 

그가 묻는다,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언제쯤 박음질된 안면일까, 희미하던 눈코입이

실밥처럼 매만져진다

무심코 넘겨 버린 무수한 현재들, 그 갈피에

그가 접혀 있다 해도

생생한 건 엎질러 놓은 숙맥(菽麥)이다

중심에서 기슭으로 번져가는 어느 주름에

저 사람은 나를 접었을까?

떠오르지 않아서 밋밋한 얼굴로

곰곰이 각별해지는 한 사람이 앞에 서 있다

 

시집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민음사, 2015)

 

 

 

봄에 관한 어떤 추억 상희구(1942)

 

국민학교 적 소풍날

꽁보리밥에 양념 친 날된장을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갔는데

다른 친구들 모두 쌀밥으로 싸왔거니 하고

산모퉁이에 숨어서 점심을 먹었다

이 기억만은 선연한데

그날 그 소풍 간 곳이 어디였는지

그날 어머니는 무슨 색깔의 옷을 입으셨는지

그날 아침밥은 무슨 반찬으로

어느 숟가락으로 밥을 먹었는지

그날 내가 사자표 가루치약으로

양치질을 했는지 어쨌는지

그날 우리 집 뜨락에

철쭉이 몇 송이나 꽃봉오릴 매달았는지

그날 우리 집 앞을 어떤 자동차가

몇 대나 지나갔는지

그날 신문에 무슨 기사가 실렸었는지

그날 또 어머니가

어떤 종류의 눈물을 흘리셨는지

도무지 기억에 없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5(

 

모든 가구는 거울이다 이승희

왜 모든 세간은 나를 바라보는지 생각하는 저녁이 시작되었다. 마주 앉은 자세로 가구의 물음에 답을 하다가 가구에 등을 기대면 우린 같은 방향이 되어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침묵이 된다. 가구들의 이마는 때로 비정상적으로 증식되어 방 안엔 온통 가구들의 이마만이 있다. 나는 가구들 사이를 오가며 오늘은 어떤 비밀을 풀어 밥을 해먹나 생각한다. 가구들이 더 멀리 달아나지 않는 것은 이미 달아나서 여기에 있는 것. 그건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이유와 같은 것.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가만히 멈춰 서서 낯설게 바라보는 어항 같아서 어떤 날은 이야기를 시작하지도 않은 채 잠들었고, 어떤 날은 내게 아예 오지 않았다. 부주의한 날들은 그렇게 흘러간다. 사이는 살면서 생기는 것, 살아서 생기는 것, 가끔 그사이에 사다리를 놓고 달에 오르듯 가구에게로 건너간다. 그래도 어쨌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한다. 사이에 또 무수한 사이가 생길 때까지는 말이다.

 

계간예술가(2015년 봄호)

 

강나루 권택명

 

오늘은 어쩐지

그대의 안부가 올 것만 같다

 

산 너머 산이 있어도

코 앞의 산만 보고

천 리를 굽이쳐 온 강물이 저리

철마다 물안개 피우며 흘러도

그저 방황의 몸짓 속에 떠나 보낸

청맹

 

이내 속에 오히려 선명해지는

기억의 강나루에 서면

 

분명 오늘은

오랜 불면 속에 기다려온

당신의 풍문이라도 전해올 것 같다

 

저기 저 찬 강물 한가운데

하늘 향해

실핏줄 같은 손을 들고 선

저 시원(始原)의 나무들의

간구!

 

월간유심(20154월호)

 

개 같은 사랑 최광임

 

대로를 가로지르던 수캐 덤프트럭 밑에 섰다

휘청 앞발 꺾였다 일어서서 맞은편 내 자동차 쪽

앞서 건넌 암캐를 향하고 있다, 급정거하며

경적을 울리다 유리창 밖 개의 눈과 마주쳤다

그런 눈빛의 사내라면 나를 통째로 걸어도 좋으리라

거리의 차들 줄줄 밀리며 빵빵거리는데

죄라고는 사랑한 일밖에 없는 눈빛, 필사적이다

폭우의 들녘 묵묵히 견뎌 선 야생화거나

급물살 위 둥둥 떠내려가는 꽃잎 같은, 지금 내게

무서운 건 사랑인지 세상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간의 생을 더듬어보아도 보지 못한 것 같은 눈

단 한 번 어렴풋이 닮은 눈빛 하나 있었는데

그만 나쁜 여자가 되기로 했다

 

그 밤, 젖무덤 출렁출렁한 암캐의 젖을 물리며

개 같은 사내의 여자를 오래도록 꿈꾸었다

 

시집 도요새 요리(북인, 2013)

 

가을은

          송해월

 

가을엔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어지네

세상은 온통

고독한 남자들과 외로운 여자들뿐

고독한 남자들과 외로운 여자들이

서로에게 가 닿기 위해

그림자는 길어지지만

이상도 하여라

고독한 남자들의 고독이 절반

외로운 여자들의 외로움이 절반

길어진 그림자로도 가 닿을 수 없는

반반씩의 절대 거리

그래서

고독한 남자들은 더 고독해지고

외로운 여자들은 더 외로워지는

가을은

가눌 수 없는 마음 부릴 곳을 찾느라

사람들은 술을 찾거나

새벽이 창문 턱에 이르도록

인터넷 선을 타고 밤새 헤메네

아아, 가을은 참 이상도하지

모두 같은 병을 앓는

고독한 남자들과

외로운 여자들뿐.

 

 

관계 /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도 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 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 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의관(衣冠)을 썼디야, 지게를 졌디야? / 박이도

 

보리밭에 보리가

꼬심바라져* 야단인디

이른 아침 실바람이 실실

늙푸른 바람결을 일렁일 제

누구여? 보리밭을 들러보고 가는 이가.

'훗딱 베야 쓰것구먼

벌써 꼬심바라져씽게'

 

새끼 새가 이 소리를 듣고 있다가

어미 새가 돌아오자 낼름

 

'엄마. 우리 싸게 이사해야겠어라우,

주인이 보리를 벤디이야...'

헌게 어미 새가

'그 사람 어찌 생겼더냐? 의관(衣冠)을 썼디야, 지게를 졌디야?'

'...대님차고 의관을 썼더구만'

'그러면 괜찮타야. 오늘 저녁 이사 가도 안 늦제,

오늘 맘껏 먹고 놀다가 저녁답에 뜨자'

그러더라네

참 용하기도 혀

농사일은 농사꾼이 챙기는 법잉게

*꼬심바라져 : 곡식이 지나치게 익어서 이삭이 바실바실 떨어지는 상태

문학사상 (200012월호)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 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 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 때는 '' 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벌 초 / 오변세

 

지난번 또 지지난번 처럼

마냥 반겨주시는 당신은

이승에서 풀지 못한 일들

파란 풀로 풀고 계시온데

불초한 자식은 이제 쉬엄쉬엄

다시 풀으시라고 소복이 풀어

속절없이 파란 풀 쌓아 놓았구요

평생 멍에 짊어지셨던 슬픈 등어리

허리 숙여 이제사 긁어 드리네요

저 절정의 고운 저녁 노을앞에서

땀을 닦으며 술 한잔 올리나이다

곱다란 하늘도 함께 흠향하시옵소서

 

바람 부는 날 / 윤강로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만을 보면서

오래오래

기다려 보았나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로

세상에 매달려 보았나

바라보는 눈매에 추워 보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에 시달려 보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이 되어 스친 것들을

잊어 보았나

삶이 소중한 만큼

삶이 고통스러운 만큼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를

사랑해 보았나

 

시집피피피 새가 운다(청하, 1990)

 

 

삼류  오변세

 

그때 볼링장에서 젊은 코치는

시계추의 진자운동을 생각하며

살갑게 볼을 살려서 보내라고 하였지

우격다짐으로 던지는 볼은 파괴력이 없다고

자연스런 발의 스텝과 팔의 유연함이 어울려

볼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비로소 핀을 쓰러뜨린다고

지난 고래실에서 내 아버지는

가래질할 때 허리와 팔을 능청능청 움직이라 하셨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팔 힘만으로 잡아채면

누구라도 힘에 부쳐 몸살이 난다고

허리와 팔이, 세 사람의 마음이 조신하게 움직여야

비로소 콧노래를 불러가며 일의 재미를 잡을 수 있다고

세상의 일류는

물 흐르듯 깔죽없이 내 몸을 맡기는 것

인위적인 힘만으로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

자연스러움을 벗어나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평생 애면글면 엇박자로 살아오면서

그때 모지락스럽게 스텝을 밟던 왼발이

그 우악함을 고스란이 받아낸 무릎과 허리가

세월 지나 무시로 결린다, 역시 삼류다

***

* 살갑다 : 겉으로 보기보다 속이 너르다.

* 고래실 :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

* 깔죽없다 : 조금도 축내거나 버릴 것이 없다

* 애면글면 : 약한 힘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애쓰는 모양

 

치마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쓴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팬티-문정희의치마를 읽다가 임보

 

그렇구나.

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

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

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들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

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

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붙들리면

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

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

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

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한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보라.

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 봐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

남자들의 팬티를!

 

풍경 소리 / 최새연

 

추녀 끝에

물고기 한 마리

 

죽었을까?

살았을까?

 

바람이 살짝 건드려 봅니다

땡그랑 땡그랑

 

물고기는 잔잔히

물결을 일으키며

맑고 고운 소리를 냈습니다

 

땡그랑 땡그랑

죽은 물고기를

바람이 살려놓고 갔습니다

 

무섭다 / 허홍구

 

미친 사람이

칼 들고 있으면 무섭다

무식한 사람이

돈 많은 것도 무섭고

권력을 잡으면 더 무섭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실력 있고 잘난 사람들 중에

사람이 아닌 사람은 더 무섭다

참 무섭다

언제나 웃고 있는

너그러워 보이는 탈을 벗기면

흉악한 얼굴들이 보인다

언뜻 언뜻 나의 얼굴도 보인다

몸서리치게 무섭다

 

 

사람을 그리워 하는 일

오인태

하필 이 저물녁

긴 그림자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한 그루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사람을 그리워하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홀로 선 나무처럼

고독한 일이다

제 그림자만 마냥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는

나무처럼 참 쓸쓸한 일이다

 

 

늑대야 늑대야 / 허홍구

 

남자는 모두 도둑놈, 늑대라며

늘 경계를 하던 동창생 권여사로부터

느닷없이 소주 한잔 하자는 전화가 왔다

 

어이 권여사 이젠 늑대가 안 무섭다 이거지

흥 이빨 빠진 늑대는 이미 늑대가 아니라던데

누가 이빨이 빠져 아직 나는 늑대야

늑대라 해도 이젠 무섭지 않아

나는 이제 먹이감이 되지 못하거든

 

이제는 더 이상 먹이감이 되지 못해

늑대가 무섭지 않다는 권여사와

아직도 늑대라며 큰소리치던 내가

늦은 밤까지 거나하게 취했지만

우리 아무런 사고 없이 헤어졌다

 

그날 권여사를 그냥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 나는 아직도 늑대가 분명하다

 

아지매는 할매되고 / 허홍구

 

염매시장 단골술집에서

입담 좋은 선배와 술을 마실 때였다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면 안주 떨어지고

안주 하나 더 시키면 술 떨어지고

이것저것 다 시키다보면 돈 떨어질 테고

그래서 얼굴이 곰보인 주모에게 선배가 수작을 부린다

"아지매, 아지매 서비스 안주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주모가 뭐 그냥 주모가 되었겠는가

묵 한 사발하고 김치 깍두기를 놓으면서 하는 말

"안주 안주고 잡아먹히는 게 더 낫지만

나 같은 사람을 잡아 먹을라카는 그게 고마워서

오늘 술값은 안 받아도 좋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

 

십수 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아줌마 집은 할매집으로 바뀌었고

우린 그때의 농담을 다시 늘어놓았다

아지매는 할매되어 안타깝다는 듯이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

 

 

後日譚

조상기

 

바람은 가지 안에 꽃이 되지만너무 멀어 손끝에도 닿을 수 없는내 어린 사랑을 두고,

출렁이는 바다의 물이랑 같이

보채는 나로 하여 몸부림해도

끝내는 닿을 수 없는

사랑을 두고,

오래 전에 우리는 잊어 버리고

잊어서 지금은 남이 된 그들,

낯선 골목에서 마주쳤을 때

, 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까.

가만히 제 속 안에 숨을 죽이고

여울로 잔잔히 흔들리는 것

, 무어라 이름하면 좋을까.

깊은 목에 잠기는

그런 세월의

손금으로 흐르는 피의 냄새를

조용히 가슴 안에 일러 재운 채

내 저승 밖의 둘러리,

노고지리 우는 봄의 아지랭이 속

선한 길이 열리면

꽃 모종하듯 심어 봐야지.

 

너무 멀어 손끝에도 닿을 수 없는

내 어린 사랑을 두고

바람은 가지 안에 꽃이 되지만.

 

조상기 시집 後日譚(교학사, 1977)

 

넌 나처럼 살지 마라 / 박노해

 

아버지,

술 한 잔 걸치신 날이면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어머니,

파스 냄새 물씬한 귀갓길에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이 악물고 공부해라

좋은 사무실 취직해라

악착같이 돈 벌어라

 

악하지도 못한 당신께서

악도 남지 않은 휘청이는 몸으로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울먹이는 밤

 

내 가슴에 슬픔의 칼이 돋아날 때

나도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요

스무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꿈을 찾는게 꿈이어서 억울하고

 

어머니, 당신의 소망은 이미 죽었어요.

아버지, 이젠 대학 나와도 내 손으로

당신이 꿈꾸는 밥을 벌 수도 없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그래요,

난 절대로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거예요

자식이 부모조차 존경할 수 없는 세상을

제 새끼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는 세상을

난 결코 살아남지 않을거예요

 

아버지, 당신은 나의 하늘이었어요.

당신이 하루아침에 벼랑끝에서 떠밀려

어린 내 가슴 바닥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 내가 딛고 선 발밑도 무너져 버렸어요

그날, 내 가슴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공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지고 말았어요

 

세상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디에도 기댈 곳도 없고

돈 없으면 죽는구나

그날 이후 삶이 두려워졌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알아요, 난 죽어도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제 자식 앞에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정직하게 땀 흘려온 삶을 내팽겨져야 하는

이런 세상을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죽어버리거나 죽여버리겠어요

돈에 미친 세상을, 돈이면 다인 세상을

 

아버지, 어머니,

돈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늘입니다.

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잖아요

못 배웠어도, 힘이 없어도,

당신은 영원히 나의 하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나는 없이 살아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나는 대학 안 나와도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어떤 경우에도 아닌 건 아니다.

가슴 펴고 살아가라고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누가 뭐라해도 너답게 살아가라고

너를 망치는 것들과 당당하게 싸워가라고

너는 엄마처럼 아빠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으라고

다시 한번 하늘처럼 말해주세요

 

새해 아침에 / 홍수희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주고서 받을 셈은 잊게 하시고

더 주지 못한 아쉬움만 갖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받고 싶은 한 마디는 잊게 하시고

주어야 할 한 마디만 내내 기억하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창가에는 불빛 하나 걸어두게 하시고

문 두드리는 소리 행여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격식이나 체면에는 덤덤하게 하시고

진실로 서야 할 자리를 분별하는

견고한 지혜를 허락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사랑만이 삶의 이유가 되게 하시고

오직 사랑만이 내게는 하루의 목적이 되게 하소서.

 

친구에게   이해인

   

올 한해도

친구가 제 곁에 있어

행복했습니다

 

잘 있지? 별일 없지?

평범하지만 진심 어린

안부를 물어오는 오래된 친구

 

그의 웃음과 눈물 속에

늘 함께 있음을 고마워합니다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사랑보다 깊은 신뢰로

침묵 속에 잘 익어

감칠맛 나는 향기

그의 우정은 기도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음악입니다

 

친구의 건강을 지켜 주십시오

친구의 가족들을 축복해 주십시오

 

 

희망을 위하여 / 배한봉

 

아침이라서 해 뜨는 것이 아니라

해 뜨니까 아침이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해를 가진 사람

사람이 빛나서 희망도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

주저앉아 흙탕에 젖고 황혼에 젖고

혹한에 떨며 벼랑 아래로

한없이 무너지던 만신창이 영혼

그 시간 너머에서 해는 뜬다

오늘 아침은 오늘 ()의 아침

구름도 바람도 오늘()의 노래

희망이 있으니까 삶은 빛난다

눈보라 끝에 꽃봉오리 터트린

저 눈부신 홍매처럼

 

불취불귀( 不醉不歸) / 허수경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기를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세상의 불빛 - 김진경

 

산 아래 펼쳐진 불빛 자욱하다

언젠가

저 불 켜진 골목 어딘가에

너와 함께 서 있었다.

낮은 처마 밑으로 새나오는 불빛

오래 바라보며

간절하게

그 작은 불빛 하나 이루고 싶었다.

그 때 첫 키스를 나누었던가.

기억이 멀어 생각나지 않는데

그 오래 남은 간절함으로 따뜻한

세상의 불빛

 

 

어떤 미소 /김두경

 

때 묻은 일기장 속에

꿈처럼 살아 있었구나

싱그러운 너의 미소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아

구김 없이 웃고 있구나

 

지난여름 꽃밭에서

손가락에 꽃 물들이던

다정한 너의 미소

 

살다가 지쳐 외로운 날은

그리운 가슴 열어, 너의

하얀 미소를 꺼내어 본다

 

너무 멀리 / 강은교

 

바리데기, 가장 일찍 버려진 자이며 가장 깊이 잊혀진 자의 노래

 

그리움을 놓치고 집으로 돌아오네

열려 있는 창은

지나가는 늙은 바람에게 시간을 묻고 있는데

, 그림자 없는 가슴이여, 기억의 창고여

누구인가 지난 밤 꿈의 사슬을 풀어

저기 창밖에 걸고 있구나

꿈속에서 만난 이와

꿈속에서 만난 거리와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던 한 사람의 얼굴과

그 얼굴의 미세한 떨림과

크고 깊던 언덕들과

깊고 넓던 어둠의 바다를,

어디선가 몰려오는 먹구름 사이로,

 

너무 멀리 왔는가.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그리움이 저 길 밖에 서 있는 한,

 

 

어쩌자고 / 최영미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구나

속 뒤집어 놓는, 저기 저 감칠 햇빛

어쩌자고 봄이 오는가

사시사철 봄처럼 뜬 속인데

시궁창이라도 개울물 더 또렷이

졸 졸

겨우내 비껴가던 바람도

품속으로 꼬옥 파고드는데

어느 환장할 꽃이 피고 또 지려 하는가

 

죽 쒀서 개 줬다고

갈아엎자 들어서고

겹겹이 배반당한 이 땅

줄줄이 피멍든 가슴들에

무어 더러운 봄이 오려 하느냐

어쩌자고 봄이 또 온단 말이냐

 

어느새 / 최영미

 

 

 

사랑이 어떻게 오는지

나는 잊었다

 

노동과 휴식을 바느질하듯 촘촘히 이어붙인 24시간을

내게 남겨진 하루하루를 건조한 직설법으로 살며

꿈꾸는 자의 은유를 사치라 여겼다.

 

고목에 매달린 늙은 매미의 마지막 울음도

생활에 바쁜 귀는 쓸어담지 못했다.

 

여름이 가도록

무심코 눈에 밟힌 신록이 얼마나 시리도록 청청한지

눈을 뜨고도 나는 보지 못했다.

 

유리병 안에서 허망하게 시드는 꽃들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의식주에 충실한 짐승으로

노래를 잊고 낭만을 지우고

심심한 밤에도 일기를 쓰지 않았다.

 

어느날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

비스듬히 쳐다볼 때까지.

사랑이 어떻게 왔다 가버리는지..

 

그리움을 삭히는 법 / 이만섭

 

구절초는 왜 쓸쓸한가에 골똘한 적이 있다.

일몰의 뒤끝에 깃드는 어둠처럼.

그도 등 뒤에 그리움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먼 산 바라보다가 어느 날 가을빛에 눈먼 그리움이라면

왜 아니 그럴만도 하겠지,

매양 그리움은 앞에 놓여 있건만 생각해보건대

언제 그리움이 앞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던가,

이명처럼 뒤꼍에서 가느다란 속울음을 지펴놓고

틈새를 비껴간 바람처럼 허공을 맴돌다 갔지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고립무원을 자처하고 습관처럼 붙박여 사는 그리움이지만

젖은 마음도 챙겨드는 것이 또한 그리움이라

그렇기에 어떤 외로움에도 그 깊이를 재지 말아야 하거니

저녁이 오면 어둠으로 맞서 저녁을 삼고

어둠 속에서 불빛을 찾아나서기보다는

기다리면서 사위가 어떤 모습으로 색칠해가는가를

내색하지 않고 눈여겨보아야 하리

치자색으로 물든 달빛이 어둠을 지우며 그윽히 밀려오고

별빛이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오는

그런 빛으로부터 숙지하는 밤을 견디면서

밤배를 노 젖듯 서둘지 않고 침착하게 다가설 때

본성이 착한 그가 나직나직 꽃숭어리처럼 피어난다

그리고 곁에 와 가만히 고갤 기대어 고백할 것이다

그대 가슴에만 살아가겠노라고,

 

소달구지와 기차/김한주

 

털털대는 소달구지 타고

바라보는 하늘의 구름

정지한 듯 흘러가고

 

질주하는 기차 타고

내다보는 차창의 풍경

쏜살같이 달아나네

 

멀찌가니 물러나서

느긋한 마음

가까이 다가서서

조급한 마음

 

고속열차에 실은 몸

급하기만 하고

소달구지에 누인 몸

한가로워 구름이네

 

등 뒤의 사랑 / 오인태

 

앞만 보며 걸어왔다.

걷다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의 하얀 등이

보였다. , 그는 내 등 뒤에서

얼마나 많은 날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그 수척한 등줄기에

상수리나무였는지 혹은 자작나무였는지,

잎들의 그림자가 눈물 자국처럼 얼룩졌다.

내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랑을 좇아

끝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앞만 보며

걸어올 때, 이따금 머리 위를 서늘하게

덮으며 내가 좇던 사랑의 환영으로

어른거렸던 그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슬픔의 그늘이었을까. 때때로

발목을 적시며 걸음을 무겁게 하던

그것은 그의 눈물이었을까.

그럴 때마다 모든 숲이

파르르 떨며 흐느끼던 그것은

무너지는 오열이었을까.

미안하다. 내 등 뒤의 사랑

끝내 내가 좇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 되지만

나는 달려가 차마 그대의

등을 돌려 세울 수가 없었다.

 

살다가 보면 / 이근배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이근배 시집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문학세계사,2004)

 

 

 

Zlatko Manojlovic - Jednoj Zeni (To one 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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