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괜찮은 詩에 실린 사진들은 주한미군들이 찍은 사진이다. 사진의 출처는 http://blog.joins.com/fabiano 에서 가져 왔다.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메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미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의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수 있으리라
아카시아 나무에게
사실 나는 상상도 못했어
앙상한 가지에 마른 가시를 볼썽사납게 달고 있던 너에게서
이토록 달콤하고 부드럽고 향기 가득한 꽃이 피리라고는
정말 미안하구나 아카시아 나무야
어린 시절 주린 배를 채워 준 것도 너였고
나의 예쁜 첫사랑 계집애한테 선물을 만들어 준 것도 너였는데
정말 미안하구나 아카시아 나무야,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어
너는 아직도 산골에 남아 네 몸을 태워 가난한 이들의 추운 방을 데우는구나
너는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 꿀벌을 기르고 정말 향기로운 꿀을 만드는구나
지난겨울의 가난과 고난은 너의 가시와 함께 꽃이 되고 꿀이 되는구나
네 몸의 가시는 너의 소중한 무엇을 지키기 위한 뜨거움이었구나
나무야, 나무야, 아카시아 나무야
이제서야 내 몸에도 가시가 돋는 이유를 알 것 같구나
나무야, 나무야, 5월의 아카시아 나무야
맨살로 다가가 피가 나도록 그 가시에 찔리고 싶은
[출처] 아카시아 나무에게 (김시천) (산과 들에 부는 바람) |작성자 산과들
혼자 웃다 (獨笑)
넉넉한 집엔 밥 먹을 식구도 없는데
有粟無人食
자식 많은 집은 굶을까 걱정하네
多男必患飢
높은 벼슬아친 어리석기만 한데
達官必憃愚
실력 있는 사람은 기회조차 못얻네
才者無所施
두루 두루 복을 갖춘 집 드물고
家室少完福
지극한 도는 늘 펴지지 못하네
至道常陵遲
아비가 아낀다 해도 자식이 늘 탕진하고
翁嗇子每蕩
처가 지혜로운가 싶으면 남편이 꼭 어리석네
婦慧郞必癡
달이 차도 구름이 가리기 일쑤고
月滿頻値雲
꽃이 피어도 바람이 떨구네
花開風誤之
천지만물 다 이렇지
物物盡如此
혼자 웃는 그 뜻 아는 이 없다네
獨笑無人知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다산시문집 제5권 > 시(詩) > 혼자 웃다
口耳聾啞久(구이농아구)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된 지 오래지만
猶餘兩眼存(유여양안존)
그래도 아직 두 눈은 멀쩡하다
紛紛世上事(분분세상사)
어지럽고 헝클어진 이놈의 세상사
能見不能言(능견불능언)
할 말은 못해도 다 보고 있다
朴遂良(박수량, 1475~1546)
自勉(자면) 스스로 권면하다
沒有冬寒憔悴景(몰유동한초췌경)
엄동설한의 앙상한 풍경이 없다면
將無春暖的輝煌(장무춘난적휘황)
따스한 봄날의 찬란함은 결코 없으리
災殃把我來鍛煉(재앙파아래단련)
지금 겪는 이 재앙이 나를 단련시켜서
使我精神更健康(사아정신갱건강)
나의 정신을 더욱 굳세게 하리라
호치민(胡志明, 1890~1969)
自寬 (자관, 스스로 너그러워지기)
萬事唯宜一笑休 (만사유의일소휴)
세상만사 그냥 한번 웃어 넘기세나
蒼蒼在上豈容求 (창창재상기용구)
창창한 하늘아래 원한다고 다 되지 않아
但知吾道何如耳 (단지오도하여이)
다만 내가 가는 길이 어떠한지 제대로 알면 되지
不用斜陽獨倚樓 (불용사양독의루)
해질 무렵 홀로 누각에 기대 고민일랑 마시게
- 이장용(李藏用 1201~1272) 동문선 20권
雖不現吾等之期待 (수불현오등지기대
비록 우리의 기대가 실현되지 않아도
未成吾等之祈禱與夢 (미성오등지기도여몽)
아직 우리의 기도와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人生之大榮 (인생지대영)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非不倒一(비부도일)
한 번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起於倒時 (기어도시)
쓰러질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다
-『잡보장경(雜寶藏經), 용왕게연(龍王偈緣)』,"生也 思也(살며 생각하며)"
비야골 경전 1 정바름
산 아래 작은 밭에 들어서면
거기 경전 한 자락 펼쳐 있어
그 말씀 들으러 비야골에 가네
옥수수 심은 곳에 옥수수가 자라고
고구마 심은 땅에 고구마가 자라
심지 않은 곳에서 나지 아니하고
가꾸지 않은 곳에서 거두지 못한다는
주옥같은 말씀 한 뙈기
바닥난 믿음을 일으켜 주네
흙을 파야겠네
심지를 굳게 묻고
퍽퍽한 가슴을 일구어야겠네
알곡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하늘 뜻 경건히 살피면서
사람처럼 살아야겠네
사람답게 죽어야겠네
비야골 경전 2
땡볕에 김을 맨다
잡생각이 빳빳이 고개를 쳐든
마음의 이랑도 함께 맨다
땀에 흠뻑 젖고서야
비로소 내가 사람처럼 느껴진다
징그러운 풀들과 마주하면서
건성으로 지은 농사를 후회하지만
그래도 사는 재미 쏠쏠하지 않은가
김을 맨다
내겐 한 철 재미라지만
누군가에겐 목숨과도 같은 것
목숨 부지한 자들의 눈물과도 같은 것
눈물 같은 땀을 흘려야
겨우 한목숨 부지하는 것
그러므로 나는 목숨밭을 맨다
되돌아보면 여전히 풀이 무성한
늦은 저녁의 들녘에서
바람이 어둠을 몰고 올 때까지
어둠이 내 목숨을 덮을 때까지
구 겨 진 몸 -이 향
불 피우다 보면
구겨진 종이가 더 잘 탄다
주름살 많은 부채 속, 바람 접혀있듯
구겨진 몸에는 통로가 있다
밑바닥까지 굴러본 뒤에야 깊어지는 숨처럼
구석에 쿡, 처박혀봐야
뻑뻑한 등도 굽을 수 있지
그래야 바람을 안을 수 있지
반듯한 종이가 모서리를 들이미는 사이
한 뭉치 종이가 불을 먼저 안는다
구겨진다는 것은 바짝 다가선다는 것일까
더 망칠 것 없다는 듯
온몸으로 불길은 연다
구겨진 몸이 불을 살릴 줄 안다
先山을 오르며 -정바름
저 산이 아버지 같은 이유를 알겠네
육탈(肉脫)한 아버지의 뼈가 산을 떠받치고
세상의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이지
아버지는 저 품으로
헝클어진 뿌리를 보듬어 나무를 세워주고
다람쥐 같은 자식 몇을 키웠네
나무도 다람쥐도 사람도
모두 다 그 품에서 자랐으므로
나이를 먹을수록 산은 얼마나 그리운가
언젠가 저 넉넉한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음은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만만찮은 이 세상 살아낸 뒤엔
발길에 채이는 뼈다귀처럼
함부로 구르지 않았으면 좋겠네
내 뼈다귀도 저 산에 묻혀
산을 떠받치고 하늘을 떠받치고
사람 사는 세상을 떠받치면 좋겠네
사진/ 이성복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올라갈 때 아버지가 우겨서
딴 이름의 학교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친구들 보기 창피하다고 밥도 안 먹고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던 학교에 들어가 처음 교복 입고
노란 교표 달린 모자 쓰고 찍은 사진을
아버지는 늘 지갑 안에 넣고 다니셨습니다
점심값 아끼느라 떡이나 오뎅 사먹고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그 먼 퇴근길 걸어오시던
아버지는 그토록 내가 자랑스러웠던가 봅니다
시험 잘 보고 와도 칭찬 한번 안 하던 아버지,
뭘 좀 잘못하면 눈만 흘기시던 아버지,
정말 내가 크게 잘못한 날에는 자기 종아리 걷고
혁대 풀어, 나보고 때리라고만 하셨습니다
올여름 지나면 아버지 돌아가신 지 오 년,
언제까지 아버지가 내 사진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니셨는지 모르지만, 지금 내 지갑에는
이십 년도 더 지난 우리 애들 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봄 아파트 정원에서 둘째는 쪼그리고 앉아
깔깔 웃고, 첫째는 동생 목을 휘어 감고 있습니다
지금 그 아이들 군대 갔다 오고 대학 졸업하고
취직도 않고 빈둥거리지만, 나는 녀석들이 지갑 속에서처럼
언제까지나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지 모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그 애들을 보듯이
육십 년대 후반, 경리 일 그만두고 집에서 쉬는 동안
아버지는 이따금 내 사진을 들여다보셨겠지요
빳빳한 교복 칼라에 단정하게 모자 쓴 그 아이가
언젠가 그의 가난과 실직과 시들한 살림살이를
하루아침에 바꿔주길 바라셨겠지요
평생 울컥, 화내는 취미밖에 없었던 아버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경로당 두루마리 휴지를
한 움큼 뜯어 오다 동네 노인들한테 창피당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냉동고 유리문 너머 입관하실 때도,
영정사진 모시고 산을 오를 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린 독한 아들이었습니다
-시집『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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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지 왕버들/ 반칠환
누군들 젖지 않은 생이 있으려마는
150년 동안 무릎 밑이 말라본 적이 없습니다
피안은 발 몇 걸음 밖에서 손짓하는데
나는 평생을 건너도 내 슬픔을
다 건널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은 왜 낙타로 하여금
평생 마른 사막을 걷도록 하시고,
저로 하여금 물의 감옥에 들게 하신 걸까요
젊은 날, 분노는 나의 우듬지를 썩게 하고
절망은 발가락이 문드러지게 했지만,
이제 겨우 사막과 물이 둘이 아님을 압니다
이곳에도 봄이 오면 나는 꽃을 피우고
물새들이 내 어깨에 날아와 앉습니다
이제 피안을 지척에 두고도 오르지 않는 것은
나의 슬픔이 나의 꽃인 걸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시집『 전쟁광 보호구역』(지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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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소박하게 질문하다/ 엄원태
몸 풀린 청량천 냇가 살가운 미풍 아래
수북해서 푸근한 연둣빛 미나릿단 위에
은실삼단 햇살다발 소복하니 얹혀 있고
방울방울 공기의 해맑은 기포들
바라보는 눈자위에서 자글자글 터진다
냇물에 발 담근 채 봇둑에 퍼질고 앉은 아낙네 셋
미나리를 냇물에 씻는 아낙네들의 분주한 손들
너희에게 묻고 싶다, 다만,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산자락 비탈에 한 무더기 조릿대들
칼바람도 아주 잘 견뎠노라 자랑하듯
햇살에 반짝이며 글썽이는 잎, 잎들
너희에게도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폭설과 혹한, 칼바람 따윈 잊을 만하다고
꽃샘추위며 황사바람까지 견딜만하다고
그래서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 시집『물방울 무덤』(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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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꽃/ 김윤현
추운 겨울이 있어 꽃은 더 아름답게 피고
줄기가 솔잎처럼 가늘어도 꽃을 피울 수 있다며
작은 꽃을 나지막하게라도 피우면
세상은 또 별처럼 반짝거릴 것이라며
많다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높다고 귀한 것은 더욱 아닐 것이라며
나로 인하여 누군가 한 사람이
봄을 화사하게 맞이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고 사는 보람이 아니겠느냐고
귀여운 꽃으로 말하는 봄맞이꽃
고독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며
풍부한 삶을 바라기보다
풍요를 누리는 봄맞이꽃처럼 살고 싶다
- 시집『들꽃을 엿듣다』(시와 에세이,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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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면 되리라 / 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 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 시집 '천년의 바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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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헌법 제12조를 읽다 / 박칠근
산에선 뒤엉킨 갈등조차
헌법 제12조처럼 술술 풀린다
나지막한 풀 한 포기도
키 큰 나무와 조화를 이루고
동떨어져 무관할 것 같은 먼 산도
어울려서 말쑥한 풍경이 된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도
헌법 제12조처럼 제 몫을 다 하는 큰 바위
홀로 서 있어도 소외되지 않는 소나무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이들을 수색 또는 심문할 수 없노라
능선 타며 흐르는 야릇한 빛
나는 비로소 신체의 자유를 느낀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여
휴식을 미룬 채 나를 바라보는 오리숲이여
내 어찌하여 오늘 하루도
옹졸하고 쪼잘하게 내 것을 베풀지 못하고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행복을 탐했던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이 흘러간다
저토록 탐스러운 절경을 남긴 채, 헌법 제12조처럼.
<현대시> 2007. 10월호
꽃씨를 품은 서랍/ 박동덕
농기구 창고에 턱 버티고 앉은
헌 책상서랍 입이 무겁다
내가 먼저 열지않으면
-- 자로 다문 입 절대 열지않는다.
눈치도 없이 자리나 차지하는 미련퉁이
서랍을 뜯어내어 개집을 만들까
날도 추운데 확 군불이나 지펴버릴까
중얼거리며 바깥으로 끌어내려 하자
말에도 씨가 있다며
무뚝뚝한 사내 입을 열었다
종알종알 지끌이던 말이 씨가 되어
후회해본 일 한두번이겠냐고
지난 해 모아두었던 꽃씨를
탁 뱉어낸다
오래삭힌 말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숨어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저 입은 세상을 지키는 힘이다
시골에 살고 싶다는 말이 씨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붙박은 이 집까지
따라온 저 책상
서랍은 씨앗을 쓸어 담으며
꽃 피우고 싶다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문다
처마밑에서 웅성거리던 겨울 바람
슬거머니 달아나고 있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 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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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
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
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 저울은 꿈쩍
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
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 더욱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 . 6 / 김용락
가만히 생각해보니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반달]의 윤석중 옹이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새싹문학상을 주시겠다고
안동 조탑리 권정생 선생 댁을 방문했다
수녀님 몇 분과 함께,
두 평 좁은 방 안에서 상패와 상금을 권 선생께 전달하셨다
상패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권 선생님 왈
"아이고 선생님요, 뭐 하려고 이 먼 데까지 오셨니껴?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한 게
뭐 있다고 이런 상을 만들어
어른들끼리 주고 받니껴?
내사 이 상 안 받을라니더......"
윤석중 선생과 수녀님들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서울로 되돌아갔다
다음날 이른 오전
안동시 일직면 우체국 소인이 찍힌 소포로
상패와 상금을 원래 주인에게 부쳤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봉화서 농사짓는 정호경 신부님
"영감쟁이, 성질도 빌나다 상패는 돌려주더라도
상금은 우리끼리 나눠 쓰면 될 텐데......"
김용락 시집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문예미학사, 2008>
소나무를 만나/ 박곤걸
바람을 다스리지 못하겠거든
산으로 가서 소나무를 만나
말 대신 눈으로 귀를 열어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절제하고, 절단하고
바람이 부는 날
하늘에다 온몸으로 수화하는
나무의 설법에 큰절하고
잘 늙은 소나무가 손짓해 주는
그 곁에 가서 뿌리를 내려라
어느덧 산을 닮아
푸른 자태가 제격이면
바람도 솔잎에 찔려 피를 흘린다
- 시집 「하늘 말귀에 눈을 열고」 중에서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부패의 힘/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 시집 '그곳이 멀지않다' 중에서 -
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
- 시집 <겨울강> (세계사, 1994)
바다경전/ 박창기
뭍에 있어도 마음은 자꾸 바다로 달린다. 뜻도 모르면서 바다경전에 푹 빠져서는 읽기만 했었던 나에게 최초의 시는 바다였다. 온몸으로 읽는다고 아랑곳하지 않은 채 교만에 찌든 허상에 매달려 있을 때 파도 꼭대기에서 떨어지던 나를 보고서는 경전의 가장자리에서 헤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 준 것도 파랑이었다, 파랑은 바다만이 뱉어내는 언어, 그 언어의 속살과 갈비뼈 사이에서 끊임없이 서슬 퍼런 채찍을 들었지만 외면한 쪽은 나였다. 만신창이가 된 이즘에 와서야 바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바람은 나보다 경전을 더 잘 읽었다. 바람은 파랑을 수도 없이 데리고 경전의 구석구석을 다독이듯 읽었다.
그 큰손으로 바다를 다루는데 파도 같은 경전이 어쩌지 못하는 걸 보면 보잘것없는 나를 변화시켜야한다는데 동의하고 만다. 겨우 몇 장의 경전을 넘겼을 뿐인데 심연의 끝장을 넘기기까지는 몇 번의 허물을 벗고서야 다시 나게 될지 이즘 해변에 서면 파랑이 남긴 언어의 파편을 줍는 것이 고작이다. 유년의 빛바랜 꿈이 잠들어 있는
- 시집 『바다경전』중에서 -
묵화(墨畵) /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시집 ‘십이음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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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락눈/ 정양
검불 덥힌 마늘밭
언 마늘씨를 캐먹으며
아이들은 속이 쓰리다
싸락눈 몰아오는
흐린 하늘밑
손가락으로 혓바닥으로
싸락눈을 받아먹으며
아이들은 또 어디를 갔는지
어디로들 가서
쓰리고 긴 겨울을 캐고 있는지
흐린 하늘을 휩쓸며
희끗희끗 또
싸락눈이 내린다
- 정양 시선집 ‘눈 내리는 마을’ 중에서 -
달북/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 시집 ‘쉬!/ 문학동네’ 중에서 -
아내의 브래지어/ 박영희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 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을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존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창비시선)' 중에서 -
어처구니 / 이덕규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 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 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또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여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2003, 문학동네> 중에서 -
나무1 -지리산에서/ 신경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 이명주 편 <국어시간에 시읽기>중에서
얼굴 반찬/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 시집 ‘말똥 한 덩이(2008, 실천문학사)’ 중에서 -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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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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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시집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 지성사>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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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새소리/ 백석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별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게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백석 시전집/ 1987,창작과 비평사>중에서 -
외손자들/ 김정숙
“할머니, 지수예요.”
“으응, 지수구나, 밥 먹었어?”
매번 화두가 겨우 밥이다. 전화할 때도
“밥 먹었어, 오늘 뭐 했어?”
이제 네 살, 우리말도 잘 못하는 애가
싱가포르에 가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운다
“할머니 어엉 어엉 ”
입 안에서 구르던 말을 끝내 내뱉지 못했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이국에서 생활하는 외손자가 불쌍해
훗날은 차치하고 마음이 아리다.
그 위 외손자는 “할머니, 싱가포르에 오세요.”
마치 가까운 곳에 오라고 하듯 성화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가 더 멀게 느껴진다.
- 시집 <여로의 물빛/ 2009, 그루> 중에서 -
늙은 소나무/ 김광규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둥을 싸바르고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 백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 시집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1998, 현대시> 중에서
아배 생각/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니, 오늘 외박하냐?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야야, 어디 가노?
-예……. 바람 좀 쐬려고요.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 시집 <아배생각/2008,애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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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경상도라도 안동을 중심으로 예천, 영주, 청송, 봉화, 의성의 북부지역 말과 상주방면의 서부지역 말, 그리고 대구, 영천, 청도 쪽의 남부지역 말, 경주 포항 등 동부지역의 말이 확연히 다르다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최영미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 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붙이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에서 -
이 도시도 한때는 울창한 숲이었다/ 이기철
이 도시도 한때는 울창한 숲이었다
저 빌딩도 한때는 부드러운 흙과 소낙비를 기다리는 나무들이었다
이 쓰레기 매립지도 폐차장도
한때 우리의 맨발을 받아준 꽃밭이었다
우리를 잠시 그 자리에 서게 하는 신호등의 네거리도
한때는 파꽃 피는 채소밭이었고
뒹구는 고철덩이도 한때는 번쩍이는 은이었고 철이었다.
둥치가 썩은 전나무도 한때는 크낙새의 놀이터였고
지금은 톱날에 잘려 나간 앵두나무도 부리가 여린
박새의 집이었다
한때는 그 숲 사이로 아름다운 짐승이 지나갔고
목걸이를 건 여자들과 팔뚝에 힘 오른 남자들이
팔짱을 끼고 지나갔다
바람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거기서 시를 썼고
나무의 숨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그 곁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쓰레기 매립지와 폐차장 곁에서
노래 부르지 않는다
이 도시를 파괴한 사람들도 우리 자신이듯이
이 도시를 나무와 숲과 새의 요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도
우리 자신이다
한때는 이 도시가 숲이었고 나무였음을 증언할 사람도
- 시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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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를 따라가다 / 안성덕
산신령님 이름이 뭐죠, 부음을 접하고 달려간 산악회원의 상가 영안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카페에서 우린 닉넴으로 통했으니까요. 누군가 핸폰으로 산신령님의 실명을 알아냈죠. 갹출한 부의금을 넣고 막 돌아서려는데 접수처 청년 방명록에 서명을 부탁하더라고요. 김만수, 평소대로 써넣으려다 가만 생각해 보니 글쎄 상주가 우릴 무슨 수로 알아보겠어요. 그래요. 고심 끝에 솔낭구, 뒤이어 고갤 끄덕이던 산꼭대기님도 닉넴을 써넣습디다. 접수처 청년 표정 참 묘해지더구만요. 일행이 선녀와 나무꾼, 이라고 계속 써넣자, 딱 뭐 씹은 얼굴을 하더라니까요. 민망하긴 우리도 매한가지였지요. 화톳불이 그렇게 화끈거리는 줄 미처 몰랐다니까요. 쥐구멍에 그냥 대가리 콱 처박고 싶은데 일행 중 하나가 자꾸만 머뭇거립니다. 누군가 거듭 채근을 해대고, 마지못해 개미만한 글씨로 에헤라디아, 라고 써넣는 순간 마지막 남은 회원 글쎄 총알처럼 뛰쳐나갑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들은, 저승사자님 같이 가요.
쪽팔려 딱 죽고 싶더라고요.
제10회 〈시인세계〉신인작품 공모 당선 취소작
고쳐 말했더니/ 오은영
사다리가 전봇대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하나밖에 없네."
전봇대도 사다리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두 갠데도 혼자 못 서지?"
사다리가 말을 바꿨어요.
"넌 대단해!
다리가 하난데도 혼자 서잖아."
전봇대도 고쳐 말했어요.
"네가 더 대단해!
사람들을 높은 데로 이끌어 주잖아!"
- 아동문예 2007년 3월호 -
오줌발에 대하여/ 장혜승
백주대낮, 귀하신 몸으로
달콤한 낮잠중인 자동차 바퀴에
건들건들 오줌 갈기는 남자의 등에 대고
젊은 여자 앙칼진 소프라노
-아무데서나 갈기는 거 확,
놀란 남자, 고개 푹 꺾고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끊어지지 않는 오줌자루 거머쥐고
구불구불 물 글씨 쓰며 간다
한없이 쏟아져 나오는 슬픈 글씨
비틀비틀 걸어가며 휘갈기는
저 글씨 해석할 수 없는 오월의 콧구멍 새까맣다
모내기해야 할 논바닥에는 촛농 낭자해
시집올 모가 없단다
하늘이여, 저 강쇠 오줌발
어디에다 좍, 갈길까요?
- 시집 <씨앗/ 2009, 한국문연>중에서 -
유모차/ 이설야
동네 할머니들이 더러
유모차를 밀고 마실을 다니신다
당신들의 유아시절을 고스란히 싣고서
아직도 남은 인생을 애써 밀고 다니신다
할아버지들은 여전히
사나이라 체통 때문이신지
유모차 바퀴에 몸을 맡기진 않으신다
다만 반질반질한 지팡이의 도움을 조금 받을 뿐
- 계간 <詩하늘> 2008년 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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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가고 있다/ 허리 굽은 할머니가/ 아기도 젖병도 없이/ 손가방 하나 달랑 태우고 가고 있다/ 이 유모차를 타던 아기는/ 올봄에 벌써 1학년이 되었다/ 아기 손목이 굵어지는 동안/ 할머니의 손등은/ 더 쪼글쪼글해지고/ 아기 종아리가 통통해지는 동안/ 할머니의 키는 더 작아졌다/ 오늘은 유모차가/ 할머니를 모시고 가고 있다' -안도현 시인의 「할머니의 유모차」
생의 한 저녁/ 조행자
말하지 않아도 되는 날은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편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나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이 그럴 수 있다에 머물렀을 때
난 그저 씩 웃으며 마음을 지웠다
어두운 대기 속으로 몸을 감추는
들꽃 길을 따라가며
내 존재의 자리는 어디인가란 생각보다
무관심에 관한 긴 휴식을 떠올렸다
가끔은 어둠의 가장 깊고 부드러운 안식에서
수 없이 그렸다 지웠던 욕망의 얄팍함에 기대었던
어둠의 과거를 생각했다
무엇인가 지상에서의 부질없는 것들은
누가 나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해도
내 부재의 자리를 가볍게 즐기는 오늘 저녁 생이여,
그래도 끝내 삶을 버려두지 않기에
마음 지운 자리 꼿꼿이 피어낸 망초꽃 한다발
- 시집 <지금은 3시> 2007, 만인사 -
감포/ 권경인
떠도는 영혼은 언제나 포구에서 길을 잃는다
여기까지 끌고 온 길은
또 어디까지 끌고 가야 할 길이냐
긴 세월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을
좁은 바닥의 비릿한 살 냄새
배고프면 파도는 더 많이 출렁거리고
갈매기도 먹이 앞에선 자유롭지 못한 것을
양철지붕 파이도록 의문에 잠 못 이루던 그 누가
신열에 들떠 눈 부릅뜬 채 여기 섰던 것이냐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여도 벅차기만 한
떠나온 길은 떠나갈 길
아이들은 자라 서울로 가고
서울사람 이곳에서 잠시 횟감에 빠졌다간 달아나는데
내장을 다 발리고도 펄떡이는 동해의 한자락을
묵묵히 밟고 서서
누가 오래도록 해진 그물을 깁던 것이냐
상처는 건드리면 커지는 것인지
좀체 속을 보이지 않는 무표정 속의 아득한 욕망을 적시는
밤 가득 후줄근한 등불꽃
사람들은 멋대로 취하고
파도는 저 혼자 더 먼 곳으로 나가 길을 잃는다
- 시집 <변명은 슬프다/ 1998, 창작과 비평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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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정희성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겠느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 2008, 창비>
믿음에 관하여/ 임영석
나무를 보니 나도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겠다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있어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다가 가야겠다
그러려면 먼저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에
내 마음의 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다
눈과 비, 천둥과 번개를 말씀으로 삼아
내 마음이 너덜너덜 닳고 헤질 때까지
받아적고 받아적어 어떠한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침묵의 기도문 하나 허공에 세워야겠다
남들이 부질없다고 다 버린 똥, 오줌
향기롭게 달게 받아먹고 삼킬 수 있는 나무,
무엇을 소원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나무,
누구에게나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
그런 나무의 믿음을 가져야겠다
하늘 아래 살면서 외롭고 고독할 때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고 싶을 때
못 들은 척 두 귀를 막고 눈감아 주는 나무처럼
나도 내 몸에 그런 믿음을 가득 새겨야겠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侶)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 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보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너머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 시집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중에서
노을 / 이상이
눈물 없이 우는 것들은
저렇게 붉다
마른 울음은 뜨거워서
마음을 태우고 데이는 불길이라서
차마 누가 달랠 수도 없어서
내 마지막 기원은
너에게 낙인찍히는 것
돌이킬 수 없는 화상을 입고
너의 한이 되는 것
어둠이 큰 손으로 틀어막을 때까지
너에게 들키고 싶어 활활 우는 저녁
마음을 엎질러놓고
달디 단 죄를 저질러놓고
온몸으로 판 벌이는 피울음
영혼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피의 굿
- 계간 <시와시학> 2007년 가을 -
고향 /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를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삼천리 문학 2호/1938> 중에서
즐거운 제사/ 박지웅
향이 반쯤 꺾이면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
열린 시간 위에 우리들 一家는 선다
음력 구월 모일, 어느 땅 밑을 드나들던 바람
조금 열어둔 문으로 아버지 들어서신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
어머니, 메 곁에 저분 매만지다 밀린 듯 일어나
탕을 갈아 오신다 촛불이 휜다 툭, 툭 튀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삼색나물처럼 붙어 다니는
아이들 말석에 세운다. 유리창에 코 박고 들어가자
있다가자 들리는 선친의 순한 이웃들
한쪽 무릎 세우고 편히 앉아 계시나 멀리 山도 편하다
향이 반쯤 꺾이면 우리들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엎드려 눈감으면 몸에 꼭 맞는 이 낮고 포근한,
곁
- 시집 『너의 반은 꽃이다 』2007,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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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아버지 제사를 통해 가족 친지간의 끈끈한 유대와 따스함을 확인하고 있다. ‘즐거운 제사’는 향을 피우고 조상신께서 내려오시기를 기다리는 분향강신(焚香降神)으로부터 시작된다. ‘향이 반쯤 꺾이면’ 조상이 제사상 앞에 당도했다는 신호인데,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 경건하게 치루는 제사 시간동안 ‘멀리 산도 편하’고, ‘엎드려 눈감으면 몸에 꼭 맞는 이 낮고 포근한, 곁’이 온기로 가득하다.
지금 우리가 행하는 제사는 집집마다 그 절차와 방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근간은 2500년 전 유교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유교의 본향인 중국에서조차 이를 지키지 않고 있으며 우리도 최근엔 제사를 모시지 않는 가정이 많이 늘었다. 제사의 조상 숭배를 우상적 행위라고 믿는 우리나라 기독교의 일반적인 관례를 따르는 가정도 많이 있고, 그냥 귀찮아서 또는 경제적 부담 등으로 기피하는 가정도 흔하게 본다. 심지어는 기독교의 전도 수단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 장점(?)을 들기도 한다.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B.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 했던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
왕들이 손수 바윗덩어리들을 끌고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된 바빌론
그 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일으켜 세웠던가? 건축 노동자들은
황금빛 찬란한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완공된 날 밤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에는
개선문이 많기도 하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개선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에서도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린 날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이 그들의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데려가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왕은 자신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말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도
또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승리가 하나씩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십 년마다 한 명씩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그 비용은 누가 지불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 Chris Harman의『민중의 세계사』첫머리에
밥 한 봉지/ 박경조
이 뜸 들지 못한 또래들 표정에 섞여
뭉게뭉게 부푸는 목요일의 정오
큰 솥의 멸치다시국물 우려질 동안 깨순이며
참비름 살짝 데쳐 무치고
봄배추 삶아 된장국거리 버무려 놓고, 생고등어 한 상자
튀김옷 입히면
복지관 담장 따라온 해묵은 이팝나무도
갓 지은 100인분의 막막한 기대 뜸 들이느라 분주하다
자원봉사자가 수저와 배식판 한 순배 돌리는 사이
귀먹은 끝순할매 오늘도 잽싸게 다음 한 끼니의 밥덩어리
또래들의 눈치까지 덤으로
검은 비닐봉지에 꼭 꼭 감추는 거 훔쳐보고 말았다
살아가는 힘,
저토록 처절하게 감추는 거구나
끝내는 죽음과도 묶여야 할 맹렬한 저 매듭 옆에서
자꾸만 얼룩얼룩 뜨거워지는 내 목구멍
- 시집 <밥 한 봉지 / 2008, 시와 에세이>
밥이라는... / 지 순
밥이라는 말 대신
진지라는 말 입에 달고 살아야겠네
진주알처럼 빛나는
희디 흰 밥 한 그릇 올린
밥상은 늘 진짓상으로 올리고
담백한, 담백해서 맛있던 밥이라는 말
이제 그 말은 야생의 맛이 나네
옷깃을 풀어 놓은 밥상 앞에서 서로 권하며 먹고 마시는
따뜻한 순간에도 먹고 먹히는
핏빛 바람이 달려와 먼저 수저를 드네
김수환 추기경님 돌아가실 때
나는 밥이라 하셨네
나는 그의 밥, 그는 나의 밥이 되면
생은 영롱한 진주처럼 네 목에 걸린다 하셨으나
나 자신 있게 밥을 말 할 수 없네
누군가 그의 밥이 되는 것이 내 꿈이라고
밥이라는 말 입에서 떼어내고
밥이라는 말 대신 진지라는 말 입에 달고
노래 부르고 싶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진지...진지... 진지 드세요
진지 잡수세요...
이제는 사라진 담백한 그 맛
어머니 무덤처럼 그 앞에 엎드려
울고 싶은 그 말
잃어버린 보석 같은
- 월간 <스토리문학> 10월호
혼자 먹는 밥/ 송수권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딸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生(생)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되집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 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시 하나.
- 계간 『詩向』 2006, 봄
사라진 것들의 목록/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졌다 고전
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세상에는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나도 나를 버리는데 반생이 걸렸다
걸려 있는 연(緣)줄 무슨
연보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내 업을
끌고 왔을 것이다 만남은 짧고 자국은
깊다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다
- 계간 『문학의 문학』2008. 가을
긍정적인 밥/ 함민복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1996, 창비
밭 한 뙈기/ 권정생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것은 없다.
하나님도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1988, 지식산업사>
빈들/ 강연호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혼자 쌀을 안치고 국 덮히는 저녁이면
인간의 끼니가 얼마나 눈물겨운지 알게 됩니다
멀리 서툰 뜀박질을 연습하던 바람다발
귀 기울이면 어느새 봉창 틈새로 기어들어와
밥물 끓어 넘치듯 안타까운 생각들을 툭툭 끊어놓고
책상 위 쓰다만 편지를 먼저 읽고 갑니다
서둘러 저녁상 물려보아도 매양 채우지 못하는
끝인사 두어줄 남은 글귀가 영 신통치 않은 채
이미 입동 지난 가을 저녁의 이내 자욱이 깔려
엉긴 실꾸리 풀듯 등불 풀어야 합니다
그래요. 이런 날에는 외투 걸치고 골목길 빠져 나와
마을 앞자락 넓게 펼쳐진 빈들에 나가지 않으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웅크린 집들의 추위처럼 흔들리는 제 가슴 속
아 이곳이 어딥니까, 바로 빈들 아닙니까
- 시집<비단길/ 2006, 세계사> 중에서
호라지좆/ 김중식
난 원래 그런 놈이다 저 날뛰는 세월에 대책 없이 꽃피우다 들켜버린 놈이고 대놓고 물건 흔드는 정신의 나체주의자이다 오오 좆같은 새끼들 앞에서 이 좆새끼는 얼마나 당당하냐 한 시대가 무너져도 끝끝내 살아남는 놈들 앞에서 내 가시로 내 대가리 찍어서 반쯤 죽을 만큼만 얼굴 붉히는 이 짓은 또한 얼마나 당당하며 변절의 첩첩 산성 속에서 나의 노출증은 얼마나 순결한 할례냐 정당방위냐 우우 좆같은 새끼들아 면죄를 구걸하는 고백도 못 하는 씨발놈들아
- 시집 『황금빛 모서리』 , 문학과지성사, 1994.
‘호라지좆’은 욕이 아니라 식물의 이름이다. 그 뿌리는 ‘천문동(天門冬)’이라는 귀한 이름의 약재이고 호라지좆죽을 쒀먹으면 피부미용에도 좋다고 하며 부지깽이 나물이라 하여 무쳐먹기도 한다. 하지만 ‘우우 좆같은 새끼들아’ ‘씨발놈들아’는 분명히 욕설이다. 욕은 욕이되 ‘면죄를 구걸하는 고백도 못하는’ 얍삽한 자들에게 퍼붓는 욕이다.
간격 / 안도현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2004,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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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 하나/ 이안
할머니한테 들은 고조할아버지 이야기
얼마나 가뭄이 지독했던지 먹을 게 없었다
어느 날 마루에 놓인 물동이 속에
밥알 하나 가라앉은 게 보였다
가난해도 양반 체면에
밥알 하나만 달랑 건져 먹는 건 욕이 될까 봐
물 한 동이를 통째 들이키셨다는,
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에
밥알 하나 가만히 떠올라 오는 이야기
- 동시집『고양이와 통한 날』(2008, 문학동네)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 시집『뿔』(창작과비평사, 2002)
Isaac Hayes - Nothing Takes The Place Of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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