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저자 황석영|창작과비평사 |2001.06.30
황석영-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재학중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를 따라 전국의 공사판을 떠돈다. 오징어잡이배, 빵공장 등에서 일하며 떠돌다가 승려가 되기 위해 입산, 행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해병대에 입대,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단편소설 「탑塔」이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방북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베를린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 체류했고, 1993년 귀국 후 방북 사건으로 7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98년 사면 석방되었다. 1989년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다룬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로 만해문학상을, 2000년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변혁을 꿈꾸며 투쟁했던 이들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장편소설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객지』 『가객』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무기의 그늘』 『장길산』 『오래된 정원』 『손님』 『모랫말 아이들』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등이 있다. 한국문학 100년사를 정리하는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을 펴내기도 했다.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등 세계 각지에서 『오래된 정원』 『객지』 『손님』 『무기의 그늘』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이 번역 출간되었다.
목차
1. 부정풀이
2. 신을 받음
3. 저승사자
4. 대내림
5. 맑은 혼
6. 베 가르기
7. 생명돋움
8. 시왕
9. 길 가르기
10. 옷 태우기
11. 넋반
12. 뒤풀이
책속으로
찬샘골이라고 말하자마자 그는 사십여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마을의 이름을 입밖에 내놓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찬샘골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무슨 향내나는 산열매 같은 맛으로 혀끝에 맴돌다가 발효시킨 생선의 썩은 냄새로 돌변하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수채화로 연두색의 여린 잎사귀를 가득 차게 그린 화선지 위에 먹구름 같은 물감이 왈칵 덮치듯이 쏟아져 번져가는 것처럼... --- p.12
자자, 이젠 돼서. 그만들 가자우. 순남이 아저씨의 헛것이 말했고 일랑이도 그 옆을 따른다. 그래, 가자우. 다른남녀 헛것들도 벽에서 스르르 일어나 바람에 너울대는 헝겊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득하게 먼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서로 죽이고 죽언것덜 세상 떠나문 다 모이게 돼 이서. 요한이 아우에게 말했다. 이제야 고향땅에 와서 원 풀고 한 풀고 동무들도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 --- p.
자리를 옮겨서 땅바닥의 흙을 파냈다. 두어 줌 파내니까 축축하고 나뭇잎 섞인 흙이 나오다가 한뼘쯤을 더 파내니 그제야 부드럽고 바알간 속흙이 나왔다. 그는 잔돌멩이들을 골라내고 손바닥으로 자리를 다진 다음에 간수했던 모피 주머니를 꺼냈다. 가죽끈을 풀고 안에서 작은 도장처럼 생긴 형의 뼛조각을 꺼내어 구멍 속에 놓았다. 요섭은 그 위에 흙을 덮는다. 그리고 아기를 잠재울 때처럼 손바닥으로 땅 위를 토닥이며 두드려주었다. 형님 이제야 고향에 돌아온 거요, 하고 요섭은 소리를 내어 말하고 싶었다. --- p.254-255
요섭은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의 뒤통수를 지나 얼굴을 다시 돌아본다. 이쪽 통로에는 없는 것 같다. 그는 커튼을 젖히고 어둠속으로 들어선다. 화장실의 빈칸 표시등이 파랗게 반짝인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비행기의 굉음이 귓바퀴에 멍멍하게 가득 찬다. 거울 위에 피로한 초로의 얼굴이 떠 있다. 그는 손을 씻고 세수를 한다. 종이타월로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고 맨손바닥으로 다시 얼굴을 쓸어내린다. 요섭이 문을 향하여 돌아서는데 갑자기 자신이 타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거울을 힐끗 본다. 형이 거기에 떠올라 있었다. 그는 쫓기듯이 문을 밀치고 나온다. 그리고 커튼을 젖히고 통로로 나오는 데 저어기, 자신의 자리에 요한 형이 앉아 있었다. 류요섭 목사는 잠깐 멈칫했다가 형을 향하여 눈길을 똑바로 맞추고 형이 앉아 있는 좌석으로 걸어나갔다. 가까이 다가서니 빈 좌석이다. 앉으려고 몸을 돌리는데 뒷전에 형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그대로 눌러앉는다. 요한 형의 환영을 등으로 깔아뭉개면서 요섭은 등받이에 푹 기대앉았다. 요섭아, 요섭아. 그는 깜짝 놀라서 궁둥이를 얼른 들었다가 다시 앉았다. 요섭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허튼 짓 하지 말라우요. 한번 갔으문 그만이지 왜 자꾸 나타나구 기래요? 난두 너하구 고향 가볼라구. --- p.37
사랑할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251) --- p.251
추천평
내가 방북했을 때 저쪽에서 방문 코스와 스케줄을 협의해왔는데 다른 방북자들도 그랬겠지만 나름대로 선택을 하거든요. 나는 만주에서 태어나 외가인 평양에서 몇년 살다가 삼팔선을 넘었으니까 한번도 본적지에는 가보지 못했어요.
하여튼 황해도 신천(信川)을 방문했는데 매우 암울하고 북한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낙후된 인상을 받았어요. 신천에는 '미제 양민학살 기념관'이 있고 군(郡) 전역에 걸쳐서 학살장소를 보존하고 있어서 더욱 어두웠습니다. 안내원이 격앙된 어조로 전쟁시기의 미군의 만행에 대하여 치를 떨며 설명하고 그 물적 증거물들을 보여주는 식이었지요. 남한에서의 좌우대립에 의한 농촌공동체의 파괴에 대하여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듣고 보아온 나로서는 분노보다는 죽은이들의 신발이라든가 옷가지, 또는 머리카락 따위 물건들의 생생한 보존과 인형으로 만들어놓은 참상의 실감나는 재현 등에 소름이 끼쳤어요. 더구나 끔찍한 것은 전 군민의 4분지 1에 해당하는 3만 5천여명을 학살했다는 것이지요. 몇번의 방문 중에 알게 되었지만 황해도에는 본토박이들이 많이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함경도나 평안도에서 이주시킨 사람들이 많았어요. 북한에서 월남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라는 겁니다. 미군은 남한에서도 그랬고 북한지역의 곳곳에서 양민학살을 저질렀지만 이 지역에서만은 머무를 시간이 없이 곧바로 만주의 국경지대를 향하여 북진했고, 중국군이 참전하자 일제히 후퇴했다고 전사(戰史)에 나와 있어서 이건 무엇인가 좀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베를린에 돌아가자마자 여러가지 자료를 뒤지기도 하고 황해도 지역에서 월남한 해외동포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황해도에는 봉건시대부터 토착 대지주가 별로 없었지요. 북에서는 유일한 곡창지대인데 대지주가 별로 없었다는 게 잘 이해가 안 가지요. 조선시대부터 황해도는 토질이 좋은데다 토반세력은 형성되지 않아 일찍부터 궁방전(宮房田)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궁에서 온 하급아전들과 지방 마름〔舍音〕들이 지주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곡산군수로서 목격한 황해도의 백성들이 일년에 여덟 가지, 많게는 열 가지 이상의 부역을 지고 있어, 남도에서 아전의 수탈과 폐해가 가장 심한 전라도보다 더하다고 탄식할 정도였지요.
일제가 들어오면서 궁방전은 곧 국유화되거나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한 일제의 경제기관에 흡수되었어요. 구한말 식민지시대에 이르면 이들 관리인 계층이 중농층을 이루게 되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북선지방 사람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신분상승을 하려면 기껏해야 향시나 보고 실직(實職)이 아닌 직함으로 지방에서 행세깨나 할 정도였지요. 그러므로 이들은 진충보국(盡忠報國)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개화하여 신지식을 받아들이거나 했습니다.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이들의 배경이 그렇지요. 식민지시대 북선에서 개화 지식인은 두 가지 상반된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를 통해서, 다른 하나는 당시의 선진사상인 사회주의를 통한 개화였지요. 사실 이들의 뿌리는 하나였던 셈입니다.
해방이 되어 항일빨치산 세력이 북한정권의 실세가 되었고 겨우 두어달 동안에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는데, 남쪽에 미군정이 있는데다 시간도 없었으며 또한 전투경험은 많지만 현장 당활동이나 교육경험이 없는 그들로서는 지방에서 여러가지 무리를 빚게 됩니다.
열정이 넘치는 반면에 교조적인 젊은 당원들은 평양은 물론이고 신의주나, 함흥, 원산 등지에서 기독교로 대표된 민족 부르주아지들의 저항에 부딪칩니다. 더구나 당의 이론가들은 거의가 소련에서 교육받고 자라나 조선의 실정을 모르는 스딸린주의자들이었습니다. 토지개혁을 담당할 요원들은 모두가 이른바 기본계급이라고 하는 빈농층이나 머슴 같은 이들이었어요. 이들은 오랫동안 어느 지방 한 동네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기 때문에 인정상이나 도리상 계급투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요. 복잡한 공산주의 이론보다는 '적개심'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수단일 수가 있었습니다.
베트남이나 중국의 경우, 토지개혁 과정을 착근(着根)이라고 하여 노련한 당일꾼이 하방해서 마을의 농군 집에 기거하며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의식화하여 농민 스스로가 토지개혁의 주체로 나서게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 그런 여유와는 거리가 있었겠지요.
물론 이러한 조급성은 북한정권의 책임도 있겠지만 당시의 급박한 국제정세와 분단의 탓일 수도 있습니다. 초창기 북한정권의 종교에 대한 정책도 이러한 조급성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만식이나 그와 비슷한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나 지방 향신층으로 이루어진 교계의 장로들을 포용하지 못했고, 이들 상반된 세력은 토지개혁에의 저항, 주일날 대의원선거의 강행과 불참, 그리고 테러와 체포, 처형으로 맞대결하게 되지요.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철천지원수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전쟁 전까지 형성된 지하교회는 일종의 지하조직으로 되었던 겁니다. 백색테러로 유명한 서북청년단이나 한독당 또는 반공청년단의 정신적 근거가 사실은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와 깊게 관련되어 있거든요.
나는 베를린에서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사가 격변하는 현장에 있으면서 더욱 확신하게 된 생각이 있었지요. '나는 내 방식으로 세계를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주의적 생각을 동아시아적 형식에 담는다'는 생각입니다.
망명지를 뉴욕으로 옮긴 뒤에 통일운동 활동으로 알게 된 신천 출신 어느 목사에게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자료를 통해 가졌던 의구심이 옳은 것으로 드러난 겁니다. 진실은 그 끔찍한 학살이 '우리들끼리'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내면적인 죄의식과 두려움이 지금도 그치지 않는 광적인 증오의 뿌리가 되었던 셈입니다. 북이 이 사건을 '미제'라는 원인제공자에게 돌린 것은 자신들 체제의 봉합과 해소를 위해서였을 겁니다.
『손님』은 한국전쟁시기 서로 죽고 죽이던 저러한 악몽의 45일을 몽환적으로 드러내는 한판의 해원(解怨)굿입니다. 사실 '손님'은 천연두의 민속적 별명이기도 합니다. 천연두는 17세기에 서양에서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를 통하여 중국의 양쯔강 이남을 휩쓸고 동북지방을 거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특히 병자호란 뒤부터 조선에 창궐해서 풍토병이 되다시피 했지요. 백성들은 그것이 서병(西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호구별성(胡寇別星)이라고 불렀습니다. 호구는 오랑캐, 별성은 궁 지키는 수문장 같은 무서운 존재이므로 말 그대로 외국 병정을 말합니다. 천연두의 다른 별명인 '마마'라는 말도 당상관 이상의 무섭고 높은 이에게 붙이는 경칭이라는 점에서 천연두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천연두 자료를 찾아보면 각 시대마다 목차가 끝없이 나타나서 어느 자료를 뒤져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마을마다 수호신처럼 서 있는 장승이나 돌 무더기 따위도 무슨 이정표가 아니라 사실은 바로 외방에서 들어올 손님 귀신을 막자는 것이랍니다.
<신춘문예 당선작>문학평론-황석영의 『손님』論 2003 2.9 문화일보
1. 죽음에서 삶으로
황석영의 ‘손님’꺝은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한다. 한 인물(한영 덕)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분단의 상처와 기억을 현실로 불러내는 ‘한씨 연대기’의 경우처럼, ‘손님’ 에서 죽음은 불화의 존재들을 현실의 광장으로 불러들이는 중요 한 모티브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손님’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것은 ‘류요한’이라는 인물이 지닌 상징적 맥락이다. 기독교 장로로서,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한 주체로서 자리매김되는 류요한은 그가 겪은 실존적 고투 이상의 역사적 고통을 온몸으로 체현하는 인물이다. ‘신천 인민 학살’을 비롯하여, 기독교-우익 세력에 의해 자행된 ‘살육’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이 류요한의 인물상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의 죽음이 갈등의 해소,곧 화해의 길로 들어서는 모티브로 설정되고 있는 점은 무엇보 다도 ‘손님’에 내포된 역설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가 화해의 중심에 류요한을 세운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6·25 전쟁을 전후하여 그가 벌인 악마적인 행동의 기원을 해명하는 문제와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손님’이라는 작품 속에서 류요한의 죽음은 자신의 삶뿐만 아 니라 타자들의 삶을 역사화하는 모티브로 작용한다. 류요한이라 는 개인이 죽음으로써 타자들의 기억은 현재화되고,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세계로 회귀한다. 삶과 죽음이, 이승과 저승이 류요 한의 죽음을 통해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틀로 전경화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손님’에서 표명되는 죽음의 영역은 삶의 영역과 교차한다. 죽음이 화해의 길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거론되는 까 닭은 그것이 지닌 삶과의 연계성 때문일텐데, 황석영은 이 죽음의 모티브와 직접적으로 대면함으로써 지난(至難)했던 민족 근대사의 두 주체세력들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죽어서야 가슴 속에 맺힌 ‘한들’을 풀어헤칠 수 있다는 인식은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가, 화해의 장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음을 암시한다. ‘손님’의 시대적 배경인 50년대 초의 분단모순이 50여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는 모순구조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손님’을 관통하는 죽음의 의미를, 그리고 작가 스스로 샤먼으로 변신하여 죽은 자들을 위한 진혼곡을 부르는 이유를 우리는 새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들이 죽은 자들의 ‘한들’을 망각할 때, 죽은 자들의 ‘한들’은 역사 속으로 묻힐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묻혀버릴지도 모를 ‘한들’을 현실세계로 불러들이는 것 ‘손님’은 그렇게 죽음의 사상과 연결되고 있다 하겠다.
2. 떠도는 기억들
‘손님’의 전작(前作)인 ‘오래된 정원’(창작과 비평사, 2000)에서도 죽음은 역사적 기억을 불러들이는 기호로 작용한다. 암으로 죽은 한윤희의 흔적들(편지, 노트)이 주인공 오현우의 역사적
기억을 현실로 매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죽음-기억 은 과거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로 들어가기 위한 계기이다. 한 윤희에 대한 기억이, 그리고 그녀에 대한 시대적 의미부여가 ‘ 일상과의 투쟁’이라는 현실적인 조건과 접맥되는 것도 죽음-기억 이 지닌 현실적 근거 때문이다. ‘손님’에서 류요한의 죽음을 통해 전경화되는 류요섭과 박명선의 기억이 갖는 의미는 이처럼 흔적으로 남은 기억들의 현재화가 화해의 길로 들어서는 전제라 는 점과 관련된다. 특히 이 두 개의 기억이 한 맺혀 죽은 영혼들의 기억만큼이나 작품 속에서 ‘떠도는 기억들’이라면, 그 기억들이 떠돌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그 떠도는 기억들을 의미화하는 근거를 찾는 일은, 화해의 길목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번쯤 거쳐가야 할 사유의 길일 것이다.
‘손님’의 전체적인 정조가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박명선의 기억을 지배하는 정조 역시 죽음에 대한 이미지와 연관된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그 강렬한 이미지 앞에서 시간성은 사라지고 공간성만이 이미지화되어 그녀의 기억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엄 밀하게 따진다면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살해자’로서의 류요한의 모습은 가족의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에서 파생된 ‘류요한’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명선의 기억이 화해의 길로 나올 수 없는 구체적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박명선은 그녀의 가족이 살해되는 정황을 살펴보기 이전에 죽음 자체의 이미지에 함몰된 다. 때문에 그녀에게 과거는 기억하기도 싫은 이미지로 가득찬 과거이다. 류요한이 철저한 ‘악’으로 판별되는 것은 이 때문인 데, 작가는 죽음으로 감싸여진 박명선의 기억 역시 화해의 길로 가는 가능성의 영역에 포섭하고 있다. 비록 현실적 삶의 세계에 서는 화해가 불가능하겠지만, 죽음의 세계에서는 이들 역시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박명선의 이미지화된 기억처럼 류요섭의 기억 역시 이미지화된 기억이다. 류요섭의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홍정숙과 강미애라는 ‘인민군 여전사’들의 죽음이다. “나는 키가 작고 몸집도 작은 소녀같은 강미애 누나를 분명히 좋아하고 있었다”(235쪽)라는 류요섭의 고백처럼, 변성기에 접어든 소년에게 그녀들이 있는 세계는 모든 것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세상이었다. 시대가 전쟁(6 ·25)의 시기였고, 또 형 류요한이 기독교 계열의 우익으로 활동하고 있더라도, 류요섭에게 그녀들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사람 들이었다. 순수함이 지배하는 원초적인 세계, 타자가 사물화되지 않는 공존의 세계, 이러한 류요섭의 기억의 세계를 깨뜨린 사람이 류요한이었다. “당시에는 그저 남에게 들키지 않게 소리없이 처치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243쪽)는 류요한의 회상에도 드러 나는 바, 류요한에게 동생의 순수함은 이데올로기 이후의 문제였다. 인민군 여전사는 ‘적’일 뿐이며 적은 당연히 ‘처치’해야 할 대상이다. 류요섭에게 인민군 여전사들이 타자였다면, 그리 하여 사물화가 적용될 수 없는 ‘인간(타자)’이었다면, 류요한에게 그들은 사물화된 대상일 따름이었다. 타자에 대한 이러한 인 식의 차이가 결국은 류요섭의 기억의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류 요섭의 기억에는 박명선과 같은 압도적인 죽음의 이미지는 없지 만, 그 대신에 잃어버린 순수함의 기억이 존재한다. 순수함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순수함이 깨지면서 류요섭이 잃은 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 정확하게 말하면 형에 대한 신뢰였다.
박명선의 기억이든, 류요섭의 기억이든 그들의 기억 속에는 죽음으로 표상되는 고통이 있다. 그런데, 기억 속의 고통은 욕망을 통해 해소되지 않고 그 밑에 잠재하여 주체의 삶을 규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류요섭의 북한 고향 방문은 단순한 고향 방문일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상처’와 ‘고통’으로 이미지화된 기억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며, 한편으로 죽은 자들의 영혼 과 산 자들이 만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요컨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다시’ 만난다. 실로 50년만의, 그것도 산 자보다는 죽은 자들이 많은 이들의 만남이 성사됨으로써 ‘손님’에서 떠돌던 기억들은 이제 그 기 억의 주체-타자들과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이다.
3. 타자들, 공존할 수 없는 이제 우리는 문제의 시대 중심으로 들어선다. 박명선과 류요섭이 중심의 외부에서 이유도 모르는 고통을 당한 타자들이라면, 시대의 중심에 선 인물들, 그러니까 류요한, 이찌로(박일랑), 순남이 아저씨, 소메 삼촌 등은 자신들이 선택한 세계에서 행동한 주체들이며 타자들이다. ‘신천 대중 학살’이라는 뚜렷한 사건이‘손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지만, 일단 우리는 ‘신천 대중 학살’을 역사적으로 의미화하기에 앞서 그 ‘학살’의 근원을 찾아나서야 한다. 근원에 대한 탐색은 달리 말하면 타자에 대한 탐색이 될 터인데, 그런 탐색 과정을 통해 당대 주체들의 타자인식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황석영이 ‘손님’에서 쟁점화하는 사안은 기독교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사이의 갈등이다. 이데올로기 문제와 삶(생활)의 문제가 중층적으로 복합되어 있는 이들의 갈등은 그 때문에 격렬한 양 태로 현상화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타자)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나(주체)의 삶의 기반이 파괴된다. 주체가 삶의 기반을 지 키려면 타자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시켜야만, 곧 공산주의자(사탄)를 기독교도로 개종시키거나, 아예 말살시켜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점은 공산주의자의 입장에 서도 마찬가지일 터, ‘지주계급’을 대표하는 기독교도가 공산 주의자들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는 한 기독교도는 영원한 ‘반동 ’으로 남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두 세력의 담론에는 공존할 틈 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이 인정하는 세계만이 유일하고 가능한 세계일 뿐이라는 이 주체 중심의 인식구조는 그런 만큼 타자의 타자성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한다.
그리하여 인식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행동의 차이가 이들에게는 도덕적인 선·악의 문제로 돌변한다. 타자가 인정되지 못하는 이유도, 도덕이라는 문제는 원천적으로 가치판단을 내포하는 문제 인데, 이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만 유효한 조건을 도덕적 가치판단의 선험조건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험적 가치판단으로서의 도덕주의가 ‘권력욕망’으로 통하는 지름길이라 는 사실이다. ‘신천 대중 학살’을 비롯하여 소설 곳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살육은 타자에게 인정받기 위한 주체-동일자의 인정투쟁의 결과였다. “그날 십팔일하구 이튿날 십구일, 또 이십 삼일꺼디 우리넌 모두 미체 있댔다”(225쪽)는 소메 삼촌의 말대로, 인정투쟁은 주체가 자신의 행동에 ‘미쳐야만’ 이길 수 있는 투쟁이다. 이 ‘미침’의 궁극점이 ‘신천 대중 학살’이며, 류요한과 조상호 사이에 벌어진 ‘가족 살해’ 역시 주체의 인정투쟁, 즉 권력욕망이 부정적으로 작동할 때 초래되는 비참한 결과 를 예증한다 하겠다.이렇듯 선험적 도덕주의가 권력욕망으로 변할 때 타자의 타자성 은 배척된다. 그리고 타자가 다만 ‘인정욕망’의 ‘대상’으로 만 비쳐질 때, ‘신천대중학살’과 같은 역사적인 살육은 하나의 잠재태가 되어 언제나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황석영이 ‘신천 인민 학살’의 죽음 이미지를 다소 치밀하게 묘사하는 까닭은 이러한 죽음 이미지의 충격 속에서 “우리”가 저지른 타자의 살육을 직시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타자가 부재하는 동일자의 세계 속에서 화해는 타자를 타자로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할 것이다. 류요한을 포함한 여러 타자들의 죽음이 새로운 시작일 수 있는 것은, 죽음의 세계는 “아무 편두 아닌”(51쪽)세계이며, 더불어 “구원받지 못할 영혼은 없”(143쪽)기 때문 이다. 죽어서야 대화가 가능한 세계라는 소설적 모티브는 그만큼 현실세계에서의 화해라는 것이 거짓 화해일 수 있다는 점을 암 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황석영이 추구하는 화해의 세계가 그만큼 뿌리깊은 곳에 닿아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4. 대화의 장(場)에서
타자들의 대화는 삶과 죽음의 접점, 곧 굿판에서 이루어진다. 이 대화의 장(場)으로서의 굿판은 여러 인물이 여러 목소리를 내는 다양성의 공간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선험적인 진리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중심으로서의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 은 잠재성의 공간이며, 모든 타자들이 자신들의 ‘한’을 자유롭게 발설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 잠재성의 공간에서, 죽은 자들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작가는 그 태어남을 “한이 없이 가야 떠돌디 않구”(119쪽)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한이 없는 영혼’을 위해 작가가 준비한 것이 바로 한바탕의 굿판이라 하겠다. 이 굿판에서 죽은 자들은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는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인 바, 이야기를 통해 삶을 풀어헤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을 규정했던 근원적 억압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을 얻는다. 이러한 잠재성의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은 따라서 소메 삼촌의 말대로 “나타나문 보아주구 말하문 들어주는”(174쪽) 것 이외에는 있을수 없다. 그렇게 대화의 주체들은 열린 대화의 장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의미화한다. 그렇게 의미화된 말은 다른 대화자(타자) 들의 의미화된 말과 공명하면서 새로운 대화의 장을 형성한다.
그것은 그러니까 ‘말들’의 릴레이이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 말들’의 잔치이다.다양한 ‘말들’이 공존하는 이 같은 세계에서 산 자와 죽은 자 들의 대화를 규정하는 준거는 다름 아닌 살육-죽음이다. 류요한 이 이찌로(일랑)와 순남 아저씨를 죽이고, 봉수(요한과 상호의 친구)가 “빨개럴 벗긴 남자 두 사람”을 “휘발유”로 태워 죽 인다. 그리고 방공호 속의 사람들을 “까소린”과 “휘발유”로 태워 죽이면서 “군내 총인구으 사분지 일이 죽”(226쪽)는 “신천 대중 학살”이 일어난다. 대화자들이 이야기하는 죽음의 이미지-사건은 끝이 없다. 죽이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그들은 죽이 고 죽임을 당한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계속된다. 죽임을 당한 사람의 이야기도, 죽인 사람의 이야기도 거리낌없이 대화의 공간을 메꾼다. 아니, 죽인 사람이 죽임을 당한 사람이니 그들의 이야 기는 ‘하나’이다. 그리고 그 ‘하나’의 이야기의 끝에서, 곧 죽음과 죽임의 끝에서, 그들은 드디어, 그들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자기증오”를 발견한다.
자기에 대한 증오가 강할수록 주체와 세계(타자)의 단절감은 더 욱 커진다. 자기증오의 감옥에 갇혀 이국(異國)에서 수인(囚人)과 같은 생활을 한 류요한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인물들이 자신의 과거를-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죽인 자들과 어울리고, 또 “리당위원장”을 지낸 이찌로(일랑)처럼 “아마 모르긴 해두 내가 그 아이(류요한)럴 체다볼 젠 독한 눈이 아니댔을 거이야”(213쪽)라며 당시의 살육이 상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에서 비롯되지만은 않았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증오하는 주체들은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의 세계로 떠올리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죽음이라는 장의 변화와 맞물린다. 변화된 것은 무엇인가? 소설의 곳곳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삶의 세계의 부분성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전체성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죽음의 세계는 “너 난 데”(27쪽), 곧주체와 타자가 태어난 원초적 공간이며, 그 곳은 “우린 아무 편두 아니”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비정형의 공간이다. 다양성의 가치가 열려 있는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는 비정형의 상태는 정형의 상태가 가능할 수 있는 궁극적 모태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황석영이 ‘손님’에서 전경화한 죽음의 이미지는 죽음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려는 구성적 배치물로 의미화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는 그 악몽의 나날을 보내면서 안에 감추고 있었을 뿐 서로를 원수보다 더 미워하게” 되는 상황의 악순환을 방지하는 소설적 장치이다. 이 장치를 통해 죽음이 이야기되는 대화는 ‘한’을 푸는 굿판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이 장치를 통해 류요한은 그의 말대로 “이제야 고향 땅에 와서 원풀고 한 풀고 동무들두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250쪽) 죽음과 대화를 가로지르는 이와 같은 구성적 힘은 분명 근자에 발표된 여타의 소설들과는 대별되는 ‘손님’만의 독특함이다. 이 독특함이 황석영이 도달한 화해의 세계를 단순한 화해의 의미망에서 벗어나게 한 주된 이유일 것이다.
5. 화해 혹은 상생(相生)의 길
황석영의 ‘손님’에서 형상화된 화해의 길은 달리 말하면 상생의 길이다. 상생을 말하기 위해 그는 기독교나 마르크시즘 같은 “손님”의 사상들을 현실세계로 불러들인다. 외래의 “손님”들이 벌인 것은 상극(相剋)의 잔치였다. 그러므로 ‘손님’에 표명되는 상생의 세계는 외래의 “손님”들이 만든 “살육”의 광장을 경유해야만 들어설 수 있다. ‘손님’에서 이 “살육”의 공간을 거쳐 궁극적으로 이른 지점은 “증조 할머니”로 표상되는 여성적인 공간인 바, “증조할머니”의 세계는 소설 말미의 ‘어머니의 세계’를 이끌어내는 원초적 기억의 세계라는 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손님’에 대한 평문들�커【�간과되어 온 “증조할머니”의 상징적 맥락은 실상 ‘손님’의 소설적 모태를 이룰 만큼 중요한 모티브이다. 이를테면 이
소설을 근거짓는 환상성의 모티브나 류요섭의 꿈속에 표출되는 ‘어머니의 세계’는 “증조할머니”의 세계와 접맥되어야만 소설적 의의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증조할머니”의 세계는 “장갑바우”와 같은 “옛말”, 곧 이야기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야기의 바탕이 상상력에 있는 것이라면, 그 세계는 분명 근대가 지향하는 이성의 세계와는 이질적인
양태를 띨 수밖에 없다. 근대의 세계가 지향하는 명료한 논리의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에서 보면 여러 다양한 세계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야기의 세계는 논리와 비논리가 혼융된 역설적인 세계이며,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는 환상의 세계이다. 그렇기에 “당 군 하라부지가 여게 내레와 지내다가 하늘루 올라갈 적에는 평시에 쓰던 칼과 갑옷을” 감추어둔 “장갑바우”의 세계가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있다. 근대의 세계, 특히 기독교적 세 계가 이런 이야기의 세계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이면에는 유일신이라는 기독교의 토대와 이야기의 다양한 세계 사이의 넘지 못할 사상적 장벽이 놓여있을 것이다.
“굿판”이라는 공존의 공간을 통해, 또 죽음의 사상을 통해 황석영이 이르려는 지점은 이 “증조할머니”의 세계, 구체적으로 이야기의 세계일 것이다. 세계로 열려야만, 그리고 입에서 입으
로 전해져야만 풍성해지는 이야기의 세계는 말 그대로 “굿판”의 무질서한 세계와 상통한다. “굿판”에서 벌어지는 한 맺힌자들의 이야기는 한 맺힌 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서로의 갈등을 푸는 단서가 된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 상극의 세계는 상생의 세계와 어울린다. 그리고 그 상생의 밑자리에는 “증조할머니”로 표상되는 여성성-전통성의 세계가 살아숨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증조할머니”의 세계는 단순히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전통을 거슬러 근대를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류요섭이 “낯선” 고향에 당도함으로써 과거와 화해하 는 길로 들어서듯, 황석영은 “증조할머니”의 세계를 떠올림으로써 근대적 세계와 화해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새삼 “증조할머니”의 세계가 지닌 현실적 유효성의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래된 정원’이도달한 모성적 세계와도 연관될 것인데, 황석영이 이 두 작품에서 모색해 온 ‘모죽(母竹)의 상상력꺟’은 굿판의 공간이 지니는 의미만큼이나 제의적인 상상력에 닿아 있다. 제의의 중심은 ‘샤먼(무당)’이다. 작가가 샤먼이 되어 벌이는 굿판으로서의 소설의 세계는 그러므로 이미 소설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소설이면서 동시에 소설을 넘어서는 이러한 시도는 “증조할머니”의 전통적인 세계를 근대적 소설의 세계로 되불러들이는 바탕이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의 소설적 특장이던 �矩瓚�세밀한 묘사는 상대적으로 간과될 수밖에 없다. 90년대 이후의 시대적 변화를 염두에 두더라도, ‘손님’에서 제시되는 “증조할머니”의 세계는 “오래된 정원”(‘오래된 정원’)의 시적인 세계(절대적인 공간)만큼이나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증조할머니”의 세계가 지닌 역설성은 현실적 유효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고립된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증조할머니”의 세계에 필요한 것은 아마도 황석영의 초기소설인 ‘삼포가는 길’의 “백화”나 ‘잡초’의 “태금”과 같은 인물들에서 소중하게 다루어진 건강한 여성성의 세계이리라. “ 백화”와 “태금”의 여성성의 세계가 근대의 남성적인 세계에 의해 추방될 수밖에 없는 세계라 할지라도, 전통을 거슬러서 근대를 다시 살아가야 하는 “증조할머니”의 세계는 여전히 이 “음울한” 근대적 여성성의 세계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손님’에서 도달한 화해의 세계는 이 여성성의 세계와 다시 한번 어울려 또 다른 화해의 세계로 들어서야 한다. 그것은 남성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의 화해보다 더 지난한 과정일 수 있다. 근대가 이미 지워버린 세계를, 혹은 근대가 지우려고 하는 세계를 화해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우리 가 황석영의 향후 작업을 주목해야 할 실제적인 이유일 것이다.<끝>
1)황석영, ‘손님’, 창작과 비평사, 2001.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할 때는 쪽수만 표기함.
2)김병익, ‘이념의 상잔, 민족의 해원’(‘문학동네’ 2001년 가을호), 성민엽, ‘이데올로기 너머의 화해와 그 원리’(‘창작과 비평’ 2001년 겨울호), 임홍배, ‘주체의 위기와 서사의 회 귀’(‘창작과 비평’ 2002년 가을호) 등이 ‘손님’을 다룬 대 표적인 평론들인데, 이 평론들은 공통적으로 이념의 화해라는 맥락에 주목하고 있어, 그 이념 너머를 지향하는 여성적 공간의 상징성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3)대밭에 처음 심는 대나무가 모죽(母竹)이다. 이 대나무가 삼백육십 도 방향으로 뿌리는 뻗어나가면 한 구역의 대숲을 이루는데 그것은 “밖으로는 각개의 독립된 대나무지만 땅 밑으로는 그 뿌리가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황석영, 이문재 대담 ‘문학을 찾아서’, ‘문학동네’ 1999년 봄호, 40쪽 참조) 이질적인 것.湧.공존이라 볼 수 있는 ‘모죽의 상상력’은 ‘오래된 정원’ 과 ‘손님’에 드러나는 여성적 공간의 근간이라 하겠다./오홍진
북핵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힘, 소설에서 만났다 17.09.14 오마이뉴스
극적인 촛불시민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야심차게 적폐청산을 목표로 달리다 북핵이라는 거대한 산을 맞닥트렸다.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을 거침없이 진행하며 문재인 정부의 대화 제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략적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이 와중에 사드배치를 둘러싼 국내 의견은 분분해지고 트럼프 행정부는 순발력 있게 한국과 일본에 전략무기 판매를 제안한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의 틈바구니에 끼인 한반도의 운명은 깊은 안개에 가려 쉽게 장래를 점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현대사에서 분단이라는 변수는 우리 사회의 다른 모든 의제를 삼켜버리는 거대변수로 기능했다. 당장 적폐청산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북핵 위기 앞에 꼬리를 감추었다. 위기 앞에 확연히 드러난 것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무력감이다.
우리에게 진정 자기결정권이 있는지 심각하게 되묻게 된다. 북한에 비해 경제력이 수십 배 앞서있는 남한이 미국의 사드를 배치하지 않고서는 안보를 장담 못한다고 하는데 정작 위협을 느끼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인가 보다. 중국은 서슴지 않고 경제 보복을 수행한다. 참으로 난망한 상황이다.
촛불시민혁명을 주도한 국민들 또한 전략적 판단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중국과 러시아에 북한 제재를 강력히 촉구하며 사드 배치의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신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극우세력은 말할 것도 없이 평화를 꿈꾸는 일반 시민사회 저변에서부터 두려움과 증오의 기운이 옮아가고 있다. 전략과 정책적 수단을 논하기 이전에 문재인 정부에게 헤게모니를 주었던 촛불시민사회의 뒤숭숭한 분위기가 진정한 위기를 말하고 있다.
한반도 분단의 트라우마는 좀처럼 치유되지 않고 있다. 상처가 아물만하면 다시 덧나고 아픈 상처가 온몸에 전이되는 양상이 반복된다. 한국 사회에 내면에 깊이 드리워져 있는 증오와 두려움을 기원을 복기하기 위해 황석영의 소설 <손님>을 다시 손에 들었다.
작가 황석영이 2001년에 내놓은 이 소설은 2000년 남북회담 이후 조성된 남북 화해의 분위기 속에 오랜 분단 갈등의 기원을 망자의 대화를 통해 풀어내고 다시금 화해와 상생의 길을 상상하게 만든 작품이다. 소설 속 배경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중순부터 그해 말까지 약 3만5000여 명의 황해도 신천군 마을 주민이 살해된 '신천 학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현재까지 북한 정부는 신천군에 '신천 학살 기념관'을 세워 미군의 잔인한 신천 군민 학살사건을 고발하며 체제 선전용으로 신천 학살사건을 활용해 왔다. 실체적 진실은 무엇인가. 소설은 당시 학살 사건을 경험한 류요한의 일상에서부터 전개된다. 류요한과 류요섭 형제는 재미교포다. 류요섭은 재미교포 목사로 북한 고향 방문의 기회를 얻어 고향 신천군을 오랜만에 찾아가게 된다.
신천 방문을 계기로 요섭은 당시 사건의 진실을 엿보게 된다. 류요한은 요섭의 형으로 신천 학살사건의 장본인이다. 그는 지난 끔찍한 기억에서 해방되지 못하다가 요섭의 북한 방문 직전에 사망한다. 류요섭은 신천 학살사건 당시 어린 나이여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고향을 방문하며 살아남은 자와 망자와의 대화를 통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한다. 사건의 진실은 바로 신천 학살사건은 외부자 미국이 아닌 북한 기독교 자영농과 사회주의자들 간의 치열한 전쟁의 결과였다.
해방 후 급진적으로 진행한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대다수의 대지주는 월남하였다. 남아 있었던 기독교인 자영농은 자신의 땅을 지키기 원했다. 땅이 없었던 다수의 소작농은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신분과 땅을 하사 받는다. 이해관계를 달리한 양대 세력은 한국전쟁의 전개 양상에 발맞추어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서로를 죽이는데 앞장섰다.
신천 학살사건은 '하나님의 전쟁'이었고 또한 '계급 혁명전쟁'이었다. 증오와 두려움 속에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생의 경계선에서 다른 여지는 없었다. 누구도 말 못할 끔찍한 현장을 담담하게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네 편, 내 편이 없는 죽음 이후의 망자들의 특권이었다. 망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분단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싶었던 황석영의 상상과 통찰이 돋보인다.
작가 황석영은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 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라고 말한다. 무서운 손님 마마님과 같이 한반도에 찾아온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나의 형제요 나의 이웃을 죽이는 무서운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했다. 기독교와 맑스주의의 실체적 진의를 넘어 분단의 현장에 결과로서 존재한 손님을 말한다.
우리는 과연 손님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오늘날 재생되고 있는 증오와 두려움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시대적 과제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동인으로서의 한국 시민사회를 다시 주목한다.
한국사회는 촛불시민혁명을 통해 역동의 날갯짓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변화에 대한 몸부림은 촛불시민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동인이다. 그 힘으로 철옹성과 같았던 국정농단 세력을 몰아내었다.
깨어있는 시민사회의 깊은 성찰과 과감한 도전이 한반도를 둘러싼 '손님마마님'을 넘어 새로운 평화의 물꼬를 열어낼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 청년단에게 죽임을 당한 머슴 일랑이가 남긴 마지막 말이 가슴에 남는다.
'조선의 하나님을 믿어라!'
작금의 한반도는 우리의 성찰과 우리의 고뇌가 담긴 자생적인 결단과 실천이 절실히 요청된다. 위기와 기회는 같이 온다. 증오와 두려움의 기운을 넘을 수 있는 평화의 새로운 시대적 물꼬가 열리기를 염원한다. 우리는 손님마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을 읊조리지 않더라도 촛불시민혁명을 이루어냈다. 손님 하나님이 아닌 조선의 하나님을 믿는다.
김정은의 딜레마 反美를 어쩌나 주간조선 [2507호] 2018.05.14.
북한의 신천박물관은 6·25전쟁 때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미군이 주민들을 학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고 북한이 주장하면서 각종 자료들을 전시해온 곳이다. 북한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미군이 38선을 돌파한 후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383명을 학살했다고 선전해왔다. 북한은 1958년 3월 26일 김일성 주석의 현지 교시에 따라 1960년 6월 25일 미군이 6·25 당시 주둔했던 자리에 이 박물관을 건립했다. 북한은 그동안 이 박물관을 ‘반미(反美)’의 교육장으로 활용해왔다. 실제로 지난 60년간 이곳을 찾은 인원만 1800만여명이나 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2014년 11월 25일 이곳을 방문해 반미투쟁 교육을 강화하라면서 개·보수를 지시했다.
800만이 찾은 반미의 성지 신천박물관
김 위원장은 2015년 7월 26일 이곳을 다시 방문해 미국을 ‘미제 살인귀’ ‘식인종’ ‘침략의 원흉’ 등 원색적 표현으로 비난했다. 김 위원장은 “신천박물관은 미제의 야수적 만행을 낱낱이 발가벗겨 놓은 역사의 고발장”이라면서 “피는 피로써 갚아야 하며 미제와는 반드시 총대로 결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매년 6월 25일부터 정전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까지를 ‘반미공동투쟁 월간’으로 지정하고, 신천박물관에서 대대적인 반미투쟁 대회를 가져왔다. 하지만 신천군 주민학살은 미군의 소행이 아니라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당시 기독교 우파 세력과 공산 좌파 간의 알력으로 양 진영 간에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미군은 신천에 주둔하지도 않았고 소규모 부대가 지나간 적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미군이 신천군 주민학살 사건의 주범이며 잔인한 범죄자라고 선동해왔다.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도 북한의 반미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푸에블로호는 1968년 1월 23일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북한에 나포됐다. 당시 북한은 초계정 4척 및 미그기 2대를 동원해 50㎜ 기관포 2문만을 탑재해 사실상 비무장함정인 푸에블로호를 납치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 승무원 83명 중 1명이 총격으로 사망했고 나머지 82명은 북한에 억류됐다. 미국 정부는 북한의 무모한 도발행위를 비난하고 푸에블로호와 승무원들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일전도 불사한다는 결연한 입장을 보이기 위해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제7함대의 구축함 2척을 동해로 출동시켰다. 반면 북한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고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학대·고문해 영해를 침범했음을 시인하도록 강요했다.
북한은 미국이 영해 침범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하자 사건 발생 후 11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 23일 승조원 82명과 유해 1구를 송환했지만 푸에블로호 함정은 반환하지 않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9년 1월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를 평양의 대동강 ‘충성의 다리’ 근처에 옮기도록 했다. 김정은은 한 술 더 떠 2013년 푸에블로호를 평양 보통강변 전승기념관의 ‘노획무기전시장’으로 옮기고 대형 전광판까지 설치하도록 했다. 북한은 푸에블로호 사건을 “6·25전쟁에서 패한 미국이 제2의 조선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무장간첩선을 침투시킨 것”이라면서 “미국과의 협상에서 ‘항복서’를 받아냈다”고 선전해왔다. 푸에블로호가 전시돼 있는 곳에선 반미구호를 외치는 청년 학생들과 주민들의 군중집회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푸에블로호를 참관한 북한 주민은 219만여명이나 된다.
▲ 북한의 한 유치원생이 미군이 그려진 표적을 향해 화살을 쏘고 있다. photo KCNA
반미가 북한의 국시
북한은 전 세계에서 반미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말 그대로 반미가 국시(國是)라고 볼 수 있다. 반미가 북한의 국가 정체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북한 정권은 주민들의 반미 정서를 고취시키기 위해 세뇌작업을 끊임없이 해왔다. 실제로 북한 어린이들은 걷기 시작할 나이가 되면 미국을 적으로 보는 교육을 받는다. 유치원생들은 장난감 총으로 미군 모형을 내리치는 놀이를 하는가 하면 미국과 싸워 이기거나 미국을 비판하는 그림을 그린다. 게다가 소학교(한국의 초등학교)부터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는 반드시 반미를 충동질하는 내용이 포함된다. 탈북자 이현서의 저서 ‘7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 어느 탈북자의 이야기’를 보면 북한 교사들은 미국이 사악하다면서 미제를 타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은 미국을 ‘승냥이’에 비유한다. 승냥이는 개과의 포유동물로 잔인하고 성격이 난폭하다. 소학교에서 배우는 산수 문제도 ‘내가 미제 승냥이 한 명을 죽이고 인민군 동료가 미제 놈 두 명을 죽였다면 미제 놈은 모두 몇 명이 죽었나’라는 내용으로 돼 있다. 김일성은 1963년 2월 “승냥이의 야수적 본성이 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미제의 침략적 본성은 절대로 변할 수 없다”며 “미제를 미워하는 사상으로 군인들과 주민들을 철저히 교양해야 한다”는 교시를 내리기도 했다. 북한 주민들은 각종 집회나 회의에서 항상 반미 구호를 외치면서 미국을 비난한다. 평양을 비롯해 북한 방방곡곡에는 반미를 부추기는 포스터 등이 붙어 있다. TV와 영화를 봐도 반미가 주요 내용인 작품들이 많다. 주민들이 미국 영화를 보다가 적발되면 처형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북한 정권이 반미를 이처럼 앞세워온 이유는 무엇보다 ‘체제 생존’을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북한 정권은 지금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근본적인 원인이 미국에 있다고 선전해왔다. 북한 정권은 모든 문제의 출발점을 미국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선악의 개념으로 미국을 보고 있다. 북한 정권은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강력한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고 있는 미국을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백년 숙적’이라고 부른다. 북한 주민들은 이런 선전·선동 때문에 미국을 타도해야 할 사악한 제국주의 국가로 간주해왔다. 심지어 북한 정권은 1990년대 후반의 ‘고난의 행군’도 미국과 한국의 음모에 따라 발생한 것이라면서 주민들에게 거짓 선전을 해왔다.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핵 개발은 미제에 맞서기 위해 불가피한 자위 수단이고 이에 따른 경제적 고통도 인내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북한 주민들은 과거 김일성이 위대한 영도력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6·25전쟁 때 한반도 북반부에서 미제를 쫓아낸 것처럼 김정은이 핵무기로 미국의 한반도 점령 야욕을 분쇄하고 주체적으로 조국통일을 이뤄낼 것이라고 믿고 있다. 특히 북한 정권은 반미를 3대 세습의 약점을 감추고 폭압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북한 정권은 미제의 침략에 맞서 자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미명 아래 주체사상과 수령 독재체제를 구축해왔다.
▲ 집회에서 반미 구호를 외치고 있는 북한의 젊은이들. photo KCNA
김씨 3대의 미국 ‘짝사랑’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김일성과 김정일은 ‘불구대천의 원수’인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해왔다. 김일성은 1981년 4월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과의 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의 관계개선에 적극 협조할 것을 부탁하면서 미국이 남·북 연방제에 동의만 해준다면 통일 이후 진해만을 미국에 할양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정일도 자신의 아버지처럼 이중적인 입장을 보였다. 김정일은 2000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에게 주한 미군이 (동북아 질서에서) 안정된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성사되기를 기대했다. 김정은은 부친이나 조부보다 미국을 더 좋아하는 듯하다. 실제로 김정은의 집무실엔 애플 컴퓨터가 놓여 있고, 즐겨 타는 차량은 미국산 SUV라고 한다. 미국의 프로농구인 NBA 게임을 즐겨 보는 김정은의 유일한 외국인 친구는 NBA 스타였던 데니스 로드먼이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장례식 운구차로 미국 포드사의 링컨컨티넨탈 리무진을 사용하도록 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 2012년 모란봉악단 공연에서는 미키마우스 등 미국 디즈니 캐릭터들이 나와 화제가 됐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김씨 3대는 주민들에게 반미 세뇌교육을 철저하게 시키고 자신들은 미국을 ‘짝사랑’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왔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김정은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요구해온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에 동의하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이어 수교까지 한다면 북한 주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중동의 위성방송인 알자지라가 지난 4월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분위기를 보도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인터뷰에 응한 북한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반미투쟁을 강조했다. 한 의대생은 “나는 미국 제국주의를 싫어한다”면서 “모든 조선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을 증오한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은 “조선 민족 전체를 위협한 트럼프는 승냥이”라고 비난했다. 이처럼 반미정신이 투철한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과 트럼프가 악수하는 모습을 TV나 사진으로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김일성은 항일투쟁 이력을 주된 정체성으로 내세워 경쟁자들을 숙청했고 끝내 북한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는 미국 제국주의로 대체됐고 이것이 제도로까지 굳어지면서 북한 전체가 ‘반미’를 국가정체성으로 만들었다. 사회과학 용어로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용어는 ‘행위자는 제도를 창출하지만 제도는 행위를 제약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선 ‘반미’의 경로가 어떤 이탈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제도적으로 공고화됐기 때문에 북한 정권이 변화를 원해도 제도의 속박에 갇힐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이 굶주리는 상황에서도 김정은은 오로지 ‘미제의 위협’을 핑계로 핵 개발에 전념해왔다. 정권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는 데 외부의 적만큼 좋은 도구는 없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우리에게 핵무기라는 ‘보검’만 있다면 승냥이 같은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공화국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김정은이 트럼프와 악수하고 핵무기를 포기하고 미국과 수교까지 한다면 지난 70년간 반미만을 외쳐왔던 북한 주민들은 엄청난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평양의 한 소식통은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중앙당의 한 간부가 지금껏 선대 수령들과 원수님(김정은)은 외세를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 핵을 개발해왔는데 오늘에 와서 힘들게 구축해놓은 핵을 포기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 체제를 포기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냐고 반문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게다가 김정은은 더 이상 반미를 이용해 체제 수호를 위한 선전·선동 활동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 신천박물관을 폐쇄하고 푸에블로호를 미국에 반환해야 할지도 모른다. 김정은과 집권 엘리트들은 체제 보장으로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겠지만 북한 주민들은 이들이 내세워온 반미나 주체사상이 허구라는 점을 깨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 정권이 남북 정상회담 직후 노동당 간부들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상적으로 해이해지지 말라면서 대대적으로 사상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북한의 반미 포스터들.
반미국가 쿠바의 교훈
쿠바도 북한처럼 반미를 앞세우는 대표적인 국가이다. 미국의 턱밑에서 공산주의 깃발을 고수해온 쿠바를 통치해온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은 반미투쟁을 기치로 내세워왔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생전에 피델과 돈독한 친분 관계를 맺어왔고, 북한과 쿠바는 1960년 수교 이래 두 반미주의자의 유대를 토대로 이른바 ‘형제국가’라는 점을 과시해왔다. 피델은 1986년 방북 때 김일성으로부터 소총 10만정과 2000만달러 상당의 탄약과 탄약공장 건설 비용을 지원받은 것을 감사해하기도 했다. 그런 쿠바가 그동안 적대관계였던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하자 북한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2015년 7월 피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라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1961년 단교했던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복원시켰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6년 88년 만에 미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이 가장 눈여겨본 것은 미국과 수교로 쿠바 체제가 붕괴하느냐 여부였다.
라울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선 이유는 반미 강경노선이 쿠바 경제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라울의 이런 노선 변경으로 쿠바 체제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피델과 라울은 반미를 체제 유지 수단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델과 라울은 김일성·김정일과는 달리 반미투쟁을 해온 자신들을 우상화하지 않았다. 쿠바 국민들은 무조건 반미 세뇌 교육을 받아온 북한 주민들과는 달리 반미 정서가 강하지 않고 오히려 호의적이다. 쿠바 국민들 중 상당수는 미국으로 망명해 살고 있다. 이들은 쿠바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는 등 교류를 해왔다. 쿠바를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200만여명이 쿠바 친척에게 보내는 송금액이 연 20억달러로 쿠바 외화 소득의 1위를 차지한다. 피델처럼 미국에 대한 적대정책을 고수할 경우 경제제재로 고통만 가중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라울은 미국 관광객들이라도 유치하기 위해 관계개선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라울의 뒤를 이어 지난 4월 권좌에 오른 미겔 디아스카넬 국가평의회 의장은 로큰롤 음악을 좋아하고 청바지를 즐겨 입는 실용주의자이다. 디아스카넬이 쿠바의 탈공산화를 주도할 가능성은 낮지만 반미를 앞세워 체제 수호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김정은이 미국과 화해에 나서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체제를 유지해온 버팀목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유일한 해법은 지난 70년간 반미만 외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온 북한 주민에게 ‘진실’을 고백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신천군사건 2018-03-16 나무위키
신천군 사건 혹은 신천대학살이라고 불린다. 이 사건은 1950년 10월 17일~12월 7일까지 6.25 전쟁 중 일어난 사건으로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던 사건을 말한다. 북한에서는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르며 미군의 홀로코스트 전쟁범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증거가 없고, 대체로 좌우익 갈등 과정에서 학살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일단 학살 자체는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휴전 1년 전인 1952년, 국제 사법단체로 공산주의 계열의 NGO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1]에서 북한의 요청으로 북한 지역을 돌며 ‘한반도에서의 미군 범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그 시작이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중위 계급의 신천 점령군 지휘관과 예하 미군 1개 중대 그리고 한국군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무려 약 3만 5천여 명,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
북한측 주장: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미군과 한국군이 북진하면서 미군들이 38선을 넘어와 황해도 신천군을 점령하면서 '해리슨 중위' 라는 점령군 사령관의 지시로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지어 반미 교육으로 이용하고 있다.
남한측인식: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채 그런 거 없다거나 사실은 북한이 다 죽여놓고 우리에게 뒤집어 씌운 거임 정도로 언급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신천 의거일이라고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간략하게(...) 공산당의 가족 처단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고, 위의 링크된 분 글에 의하면 사람 죽이는 걸 그렇게 자랑할 정도로 모골이 송연한 수준의 업적 자랑도 있었으니...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1990년대 초반 나온 <6.25와 민간항쟁>이라는 반공서적에 버젓이 나온 이야기이다.
이쪽 부분을 설명한 작품이 황석영의 <손님>이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마을 사람들간의 학살로 다루고 있으며, 약간 무리하게 화해와 갈등 해소를 강조하는데, 막상 미국 교포 종북주의자들에게는 미군의 학살을 은폐했다는 이유로 까인다고 한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2년 4월 21일 방송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북한 측 기록 영상 화면을 최초로 소개하였고 당시 관련자 인터뷰를 일일히 했다. 황석영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였다는 점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곳에 나온 남한에 살고 있는 당시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점이 충격적이다. 지하철에서 시비 거는 노인 행색으로 시비거는 게 자랑스럽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관련 논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21세기에도 1950년대식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느낌이 난다. 물론 지금 와서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엄청난 잘못이며 범죄인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그러는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사실 홍위병이나 나치 친위대 잔당들도 그렇지만 시류에 휩쓸려 만행을 저지른 자들의 상당수는 자기가 저지른 짓을 끝까지 반성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최근 줄줄이 잡혀 들어오는 나치 독일 전범들에게 각국 사람들이 "잘못을 반성하느냐??"고 묻자 그들의 대답은 대부분 "그 시절이 자랑스럽다"는 것이었다.
Massacre in Korea, Pablo Picasso, 110 x 210 cm,1951, 패널에 유채, 파리 피카소 미술관.
해석하자면 '한국의 학살'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도에 이 그림을 그렸다. 1950년에 발생한 '신천 학살' 혹은 '신천군 사건' 소식을 듣고 나서 그린 작품이다.
천 학살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서 신천군 주민의 1/4에 달하는 35,0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이다. 신천 학살이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자 당시 서구 사회는 경악했다
“...피카소는 1937년 독일 나치군이 스페인 내전 당시 저지른 학살을 고발하기 위해 '게르니카' 그렸던 것처럼 신천 학살의 뉴스를 접하고 경악하며 「코리아에서의 학살」를 그렸다.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은 어떠한 의식적인 선전 의도나 상징적이지 않다"고 했으나 게르니카만은 예외라고 규정했다. 게르니카를 완성 후 14년이 지난 다음에 그린 「코리아에서의 학살」 도 그런 관점에서 그린 그림일 것이다. 피카소가 주목한 신천 학살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 주민 35,383명이 죽은 대참사였다. 신천군의 주민 4명 중 1명이 죽은 사건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참살한 우리의 잔인한 민낯이다....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신천군 학살은 두 가지의 견해가 갈린다. 북은 미군이 자행했다고 주장하고, 남은 공산화를 막으려는 반공운동이었다고 주장한다. .....북한을 방문했을 때 신천박물관을 답사한 경험이 있는 소설가 황석영은 소설 '손님'을 통하여 미군이 학살했다는 북과 다른 입장을 내놓았다. 손님은 2001년에 발표한 소설로 신천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지만, 작가의 관심은 '또 다른 진상'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라면 당연히 '합리적 의심'을 가져야 한다. 작가는 여러 목격담과 자료를 모아서 '우리 내부에서 저질러진 일'을 탐색한다. 남북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건을 작가는 어느 시각에 치우치지 않고 동족끼리 벌인 사실을 적시한다.
우리 선조들은 천연두가 창궐했을 때 서양에서 넘어 온 병으로 인식하고, 퇴치하기 위해서 '마마' 또는 '손님'으로 부르며 '손님굿'을 했다. 소설 '손님'은 기독교와 막시즘을 손님으로 규정하고 손님굿의 무속 형식을 빌려 풀어간다. 신천 학살은 西病 천연두와 같은 西學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성경과 자본론을 신봉한 좌우가 저지른 것으로 보는 것이 소설의 관점이다. 작가는 무지막지한 살육의 원한을 넋반을 차려 놓고 解寃 하고 있다.“ [출처] 문학과 미술 - 피카소와 한국전쟁| 목우인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캔버스에 유채, 266*345cm,
신천박물관 참관기(1) 학살의 첫물증은 성경책과 십자가였다•| www.ojakyonews.com 2015.06.03
지금과 같이 남북이 적대적인 상황에 있을 때는 해외 교포의 입장에서 남북을 오가며 양측 사회를 소통하게 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사회 통합 운동을 벌인다는 것이 매우 힘들다. 화평케 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철저한 중립을 지켜야 하기에 나는 항상 객관성과 주관성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긴장과 고뇌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남과 북이 워낙 전혀 다른 이질적인 체제이다 보니 사회 통합 운동을 하다가 보면 혹시라도 이쪽저쪽 모두에게 욕을 먹거나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통일지향적인 ‘세계적 보편성’이며 ‘분단 극복의 방향성’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건강이 힘든 상황에서도 신천박물관을 찾았다. 거창한 연구와 조사를 하기 보다는 한 조작의 모자이크처럼 작은 단서를 얻어 가서 진실을 규명하는데 작은 역할을 하고자 했다. 신천박물관의 북측 정식 명칭은 ‘미제 신천양민학살기념 박물관(이하, 신천박물관)’이다. 비록 6.25전쟁 중에 발생했지만 현대사에 있어 전무후무한 야만적 학살 사건이므로 나와 학술원에서는 그동안 준비한 자료들을 대비하며 신천 사건 해석에 대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자 했다.
가련하고 불쌍한 신천군 영령들의 죽음에 대해 철저하게 진실을 규명하여 가해자에게는 정의의 심판을 내리고 그 다음 단계에 가서 용서와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러한 작은 발걸음들은 우리 겨레의 한풀이 작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풀이는 원한이 맺힌 것을 풀어주는 것이다. 한이 맺힌 피해 당사자는 가해자를 응징할 때만 그 원망과 원한이 풀리는 법이다. 그러나 아직도 신천 학살사건과 6.25전쟁 중 미군의 학살 범죄 규명 요청에 대해 UN측은 거부와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고 미국은 발뺌을 하거나 부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우리 내부에서 학살에 가담한 당사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오히려 망자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사건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6.25전쟁 중에 무고한 양민을 대상으로 남과 북 전역에서 벌어진 미군의 학살적 만행들과 당시 황해도와 신천을 구심점으로 벌어진 역사적 배경들 그리고 평화로운 마을에 투하된 미군의 폭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의 어머니의 가슴에 평생토록 박혀 있는 포탄 파편들과 그 피고름 나던 어머니의 가슴에서 나온 쇳물이 섞인 듯한 모유를 먹으며 자란 나의 가슴 아픈 가정사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어 신천박물관 탐방기는 서너 차례에 걸쳐 써야 할 것 같다.
‘Then there(그 때 거기서)’와 ‘Right now(지금 여기서)’의 논리로
이미 공개된 이야기다. 지금부터 15년 전인 1999년 1월 중순에 실향민 출신의 김모 목사를 비롯한 각 종교계 인사 7명이 이북의 ‘아태’와 ‘민화협’의 공식 초청을 받아 7박8일간 방북을 했다. 김 목사는 한국 교회에서도 개혁적인 지도자급에 속하는 인물로서 마침 방북 일정 중에 포함된 신천 박물관 참관을 하게 되었다. 박물관 전시실을 돌아보던 김 목사는 해설사와 북측 일행들에게 “저렇게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한 범인들이 반드시 미국 군인들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지 않느냐? 학살자들 중에는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 밖의 질문을 던졌다.
그 후 관람을 마친 일행들은 자신들을 초청한 북측 위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말았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수 없는 사람들이 박물관을 방문했지만 그런 잘못된 질문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그런 근거 없는 질문을 우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행들은 그들의 항의를 무마시키느라고 그날 무척 애를 썼다고 한다.
미군이 저지른 범죄라고 수십 년간을 신념처럼 굳게 믿어온 북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경우는 매우 불순한 질문이거나 이단적 질문이며 자신들에게 반박 도전장을 내민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비록 질문 내용이 신빙성 있고 논리적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북측 당국과 주민들의 정형화된 기존 의식을 배려하지 못한 것이다. 피해자로서 학살 문제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여 적개심이 가득 찬 북의 주민들에 대한 정서적 이해가 부족하거나 신천사건에 대한 기초적인 역사 지식을 습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내던지는 질문들은 그들의 가슴에 못질을 하는 행위라고 여겨진다.
특히 남측이나 해외 동포 인사들이 신천 박물관을 찾는 기회가 주어질 경우에는 김 목사의 경우처럼 다양한 해석과 시각을 갖게 되리라 생각한다. 어떤 부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반미 감정에 흥분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설마 하고 의심을 품거나 심중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지금까지 미국과 적대적 관계에 처해 있는 북의 입장에서는 절박했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사정과 형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이제는 북측 당국도 좀 더 열린 자세와 입장에서 신천학살 문제에 대한 다양한 논의의 창구를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분명한 입장은 신천군 전체 인구인 14만 2,786명의 약 25%인 3만 5,383명이 누군가에 의해 분명히 학살당했다는 사실과 이 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된 미군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6.25 당시 미군은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회복하여 북진하던 중에 1950년 10월 17일 신천을 통과하여 점령한 뒤,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기 시작한 12월 17일까지 무려 52일간 인민공화국 정권과 인민군에 협력한 혐의가 있다고 확인된 관련자들과 그 일가족들에 대하여 남녀노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을 감행 했다.
비록 사건의 발단 단계는 미군과 무관하게 우리 민족 구성원 내부끼리 적대심이 표출되어 후퇴하던 유격대와 서북청년단 등 많은 우익 반공단체들에 의해 자발적인 학살이 이뤄지는 등 손에 피를 묻힌 건 우리들 자신이었지만 전쟁의 기선을 잡고 적을 제압하려는 미국 정부와 미군, 그리고 실무적으로 그 일을 수행한 미군 방첩대가 전략적으로 깊숙이 개입하면서 이 사건이 확대된 것이다. 양민 학살은 주로 배후에서 미군 정보기관에 의해 교묘하고 은밀하게 수행되기 때문에 일반 미군들과 미군에 협력했던 반공 우익단체들도 주동자 외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당시 신천지역을 군사적 점령지로 둔 미군들이 이 사건을 배후에서 진두지휘 하였기에 결코 미군과 미국 정부에게는 면죄부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이 문제를 두고 그 동안 좌우로 대립되어 신천학살의 주범이 ‘미군인가?’ 아니면, ‘우리 민족끼리 내분의 결과인가?’에만 초점을 맞추며 상대의 주장을 서로 반박해 왔다. 지금도 한국사회의 지식층들 중에는 황석영 씨의 소설 ‘손님’의 영향과 신천사건을 다룬 MBC 다큐멘터리 등의 파급 효과로 “우익 단체들과 치안대에 의해 저질러진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이지 미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견해를 가진 이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전쟁 후 지금까지 미 국립문서 보관서에 보관된 6.25전쟁 문서들과 그 외 각종 관련 자료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양파 껍질 벗겨지듯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신천 사건에는 미군과 미국 정부가 조직적으로 배후에서 깊숙이 개입한 사실은 확실한 사실이며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 한국은 중도 노선에 속한 부류들이 의외로 많다. 또한 극단적인 좌익과 보편적 좌익 그리고 중도좌익이 존재하며 아울러 중도우익이 있는가 하면 완만한 보편적 우익과 극단적 우익이 존재하고 있다. 마치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다양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모두 모여 구성된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이며 그것이 곧 한국의 강점이자 저력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것을 발판으로 통일을 앞둔 이 시점에서 이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6.25전쟁에 대한 ‘통일 지향적인 객관적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그동안 나와 학술원에서는 ‘오폭이나 오인사격 같은 실수나 우발적 사고 혹은 작전상 오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6.25전쟁 시 미군의 학살적 만행에 대한 객관적 연구를 지속적으로 병행하고 있다. 6.25전쟁 기간 중에 발생한 미군의 학살적 범죄 기록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와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그동안 전문적으로 조사하여 실사를 벌였는데 그 최종 문서들을 읽어 내려가며 검토하다 보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이다. 그뿐 아니라 6.25전쟁 이전은 물론이고 전쟁 이후 현재까지 미군의 범죄들을 보면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 있어 민족적 존엄과 자주가 철저히 짓밟힌 가장 치욕적이고 불행한 사건들이라는 것을 우리 민족 구성원 모두가 인식했으면 좋겠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의 학정에 36년간을 시달리다가 힘들게 해방을 되찾았는데 곧 바로 미제라는 외세에 의해 다시금 참혹한 피해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분노를 넘어 자괴감이 짓누르는 일이다.
신천군 학살 사건을 규명하거나 올바른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6.25전쟁이라는 큰 ‘숲’ 에서 ‘나무’라는 신천 사건을 조명해야 하며 더 나아가 신천 인근지역에 있는 사리원과 신막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을 비롯하여 황해도 전체에서 7만 4천여 명이나 학살당한 사건을 연계해서 종합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6.25전쟁 시 남과 북, 전체 영토에서 자행된 미군의 학살적 범죄 사건들을 모두 연계해서 연동성 있게 다루어야만 신천 사건의 윤곽과 실체적 진실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더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 미 제국주의의 아시아 패권 전략과 6. 25전쟁에서의 미국의 의도와 주도적 역할에 대해서도 파악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미 국립문서 보관소Ⅰ,Ⅱ에서 아직도 잠자고 있는 다양한 관련 문서들을 얼마만큼 들춰내느냐에 따라 신천사건 진실 규명의 속도는 빨라 질 것이라고 본다.
또한 우리는 신천사건을 다면적으로 접근하여 “Then there(그 때 거기서)”와 “Right now(지금 여기서)”의 논리로 해석해야 하며 남과 북은 물론 세계가 공감할 수 있도록 ‘메시지화’ 해야 한다. 신천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해 일하는 남과 북과 해외동포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감성을 앞세우기보다 좀 더 냉철한 이성과 과학적 논리를 가지고 자료를 모으는데 열중해야 하며 백지 상태에서 각자 모자이크를 맞추듯 서로 협력해서 진실의 그림을 그려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아직도 이 땅에 남아있는 쓰라린 전쟁의 상흔과 억울한 영령들을 편히 잠재울 수 있을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분단 이면의 기억으로 역사를 다시 쓰고자 신천 박물관을 향하는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수만 명의 한맺힌 넋들이 깃든 박물관을 찾아서
우리 일행은 평양시를 빠져 나와 서너 시간이 걸려 황해북도 사리원을 거쳐 황해남도 재령을 지나 신천읍에 도착했다. 초소가 딸려 있는 정문을 통과 하니 ‘밤나무골’이라고 부르는 곳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신천박물관이 눈앞에 나타났다. 건물에 들어서니 울타리 같은 둔덕에 붉은 글씨로 “미제 살인귀들을 천 백배로 복수하자!” 라는 섬뜩한 구호판이 눈에 띄었다. 박물관의 건물 규모와 배치는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학교 건물과 운동장처럼 평범하게 보였다. 정면으로 봤을 때 우측에는 빨간색 음각 글씨체로 “신천 땅의 피의 교훈을 잊지 말자!” 라는 구호가 적힌 건물이 보였다. 방문객들이 대기할 수 있는 휴게실, 방명록을 적을 수 있는 공간 등을 비롯해서 교양 마당, 매점, 화장실 등 다양한 부대시설들을 고루 갖춘 2층짜리 건물이었다. 또한 부지 정면에는 6.25전쟁 당시 ‘신천군 인민위원회’ 청사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해 만든 2층짜리 박물관 본관과 전시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본관 전시실 내부에는 신천군 전체 군민의 1/4에 해당하는 인구가 잔인하게 피살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피해자들의 실제 머리카락과 신발, 비녀 등의 각종 장신구들을 비롯해 유품들이 진공유리 보관함에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각종 학살 도구와 학살자들과 관련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6.25전쟁 중에 발생한 신천지역 폭격 피해 현황과 세균전 및 화학전에 대한 자료들, 6.25전쟁에 대한 종합 전과 게시물이 설치돼 있었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위원회의 조사 보고서를 비롯해 다양한 현장 사진들과 관련 자료들, 학살 당시를 고증하여 재현한 그림들과 각종 설명 문구들, 통계 자료와 수치 등 수천 점의 전시물들이 테마별로 서로 연계되어 전시되었다. 박물관 전시실은 본관 전체 2층 공간을 활용하여 1층(1관)에 16개실과 2층(2관)에 3개실 등 총 19개의 전시실을 갖췄다.
전시실 참관을 마치고 본관 건물을 빠져 나와서 운동장 좌편 방향으로 이동하면 유대인들을 죽인 나치 독가스실을 떠올리게 하는 지하 방공호가 나온다. 이곳은 수백 명의 주민들이 수류탄과 휘발유 불에 의해 한꺼번에 숯덩이로 몰살당한 장소로서 무거운 침묵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방공호에서 나와 1분 거리에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계단에 올라서면 무고하게 학살당한 주민들의 시신과 유골들이 무려 5,605명이나 안장되어 있는 ‘애국자묘’가 왕릉처럼 나타난다.
이곳에서 헌화하고 나면 곧 바로 차량으로 이동하여 20분 거리에 있는 원암리 학살 현장으로 떠난다. 이곳은 900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한 화약 창고가 두 개가 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아이들만 102명, 아이 엄마들이 500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아이들은 위 창고에, 어머니들은 아래 창고에 가둬 넣고 살해 했는데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생존자의 증언을 뒤로 하고 학살 현장 바로 옆에 희생자들의 유해를 모신 ‘102 어린이 묘’와 ‘500 어머니 묘’에 환화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해설사의 답변과 현장 생존자의 증언들이 전시실 참관부터 모든 일정을 마칠 때 까지 함께 이뤄지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진행 됐으며 세밀하게 살피거나 집요하게 파고드는 나의 스타일 때문에 관계자들이 다소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주어진 참관이다 보니 주어진 시간 내에 큰 성과를 얻어야 하기에 잰 걸음으로 움직였다.
이승복 군과 신천 피살자들이 오버랩 되는 이유
박물관 전시실로 향하는 이 시점에서 나의 머릿속에는 뜬금없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무장 공비에게 학살당했다는 이승복 군이 떠올랐다. 물론 내가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은 이승복 군의 외침이 아니라 “조선일보사의 외침”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의 집요한 연구에 의하면 이승복 군이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고 해당 언론사의 과장되고 의도적인 왜곡 보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승복 군은 죽음의 과정마저 참혹했는데 죽어서도 억울하게 극우들의 반공주의를 위해 철저히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신천 학살 사건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이유에서도 실체적 진실은 호도되거나 왜곡되면 안 된다. 누군가 “국익이 우선이냐? 진실이 우선이냐?” 라고 물을 때 우리는 당연히 “진실이 우선”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처럼 유명을 달리한 수만의 신천 영령들이 60년을 넘는 세월 동안 진실보다는 어느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울한 죽음이 이용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이다.
원한의 이 신천 땅과 기념관 건물 부지 안에도 이제 분단 70년의 새 봄이 찾아온다. 하나님의 은혜와 화해와 상생의 새로운 기운이 이곳에 넘치기를 조용히 기도하며 본관 입구에 도착했다. 교양 과장으로 있다는 수십 년 경력의 베테랑 해설사 박영숙 선생과 곱디고운 미모의 김정심 해설사와 또 다른 아리따운 여성 해설사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곧바로 전시실로 이동하며 나는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다.
“지금까지 모두 몇 명이나 여기를 다녀갔는지 정확한 통계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박물관이 건립된 후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1,600만 명에 달하는 방문자들이 이곳을 다녀갔으며 425만 명이 우리 박물관 해설 강사들을 통해서 이동식 강의를 받았고 해외 동포가 22만 명, 세계 각국의 외국인이 3만 명이 넘게 다녀갔습니다.”
“이 박물관은 언제 개관이 됐나요?”
“우리 수령님께서는 전쟁 복구가 끝난 어느 날, 신천군에서 감행한 미제와 계급적 원쑤들의 야수성과 잔인성을 폭로하는 각종 증거물들과 우리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발굴하여 전시하라는 말씀을 주셔서 1958년 3월 26일에 력사적인 개관을 하게 되었으며 올해로 개관한지가 5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해마다 개관일이 돌아오면 신천군 당 책임비서가 주관하여 기념 보고회를 갖고 있으며 그 동안 10년에 한 번씩은 기념일마다 우리 수령님과 장군님을 모시고 대대적으로 기념 보고회를 개최하여 왔습니다.”
“제가 연구를 하면서 사진 자료들을 확인해 보니까 전시실 내부가 여러 번 바뀌었던데요?”
“네, 우리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박물관 건립 40돌 기념 보고회에 참석하신 자리에서 신천 박물관의 개건공사를 지시하셨습니다. 우리 박물관이 개관한 지가 40년이 지나다 보니 여러 가지 보완할 시설들이 많아서 다시 내부적으로 개건 공사를 시작하여 주체 87(1998)년 11월 22일에 새롭게 단장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김정은 위원장께서는 아직 여길 다녀 간 적은 없으신가요?”
“아닙니다. 여기를 이미 다녀 가셨더랬습니다. 우리 김정일 장군님께서 1998년 3월 25일에 열린 40돌 기념행사를 마치신 후, 우리 장군님과 함께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께서도 이곳을 친히 다녀가셨습니다. 아마 머지않아 이곳에 또 한 번 현지 시찰을 오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그럼 그때 당시 김정은 위원장께서는 14살 청소년 시절이셨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건 선생님이 직접 계산해 보시면 됩니다. 우리 수령님은 생전에 이곳을 1953년 8월 13일과 1958년 3월 26일에 두 번에 걸쳐 찾아 주셨고, 우리 장군님도 1962년 1월 22일과 1998년 11월 22일, 모두 두 번을 친히 다녀 가셨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실제로 내가 박물관을 다녀 간지 두 달 후인 2014년 11월 25일에 김정은 위원장이 이곳에 현지 시찰을 다녀갔으며 신천 박물관을 시대에 걸맞게 재보수할 것을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신천 학살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방향에서 제시를 해준 것으로 전해진다. 나는 한 명이라도 학살 현장의 증인을 더 만나보고 싶어 생존자인 정근성 선생 외에도 다른 생존자를 더 요청했다.
“아, 참, 제가 평양에서 출발할 때 미리 요청을 했어야 하는데 깜빡했습니다. 혹시 ‘복수하리라’ 어머님을 잠시라도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예, 일 없습니다. 저희가 좀 알아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 저기 전화를 걸던 박물관 측에서는 만남이 성사될 수 없다고 귀띔해 주었다. 신천 사건 피해자 중에 매우 유명한 분인데 그녀의 증언을 듣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오늘은 ‘복수하리라’ 어머님이 급한 사정들이 있어서 만나기 힘들 듯 합니다.”
신천사건 당시 미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어느 여인이 나중에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다. 그런데 오죽 원한이 맺혔으면 첫째인 장녀 이름을 ‘복수’, 둘째인 아들의 이름을 ‘하’, 셋째인 막내 딸의 이름을 ‘리라’로 지었겠는가? 미군에 의해 두 팔이 잘렸다고 하는 이 아주머니는 몸뚱이가 마치 절구통처럼 불편한 생활을 하며 한 맺힌 생을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세상 어느 부모가 사실이 아닌데도 자식의 이름을 거짓으로 지어 줄 수 있겠는가를 잠시 생각해 봤다.
“그러시면 대신에 평양으로 떠나실 때 ‘양장리’에 한번 들렸다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 양장리에는 왜요?”
“그 동네는 미제 놈들이 마을 사람들 중에 남자들은 씨를 말리려고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잔인하게 죽여 버려서 한 동안 여자들만 살던 유일한 마을입니다.”
“아. 참 그렇게 기막힌 경우가 있다니...”
인간의 잔인함이 어디까지인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이날은 밤늦게까지 원암리 화약 창고 일대를 참관하느라 날이 어두워서 양장리 마을은 가지 못하고 평양으로 복귀했다.
학살 근거의 첫 전시물은 성경책과 십자가 묵주였다
제1전시실 안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기다란 유리관이 눈에 띄었다. 유리관 속의 전시물은 학살 사건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를 밝혀 주는 도표와 함께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이윽고 해설사의 까랑까랑한 설명이 시작됐다. 원래 참관자들은 기본적으로 해설사와 눈을 마주치며 설명을 들어줘야 예의를 지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선은 자꾸 유리관에 전시된 진열품으로 신경이 쏠렸다. 진열된 물건들은 다름 아닌 성경책들과 십자가 묵주들이었기 때문이다. 직업이 목회자인 내가 어찌 성경책과 십자가를 보고도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 있겠는가? 자세히 보니 분명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손때 묻은 여러 종류의 성경책들과 소책자들이었고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십자가 묵주와 종교 물품들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도표를 그려놓은 게시물을 자세히 바라보니 ‘신천지구 미강점군의 통치 체계와 반동 단체 조직표’ 라고 쓰여 있었고 학살의 총 지휘 체계의 우두머리를 ‘신천강점 미군장교 해리슨. 디. 매든’이라고 적어 놓았으며 그 수하에는 두 조직을 밝혀 놓았다. 그 중 하나가 ‘신천강점 미군 첩보장교 뇨크’라고 적혀 있으며 그 ‘뇨크’의 예하 조직으로는 ‘경찰대’, ‘학생 무장대’, ‘치안대’, ‘자치회’, ‘대한 청년단’, ‘멸공단’, ‘부인회’를 열거 해 놓았으며 또 하나의 조직은 ‘차프링, 우두머리 미 종군목사’ 라고 표기해 놓고 그 예하 조직으로는 ‘서부 교회’, ‘동부 교회’, ‘신천성당’, ‘각 면 교회당’이라고 지목하여 열거해 놓았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성경책들과 십자가 묵주 꾸러미들을 바라보니 갑자기 발바닥이 얼어붙는 듯한 전율과 절망감이 나의 전신을 휘감는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란 말인가? 사람을 살리고 죄인을 구원하는 종교라는 기독교가 무슨 연고로 이 엄청난 학살 사건의 주범이란 말인가? 해설사가 관람 시작부터 당차게 내놓은 증거물이 성경책과 십자가라니 나 보고 어쩌란 말인가? 다리에 힘이 풀리고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처음 접하는 사실 때문에 받은 충격이 아니라 이미 내가 그 동안 연구하여 알고 있던 자료들이 하나씩 사실로 확인 됐기 때문이다.
해설사의 주장과 전시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해리슨(Harrison D. Maddon)이라는 미군 우두머리가 학살을 진두지휘 했으며(다음 회에는 해리슨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됨) 그 밑에서 학살 전략을 보좌한 두 명의 실무자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요크(Captain York)라는 미 방첩부대 요원이고, 또 한 명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미 군종목사 라는 것이다(전시실 게시물에 한글로 표기된 ‘차프링’은 군종 장교의 영어 이름이 아니고 ‘Chaplain(군목)’을 한글로 발음한 것을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리슨을 돕는 이 두 명의 미군 장교들을 돕는 예하 조직 단체들과 그 구성원들은 모두 서북 청년단원들을 비롯해 기독교 색채가 농후한 여러 외부 청년 단체들도 있었지만 주로 신천지역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회 청년, 여성들이었다는 것이다.
성직자의 신분인 군종목사는 전시나 평시에 군인과 장교이면서 동시에 목회자의 신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종목사가 전쟁터에 파견되어 사역 하는 것을 종군목사라고 한다. 이런 미군의 종군목사가 우두머리 장교인 해리슨의 휘하에서 학살 지역의 교회와 성당의 신자들과 연대해서 무고한 양민들의 학살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해설사의 주장을 자세히 들어 보면 단순하게 미 제국주의 앞잡이인 기독교와 선교사를 배척하기 위해 북측이 습관적으로 내세우는 무모한 주장이 아니었으나 우선 상식적으로는 믿기 어려운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또한 ‘뇨크’라는 대위 출신의 방첩대 장교가 거느리고 있는 예하 조직들과 단체들의 구성원들도 역시 모두가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 청년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루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들을 알아 본 후에 참관 이야기를 계속해야 할 것 같다.
신천지역 교회 내부에서 형성된 좌익과 우익
해설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직접 학살 연루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준 MBC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때 일어났던 이야기들과 황석영의 소설 ‘손님’의 실제 주인공인 류태영 목사님의 이야기들을 먼저 살펴봐야 할 듯하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2002년 4월에 접어들면서 MBC 방송국은 방송 사상 최초로 신천 학살 사건을 집중해서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한 해 전에 있었던 황석영의 소설 ‘손님’의 파급 효과를 타고 이 프로그램은 다각도로 한국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가져 왔으며 신천학살에 대한 연구와 논의에 불을 지폈다.
나 역시 이 방송 테이프를 입수해서 수 없이 반복 시청했으며. 방송 내용을 녹취해서 30페이지 분량이 넘는 녹취록을 팸플릿으로 만들어 수 없이 읽으며 연구 자료로 삼았다. 심지어 당시 방송에서 다루지 못한 여러 궁금증들을 풀기 위해 서울 시내 모처에 있는 신천군민회 사무실을 찾아 가기도 했으며 여러 번 문전 박대를 당했으나 우여 곡절 끝에 두 차례 만남의 기회가 주어져 추가적인 학살 증언 자료들을 수집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신천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평소 지니고 있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반북정서와 반공의식에 경악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북의 정권은 그 자체가 악이며 사탄의 세력이었고 타협할 수 없는 영원한 적이었다. 또한 북한이라는 국가와 국내의 진보 세력들을 동일시하며 적대심과 증오심에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은 자신들도 대부분 기독교인들이면서 매우 평범하고 젊은 목회자인 나를 접촉할 때마다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고 꺼려했으며 아직도 고향 땅 신천에 살고 있을 가족들이 자신들로 인해 혹시 피해를 입는 다거나 자신들이 북으로부터 자칫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심지어 당시 유행하던 전화번호부 책자에도 가명으로 등록할 정도로 피해 의식에 빠져 있는 심각한 모습을 목격함으로써 그들 대부분이 바로 신천 학살에 동참한 가해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더 나아가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이라는 것을 최종 확인한 나는 한 동안 충격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증언을 들어보니 그들은 신천 지역 교회의 청년들이나 젊은 지도자들로서 게릴라전을 펼치기 위해 조직한 ‘동키(Donkey)부대’라는 유격대를 조직하거나 일시적인 자체 ‘치안대’를 조직해서 한 동네에 살고 있던 좌익 세력들을 모두 이 잡듯이 잔인하게 잡아 죽였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 살면서 언덕에서 함께 뛰어 놀거나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사이좋게 놀던 친구들이나 이웃 주민들을 빨갱이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사자 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까지 남녀노유 가리지 않고 모두 잔인하게 처형하는데 앞장섰다.
그 후 그들은 보복을 피해 대부분 월남해서 한국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올랐으며 특히 그들 중에는 한국교회의 목사와 장로 혹은 교회의 중추적인 일꾼들이 많아 한국 기독교 교계의 헤게모니를 잡았다. 그중에는 개신교 최대 교단의 총회장과 부총회장을 지낸 목사와 장로들도 여러 명 있었다.
나와 대화 할 때 살펴 본 바로는 자신들의 행위를 지금도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었다. 오히려 공개적인 대중 장소에서는 자신들의 과거 학살 행적이 마치 전장에서의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나 한 듯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큰일이나 한 듯 공산당을 때려잡았다는 식의 무용담처럼 자랑을 일삼아 왔다. 그 결과 60년대부터 한국교회가 온통 반공주의 일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원인이 된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로서 반공 투사가 된 그들은 신성한 교회 강단을 반공 강연장과 본거지로 둔갑하게 만들거나 자신들이 속한 교파와 교단에서는 절대적으로 친미를 주장하는 동시에 반공주의를 신봉하여 왔던 것이다. 아무리 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보복성 살인이라 해도 그렇게 많은 숫자를 살해하고도 털끝만큼도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고 회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을 보며 나는 무수히 절망했었다.
내가 만나 본 신천 출신의 실향민들은 6.25 당시 일부 지주와 중농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의 사고 의식의 저변에는 노비와 빈농 출신들이 대부분인 좌익 계열의 주민들을 매우 업신여기고 모멸하는 정서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나에게 “그런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김일성 정부가 들어서며 시절이 바뀌니까 몇 달간 어디 가서 빨갱이 교육을 받고 와서 우리들 앞에 나타나 거들먹거리며 상전 노릇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중략).. 결국 보복이 두려우니 그들을 안 죽이면 내가 죽으니 그들을 먼저 죽였어야 마땅하다”는 말을 당당히 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모습은 눈곱만큼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소작농이 지주에게 내는 소작료가 수확물의 절반을 상회하였고, 심할 경우 80%에 달했기 때문에 소작농과 빈농들은 1년 내내 아등바등 죽어라 일해도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중국의 간도(지금의 연변지역) 등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양보와 타협과 배려는 전혀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해방이 되자 국민(인민) 구성원의 절대 다수인 농민들의 최대 숙원이자, 사회의 최대 현안 문제로 떠오른 것은 토지개혁 문제였다. 1946년 3월에 시작된 이북의 대대적인 토지개혁은 지주들의 땅을 모두 몰수한 후에 이들을 타지로 보내서 그곳에서 땅을 재분배해 주는 ‘무상 몰수’와 ‘무상 분배 방식’이었다(알려진 대로 지주들에게 무조건 강제로 땅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결국 좌우 대립의 단서가 됐던 토지개혁 문제는 황해도 지역의 교회를 둘로 분열시키고 말았으며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출석했던 개신교 교회 안에서는 토지 개혁 문제로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지게 됐다. 지주나 부농 출신의 신자들은 토지개혁을 적극 반대하는 반면 전답이 없는 신자들은 적극 찬성함으로써, 결국 교회가 찬반양론으로 나눠져 급기야 좌익과 우익으로 분열했다. 교회안의 좌우익 분열 현상은 점차 사회로 확대되어 사회도 좌와 우로 양분되는 사태로 확대된 것이다.
바로 이들 좌익 기독교의 뿌리가 김일성 주석과 함께 토지개혁 문서에 직접 서명 날인을 했던 강양욱 목사가 이끈 ‘조선기독교도연맹(현재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며, 우익 기독교는 ‘이북 5도민 연합노회’를 따로 구성해서 활동하다가 이들이 모두 월남하여 한국교회의 중추적인 보수그룹을 형성한 반공세력의 핵심 그룹이 되었던 것이다. 끝내 이들 우익 기독교에 속한 반공우익 청년들이 세운 서북청년단은 급기야 야밤에 강양욱 목사의 집을 급습해 수류탄 투척과 기관총을 난사하여 강 목사의 장남과 외동딸이 즉사했고 손님으로 와서 윗방에서 잠을 자던 두 명의 목사도 현장에서 즉사를 하는 비극을 안겨 주는 악행을 저질렀다.
황석영의 ‘손님’과 주인공 류태영 목사가 주장하는 진실
남북이 모두 주목하는 소설가 황석영 선생은 1989년에 불법으로 방북했을 때 부친의 고향인 황해도 신천에 찾아 간 적이 있었다. 해방 전부터 황석영의 외조부는 기독교 목사였다. 또한 황석영은 그의 부친 때문에 호적상의 원적도 ‘황해도 신천군 온정면 온정리 103번지’로 되어 있었다. 그가 막상 신천에 가보니 일가친척은 아무도 없었고 신천박물관을 둘러보고 왔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한국으로 가지 않고 독일을 거쳐 도피하듯 미국에 와서 몇 년을 생활하게 됐다. 마침 뉴욕에서 통일운동을 하며 목회를 하던 류태영 박사를 알게 되었고 류 목사는 동포의 입장에서 그를 힘껏 도와주었다. 황석영이 동부 지역을 방문할 때는 류 목사가 직접 차를 운전하거나 비행기에 합승하여 같이 움직일 정도였다.
문제의 발단은 시카고를 함께 방문했던 어느 날에 벌어졌다. 류 목사는 자신이 개신교 목사로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의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대화를 나눴고 그 대화중에 신천이 고향인 자신이 19세에 겪었던 고향마을에서 일어난 잔인한 학살 사건에 대해 증언을 해 줬다. 그런데 그 후 세월이 흘러 2001년 6월에 황석영은 신천 학살을 소재로 다룬 장편소설 ‘손님’을 발표했는데 느닷없이 류태영 목사가 이 소설속의 주인공인 류요섭의 모델로 둔갑을 한 것이다.
그리고 황석영은 두 달 후인 8월에 방북단을 이끌고 두 번째 방북 길에 올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북측에서는 그의 소설에 문제를 제기했는데 남과 북의 기자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북측의 문학 평론가 조정호와 황석영이 작은 논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황석영은 자신의 소설에 대해 “남조선 사회에 있는 우익의 뿌리를 찾기 위해 시도한 소설” 이라는 해명을 하면서 사태는 일단 무마되었다.
문제가 된 소설 줄거리는 학살의 원인을 인민군에 협력 했던 빈민층, 머슴들이 주축이 된 좌익 세력과 황해도 곡창지대의 지주 계급이 대부분이었던 우익 기독교 세력들 사이의 정면충돌로 묘사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신천 사건을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대결로 인한 결과물로서 미군과는 상관없이 우리 동족 내부에서 저질러진 학살로 결론짓게 된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류태영 목사님은 거주 지역이 나와는 다르지만 미국의 어느 인터넷 신문에 편집 위원으로 함께 소속된 적이 있었기에 서너 번 만날 기회가 있었으며 통일운동 관련 행사에서도 간혹 뵐 수 있었다. 그 문제에 대해 류 목사는 황석영을 향해 언제나 불만스러워 보였다. “나는 신천 학살에 대해 미군이 저지른 부분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데 무슨 의도로 그런 소설을 썼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아무리 소설 속 줄거리라 해도 류요섭의 입을 빌려 신천을 이야기하면서 미군 학살을 부정하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황석영의 면전에서 실제로 전해 준 증언내용은 자신이 살던 ‘부종리’라는 시골 동네에 국한된 이야기에 불과 한 것이며 3만 5,000명이 넘게 학살당한 신천군 전체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살던 동네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 이야기가 신천군 전체에서 미군의 학살이 자행됐는지의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단서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된 불만 내용이었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이고 역사는 역사일 뿐이다. 작가가 아무리 어느 특정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해도 독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설 창작에 있어서 작가는 자신이 의도하는 주제를 떠 받쳐주는 일부 소재만을 활용할 뿐, 나머지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것이 소설의 특성이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도 실제로 신천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의 일부 소재를 근거로 꾸며진 소설이므로 황석영의 문학적 평가와는 상관없이 신천군 학살 사건의 실체적 진상은 별도로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류태영 목사가 말하고자 했던 진실은 무엇이었나? 류 목사는 ‘신천군 남부면 부종리’ 마을에서 3대째 내려오는 목회자 가문에서 태어나 기독교의 영향으로 형님과 함께 자연스레 친미, 반공주의자가 됐다. 1950년 가을,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이 들어오고 인민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나돌면서 같은 마을에 살던 좌익 성향의 청년들과 주민들이 모두 산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그들은 2주가 못돼 배고픔을 못 이겨 마을로 내려 왔는데 이때 류 목사가 다니던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치안대가 산에서 굶주림에 지쳐 내려온 이들을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했으며 바로 류 목사의 형님도 이 학살에 가담한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군이 인해전술로 투입되면서 사태가 역전되자 보복이 두려운 형제는 1·4 후퇴에 가족들을 남겨 두고 남쪽으로 도망치듯 내려왔던 것이다. 몇 달 후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누님과 형수와 어린 조카들에게 인사조차 못 하고 내려와서 수 십 년을 생이별한 것이다.
그 후 5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1990년이 돼서야 류 목사는 고향 땅 신천을 방문하게 됐는데 누님은 평양에 살고 있었고 형수와 조카는 여전히 신천에 살고 있으면서 조카는 노동당원의 신분으로 시멘트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류 목사의 방문을 알게 된 시멘트 공장장이 오히려 류 목사에게 환영 행사와 만찬을 베풀어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더구나 학살자의 가족들에게 이미 심한 보복과 앙갚음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 확인을 해 보니 자신의 가족들은 오히려 아주 편안히 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류 목사가 황석영에게 말하고자 했던 부분이었다.
실제로 사회주의라고 하는 북에서는 오히려 학살자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아무런 보복을 하지 않았고 보듬어주고 품어주며 잘 살도록 이끌어 주었다. 부모 자식을 처참히 죽인 원수들은 3대를 이어가면서 복수를 하는 것이 동서양의 기본 정서임에도 불구하고 북의 사회는 이들을 모두 관대히 용서해 주고 오히려 다독여 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으로 내려간 학살 당사자들은 대부분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이면서도 전혀 반성의 기미도 없이 오히려 남쪽 사회에서 반북정서와 반공사상을 통해 북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을 키우는 역할에 앞장서 있다는 것을 류 목사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농사나 짓고 살던 무지렁이 같은 순진한 주민들이 색깔 논쟁과 사상 논쟁에 휘말려 서로 죽고 죽이는 보복의 악순환에 희생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으며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이웃을 죽인 당사자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도 철벽처럼 아무런 죄의식이나 가책이 없이 살고 있는 것이 슬프다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의 대명사를 지니고 있는 기독교 복음의 가치는 그 어떤 사상과 이념의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하고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날 학살자들과 피살자들의 태도와 반응이 뒤바뀐 슬픈 현실을 살고 있다.
전시물은 학살의 책임을 미군에게만 돌리지 않았다
오늘 제 1전시실에 보관된 첫 번째 전시물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본 결과 그 동안 우리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북측은 학살의 주범을 결코 미군에만 국한시키지 않았으며 미군에게 협력하고 순복한 우익 단체들도 학살자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동안 수십 년을 들어 왔던 북측의 증언들과 주장들은 학살의 주범과 원흉을 앵무새처럼 미군을 지목했으나 이곳 박물관 첫 전시물 내용에는 반드시 미군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의 수확이었다. 전적으로 미군의 소행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된 많은 반공 우익 단체들도 미군들과 함께 학살의 공범으로 포함시켰다.
다만 북측은 학살 사건 발생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학살자에 대한 공격의 화살을 우익 단체들에게 돌리지 않고 미 제국주의에 돌렸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신천 학살을 배후에서 주도한 미군의 역할을 외면한 채 “신천 학살은 동족끼리의 학살극일 뿐 미군에 의한 학살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거나 “학살은 오직 미군에 의해서만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식으로 본질을 왜곡하면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미군을 지목하는 북의 태도와 관점은 우선적으로 우리 민족의 자존을 지키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신천박물관 참관기(2) 김익두 목사는 순교자인가? 미제 간첩인가?
신천박물관측의 주장들을 듣고 있노라면 표면적으로 볼 때는 ‘반미’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박물관의 용도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선동)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6.25전쟁 중에 발생한 모든 학살 행위들을 볼 때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은 ‘작전으로서의 학살’이 더 많았던 반면, 우익과 군인, 경찰과 미군에 의한 학살은 주로 ‘처형으로서의 학살’과 ‘보복으로서의 학살’이 더 많았다. 물론 잔인성에 있어서는 보복적 학살이 매우 심했으며 ‘작전상 학살’은 ‘국가 권력이 주도한 것’이지만 ‘보복으로서의 학살’은 특정 정치세력과 맞물려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의 역학관계로 인해 신천군 민간인 학살은 궁극적으로 미국에 의한 정치적 학살(Political Massaccre)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제1전시관 걸려있는 신천사건 학살자 조직에 왜 신천읍에 있는 서부교회와 동부교회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주동자가 누구인가를 살펴보며 과연 북에서 지목한 이 두 교회들이 실제 학살사건에 어떻게 가담했는가에 대한 여부를 확인해 보고자 했다. 동시에 유리관 안에 진열된 성경책들과 십자가 묵주들은 과연 이 신천 사건에 어떤 연관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제1전시관의 기독교 관련 게시물들은 과연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입증될 만한 신빙성 있는 근거 자료들인가를 한 가지씩 계속 해서 알아 보도록 할 것이다.
전시관속에 걸려 있던 대부흥사 김익두 목사
함흥이 고향이며 실향민 출신인 남서울교회 이모 목사는 방북단과 함께 1999년 10월 30일부터 11월 6일까지 제9차 대북 지원품을 전달하느라 평양을 방문하는 기간에 신천박물관을 찾았다. 그런데 박물관의 전시물들 중에는 미국에서 16년간을 살았던 자신이 차마 부끄러움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더구나 박물관의 해설사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와 같은 선교사들을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싸잡아 비판했으며 심지어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유명한 기적의 부흥사였던 김익두(金益斗) 목사를 가리켜 ‘미제의 이중간첩’이라며 육두문자를 써가며 비판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는 내용을 그의 방북기에 언급한 적이 있었다. 김익두 목사는 신천학살 사건 당시 신천 서부교회를 담임했던 현직 목사이며 서부교회에서 분립해 갈라져 나간 동부교회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서 신천사건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벽에 걸린 김익두 목사의 사진은 이번에 내가 방문했을 때는 이미 철거된 듯 했지만 그동안 수십 년에 걸쳐 이곳 제1관 벽면에 걸려 있었다. 그 동안 전시실의 여러 게시물 중에 유독 해외동포와 남측 방문객들의 눈길을 가장 끌었던 것이 바로 “신천 서부교회당과 목사로 있던 미제의 고용간첩 김익두놈” 이라고 적힌 문구와 김익두 목사의 흑백사진이었다고 한다. 박물관이 설립된 이후 그 동안 거의 모든 해설사들은 김익두 목사를 가리켜 “우리 신천지역에서 미제의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음날인 1950년 10월 14일에 우리는 미제가 고용한 간첩이었던 신천교회 김익두 목사 놈을 처단했다”며 가르쳐 왔다. 도대체 김익두 목사가 누구기에 무엇 때문에 신천 사건과 연관 지어 그토록 공개적으로 비판을 해 왔는지 잠시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오늘날도 한국교회는 김익두 목사에 대해 뛰어난 목회자와 부흥전도자로, 교단 행정가와 교회지도자로 평가하고 있으며 신천교회당에서 새벽기도를 드리던 도중에 인민군의 총탄에 맞아 절명한 그의 죽음에 대해서 최근에는 순교자로까지 규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한국교회가 인정하는 전설적인 대부흥사인 그가 이곳 신천박물관에서는 미제의 앞잡이로 지목되어 통렬하게 비판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대로 김익두 목사는 1874년 11월 3일 황해도 안악군에서 출생했다. 1900년, 그의 나이 26살 때 동네 친구의 권유로 이웃 동네 금산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소안론(W. L. Swallon)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으며 1906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입학하여 5년만인 1910년 6월, 제3회로 졸업하고 그해 제4회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안수 후에는 신천읍교회를 비롯한 묘골, 새동안, 장촌, 정례동, 도촌, 문화, 보평, 송화골꼿 등의 여러 교회들을 미국 선교사 사우업(Charles E. Sharp)과 함께 동사목사(Team ministry)로 목회를 시작했으며 이때가 37세였다.
그의 수고로 신천교회가 크게 부흥했으며 그가 전국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면 전무후무한 치유와 기적들이 일어났으며 이윽고 그의 명성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황해노회장의 직책을 거쳐 그의 나이 46세였던 1920년에는 제9대 장로교 총회장이 되었고 그 후 서울의 남대문교회와 승동교회를 연이어 담임하다가 해방 이후 직전리교회를 담임하였고 얼마 안 되어 재령에 해창교회에 청빙을 받고 잠시 시무하다가 1946년에는 신천 서부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는데 그 당시 나이가 72세였다.
그 후 신천 서부교회에서 목회를 한지 4년이 지난 1950년 10월 14일, 새벽기도회 시간에 인민군의 총격으로 교회당 강단위에서 절명하게 된다. 겉으로는 김일성 정부에 협력하며 북조선기독교연맹을 이끌어 가면서 한편으로는 은밀하게 신천읍내 반공 우익 청년들을 규합한 배후 세력이라고 단정한 좌익들로부터 보복성 응징 살해를 당한 것이다.
김익두 목사, 김일성 수상과 같은 길을 걷다
해방직후와 6.25전쟁 중에 이북 지역만을 집중적으로 조사해서 입수한 ‘북한에서 노획한 문서’라는 이름의 160만 쪽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가 미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되어 있는데 문서들 중에는 당시 김익두 목사가 시무한 신천 서부교회(信川 西部敎會)가 ‘매 주일 1천 5백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아울러 평북, 평남 각 지방에서도 기독교가 부흥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33년에는 김 목사가 세운 신천교회에서 신천 동부교회가 분립해 나감에 따라 신천교회는 신천 서부교회로 이름을 변경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통계에 의하면 김익두 목사는 목회생활 50년 동안 국내,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했고, 150여 곳에 교회당을 세웠으며 무려 2만 8,000여회의 감동적인 설교로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질병을 신적인 치유능력으로 고쳐주었고 그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당시 우리나라의 기독교계와 사회의 존경과 신망을 받아 온 김익두 목사는 드디어 해방 이후에는 김일성 수상과 같은 길을 걸으며 협력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해방 후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 수상은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위원장(서기 강양욱 목사)에 선출되었는데 이는 이북 지역을 총괄하는 중앙행정기관으로서 토지개혁 추진과 함께 생산수단의 국유화 조치 등을 단행하는 최고의 집행기관의 수장이 된 것이다. 물론 김일성 위원장의 곁에는 언제나 그의 외종조부가 되며 창덕소학교의 담임선생이었던 강양욱 목사가 그림자처럼 지켰으며 이런 와중에 이북의 각 시도 지역에는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조직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계 단체로서 조선민주당(대표 조만식 장로, 이윤영 목사, 최용건), 기독교자유당(김화식 목사, 김광주 목사, 황봉찬 목사), 기독교사회민주당(윤하영 목사, 한경직 목사 등), 기독교민주당(감리교계열 목회자) 등의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이때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각 도에서 발족될 때 예기치 않게 기독교계 인물들이 대표자로 부상되는 등 위원회 측의 안목으로 볼 때 정치 판도에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더구나 1946년 10월 20일, 우익 기독교 연합체인 ‘5도 연합노회’에서 선거를 반대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자 김일성 위원장과 강양욱 목사는 기독교에 대한 획기적인 정책을 강구할 필요가 절박했다.
결국 임시 인민위원회는 ‘5도 연합노회’의 결정에 당황했지만 당시 전체 인구의 약 2~3%에 불과했던 연합노회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미미했고 이에 김일성 위원장은 서기를 맡고 있던 강양욱과 함께 북조선 기독교도연명(이하, 조기련)을 조직했다. 조기련에서는 ‘① 우리는 김일성 정부를 절대 지지한다. ② 우리는 남조선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③ 교회는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공약한다. ④ 교회는 선거에 솔선해 참가한다’ 는 4개항의 성명을 발표하며 인민위원회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이에 이북지역 개신교 목사의 1/3 가량이 이에 동조하고 나섰고 결국 1946년 11월 3일에 실시된 선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날 선거는 이북 전역에서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되어 총 3,459명의 위원들이 선출되었고 이어서 1947년 2월 17일 평양에서 인민위원회, 정당, 단체 대표 1,157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시, 도, 군 인민위원회 대회’가 개최되어 간접 선거로 선출된 237명의 대의원들이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했다. 그리고 인민회의는 제1차 회의를 통해 김일성 수상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를 결성하였는데 이는 ‘북조선인민회의(人民會議)’와는 별도로 조직된 당시 최고집행기관이었다. 이후 1948년 8월에 최고인민회의가 구성되고 9월에 김일성 위원장이 내각 수상에 선출되며 드디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정식 국가로 출범하게 되었다.
조기련이 창립된 이후 북한의 교회들은 친사회주의적인 교회와 정권에 반대하는 교회로 양분됐으며 당시 이북지역에 남아있던 20만 명 정도의 기독교인들 중에서 85,118명이 조기련 회원이 되었다. 이들을 기반으로 1949년에 이 조기련의 초대 총회장에 바로 김익두 목사가 취임하며 본격적으로 이북의 개신교회들을 이끌어 간 것이다. 이때 부회장에는 증경 총회장 출신의 김응순 목사, 서기는 조택수 목사를 선임했다. 이때부터 김익두 목사는 김일성 수상과 같은 사회주의노선의 길을 걷게 된다.
인민군 무기구입 자금을 헌납한 김익두 목사
한편 김일성 위원장은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그해 9월 내각 수상에 당선되었고 1950년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해 6.25전쟁을 직접 총 진두지휘했다. 빠른 속도로 정치적 입지를 굳히며 승승장구하는 김일성 수상 곁에 김익두 목사가 본격적으로 힘을 보탰다. 1949년 조기련 총회장에 취임한 김익두 목사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9년 5월 1일, 평양 만경대 운동장에서 개최된 노동절 경축식에 김일성 수상과 함께 참석해서 연설을 했다. 훗날 여기에 대한 역사가들의 해석들이 분분하지만 연설을 마친 김 목사는 단상에서 실제로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쳤고 그 실황 중계가 며칠 동안 라디오 방송으로 전국에 녹화방송 되기까지 했다.
김일성 정부를 지지하며 이북교회들을 이끌던 핵심 지도자였던 김 목사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인민군이 사흘 만에 서울 중앙청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에는 평양에서 ‘조선인민군 서울 탈환 환영예배’를 주최했다. 그뿐 아니라 1950년 8월 5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는 북조선 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들과 각 시도 지역 기독교도 연맹 대표들 그리고 북한 전역의 목사, 장로, 전도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쟁 승리를 위한 궐기대회’를 열었으며 이 자리에서 6.25 전쟁을 언급하며 “정의의 전쟁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스러운 성전”이라고 강조했다. “불의와 죄악을 제거하기에 어떤 것도 아끼지 말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정의로운 우리의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영웅적 우리 인민 군대에게 비행기, 탱크, 함선을 더 많이 헌납하기 위한 기금 거둘 운동을 신도들 사이에서 더욱 맹렬히 전개하자!”고 호소하던 그는 필승을 기원하는 예배와 합심기도를 앞장서서 주도했다.
연이어 김익두 목사는 사흘 후인 8월 8일에 열린 궐기대회에서 “미제의 무력 침공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인민군대의 비행기, 탱크, 함선 등의 전쟁 무기(軍器)를 구입할 자금을 후원하기 위해 당시 액수로는 상당한 거액인 10만 원을 자원하여 헌납했다. 이 같은 그의 군기구입 헌납운동은 이북 전 지역의 교회들로 확산되어 갔으며 전쟁의 승리를 위해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그의 열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닷새 후인 8월 13일에도 궐기대회를 열고 이북지역의 교회들을 향해 더 많은 전쟁무기 구입기금 헌납운동을 호소하면서 ‘침략자인 미제국주의자들과 망국노 이승만 도당을 완전히 소탕하는 전승 기원의 날’로 정할 것을 제의했다. 이날 평양 신양리교회에서 시작된 그의 열정적인 기도회는 새벽부터 불이 붙어 이북 전 지역으로 ‘전승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확산되었다. 평양 시내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군기헌금 모금과 전쟁 독려를 위한 전승기도회가 연달아 열렸으며 그 기세를 남한까지 몰아 인민군 점령 지역과 도시들에서도 궐기대회와 전승기도회를 열었다.
특히 1950년 7월, 김창준 목사를 포함한 북조선 기독교연맹 대표들이 서울에 와서, 1947년에 결성됐다가 활동이 중지된 ‘기독교민주동맹’을 재건했으며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월북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일부 남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민주동맹’을 지지하며 인민군 환영대회, 국방헌금 모금, 노동력 동원, 기독교인 궐기대회 등을 통해 인민군들의 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수복과 함께 이들의 활동은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한 가지 웃지 못 할 사실 중에 하나는 6.25전쟁 기간에는 남과 북으로 양분된 교회들도 덩달아 전쟁에 깊이 간여하면서 마치 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교회와 영국교회가 각각 자국의 군대가 전쟁에 승리하게 해달라고 군목들을 중심으로 전승기도회를 열었듯이 남과 북에서도 동일한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이북교회처럼 남한교회도 마찬가지로 1950년 7월 3일, 피난지 대전에서 한경직 목사를 위시한 교회 지도자들이 ‘대한기독교 구국회’를 결성해서 전선을 따라 다니며 국군을 선무하고 기독청년들을 모집해서 전선으로 내보내며 전장을 독려했다. 9월 28일 서울수복 다음 날은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서울수복 기념예배’에서 “하나님 은혜로 싸웠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수복하게 되었다”고 설교하며 전쟁승리를 기원했다.
‘13일의 금요일’에 반공우익 청년들을 규합한 김익두
강양욱 목사와 함께 김일성 수상을 협력하던 김익두 목사의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자신의 과오와 행적에 대한 뉘우침과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방되기 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흥목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앙운동을 위해 전력해 왔고 교단의 황해노회장과 장로교 총회장를 역임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해방 전에는 순수한 부흥목회에만 주력했는데 해방이후 이북의 교회가 사회주의 교회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자신이 그 일에 주역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았을 것이다. 전쟁 중이라 해도 남아 있던 500명 정도의 신자들을 거느리며 신천 서부교회에서 목회하던 김 목사는 라디오를 들으며 남쪽소식을 접하거나 날이 갈수록 우익 세력들과의 접촉을 갖는다. 특히 남북을 오가며 우익 지하운동하는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는 이북에서도 가장 기독교 세력이 왕성한 지역이다 보니 반면에 반공세력이 가장 강력한 지역이었다. 이에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 온다는 정보에 맞춰 반격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국군이 진격한다는 과잉 정보로 인해 너무 서둘러 10월 13일이라는 날짜에 반격을 한 것이 가장 큰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에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감행됐고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은 낙동강까지 내려온 인민군들의 허리를 끊는데 성공했다. 갑작스런 연합군의 기습으로 허를 찔린 인민군은 당황했고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서울 점령 사흘 만에 국군은 38선을 넘었고 뒤 이어 미군과 UN군도 북진에 가세했다. UN군이 38선을 돌파해서 북진을 하니까 그 소문이 재령과 신천지역에 퍼지면서 김익두 목사의 주변에는 아주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
당시 신천지역에는 남과 북을 오고가며 음성적으로 우익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백색테러로 유명한 한독당 당원, 백의사, 서북청년단 요원을 비롯해 김구 노선에 있는 인물 등 다양한 우익 조직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승만 정부에서 파견된 권총을 소지한 첩자들도 남북을 오가며 몰래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 김익두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신천 서부교회 청년들과 읍내에 소재한 교회 청년조직들을 규합하여 국군과 UN군의 전황을 알려주며 반공궐기와 반격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국군과 UN군의 북진 소식과 함께 황해도 구월산에서는 은밀한 거사가 계획됐다. 구월산에서 봉화를 피우면 신천, 재령, 나무리벌, 북율, 남율, 소호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거사가 시작되는 것이며 교회의 반공 우익청년들의 계획은 연합군이 들어오기 전에 황해도 일대에서 반공 봉기를 일으켜서 미리 주도권을 잡는 것이 목표였다. 목표물은 신천군의 행정을 주관해 온 노동당 인민위원회 청사, 그날은 이른바 ‘13일의 금요일’이었다. 이날은 김익두 목사가 죽기 하루 전날이었다.
10월 13일 저녁 5시경이 되자 드디어 우익들의 반공 봉기가 일어났고 교회 청년들로 구성된 다양한 자체 치안대원들 한 사람이 아시바 총을 대 여섯 정씩 메고 나타났다. “대한민국만세! 국군만세!” 하면서 신천읍과 각 마을에는 청년들이 삽시간에 떼를 지어 나타나서 흥분한 상태로 좌익들을 체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현재 신천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당시 신천군 노동당 인민위원회 청사를 접수하고 봉기에 성공한 우익은 대대적인 좌익 색출에 돌입했고 끔찍한 학살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모든 사건은 김익두 목사가 죽기 하루 전날인 10월 13일에 도화선이 되어 터진 것이다. 마침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하던 좌익계열 청년들이 우익반공계열 수백 명을 대상으로 예비 검속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지하에서 우익반공 조직 운동을 하고 있던 신천 서부교회와 동부교회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온천교회, 구당교회, 석당교회, 간성리교회, 은천교회, 지봉교회 등에 다니던 교회의 청년학생들 수백 명이 반발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며 닥치는 대로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13일 이후, 신천군 인민위원회 청사와 관공서를 장악한 우익청년들은 닷새간의 전투 끝에 신천군 전역을 장악하여 평양탈환을 목표로 북진하던 미군 제1기갑 사단의 통로를 열어주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새벽기도를 드리던 중에 총격을 당한 김익두 목사
광란의 살육전이 계속되던 13일 밤이 지나고 어느덧 14일 새벽 4시가 되었다. 이제 신천지역은 우익 반공세력과 미군이 주도하는 것으로 모든 전세가 끝났다고 판단한 김익두 목사는 교회의 종탑으로 가서 그동안 전혀 하지 않았던 새벽종을 치고 교인들에게 새벽예배가 있음을 알렸다. 당시는 교회의 종을 칠 수 없을 시기였다. 종소리를 들은 교인들이 여기저기서 50명 정도가 모였다. 김 목사와 교인들은 긴장감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라고 선언하며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를 찬송하는 것으로 새벽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설교를 모두 마치고 이윽고 광고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 동안 하나님께 서너 가지 기도 제목을 두고 기도해 왔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첫째는 우리 교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을 속히 주옵소서. 둘째는 신천읍내 5일장을 다시 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는데 이제는 5일장이 서게 되어 우리 성도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셋째는 하루 속히 인민군대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넷째는 신앙고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날을 달라는 것이었는데 마침내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마음 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때가 되었으니, ‘하나님 만세! 예수 만세!’를 부릅시다.”
김 목사는 광고시간을 이용해 교인들과 함께 신앙적인 만세삼창을 우렁차게 했다. 그는 이어서 ‘국군이 곧 입성할 것이니 우리교회가 환영회를 개최하자’는 말로 모든 광고를 마치고 예배를 끝냈다. 예배를 끝내자 참석한 신자들의 절반 정도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20명 정도가 김 목사와 함께 예배당에 계속 남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는 강대상 옆 방석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까지도 예배당 밖에서는 좌익세력과 우익반공세력이 밤이 맞도록 서로 쫒고 쫒기는 살육전을 벌이고 있었던 살벌한 시간이었다. 때마침 전세가 불리해진 좌익세력들이 간혹 교회 뒷산 길목을 이용하여 간간히 도주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김익두 목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좌익과 인민위원회 대원들은 김 목사를 제거하기 위해 교회당 담 밖에 몰래 숨어서 예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예배를 마치자 어둑어둑한 예배당 안에 구둣발로 진입한 그들은 강단위에서 기도하던 김익두 목사를 찾아냈다. 그리고 깜짝 놀라 기도를 멈추고 말리려던 교인들을 향하여 총격을 가했다. 이어서 총구는 김 목사를 향하여 발사되어 현장에서 모두 6명이 즉사를 하고 몇 사람은 중경상을 입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교회의 기둥이었던 채장로와 임성근, 김채호 전도사, 그리고 맨 주먹으로 대항하던 청년 두 명, 이렇게 모두 6명이 절명했으며 당시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대원으로 봉사하던 21살의 처녀 이순일은 창문을 넘어 밖으로 도망치다가 죽창에 뒷 어깨가 찔려 실신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순교인가? 변절자에 대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인가?
북의 인민공화국 정부는 신천지역에서의 은밀한 반공우익 행적을 보인 김익두 목사를 제거 한 것은 자신들의 활동무대인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기독교 측에 몽땅 넘겨주었다는 초조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좌익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 동안 자신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충성했던 김익두 목사를 과감히 처단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김익두 목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현직에 있을 때 조기련 총회장으로 사역한 경력 때문에 사후부터 지금까지 남한에서는 좌경인물로 낙인찍혀 왔으며 반면 북에서는 그곳대로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낙인찍힌 불운한 인물이 되었다. 마치 박헌영처럼 남과 북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는 듯한 처지가 되어 보였다.
인생 말년의 김익두가 신천 지역에서 은밀히 행했던 친미 반공행각은 북측 입장에서 볼 때는 단죄할 수밖에 없는 변절자이며 배신자에 해당됐다. 그의 인생은 ‘역사의 악’과 ‘개인사의 불행’이 서로 뒤엉켜 있는 듯한 구조를 지니며 좌우의 이념 대립을 떠나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당시 사회와 교회를 구원한 걸출한 시대적 인물이었다고 본다. 역사의 정량론(定量論)으로 보아서 김익두 목사만이 그 시대에 좋은 것을 모두 다 갖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한국교회에서는 김 목사를 순교자로 규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에는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가 과연 순교자로서 적합한 자격을 지녔는가의 문제는 나의 관심 밖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의 총회장으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연맹가입에 한사코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한 목회자와 신자들이 상당수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김익두 목사는 당시 부총회장이던 김응순 목사와 함께 이북교회 목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교회를 살리는 길은 연맹에 가입하는 길 뿐이 없다”며 의도적으로 목사들을 연맹에 가입시켰으며 거부하는 목사들에게는 협박도 주저하지 않았다.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김인준 목사나 이성휘 목사, 산정현교회의 방계성 전도사, 이기선 목사 등은 끝내 가입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처럼 김 목사에게 실제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과 그의 후손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 가운데 굳이 한국교회가 순교자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아직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보인다. 김 목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과정도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죽음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신천 반공무력 사태에 대한 북측과 좌익계열의 보복 살인이었다. 그의 죽음이 반공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반공 그 자체로는 순교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그의 사역 전반에 대한 과학적 자료와 김일성 정부에 협력했던 과거 행적에 대한 신빙성 있는 자료들이 더 많이 수집되어 철저한 고증과 절차를 거친 후, 객관적 평가를 통해 순교자 규정 문제를 논의했어야 한다.
북측의 주장대로 겉으로는 김일성 정부에게 협력자로 일하면서 동시에 은밀히 미군과 국군 그리고 남한 정부와 내통했을 뿐 아니라 신천지역 기독교 청년들을 한데 묶어 반공연대세력을 꾀했던 김익두 목사는 중국 길림에서 선교목회를 하던 손정도 목사와는 또 다른 유형의 사회주의 목회를 시도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신천박물관 참관기(3) 학살책임자 해리슨은 위관급인가? 장성급인가?
‘복수.하.리라’ 어머니의 한 맺힌 증언
신천박물관을 방문한 첫날에 만나고자 했던 ‘복수.하.리라’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삼남매의 어머니는 바로 이옥후(리옥후)라는 이름의 70대 아주머니였다. 신천학살 피해자인 그녀는 사건 당시 7살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70대 중반으로 접어든 할머니가 되었다. 학살사건 당시 미군에 의해 양팔을 잃은 상태로 지금껏 살아왔다는 그녀는 한숨과 함께 떨리는 음성과 증오심에 가득 찬 증언을 내뿜었다. 그의 증언에 대한 진위여부를 떠나 차마 분노의 눈물 없이는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미군이 우리 마을에 들어왔을 때 우리 식구들은 무서워서 죽은 듯이 숨어 있었어요. 워낙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피바람이 불었기에 숨소리도 못 내고 사흘 동안 꼼짝없이 숨어 지냈습니다. 사흘이 되자 우리 식구들이 배가 고파 너무 허기지니까 어머니가 나더러 ‘어른들은 위험할 수 있으니(애들은 좀 안전할 수 있으니) 네가 몰래 나가서 먹을 양식 좀 구해 오너라’ 하고 말씀하셔서 저는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위험한 상황인데 어떻게 아이를 내 보낼 수 있나요?”
“저는 조심스럽게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간신히 먹을 것을 구해 다시 오두막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눈앞에 미군들이 나타난 겁니다. 저는 미군을 발견하고는 엉겁결에 놀라서 도망을 쳤지 뭡니까. 정신없이 달리는데 벌써 미군들은 등 뒤에 바짝 쫓아왔고 저는 너무 놀라서 계속 도망치려 했습니다. 미군들은 영어로 멈추라고 지껄이는 듯 고함을 쳤으나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혹시 그 당시에도 헬로우, 스탑처럼 기본적인 영어는 알고 있던 시절이 아니었나요? 혹시 멈췄더라면 괜찮지 않았을까요?”
“너무 당황하고 무서워서 아무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고 전 그때 영어를 처음 들어봤습니다. 저는 이를 악물고 식구들이 숨어 있던 오두막까지 단숨에 달려와서는 문을 열려고 오른 팔을 올렸지요. 그 순간 미군이 총을 쏴서 내 한쪽 팔을 박살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저는 나도 모르게 다시 왼쪽 팔로 문을 움켜잡았는데, 그 미군 놈이 다시 내 왼팔을 쐈습니다.”
“아, 기가 막히군요. 그런데 양팔에 총을 맞았다고 해서 지금처럼 두 팔이 모두 없어지지는 않을텐데... 치료를 못해서 이렇게 되셨나요?”
“아닙니다. 살기등등한 미군놈들은 내 양팔을 쏘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놈들은 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서 엎어놓고 군홧발로 짓밟으며 내 두 팔을 몽땅 잘라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잘라진 내 팔을 또 다시 세 동강이씩 절단을 냈습니다.
“도대체 어린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요.”
“내가 죽어서라도 살인마 미제놈들의 원수를 꼭 갚고야 말 것입니다.”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의 민망함과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생경스러움이 교차하며 내 몸을 휘감는다. 그의 온 몸에서는 복수의 피가 펄떡이는 듯 했다. 시대의 아픔을 통째로 안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몸짓은 한 자락의 희망이라도 붙들 힘이 없어 보였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 같은 잔인한 만행을 겪었다는 그날의 일곱 살 소녀는 그 후 양 팔이 없는 불편한 몸으로 한 맺힌 65년의 삶을 그렇게 모질게 살아왔다고 했다.
누구라도 그렇듯이 나는 리옥후 할머니의 생생한 이야기가 추호도 가식이 없는 진실 된 증언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오죽하면 결혼해서 힘들게 낳은 삼 남매의 이름들을 각각 “복수” “하” “리라”로 지었겠는가?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국가는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장애의 몸으로 대학을 모두 마치고 일선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도록 후원해 주었으며 지금은 정년퇴직을 했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관통상의 아픔과 복수의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내는 한 가냘픈 여인의 증언을 들으며 오늘은 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자료들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이하, NARA) 문서들을 직접 대조하는 작업을 통해 신천학살 사건에 미군이 실제로 개입한 증거와 정황이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학살을 총 진두지휘했던 지휘관과 실무자들이 누구였는가를 알아보고자 했다. 지금까지 가능성을 두고 조사한 바로는 신천에서 직접 작전을 수행하거나 주둔했던 미군부대가 두 종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일반적인 전투를 수행하는 야전부대였고 또 하나는 은밀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특수 방첩부대였다.
신천학살사태는 1950년 10월 3일 오후 4시에 황해도 재령에서 시작되어 저녁 6시부터는 신천으로 이어졌다. 겉으로 볼 때는 좌익과 우익 양측의 충돌에 의해 발생한 듯하나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기획하고 현장에 투입되어 직접 진두지휘하기까지 했던 검은 실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 정부와 미군사령부의 지시아래 실행에 옮긴 미군 전투부대와 방첩부대들이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이승만 정부로부터 전시작전권을 물려받은 미국 정부와 미군 최고사령부의 완전한 승인절차와 이승만정부의 비호와 공조 없이는 감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천사건은 학살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사냥’이라고 불릴 정도의 유혈 참극이었기에 반세기를 넘어 1세기를 향하는 이 시점에도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사건의 진실은 은폐되어 왔고 마음 놓고 우리 역사의 수면 위에 드러낼 수 없었다.
학살책임자로 지목된 해리슨의 계급은 무엇인가?
오늘 전시관을 둘러보거나 생존자의 증언을 듣기 전까지 나는 평소에 커다란 의문점을 하나 품어왔다. 그것은 바로 북측이 지목하고 있는 학살 책임자 미군장교 해리슨의 계급이 정확하게 무엇이냐에 대한 문제였다. 평소에 신천사건에 대해 연구하면서도 이 문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점점 미궁에 빠져 있었다. 피해자인 북측을 제외한 한국이나 각국의 연구 단체들과 언론 매체들은 모두 해리슨에 대한 계급을 ‘중위’로 언급하거나 중대장이니, 소대장이니 하면서 중구난방으로 제 각각 언급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동안의 연구에 대한 확신 때문에 해리슨이 미군 중위였다는 주장들은 아무런 근거나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천사건을 다룬 소설 ‘손님’을 집필한 작가 황석영은 해리슨의 계급을 ‘중위’로 간주하여 작품을 집필했으며 한국 방송사상 최초로 신천사건을 방영해 진보와 보수진영 모두에게 큰 관심을 끌었던 MBC 다큐멘터리 제작진도 해리슨의 계급을 아예 처음부터 ‘중위’로 단정을 하고 방송 스토리를 전개했다. 이와 같이 신천학살 주모자로 지목된 해리슨을 추적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아무런 근거나 기초자료 없이 해리슨의 계급과 직책을 아무렇게나 취급해왔다. 그런 이유로 인해 신천학살에 대한 미군 개입설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확보되기 보다는 사건의 실체에서 벗어난 추론과 억측들만 난무했던 것이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된 부분은 자체 내부의 혼선에서 빚어진 실수인지는 몰라도 북측도 생존자들의 증언 동영상을 보면 해리슨을 중위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에 나를 더욱 혼란하게 했다. 아무튼 학살의 총지휘관인 해리슨이라는 장교는 분명 한 사람일 텐데 그의 계급과 직책은 지금까지 팔색조처럼 다양하게 불려왔다.
그의 계급과 직책이 정확히 무엇이냐에 따라 신천학살사태의 미군 개입설에 대한 진실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남측이나 서방세계 시민들은 막연하게 “신천학살은 미군이 저질렀으니 그대로 믿어라”라는 식의 주장이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좀 더 누구나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자료도 확보하여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해리슨은 장성급 계급인 미육군 소장(少將)이었다
나는 그동안 북측에서 해리슨의 직책을 ‘신천지구 위수사령관’ 혹은 ‘신천점령 미군사령관’이라고 언급해 온 것을 근거로 해서 적어도 점령군사령관 정도의 직책이라면 미군 고위직 장교가 분명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해리슨(Harrison)’이라는 영어이름 하나 달랑 들고 해방 이후부터 6.25 정전협정까지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 영관급과 장성급을 대상으로 해당 인물을 물색해왔다.
지금까지 학살주범으로 지목된 ‘해리슨’의 정확한 영어 풀 네임(Full Name)조차 서방세계에 공개된 바가 없었고 ‘해리슨’ 이라는 이름 자체도 라스트 네임(Last Name)인지 퍼스트 네임(First Name) 인지의 여부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두 명의 관련 인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 명은 제주 4.3사태와 관련이 있는 영관급 장교로서 사태이후 정보 수집 차 계속 제주에 잔류했던 미 24군단 정보참모부 소속 해리슨(Harrison) 대령이었고 또 한 명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6.25전쟁 정전협정 조인식에서 유엔군 측 수석대표로 나온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 장군(중장)이었다. 그러나 신천사건과 관련된 ‘해리슨’이 이 둘 중에 한 명이 해당되는지에 대한 여부는 박물관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오리무중이었다.
북측이 박물관을 설립한 날부터 지금까지 입에 거품을 물듯 초지일관 학살의 우두머리로 미군장교 해리슨을 거론해 온 사실을 고려하면 분명 그에 대한 신상자료가 전시실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전혀 근거 없는 허구의 인물을 학살의 책임자로 거론하기에는 너무 많은 무리수가 따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신천사건의 미군개입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월남한 반공 우익 인사들과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보수세력들이었다. 그들은 해리슨이라는 일개 미군 중위가 어떻게 자신의 소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수만 명을 죽일 수 있겠느냐는 논리를 펴며 하루에 700명은 죽여야 52일간 35,000명이상을 학살 할 수 있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일축했다. 또한 신천사건은 좌익과 우익들끼리 죽인 우리 민족 내부의 사건이며 사건 현장에서 미군을 전혀 목격한 일이 전혀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내가 오늘 방문한 전시실에서 해리슨이라는 장교는 일반 전투부대의 위관급 장교가 아닌 미군 첩보부대의 장군으로 밝혀졌다. 그가 미 육군의 장성으로서 소장(少將)의 계급이었음을 밝혀주는 결정적인 단서는 의외로 박물관 전시실 벽면에 다른 사진들과 함께 조용히 붙어 있었다. 그 증거물은 해리슨이 전쟁 중에 특수임무를 수행할 때 사용했던 장교 신분증이었다. 이번 박물관 참관 중에 가장 큰 소득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해리슨의 신분증 사진을 통해 그의 신상정보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는 것이며 그에 따른 후속 연구 조사가 박차를 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신분증의 앞면은 영어 원문으로 작성되었고 그 아래는 원문을 한글(조선글)로 번역해 놓았다.
‘해리슨의 신분을 확증하는 근거 자료’라는 설명서와 함께 번역한 내용을 보면 ‘이 증명서의 소지자는 민주자유 한국의 통일을 위한 군사 첩보활동에 종사하고 있음 -미륙군소장 해리슨 디 매든 -’이라고 적혀 있었다. 신분증 앞면은 카드 고유번호 ‘70120’가 스탬프로 찍혀 있었고 카드의 네 모서리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각각 그려져 있었으며 카드 내용은 영어 대문자로 “THE BEARER OF THIS CARD IS ENGAGED IN SUPPORT OF ARMED FORCES INTELLIGENCE ACTIVITIES FOR THE UNIFICATION OF A DEMOCRATIC FREE KOREA. - HARRISON D. MADDON- MAJ. GENERAL”이라고 기록 되었고 해리슨의 풀 네임 위에는 그의 친필로 된 서명이 있었다.
예상대로 해리슨은 위관급이 아니라 미 육군소속의 장성급 지휘관이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원래 이런 류의 카드는 국내외에서 정보기관에 종사하는 요원들이나 군 방첩대 요원들이 임무를 수행하거나 각 기관의 협조가 필요할 때 필수적으로 제시하는 암행어사 마패와 같은 것이다. 학살 지휘자로 지목된 해리슨 소장은 6.25전쟁 중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미군 방첩부대(Counter Intelligence Corps, 이하 CIC)의 지휘관으로 신천사건에 개입했던 인물이라는 것이 1차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해리슨 장군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해야
또 해리슨의 신분증 사진 위에는 ‘미제 침략군 장교 해리슨 디 매든’이라는 설명서와 함께 유엔기 옆에서 해리슨 장군이 모자를 들고 뒷짐을 진 상태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장면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사진 우측에는 해리슨장군이 1950년 10월 17일자로 장병들에게 내렸다는 학살명령문이 영문과 번역문으로 아래와 같이 걸려 있었다.
‘1950년 10월 17일 해리슨 놈의 <명령>’
“나의 명령은 곧 법이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무조건 총살한다.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북한을 구원하기 위하여 공산도배를 진멸시켜야 한다. 로동당원, 국가기관 복무자는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모조리 체포 처단하며 일체 그 동정자들도 공산주의자들과 동일하게 처단하라”
‘Harrison order(10/17/1950)’
“My order is the law. outlaws will be shot to death. destory all red bandits to free the north korea from the communist threat. hunt and kill all the communist party remembers civill servants and there famillies. kill there sympathizers too”
또한 명령문 옆에는 ‘졸개들에게 학살 명령을 내리는 해리슨’이라는 당시 상황을 재현한 그림 한 폭이 걸려 있고 그 밑에는 ‘1950년 12월 3일에 내려진 해리슨의 두 번째 학살명령문’이 걸려 있었다.
Harrison D. Maddon! 그가 미 육군에서 은밀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첩보부대 지휘관으로 밝혀졌으니 이제부터라도 국내외 연구가들은 그에 대한 자료들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석하게도 NARA에는 6.25전쟁 관련 문서들이 수백만 건이나 소장되어 있지만 해리슨 장군과 관련된 자료를 입수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미국의 이익에 해가 되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은 해제가 만료됨에도 아직도 일급비밀(Top Secret)로 분류되거나 이미 공개된 문서들도 논란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다시 슬그머니 사라지기 때문이다. 신천사건 당시 미 24사단 19연대 1대대장, 모리스 너츠 대령도 당시의 신천지역 전투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NARA를 찾았으나 문서군에는 구체적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신천지역에서 미군방첩대는 어떤 역할을 했나?
해리슨이 미군 방첩대 장군 출신 지휘관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니 앞으로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한 후에 추후 방북기를 통해 밝혀 보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2001년 4월에 한국의 ‘한겨레 21’측에서 NARA를 직접 방문하여 ‘사리원과 신막 사건 조사 보고서’라는 제목의 63쪽 분량의 문서를 발굴 조사했는데 이 문서에는 조사 보고서, 외신 기사, 관련자 증언록, 민간인 관련 문서 등으로 구성돼 있었음이 밝혀졌다. 나는 이 문서를 통해 미군 방첩대가 신천학살 전후로 황해도 일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건이 담겨 있었다. ‘1950년 12월 8일 사리원에서 멀지 않은 신막 부근에서 치안대원들이 21명의 민간인들을 향해 총알을 발사하려는 순간을 영국군 장교가 목격을 했고 그 장교는 황급히 처형을 지연시킨 뒤 상부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고 급파된 두 명의 영국군 통신장교는 처형을 신속히 중지시키고 살해당할 뻔한 민간인들을 신막 교도소로 무사히 이송시켰다고 한다.
그 후 처형을 중지시켰던 당사자인 레너드라는 영국군 중위는 당시 처형을 집행하려던 치안대원에게 직접들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치안대의 대표가 하는 말이 민간인을 처형하는 것은 미국 방첩대(CIC)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있었던 캄펠 중위도 비슷한 발언을 했는데 “당시 사살하려고 했던 죄수들은 공산주의자 혐의가 있어 서울로 이송할 계획이었고, 처형은 미국 방첩대의 명령에 의한 것이지만 방첩대 내부의 작전을 우리가 입증하긴 어렵다고 했다”는 증언을 했다.
이처럼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 방첩대원들은 이북의 점령지역에 들어가서 좌익과 부역자들 그리고 그들의 일가족들을 모두 색출하여 제거하는 작전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집행하는 비밀정보조직이며 고도의 테러 실행조직이었다. 또한 미군부대의 지휘관은 점령지인 해당 지역에서 자치대를 관리하고 통제할 책임이 있고, 행정명령에 따라 관이 주도하는 민간치안대에서는 미군사령관의 허가한 만큼의 무기들을 소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에 의해 무장된 우익 치안대가 함부로 총기류와 각종 흉기를 휘두르는데도, 미군은 적절한 통제를 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하물며 신천과 재령에서 발생한 극단적인 학살사태는 단순히 좌익과 우익의 즉흥적인 충돌에서 빚어진 사태라기보다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인 미군 정보부서와 방첩대의 전략에서 실행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은 미군 방첩부대의 작전은 비공개이기 때문에 일반 미군병사들과 일반 국군들 그리고 반공우익에 속한 일반 치안대원들은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다만 지휘관이나 지도자나 단장, 대표자들만 방첩부대의 흐름과 전략을 어느 정도 인지할 뿐이다.
미군 개입설을 부인하는 다양한 주장들
그 동안 한국 정부가 발행한 ‘6·25전쟁 전사(戰史)’ 기록에는 “1950년 10월 18일, 미육군 보병 제24사단 19연대 3대대가 가장 먼저 신천에 진입했고 이틀 후인 20일에 3대대는 신천을 떠나서 진남포로 진격하라는 상부의 작전 명령을 받고 3대대가 다시 북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신천학살 사건에 직접 연루되거나 현장을 목격한 월남 반공우익 인사들로서 “미군들은 단 2시간 정도만 신천에 머물다 지나갔으며 미군들은 탱크나 군용 차량들을 몰고 신천을 유유히 통과하며 구월산을 향해 포만 몇 번 쏘고 지나갔다”고 증언했다. 6.25전사 기록과 우익 인사들의 주장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 두 증언을 비교할 때 확실히 드러난 것은 신천에도 미군이 들어 온 것은 맞는 사실이나 이틀이나 2시간은 학살을 저지르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기에 이런 주장들은 미군 개입설을 확증하려면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또한 소설가 황석영의 한겨레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소대병력이 신천에 잠깐 들어가서 두 시간 정도 머물고 그대로 진격해서 올라갔어요. 그게 미군 제1기갑사단 소속인데. 전사에 잘 나와 있어요. 이거 작전계획을 알아야 하는데 황주 방면으로 올라가는 중대가 예하부대를 파견해서 신천에 들어가서 두 시간 동안 미군환영대회를 하고 돌아왔단 말이야. 그렇다면 수색소대인데 수색소대가 45일 동안 주둔할 필요가 없는 거라. 본대는 이미 올라갔고. 작전개념상으로 맞지가 않는다니까?”라며 황 씨도 당시의 미군 부대 정보와 동향을 다른 방향으로 파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신천에 도착한 미군은 반공우익의 증언처럼 2시간을 체류한 것인가? 아니면 전사의 기록처럼 이틀을 주둔한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북측의 주장대로 52일간 주둔하며 학살을 주도한 것인가?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가? 북측은 미군이 1950년 10월 17일 신천을 통과하여 점령한 뒤,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기 시작한 12월 17일까지 무려 52일간 인민공화국 정권과 인민군에 협력한 부역혐의가 있다고 판단된 좌익과 그 일가족들에 대하여 남녀노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을 감행했다고 주장해왔다. 누구의 말이 근거가 있는지 밝히고자 그 동안 입수된 자료들을 가지고 당시 미군의 이동경로와 신천 주둔여부를 확인해 보도록 하자.
미군 전투부대는 왜 신천에 주둔했는가?
신천학살 사건의 최초 발단은 1950년 10월 13일, 금요일 저녁 6경부터 서서히 시작됐다. NARA문서에는 당시 신천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미군의 일상적인 전투일지들과 보고 문서들이 다행스럽게도 상당수가 남아 있었다.
1950년 10월 17일자에 작성된 보고 문서에는 “4일 전인 13일에 황해도에서 ‘Mansai affair(만세사건)’가 있었으며 좌우로 대립한 주민들끼리 처참한 살육전을 벌였다”고 사건 당일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언급했다. 또한 미군 항공기가 신천지역 항공을 관측 보고한 후에 작성된 10월 18일자 통신문서에는 “미군 비행기를 본 신천 주민들이 백기를 흔들면서 구조를 요청했다. 조사가 요망된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또한 문서에는 미군의 점령지로서 신천을 담당하게 될 미군부대는 서부전선을 맡고 있던 ‘미육군 24사단 19연대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19연대의 이동경로를 적은 10월 18일자 작전지도에는 ‘신천’이라고 적힌 지명과 함께 작전을 수행한 이동 경로가 분명히 표시되어 있었다. 실제로 18일에 신천으로 직접 들어간 미군부대는 19연대 3대대 소속의 C중대와 L중대였다. 1대대와 2대대가 안악과 진남포를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는 동안 3대대 소속의 2개 중대는 신천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평양시 함락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3대대 소속의 2개 중대는 왜 북진하지 않고 후방지역인 신천과 재령에 계속 남아있게 됐는지를 알아보고 그들에게 내려진 상부의 작전 명령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자.
신천에 남았던 2개 중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양으로 진격하는 주력 부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경계 근무를 서기 위한 것으로 일반적인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2개 중대가 신천에 도착한 목적은 바로 반공우익 세력을 돕기 위해 긴급 투입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2개 중대가 신천에 도착하기 닷새 전(10월 13일)에 재령과 신천에서 발생했던 학살 사건에서 좌익과 우익들의 불꽃 튀기는 살육전이 진행되자 미군 3대대가 좌익과 부역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특수임무를 받고 배치된 것이다. 물론 3대대가 신천에 도착하기 이전에 미군 방첩대가 먼저 당도해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19연대는 원래 1대대와 2대대뿐이 없었으나 8월 중순 무렵에 뒤늦게 어디에선가 3대대가 19연대에 합류했던 것이다. 이 3대대원들은 6.25전쟁에 투입된 지 단 3개월 만에 작전수행중 인민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중대원들이 전사하고 그 결과 대대가 해체가 되고 나머지 생존자들로 꾸려진 대원들이었다. 당시 해체된 중대의 통신병이었던 ‘챨스 슈’라는 이름의 병사가 소속된 중대는 원래 140명이었는데 인민군의 총격으로 겨우 4명만 살아남았다고 증언했으며 이처럼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병사들로 구성된 3대대의 C중대와 L중대는 마침내 무법천지가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살륙의 현장인 신천에 도착해 좌익 소탕작전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챨스 슈’는 훗날 미국 신문에 “한국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불가피했다(신문기사 제목: U.S. Army vet says killing korean civillians anavoidah)”라는 기고문을 발표해서 미국사회에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반공우익 인사들과 보수 측 인사들 측에서 가장 신뢰하는 신천사건 기록서는 당시 신천사건 현장에 직접 참여했던 조동환 씨가 1957년 5월에 펴낸 ‘항공의 불꽃, 황해도 10.13 반공의거 투쟁사’라는 백서인데 사상자와 관계자 실명까지 등장할 정도로 세부적으로 집필했다. 이 책은 신천사건을 총 1막에서 5막까지 분류해서 종합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는데 그 중에 1막이 바로 10월 13일 저녁에 시작된다.
13일에 시작된 서로간의 학살은 18일까지 지속됐다. 결국 반공 우익세력과 좌익세력은 5일간의 혈전 끝에 닷새 만에 우익이 승리하며 신천군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그 결과 유엔군과 미군 제1기갑사단의 북진 통로를 열어주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 닷새가 되는 날(18일)이 바로 미 19연대 3대대의 2개 중대가 신천에 입성한 날이다. 그렇다면 신천에 도착한 미군들은 팔짱을 끼고 좌익과 우익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 미군은 이날 좌익을 대상으로 가장 큰 피의 대학살극을 벌여 입성 당일에 우익반공 치안대에 승리를 안겨준 것이다.
또한 신천사건 당시 활약했던 반공우익 인사들이 월남해서 조직한 ‘신천 10.13동지회’라는 단체에서 작성한 공식적인 문서를 보면 10월 13일 오후 4시를 기해 신천군 옆에 있는 재령군에서 인민군과 좌익이 퇴각하기 전에 반공우익 세력들이 먼저 봉기하여 노동당과 각 기관을 습격했고 남산 꼭대기와 거리에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동시에 좌익과 부역자들을 대거 숙청했다고 기록했다.
그 후 퇴각하던 인민군 측의 병력증원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우익 봉기군은 사리원에 주둔한 유엔군 측에 긴급 연락을 취하는 한편 S.O.S라는 대공표식으로 유엔군 측 공군에 신속히 알려 드디어 10월 18일 유엔군이 재령과 신천으로 입성하여 결국 두 지역은 재탈환되고 치안이 평정됐으며 수많은 무기와 차량 및 군수품을 유엔군에게 인계했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조동환씨의 책이나 ‘10.13동지회’의 전사기록을 보더라도 분명히 미군은 좌익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재령과 신천에 긴급 투입된 사실이 분명하며 투입된 후에는 치안을 평정하기 위해 수많은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이다.
미군에게 있어 민간인들은 사냥감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미 24사단 지휘부는 많은 예하부대 중에서 왜 하필 19연대 3대대를 신천에 배치했을까? 앞서 밝혔듯이 신천으로 간 3대대원들은 이미 자신들이 소속했던 연대가 해체되어 새롭게 편입돼 온 상처 입은 병사들이면서도 동시에 강한 병사들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피난민들 틈에 낀 인민군들이 민간인과 똑같은 복장을 입고 자신의 중대 행렬에 총격을 가한 결과 140명중 겨우 4명만 남을 정도의 피해를 입어 큰 충격을 받았기에 이들은 다른 부대의 병사들과는 다르게 민간인들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했고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보호 본능이 어느 부대원들 보다 심하게 작용했다.
낯선 이방인이었던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신천에 당도하기 전에도 누가 적군이고 민간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서로 맞붙어 싸우는 남과 북의 주민들 생김새와 옷차림이 모두 똑같은 상황을 보며 언제 어디서 자신들을 향해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긴장감과 함께 동료들을 잃은 적개심마저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에 파견돼 온 미군장병들은 부산항에 내릴 때만 해도 2차 세계대전의 승리감에 들떠 있었다. 입국할 때만 해도 전선의 상황을 실감하지 못해 의기양양했던 미군들은 듣던 말과는 달리 직접 전장에 출전해보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게 된다. 가는 곳마다 자신들을 환영하는 인파들이 거리를 메웠지만 그들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을 정도로 피아 분별력이 힘들었다.
24사단이 참전하고 1개월 만에 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이 대전전투 중에 포로로 잡혀가자 미군사령부 총지휘부는 급기야 “흰 옷을 입은 민간인을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예하부대에 내렸다. 1만 6천명의 병력과 5천대의 차량을 보유한 미 24사단은 17일간의 전투기간 중 모두 7천 명의 병력과 주요 장비의 60%를 상실했기에 전투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미군에게 있어서 이제부터는 남측 주민이든 북측 주민이든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적으로 의심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NARA의 전투 보고서에는 “육군에서는 우리 거점에 접근하는 모든 민간인 피난민들에게 폭격을 가할 것을 요청했다. 야간에 흰옷을 입은 민간인들에게 정체를 묻는 대신에 총격을 가할 것”, “북측 발사지역 난민들은 모두 Fair game이다”라고 기록되었다. Fair game은 수렵금지가 해제된 사냥감이라는 뜻이다. 또 ‘밤에 흰옷을 입은 사람이 보이면 누군지 묻지 말고 그냥 총격을 가하라. 총격을 가하지 않으면 중대장을 보직 해임한다’는 문서도 있었다. 미군들은 이제 신원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접근하면 발포해도 문제가 되지 않게 된 것이다. 두려움이 커질수록 병사들도 난폭해져 갔고 지휘부의 명령처럼 전쟁터는 그야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살육하는 사냥터로 전락이 된 것이다. 아래와 같이 당시 다른 미군부대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 피난민이 전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라. 누구든지 넘으려고 하면 발포하라. 여자와 아이들의 경우에는 분별력 있게 대처하라. (1950년 7월 24일, 미1기갑사단 명령문, 24일 오전 10시, 휘하 미 8기갑 연대 통신문)
*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에서든지 피난민들이 전선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 (1950년 7월 26일, 미8군 본부 통신명령문)
* 전투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며 발포하라. (1950년 7월 26일, 미 보병 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명의의 명령문)
* 전투지역에서 눈에 띄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할 것이며 그에 따른 조처를 취할 것이다. (1950년 7월 27일, 미보병 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명의의 반복 명령)
AP통신이 보유한 위와 같은 19개나 되는 작전문서 외에도 피난민에 대한 무차별 발포를 승인한 문건은 더 많았다. 특히 미군 지휘사령부가 7월 25일에 피란민 대책회의를 가진 이후로 1950년 7~9월까지 3개월간 작성된 문건들을 보면 피난민을 향해 총격을 가하라는 명령문들은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공군의 경우에는 육군의 지상전투상황의 답보상태나 소강상태와는 상관없이 이북 전 지역을 대상으로 융단폭격을 가했으며 “피란민이 8명 이상 눈에 띄면 적군으로 간주해서 공격하라”는 내용의 문서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군 지휘부는 북측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전투지침을 내리는 한편 북진을 하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가 공산주의자니 조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실제로 미군들은 38선을 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사살하려 시도했다.
날이 갈수록 미군들의 눈에는 군인과 민간인 구분이 안됐기에 남과 북, 우익과 좌익, 민간인과 군인을 쉽게 구별하지 못했고 모호해져갔다. 결국 미군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민간인들 앞에서는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고 그러한 위험 요소는 제거돼야 마땅했기에 그런 전투지침을 받은 상태에서 3대대원들은 신천 땅에 투입된 것이다.
대량학살은 3대대가 신천에 입성한 날에 본격적으로 시작
NARA의 문서상에는 1950년 10월 18일 신천에 머문 미군 병력은 24사단 19연대 3대대의 2개 중대였고 나머지 주력군들은 다시 예정대로 북진했다. 뒤에 남은 3대대 병력은 북진한 주력군의 안전을 위해 경계업무를 담당하면서 신천 지역의 정황을 상부에 비교적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신천에서 발생한 사태는 미군 3대대가 주둔한 18일부터 본격적으로 대량학살로 이어지게 된다. 전세가 어느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지 않았던 좌익과 우익간의 닷새간의 치열한 혈전은 19연대 3대대원들이 신천에 도착하며 마무리 됐다.
우익세력이 이날을 자신들의 승리의 날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다. 좌우의 치열한 싸움이 왜 미군이 주둔하면서 갑자기 우익의 승리로 마무리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미군이 우익들을 도와 좌익으로 몰린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상상을 초월한 전대미문의 살육전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신천에 주둔한 미군은 반공 봉기사건의 방관자나 감독자 역할이 아닌 학살의 직접적인 주체로서 개입했던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월남한 우익 인사들 중에는 신천에 주둔한 미군 병력이 1950년 12월 초까지 머물렀으며 심지어 12월 6일에도 우익세력과 미군에 의한 집단 학살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결국 미군이 신천군에 주둔한 자체가 우익반공 세력들의 활동에 큰 힘과 배경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좌익과 부역자들을 색출하며 학살을 확대한 미군들
10월 13일 저녁, 신천에서 발생한 좌익과 우익세력들의 무차별적인 공세에서 시작된 피의 학살은 미군이 신천에 입성하여 개입하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양상이 되었다. 좌우의 참혹한 싸움판에 개입한 미군은 불붙어 있던 학살 사태를 묵인하거나 방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태를 공평하게 진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우익세력 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좌익들의 가족들과 부역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집요하게 색출하여 학살을 감행했던 것이다.
미군의 그 같은 행동들은 우익세력들의 살인 감정을 더욱 고무시켰으며 피는 피를 부르는 원리에 따라 그날 하루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민간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했다. 결국 신천에 미군이 도착한 18일, 그날 미군은 반공우익 세력과 치안대에게 일방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현재 NARA에 있는 미 24사단 민정담당 보고 문서에는 미군이 신천을 지나갔다는 10월 18일 이후에도 신천에 관한 문서가 작성되어 연속으로 상부에 전달됐고 작성자는 민정 담당관으로 표기 되었다. 10월 24일자 문서에는 당시 신천지역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던 반공 봉기군 지휘관이었던 신상규(sin sang kiu)에 대한 정보를 비롯해 신천군의 인구와 식량 상태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으며 비단 신천뿐만이 아니라 황해도 전 지역에 걸친 광범위한 조사 결과가 망라되어 있었다. 이처럼 신천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려면 누군가는 계속 신천에 주둔해서 활동하며 조사해야 했다.
이를 입증하듯 월남한 반공우익 인사들 중에는 2가지 중요한 단서를 증언해 주었다. 첫째는 18일 이후에도 미군들이 통역관을 동반하고 신천에 계속 남아서 치안을 통제하고 있는 장면을 분명히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신천에 있던 미군들은 주민들의 복장으로는 피아를 구분할 수 없었기에 같은 편인 우익 민간인들을 포함해 눈에 띄는 민간인들은 검문을 통해 무조건 두 손을 들게 하여 소지품들을 빼앗는 등 철저한 조사를 통해 혐의가 없는 사람들만 풀어주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미군이 들어온 지 한 달이 훨씬 지난 11월 30일에도 신천에서 미군을 목격했으며 당시 희생당한 반공 봉기군들의 합동장례식이 열리던 날에도 재령과 신천에서 미군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이 두 가지 증언을 통해 미군 방첩대원들이 신천 일대 지역에 주둔하며 계속해서 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미군 방첩대원들은 계속 민간의 동태를 살피며 상부에 보고서를 제출했고 그들의 지휘관들은 신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다는 결론이 난다. 이처럼 미군 방첩대는 신천에 계속 주둔하며 악몽의 학살을 지속적으로 기획하며 집행하는 주체세력이 되어갔던 것이다.
미군과 연합군의 참전이 결정된 직후 이승만은 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이양했고 그 시각부터 전쟁의 법적 당사자는 미군과 인민군의 대결로 바뀌었기 때문에 미군은 이처럼 특수 점령지역인 신천의 상황을 예민하게 파악하며 직접 개입했던 것이다.
국제법상 전시에 정상적인 전투행위로 적군을 사살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전쟁 중 발생한 무고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학살은 제네바, 헤이그 협약에도 위배되는 매우 중대한 반인도적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국과 유엔은 신천학살에 대해 함구하며 범죄사실을 묵살해왔다. 분단 70주년을 맞은 이런 시점에서 객관적이고 올바른 진상규명을 위해 남과 북과 해외동포가 모두 함께 힘을 모은다면 평화적인 남북통일의 기운을 싹트게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대학살(Holocaust)이라는 것은 근대성과 배치되는 단어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 문명의 보편적 현상으로 뿌리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미국의 역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한 첫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고한 민간인 학살로 면면히 이어져왔다. 미국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영토를 빼앗고, 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노동력을 빼앗고,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자원을 빼앗아 그것들을 근간으로 지금까지 경영되고 유지되어 왔다.
근래의 한 예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영토 내에 대량 살상무기가 있다는 날조된 거짓말로 침략을 정당화했으나 결국 이라크에는 대량 살상무기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애꿎은 민간인 수만 명이 미군의 학살적 만행에 참혹하게 죽어갔다.
미국은 이 같은 방식으로 6.25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한반도에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북한에 대한 왜곡된 정보와 부정적인 자료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국제사회에 퍼트리며 국제여론을 조성하여 이를 구실로 한미 합동군사훈련, 한일 합동군사훈련, 한미일 합동군사훈련 등 갖가지 종류의 최첨단 공격훈련을 실시하며 또 다시 전쟁의 기회를 찾고 있다.
동시에 미국은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북 관계를 팽팽한 군사적 대결 구도가 적절하게 유지되도록 정책을 이끌어 왔으며 핵무기와 인권을 구실로 대북 제재조치와 고립정책을 주도해오고 있다. 또한 남북 양측이 서로 화합하고 화해하려는 조짐만 보이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가차 없이 훼방하며 우리 민족 당사자끼리의 평화적인 통일 논의시도 자체를 가로막아 아시아권에서의 자국의 이익과 패권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시관을 참관하며 자료를 확인하는 내내 내가 몸서리쳤던 이유는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증오심과 적개심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태어난 조국 대한민국이 전후 지금까지 아직도 자주권을 찾지 못해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친미를 부르짖으며 미군과 미국정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전시작전권을 계속 맡아 달라며 애걸하고 있는 비극적 현실 때문이었다
신천박물관 참관기(4) 미군에 의한 학살은 아직도 진행중이었다
‘반미와 항미’보다는 ‘용미’의 지혜를 모아 ‘극미’의 단계로
해외에 살며 남북을 오가며 보니 6.25정전협정으로 휴전된 지 6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미군에 의한 한반도(조선반도)에서의 학살적 범죄행위들은 여전히 남과 북에서 진행 중에 있었다. 그 근거로 미국은 북한에 대해 아직까지 일관되게 ‘전쟁위협’은 물론 갖가지 명목으로 국제사회에서 ‘경제제재조치’와 ‘고립압살정책’을 주도하며 북한의 목을 옥죄고 있으며 이런 미국의 모습들은 북한에 대한 또 다른 유형의 집단적 학살 만행이며 명백한 인륜범죄라고 생각한다.
북한뿐 아니라 남한을 대상으로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짓밟는 미군의 만행은 더욱 심각하다. 6.25전쟁 중에 남한전역은 미군의 학살적 만행으로 몸살을 앓았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60년이 넘도록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은 가장 아름다운 지역 100여 곳에 최첨단 기지를 세워놓고 우리나라의 육지와 바다와 하늘을 점령하며 요새화하고 각종 환경오염과 자연파괴를 일삼고 있으며 강간, 살인, 방화 등 무려 10만 건에 달하는 각종 미군 범죄들을 그동안 저질러왔기 때문이다.
경남 함안의 장지리 마을에서 6.25전쟁 중에 발생한 미군폭격사건의 피해자인 황계일씨는 폭격기에서 발사한 총탄이 부친의 턱을 관통한 뒤 곧이어 자신의 눈을 뚫고 들어가 그의 얼굴 반쪽은 지금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그의 눈에는 의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눈물샘이 60년동안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다. 멈추지 않는 황 씨의 눈물을 누가 멈추게 할 것이며 누가 그의 눈물을 닦아 줄 것인가? 황 씨를 비롯하여 나의 어머니 강봉단 여사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민간인 피해자들은 반세기가 넘도록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고 살아오면서도 오히려 역사의 죄인처럼 음지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살아왔다.
특히 주한 미 공군전투부대가 전쟁 직후인 1951년부터 2005년 8월까지 경기도 화성의 매향리 사격장에서 전쟁훈련과 사격연습을 하는 동안 선량한 주민들은 사시사철, 불철주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무려 54년간 지속된 훈련의 피해와 후유증에 의한 심한 우울증, 불안증, 불면증, 외상 후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주민들의 자살률이 한 때 전국에서 최고조에 달했으며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행기 굉음과 사격소음에서 발생한 피해 때문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주민들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었으며 사격훈련 중 발생한 피폭, 오폭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와 인명, 재산피해 등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될 수 없는 미군에 의한 최악의 인권유린 행위였다.
또한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주한미군들의 각종 범죄사건들은 지난 60년 동안 끝없이 이어져왔다. 여성의 음부에 콜라병을 박아 참혹하게 살해하는가 하면 길을 걷던 어여쁜 여중생들을 장갑차로 깔아 죽이는 일들을 자행한 것에서 보이듯 미군들은 아직도 우리 겨레의 깊숙하고 은밀한 자존심까지 참혹하게 유린하고 있으며 떡잎처럼 파릇한 우리 겨레의 희망마저 깡그리 짓밟아 뭉개버리고 있는 중에 있다.
우리 민족이 분단된 지 어언 70년이 되었다. 이제 남, 북, 해외의 모든 민족 구성원들이 분연히 들고 일어서 우리나라의 참된 주인이 되어 미국이 우리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저지른 살육적 만행들과 온갖 범죄들을 세계의 양심들과 역사의 정의 앞에 낱낱이 밝혀내고 당당하게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반미(反美)나 항미(抗美)보다는 용미(用美)의 지혜를 발휘하여 마침내 극미(克美)의 단계에 진입해 우리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되찾는 일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틀러 동상을 예루살렘에 세와보십시요
원암리 화약창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정근성, 주상원 등 생존자들과 읍내 주민들과의 대화 도중에 6.25전쟁 시 9.28서울수복과 인천상륙작전 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은 정색을 하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신천군과 황해도 뿐 아니라 미군의 평양 탈환시 부녀자들과 아이들에게 저지른 온갖 종류의 범죄와 만행들은 너무도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듣기 민망하였고 때론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이북 전역에서 미군에게 피해를 입거나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최선생님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유대인들을 수백만 명이나 학살한 시틀러(히틀러)의 동상을 예루살렘 한복판에 세와두면 유대인들이 가만 있갔습네까? 그런데 남조선에서는 버젓이 맥아더 동상을 세워놓고 기념한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됩네다.”
“그거야 남측이 전쟁에서 위기에 몰리고 있을 때 맥아더장군이 나타나 도와줬으니까 은인으로 생각하거나 영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동상을 세우고 기념하는 것 아닙니까?”
“학살자들인 미제놈들과 맥아더 놈만 아니었으며 이런 비극적인 신천학살만행은 일어나자 않았을 것이고 우리 공화국 전체에서 자행된 학살만행도 결코 안 일어났을 겁네다. 인천상륙작전은 미제의 인간살륙작전의 시작이 아닙네까?”
그들은 이미 미국을 향한 적개심이 도를 넘어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화석처럼 온 몸에 굳어 버렸으며 삶의 정체성이 되어 버린 듯 했다. 서방세계와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자료를 보면 6.25전쟁 중 발생한 전체 학살사건의 가해자들은 미군을 비롯해 국군, 경찰, 그리고 우익반공단체와 비정규무장대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오히려 인민군, 빨치산,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적은 것으로 통계가 나왔다. 인민군들은 점령지역이라 해도(간혹 예외도 있었지만) 어린이와 부녀자, 노인들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배려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부와 그 후견인인 미국은 그들의 적국인 북한지역은 물론 아군 지역인 남한의 민간인들조차도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인민군과 좌익분자 소탕이라는 미명하에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하거나 묵인했다는 증거가 지금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아군지역의 민간인들에게도 이렇게 대했는데 적군지역의 민간인들은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이북지역은 민간인들만 123만명이 살해당하다
나는 6.25전쟁 중에 피해를 입은 북한지역의 정확한 통계가 알고 싶어 평양으로 올라온 후에도 평양호텔 회의실과 커피숍 라운지 등에서 김철주사범대학의 정기풍 교수와 조국통일연구원 림용철 부원장 등과 각각 만나는 자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북한의 공식적인 피해 상황을 집중적으로 질문하며 그 문제를 다루었다. 그들은 뛰어난 대남 전문가들로서 남북문제는 물론 국제정세에 대해서 매우 해박한 지식을 소유했고 예리한 분석과 논평을 내놓는 것으로 유명한 학자들이었다. 비록 북한의 시각에서 증명된 역사인식이었지만 그들의 시사 분석력은 매우 실력이 있었다.
“전쟁 중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숫자의 북조선 민간인들이 미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피해를 입었는지 거기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있습니까? 한국과 서방세계의 통계들은 저마다 다르고 연구하는 기관이나 언론들마다 입장에 따라 차이들이 많아서...”
“아, 물론입니다. 저희 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6.25전쟁) 중에 미제에 의해 피해를 입은 민간인 통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인민군들이 입은 피해는 제외하고 순수하게 주민들이 입은 피해상황을 저희가 작년(2013년)에 전승절 60주년을 맞아 유엔대표부에 있는 우리 공화국 대사관 성원들을 통해 유엔과 미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제기하였으니 참조해보십시오. 전쟁 시기에 미군에 의해 직접 피해를 입은 지역들이 공화국내에서만도 전국적으로 100여 곳이 훨씬 넘습니다.”
전쟁중 미군에 의해 피살된 민간인들과 피해상황을 기록한 북한정부의 공식문서는 3페이지 분량의 영문으로 작성되었다. ‘2013년 7월 15일’자로 발표되었으며 ‘DPRK Permanent Mission to the United Nations(주 UN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 명의로 작성되어 ‘US Crimes in Korean War(조국해방전쟁에서의 미국의 만행)’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press release(보도자료)’라고 표기된 것으로 보아 이미 미국과 유엔 외교가에 배포가 된 듯했다. 첫 페이지 문장은 “The US imperialists committed thrice-cursed genocide, destruction and pillage during the Korean war”(미 제국주의는 한국전쟁 중에 수차례에 걸쳐 대량 학살을 감행하였고,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였다.-편집자 주)으로 시작되었으며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은 “The US can by no means evade its responsibility for its criminal atrocities it perpetrated during the Korean war and should clearly bear in mind that it should be surely brought under the international laws and reprehension”(한국 전쟁에서의 이와 같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전쟁 범죄는 전쟁 시에 자행되는 각종 범죄 행위들로, 국제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는 위법 행위이며 전쟁 범죄는 침략 범죄와 인도적 범죄 행위가 모두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범죄에 해당하며 이에 대한 어떠한 시효도 적용되지 않는 국제적 중범죄임을 미제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편집자 주)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이 문건은 그 동안 서방세계가 구구각색으로 작성하여 발표한 추측성 통계에 쐐기를 박는 것으로서 북측이 대외적으로 공식 작성하여 발표한 것이기 때문에 진실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북측 용어 위주로 번역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중략).....미제가 조선의 인민들에게 저지른 만행들은 세계 전쟁 역사상 전례가 없는 가장 야만적이고 비인륜적인 A급 전쟁 범죄행위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것은 미제는 전쟁기간에 민간인 보호에 관한 국제법을 무시하거나 위반하며 잔혹한 방법으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3년의 기나긴 전쟁기간 중에 1,231,540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미제 침략자들은 황해도 신천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동안에는 전체 군민의 4분의 1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에서 401,940명 이상, 함경북도에서 82,020명 이상, 함경남도에 115,300명 이상, 평안북도에서 116,220명 이상, 평안남도에 162,180명 이상, 강원도에서 129,390명 이상, 그리고 자강도에서 64,240명 이상, 그리고 평양지역에서 157,840명 이상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북의 각 지역에서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당했다.
미제가 저지른 또 다른 흉악범죄 중에 하나는 국제법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 대량살상무기인 화학무기를 다량으로 사용해 대규모 세균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교활하게도 전염성 병균을 자신들이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이북의 절반이 넘는 곳을 대상으로 확산시켰다. 1952년 1월말에서 3월말까지 이북지역 400여 군데에 무려 700회 이상의 세균탄을 투척해 장티푸스, 페스트, 콜레라 등 각종 무서운 악성 급성 전염병 바이러스를 퍼뜨렸다. 1951년 2월부터 1953년 7월까지 그들은 강원도, 황해도와 평안남도 지방을 포함한 24개 시군과 접전지역에서 대량의 화학 무기를 사용했다
...(중략)... 이북에서 미제가 저지른 파괴와 약탈은 세계 전쟁사에서 그 전례가 없는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재난을 불러일으켰으며 ...(중략)... 평화로운 도시, 마을, 주거 주택 및 건물에 대한 무차별 폭격과 포격을 감행하여 그 도시와 마을들을 폐허로 만들었다. 미제는 564,436톤의 폭탄, 32,356톤의 네이팜탄, 587,189개의 로켓탄, 55,797개의 발연탄들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다.
또한, 50,941개의 산업시설과 28,632개의 각급 학교, 병원과 진료소를 포함한 4,534곳의 공중보건 건물과 의료시설들, 579곳의 과학 연구기관, 8,163곳의 출판 인쇄시설과 문화기관을 비롯해 2,077,226호의 주거주택들이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전국의 7,491개소의 예배와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종교시설물들이 파괴되어 사라져버렸다. 4,879km로 건설된 철도, 4,009km의 도로, 1,109km의 총 교량과 1,489량의 기관차와 4,803대의 트럭과 6,281척의 고깃배와 선박이 파괴되었으며 1,715개의 저수지와 관련 수리시설이 파괴 혹은 폭파되었고 엄청난 숫자의 인적, 물적, 환경이 피해를 입었다.
563,755헥타르 규모의 경작지는 폐허가 되었고 155,500헥타르의 논과 비경작지들이 유실되는 손실을 입었고 농가의 소 369,101 마리와 돼지 764,604 마리와 수백만 마리의 가축들이 몰살당하거나 약탈당하였다. 그뿐 아니라 국가의 중요한 문화재 유산들이 무자비하게 파괴 또는 약탈되었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고문서와 자료들, 전시되어 있던 각종 보물과 국보급 문서들을 포함한 수많은 고대문헌 자료들이 모두 40,755,640 개가 소실되거나 약탈을 당하였다...(끝)....”
위의 문건을 입증하는 6.25전쟁 중 미군에 의해 발생한 북한지역 민간인 학살사건은 아래와 같이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어 발생했다. 1차시기는 1950년 10월 1일부터 12월 중순까지 미군이 40~50일 정도 3.8선 이북을 점령한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다. 또한 그 후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51년 6월부터 53년 7월 27일(정전협정을 체결하는 날)까지 약 2년 동안 발생한 학살사건을 2차시기로 규정했다.
1차시기에 피살된 이북지역 민간인 통계
우선 1차시기에 피살된 민간인 통계를 보면 황해도가 127,367명, 강원도 30,790명, 함경도 4,430명, 자강도 1,750명, 평안도 26,011명, 평양시 16,400명이 학살되어 모두 20만명(206,748명)이 넘는 무고한 주민들이 두 달이 안 된 기간에 살해를 당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지역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황북(7곳): 송림 1,000 사리원 950, 봉산 1293, 평산 5,290 토산 1,385 (합계 9,918명)
2. 황남(12곳): 은천 5,131 은률 13,000 안악 19,072 송화 5,545 장련 1,199 신천 35,383 락연 802 재령 1,400 대탄 3,429 벽성 5,998 해주 6,000 옹진 15,000 봉천 3,040 연안 2,450 (합계 117,449명)
3. 강원도(5곳): 문천 800, 원산 630, 안변 1,500, 철원 1,560 평강 1,000 (합계 5,490)
4. 강원남도(1곳): 양양 25,300 (합계 30,790명)
5. 함북(2곳): 길주 400 학성(김책) 350 (합계 750명)
6. 함남(7곳): 단천 532, 리원 450, 북청 500, 장진 250, 함주 648, 영흥 500, 고원 800 (합계 3,680)
7. 자강도(2곳): 초산 900, 희천 850 (합계 1,750명)
8. 평북(6곳): 선천 1,400 용천 800, 정주 3,000 구성 1,000 벽천 1,400 영변 900 (합계 8,500명)
9. 평남(8곳): 개천 1,800 순천 1,200 안주 5,000 숙천 2,000 평원 1,800 용강 1,200 남포 1,511 강서 3,000 (합계 17,511명)
10. 평양시 지역(2곳): 평양 15,000 중화 1,400 (합계 16,400명)
총 합계 206,748명
이와 같이 미군사령부의 지휘 감독 하에 40~50여 일 간 미군이 이북전역을 강점하는 동안 무려 20만 명(206,748)이 넘는 민간인들이 무참히 학살되었다. 이 숫자는 미군의 노골적인 전시 전투행위나 1.4후퇴 이후의 전시 폭격으로 피살된 민간인들은 포함하지 않았으며 미군 강점 한 달 반 동안 저지른 보복적인 학살 피해자들만 다룬 것이다.
1차시기에 미군이 저지른 학살방법은 믿기지 않을 만큼 인간 이하의 잔인성과 포악성을 보여주었다. 집단 생매장은 물론 밀폐된 건물 안에 감금시켜 질식사나 굶겨 죽이는 일도 많았으며 휘발유와 장작불로 태워 죽이거나 눈알을 빼내거나 귀와 코를 도려내기도 했고 톱이나 칼로 사지를 자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수백 명을 방공호에 몰아넣고 기름불로 태워죽이며 동시에 환풍구로 수류탄도 던져 죽이는 만행은 물론 산 사람의 피부를 벗기거나 불에 달군 쇠로 지져 죽이기도 했고 멀쩡한 사람을 탱크에 깔아 죽이거나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와 함께 죽이는 범죄도 감행했다.
이 당시 가장 큰 학살 규모는 황해도 신천과 안악, 그리고 강원도 양양에서 발생했다. 전쟁 중에 미군의 범죄행위가 세계의 여론을 악화시키자 1951년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에서 진상조사단을 파견했다. 이 조사단이 황해도에서 가장 처음 확인한 곳은 19,000명이 살해된 안악이었으며 신천과 양양을 연이어 방문해 조사를 벌였다. 안악에 도착즉시 통풍할 창문도 없는 밀폐된 농가 창고에서 수백 명이 갇혀 떼죽음을 당한 곳을 목격한 조사단원들은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
신천군 초리면 월산리에서는 미군 점령 첫날 우말재 씨의 가족을 대상으로 끔직한 학살을 저지렀는데 미군은 우 씨의 손과 귀와 코를 쇠줄로 꿰어 뚫었으며 방에 있던 표창장을 이마에 못으로 박아 붙이고 죽을 때까지 고문했으며 5살부터 25살 이르는 11명의 자녀들을 모두 즉석에서 총살했다. 이를 목격한 우 씨의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말리려 하자 머리채를 잡아 나무에 매단 후 가슴을 베어냈고 심지어 국부에 막대기를 박고 기름을 부어 화형식을 하듯 살해했다.
50년 10월 25일, 사리원시에서는 MP완장을 찬 미군들이 칼을 들고 김창두 씨를 붙잡아서 목에서부터 아랫배까지 산채로 피부를 벗기다가 뜻대로 잘 안되니까 돌로 때려 죽였으며 11월 11일에는 3명의 미군들이 처녀를 윤간했는데 강간 후에는 심한 구타와 함께 목구멍으로 물을 부어 고문하듯 죽였다고 한다. 또한 미군은 당시로서는 노인 연령에 해당하는 56세 된 여인을 강간 후 살해했으며 해주시에서는 여맹위원장으로 일하던 조옥희 씨를 장시간에 걸쳐 고문하다가 갑자기 두 눈을 뽑고 얼마 뒤에는 코를 베고 마지막에는 그의 가슴을 베어 처참히 살해했다.
또한 신천에서 100여리 정도 떨어진 김지리에 살던 변난동이라는 아이 엄마는 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했다는 죄목으로 미군이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는데 그의 친정어머니가 면회를 다녀온 며칠 후에 딸의 살해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미군장교의 명령에 따라 변 씨는 우익 무장군의 총검에 의해 업고 있던 아기와 함께 꼬치에 끼워지듯 살해됐는데 이같은 만행을 저지른 당사자는 오히려 단 한 번의 칼로 두 명을 동시에 찔렀다며 자랑까지 늘어놨다고 했다. 1차 시기에는 대부분의 북한 민간인들이 모두 이런 류의 죽음을 당했다
2차시기에 피살된 이북지역 민간인 통계
또한 2차시기는 2년 동안에 걸쳐 발생했는데 이때 피살된 이북지역 민간인 통계를 보면 1차시기보다 죽음의 방법이 더욱 끔찍하며 피살자 숫자도 백만 명이 훨씬 넘는다. 황해도에서 274,573명, 함경북도에서 81,270명, 함경남도에서 111,620명, 평안북도에서 107,720명, 평안남도에서 144,669명, 강원도에서 98,600명, 자강도에서 62,490명, 평양지역에서 141,440명이 피살되어 모두 백만 명(1,022,382명)이 넘는 무고한 주민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희생자들은 이북지역에 대한 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참혹하게 피살되었다. 이로서 1, 2차시기에 학살당한 이북지역 민간인 희생자들의 숫자는 120만 명(1,231,540명)이 넘는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2차시기 피해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치열했던 전쟁은 어느덧 1951년 초여름부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전 전투의 소강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공중전과 해상전에서는 여전히 미군이 절대적 우위에 있기 때문에 공습이나 해군의 해상함포사격 등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미군은 전선이 아닌 후방지역에서 민간인들의 생업 현장을 대상으로 일방적인 해상공격과 공중포격을 감행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되고, 주민들의 생존시설들은 모두 파괴됐다. 더구나 미군과 인민군이 서로 정전회담을 진행되는 와중에도 미 공군은 북한지역 민간인과 비군사 민간시설에 대한 폭격과 살상행위를 계속 진행했고 심지어 정전협정이 실효되는 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정각의 1분 전인 9시 59분까지도 미공군은 무차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미 해군함정에서는 원산을 향해 무려 41일 동안 밤낮 없이 연속적인 무차별 포격을 했으며, 미국 해군사상 최장기간이라는 기록을 남긴 861일 동안을 포위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미 해군소장 스미스는 “원산에서는 길을 걸어 다닐 수 없고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미공군의 공격은 잔인했는데 미공군 폭격대는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민가에도 야간에 불빛만 비치면 굶주린 개가 고기를 본 듯 공격을 했다.
중국군의 인해전술이 투입되기 이전에 이미 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 등 북한의 주요 5개 도시는 쑥대밭이 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죽하면 미 극동군 공군사령관을 역임했던 오도넬은 맥아더 청문회에 출석해서 “한반도 지역 전부가 정말로 놀랄 만큼 어지럽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이름값을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더 이상의 목표물이 없어 중국군이 들어오기 바로 전에 우리는 무기를 손에서 놓게 되었다”고 증언했겠는가?
특히 평양시에 대한 초창기 기습공격은 서울이 중국군과 인민군에 의해 다시 점령된 1951년 1월 3일에 미공군 폭격부대에 의해 감행됐으며 평양시에 대한 폭격은 1월 3일 밤에 시작되어 그 이튿날 정오까지 매 15분 간격으로 소나기가 퍼붓듯 폭탄을 투하했다. 처음에는 소이탄으로 시작해 네이팜탄, 고성능폭탄, 그 후에는 더 많은 양의 소이탄과 시한폭탄을 연속적으로 투하했으며 이런 체계적인 공습 때문에 그 어떤 인명 구조작업도 불가능했고 수만 명의 주민들이 건물 잔해 속에 깔려 구조받지 못하고 질식사와 압사를 당해 죽었다. 파괴된 건물 중에는 8,000미터 상공에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적십자 표시를 해놓은 평양시내의 병원들마저도 포함되었으며 이로서 평양시내의 건물은 단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파괴되어 허허벌판이 되고 말았다.
식량이 떨어진 평양시민들은 비바람을 피할 천막이나 움막집조차 없어 오갈 데가 없게 되자 파괴된 가옥에 들어가 토굴을 파놓고 원시인들처럼 살아갔으며 도시 전체가 빈민소굴과 난민소굴이 되어 생존자들도 대부분 굶주리거나 치료를 받지 못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당시 시내 상황은 살아 움직이는 생존자보다 죽은 시체가 더 많았으며 공포에 휩쓸린 시민들은 대부분 도시를 떠났고 급기야 평양의 인구가 50만 명에서 약 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농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미공군이 투하하는 석유덩어리로 만든 신형무기인 네이팜탄의 가공스런 살상력 때문에 시골 사람들은 동굴이나 지하 방공호에 은신하며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중에서 폭발한 네이팜은 다시 산탄으로 사방에 흩어져 지상에 있는 모든 물체들을 불 태워버리고 거머리처럼 사람의 살갗에 달라붙어 온몸을 불태워버렸다. 이같은 공습에 의해 피살되거나 부상당한 이웃들과 가족들을 구조하는 동안 인마살상용 시한폭탄을 투하해 이 구조하는 인원들마저 살상하고 건물을 파괴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공군의 공습은 장마철 우기에 접어든 평양근처의 저수지와 댐을 폭파시켜 농토와 관개시설물을 모두 파괴했다. 북한지역 전체 미곡의 3/4을 생산하는 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평양근교의 5개 댐에 대한 폭격은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다. 모내기가 끝난 장마철에 댐을 폭파시킨 결과로 생긴 인위적인 대홍수로 말미암아 물살은 27마일의 계곡과 평야를 휩쓸어버렸고 대동강 물은 넘쳐서 평양시와 인근 주거지역에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혔으며 생존의 기본양식인 쌀 생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1953년의 쌀 생산량은 1949년에 비해 88%로 감소되었다.
미공군은 화학전과 세균전을 감행하는 동시에 대규모 폭격작전인 ‘교살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500대 이상의 전투기를 동원해 북한전력의 90%를 공급했던 수풍댐과 발전소를 파괴하는 등 미공군의 야수같은 전쟁범죄로 북한의 중부지역을 비롯하여 전 지역이 완전 초토화되었다. 이로인해 8천 7백동의 공장과 생산설비 등이 파괴되어 1949년에 비해 1953년은 전력공업은 26%로, 연료공업은 11%, 야금공업은 10%로, 화학공업은 23%로 감소되었으며, 철광석, 선철, 강철, 조동, 조연, 전동기, 변압기, 유산, 화학비료, 카바이드, 가성소다, 시멘트 생산시설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미군사령부는 공군의 공습과 폭격에 의해 부상당한 민간인들을 구조하는 것까지도 허용하지 않는 야비하고 파렴치한 전쟁범죄를 저지렀으며 이상과 같은 미군의 전쟁 범죄 행위들은 결코 장병들 개인 차원에서 저지른 작전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미국정부와 지도부의 계획 하에 미군사령부의 승인과 지시에 의해 감행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 맺힌 원혼들, 동굴과 터널을 빠져 나오다
앞서 다뤘듯이 6.25전쟁 중에 미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곳은 북한지역만이 아니었다. 다행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노력으로 그나마 50년 동안 철저하게 베일 속에 갇혀 있던 6.25전쟁 시 미군이 저지른 범죄와 학살적 만행들이 하나 둘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기득권을 차지한 친일 반공보수 세력들은 6.25전쟁 전부터 전쟁이 시작된 직후에 남쪽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하고서도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좌익’과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붙여 피해자들을 방치하여 왔는데 이는 망자들을 다시 한 번 학살하는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충북 단양의 곡계동굴에서 생지옥의 떼죽음을 당한 수백 명의 한 맺힌 원혼들과 충북 영동의 노근리 쌍굴다리에서 학살당한 수백 명의 원혼들이 반세기만에 서서히 동굴과 터널을 빠져 나와 밝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좌우 이념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철저하게 은폐되어 왔던 반인륜적 범죄의 실체들이 그후 하나 둘씩 밝혀질 때마다 당시 온 나라는 경악했다. 헤아릴 수 없이 드러나고 있는 미군들에 의한 피해사례들은 2015년 현재도 진행 중이다.
1999년 9월 29일 미국의 ‘AP통신’을 통해 노근리 학살만행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면서 지난 50여 년 동안 전국적으로 숨죽여왔던 전쟁 시 미군에 의한 피해자와 유족들 그리고 당시 목격자들로부터 한맺힌 절규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2000년 6월 13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전쟁 당시 남북의 500만 명 희생자 중 절반 이상이 민간인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남한지역은 피해지역이 전국 각 시도에 골고루 퍼져있는데 영동과 단양을 포함한 충청북도가 많았으며 서울, 부산, 제주, 경기, 강원,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등 80여 곳이 넘으며 북한 지역에는 100여 곳이 훨씬 넘는다. 이것은 미군이 자행한 범죄가 몇몇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북을 아우르며 한반도 전역에 걸쳐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이며 우리민족 전체를 상대로 저지른 전쟁범죄 행위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구순노모 가슴에 박혀 있는 미군의 포탄파편들
미군의 만행은 나의 가정에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우리 마을에서 실제 발생한 미군기 폭격사건은 아직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우리 동네의 사례에서 보듯이 아직도 전국적으로 6.25전쟁 중 미군의 피해를 입은 민간인들은 무수히 많다고 본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와 모친과의 관계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지금도 나는 구순이 넘은 노모를 뵐 때마다 인사를 마치고 나면 모친의 가슴을 애틋한 심정으로 어루만지는 버릇이 있는데 이런 행동의 이면에는 모친의 젖을 먹고 자라는 과정에서 형성된 나만의 특이한 멘탈리티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양평의 ‘석장리’는 예로부터 조상대대로 평화로이 살아오던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으나 6.25전쟁사에서도 매우 유명한 ‘지평리전투’와 ‘용문산전투’ 때문에 우리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양평의 지평리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발생했고 용문산전투는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51년 5월 17일부터 시작됐는데 특히 우리 마을에 피해를 많이 준 지평리전투가 발생한 원인을 보면 열세에 몰리고 있던 유엔군이 반격하면서 위협적이던 중국군의 공세가 저지되고 마침내 미군과 유엔군이 라운드업 작전을 개시하면서 당황한 중국군이 횡성과 홍천군 접경에 있는 ‘삼마치고개’와 양평의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면서 양측의 혈전이 시작됐다.
중국군은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 유엔군을 몰아내고 남한강을 도하해 서울의 남쪽을 뚫고 들어가 수도 서울을 함락하는 전략을 세웠는데 이런 과정에서 당시 서울 근교인 양평읍에서 10리 거리에 떨어져있던 우리 마을은 지형적으로 용문산과 지평리의 중간 지점에 있어 미군이 중국군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애꿎은 피해를 입은 것이다.
강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2월 보름, 황혼 무렵이 되자 어머니는 우리집 뒷곁 장독대와 부엌을 오가며 저녁식사를 장만하고 있었다. 이때 미군 지휘부에서는 도주하는 중국군들이 우리 마을에 숨어 있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착각을 했는지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 미공군 폭격기 편대가 굉음을 내며 동네 상공으로 출격을 한 것이다. 미군 폭격기들은 우리 마을을 서너 바퀴 선회한 후에 우박이 떨어지듯 동네 여기저기에 폭탄을 쏟아 붓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폭탄 중에 하나는 우리 집 장독대 부근에 떨어져 마침 이웃에 살던 주민들과 길을 가던 행인 등이 몰사하고 옆집 아주머니(쌍둥이 엄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오른쪽 팔목이 잘려 나갔다(그 후 그녀는 평생을 팔목이 없는 장애로 살아왔다). 천만 다행으로 나의 어머니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가슴에는 무수한 폭탄 파편들이 박히는 큰 부상을 입어 유혈이 낭자한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당시로서는 수술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에 읍내 병원에서 응급 지혈치료를 받았으나 퇴원을 하여 민간요법을 통해 상처들을 치료했으나 당시 상황에서 파편들은 제거하지 못해 결국 몸속에 지니며 한 평생을 살아오게 되었다.
쇳물이 들어 간 젖을 먹고 자라나다
어머니가 폭탄파편 세례를 받은 지 10년이 지나 태어난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폭탄 파편들이 박힌 가슴에서 나온 시금털털한 젖을 빨면서 무럭무럭 잘 자라났다.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여느 아이들처럼 어머니품에 안겨 무심코 가슴을 더듬다가 무언가 이상하고 딱딱한 물체가 손에 잡히면 의아스런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의 턱밑에서 질문을 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아련하다.
내가 군대를 갓 제대한 어느 날,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데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막내야, 나중에 돈 생기면 엄마 가슴을 수술해 줘야 한다. 사람은 원래 죽을 때는 몸에 쇠붙이를 지니고 죽는 게 아니란다”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 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약속대로 파편들을 꺼내기 위해 종합병원에 모시고 갔으나 의사로부터 “오히려 수술을 시도하면 이전보다 더 위험할 수 있으니 원래대로 조심하며 그냥 살아가라”는 통보만 받았다. “너무 오래된 부상이라서 파편들은 저마다 땅콩껍질이 땅콩을 감싸듯 파편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건강에는 지장이 없다”고도 했다.
진액을 쥐어짜듯 모유를 흡입하며 성장한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우리 동네 어른들과 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왜 미군이 우리 마을에 폭격을 가했는가에 대해 질문공세를 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당시는 이승복 군의 ‘반공전설’ 때문에 내 주장은 힘을 잃었고 당시 미국이나 미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철저히 금기시 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 문제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답변해주려고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냥 전쟁 중에 당한 일이니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몰래 가슴 아파하며 눈물 흘리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나는 마땅히 품어야 할 냉혹한 의문들을 품으며 자랐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내 의식의 저변에는 어느덧 내 어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미군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막연한 적개심이 싹트는 동시에 도대체 미군들은 무엇 때문에 그 같이 무모하고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가에 대한 의문점을 안고 지내왔다.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평화로운 시골마을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던 흰옷 입은 아낙네들의 무리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감행한 미군들의 무모한 어리석음과 교만을 청년기에 접어들며 단죄하고 싶었다. 이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반미를 부르짖는 진보적 유형의 애국심이 아니라 그저 소박한 나의 어머니를 향한 평범하고 작은 효심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구순 노모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평안을 확인하는 나의 행위는 내 존재의 확인일 뿐이며 모자간에만 공유하고 있는 치유의 몸부림이다. 어머니는 가슴에 미군 폭탄 파편을 맞고 그것들마저 품은 채 90년을 모질게 살아왔기에 나는 김치 냄새 풍기던 어머니의 품속과 치마폭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겨왔고 삶의 또 다른 평화지역으로 간주하며 안식처로 삼아왔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인해 나는 틈나는 대로 6.25전쟁에서의 미군의 역할과 범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눈을 뜨게 된 것이며 지금도 나는 이런 문제를 객관적으로 풀어야만 남북 분단문제와 통일문제의 매듭이 풀릴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노근리에서 베트남전까지
6.25전쟁 시 벌어진 미군학살의 진상들은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전국에서 봇물처럼 터졌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간간히 드러나고 있다. 노근리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과정에서 보듯 미국은 끝까지 책임회피와 외면 그리고 궤변으로 일관해왔다. 사실 노근리 사건에 대한 피해자의 문제 제기는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1960년 10월에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 의해 시작됐다. 피해자들은 미국방부가 설치한 소청심사위에 진상 규명과 배상을 요구했으나 심사위원회의 대위출신 법무장교는 회신문서를 통해 증거와 시효문제를 들어 요청을 거절했고 같은 해 12월에도 다시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그 후 94년 7월과 10월에도 미국 정부와 클린턴 대통령에게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했으며 미국을 상대하다 지친 유가족들은 97년 8월에 청주지검을 통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신청했으나 기각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법무부에 낸 신청도 역시 증거와 시효를 이유로 기각됐다. 계속해서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를 통해 미 국방부에 요청했으나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신만 보내왔다. 그러다가 미국의 AP통신사가 노근리 사건 관련자들의 증언과 공식기록을 확인하여 보도하여 국제적 쟁점이 되고 사회문제화 되자 미국의 대응과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이처럼 피해자나 유가족의 힘만으로 미국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며 각종 시민단체의 주도하에 전 국민적인 관심과 참여 속에 범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 남한은 물론 북한에서도 저지른 미군의 학살적 범죄행위들에 대해 통일지향적 차원에서 남과 북이 힘을 모아 대응해야 하며 이와 더불어서 남한 내부에서 6.25전쟁 시 자행된 국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진상규명을 매듭져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고 민족화합과 통일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또한 미국의 꼭두각시처럼 미군과 함께 베트남전에 덩달아 참전했던 한국군은 그곳에 민망하게도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던 과오를 범했다. 미군의 전쟁범죄에 한국군이 가담하여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진상규명도 매듭을 지어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의 씨앗이 싹트지 못하게 해야 하며 그 어떤 나라에서도 다시는 미군이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놀랍게도 베트남전 당시에는 북한의 공군도 호치민을 돕기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을 했으며 한국군이 월남군과의 전투 중에 포로로 잡히면 심문과 취조를 담당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북한 인민군이었다는 사실들은 지금도 역사의 베일 속에 가려져 왔다. 남의 나라 전쟁에 남한과 북한의 군인들이 참전해 싸우는 일은 전쟁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다.
미군의 폭탄 파편을 맞은 나의 어머니로 인해 6.25전쟁에서의 미군의 역할과 범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눈을 뜨게 된 나는 보다 객관적이고 폭넓은 시각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만 남북 분단과 통일문제의 매듭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작은 용기와 행동들이 모아지면 60년이 넘도록 짓밟혀왔던 우리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되찾는 일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신천박물관 참관기(5) 제1전시관 기독교관련 전시물들의 허(虛)와 실(實)
평양을 방문하기 위해 북경에서 합류했던 미 법무장관 출신의 진보인사 램지 클락(Ramsey Clark)은 “미군에 의한 학살범죄는 6.25전쟁에서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남북 간의 긴장을 심화시켜 분단을 지속시키고 같은 민족끼리 서로 악마화하여 적으로 간주하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최첨단무기를 보유한 주한미군은 전쟁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남한 국민들의 기본권을 위반하고 정신까지 점령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그것으로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같은 미국의 전략은 인류평화에 위반되는 범죄행위다”라고 나와 일행에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굳이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남한과 북한을 오가며 6.25전쟁 중에 미군에게 직접 피해를 당한 유족과 생존자들을 만나 구체적인 사실들을 들어왔으며 특히 이번 신천박물관 방문을 통해서는 온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또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평양시민뿐 아니라 각 지방에 거주하는 인민들과도 격의 없는 대화를 골고루 나누는 과정에서 북의 주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정신과 가치관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오늘로서 신천박물관 내부 전시실을 관람한 방문기는 마무리 하고 외부에 있는 학살현장 참관기는 다음 기회에 연재하도록 할 것이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전시실을 돌아보며 느낀 전체적인 평가와 더불어 각종 전시물에 대한 허(虛)와 실(實)을 다룰 것이며 박물관의 운영방향에 대한 발전적인 제안을 하려고 한다. 또한 그동안 신천박물관 참관기를 통해 다룬 6.25전쟁 기간과 전쟁이후 지금까지 발생한 미군의 만행과 범죄를 다루었는데 오늘 서두에는 그것에 이어 6.25전쟁 직전에 발생했던 또 다른 형태의 남북 간의 전쟁(전쟁직전의 전쟁)에 대해 잠시 살펴보며 미군관련 범죄 여부를 다루고자 한다.
순수한 인민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은 놀랍게도 1989년까지는 식량과 곡물을 해외에 수출한 국가였다. 그 당시 북의 인민들은 직업적으로는 완전 고용의 혜택, 의료분야는 무상의료 혜택을 받아왔으며 주거지는 실질적인 무상주택, 학교는 평생 무상교육의 혜택을 누리고 살아왔으나 1991년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의 붕괴와 더불어 이에 따른 무역상대국의 몰락으로 북한의 경제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계속되는 가뭄과 대홍수, 냉해를 겪어야 했으며 이런 악조건을 지닌 북한을 상대로 냉혹한 미국은 국제적으로 대북 구제정책을 펴기보다는 강력한 대북 경제봉쇄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인민들이 사망(고난의 행군시기)했으며 당시 유아 사망률은 무섭게 치솟았고 평균 수명도 1993년 73.2세에서 1999년에는 66.8세로 추락했고 5세 이하의 어린이 사망률은 1천명당 27명에서 48명으로 상승했다.
이같은 원인의 배경에는 미국이 취해온 대북 제재조치가 가장 큰 작용을 했다. 미국이 근래까지 이라크와 북한 등에 취해온 경제봉쇄 정책들은 무기에 의한 전쟁보다 실제로 더욱 잔인하고 참혹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무서움을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6.25정전협정이 끝난 직후부터 60년간 북한에 가해진 대북 경제봉쇄는 마치 대량학살무기와 동일한 파괴력을 지니며 아직도 북한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
내가 3년 전에 평양시에 있는 대동강 타일공장을 방문해 공장내부를 세밀하게 돌아본 후 부소장의 브리핑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 공장은 대리석보다 더 단단하고 성능이 뛰어난 30여 가지 종류의 타일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이 국제사회의 무역 시스템을 총 가동해 북한에 대한 수입, 수출, 통관, 은행 거래 등을 철저히 막아버려 수출할 길이 없어졌다며 부소장은 울상을 지어 보였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인권에 해당하는 식량과 의약품 문제를 볼모로 자행된 미국의 압박정책은 경제봉쇄로 확대되어 인간의 의식주와 삶 자체를 파괴하는 심각한 인류 범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학살만행은 아직도 한반도에서 현재 진행형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 북한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모두 몰락한데다가 미국의 경제봉쇄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도 김일성 주석 사후 지금까지 자체의 힘으로 단합하며 잘 견뎌왔다. 물론 일부 탈북자들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국가 정체성과 체제의 본질이 훼손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방북기간 내내 북에서 본 인민들의 모습은 매우 놀랄 정도로 차분하고 의연했다.
유사한 경제봉쇄가 가해진 이라크와 비교할 때 북한이 지금까지 갖추어 놓은 업적들과 현재의 발전적 상황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라크에서 입증됐듯 혹자는 미국이 북한을 제재하듯 프랑스와 영국의 목을 조여 왔다면 아마 영국과 프랑스조차도 힘든 상황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경제봉쇄 정책속의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북의 인민들은 매우 긍지가 높았으며 민족 정체성과 자주에 대한 정신이 살아 있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북한의 모든 제도와 시설들은 인민들을 위해 계획되고 유지되어 있었다.
6.25전쟁 직전의 또 다른 남북 전쟁
우리 민족은 1945년 9월, 미군이 남한에 주둔한 이후 지금까지 70년 동안 미 점령군에 의한 만행과 범죄로 고통을 받아왔다. 한반도에서 자행된 미군 범죄를 분류할 때 첫 시기는 1945년 9월 8일 해방직후 미군의 남한 진주 시점부터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직전까지 구분된다. 두 번째는 3년간의 6.25전쟁 기간인 1950년부터 1953년 사이, 그리고 세 번째가 정전협정이후 60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이다.
미국은 해방직후 일본의 무장해제를 빌미로 남한에 진주하여 결국 군대를 양성하고 미군을 주둔시키는 등 남한 내에서 치밀한 전쟁준비를 시작했고 궁극적으로 남한에 친미 군사정권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 기간 미군 지배하에 있던 남한의 국군과 경찰 등에 의해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으며 그들은 민족적인 양심을 지켰다는 이유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좌익으로 몰리는 등 정치적 견해 차이로 투옥되거나 무참히 처형되었다.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제주 4·3 사건과 1948년 10월 19일의 여수순천 사건, 1949년 12월 24일의 문경 양민학살 사건 등이 미국정부와 미군의 지도와 간섭 아래 국군과 경찰에 의해 자국 내에서 자행된 끔찍한 사건들이다. 따라서 당시 남한에서 자행된 각종 대규모 처형사건들도 미군에 의한 전쟁범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6.25전쟁 직전에 발생한 또 다른 남북 대결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우리나라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수백차례 이상의 갖가지 전투를 벌여왔다.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있었던 전투횟수는 총 874회였다. 그 한 예로 1949년 3월에 발생한 무력충돌은 개성 서북쪽의 송악산에서 벌어졌는데 이때의 혈전은 거의 전쟁 수준에 해당할 만큼 남북 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1949년 6월 7일에는 남한군이 북한군을 가장하여 38선 북쪽으로 부터 2킬로미터 떨어진 한 고지를 점령했고, 같은 해 6월 17일에는 38선 이북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황해도 태탄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어서 6월 18일에는 은파산을 점령했는데, 이 전투 때에는 개인 화기뿐만이 아니라 포까지 동원되었다.
이러한 전투는 모두 미군의 작전계획에 의해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해서 발생한 전투였으며 북한 측은 이런 남측의 공격에 의해 커다란 경각심을 갖게 되어 추후 남한보다 더 적극적으로 군사적 공격 태세로 무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측의 주장에 따르면, 남한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되었고 쌍방의 충돌지역은 황해도 옹진에서 강원도의 양양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로서 남북 간에는 6.25전쟁 직전에도 단순한 국지전이나 소규모 충돌이 아니라 실제로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 가운데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으며 그런 연유로 해서 이 지역들은 6.25전쟁 중에 북한 인민군이 주공격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1년 5개월간 벌어진 전투가 874회라는 것이며 경미한 충돌 사건과 월경사건들까지 포함하면 2,000여회 이상을 남북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렀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전투의 배경에는 이승만정부의 독자적인 행동이 아니라 미국 정부와 미군정 그리고 주한미주둔군과 미방첩대(CIC)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각종 문서들과 6.25전쟁 초기 인민군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 미군 사무실 등에서 입수한 공문서들에 의하면 1945∼48년 사이에 미군이 남쪽 군대를 어떻게 통제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북한지역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25전쟁이 남긴 가장 큰 상처와 결과물은 바로 남북 분단이며 미국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에 대해 분단 유지를 강요하고 압박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실도 마땅히 미국의 범죄로 단정해 책임을 묻고 민족의 존엄과 자주성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분단 70년을 맞는 남과 북과 해외동포들은 국제법상 ‘전쟁범죄’ ‘평화범죄’ ‘인류범죄’에 해당되는 미국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단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학살규명의 본질에서 벗어난 반기독교적 게시물은 철거해야
나는 신천사건의 발생 원인과 신천지역 기독교인들과의 연루 여부를 앞서 다뤘다. 그러나 제1전시관 초입에 진열된 불필요한 반기독교적인 전시물들을 보면서 이런 것들은 오히려 학살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호도할 수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몹시도 마음이 불편했다.
‘종교의 탈을 쓰고 조선에 기어든 미국 선교사 일당’이라는 설명 문구를 넣은 장면에는 양복을 입은 조선 최초의 선교사들인 언더우드, 아펜젤라 등 4명의 선교사들 사진이 편집되어 있었고 ‘조선옷 차림으로 위장한 미국선교사 언더우드와 그 심복자들’이라는 문구가 쓰인 또 다른 사진 속 장면에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교회를 설립한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언더우드 목사의 아들인 원한경 박사와 함께 삿갓과 두루마기를 입고 찍은 장면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시실 유리관 안에는 각종 성경책과 찬송가, 소책자, 십자가 목걸이와 천주교 묵주 등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우리 인민들 속에 숭미, 공미사상을 퍼뜨리기 위하여 미국 선교사놈들이 리용하던 성경책, 찬송가, 십자가’라는 설명문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1전시관안의 이러한 기독교 관련 진열품과 게시물들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사용했다는 법적 증거물이 될 만한 물건들은 전혀 아니었다. 특히 유리관속의 성경책들과 십자가 장식물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선교사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반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진열품들이었다.
지금 내가 당장 시급하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종교적인 자료이든 아니든 간에 학살사건과 직접 연관됐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자료들과 납득할 만한 증거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관 벽면이나 진열장에는 학살 사건과는 무관한 반기독교적인 전시물들이 연달아 보였기에 결국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이다. 그 동안 간혹 이곳을 방문했던 해외동포나 남측 인사들 중에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이곳에 전시된 반기독교적인 전시물들을 보며 거부감과 오해를 품고 돌아가기도 했다.
전시물들은 철저한 고증과 검증을 통과한 것으로
한국에서 활발하게 진보적 시민사회운동을 하던 서경석 목사는 신천박물관을 방문하고 나서 반감을 품은 채 귀국해서 오히려 철저한 반북 활동가가 된 케이스에 해당된다. 서 목사는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왜 극우보수로 돌아서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며 그 원인 중에 하나가 신천박물관측의 잘못된 전시물들을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우리나라 최초의 자생적 개신교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松川理)’에 세워진 ‘소래교회’였는데 이 교회는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83년 5월 16일에 서경석 목사의 증조부가 되는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거주하던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시작되었다. 소래교회는 외부세력의 도움 없이 순수한 우리 선조들의 자력에 의해 세워진 조선교회의 뿌리가 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런 증조부를 두고 있던 서목사가 신천박물관 제1전시실을 둘러보다가 자신의 증조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사진 속에는 삿갓을 쓴 서목사의 증조부 형제와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목사의 아들이 함께 찍은 장면이 있었는데 이 사진이 전시실 벽에 걸린 이유는 신천 학살사건과 결부시키려는 북측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해설사는 한술 더 떠 “미제 양키는 황해도 지역의 주민들을 몰살시킨 우리 인민의 원쑤이고 기독교와 선교사들은 그 놈들의 앞잡이”라며 우렁찬 해설까지 곁들여 주니 서 목사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황당함과 분노를 느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직계 증조부들의 교회사적 업적이 이곳에서는 엉뚱한 용도로 사용되는 실상을 목격하자 충격을 받고 즉각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 사건 이후 서목사가 한국 언론에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박물관 측에서는 해당 사진자료를 떼어 내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직도 그 사진 게시물을 떼어내지 않고 있다”며 인터뷰 중에 불만을 표출했다. 실제로 서목사가 지적한 그 게시물은 내가 이번에 방문할 때도 여전히 벽면에 붙어 있었다.
기독교 복음이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역사적 사실과 최초의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와서 행했던 역할들은 박물관 측에서 주장하는 내용과는 실제로 많은 차이가 있다. 설령 신천학살사건에 당시 미군에서 활동한 군종장교들이 직접 연관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120년전 이 땅에 들어 온 서양 선교사들의 역할과는 무관하다. 또한 박물관 측이 학살자로 지목하는 미군 군목(채플린) 연루설은 그에 따른 논리적 증거물들과 과학적인 설명을 박물관 측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자료적으로 뒷받침해 줘야한다.
그럼에도 아직도 제1전시실 초입에는 반미를 뒷받침하기 위한 명목으로서 반기독교적인 게시물들을 전시한다면 학살사건의 주체와 원인을 규명하는 일에 방해가 되거나 장애요인이 된다고 본다. 신천 박물관 측에서는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학살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난 전시물들과 게시물들은 엄격히 선별해서 신속히 철거해야 하며 기존의 전시물들도 하나하나 철저한 검증을 통해 진열해야 하며 전반적으로 전시실의 자료 보완작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징기념관과 유대인기념관처럼 자료수집과 추모사업에 중점을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신천박물관을 직접 참관한 인원이 무려 1,600만 명, 박물관 강사들로부터 이동식 강의를 들은 인원이 425만 명이라고 한다. 연인원이 무려 2천만 명이나 되는 각계각층의 엄청난 인민들이 그동안 박물관을 통해 반미, 반기독교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기독교적인 강조가 북의 주민들에게는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해외동포나 남측 동포들에게는 오히려 반감과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통일시대를 앞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반기독교 정서를 주입하는 교육이 박물관의 존재 이유처럼 느껴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의 난징대학살희생동포기념관(이하 난징기념관)에 가면 입구에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可以寬恕, 但不可以忘却),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의 스승으로 삼자(前事不忘, 后事之師)” 라는 글귀가 있으며 매년 12월 13일이 되면 중국 인민은 학살당한 30만 명의 희생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특히 지난 12월에는 추모일을 앞두고 미국, 일본, 영국 등 14개 국가의 협조를 받아 일본군이 사용하던 각종 학살관련 군용장비, 보도영상 등 새로운 증거 자료들 7,602점을 수집하여 공개했다. 중국 정부도 국가기록보관소를 통해 17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사이트에 올려서 일제의 학살 만행을 고발하는 영상을 공개했는데 이 영상에는 일본군이 중국인 임산부를 37번이나 난도질한 사실과 휘발유를 이용해 중국인들을 화형에 처한 내용들이 포함됐다.
중국판 홀로코스트라고 할 수 있는 난징기념관처럼 이제 신천박물관도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해 좀 더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자료수집과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사업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난징기념관 외에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학살기념관인 야드바셈(Yad Vashem, 이름을 기억하라)의 운영방식도 신천박물관 측이 적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라는 표어아래 야드바셈의 입구에는 “망각은 포로상태를 이어지게 한다.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이 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로부터 학살당한 유대인 600만 명을 추도하기 위해 1953년에 건립됐고 2005년도에는 무려 5,600만 달러를 다시 투자해 10만 평의 부지에 역사관을 세우고 재개관을 했다.
기념관 캠퍼스에는 추모탑과 전시관, 역사관은 물론 어린이 희생자들만을 별도로 추모하는 어린이 추모관등의 시설물이 자리 잡고 있으며 어두운 실내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으며 천정부터 바닥까지 어린이의 희생을 상징하는 숫자의 촛불들을 밝혀주고 있다. 이처럼 신천박물관도 일일이 모든 희생자들에 대한 세밀한 정보와 자료를 입수해 구체적인 추모 사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본다.
가해자의 공식사죄와 추모방문을 꿈꾸며
독일 국민들은 2차 대전이 끝난 50년 만인 2002년에 사상 최초로 국가원수인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이스라엘 의회 연설을 통해 이스라엘 국민들과 전 세계 유대인 디아스포라 앞에서 진심으로 사죄함으로써 과거사 청산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이날 독일 대통령은 “나치에 의해 학살당해 용서를 빌 수 있는 무덤조차 없는 고인들에게 진심으로 조의를 표합니다. 과거 독일인들이 저지른 행위와 저와 저의 세대의 잘못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분명하게 사죄했다.
그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독일간의 수교 20주년을 기념해서 당시 독일의 퀼러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바로 야드바셈 기념관이었다. 그도 역시 기념관에서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감히 기념관 안에 들어갈 용기가 생기지 않으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다”라고 고백했다.
이듬해인 2006년 1월에는 현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학살기념관을 찾아가서 “과거를 아는 사람만이 미래를 가질 수 있다”는 문구를 방명록에 남기며 깊이 사죄했으며 그 후 2012년 5월에는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을 보내 추모하게 했다. 이처럼 독일은 국가의 역대 지도자들이 의무적으로 방문하도록 하는 관례를 두면서까지 유대인 희생자들을 진심으로 기리고 있었다.
이처럼 독일은 자신들의 부끄럽고 추악한 과거의 흔적들을 감추기보다는 아직도 사건 당시의 홀로코스트 수용소를 철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기념관을 세웠으며 희생자들에 대한 금전적 배상을 아직까지도 자발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중에 있다. 이들 독일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미국과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대통령들을 떠올리며 하루 빨리 미국의 양심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무엇보다 독일이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죄과를 인정하고 무릎 꿇게 된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국력과 국민적 단합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사진에서 보듯 미국은 유대인학살과 직접 관련이 없으면서도 오바마 대통령은 자발적으로 기념관을 찾아가 추모와 헌화를 하면서도 아직도 미국에 의한 6.25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과 반응이 없다. 아베 일본 총리 역시 위안부나 징용군에 대한 사과나 난징학살에 대한 언급은 피하면서도 유대인기념관에 자발적으로 추모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해 독일도 구구하게 변명할 여지가 많았을 것이다. 2차 대전이라는 전쟁 중에 피치 못하게 발생한 사건으로 몰고 간다면 얼마든지 발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이스라엘 국민의 단합된 모습과 국력 앞에서 그리고 역사의 정의와 양심 앞에서 철저히 자신들의 죄과를 인정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남북의 희생자 모두를 위한 기념관으로 확산되기를
앞으로는 신천박물관도 ‘피의 교훈’은 잊지 말되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와 적개심보다는 미국이 학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관여했다는 과학적인 자료수집에 몰두해야 하며 동시에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사업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학살사건에 미군이 개입한 부분을 ‘반미구호’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미 국립문서보관소 문서들과 각종 관련 자료들을 입수하는 프로젝트를 세워 철저한 자료 확보와 체계적인 증명 작업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미국은 제시된 자료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죄과를 시인하고 사죄와 보상을 논의하는 단계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 학살박물관인 야드바셈에서는 지금부터 10년 전에 무려 2,200만 달러(약 230억 원)를 투자하여 피살당한 유대인 320만 명의 명단과 신상정보를 구체적으로 입수해 1차적으로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이 신상정보 자료에는 희생자들의 이름, 생일, 주소 사망일과 생전의 사진, 일기, 편지, 가족과 친척, 수용소로 끌려갈 때 탑승했던 열차번호와 수용소에서 받은 수인번호까지 모두 보관되어 있으며 누구나 사이트에 접속하여 사망자의 이름만 검색하면, 고인들의 생전의 자취와 신상명세는 물론 희생자의 평소의 버릇과 연인은 누구이며, 첫 데이트 장소와 마지막 남긴 말까지 모두 담겨 있다고 한다.
이 방대한 자료를 구축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유가족과 친구들과 이웃들은 물론 관계된 인물들을 모두 탐문하여 철저하고 객관적인 자료들을 지속적으로 수집했다고 한다. 이처럼 신천박물관도 희생자와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많은 재정과 시간을 투자해서 희생자들에 대한 자료 확보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부터 15년 전에 미군이 저지른 신천사건과 6.25전쟁범죄를 다루기 위해 남과 북, 해외동포가 함께 힘을 합해 ‘전민특위’를 구성하여 2001년 6월 23일이 되어서야 ‘코리아 국제전범재판’을 뉴욕에서 열었다. 비록 이 재판이 국제여론을 크게 이끌지는 못했고 UN과 ICC(국제형사재판소) 등 공신력 있는 국제기구에 의한 법적인 제재와 구속력은 얻지 못했어도 미국 측에 충분한 경종을 울렸다고 본다.
앞으로도 미 법무장관을 지낸 램지 클락을 비롯해 국제행동센터(IAC)의 브라이언 베커,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르녹스 하인즈 U.N상임대표, 평화를 위한 미재향군인회장인 브라이언 윌슨, 미국 헌법권리센터(CCR)의 대표 마이클 래트너 등 양심 있는 미국의 법조계 인사들과 반전 및 평화단체, 인권단체 등과 연대 협력해야 한다. 미국 내에서 신천학살 문제를 인정하는 지성인들과 시민들이 주축이 돼 신천사건과 6.25전쟁 중에 일으킨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민적 이슈와 열풍이 자국 내에서 거세게 일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미국정부의 사죄와 보상은 물론 책임자 처벌에 대한 길이 열릴 것이며 유대인학살 기념관에 독일 지도자들이 정식으로 사죄하듯 미국 지도자들도 직접 우리나라를 찾아와 사죄와 추도를 하는 날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또한 신천박물관과는 별도로 남북 간의 합의하에 6.25전쟁 중에 희생당한 모든 민간인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서울과 평양의 한복판에 각각 설립하여 민족화합과 유대협력의 차원에서 동족의 상처와 아픔을 서로 함께 나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현재 평양에는 ‘전승기념관’이 있고 서울에는 ‘전쟁기념관’이 있으나 통일지향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기념관들은 상대방을 군사적으로 제패했다는 의미의 ‘군사적 전쟁 승리사’의 차원에서 설립한 것이기에 민족화합 차원에는 도움이 안 되는 실정이다.
만일 남북의 모든 민간인 희생자 기념관이 건립된다면 우리민족은 자체적으로 6.25전쟁의 참된 의미를 사로 공유할 수 있을 것이며 짓밟힌 우리 민족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회복하여 평화통일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남북은 더 이상 서로 대적하며 국력을 소진하지 말고 6.25전쟁 기간 중에 남과 북 전체 영토에서 자행된 미군의 만행과 범죄에 대한 공동 규명작업을 마무리하여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남북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 책임자 규명과 사죄문제에 대해 깊이 논의하면서 동시에 남북이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용서와 치유의 한 마음을 품는 날이 빨리 다가오기를 소망한다. (끝)
종교와 사상은 부모와 자식 사이도 갈라 놓는다는 말이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 사랑을 품지 않은 신념은 이처럼 참혹한 결과를 낳는다
Puerto Montt - Patricia Salas
'세상과 어울리기 >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본주의 (0) | 2018.05.18 |
---|---|
삼성 혹은 삼성전자가 몰락해도 한국이 사는 길 外 (0) | 2018.05.13 |
슬픈 쌍둥이의 눈물 김현희 (0) | 2018.05.09 |
한국인의 발견 (0) | 2018.05.07 |
돈의 철학 (0) | 2018.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