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삼성 혹은 삼성전자가 몰락해도 한국이 사는 길 外

by 이성근 2018. 5. 13.




삼성전자가 몰락해도 한국이 사는 길 저자 박상인|미래를소유한사람들 |2016.02

노키아와 핀란드 사례를 통해 본 삼성의 미래, 한국의 미래

 

저자 박상인은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개혁론자이다. 정부 주도-재벌 중심의 발전 전략이 한계에 도달했으며 한국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복지제도가 구비된 사회통합적 시장경제체제의 정립이라는 과감한 제도 혁신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6년부터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대학(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STONY BROOK)에서 경제학과 조교수로 재직했다. 2003년 서울대학교에 부임한 후 행정대학원 교수와 시장과 정부 연구센터 소장으로 재임 중이다.

 

주요 저서로 벌거벗은 재벌님(2012)이 있으며, 한국의 기업지배구조 연구(2008), 한반도 경제공동체 그 비전과 전략(2009), 방송통신 정책과 쟁점(2011), STRATEGIES AND POLICIES IN DIGITAL CONVERGENCE(2004) 등의 공저서, REVIEW OF ECONOMICS AND STATISTICS, JOURNAL OF ECONOMETRICS등을 비롯한 국내외 저명 학술지에 게재한 다수의 논문들이 있다

 

목차

머리말

 

1부 노키아의 기적

1. 핀란드의 역사

2. 노키아의 탄생, 성장 그리고 시련

1) 노키아의 탄생과 성장

2) 내우외환의 시기

3. 노키아의 기적

1) 기적을 이룬 노키아

2) 노키아의 성공 요인

3) 노키아의 전략적 변신

 

2부 노키아의 몰락

1. 노키아는 알고 있었다

1) 노키아는 기술혁신에 과감히 투자했다

2) 노키아는 스마트폰의 선구자였다

3) 노키아는 콘텐츠의 중요성도 알고 있었다

2. 노키아 몰락의 과정

1) 노키아 2006

2) 아이폰의 등장

3) 휴대폰 시장의 지각변동

4) 노키아의 몰락

3. 노키아는 왜 몰락했나

1) 과거의 성공 전략이 혁신의 장애가 되었다

2) 기득권이 우선시 되었다

3) 비대해지고 관료화되었다

4) 소결: 노키아의 몰락은 창조적 파괴 과정이었다

4. 노키아 몰락이 핀란드 경제에 미친 영향

1) 2010년 노키아와 핀란드 경제

2) 고용과 실업률에 미친 영향

3) 연관 산업에 미친 영향

4) 지역 경제에 미친 영향

5) 금융 시장에 미친 영향

6) 소결: 노키아의 몰락이 핀란드의 경제위기로 전이되지 않은 이유

*노키아의 브릿지 프로그램

*핀란드 정부의 창업 지원 정책

*핀란드의 실업보험제도

 

3부 삼성전자는 제2의 노키아?

1. 삼성전자의 폭풍성장

2. 삼성전자와 노키아의 닮은 점과 다른 점

1) 성공요인

2) 부품 공급망 관리와 기업 조직

3) R&D와 인수합병 전략

4) 휴대폰 사업의 중요성

5) 수직계열화

6) 소유지배구조

3. 삼성전자 몰락에 대한 예측

1) 창조적 파괴의 가능성

2) 스마폰 시장의 양극화

3) 사업다각화

 

4부 삼성발 경제위기 가능성

1. 삼성그룹에 의한 경제력 집중의 심각성

1) 삼성 재벌의 경제력 집중

2) 경제력 집중의 폐해

2. 삼성전자 위기의 전이 구조

1) 수직계열화와 내부거래 규모

2) 삼성전자 위기의 전이 시뮬레이션

3) 삼성 리스크

3. ‘삼성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1) 삼성 리스크에 대비한 최소한의 장치

2) 이스라엘의 재벌개혁

3) 더 미룰 수 없는 재벌개혁

 

참고자료

부록_출자구조도 범례

 

 

삼성전자가 망하면 한국은 어떻게 될까?

한때 노키아는 핀란드의 상징이었다. 노키아는 1994년 이후 휴대전화 제조업체로 변신해 핀란드 역사상 최초로 초일류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1995년 핀란드 국내총생산(GDP)1.1%였던 노키아의 부가가치 생산액 비중(GDP 점유율)20004%로 훌쩍 커졌다. 노키아의 매출액은 한때 핀란드 GDP3.8%에 달했다. 세계는 핀란드를 두고 '단일 기업 경제(one firm economy)' 체제라고 불렀다.

 

이런 노키아가 망했다. 애플의 스마트폰 패러다임 혁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방황하던 노키아는 결국, 2013년 그룹의 핵심인 휴대폰사업부를 379000만 유로로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했다.

 

핀란드 경제는 어떻게 됐을까.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을까. 아니다.

2012년 이후 핀란드의 경제 성장률이 유럽연합(EU) 평균보다 낮고, 마이크로소프트가 결국 노키아로부터 인수한 휴대폰 사업 부문을 지난해 폐쇄함에 따라 앞으로 새로운 실업 대란이 일어날 위험이 상존한 건 맞다. 따라서 일부에서 나오는 '노키아가 무너진 후 핀란드 경제가 오히려 살아났다'는 주장은 거짓에 가깝다.

 

하지만, 생각만큼 핀란드 경제가 당장 큰 충격을 입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로비오(휴대전화 게임 앵그리버드 제작사)와 같은 스타트업 창업 붐이 핀란드에 일어났다. 300명이 노키아 전직 직원이 '이노베이션 밀'이라는 상생 프로그램을 통해 창업에 성공했다. 2013<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노키아가 수준 높은 엔지니어 1만 명을 사회로 내보냄에 따라 핀란드의 창업 활동이 활발해졌음을 조명했다. 노키아 쇠퇴가 시작한 2008년 이후 핀란드의 실업률은 소폭 상승했으나, 2011년 이후에는 오히려 안정화됐다. 특히 EU의 다른 나라에 비해 청년 실업률은 오히려 낮다.

 

우리는 노키아처럼 절대적 규모를 가진 기업이 망한다면 국가 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려야 할 것이라 믿기 쉽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기업 지배 구조의 차이 때문이다. 노키아는 재벌 기업 집단이 아니었다.

 

<삼성전자가 몰락해도 한국이 사는 길>(미래를소유한사람들 펴냄)은 재벌 개혁론자인 박상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가 노키아 사례를 통해 한국의 초일류 기업인 삼성전자가 무너질 경우,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하고, 미리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함을 촉구하는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을 술술 따라가려면 우선 이 책은 '삼성 망하라는 소리'라는 편견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도 의문은 생기리라. '노키아는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지만, 삼성이라고 그러라는 법은 없잖은가'라는 식의 물음이다. 이 의문은 틀렸다.

 

박상인 교수는 기업이 망하는 건 노화와 같다고 단언한다.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소리다. 사람의 노화를 방지할 수 없는데, 노화를 막는 방법을 연구하자는 건 헛소리다. 노화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책은 노키아 사례를 다시 언급하며 논리를 보강한다. 노키아는 하이테크 산업에서 기술 혁신이 시장 질서를 바꿀 것이며, 이에 선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키아는 일찌감치 기술 혁신에 과감히 투자했다. 심지어 (우리의 편견과 달리) 스마트폰 시장을 가장 앞서 개척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노키아는 어느 제조업체보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무너졌다. (노키아가 무너진 자세한 이유는 책을 보면 충실히 설명된다.)

 

박상인 교수는 대형화한 기업은 반드시 관료 체제의 부작용에 시달리게 되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진정한 혁신이 불가능한 조직이 된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삼성 역시 다를 바 없다. 관료적 관리 체계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삼성그룹 특유의 조직 문화다. 삼성이 무너질 상황에 국가적 대비가 필요한 이유다.

 

왜 그렇다면 굳이 삼성의 몰락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하는가. 일단 삼성전자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2012년 세계 스마트폰 시장 최정상에 오른 삼성은 불과 2년 후, 추락을 시작했다. 지난해 1월 공시를 보면, 삼성전자의 2014년 매출액은 2066100억 원으로 전년보다 9.83%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무려 31.97% 급감했다. 삼성전자가 신성장 동력을 찾는데 힘겨워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경제 뉴스의 단골 소재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한국 경제가 삼성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데 있다. 한국의 삼성 의존도를 보면, 노키아 사례는 약과다. 2014년 말 기준 삼성그룹의 총매출액은 약 303조 원이며, 자산총액은 623조 원이다. 같은 해 한국의 GDP1485조 원이었다. 삼성그룹의 매출액은 GDP 대비 20.4%이고, 자산총액은 GDP 대비 42.0%. 삼성그룹 18개 상장 계열사의 시가총액은 20158월 말 기준 전체 시가총액의 20.4%에 달한다. 2013년 삼성그룹의 GDP 점유율은 4.7%에 달했다. 이는 최전성기 노키아의 점유율(4.0%)보다 크다. 한국이야말로 진정한 '단일 기업 경제' 체제인 셈이다. '삼성 공화국'은 결코 정치적 수사이거나, 과장된 헛말이 아니다.

 

박상인 교수는 삼성전자가 휴대폰 사업 경쟁력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면 일어나는 일을 시뮬레이션해 책에서 보여준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한국은 핀란드와 달랐다.

 

휴대폰 판매 부진 등으로 인해 삼성전자 주가가 최전성기 대비 70% 하락할 경우, 삼성그룹 지배 체제의 핵심 고리인 삼성생명과 삼성물산 주가도 각각 70%, 63% 급락한다. 이 영향으로 인해 삼성전자 주가는 추가 하락해 최후에는 87%까지 하락한다. 이는 사실상 삼성그룹 핵심 상장사의 파산을 의미한다.

 

삼성그룹만의 파산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선, 하청업체가 줄도산한다. 박상인 교수는 역시 대략적인 통계 추정을 통해 우리나라의 삼성그룹 하청기업 노동자 수를 약 152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들 기업이 모두 도산한다면,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약 7.1%포인트 급증하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로 이어지는 금융 계열사 몰락은 국내 보험 산업 전체의 몰락으로 퍼진다. 총보험료 규모로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각각 생명보험 보험료의 23%, 손해보험 보험료의 25%를 차지한다.

파문은 여기서 끝나지도 않는다. 삼성전자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무너진다. 예상되는 기금 손실 규모는 약 19조 원이다. 이 손해는 정부 재정으로 메워야 한다. 법인세수도 무너진다. 삼성그룹이 법인세를 납부하지 않을 경우, 법인세수는 약 20%포인트 줄어들게 된다.

 

은행 부실도 필연적이다. 주식 시장 전체가 무너지는 것 역시 불을 보듯 뻔하다. 삼성전자의 몰락은 곧 삼성그룹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이는 국가 경제 마비로 연결된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전개된다.

 

왜 핀란드와 한국은 다른가. 박상인 교수는 명쾌히 단언한다. 우리나라의 재벌 지배 구조 체제 때문이다. 총수 가문의 그룹 지배를 위해 누더기처럼 정비된 그룹 핵심 계열사 간 순환 출자 체계와 무늬뿐인 지주회사 체계로 인해 개별 기업 리스크는 순식간에 그룹 전체로 퍼진다. 삼성그룹처럼 막강한 글로벌 기업의 위기로 인한 피해는 자연히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책은 후반부에 이르러 확신에 찬 대안을 제시한다. 재벌 기업에 대한 경제력 집중을 과감히 금지해야 한국 경제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단언한다. 구체적 사례로 박상인 교수는 2013년 만장일치로 의회를 통과한 이스라엘의 '경제력 집중법(Concentration Law)'을 든다.

 

이 법은 크게 3가지 개혁 내용을 담고 있다. 기업 소유 지배 구조 개선, 금산 분리, 경제력 집중 우려 기업의 참여 자격 위원회 설립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법이 통과됨에 따라 앞으로 이스라엘 기업은 '지주회사-자회사' 2층 구조의 지주회사 체제 지배 구조만 가질 수 있다. 한국처럼 손자회사의 존재까지 모조리 인정하는 느슨한 지주회사법과는 차원이 다르게 엄격하다. 또 자산이 400억 세켈(136100억 원)을 초과하는 은행, 보험사,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의 금융기관과 비금융회사를 동시 보유하는 것을 금했다.

 

아울러 경제력 집중 우려 기업으로 지정된 대기업이 공기업의 민영화, 주요 공공 입찰, 라이센스 획득 등에 참여하려 할 경우, 허용 여부를 권고하는 독립적인 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도록 시장 참여까지 제한했다.

 

박상인 교수는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개혁 조치와 미국의 역대 강력한 규제 정책을 예로 들며, 지금이라도 '삼성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과감한 재벌 규제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삼성 리스크가 현실화한다면 한국 경제와 사회는 1997년의 경제 위기 당시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겪을 수 있다"며 최악의 경우 "경제위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남미형 사이클로 전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 책은 삼성을 저주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핵심은 국가적인 위기 대처 프로그램을 가동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중요한 위기로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 체제가 무너질 경우를 가정했을 뿐이다. 경영학 관련 서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본 이라면 누구나 안다. 기업은 영속 가능하지 않다. 기업의 수명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짧다. 기껏해야 사람의 중년 수준에 불과한 평균 수명을 가진 기업이 이토록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면, 그 기업이 무너질 경우를 대비한 국가적 대응 체계를 마련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스라엘 여야가 합심해 재벌 규제 관련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게 상식적 일이다.

 

누군가는 반문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니 삼성 망하지 않게 규제 완화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앞서 보았듯, 노화는 필연적이며, 기업은 영속 가능하지 않다. 국회가,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규제 완화가 아니며, 재벌 규제다. 2의 외환 위기는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다.

2016.03.04 프레시안 이대희

 

 

왜 지금 재벌 개혁인가 박정희 개발체제에서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로 : 저자 박상인|미래를소유한사람들 |2017.03

 

불확실성으로 특징되는 오늘날의 혁신형 경제에서 정부는 여전히 자신들이 스티브 잡스를 발굴해 육성하겠다는 개도기식 정책에 집착하고 있다. 누가, 무엇이 성공할지를 미리 알 수 없는 혁신형 경제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고, 정부는 이를 위해 약자의 재산권 보호, 공정한 경쟁, 사회 안전망이 확립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는 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이런 제도화가 바로 사회통합적 시장경제.


목차               

머리말

 

1부 박정희 개발체제는 수명을 다했다

 

1장 박정희 개발체제의 성공과 한계

1. 한강의 기적

2. ‘정부 주도-재벌 중심발전전략의 성공요인

3. 수명을 다한 박정희 개발체제

 

2장 한국 경제, 위기의 늪에 빠지다

1. 저성장의 고착화

2. 제조업의 위기

1)제조업의 경쟁력이 추락하다

2)제조업의 진화가 단절되다

3. 좀비 기업과 관치금융

1)좀비 기업과 은행의 부실화

2)국책은행 주도의 구조조정과 관치금융

4. 양극화의 심화

1)양극화와 불평등의 차이

2)노동시장 분절적 이중구조의 심화

3)기업소득과 가계소득의 격차 확대

 

2부 한국 경제에는 뉴딜(New Deal)이 필요하다

 

3장 정부 주도-재벌 중심 경제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1. 정부 주도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1)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한국 경제

2)혁신형 경제와 불확실성

3)혁신형 경제의 제도적 전제

2. 재벌체제는 왜 혁신형 경제와 양립할 수 없는가

1)재벌의 과도한 계열화와 일감 몰아주기

2)만연한 기술 탈취

3)한계에 다다른 하청 쥐어짜기

4)혁신을 막는 재벌 세습

3. 정부 혁신과 제도 혁신이 필요하다

1)정부 혁신: 세출 구조, 증세, 정부 조직 개편

2)제도 혁신: 박정희 개발체제에서 사회통합적 시장경제체제로

 

4장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는 한국 경제를 위한 뉴딜이다

1. 뉴딜의 교훈

1)대공황과 뉴딜 정책

2)시장경제 질서 재확립 정책으로서의 뉴딜

3)사회통합 정책으로서 뉴딜

2. 사회통합적 시장경제

1)시장경제의 제도적 기반

2)한국 경제를 위한 뉴딜

3.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를 위한 정부 혁신

1)정책의 대전환

2)세출 및 세입 구조 변경

3)정부 조직 개편

 

3부 왜 이 시점에 재벌 개혁인가

 

5장 재벌 개혁은 왜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까

1. 재벌체제의 폐해

1)경제력 집중의 의미와 폐해

2)기업 거버넌스의 형해화

3)시장의 왜곡

4)시스템 리스크

2. 이스라엘의 교훈

1)이스라엘의 재벌 개혁 배경과 과정

2)이스라엘 개혁의 주요 내용

3)이스라엘 개혁의 교훈

3. 재벌 개혁 이렇게 할 수 있다

1)소유지배구조 개혁

2)기업 거버넌스 개혁

3)시스템 리스크 규제

 

6장 개혁은 한국 사회를 이렇게 바꾼다

1. 한국 경제는 갈림길에 서 있다

1)모방형 경제의 덫

2)한국과 일본은 다르다

3)양극화와 경제위기의 반복: 멕시코의 교훈

2. 한국 사회는 어떻게 탈바꿈할 것인가

1)개혁의 조건과 결과

2)결국 국민이 답이다

3. 전환기에는 위기관리도 필수다

1)기업구조조정

2)일자리 대책

3)가계부채

참고문헌

 

박정희 개발체제가 수명을 다하며 길을 잃은 한국 경제, 해법은?

한국 경제를 압축성장시킨 것으로 평가 받는 박정희 개발체제는 한마디로 정부 주도-재벌 중심발전전략이었다. 박정희 개발체제의 성공요인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저개발 상태에서 시장과 제도의 부재 문제를 정부와 재벌이 효과적으로 해결했고, 둘째로는 모방을 통한 추격형 경제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는 것, 셋째로는 수출을 잘하고 많이 하는 기업들에게 특혜를 주는 식으로 친경쟁적인 보상체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돼 모방형 성장에서 혁신형 성장으로 이행해야 하는 오늘날 박정희 개발체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산업의 진화를 단절시키고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역작용만 낳고 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한국은 일본의 잃어버린 20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경제위기와 양극화의 심화가 반복되는 2의 중남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경고다.

불확실성으로 특징되는 오늘날의 혁신형 경제에서 정부는 여전히 자신들이 스티브 잡스를 발굴해 육성하겠다는 개도기식 정책에 집착하고 있다. 누가, 무엇이 성공할지를 미리 알 수 없는 혁신형 경제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고, 정부는 이를 위해 약자의 재산권 보호, 공정한 경쟁, 사회 안전망이 확립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는 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이런 제도화가 바로 사회통합적 시장경제.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는 한국 경제를 위한 뉴딜(New Deal)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는 먼저, 약자의 재산권이 실질적으로 보호받고, 둘째,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고, 셋째, 최소한의 인격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복지와 사회안전망이 확립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갖춘 시장경제체제다. 이는 파워엘리트의 지대추구 행위를 억제하고 정치적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구현되도록 담보하는 경제체제이기도 하다.

 

사회통합적 시장경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벌 개혁이 필수적이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정상적인 기업 거버넌스가 작동되지 않는 황제경영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재화·하도급·노동·금융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 자체가 이뤄질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또한 재벌 세습은 시장경제의 근간이 되는 약자의 재산권, 법의 지배, 주식회사제도를 형해화하고 있다.

따라서 재벌 개혁은 시장경제의 기본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며, 동시에 기술 탈취-단가 후려치기-노동시장 양극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결국 재벌 개혁은 경제 혁신과 사회 통합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로 이행하기 위한 선결요건이 된다.

 

사회통합적 시장경제, 어떻게 이룰 것인가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시장경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음은 20세기 초 미국의 진보적 운동을 통해 이미 드러났다. 따라서 재벌 개혁을 통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근간을 바로잡는 것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믿는 모두가 동참해야 하는 과업이다. 2013년에 이스라엘의 재벌 개혁을 주도한 세력도 다름 아니라 우파 정부였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은 정경유착과 우리 사회의 부패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급기야 삼성그룹의 세습 과정에서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재벌의 적폐와 재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여망과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재벌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1910년에 일어났던 멕시코 혁명은 정치 세력의 교체만 가져온 채 유의미한 경제 개혁에는 미치지 못했고, 결국 1930년대 이후 멕시코 재벌은 더 높이 철옹성을 쌓아갔던 역사적 경험도 있다. 따라서 다음 정권이 재벌 개혁의 시늉만 하고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더욱 심화된다면 한국 경제와 사회는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씨마저 꺼질 수 있다. 촛불 시민혁명이 정의롭고 활기찬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의 출발점이 될지, 멕시코 혁명처럼 정치 세력 교체라는 코스프레로 끝날지도 결국 국민에게 달렸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 혁신과 제도 혁신이 중요하다. 세출구조, 증세, 정부 조직 개편을 통한 정부 혁신과 박정희 개발체제에서 사회통합적 시장경제체제로 이행할 수 있는 제도의 뒷받침을 통해 소유지배구조와 기업 거버넌스를 개혁하고 시스템 리스크를 규제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한국 재벌 흑역사 상 삼성 현대 저자 이완배|민중의소리 |2018.03.

이완배-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동아일보] 사회부와 경제부에서 기자로 일했다. 네이버 금융서비스 팀장을 거쳐 2014년부터 [민중의 소리]에서 경제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두 자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가치 있는 행복을 물려주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지은 책으로 생각하는 십대를 위한 토론 콘서트 - 경제』 『10대를 위한 경제학 수첩』 『경제 교과서, 세상에 딴지 걸다』 『한미 FTA 완전정복』 『한국 재벌 흑역사』 『일어나라, 기훈아!(공저) 아빠가 가르치는 부자 되는 경제학등이 있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재벌들의 악행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나 큰 죄를 짓고도 태연히 거리를 활보하며 경영활동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서문 - 재벌이 남긴 어두운 발자취를 기록하는 까닭

 

1부 삼성그룹

1장 술꾼, 도박꾼, 투기꾼이었던 청년 이병철, ‘사업보국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다 - 삼성그룹의 출범

2장 이병철과 조홍제 - 인연으로 시작해 악연으로 끝나다

3장 이병철이 민중의 굶주림을 대하는 태도 - 삼분폭리 사건과 제일제당

4장 사카린 밀수 사건 - 이맹희를 야인으로 내몰다

5장 용인에 등장한 거대한 별장 용인자연농원 - 땅 투기와 편법 증여의 도구였을까?

6장 미원을 향한 이병철의 집념 - CJ그룹의 태동

7막내딸아, 절대 결재 서류에 사인하지 마라” - 신세계 그룹의 무책임, 무노조 경영의 태동

8장 취미는 취미로 끝났어야 했다 - 이건희의 자동차 사랑과 삼성자동차의 몰락

9장 모든 인재는 철저히 관리한다! - 삼성이라는 틀 안에 갇힌 한국 사회

10장 안기부가 도청한 X파일 속의 삼성, 그리고 [중앙일보] - 삼성 X파일 사건

11장 삼성의 비자금, 하지만 이건희는 건재했다 - 삼성에게 면죄부만 안겨준 비자금 특별검사

12장 이재용, 단돈 60억 원으로 삼성그룹을 삼키다 -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증여 사건

13장 벌처 펀드의 공격에 드러난 삼성의 민낯 -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

14장 풀려난 이재용, 완성되지 않은 촛불혁명 - 이재용의 구속과 석방

 

2부 현대그룹

1무데뽀 정신의 전통을 세운 정주영, 그리고 그의 추종자가 남긴 족적 - 현대그룹의 모태가 된 현대건설

2장 정주영을 살린 박정희, 8.3 사채 동결 조치 - 정주영과 박정희의 각별한 관계

3장 현대조선 폭동과 식칼 테러 - 현대만의 격렬한 노사문화 탄생의 배경

4부동산으로 보수를 지배하라”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

5장 포니에서 기아차까지…… - 현대차가 100만 안티를 양산한 이유

6모름지기 기업은 시류를 따라야 한다” - 너무도 당당했던 정주영의 5공화국 청문회

7장 정치권력 위에 서고자 했던 경제권력의 욕망과 좌절 - 정주영과 통일국민당

8장 정주영의 소떼 방북…… - 신의 한 수였나, 지옥행 급행열차였나?

9장 아비도, 형제도 몰라본 가족들의 이전투구 - 현대그룹 왕자의 난

10장 족보 싸움으로 얼룩진 현대 - 쇠락하는 현대의 적통

11장 재벌 2세 정몽준이 헬조선에서 사는 법 - ‘정치인정몽준의 감출 수 없는 귀족 본능

12장 정의선에게 현대차를 지배할 자격이 있는지 묻는다 - 2인자 정의선이 3조 원 자산가로 성장한 과정

 

목차

서문 - 함께 여백을 채워나가기를 소망하며

1부 롯데그룹

1장 껌에서 발견된 쇳가루, ‘롯데 재벌탄생의 신호탄이 되다

2장 콩가루 집안의 지존, 롯데 가문 갈등의 역사

3장 롯데가 낳은 최고 스타는 이대호가 아니라 신동학

4장 배임과 횡령으로 꽃 피운 신격호의 셋째 부인 사랑

5장 롯데자이언츠? 아니, 롯데 갑질스

6장 롯데시네마의 막장 드라마 형제의 난개봉

7장 롯데의 주인이 직원 세 명짜리 포장재 만드는 회사라고?

8장 롯데는 한국 기업인가? 일본 기업인가? 박쥐인가?

9장 정경유착으로 흥한 자, 정경유착으로 망하리라

 

2SK그룹

1장 적산 가로채기로부터 시작된 선경그룹의 출범

2장 정경유착 전문 그룹 SK와 노태우의 밀월

3장 헤지펀드를 불러들인 SK의 분식회계와 소버린 사태

4장 부채도사에게 홀린 재벌 총수의 횡령 행각

5장 바지사장은 결코 오너를 넘어설 수 없다

6장 영화 베테랑의 모티브가 된 최철원의 야구방망이 폭행 사건

7장 불륜에도 회사 돈을 쓰는 뻔뻔한 재벌 총수

8장 애국심 마케팅, 그런데 군대는 다녀오셨나요?

9장 최태원은 어떻게 4조 원 대 거부가 됐나?

 

 

책속으로

정주영이 사업 실패로 진 빚을 다 갚은 1등 공신은 그의 불굴의 정신이 아니라 20년 뒤 박정희가 베풀어 준 사채 동결 조치였기 때문이다. 고령교 공사의 기록은 정주영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 나와 있는데, 보다 냉정히 이를 기록하자면 책 제목을 [시련은 있어도, 박정희의 도움만 있다면 실패는 없다]로 수정하는 것이 마땅할 지도 모른다. _ 정주영을 살린 박정희, 8.3 사채 동결 조치

 

1987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의 불씨가 피어난 곳은 울산이었고, 가장 먼저 거리로 나섰던 이들은 현대그룹 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노동자 대투쟁을 주도했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현대그룹과 정주영을 향해 가장 먼저 외쳤던 구호는 임금 인상이 아니라 두발 자유화였다. 그들에게 임금 인상보다 더 급했던 것은 바로 인간다운 삶이었다. _ 현대조선 폭동과 식칼 테러

 

20153월 쏘나타 신차 발표회에서 한 기자가 김충호 현대차 사장에게 안티 현대차의 바람이 거센데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충호는 너무도 당당하게 노사문제 때문이라고 짧고 굵게 답했다. 자동차 결함은 소비자들이 예민한 탓, 산타페에서 들리는 개소리는 소비자의 귀가 밝은 탓, 100만 안티의 적대감은 노조 탓, 이것이 현대차가 국내 고객 시장을 인식하는 현주소였다. _ 현대차가 100만 안티를 양산한 이유

 

이 해 518일 현대건설 주주총회에서 출자전환 안이 통과되면서 현대건설은 이제 현대그룹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은행관리 회사로 탈바꿈했다. 한국 산업계의 지배자 현대그룹의 모기업 현대건설이 정주영 일가의 품에서 떠나 채권단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리스크 관리 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오로지 해봤어?” 정신으로 문어발식 확장을 지속했던 정주영 식 경영의 종말을 알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_ 현대그룹 왕자의 난

 

한 때 한국을 대표했던 재벌 그룹의 자손들이 온 국민 앞에서 도대체 당신 성이 뭐냐?”며 족보를 다투는 이 참담한 현실. “현 씨니까 안 된다” “알고 보면 나도 정 씨등 희대의 코미디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이들의 볼썽사나운 다툼은, 현대그룹 경영권 논쟁을 장충동 족발 원조 논쟁 수준으로 되돌려 놓았다. 21세기 첨단 정보 시대에 한국의 대표그룹 현대에서는 이렇듯 봉건사회에서나 볼법한 족보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_ 족보 싸움으로 얼룩진 현대

 

정몽준이라고 왜 노력을 안 했을까? 자신의 귀족적 이미지가 선거에 결코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구축된 정몽준의 이미지는 그가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얻은 것이라고 인정해 줘야 한다. 쉽게 말하면 최대한 겸손하고 최대한 서민적으로 보이도록 노력한 결과가 바로 이 모양이라는 이야기다. _ 재벌 2세 정몽준이 헬조선에서 사는 법

 

사람들이 이재용에게는 당신이 삼성그룹을 지배할 자격이 있느냐고 묻지만, 정의선에게는 당신이 현대차그룹을 지배할 자격이 있느냐?”고 묻지 않는다. 이것은 부의 편법 승계 과정에서 철저히 2인자의 자리를 고수했던 현대차그룹의 전략의 승리였다. 그래서 정의선은 이노션 상장으로 4,000억 원을 챙기고도 무리하지 않은 상장이라는 뜻밖의 칭찬을 받는다. _ 정의선에게 현대차를 지배할 자격이 있는지 묻는다

 

만약 껌에서 쇳가루가 나오지 않았다면 오늘날 롯데가 누리는 대부분의 지위는 다른 재벌들 손에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운명처럼 롯데 껌에서 쇳가루가 검출됐고 롯데는 그 덕에 박정희의 화끈한 지원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_ 껌에서 발견된 쇳가루, ‘롯데 재벌탄생의 신호탄이 되다

 

신격호 가문은 대한민국 재벌 중에서도 유난히 가족 사이에 갈등이 많았던 집안이다. ‘콩가루 집안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형제끼리 권좌를 두고 치고받는 형제의 난은 흔한 편이지만 장장 2대에 걸쳐서 형제의 난을 반복하는 재벌은 롯데가 유일하다.

_ 콩가루 집안의 지존, 롯데 가문 갈등의 역사

       

셋째 부인을 위한 신격호의 애정을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사랑스러우면 자기 돈으로 사랑을 표시해야 한다. 그런데 신격호는 이 부도덕한 불륜 놀이에 회사 돈을 끌어들였다. _ 배임과 횡령으로 꽃 피운 신격호의 셋째 부인 사랑

 

롯데 갑질’. 이 용어는 1967년 한국에 진출한 롯데의 수 십 년 역사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일종의 고유명사. 대형 유통업체들 가운데 롯데 갑질은 그 강도와 악랄함 면에서 단연코 압도적이라는 것이 중소업체들의 이야기다._ 롯데자이언츠? 아니, 롯데 갑질스

 

아무리 경영권 분쟁이 중요해도 평생 그룹을 이끈 아비의 정신건강 이상설을 흘리는 것은 어떤 형제의 난에도 볼 수 없었던 역대급 후레자식 전술이었다. 아비의 노년이 어떻게 기록되건 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롯데그룹 경영권에만 있었던 셈이다. _ 롯데시네마의 막장 드라마 형제의 난개봉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그동안 글로벌 기업이라고 믿었던 롯데의 진짜 주인은 도쿄 신주쿠 거리에 있는 직원 세 명짜리 골판지 만드는 회사였다는 사실이다. 세상 어느 천지에 매출 90조 원에 이르는 거대 그룹을 직원 세 명짜리 골판지 만드는 회사가 지배하는 나라가 있던가? _ 롯데의 주인이 직원 세 명짜리 포장재 만드는 회사라고?

 

우리가 내린 결론은 롯데는 박쥐같은 기업이다라는 것이다. 롯데는 한국이 달면 한국을 삼키고 일본이 달면 일본을 삼키는, 아침에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밤에는 일장기에 몸을 숨기는 그런 존재라는 이야기다. _ 롯데는 한국 기업인가? 일본 기업인가? 박쥐인가?

 

2008428일 청와대에서 열린 투자 활성화 및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민관합동회의에서 국방장관 이상희는 제2롯데월드 계획에 우려를 표시했지만 이명박은 이상희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이상희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이명박은 날짜를 정해놓고 그때까지 해결할 수 있도록 검토하라고 강력하게 압박을 가했다. 이후 이명박은 제2롯데월드에 반대한 공군참모총장 김은기를 경질하는 등 공군의 반대론자들을 삽시간에 제압했다. 그리고 2009년 마침내 신격호에게 123층짜리 마천루 제2롯데월드의 건축 승인이라는 선물을 안겼다. _ 정경유착으로 흥한 자, 정경유착으로 망하리라

 

그것이 바로 해방 직후 청년 최종건은 선경치안대를 조직해 선경직물의 일본인 간부들이 무사히 일본에 돌아가도록 도왔다라는 문장이다. 그들이 남긴 기록에도 공장 중간 관리자였던 최종건은 분명히 이 치안대 결성을 주도했고 적산(敵産)을 남기고 떠난 일본인들의 탈출을 도왔다. 그리고 나중에 그 공장을 차지해 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_ 적산 가로채기로부터 시작된 선경그룹의 출범

 

재계가 SK그룹에 대해 가지는 일반적 시각은 온실 재벌혹은 공기업 민영화 전담 그룹이라는 것이다. SK그룹은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두 번의 초대형 민영화에서 모두 승자로 남았다. 1980년 유공을 삼킨 것이 첫 번째 사례이며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것이 두 번째 사례다. _ 정경유착 전문 그룹 SK와 노태우의 밀월

 

영미권에서 최악의 분식회계를 저지른 기업으로 기억되는 엔론의 최고경영자 제프리 스킬링(Jeffrey Skilling)2006년 사법부로부터 24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연히 1년의 감형도 없었고 스킬링은 아직도 감옥에 있다. 그런데 최태원은 분식회계로 구속된 이후 단 7개월 만에 병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져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게 바로 봉건과 자본주의의 또 다른 차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우리가 아직도 봉건적 재벌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_ 헤지펀드를 불러들인 SK의 분식회계와 소버린 사태

 

최태원은 그 해에 회사 돈 465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런데 횡령한 이유가 엽기적이었다. 점쟁이 말만 믿고 재산 불리겠다며 회사 돈을 횡령했다가 덜미를 잡힌 것이다. _ 부채도사에게 홀린 재벌 총수의 횡령 행각

 

한 중견 간부는 최철원에게 골프채로 얻어터졌는데, 최철원이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골프채가 부러진 일도 있었다. 도구만으로 사람을 패는 게 성에 안 찾는지 하루는 최철원이 도베르만이라는 품종의 사냥개를 사무실에 끌고 왔다. 그리고 여직원에게 요즘 불만이 많다며?”라고 말한 뒤 개 줄을 풀고 물어!”라고 명령했다.

_ 영화 베테랑의 모티브가 된 최철원의 야구방망이 폭행 사건

 

최태원의 불륜이 그냥 불륜에 그쳤다면, 그것 역시 사생활의 영역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롯데 신격호가 이른바 셋째 부인 서미경에게 했던 것처럼 최태원 역시 불륜을 기업 경영이라는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_ 불륜에도 회사 돈을 쓰는 뻔뻔한 재벌 총수

 

한국 남성 일반인들의 병역 면제율은 평균 6.4%. 그런데 재벌가의 병역 면제율은 33%로 껑충 뛴다. 이 수치는 10대 그룹으로 대상을 좁히면 56%로 치솟는다. 그렇다면 한국 재벌 1위인 삼성으로 대상을 국한하면 어떨까? 놀랍게도 삼성 가문의 군 면제 비율은 73%나 된다. 10명 중 7명이 군대를 가지 않는 기적이 삼성 가문에서 벌어지는 셈이다. _ 애국심 마케팅, 그런데 군대는 다녀오셨나요?

 

최태원의 재산은 약 4조 원으로 이재용의 절반에 채 못 미친다. 하지만 최태원은 20년 만에 원금 28000만 원을 4조 원으로 불려 무려 143%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재용의 수익률이 15%인 것에 비해 최태원의 수익률은 이재용의 열 배에 육박한다. 전 세계에서 20년 만에 재산을 143%씩이나 불린 투자자는 단언컨대 최태원이 유일하다._ 최태원은 어떻게 4조 원 대 거부가 됐나? ---본문 중에서

 


 

이제 그만! 더는 지켜보기 역겨운 세습자의 만행[김지환의 세상잡설]

지금 이 순간 전전긍긍할 모 기업 홍보부 직원들

 

오너가 사고를 많이 치는 기업은 홍보부가 무척 바쁘다고 한다. 요즘 상대적으로 사람들 칭찬을 종종 받는 LG의 홍보부는 비교적 무난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한 오너 일가의 만행으로 어느 회사 홍보부 직원은 지금 제대로 잠을 못 이룰지 모른다. 2014125일 이른바 땅콩회항사건은 한진그룹 일가의 행태를 돌아보게 했다. 사건 당사자인 조현아 씨는 잠시 물러나 있는 척하다 지난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실실 웃으며 성화 봉송에 참여하더니 예상했던 대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그 사건 때 많은 사람이 걱정했던 것은 박창진 사무장의 거취였다. 시민의 분노와 눈길도 무시한 채 이후 박 사무장에 대한 보복조치가 행해졌다. 그는 모욕감을 안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다가 최근에는 병까지 얻어 얼마 전에 수술까지 해야 했다. 박 사무장은 자신의 요즘 상황에 대한 소회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에 기고했다.

 

나는 타고난 언변가나 사회 부조리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진 투쟁가가 아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히고 그 누구의 조력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어쩔 수 없이 나를 변호하기 위한 변호인이 돼야 했다. 아울러 나는 그 비극의 상황에서 많은 왜곡을 통해 자신들의 구명에 열을 올리는 거대 집단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죽지 않아야 했으며, 또 나의 명예를 지켜야만 했다. 이런 일념으로 어느 순간 사회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투쟁가로 변해야 했고, 변해 있었을 뿐이다.”

 

박창진 사무장의 외로운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지금, 조현아의 동생 조현민이 또 엄청난 사고를 쳤다. 조현아의 땅콩회항을 떠올렸고, 삼남매는 물론 이 친구들 엄마 아빠 할 것 없이 조 씨 일가의 만행이 회자되는 중이다. 하루에 몇 건씩 이 집안 사람들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다. 특히 며칠마다 공개되는 녹취 파일은 이 가족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시민은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지금 국적기 박탈, ‘대한항공이라는 이름을 회수하자는 청원이 불붙었다.

 

지난 414일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가 인천공항에서 기자의 물음에 답하고 있다. (사진 출처 = MBC뉴스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어이없는 세습자들의 나라

사실 한진그룹뿐만 아니라 재벌가, 특히 재벌 2, 3세의 문제는 하루이틀 벌어졌던 일이 아니다. 얼마 전 많은 사람을 어이없게 했던 너희 아버지 뭐 하시냐하며 대형 로펌의 신입 변호사들에게 폭행과 폭언을 일삼았던 한화 김승현 회장의 셋째 아들 김동선 사건도 그렇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그들에게는 조금 과장되었다 싶은 드라마나 영화 속 장면이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인 듯하다. 재벌의 온갖 작태는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가 쓴 한국 재벌 흑역사”(민중의소리, 2018)에 아주 소상하게 적혀 있다.

 

탈북자인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북한은 권력자 혼자서 다 가지고 세습하는 사회라면 남한은 한 100명쯤이 나눠서 세습하는 사회. 우리는 북한을 3대 세습이나 하는 후진 국가로 얕보며, 그런 맥락에서 최근에는 부카니스탄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주 기자가 말한 ‘100명쯤의 세습그중에는 재벌가가 상당수일 텐데, 재벌은 2, 3대를 넘어 이제 4대 세습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재벌 세습의 과정이 또 온당한지 보자면, 이 과정에서 온갖 탈법과 불법이 자행된다. 특히 삼성의 세습 과정은 완전 범법행위임에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 나라를 삼성공화국이라 하는 것이겠다. 재벌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는데, 직접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 저명한 정치학자는 사회적 책임 안 해도 좋으니, 일단 법부터 제대로 지키게 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사회적 책임 같은 거창한 것도 안 바란다. 법만 잘 지키면 될 뿐이다.

 

기업의 지분을 몇 퍼센트밖에 갖고 있지 않으면서, ‘순환출자라는 희한한 흑마술을 동원해 기업 전체를 장악한다. 이는 온갖 인간이 그토록 좋아하던 미국, 이 나라의 주주자본주의에도 어긋난다. 재벌이 꽤 꺼려 하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같은 재벌개혁 세력이 엄청 진보적이라기보다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에 충실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자본주의는 참으로 기이하고 왜곡된 자본주의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지금처럼 한 집안이 작은 지분으로 기업 전체를 장악하는 구조를 타파해야 할 때다. 만약 지금의 재벌이 스웨덴의 재벌 발렌베리 가문처럼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사회적 책무를 다한다면 백번 천번 양보해 지금의 방식을 존중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렇기 되기보다 남북통일이 훨씬 빠를 만큼 머나먼 일일 것이다. 답은 뻔하지만 그것이 너무도 험난한 길이라는 사실일 뿐이다. 지금 벌어지는 온갖 작태는 현재 재벌구조와 깊게 관련되었다고 생각한다. 재벌을 개혁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 같은 어이없는 블랙 코미디를 욕만 하면서 계속해 바라볼 것이다.

 

정말 누가 개돼지일까?

언젠가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탄핵을 당하고 구치소에 있는 박근혜는 아직도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를 것 같다고 했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멍하게 흘러온 참으로 딱한 사람이라 보는데, 수많은 재벌 상속자의 모습과 상통한다 생각했다. 상식 이하의 행동을 태연하게 보여 주는 상속자에게서 박근혜의 모습이 비친다.

 

어떤 사람이 영화 속에서 나왔던 민중은 개돼지를 했다가 공분을 샀다. 인간이 뭐 그리 대단한가 문제는 뒤로하더라도, 개나 돼지, 짐승을 거론했을 때는 인간의 기본적 도리 그리고 염치나 분별력을 잃은 인간을 가리킬 때 쓸 법한 이야기다. 민중은 모욕감을 안고 하루하루 버겁게 살아갈지언정 대체로 인간적 도리를 어기지 않고 살아가려고 한다. 그런 민중이 세상을 지탱하고 돌아가게 한다.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그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익혀야 할 도리는 하나도 모르고, 미쳐 날뛰는 그것이 개돼지가 아니겠는가? 정말 누가 개돼지인가? 18.4.20

 

나라가 이제 조금씩 품격을 찾아가고, 구습을 하나씩 덜어 내려 하는 중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지난 시대에도 비난받아 마땅한 일을 지켜보는 것도 정말로 질리는 일이다. 불매도 좋고 국민 청원도 좋고, 어떤 식으로든 잊지 말고 계속해 이야기하면서 압박해야 할 때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삼성, 한국주류사회 어떻게 지배하게 됐나

한국 경제의 최대 권력이 삼성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한국 미디어의 최대 권력은 누구에게 있는가? 저자는 이건희로 대표되는 삼성 오너 일가라고 단언한다. 삼성은 한국 최대의 미디어 집단을 소유하고 있다. 삼성은 광고, 협찬 등으로 한국 언론에 가장 많은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의 미디어 통제력은 이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나온다. 삼성의 미디어 권력은 근본적으로 미디어를 둘러싼 제도 장악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일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삼성의 성장, 삼성의 미디어 진출 역사, 이병철의 제국 통치 방식, 삼성와 한국 파워 엘리트, 이건희의 범 삼성확장, 삼성 미디어 제국,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한국 미디어 (신문, 유료방송, 광고, 영화) 시장 구조와 삼성의 미디어 검열 영향력 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삼성 권력은 자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한국 미디어의 구조 장악에서 나온다.

 

한국 사회에 대한 삼성의 지배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삼성의 경제력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력의 뿌리가 되는 미디어 통제력을 정밀 분석할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분명해진다.

 

이에 저자는 미디어오늘·자유언론실천재단과 함께 한국 미디어 통제 체제와 나아가 한국 사회 지배 체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삼성의 한국 미디어 통제에 대한 심층 연구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 미디어오늘 편집자주

 

삼성, 한국주류사회 어떻게 지배하게 됐나

김춘효 자유언론실천재단기획편집위원 (매체정치경제학 박사)

 

(01) 왜 삼성의 미디어 정치경제학인가

(02) 삼성 제국과 내부 통제 라인

(03) 이병철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한국 파워 엘리트

(04) 한국 매스컴 속의 삼성 미디어

(05) 금융 자유화와 이건희의 범 삼성계

(06) 누가 한국 신문 시장을 지배하는가

(07) 누가 한국 광고 시장을 통제하는가

(08) 누가 한국 영화 시장을 지배하는가

(09) 누가 한국 유료 방송 시장을 통제하는가

(10) 삼성 그룹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11) CJ 그룹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12) 중앙일보 그룹의 소유 구조와 이사회

(13) 1965년 사카린 밀수 사건과 2005X-파일

(14) 범 삼성가의 미디어 검열 방식

(15) 누가 미디어 자유화의 최대 수혜자인가

(16) 삼성 없는 한국 미디어를 위하여 -

 

(1)] 왜 삼성 미디어의 정치경제학인가 20180102

20171222일 미디어 비평 전문지인 미디어오늘은 중앙일보 간부들의 손석희 흔들기란 기사를 보도했다. 중앙일보 간부들이 홍석현 전 중앙일보 그룹 회장과의 식사 자리 이후 손석희 JTBC보도담당 사장을 폄하했다는 지라시가 나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는 지라시 내용의 진위 여부보다 홍석현과 계열사 핵심 임원들 간의 갈등 상황에 주목했다. 여기에 삼성 그룹 광고라는 변수를 놓고 중앙일보와 JTBC 간의 미묘한 경쟁 구도도 첨가했다.

 

[ 관련기사 : 중앙일보 간부들의 손석희 흔들기’ ]

 

손석희 JTBC보도담당 사장.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이 기사 내용만을 놓고 보면, 중앙일보 그룹과 삼성 그룹, 홍석현, 손석희의 JTBC, 그리고 중앙일보 임원들은 독립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미디어오늘 기사뿐만 아니라 다른 언론 보도들도 유사한 보도 행태를 보여왔다. 이런 유형의 기사들은 몇 가지 의문점을 갖게 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조직과 역사를 갖고 있는 법인과 존재들인가? 아니면 하나의 조직이며 그 조직의 구성원들로 볼 수 있는가? 홍석현 전 중앙일보 그룹 회장은 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서도 중앙일보 임원들과 식사를 하면서 JTBC와 손석희 사장을 논의할까? 홍 전 회장은 그런 권력을 행사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중앙일보 미디어 그룹은 왜 종합 편성 방송 이름을 JTBC로 지었을까? 그 이름은 삼성 소유의 동양방송(TBC)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중앙일보 그룹은 삼성 그룹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나? 손석희 JTBC 사장은 왜 중앙일보 임원들에게서 비난을 받고 있는가?

 

삼성 미디어 제국의 건설

얼핏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답을 하다 보면 오히려 새로운 궁금증이 이어진다.

 

삼성 제국의 역사가 궁금해지고 여기에 한국 매스컴의 역사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파고들게 된다. 신문 시장 구조, 광고 시장 구조, 유료 방송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시 삼성 미디어 제국의 소유 구조와 사업 확장 과정이 궁금해진다. 답할수록 어려워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삼성의 미디어 권력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과 이해 없이는 삼성 공화국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으면 벗어날 수도 없다.

 

1960년대 시작한 한국 미디어의 기업화는 삼성의 정보 산업 및 오락 산업의 진출과 궤를 같이 한다. 특히, 한국 정부가 시장주의 개념을 미디어 산업 전반에 도입한 1990년대에 삼성의 오너 일가는 미디어 사업 분야를 케이블 방송, 영화 투자, 유통, 극장, 연극, 드라마 제작, 디지털 콘텐츠 투자 등의 사업으로 확장했다. 그 결과, 삼성 오너 일가는 한국 미디어 콘텐츠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전시 분야까지 진출, 2008년 이후 한국 정보 산업과 대중 오락 산업의 최대 생산자이자 투자자이며, 유통업자이고 전시자가 되었다. 이를 통해 삼성이 한국 미디어 산업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최고 권력이 되었다. 그 권력의 정점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존재한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연합뉴스

 

그래서 나는 이건희 회장이 한국 미디어를 통제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미디어 정치경제학

미디어 산업화가 우리보다 먼저 진행된 서구에서는 일찍부터 시장과 미디어 재벌, 그리고 정치 권력의 관계에 주목하여 연구를 진행했다. 달라스 스마이스(Dallas Smythe), 허버트 쉴러(Herbert Schiller), 존 렌트(John A. Lent) 제임스 큐란(James Curran), 벤 배지키언(Ben Bagdikian), 안드레 쉬프린(Andre Schiffrin) 등은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미디어 소유 구조, 이사회 임원 구성과 정치 경제 파워 엘리트 간의 연결, 미디어 법과 정책 변화, 시장 구조 변화와 콘텐츠의 흐름 등을 분석하였다. 미디어 정치경제학의 탄생이다. 미디어 정치경제학자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 다양한 미디어 기업을 분석한 결과, 어느 국가에서건 정치 권력 변화가 미디어 법과 제도에 영향을 끼치며, 동시에 시장 주도 미디어 기업의 활동과 시장 구조 변동과도 유기적으로 연동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들은 특히 시장주의 이데올로기가 미디어 산업 구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1980년대 후반부터 미디어 대형화가 시작되었음에 주목했다. 정부의 소유 규제 완화와 공기업 민영화 정책은 금융 자본들이 미디어 산업에 진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열어 줬고, 그 결과 초대형 문화 기업(또는 미디어 재벌)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미디어 재벌(media conglomerates 또는 cultural conglomerates)이란 기업들이 두 개 이상의 미디어 사업 분야에 진출해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면서 중앙집권식의 소유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Kunz, 2007: Meehan, 2005).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 산업 재벌들로는 미국의 GE-NBC, Disney-ABC, News Corporation(Fox 채널 소유), Time-Warner, CBS-National Amusement, Sony사들이 있다. 이들 미디어 재벌들의 출신은 제조업이거나 미디어 전문기업이다. GE처럼 제조업에서 미디어 사업으로 확장한 기업이 있는가 하면, Disney처럼 미디어 전문 기업도 있다.

 

이들 소유 형태는 대부분 금융사들이 최대 주주이다. Disney 최대 주주는 미국의 대표적인 금융 자산가인 워렌 버펏(Warren Buffet)이다. 그가 소유한 금융 회사가 Disney의 최대 주주이다. 이와 달리 CBS-National Amusement는 레드스톤 (Red Stone)가문이 80%이상 소유지분을 갖고 있다. 레드스톤 가문은 지분만 갖고 있고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같은 가족 기업 소유 형태를 보이는 News Corporation은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과 그의 가족들이 경영까지 관여한다. 삼성과 달리 루퍼트 머독 집안은 News Corporation30% 이상 지분을 갖고 있다. 또한 아시아에도 미디어 재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도의 Bennett & Coleman, 필리핀의 ABS-CBN, 말레지아의 Media Prima, 싱가포르의 Singapore Press Holdings (SPH) 등이다.

 

 

루퍼트 머독 (Rupert Murdoch)

 

미디어 재벌의 시장 통제

미디어 재벌의 등장으로 미디어 시장 구조는 독과점화됐다. 강력한 현금력을 갖춘 미디어 재벌들은 적극적인 기업 인수 합병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높여갔다. 그 결과, 미디어 재벌들은 시장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됐다. 이들 기업들이 시장의 필터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미디어 재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작품은 제작 기회조차도 배제된다. 설령 운이 좋아서 작품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시장에서 유통될 수 없다. 미디어 재벌들이 유통시장 출입구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중소형 미디어 기업들이 작품을 기획할 때부터 유통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작품만을 만들도록 유도하는 자체 검열 기제를 작동하도록 한다. 다시 말하면 중소형 기업들은 생존하기 위해 작품의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다 시장에서 팔릴만한 작품에만 치중하게 된다(Meehan, 2005: Schiller, 1989: Schiffrin, 2000, 2006).

 

또한 여론 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쇄 매체 시장에서도 미디어 대형화의 폐해는 심각하다. 광고주들이 발행 부수가 많은 매체만을 선호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신문과 잡지들은 사회의 진보적인 가치에 대한 보도 빈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 대중 인쇄 매체에 대한 광고주들의 통제 기제는 광고비와 협찬비 등의 형태로 직간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적인 가치를 주창하는 인쇄 매체들이 시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Curran, 2003: Freiberg, 1981).

 

다시 말하면, 미디어 재벌들은 시장 구조 장악을 통해 콘텐츠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됐다. 문화적 재벌들이 미디어 상품의 게이트 키퍼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미디어 시장의 양극화는 심화됐고, 중소형 미디어 기업들이 몰락함에 따라 콘텐츠의 다양성은 심각하게 훼손됐다.

 

삼성의 미디어 정치경제학

서구 미디어 정치경제학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결과는 서구 자본주의를 뒤쫓아 걸어온 한국에도 적용 가능할 것이다. 삼성의 미디어 정치경제학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한국의 경우 언제부터 미디어 규제 완화가 진행됐는가? 되었다면 언제, 누가, 어떤 형식으로 제도화했는가? 한국형 미디어 재벌이 등장했는가? 등장했다면 서구의 문화 기업 재벌들과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을 보이는가? 한국 미디어 시장도 서양처럼 양극화가 심화했는가? 한국 미디어 재벌은 어떤 소유 구조를 갖고 있는가? 한국의 문화 파워 엘리트들은 어떻게 미디어 기업 내부에 통제 라인을 설치했는가? 한국 미디어 재벌의 등장은 한국 여론과 대중 문화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연합뉴스

 

이러한 질문에 하나씩 답을 찾아 나가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미디어 집단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바로 삼성이다. 한국의 대중 매체사에서 삼성은 재벌 중에서 가장 먼저 미디어 산업에 진출했다. 삼성은 지난 1963년 중앙방송(나중에 동양방송으로 개명)을 시작으로 신문, 잡지, 광고, 드라마 제작, 케이블 방송, 영화 제작 분야까지 진출했다.

 

재벌의 진화 과정 측면에서도 삼성은 두드러진다. 1990년대 금융 자유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재벌들은 분화하기 시작했다. 재벌 창업주들이 세상을 떠난 뒤 기업을 물러 받은 후손들은 선친의 기업을 몇 개로 나눠 갖는다. 그 과정에서 기업들 간의 업종별 전문화가 함께 진행됐다. 이런 재벌들의 기업 나눠 갖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1997년 금융 위기가 찾아왔다. 이 같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선출된 정치권력은 미디어를 포함하는 문화 산업을 국가 진흥 산업으로 지정했다. 정치권은 미디어법과 제도를 자유화하면서 재벌과 외국의 대형 미디어 기업들을 한국 미디어 진흥 동반자로 초대했다(Shim, 2000: Jin, 2011: Kwak, 2012). 이 같은 규제 완화 정책 속에서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은 1990년대 이병철 설립 회장의 삼성 그룹을 5개의 재벌 그룹으로 분화했다. 이들 기업들 중 삼성과 중앙일보와 CJ 그룹이 적극적으로 미디어 전 사업 부분에 진출했다. 다시 말하면, 삼성은 다른 재벌들과 달리 가장 먼저 미디어 사업 부분에 진출했고, 지속적으로 미디어 사업을 확장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던져진다. 삼성, 중앙일보 그리고 CJ 그룹은 미디어 재벌인가? 이들 3개 재벌 그룹은 어떤 형태의 미디어 소유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가? 이들 미디어 기업들은 한국 미디어법과 정책 변화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정책과 유기적으로 연동했는가, 아니면 정책 변화를 추인했는가? 이병철 후예의 미디어 기업들은 어떻게 한국 신문, 방송, 영화, 광고 시장 구조에 영향을 미쳤는가? 이들 미디어 기업의 최종 수혜자는 누구인가? 다시 말하면, 삼성의 이씨 일가는 한국 미디어 시장의 제후들인가, 아니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한국 미디어 시장의 황제인가?

 

2회부터는 꼬리에 꼬리는 무는 삼성의 미디어 정치경제학 질문을 하나씩 해결해 보도록 하자.

 

(2)] 삼성 제국과 내부 통제 라인 20180109

삼성은 한국 재벌이다. 재벌이란 개념은 한국 대기업집단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명칭이다. 김유태(2008)재벌은 한 가족과 친척들이 다양한 산업 분야에 계열사를 소유하고 통제하는 하나의 기업 집단”(p. 64)이라고 정의한다. 한 가족과 친족이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큰 기업 집단이란 뜻이다.

 

브루스 커밍스(Cuminngs, 1984; 1997)와 우정은(Woo, 1991)은 재벌은 한국 정부가 노동자들의 희생을 담보하면서 한반도 국제 정치경제학의 흐름 속에서 정경유착으로 탄생한 대기업 집단이라고 규정한다. 특히 커밍스와 그의 부인인 우정은은 재벌 탄생과 성장은 미국의 동북아 외교 정책과 상관관계가 깊다고 말한다. 한반도는 미국이 공산화를 막아야 하는 동북아시아의 마지막 장소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시아 문제에 직접 관여하기보다 일본을 통해 아시아를 통치하게 하는 미국의 아시아 외교 전략과도 연관돼 있다고 밝혔다.

 

실제, 재벌이 성장할 수 있는 자금은 미국과 일본에서 주로 들어왔다. 1960년까지 이승만 정권의 통치 자금은 미국에서 원조의 형태로 지급됐다. 그 후 한반도 경제 지원 자금은 대부분 일본에서 들어왔다. 그 속내는 미 케네디 정부가 일본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를 동시에 압박한 결과이다. 지난 1965년 한일협정이후 한국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은 대부분 일본에서 들어왔다. 다시 말하면, 재벌의 탄생은 한반도를 둘러싼 한국, 미국 그리고 일본 간의 국제 정치경제학이 긴밀하게 작동한 결과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삼성 재벌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통해 확인해 보자.

 

삼성 재벌의 역사

 

1938년 대구 삼성상회. 사진=호암재단 홈페이지

 

삼성은 1936년 곡물 도정업을 시작으로 주류·무역업·식품업·의류업·석유화학·전자·건설·의료·호텔·부동산·미디어·정보통신 및 디지털 등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 서비스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1’에서 보여지듯, 삼성은 한국 정치 경제 변화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상업 자본에서 산업 자본, 그리고 초국적 자본으로 성장했다.

 

이병철, 한국의 자이바츠(Zaibatsu)를 꿈꾸었나

이병철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친구 2명과 함께 자본금 3만 원으로협동정미소란 곡류 도정업계에 발을 내딛었다. 당시 마산은 한반도의 쌀을 일본 본토에 수출하고, 만주의 콩 등이 대량으로 수입되는 무역항이었다. 이곳에서 이병철은 곡물 도정업과 함께 트럭 20대를 이용, 곡물을 운송하는 사업도 함께 진행했다. 여기에 그는 일본 산업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부동산업에도 뛰어들어 토지 2백만 평을 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37년 만주사변으로 마산에서의 사업을 접어야 했다. 2년 뒤인 1938, 이병철은 대구에서 건어물과 잡화 등을 수출입 판매하는삼성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차렸다. 그가 무역업을 선택한 것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린다.

 

그 당시 대부분의 제조업은 일본 재벌인 자이바츠(Zaibatsu)만 할 수 있었다. 자이바츠는 부호의 가족 또는 동족들이 폐쇄적인 소유 지배구조를 유지하면서 다각적 사업체를 운영하는 일본의 대기업 집단이다. 일본 정부가 메이지 유신 이후 경제 부흥을 위해 인위적으로 키운 기업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쯔비시, 미쯔이, 스미모토 등이 대표적 일본 대기업집단들이다. 이들 자이바츠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 맥아더 제독에 의해 해체되고 기업 집단(Kigyosudan)으로 변신했다.

 

이들 기업 집단은 한국의 재벌과 유사한 사업 특징을 갖고 있다. 국가가 몇몇 소수의 기업들에 특혜를 베풀어 국가 경제 성장과 국부를 증진시켰다는 점과 사업 진출 분야가 경공업에서부터 중화학공업, 유통업까지 문어발식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일본 대기업은 한 가족이 아니라 한 가문 또는 문중이 공동으로 기업 집단을 통치한다. 반면 한국 재벌은 한 가족과 그의 친척들이 지배한다. 다른 차이점은 일본 자이바츠는 은행을 포함하는 금융업을 하고 있지만, 한국 재벌은 은행업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김영래, 2000).

 

이병철은 일제 강점기에 자이바츠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일본의 경제 동향과 기업들의 움직임을 삼성 사업 다각화와 기업 통제방식에 응용했다. 그는 삼성 그룹 제조업체의 플랜트 시설과 부품 등을 일본에서 구입하는 것을 가장 선호했다. 일본제품의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과 거리가 가까워 부품 조달과 플랜트의 애프터서비스가 용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한 신규 사업에 관련된 컨설팅도 일본에서 받았다. 특히 이병철은 내년 연말 도쿄에 머물면서 일본의 기술정보와 시장 정보를 수집했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 경영 방식을 삼성그룹에 도입하기 위해서였다(김영욱, 2010).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사진=호암재단 홈페이지

 

삼성이 재벌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 때다.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는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설립이 모두 이 시기다. 이승만 정권은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을 일본 제국주의자가 남긴 귀속 자산으로 이병철에게 염가로 넘겼다. 또한 이승만은 제일모직 운영에 필요한 자금과 기계 설비 수입 등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시중의 4개 국영 은행 중 3개를 민영화하면서 삼성에게 은행업을 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이 같은 특혜의 댓가로 이승만 정권은 대략 10~20% 정도 액수를 리베이트로 받았다. 이는 삼성이 정경유착을 통해 재벌로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Cummings, 1997; 이시가와 요이찌, 1988). 삼성의 모태가 되는 이들 3개의 기업은 이병철이 단독으로 설립하지 않았고 동업의 형태로 지배했다. 제일제당을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발기인 명단을 보면, 이병철(27.5%), 조홍제(15%), 김생기(11.5%), 구영회(10%), 허정구(10%) 등이다. 이병철을 제외한 다른 주주들은 나중에 삼성과 결별하고 별도의 기업을 창업했다. 조홍제는 효성그룹을, 허정구는 삼양통상을, 김재명은 동서식품을, 성상영은 대한화섬을 설립했다(이정원, 1989).

 

박정희와 이병철의 긴장관계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병철 등 10여 명을 부정축재자로 몰았다.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경제인들에게 벌금 대신 공장을 건설케 하여 그 주식을 정부에 납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이병철은 시중은행 3(상업·조흥·한일)를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민의 배고픔을 해결하겠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한 박정희는 이병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발표된 것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Kim, 1997). 군사 독재자 박정희와 삼성 그룹의 총수 이병철의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불안한 동거는 1965년 삼성 사카린밀수 사건 계기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이병철은 삼성그룹 오너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밀수 재벌의 오너란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는 처벌되지 않고 그의 둘째 아들 이창희가 구속됐다. 또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해야만 했다. 그 뒤 이병철의 장남인 이맹희가 삼성그룹 회장 자리를 잠시 맡았다. 하지만 이병철은 삼성 경영 일선에 다시 복귀했고 이맹희는 삼성에 다시 복귀하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이병철 회장은 1969년 삼성전자를 창립했다. 삼성은 필요한 기술과 자금을 미국으로부터 끌어들였다. LG와 대한전선 등 다른 재벌들이 일본 전자분야 대기업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과는 차이점을 보인다. 후발주자로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으로 보인다. 또한 이병철 회장은 중화학분야, 조선, 건설분야까지 사업를 다각화했다. 그 결과, ‘2’에 보여지듯, 삼성은 1950년 후반부터 재벌 순위 1,2위 자리를 유지하며 최상층부의 자격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사진은 국내 공업단지 시찰을 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앞줄 왼쪽 두번째)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앞줄 왼쪽 세번째).

 

2시대별 10대 재벌의 변천사.jpg

삼성이 재계 1위로서 자리를 굳건히 한 1970년대 이병철 회장은 삼성그룹을 그의 셋째 아들인 이건희에게 물러주기 위해 장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삼성문화재단을 이용하는 것이다. 비영리법인을 통해 삼성그룹을 그의 아들에게 물려줄 경우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법의 허점을 노린 셈이다. 그는 이건희를 후계자로 지명한 이후 삼성문화재단의 그룹 내 지분을 높여 갔다. 재단은 면세 혜택을 받는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 그룹 부회장과 의사 결정을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삼성그룹 내에 이건희 체제가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실제로 1987년 이병철 사망 이후, 삼성그룹을 통째로 물려 받은 이건희는 삼성의 사업 외연을 넓히기보다 삼성을 다국적 기업으로 만드는데 역량을 쏟았다. 동시에 선친 회장에게서 물려받은 삼성그룹을 5개의 범 삼성그룹으로 분화했다. 그렇게 탄생한 범 삼성그룹은 삼성, 한솔, 새한(1997년 금융위기 이후 파산), 중앙일보, CJ 그리고 신세계이다.

 

총수 일가 내부 통제라인 : 삼성주의, & 비서실

이병철은 제국 통치를 위해 3가지 방법을 상호연계해서 사용했다. 그 통제 방식은 삼성주의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삼성 경영 철학의 상징화, 비서실을 통한 대리통치 그리고 피라미드 소유 지배 구조의 고착화이다. 이중 삼성주의는 미디어를 통해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병철은 기업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한다는 사업 보국, 인재제일, 그리고 합리 추구라는 3가지 경영철학을 표방했다. 나는 이 경영 철학을 삼성주의라고 명명한다. 왜냐하면, 이 이념이 총수 일가가 제국을 지배 통치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의 이씨 일가에 대한 비판적인 언론 기사나 삼성의 악행을 고발하는 기사를 작성하면 기자들이 많이 받는 말이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 대한민국 망하면 네가 책임질거야?”라는 비난 섞인 비아냥이다. 삼성에 대한 이같은 무조건적인 옹호는 삼성주의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기업 애국주의 이데올로기는 삼성만 쓰는 홍보 전략이 아니다. 지난 1950년대 매카시즘이 팽배했던 미국적의 다국적 기업인 제네럴 일렉트릭(GE)도 많이 사용했다. 실제, 미국인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 이데올로기가 아직까지도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 연합뉴스

 

또한 삼성주의는 삼성맨은 엘리트이므로 삼성이 하면 국가에 도움이 된다는 의식과 연관돼 있다. 이는 철저하게 이씨 일가가 길러낸 그럴 듯한 허위의식이다. 왜냐하면 삼성그룹이 다른 재벌에 비해 사원 교육 프로그램을 일찍, 다양하게 실시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철저하게 삼성 총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되기 때문이다. 삼성은 자연인을 선출한 다음 사내 연수라는 성형술을 통해 삼성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고 이들에게 엘리트 의식을 주입한다. 이성태 경제평론가는 지난 1992년 월간 ’ 67호에서 삼성의 기업 연수 내용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그것은 주로 삼성인으로서의 소속감을 심어 주기 위한 내용과 삼성의 역사와 기업 이념 소개를 통한 긍지, 그리고 신입 사원으로 새 출발 한다는 관념을 불어넣어 주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프로그램은 철저히 삼성이라는 기업 중심의 사고를 하도록 작성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삼성맨으로 길러진 사람들이 최고 경영자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하는 관문이 있다. 삼성그룹 비서실(또는 기획조정실, 구조본부)이다. 이 곳의 명칭이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그 기능은 동일하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삼성은 유동적으로 비서실의 이름만 바꿀 뿐 비서실을 통해 제국 내부 구성원을 통제하는 그 기능은 바뀌지 않았다. 비서실은 삼성그룹의 현재와 미래를 통제하는 권력 핵심부이다. 실제, 이곳에서 근무하지 않은 사람은 삼성그룹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고 최고임원이 될 수도 없다.

 

그 역사를 추적해 보자. 비서실은 지난 1956년 이병철 회장이 직접 그룹 내에 설치했다. 직접 통치보다 비서실을 통한 간접 통치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회장이 비서실을 지배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회장만 비서실장을 임명하고 파면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비서실장은 회장과 의논해 비서실 임원과 직원들을 선발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비서실 직원들은 계열사에서 삼성맨으로서 능력과 충성심을 검증 받은 사람들만 선출된다. 하지만 이들 조직은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다(Kang, 1997).

 

예를 들어 보자. ‘정경문화정형태 기자는 19852삼성의 요새: 이병철회장 비서실이란 제하의 기사를 통해 삼성 비서실을 조명했다. 그 당시 비서실에는 150여 명의 임직원들이 13개 팀에 소속돼 있었다. 비서실장의 통제 하에 있는 비서실 직원들은 삼성그룹의 인사, 업무 감사, 관계사의 위험 관리, 정보 수집 등 대외 활동, 국제 동향, 오너 일가의 자산 관리, 그룹의 차기 사업 기획, 홍보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이처럼 삼성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삼성 비서실은 1985년 당시 서울직업별 전화번호부어느 구석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30년이 지난 현재도 삼성 비서실은 외부에는 비밀에 쌓여 있다. 흥미롭게도, 삼성의 미래를 이끌어갈 비서실 임직원들은 이씨 일가가 월급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 계열사에서 월급을 받는다. 삼성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는 총수 일가이지만 월급은 삼성 법인에서 받는 이같은 이중 구조는 회사법인과 오너 일가가 경영과 소유를 함께 장악했기에 가능한 기업 문화이다(김용철, 2010).

 

마지막 통제 양식은 돈이다. 삼성 총수 일가는 적은 소유 지분으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씨 일가가 비서실을 통한 제국 장악력을 확보한 점과 정치권력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가능한 일이다. 소유구조는 오너 일가-중핵기업-비 중핵기업이라는 피라미드 구조다. 일명 출자 순환 구조라고도 불리운다. 이것도 역사가 오래됐다. 삼성그룹의 소유 구조는 지난 1964년을 기점으로 변화했다. 이병철은 삼성의 사업 분야를 석유화학, 비료, 보험, 미디어, 의료, 대학교까지 넓혔다. 하지만 이들 계열사를 직접 소유할 정도의 자금은 없었다. 그래서 활용한 것이 중층 지배 구조 구축이었다. 이씨 일가가 중핵기업만을 직접 소유하고, 나머지 기업들은 중핵기업들이 비 중핵기업을 지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중핵기업은 삼성물산, 삼성생명, 제일제당, 제일모직, 전주제지, 중앙일보, 삼성전자 등이다. 이들 중핵기업들은 총수일가와 비 중핵기업들 간의 소유관계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왼쪽부터)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뉴스타파 캡쳐

 

이는 삼성이 사업 분야를 넓혀갈수록 이씨 일가의 지분이 줄어듦을 의미한다. 제일모직을 예로 들어 보겠다. 총수 일가는 제일모직 지분을 1965년에는 59.4% 소유했다. 하지만 그 지분은 줄어들었다. 1974년에는 38.3%, 198511.4%, 19907.2%까지 감소했다. 특히, 기업 공개를 전후로 이씨 일가 지분이 더 크게 감소했다. 제일모직이 기업을 공개한 1975년을 기점으로 비교해 보면, 오너 일가 지분은 1960-1974년 연평균 44.8%에서 1975-199025.6%까지 감소했다. 즉 피라미드 구조처럼 이씨 일가는 중핵기업 지분만 소유하고, 중핵기업은 산업별 계열사를 지배하는 형식이다(김영욱, 1993).

 

이 같은 피라미드 소유구조는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을 그의 외아들인 이재용에 물려주는데도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20048월간조선송승호 기자는 삼성그룹의 3대 승계 어디까지 왔나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건희 회장이 중앙 집권식 소유 지배 구조를 이용해 삼성을 그의 아들에게 넘겼다고 주장했다. 1995년 이건희 회장은 자신의 돈 608천만 원을 이재용에게 물려줬다. 증여세를 제외한 44억 원을 종잣 돈 삼아, 이재용은 삼성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삼성그룹을 상속받는데 있어 168천만 원만 지불했다고 비난을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이때 구축해 놓은 삼성재벌의 지배구조는 2014년까지 별 변동이 없었다 (송원근, 2014). 적은 지분으로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서 그룹내 경영권에 변화가 없음을 의미한다.


(3)] 삼성가, 혈연 지연 혼맥으로 권력 네트워크 구축 20180120

세계 기업 역사에서 재벌은 가족 기업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창업주와 그의 친인척이 주요 주주이고,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보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중요 의사 결정 과정에 관여하는 기업을 가족 기업이라 분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세기 초반 미국과 독일에서 상장된 100대 기업 중 각각 17%가 가족 기업이었다. 이태리의 경우는 50%, 스위스는 33% 정도가 가족 기업이었다. 영국은 1989년 런던증권거래소 100대 기업 중 13% 정도가 가족 기업이었다(Colli, 2003).

 

이 같은 가족 자본주의 형태는 서구보다는 일본, 중국, 한국, 대만 등 동아시아 권역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서구 가족 기업 구성원들은 동아시아 가족 기업 회사원들이 그룹 내외의 사회적인 관계에 좀 더 주목하는 것에 비해 좀 더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성향을 보인다(Hofstede & Bond, 1988).

 

차이를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 발달사의 차이와 문화적 차이 때문이다. 서구 자본주의는 분권형 봉건제가 붕괴된 이후 대지주가 산업 자본가로 변신한 반면, 일본을 제외하고 동아시아 자본주의는 식민 체제를 경험한 다음 정치권력이 신흥 자본가를 키워내는 발전주의 전략을 갖고 발달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서구 자본주의는 개인적인 자유를 중요시하는 기독교 윤리에 기반 한 반면, 동아시아는 집단성을 강조하는 유교 철학에 기초했다는 차이점도 있다.

 

공자 (孔子)

 

유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연장자에 대한 권위 존중, 부계 쪽의 가족 동맹 강화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의리 등을 중요시 한다. 동시에 나이, 성별과 계급에 따른 위계질서를 강조하면서도 같은 구성원들끼리의 화합을 강조한다. 이 같은 유교적 가치들이 동아시아 가족 기업 형태와 결합되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연장자에 대한 존경은 상사에 대한 존중으로, 구성원 간의 의리는 조직원 간의 화합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난다(Chen & Chung, 1994). 그래서 일본, 대만, 한국, 중국 등의 자본주의 형태를 유교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유교자본주의 국가로 분류된다 할지라도 유교적인 가치가 기업 내부 문화 형성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보인다는 점이다. 개인보다는 조직의 안정과 화합을 강조하는 유교의 철학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한국 기업 문화는 같은 그룹 내부의 위계질서 안에서의 화합(인화)를 강조한다. 일본 기업은 그룹 내에서의 조화와 사회적 응집력을 갖는 화합(wa)을 강조한다. 중국은 조직원 간의 조화 또는 화합을 강조한다는 점은 한국과 일본 기업 문화와 비슷한 측면을 보이지만 그룹 내 네트워킹이 그룹이 아닌 개인적 친분(guanxi)에서 일어난다는 점은 차이가 난다(Alston, 1989).

 

특히 한국 재벌처럼 가족끼리만 대규모 기업 집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폐쇄적인 특징은 다른 나라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유교자본주의 국가인 일본과 중국도 다른 가족 또는 가문들과 기업의 소유 지분과 이사회 의석을 공유하지만 한국 재벌은 왕조 체제처럼 기업에 관한 통제권을 철저히 가족 내부 구성원만 행사할 수 있다(Ungson et.al, 1997). 이 같은 한국재벌의 폐쇄성은 재벌 형성 초기부터 형성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국 파워 엘리트 기원: 연고주의

재벌의 창업자와 그의 가족들은 한국 대자본가들이다. 이들은 한국형 파워 엘리트로 규정 할 수 있다. 미국 사회학자 돔호프(Domhoff, 2006)는 파워 엘리트를 상류 사회의 일원이면서 기업 공동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가 정책 형성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기업의 임원을 파워 엘리트 중에 엘리트로 표현하는 돔호프와 달리 한국 사회학자 홍덕률(2002)은 한국형 정치경제 파워 엘리트를 주류라는 말로 표현한다. 주류는 사회의 제도적 권력과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특히 한국 주류들은 아는 사람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선택과 배제의 원리에 충실하다. 아는 사람는 지연, 혈연, 학연 그리고 결혼이라는 접합점을 통해 확장된다. 같은 지역, 같은 고향, 같은 학교 그리고 같은 집안이라는 필터를 통해 주류에 편입될 수 있는지 배제되는지 결정된다.

 

이승만 전 대통령(왼쪽)과 박정희 전 대통령

 

이처럼 폐쇄적인 한국 주류 집단은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때 형성됐다. 그래서 홍덕률(2002)와 김교동 (1976)은 재벌의 창업주들을 정치적인 기업가들이라고 규정한다. 왜냐하면 재벌 창업주들은 학연과 지연 등의 연고주의 고리를 통해 정치권에 줄을 대고 각종 특혜를 그들끼리만 독식했기 때문이다. 자원을 배분하는 독점적 권한을 가진 정치 권력자들이 그들과 같은 고향, 같은 학교, 같은 집안의 특정 기업가에게만 특혜를 베푼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재벌의 창업주들은 6·25 전쟁이 끝난 이후 연고주의를 기반으로 전쟁 구호 물자와 구호 자금을 독점하기 위해 각종 협회를 구성했다. 정치권도 이 협회에 가입한 기업들에게만 원조 물자 배당 등의 각종 특혜와 원료 독점, 판매독점권을 보장했다. 대표적인 협회는 제당협회, 방직협회, 제분공업협회, 건설협회 등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 관여한 협회는 대한제당협회, 대한제분협회, 대한소모방협회, 대한모방직협회, 대한주정협회 등이다. 그는 협회에서 받은 자원과 자금을 이용해 제일제당, 제일모직, 조선양조 등의 회사를 1950년대에 설립하거나 확장했다. 이 같은 선택과 배제의 연고주의는 박정희 독재정권까지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외자 물자를 통해 기업가 집단을 순치한 이승만과 달리 은행 등의 금융을 통해 재벌 창업주들을 통제했다. 정부는 금융 특혜, 조세 감면, 차관 배정, 부실기업 인수 특혜 등을 소수의 선택된 재벌들에게만 제공했다. (Chang, 1993). 이처럼 1950년대와 1960년대 정권과의 결탁을 통해 성장한 재벌 창업주들은 한국형 대자본가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연고주의를 기반으로 한국형 정치경제 엘리트의 탄생이다. ‘1’에서 보여지 듯, 핵심 정치 집단은 특정 학교와 지역 출신이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경제 집단은 이들과 연결된 재벌 창업주들이다. 상호협력 관계를 통해 성장해온 한국 정치 경제 파워엘리트들은 몇가지 이념들을 공유한다. 대표적인 이념들은 성장제일주의와 반공 이념을 공유하면서 친일과 친미 외교 정책, 국가의 축적된 부의 재분배 과정에서선성장 후분배란 이념으로 노동자 배제 등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때 공유된 이 이념들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지연과 학연 등의 연고주의는 재벌 창업주들이 정치권과 연결돼는 고리로만 작동한 것은 아니다. 연고주의는 재벌에서 일하는 직원을 선발하고 임원으로 승진시키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대 초반 유태현 외 5(2005)이 분석한 삼성 그룹 임원의 출신 지역을 살펴보자. 출신 지역이 확인된 임원 652명 중, 영남권 출신이 256(41.0%)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수도권 출신이 239(38.2%), 중부권 출신이 88(14.1%), 호남권 출신 37(5.9%)이다. 또한 삼성 그룹 임원 중 서울대 출신이 가장 많다. 유태현 외 5(2005)이 조사한 1,184명의 임원진 중에서 서울대 출신 298(25.2%), 지방 대학 241(20.4%), 서울대와 연고대를 제외한 서울 소재 대학 176(14.9%), 연대와 고대 출신은 각각 108(9.1%)107(9.1%)명이다. 출신 대학별 대표 이사 구성도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당시 삼성 그룹 전체 68개 계열사 중 자료를 수집한 66개 계열사의 대표 이사 중 출신 지역을 확인한 57명의 출신 지역별 구성을 보면, 영남권 26(45.6%), 수도권14(24.6%), 중부권8(14.0%), 호남권 6(10.5%), 기타 3(5.3%)이다. 이들의 출신 대학은 서울대가 가장 많고, 그다음은 연대와 고대 순이었다. 이들 회사의 사외 이사들 비율도 임원 비율과 비슷하다. 다만 특이한 점은 지방 대학 출신은 드물다는 것이다 (pp. 143~148)

 

또 하나의 가족: 결혼 동맹

재벌 창업주들은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그들만의 성을 높이 쌓았다. 사돈을 맺는 대상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점을 보인다. 한국 대자본가 집단은 정치권력이 경제 권력을 지배했던 1980년대 이전까지는 정관계 가문과 결혼동맹을 결성했다. 정치권력이 자원배분 독점권을 통해 경제 권력을 지배했던 시기였던 만큼 정관계 인사들과 인맥 쌓기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 축적 과정이 끝난 1980년대 이후에는 같은 재벌가 가문 자녀와 성혼하는 경향을 보였다. 재벌 이익 단체인 전경련 회원 소속사 창업주 자녀들의 결혼 사례를 분석한 공정자(1989)는 재벌 가문들의 혼인 유형은 상류층 간의 계급내혼의 특징을 보인다고 밝혔다. 재벌 창업주들은 재계를 포함해 정·관계 등의 저명인사들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이다. 결혼도 성별에 따라 다른 특징을 보인다. 재벌 창업주들이 며느리를 맞이할 경우 정관계 출신을 선호하고, 이들이 사위를 맞이할 경우 정관계보다는 재계 출신을 선호했다 (서울경제신문, 1992). 이 같은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가부장적 재벌문화와 연관된다. 아들은 그룹 계열사 상속을 통해 그룹의 재산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지만 딸은 그룹 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재벌들은 결혼동맹을 통해 서로 연결될 수 있다. 박해현 (1992)의 분석 기사를 보자. 이병철 회장의 3남인 이건희가 지난 1967년 홍진기의 맏딸 홍라희와 결혼하면서 전 국무총리인 노신영 그리고 현대그룹 정주영과 건너 사돈이 된다. 홍진기가가 양쪽집안과 혼사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한 연구결과도 있다. 신호철(2005)은 사회관계망 조사 방법론을 이용해 8대 재벌과 88개 유력 가문에 속한 361명의 혼맥 관계를 분석했다. 그 결과 재벌가 혼맥 중심은 LG가문이었다. 재벌 가문들이 LG 가문을 통할 경우 13촌 이내에서 모두 연결됐다. 그 다음으로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는 가문은 삼성가문이었고, 가장 화려한 혼맥을 가진 언론 가문은 중앙일보 가문이었다.

 

▲ ⓒ getty images bank

 

삼성 파워 네트워킹 핵심: 이병철-신현확-홍진기

삼성가는 한국 재계-정계-관계의 거미줄 혼맥도에서 주요한 한 핵을 차지하고 있다. 창업주 이병철이 직접적으로 정관계 인사들과 혼맥으로 연결된다기보다 결혼을 통해 한 가족이 된 홍진기 자녀들의 혼맥을 통해서다. 이씨와 홍씨의 혼맥 분석을 하기 전에 이들의 관계 분석을 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파워엘리트들의 특징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병철과 홍진기를 연결해 준 사람은 TK 마피아의 대부인 신현확이다. 이병철과 신현확은 같은 영남출신이다. 신현확과 홍진기는 학연으로 연결돼 있다. 이들 모두 경성제대(서울대) 법무학부을 졸업했다. 또한 고등문관시험(사법고시)에 합격한 고위 관료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신현확은 학연으로 알게 된 홍진기를 지연으로 이병철을 소개한 것이다. 19603·15 부정선거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홍진기는 경무대 입구 발포 명령자란 혐의로 구속 복역 중이었다. 그때 이병철이 감옥으로 홍진기 면회를 가면서 만남이 시작됐다. 당시 무기 징역을 선고 받은 홍이 어떻게 풀려났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 동양방송 사장에 취임했다. 그 뒤 이병철과 함께 중앙일보을 창간하고 확장하는데 적극 개입했다. 그룹 내에서 그의 위상은 계열사 회장 이상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1971년 삼성 후계자를 정한 다음 이병철은 유언장에 삼성 그룹의 후계자는 건희로 정한 만큼 건희를 중심으로 삼성을 이끌어 갈 것이며,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이 뒷받침해서 승계해 주기 바란다라고 명기해 놓았다(이경남, 1986). 다른 예도 있다. 이병철은 1986년 세상을 떠난 홍진기에 대한 조사에서당신은 내 일생을 통해 제일 많은 시간을 접촉한 평생의 동지요, 삼성을 이끌어온 같은 임원이요, 사업의 반려자였으며, 가정적으로는 나의 사돈이었다고 추모했다(이경남, 1986).

 

신현확 전 국무총리

 

신현확은 홍진기와 달리 오랜 동안 정관계에 몸담았다. 1964년 경제과학심의위원이 되어 제3공화국 정부와 인연을 맺은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보사부 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역임했다. 197910·26 사태 이후 최규하 정부에서 잠시 동안 국무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신현확이 삼성 그룹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이 세상을 떠난 두 달 뒤인 19869월이다. 당시 삼성 그룹의 소유 구조에서 중핵 기업인 삼성물산 사장직을 맡았다. 1년 뒤 이병철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건희가 삼성 그룹을 무난히 승계 받을 수 있도록 대내외적인 환경을 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병철 자녀들

경북 의령군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이병철은 2’에서 보듯 35녀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벌의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문화가 삼성에서도 발견된다. 아들들은 모두 그룹 내 계열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만 딸들은 대부분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장남 이맹희는 경북고 32회 졸업생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김윤환 전 정무제1장관, 정호용 전 내무부 장관 등과 고교 동기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삼성물산과 한국비료 등 삼성 계열사 임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1965년 삼성이 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돼 이병철이 삼성 그룹 회장직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 때 그룹을 책임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삼성 그룹의 경영 일선에 복귀하지 못했다(이맹희, 1993). 그는 1958년 경기도지사와 농림부 양정국장을 지낸 손영기 딸과 결혼했다. 이맹희가 삼성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과 달리 그의 아내는 1992년 안국화재(현 삼성생명)의 최대 주주(19.6%)로서 상무이사를 맡아 경영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3’에서 보듯, 이맹희는 3명의 자식이 있다. 그의 큰 아들이 CJ 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병철 회장의 둘째 아들인 창희는 일본 와세다 시절 만난 이영자와 결혼했다. 그녀의 부친은 일본 재벌인 미쯔이물산 임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이창희는 1990년대 범 삼성 계열 그룹인 새한 그룹을 이끌다가 세상을 떠났다.

 

2012729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일가가 영국 런던 올림픽파크의 아쿠아틱스 센터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결승을 참관하기 위해 수영장을 방문했다. 연합뉴스

 

이병철 선대 회장에게서 삼성 그룹을 물러 받은 사람은 3남인 이건희다. 일본 와세다 대학과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중앙일보, 삼성전자 등 계열사에서 임원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1967년 자유당 시절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지낸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결혼했다. 서울대 미대 출신인 홍라희는 이건희가 그룹 회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중앙일보 편집국과 경영 일선에서 활동했다. ‘4’에서 보여듯이, 이들 부부는 12녀 자녀를 두었다. 이들 자녀들은 모두 삼성 그룹 내에서 최대 주주이며 경영자들이다.

 



결혼을 통해 이병철가의 일원이 된 홍라희 가족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병철 회장의 회고록에 언급될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홍라희의 부친 홍진기는 이병철-이건희 승계 라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범 삼성 그룹에 포함되는 중앙일보 그룹 홍석현 회장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홍석현은 홍라희의 남동생이다. ‘5’에서 보듯, 홍라희는 5명의 동생들이 있다. 이들 모두 한국 최고 학벌을 취득했고, 한국 주요 파워 엘리트들과 결혼했다. 예를 들면, 그의 큰 동생 홍석현은 박정희 정권 당시 검찰총장과 안기부장을 지낸 신직수의 딸과 결혼했다. 신직수는 박정희 철권 통치때 법률자문을 담당했다. 그의 여동생은 노신영의 차남과 결혼했다. 이 결혼을 통해 삼성은 다른 재벌가와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갖는다. 노신영의 장남 노경수는 현대 정세영의 장녀와 혼인했다. 현대의 정몽준은 전 외무장관 김동조 자녀와, 김동조의 또 다른 자녀는 GS 창업 가문과 결혼했다. 홍라희는 또 동아일보 소유 집안과 사돈이다. 그녀의 사위가 동아일보 주식을 갖고 있고 창업주의 손주다(신호철, 2005; 조동명, 2004).

 



 

마지막으로, 이병철의 장녀 이인희는 경북지역 대지주 조범석의 자제로 경북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은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장을 지냈다. 차녀는 LG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3남과 결혼했다. 이병철의 3녀 순희는 교수 출신과, 4녀는 삼성맨과 결혼했다. 막내딸은 4·5대 국회의원과 삼호방직 회장의 차남과 결혼했다.

 

삼성의 미디어 진출 역사는 한국 미디어의 기업화 과정 1.24

[연재기고 (4)] 한국 매스컴 속의 삼성 미디어

언론의 본질보다 그룹의 이해관계를 우선시

 

한국 언론과 대중문화는 이승만 정권보다는 박정희 독재 정권의 비호 아래 기업으로서 성장했다. 박 정권은 소수의 체제 순응적인 언론 소유주에게만 특혜를 베풀고 왜곡된 광고 시장 구조를 용인하면서 언론 기업화를 가속화시켰다. 그래서 Park, et al.(2000)은 한국 언론은 서구와 달리 정치적인 후원을 통해 성장해 시민의 민주 권리보다는 국가 안보를 우선시하는 미디어 콘텐츠를 제작 유통하는 국가주의 전통이 강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한국 언론기업들이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 자본을 축적하고 언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진은 국내 공업단지 시찰을 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앞줄 왼쪽 두번째)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앞줄 왼쪽 세번째).

 

한국 언론기업들은 소유 지분과 이사회 의석을 금융 자본과 공유하는 서구 언론기업들과 달리 가족들이 기업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가족 자본의 성격이 강하다(Kwak, 2012). 이들은 언론사 내부의 편집권과 경영권 통제를 통해 정보 제작, 유통 과정에 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 가족 자본가들은 또한 왜곡된 한국 광고시장 구조에 기대어 자본을 축적했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세계 어느 나라에도 한국 광고 시장처럼 중립성이 배제된 곳은 없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는 상품 정보의 중립성 확보를 위해 광고 회사 설립에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다. 광고주나 광고하는 매체, 심지어 기타 광고 자재를 공급하는 업체조차도 광고 회사에 투자할 수 없다. 광고를 제작 유통하는 회사의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신이섭·서범석, 2011). 한국과 유사한 미디어 시스템을 갖고 있는 일본조차도 광고시장의 중립성은 보장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광고주가 광고 회사를 갖고 있으면서 매체를 갖고 있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광고주와 광고회사 그리고 언론사가 한 가족의 소유인 경우도 있다. 이런 기울어진 언론지형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다.

 

독재정권, 재벌, 언론 기업화     

한국 대중 매체 역사를 가르는 기준점은 1960년대와 1980년대다. 1960년대는 정치적인 통제가 한국 언론과 대중문화를 통제했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시장을 통한 경제적인 통제가 시작된 시기다. 매체별로 살펴보면, 1960년대 한국 신문들과 영화사들은 기업화 과정을 시작했고, 1970년대 광고 시장이 성장하면서 방송도 매출 확장을 통해 기업의 모습을 갖춰갔다. 1980년대는 미국의 통상 압력으로 인해 영화와 광고 시장이 개방되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방송과 신문을 동시에 소유하는 복합미디어 기업을 해체했다. 그 후, 1987년 시민혁명이후 한국 신문 시장은 정치적인 통제가 아닌 시장 통제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1990년대는 케이블 텔레비전과 디지털 미디어가 본격 도입되면서 다매체 다채널 영상 시대가 열렸다. 이처럼 한국 언론과 영상 매체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기업화 과정을 거쳤다(Jin, 2011). , 이제 시대별로 살펴보자.

 

해방 이후 한국 신문들은 신문 및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미군정법령 88호에 의해 통제를 받고 있었다. 미군정은 이 법령으로 좌익 성향의 신문을 탄압하고 친 우익적인 매체만을 시장에 남겨뒀다. 진보적인 신문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원천 차단한 셈이다. 이승만 정권도 미군정과 유사한 언론 정책을 행사하면서 한국 신문은 태생적으로 집권 세력 편향적인 보도를 하거나 탈정치적인 대중 신문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김남석, 2010).

 


1961516,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잡았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채찍과 당근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언론법과 정책을 시행했다. 채찍 정책은 체제에 반항하는 언론사 허가 취소, 제반 인쇄 시설과 통신 시설 의무화, 기자와 경영진 분리 정책 등이다. 이 정책은 자금력이 약한 비판적인 성향의 신문사들을 시장에서 쫒아내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로 인해 정권에 우호적인 신문이거나 정권 비판에 소극적인 신문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언론 기업의 경영 여건을 개선한다는 목적으로 편집인 제도를 도입, 기자와 경영진들의 관계를 기존의 동지적 협력 관계에서 상하적 종속 관계로 변질시켰다.

 

박정희의 당근 정책은 대대적인 물량공세다. 정권 코드 맞추기에 적극적인 언론사들은 정권으로부터 저리의 자금 융자, 신문용지용 원목의 수입 관세 인하, 세제 지원 등의 특혜를 받았다. 또한 방송 사업을 신청할 경우 방송-통신 겸업을 허가해 주었다. 여기에 경영 다각화를 위해 인쇄업, 광고업, 운송업, 호텔업 등을 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하고, 이를 설립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인 상업 차관을 저리에 대출해 주었다(서현진, 2003). 다시 말하면 한국 신문은 재벌처럼 박정희 정권 비호 아래 언론 자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신문 기업화를 촉진한 박정희는 또한 방송기업화도 함께 시도했다. ‘1’에서 보듯, 한국 방송은 1950년 후반부터 미국 텔레비전 제조회사인 RCA가 한국 방송 시장에 진출해 있었다. 하지만 대중이 시청할 수 있는 수상기 부족과 광고주 부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런 와중에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국영 방송국을 설립하고 재벌들에게 민간 방송국을 허가해 줬다. 하지만 방송국들은 재정난에 허덕였다. 시설 자금 외에도 수익 낼 수 있는 창구가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국영 방송국인 KBS가 시청료를 국민으로부터 받고 상업광고를 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하지만 1960년대는 한국 제조업이 경공업 수준에 머물고 있어 대형 광고주가 출현하지 않은 시기였다.

 

 

영화도 산업으로서 정비되기 시작한 시기는 1960년대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 최초의 영화법 제정을 통해 영화 제작업자, 수입업자, 수출입업자의 등록제를 도입했다. 이법은 몇 번의 개정 작업을 통해 군소 프로덕션을 정비하고 신문과 방송처럼 일정 시설과 인원을 갖췄을 경우만 영화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독립된 영화 제작자의 탄생을 전속제, 시설 기준, 예치금 납부 등으로 철저히 묶어두면서 영화에 대한 박정권의 통제 권한을 행사했다. 또한 외국 영화 수입 추천권을 국산 영화 제작, 수출 편수 및 수상 실적과 연계시키는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제작자 중심의 편향된 시장 구조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영화 제작에 필요한 하부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은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제도를 도입한 것도 있다. 1966년 스크린 쿼터제 도입이다. 국산 영화 및 합작 영화의 수출 실적에 따라 외화 수입량을 연동시킨 것은 한국 영화가 지속적으로 제작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한 장점도 있다(영화진흥위원회, 2001).

 


제일기획 사옥. 사진=제일기획 Blog

 

1970년대는 광고 산업의 확장과 방송사들의 기업화 과정이 활발했다. 재벌들이 사업 분야를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넓혀가면서 대중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광고 확대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광고에 마케팅의 개념을 접목시켜야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도입된 것이 광고 대행사였다. 광고 대행사란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여 줄 고객을 갖고 있는 판매자를 대신하여 광고물을 기획, 개발, 제작하여 광고 매체에 싣는 크리에이티브 및 영업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기업 조직체이다. 광고주와 광고 매체의 중간에서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기호 조사, 시장 조사 등으로 광고주를 돕는 마케팅 활동도 함께 수행한다 (원우현, 1984. pp. 202-210). 이 시기 등장한 광고 대행사는 제일기획, 연합광고, 만보사 그리고 오리콤이다.

 

이들 광고 대행사들은 재벌의 소유이거나 신문사와 소유지분을 공유한다. 세계 광고역사에서 한국만이 갖는 특이성이다. 서구에선 광고주와 광고 매체는 광고회사를 소유할 수 없다. 상품 정보의 중립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일기획과 연합광고 지분을 살펴보자. 1973년에 설립된 제일기획 소유 지분을 살펴보자. 자본금 1억 원으로 출범한 제일기획의 주요 주주는 롯데제과, 삼립식품, 태평양화학, 제일모직, 신세계백화점,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제일모직, 제일제당,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 등이다. 제일기획의 주요 광고주는 삼성전자. 신세계백화점 제일제당 등 삼성 계열사들이다.

 

1974년 설립된 연합광고 주요 주주는 문화방송·경향신문(20%), 동아일보(10%), 태광산업(10%) 등이다. 주요 광고주는 금성사, 기아산업, 동아제약, 럭키, 미원, 해태제과 등이다. 이처럼 광고회사와 광고주 그리고 광고매체가 동일한 경우가 많다. 제일기획은 중앙일보와 TBC과 함께 삼성 계열사다. 이병철 일가의 통제를 받는 재벌 그룹이다. 연합광고는 MBC TV와 라디오 및 경향신문과 같은 계열사이고, 이들 광고주들이 주요 주주이다. 상품정보가 대중에게 선보이기 전에 대자본 위주로 오염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 광고대행사들은 모두 하우스에이전시이다. 재벌이나 언론사를 배경으로 설립됐다는 의미다. 이들 광고 대행사들은 상품 마케팅만 전개한 것이 아니라 사보 발행을 통해 기업 이미지 향상에 기여했다 (신이섭·서범석, 2011). 이 같은 재벌과 광고시장의 구조적 유착관계는 한국 언론 시장의 대자본 편향적인 구도를 만들었다.

 

2’에서 보듯, 재벌들은 신문, 방송, 통신, 광고 시장에까지 진출했다. 재벌이 미디어 기업을 소유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경제적으로 언론 기업을 계열사로 둠으로써 정보의 불확실성과 거래 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모기업인 재벌이 정권과 긴장 관계를 형성할 때 방패막이로 활용할 수 있다(강현두·이창현, 1987).

 


 

마지막으로 1980년대는 한국 미디어 산업 구조를 정권이 직접 통제하는 정치적인 지배에서 시장을 통한 경제적인 통제로 넘어가는 과도기다. 1979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비판적 언론인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지방 언론사들을 강제로 통폐합한다. 이 통폐합 조치에 방송·통신 겸업 금지도 포함됐다. 이로 인해 기존에 신문과 방송 또는 통신 계열사를 운영하고 있던 재벌들은 언론 시장에서 자리를 감추기 시작한다. 삼성은 방송을 포기한 대신 신문을 선택하고 지방 문화방송국을 소유하고 있던 다른 재벌들은 소유 지분을 전두환 정권에게 넘긴다. 통신사를 운영하고 있던 두산, 삼호 그리고 쌍용도 언론사업을 접었다(Kwak, 2012).

 

삼성을 제외하고 정보 시장에서 물러난 재벌들은 1980년 후반 시장 개방과 자유화 바람을 타고 영상 산업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재벌의 영화와 비디오 산업 진출은 이데올로기적 측면보다 경제적 이윤 추구 목적이 더 크다. TVVTR을 제작하던 삼성과 대우, LG 등은 수요 창출을 위해 비디오 유통업에 진출했다. 전자제품인 하드웨어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비디오 제작 시장에 뛰어 들었다는 의미다. 여기에 케이블 방송 도입을 앞두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재벌들이 영상 산업 시장에 진출했다(영화진흥위원회, 2001).

 

삼성, 미디어 사검열 역사    

삼성의 미디어 진출 역사는 한국 미디어의 기업화 과정과 일치한다. 삼성은 다른 재벌들에 비해 대자본 축적 과정이 빨랐다. 대부분의 재벌 그룹들이 1960년대 박정희 정권과의 유착 관계를 통해 사업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에 삼성은 신문사와 방송국을 설립했다. ‘3’에서 보듯, 삼성은 1960년대에 신문과 방송 분야에 진출했고, 1970년대는 광고와 사보, 1980년대에는 영상과 음반 산업에 진출했다. 1984년 삼성은 삼성물산 산하에 스타맥스 (Starmax)’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드림박스로 명명된 이 회사는 VHS 판매를 위한 비디오 작품을 제작하거나 헐리우드 등에서 외화를 수입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영상 부서였다. 1985년 삼성은 또한 삼성SDS를 설립했다. 그룹 내 전산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설립된 이 회사는 1980년대 당시 정부가 추진 중인 정보통신 국가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삼성SDS1990년대 다른 재벌 기업들이 PC통신에 투자를 확장한 것과 달리 인터넷을 이용한 디지털 소통방식에 더 치중했다. 1990년대 삼성은 오렌지(Orange)라는 대중 음반 생산을 담당하는 회사를 제일기획의 산하 기업으로 설립했다(Variety, 1997). 그리고 1990년대에는 케이블 방송 분야에 진출했다.

 


 

삼성이 TBC 설립 이후 1965년 중앙일보를 설립하려 하자 조선, 동아, 한국일보 등의 반발이 거셌다. 중앙일보를 설립할 당시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은 이병철 삼성 회장에게 재벌이 어떻게 신문을 만듭니까. 나랏돈 갖고 돈 번 사람이 정부를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신문 사업이란 것이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어 우리도 겨우 먹고 살기 바쁩니다. 재벌이 왜 신문에까지 손을 대려고 합니까. 그럴 돈 있으면 신문에 광고나 많이 내 신문사들을 도우십시오.”(2008, pp. 53-54) 라고 충고했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재벌의 언론시장 진출에 대한 거부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막강한 자금력을 갖고 있는 삼성이 기업화 초기 단계인 신문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기존 언론사들에겐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실제, 중앙일보 창간 이후 다른 언론사들이 어려움에 처했다. 삼성이 경쟁사에서 기자들을 대량으로 스카우트해 갔다. 여기에 중앙일보는 무가지를 살포하고 경품 끼워 넣기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전개하면서 기존 신문 시장 질서를 통째로 뒤흔들었다(김주환, 2006, p. 267).

 


중앙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삼성은 1960년대부터 신문(중앙일보)과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TBC)을 운영하는 복합 미디어 기업이었다. 이들 미디어 기업들은 매출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기보다는 모기업인 삼성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경쟁사들을 비방하는데 활용했다. 강현두·이창현 (1987) 연구 결과가 하나의 사례일 수 있다. TBC1966년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과 1969년 미원-미풍 조미료 광고 방송 사건이 터졌을 때 삼성에 유리한 내용을 보도하거나 프로그램으로 편성했다. 공공재인 미디어를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한 것이다. 미디어 소유 집중에 따른 사적 검열이 일어난 사건이다.

 

김주환(2006)도 유사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삼양사 소유의 동아일보와 삼성 소유의 중앙일보 사례를 꼽았다. 1950년대 제당과 의류 분야에서 앞서 있던 삼양사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로 급성장한 삼성과 1960년대 강하게 대립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삼양사 소유의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4개월 동안 집중 보도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모기업인 삼성은 10년 간 동아일보에 광고를 중단했다. 재벌 소유 언론사인 중앙일보는 삼양사 소유 고려중악학원의 토지 불법 매각과 탈세, 동아일보 사주 일가의 상속세 탈루와 그린벨트 훼손 등을 집중 보도했다. 동아와 중앙의 이전투구 양상 싸움의 근원은 모기업 재벌 이익 보호를 위해서였다. 이 같은 편파주의 보도 행태는 언론의 주도권이 시장으로 넘어간 2000년대에는 더욱 교묘하고 정교해졌다.

 

삼성 오너만 자유로운 시장주의 체제 2.3

[연재기고 (5)] 금융 자유화와 이건희의 범 삼성계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재벌

       

1980년대는 과도기였다. 정치적으론 군사 독재정권에서 시민정부로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시작된 시기였고, 경제적으론 관치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되는 도입기였다. 정치적 전환 변곡점은 1987년 시민혁명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은 7년 동안 국민들을 강압적인 폭력으로 통치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 한국인은 자유롭게 정치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게 됐다. 정치적 자유화인 절차적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제적 체제 변화는 시민들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미국에 의한 외압 때문이었다. -미간 무역거래에 있어 미국의 적자가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1985년 한국정부와 미국 통상대표부는 한국의 금융, 보험, 광고, 영화 시장 개방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한국경제가 세계 경제 자유화 흐름에 편입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 다음해부터 한국정부는 보험업과 증권 등 금융업과 영화와 광고 등의 미디어 시장을 개방했다. 경제 중심축이 정부 주도형에서 시장 중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시간이었다(Sa, 1993).

 

사실 한국 시장 개방은 미국의 통상압력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의 자발적 협력도 있었다. 19805월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모델을 승계할 수 없었다. 그동안 금전적 물적 자원을 지원해 줬던 미국과 일본이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과 영국 등 앵글로색슨 자본주의 국가들은 불황 타개책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한마디로 시장 중심 경제구조를 말한다. 대표적인 정책들은 공기업의 사기업화, 금융시장 활성화, 소유 지분 완화 및 기업의 인수 합병 (M&A) 활성화 등이다. 미국과 영국은 또한 이 같은 경제 개방화 조치를 아시아국가도 요구했다. 자국의 기업들이 아시아 시장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길을 터주기 위해서였다(Harvey, 2005). 이 같은 시장 개방화 흐름 속에서 전두환은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려 했다. 미국으로부터 정치적 인정을 위해서였다. 전두환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기 위해 미국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고 돌아온 시장주의자들을 경제 관료로 임용했다. 이들은 정부의 시장 개입 축소, 기업 활동 자유 보장, 금융 자유화 그리고 공공 부문 민영화 정책을 추진했다 (Kim, 1999).

 


1985426일 미국을 방문중인 전두환 대통령 내외와 레이건 대통령 내외가 백악관 발코니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이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은 한국 미디어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1980년 중반 통상 협상을 통해 새로운 민영 방송국 설립, 외국 광고대행사의 자유로운 영업활동 보장, 헐리우드 영화의 직접 배급 등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 같은 미국 측의 요구로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정부는 SBS 등을 포함하는 민영방송국을 추가로 허가했고, 다국적 광고대행사들과 헐리우드 영화 배급사들은 한국 미디어 시장에서 자유롭게 영업 활동을 하게 됐다(Kim, 1996). 이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1993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영삼 정권 때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994년 쌀 시장을 개방했고 1995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시장의 자율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한국 독점기업으로 성장한 재벌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특히, 재벌들은 외국 은행에서 차관을 직접 들여와 금융 계열사를 설립하고 국민들을 상대로 이자 장사를 했다. 또한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중화학 공업, 반도체 그리고 자동차 산업에 진출해 한국 경제 부실 규모를 키웠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재벌의 무분별한 경제활동을 제재할 수단이 없었다. 독재 정권 시절의 강한 정부-약한 재벌의 권력 관계가 민주 정부시절엔 약한 정부-강한 재벌로 역전된 것이다 (홍덕률, 2006). 한마디로 1990년대는 선출되지 않은 경제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통제하는 재벌공화국 시대였다.

 

금융 자유화와 삼성가의 편법 상속    

경제 자유화와 시장 개방화 흐름 속에서 삼성의 통치권은 설립자 이병철에서 이건희로 교체됐다. 이병철 삼성 창립자는 198711월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삼성은 32개의 그룹 계열사, 종업원 15만 명, 11조 원이상의 자산에 17조 원이 넘는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셋째 아들인 이건희가 121일 그룹 회장 직을 승계했다. 회장에 취임한 그는 당면한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그룹의 새로운 먹거리 발굴과 형제들 간의 상속 문제였다.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 유통, 종합화학, 영화-영상사업, 인터넷 등의 사업 분야에 진출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특히 삼성자동차는 1999년 법정관리로 넘어가면서 약 45천억 원의 부채까지 남겼다. 자산 매각을 통해 2조 원 정도의 부채는 상환했지만, 나머지 약 25천억 원을 갚아야했다. 이처럼 이 회장의 경영실적은 탁월하진 않았다. 하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그는 삼성전자를 초국적 기업으로 성장시켜 세계인의 머릿속에 삼성을 각인시켰다. 이건희의 경영 스타일은 이병철과 비슷하다. 그룹 비서실 (또는 구조본부)을 통해 수렴 청정하는 방식이다. 그룹의 장기적인 밑그림과 자금운영은 비서실에서 총괄하도록 하고, 정기적인 그룹 사장단 회의를 통해 계열사 업무를 보고 받았다(선우정, 2000).

 


1980년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진=삼성

 

이건희 회장의 또 다른 임무는 가족 간의 상속 문제를 무난히 처리하는 거였다. 그는 선대회장으로부터 그룹을 통째로 물려받았다. 그가 낸 상속세는 1501800만 원이었다. 삼성 자산 규모에 비해 턱없이 낮은 상속세금을 냈지만 위법 사항은 아니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아들에게 넘긴 자산은 237억 원 2300만 원과 몇 개의 공익재단이었기 때문이다(권영준, 2005). 공익재단에 대한 세금 규정이 없는 점과 재벌 총수가 그룹 경영권을 통제하는 한국 재벌의 특성을 적극 활용해 세금을 아낀 것이다. 한국 최고의 재벌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세금을 적게 냈다는 도덕적 비난을 받았지만 법적 처벌 사항은 아니었다.

 

선대 회장은 공익재단을 이용해 절세했다면 이건희 회장은 금융기법을 적극 활용했다. 이들 부자의 상속 방법은 달랐지만 법의 허점을 이용, 상속세를 적게 냈다는 공통점은 있다. 선대회장 보다 이건희 회장의 상속 문제는 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출자순환구조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삼성 그룹을 6개 범 삼성가로 나누고 그의 자녀들에게도 경영권을 세습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범 삼성가를 이룬 사람들은 모두 공정거래법에서 규정한 특수 관계인들이다. 이병철은 19871월 일본 동경으로 6명의 사람을 부른다. 동경 6인들은 큰 딸인 이인희, 작은 아들 이창희, 셋째아들 이건희, 장손자 이재현, 그리고 막내 딸 이명희 등이다 (정혜연, 2012, p. 200). 특수 관계인은 그룹 창업자의 배우자, 6촌 이내의 혈족과 4촌 이내의 인척들을 특수 관계인으로 명명한다.

 

삼성을 분할하는데 있어서 이학수 등 구조본부 사람들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재무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중핵기업들에 첨단 금융기법을 접목시켰다. 대표적인 중핵기업은 에스원, 엔지니어링, 제일기획, 서울통신, 에버랜드 그리고 SDS 등이다. 활용한 금융 기법은 사모전환사채 (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정부가 기업들의 자금 조달 편의성을 위해 1990년대 도입했다. 삼성은 주식 상장을 앞둔 중핵기업의 CBBW를 상속 수단으로 활용했다. 기상천외한 방법이었다. 비상장 주식이 장외시장에서 거래돼 소득이 발생할 경우 시세차익에 대해서만 세금을 부과하지만, 상장 주식의 경우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법의 허점을 이용한 것이다. 삼성의 행위는 동일한 패턴을 보인다. 삼성비서실의 종자돈 불리기(1단계), 불어난 자금으로 핵심회사 장악하기 (2단계: 불어난 자금으로 핵심회사인 에버랜드, 삼성전자, 삼성 SDSCBBW를 저가로 인수하는 단계), 순환출자구조를 통해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지배구조의 강화 및 안정화(4단계), 차기 경영 전면에 등장 및 황제이미지 구축하기 등이다 (조승현, 2014, p. 274).

 


2013531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삼성물산 패션부문장 사장이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연합뉴스

 

1990년대 삼성에버랜드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그룹 내 부동산 관리회사였던 중앙개발에서 삼성에버랜드로 개명한 이 기업은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였다. 1995년 이건희 회장은 그의 자녀들에게 약 61억 원을 증여했다. 증여세금 약 16억 원을 내고 남은 돈 46억 원으로 주식 상장 직전인 에스원과 삼성엔지니어링 주식을 구매했다. 상장되자마자 주식을 되팔아 450억 원을 만들었다. 이 돈을 종자돈 삼아 회장 자녀들은 에버랜드와 삼성전자, 그리고 제일기획에서 발행한 CB를 대량 구입한다. 다른 주주들은 대부분 신주 인수를 포기한다. 그 결과, 아래 표에서 보듯, 이재용과 그의 여동생 3명은 1996년 삼성에버랜드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이 회사는 삼성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이므로 이재용과 그의 여동생들은 16억 원의 세금만 내고 삼성을 상속 받은 셈이었다. 왜냐하면 에버랜드를 정점으로 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베랜드로 돌고 도는 순환 출자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 일가가 삼성에버랜드를 통해 그룹 경영권을 세습하고 통제권을 확보하는 행위는 현대, SK, LG 등 다른 재벌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다(조승현, 2014).

  


특히, 표 내용 중 중앙일보와 이재현, CJ의 지분 변동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은 1996년 중앙일보 사장이었지만 그의 지분은 1%도 되지 않았다. 그 당시 중앙일보 최대주주는 이건희 (26.44%)였다. 나머지 중앙일보 지분은 이 씨의 형제들과 삼성 중핵기업들이 공유했다. 홍석현씨나 그의 형제들 이름은 명부에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상황이 1996년부터 벌어졌다. 중앙일보는 삼성 에버랜드의 신주 CB 인수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삼성에버랜드 최대주주 자격을 상실했다. 심지어 1998년에는 에버랜드 주식이 하나도 없다. 1년 뒤 1999년 중앙일보는 삼성그룹에서 분가했다. 보광 그룹과 함께 삼성에서 떨어져 나온 중앙일보의 최대주주는 홍석현이었다. 그의 지분은 1997년까지 1%미만에서 199921.51%로 증가했다(최경운, 2005, p. 205). 삼성에버랜드와 중앙일보 지분이 맞교환 됐을 수도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분가 이후 중앙일보 최대주주는 홍석현 등 홍씨일가다. CJ와 이건희의 큰 조카 이재현도 살펴보자. CJ1997년 삼성에서 정식 분가했다. CJ는 다른 주주들과 달리 삼성에버랜드의 CB 발행 신주를 유일하게 인수했다. 그 지분을 2010대 초반까지 갖고 있었다.

 


201354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위해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함께 서울 강서구 공항동 김포공항 출국장에 들어서고 있다. 홍라희 여사 뒤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보인다. 연합뉴스

 

이런 식의 주주 맞교환 형식을 통해 이병철의 삼성은 6개의 범 삼성가 그룹으로 확대됐다. 이인희씨는 삼성으로부터 전주제지 등의 제지사업과 통신장비계열사를 인계 받아 1993년 분가해 한솔그룹으로 독립했다. 이창희씨는 VCR 등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기업과 한일합섬을 상속받아 새한그룹으로 독립했다. 이건희는 핵심사업 영역인 전자, 금융, 제조, 의류, 서비스 관련 계열사를 그대로 상속받았다. 이재현은 식품업 위주로 상속 받아 CJ 그룹으로 1997년 독립했다. 이명희는 1999년 백화점 등 유통업 계열사를 갖고 1999년 분가했다. 이건희의 처남인 홍석현은 1999년 중앙일보 그룹으로 분가했다. 이들 범 삼성가 그룹들 중 새한 그룹을 제외하고 모두 시장에서 선두 기업들이다. 이들 모두 한국 광고 시장을 떠받치는 광고주들이다. 이중 삼성, 중앙일보 그리고 CJ 그룹이 분가 이후 정보와 대중문화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김춘효 자유언론실천재단기획편집위원

 

누가 한국 신문시장을 지배하는가? 2.8

[삼성 연재기고 (6)] 조중동 독과점 심화와 재벌의 영향력 확대

신자유주의의 자유 시장 정책은 미디어에도 적용됐다. 미국 매체 정치경제학자 배지키언(Bagdikian, 2000)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미디어에 대한 규제를 크게 완화시켰으나 시장 경쟁의 심화가 자유 언론을 보장해 주기는커녕 미디어 독과점 현상을 심화시켰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 미디어 정책이 도입될 무렵인 1983년 대형 신문사 수는 50개였으나 극심한 시장 경쟁 체제를 거치면서 1990년대 말 10개 안팎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후속 연구에서 미한(Meehan, 2005)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디어 독점화 현상이 더 심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 또한 1987년 민주화 이후 미디어 규제 완화가 진행됐다. 한국 신문 시장은 외견상 미국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1’에서 보듯 규제 완화 조치로 신문사들의 숫자가 줄어들기는커녕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신문의 숫자 증가와 무관하게 한국 또한 미국과 마찬가지로 규제 완화로 오히려 독과점 현상의 심화돼왔다.

 


언론통폐합·동아사태·자본통제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중앙 일간 신문사들은 1970년대의 광고 시장 팽창으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언론기본법제정을 통해 언론 통폐합을 단행했다. 이 법은 방송 공영화, 신문과 방송의 겸영 금지, 신문통폐합, 지방지의 11사제, 통신사 통폐합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송건호 외 저, 2015). 사회 정화라는 명분으로 추진된 언론 통폐합 조치로 정기 간행물 172종은 폐간했고 870명의 언론인을 대량 해고했다. 5공화국 출범 이후 시장에 남아있는 기업은 신문사 21(중앙지 11, 지방지 10), 계열사 포함 방송사 27, 통신사 1개 등이었다(옥기원, 2012, p. 11).

 

재벌의 언론 소유 경영을 엄격히 제한하려는 신군부는 재벌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이로 인해 삼성을 제외한 재벌들은 잠시 언론 정보 시장에서 물러나 있게 된다. 삼성은 TBC 방송국을 포기하고 중앙일보를 선택했다. 통신사를 운영하고 있던 쌍용과 두산그룹 등은 각각 뉴스통신 사업권을 포기했다. LG그룹은 부산 국제신문과 경남일보를, 일산그룹은 충청일보를, 동부그룹은 강원일보를 포기했다(김남석, 1994).

 

신군부는 신문사들을 대상으로 채찍과 당근정책을 사용했다. 정보기관원을 편집국에 상주시키고 보도 지침을 통해 기사 논조를 통제했다. 통제를 벗어난 기사가 나오면 정보기관이 관련 언론인들을 연행, 협박하기도 했다. 동시에 유화 정책도 함께 사용했다. 언론 사주들은 독점(지방지) 또는 경쟁 완화(중앙지)로 손쉽게 수익 창출을 보장받았다. 여기에 더해 일간지들이 출판업과 공연 등 문화 사업을 할 수 있는 사업 다각화를 허용했다. 기자들에게는 복지 향상이란 명목으로 주택 공급, 저리 대출 등의 혜택을 주었고, 해외 연수 프로그램도 제공했다. 박정희 체제부터 이어진 언론인의 고위 공무원 발탁이나 국회의원 공천도 계속됐다. 박명진(Park, et al., 2000)은 이 관계를 후원자-고객(Patron-Clients) 관계라고 규정했다. 왜냐하면 군부 정치 세력과 신문사주 및 기자의 이 같은 관계는 언론 카르텔을 형성, 정권의 입맛에 맞는 뉴스만을 제작 유통시켰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에 개봉한 영화 ‘1987’에서 보도 지침을 볼 수 있다.

 

정권과 언론의 안정적인 담합은 1987년 시민 혁명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노태우 정권은 1988년 언론기본법을 폐지하고 정기간행물법을 제정하면서 신문사 설립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했다. 이로써 한국 신문은 본격적인 시장 경쟁 체제에 들어섰다. 신문사 설립 조건 완화로 새로운 신문이 쏟아져 나왔다. 신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종합 일간지 시장 진출은 국민주, 재벌 그리고 종교 단체에 의해 이루어졌다. 1987년 국민들이 최대 주주인 국민주 형식의 한겨레신문이 창간됐다. 1987년 순복음교회에서 국민일보를 창간했고, 1989년 통일교에서 세계일보를 창간했다. 1990년 한화그룹은 경향신문을 인수했고 1991년 현대그룹은 문화일보를 창간했다. 이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경쟁 체제였다.

 


언론 통폐합 조치에서 살아남은 언론사는 경쟁 없는 자본 축적을 이룰 수 있었다. 안정적인 독자와 광고를 시장의 소수 신문들에게 몰아주는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확대로 정보 수요에 대한 욕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재벌들은 방송에 비해 신뢰도가 높은 신문을 광고 매체로 선호했다. 이처럼 광고 수요는 많은데 매체는 부족한 상황에서 신문 광고 비용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반면 구독료는 정부의 물가 억제 정책 품목으로 철저한 규제를 받았다. ‘3’에서 보듯 구독료는 1982년 저물가 대책에 포함된 이후 상승 폭이 크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의 발행 면수 통제로 발행 면수도 묶여 있었다. 정부의 통제로 모든 신문은 휴일에 신문을 발행하지 않았다.

 

당시 군사 정부는 특별한 광고 정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광고주와 신문사 자율에 맡겼다. 가장 큰 이유는 신문 지대 및 발행 면수 억제 정책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문사들은 광고 효과와 무관하게 광고액수를 책정하여 고수익을 확보하였다. 군사 정권의 광고 방임 정책으로 한국 신문 시장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과도하게 지대보다 광고 수익에 의존하게 있었다 (옥기원, 2012).

 

1987년 언론 자유화로 신규 신문사들이 시장에 들어서자 이전과 같은 시장 카르텔에 의한 수익 창출이 불가능해졌다. 신문사들은 증면 경쟁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 했다. 19897월 한국일보가 휴일판을 발행하면서 단초가 열린 신문 판매 경쟁으로 증면 경쟁이 과열되기 시작했다. 198812면 발행하던 신문은 1993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32면 발행, 1994년 중앙일보의 48면 발행 등으로 지면을 급격하게 늘렸다(송건호 외저, 2015, p. 525). 독자 확보 경쟁도 과열됐다. 삼성이 1965년 중앙일보를 세우면서부터 시작한 확장지가 다시 등장했다. 확장지는 독자 배가 운동을 할 때 사용되는 신문이다. 배급을 맡고 있는 신문사 지국이 자사 신문을 구독하지 않는 가정에 무료로 신문을 투여하고, 구독을 강요하는 방식이다. 신문사들은 무가 부수 배포뿐만 아니라 구독료 할인도 함께 추진했다. 심지어 배달 지국은 이삿짐 날라 주기 등으로 예비 독자를 끌어들이기에 안간힘이었다. 여기에 중앙 일간지 지국 간 경쟁이 과열되면서 살인 사건까지 발생했다(강기석, 2008, pp. 44-45).

 

현재 국내에서 발행되고 있는 전국 일간지들.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신문사들은 시장에서의 우위 확보를 위해 발행 면수를 대폭 늘리고 그에 따라 구독료도 인상했다. 하지만 증면에 따른 비용 증가는 구독료 인상에 따른 수입 증가를 훨씬 능가했다. 지대 수입은 신문 발행 비용에도 미치지 못해 광고 수익의 변화 없이 구독자가 증가하면 오히려 신문 수익이 악화되는 상황이었다. 증면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광고 수익을 더욱 확대해야 했다. 신문 시장이 지대보다 광고에 의존하는 수익 구조가 시장 경쟁 상황에서도 고착된 것이다. 그리고 광고 중심 수익 구조는 결국 주요 광고주인 재벌의 신문 통제 권한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문 시장이 과열 출혈 경쟁에 들어서면서 언론자본은 신문과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과 단체협약을 통해 편집권의 독립을 상호 합의했음에도 이를 애써 무시한 것이다. 1991년 동아사태가 대표적인 예이다. 동아일보 사주 김병관의 신문 제작 간섭을 거부하다 경질된 김중배 편집국장은 이임사에서 과거 언론 자유를 위협한 세력은 정치세력이었지만 90년대 들어서면서 자본이 언론 자유를 위협하는 최대 세력으로 등장했다고 말했다(송건호 외저, 2015, p. 527). 이 이임사는 시장 경쟁으로 군사 독재 정권의 언론 통제가 신문 자본과 재벌과 같은 광고주 자본의 언론 통제를 막아주던 역설이 풀렸음을 선언한 것이다.


떠나가는 독자들조중동 쏠림 현상과 재벌   

1997년 금융 위기는 재무구조가 취약하고 독자 경쟁력이 부족한 한국 신문들을 사지로 몰았다. 최대 광고주였던 재벌의 위기가 그대로 신문 시장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또한 신문시장에 진출한 재벌인 현대와 한화는 신문 시장을 떠나서 문화일보와 경향신문은 우리사주제로 전환해 스스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금융 위기로 기업들이 어려워지면서 1990년대 말 광고 매출은 급감했다. 금융위기 이전에 2억 원까지 집행되던 상위 신문의 뒷면 전면 광고는 3000~4000만 원의 가격으로까지 낮아졌다. 기업들은 군사 독재 정권 시절부터 내려오던 광고 효과와 무관한 광고 집행 관행에서 벗어나 효과를 따지면서 광고를 집행했다. 가장 많은 독자와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신문으로 광고가 집중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독과점 신문 구조는 더욱 강화했다(옥기원, 2012, p, 49~50).

 

상업 한국 신문 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독자들이 떠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4’에서 보듯 열독률과 구독률이 각각 199685.2%69.3%에서 201525.4%14.3%로 떨어졌다. 거의 20년 동안 진행된 독자 떠남 현상은 한국 신문의 여론 형성력과 장악력이 크게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 위기 이후에도 일간지의 발생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일간지로서 허가를 받고 신문을 발행하는 기업이 1998125개에서 2009290개로 거의 2.5배 증가했다. 신문 시장의 악화와 무관하게 신문들이 도태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이는 미국에서 미디어 규제 완화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문사의 숫자가 줄어드는 배지키언(Bagdikian, 2000)의 연구 결과와는 반대되는 양상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 -미간 비교 연구 결과는 아직 발표된 바는 없다. 추론컨대, 가장 큰 이유는 미국과 한국 신문 자본의 발전 역사의 차이다. 미국 신문 자본은 독립운동의 동반자였고 자본주의 발달의 협력자였다. 이 과정에서 시장 경쟁이 내면화됐다. 그래서 시장 자유화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신문사는 도태되거나 또는 신문사 간 인수 합병을 통해 경쟁력을 제고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반면 한국 신문자본은 독립운동의 협력자가 아니었으며 독재 권력에 기생해 언론 자본으로 성장했다. 시장 경쟁보다는 기사와 광고의 교환, 광고주 협박, 신문 발행으로 다른 영역에서 이권 확보 등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정치권력의 후원을 받는 특권 자본주의가 익숙하다. 다시 말하면, 신자유주의 정책이 경쟁이 내면화된 미국 신문시장에선 신문기업 숫자 감소로 나타나지만, 특권이 내면화된 한국 신문 시장에선 반대되는 현장이 나타난다. , 미국은 시장 상품 가치를 통한 수익 창출이라는 시장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경쟁의 결과 생존이 줄어들지만 한국 신문은 시장 경쟁 외적 동인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에 악화하는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오히려 증가한다.

 

미국과 달리 시장 자유화로 발행 신문은 더 늘었음에도 신문의 독과점 현상은 한국에서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진행되고 있다. ‘5’에서 보듯 금융위기 이후 이른바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의 시장 점유율은 199852.3%에서 200267.7%로 꾸준히 상승했다.

 


조중동의 시장 점유율 확대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 번째 특징은 규제완화로 신문사의 숫자가 늘어났음에도 조중동과 중소형 신문사간의 시장 양극화 심화다. 이는 중소형 일간지의 몰락과 경영 위기로 인한 여론 다양성 축소다. 두 번째 특징이다. 정부 의존형 독과점 시장 구조를 통해 언론자본을 축적했던 조중동과 달리, 규제 완화이후 시장에 진출한 중소형 언론사들의 재무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다. 이로 인해 시장의 검열에 더 강하게 반응할 수 있는 구조에 놓이게 된다. 생존의 위기가 상존하기 때문이다. 시장의 통제가 편집국 기자에게 생존의 자기 검열을 하게한다는 의미다. 이는 보도의 보수화와 뉴스 상업화로 연결돼 저널리즘을 고사의 위기로 몰아넣는다(McChesney, 2010). 다시 말하면, 한국 신문은 조중동 위주의 광고 쏠림현상 심화로 인해 진보적이거나 독립적인 언론은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소외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시장 구조의 양극화는 또한 조중동 매출 쏠림 현상으로 나타난다. 광고주인 재벌들이 발행부수가 많은 조중동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6’에서 보듯 조중동은 일간지 시장 매출액에서 다른 신문사의 총합보다 더 많은 매출액을 올리고 있다. 옥기원 (2012, p. 83)1997년부터 2003년까지 분석한 종합 일간지의 광고의존도[(광고수입/(광고수입+구독료) x100]에 따르면, 일간지의 광고의존도는 1997년 약 72%에서 200382%까지 증가했다. 신문광고주가 재벌인 점을 고려한다면, 조중동 중심의 독과점 체제를 재벌이 지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구 보수적인 논조를 유지하는 조중동과 한국 독점 자본인 재벌이 시장 구조 속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7’은 재벌 상위 그룹인 삼성과 현대 그리고 LG그룹 등이 2003년에 중앙일보·조선일보·동아일보에 각각 집행한 광고액수이다. 1위부터 4위까지 광고액수는 다르지만 광고주 순위는 같다.

    



201712일자 주요 일간지 1. 하단 광고가 모두 삼성 기업광고다.

 

재벌의 광고가 조중동에 집중되면서 생존 위기에 처한 중소형 일간지들은 재벌의 홍보지로 전락하고 있다. 김수찬(Kim, 2008)은 한국 신문 구조가 자본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상업주의 체제로 변질되면서 기사 내용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지 기자들은 기사를 작성할 광고주가 제공하는 정보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고 있으며, 광고지면을 확보하기 위해 출입처에서 영업 활동을 하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 건강관련 상품, 부동산, 백화점 관련 기사는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라기보다 홍보성 기사거나 또는 협찬광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문이 독자들에게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주인 재벌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보도행태는 경제지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상업화된 한국 신문의 현 주소이다. 신문 시장의 자유로운 경쟁이 독자들에게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사의 돈줄인 재벌만 자유롭게 만들어줬다.

 

 

누가 한국광고 시장을 통제 하는가 2.16

[삼성 연재기고 (7)] 독과점 양극화 심화의 최대 수혜자 삼성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감옥에서 나온 다음날, 한국 언론은 또 다시 애완견이 됐다.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정의의 감시견이 아니라 삼성의 이익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삼성 PR지가 된 것이다. 어떤 뉴스 프레임을 사용해 이재용을 묘사했는지 잠깐 살펴보자. 시장 점유율 1위인 조선일보는 이재용 정경유착 굴레서 풀려났다란 헤드라인을 통해 그를 부당한 정치 희생양으로 묘사했다. 이재용과 특수 관계인이 사주로 있는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이재용, 항소심서 집행유예353일 만에 석방‘353일 만에이재용 석방이란 제목을 통해 이재용이 오랫동안 억울하게 감옥에 있었다는 동정 뉴스 프레임을 사용했다. 경제신문 중 시장 점유율 상위인 매일경제는 승계 청탁 없었다, JY 353일 만에 석방이란 제목을 통해 대법원 판단이 남았음에도 이미 판결이 완결된 듯 한 뉴스 프레임을 사용했다. 정부가 최대 주주인 서울신문은 이재용 부회장 석방되자마자 첫 행보로 아버지 병문안이란 기사를 통해 효자뉴스 프레임을, 연합뉴스TV이재용 석방에 삼성전자 주가 나홀로 반등이란 기사를 통해 판결의 효과로 인해 주가가 올랐다는 경제 우선주의 뉴스 프레임을 사용했다

 

왜 한국 언론들은 삼성 PR지를 자처하고 있는 것일까? 삼성의 돈의 위력과 한국 광고시장의 왜곡된 구조가 자체 수익 기반이 취약한 한국 언론이 결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삼성그룹은 한국 여론을 움직이는 광고를 가장 많이, 오랫동안 그리고 지속적으로 제공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최고 광고주는 삼성전자이고 시장점유율 1등 광고대행사는 제일기획(2008Cheil Worldwide 개명)이다. 삼성전자와 제일기획은 삼성의 중핵기업들이다. 이재용은 삼성그룹의 사실상 오너이다. 여기에 한국 광고시장의 왜곡된 구조도 삼성의 여론 장악력을 상승시킨다. 한국 광고시장은 광고주와 광고대행사가 분리돼 있지 않다. 재벌이 광고주이고 광고대행사의 오너이다. 어느 나라에도 광고주와 광고대행사가 한 몸인 관계는 없다(이수범 외저, 2010). 서구는 여론 형성의 건전성 확보를 위해 광고를 요청하는 광고주와 광고를 기획·제작하는 광고대행사의 분리 운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세계 광고시장 점유율 10위권 안에 들어있는 미국의 더블유피피(WPP)와 영국의 옴니콤(Omnicom)은 광고대행사이지 광고주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 광고시장은 광고주와 광고대행사가 한 몸이다. 광고시장 내부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 부재는 광고주의 이익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양산한다. 또한 왜곡과 과장 광고 제작 그리고 유통으로 이어진다. 정당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피해는 모든 비용을 마지막에 결제하는 소비자가 본다. 그런데 돈을 내는 소비자들은 왜곡된 한국 광고시장 구조에 의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신 중간에 광고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삼성전자 등의 오너일가가 그 혜택을 독점하고 있다. 왜곡된 한국 언론시장 구조와 광고시장 구조가 결합되면서 언론시장의 오염도가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내 주장이 너무 허무맹랑한가? 이에 대한 증거로 한국 광고시장 구조 변동과 시장 점유율 변화 추이 속에서 삼성의 언론 장악력을 구조적으로 분석해 보겠다.

 

쩐의 전쟁터가 된 한국 광고시장

세계광고시장에서 한국의 시장 규모는 세계 10위권 안팎이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광고시장이며 그 다음이 한국이다. 1995년 한국 광고시장 규모는 세계 10위였고, 2005년에는 11, 2014년에는 세계 8위였다 (콘텐츠산업백서 2016). ‘1’에서 보듯 한국 광고시장은 1968년 총 광고 매출 92억 원에서 19802753억 원, 2000년 약 6조 원, 2015년 약 11조 원까지 성장했다. 한국 광고시장 규모가 지난 50년 동안 1165배나 증가했다. 광고 매출 증가는 한국사회가 광고라는 수요관리에 의해 유지되는 소비사회에 1990년대부터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광고하는 품목은 제조업이나 도매업종이 아닌 소비자들의 욕구에 직접 호소하는 소비재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광고매출이 이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은 인쇄와 영상매체 산업규모가 급증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한국 미디어 시장은 지난 1990년대부터 정부통제 방식에서 시장 규제 방식, 즉 상업 미디어 시스템으로 전환했다. 자본의 논리에 의한 미디어 통제 방식은 다매체 다채널이라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했다. 1988년 신문 산업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되면서 완전 경쟁체제에 돌입했다. 1991SBS 등 민영방송국을 추가로 허용하기 시작했고, 1993년에는 케이블 텔레비전을, 2000년 디지털위성방송을, 2005년 방송과 통신의 미디어 융합방송인 DMB, 2010년 사실상의 지상파 기능을 갖는 종합편성프로그램 등을 도입했다. 여기에 인터넷텔레비전(IPTV)까지 도입되면서 한국은 명실상부한 미디어 천국이 됐다. 이로 인해 신문·방송·잡지·인터넷 등의 매체별 광고 집행비가 증가했다. 한국 미디어 시장 규모는 표2에서 보듯, 1999년 약 46천억 원 규모에서 2015113천억 원으로 증가했다. 지난 20년 동안 가장 큰 성장세를 보인 매체 시장은 인터넷과 케이블TV이고 라디오와 지상파TV 그리고 잡지시장은 완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여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문시장 광고 매출은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다. 다시 말하면, 지난 20년 동안 한국 신문시장은 광고주들에게 지속적으로 외면 당해왔고, 지상파 방송은 현상을 유지하는데 그쳤으며, 상대적으로 새로운 미디어인 디지털과 인터넷 매체는 광고주들에게 지속적으로 재정적 후원을 받아왔다.

 


이처럼 한국 매체 광고비용 증가는 광고시장 개방과 연관돼 있다. 지난 1987년 미국의 통상압력에 의해 시작된 광고 자유화 조치는 1991년 외국인 투자 100% 허용, 1995년 광고영화제작부분까지 완전 개방했다. 다국적 광고대행사가 한국 광고시장에 진출 형태는 업무제휴방식, 단독투자 (: 제이월터톰슨), 지분참여(TBWA 코리아) 그리고 재벌 광고대행사와 합작회사 설립 (: 제일보젤, 휘닉스 커뮤니케이션) 4가지 형태다. 광고시장개방이후 국내에 들어온 다국적 광고회사는 미국의 BSBW사이다. 1989년 현대그룹 광고대행사였던 금강기획과 업무제휴를 통해 한국에서 광고영업을 시작했다. 1997년 이전에 한국에 들어와 있던 다국적 광고대행사들은 프랑스의 퍼블리시스, 하바스 그룹, 미국의 인터퍼블릭, 보젤과 옴니콤 그룹, 영국의 더블유피피 그룹, 일본의 덴츠와 하쿠호도 그룹 등 세계 10대 광고대행사들이 모두 한국에 진출해 있었다.

 

제일기획(cheil) 홈페이지

 

하지만 이들의 시장 점유율은 1998년 이전까지 미미했다. 가장 큰 이유는 광고주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다국적 광고대행사들의 고객들은 한국에 들어와 있는 다국적 기업 (: 코카콜라)들이었다. 한국시장 특징을 파악한 이후 시장을 넓히려 해도 할 수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 광고 시장의 특징인 인하우스 에이전시 (in-house agency) 때문이었다. 광고주인 재벌이 계열사인 광고대행사를 통해서만 광고를 판매하는 이 제도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고시장 폐쇄성이다. 재벌이 인하우스 에이전시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광고에 대한 정보를 경쟁사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는 재벌의 폐쇄적 경영방식과 연관이 깊다(Kim, 1996). 이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방식이다. 광고주와 광고대행사가 분리돼 있는 외국과 달리, 한국은 광고주와 광고대행사가 한 몸이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관행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완화되기 시작했다. 재벌들이 유동성 위기에 휘말리면서 광고대행사를 다국적 기업에 매각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97년 미국계 다국적 광고대행사인 옴니콤이 SK그룹 광고 계열사인 태광멀티애드의 주식을 전량 인수해 TBWA 코리아를 설립했다. 해태그룹의 광고대행사인 코래드는 다국적 투자자문회사 코론사에 지분을 넘겼다. 런던에 본사를 두고 있는 WPP사는 2002LG그룹 광고대행사인 LG애드 지분을 인수해 최대주주가 됐다. WPP사는 또한 2003년 코디언트를 인수 합병 함으로써 금강기획을 계열사에 포함시켰다. 코디언트는 1999년 현대그룹 광고대행사인 금강기획을 인수·합병했다. 재벌들만 다국적 기업들이 사들인 것은 아니었다. 1999년에는 프랑스 퍼블리시스는 국내 독립광고대행사인 웰콤을 인수했다. 일본광고대행사인 하쿠호도사는 제일기획과 함께 하쿠호도제일을 설립했다. 다시 말하면, 다국적 광고대행사들은 1997년 이후 재벌 소유의 광고대행사를 인수·합병하거나 자금력이 부족한 독립 광고대행사들을 인수·합병을 통해 광고시장 점유율을 높혔다(이수범 외저, 2010, pp.113-115; Kim & Cha, 2009).

 


그 결과 3’에서 보듯 다국적 광고대행사들은 금융위기 이후인 19987.6%의 시장 점유율에서 200634.3%까지 시장 점유율을 확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시장 확대는 더 이상 이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대와 SK, 그리고 LG그룹이 인하우스 에이전시 시스템을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2004LG그룹은 HS애드를 설립해 LG전자 등의 광고물량을 지원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차 그룹은 2005이노션, SK그룹은 2008SK M&C라는 광고대행사를 설립했다. 그 후 다국적 광고대행사들의 시장 점유율은 오르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금융위기 이후 다국적 광고대행사들과 재벌의 광고대행사들이 한국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쩐의 전쟁을 벌였다. 국내자본이 광고대행사를 국외자본에 매각하면서 시장 점유율을 나눠 가졌고, 2005년을 기점으로 재벌이 자체적으로 광고대행사를 다시 설립함으로써 다국적 광고대행사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국내와 국외 자본과의 싸움에서 국내 자본이 승리했다는 애국주의 분석법은 위험해 보인다. 왜냐하면 단지 3개의 재벌그룹이 광고대행사를 국내 광고회사로 옮겼다고 해서 시장 점유율이 급격하게 변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한국 광고시장의 독과점화가 심화됐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4’에서 보듯 1999년부터 2014년까지 SK텔레콤과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LG전자는 지난 15년 동안 10대 광고주에 들었다. 이 기간동안 최고의 광고주는 삼성전자이다. 10대 광고주에 포함되는 기업들이 모두 재벌그룹 계열사인 것을 고려해 본다면, 재벌들이 광고주로서 한국 여론시장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재벌 그룹별로 광고 집행 액수는 다른 점은 또한 재벌(삼성: 비삼성)간 의 양극화가 심화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심화되는 독과점 구조 속 삼성 광고 쏠림

한국 경제의 독점 자본으로 성장한 재벌들은 광고시장을 주무르는 큰 손이었다. 1980년대 광고대행사들의 출신은 재벌계열사가 다수를 차지하고 선연 등 독립대행사, 그리고 다국적 광고대행사 등이었다. 시장 점유율 순위에서 제일기획과 금강기획 등 재벌 소속 광고대행사들과 독립 대행사들 간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됐다. 그런 흐름은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광고회사나 매체의 변화가 거의 없으면서 전체 상위 10개 광고대행사가 1997년 금융위기 직전까지 70%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다(이규완 외저, 2000). 이들 10대 광고대행사에는 다국적 광고대행사는 포함되지 않았다. 재벌과 독립 대행사들간의 광고 유치경쟁이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광고시장의 주요 기업 명단에서 독립대행사들은 사라졌다. 자금력을 앞세운 다국적 광고대행사들이 독립 대행사들을 인수·합병했기 때문이다. 재벌과 다국적 기업 간의 광고 전쟁이 시작됐다는 의미다. 그 결과는 상위 광고대행사들의 시장 독과점 심화다. ‘5’에서 보듯 10대 광고대행사들의 광고 매출 대비 시장 점유율은 200471.3%에서 201485%까지 악화됐다. 이 자료는 한국광고연합회가 매년 발표하는 광고회사 현황 조사 결과다.

 


업계 자료가 아닌 학자들의 시장 분석 결과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지난 1990년부터 2009년까지 20년 동안 광고대행사 시장은 매출액 기준으로 평균 12.97% 성장률을 기록했다. 인하우스 광고대행사가 집중된 상위 1~3위의 점유율은 평균 54%, 상위 1~5위의 점유율은 평균 68%로 광고시장 개방 이후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하다가 IMF이후에는 다소 떨어졌다. 상위 1~10의 점유율은 평균 84%를 기록했다. 또한 상위 1~15위 이상의 점유율은 92%를 기록했다. 특히 또한 광고시장개방이후 인하우스 광고대행사들과 다국적 광고대행사들로 구성된 상위1-5위 집중도는 오리려 심화되어 광고시장 개방이후 광고대행사들이 양극화됐다(함성호·서상호, 2011).

 

그렇다면 상위 10위 광고대행사들은 누구이며 얼마만큼의 시장 점유율을 점유하고 있는가? 이에 부합하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는 지난 2005년부터 광고시장 관련 통계를 정식으로 집계하기 시작했고, 그마저도 제일기획의 광고연감이나 한국광고연합회가 발표하는 자료를 취합 발표하는 수준이다. 제일기획 자료에는 1~10위까지 명단과 매출액이 나온다. 하지만 각각의 시장 점유율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 10위까지 기업들의 매출 총합을 각각의 기업 매출로 나눠봤다. 이들 10개 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200417.3%에서 201485%까지 증가한 상황에서 이들 기업들 간의 우열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그 결과가 6’이다.

 




최근 TV 및 온라인 매체를 활용해 방영된 삼성전자 영상광고

 

6’에서 보여지듯 금융위기 직후와 20092014년의 자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10대 기업 중 1~2위 기업의 시장 점유율 총합이 나머지 8개 기업들의 시장점유율 총합을 더한 것보다 높다는 점이다. 독과점 시장 구조내부에서조차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뜻이다. 심지어 2014년 자료에서 보듯, 1위 광고대행사인 삼성의 제일기획과 2위 현대차의 이노션의 시장 점유율도 10%이상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삼성 광고가 한국 상업 미디어 체제를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많은 돈을 꾸준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집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장 점유율 비중도 199917.8%에서 201440.3%까지 증가했다. 2009년 시장 점유율이 1999년에 비해 증가한 것은 광고주인 삼성전자 등이 해외광고비 집행을 강화하면서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 (2008Cheil Worldwide 개명)의 매출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이 사항은 독립 광고대행사의 몰락이다. 1999년에 10권 순위에 포함됐던 웰컴과 애드벤처월드와이드 모두 시장에서 사라졌다. 다국적 광고대행사에 인수·합병됐기 때문이다. 미디어 시장의 대형화가 중소형 기업의 몰락을 초래했다는 기존 연구 결과가 한국 광고시장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한마디로, 지난 20년간 한국 광고시장 특징은 부자 부모(재벌 또는 다국적 기업)을 둔 자식만 살아남고 가난한 집 자식은 시장에서 사라진 독과점 양극화 시대였다.

 

 

한국 영화는 CJ·롯데·중앙일보에 장악됐다 3.2

[삼성 연재기고 (8)] 상영 시장의 독과점 구조 심각 제작자는 파산해도 3개 재벌사만 흥행

영화는 어둠을 배경으로 빛과 소리로 내러티브(서사 구조)를 만든다. 그 서사 구조는 인간의 욕망을 대사와 음향 그리고 이미지로 표현한다. 완성된 영화가 대중들을 만나기 위해 영화 예술인들의 피와 눈물 그리고 그 사회가 축적한 과학기술이 결합해야 한다. 영화인의 노력과 과학의 결합도 자본이 없으면 제작도 유통도 상영도 할 수도 없다. 영화인의 노력도 자본을 만나야만 비로소 빛을 볼 수 있다. 자금력이 낮은 기업들은 쉽게 영화 시장에 들어올 수 있지만 오래 버틸 순 없다. 고위험-고수익 산업 특징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산업은 자본 논리가 다른 미디어 산업에 비해 더 강하게 작용한다.

 

한국 영화가 대내외적으로 대자본의 논리를 경험하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다. 미국은 한·미간 무역 적자 해소의 일환으로 한국 영화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비디오카세트레코더(VCR)를 제조 판매하는 재벌들은 수요관리 차원에서 영상 제작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 영화가 더 이상 중소기업 보호 업종에 머물 수 없음을 의미했다. 사실 박정희 독재 정권은 지난 1962년 영화법 제정을 통해 영화 제작과 수입 그리고 수출 사업을 연계해 운영했다. 일정 비율의 한국 영화를 제작해야만 외화를 수입 방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 배급과 상영에 대해선 개입하지 않았다. 다만 1966년부터 영화상영일 365일중 5분의 2 이상을 반드시 국산 영화를 상영하도록 하는 스크린 쿼터 제도를 도입해 지방 행정 기관들이 관할 내 극장주들의 상영 일자를 관리·감독하도록 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영화 사업 독점권을 보장해 주면서 스크린 쿼터제를 통해 국산 영화가 지속적으로 제작 유통되도록 하는 보호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국산 영화 보호 정책들은 시장 개방화 시대에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gettyimages

 

흥행 자본 입도선매 제작에서 기획 영화 시대로

미국영화협회(MPPA)는 미국 통상대표단과 함께 움직인다. 미국 정부가 세계 각국에 통상 압력을 행사 할 때 항상 요구하는 사항이 있다. 해당 국가의 영화 시장 개방이다. 미국 상품과 헐리우드 영화는 세계 무역 협상에서 세트 메뉴란 이야기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워너브라더스 등 헐리우드 영화 배급사들은 미국 영화를 한국에서 직접 배급할 것을 요구하면서 한국의 스크린 쿼터 제도 축소 또는 폐지를 요구했다. 미국 수출 시장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은 19855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영화 제작업과 수입업을 분리했다. 이로 인해 1988년부터 헐리우드 배급사들은 한국 내에 수입업자 등록만 하면 헐리우드 영화를 배급 할 수 있게 됐다. 전두환 정권은 또한 스크린 쿼터 제도에 대한 의무적 규정을 다소 완화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이를 축소하진 않았다. 영화시장 개방화 조치는 헐리우드 영화사들에게 1990년대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시장 개방화 조치는 또한 재벌들에게도 기회였다. 삼성, 대우, LG 등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재벌 그룹들은 전자 제품 수요 관리 차원에서 비디오 제작 시장에 진출했다. 가전 제품을 팔기 위해 영화 제작 시장에 뛰어 든 것이다. ‘1’에서 보듯, 대우와 선경(SK) 그룹은 1980년대 중반부터 영화를 제작하고 외화를 수입 배급했다. 이들 재벌 상위집단들은 또한 자체 제작한 비디오를 유통시킬 수 있는 유통 대행업도 진행했다. 이병철의 삼성 그룹에서 분사한 삼성, 새한, 제일제당도 모두 1990년대 영상 제작 및 유통 그리고 상영 사업에 진출해 있었다. 삼성은 드림박스 등의 비디오 프로그램 공급업체를 통해 월트 디즈니가 제작한 영화들을 유통시켰다. 또한 명보극장과 서울극장 등 극장 운영 사업 분야에도 진출했다. 제일제당은 호주의 빌리지사와 합작해 CGV를 설립, 우리나라 최초로 멀티플렉스를 세웠다(영화진흥위원회, 2001).

 


재벌이 충무로에 뛰어 들면서 한국 영화는 자본의 논리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흥행 자본에 의존하던 입도선매 방식에서 기획 영화 시대에 접어 든 것이다. 기획과 제작을 분리하면서 업무 전문화가 강화됐다. 시장 리스크 관리를 위해 기획 단계에서부터 시장 분석 과정이 이뤄졌다. 관객층은 세분화 됐고 이에 적합한 배우나 시나리오를 찾아 영화를 제작했다. 여기에 시장성에서 검증된 쟝르(: 로맨틱 코메디, 액션)가 스타시스템과 결합되면서 내용의 획일화 (또는 표준화)가 진행됐다. 여기에 영화 개봉되기 전부터 광고를 하는 사전 마케팅이 도입돼 홍보비가 증가했다. 재벌이 영화시장에 등장하면서 충무로는 산업으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김태준, 2005).

 

재벌이 충무로 영화 시장에 뛰어든 것은 정부의 영상 진흥 정책과도 연관돼 있다. 1993년 김영삼 정부는신경제 5개년계획을 수립해 영상 진흥 정책을 시작했다. 영화인의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제작업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했다. 촬영 장소 확충을 위해 경기도 남양주시에 서울영화종합촬영소를 건립하는 등 영상 인프라 작업도 진행했다. 김대중 정부는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을 제정해 국가 예산의 1%를 문화 산업에 배정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영상 기업을 벤처 기업으로 지정해 국가와 금융기관의 지원을 제도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정부의 영화 진흥 정책과 재벌의 영화 산업 참여는 2’에서 보듯, 한국 영화 기업의 외형적 성장을 가져왔다. 1999367개였던 제작사는 20112664개로, 배급사는 같은 기간 155개에서 641개로 늘어났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됐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약 1670억 원의 영화 진흥 기금과 영상 투자조합이 조성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만들었다. 5년 동안 프로젝트 형식으로 운영되는 영상투자조합은 벤처캐피털 회사와 정부의 공적기관 그리고 일반 투자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정부와 함께 주주로서 영상투자조합을 운영하는 이들 투자사들은 한 작품에 제작비를 지원하기보단 여러 영화에 일정비율만 투자하고 수익을 거둬들이는 프로젝트 형식으로 운영됐다. 정부는 투자금의 약 25% 정도만 책임지고 일체 관리 운영에 간섭하지 않았다. 나머지 75% 투자금은 재벌, 금융기관 또는 영화 투자사나 배급사들이 공동으로 모금했다. 이들 영상 조합들은 투자 작품을 선택할 때 영화 프로듀서와 감독의 역량과 시나리오 완성도, 제작사의 신뢰도, 마케팅 능력, 캐스팅 등을 고려했다(영화산업백서, 2001).

 

영화시장에 꾸준히 자금이 유입되면서 한국 영화 제작비는 상승하기 시작했다. ‘3’에서 보듯, 199610억 원이던 총 제작비는 20년이 지난 2016년에는 24억 원까지 증가했다. 제작비의 증가와 함께 눈에 띄는 지출은 마케팅 비용의 증가이다. 이는 한국 영화가 작품으로 승부를 보기보단 광고를 통한 마케팅을 통해 관객을 모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 영화 제작과 배급에 투여되는 자금을 분석해 보자. ‘4’에서 보듯, 광고비와 마케팅 비용 그리고 배급 수수료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반면 인건비와 진행비 그리고 후반 작업 비용은 변동이 없고 기획 개발 비용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이는 한국 영화가 연구 개발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개발 제작하기보다 기존의 검증된 작품만을 제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2000년 중반 한국 영화 수익률은 상당 부분 감소했다(백일, 2014).

 


재벌 그늘 아래 신음하는 충무로

금융 위기를 기점으로 충무로 주자들의 손바꿈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금융 위기를 불러온 상위 재벌 그룹인 삼성, LG, 현대, SK 등에게 제조업종에 집중할 것을 요구함에 따라 이들 재벌 주자들은 영화 시장에서 사라졌다. 재벌 상위 그룹이 떠난 자리를 CJ, 롯데와 오리온 등 서비스 전문 재벌 그룹들이 파고들었다. 이들은 제작에 집중하는 금융 투자사들과 달리 영화 배급과 상영 시장에도 함께 진출하기 시작했다. CJ그룹은 전문 영화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또한 호주의 빌리지 시네마사와 함께 CGV 멀티플렉스 영화 상영관을 설립해 1998년 서울 강변역에 우리나라 최초로 멀티플렉스 전용관을 개관했다. 후발주자인 오리온과 롯데그룹도 CJ처럼 영화 배급과 상영시장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5’에서 보듯, 영화 스크린 숫자는 1999588개에서 20152424개까지 증가했다. 지속적인 멀티플렉스 증가와 함께 기업들 간의 인수합병도 활발히 일어났다. CJ2004년 중형 영화 전문 기업인 시네마서비스의 상영관 사업인 프리머스를 인수·합병했다. 2012년 중앙일보는 오리온 그룹이 맥쿼리 사모펀드에 팔아넘긴 메가박스를 인수했다. 범 삼성가인 CJ와 중앙일보가 한국 극장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소형 극장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명보극장과 스카라 극장 등 중소형 영화 상영관들이 CJ와 롯데 등에 경영권을 위탁하면서 재벌의 하청 영화관이 되어야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영화 배급업자들 때문이다. 영화 유통업을 담당하고 있는 배급업자들은 이들 중소형 극장주들에게 동시에 4개 이상의 스크린 확보를 요구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신규 영화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통고했다. 그러자 독립 극장주들은 생존을 위해 극장 운영권을 멀티플렉스를 장악하고 있는 CJ와 롯데 등 재벌들에게 넘겨야했다. 중소기업의 몰락이자 재벌 독과점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픽=안혜나 기자

 

구체적으로 배급 시장 구조부터 살펴보자. ‘6’에서 보듯, 5개의 영화 배급사들이 시장 점유율 60~70%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영화 배급사들이 1999155개에서 2011641개로 늘어났다 할지라도 소수의 기업들에 의해 배급 시장이 통제되고 있다는 의미다. 재밌는 현상은 1980년 후반부터 한국 배급시장에서 들어온 헐리우드 영화사들이 한국 배급 업체와의 시장 경쟁률에서 밀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현상은 세계 영화 시장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헐리우드 배급사들은 2000년대 들어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2001년과 2003년 한국 영화 배급 시장에서 절대 강자는 재벌도 헐리우드 배급사도 아닌 독립 영화사들이었다. 시네마서비스와 청어람, 플레너스 등의 독립 영화 배급사들이다. 하지만 이들 독립 영화 배급업체들은 2007년 이후 보이지 않는다. 시네마 서비스와 플레너스는 2005CJ에 인수 합병됐기 때문이다. 다른 독립 영화 배급사들도 후발 주자인 롯데와 오리온 재벌에게 인수 합병됐다.

 



2013년에서 2016년까지 10대 영화 배급사들의 명단과 시장 점유율인 7’도 한번 살펴보자. ‘6’에서 등장했던 CJCJ E&M으로 개명했을 뿐 시장 점유율은 여전히 1위다. 쇼박스, 롯데E, 헐리우드 배급사들의 명단도 그대로다. NEW, 아이러브시네마, 씨너스, 메가박스플러스엠 등이 새롭게 등장한 영화 배급사다. 이중 메가박스플러스엠은 중앙일보사가 영화 상영관인 메가박스를 지난 2012년 인수한 이후 배급업에 진출하면서 설립한 기업이다. 시장 점유율도 이들 10대 배급사들이 거의 90%이상을 점유하는 과점 구조를 보이고 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영화 상영 시장을 CGV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3개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8’에서 보듯, 이들 3개 재벌 기업에 의해 95% 이상 장악되어 있다. 공정거래법상에서 규정하는 독과점 시장이다. 거래법은 시장에서 단독 기업이 50%이상 또는 3개사의 합계가 75%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보이면 독과점 시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상영 시장이 독과점 구조라는 것은 한국 영화의 수익을 3개 재벌들이 독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한 관객이 1만 원을 지급하고 영화 한 편을 보면 그중 50%5천 원은 극장주에게 무조건 가야 한다. 왜냐하면 상영관과 다른 영화 조직과의 수익률 배분은 5:5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5천원 중 60%3천 원은 영화 투자사나 투자 조합으로 돌아간다. 남아있는 2천 원 중에서 배급사 수수료(6~12%)를 준 다음 남아있는 1천 원을 웃도는 돈이 제작사 수익으로 돌아간다. 영화 한편 제작비가 평균 30억 원인 점을 감안하면, 관객이 500만 명 정도는 들어야 제작사는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제작비가 30억 원을 넘을 경우 영화는 흥행했지만 제작사는 파산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2007년 김지훈이 감독한 화려한 휴가를 예를 들어 보면 100억 원 정도의 제작비가 투여된 이 영화의 유료 관객이 730만 명이었다. 이 영화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와 상영관 CGV는 엄청난 수익을 올렸지만 영화 제작사는 파산했다. 유사한 현상은 2008년 개봉한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다.

 

다시 말하면 한국 영화 제작은 과당 경쟁 체제이고 영화 배급은 과점 구조이며 상영관은 독점 구조이다. 이로 인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해도 영화를 만든 회사가 빚더미에 앉는 기이한 현상이 일상화되고 있다.

 

CGV 홈페이지

 

한국 영화 시장이 독점화됐다는 것은 한국 영화가 재벌 3사의 통제 하에 놓여 있다는 의미이다. 독점 자본은 시장에서 가격 결정권을 갖고 유통될 수 있는 물량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갖기 때문이다(Baran & Sweezy, 1966). 영화 배급 및 상영 시장이 독과점 구조로 정착되면서 시장질서가 문란 해 지고 있다. 재벌기업들이 시장에서 지배적 위치를 남용하면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중소형 영화업자들이 당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2004년 오리온 그룹의 영화 배급사인 미디어플렉스는 전주 영화 상영관인 ()시네타운의 영화 배급 요청을 2년 동안 거절했고 시네타운은 스크린 쿼터에 따른 한국 영화 상영 의무 일수를 채우지 못해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들의 횡포는 유료 방송 시장에서도 있었다. CJ그룹의 영화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와 오리온 그룹 소속 미디어플렉스는 2008년 판권을 소유한 영화를 자신들의 계열사 케이블텔레비전에만 공급하고 다른 사업자에게는 공급하지 않는 차별적 행위를 자행했다. CJ엔터테인먼트 등 5개 영화 배급업자들(시장 점유율 총합 79.3%)은 또한 2008년 영화 관람료 할인의 종류와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이외의 할인은 금지하도록 하는 공문을 상영관에 발송했다. 상영관은 배급업자에게 영화를 받아야만 영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상영관은 영화 관람료 할인 행사를 중단해야 했다(박제현, 2008). 다시 말하면 영화 배급과 상영 시장을 장악한 3개의 재벌(CJ, 중앙일보, 오리온, 롯데)들이 한국 영화 산업화의 결과물을 독식하면서 그 피해는 영화 제작 예술인들과 소비자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재벌들 투기장 된 유료방송채널수는 증가, 콘텐츠는 획일화 3.11

[삼성 연재기고 (9)] 투기자본 담합·SO 독과점 폐해로 시청자 미디어 주권 상실


돈 내고 방송 보는 시대 도래    

20171월 우리나라 가구 기준으로 90.1%가 유료방송 가입자다 (방송통신위원회, 2017). 열 가구 중 아홉 세대는 일정액을 내고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는 의미다.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유료방송 사업자에게 현금을 납부하고 있다는 뜻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자 유료방송이 뭐가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자. 1995년부터 우린 케이블 방송을 시청해왔다. 첫 번째 유료방송이다. 2000년에는 디지털위성방송인 SkyLife가 도입됐다. 5년 뒤 2005년 방송통신융합 이동방송인 위성DMB와 지상파DMB도 공짜 방송은 아니었다. 2008년 도입된 인터넷텔레비젼(IPTV)도 신규 유료매체이다. 지금까지 도입된 한국의 유료방송 매체들이다.

 

이들 유료매체가 등장하게 된 계기는 지난 1980년부터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연관돼 있다.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는 기업들의 자유로운 경쟁이 소비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신화를 지속적으로 퍼트려왔다. 미디어산업에서 신자유주의 모습은 공기업 사기업화와 소유 지분 완화다. 전 세계적으로 공기업 사기업화는 통신시장과 공영방송에서 일어났다. 미국과 일본, 프랑스 등 앞선 자본주의 국가들은 국영 통신사를 민영화했다. 영국과 프랑스, 이태리 등은 공영방송국을 자본들에게 양도했다(Murdock&Wasko, 2007). 그렇게 해서 탄생한 언론재벌들이 폭스 채널을 갖고 있는 뉴스코러페이션(News Corporation) 그룹 오너인 루퍼트 머독이다. 그는 영국과 미국 미디어 시장에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 흐름과 금융권과의 결합을 통해 언론재벌이 됐다(Meehan, 2005).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이태리의 공영방송 민영화 정부 정책을 이용해 언론 재벌이 됐다. 그 다음 정계에 진출해 총리가 됐다(Padovani, 2004).

 

지난 1980년 후반부터 한국도 경영 합리화란 이름으로 국가 기간산업인 통신과 방송의 민영화가 진행됐다. 신자유주들이 공기업 적자 해소를 위해 민영화를 추진해야한다고 강변했지만 한국전기통신공사(Korea Telecom=KT) 민영화 사례는 정확히 그 반대다. 한국통신은 지속적으로 흑자를 낸 알짜배기 국영기업이었다. 그런 한국의 흑자기업도 앵글로색슨이 만든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경제 이념에 의해 민영화 대상이 됐다. 지난 1988년부터 수면으로 떠오른 KT 민영화 논의는 2000년 초반에서야 마무리됐다. 민영화가 늦어진 가장 큰 이유는 강성 노조 때문이 아니라 지분 관계 때문이었다. 정부 소유지분을 어떻게 얼마만큼 누구에게 넘길 것인가를 두고 12년 넘게 씨름한 것이다. 그 결과 정부가 절반에 못 미치는 지분을 가지면서 최대주주로서 경영권을 행사하고 나머진 시장에 팔았다. SK그룹과 삼성그룹 등 재벌들도 KT의 대주주에 육박하는 지분을 가졌고, 외국인들도 민영화된 한국통신 주주로 등극했다(Jin, 2006). 또 다른 민영화 분야는 방송 분야다. 영국과 프랑스, 이태리 등 전 유럽은 공영방송이 민영화 대상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공영방송 민영화 정책이 추진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공영방송 민영화 대상으로 지난 1990년 초반부터 논의됐던 문화방송(MBC)소유 지분 때문으로 추정된다. 만약 수구보수 세력(예로 군 출신)과 시장주의로 무장한 보수주의자(예로 이명박)들이 1990년대와 2000년 초반에 정권을 잡았더라면 문화방송은 민영화 됐을 것이다. 그 당시 세계적인 흐름이 공영방송 민영화였다. 하지만 그 시기동안 한국은 야당 출신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면서 문화방송 사기업화는 진행되지 않았다. 문화방송 소유 지분은 정부가 70% 지분을, 박근혜 영향권 아래 있는 정수장학회가 30% 지분을 갖고 있다. 정부가 주식을 모두 시장에 판다면 (또는 주식을 개방한다면), 최대 주주로 정수장학회가 남게 된다. 민주정부에게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공영방송 민영화는 이런 복잡한 정치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현실화 되지 못했다.

 

▲ ⓒ gettyimages bank

 

이와 달리 통신 민영화 정책과 연관된 케이블 등 유료방송 분야는 규제완화 가속도가 붙었다. 한국 정부는 케이블 사업에 재벌과 외국인 투자자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소유 지분을 완화하고, 통신 망 사업의 일정 부분을 케이블 망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민영화를 추진했다. 또한 새로운 미디어인 위성채널과 디지털 기반의 융합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케이블, 피라미드 유료방송 구조 최강자

한국 케이블 방송 도입은 한국통신 민영화 정책과 맞물려 있다. 왜냐하면 케이블은 지상파와 달리 반드시 망을 통해서만 방송을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상파가 영상 이미지와 텍스트를 불특정 대중에게 무료로 송출한다면 케이블은 똑같은 미디어 콘텐츠를 한정된 지역에 망을 통해서 돈을 낸 가입자에게만 전달한다. 망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면 케이블 방송은 할 수 없다. 그래서 케이블 방송은 통신사업 민영화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한국은 77개 권역으로 나눠서 케이블 망이 깔려있다. 또한 1’에서 보듯, 이 매체는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이를 송출하는 회사가 별도로 존재해야 한다. 프로그램 공급자 (Program Provider=PP)들은 자신들이 직접 제작하거나 수입한 작품을 케이블 망과 방송을 송출할 수 있는 기기를 갖고 있는 종합유선방송사업자(System Operator=SO)에게 일정한 돈을 받고 판매한다. SOPP들에게 방송 편성권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SO가 갑이고 PP가 을이란 뜻이다. 자본력이 있는 법인이나 사람은 SO, 재능과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PP 법인 소속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의 케이블 방송은 1995년 처음 선보였다. 삼성과 대우 등 재벌들에게 29PP들을 허가해 줬다. 케이블 방송이 자리를 잡기 위해 강한 현금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케이블 망을 재벌들에게 개방했다. 공기업 민영화가 케이블 망 사업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예를 들어 보자. CJ 홈쇼핑 (현재 CJ오쇼핑)199912KT가 운영하고 있던 케이블 망 93.26%을 매입, 종합유선방송사업자가 됐다(이은주, 2008, p.93). CJ홈쇼핑은 케이블 망 사업을 전담하는 CJ 헬로비전을 설립했다. 이때 외국인 투자자를 유치해 회사 지분을 공유했다. 2008년 태광그룹에 인수 합병 된 큐릭스는 1998년 홍콩 SSB-Aim 그룹과 미국 시티그룹에서 외자를 유치했다. 중소기업인 이민주씨는 2000년 외국인 사모펀드로 추정되는 자금을 끌어와 C&M을 설립했다. 2008CJ에 피인수 합병됐던 오리온그룹의 온미디어도 2000년 홍콩 신동아시아투자기금과 미국 시티그룹에서 투자금을 유치했다. 다시 말하면, 한국 케이블 방송 분야는 매체 도입 초기부터 재벌들과 외국인들이 함께 시장에 들어와 있었다.

 

외국인은 한국 미디어 사업 분야 중 케이블 망 사업과 광고 분야만 자금을 투자한다. 하지만 외국인의 두 시장 접근 방식은 약간 상이하다. 광고는 제작과 기획 등의 분야에 지사를 설립하거나 한국 광고회사 지분을 인수하거나 투자한다. 어떤 경우에는 대주주로서 이사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한다. 하지만 케이블 분야에서 외국인들은 SO로서 케이블 망 사업에 지분을 투자하거나 재벌이 갖고 있는 PP 계열사에 일정 지분만을 투자한다. 하지만 그 지분은 이사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대자본은 아니다.

 

특이하게도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기업들이 2008년 집중적으로 피인수 합병 됐다. , 방송을 돈 벌이의 수단으로 여긴 외국인 사모펀드 자본이 한국 유료방송 시장에서 회사를 키운 수익만 챙긴다는 의미다. 예를들어 보겠다. MSO업체인 큐릭스는 태광그룹에 팔렸고, C&M은 국민유선방송투자 (MBK 파트너스와 맥쿼리 합자)에 지분을 팔아넘겼다. MPP였던 온미디어도 CJ에 매각됐다.

 

이처럼 재벌과 외국인들이 케이블 방송, 특히 SO에 투자를 집중하는 것은 높은 수익률 때문이다. ‘2’에서 보듯, 고객들이 낸 돈의 약 68.7%가 케이블 SO업체로 간다. 영화 관람료의 50%는 무조건 극장주에게 가듯, 케이블 방송을 송출해주는 서비스만 제공하는 SO가 수익의 약 70% 정도를 가져간다. 실제로 작품을 제작하는 PP20% 미만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 한국은 SOPP의 비율이 2:7이라면, 미국은 5:5 정도다. 즉 작품을 기획 제작하는 독립 제작사보다 유통업자가 더 많은 돈을 버는 착취적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같은 고수익 구조 때문에 재벌과 외국인 투자가 몰린 것이다.

 



케이블 시장의 착취 구조는 정부의 시장 양적 성장만을 위한 규제완화 정책에 기인한다. 공급과 수요를 통한 시장의 안정성보다 빠른 양적 성장에 집중에만 집중하는 관료주의 정책의 폐해다.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재벌을 통해 실행하고 노동자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개발모델을 케이블 등 유료방송 시장에 적용했다(Nam, 2008). 제조업의 개발모델이 노동자의 희생을 담보로 했다면, 유료방송의 개발모델은 독립 제작 회사들의 희생과 눈물을 담보해 했다. 예를 들어 보면 3’에서 보듯, 정부는 지속적으로 신규 미디어들을 도입을 SK 등 재벌들에게 허가해 줬다. 동시에 제작 지원 정책도 진행했다. 신규 매체에 필요한 작품을 충원하기 위해서다. 유료방송에 작품을 공급하는 제작 회사들은 기존 정부의 허가제에서 등록만 하면 영업을 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영상 회사들도 정보통신(IT)기업처럼 벤처기업에 지정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독립 영상 회사들이 스크린 쿼터 제도처럼 방송 쿼터 제도를 통해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국들은 일정 비율 이상 국내 작품으로 편성토록 했다. , 정부가 신규 미디어 도입과 채널을 돌릴 수 있는 영상 공급 수요를 조절하면서 영상산업 진흥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관료들이 독재시대의 경제개발 모델을 영상 산업 진흥을 위해 미디어 산업에 활용한 것이다.

 


4’에서 보듯, 실제로 정부의 규제완화 정책은 방송 사업의 성장을 이끌어 냈다. 공정거래위원회 (2010)2004년부터 2008년까지 방송 사업자 규모수를 보면, 지상파 방송 법인 수는 증가했고, 케이블 PP법인도 증가했다. 여기에 위성방송은 방송통신 융합 기능을 갖고 있는 DMB 도입으로 그 숫자가 늘었다. 2008년에는 신규 유료방송인 인터넷 방송 서비스도 증가했다. 다만 케이블 방송에서 단순히 중계업무를 보던 RO와 음악유선방송 수만 줄어들었다. 그 결과, 2004년부터 5년 동안 전체 사업자 수는 735명에서 490법인으로 줄었다. 시장에서 경쟁자들이 줄어들었으니까, 수익률은 상승했을까? 시장 구조 분석으로 가 보자.

 



규제완화, 승자 독식 가속 페달

한국 유료방송은 새로운 유료매체인 인터넷방송(IPTV)2008년에 도입했다. 케이블과 위성방송 등 양강 체제로 유지됐던 유료방송 시장에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한 것이다. 정부는 IPTV 사업 허가권을 기존 통신시장 강자인 SK, KT, LG 등 통신 3사에 할당했다. 이런 와중에 케이블 시장에 대형 인수합병 두건이 발생했다. 종합유성방송국 즉 케이블 망 사업자인 태광그룹이 외국인 자본이 결합된 큐릭스를 인수해 시장점유율 1위 업체로 등극했다. 또한 CJ는 오리온 그룹과 특수 관계인 동양그룹의 케이블 프로그램 공급업체, 시장 점유율 2위인 온미디어를 인수해 시장 점유율 1위 업체로 등극했다.

 

▲ ⓒ gettyimages bank

 

2008년 케이블망 사업인 SO시장은 이미 태광그룹의 Tbroad 8개 업체가 83.7% 시장 점유율을 보일 정도로 과점상태였다. 각각의 8개 기업들은 또한 유선방송국은 2개 이상 소유한 MSO들이었다. 이 시장이 독과점 구조를 보인다는 의미는 한국 케이블 방송 편성 권한을 이들 8개의 기업이 좌지우지 한다는 뜻이다. 확대해석하면, 이들 MSO들의 영향력은 유료방송업계의 봉건군주들이다. 왜냐하면 케이블 위상이 피라미드 구조 특성을 보이는 유료방송 시장 구조에서 최상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케이블에서 유통된 콘텐츠가 위성방송과 IPTV에 동시에 유통되거나 재송신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2008년 당시 시장 점유율 21.3%로 업계 1위였던 Tbroad7개의 SO를 소유한 큐릭스를 인수했다.

 



프로그램 제공 시장은 2008년 기준으로 18개의 채널을 보유한 CJ 등을 포함한 5MPP의 방송수익 수익률 대비 시장 점유율은 64.7%로 다소 경쟁구조를 보이고 있다. 5개 주요 MPP들이 70% 미만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거래법은 3개 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70% 이상을 보일 경우 독과점 시장으로 규정하고 있다. ‘6’애서 보듯, SO 시장과 달리 독과점 구조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고 추론할 수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업계 1위인 CJ2008년 연말에 업계 2위인 온미디어를 인수 합병했다. 이로 인해 2009년에는 업계 1위인 CJ2위인 SBS의 시장점유율에서 두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 2008년 케이블 방송시장에는 태광그룹이 큐릭스를, CJ그룹이 온미디어를 인수 합병했다. 그 결과 7’에서 보듯, 케이블 방송업계의 강자였던 이들 재벌들은 시장에서 콘텐츠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시장 권력을 갖게 됐다. 케이블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동시에 편성권을 갖고 있는 업체들을 MSP 시장에서 1위인 CJ2위인 태광의 방송 사업 수익 대비 시장 점유율은 39%이다. 이는 유료방송 시청자들이 매달 내는 돈의 약 40% 정도는 CJ와 태광 통장으로 입금된다는 의미이다. 1위 업체인 CJ는 표에서 보듯 6년 뒤에는 9개의 독립 SO들의 지분을 사들여 업계 1위로 등급 했다. 그동안 케이블 주요 기업들의 명단변경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부여 이들 MSO들의 시장 점유율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똑같은 시장을 놓고 IPTV라는 경쟁자가 등장한 만큼, 전체 유료시장에서의 수익률은 낮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8’에서 보듯, 케이블 TV는 전체 유료시장 수익 점유율에서 49.6%, 위성방송은 10.7%, IPTV39.6%를 기록했다. 2008년 도입된 IPTV7년 만에 급격하게 성장세를 보인 반면, 1995년부터 시청자를 확보하기 시작한 케이블 방송국들의 시장 점유율은 2009년을 기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위성방송 시장 점유율이 변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케이블 방송 대표주자인 CJ와 태광그룹과 IPTV 대표주자인 SK, KT, LG 5개 재벌들의 살벌한 시장 쟁탈전이 전개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투기 자본 담합소비자 미디어 접근권 제한

지난 1995년 처음 선보인 유료방송은 한국 전체 가구 세대의 90%가 시청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한강의 기적이 유료방송 시장에서도 일어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 기적인가라는 질문으로 세분화해 보면, 그 답변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유료방송으로 미디어 채널 수가 증가했지만 미디어 다양성이란 측면에선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한국 유료방송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SO 시장 구조의 독과점 구조다. 소수가 지배하는 독과점 구조는 상품이 유통되는 시장의 흐름을 막아 소비자들의 미디어 접근권을 제한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공정거래위원회(2011)‘IPTV에서 왜 인기채널을 볼 수 없을까란 제목의 보도 자료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5MSO (Tbroad, CJ 헬로비전, C&M, HCN, 규릭스)가 담합을 통해 시장 질서를 교란했다는 것과 그에 대한 처벌 내용이었다. 5개 기업은 약 10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 받았고 담합행위를 주도적으로 한 태광의 로드와 CJ 헬로비전을 검찰 고발했다.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200811월 케이블 편성 권한을 갖고 있는 5MSO들은 새로 도입된 IPTV 영업을 방해하기 위해 IPTV에 채널을 공급하기로 한 온미디어 채널을 축소하고 CJ 미디어에는 방송 채널을 공급하지 않는 조건으로 약 250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IPTV 사업자는 프로그램을 구하지 못해 129개 채널이 가동되지 못했다. 또한 온미디어의 시청가입자수가 9백만 명으로 축소됐다. 이런 상황에서 CJ2008년 연말 온미디어를 인수 합병했다. 이 사건은 돈을 지불하는 시청자의 미디어 주권에 대한 보호 장치가 미흡함을 보여준다. 단적인 예로 케이블 방송에서 기본서비스에 포함된 작품조차도 시청률이 올라가면 예고도 없이 고가 상품으로 옮겨버린다.

 

또 다른 독과점의 폐해는 PP들의 수익률 착취다. 가입자들이 낸 케이블 수익 배분율에 있어서 SO들이 약 70% 수익을 가져가고 PP들에겐 약 20% 정도의 돈만 돌아간다. 낮은 수익률은 제작할 수 있는 비용을 제한하고, 이로 인해 제작비가 낮은 작품만을 지속적으로 제작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심지어 오래된 작품을 재방송을 반복적으로 하기까지 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8SO들의 재허가 조건으로 방송 수신료 수익의 25%이상을 PP들에게 지급하는 것을 심사 조건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SOPP의 오래된 갑을관계 관행으로 인해 정책적으로 실효성 효과를 잃어가고 있다(홍정윤 외저, 2016).

 

SO의 독과점 폐해는 유선 방송망과 통신망을 설치하는 하청 노동자들에게까지 전가되고 있다. 이들 방송 통신 업체들은 망을 보수하는 업무와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업무를 협력사에게 하청을 주면서, 작업에 따른 위험비용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또한 하청 노동자들과 개인도급사업자로 계약을 맺어 실적 부진에 따른 수익 감소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20172월 기준으로 SKLG의 도급사업자 비율은 각각 36%, 48%에 이른다(김유경, 2017).

 

 

디지털 한국기획자는 삼성이다 3.17

[삼성 연재기고 (10)] 삼성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는 어떻게 구성돼 있나

이건희는 지난 1990년대 금융 기법을 활용해 이병철의 삼성그룹을 6개의 범 삼성그룹으로 나눴다. 이들 그룹 중 삼성, CJ 그리고 중앙일보가 미디어 사업을 하고 있다. 삼성은 디지털 미디어(삼성물산과 삼성SDS)와 광고(제일기획) 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신문 등 인쇄매체(중앙일보)와 방송 등 영상매체(JTBC·메가박스) 분야에서 선두 기업이다. CJ는 케이블(tvN)과 영화(CGV) 등의 영상 분야와 함께 온라인 게임(넷마블) 등에서 한국 최정상 기업이다. , 삼성과 CJ 그리고 중앙일보는 한국인들의 여론과 소비 문화생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디어 복합 기업이다.

 

미디어 복합 기업(Media Conglomerates)은 중앙집권적 지배구조를 갖고 두 분야 이상에서 미디어 사업을 벌이는 대기업을 말한다(Kunz, 2007). 미디어 복합기업은 정부의 미디어 규제완화와 공기업 사영화 조치 이후 등장한 기업의 형태이다. 미국의 GE-NBC, Disney-ABC, CBS-Viacom, News Corporation, Sony 등이 대표적인 문화 재벌들이다. 이들은 1990년대 세계 미디어 시장에서 콘텐츠의 흐름을 통제하는 시장의 절대 권력들이다.

 

하지만 이들 앵글로색슨 자본의 복합 미디어 기업들은 한국 미디어 시장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들은 세계 10대 미디어 시장 규모를 갖고 있는 한국 시장에 진출하지 않은 것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선 한국 복합 미디어 기업들의 지배구조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외국계 문화기업들은 토착기업들과의 지배구조 공유를 통해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영업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구조는 경제적 소유구조와 이사회 구성 그리고 기업의 사업 전략과 자원 배분 등을 보여준다(Murdock, 1982). 이는 지배구조를 분석하면 누가 그 기업을 통제하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삼성과 CJ, 중앙일보의 지배구조를 분석하기 위해 이들 3개 기업의 감사보고서와 사업보고서를 분석할 것이다. 분석 시기는 1999년 이후부터다. 왜냐하면 재벌 기업에 관한 정보가 그때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재벌의 불공정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공정거래법을 1998년 개정했다. 개정된 법은 재벌 계열사나 재벌 오너 일가가 투자하는 기업들에 대해선 모두 사업보고서나 감사보고서에 그 내용을 기재토록 명시했다.

 

삼성물산, 디지털 한국 기획자 & 투자자

2015년 삼성물산은 지난 1948년 삼성물산과 다르다. 이름만 같고 하던 사업이나 그룹 내 위상이 다르다는 의미다. 2018년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다. 1948년 삼성물산은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구인회 LG 창업주와 조홍제 효성 창업주와 함께 설립한 무역회사다. 그 후 도소매업과 1970년 후반 건설업을 추가했다. 1948년 삼성물산은 그룹 자본의 모토가 된 기업이다. 또 다른 삼성 자본의 모태가 된 기업은 1953년 설립된 제일제당과 1954년 제일모직이다. 이들 세 회사 중 제일제당은 지난 1997년 이건희 회장의 조카인 이재현에게 넘겼다. 나머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2015년 통합됐다. 이로 인해 삼성물산이 사실상의 지주회사가 됐다. 이 회사가 그룹 내 피라미드 지배 구조상 정상에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삼성물산공사 시절 고 이병철 삼성 회장. 사진=삼성

 

이를 이해하기 위해 삼성 역사와 지배구조 변동을 함께 분석해야만 알 수 있다. 2015년 삼성물산은 여섯 번의 개명 작업을 거쳤다. 1963년 삼성그룹의 부동산 업무를 위해 설립됐던 동화부동산이 최초의 이름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부동산을 통해 재를 증식시켰던 이병철은 동화부동산의 이름을 동화진흥과 중앙개발로 두 번 개명했다. 1970년 중반 가축분뇨 무단 방료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기업이 중앙개발이다(이시가와 요이찌, 1988). 삼성그룹을 승계한 이건희는 이 기업을 삼성에버랜드로 개명했다. 그 과정에서 최대 주주를 그의 처남인 홍석현에서 그의 외아들 이재용으로 교체했다. 2013년 삼성에버랜드는 상장사인 제일모직의 패션사업을 인계받고, 2014년 제일모직으로 개명한 다음,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이는 전형적인 우회상장 수법이다. 비상장기업이 증권거래소의 까다로운 심사를 피하기 위해 상장기업을 인수한 다음, 재상장 절차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 뒤 제일모직은 또 다른 삼성 모태자본인 삼성물산을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주식 가격 산정을 놓고 많은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상장사인 삼성물산 주식 가격을 지나치게 낮게 산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연금 기금을 무리하게 끌어들여 삼성물산 합병자금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1) 회사 개명 내역

 

사실, 이재용이 삼성물산(구 삼성에버랜드) 대주주로 공식적으로 등극한 것은 1999년 이후다. 1999년 이재용은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 지분 25.1%를 확보함으로써 1대 주주가 됐다. 2대 주주는 그룹 내 중핵기업인 삼성카드(14.0%)와 삼성캐피탈(11.6%)이다. 5%이상 대주주 명단에는 포함돼 있지 않지만 삼성전기와 삼성SDI 등 그룹 내 중핵기업들도 모두 주주 명단에 포함돼 있다. 삼성캐피탈은 2004년 삼성카드에 합병됨으로써 삼성카드가 26.64% 지분을 확보해 이재용을 누르고 1대 주주가 된다. 삼성카드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삼성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 최대주주였다. 그러나 2012년 이후 삼성카드 지분은 5%까지 줄어든다. 삼성카드의 지분이 줄어 듬과 동시에 이재용이 다시 1대 주주로 등극한다.

 

2) 5%이상 대주주와 기타 소유구조 변화

 

이재용 재등극과 함께 눈에 띄는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2대 주주로 2012년부터 현대가의 KCC 그룹(17%)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현대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의 막내 동생인 정상영이 창업한 KCC는 건축자재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재벌그룹이다. 다른 가문의 자본을 5년 이상 지주회사에 등재한 것은 재벌역사에서 흔한 경우는 아니다. 두 번째 눈에 띄는 대목은 2015년부터 국민연금이 5%이상 대주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씨 일가와 삼성 중핵기업의 5%이상 지분의 총합이 199975.9%에서 201642.79%로 줄어들고 있다. 이는 이씨 일가의 자금력이 지주회사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함을 의미한다. 만약 이씨 일가가 삼성그룹 내에서 경영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면, 삼성그룹 지배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지 회의가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몇 가지 특이한 사항을 추론할 수 있다. 첫 번째 추론의 대상은 제일모직이다. 삼성 모태 자본의 하나인 제일모직은 삼성에버랜드 지분 4%2000년부터 2012년까지 갖고 있었다. 이는 2013년 삼성에버랜드가 제일모직 패션사업 부분을 인수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두 번째 추론은 CJ과 삼성과의 연계 고리이다. CJ 이재현은 삼성에버랜드 지분을 2003년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 삼성에버랜드 지분을 처분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CJ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와 케이블, 인터넷 게임 기업들을 사냥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CJ는 오락산업 분야에서 강자가 된다. 이는 CJ 미디어 사업 부분에서 본격적으로 증명하겠다. 세 번째 추론 대상은 이유정과 조운해이다. 범 삼성계에 포함되는 신세계 그룹의 이명희(이건희 막내 여동생)의 딸인 이유정과 한솔그룹의 이인희(이건희의 큰 누나)의 남편인 조운해가 삼성그룹 지주회사 지분을 갖고 있다. 비록 적은 지분이지만 가문의 일원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삼성 지주회사는 기업공개가 이뤄진 2014년 전까지 소수의 이씨 가족과 이들이 통제할 수 있는 기업만 주주가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삼성전자조차도 이 기업의 지분을 오랫동안 갖고 있지 않았다. 삼성전자의 최대주주는 외국인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삼성물산은 소수의 이씨 가족만 소유권을 갖는 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이다.

   

3) 미디어 관련 타 법인 주요 출자

 

삼성물산은 더욱이 이재용이 최대주주로 등극한 1999년 이후 한국 디지털 미디어의 재정적 후원자였다. 삼성물산(구 삼성에버랜드)2000e-삼성 프로젝트 이외에도 인터넷 금융과 보험 그리고 정보보안 관련 기업에 지분을 투자했다. 이들 기업들은 디지털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거나 업체이거나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업체들이다. 투자금은 삼성물산 지분뿐만 아니라 삼성 계열사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표면상으로 이재용이 e-삼성 프로젝트를 포기하면서 실패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결론은 유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은 삼성그룹의 시스템 통합사업을 하는 삼성SDS 영업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매출 확대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몇개 기업들의 사업영역과 소유구조를 살펴보자. ‘올앳’ (, 케이지올앳)은 전자상거래나 인터넷 금융 거래 시 ActiveX를 쓰는 지급 결제 대행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업체다. 주요 주주는 2000년부터 현재까지 삼성카드, 삼성물산, NHN(네이버) 등이다. 현재까지 지분 변동이 없다. 이들 3개 대주주들은 한국 온라인 금융상거래의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소비자들은 거래를 할 때마다 올앳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자신들의 디지털기기에 설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큐아이 닷컴은 정보 보안 프로그램 개발과 온라인 사업 모델을 개발하는 업체다. 주요 협력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웨어(MS). 2000년 설립 당시 최대주주는 에스원(53.62%)이며 삼성에버랜드와 함께 삼성SDS(4.47%)등이 주주였다. 2015년 삼성SDS가 에스원 지분을 인수해서 1대 주주가 됐다. ‘엠포스는 인터넷 광고 기법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온라인 소프트웨어 기업이다. 한국 광고시장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넘어간 2010년 이후 급성장했다. 이처럼 성공한 디지털 투자와 달리 실패한 기업도 있다. ‘가치네트는 인터넷 뱅킹과 온라인 보험회사다. 이 기업의 소유지분은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이재용이 최대 주주였다. 2000년 지분을 살펴보면 이재용(52.4%), 삼성에버랜드(19.1%), 삼성SDS(9.5%), 이학수(4.8%) 그리고 삼성경제연구소(4.8%) 등이다. 2010년까지 지분 변동은 있지만 이재용이 최대주주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치네트는 2014년 청산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출근 모습. 연합뉴스

 

특히 이재용이 투자한 이들 기업 중 증권시장에 상장된 기업도 있다. ‘크레듀’(현재 멀티캠퍼스)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회사는 인터넷 사이버 위탁 교육 서비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업체로 2006년 코스닥에 상장됐다. 2000년 주요 주주는 e-삼성(48.32%), 삼성경제연구소(14.50%), 삼성네트워크(9.66%) 등으로 모두 이재용이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업들이다. 이재용이 디지털 투자 사업을 포기해 실패한 듯 보였지만 삼성 계열사들이 최대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 2002년 크레듀는 이재용이 최대주주로 있는 가치네트의 교육사업을 인수해 사이버 위탁 교육 서비스 사업을 확대했다. 또한 삼성 이데올로기를 생산 유포하는 삼성 지식정치 사령부인 삼성경제연구소가 이 기업의 대주주이다. 디지털 지식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기업이 하나로 결합된 사례이다.

 

4) 멀티캠퍼스 (, 크레듀) 대주주 변화

이처럼 이재용의 e-삼성 프로젝트가 실패한 듯 보이지만 삼성의 디지털 미디어 권력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삼성물산의 이사회 구성을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임기임원들은 다른 기업에서 오거나 다른 기관에서 온 사람은 없다. 등기임원들은 모두 삼성 구조본이나 삼성 계열사 임원 출신이다. 이미 이씨 일가에 대한 충성심과 능력을 검증 받은 사람들이다. 1999년부터 2016년까지 등기임원은 13명에서 5명까지 숫자가 유동적이다. 이건희 회장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등기임원이었다. 삼성 구조본부를 책임지고 있던 이학수는 1999년 등기임원이었다. 그 이후 삼성 구조본 재무통인 최광해가 2000년부터 2003년까지 감사로 등록했다.

 

외부 임원이 등재되기 시작한 것은 제일모직과 합병되기 1년 전인 2013년부터다. 사외이사들의 출신은 재벌 기업(KCC) 이사출신, 경제학 또는 건축학 등 교수들,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이다. 이들이 삼성물산의 2014년과 2015년 합병 건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경우는 없다고 파악되고 있다.

 

삼성SDS, 디지털 한국 건설자

삼성SDS1985년 그룹 내 컴퓨터 임대 등을 목적을 하는 정보시스템 업무을 위해 설립됐다. 그 이후 삼성생명 전산시설을 구축하는 등 정보통합서비스(System Integration=SI) 업체로 성장했다. 삼성SDS1997년 마이크로스프트(MS)사와 전력적 협력관계 확대를 통해 사이버 코리아를 건설하는데 앞장섰다. 건설업체에서 원청이 있고 그 아래에 하청 기업들이 있듯이 삼성SDS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이버 건설 업체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삼성SDS가 도로공사로부터 하이패스 설치 공사를 따 오면 이 기업은 이를 다른 기업에 하청을 준다는 의미이다. 2000년 초반부터 현재까지 이 기업은 한국 최대 SI업체다. 이 기업의 주요 고객들은 정부 (국세청, 인천공항, 검찰청, 국가교육센터), 금융(산업은행, 농협), 대학(명지대) 등이다. 주요 공공시설의 인터넷 통합 서비스 사업을 가장 많이 수주한다.

 

이 기업의 1대 주주는 삼성전자이다. 삼성전자가 디지털 기기를 만든다면, 그 디지털 기기를 가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소프트웨어를 연결하는 서비스를 하는 곳이 바로 삼성SDS. 그 다음 주주는 삼성물산와 삼성전기 등 중핵 기업들이다. 1999년부터 2016년까지 계속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이재용과 이부진 그리고 이서현이다. 실은 삼성에스디에스는 그룹 승계 문제와 연계돼 있었다. 삼성은 1999년 삼성물산 (구 삼성에버랜드)에서 사용했던 금융기법을 이곳에서도 똑같이 사용했다.

 

2013531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삼성물산 패션부문장 사장이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연합뉴스

 

신규 전환사채 발행과 유통 과정을 통제하면서 이재용과 그의 여동생(이부진, 이서현, 이윤형) 지분을 늘려줬다. 그 행위는 불법이었다. 삼성 구조본부를 책임지고 있는 이학수와 이인주가 주도했다. 재무 전문가인 이 두 사람은 2008년까지 삼성SDS 지분을 갖고 있다. 이 회사는 2014년 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그 이후 이들의 지분은 보이지 않는다.

 

5) 삼성 SDS 주요 주주 변동사항

 

삼성SDS는 삼성물산처럼 소프트웨어 개발 기업에 지분을 투자한다. 1999년 인터넷 백신을 만드는 안철수연구소(23.0%)도 이 기업의 투자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포탈 사이트인 네이버(18.4%)도 마찬가지로 삼성 돈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최초 기업간 거래(B2B) 프래그램을 개발하는 일렉트로피아에도 투자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웹사이트를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디자인스톰과 정보시스템 운영 회사인 시스게이트 모두 삼성SDS 사내 벤처 기업이라는 점이다. 실은 네이버도 마찬가지로 삼성의 사내 벤처였다. 2004년에는 동아닷컴 지분을 19.90% 갖고 있다. 또한 삼성물산(구 삼성에버랜드)과 함께 정보 보안업체인 시큐아이닷컴과 사이버 위탁 교육서비스인 크레듀(현 멀티캠퍼스), 가치네트에 공동 투자했다.

 

6) 삼성 SDS 투자 기업

 

삼성SDS 임직원 구성도 삼성물산과 유사하다. 등기임원 숫자는 6~7명 순이다. 기업을 공개하기 전인 2013년까지 삼성그룹 출신의 임원들이 등기 이사이다. 이 기업이 삼성 상속문제와 연관돼 있어 최광해 등 삼성 구조본부 재무팀장이 감사로 등재돼 있기도 한다. 2014년 기업 공개이후 사외이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사외이사 출신은 변호사, 경영학과와 공대 교수들, 그리고 검찰 고위직 출신이다.

 

제일기획(Cheil), 삼성 미디어 자금 집행자

삼성그룹은 1970년대까지 설탕과 밀가루 등 소비제품 판매를 통해 삼성 자본을 축적했다. 그래서 다른 재벌들에 비해 일찍 광고업에 진출한 것으로 추론된다. 광고의 본래 목표는 소비자 수요 관리이기 때문이다. 실제 재벌 그룹 중 최초로 광고대행사 제일기획을 1973년 설립했다. 삼성물산이 6번의 개명을 통해 불법성의 이미지 세탁을 한 것과 반대로 제일기획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제일기획이란 이름을 2008년에 영문으로 ‘Cheil’로 바꿨을 뿐이다.

 

제일기획 사옥. 사진=제일기획 Blog

 

삼성 역사를 살펴보면서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창업주 이병철의 엘리트 의식과 연관된 것으로 추론된다. 삼성 계열사중 많이 쓰는 글자가 제일○○이다. 제일제당, 제일기획, 제일모직 등이 그 사례이다. 삼성그룹의 사훈 중 하나가 인재제일이다. 그 다음에 쓰는 글자가 중앙○○이다. 중앙일보, 중앙개발(구 삼성에버랜드) 등이다. 삼성이란 이름도 3개의 별이란 뜻이다. 3이란 숫자는 동양학에서 ··을 의미한다. 완전함이란 뜻이다. 삼성그룹 광고 카피 중에도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란 글귀도 이런 삼성의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글귀이다. 제일’, ‘삼성’, ‘중앙이란 글귀는 모두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이미지들이다. 이런 그룹 이미지를 만들고 삼성 제품을 광고하는 곳이 제일기획이다.

 

제일기획은 삼성관련 미디어 업무를 총괄했다. 이 기업은 1970년대에는 광고에 집중했고 1980년대에는 비디오 프로덕션 등 영상 제작분야까지 진출했으며 1990년대는 케이블 방송사업까지 확대했다. 하지만 이병철의 삼성그룹이 이건희 삼성그룹으로 재조직된 2000년대 이후부터는 광고사업에만 집중하고 있다. 2000년대 삼성전자의 해외 사업 확대와 맞물려 스포츠를 통한 광고 후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제일기획은 2010년 전후로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등 각국의 광고기업 인수 합병을 통해 세계 20권내의 광고대행사로 성장했다. 실제 2016년 제일기획 매출의 60%이상은 해외시장에서 발생하고 있다. 외국 기업 광고 대행을 통해서 수익을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삼성그룹 계열사의 해외 광고를 대행하면서 발생한 수익들이다.

 

7) 제일기획 주요 사건

 

제일기획의 매출을 분석하기 위해선 누가 광고주인지를 파악하면 된다. 주요 광고주들은 대부분 삼성전자, 삼성테스크, 제일모직 등 계열사들이다. 다른 큰 광고주들은 CJ홈쇼핑, 동서식품, NHN(네이버) 등으로 삼성 계열사였거나 삼성 그룹과 연관된 사람이 설립한 회사들이다. 다른 광고주는 KTF와 신한은행 등이다.

 

제일기획은 삼성물산과 삼성SDS와 달리 삼성 오너일가가 직접적으로 소유 지분을 갖고 있지 않다. 삼성그룹의 중핵기업들이 대주주이다. 이재용이 1999년 제일기획이 주식시장에 상장될 당시 29.75% 지분을 갖고 있었지만 연말에 모두 팔아치웠다. 이는 제일기획도 삼성SDS와 삼성물산처럼 삼성그룹 승계 작업에 이용됐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건희 삼성 회장과 이학주 구조본부 책임자가 1998년 모두 등기이사로 등록했다. 이재용이 주식을 모두 처분 한 후 이 두 사람은 이사명부에서 빠졌다. 이를 통해 제일기획도 삼성 승계 작업에 활용됐음을 추측할 수 있다.

 

8) 대주주와 특수 관계인 주식 소유

 

제일기획이 삼성 승계 작업과 연관됐다고 추론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타법인 출자 현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일기획은 삼성물산과 삼성SDS가 투자하고 있는 크레듀(현 멀티캠퍼스), 배틀탑, 오픈타이드 코리아, 에스코어 등의 회사들에 지분을 투자하고 있다. 제일기획은 또한 인터넷 광고업체인 하이퍼네트 코리아와 텔레마케팅 회사인 MPC 등에도 투자하고 있다.

 

9) 주요 타법인 출자현황

 

마지막으로 제일기획 임원들의 특징을 살펴보자. 삼성물산과 삼성SDS2014년 상장된 것과 달리 제일기획은 1998년 주식 시장에 개방됐다. 이사회 명부에 등재된 이사들 숫자는 199811(사내 8+사외 3)에서 20029(사내 5+사외 4), 20167(사내 4+사외 3) 등으로 유동적이다. 사내에서 임명된 이사들은 모두 삼성 계열사 임원 출신이거나 제일기획에서 근무한 삼성맨들이다. 사외이사들은 모두 한국 파워엘리트로 분류할 수 있다. 대부분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 출신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대학교수, 사법고시를 통과한 검사장 출신, 회계사 시험을 통과한 회계법인 대표, 국회사무처 수석 전문위원 출신 등이다.

 

기업사냥으로 세운 미디어제국 CJ 3.25

[삼성 연재기고 (11)] 공기업 민영화와 중형 미디어 기업 M&A로 성장이재현, 삼성 중핵기업·중앙일보 소유 지분 공유

한국 영상 산업은 CJ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작품 기획에서부터 제작, 배급 그리고 상영까지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업 분야의 다각화와 함께 시장 점유율도 시장 최고이다. 2016년 현재 CJ는 유료방송 최정상에 위치한 케이블 시장 최강자이다. 29개 케이블 채널과 23개의 케이블 방송국을 통제하고 있다. 또한 한국 영화 제작의 가장 큰 손이다. CJ 돈을 받은 독립 제작회사는 CJ 영화 배급사와 상영관을 통해야만 가장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다. 한국 영화 시장의 쇼케이스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CJ가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게이트키퍼라고 단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CJ가 무엇을 제작하고 어떻게 배포하고 언제 시장에 노출시킬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때문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 질문들이 떠오른다. 한국 대중문화의 흐름을 조절하는 CJ는 누가 통제하는가? CJ는 어떻게 대한민국 최대의 복합 미디어 기업이 되었나? 성장에 필요한 자금은 어디에서 왔는가? 저자는 이 질문들에 답을 하기 위해 CJ 제국의 역사와 기업 성장 과정을 분석하겠다. 분석 시기는 CJ가 미디어 사업 내용을 공개하기 시작한 1998년부터 2016년까지다. 분석 자료는 CJ그룹의 지주회사인 CJ의 사업보고서와 감사보고서를 토대로 주요 미디어 기업(CJ 오쇼핑·CJ 인터넷·CJ CGV)의 소유구조와 이사회 구성, 그리고 타법인 투자현황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CJ 미디어 제국의 역사와 지배구조

CJ1993년 삼성그룹으로 분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완전 분리를 이룬 시기는 1997년이다. 그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조카인 이재현은 한 개의 상장사(CJ)와 씨제이골든빌리지(CGV) 10개의 비상장 기업을 갖고 CJ그룹을 만들었다. 그 뒤 지속적으로 기업 인수 합병을 통해 2016년 현재 CJ CGV 6개의 유가상장사와 CJ E&M 2개 코스닥 상장사 그리고 49개 비상장회사와 199개 비상장 해외법인을 갖고 있는 복합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71217일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장모 고 김만조 박사 빈소로 수행원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1’에서 보듯 CJ2011년까지 지속적으로 기업 인수합병을 단행했다. 눈에 띄는 기업 사냥은 2000년 삼구쇼핑, 2004년 플레너스 그리고 2009년 온미디어 인수이다. 2000년 삼구쇼핑을 합병할 당시 CJ는 삼구그룹으로부터 4개의 케이블 채널(제일방송· 양천케이블TV·아이삼구, 룩티브)도 함께 인수했다. 4개의 회사는 CJ가 케이블 사업을 확장하는데 발판이 된다. 특히 양천케이블TVCJ가 케이블 SO 사업자로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CJ는 케이블 방송국을 인수하면서 시골보다는 대도시지역을, 단독주택보다는 아파트 단지가 많은 중소형 케이블 방송국을 집중적으로 인수하거나 합병했다. 이때 중추적인 역할을 한 기업이 CJ 오쇼핑이다. 삼구쇼핑에서 개명한 이 회사는 CJ그룹이 다른 케이블 방송국이나 채널들을 사들일 때 거래 창구역할을 했다.

 

1) CJ 성장의 주요 내역

 

2004년 플레너스 인수를 통해 CJ는 영화 배급시장 점유율 2위에서 2005년부터 1위로 껑출 뛰어 올랐다. 또한 플레너스가 소유하고 있던 온라인 게임회사도 함께 인수했다. CJ 게임즈나 또는 넷마블로 알려진 회사들은 모두 CJ가 설립해서 키운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산 기업들이다. 특히 2009년 연말 CJ가 케이블 사업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오리온 그룹의 온미디어를 인수함으로써 유료방송 최강 기업이 됐다.

 

다시 말하면 CJ 미디어 제국은 자체 미디어 기업을 설립해서 수립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한 기업 사냥을 통해 만들어진 제국이다. 그 결과 CJ의 미디어 기업들은 이재현을 정점으로 하는 비대칭적 피라미드 지배구조 아래 있다.



2015CJ 미디어제국 소유 구조. 디자인=안혜나 기자

 

CJ 성장의 3대 인수합병

CJ 미디어 제국은 CJ 오쇼핑 (구 삼구쇼핑), 플레네스, 온미디어 인수 합병을 통해 완성됐다. 흥미롭게도 이들 3개의 기업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외국인들이 회사 설립 초기부터 5%이상의 대주주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 유사점은 외국 자본을 유치한 다음 모두 코스닥에 상장됐다는 점이다. 마지막 공통점은 이들 모두가 CJ에 합병됐다는 점이다. 이는 CJ의 성장은 자구적 노력이 아닌 자금력을 기반으로 한 기업 사냥으로 기업 외면을 확장시켰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이들 3개 기업의 역사와 소유구조 그리고 사업 내역을 살펴보자.

 

CJ 오쇼핑은 삼구그룹이 지난 1994년 설립했다. 삼구는 1996년 케이블 채널인 제일방송을 인수한 다음, 1997년 천만 달러 외자를 유치했다. 2년 뒤인 1999년 코스닥에 상장됐다. 같은 해 삼구그룹은 케이블 민영화 대상인 한국통신케이블텔레비젼을 인수한 뒤 이름을 양천넷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1년 뒤 2000년 삼구그룹은 CJ그룹에 삼구쇼핑을 매각했다. 그 뒤 CJ는 삼구쇼핑을 CJ 39쇼핑에서 CJ 오쇼핑으로 개명했다. ‘2’에서 보듯, CJ 오쇼핑은 모기업의 지주회사인 2000년부터 최대주주인데 이는 이 기업이 CJ그룹 내에서 핵심기업이란 의미이다.

 

2) CJ 오쇼핑 소유지분 변동 내역

 

3’에서 보듯CJ 오쇼핑은 지속적으로 다른 미디어 기업들을 인수하거나 지분을 투자하고 있다. 2005년 즈음에는 케이블 방송국 인수 합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0년 즈음부터는 영상 컨텐츠 제작 자금에 지분을 늘리고 있다. 2015년에는 케이블 유선방송국과 인터넷 브로드밴드 사업을 주로하고 있는 CJ 헬로비전의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3) 타 법인 출자 변동 현황

 

이사회 임원구성에서 2005년이 분기점이 된다. 2005년 이전까지 삼성 그룹의 주요 임원들이 CJ 오쇼핑 등기이사로 기재돼 있다는 점이다. 이는 CJ가 삼성맨 출신을 주요 이사로 기용했다는 의미이다. 특히 2000년 등기 이사에 시티그룹 소속인 시키코프가 이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CJ 오쇼핑이 삼구그룹에 소속돼 있을 때도 등기 이사로 기재돼 있었다. 2006년 이후 CJ는 등기이사에 삼성맨 출신을 기용하기보다 다른 대기업 출신의 임명하고 있다. 이사회 임원수는 그룹내 이사 3~4명과 사외이사 3~4명을 임명하고 있다. 사외이사 출신은 미디어학과 대학교수들, 전직 공정거래위원회와 검찰청 그리고 기획예산처 고위직 출신들을 기용하고 있다. 이는 CJ가 사외이사 제도를 활용해 한국 파워엘리트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CJ가 삼구쇼핑 인수를 통해 케이블 망 사업자 시장에서 입지를 다졌다면 플레너스온미디어의 인수합병을 통해 미디어 컨텐츠 시장에서 최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우선 플레너스의 역사와 지배구조를 살펴보자. 플레너스는 기업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 미디어 시장의 투기성을 한눈에 알 수 있다.

 

4) CJ 게임즈(구 플레너스) 회사 내역

 

4’에서 보듯 플레너스는 여러번 개명을 한다. 1982년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었던 동보강업은 1999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다. 그 뒤 벤처사업가인 김형순은 이 회사를 인수한 다음 로커스 홀딩스로 개명한다. 그 뒤 그는 김형순은 영상물 제작사인 싸이더스, 영화 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 온라인 게임 포털업체인 넷마블, 그리고 영상물을 DVD 등으로 판매하는 아트서비스, 음반 유통업인 예전미디어를 인수 합병했다. 이들 회사들은 모두 플레너스 엔터테인먼트 계열사로 편입됐다. 그 뒤 외국인 투자를 받은 다음 영화 상영관사업을 위해 프리머스시네마를 설립한다. 로커스는 1년 뒤 인터넷 게임포털 업체인 넷마블을 인수 합병 온라인 게임시장에 진출했다. 이후 최대주주로 강우석 영화감독이 부상한 다음, 한국 온라인 게임의 대표주자중 하나인 방우혁이 최대주주로 이름을 올린다. 그뒤 인터넷 쇼핑몰 사업과 온라인 광고사업을 첨가한다.

 

이렇게 대주주가 김형순강우석방준혁으로 바뀌는 과정에 외국 사모펀드(2000WP Seoul IV)가 이 회사에 투자한다. 즉 벤처사업가와 영화와 게임 사업가들이 회사를 키우는 과정에 외국 자본이 결합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 회사는 지속적으로 미디어 콘텐츠를 생산하지 않고, 다른 기업에 판매를 함으로써 미디어 돈놀이의 대상이 된다. 실제로 영화제작, 배급(시네마서비스), 상영사업(프리머스)과 온라인 게임 사업을 2004CJ에 넘겼다. CJ는 플레너스를 인수할 당시 소유지분을 외국계 T. Rowe Price International(8.75%)와 공유했다. 이 같은 외국인 투자 지분은 2010CJ E&M에 합병될 때까지 지속된다.

 

5’에서 보듯 CJ가 영화, 연예 매니지먼트 그리고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플레너스 인수 이후다. 2007년부터 이 회사는 온라인 게임회상에 대한 지분을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다. 심지어 2016년에는 한국 온라인 기업의 대표주자인 엔씨소프트까지 지분을 확대하고 있다.



5) CJ 게임즈(구 플레너스) 타 법인 투자 현황

 

한때 CJ그룹의 경쟁자가 소유했던 온미디어도 외국자본이 설립 초기부터 투자돼 있었다. 이 기업은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 등 4개 케이블 채널과 5개 케이블 방송국을 소유하고 영화배급 사업을 전개했던 미디어 복합기업이었다. 2006년 거래소에 상장될 당시, 대주주는 오리온 (38.13%)과 외국계 사모펀드인 Tabimax SGP(16.71%)CiGEPEF(12.78%)였다. 2009CJ에 매각될 당시에는 외국인 지분이 다수 있었다. 특히 이 회사는 알레스델어네이들이라는 홍콩계 은행인 HSBC 자산운용 이사가 이사회에서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CJ 중핵 미디어 기업: CJ E&MCJ CGV

CJ E&M도 계열사간의 인수합병을 통해 탄생한 기업이다. CJ20115개 영상 계열사(온미디어, CJ 엔터테인먼트, CJ 인터넷, CJ 미디어, 엠넷 미디어)를 합병했다. 합병 당시 계열사들은 손주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온미디어는 오리온시네마케트워크, 온게임네트워크, 바둑TV, 디지털 온미디어, 이플레이온 등을 계열사로 갖고 있었다. 영화배급을 전문으로 하는 CJ 엔터테인먼트사는 아트서비스, 클립서비스, 엠바로 등의 계열사를 보유했다. 온라인 게임 사업을 책임지고 있던 CJ 인터넷은 미디어 웹, 애니파크, CJ 스포츠와 시드나인스포츠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케이블 음악 전문 채널인 엠넷미디어는 공연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좋은콘서트와 케이블 채널 KMTV을 보유하고 있었다.

 

CJ 사옥. 연합뉴스

 

한국 최대 컨텐츠 기업인 CJ E&M의 소유지분은 6’에서 보듯 그룹 지주회사인 CJ가 최대주주이다. 특이하게도 이재현의 가족들이 모두 이 회사 지분을 갖고 있다. 2012년를 예로 들면, CJ 오너인 이재현(2.43%), 그의 아들인 이경후(0.28%)와 이선호(0.7%), 이재현의 누나인 이미경(0.15%), 그의 외삼촌인 손경식(0.02%) 등이다. 회사 임원 구성도 다른 계열사와 비슷한 유형을 보인다. 2013년까지 이재현이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나머지는 CJ맨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들이 경영을 맡고 있다. 사외이사는 미디어학과 교수, 전 국세청, 검찰청 그리고 금융감독원의 임원출신 들이다.

 

6) CJ E&M 지분변동

 

7’에서 보듯 CJ E&M은 인수 합병 초창기에는 합병한 회사들을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2014년이 지나면서 온라인 광고나 시나리오 전문 회사들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7) CJ E&M 타법인 현황

 

CJ CGV는 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상장회사다. 이 회사는 지난 1996년 한국의 제일제당, 홍통의 골든 하베스트 그리고 호주의 빌리지 로드쇼가 합작해서 만든 ‘CJ 골든 빌리지를 전신으로 한다. 1998년 한국 최초 멀티플렉스관을 서울 테크노마트 강변역에 개관한다. 1년 뒤 이 회사는 영화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50.0)사와 호주의 멀티플렉스 업체인 빌리지로드쇼 인터내셔날(village roadshow international(50.0)이 합작해서 만든 제일빌리지에 합병된다. 그 뒤 이름을 ‘CJ빌리지에서 ‘CJ CGV’로 개명한뒤 2004년 한국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외국계 합작회사인 CJ CGV는 영화 상영사업에만 집중한다. ‘8’에서 보듯 최대주주는 CJ 계열사이거나 지주회사이다. 2010년까지 외국계 사모펀드가 꾸준히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다른 상장 계열사와 마찬가지로 2005년까지는 삼성그룹 출신이 등기 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한 2013년까지 모기업 최대주주인 이재현이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사외이사는 다른 계열사와 마찬가지로, 미디어학과 교수, 전 국세청과 검찰의 고위직 공무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8) CJ CGV 소유지분 변화

 

CJ와 삼성 그리고 중앙일보

CJ 지주회사를 통해 CJ 미디어 기업을 통제하고 있는 이재현은 삼성그룹의 중핵기업 소유지분을 2012년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9’에서 보듯 CJ는 삼성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생명 지분을 1998년부터 2012년까지 갖고 있었다. 이재현 씨제이 회장의 삼성 에버랜드 지분은 2003년부터 삼성 에버랜드 감사보고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CJ의 타법인 출자 현황에는 2012년까지 지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동시에 CJ는 중앙일보 지분을 2010년까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9) CJ 그룹내 범 삼성계 간의 지분 공유 내역

 

사실 중앙일보와 CJ는 유료방송 시장에서 소유지분을 공유하고 있었다. ‘10’에서 보듯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에서 CJ와 중앙일보가 만나고 있다. 이 회사는 동양그룹 (나중에 오리온 그룹 개명)1999년 설립한 케이블 프로그램 공급회사다. 설립 당시 최대 주주는 동양그룹 미디어 지주회사인 온미디어(50.48%)와 중앙일보사(16.52%) 그리고 TWE Korea Hodlings(33.0%)이다. 1999년 설립 당시 중앙일보의 최대주주는 홍석현이었다. CJ2009년 온미디어를 인수할 당시에도 중앙일보는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 지분을 그대로 유지했다. 2013CJ E&M이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를 인수할 당시까지 중앙일보와 소유지분을 공유했다.

 

10) 오리온 시네마네트워크 소유지분 변동

 

이외에도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개인 자격으로 2001년 케이블 음악 채널인 엠넷 미디어(7.24%)를 짧게 보유했다.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와 엠넷 미디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범 삼성가문은 미디어 기업의 소유 지분을 공유하고 있다.

 

삼성미디어 제국 징검다리는 중앙일보 4.1

[삼성 연재기고 (12)] CJ그룹과 지분 공유 삼성 출신, 중앙일보 의사결정 과정 참여 외국자본과 적극 협조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8·15 해방직후 신문사를 경영 한 적이 있다. 당시 대구지역 사업가들의 친목단체 을유회소속이었던 이병철은 경영난에 봉착한 조선민보를 인수했다 (삼성비서실, 1988215). 하지만 그는 이 신문사를 오랫동안 경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업적인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이병철은 사업 본거지를 대구에서 서울로 옮겼다. 효성 창업자인 조홍제와 엘지 창업자인 구인회와 공동으로 삼성물산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뛰어들면서 언론사와의 인연은 멀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1963년 이병철은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을 포함하는 언론사업 진출 의사를 밝혔다. 그는 언론사업 청사진을 이승만 정권 때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와 함께 그렸다. 그 결과 19645라디오 서울을 개국했고 같은 해 12월 동양방송국(TBC)을 개국했다. 삼성은 1년 뒤인 1965년에 중앙일보를 창간했다. 사실 이병철은 1961년 중앙일보 창간을 위해 삼성 비서실에 신문창간 기획안 마련을 지시했다. 그는 특히 중앙일보 창간에 앞서 일본 3대 신문사인 아사히·마이니치·요미우리 신문사를 직접 방문하고 경영과 편집시설 등 신문제작 전반을 시찰한 후 중앙일보를 창간했다(삼성비서실, 1988225~226). 중앙일보 창간 당시 이병철은 대표이사직을 홍진기는 부사장직, 이병철의 둘째아들인 이창희는 이사직을 갖고 경영에 참여했다. 중앙일보는 이렇게 이병철-홍진기통제 아래 종합 일간지로서 성장해갔다.

 

1965922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립자가 중앙일보 창간호를 보고 있다. 사진=이병철 자서전 호암자전

 

중앙일보는 사실 이병철 삼성 그룹의 중핵기업이다. 오너 일가가 직접 소유지분을 갖고 있고 경영에도 직접 참여한다. 이병철 셋째아들이자 홍진기 사위인 이건희는 1970년 초반부터 중앙일보 경영에도 참여했다. 이건희 부인인 홍라희는 1980년 초반까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에서 미술 등 문화관련 기사를 작성했다. 특히 홍라희 큰 동생인 홍석현이 1994년부터 중앙일보 경영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홍석현이 명실공히 중앙일보 최대 실력자가 된 것은 그 후 5년이 지난 1999, 삼성그룹에서 분리하면서 부터다. 삼성그룹을 이어받은 이건희가 그의 형제와 삼성 중핵기업들이 갖고 있는 중앙일보 지분을 홍석현 등 홍씨 일가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이는 중앙일보 통제라인이 이병철-홍진기에서 이건희-홍석현으로 전환됐다는 걸 의미한다. 즉 중앙일보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가문과 정치 엘리트인 홍진기 가문이 창간 단계에서부터 공동 기획·운영한 가족 미디어 기업이다. 그 전통은 2018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9, 불안한 중앙일보 독립

중앙일보는 1965년 창간 이후 2000년대 복합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1’에서 보듯 중앙일보가 관여하는 미디어 사업은 종합일간지 등을 포함하는 인쇄매체, 종합편성 케이블방송 등의 방송, 영화 투자와 제작 등의 영상 매체 그리고 광고 제작과 유통 등이다.

 

1) 중앙일보 연혁

 

중앙일보는 이병철과 홍진기의 통제 아래에 있던 1987년까지는 신문과 방송 사업에 집중했다. 하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신문과 방송 겸업을 금지하면서 방송 사업은 접어야했다. 그 뒤 이병철과 홍진기는 신문 등 인쇄사업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이건희가 삼성그룹을 인수 한 다음 중앙일보는 1996년 일본 다국적 광고회사인 덴츠와 50:50 지분으로 종합 광고대행사인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해 한국 10대 광고대행사로 성장시켰다. 그 뒤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부상한 1999년 이후 중앙일보는 인쇄매체뿐만 아니라 드라마 제작 등 영상 제작과 유통 그리고 영화관 사업까지 확장했다. 2005년 중앙일보 계열사는 79개에 달했다. 그 뒤 중앙일보가 광고회사와 반도체 장치 그리고 리조트와 편의점 사업 등을 묶어 보광그룹으로 분할하면서 중앙일보 계열사 숫자는 40개 내외로 줄었다.

 

중앙일보는 19994월 삼성그룹으로부터 몇개의 반도체와 LCD 제작 기업, 2금융기업, 편의점, 레저 스포츠, 광고와 케이블 등 미디어 사업 등을 넘겨받았다. 사업을 넘겨받음과 동시에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2’에서 보듯 홍석현은 1998년 중앙일보 최대주주였지만 중앙일보를 혼자서 경영할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갖고 있는 지분을 제외할 경우 삼성 총수인 이건희와 그의 통제 아래에 있는 범 삼성가의 지분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홍석현은 중앙일보를 CJ그룹 계열사와 2010년까지 공동 소유하고 있다. 유민재단은 그의 부친인 홍진기를 기념하는 재단이다. 특이하게도 2016년 지분에서 보듯 중앙미디어네트워크가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홍석현 지분보다 더 많다. 이 회사는 2011년 중앙일보 유상증자를 통해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한 중앙일보 미디어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다.



2) 중앙일보 대주주 변동

 

하지만 1999년은 중앙일보에게 있어 가혹했다. 홍석현 중앙일보 최대주주가 탈세 혐의로 구속됐기 때문이다. 중앙일보가 삼성에서 분리될 당시 증여세와 법인세 등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백병규, 199977). 세금 탈루 혐의에 연관 된 기업들은 지난 1983년 홍진기가 설립한 텔레비전브라운관 부품업체와 반도체 장비기업들, 종합 레저시설, 1990년 일본 세이유 그룹과 제휴해 설립한 훼밀리 마트등이었다. 최대주주의 구속은 중앙일보에게 있어 최대 위기였다. 오너가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는 재벌의 경영방식에 비춰보면 오너의 부재는 통제라인 부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홍석현은 구속에서 풀려난 뒤 중앙일보를 제외한 광고와 반도체 제조, 리조트, 편의점, 금융사업을 묶어 그의 형제들에게 사업을 분리해 줬다. 그 기업의 이름이 보광그룹이다. 중앙일보 그룹이 2005년을 두 개의 재벌기업으로 분할했다.

 

기업사냥, 중앙미디어 제국 발판

홍석현은 구속에서 풀려난 이후 중앙일보를 복합 미디어 제국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 지분을 투자했다. ‘3’에서 보듯, 중앙일보는 무료 신문사업, 방송 제작업, 영상 투자사업, 경제 신문, 연극과 뮤지컬 등 공연 투자사업, 종합편성채널 획득, 온라인 신문 등에 지속적으로 투자했다. 이들 투자기업들은 중앙일보가 영상 사업 분야로 진출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한다.

 

3) 중앙일보 주요 타법인 출자 시기

 

중앙일보도 CJ 그룹처럼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미디어 제국을 완성해 갔다. 이는 금융자유화 이후 재벌들이 미디어 사업 확장을 위해 사용한 우회상장기법과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우회상장이란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장된 중소기업을 인수한 다음 사업 내용에 미디어 사업을 추가하고 이름을 바꿔 재상장하는 수법을 말한다. 신주인수권부사채(BW:bond with warrant)는 새로운 주식 발행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된 신 금융기법이다. 하지만 재벌 오너들이 세금을 적게 내고 그룹을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다. 이건희 회장은 이재용 등 그의 자녀들에게 그룹을 상속하기 위해 삼성에버랜드와 삼성 SDS 그리고 제일기획 등 중핵기업을 상속 통로로 활용했다.

중앙일보는 계열사인 제이콘텐트리에서 우회상장과 BW 기법을 활용했다. 사실 중앙일보가 이 기업을 인수할 당시 이름은 일간스포츠였다. 이 신문은 사실 종합일간지 시장에서 중앙일보 경쟁사였던 한국일보가 소유한 스포츠와 연예소식을 주로 보도하는 대중지였다. 하지만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경영이 악화된 한국일보는 피혁제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상장사인 한길무역 지분을 획득한 다음 회사이름을 일간스포츠로 변경했다. 그뒤 사정은 4’에서 보듯, 이 회사 이름은 일간스포츠-아이에스플러스코프-제이콘텐트리로 개명했다.

 

4) 제이콘텐트리 연혁

 

5’에서 보듯, 이름이 변할 때마다 최대주주가 바뀌었다. 이 회사는 2001년에는 한국일보 소유였다. 2003년에는 한국일보사, 중앙일보사 그리고 매일경제신문가 공동소유했다. 그 당시 이름은 일간스포츠였다. 중앙일보사는 2007년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1년 뒤인 2008년 회사이름이 아이에스플러스코프 개명했다. 그뒤 중앙일보가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로 지정하면서 다시 이름을 제이콘텐트리로 바꿨다.

 

5) 제이콘텐트리 대주주 변동 현황

 

6’에서 보듯, 중앙일보는 최대주주로 확정된 2005년 이후 영상과 영화 그리고 공연관련 사업으로 투자를 늘리고 있다. 대주주 변동이 있었던 2000년 초반 이 기업은 미디어 기업을 확대하지 않았다. 피혁회사가 소유할 당시에는 미디어 투자 기업이 아예 없다.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그리고 매일경제신문이 공동으로 이 기업을 소유할 당시에는 아예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상장된 중소기업이 미디어 투기 자본의 돈놀이터임을 암시한다.

 

6) 제이콘텐트리 타 미디어법인 출자

 

중앙일보는 제이콘텐트리를 영화 상영관 사업 확장 통로로 활용했다. 이 회사는 2007년 중소형 독립 영화 상영관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씨너스를 인수한 다음 영화 상영관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2010년 씨너스는 한국 3대 영화 상영관인 매가박스 지분을 인수하기 시작해 2012년 완결했다.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 사진=중앙일보 제공

 

또한 홍석현의 중앙일보는 한국에 진출한 외국기업들과 협력해 미디어 사업을 확장했다. 휘닉스커뮤니케이션과 터너브로드캐스팅 그리고 팍스스포츠 채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전자는 직접적으로 외국 기업들과 지분을 공동투자하고 이사회 의사를 공유하지만 후자는 느슨한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중앙일보의 선택적 사항이기 보단 외국 자본의 속성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미디어 시장에 진출해 있는 외국인들은 광고시장을 제외하곤 한국 시장에 자본을 투자하기보다 국내 파트너와 사업적 협력만을 유지하고 있다.

 

 

7’에서 보듯,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은 한국 광고시장이 완전 개방된 1996년 설립된 이후 2003년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그 뒤 지속적으로 다국적 기업들과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휘닉스가 협력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은 광고를 대행보단 광고 제작에 더 치중해 있다. 오프라인 매체보다는 온라인과 모바일 광고에 집중하고 있다.



7)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연혁

 

8’에서 보듯, 다국적 기업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은 2014년 소유지분을 다른 기업에게 매각했다. 회사를 설립할 당시부터 유지하고 있던 동일 지분 비율이 2013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홍석규가 2014년까지 지분을 보유했다. 그 이후 그의 지분은 보이지 않는다.

 

8) 대주주 변동 현황

 

중앙일보는 삼성과 무관한가?

지금까지 중앙일보의 미디어 사업 확장 현황과 주요기업의 소유구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중앙일보는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홍석현이 소유지분과 경영권한 행사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2012년 이후 중앙일보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가 등장하면서 홍의 권한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 지주회사에 대한 정보가 베일에 쌓여있기 때문이다. 2016년 중앙일보 그룹의 소유권을 분석해 보면 신문과 잡지 등 인쇄 매체를 총괄하는 중앙일보(32.86%), 영화 제작과 영화관사업을 통제하는 제이콘텐트리(21.39%), 방송사업을 총괄하는 JTBC(21.39%), 온라인 미디어 선두기업인 조인스(100.0%), 미디어 서비스를 책임지는 중앙판교개발(72.82%)가 최대주주이다. 즉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에 대한 지분 정보는 공개돼 있지 않다.

 

2016년 중앙일보 통제 라인. 그래픽=안혜나 기자

 

사실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는 2008년 중앙일보가 영어신문과 정기간행물을 발행하기 위해 중앙일보가 설립한 자회사다. 그런데 2010년 중앙일보사가 자산 약 6547억 원과 부채 5583억 원을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에 넘긴다. 그리고 2011년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이때 중앙일보와 CJ의 지분이 일부 줄어들었는데 그 뒤 2012년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가 최대주주로 등극한다. 1995년 삼성에버랜드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2011년 중앙일보에서도 일어났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중앙일보는 홍씨 가문의 것인가라는 점이다. 서류상으로는 홍석현과 CJ그룹이 공동소유하고 있다. CJ그룹은 이재현이 통제한다. 그러므로 중앙일보는 홍석현과 이재현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최대주주는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다. 홍석현과 이재현의 공조관계는 케이블 방송 회사인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에이스토리에서도 발견된다. 홍석현은 오리온시네마네크워크 지분을 2012년 매각했다. 이로인해 CJ와 사업적 협력관계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013년 에이스토리 감사보고서를 살펴보면 양쪽 집안의 협력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2013년 지분 비율을 보면 중앙일보(8.32%)와 제이콘텐트리(8.32%) 그리고 CJ E&M(16.64%)이다. 2015년에는 2013년 지분에 보광 18호 콘텐츠조합(3.4%)과 보광 20호 청년창업투자조합(3.4%) 등이 더해진다. 즉 중앙일보와 CJ는 여전히 미디어 사업 협력자이다.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이 중앙일보 윤전기를 시찰하고 있다. 이병철 선대 회장(사진 오른쪽),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사진 왼쪽), 이건희 회장(이병철 회장 뒤), 이재용 사장(사진 가운데). 사진=삼성그룹

 

마지막으로 중앙일보가 삼성그룹과 무관하다고 확언하기 어려운 점이 중앙일보 중핵기업 이사진 명단에서 발견된다. CJ2000년대 삼성 비서실이나 구조본부 출신들이 CJ 미디어 계열사 경영 총괄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중은 2010년이 넘어가면서 줄어들었다. 이와 달리 중앙일보는 그 비중이 줄어들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건희 삼성 회장의 고등학교 동창생이자 삼성그룹 비서실 출신이 홍석현 회장 측근에 배치돼 있다. 또한 재정을 감사하는 이사도 중앙일보 전반에 관여하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에서 분리할 당시 중앙일보에 배속됐다가 보광그룹으로 분할해 나간 휘닉스커뮤니케이션 등기 이사들이 삼성의 중핵기업 이사들이다. 이처럼 삼성맨들이 2010년 이후까지 중앙일보 주요기업 이사로 등재돼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 때 중앙일보는 온전히 홍씨 가문의 것으로 확인할 수 없다.

즉 중앙일보는 1965년 이병철-홍진기가 협력해서 창간하고 기반을 구축했다면 2018년 이 회사는 이건희-홍석홍석현이 복합 미디어 기업으로 공동 소유 운영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Hasta Siempre Comandante Che Guevara - Soledad Bravo

 

 


'세상과 어울리기 >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책 -도시의 마지막 나무  (0) 2018.05.26
자본주의  (0) 2018.05.18
손님  (0) 2018.05.12
슬픈 쌍둥이의 눈물 김현희  (0) 2018.05.09
한국인의 발견  (0) 2018.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