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쌍둥이의 눈물 김현희-KAL 858기 사건과 국제관계학 박강성주 지음/한울아카데미·3만4000원
저자 박강성주는 현재 네덜란드 레이덴대학교 교수. 통일부가 주최한 대학생 통일논문 공모전에 입상했으나 논문 수정 요구를 거부해 취소되었다. 그 뒤로 고통과 기억, 진실의 정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김현희 사건에 대한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주요 저서 : FICTIONAL INTERNATIONAL RELATIONS: GENDER, PAIN AND TRUTH(2014)
《KAL 858, 진실에 대한 예의: 김현희 사건과 ‘분단권력’》(2007)
주요 논문 : “PAIN AS MASQUERADES/MASQUERADES AS PAIN”(2015)
“UTMOST LISTENING: FEMINIST IR AS A FOREIGN LANGUAGE”(2011) 외 다수
목차
한국어판을 내며9
한국어판 추천의 글 _신시아 인로20
영어판 추천의 글 _스티븐 찬24
01_ 이상하게 미안한 이야기
02_ 너무나 뜨거운 냉전과 대한항공 858기 사건
03_ 정보와 상상력: 소설 쓰기 국제관계학
04_ 언니 미안해
05_ 교차적 정치학: 여성주의 국제관계학
06_ 젠더의 정치학
07_ 고통의 정치학
08_ 진실의 정치학
09_ 공감하는 탐정, 공감하는 연구
10_ 10년
출판사 서평
■ KAL 858기 사건과 특별한 인연
“내가 사건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통일부가 주최한 대학생 통일논문 공모전에 참여했다. 논문에 이 사건에 관한 부분이 있었는데 사건을 둘러싼 의문들이 있기 때문에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고맙게도 우수상을 받게 되었는데 시상식을 며칠 앞두고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수정 요구를 받았다. 나는 이 요구를 거부했고, 상은 취소되었다.” (45쪽)
저자는 책에서도 밝혔듯이 대한항공 858기 사건과 개인적인 관련이 있다. 입상 취소에 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신경쇠약을 겪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 잊으려고 했으나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858기 사건 재조사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실종자 가족과 함께 재조사 운동을 함께했다. 그 기간 참여관찰과 자료 수집 노력을 멈추지 않았으며 연구 성과를 석사 및 박사 논문으로 발표해왔다. 이 책은 이러한 학문적·실천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 KAL 858기 사건을 다루는 시선 속 젠더, 고통, 진실 문제
“대한항공 858기는 서울올림픽을 앞둔 해에 사라졌습니다. 비행기는 올림픽 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북한이 파괴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잔해가 발견되지 않은 채 비행기는 다시 올라오지 않았고, 탑승객들과 승무원들도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북한의 여성 공작원이 서울로 압송되었고 대한항공기를 폭파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굉장히 아름다웠고 이에 대한 언론 보도와 여론은 선정성과 스캔들의 양상을 띠었습니다. 비극은 일일 연속극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영국 런던대학교 동양학·아프리카학대학 스티븐 찬) _영어판 추천의 글 중에서
858기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영어권 독자들에게 사건의 전개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는 이 글은 어떻게 비극이 가십이 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저자는 젠더, 고통, 진실 세 가지 키워드로 사건을 분석하는데 첫째는 기본적으로 사건이 젠더화되었음을 지적하고 사건 자체와 그 이후 과정에서 김현희와 미모, 처녀 테러리스트, 결혼, 모성 등이 어떻게 결합되어 사용되는지 살핀다(6장). 고통에 대해서는 이 사건에 존재하는 복합적인 측면과 이 고통의 젠더화된 특징을 살펴본다. 특히 실종자와 실종자 가족 그리고 김현희의 고통을 짚어본다(7장). 마지막으로 진실을 중심으로 사건을 분석한 내용은 사건의 공식 수사 결과가 절대적 진실로 자리 잡는 과정과 풀리지 않는 의문을 다루면서 진실의 경합성을 살펴본다(8장).
■ 소설쓰기와 공감적 국제관계학 탐정되기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현실적 문제, 검증이 불가능한 일방적 자백, 사실 확인을 막는 ‘국가보안법’, 구체적 물증이 발견되지 않은 사고 현장 등의 한계요소를 뛰어넘기 위해 저자는 ‘소설쓰기’ 방법론을 제안한다. 이는 정보의 한계 너머를 상상력으로 채우려는 시도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쓴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하나는 김현희와 실종자의 가족이 등장해 사건 전후의 이야기 풀어가고 있으며, 두 번째 소설에서는 저자 자신이라고 생각되는 연구자와 실종자의 영혼이 등장한다. 이 소설들은 사건을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상상하고 숙고할 여지를 남겨준다.
이 책은 루트리지에서 출판한 Fictional International Relations: Gender, Pain and Truth(2014)를 저자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원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젠더, 고통, 진실을 통해 소설쓰기 방법론으로 국제관계학 연구를 제안하는 내용이다. 이 책은 김현희 사건을 국제관계학의 새로운 관점에서 정면으로 다루는 동시에 사건을 둘러싼 슬픈 정치학에 관한 이야기이며, 소재를 10년 동안 연구해왔던 지은이의 조심스러운 기록이기도 하다. 실종자 가족을 포함해 관련 인물 63명을 인터뷰하고 사건 정보를 보유한 5개국(한국, 영국, 미국, 호주, 스웨덴) 정부와 기관에 정보공개를 요청한 결과를 정리해 집필했다.
저자가 밝히는 이 책의 목표는 첫째, 국제관계학에서 정보의 부족과 불확실함을 다루는 방법으로서 소설 쓰기가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살펴보며, 둘째, 대한항공 858기 사건에서 젠더, 고통, 진실이 어떻게 작동하고 얽혀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교차성의 측면에서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셋째, 대한항공 858기 사건을 공개적이고 철저하게 연구하는 것이 왜 어려웠는지 따져보는 것이다.
김현희 사건은 한국현대사의 가장 아픈 대목 중 하나이며, 지금까지도 재조사와 관련해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재조사 문제와는 별개로, 당시 대통령선거에 사건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부분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저자는 사건의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니며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와 그 구성 과정에 물음을 던진다. 대신 공감하는 탐정이 되어 증거와 증언을 통해 진실을 밝혀내는 동시에 공감하고, 힘겨워하고, 최선을 다하며, 평범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어판 추천의 글
박강성주의 도발적인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하기(스토리텔링)의 정치학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1987년 대한항공 858기의 실종 이야기는 후기 냉전의 폭력과 반역죄에 관한 비극적이지만,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얘기인 듯합니다. 하지만 박강성주의 손에서, 대한항공기와 115명의 탑승객들 및 승무원들의 운명은, 우리 각자가 국제정치를 어떻게 이해하려 하는가와 그 정치에서 유동적인 우리들의 위치에 대한 깊은, 게다가 불편한 물음들을 던지는 출발점이 됩니다.
우리는 국제정치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을 자신과 서로에게 하고 있습니까? 다른 이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예를 들면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랍의 봄, 소치 겨울 올림픽) 우리가 기억할 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 해주고 있는 이야기는 어떤 것입니까? 이야기들. 어떤 이야기들은 놀랍도록 분명한 반면, 어떤 이야기들은 윤색으로 가득합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곧게 뻗은 고속도로를 여행하는 듯하고, 어떤 이야기들은 복잡한 홀림길과 에움길을 돈 뒤에야 마지막 결론에 도달합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충격적으로 끝맺어지고, 어떤 이야기들은 좌절감을 줄 정도로 애매하게 끝납니다. 박강성주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야기들이 꼭 허구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방식들은 원인부터 결과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보증할 수 있는 증거의 기록인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이야기들에서 얻게 되는 교훈이 언제나 분명한 것도 아닙니다.
이야기에는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들은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사건들을 추적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 인간은 연속성의 존재인 듯합니다. 만약 잘 얘기되면, 어떤 이야기는 우리 마음속에 계속 남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는…….” 그러므로 사실들은 (또는 사실이라고 알려진 것들은) 만약 매력적인 이야기에 실려 전해진다면 우리 대부분에게 기억되기 쉬운데, 왜냐하면 그 사실들이 맥락적인 중요성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좋은 이야기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는 친구들이나 친척들 가운데 특히 재주 있는 이야기꾼을 한 명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정부, 정치권 그리고 언론은 언제나 좋은 이야기꾼들을 모집하고 훈련시키려 합니다.
이야기가 예를 들어, 인구 조사 보고서나 통계 도표보다 더 힘이 있기 때문에 특정 이야기를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된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는 것은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많은 사회들에서 인종주의가 그처럼 공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서입니다. 군사주의가 겉보기에 평화로운 사회에 살아서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차별주의의 가부장적 제도가 수십 년의 반차별 입법 속에 건재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종주의를 없애고, 군사주의를 사라지게 하고, 가부장제를 철폐하는 일은 잘못된 이야기에 밝은 빛을 비추고 새로운, 더 진실한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에게 할 것을 요구합니다.
박강성주는 한반도 냉전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추적하며 탐정이 됨으로써, 우리 각자에게, 그의 독자들에게, 우리 대부분이 ‘끝난’ 것으로 상상했던 사건을 열기 위해 서사적 역량을 확장시키자고 제안합니다. 이 말은 이 책을 읽는 것에는 에너지가 요구된다는 뜻입니다. 이 책은 수동적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가능한 것을 다시 생각해야 했을 뿐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젠더화된 특성들 전체에 대해 다시 상상해야만 했습니다.
이야기들은 흔히 남성성과 여성성이 갖는 다양한 형태에 대한 생각들에 의존하곤 합니다. 남성성 또는 여성성의 각 형태는 이야기의 얼개를 앞으로 전개시킬 수 있고, 그 결과를 명확하게 하거나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이야기꾼에 의해 어떻게 다루어지느냐는 이야기의 의미를 뚜렷하게 하거나 흐릿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야기는 젠더화되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를 치열한 선거전이나 섹스 추문에서 확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말하고 반복하는 국제정치에 대한 이야기 역시 젠더화되었음을, 다시 말해, 그 이야기들도 무엇이 적절한 그리고 부적절한 남성다움을 구성하는가, 무엇이 훌륭한 그리고 수상쩍은 여성다움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또는 애매한) 생각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어려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성화된 배신자들, 슬퍼하는 어머니들 그리고 남성적인 보호자로서의 정보기관원들에 대해 특정한 생각들을 하도록 유도됩니다.
그러니,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정신적인’ 윗몸 일으키기를 몇 번 하고, 냉전, 국가 안보 그리고 오늘날의 국제정치에 대해 스스로에게 해왔던 이야기들을 다시 생각할 준비를 하십시오./신시아 인로(미국 클라크대학교)
∥영어판 추천의 글
이 책은 서사와 행위의 복잡한 그물망을 이해하기 위한 단계로 학문적 방법을 상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놀라운 연구물입니다. 대한항공 858기는 서울올림픽을 앞둔 해에 사라졌습니다. 비행기는 올림픽 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북한이 파괴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잔해가 발견되지 않은 채 비행기는 다시 올라오지 않았고, 탑승객들과 승무원들도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북한의 여성 공작원이 서울로 압송되었고 대한항공기를 폭파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굉장히 아름다웠고 이에 대한 언론 보도와 여론은 선정성과 스캔들의 양상을 띠었습니다. 비극은 일일 연속극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고백을 했을 뿐만 아니라 참회도 했습니다. 참회도 했을 뿐만 아니라 수사관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도 했습니다. 그녀는 사면을 받은 뒤 자신에 대한 책을 몇 권 썼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녀를 둘러싼 일일 연속극을 심화시키고 확장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진실하게 말하고 쓰는가와 관련해 여론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박강성주가 여기에서 한 작업은 사건에 대한 이용 가능한 증거를 꼼꼼하게 엮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것인지를 제시하기 위해, 그리고 사건의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을 말하기 위해 증거와 의혹이 공존하는 소설적 국제관계학을 썼습니다. 그는 소설가처럼 쓰면서 일어난 일을 재현해내고 있는데, 이는 감동적이면서도 더 이상 일일 연속극으로 전락하지 않습니다.
박강성주는 그의 작업을 젠더와 고통 그리고 이들과 진실의 관계에 대한 개념적 조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진실일 수 있는 것에 대해 공감하려는 상상 외에는, 어떤 ‘진짜’ 답도 존재하지 않았을 냉전 정치 사건에 대한 아주 드물고 감동적인, 그리고 제가 느끼기에, 굉장히 중대한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스티븐 찬(영국 런던대학교 동양학·아프리카학대학)
책속으로
이 책의 목적은 김현희-KAL 858기 사건의 맥락화를 통해 소설 쓰기 국제관계학 개념을 제안하고,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에 개입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은 국제관계학에서 상상력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와 젠더를 어떻게 세계관으로 삼느냐를 다룬다. --- p.28
젠더, 고통, 진실은 국제관계학에서 다른 주제들에 비해 연구가 적었고 최근에야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이 주제들은 모두 여성주의에 기반을 둔 논의와 관련이 있는데 각각 젠더, 감정(고통), 객관성(진실)이다. 나는 대한항공 858기 사건이 이 주제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아주 단순화시켜 말하면, 일단 폭파범으로 알려진 사람이 여성이고(.젠더), 사건 및 그녀 말하해 여러말걘지 의문이 있으며(진실), 이에 실종자들과 그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고통). 결국 젠더-고통-진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 p.41
다시 말해, 한반도는 사실상 그리고 가상의 군사적 충돌이 ‘끝나지 않은 전쟁’의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는 상태다. 2013년은 평화협정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휴전협정 체결 60주기였다. 그리고 일상적 전쟁 상태는 60년 넘게 한반도에서 정상 규범으로 제도화되었다. 달리 말하면 한반도는 거대한 ‘전쟁 면역 공동체’가 되어버린 듯하다. --- p.58
그러나 가족들은 김현희를 볼 수 없었다. 정부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감시를 당했고, 언론은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친북 세력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그레이스는 고심했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누구를 믿어야 할까?’ 그녀는 절박했다. 언니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었다. 오직 언니가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시신으로라도……. --- p.102
나는 이 사건이 (공식 결과를 따른다고 했을 때) 젠더화된 폭파 사건이며, 이는 ‘젠더 폭탄’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분적으로 이 비유는 젠더에 민감한 관점으로 보면 사건이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다. 젠더는 숨어 있는 ‘폭탄’과 같은 것이다. 동시에 이는 여성으로서의 김현희와 관련된 요소인 미모 또는 가련함을 뜻하기도 한다. 이 장에서 젠더의 정치학은 기본적으로 대한항공기 사건에서 전통적 젠더 규범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이 규범이 여성 공작원에게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 p.139
지금도, 우리는 그래요. 남편이, 죽은 사람, 없어진 사람 말고 우리 부모들은, 지금도 뭐 저……요번에 미국 기자들 가봤으니까 만나거든요. 이북에 가서……살아서 만난다고요. 근데 지금도 20년씩 막 있어요. 혹시나, 잡아다가 어디 가서 이이 있지 않느냐.……아무것도 없어요. 옷 한 가지도 없어요. 비닐로 싸 가면 안 썩어요. 그치요? 그거 하나 없잖아요. 백 몇 명이 넘는데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믿어요? 못 믿어요(면접, 강차연, 2009년 8월 8일). --- p.182
재판 받을 적에도 이, 저, 저만치 앉혀놓고, 우리 뒤에 앉아 있는데, “이 사람을 죽여야 됩니까, 살아야 됩니까” 글 적에 내가 손들었어. 그러니께네, 재판관이 할머니 말하라고. 죽이지 말라고, 이 죽이믄 증거가 없으니까 죽이지 말라고 그랬어. 근데 또 그 다음 날에 신문에 났는데, 뭐라 그랬는지 알아?……아들 잃은 엄마가 김현희 죽이지 말라고 그랬다고, 이렇게 왔다고. 신문에 나왔어요. 그래……그, 그 애 생각해 죽이지 말라고 그러냐? 너희들 공산당이 핸 거니까, 그걸 죽이지 말라고 그랬지. 죽일라믄 115번 죽이라 그랬어. 내가 한 번에 죽이지 말고 115번을 죽이라 그랬어(면접, 주덕순, 2009년 8월 8일). --- p.219
만약 누군가 북한과 관련해 긍정적인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나 행위를 하면 이는 ‘빨갱이’이나 ‘친북’으로 몰리기 쉽다. 다시 말해, 단지 북한에 대해 좋게 들릴 수 있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 또는 북한 추종자가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이러한 낡은 반공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부분적 이유는 북한을 남한의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때문이다. --- p.231
재조사 요구를 북쪽이 비행기를 폭파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해다. 가족들이 재조사를 바라는 이유는 공식 수사 결과가 확실하지 않고 물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북쪽이 테러를 했더라도 쉽게 부인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적어도 북쪽의 책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재조사가 필요하다. 달리 표현하면, 일부 보수 진영의 주장대로 ‘친북’이기 때문에 재조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p.244
나는 면접을 하면서 거의 모든 이들에게 첫 번째 질문으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대한항공 858기 사건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인지요?” 압도적 다수가 공식 수사 결과가 진실인지 아닌지와 관련해 답을 했다. 이는 실제로 진실 문제가 사건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중요한 사안이라고 말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 구도에서는 젠더/고통과 같은 문제들이 충분히 얘기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점에서 나의 연구가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진실에 대한 다른 관점의 물음--- p.불확실함과 결정 불가능성)을 던지는 한편, 이 책은 진실 외의 부분들에 대해서도 물음을 던지고 있다. --- p.259
대한항공 858기 사건은 이와 같은 다른 해석과 정치학의 사례가 될 수 있다. 진실 문제의 경우, 남한 정부는 공식 수사 결과가 그 외의 다른 어떤 해석이나 질문도 통제해내길 바랐다고 하겠다. 하지만 수사 결과는 통제에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던 듯하다. 고통 문제의 경우, 실종자들은 그들의 삶을 갑자기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 가족들 또한 갑자기 상실의 충격을 받아야 했다. 김현희 역시 그녀의 공작을 계획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수사 결과를 따른다면) 그녀는 북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붙잡혔고, 남한으로 압송되어 반북 선전 활동에 나섰다. 젠더 또한 진실-고통과 마찬가지로(하지만 약간 다른 맥락에서) 통제 불가능성과 관련된 문제로 해석할 수 있다. 여성으로서 김현희는 대체로 남성성과 폭력성이 지배적이라 할 수 있는 공작원 세계에 들어왔다. 이는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곧,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이 여성은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이어야 한다는 지배적 관념에 도전하듯 젠더 규범의 통제를 위반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이 삶이라 하겠다. ‘갑작스러움’과 ‘통제 불가능성’은 삶의 한 부분이다. 나는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확실한 것은 거의 없다. 인간과 사회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에는 불확실함이 섞여 있다. 그렇다면 이 갑작스러움과 통제 불가능성을 겸손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 p.261
사람들은 말렸다.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민감합니다. 당신이 그걸 직접 겪었잖아요. 그런데 왜 하려고 하죠? 당신의 경력과 인생을 망칠 거예요.”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올라이트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들은 카프카의 소설 [심판]에서처럼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그냥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그래. 괜히 우리를 괴롭게 하지 말고 말이야. 지금 이 순간, 아마 우리가 이 세상 누구보다 당신 가까이에 있을 거야.” 하지만 때로 삶은 논리적이라기보다, 신비롭다.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던 학생. 이제는 대한항공기 사건 덕에 ‘박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학문적 성취를 위해 ‘비극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뇌하기도 했다. --- p.282
▲ <조선일보> 1987년 12월 16일 지면
젠더, 고통, 진실이 경합하는 ‘KAL 858기 사건’ 2015-09-03 한겨레
실종자 가족들은 생계부양자를 잃은 여성이 많았고, 폭파범 또한 여성이었다. 2003년 ‘칼기 폭파사건 16주기 추모식’에서 오열하는 실종자 가족의 모습.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김현희-칼기 사건 10년 학술 탐사
63명 면접·5개국 비밀문서도 포함
‘이야기의 힘’ 강조한 국제관계학
슬픈 쌍둥이의 눈물 김현희-KAL 858기 사건과 국제관계학 박강성주 지음/한울아카데미
이것은 냉전과 안보 그리고 국제정치에 대한 거대하고 까다로운 이야기다. 다들 사건이 명백하게 밝혀졌다고 하지만 피해 당사자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 그러나 끝내 누군가 하고 또 들어야 하는 이야기다.
<슬픈 쌍둥이의 눈물>은 이른바 ‘칼기 폭파 사건’으로 일컫는 비극을 다룬 국제관계학 학술서다. 지은이 박강성주 네덜란드 레이던대(지역학연구소-아시아학대학) 교수는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 삼아 쓴 이 책을 지난해 영국 라우틀레지 출판사에서 영어로 출간했으며 최근 한국어판을 직접 수정·번역했다.
1987년 11월29일, 대한항공 858기는 탑승자 115명과 함께 안다만해에서 사라졌다. 12월15일, 대통령 선거 하루 전 ‘여성 테러리스트’가 바레인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23일, 그는 자신의 이름이 김현희이며 비행기를 폭파했고 북한 지도부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 지령을 내렸다고 자백한다. 1990년 3월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보름 뒤 사면되었다. 얼마 뒤 영화 <마유미>(영어제목 ‘마유미: 처녀 테러리스트’, 신상옥 감독)가 개봉됐다. 김현희는 수기를 펴냈고, 강연을 했고, 자신의 고통도 증언했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 전 안기부 직원과 결혼했다.
지은이는 2002년 통일부가 주최한 전국 대학생 통일논문 현상공모전에 논문을 응모해 입상했지만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쓴 부분을 수정해달라는 요구를 받았고, 거부했다. 입상은 취소되었다. 힘들었지만 연구를 이어가기로 하고 2004년부터 4년 동안 실종자 가족회와 사건 대책위원회가 마련한 거의 모든 모임과 활동에 참여했다. 한국,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스웨덴 정부에는 정보공개 청구를 했다. 총 63명을 면접했으며 그중 절반은 실종자 가족들이었다. 조갑제·주진우 등 관련 기사를 쓴 기자들, 재조사에 관여한 이들, 인권활동가, 전 정부 관리들을 만났다.
‘젠더-고통-진실’이라는 개념은 책의 뼈대를 이룬다. 폭파범은 ‘여성’이었고(젠더), 사건에는 여러 의문이 있으며(진실),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했다. 이 책은 ‘젠더화된 고통’을 다루면서도 왜 특정한 고통이 무시되고 특정한 설명만이 진실로 간주되는지 살핀다.
1989년 첫 공판 당시 김현희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용서해주세요, 미안해요”라고 했다는 김현희의 첫 자백은 “언니 미안해”로 드라마틱하게 변형돼 발표되었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1991)라는 수기 출판 작업에도 국가의 기획이 개입되었다고 지은이는 밝힌다. 국내외 언론이 ‘아름다운 처녀 테러리스트’라며 그의 미모를 화제로 다뤘다. 한 남성 기자는 인터뷰 첫 문장부터 “김현희는 역시 예뻤다”라고 썼다. 냉혹한 살인자라기보다 ‘북한 정권에 이용당한 희생양’으로 그는 변모해갔다. 지은이는 이런 여성성을 “젠더 폭탄”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사건과 관련된 (진실 문제를 포함한) 다른 복잡한 맥락과 이미지들을 ‘폭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맥락이 피해자들에게는 통증으로 다가온다. 책에서는 폭파범의 심적 고통을 배제하지도 않지만, 실종자 115명의 가족들이 느낀 고통이 상상 이상으로 끈질겼다는 부분을 확실히 드러낸다. 실종자 가족들은 “정확한 사실을 안 알려주니까” “억울하니까”라며 가슴을 쳤다. 이들의 이야기는 점점 뒤로 밀려났다. 승객 대부분은 중동 건설노동자들이었다. 가족들은 시신을 보지 못해 “죽은 것 같진 않아”라고 말한다. 공식 수사 결과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사건과 관련해 풀리지 않는 질문들도 제기되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결국 재조사 운동에 나섰다.
국가정보원 발전위원회(2005~2007년), 진실화해위(2007~2009)가 재조사를 시도했지만 두번 다 김현희를 만나지 못했다. 2007년 국정원 발전위원회는 공식 수사 발표가 맞지만 군사정권이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지은이는 “재조사 요구를 북쪽이 비행기를 폭파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해”라며 “가족들이 재조사를 바라는 이유는 공식 수사 결과가 확실하지 않고 물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국가의 ‘공식 서사’에 의문을 품는 이는 친북주의자, 안보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되기 쉬웠다.
지은이는 김현희의 ‘고백 서사’의 권위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밝힌다. 미국을 비롯한 5개 나라에 정보공개 청구를 한 결과를 종합하면, 조심스러운 질문들이 없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공식 수사 결과를 지지했던 미국 쪽은 올림픽 방해를 위한 첫 단계로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는 데 의문을 가졌다. “평양이 왜 이렇게 빨리 행동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영국, 호주도 비밀문서에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 진실화해위 재조사 관계자는 “물증이 있어야 뭐 어떻게. (…) 이 사건도 말만 남은 사건이 됐다”고 말했다. 지은이는 이에 “진실로 간주되는 김현희의 자백이 도전을 받아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책은 경합적 진실과 국제관계학의 감정적 영역을 다루기 위해 스토리텔링을 시도한다. 책에 실린 짤막한 소설은 실종자 가족의 고통과 감정, 김현희가 느낄 미안함, 연구자 개인의 경험을 담고 있다. 학술적 영역에서 ‘상상력’을 동원하자는 데는 이견이 있지만 국제관계학에서도 ‘국제적 상상’이라는 개념을 쓰곤 한다.
10년이 넘도록 이 이야기에 매달려온 지은이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해석’과 ‘이야기’의 힘을 말하고 싶었다”며 “저의 핵심 고민 가운데 하나는 ‘사실’ 또는 ‘진실’의 개념 자체와 그것이 ‘누구에 의해-무엇을 위해’ 구성되는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밝혔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KAL기 폭파사건 진실은 대한항공·전두환 정권이 알고 있다”18. 5 9 중앙
858기 폭파사건을 모티브로한 영화 '마유미'의 한 장면(왼쪽)과 1987년 당시 폭파된 기체 내부에 붙어있는 안전확보 요강(오른쪽) [중앙포토]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의 유족들이 해당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촉구했다. KAL 858기 가족회와 KAL 858기 진상규명 대책본부는 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소문동 대한항공 서소문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87년 KAL기 폭파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유족들에게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KAL 858기 사건은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기가 공중폭발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승객과 승무원 115명이 숨졌지만, 비행기 추락 지점이 확인되지 않는 등 아직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북한의 지령을 받고 폭파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 김현희씨는 한국으로 압송돼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1990년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대책본부 회원들이 8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항공 서소문지점 앞에서 당시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 북한공작원의 사진을 들고 KAL 폭파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뉴스1
.이날 기자회견장에 선 김호순 가족회 대표는 "858기 사건에서 우리는 유품 하나, 시체 하나도 찾지 못했다. 조작된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다"면서 "115명이 숨진 사건인데 사고가 왜 일어났고 비행기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대책본부의 신성국 총괄팀장도 "3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단 하나의 진실도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또다시 이 자리에 섰다"면서 "이 사건의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기관은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와 외교부, 대한항공이다. 안기부의 주도와 대한항공의 협조하에 사건이 꾸며졌다. 대한항공은 지금이라도 사건의 진실을 낱낱이 밝히고 양심선언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유족들과 시민단체는 조양호 회장이 안기부와 공모한 의혹을 밝히고 사법·도덕적 책임을 질 것, 조 회장이 항공보안과 관련한 책임을 지고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 KAL기 사건의 실체를 밝힐 것 등을 요구하며 이런 내용을 담은 서한을 대한항공 측에 전달했다. 또 당시 폭파범으로 지목됐던 김현희씨를 경찰에 고발 조치하겠다며 서명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항공 측은 이날 오후 보도자료를 통해 공식 입장을 밝혔다. 대한항공은 "858기 폭파사건은 유족들의 끊임없는 의혹 제기에 따라 2007년에 정부 차원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발족하여 재조사를 했고, 종료된 사건"이라며 "당시 진실위원회는 사건의 실체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을 정식 확인하는 등 그동안 이 사건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불식시킨 바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858기 폭파사건은 정부 차원에서 대한항공을 비롯해 철저한 재조사를 거쳤고 현지인 증언, 수색작업까지 하여 진실규명 발표까지 공식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칼기폭파’ 책 판금신청 기각 2004-07-01 한겨레
서울남부지법 민사51부(재판장 김건일)는 국가정보원 수사관 5명이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을 다룬 <나는 검증한다, 김현희의 파괴공작>이란 책이 당시 조사를 맡았던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출판사 대표를 상대로 낸 판매금지가처분신청을 기각했다고 30일 밝혔다.
재판부는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역사적 사실로서 그 진상이 반드시 규명돼야 할 사안”이라며 “이 책의 원저자가 단순한 억측에 기초해 이 책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직접 칼기 폭파사건 범인 김현희의 행적을 취재하면서 발견한 사실에 근거해 저술한 것으로서 의혹을 품을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밝혔다.
국가정보원 직원 5명은 지난 3월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을 다룬 일본인 작가 노다 미네오(59)의 <파괴공작>이 번역, 출간되자 “안기부가 사건의 실체를 왜곡,오도해 수사했고 진실을 은폐하는 허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판매금지가처분 신청과 1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한편, 이 책의 저자인 노다는 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리는 대한한공 858기 사건진상 규명 관련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30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려다,공항당국으로부터 입국금지대상자 명단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통보받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고명섭 김남일 기자 michael@hani.co.kr
김현희의 파괴공작 나는 검증한다 저자 노다 미네오|역자 전형배|창해 |2004.03
지은이 노다 미네오저널리스트. 1945년 일본의 야마나시 현에서 태어났다. 작품에는 [주변사태-일미 가이드라인의 허실] [이케다 다이사쿠-금맥의 연구] [북으로 사라진 여인-김현희와 이은혜를 좇아서] 등 다수가 있다. 월간지와 주간지를 무대로 한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으며, 일본과 일본인이 놓인 상황을 직시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옮긴이 전형배1959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도서출판 창해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오체불만족], 로마클럽의 [제1차 지구혁명]등의 책들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KAL858편 폭파의 진실을 추적한 실화소설 [배후]를 출간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 책의 번역을 맡게 되었다.
. 한국어판을 위한 서문
. 프롤로그 : 결혼
[ 제1부 / 코리언 커넥션]
. 1장 북한에서 온 스파이
. 2장 아자부의 조선인
. 3장 네 사람의 하치야
. 4장 거물 공작원 미야모토 아키라
. 5장 방콕, 기묘한 여행자
. 6장 사라진 KE858
. 7장 외팔이 첩보원의 죽음
[ 제2부 / 참극으로의 여행 ]
. 1장 부다페스트, 위장된 암호
. 2장 빈, 서쪽에서 온 남자
. 3장 빈, 손질당한 증거 사진
. 4장 베오그라드. '오랜 도움닫기'의 끝
. 5장 바그다드 아부다비, 추적과 도망
. 6장 바레인, 참극의 한순간
. 종장 :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 떠나는 여행
. 후기
. 문고판을 위한 후기
. 부록 1 :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 수사보고서
. 부록 2 : 김현희 진술서 표기의 의혹
책소개
1987년 11월 29일 KAL858편 파괴공작의 궤적을 따라, 김현희의 진실을 철저하게 검증한 현장보고서. KAL기 858편 사건은 한반도 남북의 공방 과정에서 발생한, 국가 수준의 잔학한 범죄를 다룬 책이다. 테러용의자로 지목된 북한 특수여자공작원 김현희는 안기부가 만든 무대 안에서 모순된 이야기만을 늘어놓았다. 거기에는 미국의 동북아시아 전략과 일본의 생각 등이 깊숙이 함께 얽혀 있다. 이 책은 그같은 국제적인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며, 사건의 경위와 관련된 의문을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칼858기 의혹 제기한 저자, 입국 거부당해 14.6.30 오마이뉴스
칼858기 의혹 제기한 저자가 '국익 해치는 자?'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의 진상을 추적한 <나는 검증한다 김현희의 파괴공작>(창해출판사)의 작가인 일본인 노다 미네오씨가 내일(7월 1일) 열리는 'KAL858기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30일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했지만 입국거부를 당해 일본으로 돌아가 논란이 예상된다.
<파괴공작>은 김현희씨의 당시 진술이 거짓과 허구였고 김승일씨 역시 북한의 정예공작원이 아니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다씨 소식은 창해 출판사 관계자를 통해 알려졌는데 이 관계자는 노다씨와의 전화통화 내용을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
- 나리타로 돌아가게 된 경위는?
"칼858기 사건 취재를 위해 서울에 여러 번 입국을 했는데 이렇게 입국 금지가 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당황스럽다."
- 내일 토론회 앞두고 입국 금지가 됐는데.
"이와 같은 비민주주의적인 압력을 저널리스트의 입장으로서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 뭐라고 하면서 입국 불가라고 하던가?
"일단 금지 인물 리스트에 올라 입국이 안 된다고 하더라. 당황스러워 정확한 이유를 말해달라고 3차례 더 물었더니 'big problem'이라고만 하더라."
결국 노다씨는 오후 6시 30분 일본 나리타행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예견하지 못했던 노다씨의 불입국으로 토론회를 준비했던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은 분노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대책위원회 신성국 신부는 "알아보니 국정원에서 법원에 노다씨를 일컬어 '국익을 해치는 자'라며 입국 금지를 요청했다고 한다"며 "국정원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 이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밖에 안된다"고 노다씨의 입국 거부를 요청한 국정원을 강력히 비판했다. 이와 관련, 청해출판사 관계자는 "노다씨는 토론회에는 참석하지 못하지만 '토론회에서 하려고 했던 말들을 메일을 보낼 테니 대신 발표를 해달라'고 전해왔다"고 말했다.
토론회는 내일 오후 3시부터 국회도서관 지하 1층 회의실에서 열린다. 정지환 <시민의 신문> 편집 부국장의 사회로 진행될 이날 토론회는 '거짓과 침묵', '김승일은 누구일까?' 등의 주제로 전개된다
사랑을 느낄때면 눈물을 흘립니다 저자 김현희|고려원 |1992.07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2 꿈꾸는 허수아비 저자 김현희|고려원 |1993.11
[17년 만의 증언] 이상연 전 안기부장 <월간 중앙> 2004년 08월호
KAL 858기 폭파 사건 수사 책임자
김현희 사형시켰다면 ‘조작 증거 서둘러 없앴다’ 의혹 나왔을 것”
지금으로부터 16년여 전인 1987년 11월29일 저녁 8시께. 일요일 저녁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던 이상연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 1차장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의 주인공은 안기부 김포공항분실장이었다. 공항분실은 1급 보안 시설인 김포공항의 안전 확보와 출입국자 파악 등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분실장은 8명의 요원을 지휘하는 부국장급 간부였다.
분실장은 이차장에게 “저녁 8시40분 김포공항 도착 예정인 대항항공 여객기가 2시간 가까이 통신 두절 상태”라고 보고했다. 순간적으로 뭔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한 이차장은 “통신이 끊긴 상태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확인이 안 된다는 뜻 아니냐”고 물었다. 이어 이차장은 “그런 상황이 2시간이 넘었다면 일단 이 문제는 공개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순리일 것 같다”고 말했다. 항공기 행적부터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고, 이를 위해서는 국제적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 이차장은 “전세계 항공업계의 협력을 구할 수 있도록 상황을 즉시 공개하라”고 지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분실장과 통화한 지 몇 분 후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조중건 대한항공 사장이었다. 상황 공개 지시를 분실장을 통해 전해 듣고 전화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조사장은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고가 아닌 통신장애일 수 있으니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 기다려 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차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요? 통신 장애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도가 없고,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는데 뭘 더 기다리자는 거요?”
그로부터 20분이 지나지 않아 대한항공은 바그다드를 출발해 아부다비를 거쳐 김포공항에 도착 예정이던 KAL 858기가 통신 두절로 사실상 실종 상태라고 발표했다. 대한항공의 발표는 즉시 TV의 자막으로 떴다. 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전국이 선거 열기로 달아오르던 시점에서 닥친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공항분실장의 긴급 보고 ‘KAL 858기 실종’
대통령선거를 앞둔 당시의 정국은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했다. 호남지역 유세에 나섰던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유세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등 선거 국면은 갈수록 갈등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상연 차장은 ‘이 마당에 또 무슨 큰일이 일어났나’ 걱정하며 상황 분석에 골몰했다.
그러던 중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차장의 직속상관인 안무혁 안기부장이었다. 안부장은 “지금 TV 자막으로 나온 게 무슨 얘깁니까”라며 “대통령께서 TV를 보시다 직접 전화를 걸어와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통화 끝내고 바로 전화하는 거요”라고 말했다.
이차장은 그때서야 부장에게 보고할 틈도 갖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이차장은 “긴급 상황에 대처하느라 미리 보고를 못 드렸다”며 정황을 설명했다. 상황을 파악한 안무혁 부장은 다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화 보고를 했다. 일요일 저녁에 일어난 KAL기 폭파 사고는 이처럼 정권의 수뇌부 간에도 급한 전화가 오가도록 만든 ‘긴급상황’이었다.
KAL 858기는 11월29일 오후 2시쯤의 교신을 끝으로 버마(현 미얀마) 상공에서 폭파되며 추락했다. 승무원을 포함한 115명의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바그다드에서 탑승해 기내에 폭탄을 설치한 뒤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에서 내린 김현희는 로마행 비행기에 탑승하려다 체포돼 12월15일 서울로 압송됐다.
이듬해인 1988년 1월15일 안기부는 김현희가 김정일의 지시로 88올림픽을 방해하고 대통령선거를 틈타 사회 혼란을 야기하기 위해 KAL기를 폭파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현희는 1989년 2월 살인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돼 1990년 3월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받았다. 같은해 4월12일 김현희가 특별사면됨으로써 KAL 858 사건은 법적으로 종결처리됐다.
그러나 사고 발생 16년이 지난 지금도 관련 의혹 제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희생자 유가족 등이 제기하는 의혹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김현희가 평양에서 출발해 바그다드로 향하는 과정에서 머물렀다고 안기부가 지목한 호텔의 객실 번호가 실제와 다르다는 지적은 그나마 약과다.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이 아닌 조작된 인물이라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폭파 사건 자체가 여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돕기 위한 안기부의 자작극이라는, 사실로 밝혀질 경우 그 여파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 힘든 주장까지 다양한 의혹이 지금도 제기되고 있다. 관련 의혹은 ‘김현희 KAL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가 개설한 홈페이지(www.kal858.or.kr)에 잘 정리돼 있다.
16년 넘도록 끊이지 않는 의혹 제기
잊히는 듯하던 사건을 논란의 한가운데로 다시 끌어내는 데는 TV 프로그램들이 큰 역할을 했다. 지난해 연말 사건 발생 16주년을 전후해 MBC의 ‘PD수첩’이 ‘16년 간의 의혹,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을,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가 ‘16년 간의 의혹과 진실, 김현희 KAL기 폭파 사건’을 각각 방영했다. 지난 5월에는 KBS가 2부작으로 제작한 ‘KAL 858 미스터리, 진실은 무엇인가’를 내보냈다. KBS는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내리 저녁 8시부터 9시까지의 황금시간대에 프로그램을 방영해 눈길을 끌었다. KBS는 6월에는 ‘우리는 알고 싶다― KAL 858기 가족들 그간의 진상규명 활동’이라는 프로그램을 추가 방영했다.
TV를 통해 관련 의혹이 새삼 논란거리로 부각되는 상황에서 지난 7월에는 열린우리당의 일부 의원들이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한 KAL기 사건 재조사 가능성을 거론하고 나섰다.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의문의 죽음’으로 돼 있는 위원회의 조사 대상을 ‘국가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죽음’으로 확대해 재조사의 길을 터보겠다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는 “KAL기 폭파 사고와 군 의문사, 납북 어부 문제 등도 국가가 조사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보수 성향의 단체와 언론이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까지 난 사건을 단순 의혹 제기만으로 재조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나서면서 KAL기 폭파 사건 논란은 진보와 보수진영 간의 이념 대결로 치닫는 양상이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반응을 보였던 국가정보원도 “국회의 재조사 요구에 응할 용의가 있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월간중앙’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서 관련 의혹이 거듭 제기되는 상황에서 당시 안기부 1차장으로 사건 초기부터 검찰 송치까지의 전 수사 과정을 지휘했던 이상연 전 안기부장을 만났다. 이 전 부장이 대구시장에서 안기부 1차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87년 5월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護憲) 선언’으로 여야간 대립이 한층 격화될 무렵이었다. 국내 담당인 1차장을 맡은 후 그는 6월 항쟁, 6·29선언 등 초대형 현안과 맞닥뜨려야 했다. 그리고 연말의 13대 대통령선거라는 또 다른 현안을 헤쳐갈 준비를 하던 중 KAL기 사건 수사 책임을 맡은 것이었다.
이 전 부장은 1988년 12월 국가보훈처장을 맡아 안기부를 떠났다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과 내무부 장관을 거친 뒤 1992년 3월 안기부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같은해 10월 노태우 대통령의 민자당 탈당으로 ‘중립내각’이 출범하자 안기부장직에서 물러나 12년째 야인생활을 해오고 있다.
‘월간중앙’이 그를 찾은 이유는 16년이 넘도록 논란이 끊이지 않은 KAL기 폭파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수사는 어떻게 진행됐으며, 당시 수사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의혹이 제기되는 속사정은 무엇인지, 잇따른 의혹 제기에 대한 수사 책임자로서의 입장은 또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난 7월14일 오전, 서울 강남의 개인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이 전 부장은 “사건의 출발점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서두에서 기자가 정리한 것과 같은 초기 정황을 소상히 밝혔다. 인터뷰는 사건 시간대별 쟁점을 짚어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김현희 신병 인도 놓고 바레인과 신경전
― 안기부는 초기 단계에서 이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했는지요?
“국적 항공기가 공중폭파됐다는 점에서 올림픽을 방해하려는 테러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습니다. 김현희가 바레인 공항에서 체포되는 과정에서 독약 앰플을 깨물고 자살을 시도한 다음부터는 ‘북한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기 시작했고요.”
― 그렇게 본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안기부는 대공 관련 수사를 할 때마다 관련 파일을 만들어 다른 사건 수사 때 참고자료로 사용합니다. 관련 파일과 대조한 결과 김현희가 삼키려고 했던 독약 앰플은 북한의 남파 간첩이 사용하는 것과 크기나 모양이 똑같았습니다. 체포 위기에 처하면 음독을 시도하는 것도 북한 공작원들의 행태와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죠. 이를 근거로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이 분명하다는 판단을 내린 겁니다. 관련 자료를 제시했더니 바레인 경찰도 우리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더군요.”
― 그런 판단이 섰다면 김현희의 신병 확보가 급선무였을 것 같은데요?
“당연하죠. 자료와 함께 우리의 설명을 들은 바레인 경찰은 신속한 신병 인도를 약속했습니다. 이에 안기부는 외무부 직원 등이 포함된 신병인수팀을 구성해 대한항공기 편으로 바레인에 급파했죠. 사건 발생 4일이 지났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추가 테러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인수팀에는 절대로 비행기에서 내리지 말라는 지시도 했습니다. 기내에서 먹을 비상식량까지 준비해 갔죠.”
― 그러나 김현희의 국내 압송은 12월15일에야 이뤄지지 않았습니까.
“신병인수팀이 현지에 도착하는 사이 바레인 정부의 입장이 바뀐 겁니다. 바레인 경찰 측은 김현희를 당장 한국에 넘겨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바레인 정부 내부에서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 모양입니다. 바레인 정부는 ‘한국과는 범인인도협약이 체결되지 않았고, 추가 조사할 것도 있다’며 계속 시간을 끌었습니다. 당시 바레인은 북한과 외교 관계가 없었지만 중국과는 수교한 상태였습니다. 분위기상 북한과 혈맹 관계인 중국을 의식하는 것 같더라고요.”
― 그 상황에서 신병 인도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습니까.
“안기부는 바레인 경찰을 거듭 설득하고, 외무부는 바레인 정부를 상대로 협조를 요청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죠. 바레인 정부 관계자들을 접촉하는 데는 박수길 당시 외무부 차관이 애를 많이 썼습니다. 현지에 진출해 있던 우리 기업인들을 포함한 민간 차원의 노력도 많았습니다.”
―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어떻게든 12월16일 선거 전에 김현희를 데려오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 것 아닙니까.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얘기요. 우리 항공기가 북한 공작원으로 의심되는 테러범에 의해 폭파돼 1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의 주범이자 살아 있는 증거인 김현희의 신병 확보에 신경 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죠. 체포 직전 음독을 시도했던 김현희가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누가 압니까. 만에 하나 김현희를 국내로 데려오지 못한다면 사건의 진상은 또 어떻게 파헤칩니까. 따라서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김현희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죠. 일부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서둘러 압송한 게 아니죠. 바레인 경찰의 언질을 받고 신병인수팀이 현지로 날아간 날짜를 감안하면 늦어도 한참 늦게 김현희를 국내로 데려온 겁니다.”
“김현희는 한국을 전혀 몰랐다”
― 압송 과정에서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그때 안기부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옆에서 지켜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항공편으로 공개적으로 압송해 오는 것인데, 북한이 언제 무슨 방해를 하고 나설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지요. 김현희를 안전하게 데려와야 한다는 점에도 신경 썼습니다. 자살까지 시도한 독한 공작원이니 압송 과정에서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이죠. 포크로 자해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데 과연 식사를 제공해야 할 것인지, 자결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입에 권투 선수들이 사용하는 마우스 피스를 물릴 것인지 등을 일일이 검토했습니다. 인수팀에는 김현희를 안전하게 데려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으라는 지침이 내려졌죠.”
― 김현희는 국내 도착 후 어디에서 조사받았습니까.
“안기부 수사국이었죠. 남산 1호 터널 입구 오른편에 있는 건물이 안기부 수사국이었는데, 지금은 교통방송 사옥으로 쓰이고 있지요. 김현희는 그 건물 안에서 여자 수사관과 숙식을 함께하며 지하 조사실에서 조사받았습니다. 수사하면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보안과 외곽 경비에 신경 써야 했습니다. 저는 가장 먼저 수사국의 정문부터 폐쇄했는데, 터널 입구 오른편으로 나 있는 이 문은 그 뒤 영구히 폐쇄됐습니다. 야간에는 2중 철조망이 쳐진 건물 주변에 군견을 풀어놓기도 했죠.”
― 국내 압송 후에도 김현희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구사하며 신분을 감추려고 했던 것으로 수사 기록에 나오는데요?
“북한 공작원일 가능성이 확실해 보이는데도 김현희는 거짓말을 했어요. 일본 여권이 위조임이 밝혀지면서 마유미라는 일본인 행세를 할 수 없게 되자 ‘사실은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의 중국인’이라고 주장했지요. 고민 끝에 헤이룽장성 출신 화교를 은밀히 불러 김현희와 대화하도록 한 뒤 진짜 헤이룽장성 사투리를 쓰는지 검증해 보았더니 아니라는 겁니다.”
― 그렇게 버티던 김현희가 입국 8일 만에 스스로 북한 공작원임을 자백한 특별한 배경이라도 있었습니까.
“일부에서는 ‘8년 동안이나 밀봉교육을 받은 공작원이 어떻게 단 8일 만에 스스로 자백할 수 있느냐’며 김현희가 조작된 인물이라는 정황증거로 이 부분을 거론합니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조금만 이해하면 그런 황당한 얘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김현희가 18세부터 26세까지 8년간 공작원 교육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교육은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기까지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거나 공작 실패 때 독약을 먹고 죽기까지 익혀 둬야 할 것들만 배웠다는 겁니다. 남파 간첩처럼 한국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훈련은 전혀 못 받았다는 뜻이죠. 따라서 김현희에게는 한국에서 보는 모든 것들이 생소했던 겁니다. 수사관들이 김현희에게 서울 시내를 둘러보게 했는데, 거리의 자동차나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부터 이미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일절 윽박지르거나 하지 않는 가운데 인간적으로 대해준 것도 김현희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한몫했지요.”
― 김현희를 수사하면서 나름의 원칙을 세워두었던 모양이죠?
“수사팀은 김현희가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수사가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절대로 강압적으로 수사하지 말자는 입장을 정했습니다. 저는 수사관들에게 이번 건은 ‘해와 바람의 논리’로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코트를 벗기려면 센 바람보다 햇볕을 쬐어 온도를 높이는 게 효과적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시간에 쫓기지 말고 느긋하게 수사하라는 주문도 했습니다. 국내 압송 후 조사국 건물로 처음 들어선 김현희에게 수사팀은 ‘밥을 제대로 못 먹었을 테니 건강진단부터 받도록 하자’고 얘기했습니다. ‘심리적 안정부터 취하라’는 얘기도 해주었죠. 그렇게 했더니 결국 8일 만에 자백한 겁니다. 세계 스파이 역사상 8년간이나 공작교육을 받은 경우도 드물지만, 그렇게 치밀한 교육을 받은 공작원이 단 8일 만에 자백한 경우도 유례가 없었거든요.”
― 수사 라인은 어떻게 짜였습니까.
“당시 1차장인 제가 총책임자였고, 실무책임자는 대공수사국장으로 있던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수사는 부국장급인 전문 수사관이 핵심 요원들을 지휘하면서 진행했습니다.”
― 본인의 정체를 밝힌 후 김현희는 성실히 수사에 임했나요?
“김현희가 대공수사와 관련해 남긴 또 다른 기록이 있어요. 일단 자백을 시작한 뒤로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본명과 공작원 신분을 털어놓은 이후부터 김현희는 유가족들에 대한 죄책감 속에서 성실히 수사에 임했습니다. 그때까지 살아온 인생이 허무하다는 얘기를 하면서 앞으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자세도 내비쳤습니다. 머리가 좋아 공작원으로 선발되고 미모가 뛰어나 어린 나이에 영화 출연까지 했다지만, 김현희는 한글을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사실도 모를 만큼 차단되고 왜곡된 삶을 살아온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면 김현희가 8일 만에 자백한 배경은 자연스럽게 이해될 겁니다.”
이 대목에서 화제를 16년이 지나도록 끊이지 않는 사관 관련 의혹 쪽으로 돌렸다. 나름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그것도 김현희가 성실히 진실만 말하는 가운데 진행됐다는 수사를 놓고 왜 숱한 의혹이 제기되는지가 우선 궁금했다.
― 안기부 수사와 관련해서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오류가 많습니다. 김현희가 묵었던 호텔 객실 번호가 다른 경우가 우선 몇 군데 있지 않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많습니다. 김현희가 폭파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평양을 떠나 이동했던 경로는 소련의 모스크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유고의 베오그라드 등이었습니다. 이들 도시에서 김현희는 새로운 지령이나 자금을 받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문제는 이들 지역이 사건 당시만 해도 우리와 외교관계가 없는 공산국가였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현장 조사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당시 수사는 우선적으로 김현희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CIA 등 우방 정보기관과 공조하며 수사 진행
― 진술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사실 확인을 하지 못했다는 뜻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방 정보기관을 통해 간접적인 사실 확인 절차는 거쳤습니다. 그런 면에서 김현희에 대한 수사는 각국의 정보기관이 공조해 한 수사였다고 할 수 있어요.”
― 외국 정보기관이 안기부 수사에 적극 협조한 배경은요?
“우방 사이라고 해도 평시에는 표나지 않게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는 게 정보기관의 속성입니다. 하지만 공동의 목표가 주어지면 협조 체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KAL기 폭파 사건은 어느 나라나 관심을 가져야 할 항공기 테러였던 데다 1983년 아웅산 테러를 저지른 북한이 다시 한번 그 배후로 지목됐기 때문에 각국 정보기관이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겁니다. 이에 저는 1988년 1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말미에 ‘모든 수사 과정을 통하여 적극 협조해 준 바레인을 비롯한 우방 정부와 관계기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는 대목을 포함시켰습니다.”
― 아무래도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도움이 컸겠군요?
“강대국의 정보기관, 그리고 우리와 관계가 좋은 나라의 정보기관이 많은 도움을 주었죠. 말씀하신 대로 미국의 도움이 컸습니다. 사안에 따라서는 프랑스나 독일 정보기관의 협조도 얻어야 했는데, 우리가 그네들과 직접 접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을 통해 그들과 공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호텔 객실 번호에 착오 발생한 이유
― 일본 정보기관의 도움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일본 측은 김현희가 위조된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일본인 행세를 했기 때문에 사건 초기 단계에 주도적으로 나섰죠. 김현희의 여권이 위조된 것임이 밝혀진 뒤로는 한발 물러났는데, 후에 김현희의 일본어 스승인 이은혜 납치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에게 협조를 요청해 왔습니다. 관계자가 몇 차례 안기부를 방문해 김현희를 만나기도 했죠. 원래 일본 공안기관은 김대중 납치 사건 등으로 인해 우리 안기부와는 좋은 관계가 아니었는데, 김현희 사건 때 우리가 협조해줌으로써 관계가 개선된 측면이 있습니다.”
― 외국 정보기관과의 수사 공조는 어떤 형태로 이뤄졌습니까.
“김현희가 ‘부다페스트 공항에서 차를 타고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건물에서 최아무개라는 사람을 만나 공작금을 받았다’고 진술했다고 칩시다. 수사팀은 진술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정리해 이를 확인해줄 만한 정보기관에 협조를 요청합니다. 요청받은 해당 정보기관은 부다페스트 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북한 관련 건물을 수배하겠죠? 확인되면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 우리한테 보내줄 것 아닙니까. 그러한 과정을 거쳐 입수한 사진 등을 김현희에게 보여주면서 ‘네가 얘기한 건물과 사람이 맞느냐’는 식으로 일일이 확인했습니다.”
― 사실 확인 요청을 하면 회신이 바로 왔습니까.
“국가 정보기관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대부분은 늦어도 3∼4일이면 답이 옵니다. 하루 만에 확인된 것들도 많았어요. 거의 대부분의 자료가 놀랄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김현희가 북한의 공작 기지로 추정되는 건물에서 만났던 여성을 이름까지 기억해 진술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확인 절차를 거쳐 돌아온 자료에는 ‘000은 가명이고, 본명은 △△△가 맞다’는 대목이 들어 있었을 정도니까요.”
― 그처럼 정보력이 뛰어난 기관의 도움을 받았는데 어떻게 해서 호텔 객실 번호 같은 기초적인 사항에서 착오가 생겼을까요?
“당시 정황으로 김현희가 모든 것을 정확히 기억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신빙성 있는 자료를 제공해야 확인 과정도 빠르고 정확하게 마련입니다. 엉뚱한 자료를 주면 확인 과정도 복잡해지고 정확도도 떨어지죠. 우리 나름대로는 신빙성 있는 데이터를 줬는데 상대방이 확인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범했을 수 있을 것이고요. 호텔의 객실 번호를 둘러싼 논란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면 맞습니다.”
― 김현희가 묵었던 베오그라드의 메트로폴 호텔 객실도 수사 발표와 실제 번호가 다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호텔은 김현희가 다른 북한 공작원에게 KAL기 폭파 때 사용한 폭탄을 전달받은 곳으로,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데서도 객실 번호를 둘러싼 착오가 있을 수 있습니까.
“모 방송사가 내보낸 프로그램에도 그 대목이 나오죠. 그러나 그 프로그램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김현희가 머물렀던 당시에도 근무했다는 호텔 도어맨이 김현희의 인상을 정확히 기억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사건 전체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호텔 객실 번호가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그곳에 김현희가 투숙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까. 김현희가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의혹이죠. 그러나 김현희는 분명히 그 호텔에서 묵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모든 것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처럼 뼈대가 되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외면한 채 곁가지 격인 객실 번호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TV 프로그램들이 이러한 지엽적 문제에 초점을 맞춰 결과적으로 의혹 부풀리기에 앞장서는 데 대해서는 정말 유감이 많아요. 그러면서도 ‘조작’이니 ‘의혹’이니 하는 표현을 너무도 쉽게 사용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묻고 싶습니다.”
‘피의자 김현희’의 기자회견
1988년 1월15일 안기부는 서울 이문동 강당에서 KAL기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상연 전 부장은 수사 책임자 자격으로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발표문을 읽어내려갔다. 1차장의 발표에 이어 얼굴 사진 촬영이 허락되지 않는 가운데 수사 실무자들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안기부는 이날 김현희도 기자들 앞에 등장시켰다. 김현희는 기자들과 일문일답도 했다. 안기부의 수사 발표 때 피의자가 참석해 기자회견까지 한 것은 김현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전 부장은 김현희의 기자회견이 자신의 아이디어였다고 밝혔다.
― 어떤 취지에서 그런 결정을 하셨나요?
“명백한 북한의 테러라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발표 전날 김현희에게 ‘내일 회견을 할 준비를 하라’며 예상 질문을 몇 개 일러주었죠. 하지만 ‘이렇게 답하라’거나 ‘이런 말은 하지 말라’는 주문은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수사 결과에 자신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김현희를 회견장에 등장시킨다는 얘기를 들은 안기부의 전직 간부 등은 걱정을 많이 했죠.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회견인데, 김현희가 갑자기 ‘김일성 만세’라도 외치면 어떻게 할 거냐는 겁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오히려 용기를 냈습니다. ‘수령님 만세’를 외치는 것 자체가 폭파 사건이 북한의 테러임을 확인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 일부에서는 수사가 서둘러 진행됐다고 지적합니다만….
“11월29일 발생한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다음해 1월15일 발표한 것이 서둘러 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현장 조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건의 크기에 비해 실제 수사할 사항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김현희가 압송돼온 후 한 달 동안 퇴근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와의 시차가 제각각인 우방 정보기관과 협력 체제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24시간 대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수사 분위기는 서두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김현희는 기소된 후 검찰 조사도 받았습니다. 따라서 수사를 서둘러 종결했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어요.”
― 수사 내용은 전두환 대통령한테도 보고했을 것 같은데, 전대통령은 KAL기 사건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주요 사건 수사 때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에게도 보고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요. 그만큼 자율권과 재량을 갖고 수사한다는 뜻입니다. 전대통령은 ‘국제적 관심사이니 철저히 수사하라’는 원론적 언급을 자주 했고, 사적인 얘기는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 노태우 대통령은 어땠습니까.
“수사가 한창 진행될 때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는데, 나름대로 일정이 바빠 수사 발표 때도 TV를 시청하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 김현희에 대한 재판도 서둘러 진행됐다는 주장이 나옵니다만….
“사건의 뼈대가 간단하기 때문에 치열한 법리 공방이 오갈 여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김현희가 1, 2심 판결에 전혀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이 속도감 있게 진행된 측면도 있습니다. 김현희가 적극적으로 자기 변호에 나섰으면 오래 걸렸겠지요. 당시 사법부는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안기부가 서둘러 달라고 주문할 필요도 없었고, 그런 주문을 한 적도 없습니다.”
“김현희 살려둔 게 천만다행”
― 사형선고 후 보름 만에 특별사면했는데, 이건 진짜로 서두른 것 아닙니까.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사면복권이 어떤 배경에서 이뤄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김현희의 신병 관리가 고민됐을 겁니다. 사면복권하지 않으면 사형수 신분으로 계속 구금해야 하는데, 그에 따른 현실적 문제점이 검토되지 않았겠습니까.”
― 실제로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사형 집행을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죠. 김현희가 살아 있지 않다면 지금 제기되는 의혹들은 진작에 기정사실이 됐을 것 아닙니까. ‘조작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처형했다’는 얘기가 나왔겠지요.”
― 6공화국 출범 후 남북한은 고위급회담 등 대화를 이어간 끝에 1991년에는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북한 측에 KAL기 사건에 대한 책임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것까지 거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문제를 거론하면 남북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 일단 덮어두고 간 게 사실입니다. 6공화국 시절 고위급회담이나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나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1992년 8월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할 때 초기 실무작업을 안기부가 맡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중국군의 6·25 참전을 어떻게 짚고 넘어갈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마디라도 하고 넘어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뜻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측은 ‘그게 도움이 되겠느냐’며 회피했습니다. 북한이 아직도 남침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자기네가 끼어들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죠. 당시 중국과의 수교는 안보상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이득이 되는 국가적 현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6·25 참전 문제를 끝까지 거론해 판을 깨기보다 그 정도 선에서 멈추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옳다는 현실적 판단이 나오는 겁니다.”
― 북한은 사건과 관련된 책임을 일절 인정하지 않은 셈인데요?
“그렇지는 않죠. 지난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 회담 때 일본인 납치 문제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다구치 야에코라는 일본인을 납치한 사실이 있음을 시인했습니다. 다구치 야에코가 바로 공작원 교육 때 김현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이은혜입니다. 그렇게 보면 KAL기 사건과 관련해서는 주범인 김현희가 자백한 데 이어 폭파 지령을 내린 김정일도 간접적으로나마 자백한 셈입니다. 범죄의 당사자들이 ‘그런 사실이 있다’고 시인하고 사법부도 그것을 받아들여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은 ‘그럴 리 없다’며 의혹을 제기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이러한 비논리와 비상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 앞으로 북한과의 접촉 과정에서 KAL기 사건에 대한 책임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는 게 옳다고 보십니까.
“북한이 언젠가는 미안하다고 할 날이 오겠지요. 현실적으로 볼 때 당장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할 가능성이 없다면,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옳다고 봅니다. 기다리되 잊지는 말아야죠. 그러기 위해서도 사건에 대한 우리 내부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한데, 설득력 없는 의혹이 자꾸 제기되면서 갈등을 부추기는 분위기가 있지 않습니까. 걱정입니다. 사건의 진상을 새롭게 파헤칠 필요가 있는 명백하고도 객관적 증거나 정황이 나오면 그때는 당연히 재조사해야죠. 그러나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난 사건을 어떻게 의혹 제기만으로 재조사한다는 겁니까. 대통령 소속인 의문사위를 통한 재조사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북한이 저지른 테러 사건이 어떻게 의문사가 될 수 있습니까.”
― 시신조차 찾지 못한 유가족 입장에서는 재조사를 요구할 여지가 있어 보이는데요?
“저도 유가족들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아직도 사건 자체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그 심정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가족들의 간절한 심정이 다른 목적에서 이용되는 분위기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점이 또 안타깝습니다.”
― 유가족들은 탑승자의 시신 확인도 안된 상태에서 서둘러 사망처리됐다는 주장도 하는데요.
“정부는 사건 직후부터 유족에 대한 보상 문제를 중요 현안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집안 환경이 여의치 않은 중동 근로자들이 많이 희생됐기 때문에 보상 문제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상 액수도 문제였지만 시기도 현안이 됐죠.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빠른 보상이 가능하도록 사망처리부터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객관적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사망이 확정적이라는 판단에서 사망처리를 한 것으로 압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실종 유예기간 등 정상적 절차를 밟았더라면 신속한 보상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근거 없는 의혹 제기, 나라에도 도움 안 돼”
― 사건 재조사 문제가 논란이 된 후 국정원 관계자들을 만나 보신 적은 없습니까.
“지난 6월 초 전직 안기부장들과 함께 고영구 국정원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KAL기 문제도 거론됐는데, 고원장 본인부터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더군요.”
― 고원장이 어떤 입장을 밝히던가요?
“수사와 관련된 부분적 오류는 인정하지만 북한의 테러라는 객관적 정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하더군요. 합법적 절차를 거쳐 재조사 요청이 오면 적극적으로 응할 용의도 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국정원이 KAL기 사건과 관련된 대처 과정에서 혹시라도 부족한 게 있으면 보충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국정원의 입장은 확고했습니다. 수사 책임자 입장에서는 마음 든든하고 안심이 되더군요.”
이상연 전 부장은 “일부 방송까지 가세한 가운데 진행되는 본질에서 벗어난 의혹 제기가 과연 무슨 이익이 있으며 나라에는 어떤 도움이 되는지 냉철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며 “나의 얘기가 그러한 인식을 갖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로 3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 李相淵 -
1936년 출생
1979년 보안사령부 감찰실장
1981년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장
1981년 서울시 부시장
1985년 대구직할시장
1987년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
1988년 국가보훈처장
1990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1991년 내무부 장관
1992년 국가안전기획부장
내가 이국에서 KAL858기 사건을 못놓는 이유 2012. 06. 25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특별기고] 9년째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 작업 매달려온 신성국 신부
1987년 대선을 20일 가량 앞둔 그해 11월 29일 오후 2시 1분, 바그다드에서 출발하여 승객 115명을 태운 KAL 858기가 미얀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방콕과 최후로 교신한 뒤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바레인 현지조사를 마친 후 정부는 12월 7일 “북한의 88서울올림픽 방해공작”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듬해 1월 15일 한 여성이 TV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은 ‘김현희’이며, 김정일의 사주로 88올림픽 방해와 대통령 선거 혼란 야기, 대한민국 내 계급투쟁 촉발을 위해 KAL858기를 폭파했노라고 발표했습니다.
얼마 뒤 검찰은 김현희에 대해 살인죄, 항공기폭파치사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하여 재판이 진행됐는데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은 김현희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불과 보름만인 4월 12일 사면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그로부터 7년뒤인 1997년 말 김현희는 전직 안기부 직원과 결혼해 새 삶을 시작했으며, 책 출간과 외부강연도 종종 갖고 있습니다.
한편, 정부의 수사결과 발표와 관련해 사고 항공기의 블랙박스 및 사망자 시신이나 유품이 거의 발견되지 않은 점, 안기부가 급속한 사고처리 등을 들어 조작의혹 제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두 차례에 걸쳐 재조사를 실시해 “안기부 조작사건이 아니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KAL 858기 가족회’나 이 사건을 추적해온 사람들은 여전히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신성국 신부(50)가 최근 김현희 씨의 방송출연을 계기로 그간 자신이 수집한 자료와 증언 등을 토대로 KAL 858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겠다며 그 ‘서론’ 격으로 아래 글을 보내왔습니다. 본지는 이 사건을 둘러싼 의혹해소 노력의 일환으로 신 신부의 글을 연재할 방침이며, 반론도 기꺼이 수용할 것임을 밝혀둡니다. 참고로 신 신부는 청주교구 소속으로 공군 군종 신부를 역임했으며, 현재 캐나다에서 사목 활동 중입니다... -편집자
‘KAL858기 사건’은 내 삶의 중심에 언제나 자리 잡고 있다. 엊그제(18일)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다가 <TV조선> ‘오늘의 시사토크 판’에 김현희가 출연하였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KAL858의 진실을 찾아 사투하며 살아온 천주교 신부의 운명과 진실 뒤에 숨어버린 의혹의 여인 김현희와의 숨바꼭질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공개출연이 한편으로는 씁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로 삼고 싶었다. 김현희의 <TV조선> 출연 동기와 내용들이 대선 정국과 맞물려 공안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생겼지만 무엇보다도 ‘KAL858기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사회적 관심의 기회로 삼고 싶은 마음이 은근히 생겨났다. 김현희가 <TV조선>에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가 남긴 ‘서약서’를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 KAL 858기 가족회가 지난 2006년 1월 17일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858기 실종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해명해야 할 사람들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오른쪽 끝이 신성국 신부. © 사람일보
[858기 희생자 유족회에 드리는 말씀]
“본인 현희는 평생을 유가족과 함께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를 노력하겠습니다. 1987년 12월 23일 김현희”
‘서약서’를 되씹어 보면서 김현희가 15년 전 희생자 가족들에게 했던 이 약속은 과연 지켜졌을까? KAL858기 가족회에 확인해본 결과 약속은 단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에 단 한 번도 가족들과 만남이 없었다니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다. 김현희는 법정에서, 그리고 자기의 진술서를 통해 자기의 범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유족들에게 깊이 반성하고 참회하고 속죄한다고 진술한 적이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김현희의 이러한 참회와 속죄를 받아들이고 역사의 증인으로 삼겠다고 하여 1990년 4월 12일에 대통령 특별사면을 단행하였다. 대법원 확정판결 15일만에 단행된 사면은 세계 사법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현희의 진심어린 참회와 속죄를 믿는 희생자 가족들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론에 공개적으로 발표된 김현희의 참회와 약속들은 실제로는 허구였으며 오히려 가족들의 마음에 불신과 더 큰 상처만 남긴 사기행각이 되고 말았다.
내가 ‘KAL858기 사건’과 인연을 맺은 것은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3년 5월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KAL858기 가족회 임원들을 만났다. KAL858기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어머니들의 외침은 내 양심을 뒤흔들어 놓았다. 남편을 잃고, 남동생을 잃고, 딸과 아들을 잃고, 아버지를 잃고 피눈물을 흘리며 15년을 살아온 그들의 슬픔과 아픔이 나를 진상규명 활동에 끌어들인 결정적인 동인이었다. 또 희생자 가족들의 아픔을 넘어 한반도 분단이 가져온 민족적 비극과 불행이 더 이상 생겨서는 안된다는 시대적 고민도 한 이유였다.
사건 진상규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참으로 곡절도 많았다. 2003년 10월 초순에 국정원 직원 두 명이 나를 찾아와 이 일에 손을 떼라고 강요했다. 그 다음으로는 교회 내부로부터 강한 압력이 들어왔다. 그러나 거짓을 밝히고 진실을 찾으려는 나의 의지와 노력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힘겹고 외롭고 고달픈 일이었지만 신앙인으로서 내가 믿는 절대자에게 끊임없이 기도하고 의지하며 인간적 한계를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3년여 동안 KAL858기 희생자 가족들 곁에서 혼신을 다해 일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거두면서 보람도 많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교회에서 나를 돌연 해외(미국)로 발령을 낸 것이다. 그로 인해 국내에서의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활동은 접을 수밖에 없게 됐다. 그 이후 현재 캐나다에 3년째 체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새로운 차원의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중이다.
사건 진상규명 활동에 결정적인 큰 소득과 반전의 계기를 꼽는다면, 2007년 10월에 법원의 정보공개 청구에서 승소하여 ‘KAL858기 사건’ 관련 수사기록 및 재판기록, 김현희 진술서 등을 확보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사건 발생 20년간 수사기관이 공개하지 않은 수사 관련 자료들을 입수한 후 사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분석작업을 거치면서 안기부와 검찰의 숱한 거짓들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김현희 진술문과 수사 기록들은 한국 수사기관이 얼마나 많은 거짓과 조작으로 국민들을 속였는가를 명백하게 입증하는 증거물이 돼 버렸다. 파면 팔수록 끝이 없는 거짓의 기록을 들추며 나와 KAL858기 가족회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미리 말씀드려 둘 것은 오늘 이 글을 시작으로 <진실의 길>을 통하여 그들이 숨기고 감춘 범죄의 실체를 하나하나씩 밝힐 것을 독자여러분께 약속드린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김현희는 남은 여생을 희생자 가족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약속은 거짓이었고 오히려 그들을 배신하고 외면하였다. 또한 자신의 범죄를 속죄하고 참회한다고 대국민 약속을 하여 대통령 특별사면까지 받아 혜택을 누렸던 자가 지금 다시 TV에 나와 자기가 무슨 영웅인양 행세하는 모습은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을 모독하고 우롱하는 후안무치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 18일 밤 TV조선의 토크쇼 '시사토크 판'에 출연해 북한에서 공작원으로선발된 과정 등을 설명하는 김현희 씨. ⓒ TV조선 화면캡쳐
TV에 출연하여 세상 밖으로 나와 공개활동을 시작한 김현희에게 이 자리를 빌어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진실과 화해·상생을 위하여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을 바라는 피해자 가족들 및 일반인들과 공개토론회를 요청한다. 공중파 방송 또는 언론을 통하여 공개토론회 자리를 마련하여 25년 동안 만남을 원했던 피해자 가족의 의혹과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회를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이제라도 15년 전의 약속을 지키고 동시에 ‘KAL858기 사건’을 둘러싼 국민적 의혹을 깨끗이 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바란다.
이번처럼 특정 방송사 ‘시사토크’ 프로에 김현희 씨 혼자 출연하여 일방적으로 ‘KAL858기 사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국민들이 기대하는 진실의 목마름과 욕구를 채워줄 수 없다. 오히려 불신과 의혹만 증폭시키는 역효과만 가져올 뿐이다. 25주기의 특별한 의미를 살리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공개석상에서 먼저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만나서 진심으로 대화하고 진실의 실체를 찾아 궁극적으로 화해하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김현희 씨가 약속한대로 KAL858기 가족들을 돕는 사랑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을 김현희 씨가 받아들여 성사된다면 25년간 응어리진 가족들의 슬픔과 원한도 풀리고 김현희 씨도 더 이상 세상과 등지며 숨어서 살 필요 없이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KAL858기 가족회는 김현희 씨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릴 것이며, 만일 김현희 씨 측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경우 진상규명 활동에서 발견된 결정적 거짓들을 가감 없이 공개해 나갈 것이다. 스스로 불행을 자처하지 말기를 당부하면서 피해자 가족들이 내민 진실과 화해의 손짓에 화답해주기를 간곡히 호소한다.
“김현희는 살아있습니다” 2018.01.13. 통일뉴스
<대통령 전 상서> KAL858 사건 의혹 제기자 현준희
무술년 개띠 새해 남북화해무드가 통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대통령님께선 대한노인회와 만남에서 “북한문제가 어렵지만 더 어려운 것은 내부 의견분열”이라 하셨죠. 맞습니다. 북한문제만 나오면 시끄럽고,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지요.
18년전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있었고, 이어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이 예상됐습니다. 당시 보수단체, 보수언론에서는 ‘6.25와 칼기사건 사과 없이는 방문 불가’를 주장했고, 심지어 서울에 오면 암살, 체포하자고 앙앙불락. 1987년 김현희 칼기사건 발생이래 추적해온 제가 보기엔 북한과 무관. 안타까웠습니다. 무섭지만 밝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1년 10월호 <내외저널>에 ‘칼기사건은 북한이 했다는, 폭파됐다는 증거 없다’
대통령님, 이번 화해무드가 무르익으면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먼저 올 것입니다. 선친의 서울 답방이 이뤄지지 못했으니까요. 그때 내부분열 없이 한마음으로 환영할까요? 김대중 대통령 평양 방문시에는 그랬지만, 서울에선 어려울 겁니다.
불길한 생각까지 듭니다. 1차 세계대전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부부 저격으로 촉발된 것 아닙니까? 김 위원장 방문시 일어난다면? 서울은 불바다가 됩니다. 바로 뇌관 제거가 이 글의 목적입니다.
제가 불씨를 당긴 이후, 칼기가족회, 민변, 신성국 신부, 서현우 작가 등의 노력으로 이제 칼기사건은 ‘전두환 조작’으로 공연히 떠들 수 있도록 밝혀졌습니다. 12.12 쿠데타, 5.18, 각종 인권탄압, 간첩조작, 부정부패 업보에 그는 육사동기이자 친구인 노태우가 대통령돼야 안전한 퇴임이 보장되는 것이죠. 칼기사건으로 인해, <조선일보> 추정 150만표가 노태우에게 갔고, 이후 북풍원조가 되어, 매선거시 표심을 왜곡했습니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됩니다. 전두환이 노태우를 당선시켜 살아난 것처럼, 4자방비리 이명박이 국정원 댓글, 심리전단 선거개입으로 박근혜를 당선시킨 구도. 닮지 않았습니까? 엉터리 칼기사건 조사는 천안함, 세월호사건 조사도 엉터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칼기사건은 북한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계기가 된 점에서도 재조명돼야 합니다. 1988년 1월 15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북한폭파로 발표하자 미국은 5일만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습니다. 테러지원국이 되면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지요. 오늘날 북한이 못살게 된 배경도 여기서 비롯됐고. 부담은 남한에도 돌아오며, 형제간이라도 누명 쓰고, 경제적 타격까지 받았다면 의절(義絶)합니다. 반면 북한소행이라면 통일은커녕 바로 국제사법재판소에 가, 단군(檀君)호적 정리하고 이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증거가 없습니다. 1988년 2월 정부는 UN안보리에서 칼기사건 북한제재결의안을 채택시키려 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실패했습니다.
▲ 1988년 2월 5일, 당시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인 박철언이 김현희를 특보실로 불러 기념사진을 남겼다. 박철언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실렸다. 김현희 오른쪽이 박철언, 왼쪽이 강재섭. [자료사진 - 통일뉴스]
대통령님, 진상규명은 민간에서 다 조사해 놔 거저먹기입니다. 의지만 있으면 됩니다. 예컨대
1. 국정원은 안기부가 88.1.15 수사발표시 제시한 ‘김현희 = 화동(花童)사진’이 가짜라고 인정했고, 안기부 수사책임자였던 정형근은 2003년 방송인터뷰에서 ‘김현희 진술을 참고, 폭약의 종류와 양(量)을 임의추정했다’고 자수했습니다. 칼기 잔해라고 태국 앞바다에서 건진 61점 잔해도 국과수 감정결과 폭파 흔적은 없었습니다. 해서 영국 로이드보험에 재보험금 청구도 못했습니다. 송곳 실사(實査)가 두려운 것이죠.
2. 진상규명은 필연입니다.
첫째, 탈북자 3만명시대. 김현희가 남긴 수많은 고백록, 방송출연을 모니터링한 그들은 일언지하에 “김현희는 북한사람 아니다” 북한의 현실과 동떨어진 소설이라는 거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으로 부르는 김현희, 북한여자 맞습니까?
둘째, 인터넷 SNS시대에선 정보기관 비밀주의는 안 통합니다. 구글에서 ‘김현희, 폭파, 현준희, 신성국, 서현우, 노다미네오, 무지개공작’을 치면 누더기 된 안기부수사발표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3. 김현희는 살아 있습니다.
1990년 3월 대법원 사형 선고받은 김현희에게 정부는 16일만에 ‘추후 이 사건이 허위날조라고 주장하는 흑색정치선전을 분쇄할 역사적 증인’이라는 요지로 특별사면했습니다. 허나 ‘칼기사건은 허위날조다’, ‘김현희는 가짜다’라는 의혹이 계속 나왔음에도 숨고, 보수언론에만 나와, 눈물을 글썽 ‘북녘 부모님이 보고 싶다’ 동정심을 자극하는 식으로 덮었습니다. 가짜의혹은 북한공민증번호(주민번호)를 까면 즉시 확인 될텐데, 김현희는 물론, 안기부, 검찰, 재판부, 보수언론 어디도 ‘묻지도 따지지도’않고 비호했습니다. 한통속이었습니다.
▲ 김현희가 자신이라고 지목한 사진 속 소녀의 귀는 '칼퀴'가 아닌 '복귀'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현준희 씨는 집중적으로 화동과 김현희의 귀 모양이 다르다는 점을 의혹으로 제기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미인의 눈물처럼 빨리 마르는 것은 없는 법’그녀는 천하의 거짓말쟁이입니다. 증거는 무수하나 상기 화동사진 예만 들겠습니다. 안기부가 1972년 평양을 방문한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장기영 대표에게 꽃을 준 소녀사진을 제시하자, ‘맞아요. 저희 집에도 있어요’ 북한사람이라는 물증으로 언론공개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소녀의 귀는 복귀. 김현희 귀는 칼귀. 귀모양은 평생 변하지 않는 제2의 지문. 유일한 물증마저 사라진 겁니다.
헛발질한 뒤 1988년 3월, 1972년 일본기자가 찍은 다른 각도의 화동사진이 제시되자, 김현희는 ‘이 사진 어디서 구했어요? 틀림없는 접니다’ 이에 북측에서 실제 화동인물이 나오자, ‘깨갱’ 거짓말쟁이 불량소녀 김현희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음에도 <TV조선> 등 종편에 출몰, 거짓말로 칼기사건을 오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하튼 전두환을 비롯한 어둠의 자식들에게 김현희는 더 없이 고마운 존재입니다. 2012년 미국무부가 공개한 ‘대한항공858’ 비밀문건에 따르면, 88.1.14 전두환은 미국 릴리대사와 면담자리에서 “(김현희에게) 새 옷도 사주고 64빌딩에도 데려갔다”고 자랑. 점입가경. 88.2.5 박철언 안기부장특별보좌관은 115명을 죽인 살인마와 기념촬영까지.
한편 진상규명 목소리가 커질수록 김현희는 살해위험이 있고, 미궁에 빠질 수 있습니다.언제까지 김현희의 거짓말에 휘둘려야 합니까? 살아있을 때 대중 앞에 내세워야 합니다. 저는 20세기 최대 미스터리로 칼기사건을 꼽습니다. 대명천지에 115명을 태운 항공기가 폭파됐다는 데, 시신 1구, 잔해 1점이 없는 해괴함.안기부는 1988년 1월 ‘김현희 눈물의 깜짝쇼’로 실종사건을 폭파사건으로 둔갑시킨 겁니다.
그럼 21세기 최대 미스터리는? 칼기사건의 미해결입니다. 사건 초기 닭발 오리발 구분없이 북한테러 천동설로 굳혔지만 사방에 닭털이 풀풀. 민간에서 나랏돈 한푼 안쓰고 밝혀놨는데도 정보기관은 엄청난 혈세를 쓰며 감추는 형국입니다. 적폐 중 상(上)적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 일반 정서는, ‘아무리 대통령 만든다고, 무고한 시민 100여명을 죽일 수 있느냐?’
그럼 광주 5.18때 수백명 시민을 북한 폭도로 몰아 죽이고, 86년 금강산댐 사기, 87년 수지킴 사건 등 조작은폐는 누가 했습니까?
‘이 사건은 너무 크다. 밝혀지면 국기(國基)가 흔들리고, 대한민국은 지구촌에 존재할 수 없다’며 국익빙자 덮자는 말도 있습니다. 그럼 금강산댐 사기가 밝혀졌어도 대한민국이 없어졌습니까? 70년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반대자들을 비행기에서 산채로 떨어뜨리는 등 1만명 넘게 죽였는데 나라가 없어졌나요? 창피는 순간. 남의 나라 지난 일은 한때 추억일 뿐입니다.
대통령님, 하지만 칼기사건은 지난 일이 아닙니다. 진상을 밝혀, 남북관계 지뢰를 제거하고, 결자해지(結者解之) 테러지원국을 푸는 게 국익입니다. 해서 ‘칼기사건 규명 없이 통일 없다’고 감히 주장합니다. 31년 세월을 돌이켜보면, 안데르센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생각납니다. 안기부는 기획 시나리오, 김현희는 사기꾼 재단사, 기레기언론은 간신배 신하로 역할분담, 대국민 사기친 겁니다. 이에 오늘도 외칩니다. “임금님, 벌거벗었네”
▲ 2003년 11월 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김현희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천주교 신부 115인 선언` 기자회견이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국정원 발전위는 2006년 8월 1일 국정원 3층에서 'KAL858RL 폭파사건' 재조사 중간발표 기자회견을 갖고, '무지개 공작'의 존재를 처음으로 밝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태영호 '김현희 가짜설' 정면 반박…"인터폴에 자료 있다" 2017.01.18. TV조선
[앵커]올해는 KAL기 폭파사건 30주기입니다. 당시 테러에 가담했던 북한공작원 김현희씨가 테러를 자백하고, 수차례 공개 증언도 했지만, 정권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됐던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귀순한 태영호 전 북한 공사가 북한 소행이 맞다고 명백하게 밝혔습니다. 윤동빈 기자입니다.
[리포트]칼기 폭파사건은 1987년 11월 29일 북한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은 김승일과 김현희가 대한항공 여객기에 시한 폭탄을 두고 내려 민간인 탑승자 115명이 전원 사망한 사건입니다.
국가기록원 영상 (지난 1987년)
"폭파범 김현희는 기자회견에서 북괴에 기만당하고 살아온데 대한 배신감에 통분하면서 사실을 밝히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88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제적으로 고립됐던 북한이 올림픽 개최를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테러였습니다.
김현희 / 전 북한 공작원 (지난 2011년)
"죽어도 진실을 밝히는 게, 유가족분들 한테라도 보답하는 게 아니냐 그래서 제가 8일만에 자백을 하고 진실을 밝히게 된거죠."
김씨 진술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선 정권에 의해 조작됐다는 음모론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귀순한 태영호 전 북한 주영 공사는 월간조선과 인터뷰에서 이를 정면 반박했습니다. 사건 당시 북한 외무성 유럽국에서 근무하던 태 공사는 "김현희씨가 오스트리아를 경유해 이라크 바그다드로 건너갔다"며, "사건 직후 오스트리아 정부가 김현희씨의 출입국 기록을 가지고 북한에 공식 항의했다"고 밝혔습니다. 태 공사는 오스트리아 외교 문서뿐 아니라 인터폴에도 김현희와 관련된 자료가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TV조선 윤동빈입니다.
위기의 우파-사건 30주기 맞는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金賢姬) 2017.11.19 월간조선
“국정원이 진짜 ‘적폐청산’ 하려면 나를 가짜몰이 한 적폐부터 밝혀야”
⊙ 국정원은 노무현 국정원 시절 ‘김현희 가짜 만들기’ 공작을 했다고 구두(口頭)로 시인했지만…
⊙ 정권 바뀌면서 다시 ‘김현희 가짜’ 주장 등장
⊙ 내가 사는 집을 방송사에 알려줘서 공개한 것은 나에 대한 간접 살인 행위
⊙ 정보 당국, 김현희씨 부친은 2004년, 모친은 2012년 사망한 것으로 판단
⊙ 김현희씨가 수녀(修女) 되기를 거부했던 이유
⊙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등으로 받은 인세 8억5000만원 희생자 가족들에게 기부
글 김성동 부장
1960년대 후반 무렵. 그때 여섯 살이 채 안 된 북한 소녀는 쿠바에 있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푸른 하늘을 보았고 아바나의 푸른 바다를 보았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쿠바의 그 하늘과 바다는 그의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 있다. 행복했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쿠바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소녀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꿈많은 학창 시절을 보낸 소녀는 어느새 평양 외국어대에 진학한 숙녀가 됐다. 그것이 소녀 개인과 그 가족에게 끔찍한 아픔을 주게 되는 출발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가족과의 생이별의 출발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평양 외대 재학 중 공작원으로 선발된 그는 마카오 등지 등을 다니며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만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87년 11월 29일 그는 주범 공작원 김승일과 함께 미얀마 안다만 상공에서 115명이 타고 있었던 KAL 858기를 폭파한 폭파범이 됐고 체포된 그는 한국으로 압송됐다. 체포 과정에서 주범 김승일은 자살했고 그는 자살에 실패했다. 그는 혼자서 한국으로 압송됐다. 암담했다.
압송된 후 그는 대한민국 법정에서 1심, 2심, 3심을 거치며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년 시절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쿠바의 푸른 하늘과 바다였을까. 아니었다. 가족이었다. 2012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원통한 것도 있었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인간인지라 ‘사형’이란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끝이구나,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맥이 탁 풀렸어요. 부모님과 동생들 생각이 났어요. 특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나를 예쁘게 키워주셨는데 딸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金賢姬)씨. 그때 그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사형을 선고받았던 그는 사면을 받았다. 사면을 받은 후 한국에서 산 30년 동안 그는 행복했을까. 과거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했던 기사를 찾아봤다.
다음은 《월간조선》 2009년 6월호 〈김현희씨의 12년 만의 서울 나들이/“엄마 옛날 이름이 김현희였어?”〉 제하 기사 앞부분이다.
〈…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며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김현희씨의 얼굴은 사진으로 봤던 과거의 모습과 비교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알려진 대로 그녀는 둘째 아이가 돌을 막 지난 무렵이었던 2003년 11월, MBC 취재진에 자신의 집이 노출된 다음날 새벽 그곳을 떠나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좌파 정권하에서 그녀는 “‘KAL 858기 폭파 사건’은 조작됐고, 김정일의 공작 지시는 없었다”는 대답을 직간접적으로 강요받았다. 그녀는 그 배후 중의 하나가 좌파 정권하의 국정원이었다고 주장하며 국정원의 공식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고 있다. 국정원이 자신을 가짜로 모는 프로그램을 제작 중인 MBC 출연을 요구했고, 국정원 간부로부터는 제3국으로 이민을 떠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좌파 정권하의 ‘싸늘했던 시대’가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고 싶었던 그녀의 바람을 철저하게 짓밟은 것이다. ‘살벌한 시대’는 그녀를 투사로 만들었고, 살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더 강해져야 했다고 한다. 그 결과가 그녀에게 안겨준 것은 ‘야윈 얼굴’이었다.…〉
다음은 《월간조선》 2012년 12월호 〈사건 25주기 맞는 KAL 858기 폭파범 金賢姬/“국정원은 내가 수녀 되기를 원했다”〉 제하 기사 앞부분이다.
〈… 그녀는 남한에 온 지 10년 만에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는 외피만을 놓고 볼 때 그녀는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북한의 테러를 입증하는 증거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기에 그 증거를 없애버리고 싶은 세력이나 가짜로 만들어 북한을 이롭게 하고 싶은 세력들에 의해 끊임없이 시달려 왔고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
좌파 정권과 좌파적 언론의 ‘가짜 만들기’ 공세에 시달리다 못해 2003년 11월 젖먹이 아이 등 가족과 함께 집을 나온 그녀는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결혼생활 중 절반 이상의 세월을 바깥을 떠돌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내년 이맘때면 집 나온 지 10주년 기념식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최근에도 일부 좌파 언론은 김현희씨가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하지는 않고 TV조선 프로에만 출연한다고, 사실과 다른 공격을 하고 있다. 김현희씨는 국감에 출석해 ‘김현희 가짜 만들기’의 진상을 밝히겠다는 입장이었지만 국회는 그녀에게 출석을 통보하지 않았다. 김현희씨와는 상대적 입장을 가진 김만복(金萬福) 전 국정원장만 증인으로 출석시켰을 뿐이다. 좌파 언론은 주소 불명을 이유로 김현희씨에게 출석 통보를 하지 않은 국회의 직무유기를 지적했어야 옳았다. 김현희씨와 연락이 가능하다는 것을 국회가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김현희씨는 사건 발생 25주기를 맞아 가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도 “국회가 부르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부르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가짜’가 아니라는 증거가 넘쳐남에도
두 기사를 인용한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이 흘러도 그의 고단한 삶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집을 나와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일부 세력의 ‘김현희 가짜몰이’ 후 이명박, 박근혜 두 보수 정권이 출현했지만 바뀐 상황은 아무것도 없다. 사건 30주기를 맞아 11월 7일 있었던 그와의 인터뷰는 이런 우울함으로 시작했다.
― 혹시 올해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린 태영호 공사 인터뷰 보셨습니까.
“네, 봤어요.”
기자는 《월간조선》 2월호에서 태영호 공사를 인터뷰했다. 기사 제목은 〈북한 태영호 전 공사의 증언들 - ‘김현희 가짜설’을 반박하는 결정적 증언/“김현희 체류했던 오스트리아 정부 KAL 858기 폭파 사건 직후 북한 당국에 공식 항의”〉였다. 당시 태영호 공사는 북한 외무성 유럽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관련 질의응답이다.
〈— 나이도 같은데 학교 다닐 때 혹시 평양에서 김현희씨를 보지 못했나요.
“저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데 김현희는 북한에서 대남 공작대로 갔거든요. 그 이후에 KAL기 사건이 났고 김현희의 부모나 가족들은 다 사라졌죠.”
— 혹시 가족들이 살아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까.
“못 들어봤어요.”
— 그럼 김현희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KAL 858기 폭파 사건 후에 알게 됐군요.
“그렇죠. 제가 그 사건 당시 외무성 유럽국에 있었거든요. 김현희가 KAL기 폭파하기 전에 유럽을 거쳐서 갔는데 그때 오스트리아를 경유했죠. 그때 오스트리아 정부 당국이 김현희가 언제 오스트리아에 들어왔다가 언제 어떻게 해서 나갔다는 구체적인 정보와 자료를 입수해가지고 북한에 공식 항의했습니다.”
— 어떤 항의였습니까.
“‘왜 오스트리아를 북한 간첩 양성(養成)기지로 이용하느냐,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될 때는 외교적인 조치를 가하겠다’고 오스트리아 당국이 공식적으로 북한에 항의했죠. 물론 언론에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 김현희씨가 가짜라고 믿는 사람들한테는 태 공사의 증언이 아픈 증언이네요.
“김현희가 진짜냐, 가짜냐 하는 거는 인터폴에 그 자료가 다 있습니다. 인터폴에서 KAL기 사건 있은 다음에 자료를 조사해가지고, 김현희가 들어왔다 나갔다 한 나라들에서는 공식적으로 북한에다 항의하고 물밑에서는 상당한 그 외교적인 분쟁이 있었습니다. 제가 유럽국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잘 알죠.”〉
― 이렇게 김현희씨가 가짜가 아니라는 증거가 수없이 드러나는 데도 아직도 가짜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글쎄요. 올해가 30주년인데요, 30년이 됐는데도 아직도 북한은 사건 자체를 인정도 사과도 안 하고 있죠. 저에게는 우여곡절이 많은 30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2003년 노무현 정권 때 본격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저에 대한 ‘가짜몰이’를 했어요. 이거는 그냥 사건이 아니고 안보 문제거든요. 안보 문제인데 이것을 정치적인 문제로 끌고 가서 정치적으로 이용, 활용하려고 했고, 그것을 정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그런 세력(김현희씨가 가짜라는)이 있는 거죠. 저는 지금도 당시 KAL기 희생자 유족분들에게는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그런데 가짜가 아닌 저를 자꾸 가짜라고 하니 답답하죠. 그럼 정말 진짜는 어디에 있나요?”
문서 아닌 구두(口頭) 사과
― 2008년 “나는 법원의 3심, 국정원의 4심을 거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5심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한 탄원서, 항의서, 호소문을 관계 요로에 보낸 적이 있는데 그 뒤로 국정원의 사과 등 커다란 변화는 없었던 거죠.
“그때 제 편지가 언론에 공개되고 국정원에서 내부 조사팀을 만들었습니다. 당장 언론에 나오고 하니까 그래가지고 조사한다 하고, 2009년 3월 말에 저희를 직접 검사랑 조사팀이 찾아와서 이렇게 인정을 했습니다. ‘우리가 노무현 정권 때 국정원, 경찰, MBC, KBS, SBS, 정의구현사제단, 대책위, 시민단체 등 여럿이 다 연합해가지고 가짜 만들기 공작을 했다’고 인정을 했습니다.”
― 구두 시인이죠.
“네, 문서가 아니고 구두 시인하고 이거를 검찰에 넘겨서 처리하겠다고 하고는 계속 질질 끌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나 질질 끌다가 국정원은 잘못을 그렇게 인정하고도 자기네는 잘못이 없다고 살짝 빠졌어요. 자기들은 무혐의로 검찰에 넘겼나 봐요. 그러니깐 검찰에서는 수사도 안 했습니다. 그냥 내사로 무혐의 종결시켜 놨습니다. 완전 흐지부지해 놓은 거죠. 인정하고도 처리 안 하고 흐지부지해 놨습니다.”
― 이명박 정부였는데요.
“네, 이명박 정부는 안보 면에서는 그전 정부와 확연히 다를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검찰은 정말 수사 의지가 없었습니다. 한국의 정보기관에 의해 북한이 저지른 항공기 테러 사건을 뒤집고, 공작원인 저를 가짜로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뉴스로 알려진다면, 노무현 정부든 이명박 정부든 박근혜 정부든 국정원은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고, 살아남기 힘들 것이 자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국정원은 그냥 흐지부지 덮으려고만 했지 처리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처리를 안 하니깐 오늘날까지 그런 얘기(가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저를 가짜라며 시위하고 다니던 정의구현사제단 신부가 정부가 바뀌니깐 요 며칠 전부터 저를 ‘17세 이전 탈북자’로 확신한다며 다시 의혹 제기를 시작했습니다. 노무현 정권 때에는 KAL기 사건은 전두환의 조작이고, 저는 안기부 공작원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있습니다.”
― 공개적으로요.
“네, ‘통일뉴스’라는 인터넷 매체에다 제가 가짜라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뭐 적폐청산 한다고 야단이지만 사실 이 사건은 돈 몇 푼 받은 적폐가 아니잖아요. 이 문제는 나라의 운명과 관련되는 안보 문제거든요. 6·25전쟁 이후에 가장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항공기 테러 사건 아닙니까. 이런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저를 가짜로 만들고 북한이 저지른 테러라는 엄연한 사실을 뒤집으려 한 음모들은 정말 세계적으로 수치스러운 범죄거든요. 이전 정부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 안 했기 때문에 다시 그런 자들이 고개를 쳐든다고 생각합니다.”
― “김현희는 가짜다, 아니다”를 아주 간단히 증명할 수 있는 게 가짜라면 김현희씨가 남한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 그 긴 시간 동안 함께 지냈던 사람이 나타났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전혀 없었죠.
“네, 그런 일은 전혀 없었죠. 전혀 없었고 6·25전쟁 전에 어머니가 개성 분이니까 개성에 같이 계셨던 남한에 온 먼 친척들이 몇 분 계십니다. 그분들한테 어머니 어렸을 때 사진 받은 적은 있거든요. 그러니깐 제가 북한 사람이라는 게 사진도 나오고 그러지 않습니까.”
― MBC가 2013년 1월 15일 2003년 방송에서 ‘김현희 가짜 의혹’을 제기한 데 대해서 간접사과를 했는데 다른 방송사에서도 그런 제안들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MBC는 그렇게 특별 대담 프로를 마련해 주었고, 사과한다는 말도 했죠. 그런데 MBC 대담 프로에서는 사과를 했지만, 정작 저를 가짜로 몰아간 그 〈PD수첩〉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사과를 안 했습니다. 그리고 KBS, SBS 등 다른 방송사들의 사과 제안은 없었습니다.”
― 그럼 MBC의 2013년 방송을 사과로 받아들인 겁니까.
“자기네들이 국정원이 우리 집을 가르쳐줘서 습격을 하고 방송을 했지만 어쨌든 그것을 비판하는 자체 대담 프로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사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당시 〈마유미의 삶-김현희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대담 프로가 진행되었습니다.”
‘가짜몰이’ 책임 반드시 물어야 한다
― 지금 문재인 정부는 과거의 문제들에 대한 적폐청산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노무현 정부에서 ‘김현희 가짜몰이’를 한 것도 적폐청산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생각 안 하십니까.
“당연히 그렇지요. 근데 노무현 정권 때 자신들이 잘못한 것을 자신들이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네요. 노무현 정권 때는 정부 차원에서 이 문제를 활용했고 제가 진짜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걸 했습니다. 그때도 그런 세력들이 얘기하는 게 저보고 안기부 공작원이니깐 나와서 얘기하라고, 양심 선언하라고 계속 플래카드 들고 전국을 다니면서 데모를 했어요. 보수 정권으로 바뀌고 나서 제가 언론에 나와서 얘기를 하니깐 그때는 ‘왜 가만히 있을 것이지 밖으로 나오느냐’ 이랬습니다.”
―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이네요.
“네, 완전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했죠. 요새 적폐청산을 한다고 하는데 정말 본격적으로 적폐청산 하려면 자신들이 잘못한 것, 가짜몰이 한 것부터 사과하고 그리고 관련자 처벌도 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이렇게 정리를 해야만 지금 하고 있는 적폐청산 작업이 진짜 진정성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기네가 잘못한 적폐를 청산 안 하면 요즘 말하는 정치보복이 될 수 있죠. 사실 그 당시 노무현 정권 때 지금 문재인 대통령께서 비서실장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께서도 알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정부에서 정말 이런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데 대해서는 사과를 하고 제대로 정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 지금도 국정원에 대해서 당시 ‘가짜몰이’에 참여했던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을 계속 요구하는 중입니까.
“네,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면서 제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는 편지가 공개됐고 그 후에 기회될 때마다 방송에 나와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 보수 정권에서도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처리가 안 됐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 본격적으로 적폐청산 한다고 하고 있는데 이 문제도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지금 정부는 과거 노무현 정권과 성향이 비슷합니다. 노무현 정부 시기에 김현희 가짜 만들기가 가장 심했는데 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런 일이 다시 시작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나 불안은 없습니까.
“그 당시에는 당연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겠죠. 하나는 저에 대해 가짜 만들기를 해서 국내에서는 정치적으로 반대 세력에게 타격을 주고 그로 인한 내부적인 결속과 효과를 기대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북한 김정일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 이것을 활용했다고 생각합니다.”
―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이 KAL기 사건으로 인해서 북한은 테러지원국으로 지정이 됐고 그 당시 북한도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제재를 받으면서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동안 미국에다 KAL기 사건 이후에는 자신들이 테러를 한 적이 없으니깐 제발 해지해 달라고 애걸복걸했고 또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직접 미국에 가서 도와달라고 얘기를 했죠. 결국 20년8개월여 만인 2008년 10월에 북한은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가짜라면, 북한 입장에서는 테러지원국이 된 것이 얼마나 부당합니까. 북한이 테러지원국으로 20년 동안 참고 있었겠습니까.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되었을 때 북한은 이를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간접적으로 KAL기 테러를 인정한 셈이죠. 그런데도 의혹 제기자들은 이러한 북한의 태도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안 하고 그냥 힘없는 저 개인만 무참하게 삶을 짓밟아 놓고 가짜몰이를 하니 얼마나 한심하고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도 제가 증언을 해서 어느 정도 밝혀졌잖습니까. 제가 가짜라면 일본인이 북한에 납치된 사실들을 어떻게 낱낱이 열거할 수 있었을까요.”
가족 소식은 탈북자 등을 통해서 들어
― 지금도 혹시 2003년 공중파 3사의 의혹 제기가 본격화했을 때 느꼈던 신변의 위협을 느낍니까.
“그 당시 정부가 가짜몰이 할 때는 초기에 조직적으로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몇몇 출판사에서 제가 가짜라는 책들이 나오고 심지어 저를 가짜로 몬 일본 조총련하고 관련된 노다 미네오라는 사람이 쓴 책까지 출간됐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은 전국을 다니면서 기자회견하고 데모하면서 저를 가짜라고 재조사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심지어 저를 29만원에 수배하는 KAL기 진상규명대책위 명의의 수배 전단이 나돌기까지 했습니다. 국정원은 자꾸 이민 가라고 하고, 경찰은 경찰대로 타 지역으로 이사 가라고 종용했습니다. 저를 보호해야 할 국가 기관들이 앞장서서 그러더라고요. 그런 혼란스런 와중에 국정원에서는 MBC 방송에 출연하라고 자꾸 강요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결혼 이후 일체의 외부 활동을 끊고, 가정 생활에만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방송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국정원 담당자는 ‘이미 지휘부의 결정이 난 사항이다. 출연하라’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정보기관에서의 지시 사항을 거부하면 장차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미 민간인 신분인데도 저를 용서하지 않더군요. 그 이후부터 저에 대한 신변 위협은 노골화되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순간이 올 수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 국정원은 남편을 사는 곳과 멀리 떨어진 경기도 분당으로 불러냈었죠.
“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저의 남편은 국정원으로부터 분당의 한 식당으로 호출을 당했고, 그날 야밤에 저희 집에는 카메라를 멘 MBC 〈PD수첩〉 제작진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저로서는 애들을 데리고 야간 피신을 해야만 했습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제가 사는 곳을 국정원이 가르쳐줬더군요. 그렇게 해서 국정원이 결국 저를 쫓아낸 겁니다. 그렇게 쫓아낸 상태에서 MBC 방송에 출연할 것을 계속 요구했어요. 그런 행위는 국정원이 저를 지켜주는 기관이 아니라 우리 말 안 들으면 이렇게 죽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리고 제가 사는 집과 그 주변을 촬영하고 노출시켜 버렸습니다. MBC에 이어서 SBS도 거주지 주변을 공개했습니다. 저로서는 이민 가지 않은 혹독한 대가를 치른 거지요. 그리고 KBS는 2부작으로 대대적인 가짜몰이 방송을 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상파 방송 3사들의 이런 행위는 북한에다 저를 ‘어떻게 처리해 주세요’라고 주문이라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한영 사건도 집이 노출돼서 그 앞에서 살해당했잖아요. 그렇게 저희는 쫓겨나갔습니다. 국정원은 제가 어린 자식이 둘이나 있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예상을 했나 봐요. 하지만 쫓겨나서 지금까지 만 14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체포되어 한국에 온 30년 중 거의 절반은 도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임시 거처에서 불안정하고 긴장되고 궁핍된 생활을 해왔습니다. 저와 저의 가족들을 추방하려는 정부와 관련 기관들의 행위는 대한민국이 정말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맞는지 의심이 가게 합니다. 제게는 어떠한 인간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 집에는 언제 돌아가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직 해결이 안 됐으니 저도 모르겠습니다.”
― 자제분들에게는 아직 김현희가 누구다는 것을 얘기 안 했죠.
“예, 사건에 대한 것은 얘기를 아직 안 했습니다. 애들은 외가가 북한이다 정도는 알고 있지만, 엄마가 KAL기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저도 아직 애들에게 구체적인 사건 얘기는 안 했습니다. 언젠가는 얘기할 기회가 오겠지요.”
― 가족 얘기가 나온김에 여쭙겠습니다. 정보당국에 따르면 부친께서는 2004년, 모친께서는 2012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혹시 북한 가족들 소식을 따로 들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냥 뭐 가족들 얘기는 탈북자 등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 사건이 난 이후에 가족들이 바로 평양에서 추방돼서 고생했다더군요. 부모님은 돌아가셨다고 생각되고, 동생들은 북녘의 어느 하늘 아래서 당국의 감시받으면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무사히 살아 있기만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 지금도 사건 현장이라든지 30년 전 당시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릅니까.
“해마다 11월이 되면 마음이 무겁죠. 뉴스에 무슨 테러 사건이 보도되면 저도 가슴이 아프고 그 당시가 생각이 납니다. 특히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면 그때 상황을 재연해야만 하니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의 상황들 잊어버리고 싶지만…
― 괴롭기 때문에 그 상황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습니까.
“예, 사실은 그때 얘기를 하고 싶지 않고 저는 잊고 싶습니다만 근데 할 수 없지요. 강연이나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면 그때 상황을 세세한 부분까지 상기해야만 하니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많이 힘듭니다. 어쨌든 살아 있는 유일한 증인으로서 매번 증언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저를 살려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강연과 인터뷰 장소에서 저는 전두환 정권이 아닌 북한 정권이 KAL기를 폭파하였고, 저는 북한 공작원이었다고 틀림없이 말했습니다.”
― 담당 수사관이셨던 분과 결혼을 하셨는데 연애를 한 1년 정도 했죠.
“2년 정도 했습니다. (결혼) 승인이 안 떨어져서요.”
― 결혼 전에 국정원은 왜 수녀가 되길 권유했던 건가요.
“아, 그때는 안기부였죠. 뭐 꼭 수녀가 되라는 것보다는 안기부에서는 제가 한국 사회에서 정착 생활하는 방안을 계속 생각했나 봅니다. 그중의 하나가 수녀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수녀 생활은 정부 차원에서 관리하는 게 좀 쉬우니까 수녀도 하나의 방안에 넣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고 또 수녀가 되는 길이 결코 쉽지만은 않더군요. 제가 사회의 밀알이 되는 그 길을 선택하기에는 그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래도 당시 어떤 종교에 귀의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없었나요.
“그 당시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세직 안기부장이 저를 한번 보시더니 목사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목사님 통해서 성경 공부 했고 또 어려울 때 제가 많이 하나님에 의지했습니다. 재판받을 때도 그랬고요. 그때 많이 심적으로 힘들었거든요. 항상 기도하고 성경책 보면서 마음을 좀 다스렸습니다.”
― 지금도 교회를 다니나요.
“아닙니다. 현재 교회에 직접 나가지는 않고 방송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접합니다.”
― 집에 성경책은 있으신 거죠.
“당연히 있죠. 힘든 일이 있으면 자연적으로 읽게 되고 위안이 됩니다.”
― 한동안 방송 활동을 많이 하면서 혹시 주변 분들이 더 많이 알아봐서 불편해진 건 없었습니까.
“글쎄요. 제가 사는 임시 거처의 주변 분들은 아마 저를 알고 있을 겁니다. 그곳에 오래 있었으니까 알게 됐을 거고요, 2009년부터 방송에 다시 출연하면서 저를 알아보는 분들이 제법 있더군요.”
― 그런 것 때문에 불편하진 않으셨고요.
“불편한 적이 있었지요. 제가 가짜몰이를 당하고 있을 당시에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싸늘한 눈빛과 굳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곤 했어요. 그때 부정적인 미디어의 힘이 얼마나 큰지 피부로 느껴지더군요. 그러나 그 후 저의 투쟁 모습들에, 언론을 통해 제가 진짜임을 알게 된 사람들은 제게 동정과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가족들이 그리울 때
― 이런 질문 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 북에 계신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형제들이 떠오를 때는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야 뭐…. 저 때문에 고통을 받은 가족들을 생각하면 항상 미안하고… 걱정되고 그렇죠(눈물).”
― 죄송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요.
“특별한 계획이 있다기보다는요, 지난 정부가 가짜몰이를 하고 제집에서 쫓아낸 지 만 14년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정부는 언제까지 팔짱만 끼고 눈을 감고 있을 겁니까? 가짜몰이를 한 정부와 기관, 단체들은 적폐청산의 대상이 될 수 없나요? 이 일이 좀 제대로 정리됐으면 합니다. 그리고 현 정부로부터 사과와 그들의 처벌을 받아내고 싶습니다.”
― 90년 4월 사면 이후부터 수필이랑 수기집을 출간한 걸로 압니다. 그게 어떤 내용이었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때는 안기부에서 제가 사면을 받은 이후에 붙잡힌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 정착금도 없으니까 사회 나가서 생활하기 위한 밑거름이 됐으면 하는 차원에서 수기를 쓰라고 해서 수기를 썼습니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는 책 1, 2권에는 사건과 북한에서 살아온 생활을 썼고, 그다음에 쓴 《사랑을 느낄 때면 눈물을 흘립니다》는 제가 여기 와서 한 1, 2년 동안 강연 다니면서 느낀 점, 북한과 비교해서 느낀 점들을 썼어요. 다음으로는 《이은혜 그리고 다구치 야에코》를 썼죠. 제가 북한에서 일본에서 납치해 온 다구치 야에코와 같이 생활하던 때를 썼습니다. 그리고 또 일본 소설을 몇 권 번역했습니다. 미야모토 테루 작가의 소설책으로 《해안열차》 《사랑은 혜성처럼》 《이별의 시작》의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됐습니다.”
― 97년에 그 책들로 받은 인세 8억5000만원을 희생자 유족들에게 줬는데 혹시 주변의 강요 같은 게 있었던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수기책이 생각 외로 잘 팔려서 인세가 많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그 유족분들을 위해 뭔가 해드리고 싶은데 할 수 있던 것이 달리 없었습니다. 그냥 인세라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유족분들과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고, 그분들은 저의 인세를 받아주셨고, 한동안 눈물을 흘리시더니 잘살라고 격려까지 해주셨습니다. 저도 따라 울었습니다. 깊은 상처와 너무나 큰 죄를 지은 죄인인 제게 베푼 그분들의 따뜻한 배려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 KAL기 위령탑이 양재동 시민의 숲에 설치되어 있지요. 최근에 위령탑에 다녀온 적은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지난 10월 하순에 일본 모 방송국에서 KAL기 사건 30주년을 맞이하여 취재를 왔는데 그때 위령탑에 함께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돌아가신 분들의 존함이 비석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저 죄송하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 TV 시청은 많이 합니까.
“많이 하는 편이죠.”
― 외부 활동을 하기 어려우니까 자연스럽게 TV 시청 시간이 많은가 봅니다.
“네.”
그가 집을 나온 14년 전이나 기자와 인터뷰를 했던 8년 반 전이나 지금 그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고, 국정원의 공식 사과는 없었다. 그가 추억하는 행복한 아름다움이 유년 시절 본 아바나의 푸른 바다와 하늘이 아닌 대한민국의 바다와 산과 강과 하늘이 될 수는 없는 일일까.⊙
6하원칙으로 본 칼기사건, "누가 얼마나 이익 봤나?" 2018.01.22 통일뉴스
<기고> KAL858 사건 의혹 제기자 현준희
거짓말에는 2가지 색깔이 있다. 자기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거나 감추는 빨간 거짓말. 자기보다 공익, 국익을 위해 하는 하얀 거짓말.
1940년 2차세계대전 중 독일폭격기는 도버해협 건너 영국도시를 연일폭격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정보기관은 독일암호체계를 해독, 다음 차례는 군수도시 코벤트리임을 알았다. 하지만 독일군이 암호가 해독되었음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대피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코벤트리시 희생은 컸으나, 그 다음 런던공습시 더 많은 시민을 구할 수 있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킨 거다. 전후 처칠수상은 코벤트리시에 통절히 사과했다.
이렇게 정보기관은 하얀 거짓말이 본업이다.허나 우리정보기관은 대대로 정권안보를 위해 빨간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탄압했다.
▲ KAL858기 사건 발생 사흘만에 국가정보원 등은 '북괴 소행'으로 단정,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이용한 이른바 '무지개 공작'을 작성, 추진했음이 밝혀졌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대표적 사건이 1987.11.29 제13대 대선 18일 앞두고 일어난 김현희 칼기사건.
1988.1.15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는 88올림픽 방해를 위해 북한공작원 김현희가 폭파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물증 없이 김현희 진술에만 의존해, 엄청난 의혹을 초래, 안기부 발표문은 결국 누더기가 되고 말았다. 맞는 거라곤 틀린 것밖에 없는 발표문이었지만 시종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
‘초동수사시 다소 지엽말단적 실수가 있다해도 사건의 본질이 변한 게 아니다.’ 칼기사건의 본질은 ‘북한이 폭파한 것’이지만 김현희가 북한여자라는, 칼기가 폭파됐다는 물증은 하나도 없다. 지엽말단적 실수가 아니라 사건 전체가 송두리째 부인되는 것이다.
항공기 폭파사건의 수사전형은 먼저 피해기와 똑같은 모형의 틀(얼개)을 짠 후 사고지역에 뿌려진 수만개 기체잔해를 수거, 모형틀에 갖다 일일이 붙이는 퍼즐맞추기식으로 진행된다. 31년이나 지난 이 사건도 이해하기 쉽도록 기사작성의 필수인 ‘5w1h, 6하원칙’ 틀에 맞추어 봤다.
1. who(누가)
안기부는 북한의 2인조 특수정예공작원 김현희와 김승일이 칼기를 폭파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주범 김승일은 ‘장기간 해외공작활동을 해온 70세 특수공작원으로, 일어, 중국어, 영어, 노어 등 4개국에 능통한 전자기술 전문가’라고 했으나, 새빨간 거짓말. 김승일이 유럽, 중동 여정시 접촉했던 몇몇의 증언에 의하면 영어를 못했고, 일본어에만 반응. 거동을 보면 한쪽 다리를 저는 노인네로, 실제 바레인에서 음독자살한 시신을 부검해 보니, 위와 쓸개가 거의 절제돼 있고, 몸안이 결핵균에 감염된 상태. 국제정예공작원은 커녕, 171cm에 46kg 걸어다니는 시체에 불과했다.
김현희의 경우는 더 웃긴다. 안기부는, 미모와 좋은 성분에 아역배우를 했는가하면 중학교 1년 때인 72년 11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조절위에 참석한 우리측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증정했던 장본인이며, 김일성대학 1년을 수료한 재원으로, 7년 8개월간 사격술, 격술 등 대남공작원전문교육을 받았다했다.
그러나 화동(花童)은 김현희와 귀모양이 달라 안기부 발표가 거짓말로 들통났다.
그녀가 북한여자란 유일한 물증이 사라진 것이다. 좋다, 김현희의 미모는 인정하나 머리는 7푼이 박근혜 수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이라고 하거나 조국해방전쟁이란 명칭을 6.25전쟁이라는 등 그녀가 남긴,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수기), 진술서, 재판서류 등을 보면 북한여자가 아닌 증거가 수백 가지.
또한 안기부가 묘사한 어마무시한 테러리스트와도 딴판. 김현희는 90년 사면이후 1년에 100회 이상 반공강연, 신앙간증 다녔다. 어느날 칼기가족회 차옥정 회장은 마포구 한 교회에서 간증을 마치고 나오는 김현희를 갑자기 부둥켜 잡고 “네가 진짜 폭파범이냐? 바른대로 말하라”고 한바탕 뒹굴었다. 알려진 대로라면 남자 두세 명은 거뜬히 해치울 격술을 익혔고, 피부는 무쇠근육이라는데 실제는 힘 하나 못 쓰는 말랑말랑 아가씨.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테러사건에 투입된 어리버리 2인조, 북한은 또라이 국가인가?
2. when(언제) 3. where(어디서)
안기부는 김현희 2인조가 칼858기에 두고 내린 폭발물에 의해 1987.11.29 오후 2시5분쯤 버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공중폭발됐다고 발표했지만 폭파잔해나 115명 탑승객 시신, 유품 1점 나오지 않았다. 물증 없는 언제, 어디서는 아무 의미 없다. 실종사건일 뿐이다.
4. what(무엇)
115명을 태운 칼858기가 소실된 것. 이거 하나만 사실이다. 본래 칼858기는 2차례나 동체착륙한 사고이력으로 국내선을 뛰고 있었고, 이듬해 퇴역예정인 16년차 중고기. 버스도 처음엔 고속도로 장거리 뛰다 노후되면 지방 단거리 뛰는 게 일반적인데, 왜 국내선을 국제선으로 배치, 첫 출항시 당했는지 수상쩍다.
무릇 국제선이라면 여러 나라 사람이 타게 마련. 예컨대 83년 소련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된 칼 007기에는 미국 래리맥도날드 하원의원을 비롯 16개국 269명이 타고 있었다. 반면 칼858 승객 대부분은 귀국하는 중동노동자. 김현희의 증언에 의하면 외국인이 탄 비행기는 국제적으로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 노동자들만 탄 비행기를 노렸다한다. 그럼 미국 하원의원 같은 요인이 타고 있었다면 애시당초 일어날 수 없는 사건. 소름 돋는다.
지금도 미스터리인 것은 김현희가 폭파 한달전 북한에 있을 때, 858기 승객명단을 소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상 승객명단은 출발 하루나 이틀 전 확정되기 마련인데 어떻게 북한당국은 1달 전 살생부를 확보했단 말인가? 노동자우선 사회주의 북한 소행이라면 천벌받을 일이고, 반대로 안기부 소행이라면 생명에 관한 문제인 만큼 끝까지 밝혀야 할 것이다.
5. why(왜?)
88올림픽 방해 목적이라면 올림픽 임박하여 외국인, 요인 등이 탄 비행기를 노리는 것이 효과적. 당시 북한은 올림픽 남북한 공동개최를 위하여 스위스 로잔 IOC본부에서 남북협상 중이었고, 평양에선 올림픽 대비 경기장, 도로, 공항 등 인프라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익이 있다고 올림픽 개막 10달전 비행기 폭파? 그럼 내달 평창동계올림픽 때도 폭파테러하겠네. 이해할 수 없다.
6. how(어떻게)
▲ KAL858기 동체잔해라고 언론에 보도됐지만 폭파 흔적이 없었고, 나중에는 고물상에 넘겨졌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폭파됐다 하나 증거가 없다. 이는 대형 항공기사고 사상 초유의 일.
90년 3월 안다만에서 칼기 동체잔해(?)를 발견, 국과수 의뢰했으나 폭파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이때 안기부는 동체잔해가 칼858과 동일한 것인지는 의뢰하지 않은 꼼수를 부렸다.
실종사건을 폭파프레임에 가뒀고, 잔해는 고물상에 팔려나가 영영 사건 실종. 통탄할 일이다.
7. whom(누구에게) how much(얼마나 이익)
일본에서는 5w1h에 더하여 6w2h를 기업보고서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최종 누구에게 얼마만큼 이익이 생겼냐는 점으로, 영국의 전설적 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가 ‘사건의 범인은 반드시 이익을 보는 자’로 결론지은 점과 같은 맥락.
그럼 칼기폭파 사건으로 누가 얼마나 이익을 봤나? 에둘러갈 필요 없이 초대형 북풍으로 군사정권이 대선 승리를 거머쥐었다. 당시 김현희의 남자로 거론되는 면면을 보면,
- 전두환은 민주세력이 당선될 경우, 골로 가는데 친구 노태우가 돼, 기사회생.
- 노태우의 칼기사건 역할은 불분명하나 어쨌든 대통령이 됐다.
- 안기부 수사단장이었던 정형근은, 수사국장으로 승진, 국회의원으로 출세가도를 달렸고,
- 검찰총장이었던 김기춘은 법무부장관, 국회의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영화를 누렸으며,
- 당시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이던 박철언도 장관, 국회의원 다 해먹었다.
가만 보면 경상도 출신에다 보수집권여당 국회의원을 거친 실세.
살아있는 권력 앞에 칼기사건은 북한소행 천동설로 굳혀질 수밖에 없었다.
자, 이상 6w2h 중, 하나라도 온전한 거 있는가? 국민을 개돼지로 본 안기부와 거짓말쟁이 김현희에게 속은 유령사건일 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115명이 죽었다(폭파)는 증거가 없는 실종사건이라는 점. 실종자 가족들로선 주검을 확인, 정식 고별하지 않는 한 끝난 게 아니다. 세월호도 몇몇 시신 미수습자를 위해 많은 예산을 들여 찾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정부는 지금이라도 찾아나서야 한다.
마지막으로 김현희에게 당부한다. 더 이상 <TV조선> 등 종편에 나가 거짓말 말라. 대신 대한민국정부와 사법부에 대고, “나 칼기폭파범이 아니다. 내가 북한여자라는 증거 있으면 하나라도 내봐라”고, 재심청구 해야 한다. 바뀐 새 시대에 자신과 가족, 남북 7500만 겨레가 살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