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가는 전봉준 -안도현
산 너머 남촌에는 -김동환
사평역(沙平驛)에서-곽재구
사는 일 -나태주
승 무(僧舞) - 조지훈
거제도 둔덕골-유치환
새- 천상병
서 시(序詩)- 윤동주
귀천 (歸天) - 천상병
어머니의 총기- 고진하
어머니 1-정한모
어떤 출토(出土)-나희덕
다시 오는 봄 -도종환
농주 (農酒) -김용욱
사람이 위안이다 -박재화
저금 -시바타도요
너에게 -서혜진
그런 저녁 - 박제영
그대도 오늘 -이훤
묵혀둔 길을 열고 -옥경운
별 -정진규
별 -구석본
스며드는 것 -안도현
모과나무
건강한 슬픔- 강연호
풀 - 김재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방문객
동태 -박상화
산산조각-정호승
내일은 결혼식- 최정례
생각들/ 황병승(1970~2019)
불길한 저녁- 김사인
우화의 강- 마종기
노래- 김남주
쌀 한 톨 -이사랑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 김인자
오월- 안상학
아름다운 책- 공광규
감나무와 옻나무- 손남주
三代- 하종오
혼자 먹는 밥- 오인태
깡통- 곽재구
아기별이 뜨는구나- 허정분
부부 -함민복
부부 -문정희
서울로 가는 전봉준-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萬頃)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 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 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재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 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
귀를 기울이라
-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 (민음사, 1985)
...............................................
운명(殞命)/ 전봉준
時來天地皆同力 시래천지개동력
運去英雄不自謨 운거영웅부자모
愛民正義我無失 애민정의아무실...
愛國丹心谁有知 애국단심수유지
전봉준과 김개남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 사랑 정의 위한 길에 허물이 없었건만
나라를 위하는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 최현식 편저 『갑오농민혁명사』 (신아출판사, 1994)
............................................
산 너머 남촌에는 -김동환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 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영(嶺)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나
끊었다 이어 오는 가는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데.
<조선문단>(1927)-
사평역(沙平驛)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중앙일보>(1981)
사는 일 -나태주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낙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승 무(僧舞) -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 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문장>(1939)-
거제도 둔덕골-유치환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조(父祖)의 살으신 곳
적은 골 안 다가솟은 산방(山芳)산 비탈 알로
몇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 짜서 옷 입고
조약(造藥) 써서 병 고치고
그리하여 세상은
허구한 세월과 세대가 바뀌고 흘러갔건만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뒷산 산비탈모양
두고두고 행복된 바람이 한 번이나 불어왔던가
시방도 신농(神農) 적 베틀에 질쌈하고
바가지에 밥 먹고
갓난것 데불고 톡톡 털며 사는 칠촌 조카 젊은 과수며느리며
비록 갓망건은 벗었을망정
호연(浩然)한 기풍 속에 새끼 꼬며
시서(詩書)와 천하를 논하는 왕고못댁 왕고모부며
가난뱅이 살림살이 견디다간 뿌리치고
만주로 일본으로 뛰었던 큰집 젊은 종손이며
그러나 끝내 이들은 손발이 장기처럼 닳도록 여기 살아
마지막 누에가 고치 되듯 애석도 모르고
살아 생전 날세고 다니던 밭머리
부조의 묏가에 부조처럼 한결같이 묻히리니
아아 나도 나이 불혹(不惑)에 가까웠거늘
슬플 줄도 모르는 이 골짜기 부조의 하늘로 돌아와
일출이경(日出而耕) 하고 어질게 살다 죽으리.
-시집 <울릉도>(1947)-
새- 천상병
외롭게 살다가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이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 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사상계(1959) -
서 시(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귀천 (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창작과 비평>(1970)-
어머니의 총기- 고진하
영혼의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센 듯싶은
팔순의 어머니는
뜰의 잡풀을 뽑으시다가
마루의 먼지를 훔치시다가
손주와 함께 찬밥을 물에 말아 잡수시다가
먼 산을 넋을 놓고 바라보시다가
무슨 노여움도 없이
고만 죽어야지, 죽어야지
습관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이젠 섭섭지 않다.
치매에 걸린 세상은
죽음도 붕괴도 잊고 멈추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죽음의 속도로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마른 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시는
팔순 어머니의 총기(聰氣)!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1990)-
어머니 1-정한모
어머니
지금은 피골만이신
당신의 젖가슴
그러나 내가 물고 자란 젖꼭지만은
지금도 생명의 샘꼭지처럼
소담하고 눈부십니다.
어머니
내 한 뼘 손바닥 안에도 모자라는
당신의 앞가슴
그러나 나의 손자들의 가슴 모두 합쳐도
넓고 깊으신 당신의 가슴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머니
새다리같이 뼈만이신
당신의 두 다리
그러나 팔십 년 긴 역정(歷程)
강철의 다리로 걸어오시고
아직도 우리집 기둥으로 튼튼히 서 계십니다.
어머니!
-시집 <새벽>(1975)
어떤 출토(出土)-나희덕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사라진 손바닥>(2004)-
다시 오는 봄 도종환
햇빛이 너무 맑아 눈물 납니다
살아 있구나 느끼니 눈물 납니다
기러기 떼 열 지어 북으로 가고
길섶에 풀들도 돌아오는데
당신은 가고 그리움만 남아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 있구나 생각하니 눈물 납니다
농주 (農酒) 김용욱
풋풋하게 버무린 흙빛 바람
지게 너머 산등으로 내려 받아
문토전 (門土田) 사래에 기침소리 캐내는
파랑새 날개위로 어머니가 서 있다
허기진 쟁기 숨길이 거칠 때쯤
또아리 땀에 젖은 새참걸음 흥겨웁고
텁텁한 농주 한 모금 농심이 영글어
풍요로운 하늘이 사발 속에 웃고 있다
사람이 위안이다 박재화
살다보면
사람에 무너지는 날 있다
사람에 다치는 날 있다
그런 날엔
혼자서 산을 오른다
해거름까지 오른다
오르다보면
작은 묏새 무리 언덕을 넘나든다
그 서슬에 들찔레 흔들리고
개미떼 숨죽이는 것 보인다
그림자 없이 내려오는 숲속
순한 짐승들
어깨 비비는 소리 가득하여
사람에 무너지는 날에도
사람은 그립고
사람에 다치는 날에도
사람은 위안이다.
저금 시바타도요
난 말이지,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면
마음에 저금을 해 둬
쓸쓸할 때 그 걸 꺼내
기운을 차리지
너도 지금부터
모아두렴
연금보다
좋단다
너에게- 서혜진
내려놓으면 된다
구태여 네 마음을 괴롭히지 말거라
부는 바람이 예뻐
그 눈부심에 웃던 네가 아니었니
받아들이면 된다
지는 해를 깨우려 노력하지 말거라
너는 달빛에 더 아름답다.
그런 저녁 - 박제영
바람이 지나간 후에도 시누대가 저리 흔들립니다
새가 날아간 후에도 댓잎이 저리 흐느낍니다
내 생애 전부를 흔든 사람
내 생애 전부를 울린 사람
대숲 사이로 옛사랑이, 옛 문장이 스미어
붉은 노을로 번지는 그런 저녁이 있습니다
모처럼의 산책이라 시 한 수 읊은 것인데
그 사람이 누구냐고 도대체 옛사랑이 누구냐고
그 사람이 자기인 줄도 모르고
옛사랑이 자기인 줄도 모르고
노을 사이로 당신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지는
붉어도 좋은 그런 저녁이 있습니다.
그대도 오늘 - 이훤
무한히 낙담하고 자책하는 그대여
끝없이 자신의 쓸모를
자문하는 영혼이여
고갤 들어라
그대도 오늘
누군가에게 위로였다.
묵혀둔 길을 열고 - 옥경운
손을 내미는 것도
그 손을 잡는 것도
길이된다.
그렇게 다가와
말없이 내미는
네 손이 길이 되어
우리는 마침내
서로의 꽃이 된다.
옛날의 우리로 다시
돌아가 묵혀둔 길을 열고
별 -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별 - 구석본
멀리 있는 것은 빛난다.
멀면 멀수록
그 빛은 영롱하다.
이승의 몸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그대.
스며드는 것- 안 도 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바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끄고 잘 시간이야..
모과나무
모과나무가 한사코 서서 비를 맞는다
빗물이 어깨를 적시고 팔뚝을 적시고 아랫도리까지
번들거리며 흘러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비를 맞는다. 모과나무
저놈이 도대체 왜 저러나?
갈아입을 팬티도 없는 것이 무얼 믿고 저러나?
나는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모과나무, 그가 가늘디가는 가지 끝으로
푸른 모과 몇 개를 움켜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끝까지, 바로 그것, 그 푸른 것만 아니었다면
그도 벌써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왔을 것이다.
건강한 슬픔- 강연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애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풀 - 김재진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 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히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동태 박상화
동태는 강자였다 콘크리트 바닥에 메다꽂아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동태를 다루려면 도끼 같은 칼이어야만 했다
아름드리나무 밑둥을 통째로 자른 도마여야 했다
실패하면 손가락 하나 정도는 각오해야 했다
얼음 배긴 것들은 힘이 세다
물렁물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한때 명태였을지라도,
몰려다니지 않으면 살지 못하던 겁쟁이였더라도
뜬 눈 감지 못하는 동태가 된 지금은
다르다
길바닥에 놓여진 어머니의 삶을
단속반원이 걷어차는 순간
그놈 머리통을 시원하게 후려갈긴 건
단연 동태였다.
산산조각-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 시집『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2004)
내일은 결혼식- 최정례
신발을 나란히 벗어놓으면
한 짝은 엎어져 딴 생각을 한다
별들의 뒤에서 어둠을 지키다
번쩍 스쳐 지나는 번개처럼
축제의 유리잔 부딪치다
가느다란 실금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트는 것처럼
여행 계획을 세우고 예약을 하고 짐을 싸고 나면
병이 나거나 여권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가기 싫은 마음이
가고 싶은 마음을 끌어안고서
태풍이 온다
태풍이 오고야 만다.
고요하게 자기 눈 속에 난폭함을
숨겨두고
내일은 결혼식인데 하필 오늘
결혼하기 싫은 마음이 고개를 쳐드는 것처럼
- 2017 현대문학상 수상시집(현대문학, 2017)
생각들/ 황병승(1970~2019)
밤새도록 당신을 들락거리는 생각들
당신을 잠 못 들게 하는 생각들
당신의 천장을 쿵쿵거리는 생각들
당신을 미치게 하는 생각들
미쳐가는 당신을 조롱하는 생각들
당신을 침대에서 벌떡 일으키는 생각들
당신을 고무(鼓舞)시키는 생각들 순식간에
당신의 고무를 무화시키는 생각들
당신을 돌처럼 굳어가게 하는 생각들
당신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생각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을 무덤으로 만드는 생각들
무덤 속에서 당신의 머리칼을
손톱을 자라게 하는 생각들
죽어도 죽지 않는 생각들
관 속의 뼈들을 달그락거리게 하는 생각들
무덤이 파헤쳐지고 장대비가 쏟아져도
백 년 이백 년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생각들
당신의 텅 빈 해골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가차 없는 생각들
- 월간 《현대시》 2016년 3월호
불길한 저녁- 김사인
고등계 형사 같은 어둠 내리네.
남산 지하실 같은 어둠이 내리네.
그러면 그렇지 이 나라에
'요행은 없음'
명패를 붙이고 밤이 내리네.
유서대필 같은 비가 내리네.
죽음의 굿판을 걷자고 바람이 불자
공안부 검사 같은 자정이 오네
최후진술 같은 안개 깔리고
코스모스 길고 여린 모가지 흔들리네
별은 뜨지 않네.
불가항력의 졸음은 오고
집요한 회유같이 졸음은 오고
피처럼 식은땀이 끈적거리네.
슬프자, 실컷 슬퍼 버리자.
지자, 차라리
이기지 말아버리자.
-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
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이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 시집 『그 나라 하늘빛』(문학과지성사, 1991)
노래- 김남주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시집 『사랑의 무기』 (창작과비평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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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 톨 이사랑
긴긴 밤 잠도 안 오고
수행이나 해볼 요량으로
한 톨 한 톨 쌀을 세었다
오천삼백 개
어림잡아 이 정도면
밥 한 그릇은 되겠다
아침에 밥을 지었더니
넉넉히 한 그릇이다
별짓을 다 한다 싶다가도
한 톨 한 톨의 쌀이 모여
밥 한 그릇이 된다는 것을
낱알을 세어봄으로 깨달았다
수백억 별 중 하나가
푸른 별 지구라는데
수십억 인구 중
한 사람은 누구인가?
- 시집 『적막 한 채』 (다시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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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 김인자
첫 결혼기념일이 이혼기념일이 된 후배의 변은
걷잡을 수 없는 남편의 바람기가 원인이었단다
30년을 한 남자와 살고 있는 나도
실은 한 남자와 사는 게 아니다
영화나 소설처럼 호시탐탐 친구의 애인을 넘보고
선후배에게 추파를 던지고 이웃사내에게 침을 삼켰다
단언하지만 이런 외식이 없었다면
나야말로 일찍이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
결혼제도란,
한 여자가 한 남자만을 거래할 수 있도록 규정지어진
공소시효가 불분명한 합법을 가장한 희대의 불법 사기극
나는 달콤한 미끼에 걸려든 망둥어, 위장취업자, 아니 불법체류자,
결혼이라는 기업에 청춘의 이력서를 쓰고
정규직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상근봉사자,
가문의 대소사엔 대를 이은 비정규직 노동자,
자식에겐 만료가 없는 무보수 근로자,
이런 근로조건에서 이 정도 바람 없기를 바란다면
인간이 아닌 건 내가 아니라 후배일 터,
나는 삼류영화,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봤고
후배는 너무 오래 교과서만을 탐닉한 결과다
- 계간⟪리토피아⟫200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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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안상학
흰 꽃 많은 오월
이팝나무, 불두화, 아카시아, 찔레꽃
인디언 아라파호족은 이런 오월을
오래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이라고 불렀습니다
푸르기만 하던 나의 오월도
살면서
오래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로 바뀌었습니다
하필 5·18 기념일에 돌아가신 아버지,
임병호, 박영근 시인, 권정생, 박경리 선생,
달력에 치는 동그라미가 하나둘 늘어났습니다
올해는 또 한사람이 돌아가셨습니다.
5·18은 이제 어느 달력에나 있으니 안심하지만
내년 달력이 생기면
5월 23일에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려야겠습니다
오래 지날수록 더 그리워질 사람들의 오월
흰 꽃송이 더미더미 조문하는 오월입니다
ㅡ 시집『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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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 공광규
어느 해 나는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읽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에서
책상이 아니라 식당에서 등산로에서 영화관에서 노래방에서 찻집에서
잡지 같은 사람을
소설 같은 사람을
시집 같은 사람을
한 장 한 장 맛있게 넘겼다
아름다운 표지와 내용을 가진 책이었다
체온이 묻어나는 책장을
눈으로 읽고
혀로 넘기고
두 발로 밑줄을 그었다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최고의 독서는 경전이나 명작이 아닐 것이다
사람, 참 아름다운 책 한 권
- 계간《문학나무》 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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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와 옻나무- 손남주
밭둑위에 감나무들이 서있고
그 아래, 문지기처럼 두어 그루 옻나무가
어둑하게 버티고 있는 산골마을.
천둥소리 같은 포성이 들려오는 먼 하늘로
감나무들은 멍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치열한 낙동강 최후의 전선에서
어린 학도병들이 수없이 쓰러져갈 때도
이곳 산골마을 감나무의 감은 발갛게 익어갔다
풋감의 유혹에 소년은 날마다 감나무 등줄기를 오르내리고
옻나무는 퍼렇게 약 오른 손으로 그의 종아리를 휘어잡았다
소문대로 올 것이 왔다
20여 가구가 사는 이 마을에
- 의용군 2명 차출- 대상자 4명은
이장 댁 마당에서 제비를 뽑았다
도끼눈으로 째려보던 인민위원회 서기는
나를 제비뽑기에서 제외시켰다
“옻이 올라 뚱뚱 부은 장딴지로
엉금엉금 기는 놈은 성전 참가자격이 없다”고 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해간 내 운명은
감나무와 옻나무 사이에서 묵계처럼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남은 세 사람 중
읍내 중학교를 다니던 친구는 x를 짚었고
o를 짚은 건, 이상하게도 둘 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불운한 친구였다
그들은 그날 밤 일선으로 끌려갔다
전세 불리하던 인민군들이 후퇴하기 시작할 무렵
Z기 기총소사로 대오가 흐트러지는 틈을 타서
한 친구는 용케도 빠져 돌아왔지만
기약 없는 60여 년이 흘러간 지금까지, 한 친구는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영영 무소식이다
아찔하게 피해간 내 요행 뒤에는
언제나 나대신 그가 갔다는 죄책감이
평생을 가슴 한켠에 숨었다가
그 친구의 수굿한 얼굴과 함께 문득문득 살아나곤 한다
지난여름 모처럼 찾아가 둘러본 고향,
감나무와 옻나무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누군가의 별장이 들어서서
기나긴 세월을 깔고 앉아 뭉개고 있었다
- 동인지 《餘白集》26호 (여백문학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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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代- 하종오
그의 아버지는 국방군에 징집되어
서울 수복에 나가며 그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살아서 돌아올게요
정말로 인민군하고 육박전하고도 살아서 돌아와
고향에서 새로 초가집 짓고 감나무 심고 그를 낳았다
이제 전쟁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이십여 년 후,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그는 파병군에 지원하여
베트남 전에 나가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돈벌어 살아서 돌아올게요
정말로 그는 베트콩과 맞총질하고도 살아서 돌아와
모아온 봉급으로 장가들고
서울로 가 공장 다니며 아들을 낳았다
이제 아들만은 전쟁에 안 나갈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십여 년 후 어느 날,
대학생이 된 그의 아들이 군대 가게 된 날
그와 그의 아내가 먼저 말했다
너무 잘 하지도 말고 너무 못 하지도 말고 몸만 성해라
어김없이 군인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어디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여
오직 죽거나 죽이러 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 시집 『반대쪽 천국』 (문학동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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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먹는 밥- 오인태
찬밥 한 덩어리도
뻘건 희망 한 조각씩
척척 걸쳐 뜨겁게
나눠먹던 때가 있었다
채 채워지기도 전에
짐짓 부른 체 서로 먼저
숟가락을 양보하며
남의 입에 들어가는 밥에
내 배가 불러지며
힘이 솟던 때가 있었다
밥을 같이 한다는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
이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누구도 삶을 같이 하려 하지 않는다
나눌 희망도, 서로
힘 돋워 함께 할 삶도 없이
단지 배만 채우기 위해
혼자 밥 먹는 세상
밥맛 없다
참, 살맛 없다
- 시집『혼자 먹는 밥』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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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 곽재구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 시집『서울 세노야』(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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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별이 뜨는구나- 허정분
무슨 소용이겠냐 애기야,
네가 하늘나라 천사로 떠난 지 오늘로 49일이란다
보고 싶고 보고 싶어 시도 때도 없이 흘린 눈물
아직도 내 등에는 네가 업혀있는데
야속한 시간은 속절없구나
부질없어 넋 놓은 할미 대신 너의 외할머니
가엾은 어린 영혼 극락세계에 들라고
큰돈 내놓으시고 부처님 앞에서 사십구재를 모신다
봄꽃이 피었다 지고 지상에는 철쭉이 한창이다
너는 영원히 노란 민들레꽃처럼 웃는데
망자들 혼백 모신 절 마당에는 슬픔 같은 적막이
먼 먼 하늘나라 아기별을 배웅하는 상현달로 떠 있구나
몇 번이나 이 절로 너를 보러 오려나
이승의 관습이 망자에 대한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예우라면
개미 한 마리 죽여 본 일 없는 우리 아기
어여쁜 천사로 하늘을 날겠구나
우리 집 지붕 위에 조그만 여린 별 하나 뜨겠구나
부디 좋은 곳으로 잘 가거라
사랑하는 애기야
시집『아기별과 할미꽃』 (학이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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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 시집,『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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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 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 시집 『다산의 처녀』 (민음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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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Marradi 음악.... Innocence외 10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