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꿈꾸는 것처럼 허수경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정현종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너무 오랜 기다림 유하
여행 강기원
너를 만나러 가는길- 용해원
나무와 비- 이정하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김재진
사는 일 -나태주
봄 길 -정호승
별은 너에게로- 박노해
구부러진 길- 이진관
늘 혹은 때때로 -조병화
염소의 저녁 -안도현
돌아오는 길 -나태주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겨울 사랑
파안 -고재종
그리운 나무 -정희성
우주의 틈새 -허형만
순천만 노을 -김철중
유등 연못 -민병도
버마재비 사랑 -복효근
‘따로국밥’에 대해서 찬(讚)하다 .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이사 -박영근
대지의 인간 -백무산
깊은 물 -도종환
나무의 시 -류시화
숲 -정희성
흔적 -김윤배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그래도 봄을 믿어봐 -김형영
매립지 생태 -김명이
출항 -김명이
숲의 정거장 -곽효환
재혼 서류 -박종인
지구의 이중장부
분석심리연구소
홍길동을 낳은 봄
부채의 원칙
계구우후의 논리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척 -윤준경
사막에서 잠들다 -안차애
기억을 찾습니다 -전영미
총잡이 -이동호
레드퀸 효과(RED QUEEN EFFECT) *-전인식
공수 해변 -손순미
요리사와 단식가 -장정일
시절, 불빛 -이승희
첫딸 -백기완
주름 잡던 시절 -임창아
고래 울음 -송재학
어머니의 새벽 -권순자
국수 -백석
여승
여우난 곬족
가즈랑집
모닥불
山 宿
許 俊
누워있는 부처- 김광규
마치 꿈꾸는 것처럼 허수경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정현종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너무 오랜 기다림 유하
강가에 앉아 그리움이 저물도록 그대를 기다렸네
그리움이 마침내 강물과 몸을 바꿀 때까지도
난 움직일 수 없었네
바람 한 올, 잎새 하나에도 주술이 깃들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은 모두 그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매순간 반딧불 같은 죽음이 오고
멎을 듯한 마음이 지나갔네
기다림, 그 별빛처럼 버려지는 고통에 눈멀어
나 그대를 기다렸네
여행 강기원
네게로 가는 길이 너무 많아
나는 모든 길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어리둥절한 우체통을
길 가운데 세워놓는다
나침반과 시계를
하늘에 단다
눈먼 새 앉아 있는
풍향계는 무풍지대에 놓기로 한다
철길 건널목의 차단기 내려지고
철로의 경고음 울려도
지나가는 기차 한 대 없다
내 안의 물고기를 세워놓고
나는 옆으로 눕는다
긴 여행이 될 것이다
너를 만나러 가는길- 용해원
나의 삶에서 너를 만남이 행복하다
내 가슴에 새겨진 너의 흔적들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질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나의 삶의 길은 언제나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리움을 수 놓는 길
이 길은 내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도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길이다.
이 지상에서
내가 만난 가장 행복한 길
늘 가고 싶은 길은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나무와 비- 이정하
오랜 가뭄 속에서도 메말라 죽지 않은 것은
바로 너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수많은 나뭇가지와 잎새를 떨궈내면서도
근근히 목숨줄을 이어가는 것은
언젠가 네가 반드시 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대여,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껍데기가 벗겨지고 목줄기가 타는 불볕 속에서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도 가시지 않은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이 자리에 서 있다.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김재진
나 몰래 집 나간
내 마음 돌아오지 않고
남의 마음만 바람 불어 심란한 날
길 위에 앉아 길 끝을 본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원래의 그 자리
너 없던 그 평온하던 자리로 돌아가야지
나의 전쟁은
내 마음속으로
네가 들어온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너에게 쫓겨난 내 마음
집 나가고 돌아오지 않는다
불에 덴 사람이 불에 놀라듯
네 이름 석자에도 놀라는 나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만 아무도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사는 일 나태주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 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봄 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별은 너에게로- 박노해
어두운 길을 걷다가
빛나는 별 하나 없다고
절망하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구름 때문이 아니다
불운 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네가 본 별들은
수억 광년 전에 출발한 빛
길 없는 어둠을 걷다가
별의 지도마저 없다고
주저앉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지금
간절하게 길을 찾는 너에게로
빛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니
구부러진 길- 이진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드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같은 사람이 나는 좋다
늘 혹은 때때로 조병화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내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 노을인가
염소의 저녁 안도현
할머니가 말뚝에 매어 놓은 염소를 모시러 간다.
햇빛이 염소 꼬랑지에 매달려
짧아지는 저녁
제 뿔로 하루 종일 들이받아서
하늘이 붉게 멍든 거라고
염소는 앞다리에 한 번 더 힘을 준다
그러자 등 굽은 할머니 아랫배 쪽에
어둠의 주름이 깊어진다.
할머니가 잡고 있는 따뜻한 줄이 식기 전에
뿔 없는 할머니를 모시고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염소는 생각한다
돌아오는 길 나태주
점심 모임을 갖고 돌아오면서
짬짬이 시간
돌아오는 길에 들러본 집이 좋았고
만난 사람은 더 좋았다
혼자서 오래 산 사람
오래 살았지만 외로움을 잘 챙겼고
그러므로 따뜻함을 잃지 않은 사람
마주 앉아 마신 향기로운 차가 좋았고
서로 웃으며 나눈 이야기는 더욱 좋았다
우리네 일생도 그렇게
끝자락이 더 좋았다고 향기로웠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겨울 사랑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파안 고재종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 원 내 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받았네그려!
그리운 나무 정희성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우주의 틈새 허형만
나무초리 끝에서 명지바람 수십 필 차랑차랑 펄럭이는
서러운 갈대가 쓸쓸한 갈대 어깨에 기대어 함께 먼 하늘을 바라보는
들판에 다다른 태양이 비췻벷 창공을 한 짐 가득 부리고 있는
화선지 같은 대지에 말랑말랑한 꽃물이 시나브로 번져 스며드는
살아온 날이 아득해 지평선 적막의 그늘이 소리없이 떨려오는
순천만 노을 김철중
마음이 허수할 때면
순천만에 가 서 보라
누군가 너를 위해
손 모으고 있다는 것을
마음이 외로울 때면
서걱대는 갈대숲에 안겨보라
누군가 너의 체온 그리며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질펀한 개펄은
숭숭 뚫인 구멍마다
사무치는 그리움
게거품 토해 내는데
심상尋常한 바람결
여름내 서성이더니
이제는 조용히 물러나
해오라기처럼 묵상하는 시간
부평초갈이 등등
긴 여정 뗘내려온 강물은
섟가에 앉아
고운 놀 바라보며
봉숭아 꽃물 들이고 있다
유등 연못 민병도
연꽃도 우는구나 남몰래 우는구나
무시로 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고
바람에 등을 기댄채 빈 하늘만 닦는구나
생각느니, 처음부터 잘못된 길이었음에
저를 속인 거짓말이 물밑에서 드러나고
세상을 저울질하던 그 오만도 씻는구나
절반을 물에 묻고도 목이 마른 사랑이여
별을 따라 가거나
무지개를 따라가서
퍼렇게 멍이 든 채로 절룩이며 오는가
사람들도 우는구나 연못에 와 우는구나
젊어 한때 풍진 세상 구름으로 떠돌다가
돌아와 저를 붙잡고 소리죽여 우는구나.
버마재비 사랑 복효근
교미가 끝나자
방금까지 사랑을 나누던
수컷을 아삭아삭 씹어 먹는 자손만대 이어갈 뱃속의
암버마재비를 본 적이 있다
개개비 둥지에 알을 낳고 사라져버리는
뻐꾸기의 나라에선 모르리라
섹스를 사랑이라 번역하는 나라에선 모르리라
한 해에도 몇 백 명의 아이를
해외에 입양시키는 나라에선 모르리라
자손만대 이어갈 뱃속의
수많은 새끼들을 위하여
남편의 송장까지를 씹어 먹어야 하는
아내의 별난 입덧을 위하여
기꺼이 먹혀주는 버마재비의 사랑
그 유물론적 사랑을
‘따로국밥’에 대해서 찬(讚)하다 .
국밥 먹기란 얼마나 성급한 사랑인가?
선 채로 먹건 앉아서 먹건
맵고 뜨거움에 숨을 몰아쉬면서
연기 맛 같은 현실과 꿈, 나와 너, 또는 지나온 곳과 가야 할 곳까지 말아서 후딱 해치우느니
(이하석)
삭둑 삭둑 잘려진 백년해로 맹세를
싸잡아 무쇠 가마에 태워
북 치고 장구 치고 춤추고 노래하여 피운
한 송이 블랙홀이여
(권순학),
앞산 진달래 봄을 푼다
대덕식당 따로국밥
해장술에 취해
그 아침 개나리 목련 다 불러내어
불큰하니, 능선 따라 가슴 속 한(恨)을 푼다
(김동원)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 陶淵明 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1941)
이사 박영근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 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 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데서 불러온 아이 적 서툰 노래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원추리는 그 주홍빛 꽃을 터트릴 것이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 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그렇게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별일도 다 있지, 그는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내뱉고 부르면서
강물은 숨쉬는가
2
그 낡은 집을 나와 나는 밤거리를 걷는다
저기 봐라, 흘러 넘치는 광고 불빛과
여자들과
경쾌한 노래
막 옷을 갈아입은 성장한 마네킹들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다
생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도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트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줏잔을 흔들면서 몇 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
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대지의 인간 백무산
자신의 나라에서 우리는 자주 난민이었다
자신의 나라에서 우리는 자주 불법체류자였다
자신의 나라에서 우리는 자주 보트피플이었다
젊었을 때 그것은 젊은 날의
고독한 낭만적 비애인 줄 알았다
우리의 노동이 부족해서인 줄 알았다
애국심이 모자라서인 줄 알았다
불우한 민족의 슬픔인 줄 알았다
하지만 피땀을 쏟아내도 우리는 언제까지나
정상 국민이 될 수 없었다
우리의 배경으로는 정규 시민이 될 수 없었다
우리의 신분은 종종 계약 해지된 상태였다(……)
그러나 나쁘지 않다
우리를 받아들였다면 우리 모두 국토에 길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대지의 인간이길 원한다
(부분. 『폐허를 인양하다』. 창비. 2015)
깊은 물 도종환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나무의 시 류시화-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해질녁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에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 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해질녘 너의 그림자가 그 나무에 가 닿을 때
넌 비로소 나무에 대해 말해야지
그러나 언제나 삶에 대해 말해야지
그 어떤 것도 말고
숲 정희성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흔적 김윤배
내 가슴 그토록 출렁이며 흐르던 강줄기는
거대한 강의 흔적 적소로 남겼다
나는 소금 적소에 갇혀
생의 황무한 소멸 울었다
상실이란 그런 것이다
오랜 흐름을 멈추며
아프지 않았을 강물은 없어
울음은 폐허의 가슴에 소금꽃으로 솟아오른다
소금꽃은 수십 킬로씩 이어져
그 아픔 얼마나 지독했었는지 말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몽골 소금강의
흔적은 네가 나를 건너간
희미해진 상처였지만 기어이
가슴 치고 지나는 강물 소리 듣는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김윤배
소금밭으로 변한 호수 위에 내가 섰다
수심 깊이 숨어 있던 그리움들의
부활, 너와 나를 종단하던 시간이
순장의 수수만년을 기다려
수정의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현장
흰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한 시간 속에
네가 없다 소멸 위에 꽃 핀
참혹한 시간이 있을 뿐
대지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려
네게로 가는 길을 냈을 거다
시간이 작은 수정의 모습으로 부활하기를
기다렸던 거다 기다림이란 저런 거다
죽은 시간 위에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하는 사랑
나는 지금 그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그래도 봄을 믿어봐 김형영
머지않아 닥칠지 몰라.
봄이 왔는데도 꽃은 피지 않고
새들은 목이 아프다며
지구 밖으로 날아갈지 몰라.
강에는 썩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들은 누워서 떠다닐지 몰라.
나무는 선 채로 말라 죽어
지구에는 죽은 것들이 판을 치고
이러다간
이러다간
봄은 영영 입을 다물지 몰라.
생명은 죽어서 태어나고
지구는 죽은 것들로 가득할지 몰라.
그래도 봄을 믿어봐.
매립지 생태 김명이
질퍽질퍽 갯벌이 운다
불도저는 괴물처럼 무섭게 질주해오고
닥치는 대로 마구 먹고 토해낸다
아우성치는 어린 치어들
꼬시락, 망둥어, 장어새끼
쫓기고 쫓길 때
재갈매기는 배를 불린다
살아보려는 본능
분노의 몸부림일까
집게와 방게 반장게까지
거품을 물며 이빨을 갈고 있다
그들의 터전은 사라지고 있다
불도저가 미는 대로
배설물은 무덕무덕 쌓이고
더 이상 그들은 갈 곳이 없다
약육강식이 세상이치인 것을
눈물을 펑펑 쏟으며 갯벌이 운다
출항 김명이
엄마,그물 걷으로 갈끼가?
그래 가야할낀데 되게 춥네
우왕좌왕
갈피 못 잡는 갈매기 날갯짓 보아라
높새바람 어디쯤 오는지
바다에 핀 하얀 메밀꽃
뱃머리에도 무더기무더기 피더니
밤새 내린 실비에 다 녹았네
엄마, 지금 나가모 해질 때라야 오겠제?
아들은 걱정스럽게 물음에
그래 아무래도 어두워져야 올끼다
제발 날궂이 바람 불지 말아야 할긴데
출항준비에 바쁜 하루
그물코에 꿰인 햇살 싣고 달려가는 괭이바다
검푸른 물이랑 따라
노 끝에 은갈치가 툼벙툼벙 칼춤을 춘다
숲의 정거장 곽효환
사람들 드문드문 들고 나는
호젓한 시골마을 간이역 철길을 이어
백두대간 숲 속 깊은 곳에
작은 역 하나 더 지어야겠다
간이역과 간이역을 잇는 기차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오고가게 해야겠다
비자나무 가죽나무 굴참나무 측백나무 팔 벌리고
작은 짐승들 새들 벌레들 분주함 가득한
숲의 정거장엔
철커덕 철커덕 쉼 없이 달려왔을 기차도
같이 온 바람도 잠시 숨 고르리라
플랫폼에 이어진 호젓한 오솔길 따라
나란히 흐르는 계곡물에 발 담갔다가
단청 고운 절집 탱화아래 앉아
잠시 먼 산에 한눈팔아도 좋겠다
세상의 시간과 일상이 한동안 멈춰
몸 부리고 쉬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작은 역 하나 숲의 양식대로 지어야겠다
빛바랜 회색 기와집 아래 의상실과 세탁소
슬레이트 지붕집엔 전파사와 분식집
붉은 벽돌집에 포목점과 연쇄점
그리고 방앗간이 더러는 정겹게
더러는 힘겹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 간이역
한때는 열차들 분주히 들고 나고
수많은 사람들 멈추고 떠나며
흥성하게 장도 이루었을 텐데
그 기억과 시간이 떠난 자리에
숲의 정거장에 넘치게 붐비는
느림을 멈춤을 고요를 실어다
고루 나누어 줘야겠다
두 역을 오가는 기차의 차장을 해야 할 지
두 역 중 어느 역의 역장을 맡아야 할 지
고민은 초록과 함께 깊어간다
재혼 서류 빅종인
아이가 구겨져서 서류봉투에 들어간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끅끅 봉투에서 흘러나오고,
자꾸만 벌어지는 봉투의 출입구를 양복 입은 남자가 유리 테이프로 봉한다
아이는 풍선처럼 부풀려지고 밑줄까지 그어져 친아빠에게 배달된다
인지 값으로 아빠의 재산이 남자에게 건너가고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행복했던 시절들과 인사를 나눈다
그림일기 같던 다정한 친구와 엄마의 모습이 아이 머릿속에서 흐릿해진다
그림일기가 일기로 변할 무렵
서류가 된 아이가 엄마에게 다시 전달되어 읽힌다
두 번째 서류로 양복 입은 남자가 엄마를 감금 폭행하고
남자의 속마음이 편지처럼 낭독된다
“이번에도 제대로 답장을 쓰지 않으면 다시는
편지를 못 쓸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
친아빠의 민첩한 행동이 엄마의 가슴팍에 쓰인다
백지 같이 하얘진 아이 편지지에 엄마는 다시 편지를 쓰고
혼란스런 아이는 다시 서류가 되어 날아가고
밑줄을 쳐가며 공부할 수 있게 되면서 아이는,
자주 어른들 사이에서 요점 정리되고
그런 어른들이 아이는 책가방 같고,
집은 가방 속에 든 필통처럼
소란스러운 곳이 될 것이다
지구의 이중장부
70억 밥줄 에너지 저장창고, 세상에서 가장 큰 공장이 지금 가동 중이다
매년 천오백억 톤 당분의 생산을 맡은 암실에서 녹색식물을 위해 수백 가지 맛을 선보이는 어머니 사계절 맛이 다르다
차츰 어머니의 미각이 변해간다
자식들은 스프레이를 뿌리고 무스를 바르고 매연을 뿜어대며 질주한다 과속에 길들여진 쇳덩이들 고속으로 빌딩이 치솟고 도시는 광란의 열기로 달아오른다 문명이라는 명목으로 흑자를 가장한 적자를 산출하고, 빙산이 녹고 유빙이 늘어난다 숲이 삭제되고 하늘은 구멍이 나고
면역은 약화되어 혈압은 올라가고 맥박은 느리다 녹색식물 공장을 구해보려 적자를 흑자로 자신의 몸을 이중장부로 약 대신 쓰는 지구, 결국 목숨을 담보삼아 몸을 호루라기처럼 분다
분석심리연구소
밥솥과 뚜껑은 천생연분
어디든 밥솥은 무거운 뚜껑을 이고 다닌다
놀라운 집착이다
뚜껑이 잠시 자리를 비우면 안절부절
밥솥은 기어이 뚜껑을 찾아 쓴다
하소연하며 칙칙 울어도
고압의 사랑으로 압력을 높인다
뚜껑과 밥솥은 다르지만
기능은 같다
내가 먹는 밥은
사랑과 집착으로 지은 것이다
집착은 누룽지의 형태로 눌어붙고
도망치고 싶은 설익은 사랑은 입안을 맴돈다
아침은 저녁의 뚜껑
아침을 따면 반드시 저녁이 딸려온다
전혀 다른 흑백은 한 벌의 몸이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듯이
분석하면 모두 같은 성분이다
홍길동을 낳은 봄
봄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출몰해서 세상을 확 뒤집어 놓지
귀신도 따돌리는 축지법에 나무들은 철을 잊고 꽃을 토하기도 하지
거센 바람의 권법에 모가지를 내밀거나 잘리기도 하지
공중이 어지럽고 들판에 흙바람이 부는 것은
모두 계절의 전조증상이야
한판 뒤집어엎겠다고 그가 오는 게지
그 많은 꽃잎을 일시에 담아가는 것도
꽃을 모르는 음지의 나라에 거저 주려는 것이야
그 나라에선 꽃이 희망이거든
어젯밤 비를 부른 것도
동백의 목을 칼로 내려친 것도
모두 놈의 짓이지
낙화를 이고 흘러가는 강물에
수많은 칼날의 흔적이 숨어있어
홍판서가 태몽을 꾸듯 봄은 내게로 왔지만
미처 키우기도 전에 사산을 했어
봄은 그렇게 낙태를 경험하며 꽃을 피운대
수많은 겨울의 목을 치고
비로소 봄이 되는 거래
음지에서 태어나 빛을 수혈하고 싶은
길동이처럼, 그렇게
부채의 원칙
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는 부모가 밀어 준 덕에 마돈나는 제 힘으로 부자가 되었다
디카프리오는 부모에게 부채가 많고 마돈나는 부채가 없다
부모에게 부채가 많을수록 행운아다
세상은 넘치는 그의 행운을 부러워한다
부채가 없는 그녀는 한동안 불행했다
세상은 자수성가를 칭찬하지만
사막을 건너온 맨발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부채를 제공한 부모를 제하면
과도한 행운은 쉽게 사라진다
한동안의 불행은 부모를 제해도
용케 행운으로 지속된다
자식에게 대물림을 하는 유산은 합법적인 부채의 형식이다
받은 부채를 모두 탕진하는 순간,
또 다른 부채가 달려오고
부채의 형식은 돌변한다
계구우후의 논리
뒤로 걷는다는 것은 과거를 거스르듯 더 많은 것을 품어 안는 것 흘러간 역사를 껴안는다는 것 하늘을 마주 보며 더 많은 세상을 본다는 것
한 발을 뒤로 옮길 때마다 어제가 끼어들고 풍경이 한 아름 시야에 들어오고 구름이 빠른 행보로 이동해 내 안에 들어오고 역사의 아픔이 나를 차지하고 과거의 하늘, 5.18을 더듬고 젊고 어린 날을 거슬러 결국 자궁 속으로 생의 이전으로 태초로 달아나는 것들을 안아보는 것 깎아지른 절벽처럼 막아서는 것 저만큼 가 있던 정신이 퍼뜩 돌아오는 것 어쩌면 뒤로 걷는 것은 후진이 아닌가 뒤로 걷는 것은 퇴보가 아닌가 뒤로 걷는 것은 퇴화가 아닌가 뒤로 걷는 것은 앞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문득, 나와 마주치는 것들에게 뒤란 무엇일까?를 건네고 싶은 그런 어떤 것
공원 의자에 앉아 왜곡된 사건들에게 몸을 추스르다 흘끗 본 앞이 아닌 뒤는 어둡고 눅눅하다 그림자는 늘 바닥에 누워 발에 밟힌다
- 계간『시향』2013년 여름호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 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척 윤준경
못생긴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딜레마인데
나는 어떻게든 나를 감추고
털고 닦고 깎고 칠하며 척, 하고 산다
척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있는 척
아는 척
착한 척
뒤에서는 호박씨 까지만 아닌 척,
아무짝에 쓸모없는 나를 봐주는 건 그래도
척 때문인데,
척은
처 억 탄로가 난다
못생긴 것은 아무리 가려도 1분 안에 탄로가 나고
무식한 것은 길어야 한 시간 안에
없는 것은 한 달 안에
착하지 않은 것은 1년 안에,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1년 이상 남지 못한다
끊임없이 척을 생산해야한다
1분씩 한 시간씩 한 달씩 1년 씩
오늘도 나를 지탱해주는 척!
사막에서 잠들다 안차애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1897)
집시 여인이 모래언덕에 누워 잠든 사이
손에 쥔 지팡이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옆에 둔 만돌린이 칭얼대지 않도록
그녀가 머리맡에 세워둔 물병이 넘어지지 않도록
자장자장 아주 자장
사자는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순하게 갈기를 눕힌다.
만월은 푸른 악절의 쉼표 부분만 연주 중이고
시간은 밤의 건반을 소리 없이 누른다.
따뜻한 공기방울들이 코발트블루에 싸여
잠은 푸르게 익고
넌 나를 만져준 유일한 이야
잠이 짚어준 밤의 이마가 희붐하다.
모래처럼 허물어진 것들이
꿈속에선 수프처럼 다시 끓어오르고
바람 부는 높이, 하늘엔
무도회 가면을 쓴 당신처럼
웃는 달.
기억을 찾습니다 전영미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제가 살던 왕궁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가요
그곳은 틀림없이
장미향이 나고 순한 바람이 불었을 곳
한낮의 햇살이 대리석 바닥을 적당히 달구고
밤에는 별빛으로 커튼을 쳤을 곳
올리브와 포도가 사철 열리고 우유 분수가 솟았을 곳
왕궁은 저를 한참 전에 잊어버렸고
저는 저를 증명할 길이 없으니
제 나라로 돌아갈 방법이 없어요
연못가에 피었던 다알리아야, 나를 기억해줘
종려나무 끝에 앉아 노래하던 작은 새야, 나를 불러줘
궁에서 사람들이 와 저를 데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천 년 전에 본 제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나요
여기는 제가 살 곳이 아닌데
별은 너무 멀리서 빛나 길을 알려주지 않고
장미향은 너무 옅어져 꽃핀 데를 보여주지 않아요
왕궁을 지키는 문지기야
어서 나를 찾아내 지켜줘
저는 저를 기억해내야 해요
정원에 꽃들이 다 시들기 전에
총잡이 이 동 호
며칠째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권총만 종일 만지작거린다
내 몸속에 총알이 가득 찰 때마다
몸이 근질거리는 것은
내가 타고난 총잡이이기 때문이다.
난사亂射는 하수나 하는 짓이다.
나는 화장실 변기통을 향해 권총을 정조준한다.
총알에 맞은 물들이 튀어올랐다가 축 늘어진다.
죽은 물은 관을 타고 정화조에 가 묻힌다.
정화조는 죽은 물들의 공동묘지이다.
며칠째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속상했다.
은행에 강도가 침입했으면 좋겠다.
나는 종일 TV를 켜놓고 강도를 응원하며,
그가 영원히 잡히지 않기를 신에게 빌 것이다.
나나 당신이나 시건장치를 풀 용기가 없는 자이다.
사타구니에 총을 차고
수시로 은행문을 드나들겠지만,
총을 한번 폼나게 제대로 빼어든적 있는가.
텅빈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며
총알이 박힌 듯 아프게 은행문을 돌아서 나왔던
불쌍한 당신이나 나나,
축 늘어진 총구를 세워 달마다 여자 몸 속의
둥근 표적을 향해 무수히 연습사격을 한들
총알낭비 아니겠는가
레드퀸 효과(RED QUEEN EFFECT) * 전인식
나 잡아봐라 나 잡아봐라
영양은 사자에게 달리기를 가르쳤다
사자는 영양에게 더 빨리 달리는 법을 가르쳤다
별이 빛나는 밤마다
따라잡기 위해,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서로는 서로에게 달리기를 가르쳐주고 배웠다
사자는 영양에게 지그재그 주법을
영양은 사자에게 매복과 기습전략을
달빛 부서지는 밤마다
온힘 다해 뛰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
아름다운 사바나에 머물기 위해서는 두 배로 뛰어야한다
살기 위해 서로는 서로에게
달리기를 가르치고 달리기를 배운다
오늘도 우리는 건기 우기 가리지 않고
밤낮없이 뛰고 달려야 한다
너는 세렁게티 평원에서
나는 도시 기슭에서
주)레드퀸효과 :Matt riddly 저서 루이스 캐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속편에서 나오는 레드퀸에서 비롯된 생물학 및 경영학 이론
공수 해변 손순미
밤이 목도리처럼 길다
해변이 가지고 노는 것들
모래와 모래
파도와 파도
집어등 두어 개
선착장 굴러다니는 검정 작대기
압축된 해변의 서정이 길다
늦도록 고요를 꿰매는 노인의 손 그물 같다
해변으로 떠밀려온 것들이 혈육처럼 엉켜있다
밤의 잔물결이 해변을 간지럽힌다
한 마리 생선처럼 해변의 몸이 예민하다
-계간 《시와 사상》 2018년 봄호
요리사와 단식가 장정일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퍼마켓에서 배달된 과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굽거나 삶는다. 그녀의 외롭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잠시 잊게 해준다. 하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 새 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먹을까 ? 그녀의 책장은 각종 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쟁반에 덜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 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서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둔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외롭고, 숨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약간 상쇄시켜주는 것 같다. 어떡하면 한 모금의 물마저 단식할 수 있을까 ? 그녀의 서가는 단식에 대한 연구서와 체험기로 가득하고, 그녀는 방바닥에 탈진한 채 드러누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하여 쓰기를 즐긴다. 흔히 그녀는 단식과 저술을 한꺼번에 하며, 한 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문에 투고한다
3
어느 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간육에게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싹 마른 302호를 잡아 스프를 해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 아직도 301호는 외롭다. 그러므로 301호의 피와 살이 된 302호도 여전히 외롭다
시절, 불빛 이승희
불빛에 기대고 싶어지는 날,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불빛 속에 손을 넣어 둥근 반찬통을 꺼내다 말고 저 불빛들, 다 길이다. 중얼거린다. 저녁이 산을 가만히 지우는 동안 나는 아무 소리 없이 밥을 먹었다. 불빛에 기대면 그늘이 된다, 어둠이 된다. 여긴 마치 물속의 방 같아서 애초 바닥 따윈 없는지도 몰라.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두려움 따위는 집어쳤던 시절, 몸에 긴 칼자국을 그리던 겨울. 깜박거리던 불빛 같은 핏방울로 달빛조차 붉어보이던. 창문으로 달이 지난 지 오래. 아무 것도 소곤거리지 않는 참으로 편안했던 불안.
불빛에 부풀려진 영혼은 밤새 공중을 떠다니고
달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던 어느 날 붉고 동그랗던 불빛을 기억한다.
그 불빛들
나무들의 손가락 사이에서
물방울처럼 흘러내렸고
아직도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앉은 시절
남은 반찬을 냉장고 속에 넣고, 불을 켠다. 깨알 같은 글자들로 가득한, 채송화 꽃씨보다 작고 작은 글자들이 무료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비춘다. 한 시절이 가서 다시 오지 않았다.
첫딸 백기완
굳이 시큼한 사과만 먹고 싶다는데 어쩌랴
당구장에서 눈깔을 모로 떠 챙긴 버스값으로
사과 한 톨을 사들고
명동에서 원효로4가 수돗물도 없는 땀방울을 달려
그냥 달려
전승보처럼 엥겨주던 아내가 첫딸을 낳았다
할아버진 어비
나는 어야라고 어를수록 물쑥물쑥 크던 갸가
국민학교 가던 날, 관학이한테 얻은 시계로
빨간 아래위를 사 입혔더니
분꽃처럼 활짝 벌어지던 우리 첫딸
그 첫딸의 중학 진학은 내 당대 최고의 학력이라
당대 최고의 요리 짜장면을 먹이며
나는 우두커니 눈물나고
신이 난 아내는 월부 피아노를 사주고
그걸 다시 팔아 통일운동에 바치며
피아노가 다 무언가 지금은
잠든 결레의 가슴을 칠 때라고 속으로 울면
뒷길로 고개 숙여 학교 가던 우리 첫딸
그 첫딸이 대학선생이 되자 마루가 꺼지게
들썩이던 아내의 깨끼춤도 잠깐
어머니가 바라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거라며
노동현장에서
일년에 한두 번 고추장이나 훔쳐가더니
동해바다 외로운 술집 벽보에 갸는 수배자
나는 도망자로 만났을 때
그 명단을 찢어 거센 동해바다에 던지며
아 나는 못난 애비됨을 얼마나 울었던가
그 첫딸이 첫딸을 낳았다
이름을 뭐라고 지을 건가
그때마다 장막은 더 내리쳐 저 멀리 산비탈
어야네 불빛은 변덕변덕
한사코 이 밤을 사르고 있는데
갸는 그저 에미 노릇만 할 건가
주름 잡던 시절 임 창 아
주름의 예리한 날에 한번 맛 들이면
자주 구겨지는 자존심은 일찍 버려야 한다
갈래머리 여고 시절 주니어 잡지 표지모델로
주름 잡던 혜정이도 있었지만
문학상 휩쓸던 순정이나
약국집 딸, 하얀 얼굴의 현자가 제일 부러웠다
이불 밑에 주름치마 깔고 자던 언니처럼
나는 기껏 교복 주름이나 잡겠다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잠이라도 반듯하게 자야 했다
어차피 생은 똑바로 주름잡기 위해
몸 전체를 기울이는 것이지만
이중주름처럼 난감할 때도 있다
서울로 상경한 혜정인 스무 살에 애엄마가 되었고
화장 떡칠하고 다니는 현자는 가수 매니저다
그럴 리가 없는데 떡대 좋은 순정인
다섯 살 아들 하나 두고
저 세상으로 갔다
오늘은 동갑내기 이종사촌 결혼식
고등학교 때 변변히 이름 한 번 못 불리던
그 녀석
고린내 나는 골방에만 처박혀 살더니
다 늦게 사법시험 붙어 장가가는 날
활짝 핀 이마에 골 깊은 주름살,
저 주름 잡기 위해 그는 또 얼마나
골머리를 섞었을까
이젠 내 사촌도 느지막이
주름 꽤나 잡고 살겠다
고래 울음 송 재 학
고래 우는 소리*를 들었네
밤비가 줄기찼던 게
적멸보궁은 물이 새는 야거리였거나
절반은 고래 몸피였을 것이네
1만 개의 칼집에서 칼이 빠져나오는 소리,
하릴없이 내 목을 만졌지
부처가 없는 절집의 고래 울음은
명부전을 엮을 만큼 흥건했지만
습한 지옥도를 어찌 견딜까
더 많은 귀를 끄집어내는 저녁 예불,
내 달팽이관에 이미 물이 밀려오고 있다
처마의 풍경(風磬)조차 물고기 지느러미를 매단 것을
시커먼 빗소리가 누운 해안,
풀어헤친 범종 그림자처럼 귀신고래가 도착했다
꺼져가는 깜부기불이 자주 깜빡거렸다
*범종 소리를 흔히 고래의 울음소리<명경)라고 말한다
-송재학시집<<검은색>>/문학과지성사
어머니의 새벽 권순자
죽천 바닷가
어머니의 새벽은 싱싱하다
밤새 파도가 토해놓은 미역, 곤피
여명에 건져올리는 손,
울컥대는 갯내음을 달게 마시며
탱탱해지는 어머니의 가슴은
새벽 안개에 젖은 꿈으로 붉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깡마른 몸이 지게차처럼 함지박을 옮긴다
나날을 조이는 삶의 그물을
날렵하게 빠져 나오는 새벽마다
어머니 발걸음은 생선 지느러미보다 활기 차다
한 꾸러미 옭아매던 근심들이 달아난다
짠내와 비린내가 어머니의 속 깊은 물결에 밀려난다
아직 기울지 않고 조각달 희미하게 떠 있는
읍내로 나가는 길목
해산물 냄새 퍼트리며
소리없이 밝은 아침이 되시는 어머니
국수 백석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그지없
여승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여우난 곬족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後妻)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 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 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육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가즈랑집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 오는 집.
닭 개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촌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아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짗도 개털억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아이도 새사위도 갖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장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우리할아버지가 어미아비없는 서러운아이로 불쌍하니도 뭉둥발이가된 슳븐력사가있다.
山 宿
旅人宿이라도 국수집이다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木枕들을 베여보며
이山골에 들어와서 이木枕들과 새깜아니때를 올리고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사람들의얼골과 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許 俊
그 맑고 거룩한 눈물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그 따마하고 살틀한 볓살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눈물의 또 볓살의 나라에서 당신은
이세상에 나드리를 온것이다
쓸쓸한 나드리를 단기려 온것이다
눈물의 또 볓살의 나라 사람이여
당시이 그 긴 허리를 구피고 뒤짐을 지고 지치운 다리로
싸움과 흥정으로 왁자짓걸하는 거리를 지날때든가
추운겨울밤 병들어누은 가난한 동무의 머리맡에 앉어
말없이 무릎우 어린고양이의 등만 쓰다듬는때든가
당신이 그 공한 가슴안에 온순한 눈가에
당신네 나라의 맑은 한울이 떠오를것이고
당신의 그 푸른 이마에 삐여진 억개죽지에
당신네 나라의 따사한 바람결이 스치고 갈 것이다
높은산도 높은 꼭다기에 있는듯한
아니면 깊은 문도 깊은 밑바닥에 있는듯한 당신네 나라의
하늘은 얼마나 맑고 높을것인가
바람은 얼마나 따사하고 향기로울 것인가
그리고 이 하늘아래 바람결속에 퍼진
그 풍속은 인정은 그리고 그말은 얼마나 좋고 아름다울 것인가
다만 한사람 목이 긴 詩人은 안다
「도스토이엡흐스키」며「죠이쓰」며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일등가는 소설도 쓰지만
아모것도 모르는 듯이 어드근한 방안에 굴어 게으르는 것을 좋아하는 그 풍속을
사랑하는 어린것에게 엿한가락을 아끼고 위하는 안해에겐 해진옷을 입히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낯설은 마람에게 수백량돈을 거저 주는 그 인정을 그리고 또 그 말을
마람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벌이고 넋하나를 얻는다는 크나큰 그말을
그 멀은 눈물의 또 볓살의 나라에서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사람이여
이 목이 긴 詩人이 또 게산이 처럼 떠곤다고
당신은 쓸쓸히 웃으며 바독판을 당기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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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있는 부처/ 김광규
꼭 무엇이 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종심(從心)의 나이에 이르러...
아직도 되고 싶은 것 한 가지
있음을 깨달았다
한 팔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몸의
부처
나무도 짐승도 사람도 죽으면
어차피 땅 위에 쓰러질 것을
정신의 온갖 질곡 벗어나
살과 뼈와 터럭과 욕망 모두
떨쳐버리고
아무런 자세도 없이 편안하게
땅 위에 누워있는
부드러운 모습
와불(臥佛)을 볼 때마다
아직도 부처처럼 되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한
내 마음 부끄럽다
-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 (문학과지성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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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뉴에이지 선율1. 아침산책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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