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괜찮은 詩

최금진의 시

by 이성근 2019. 8. 8.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

뱀술

구례 어딘가를 지나가는 나의 잠

장미의 내부

황금을 찾아서

웃는 사람들

나무의 境地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새들의 역사

집에 못 들어가는 사람

개미귀신

염소와 함께

교묘한 따르릉

아파트가 운다

석회암 지대

과부 삼대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십만 년 전에

나는 원숭이 비슷한 우리 할아버지 고환에 담겨

말하는 꽃도 보고 텔레파시 하는 뱀도 보고

어멈들이 어, 하면 아범들은 아, 하고 움막에 들어가

낮이고 밤이고 인류를 길어 올려 흘려보냈겠지

내 본향이 아프리카라 생각하니

평소 안 좋아하던 파프리카도

적도에 걸린 생소한 탄자니아, 소말리아가 예뻐 보인다

나는 얼마나 멀리 흘러온 건가

얼굴 시커먼 우리 할아버지는 긴 막대기랑 돌덩이 서너 개 들고

얼마나 오래 걸어 전라남도 화순에 와서 화순 최 씨가 되었던 걸까

내 이름을 스와힐리어로는 뭐라 할까

우리는 형제니까

아동복지기금도 내고 기아 난민도 돕고

아프리카에 호적을 두었으니

나도 늙으면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

어쩌면 신께서 철조망을 쳐놓은 성경의 에덴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십만 년도 더 먹은 우리 할머니가

축 늘어진 가슴을 출렁이며 날 알아보고는

다 늙은 나를 무릎에 눕히고 자장가를 불러줄까

이 세상에 없는 새의 언어로, 나무의 모국어로

아프리카, 아프리카, 너무 늙은 나를 안고 안타까워하여 주실까

 

 

뱀술

 

추수할 무렵에 뱀은 독이 잔뜩 오른다

누군가 병마개로 꽉 닫아놓은 듯한 하늘

물어죽일 놈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일꾼들이 하품을 할 때마다 술냄새가 진동한다

똬리라도 틀고 견뎌야 하는 겨울, 그 컴컴한 집구석엔

식은 몸뚱이들이 서로 얽혀 있다

이를 악물고 밭고랑을 기는 댓가로 일꾼들은 평생

배고픈 배만 남은 뱀이 된다

 

제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고름을 맛보는 자세

몸 전체가 하나의 성난 성기가 되어

다들 아가리 닥치라고, 백태 낀 눈알을 부라리며

마침내 한 병의 독주가 된 자세

술로 밑바닥을 기다가 객지에서 혼자 목을 맨 아버지

맞은편에서 기어오는 잔뜩 독 오른 자신을 피하지 못하고

아버지는 콱, 자신을 물어뜯었다

손과 발이 없으므로 빌 수도 없고, 빌고 싶은 것도 없고

막대기와 경멸과 바닥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자세

그렇게 서서 죽고 싶었던 걸까, 뱀술

 

인생 막장, 그 막다른 곳에선 시커먼 뱀 한 마리가 기어나온다

자면서 이빨을 갈고, 머리엔 뿔이 돋고, 살갗엔 소름이 돋는 것

어린 자식놈은 몰랐으면 좋겠는데

편두통의 머리를 치켜들고

어디 한번 해보자고, 덤빌 테면 덤벼보라고, 입을 다물어도 자꾸 널름거리는 혓바닥

뱀은 바닥을 기는 배만 남은 동물

제 꼬리를 물고 꿀꺽꿀꺽 삼키다가 마침내 제 몸을 다 집어삼키고

지상의 길마저 끊길 때

제 몸을 제가 맛보는 유리병 속의 뱀

유리알 박힌 눈을 번뜩이는 한 마리의 허기

 

 

구례 어딘가를 지나가는 나의 잠

       

잠이 산수유꽃 같은 등불을 몸에 켜놓는

나는 섬진강변 구례 어디쯤

꿀벌들이 오물오물 꿀물을 씹는 봄 햇볕 아래를 지나고 있을까

잠엔 자동항법장치가 있고, 내 육신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이런, 너무 늦었군, 화를 내고 있을까

거리엔 온통 잠들이 바퀴에 사람들을 얹고 배달 다닌다

식기 전에 마시는 잠은 우유를 넣은 홍차처럼

인생을 느슨하고 부드럽게 해준다

어떤 사람의 잠은 다 식어 하얗게 응고된 촛농처럼

그의 머리맡에 떨어져 쌓인다

그는 불 꺼진 삶을 살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 것이다

완벽한 잠을 원하는 사람은 현실도피자가 아니다

초저녁, 달이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가느다란 팔을 창틀에 걸치고 앉아 지구를 바라본다

그 곁에 나란히 기대어 몇벌의 잠을 더 갈아입어도 좋다

깨지기 쉬움, 취급주의, 흰 장갑을 낀 사람들이

나를 안아 마차에 싣는다

잠은 구례 화엄사 석등 앞에 날 내려놓을 수도 있고

떠내려간 신발을 잃고 울던 유년의 모래톱에 내려놓을 수도 있다

잠은 신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작은 위로

작년에 죽은 친구가

병원 뜰에 벌써 매화가 피었다고 불평을 하며 내 옆에 눕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늑골에 아치형 뼈대를 세워 잠을 보관하고

잠은 출렁이는 한 동이의 항아리에 담긴다

강변 돌멩이에 고인 돌의 무늬와

잠든 아기 손에 새겨진 물결의 무늬는 서로 닮았다

나는 황혼녘 말조개처럼 강물에 떠서 어디를 항해하는가

그리고 때마침 비가 내리는가

양비둘기마냥 젖은 깃털 속에 머리를 묻고 있는가

화엄사 저 아래 더듬이처럼 불을 켜든 사람들의 집이

길을 따라 마을로 흘러가고

뚝뚝 처마 끝에 흘러내리는 잠이

창밖 목련나무 가지에 하얗게 돋아난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초저녁잠에서 깨어

여기가 어딘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황망히 운다

오래된 그릇은 저절로 금이 가고

인간은 거기 담긴 한 국자의 검은 물처럼 쏟아져 대지에 스민다

물줄기가 산 아래로 흘러가 마을의 잠을 이루는 저녁

미농지처럼 얇은 잠 사이로

산수유꽃이 피어 있는 게 보인다

나는 눈을 감고도 환한 구례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가

내 귀에서 어린 은어떼가 조각조각 꿈을 물어뜯고 있는가

누가 내 잠을 석회처럼 하얗게 강물에 풀어내고 있는가

발끝까지 환하다, 화안하다

 

  


장미의 내부

 

벌레 먹은 꽃잎 몇 장만 남은

절름발이 사내는

충혈된 눈 속에서

쪼그리고 우는 여자를 꺼내놓는다

겹겹의 마음을 허벅지처럼 드러내놓고

여자는 가늘게 흔들린다

노을은 덜컹거리고

방안까지 적조가 번진다

같이 살자

살다 힘들면 그때 도망가라

남자의 텅 빈 눈 속에서

뚝뚝, 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황금을 찾아서

 

은율, 재령,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엘도라도를 생각하면

우리집 마당도 금 뿌리 가득한 어느 만석꾼

그러면 식탁에 달랑 올라온 김치와 밥으로 때우는 저녁상도

푸짐한 금빛으로 넘치고

내 이름의 자도 왠지 거부(巨富)의 돌림자 같기만 하고

설핏 든 잠은 스페인 사람들이 믿었던 엘도라도로의 통로라는 생각

어쩌면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허물어진 방바닥 귀퉁이를

숟가락으로 파볼 일인지도 모르는

어젯밤 뜬금없는 누런 똥꿈을 자꾸 왕관처럼 머리에 썼다가 벗으며

할아버지 화장터에서 주워온 금이빨을 고모는 어디에다 썼을까 하는 생각

금반지 한 돈 물려받지 못한 처지를 비관으로 몰고 가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다시 파보는 누리끼리 낡고 오래된 금에 대한 몽상

나에게도 금광이 있으면 좋겠다

금지옥엽 길러서 금의환향하는 자식 생각과

적어도 금전 걱정은 없어야겠다는 새해의 새로운 각오를 파묻어 둘

토요일마다 로또방을 기웃거리지 않아도 좋을

은율, 재령,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엘도라도

감나무에 걸리는 햇살, 그 아래로 사금이 줄줄 흘러내릴 것 같은

벽에다 똥칠을 해놓고, 이게 다 금이다, 넋을 놓아버린

할머니는 행복한 연금술사

일생에서 한번만 더 길몽을 만난다면 나도 아버지처럼 노름이나 배울까

금값이 올랐다는 뉴스를 보면 억울하고 또 반갑다

내일은 토요일, 복권은 여덟시까지 팔고, 일주일은 그렇게 그냥 가고

저녁별들은 황금빛을 쩔렁거리며 빛난

 

웃는 사람들

 

웃음은 활력 넘치는 사람들 속에 장치되어 있다가

폭발물처럼 불시에 터진다

웃음은 무섭다

자신만만하고 거리낌없는

남자다운 웃음은 배워두면 좋지만

아무리 따라해도 쉽게 안 되는 것

열성인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웃음은 어딘가 일그러져

영락없이 잡종인 게 들통난다

계층재생산, 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얼굴에 그려져 있는 어색한 웃음은 보나마나

가난한 아버지와 불행한 어머니의 교배로 만들어진 것

자신의 표정을 능가하는 어떤 표정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웃다가 제풀에 지쳤을 때 문득 느껴지는 허기처럼

모두가 골고루 나눠 갖지 않는 웃음은 배가 고프다

못나고 부끄러운 아버지들을 뚝뚝 떼어

이 사람 저 사람의 낯짝에 공평하게 붙여주면 안될까

술만 먹으면 취해서 울던 뻐드렁니

가난한 아버지의 더러운 입냄새와 땀냄새와

꼭 어린애 같은 부끄러움을 코에 귀에 달아주면

누구나 행복할까

대책 없이 거리에서 크게 웃는 사람들이 있다

어깨동무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웃음들이 있다

그런 웃음은 너무 폭력적이다, 함께 밥도 먹고 싶지 않다

계통이 훌륭한 웃음일수록,

말없이 고개 숙이고 달그락달그락 숟가락질만 해야 하는

깨진 알전구의 저녁식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참고 견디려 해도

웃음엔 민주주의가 없다

 

 

나무의 境地  

 

그래도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구에겐가 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었다

아무에게도 가지않고 부딪히지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

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그게 한계다 치명적인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를 가진 나무는 아름답다 


까마득한 세월을,

길들여지지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있는 그 한가지로

마침내 가지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르렀다 


많은, 움직이는, 지친 생명들이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차는 계곡에서 한달 뒤에 발견되었다.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나 완벽 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반쯤 웃고만 있었다.

접근할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수상한 냄새 속으로 파리들이 날아다녔다.

움푹꺼진 여자의 눈알 속에 떨어진 담잿재는

너무도 흔해빠진 국산 이었다.

함몰된 이마에서 붉게 솓구치다가 말라갔을

여자의 기억들은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흐물거리던 지갑 안에 접혀진 메모한장

" 나는 당신의 무엇 이었을까"

헤벌어진 해골의 웃음이

둘러싼 사람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메아리가

축문처럼 주검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

 

 

새들의 역사

우리 집안 남자들은 난생설화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배꼽이 없다

그러니 탯줄 없는 남자들을 무슨 수로 잡아매나

밤하늘엔 연줄 끊어진 연들처럼 별들이 떠돌고

우리 집 나그네, 라는 우리 친척 여자들의 말 속에는

모계사회의 전통가옥과 거미줄과 삐걱거리는 툇마루뿐

멀리 강원도 탄광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우리 당숙도 죽어가는 새가 되어

가지 않고 날마다 숙모의 꿈 속에 내려와 운다

티베트에선 죽은 사람을 독수리 먹이로 던져준다는데

누가 우리 집안 여자들을 부려 새를 키우나

배꼽이 없는,

그래서 세상에 아무 인연도 까닭도 없이

엄마는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피똥 싸듯 나를 낳았다

어서어서 자라서 훨훨 날아가라고 서둘러

날개옷 같은 하얀 배냇옷 한 벌을 지어놓았다

서른일곱에 정착도 못하고 나는 지금도 어딜 싸돌아다닌다

 

 

집에 못 들어가는 사람

초상집에 가서 젯밥이나 먹고 다녀도 세월은 가겠지

결혼식 하객 틈에 끼어 국수를 말아먹거나

일렬종대로 서서 무료급식소를 기웃거리거나

누가 풀어놓은 저수지의 고기들을 다 건져먹거나

빈 밭둑에 남아도는 배춧잎을 씹거나

미쳐서 집 나가 다시 안 돌아온 친척 아주머니처럼

해피하게 살 수 있겠지

식구들이야 나를 죽이고 싶겠지

자유가 얼마나 더러운 지폐 같은 것인지

가게에서, 월셋방에서

내 이름을 지불할 때마다 혀를 물겠지

작은 돌무더기처럼 쭈그리고 앉아 바라보는 남쪽 바다

목발을 짚고 걸어가는 시뻘건 태양이 손을 잡아끌면

나는 또 신기한 듯, 두려운 듯, 수평선을 넘어가겠지

지구는 둥글어서 자꾸 걸어나가면

언젠가는 결국 제자리로 오게 될까 두려워, 나는

어쩌면 뻥 뚫린 무한의 하늘로 날아오를지도 몰라

그러나 다음 생에선 당신들이 나를 밟고 다녔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은 집에 못 들어간다

제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일생 헤매는 사람도 있다

용서해 주지 않아도 좋다, 인생은 짧고 공허는 깊다

 

 

개미귀신

사랑도 없이 귀신이 되어가는 세월

시를 쓰기엔 인생이 너무 짧은 건 아닐까

변명을 횃불처럼 들고 찾아가는 산 82-5번지 모래 사원

염주를 주렁주렁 목에 걸고 있는 개미귀신이란 놈은

시체애호증이 있어서

집 가까운 곳에 마른 피육을 쌓아 올린다

침침한 눈으로 머리카락을 골라내듯 언어를 골라내기엔

나무 늦은 저녁, 신경쇠약으로 잔뜩 찡그린 얼굴로

어제 먹다 남은 말을 마저 먹는다, 아득바득

시를 쓰기엔 인생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수도복을 입은 개미귀신들이 미사라도 보는 걸까

모래 속에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울고 있다

부스스, 내 손에서 사라지는 고운 모래의 언어를 만져본다

시를 쓰기엔 너무 캄캄한 모래 구덩이에서

죽은 비유들을 해골처럼 주렁주렁 꿰어 목에 걸고

그중 입맛에 맞을 것 같은 시 한 줄을 맛보다가

, 하고 뱉어내는, 당최 입맛이 없는 개미귀신 한 마리

폐업신고라도 해야 할까

 

염소와 함께

병든 아내를 염소처럼 몰고서 숲에 왔네

검은 털이 돋은 삼나무들이 주변을 뱅뱅 맴돌고

까마귀들이 염소똥 같은 울음을 떨구었네

미치광이광대버섯들이 입산금지 줄을 치고 있었네

아내가 주저앉아 자꾸 땅에 제 목줄을 묶으려 할 때

그건 우리가 묶을 수 없는 것

자신을 나무 아래 심어두고 일 년, 이 년이 지나

다시 찾아와 줄 수 있겠냐고

아내는 건초처럼 바스락거리며 내게 물었네

고집 센 물웅덩이들이 길에서 흐린 하늘 몇 점을 씹고 있었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뱀이 절망과 교미를 하기 위해

풀섶에 숨어서 퉁퉁 부은 발목을 노리고 있었네

아내는 염소처럼 생긴 제 얼굴을 바라보았네

속이 빈 나무들이 태풍에 쓰러져 누워

바닥을 향해 노를 젓고 있었네

겁 많은 염소처럼 매에 매에 울고 있는 아내를 몰고서

입에 물려 되새김질이라도 해야 할 교훈을

나는 철 지난 신문지처럼 뒤적거리고 있었네

아내여, 우리의 목줄과 축사가 저녁을 기다리고 있으니

가자, 저녁 달의 퉁퉁 부은 얼굴을

뾰족한 뿔로 툭툭 깨워 줄 염소와 함께

시커먼 제 그림자나 덧없이 씹고 있을 염소와 함께

 

 

교묘한 따르릉

 

점점 힘이 세어지는 전화에게 낮잠까지 내어준다

외출을 안 해도 전화줄이 척척 몸에 감긴다

시커멓게 파마 머리를 한 여자들이

119 구급대원처럼

카드빚에서 날 구원해 줄 것마냥 출동해선

따르릉,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묻는다

소득이 얼마냐, 전세냐 월세냐,

하늘을 가르며 검은 전화선들이 떼로 몰려다니고

그 줄을 따라 여자들이 낙하산처럼 뿌려진다

내 주민번호, 내 연체날짜, 내 지로번호와 엉킨다

시커멓게 음모가 덥수룩하게 자라난 여자들이

수화기를 헤집고 기어나와

나에게 열심히 설교하고, 마음껏 친절한 척하다가

싹둑, 나를 자르고 다시 빈 방에 앉혀놓는다

필요할 때마다 나를 꺼내려고 어딘가에 밀봉한다

다음에 또 전화할게요, 내 귀를 꺼놓으려 해도

아침이면 새로운 전화가 다녀가고

어떻게 알아냈는지 가족사까지 들먹이며 실컷 따르릉거리고

정체도 모르는 따르릉을

내 시계에 심어놓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게 하고

무성하게 가지를 뻗어

내 귀를 덮고, 나를 꼬시고, 생계를 걱정하고, 타협하고

검은 음모를 너풀거리며

따르릉이 수시로 나를 건너다닌다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 좋은 말을 먼저 선점한

예쁘고 사나운 여자들, 전신주마다 넝쿨을 뻗어간다

우리 동네 모든 전화기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사방에서 따르릉거린다

그렇다, 나는 백수다

 

 

아파트가 운다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밑이 검고 핼쑥하다

누군가는 죽여달라고 외쳤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유체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

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아 있다

여자들은 남자처럼 힘이 세어지고 눈빛에선 쇳소리가 울린다

대개는 이유도 없는 적개심으로 술을 마시고

까닭도 없이 제 마누라와 애들을 팬다

아침에 보면 십팔, 십팔평 칸칸의 집들이 밤새 욕설처럼 뱉어낸

악몽을 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운명도 팔자도 모르는 아파트 화단의 꽃들은 표정이 없다

동네를 떠나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전보다 조금 더 살림을 말아먹은 아내와

그들을 자식으로 두고 죽은 노인들이다

먼지가 풀풀 나리는 교과서를 족보책처럼 싸짊어지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아파트는 서서히 눈에 불을 켠다

이빨이 가려운 잡견처럼 무언가를 갉아먹고 싶은 아이들을 곁에 세워놓고

잘사는 법과 싸움의 엉성한 방어자세를 가르치는 젊은 부부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밤이면 아파트가 울고, 울음소리는

근처 으슥한 공원으로 기어나가 흉흉한 소문을 갈기치럼 세우고 돌아온다

새벽까지 으르렁거린다

십팔, 십팔평 임대아파트에 평생을 건 사람들을 품고

아파트가 앓는다, 아파트가 운다

아프다고 콘크리트 벽을 쾅쾅 주먹으로 머리로 받으면서 사람들이 운다

 

석회암 지대

 

밤이면 저수지에선 말조개들이 울었다

거품을 물고 물 표면에 거꾸로 매달려 이리저리 떠다녔다

시멘트가루 잔뜩 눌어붙은 익사자의 살가죽을 벗겨 먹으며

우렁이들은 저수지에서 토실토실 여물었다

동굴에서 나온 박쥐들이 몰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다

노인들은 젊은이들보다 오래 살았다

오래 사니까 검은 머리가 돋는다며 생선가시 같은 이빨을 보이던

노파는 자주 뒷한 동굴 구멍으로 들어갔다

농약을 먹은 개들이 논둑을 뛰어다녔고

아이들은 음푹음푹 발이 빠지면서도

밭둑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땅속을 쉽게 들락거렸다

동네는 석회암 지대여서

집 밑에는 커다란 땅구멍이 서너개씩은 미로처럼 나 있었다

누군가 잃어버린 운동화는 십리 밖 하천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우물 속에는 늙은 메기가 살았는데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인 누이들은

얼굴 시커먼 청년들에게 제물로 바쳐지곤 했다

분지를 덮고 있는 동그란 하늘에 이따금 꽃이 피기도 했는데

그건 상여가 뒷산을 오르는 거였다

마을의 한가운데엔 구멍 숭숭한 묘지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쪽을 향해 잔뜩 허리 조아리는 대문을 내고 살았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화악, 땅이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과부 삼대

 

아버지 기일인데

일찍 시집가서 일찍 늙어 돌아온 누이와

콩인지도 모르고 콩을 까서 바가지 같은 입에 자꾸

주워담는 할머니의 머리 허옇게 센 죄는 무엇일까

 

주신자도하나님이시고거둬가시는이도하나님이시니

 

무제공책에 성경을 베끼시는 어머니는

곪은 할머니 귓구멍에서

밥상에 뚝뚝 떨어지는 우리 가족의 잘 안 낫는 죗값을

무슨 수로 다 틀어막나

 

하얀 목화솜을 말아 마개를 씌우듯 할머니 바깥의

소리를 봉하는 어머니 손바닥

그 함부로 그어진 빗금 속에서

잠시 서럽게 잠들다 간 사내들은

지금 어디서 흘아비가 되어 제 새끼를 키우나

 

할머니 손가락에 채워진 은반지는

낮에 잘못 나온 낮달인데

지금은, 시집갔다 이빨만 상해서 돌아온 누이의

텅 빈 입속에 걸려 있고

할머니 조롱박 크기만한 머리통에선

무슨 퀴퀴한 가락이

저렇게 많이 흘러나오나

어머니가 즐겨 쓰던 가면인 누이는

아비 없이 설움을 누구에게 가서 고해바쳐야 하나

 

주신자도하나님이시고거둬가시는이도하나님이시니

 

상 위에 차려진 채 식어가는 젯밥,

우리집 과부들은

왜 아버지 죽음 앞에서 한없이 수척하기만 한가

 

할머니 고름냄새만 지독히 흘러다니는 아버지 기일



어느  신문 기자가 본  최금진


시인의 시는 불편하다.

술독에 빠져 살았던 할아버지,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아버지,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가난과 핍진의 삶은 ....마치 자신의 살가죽이라도 벗겨내듯 숨은 가족사를 털어놓는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어느 새 눈시울이 붉어진다. 하지만 성장 과정의 미세한 상처를 헤집으며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날선 시선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환영을 만들어낸다.

 

최금진은 자신의 집안과 핏줄에 얽힌 이야기들을 무섭도록 사실적인 언어로 진술하지만 단순히 책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용서의 국면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들려주는 시적 서사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우화가 된다


평화로운 피아노 음악... 10곡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로 가는 전봉준 外  (0) 2019.08.08
그대 생의 솔숲에서 외  (0) 2019.08.08
체 게바라   (0) 2019.07.28
4월은 갈아 엎는 달   (0) 2019.04.24
절벽을 건너는 붉은 꽃 外  (0) 2019.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