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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이상국의 시

by 이성근 2019. 8. 9.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봄날 옛집에 가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저녁의 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

밥상을 버리며

다리를 위한 변명

禪林院址에 가서

먼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내 가는 모든 길의 검문소에서

신발에 대하여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 이상국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2005


봄날 옛집에 가서

봄날 옛집에 갔지요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머위 이파리만한 생을 펼쳐들고
제대하는 군인처럼 갔지요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고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다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서는 바빠 못 오고
이제는 너무 멀어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 유심 (2004 봄)​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싶다 

벌써 오래 되었다 
부엌 옆에 마구간 달린 아버지의 집을 떠나 
마당도 굴뚝도 없는 아파트에 와 살며 
나는 그게 자랑인줄 알았다

이제는 그 부드러운 풀이름도 거반 잊었지만 
봄 둑길에 새 풀이 무성할 때면 
우리 소 생각난다

어떤 날 저녁에는 
꼴짐 지고 돌아오는 아버지 늦는다고 
동네가 떠나갈듯 우는 울음소리도 들었다

이제는 그 소도 아버지도 다 졸업했다고 
이 도시의 시민이 되어 산지 오래인데도 
우리 소 잘 먹던 풀밭 만나면 
한 짐 베어지고 
그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그해 소한 날 나는 울산에 있었다 
바닷가 허름한 식당 문짝에 고래고기 메뉴가 보였다 
파주 어디에선가는 기러기탕을 팔던데 
세상에, 그 아름다운 짐승들을 잡아먹다니 
사람들은 못 먹는 게 없지만 
먹을 게 늘 모자라는 모양 
대왕암 보러 가는 길에 바람이 맵다 
할머니 제사도 이맘때였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하도 이악해서 
해마다 날씨가 춥다고 했다 
전 우주가 동참하는 소한 추위를 
당신 시어머니 한 사람 인격과 맞바꾸다니, 
우리 어머니는 참 대단하다 
그러나 정말 이악해서가 아니라 
먹고 살기 힘들어서 강퍅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기러기를 탕 해 먹고 고래를 잡아먹는 게 아닐까 
천리 북쪽 집에서 내 아들 바우는 
자기 꿈이 안 보일까 봐 밤마다 안경을 쓰고 잔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안경도 없다 
소한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는 얼마나 이악할까 
추우니까 집에 가고 싶다


저녁의 집 

해 떨어지면                        
나무들은 이파리 속의 집으로 들어가고                        
먼 개울물 흐르는 소리                        
울타리 너머 밥 짓는 냄새 속으로
꼴짐 높게 진 사람들 두런두런 혼잣말하며
배가 장구통 같은 소 앞세우고 돌아오네
제 새끼 안보인다고 아갈질해대는 소울음 사이로                      
박쥐떼들 아무렇게나 날아간다                        
고등빼기 우리집에서는                        
어여 와 저녁 먹으라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어머니도 딱하다                        
나도 이젠 자식 둘이나 두었는데                        
아직 내 이름을 알몸뚱이로 동네방네 불러대다니                        
하늘 두에서 별이 어둠을 씻고 나온다                        
키 큰 밤나무 꼭대기까지 차오르는 어둠 속에서                        
새는 보이지 않고 울음 소리만 들리고                        
변소 지붕 위의 박이 엉덩이처럼 희게 떠오른다                        
부엌문 여닫힐 때마다 불빛에 어리는 마당 식구들                        
어둠에 잠겨 찰랑거리는 마을에서                        
이파리들의 소근거림                        
쇠똥냄새                        
먼데 집 펌프대 삐걱거리며 물 올리는 소리                        
멍석가로 펄쩍펄쩍 개구리들 덤벼드는                        
그 머나먼 집 마당에서                        
나는 아직 저녁을 먹고 있다

​- 이상국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 1998


집은 아직 따뜻하다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들 세상 출입하던 갓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리 물길 따라
해마다 연어들 돌아오는데
흐르는 물에 혼은 실어 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 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만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 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


밥상을 버리며 
  
오래 받아 먹던 밥상을 버렸다
어느 날 다리 하나가 마비되더니
걸핏하면 넘어지는 그를 내다 버리며
어딘가 갈 데가 있겠지 하면서도 자꾸 뒤가 켕긴다
아이들이 이마를 맞대고 숙제를 하고
좋은 날이나 언짢은 날이나 둘러앉아 밥을 먹었는데……
남들은 다 어떻게 살든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때로는 하고 또 하는 잔소리에
아이들은 눈물밥을 먹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아내는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고
딱하다는 눈총을 주기도 했지
나는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가족들에게, 실은 나 자신을 향하여
쓸데없는 호통을 치기도 했지
그러나 한끼 밥을 위하여 종일 걸었거나
혹은 밥술이나 먹는 것처럼 보이려고
배를 있는 대로 내밀고 다니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속옷 바람으로 둘러앉아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밥알이 튀어나오도록 웃던 일들을
그는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오래 받아 먹던 밥상을 버렸다
그러나 그가 어딜 가든 나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안다


다리를 위한 변명 
 
먼 길을 다니다보면 자동차의 발이 천형 같다
말은 안하지만 그들도 몸을 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쓰레기 봉지를 찢고 나온 닭발이나
바지 밖에서 잠든 노숙자의 다리나
다리는 쉬고 싶다
 
저 가느다란 것들에게 세상이 얹혀 다니다니
 
외다리 집게는 몸이 다리이고
시장바닥을 배밀이 수레로 밀고가는 사람은 찬송가가 다리이다
한 번도 집밖에 나간 적이 없는데 몸통을 잃은 나무를 보거나
아프리카는 짐승들이 사납고 먹을 것도 별로 없다는데
지뢰 때문에 다리가 날아가버린 우간다 아이들이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면
내 무릎 밑이 다 서늘해진다
 
다리는 먹이를 위하여 걷거나 뛰거나 하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禪林院址에 가서 

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 채는 
아직 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經典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을 뒹군들 니 마음이 절간이라고 
선림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부도(浮屠)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 햇살이나 몇됫박 얻어 쓰고 
나는 저 세간의 무림(武林)으로 돌아가네


먼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어느 해 봄 그것도 단 한번
신을 짝짝이로 신고 외출을 한 다음부터
나는 갑자기 늙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햇살 좋던 봄날 아침의
아무것도 아닌 실수였는데
그 일로 식구들은 나의 어딘가에서
나사가 하나 빠져나갔다고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장에 나가는 염소처럼 뻗디디며
한동안 혼자 뿔질을 해대던 나는

어느 날 마당에 나뭇짐을 벗어놓듯
먼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그 속으로 들어갔다
- 이상국 시집『뿔을 적시며』2012


내 가는 모든 길의 검문소에서 
 
젊어서는 그랬다
대대리 삼거리에 차가 멈추면
죄 없이도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권총 찬 경관이 경례를 올려붙이며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하면
나는 까닭 없이 오줌이 마려웠다
 
화진포 삼불사로
어머니 사십구제 모시러 가던 그해 겨울
수염 거칠고 주민등록증마저 없어 수상하다고
나는 사정없이 정강이를 차였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아무 소용없던
십수 년 전 조국의 국도

마흔이 넘은 지금도 그렇다
그 삼거리에 아직 차는 어김없이 멈추고
엠식스틴 움켜쥔 경관이 통로를 훑어 오면
나는 아직 뭔가 불어야 할 게 있는 것 같다
내 가는 모든 길의 검문소에서

오늘도 나는 가슴이 뛴다
- 이상국 시집 <국수가 먹고 싶다> 


신발에 대하여

그전에 선배가 입대하며
신던 구두를 벗어주고 간 적이 있었다
비만 오면 구두 속이 미나리꽝 같았던 시절
나는 마치 집 한채를 얻은 것 같았다

어쩌다 바꿔 신기만 해도
몸이 낯설어하는데
교통사고라도 있어
길바닥에 나뒹구는 신발을 보면 언짢다
누군가 생을 다치고 다시는
저 신발을 못 신을지도 모른다는……

신발을 벗는다는 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에 취해 한뎃잠을 자는 사람들도
길바닥에 공손하게 신발을 벗어놓고
더러는 울며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지는 아이들도
신발을 벗어놓고 간다
 
우리집 신발장에는 뒤축이 닳았거나
낡은 신발들이 가득하다
내가 그 어느 것 하나 쉽게 버리지 못하는 건
그것들이 늘 내 삶의 무게를 견뎌주었고
아직 나와 같이 갈 데가 있어서다
- 이상국 시집 <뿔을 적시며> 2012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비가 오면 짐승들은 집에서 
우두커니 세상을 바라보고 
공사판 인부들도 집으로 간다 
그것은 지구가 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가 오면 
마당의 빨래를 걷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고 
강을 건너던 날 낯선 마을의 불빛과 
모르는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는 안 가본 데가 없다 
빗소리에 더러 소식을 전하던 그대는 
어디서 세상을 건너는지 

비가 온다 
비가 오면 낡은 집 어디에선가 
물 새는 소리를 들으며 

나의 시도 그만 쉬어야 한다 

* 스져춘의 소설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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