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생의 솔숲에서 -김용택
모순 -허행
나무는 기다린다 -천영애
개망초 -윤일현
돌탑 -김윤현
외포리 갈매기 -천수호
호박씨가 울고’ -김대성
‘논일 소묘’ -신 평
벌레먹은 나뭇잎 -이생진
가을엽서 -안도현
산맥과 파도 -도종환
작달비 오는 날 -김용욱
내 허락 없이 아프지도 마 -엄경희
손무덤 -박노해
꽃처럼 웃을 날 있겠지요 -김용택
다리 저는 사람 -김기택
산1번지 -신경림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 -박라연
새벽편지 -곽재구
고향 -박재삼
선제리 아낙네들 -고은
구두한컬레의 시 -곽재구
서울꿩 -공광규
우리가 눈발이라면 -안도현
우리나라 꽃들에겐 -김명수
20년 후의 가을 -곽재구
대숲 아래서 -나태주
저문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절망을 위하여 -곽재구
만술 아비의 축문 -박목월
나그네
길 -정희성
들판의 빈 집이로다 -정진규
치자꽃설화 -박규리
바람부는 날 -박성룡
그대 생의 솔숲에서 김용택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모순 허행일
짝퉁이 진품보다 판을 치고
허울 좋은 거짓이
진실보다 더욱 진실해 보이는
요지경 같은 세상
모르는 바 아니지만
보험금 타 먹을 심산으로
간단한 접촉사고에 입원한 정형외과
환자보다 더 진짜 같은
부지기수의 거짓 환자들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외면된 진실을 동경하지만
눈앞의 이익 흔들리지 않을 사람 없듯이
보험금 받아서
마누라 속내 앓아 십여 년 만
새로 장만한 세탁기
땀으로 얼룩진 옷가지
허울 좋은 거짓으로만 세탁되는 건 아닌지
나무는 기다린다 천영애
청맹과니 여자 숲으로 간다 송충이 한 마리 따라 간다 살아 있는 벌레 숲 캄캄히 눈 내리고 아득히 아득히 눈 내리고
밤꽃향기 아득했을 나무 아래 한 생이 사라졌다 땅 속으로 열린 길 청맹과니 여자 지도 펴들고 서성인다 어디로 갈 것인가 소리 들은 잘못이었다 밤꽃 향기 세상에 퍼지고 새끼들 쑥쑥 자라는 소리 들은 죄였다 사랑이면 다거니 마음 놓은 죄였다
나무는 기다린다 청맹과니 여자 귀 열기 기다린다 청맹과니 여자 마음 열기 기다린다 사랑이면 다거니 그러기를 기다린다
내 마음이 고장 났다’정을숙씨
내 마음이 고장 났다
고쳐주오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시들해졌소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가슴은 반가운데 머리는 짜증을 내오
길을 걷다 멍할 때도 있소
마음의 병이 난 것 같소
억지로 큰 소리로 웃어도 보았소
그때뿐이라오
어쩌면 좋아요
큰일이다 싶어요
누가 치료방법 있으면 가르쳐주오
고쳐주면 따뜻한 커피 한 잔 사겠소
잉 신기하오
한줄한줄 마음을 적어가니
고쳐진 것 같소
털어놓는 거보다 좋은 약은 없는 것 같소
개망초 윤 일 현
-낙동강94
서른둘에 홀로 되어
아들 하나 키우며 잡초처럼 살다가
며느리 들어오자 살림 물려주고
툇마루에 앉아 종일 흰 구름만 바라보며
어디든 훨훨 날아다니고 싶다던
영천댁 꽃상여 나가던 날
칠월 뭉게구름 하늘에서 내려와
길가 가득 개망초 꽃으로 흩어졌다
하얀 두건 쓴 개망초들
바람에 온 몸 흔들며 곡하다가
상여를 메고 뒷산으로 올라갔고
할머니는 구름이 되어 먼 길 떠났다
돌탑 김윤현
하나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하나만 하고 돌을 쌓다보면 돌탑이 된다
세상은
하나가 이루어지면 다른 하나가 고개 드는 곳
돌을 쌓아 빈 곳마다 꼭꼭 채우려는 생각 마라
다 채우면 틈이 없어 더 외로워진다
허공은 텅텅 비어서 더 푸르지 않은가
세상은 가득 차지 않아서 살만한 곳
하나만 더 하고 쌓다 보면
쌓은 것조차 무너지는 것이 돌탑이다
잡았다 여겼던 것도 실은 잡은 것이 아니다
지금은 쌓았던 탑에서 돌 하나씩 내려놓을 때
외포리 갈매기 천수호
두 눈 감고 두 발 모으고
불길로 밀려들어간 적이 있었다
가지런히 발 뻗을 때는
정지비행을 위해 한잠에서 깨는 시간이라고 해두자
눈 뜨면 천 길 낭떠러지
갸웃거리는 뾰족 부리는
그때 그 이야기를 물고 있다고 해두자
하늘을 밥그릇처럼 엎으며
먼 우주를 바다에 쏟아 넣기도 하지만
너는 돌아올 기색도 없이 떠났다
그러는 사이 세상은 한번 휙 돌아서
구름을 바꿔 쓴다
네가 돌아오는 길을 잃지 마라고
눈빛으로 하늘 구석구석을 쓸어 보지만
기가 막히게도 네가 먼저 거리를 둔다
한 생을 잊기 위해
열린 서랍을 한꺼번에 닫는 눈꺼풀
조금씩 흘리고 있던 먹이를 봉지째 툭 놓쳐버린다
이제 너로부터 듣는 말이 더 길어진다
호박씨가 울고’ 김대성
우수가 넙죽이 봄을 음미하는 해거름
종일토록 문풍지가 울던 토방 구석에
내 삶의 분뇨에 파묻혀 넝쿨을 따라온 얼굴
분 바르고 새침 떨다 나른한 잠에 빠져들었다
퍼즐 된 얼굴은 지옥의 가마솥에서 래프팅을 하고
바람난 아궁이 불에 퍼질러 조는 난자(卵子)는
사회면 활자에 궁둥이 붙이고 일어설 줄 모르는데
흔들리는 앞 이빨로 세월의 꼭지를 누르니
손톱 따라 수줍게 드러나는 가련한 비너스의 속살에
맥주잔 거품이 침을 삼키며 냉큼 손을 뻗었다
벗겨진 옷
조각난 봄이 소복(素服) 소복이 인쇄체로 울고 있다.
‘논일 소묘’ · 신 평
아래 위 논 사이
고랑 따라 물이 잴잴 흐른다
돌에 부딪혀 일어나는 맑은 거품들
들쥐가 한 마리 흘낏 돌아보는데
그 눈에 한껏 담긴 평화
잠자리도 나비도
구부린 어깻죽지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시소를 탄다
어떤 낯섦이나 두려움도 없는 이곳
무심(無心)은 벼 사이 길게 드러누워
한숨 잔다
바람이 길게 스친다
억겁의 인연을 환기하며
그렇다, 이것이 마지막이라 한들
다신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라 한들
그냥 몸을 뚫고 지나간다
쪽빛 하늘 광막한 고요가 받치고
농부의 풀어헤친 가슴
떨어지는 하늘물 받아 마셔
온 몸이 쪽빛으로 물든다
벌레먹은 나뭇잎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이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가을엽서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 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산맥과 파도 도종환
능선이 험할수록 산은 아름답다
능선에 눈발 뿌려 얼어붙을수록
산은 더욱 꼿꼿하게 아름답다
눈보라치는 날들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은
외설악의 저 산맥 보이는가
모질고 함한 삶을 살아온 당신은
그 사람의 능선을 얼마나 아름답게
바꾸어 놓았는가
험한 바위 만날수록 파도는 아름답다
세찬 바람 등 몰아칠수록
보이는가 파도치는 날들을 안개꽃의
터져오르는 박수로 바꾸어 놓은 겨울 동해바다
암초와 격랑이 많았던 당신의 삶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파도로 바꾸어 놓았는가
若山 金元鳳(1898.9.28.~1958.11)
작달비 오는 날 김용욱
그랬지요
작은 텐트를 열고
32비트로 쪼개진
드럼 소리 같은 빗줄기를 마중하다
스펀지에 물젖듯 갈증을 빨아대는
마른 대지의 식탐에 침을 버무리며
흙이란 단어를 길어
회귀를 (回歸) 고민 했지요
꽃은 피고 시들고
생(生)도 결국 사위어가는 것이라
때론 엄벙덤벙 살아도 보고
허방도 밟고 살지만
여백을 찾아 다시 시동을 켭니다
여문 마음엔 늘 난로를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게워낸 배움 되새김하려고요.
내 허락 없이 아프지도 마 엄경희
꽃도 필 때는
아프다고
불어오는 바람에게 말하잖아
진주조개는
상처가 쓰라리면
밀려오는 파도에게 하소연하는데
저녁노을도
뜨거워 견딜 수 없다고
서산마루에게 안기던 걸
하물며
사랑하는 당신이 아프려면
나에게 먼저 물어보고 아파야지
그래야
아픈 상처,
바람에게 호호 불어 달라 부탁을 하지
쓰라린 가슴은
비에게 일러
어루만져 달라 얘기를 하지
정말이야
이젠,
내 허락 없이 아프지도 마
손무덤 박노해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 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 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 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 상가처럼
외국 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 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 흐르고
프로 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
선진 조국의 종로 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 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 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 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노동의 새벽>(1984)
꽃처럼 웃을 날 있겠지요 김용택
작년에 피었던 꽃
올해도 그 자리 거기 저렇게
꽃 피어 새롭습니다.
작년에 꽃 피었을 때 서럽더니
올해 그 자리 거기 저렇게
꽃이 피어나니
다시 또 서럽고 눈물납니다.
이렇게 거기 그 자리 피어나는 꽃
눈물로 서서
바라보는 것은
꽃 피는 그 자리 거기
당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없이 꽃 핀들
지금 이 꽃은 꽃이 아니라
서러움과 눈물입니다.
작년에 피던 꽃
올해도 거기 그 자리 그렇게
꽃 피었으니
내년에도 꽃 피어나겠지요
내년에도 꽃 피면
내후년, 내내후년에도
꽃 피어 만발할 테니
거기 그 자리 꽃 피면
언젠가 당신 거기 서서
꽃처럼 웃을 날 보겠지요
꽃같이 웃을 날 있겠지요
다리 저는 사람 김기택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는데
그 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사무원 1999
산1번지 신경림
해가 지기 전에 산1번지에는
바람이 찾아온다.
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
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
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
돌모래를 끼어 얹는다.
해가 지면 산1번지에는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
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
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데
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연기가 붙어 흐늘댄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1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 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그리하여 산1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쳐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창작과 비평>(1975)-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이 시대의 아벨>(1983)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 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 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 가끔 …… 전기가 …… 나가도 …… 좋았다 …… 우리는 ……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시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 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 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2000)-
새벽편지 곽재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 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향 박재삼
아, 그래,
건재약 냄새 유달리 구수하고 그윽하던
한냇가 대실 약방…… 알다 뿐인가
수염 곱게 기르고 풍채 좋던
그 노인께서 세상을 떠났다고?
아니, 그게 벌써 여러 해 됐다고?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팔포 웃동네 모퉁이
혼자 늙으며 술장사하던
사량섬 창권이 고모,
노상 동백기름을 바르던
아, 그분 말이라, 바람같이 떴다고?
하기야 사람 소식이야 들어 무얼 하나,
끝내는 흐르고 가고 하게 마련인 것을……
그러나 가령 둔덕에 오르면
햇빛과 바람 속에서 군데 군데 대밭이
아직도 그전처럼 시원스레 빛나며 흔들리고 있다든지
못물이 먼 데서 그렇다든지
혹은 섬들이 졸면서 떠 있다든지
요컨대 그런 일들이 그저
내 일같이 반갑고 고맙고 할 따름이라네
선제리 아낙네들 고은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칫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십릿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 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어느새 개 짖는 소리 뜸해지고
밤은 내가 밤이다 하고 말
구두한컬레의 시 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 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 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 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 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 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 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5월시 1집>(1981)
서울꿩 공광규
서울 특별시 서대문구
한 모퉁이에
섬처럼 외롭게 남겨진
개발 제한 구역
홍제동 뒷산에는
꿩들이 산다.
가을날 아침이면
장끼가 우짖고
까투리는 저마다
꿩병아리를 데리고
언덕길
쓰레기터에 내려와
콩나물대가리나 멸치꽁다리를
주워 먹는다.
지하철 공사로 혼잡한
아스팔트 길을 건너
바로 맞은쪽
인왕산이나
안산으로
날아갈 수 없어
이 삭막한 돌산에
갇혀 버린 꿩들은
서울 시민들처럼
갑갑하게
시내에서 산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1983)
우리가 눈발이라면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우리나라 꽃들에겐 김명수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 틈에 뿌리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20년 후의 가을 곽재구
내 어릴 적 산골 학교 미술 시간에
나는 푸른 크레용으로 옥토끼 모양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고 그 안에 울긋불긋 우거진
단풍잎과 맑은 시내를 그렸었다.
산머루 향이 교실까지 날아들던 오후
사범 학교를 갓 졸업한 처녀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고 울으셨다.
가을 산꽃이 피고 해으름이 일고
그 가을내 나는 선생님의 눈물 방울과 같은
단풍잎과 맑은 시냇물 속에 뛰놀았지만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던 선생님의 뒷모습과
나를 쳐다보던 충혈된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 단풍잎은 지고 세월은 가고
이제는 선생이 된 내 앞에서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그림을 그린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슬픔의 푸른 크레용으로
둘러친 동강 난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이들은 평상의 얼굴로
반쪽의 땅 위에 단풍잎을 채우고
나는 충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눈을 뜨고 모른다며 살아온 날들이 가슴 후비는 날
가만히 손가락으로 그려 보는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래 나는 이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내 손으로 그린 내 땅 안에 허름하게 시든
단풍잎 하나 떨구는 것을 거부하면서
끝내는 잊혀진 옛 선생님의 눈물마저 되살아나
동강 난 눈물 방울들이 산과 바다와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뒤덮었다.
대숲 아래서 나태주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서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을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 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 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도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서울신문>(1971)
저문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문학사상>(1978)
절망을 위하여 곽재구
바람은 자도 마음은 자지 않는다.
철들어 사랑이며 추억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싸움은 동산 위의 뜨거운 해처럼 우리들의 속살을 태우고
마음의 배고픔이 출렁이는 강기슭에 앉아
종이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절망의 노래를 불렀다.
정이 들어 이제는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는 이 땅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짓밟고 간
많고 많은 이방의 발짝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이웃에게 눈인사를 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웃을 위하여 마음을 불태우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두려움에 떠는
눈짓으로 술집을 떠나는 사내들과
두부 몇 모를 사고 몇 번씩 뒤돌아보며
골목을 들어서는 계집들의 모습이
이제는 우리들의 낯선 슬픔이 되지 않았다.
사랑은 가고 누구도 거슬러 오르지 않는
절망의 강기슭에 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이 땅의 어둠 위에 닻을 내린
많고 많은 풀포기와 별빛이고자 했다
만술 아비의 축문 박목월
아배요 아배요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배도 알지러요.
등잔불도 없는 제삿상에
축문이 당한기요.
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릿고개
아배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 손이믄
아배 소원 풀어들이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이나 많이 묵고 가이소.
여보게 만술아비
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
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
망령도 감응하여, 되돌아가는 저승길에
니 정성 느껴 느껴 세상에는 굵은 밤이슬이 온다
티눈 → 까막눈
*엄첩다 : (손아래 사람의 행동에 대해) 대견스럽다.
-<경상도의 가랑잎>(1968)-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윤사월(閏四月)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상아탑)1946
길 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84
들판의 빈 집이로다 정진규-
어쩌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뜨락에 와 가득히 당도하는 저녁 나절의 저 음험한 비애(悲哀)의 어깨들 오, 어쩌랴,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뜨락엔 작은 나무 의자 하나, 깊이 젖고 있을 따름이로다 전 재산(全財産)이로다.
어쩌랴, 그대도 들으시는가 귀 기울이면 내 유년(幼年)의 캄캄한 늪에서 한 마리의 이무기는 살아남아 울도다. 오, 어쩌랴,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온 국토(國土)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이 보일 따름이로다.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다시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 재산(全財産)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들판의 빈 집이로다>(1977)-
치자꽃설화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 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바람부는 날 -박성룡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 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 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깨닫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한국전후문제시집>(1961)-
Piano Princess라 불리우는 Linda Gent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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