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는 왜 있는 집 자녀만 다닐까 권선무 (지은이)바다출판사2004-12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공공정책을 전공했다. 2004년 현재「문화일보」산업부 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2004년 국가정보원 경제단 비리 추적보도로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언론재단이 수여하는 '이달의 기자상'을 받은 바 있다. 지은책으로 <이래서 당신이 자녀교육을 망친다> 등이 있다.
목차
감사의 글
그들은 어떻게 서울대에 진학하게 됐나
왜 서울대 신입생인가
교육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서울대 신입생들을 통해 '기회균등'을 보자
교육의 기회균등이란 무엇인가
평등은 이상, 불평등은 실제
과정의 평등을 넘어 결과의 평등으로
'기회의 균등'만이 전부는 아니다
'보상적 평등주의정책' 도입을
어느 정도까지 사회적 차이를 인정할 것인가
성취도에 따른 차이는 정당한가
계층이 다르면 교육의 기회균등도 다르다
무엇이 교육의 기회균등을 가로막나
교육적 자극이 지능을 만든다
사회계층이 다르면 학습동기도 달라진다
자아개념의 차이가 행동양식의 차이를 불러온다
부모의 열망 수준이 높을수록 대학 진학률이 높다
가정환경은 성취도의 차이를 더욱 벌린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부모의 교육수준도 주요 변수다
학교효과도 적지 않다
성적은 가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서울대 신입생에 대한 실증분석
신입생 절반가량은 서울 출신
서울대 신입생 아버지의 절반은 전문직.관리직
상대적으로 높은 계층의식
'학벌 대물림'의 실체 보고서
바뀐 입시제도의 효력은 1년이면 사라진다
부모의 학력이 입학률에 미치는 효과
그래서 고교평준화를 깨자고?
국립 서울대의 입시정책을 바꿔야 한다
전문직 자녀가 농어민 자녀보다 30배 더 입학한다
공교육에 대한 정부의 과소투자가 사교육비 지출을 불러온다
서울대 자체의 입시정책도 주요한 문제다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찾아서 읽어볼 만한 글들
엄마 노릇 힘든 세상
몇 년 전 PD수첩에서 잘 사는 집안 아이들과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을 비교해서 보여주며 잘사는 집안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요즘은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 공부 잘 하는 아이를 찾을 수 없어 조건에 맞는 장학금을 줄 아이가 없다는 어느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있다. 몇 년 전 그 프로그램을 볼 때나 지금 이 책을 볼 때나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대부분 공부 잘하는 집안 아이들의 부모를 보면 전문직이고 고소득이고 엄마는 전업주부이고 엄마가 차를 운행하며 아이 교육에 전념을 쏟는 집이라는 것... 그러니 엄마 노릇하기가 점점 어렵다. 집에 있으면서 돈을 많이 버는 직업도 있어야 하고, 아이 교육에 대해 빠삭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고 운전도 잘 해서 아이를 안전하게 모시고 다녀야 하니 엄마 노릇이 더 힘들어 질 수 밖에.... 굳이 이런 책을 보고 비교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른 것처럼 머리 속에 들은 게 많아야 입으로든 글로든 뱉어날 것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니까... 저자분이 통계 자료까지 자세하게 제시하며 상류층과 중하류층 아이들 부모의 교육수준 , 생활 수준, 서울대 각 과별 입학생들의 부모님 직업을 비교해 놓으셨는데 굳이 독자님들께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내 능력껏, 소신껏 사는게 중요하고 더 중요한 것은 아이의 역량과 자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떡잎이 푸른 아이는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갈 용기와 추진력도 있는 것이니까... 이 책을 굳이 돈 주고 사서 읽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사촌 오빠는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갔다 와서 모 연구소에서 잘 나가는 연구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 오빠가 서울대학교 학생일 때는 주변에 서울대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대전에 내려와 살아 보니 서울대 졸업생 만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전 시내에서 개업을 한 서울대 출신 의사들은 자신들이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을 어떻게든지 들어내놓고 자랑스러워할 정도이다. 해마다 졸업하는 서울대 학생들의 숫자를 보면 그리 적은 수도 아닌데 그 많은 서울대 출신들은 어디에 다 있는 것일까? 세상은 서울대 출신의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 분들이 사회에서 좋은 위치, 중요한 자리에 계시는 확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은 서울대 출신이라고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부 잘 하고 똑똑하고 일 잘하는 나의 사촌... 얼마나 꼼꼼하고 외곬수인지 존경스러울 정도다. 남에게 피해 안주고 자기 능력껏 잘 먹고 잘사는 의지가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말 사람답게 사람 노릇하면서 사는게 무엇인지는 모르는 양반인걸 보면 서울대 출신이라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대전복수동정지윤 2005-12-17
경멸과 동경의 SKY캐슬... 한국은 왜 이 지경인가
[교육 정의를 부탁해①] 특권의식에 취한 그들만의 '스카이 공화국'
딸을 서울 의대에 보내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한서진(오른쪽, 염정아 분)과 가치관이 다른 이수임(이태란 분)이 대립하는 장면. 두 사람 사이로 고가의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 산수화"가 보인다. ⓒ JTBC 화면 갈무리
JTBC 드라마 <SKY캐슬>을 보며 아내가 말했다.
"에휴, 서울대 의대가 뭐라고 저 난릴까. 아이 의대 보내려고 돈 수십억 원을 쓰고 엄마가 자살까지 하고... 정말 한심하다 한심해."
그러던 아내가 5분 후 다시 말했다.
"근데 스카이캐슬 저 집 진짜 좋다. 인테리어도 고급지고, 염정아 귀걸이도 너무 예쁘다. 나도 저런 데서 살고 싶다."
그 장면에선 주인공 한서진(염정아 분) 집에 걸린 김종숙 작가의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 산수화>가 고급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경멸하면서도 동경하는 그들의 삶
깜짝 놀랐다. 나 역시 아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욕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들처럼 살고픈 이중적인 마음. 대중의 이상과 욕망 사이에 자리한 이 틈을 교묘히 파고든 게 이 드라마의 인기 비결 아닐까.
학벌문제와 입시교육을 꼬집는 데 기획의도가 있었을 것이 분명한 이 드라마를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스카이(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더 강렬하게 열망하게 됐을지 궁금하다. 실제로 요즘 학원가에는 'SKY캐슬반'이 생기고 드라마처럼 입시 컨설팅을 해준다는 광고가 유행이라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스카이는 우뚝 솟은 '성채(castle)'다. 스카이라는 최고의 학력·학벌 자원을 얻으면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릴 가능성이 크다는 기대가 여전히 존재한다. 저성장·고실업 시대를 맞아 명문대 출신의 생존경쟁도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지만, 이들이 적어도 어디 가서 노골적 차별과 배제를 겪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견고하다.
바꿔 말하면 소수 명문대 출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더 크게 벌어진 사회 격차 속에서 패배자·낙오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스카이는 여전히 최고의 간판이자 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선망받는 스카이 출신 엘리트들은 개인의 욕망과 목표를 이루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의 공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에는 얼마나 기여하고 있을까? 스카이가 내세우는 교육이념은 '진리는 나의 빛(서울대)' '진리와 자유(연세대)' '자유, 정의, 진리(고려대)' 인데 이들은 과연 진리를 추구하며 정의롭게 살고 있을까?
서울대 법대를 나온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이 보여주듯, 현실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법조계, 관계, 재계, 학계, 언론계 등 주요 분야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부패와 부조리 사건을 보면 우리나라 엘리트는 사회적 책임감과 윤리의식에서 '바닥'이 아니냐는 절망감마저 든다. '이명박근혜' 시절의 실정과 국정농단은 말할 것도 없고 촛불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스카이출신 엘리트의 '파파괴(파도 파도 괴담)'는 끊이지 않는다.
스카이 공화국의 실상은...
한국은 스카이 출신 엘리트들이 각 분야의 주요 자리를 꿰차고 있는 '스카이 공화국'이다. 법조에서 스카이 출신은 전체 판사의 80%(2015년 대법원 자료), 검사의 70%(2014년 법무부 자료)를 차지한다. 행정부에선 차관급 이상 고위공무원 중 스카이 출신이 67%(2017년), 입법부에서는 20대 국회의원 중 스카이 출신이 47%에 달한다. 재계에서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 중 스카이 출신이 44.8%(2018년 CEO 스코어 조사), 언론계는 25개 언론사 주요간부 중 스카이 출신이 75%(2014년 <미디어오늘> 조사)에 이른다.
그런데 한국행정연구원의 2017년 사회통합 실태조사에 나타난 국민들의 기관별 신뢰도를 보면 국회가 15%로 조사 기관 중 꼴찌였고, 대기업 31%, 검찰 31%, 법원 34% 등 주요기관이 모두 바닥권이다.중앙정부도 문재인 정부 출범 후 41%로 상승했지만, 지난 2016년 조사에서는 25%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매년 실시하는 사회신뢰도 조사에서 최상위권인 스위스, 덴마크 국민들의 정부, 사법부 등 공공기관 신뢰도가 70~80%인 것과 대조된다.
언론 신뢰도 역시 참담한 수준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영국 옥스퍼드대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와 함께 발간한 '디지털뉴스 리포트 2018'에 따르면 우리나라 뉴스 신뢰도는 조사 대상 37개국 가운데 꼴찌였다. "거의 항상 대부분의 뉴스를 신뢰한다"는 항목에 핀란드 국민은 62%가 '그렇다'고 응답한 반면 우리나라 국민은 25%에 그쳤다.
▲ 한국행정연구원의 2017년 기관별 신뢰도 조사 결과. ⓒ 한국행정연구원
미국 콜게이트 대학 마이클 존스턴 교수는 이런 한국을 '대표적인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 국가'라고 표현했다. 사회 엘리트층이 자기네끼리 특권의식을 가진 '신성가족'을 이루고 인맥과 연줄을 통해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는 것이다. 한국 제일의 엘리트 양성소인 스카이는 한국 사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그 책임을 온전히 짊어지려 한 사람들도 있다. 멀게는 4.19 혁명 때 독재자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엘리트 대학생들이 있다. 군부 독재 치하에서 졸개 노릇을 할 수 없다며 고시를 포기하고 '대학생 친구'가 필요한 공장과 농촌으로 달려갔던 인재들도 있다. 가까이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라는 명문을 남기고 고려대를 자퇴한 김예슬이 있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의 '부끄러움' 릴레이도 기억할 만하다. 서울대 학생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부끄러운 동문상 설문조사'를 벌이고 '최악의 동문상' 1위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꼽았다. 또 대한민국 헌정사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친 동문을 선정하는 '멍에의 전당'에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올렸다.
연세대도 최악의 동문상으로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대표 친박),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민중은 개돼지" 발언) 등 5명을 뽑았다. 고려대 학생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뇌물과 횡령 혐의 등으로 구속된 후 교내 '이명박 라운지'의 이름을 바꿔달라고 학교 측에 요구했다.
이제 한국 사회에는 스카이를 부러워하기보다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여기서 부끄러움이란 한국의 이기적 엘리트와 그런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 시스템, 그리고 입시경쟁을 부추기는 지배적 가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말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스카이가 정점이 되는 피라미드 구조를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순간, '성공을 향한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류·삼류 인생'이라거나 '열등감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방해꾼'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은 '불의'하다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자. <SKY캐슬>에서 주변의 광기 어린 '입시 부조리극'을 파헤치는 동화작가 이수임(이태란 분)은 벨기에 정신분석학자 파울 페르하에허의 책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를 탐독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경쟁과 성과주의가 개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뒤집어 놓아 극단적 이기주의자, 즉 괴물을 만든다고 분석한다. 페르하에허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윤리와 사회가 '시장'에 복종한다"며 공적 가치가 훼손된 대표 사례 중 하나로 '지식 공장이 된 대학'을 꼽았다.
페르하에허가 한국 교육을 들여다보면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여기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극심한 경쟁과 양극화가 득실한 한국 사회에서 지옥 같은 입시전쟁, 점수 몇 점에 목숨을 걸게 만드는 교육제도는 우리 아이들을 영락없는 괴물로 만들고 있다.
제대로 배운다면 투철한 공적 사명과 책임감을 지닌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인재들, 남다른 개성과 재능으로 성취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학생들이 한국 교육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 획일화한 부모의 욕망, 사회의 주문에 복종하는 존재로 굴절되고 만다. 이런 교육은 불의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스카이의 화려한 겉모습을 부러워하는 대신 그 속의 거대한 불의를 부끄러워하는 용기를 내겠다.
한국 엘리트는 '썩은 나무'의 '상한 열매'
[교육 정의를 부탁해 ②] 실패한 교실이 낳은 나쁜 인재들
▲ 최근 ‘5.18 폄훼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사법고시를 거쳐 춘천지검 원주지청장을 지낸 검사 출신이다. ⓒ KBS뉴스 ⓒ 곽영신
"잘난 사람,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 권력자들일수록 타인의 고통과 불운에 대한 무관심 내지 둔감성이 유별나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편집인, <경향신문> 칼럼)
"법과 의료, 종교, 경제, 사회, 문화단체의 수장들 중에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전우용 역사학자, 페이스북)
"그들은 우리 기대를 저버리고 자본, 권력과 결탁해 제 배를 불리는 데만 힘썼다." (조영학 번역가, <서울신문> 칼럼)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한국 엘리트를 보면 한국 교육을 안다. '스카이'(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명문대를 나와 어려운 고시나 공채를 거쳐 사회를 좌우하는 위치에 오른 엘리트, 그들이 바로 한국 인재양성 시스템이 맺은 열매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 배만 불리고' '타인의 고통과 불운에 무관심하며' '존경할 수 없는' 엘리트를 길러낸 한국 교육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각 분야 엘리트들은 조직 특유의 생리와 문화에도 영향을 받지만, 그 전에 제도권 교육을 거치며 일찌감치 태도와 가치관을 형성한다.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은 저서 <대한민국의 시험>(2017)에서 "한두 명이나 한두 분야가 아니라 온갖 분야에서 사회지도층의 비리가 일어난다면 나라 전체의 구조적 문제로 보아야 한다"며 "그 한 축에는 인재양성과 선발을 담당하는 교육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 교육이라는 '썩은 나무'가 한국 엘리트라는 '상한 열매'를 맺고 있다는 얘기다.
"점수 1~2점에 죽고 사는 비루한 인간"
한국 교육은 대체 뭐가 잘못됐을까? 가장 큰 문제는 경쟁과 서열 중심의 입시교육에만 치중해 도덕성과 정의감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교육의 본래 역할은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육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오로지 '좋은 대학'을 목표로 경쟁하는 '점수 기계'를 찍어내는 데 치우쳐 있다.
핀란드 등 '협력'을 강조하는 교육 선진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우리 교실의 성적 경쟁은 유별나고 지독하다. 상위권 학생은 성공을 향한 욕망으로 '인정투쟁'에, 중하위권 학생은 낙오에 대한 공포 속에 '생존투쟁'에 뛰어들어 앞만 보고 달린다.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는 없다. 학창시절 내내 옆 친구와 점수, 등수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만 했던 아이가 적절한 공감능력과 이타심을 갖추고 사회정의와 공공적 책임에 헌신하는 인재로 성장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철학자 김상봉은 <학벌사회>(2004)에서 "한국의 교육은 학생들을 공동체의 복리와 정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성숙한 인간으로 기르지 못하고 그저 자기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점수 1~2점에 죽고 사는 비루한 인간들을 길러낼 뿐"이라며 '전인교육의 붕괴'를 한탄했다.
특히 상위권 학생일수록 경쟁자의 정체가 명확하고 대립관계 역시 분명하기 때문에 언제나 '경쟁자의 실패를 바라는 부도덕한 심리상태'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하게 된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처음으로 한국의 학벌문제를 깊이 분석한 이 책은 15년 전에 나왔지만, 피 튀기는 입시전쟁은 그동안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한 발짝도 나아지지 않았다.
윗사람 말씀이 '정답', 나만의 생각은 오답?
▲ 서울대 최우등생들의 공부방법을 심층분석한 이혜정 소장의 저서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 다산에듀
한국 교육의 또 다른 문제는 주입식·암기식 학습으로 비판적 사고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스카이 대학에 진학하는 우등생들은 이른바 '공부의 신'이지만, 그 공부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보다는 주어진 정답을 수용하는 행위에 가깝다.
이혜정 소장이 서울대에서 4.3 만점 중 4.0 이상을 받은 최우등생의 공부 방법을 심층 분석한 책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2014)를 보면 이들의 비결은 놀랍게도 '교수님의 말씀을 전부 받아 적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 교수의 말을 '농담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다 적는다는 최우등생이 전체 인터뷰 응답자 46명 중 87퍼센트에 달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교수와 의견이 다를 경우 90%의 최우등생이 자신의 생각을 버린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교수님이 저보다 경험도 많고 연구도 많이 했으니까 교수님 의견이 더 타당한 게 사실이잖아요?"라며 "내 견해보다 학점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이 소장이 서울대와 미국 미시간대 학생들의 학습전략을 비교 연구한 바에 따르면, 서울대 학생들은 교수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최대한 그대로 흡수하려고 하는 반면, 미시간대 학생들은 교수와 다른 생각을 하거나 교수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수재들의 수동적·수용적 학습 전략의 결과는 무엇일까? 성공을 위해 '주어진 정답'에 무조건 순응하는 태도는 권력자의 불합리한 지시나 조직의 부조리한 문화에도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복종하는 한국 엘리트의 모습과 그대로 겹친다. 그들에게 윗사람의 말씀은 자기 보신과 입신을 위한 '정답'이다.
한국 사회에선 이렇게 '정답 맞히는 능력'을 잘 갖춘 사람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지도층 행세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없는 엘리트는 '국정농단'과 '재판거래' 등에 협력한 관료와 법관들처럼 결국 권력과 자본에 이용당하는 불의의 도구가 될 뿐이다.
'승자독식'으로 내면화한 특권의식
승자에게 과도한 보상을 주고 특권의식을 갖게 하는 것 역시 한국 교육의 심각한 문제다. 고등학교에선 상위권 학생들을 '될 놈'으로 구분해 내신 성적과 상장 등을 '몰아주기' 한다. 단 하루 시험으로 평가하는 수능을 잘 치러 명문대에 진학한 고득점자에게는 사회적 인정 등 유무형의 보상이 평생 동안 따른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전근대적 인재선발 제도인 고시에 합격한 사람은 단숨에 중견급 공직자로 신분이 수직 상승해 대중 위에 군림한다. 공채라는 획일화된 선발 절차를 뚫은 자 역시 높은 연봉과 정규직의 안정성을 누리며 탈락자와 '구분 짓기'를 당연하게 여긴다.
▲ 서울 법대 4학년 때인 만 스무 살에 사법고시에 ‘소년급제’ 했으나 30여년 후 ‘국정농단’과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 JTBC 썰전 ⓒ 곽영신
한국이 압축성장하는 가운데 철저히 효율성을 추구한 '수능-고시-공채'는 응시자의 역량과 개성, 도덕성과 공감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제도지만 '단 한 번 시험으로 인생을 좌우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어려운 시험 하나를 통과해 과도한 보상을 받은 엘리트들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특권과 지위를 '실력과 노력의 결과'라며 당연하게 여긴다. 또 자신을 다른 이보다 우월하게 여기는 선민의식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한다. 나아가 공적 지위를 사익 추구를 위해 남용하기도 한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지난 2016년 한 칼럼에서 "고시제도가 일종의 특권 지위를 보장해주는 국가공인 특허권 획득 경쟁이기 때문에 지망자들의 사적 욕망이 공공심을 압도하며 결국 국가를 사익추구의 장으로 만든다"며 "요즘 세상의 지탄을 받는 '고위 공직자'들은 바로 고시제도가 만들어낸 '괴물'이자 어쩌면 이 제도의 희생자"라고 지적했다. 최근 로스쿨과 국립외교원의 도입으로 고시 자체는 사라지고 있지만, 한국식 '시험'을 통한 인재선발은 여전하다.
몇 배로 달려야 정의로워지는 사회
▲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엘리스>에서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달리는 붉은 여왕. ⓒ 북폴리오
"더 빨리! 더 빨리! 자, 여기에서는 보다시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단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만 해!"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는 주변 세계가 다 움직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고, 끊임없이 달려야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다른 곳에 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을 달려야 한다. 한국의 교육 현실도 이와 같다.
경쟁적·수동적·획일적인 '이상한 교육'에 가만히 순응하면 어느새 이기적이고 불의에 굴복하며 특권의식에 젖은 '이상한 엘리트'가 되고, 제 정신을 차리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겨우 정상인 범주에 들 수 있다. 조금 더 정의롭고 이타적인 인재가 되려면 권력과 조직에 저항하고 손해를 감수하는 아주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교육은 불의하다. 우리는 유별나게 용감하지 않은 보통 사람도 믿음직한 교육 시스템에서 충실히 공부하면 조금이나마 사회가 성숙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정의로운 인재'로 성장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한국 교육이라는 '썩은 나무'를 뿌리부터 소생시킬 혁신적인 변화가 절실하다.
있는 집 애들만 서울대... 악마는 '한국 엘리트'를 사랑한다
[교육 정의를 부탁해 ③] 계층 대물림 통로 된 명문대
입시 점수로 아이들을 줄 세우는 한국 교육은 불의(不義)하다. 진리를 탐구하고 사회를 개선할 인재를 키워내는 본연의 역할 대신 자원 쟁탈을 위한 경쟁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 경쟁마저 공정하지 못해, 교육은 '이미 가진 자'의 것을 더 공고하게 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교육 정의(正義)' 회복이다. 배움의 기회와 과정, 결과를 공평히 해서 학생 개개인이 모두 성장할 수 있게 돕는 것이 교육 정의다. '한국 교육에서 어떻게 정의를 살려낼 수 있을까'를 모색하고자 한다. - 기자 말
▲ 이른바 ‘명문대’에 최근 입학하는 학생들의 가장 주요한 공통점 중 하나는 ‘부유층 자녀’라는 점이다. 사진은 서울대 정문 야경. ⓒ 서울대 홈페이지
한국의 학벌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스카이'(SKY, 서울‧고려‧연세대) 등 명문대에는 과연 어떤 학생이 입학할까? 두뇌 회전이 빠르고 똑똑한 학생? 다양한 재능과 노력 의지, 성실한 태도를 다 갖춘 학생? 외우기를 잘하고 시험을 잘 보는 학생? 모두 높은 확률로 맞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특성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바로 '부모가 부유하고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가정의 자녀'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명문대 학생 70%는 '부잣집 자녀'
그들의 부모는 부자다.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한국장학재단에서 받은 '2018년 1학기 서울‧고려‧연세대 재학생 소득분위 산출 현황'에 따르면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스카이 재학생(43%) 중 소득 10분위(월 소득 1200만 원 이상) 비율이 30%, 9분위(730만 원 이상) 비율이 16%로 '고소득층' 비중이 46%나 됐다. 이들 학교의 저소득층(기초·차상위계층) 비중은 6%에 불과했다.
반면 스카이를 제외한 전국 대학에서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학생 중 9·10분위 고소득층 비율은 각각 13%, 12%였고, 기초·차상위계층 비율은 8%인 것으로 나타났다. 스카이의 고소득층 비중(46%)이 전체 대학(25%)보다 2배 가까이 많은 것이다.
▲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한국장학재단 ‘2018년 1학기, 서울·고려·연세대 재학생 소득분위 산출 현황’ 자료에 따르면 스카이 재학생 중 고소득층 비중이 전국 대학의 고소득층 비중에 비해 2배 가까이 높다. ⓒ 김해영 의원실
국가장학금 미신청자까지 고려하면 최상위권 대학생의 2/3 이상이 고소득층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한국장학재단의 '2014∼2016년 대학별 국가장학금 신청 현황'을 토대로 고소득층(9‧10분위) 비율과 국가장학금 미신청자 비율을 반영해 분석한 결과, 스카이 등 상위권 6개 대학의 고소득층 추정 학생 비중이 70% 내외에 이르렀다.
미신청자는 국가장학금을 받을 수 없는 외부 장학금 수혜자 또는 B 학점 미만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대학 등록금이 부담스럽지 않거나 소득 수준이 드러나길 원치 않는 부유층으로 추정된다. 이들 상위권대는 국가장학금 미신청자 비율이 50% 이상으로 다른 대학보다 20~30%포인트 높았다.
서울대 신입생 아버지 절반은 '전문직' 또는 '관리직'
그들의 부모는 또 잘 나간다. 서울대 대학생활문화원이 매년 시행하는 '신입생특성조사' 자료를 살펴보면, 2000년대 이후 최근까지 서울대 신입생 아버지의 직업 비율은 의사‧변호사‧판검사‧연구원‧교수‧교사 등 전문직이 25~30%를 차지했다. 경영주‧대기업 간부‧고급 공무원‧사회단체 간부 등 경영관리직도 15~20%였다. 입학생 10명 중 4~5명의 아버지가 이른바 '상층' 지위에 있는 셈이다. 반면에 서울대생 중 아버지 직업이 농축수산업인 학생은 1~3%, 비숙련노동자는 1~2%, 무직은 1~3%에 그쳤다.
서울대 신입생 아버지의 직업 중 전문직과 관리직 비중은 1980년대 20%에서 꾸준히 증가했고 농축수산업은 10% 중반 정도에서 꾸준히 감소해왔다. 지난 2000년 서울대 신입생 부모의 직업을 분석한 기획 기사로 큰 반향을 일으킨 권선무 <문화일보> 기자는 저서 <서울대는 왜 있는 집 자녀만 다닐까>에 "2000년 이후의 서울대, 특히 법대‧경영대‧의대 등에서는 서울에서 자라 스스로를 중‧상류층이라고 생각하는 전문직‧관리직 집안 자녀들이 주류가 됐다"고 분석했다.
이뿐일까. 그들의 부모는 많이 배웠다. <중앙일보>가 지난 3월 스카이 신입생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아버지 학력이 4년제 대졸 이상인 경우가 77.5%, 어머니 학력이 4년제 대졸 이상은 71.5%에 달했다. 부모 양쪽이 모두 4년제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 소지자인 경우도 61%나 됐고, 모두 고졸 이하인 경우는 한 명도 없었다. 이들 부모에 해당하는 연배가 대학에 진학한 1990년 고등교육기관(2년제 이상) 진학률은 남성이 25.7%, 여성이 19.1%였다. 스카이 신입생의 부모는 또래보다 대학진학률이 3배가량 높았다는 얘기다.
최성수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논문 '한국에서 교육 기회는 점점 더 불평등해져 왔는가(2018)'에서 대졸 부모의 자녀와 고졸 부모의 자녀가 상위권대(상위 15개 대학 및 의약학 대학)를 졸업할 확률 격차가 1970년대보다 2000년대 이후 2배가량 커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고학력 부모의 자녀가 명문대에 진학할 가능성이 예전보다 더 높아진 것이다. 최 교수는 "부모 학력에 따른 교육 기회 불평등이 4년제 대학 졸업 여부에서 상위권 대학 졸업 여부로 이동해왔다"며 "앞으로는 기회 불평등이 대학서열 외에 전공 선택, 영어 연수, 대학원‧전문대학원 진학 등의 영역으로 이전해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부자 학생이 실력을 '치장'하는 것은 불공정
풍부한 경제‧사회‧문화 자본을 가진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명문대에 많이 진학하는 게 뭐가 문제일까? 잘난 부모가 자녀에게 더 좋은 교육 기회를 주기 위해 아낌없이 지원하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학생이 우수한 성과를 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 않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문제는 사회 구성원에게 교육 기회를 배분하는 과정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육 기회가 자기 실력이나 노력 또는 '약자 배려'와 같은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부모의 돈과 배경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김세직‧류근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논문 '학생 잠재력인가? 부모 경제력인가?(2016)'에 따르면 고소득 지역인 서울 강남구와 저소득 지역인 강북구 학생의 지능·노력·유전 등 잠재력을 분석한 결과 둘 사이 서울대 추정 합격률은 1.7배 차이가 났지만, 2014년 실제 서울대 합격률은 20배 넘게 차이가 났다. 부모의 소득 수준이 학생의 잠재력보다 더 큰 영향을 준 것이다. 김 교수는 논문에서 "학생들의 대학 합격률 차이의 8~9할 이상이 타고난 잠재력 차이보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른 '치장법(사교육, 선행학습, 특수고 진학)'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고 밝혔다.
▲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대학생은 ‘부모의 재력’을 성공 요소 중 5위로 꼽았지만 한국 대학생은 1위로 꼽았다. ⓒ KBS 명견만리
부잣집 학생이 진짜 실력보다 그것을 돈으로 '치장'했을 때 더 좋은 교육 기회와 학벌 자원을 얻을 수 있다면 이런 교육은 불공정하다. 가난한 학생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통해 부자 학생을 따라잡거나 뛰어넘을 수 없다면 이런 교육은 불공정하다. 한국처럼 교육이 한 사람의 인생을 크게 좌우하는 사회에서 교육 기회를 얻기 위한 게임 자체가 공정하지 않다면, 자기가 노력한 만큼 성취할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가 무너지고 공동체는 불안해진다.
실제로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과 교수의 '청년의 성공요인에 관한 인식조사(2017)'에 따르면, 한국ㆍ중국ㆍ일본ㆍ미국 대학생 4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청년의 성공 요인 1순위로 중국과 일본은 '재능'을 미국은 '노력'을 꼽은 반면 한국은 압도적으로 '부모의 재력(50.5%)'을 꼽았다.
교육 격차로 정치·경제·사회적 불평등 심화
또 다른 문제는 사회 구성원이 교육의 결과로 누리는 성취와 보상 역시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상류층의 교육을 통한 계층 대물림으로 경제·사회적 불평등이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격차 실태 종합분석(2017)'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할 뿐 아니라 첫 일자리에서 받는 임금 수준 또한 높다.
▲ 부모 소득에 따른 자녀의 대학 진학 유형과 첫 일자리 임금 수준. 부모가 고소득층일수록 자녀는 서울 4년제에 대학에 진학해 고임금을 받고, 부모가 저소득층일수록 자녀는 전문대학에 진학해 저임금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 한국교육개발원
2014년 대학 졸업생 중 고소득 가정(월 소득 700만 원 이상)의 자녀는 서울 4년제 대학에 24%가 진학했고 그들의 첫 일자리 임금은 평균 242만 원이었다. 저소득 가정(월 소득 300만 원 이하) 자녀는 서울 4년제 대학에 8.8%만 진학했고 첫 임금이 평균 188만 원에 그쳤다. 현대경제연구원의 '계층상승 사다리에 대한 국민인식 설문조사(2017)'에서 국민 80%가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 기회가 점점 더 적어지고 있다고 응답한 데는 이런 현실이 반영돼 있다.
정치적 불평등도 마찬가지다. 양질의 교육 기회를 거머쥔 상위계층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 언어와 능력, 인맥을 갖추고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정책에 반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교육 기회를 누리지 못한 하위계층은 자기 의견을 관철할 도구와 자원이 부족해 의사결정에서 소외되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제도 변화를 끌어낼 수 없게 된다. 이처럼 교육이 계층 이동과 사회 평등에 기여하지 못한 채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사회적 격차를 더 벌린다면, 이런 교육은 두말할 것 없이 불의하다.
한국 사회 살리려면 '교육 정의' 실현해야
"악마는 엘리트를 사랑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다. 교황은 지난해 <바티칸 인사이더>와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 안에 뿌리를 두지 않고 역사 속 대중과 연관 없이 사는 것은 병든 삶"이라며 "엘리트는 대중과 섞여 사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여기서 엘리트는 사회 계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대중과 동떨어져 자신만의 성을 쌓고 부와 권력, 명예, 문화 자본을 독차지하는 게 '엘리트의 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승자독식 교육 시스템 속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신분제를 공고히 하는 데 몰두하면서, 평범한 대중과 소외된 계층을 위한 교육 기회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부유층 엘리트들이야말로 악마가 사랑하는 '대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좋은 사회는 가난하고 못 나고 배우지 못한 부모의 자녀들도 충분히 수준 높고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육 기회를 분배할 때는 개인의 실력과 잠재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되,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지원과 배려를 제공해 환경 차이로 인한 격차를 바로잡아 줘야 한다. 또 교육 결과에 따른 개인의 성취에 합당한 보상을 주되, 승자가 독식하지 않고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지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소외계층에 더 많은 입학기회와 장학금을 주고 대학 공공성 확대, 무상 교육 확대, 학교 서열 철폐, 임금 및 지위 격차 해소 등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지금처럼 승자가 계속 승리하기 위해 나머지를 들러리 세우는 교육은 이 땅을 더 '헬조선'으로 만들 뿐이다. 한국 사회를 살리려면 '교육 정의'부터 세워야 한다./ 곽영신(sampong6) 오마이뉴스
서울대 '간택받으려고' 이렇게까지... 고등학교서 벌어진 일들
[아이들은 나의 스승 162] 학벌주의 조장하는 대학 탐방 프로그램 폐지해야
지난 주말 휴게소에서 서울 소재 '명문대' 탐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고등학생들을 만났다. 지방의 한 인문계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아이들이 1박 2일 일정으로 진로탐색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지인이 근무하고 있는 학교라 반가운 마음에 부러 몇몇 아이들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몇 학년이니?"
"1, 2학년 전체에서 성적에 따라 선발된 학생들이에요."
그저 몇 학년이냐고 물었을 뿐인데 한 아이가 '성적에 따라 선발됐다'는 걸 으스대며 대답했다. 낯선 이의 느닷없는 질문에 쭈뼛거릴 만도 한데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한껏 들뜬 목소리였다. 공부를 못하면 애초 참가할 수 없다는 걸 나름대로 자랑하고 싶었던 듯하다
"서울과 수도권에 위치한 학교가 진짜 대학"
▲ 서울대학교 정문 대학 탐방은 언제부턴가 대부분 지방 소재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진로탐색활동이다. 지방의 고등학생들이 서울의 내로라는 명문대 캠퍼스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학습 동기가 부여될 것이라는 취지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 연합뉴스
이름하여 대학 탐방. 언제부턴가 대부분 지방 소재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진로탐색활동이다. 지방의 고등학생들이 서울의 내로라하는 '명문대' 캠퍼스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학습 동기가 부여될 것이라는 취지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더러 해당 대학 홍보처에서 직원이 나와 안내하기도 하지만, 대개 동문 선배가 후배들을 챙기는 것이 보통이다. 또 가까운 수도권이 아닌 다음에야 당일치기인 경우가 거의 없어 게스트하우스나 대학 기숙사 등을 빌려 숙박을 하게 된다. 어떻든 소수만 참여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상경하고 귀성하는 시간을 빼면 서울에서 둘러볼 수 있는 대학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사실상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비롯한 대학 두세 곳이 전부다. 교통 체증이 일상인 서울에서 한 대학에서 머무는 시간은 기껏해야 한두 시간에 불과하다. 그저 '관광지 투어'하듯 둘러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 대학이 지방의 아이들을 배려해 초청한 건 아니다. 안내 등 대학 측의 도움을 받으려면 최소한 몇 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하고, 그나마 그들이 가능한 시간에 맞춰 고등학교가 학사일정을 조정해야 한다. 철저히 대학이 '갑'이고 지방의 고등학교가 '을'이다.
참고로 지방 소재 대학의 경우엔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뀐다. 알다시피 거점 국립대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 소재 대학들의 경우 모집 정원조차 채우지 못한 학과가 부지기수다. 지방대 교수들은 입시철이면 '모객'을 위해 고등학교 3학년 교무실을 전전하는 '영업사원'이 된다.
얼마 못 가 지방대의 상당수가 문을 닫게 되리라는 걸 아이들이 모를 리 없다. 지금의 아이들은 서울과 수도권에 있는 학교가 '진짜 대학'이라 여긴다. 명문대는 'SKY'를 말하고, '과 잠바(대학 로고가 적힌 점퍼)를 입고 다닐 수 있는' 대학은 서울 소재 상위 10개 대학 정도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진로탐색활동의 일환이라지만, 단언하건대 대학 탐방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대놓고 학벌주의를 조장하는 반교육적인 활동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골라 무작정 졸업 후 서울로 올라가라며 등 떠미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나고 자란 고향에 머물며 헌신하도록 이끌기는커녕 어떻게든 고향을 등지라고 가르치는 게 과연 온당한가.
▲ 2014년 12월 전남 목포의 한 고등학교에 걸린 "특정학교 합격 현수막"이다. 현수막에는 "서울대 5명!! 일반고 전남최다 합격!"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소중한
그렇게 서울로 떠난 지방의 인재들은 선거에 출마하거나 은퇴 후가 아니면 결코 고향을 향해 눈길을 주지 않는다. 명문대에 합격이라도 하면 교문과 마을 어귀에는 학교와 고향을 빛낸 얼굴이라며 경축 현수막을 내걸린다. 그러나 그들은 현수막이 걸리는 순간부터 이미 고향을 떠난 '서울 사람'이다. '과잠을 입어보는 게 소원'이라는 수많은 지방의 인문계고등학교 아이들은 '잠재적 서울시민'이다.
학벌주의의 폐해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교사가 진로탐색활동이라는 사탕발림으로 미래세대 아이들을 학벌구조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모습 같아 참담하다. 학생 수가 크게 줄었어도 대학입시 경쟁이 여전히 치열한 데에는 교사의 책임이 결코 작지 않다. 대학 탐방은 지방의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자신의 자존감에 생채기를 내는 자해 행위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등학교 교사가 중학교 교사나 초등학교 교사를 아이들의 발달단계에 따라 지도하는 동등한 교육자로 대하듯 대학교수 역시 다를 바 없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한 뒤, 더 큰 배움을 위해 진학한 학생들을 지도하는 소임일 뿐이다. 그런데 학벌주의에 경도된 고등학교 교사들은 명문대를 마치 신전인 양 떠받들며 교수들에게 아이들을 받아달라고 읍소하는 꼴이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의 모든 교육과정이 대학의 입맛에 맞게 짜이게 된다. 거칠게 말해 서울대에서 필요하다면 없던 과목도 개설되고, 수능과목이 아니면 교육과정에 엄연히 등재된 과목도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다. 창의적 인재를 육성한다며 문·이과를 통합하면 뭐하나. 대부분 학교가 수능 응시 과목별로 학급을 편성하여 버젓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갑'인 대학의 간택을 받기 위해 교육과정과 지침조차 무시하고 온갖 편법과 불법이 판치는 곳이라면 더는 학교라 부를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더 많은 아이를 명문대에 보낸다고 한들 그들이 온전한 시민으로 성장할 리 만무하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걸 몸으로 터득한 아이들이 만들어갈 세상이 멀쩡할 리 없지 않은가.
대학 탐방 프로그램이 지닌 더욱 큰 문제는 명백한 특혜라는 점이다. '될성부른 나무'만 골라 가는 것도 그렇지만, 상당수의 학교가 탐방 비용을 학교발전기금 등에서 지원하고 있다. 학교 측에선 연간 학사일정에 포함되어 있는 데다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와 자문을 거쳐서 규정상 문제 될 게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적을 기준으로 소수만 뽑아 혜택을 몰아주는 행태를 두고 규정을 운운하는 건 뻔뻔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과거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을 따로 뽑아 '특별반'을 별도로 운영하던 시절이 있었다. 냉난방 시설부터 최신 책걸상까지 납부금은 같아도 성적에 따라 처우가 달랐다.
당시 학생회에서 이를 문제 삼자 '특별반' 운영을 찬성하던 한 교사는 "민주주의는 합리적 차별"이라고 말했다. 물론 성적을 기준 삼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냐는 한 아이의 질문에 그는 대충 얼버무린 채 서둘러 자리를 떴지만. 그 어떤 것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학생과 학습 동기 부여를 위해 차별이 불가피하다는 교사와의 언쟁이었지만, 당시 아이들의 주장은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특권과 반칙이 횡행하는 학교, 지금부터라도 변해야
오랫동안 특혜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자기가 받은 대우를 특혜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 특혜를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고, 외려 특혜가 주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발끈하기 일쑤다. 다양한 교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을 못 견뎌 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공부를 잘해서 특혜를 누리는 게 잘못된 건가요? 아니꼬우면 공부 잘하면 될 것 아니겠어요.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전해주세요."
얼마 전 한 아이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수업시간 성적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장학금을 독식하는 건 옳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대뜸 이렇게 반문했다. 어차피 성적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게 상금을 준 것이 대체 뭐가 문제냐는 투였다.
특권과 반칙이 횡행하는 현실은 일찌감치 학교에서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고등학교 땐 산출 등급으로 구분 짓고,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명문대와 지잡대로 나누고, 졸업 후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아이들 스스로 갈라치는 현실 앞에 교사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누구 말마따나 생각하는 대로 사는 교사는 보이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교사들만 넘쳐난다.
인문계고등학교의 대학 탐방 프로그램은 '남들 다 하니 따라 하는' 관행이 되어 소수 아이의 특권 의식을 부추기고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 소수의 특권 의식과 다수의 무력감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 시대의 화두인 '적폐 청산' 움직임에 학교라고 예외일 순 없다.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는 프로그램이라면 당장 폐지되어야 옳다./글: 서부원(ernesto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탄생
파울 페르하에허 (지은이),장혜경 (옮긴이)반비2015-11
원제 : Identiteit : und ich (2012년)
파울 페르하에허 (Paul Verhaeghe) (지은이) 벨기에 헨트 대학의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이다. 1998년에 출간된 『고독한 시대의 사랑』은 학술서임에도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2008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2000년 출간된 『정상성과 장애들에 관하여』의 영어판은 괴테상을 수상했다. 2000년 이후로 세계정신분석학회(IPA)의 후원하에 신경과학과 정신분석학의 관계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10년에는 뉴욕에 거주하는 세계적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제안으로 그녀의 작품 세계에 관한 에세이를 집필하기도 했다. 2012년에 출간된 이 책은 여러 차례에 걸쳐 행해진 강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출간 즉시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서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
1부 정체성 형성 과정이 달라졌다
1장 정체성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정체성이 있는가
정체성은 동화와 분리라는 양 극단의 긴장지대에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우리의 뇌가 아니다
가족 서사와 민족 서사
자존감과 자기혐오
우리가 습득하거나 습득하지 않은 가치관 및 규범들
공격성과 공포, 동일성과 차이의 균형
정체성은 이데올로기다
2장 윤리
자아실현에서 자기부정까지
고대의 윤리: 좋은 관습이 좋은 성격이다
기독교의 윤리: 인간은 철저히 나쁘다
급진적 프로테스탄트, 급진적 상인, 급진적 과학자의 탄생
초월성과 자기부정의 의미와 효과
3장 인간과 과학(학문)
불변성에 대한 믿음이 깨지다
유토피아의 꿈
진화를 진보로 착각하다
측정 가능성, 향상 가능성
종교의 기능을 물려받은 과학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개인의 진짜 본성을 만개시키는 계발
4장 본성이라는 신화
생물학과 유전학의 극단적 전용
본성이냐 양육이냐
윤리와 생물학을 제대로 이어보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긴장 혹은 균형
그렇다면 본성은?
막간
심리장애는 사회적인 것이다
2부 우리의 가장 나쁜 측면을 장려하는 사회
5장 엔론 사회
역사상 가장 잘 살지만 가장 기분이 나쁜 사람들
새로운 서사: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 능력주의: 그렇게 똑똑한데 왜 돈을 못 버니
경제의 옷을 입은 사회진화론
지식 공장이 된 대학
건강 기업이 된 병원
품질은 왜 이렇게 떨어지는가
사회적 결과들
6장 새로운 세대의 정체성
광고와 언론의 메시지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대의 정체성
이전까지 도덕적 발달의 일반적 과정
공갈젖꼭지를 못 뗀 아이들
만들거나 부수거나
공동체 윤리가 사라진 곳에 계약서가 들어서다
개인과 조직 간의 부정적 사이클
새로운 인성의 특징
무기력한 자유로움
7장 장애를 대량생산 하는 사회
심리학자들은 왜 모두 의사가 되려고 하나
질병 모델이라는 지배적 패러다임
다시 심리장애는 사회문제다
양극화는 건강에 해롭다
심리장애가 실패의 증거이자 실패가 곧 심리장애인 사회
훈육이 치료를 대체하다
아버지의 실종과 콜센터의 증가
8장 좋은 삶
지배자의 권력과 일하는 사람의 권한을 구분하라
효율성과 행복을 모두 고려하는 노동환경
양적인 평가보다 질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우리가 변하는 수밖에 없다
딥 프레임을 건드리면 행동도 바뀐다
자기배려를 이기심과 구분하기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균형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미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소개
“도대체 요즘엔 왜 이렇게 싸이코가 많을까?”
정신분석학의 대가가 파헤친 신자유주의 경제의 심리적 부작용들
이 시대에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열려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단연코 이 책은 우리를 환영에서 깨어나게 해줄 강력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_맹정현(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패러다임』)
아도르노와 동료들은 ‘권위주의적 인성’을 해부함으로써 무엇이 파시즘을 가능케 했는지 밝혀주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인성을 어떻게 해부할 것인가. 파울 페르하에허는 그 과제를 떠맡는다. 이 책은 정치적인 올바름에서 새로운 인종주의까지 우리를 휘젓는 은밀한 광기를 총체적으로 조감한다. _서동진(사회학자,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읽는 내내 지금 우리 사회가 닥친 문제를 거울로 비추어주는 듯해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요새 사람들은 왜 이런지 답답하고 궁금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_하지현(정신과 전문의,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점점 더 많아지고 잔혹해지는 심리장애의 징후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왕따에서 묻지마 살인, 총기난사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전의 공격성과는 질적으로 다른 심리적 증상들이 늘어나고 있다.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파울 페르하에허는 그 원인을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우리의 정체성 형성 과정, 인성 발달 과정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데서 찾는다. 철학사와 윤리학사, 종교사에서부터 뇌과학, 동물행동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언론 기사들과 개인적인 체험을 오가며 명쾌하게 입증해낸다. 그리고 이것이 왜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 ‘내 아이의 일’인지 섬뜩하게 납득시킨다. 또 이를 극복할 개인적이고도 공동체적인 대안을 모색한다.
우리는 인간의 가장 나쁜 측면을 장려하는 경제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
최근 심리적 문제의 양상들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 더 심각해지고 더 다양해지고 더 많아졌다는 것은 피부로 느껴지는 사실이다. 이전보다 더 고비용의 보육과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이전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공격성과 부적응을 보인다. 모범생으로 분류되던 아이가 교실에 폭발물을 설치하는 일이 일어나고, 왕따와 이지매가 발생하는 연령대는 점점 낮아져 이제 유치원에서도 폭력 문제를 고민할 정도다.
게다가 이런 심리적 문제의 파장은 대단히 폭넓게 사회 전반을 아우른다. 육아는 놀라울 정도로 편리한 발명품들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 힘들어졌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직원들은 직장에 대한 만족도나 충성도가 이전보다 떨어진다.(‘팀 정신’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많은 경영기법들이 개발되고 적용되지만, 실제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형편없이 팀웍이 떨어지고 잘해야 같이 시스템을 욕하는 정도에서 동료애를 확인할 뿐이다.) 기술의 눈부신 발전 속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소비재의 질은 점점 떨어진다. 외식업계와 식품업계가 온갖 메뉴를 개발하지만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적어지고 비용도 점점 비싸진다. 문화상품들은 큰돈을 투자해 겨우 ‘추억팔이’를 하는 데 만족하고, 자잘한 방송 사고와 신문기사의 오류들은 점점 많아지며, 책 속 오역이나 오탈자들도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을 근본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웬만해선 사회 비판적 언급을 자제하는 저명한 정신분석가가 입을 열었다. 파울 페르하에허는 특히 ‘엔론 사회’라는 이름으로 직장과 학교와 병원에서의 변화를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이 변화들은 줄여서 ‘신자유주의화’라고 부를 수 있고, ‘수량화와 성과주의(능력주의)의 도입에 따른 질적 퇴보’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교육, 학문, 보건 제도처럼 간단히 효율성을 평가할 수 없는 분야를 간단히 평가하려고 하면서 생겨나는 문제들은 아주 치명적이다.
학교에서는 연구자나 교수들은 ‘성과’를 내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지만 연구는 점점 더 부정확해지고 실험 결과 조작 같은 문제들이 야기된다. 정신 보건 업계에서는 유전학과 뇌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심리학자들이 모두 의사가 되려고 한다. 또 그런 과학적 권위를 앞세워 장애를 대량생산해내고, 내담자들을 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한 훈육이나 약물처방을 남용한다.
플랑드르에선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린이집에서도 ‘발달 목표’를 정한다. “아이들이 갖추어야 할” 일련의 기본 자질이란다. 최근 내 친구는 어린이집 교사한테서 아이의 ‘가위 쓰는 능력’이 기준에 못 미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판결은 젊은 부모들의 공포심을 유발시킨다.(179)
동전에는 뒷면이 있다. 이 시대의 동전에도 피할 수 없는 이면이 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숫자가 날로 늘어나는 현실이다. 열 살만 되어도 벌써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향후 정체성은 패배감 위에 세워진다(179)
연구자의 수업 능력과 참여도를 다방면에서 살펴보던 평가 방법이 불과 15년 만에 결과물, 요샛말로 ‘아웃풋’을 계산하고 평가하는 방식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은 평가에서 제외하고 그냥 포기해버린다. 교육과 사회적 유용성 같은 측면은 의미를 잃고, 중점은 거의 연구와 ‘프로젝트’ 쪽으로 옮아가 버렸다. 연구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나온 출판물의 숫자만 중요하다. 그마저 자국 언어로 쓴 논문은 쳐주지도 않는다. 국제적인 출판물만 가치를 인정해준다. 여기서 ‘국제적’이란 ‘영어권’의 완곡어법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젠 ‘영어’만으로도 안 된다. 소위 ‘A1 저널스’로 불리는 한 줌의 최고 잡지들만 인정이 된다. 현재 국제적인(즉 앵글로색슨의) 요강은 이러하다. 학자들은 최고 랭킹의 잡지에서 득점을 해야 한다! 그사이 최신 기준이 보급되면서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최고의 학자는 제일 많은 연구 지원금을 확보하는 사람이며, 특허권도 제시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다.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교육과 경제의 결합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143)
역설적이게도 이런 종류의 품질 감시는 네덜란드의 슈타펠 사건에서 독일 대학들의 박사학위 사기 사건에 이르기까지 엔론과 똑같은 거짓과 위조를 몰고 온다.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 교수 디데리크 슈타펠은 방대한 경험 연구와 최고 잡지에 발표한 수많은 논문 덕분에 최근까지만 해도 자기 전공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의 연구 대부분이 위조로 밝혀졌고 거의 모든 신문이 논문 발표에 대한 과도한 압박감과 살인적인 경쟁을 이 사건의 원인으로 꼽았다. 또 2009년 8월에는 독일에서도 박사학위를 둘러싼 대규모 사기극이 적발되었다. 여러 대학에서 약 수백 명의 교수가 연루된 사건이었다. 많은 대학 교수들이 이렇게 발각된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아무도 큰 소리로 털어놓지 못한다. 이런 구체적인 조작 말고도 더 큰 문제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대부분의 연구 결과가 부정확한 것이다. 이 역시 경쟁과 출판의 압박에 따른 것이다. 학자들은 곰곰이 고민하고 깊게 파고들 시간 여유가 없다. 스탠퍼드 대학의 유명한 전염병학자 존 이오애니디스는 2005년 「왜 출판된 연구 결과들이 대부분 위조인가」라는 획기적인 논문을 썼다. 그리고 2011년 4월 네이메헌 라드바우드 대학의 강연에서는 6년이 지났어도 전혀 변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144~145)
모든 직원들은 절약하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다. 하지만 정작 엄청난 돈이 쓸데없는 일에 낭비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한다. 새 이름과 그에 걸맞은, 하지만 누구도 믿지 못할(“우리는 당신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 슬로건을 생각해낸 자문 위원, 혹은 새로운(전문가들에게서 절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뿐더러 비용도 예상보다 두 배는 더 들 거라는 경고를 받은) 회계 프로그램을 개발한 자문 위원에게 포상금이 쏟아진다. 최고의 간병 인력, 중점 연구, 전문가 집단 같은 미사여구를 폭탄처럼 쏟아붓는 것도 이들의 증상 중 하나이다. 정신과에선 그런 식의 증상에 나르시시즘적 인격장애라는 진단을 내린다.(151)
심리학 전성시대와 과학주의 함정들
앞서 언급한 심리학 분야의 변화는 최근 10여 년 동안 시장 상황이 (그나마) 가장 탄탄했던 심리학 분야 출판물의 제목들을 훑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독해지라거나 내려놓으라거나 단순해지라는 등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훈육하는 책들이 많다. 문제는 개인에게 있으며 개인이 바뀌면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심리학 책과 자기계발서의 경계는 허물어진 지 오래다.
이 책 역시 심리학 책이고 어떻게 하면 지금의 불균형 상태를 되돌리고 행복한 삶, 좋은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한 제안도 담고 있다. 다만 그러한 자기인식과 자기변화가 공동체의 자기인식이나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엄연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차이다.
사실 사회적인 측면을 외면하고 개인에 집중하는 책들이 사회에 대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요즘 사람들이 너무 책임감이 없고 게으르고 나약하다거나 혹은 너무 이기적이고 신경증적이라는 여러 불평불만은 ‘복지국가’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리로 곧잘 사용된다. 이는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사회보장 시스템을 보완하려 할 때마다 등장하는 고전적인 반대 근거다. 게다가 이런 논리는 과학적인 외피를 쓰고 있지만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진화를 진보로 오독하는 사회진화론의 논리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정신 보건 분야에서 유전적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제한적이다. 또 뇌과학을 통해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신경장애들 역시 제한적이다. 장애와 비장애를 가르는 판단 자체가 사회적 규범과 가치판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는 연구들이 적지 않지만 이미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과학주의라는 믿음을 깨뜨리기는 어렵다.
특히 과학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최근 심리학과 인문학이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가 ‘신자유주의 능력주의’라고 부르는 교육 능력주의와 경제 능력주의의 결합은 ‘그렇게 똑똑한데 왜 돈은 못 버니?’라는 빈정거림으로 요약된다. 수량화 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는 성공, 즉 물질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제 ‘지성적’이라는 말은 욕설이나 다름없다고 일갈한다.
과학주의의 진실은 종교의 진실보다 토론을 덜 허용하며 과학주의자와의 토론은 종교인과의 토론보다 더 가망이 없다는 폴란드 철학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말은 이 지점에서 정당성을 얻는다. 소위 비판적 사고라는 명분을 내건 과학주의자들이 학문에 접근하는 일체의 다른 방식을 참지 못하는 것은 정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84)
이제 인간에게는 자신을 경험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졌고 심리학은 진짜 진정한 원초적 자아 같은 개념들을 남발했다. 안타깝게도 집에서는 자기 체험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기에 인도나 네팔 같은 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곳까지 갈 형편이 못 되면 심리치료의 대안적 형태들과 결합된 각종 ‘의식 확장 기법’들을 이용하면 된다.(86)
새천년이 시작될 즈음 ‘자기 자신의 경험’은 ‘자기 자신의 창조’가 되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 몸이다. 최신 트렌드(피트니스에서 줌바까지)를 놓치지 않으려면 피트니스클럽으로 달려가야 하며, 그래도 안 되면 보톡스와 성형수술이 기다리고 있다. 영원한 젊음과 섹시한 몸이 메시지이고, 서른 번째 생일은 재앙과 동의어이다. 이 시기엔 특정한 심리장애도 급증했다. 자해와 섭식장애, 우울증, 인격장애 같은 것들이다. 앞의 두 장애는 몸과 관련이 있고 뒤의 두 장애는 정체성과 관련된다.(86)
물론 몇 가지 심리장애에선 유전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미 많건 적건 입증이 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뺀 나머지 장애는 아무도 원인을 알 수 없다. 차라리 점쟁이한테 물어보는 편이 낫다. 더구나 심리적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항상 ‘비정상’의 의미를 암시한다. 즉 규범, 그것도 사회규범에서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회적 기준을 도외시한 채 심리의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를 밝혀냈다는 실험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전문용어로 말하면 생물학적 표식이 없는 실험이다. 그런데도 신경생물학과 두뇌에 대한 현재의 과민반응은 이런 현실을 외면한다.(117)
이런 형태의 원치 않는 친밀함은 주로 미국 의료 산업의 전략이다. 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기사를 가장한 광고를 일간지에 싣거나,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의료 상담 프로그램을 맡거나(발기부전이라고요? 편하게 말씀해보세요.) 사이비 환자 협회를 결성하여 버스의 광고판을 돈을 주고 빌린 다음 특정 ‘장애’와 특정 의약품에 대중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당연히 우리의 건강에 해롭다. 최소한 우리 모두 조만간 집단 우울증 환자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건강 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 것도 다 이런 이유 탓이다.(148)
내 전공 분야(심리진단학과 심리치료)는 불과 몇 십 년 만에 180도로 달라졌다. 진단 기준이 사회규범의 일탈 여부로 바뀌는 동안 치료의 목표로 다시 규범의 준수를 강요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증상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바로 인식의 변화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장애인이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진리에 더 근접한 사람이었다. 2008년에 나온 영화 「레벌루셔너리 로드」만 봐도 진리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입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요즘 환자들은 장애인일 뿐 아니라 철저히 위험하다. 노르웨이의 테러 사건 주범 브레이비크가 대표적인 모델이다.(222)
하지만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사고 모델은 이런 연구 결과를 불문에 부치고 원인 대신 이 현상의 결과에만 관심을 보인다. 구체적으로 말해 규범을 위반하고 장애 증상을 보이는 위험한 타자들, 정신병 환자, 마약쟁이, 청소년, 실업자, 외국인들만 물고 늘어진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분야의 시장이야말로 요즘 제일 잘 나간다. 교육 자문, 보충수업, 심리치료, 가족 상담, 그리고 무엇보다 심리사회적 문제의 약품화가 문제의 현장이다. 이 모든 것들이 많은 돈을 벌어주는 사업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장의 공통분모는 훈육이다.(223)
실제 오늘날 미국에서는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정신병 환자보다 감옥에 수감된 정신병 환자의 숫자가 세 배는 더 많다. 1840년대 수준으로 돌아간 셈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규범화와 훈육은 정신의학에 내재한다. 정신의학의 진단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늘 이런 평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는 정신의학이 더 많은 것을 제공해야 하느냐이다. 나는 심리진단학 강의를 할 때 소위 ‘법적’ 심리 진단과 임상 심리 진단을 구분한다. 전자는 집단과 사회의 보호에 기여한다. 필요한 경우 개인에 맞서 집단을 보호한다. 노르웨이 테러범 브레이비크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후자는 개인의 보호에 기여한다. 필요한 경우 사회에 맞서 개인을 보호한다. 제멜바이스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둘 다 필요하기에 임상학자들은 정말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 두 가지 목표를 결합하기가 언제나 용이하진 않기 때문이다.(226)
정체성과 윤리와 행복과 좋은 삶은 무슨 관계일까
유명인들의 학력 위조, 황우석 사건과 같은 연구 결과 위조, 최근의 폭스바겐 배출가스 저감장치 조작, 모범생으로 분류되던 중학생의 교실 폭발물 설치, 온갖 증오범죄들, 묻지마 테러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오늘날, 이런 사회 현상들을 가로지르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고민하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윤리와 정체성의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
‘정체성’이라고 하면 오래 전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에서 혹은 대학 때 교양 심리학 교재에서 본 것을 끝으로, 혹은 육아책(발달심리학)에서 본 것을 끝으로, 이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지 오래인 독자들이 꽤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체성’의 문제는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현실의 여러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기 위해 늘 호출해야 하는 평생의 과제이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쓰인 글귀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고양된 자기인식 없이는 어떤 사회적 과제도 담당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오랜 지혜를 담고 있다. ‘정체성’의 뜻을 제대로 회복시키는 것은 ‘윤리’의 의미를 회복시키는 것이나 거의 비슷하게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다.
이 책에는 웬만한 부모들, 교육자들에게 유익한 실용적인 조언이 가득하다. 교과서에 나오는 발달이론이 오늘날 현실과 어떻게 다른지 변화된 정체성 형성 과정이 어떤 문제들을 가져오는지 생생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애착과 분리의 이론과 현실을 이렇게 업데이트된 버전으로 정리한 육아책은 만나기 쉽지 않다.
또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윤리관부터 기독교적 가치관, 계몽주의의 가치관, 기독교 체제의 해체 이후에 나타났지만 종교보다도 완고한 데이터에 대한 맹신을 불러온 과학주의의 발흥, 그리고 진화를 진보로 오독하고 사회 진보와 개인의 계발을 부추기는 새로운 다윈주의의 득세에 이르기까지 수 페이지 안에 일필휘지로 윤리의 역사를 일별하는 저자의 내공은 놀라울 정도다.
저자가 좋은 삶을 위해 제안하는 것들은 새롭지는 않다. 이기심과 구분되는 자기배려에 집중하기, 일하는 사람의 권한을 지배자의 권력과 구분하고 인정하기, 그리고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결핍’을 ‘의미’로 바꾸기 위해 (학문이든 예술이든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온갖 창의적이고 끈질긴 노력을 기울이기. 인간의 조건을 끌어안는 이런 전통적인 방법이야말로 지금의 시스템에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삶을 힘들게 하는 온갖 구질구질한 규정들 탓에 우리는 윤리의 원래 의미를 놓치고 있다. 정확히 말해 규범과 가치는 자신의 신체 및 타인의 신체를 대하는 방식이다.(49)
지금과 같은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 도덕적 비판을 포함한 가치만단이란 모두가 애당초 의심스럽기에 그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49)
아이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올바른 결정을 배우는 과정에는 부모 외에 다른 규범과 가치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모든 것이 수많은 책과 영화의 주제가 되는 그 유명한 ‘어른 되기(coming of age)’를 지원한다. 동시에 이런 책과 영화는 거꾸로 청소년의 거울이 되기도 한다. 이건 어려워, 저건 재미있어. 이런 실수는 할 수 있어. 이건 검고 이건 희지만 둘 사이엔 찬란한 무지개 색깔들이 있어. 이런 과정들을 거쳐 양육은 교양(Bildung), 즉 교육과 문화적 성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풍성한 문화일수록 동화의 팔레트는 더 넓다. 여기서 중요한 요인은 지식이지만, 도덕적이고 실존적인 결정이 뒤따르기 때문에 순수 자연과학적 지식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지식이다. 고대 그리스의 지혜(Phronesis)에 더 가깝다. 절대적인 대답이나 보편적 해결책은 어리석음과 공포의 다른 이름이다.(167)
부모와 가족의 영향력은 예전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아이가 잘못되면 여전히 화살은 부모에게 돌아간다. 거기에 광고로 뒤덮인 언론은 올바른 제품만 사면 모든 욕망이 충족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쉬지 않고 송출해댄다. 이렇게 권위는 사라지고 환경은 광고로 뒤덮이니 아이들을 다루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이다.(168)
내가 성숙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모든 교육은 때가 되면 언젠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에 도달한다. 내가 약간 비장한 마음으로 ‘결핍’이라 부르고 싶은 힘든 상태를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 순간이다. 엄마가 항상 옆에 있지는 않고 아빠도 슈퍼 대디가 아니다. 설사 부모가 곁에 있어도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정상적으로 애정을 갖고 자식을 대한다 해도 필연적으로 실망하는 순간이 온다. 어떤 현실도, 어떤 제품도 우리의 욕망과 욕구에 대한 완벽하고 확정된 대답은 줄 수 없다. 교육의 질은 한 아이가 이 피할 수 없는 실망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171)
이런 실존적 문제들과 마주치는 순간 전형적인 인간의 특징이 고개를 들이민다. 가능한 모든 대답을 생각해내는 창조성 말이다. 인간은 집단일 때도 창조성을 발휘한다. 따라서 결핍의 해소를 위해 점점 더 큰 단위가 형성된다. 이중에서 종교와 예술이 가장 오래된 형태이며, 학문이 가장 최근의 형태이다. 물론 이 단위들 중 무엇도 최종 해답을 줄 수는 없다. 때문에 우리는 계속하여 대답을 찾는다. 결핍 상황에 대한 확정된 대답이 없다는 인식은 물론이고, 그럼에도 대답을 찾으려는 지속적인 노력은 성공한 교육의 징후이다. 부모가 자신들이 줄 수 있는 것에는 물질적인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한 사람의 모든 소망을 다 들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자식에게 가르친 것이다. 우리가 받거나 주는 것은 결코 최종 답변이 아니다. 라캉이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정의를 내렸다. “사랑은 갖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172) 접기
그러므로 모두가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외쳐대는 사회에서는굴욕감과 죄의식, 수치심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 죄의식은 상황을 내가 좌우할 수 있다고, 실패를 막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노력이다.(이것을, 저것을 했 노력이다.(이것을, 저것을 했더라면......) 진실은 그게 아니다.
진실은 더 단순하다. ˝당신은 중요하지 않다!˝
Un Poete - Alain Barriere
'세상과 어울리기 >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난 유전자 外 (0) | 2019.06.29 |
---|---|
가난의 시대 外 (0) | 2019.06.20 |
위장환경주의 (0) | 2019.06.16 |
포스트트루스-가짜뉴스와 탈진실시대 (0) | 2019.06.09 |
왜 그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나 (0) | 2019.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