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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더불어 살기

사람밖에 모르는 질병’의 치유를 위해

by 이성근 2019. 2. 8.

사람밖에 모르는 질병의 치유를 위해

1. 하이다 인디언과 토템 기둥



남긴 토템 기둥들에는 흰머리독수리와 곰과 고래, 개구리, 까마귀들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하이다인들의 눈에, 이 동물들은 특별한 영력(靈力)의 주체들이었고, 그래서 신성한 이들이었다.

 

우리 현대인 중 다수는 산업 문명의 질병을 앓고 있다. 전체에 관한 감각을 상실하고 산업 문명의 내폐적 질서 안에 갇히고 말았지만,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 지구, 우주를 삶의 원천이자 내용물로 감지하지 못하고 한낱 삶의 외곽에 있는 무언가로, 자원이나 자원이 있는 장소 정도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이 질병의 핵심 증상이다.

연필 한 자루, 빗방울, 날아가는 기러기 떼, 일출과 노을. 이런 것에 유별감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고, 사진을 찍어 에스엔에스(SNS)에 게재하는 것을 제외하면 커피나 빵 같은 것도 무심코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이 삶의 실체이고 의미이냐에 관한 가장 중요한 관점 또는 감각이 뒤집히고 말았다. 산업 시대에 인간과 자연세계와의 거대 장벽, 자연세계로부터의 인간의 거대 소외는 그렇게 발생했다. 예컨대 애니멀(animal)이라는 말은 본디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었지만, 오늘날 우리 중 다수는 동물들을 우리와 얼마간 비슷한 존재이거나 우리와 삶을 함께 하고 있는 이웃으로 여기는 데 퍽이나 인색하다.

 

우리 가운데 호시노 미치오(Hoshino Michio, 1952~1996)만은 달랐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연의 과정 그리고 다른 동식물들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에 눈 떴다. 숲 속의 곰과 숲 강변의 연어 떼, 줄무늬다람쥐와 버섯과 이끼, 등자나무가 하나의 사건에 참여하는 동류들임에 주목했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알래스카의 숲과 야생동물에 매료되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느라 분주했던 호시노 미치오. 그는 어느 날 알래스카의 숲을 산책하다 나무 사이에서 기이한 사물을 발견한다. 한때 그곳에 살았지만 이제는 도시로 이주해버린 하이다(Haida) 인디언들이 남긴 토템 기둥들이었다.

 

토템 기둥에 새긴 구성원들

이 토템 기둥들에는 흰머리독수리와 곰과 고래, 개구리, 까마귀들이 부조(浮彫)되어 있었다. 하이다인들의 눈에, 이 동물들은 특별한 영력(靈力)의 주체들이었고, 그래서 신성한 이들이었다. 이들의 힘을 가져올 수 있다면 마을의 태평 역시 보전될 것이었다.

 

하이다 원주민의 토템 기둥

 

또한 그 동물들은 대지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들이기도 했다. 하이다인들은 영혼을, 삶을 선물로 인식했는데, 그런 까닭에 동일한 선물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에 대한 존중은 지당한 것이었다.

현대 산업 문명이 주는 달콤함에 찌들대로 찌든 우리가, 우리 아닌 동물들에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쌍화탕을 만들려면 황기, 당귀, 계피 등 여러 약재가 필요하다. 병증이 깊은 우리에게도 그러하여 여러 약재가 동시에 필요하다. 자연의 과정에 관한 현대 과학과 그것을 기반 삼아야 하는 자연과 우주에 관한 현대 철학, 생태학적 관점의 새로운 경제학이 긴요한 약재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 아닌 동물들을 세계의 동등한 참여자로 인지했고, 예식(禮式)을 통해 세계와 우주의 의미를, 세계의 일원성을 감득했던 고대인의 사상과 감성, 그것의 표현물인 예술이 우리 영혼에 스며들어, 우리 안의 동토(凍土)를 녹여주어야 한다.

 

우석영 <동물 미술관> 저자

1년 안에 살해되는 동물이 무려 600억 마리라고 한다. 1970년 이래 인간 활동에 의해 동물의 무려 60%가 지구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분명 변화가 필요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이런 뉴스에 거의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필자는 동물과 지구 생태계에 대한 앎의 확장만이 변화를 촉발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우리의 동료들인 동물들과 모두의 터전인 지구를 미술 작품이라는 확대경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곰 복원, 시작에 불과한 이유

2. 다케우치 세이호, 아서 테이트 그리고 곰

 

눈 속의 곰. 다케우치 세이호

 

늘 누군가 곁에 없어 외롭고 남들의 인정을 받으려 안달인 우리 인간들과는 달리, 곰은 하늘 아래 외따로 의연히 살아가는 동물이다. 이 동물만큼 비사회적인 동물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곰은 고독하게, 각자 따로, 살아가기라는 과제를 수행한다.

 

수컷의 경우, 엄마 뱃속에서 나와 2년 정도(18~20개월) 지나면 독립하는데, 암컷과 사랑하는 기간인 1개월을 제외하면 줄곧 독거 생활을 이어간다. 한편, 수컷을 찾은 암컷은 약 2년간 새끼들을 기르며 가족생활이라는 특별한 삶을 살지만, 평균 수명이 26년 정도라 하니 그 시간이 그리 긴 것도 아니다. 새끼들이 떠나면, 그녀 역시 그처럼 독거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야생에서의 독거란 어떤 것일까? 야생과 장벽을 쌓은 채 도시나 마을 안에서 무리 지어 살아가는 무리 동물인 우리로서는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다케우치 세이호(Takeuchi Seih?, 1864~1942)의 회화 작품 <눈 속의 곰> 같은 것을 통해 그것을 조금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곰은 아마도 아시아흑곰일 것이다. 곰은 지구상에 총 8종이 서식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아시아흑곰(반달가슴곰이 여기에 속한다), 아메리카흑곰, 북극곰, 큰곰(불곰, 그리즐리), 말레이곰, 느림보곰, 안경곰, 자이언트 판다가 그 주인공들이다.

 

일촉즉발-곰 사냥, 초겨울. 아서 테이트

 

19세기 화가 아서 테이트(Arthur Fitzwilliam Tait, 1819~1905)의 작품 <일촉즉발-곰 사냥, 초겨울>에서 우리가 만나는 곰은 아메리카흑곰이다. 곰과 마주보고 있는 사내의 오른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다. 그러니까 그는 이 상황에서 생존했던 인물일 것이다.

 

사진작가이자 산문작가였던 호시노 미치오의 운명은 이 그림 속 주인공과는 달랐다. 19968, 호시노는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서 곰에게 희생되어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토록 야생을 좋아했던 그의 이러한 죽음은 내게는 내내 곱새겨 볼 물음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그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단순 사고에 불과한 걸까? 아니라면 그것은 대자연의 경고음 같은 것이었을까? 어쩌면 호시노는 일시적으로는 비극이었을 죽음의 형식으로, 늘 대자연에 소속되려 했던 자신의 염원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완성했던 건 아닐까?

 

개체 수복원을 넘어

(큰곰, 아시아흑곰)은 캄차카 반도의 아래쪽, 오오츠크해의 건너편, 우리 민족이 살아온 이곳에도 오래 서식했던 동물이다. 무엇보다도 곰은 고조선의 동물이었다. 한국인들은 누구라도 웅녀(熊女)의 후손들이 아니던가. 환웅이라는 남자와 곰으로 태어났지만 여자가 된 웅녀. 이들이 우리들의 조부모가 아니던가. 그러나 토템으로 곰을 모셨던 그 민족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잔혹하게 곰을 착취하고 있는 민족이 되어버렸다. 한국은 웅담(곰쓸개/쓸개즙) 채취를 위한 곰 사육이 합법화된 지구상의 단 두개국 중 하나인 것이다.(다른 하나는 중국이다)

 

다행히, 이곳에서도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1812월 녹색연합은 사육되던 반달가슴곰 세 마리를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온라인 모금을 통해 이들을 매입해 동물원으로 옮긴 것이다. 한편, 국립공원관리공단 종복원기술원에서는 2004년 이래 반달가슴곰을 야생(지리산)에 돌려보내는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20185월 기준 지리산에 53마리가, 지리산 바깥에 3마리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땅에도 빛줄기가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출발에 불과하다. 복원되어야 하는 건 단지 멸종위기 생물종이나 그들의 서식지만은 아닐 것이다. 경제림 대 원시림의 비율이 거의 100 0에 가까운 땅에는, 원시림이,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땅이 조금이라도 복원되어야 한다. 복원되어야 하는 것은 어떤 심성이기도 하다. 곰의 힘, 곰의 영혼, 곰의 영력(靈力)을 어려워하며 존중했던, 고조선을 세웠던 이들, 바로 우리 선조들의 심성 말이다.

 

지혜보다 현명한, 무엇에 대하여

3. 필립 굿윈, 곰의 지능

 

필립 굿윈. ‘곰이다!’(its a bear)

 

곰 부족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동물원이 아니라면 곰을 도통 만나볼 기회조차도 없는 원통함을, 나는 이즈음 어니스트 시튼(Earnest Thompson Seton,1860~1946)의 곰 이야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있다. 시튼은 여러 편의 곰 이야기를 남겼는데, <회색곰 왑의 삶(The Biography of a Grizzley)>이라는 단편도 그 중 하나다.

 

왑은 아주 어린 나이에 어느 목장주가 쏜 흉탄에 어미와 형제자매를 모두 잃고 외톨이 신세가 된다. 어린 포유동물에게 엄마의 세계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인 법이다. 왑의 하늘은 그날 무너지고 만다. 하늘이 무너진 곳. 그곳은 캄캄한 곳이다. 그 암흑의 세계에서 어린 왑은 하나씩 하나씩 빛을 찾아간다. 이를테면, 어디에 가면 야생순무와 애기백합이 있다는 것. 이 세상은 온통 적뿐이지만, 때로는 도망가지 말고 맞서 싸워야만 살 수 있다는 것.

 

회색곰 왑의 삶’(The Biography of a Grizzley) 중 시튼이 그린 삽화

 

자기를 위협하는 것들은 오소리, 스라소니, 흑곰, 암소 같은 몸집이 제법 큰 포유동물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무시무시한 동물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린 왑도 금세 깨닫는다. 자기 발을 덥석 문 그 강력한 쇠덫의 입은, 인간이라는 이들의 만든 것이었음을.

 

그러나 곧 반격이 시작된다. 스라소니 정도는 거뜬히 물리칠 정도로 몸집이 불자, 왑은 자기를 죽이러 집요하게 들러붙는 인디언 사냥꾼 스파왓을 지혜롭게 물리친다. 또 제 영토 아래쪽 어느 오두막에 침입해 잭이라는 사내를 처단함으로써 카우보이들을 향한 일평생의 숙원을 부족한대로 풀어낸다.

 

시튼이 살던 당시 북미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많았던지, 필립 굿윈(Philip Russell Goodwin,1881~1935)은 곰과 인간의 마주침을 회화작품에 많이 남겼다. 그 중 한 점인 <곰이다!>는 인간의 시점에서 인간과 곰의 마주침을 그려내고 있다. 곰은 어디까지나 저 바깥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시선을 뒤집어, 곰의 시점에서 본 현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니스트 시튼(Earnest Thompson Seton)

 

멈칫하게 만든 그 무엇

어느 불운한 큰곰(불곰)의 생애사를 다룬 <회색 곰 왑의 삶>은 곰의 시선에 비친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곰의 생리나 생태만이 아니라 그 지능이나 판단력에 관해서도 넌지시 일러준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어느 날, 우연히 인간들과 마주친 왑은 그들을 공격하려다 멈칫 한다.

 

뭔가가 가로막았다. 감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감각이 조용히 있을 때만 느껴지는, 곰이나 인간의 지혜보다 현명한, 어둡고 구불구불한 길을 가다가 갈림길이 나와 망설일 때마다 방향을 가르쳐 주는 바로 그것이었다.”(<회색곰 왑의 삶>, 장석봉 옮김, 궁리, 2016 중에서)

곰이나 인간의 지혜보다 현명한 이 무엇이 왑을 삶이라는 빛으로 인도해 주던 등불이었다. 또한 시튼은 주변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바위와 돌과 사물들이 왑의 코에 자기 이야기를 노래해 주며, 왑의 행동을 안내해 주었다고 쓰고 있다.

 

회색곰 왑의 삶’(The Biography of a Grizzley) 중 시튼이 그린 삽화

 

이것은 분명 (곰 같은) 동물에게도 지능이 있다는 수준 낮은 담론을 훌쩍 뛰어넘는 담론이다. 왑의 공격을 가로막은 그 무엇’, 곰이나 인간의 지혜보다 현명한 그것의 정체를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무생물에게도 생물들이 지닌 주체성과 유사한 것이 있는지 감히 확언키 어렵지만, 시튼은 그런 것을 한번쯤 생각해 보라고 이미 1900년에 주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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