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아들이 다니는 학원에서 세미나를 한다기에 마누라 대신 가 보았다.
짐작은 했지만 참 천박하고 노골적이었다. 그럼에도 꾹 참고 끝까지 들었다. 어떤 수작을 부리는 지
말머리는 교과과정이 변하기 때문에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중3에서 고1 시기 애들 등수가 확 바뀌어 버린다고 했다
예컨데 중학교때 반에서 10등권의 애들 대부분이 30~50등까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졸업전 방학시기에 복습을 시켜야 한다고했다.
잘사는 동네 사정도 한 자락 깔았다.
해운대 센텀지역에는 새벽2시면 애들이 놀이터에 와글와글 한다고 한다.
과외를 받는 아이들인데 과목당 150~200씩
그렇다고 해서 그 동네 애들이 좋은대학 진학하는 거 보지 못했다며
앞으로 3년 아이들이 입시전쟁터에 노출된다. 성적에 따라 희비가 교차된다.
자녀에게 부모가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 뭐냐고
공부하라고 강요해야 한다
지금 전국에 대학생 10만명이 공무원 시험준비 중이다.
그 중에 몇 명이 되겠냐
공무원 9급 고등학생 수준이면 가능한 시험이다
문제는 고학력자가 몰리다 보니 경쟁이 치열한 것이다.
아이들이 나 혼자 공부하겠다고 하는 말을 믿으면 곤란하다.
11월14일부터 고1수업을 시작하겠다.
11월~2월이 기장 중요한 시기다.
부모들이 애들 고등학교 들어가 받게되는 첫 성적표를 잊지 못할 것이다.
TV가 말하는 자기주도 학습법 ? 적응학생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은가 ?
이런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풀어 놓고는 그는 나갔다.
칠판에 적힌 학부모 세미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얼굴이 화끈달아 올랐다.
이렇게 아이들이 휘둘리고 부모들이 놀아나는 구나 ?
그가 이야기 했던 것 중 하나는 공감한다
좋은 핸드폰 시주지 마라 ! 그러나 이 핸드폰도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그리고 반성도 된다.
아무튼 이꼴을 언제까지 붙들고있어야 하는지
참혹하다.
동아대 정희준 교수가 경향신문에 올린 글을 실어 본다.
출처: 참세상
경향시평] 자살 중학생 “아이팟을 함께 묻어주세요”
정희준 | 동아대 교수·문화연구 chunghj@dau.ac.kr
번듯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가족이 식사를 한다. 조금 비싸기는 해도 ‘우리 집도 행복한 중산층’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가끔씩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식사하는 모습이 전혀 ‘행복한 가족’ 같아 보이지 않는다. 대화가 보이지 않는다. 중·고등학생인 아이들은 머리를 꺾은 채 ‘문자질’에 열중이고 엄마는 밥 좀 먹으라고 채근하는 정도다. 아빠는 두리번거리며 밥을 먹다가 가끔 엄마랑 짧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사실 혼자 먹는 거랑 별 다를 바 없다. 소가 여물 먹는 것 같기도 하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평소에 안 하던 대화가 갑자기 양식 먹는다고 터지겠는가.
옛날엔 그래도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모이기라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각 방’ 생활이 대세다. 컴퓨터에 스마트폰까지 등장했으니 방에서 나올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온라인에 ‘접속’된 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가정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부차적인 것이다. 사실 가정은 ‘화만 내는 아빠’ ‘잔소리하는 엄마’가 지배하는 공간이기에 아이들에게 가정이란 그들 표현대로 ‘짱나’는 곳일 뿐이다.
이런 와중에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완전히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게 있으니 바로 학교성적이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부모는 아이들에게 화내고 욕하고 때리기도 한다.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부모 자식 간은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하는 사이가 된다. 그 어리고 소중한 아이들에게 “나가 죽어”라는 말을 우리처럼 쉽게 하는 사회가 또 있을까. 동물의 왕국이 차라리 인간적이다.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는 중학생이 겪게 되는 혼란과 방황을 ‘정상적 정신분열증’이라고 칭한다. 누구나 겪게 되는, 성장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들은 청소년기 자녀들을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야 함에도 성적을 가지고 자식들의 숨통을 조른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은 의지할 곳을 찾게 마련인데 부모는 상처를 주고 등을 돌려버리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배신당한 것이다.
지난주 부산의 중학교 2학년 학생이 20층 베란다에서 몸을 던졌다. “이번 시험 정말 잘 치려고 엄청 노력했지만 뜻대로 안됐다. 성적 때문에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이 세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스마트폰을 갖고 싶었던 그 아이는 중간고사 성적이 오르면 사 주겠다는 부모의 약속에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스마트폰도 얻지 못하고 부모에게 꾸지람까지 들은 그는 “성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이 사회를 떠나고 싶다. 한국이 왜 자살률 1위인지 잘 생각해보라”며 우리 어른들을 일갈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남긴 마지막 부탁이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아이팟을 함께 묻어달라.”
가족 대신 그 아이가 함께하고자 했던 마지막 하나는 바로 음악을 들려주는 손가락만한 기계였다. 그렇다. 이 아이들에게 소비는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결핍을 메우는 것이다. MP3플레이어와 스마트폰은 외로움과 싸우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물건이자 친구인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될 것 같다. 아이들이 왜 PC방에서 같이 밤을 새우고 왜 노스페이스를 입고 몰려다니는 것인지.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는 것이다.
인터넷에는 자살을 고민하는 아이들로 넘쳐난다. 모두 부모에게 배신당한 아이들이다. “너만 없으면 잘 살겠다”는 엄마의 말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는 아이, 칼로 손목을 그었던 아이, 휴대폰 충전기로 목을 졸랐던 아이, 고층아파트 난간에 매달려 본 아이, 약을 한 통 먹었는데 부모가 살려내 다시 자살을 준비하는 아이도 있다. 중학생이 글을 올리면 초등학생까지 쫓아와 달래주고 자기 이야기 같다며 같이 울어준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지금 죽지 말라며 뭐라 하는지 아는가. “부모님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출처: 한겨레 신문
잘못된 교육을 거부하고, 잘못된 사회를 바꾸는
93/고3들의 대학입시 거부선언과 행동을 제안합니다.
더 좋은 성적,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직장, 더 안정적인 삶, 더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달리고 달리는 경쟁 속에서 허덕이며 언제 벗어날지 모를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우리들. 그 안에 우리의 행복, 다양성, 상상력 그리고 오늘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육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학과 취업을 위한 것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입시정보를 쑤셔 넣는 와중에 '비효율적인' 토론과 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지와 열정이 아무리 크다 한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인서울․SKY 이른바 ‘명문대’ 간판이 없으면 기회 한 번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거대한 학벌의 벽에 좌절하고 자신의 무능력과 의지부족을 탓하며 또 다시 무한경쟁의 쳇바퀴를 돌린다.
우리는 너무나 불안하고 불행하다. 88만원 비정규직 쓰나미와 학벌의 벽이 가로막은 미래에 어른들이 약속한 더 나은 삶과 행복이 존재하는지, 우리는 너무나 불안하다. 그래도 더 좋은 미래를 위해서는 오늘의 행복 ‘따위’는 포기해야한다는 압박에 쫓겨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오늘도 쳇바퀴를 돌린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질문할 시간도 이유도 없이 우리는 달린다. 모두가 달리는데 나만 혼자 멈춰서면 나의 삶도 멈춰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쫓겨….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내본다. 입시에 학벌에 쫓겨 교육의 목표도 인간관계의 기준도 점수가 되어버린, 무한경쟁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대학입시를 거부한다. 우리는 어른들과 이 사회기득권층이 말하는 ‘미래 성공’의 환상을 버리고 불행하고 불안한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바꾸고자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전국의 93/고3들이 함께 용기를 내주길 감히 제안해본다. 이 사회가 이 교육이 그리고 우리들이 더 이상 경쟁과 학벌에 미쳐버린 괴물이 되기 전에 이 쳇바퀴를 벗어던지자!
이 견고한 학벌사회에서 대학을 거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무모한 행동일 수도 있다. 가방끈 짧은 우리들을 향할 차별적 시선과 편견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용기 내어 이 불편한 길을 걸어가려 한다. 이 길이 어른과 사회기득권층이 말하는 거짓된 장밋빛 성공스토리보다,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나아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와 교육을 좀 더 행복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입시와 취직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학생을 위한 교육, 돈이 없어도, '명문'학교가 아니어도 누구나 자유롭게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교육, 주입과 강요가 아닌 토론과 소통이 꽃피는 교육, 학력/학벌로 사람을 단정 짓고 차별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목소리를 낼 것이다. 잘못된 교육과 사회에 침묵하지 않는 우리의 작은 용기와 실천은 우리 사회를 지금보다는 조금 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으로 바꿔낼 혁명이다. 주저하지 말자, 침묵하지 말자, 잘못된 교육을 거부하고, 잘못된 사회를 바꿔보자!
2011년8월27일
제안자 : 공기, 다영, 둠코, 따이루, 쩡열
한겨레 사설] 분노한 젊은이들과 대학·대학입시 거부 운동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대학입시와 대학 거부 운동이 구체화되고 있다. 오늘은 입시·스펙좀비 풍자 거리행진, 내일은 20대의 대학 거부선언, 10일엔 10대의 대학입시 거부선언이 이어진다고 한다. 참가자가 많은 건 아니다. 학벌·대학서열체제와 대입제도라는 저 강고한 성채에 생채기라도 낼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알아둘 게 있다. 이 움직임은 젊은이들의 끓어오르던 분노가 마그마처럼 비로소 지각을 뚫고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그마가 흘러나올 정도라면 폭발은 머잖았다.
학벌사회의 폐해를 경고하며 이달 중순 서울대를 자퇴한 유윤종씨는 이미 이런 움직임을 예고했다. 유씨 등 학생인권운동가들은 뿌리깊은 학벌사회와 대학서열체제, 이를 위한 대학입시 제도를 거부하지 않고는 중·고교 교실의 병영화와 인권 억압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 사슬을 끊기 위해선 학벌과 서열의 중심에 있는 대학과 입시 제도를 거부해야 한다. 활동가 스스로 학벌을 포기하고, 입시를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학벌과 대학서열체제는 청춘을 질식시키고, 학문의 전당으로서 대학의 존재 이유를 지웠다. 지난해 고려대를 자퇴한 김예슬씨는 이런 대학 현실을 기업의 부품생산 하청업체에 비유하기도 했다. 대학은 취업과 성공에 필요한 학벌을 획득하고,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을 쌓는 곳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 기존의 이론과 지식,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도,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도,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도 길러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싹을 죽여 버린다. 학벌과 스펙을 제조하는 주형 공장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 대학 체제로 말미암아 청소년들은 꿈을 키워야 할 소중한 시기를 입시교육의 질곡 속에서 지내야 한다. ‘명문대 진학’은 어른들이 이들에게 가하는 모든 폭력의 면죄부가 된다. 이를 위해 이들은 취미와 관심, 꿈과 열정을 억압당하고, 획일화된 행동과 외형을 요구받는다.
오동잎이 지면 가을이 오는 줄 알아야 한다. 마그마 흘러나오는데도, 학벌과 서열체제로 젊은이들을 억누르려다가는, 거대한 폭발을 피할 수 없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표심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젊은이들의 경고였다. 지금이라도 교육제도를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저 아이들의 선언과 몸짓에 박수를 보낸다. 이 고리를 바꿀 의지가 없거나 생각히지 못하는 정치는 낡은 정치다. 앞으로 이 고리에 대해 고민이 깊어 질 듯하다. 그래서 녹색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물론 작금의 지구적 위기와 우리들 생활 전반에 걸쳐 야기되는 환경의 문제는 심각한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이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환경문제는 고사하고 우리 모두가 질식해서 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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