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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이상국 -틈 外

by 이성근 2016. 3. 26.

 

 

/ 이상국

맞짱 / 김은령

차경(借憬)

법칙

이동하는 것은 / 강희근

집을 버리다 / 강영환

정구지꽃 /정일근

이 월 /엄태원

스타킹을 신는 동안/최정례

함께 젖다1 / 윤제림

사랑방 아주머니/ 도종환

벚나무 / 강미정

語之間 /이진수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이선영

, 55일 면허정지 / 박남희

돈 워리 비 해피*/ 권혁웅

달북 / 문인수

/ 문인수

만년필 / 송 찬 호

내가 바라보는/ 이승희

소가죽북/손택수

호랑이 발자국/손택수

무엇이 성공인가- 랄프 왈도 에머슨

503*/ 황지우

두 번은 없다/비스와봐 쉼보르스카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백석

청춘 - 사무엘 울만 -

다시 - 박노해 -

제향산승축(題香山僧軸) /양녕대군(讓寧大君)

달이 자꾸 따라와요 이상국

호라지좆- 김 중 식

여승(女僧)-백석-

통영/모닥불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김 기 택

감자이야기 -이성목

고목나무 / 이현복

스위치 백 / 복효근

사라진 것들이 사는 곳 / 임미영

안도현/ 만경강 노을

배진성/ 할딱새와 목탁새

유하/ 참빗 하나의 시

간이역 눈물/ 김현태

김용범 / 말씹조개


 

틈 /  이상국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는

한겨울에 뿌리를 얼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위에 틈을 낸다고 한다

바위도

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며

몸을 내주었던 것이다

치열한 삶이다

아름다운 생이다.....

 

바위도 나무에게 틈을 내주는데

사람은 사람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맞짱  /   김은령

 

내일까지는 빌린 돈 오 백만 원

꼭 갚아야 하는데

단돈 만원도 마련해 놓지 못한 채 속수무책 자시子時까지 밀려와

대문 밖에 쪼그리고 앉아 화형식을 한다

깡그리 태워져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할

죄 많은 몸뚱어리 대신

등짝에 큼지막하게 생년월일과 내 이름 석자를

수인번호인양 받아 적은 옷을 태운다

 

-망하는 데에는 장사가 없는 기라,

내어놓아야 할 목숨이니 시늉은 해야제

옷을 사루소, 살 냄새 흠뻑 밴 옷을,

용하다는 장보살 비책을 좇아 정월 대보름 둥근 달 아래

죄 없는 옷을 태운다

죽음까지 가는 까마득한 길 위에서

치사하게 번번이 발목 잡는 살아있음과

치사한 방법으로 맞짱을 뜬다

, 밝은 저 달이 보거나 말거나

 

차경(借憬)

이제 막 피고 있는 석류꽃

꽃 진 자리가 불안한 늙은 산능금 나무

어제처럼 그렇게 지는 해

어제보다 조금 더 비켜서 눕는 내 그림자가, 있는 마당에

흰나비 한 마리 왔다 가네

그냥 왔다 가네

 

 

법칙

치자꽃 나무가 죽었다

내가 약간의 풍요와 약간의 오만과

약간의 관계들로 이루어진 숲에서

간벌 되어

단칸방으로 밀려날 때

얼렁뚱땅 화분으로 옮겨져

따라온 치자꽃 나무

죽었다!

저 나무 화분 속 팽팽하게 뿌리 뻗어

눈 오는 날에도

빳빳하게 푸른 잎 세우고선

살아있다고 대들던 놈이었는데

나 또한 저놈의 눈치 보느라

살아있음에서 부동의 자세로 견디어야 했는데

이젠 저도 인정한 거다

뿌리의 집이었던 화분이 실은

뿌리의 감옥이었다는 거.

깨트릴 수 없다면, 벗어날 수 없다면

결코 대지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이동하는 것은  /   강희근

 

이동하는 것은 다 유배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리는 비

떴다가 떨어져 내리는,

내리고 내리고 모질게도 내린다

이별도 건사하지 못해

하나가 이동하여

다른 하나가 되는 것

약속이 떨어져 해약이 되고 해약은

먼지처럼 가라앉는 것이지만

먼지가 어디 가서 사상이 되는가

공화국이 되는가

강물도 흐르고 흐르면

종내는 하류를 만들고 바다로 간다

바다에 가 깊숙이 몸을 섞는 강물

파도의 주름 하나 만들고

해거름 낮은 햇살 머금고 잠시 일렁이지만

수평선 길게 친 팻말에

만물의 흔적은 없다

이동하는 것은 다 유배다

바람이 불고 가지 부러지고

눈부신 꽃 내리고 푸른 잎 젖어 내릴 때

그 시절 네가 친 사념의 휘장 걷히고

걷히는 소리 후두둑 흑비로 내릴 때

 

 

 

집을 버리다강영환

 

그 집은 수리한지 칠 년이 지났지만 비가 새기는 마찬가지다

동란 중에 피난 와서 미군이 버린 캔 조각을 이어 붙여 바람 앞에 세운 집

지붕 위에 골탈도 칠하고 모래도 뿌려 녹이 스는 것을 막기도 했지만

산복도로에 사는 어느 집도 안에서 피는 녹을 몰랐다

품에 드는 연탄가스를 거부 못해 삭아 내리는 살을 알지 못했다

그 낡은 집에서 무너지는 것은 살만이 아니었다

대들보도 써까래도 토담도 빠져나갔다

뼈도 목울대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집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의 무너짐을

지붕이 있던 자리에 파랗게 뜨는 하늘이

홀로 가는 집을 버리게 했다

몇 개의 보따리가 떠난 뒤 하늘이 무너졌다

나는 집을 버렸다

 

정구지꽃 /정일근

 

서울 사람은 부추, 충청도 사람은 솔, 제주도 사람은 쇠우리, 경상도 사람은 소풀이라 하고 전구지라고 하는데

은현리 사시는 어머니는 정구지라 부른다

정월에서 구월까지 먹을 수 있어 고맙다고 정구지라 하신다

그렇게 정월에서 구월까지 제 푸른 몸 다 내어주고 가을에 꽃 피는데, 정구지꽃 피는데

허리 굽혀 땅에 절하지 않고 흙손으로 땅과 악수하지 않은 사람은 보지 못하는 정구지꽃, 봐도 알지 못하는 정구지꽃

정구지 하얀 꽃이 어머니의 정구지밭에 가득 피었다

칠순 어머니 아픈 자식에게 검은 머리 다 주시고 흰 머리 되셨듯이

주고 또 주고, 주고 또 주고 난 그 빈 대궁에 하얀 별처럼 피는 정구지꽃 피었다

어머니 한밭 가득 피었다

 

이 월 /엄태원

 

몰운대 숲길은 저녁이 짧아서

이월엔 가지 않는 게 좋다지만

지상을 떠나는 새떼들 배웅하기엔

가장 좋은 때

 

하구에선 세상에 버려진 것들이

비로소 제 쓸쓸한 표정 어둡게 문질러 지운다

낙동강 구백리 물굽이를 거치는 동안

강물도 내내 상처였던 것

 

다대포 앞바다 반짝이는 잔물결과

몇 점, 준설선들 띄운 컴컴한 모래톱

어두워가는 저녁의 부은 목젖에 칼칼하게 걸린다

 

이월은 거기서 뒷모습만 잠시 보였던가

거대한 밀물 들이닥치듯 이내 어둠이

세상의 온몸을 적시는데,

몰운대 숲길은 저녁이 짧아서

이월엔 가지 않는 게 좋다지만

 

스타킹을 신는 동안/최정례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는 듯이

본처들은 기습해

첩의 머리끄댕이를 끌고 간다

상투적 수법이다

저승사자도 마찬가지다

퇴근해 돌아오는 사람을

집 앞 계단을 세 칸 남겨놓고

갑자기 심장을 멈추게 해 끌고 가 버린다

오빠가 그렇게 죽었다

전화를 받고

허둥대다가

스타킹을 신는

그동안만이라도 시간을 유예하자고

고작 그걸 아이디어라고

스타킹 위에 또 스타킹을 신고

끌려 가고 있었다

 

함께 젖다1 / 윤제림

 

공양간 앞 나무 백일홍과,

우산도 없이 심검당 섬돌을 내려서는

여남은 명의 비구니들과,

언제 끝날꼬 중창불사

기왓장들과,

거기 쓰인 희긋한 이름들과

석재들과 그 틈에 돋아나는

이끼들과,

삐죽삐죽 이마빡을 내미는

잡풀꽃들과,

목숨들과

목숨도 아닌 것들과.

 

사랑방 아주머니/ 도종환

 

죽으믄 잊혀지까 안 잊혀지는겨

남덜이사 허기 좋은 말로

날이 가고 달이 가믄 잊혀진다 허지만

슬플 때는 슬픈 대로 기쁠 때는 기쁜 대로

생각나는겨

살믄서야 잘 살았던 못 살았던

새끼 낳고 살던 첫사람인디

그게 그리 쉽게 잊혀지는감

나도 서른 둘에 혼자 되야서

오남매 키우느라 안 해본 일 웂어

세상은 달라져서 이전처럼

정절을 쳐주는 사람도 웂지만

바라는 게 있어서 이십 년 홀로 산 건 아녀

남이사 속맴을 어찌 다 알겄는가

내색하지 않고 그냥 사는겨

암 쓸쓸하지. 사는 게 본래 조금은 쓸쓸한 일인겨

그래도 어쩌겄는가. 새끼들 땜시도 살어야지

남들헌티사 잊은 듯 씻은 듯 그렇게 허고

그냥 사는겨

죽은믄 잊혀지까 안 잊혀지는겨

 

 

벚나무 / 강미정

 

한 번은 옆 침대에 입원한

환자의 오줌을 받아 주어야 했다

환자는 소변기를 갖다대기도 전에 얼굴이 뻘개졌다

덮은 이불 속에서 바지를 내리자

빳빳하게 솟구쳐 있는 그것,

나도 얼굴이 빨개졌다

이불 속에서 소변기를 걸쳐놓고

그것을 잡고 오줌을 눌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안한 눈은

창 밖 벚나무 가지 위로 오르는데

벚나무도 뜨겁게 솟구치는 제 속을 받아내는지

펑펑 눈부신 소리로 꽃을 뿜어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조용하게

벌어진 꽃나무의 상처를 핥아주고 있던 햇빛이

후딱 일어나 수천 개의 혀를 내밀더니

내 눈을 휘감아 가버렸다

놀란 나는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벚나무 아래에서 와와, 숨 멎는 소리만

내 눈에 고였다가 넘쳐 흘렀다

그날 옆 침대에 입원한 환자는 내내 돌아누워

밥도 먹지 않았다

- 시집 상처가 스민다는 것(

 

 

 

語之間 /이진수

   

토닥토닥 아침나절 떨어지던 비 그치고

엄니 한 분

다른 엄니와 이쑤시개 내기

민화투 치신다

 

정자나무 아래 들마루에 엉덩짝 붙이며

나도 한 마디 패를 돌린다

아니 엄니 십원짜리 내기라도 하셔야지 이쑤시개로 그게 뭔 재미래요

모르는 소리 말어 돈으로 허면 아무리 째칸케 쳐도 나중에는 의나기 십상이여 이쑤시개 한 통 300원인디 이거 가지면 한 사나흘은 너끈혀

 

허허허, 또 화투 삼맹교

점심 공양 드시고 동자 재웠는지 천지암 노스님도

한 판 끼워 달라신다

아지매요 거 이쑤시개 한 줘보소

뭘 잡쉈간디 이걸 달라고 허신대유 이거 드리면 오끗짜리 하나 날러가는디

아까 참에 내 목탁 두드릴 때 거 칼도마 소리 못 들어능교 목어 한 마리 잡아서 몸땡이는 동자 주고 내 대가리 먹었더마느

 

아무 아줌니에게나 엄니 엄니 하는 내 넉살을

갱상도 억양의 이쑤시개 탁발이 은근슬쩍 밀어내더니

암시랑토 않은 아줌니 화톳장도 가뿐하게

어지간을 넘어선다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이선영

 

나는 선운사 동백이나 비슬산 참꽃이 아니다

고란사 홀로 숨어 피는 고란초는 아니다

나는 봄이면 담장 안에 흔히 피는 개나리거나 목련일 따름이다

담장 안에서 고개만 바죽 내밀고 보이는 만큼만 세상을 구경하거나

더러 공원에 가면 사람들과 적당히 섞여 봄 한때의 정취를 나누기도 한다

도시의 한길가에서 탁한 공기와 매연을 마시는 일도 마다치 않아야 한다

나는 동백이나 고란초의 남다른 고고함 또는 남모를 고초에 관해 알지 못한다 알 리 없을 것이다

나는 흔하디흔한 시정의 꽃으로 꽃피워왔으며

그렇게 피고 지는 것밖에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꽃 피어 있음의 한편 슬픔, 환멸을 알 뿐이다

개나리 목련으로 꽃핀 데 그친 내 생이

생의 다가 아님을

 

 

 

, 55일 면허정지 / 박남희

 

신호위반 과태료를 못냈다고

면허정지 고지서가 날아왔다

55일 면허정지,

하루 5시간 교육필시 20일 감면

나는 망연히 창 밖의 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겨울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를 무수히 들락거리고 있었다

저 햇빛도 때로는 돈이 없어 면허정지를 당할까?

면허정지 세 번이면 면허취소,

꽃들도 이런 규칙 속에서 피었다 질까?

지난 겨울, 너무 일찍 찾아온 봄에

옆집 담장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 철없이

철없이 봄바람이 불고, 봄은 속도 위반에

신호 위반, 겨울 속의 꽃들은 주정차 위반에 걸려

한순간 단칼에 목을 떨구었다

철없는 봄이 잠시 왔다 사라져간 자리에

노란 꽃들이 쪼르르 모여 앉아

교통안전 교육을 받고 있었고, 그 옆의 개미들은

고장난 노란 신호등을 피해 어디론가 기어가고 있었고,

나는 문득, 창 밖에서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굴러가는,

나무들이 떨군 무수한 면허증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시집 <이불 속의 쥐>2005년 문학과경계

 

돈 워리 비 해피*/ 권혁웅

1.

워리는 덩치가 산만한 황구였죠

우리집 대문에 줄을 매서 키웠는데

지 꼴을 생각못하고

아무나 보고 반갑다고 꼬리치며 달려드는 통에

동네 아줌마와 애들, 여럿 넘어 갔습니다

이 피멍 좀 봐, 아끼징기 값 내놔

그래서 나한테 엄청 맞았지만

우리 워리, 꼬리만 흔들며

그 매, 몸으로 다 받아 냈습니다

한번은 장염에 걸려

누렇고 물큰한 똥을 지 몸만큼 쏟아냈지요

아버지는 약값과 고기 값을 한번에 벌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한성여고 수위를 하는 주인집 아저씨,

수육을 산처럼 쌓아놓고 금강야차처럼

우적우적 씹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씹을 듯 했습니다

2.

누나는 복실이를 해피라고 불렀습니다

해피야, 너는 워리처럼 되지 마

세 달 만에 동생을 쥐약에 넘겨 주었으니

우리 해피 두 배로 행복해야 옳았지요

하지만 어느날

동네 아저씨들, 장작 몇 개 집어들고는

해피를 뒷산에 데려갔습니다

왈왈 짖으며 용감한 우리 해피, 뒷산을 타넘어

내게로 도망 왔지요

찾아온 아저씨들, 나이론 끈을 내게 내밀며 말했습니다

해피가 네말을 잘 들으니

이 끈을 목에 걸어 주지 않겠니?

착한 나, 내게 꼬리치는 착한 해피 목에

줄을 걸어줬지요

지금도 내손모가지는 팔뚝에 얌전히 붙어있습니다

내가 여덟살, 해피가 두 살 때 얘기입니다

*돈 워리 비 해피 /바비 맥퍼린의 노래

시집 <마징가 계보학>(창비 시선, 2005)

 

달북 /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 어이쿠, 어이쿠, 시원하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 ,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

!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만년필 / 송 찬 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

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

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

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

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

켜본다-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

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어떤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날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거품 부글거리

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내가 바라보는/ 이승희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탁 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호랑이 발자국/손택수

 

가령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

해마다 눈이 내리면 호랑이 발자국과

모양새가 똑같은 신발에 장갑을 끼고

폭설이 내린 강원도 산간지대 어디를

엉금엉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눈 그친 눈길을 얼마쯤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눈이 내리는 곳 그쯤에서 행적을 감춘

사람인 것도 같고 사람 아닌 것도 같은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래서

남한에서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들갑을 떨며 사람들이 몰려가고

호랑이 발자국 기사가 점점이 찍힌

일간지가 가정마다 배달되고

금강산에서 왔을까, 아니 백두산일 거야

호사가들 입에 곶감처럼 오르내리면서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복고풍처럼 번져간다고 치자

아무도 증명 할 수 없지만, 오히려 증명할 수 없어서

과연 영험한 짐승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게로군

해마다 번연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

가슴 속에 호랑이 발자국 본을 떠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고 치자 눈과 함께 왔다

눈과 함께 사라지는, 가령

호랑이 같은 그런 사람이

 

소가죽북/손택수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어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흐느끼던 울음에도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 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질기딘 질긴 습성대로

죽어서도 여물여물

살가죽에 와닿는 아픔을 되새기며

둥 둥 둥 둥 지친 북채를 끌어 당긴다

끌어당겨 연신 제 몸을 친다

<시집 호랑이 발자국 중에서>

 

 

무엇이 성공인가- 랄프 왈도 에머슨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서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503*/ 황지우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

낙타야,

모래 박힌 눈으로

동트는 地平線을 보아라.

바람에 떠밀려 새날이 온다.

일어나 또 가자.

사막은 뱃속에서 또 꾸르륵 거리는구나.

지금 나에게는 칼도 도 없다.

이 길을 가르쳐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단 한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러나 너와 나는 九萬理 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는 너니까.

우리는 自己.

우리 마음의 地圖 속의 별자리가 여기까지

오게 한 거야.

 

두 번은 없다/비스와봐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07)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어지고,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하고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깎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게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매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가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청춘 - 사무엘 울만 -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닌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의 청년보다 예순 살의 노인이 더 청춘일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어가나니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만들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진 못하네

근심과 두려움, 자신감을 잃는 것이

우리의 기백을 죽이고 마음을 시들게 하네

그대가 젊어있는 한

예순이건 열여섯이건 가슴 속에는

경이로움을 향한 동경과 아이처럼 왕성한 탐구심과

인생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

그대와 나의 가슴 속에는 마음과 마음의 안테나가 있어

인간과 신으로부터 아름다움과 희망, 기쁨, 용기와

힘의 영감을 받는 한 언제까지나 청춘일 수 있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냉소의 눈에 덮일 때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 하더라도 늙은이라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고 있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라네

 

 

다시 - 박노해 -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은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제향산승축(題香山僧軸) /양녕대군(讓寧大君)

 

山霞朝作飯(산의 노을로 아침에 밥을 짓고,)

 蘿月夜爲燈(숲 사이 돋는 달로 밤에 등불을 삼네.)

 獨宿孤庵下(외로운 암자 찾아와 홀로 자니,)

 惟存塔一層(중들은 어디가고 탑만 서 있네.)”

 

 

달이 자꾸 따라와요   이상국

 

어린 자식 앞세우고

아버지 제사 보러 가는 길

 

--- 아버지 달이 자꾸 따라와요

--- 내버려둬라

달이 심심한 모양이다

 

우리 부자가 천방둑 은사시나무 이파리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솨르르솨르르 몸 씻어내는 소리 밟으며 쇠똥냄새 구수한 판길이 아저씨네 마당을 지나 옛 이발소집 담을 돌아가는데

 

아버짓적 그 달이 아직 따라오고 있었다

 

호라지좆- 김 중 식

 

난 원래 그런 놈이다 저 날뛰는 세월에 대책 없이 꽃피우다 들켜버린 놈이고 대놓고 물건 흔드는 정신의 나체주의자이다 오오 좆같은 새끼들 앞에서 이 좆새끼는 얼마나 당당하냐 한 시대가 무너져도 끝끝내 살아 남는 놈들 앞에서 내 가시로 내 대가리 찍어서 반쯤 죽을 만큼만 얼굴 붉히는 이 짓은 또한 얼마나 당당하며 변절의 첩첩 山城 속에서 나의 노출증은 얼마나 순결한 할례냐 정당방위냐 우우 좆같은 새끼들아 면죄를 구걸하는 告白도 못 하는 씨발놈들아

 

-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 지성사)

 

여승(女僧)-백석-

 

여승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전판

나는 파리한 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섭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머리오리: 머리카락

 

통영

 

옛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 집의 생선 가시가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실비가 날였다.

 

* 미역오리: 미역줄기.

* 천희(千姬): 처녀, 바닷가에서 시집 안간 여자를 <천희> 라고 하였다고 함. 또 천희는 남자를 잡아먹는( 죽게 만드는) 여자라는 불길한 여자라는 속뜻이 있다고 함.

*소라방등: 소라껍질로 만든 등잔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장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뭉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갓신창: 예날의 소가죽으로 만든 신발의 밑창

개니빠디: 개의 이빨

: 깃털

초시: 초시에 합격한 사람으로 늙은 양반을 일컬음

갓사둔: 새 사돈

뭉둥발이: 손발이 불에 타버려 몸뚱아리만 남은 상태의 몸.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김 기 택

 

마흔이 넘은 중년의 여자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 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중년의 얼굴에서 뛰어나왔다.

 

작고 어린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레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들이 나왔구나

오랜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30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수다를 떨며

더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시 흔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 문학과 사회2000년 겨울호 에서

 

감자이야기 -이성목

제주시 오라동 문간방 세 들어 살던 때 일이었어요. 그 주인할머니 감자 한 광주리씩 캐서는 서문시장 아니면 신제주 오일장 굽은 등 자주 펴고 앉아 있었어요.

언젠가는 그 모습 하도 고단해 보여 그 감자 제가 사겠노라고 슬금슬금 후한 인심 미리 세어 넣었더니. 검은 비닐봉지에 캄캄하게 넣었더니. 할머니 펄펄 뛰며 젊은 것이 이렇게 셈 어두워 어쩌냐고. 비닐봉지 뒤집어 하나 세고 훑어보고 다시 보던, 그런 감자가 있었어요.

 

그랬어요. 그 할머니 말씀으론 무자년 4.3, 낮에는 관덕정으로 밤에는 산으로 끌려 다니며 쓴 침조차 삼킬 수 없었던 춘궁이 있었대요. 그래도 살아야지 빈 집 돌며 거두어 온 씨감자 한 바구니 있었는데, 어느 바람 거친 새벽 젊은 놈 찾아와 그 감자 몇개냐고 물었대요. 세어도 세어도 자꾸 틀려 하나 둘 틀리는 거 뭐 어떠랴 어떠랴 얼버무려 일렀는데, 다음날그 서청 놈 말하길 감자 두개 어쨌냐고, 밤새 산으로 내통했냐고, 머리채 질질 끌고 산길 내려 갔었다고 할머니 울먹이며 말 잇지 못했어요.

 

할머니 아직도 양지바른 뜨락에 앉아 감자를 세고 있을 것 같아요. 셈이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란다. 꼭 맞게, 틀리지 않게, 세고 또 세어야 산다고, 먹고산다고 감자를 세고 있을 것 같아요. 그날을, 세고 또 세고 있을 거예요.

 

시집'남자를 주겠다'중에서

 

 

고목나무 / 이현복

천년을 서 있어도 푸르게 깨어 있어

입각성불(立覺成佛) 하고서도 아직도 침묵하는

저 고목 느티나무에

접 붙고 싶은 마음

 

한 백년도 못 되어서

단 한 줌 거름되어

한 평 남짓 잔디 혹은 들풀이나 키워 있을

이 짧은 목숨의 여정

겸손히 무릎 꿇다

 

천수 보살 손을 뻗어 뭇 중생을 어루듯이

낮에는 지친 목숨들 감싸안는 그늘 되고

밤에는 잠든 영혼의 넉넉한 품이 된다.

 

(<현대시> 2001.4월호에서)

 

스위치 백 / 복효근

 

기차가 앞만 보고 돌진한다고 말하지 말라 태백산을 넘어가는 기차를 타보았는가 동해 정동진에서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 전라선 야간 열차를 탔다가 기차가 영동선 홍전역에 들어서 갑자기 뒤쪽을 향해 거꾸로 되달릴 때 황당한 가슴을 어찌하지 못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한없이 물러섰던 기차가 다시 앞으로 치달아 영동선 홍전역과 나한정역 사이 태백준령을 그렇게 지그재그로 넘는 걸 알고 다시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다 기차가 태백산을 넘는 방법, 스위치 백이라고 하던가 후진의 힘이 기차를 태백너머로 밀어올린다 이제 어느 날 갑자기 나의 길이 나를 뒤로 끌고 갈 때 죽을 것처럼 놀라지 않기로 한다 기차를 타고 태백을 넘어보면 안다 깜깜한 가슴 깊이 처박힌 태양이 후진의 힘으로 산너머 동해 저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어둠 속에 깨어 퍼덕이는 정동진의 바다새들도 스위치백으로 날아오른다.

 

 

사라진 것들이 사는 곳 / 임미영

 

모든 사라진 것들은 어디에 가 있을까

지금은 이마에 거미줄 친 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정미소 앞을 지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사라진 것들이 어쩜

저 거인의 웅크림 속에 유기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순간 거인이 풀썩 헛기침을 한다

뽀오얀 먼지와 함께 얼굴 붉어진 정미소 판자 틈 새로

더 붉어진 삶의 삭은 밥알들 툭툭 튀어나온다

내 기억의 정미소에서도 기계들의 기침소리와

온 몸 짓이겨져 말갛게 몸을 까고 나오던

추억의 벼 낱알들 톨 톨 떨어짐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나의 가슴에다 제 몸댕이 수만큼 많은

오촉 짜리 점멸 전구를 켜 놓고 간다

마음속 동공이 규칙적으로 밝아 온다

오직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의식 속에서조차 완전히 사장됨은 아니었기에

이제 사라지려하는 것조차 보듬을 여유가 있다

 

내 키의 두 배가 넘는 정미소 쇠 바퀴는

제 몸의 열 배는 넘을 시간의 낱알들 물고

끊임없이 앵앵 굴러 자기를 빻아간다

성장의 율동은 언제나 그렇듯 둥글었다

 

정미소의 거인을 지탱하고 있던 낡은 관절이

끼익 끽 마른 엄살을 부리며 멈추어서면

예의 그 얄궂은 포마드 윤활유로

겨드랑이에 기름칠을 한다. 잠시 어지럽다

곁에 눅은 시절의 비릿함이 볏단으로 뒹군다

 

가끔 배가 고픈 날이면

호주머니 깊은 옷을 입고 불꺼진 정미소로 간다

거기 더 이상 벼를 빻는 일은 없다

내 유년의 단단한 껍질들이 한겹 한겹 옷을 벗고 있으며

그를 주워 먹고 사는 상념의 새 한 마리 살고 있을 뿐

 

푸드득 잡히는 한 자락 물컹한 슬픔이

깃털을 뽑아 놓고 저 멀리 도망간다

그는 햇빛 속으로 사라지는 법을 익히 알고 있었다

어디에든 구멍이 있듯, 사라진 것들이 사라질

망각의 구멍은 거기에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의 정미소에서

왕겨가 날리더라는 소리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내가 돌보지 않은 거친 시절이

저도 한 번 반항하고 싶음이리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만 말았다

내게 있어서 모든 사라진 것들은

정미소에 있었다

 

 

안도현/ 만경강 노을

 

노을아

피멍진 사랑아

어릴 적 고향집 뒷방 같은 어둠이

들을 건너 오는구나

그대 온몸의 출렁거림

껴안아줄 가슴도 없이 나는 왔다만

배고픈 나라

하늘이라도 쥐어뜯으며 살자는구나

내 쓸쓸함 내 머뭇거림 앞에서

그대는 허리띠를 푸는데

서른살이 보이는 강둑에서

나는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하는 것이냐

서해가 밀려들면

소금기 배인 몸이 쓰려

강물이 우는 저녁에

 

노을아

내 여인아

 

 

 

배진성/ 할딱새와 목탁새

 

오래된 사찰 주변에는

할딱새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특히 절간의 선방 숲에는

할딱새들과 목탁새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어여쁘고 향기로운 보살님과

젊은 스님이

엉큼한 숲길을 걸어 들어가면

할딱벗고 할딱벗고 할딱벗고

할딱새들이

온 숲이 떠나가도록

떠들어댄다고 한다

그렇게 할딱새에게

죽비를 얻어맞고 돌아온

젊은 스님은

헐떡거리는 욕망을

할딱 벗어버리고

드디어 목탁새가 된다고 한다

 

유하/ 참빗 하나의 시

 

지금 식으로 따진다면

자신이 내놓은 물건 값보다

더 신세를 지고 가던 사람이 있었다

검정 고무신 찰박찰박 장마 끝물로 와서

거시기 모다 있어라우, 찰옥수수 같은 잇속 드러내며 웃던

담바우 방물장수 아짐

대나무 참빗 달랑 하나 풀어놓고는

골방 아랫목 드르렁 고랑내 밤새 풀어놓고는

새비젓 무시너물 쩍국에 척척 식은 밥 한술 말어먹고

보리쌀 반 되 챙겨서 싸묵싸묵 새벽길 떠나가던

염치도 바우 같은 담바우 방물장수 아짐

그것만이면 진짜 양반이게

담바우 아짐 자고 간 날 이후론 온 식구 머릿속엔

영락없이 이가 바글바글 들끓었다

그 여편네 욕 직사허니 퍼대다가

그 빗살 촘촘한 참빗으로 득득 빗어내리면 와따

후두둑 후두둑 민경 위로 새까맣게

떨어져내리던 가랑이 서카래떼

장마 걷힌 하늘처럼 맑아오던 머릿속

그날은 온 식구 한데 모여 그놈의 서카래 손톱으로 똑똑

장단 맞춰 터뜨려가며 곤시랑댔다

허허참, 그래도 담바우 아짐 참빗이

참말로 짱짱한 참빗이랑게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문학과지성사)

 

간이역 눈물/ 김현태

 

새벽기차는 홀로 타지 마라

그리움이 달빛에 그을려

왈칵, 타버린 마음마저도

다 주고 싶더라도 이제, 홀로 타지 마라

혼자 떠나는 그 길은

언제나 서럽기 마련이다

 

나도 한때는 새벽기차를 타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 달래며

내 청춘 모두 그에게 주려고

잠든 기차를 깨워 어둠 뚫고

홀로,

수십 개의 터널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새벽기차는 여중생 초경처럼 달렸건만

그 사람은,

끝내 전주역에 나오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지만,

그럴 줄 알았지만

세상이 미웠고 내가 미웠다

 

그러나

마구 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는 걸

되돌아오는 길에 깨달았다

쉬지 않고 지나치는 간이역이

수없이도 많다는 사실,

그 서러운 간이역들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김용범 / 말씹조개

 

큰물이 지나간 뒤 백사장에는 물길에 밀려 온 말씹조개 몇 개가 박혀 있었다. 하많은 이름 중에 말씹조개일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경마장에 가보면 말씹조개가 왜 말씹조개인지 금방 알게 된다. 사람이든 조개든 생긴 대로 이름이 붙게 되는 것이 진리이다. 말씹처럼 생겨 말씹조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뭔가 부끄러워 말씹조개의 본 이름을 부르기를 꺼려한다. 하긴 홍합을 까면서 허허 그것 참 그럴싸 그러하구나 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것이나 멀쩡하게 말씹조개를 말조개로 부르는 것이나 죄다 내숭에 불과하다. 있는 그대로 그 이름을 불러 그것을 그것답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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