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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곽대근 詩 -발원지 外

by 이성근 2016. 2. 6.

발원지發源地/ 곽대근

바보 만복이/ 정현종

사리돈이 필요하다/ 김영희

약수터 가는 길/ 김광규

세속도시의 즐거움/ 최승호

달의 몰락/ 유하

탁주/ 권선희

택배 / 박승연

오타/ 전태련

참 빨랐지 그 양반/ 이정록

교대역에서/ 김광규

착한 / 정일근

여자야, 여자야, 약해지면 안돼! / 강경주

추억에서/ 박재삼

낙법落法/ 권순진

밑닦이에 대한 유감 / 이중기

/ 박영근

시래기 한 움큼 / 공광규

내 노동으로 / 신동문

陽洞詩篇 2뼉다귀집/ 김신용



발원지發源地/ 곽대근

 

봉화 오전리 선달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주실령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수合水하여 오전저수지를 만들었다

그곳에는 내성천 발원지를 알리는

아담한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사람과 물도 근원이 있는 것이다

그 근원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고향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나에 발원지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었다

표지석처럼 단단하지 않고

손대면 아늑하고 촉촉한

넓은 토란잎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 같이

찾아가면 흙 묻은 손으로 반기는

어머니가 사시는 곳이다

 

- 시집발원지發源地(문학예술사, 2011)

 

 

어디서 퍼온 사진인데 출처를  모른다.  괜찬은 시   에 실린 사진 대부분이 그렇다. 혹이나  출처 아시는 분

있다면 일러 주면 좋겠다.  그리고 양해를 구한다.  

 

바보 만복이/ 정현종

 

거창 학동 마을에는

바보 만복이가 사는데요

글쎄 그 동네 시내나 웅덩이에 사는

물고기들은 그 바보한테는

꼼짝도 못해서

그 사람이 물가에 가면 모두

그 앞으로 모여든데요

모여들어서

잡아도 가만있고

또 잡아도 가만 있고

만복이 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있다지 뭡니까.

올 가을에는 거기 가서 만복이하고

물가에서 하루 종일 놀아볼까 합니다

놀다가 나는 그냥 물고기가 되구요!

 

- 시집한 꽃송이(문학과지성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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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돈이 필요하다/ 김영희

 

영양제 보다 진통제가 더 잘나간다는 민 약국

골목에 줄줄이 앉아있는 아낙들

절이고 말린 보따리 봉지봉지 펼쳐놓았다

촌두부 이천 원 청국장 이천 원

무말랭이 시래기 깻잎장아찌 삼천 원,

어디에선가 본 듯

손대중으로 담은 삶의 무게들이 고만고만하다

속내 다 꺼내놓고

명태처럼 덕장에 매달려 얼었다 녹았다

빈 생을 살아온 여인들

굴묵허리 내걸린 시래기 같이

한 줌 햇살에 물기 빠지며 말라가는 생

사리돈이 필요하다

 

- 시집저 징헌 놈의 냄시(리토피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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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 가는 길/ 김광규

 

내가 먼저 죽어야

마누라가 깨끗하게 치워주지

하지만 늙은 홀어미를 자식들이 얼마나 구박할까

마누라 병구완을 하고

무덤이라도 가꾸어주려면

그래도 내가 더 오래 살아야지

오늘따라 오르막길이 숨 가쁘다

 

내가 먼저 세상을 떠야

영감이 나를 묻어주지

하지만 늙은 홀아비를 누가 곰살궂게 돌봐줄까

수의라도 제대로 입혀 보내고

제사를 챙겨주려면

그래도 내가 더 오래 살아야지

 

- 시집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문학과 지성사,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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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도시의 즐거움/ 최승호

 

연봉 몇 억의 남자 허리띠에는

죽은 악어가 산다

이빨은 이미 번쩍이는 금으로 진화하여

형질변경 성공의 도도한 허리띠

남자가 켜는 순금의 라이터 불꽃이 환해지면

햇빛 도용의 가로등, 그늘이 깔린다

성공이란 이름의 거대한 냉혈동물

밤이면 남자의 허리띠에 사는 악어가

먹어치운 립스틱의 잔해들은

명품을 합창처럼 부른다

죽은 악어가 살고 노래하는 립스틱이 사는

세속도시의 즐거움

 

- 시집세속도시의 즐거움(세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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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의 몰락/ 유하

 

난 명절이 싫다 한가위라는 이름 아래

집안 어른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김씨 집안의 종손인 나에게 눈길이 모여지면

이젠 한 가정을 이뤄 자식 낳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네가 지금 사는 게 정말 사는 거냐고

너처럼 살다가는 폐인될 수도 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난 정상인들 틈에서

순식간에 비정상인으로 전락한다

아니 그 전락을 홀로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물론 난 충분히 외롭다

하지만 난 편입의 안락과 즐거움 대신

일탈의 고독을 택했다 난 집 밖으로 나간다

난 집이라는 굴레가, 모든 예절의 진지함이,

그들이 원하는 사람 노릇이, 버겁다

난 그런 나의 쓸모 없음을 사랑한다

그 쓸모 없음에 대한 사랑이 나를 시쓰게 한다

그러므로 난,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호의보다는

날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냉냉한 매혹에게 운명을 걸었다

나를 악착같이 포용해내려는 집 밖에는 보름달이 떠 있다

온 우주의 문 밖에서 난 유일하게 달과 마주한다

유목민인 달의 얼굴에 난 내 운명에 대한 동의를 구하지만

달은 그저 냉냉한 매혹만을 보여줄 뿐이다

난 일탈의 고독으로, 달의 표정을 읽어내려 애쓴다

그렇게 내 인생의 대부분은 달을 노래하는 데 바쳐질 것이다

 

달이 몰락한다 난 이미, 달이 몰락한 그곳에서

둥근 달을 바라본 자이다

달이 몰락한다, 그 속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내 노래도 달과 더불어 몰락해갈 것이다

 

-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지성사,1995)

 

1955년 원효사에서 바라 본 무등산이라고 한다.

 

 

 

탁주/ 권선희

 

제수씨요, 내는 말이시더. 대보 저 짝 끄트머리 골짝 팔남매 오골오골 부잡시럽던 집 막내요. 우리 큰 시야가 내캉 스무 살 차이 나는데요. 한 날은 내를 구룡포, 인자 가마보이 거가 장안동쯤 되는 갑디더. 글로 데불고 가가 생전 처음으로 짜장면 안 사줬능교. 내 거그 앉아가 거무티티한 국수 나온 거 보고는 마 바로 오바이트 할라 했니더. 희안티더. 그 마이 촌놈이 뭐시 배 타고 스페인꺼정 안 갔능교. 가가 그 노무 나라 음식 죽지 몬해 묵으면서 내 구룡포 동화루 짜장면 생각 마이 했니더. 생각해 보믄 울행님이 내 보고 샐쭉이 웃던 이유 빤한데 내는 그 촌시럽던 때가 우예 이리 그립겠능교. 마 살믄 살수록 자꾸 그리운기라요. 그기 첫사랑 고 문디가시나 그리운 것에 비할라요. 내 품은 가시나들 암만 이뻐도 울 행님 그 웃음 맨키야 하겠능교. 뭐시 이리도 급히 살았는지 내도 모르요. 참말로 문디 같은 세월이니더. 제수씨요, 무심한 기 마 세월이니더. 우예든동 한 잔 하시더…….

 

- 시집구룡포로 간다(애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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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 박승연

 

어머니가 보내신 택배가

12일 여행을 마치고 도착했다

서둘러 박스를 열어보니

당신의 투박한 손으로 꾹꾹 눌러 담은 채소가

자식 향한 어머니 마음처럼 부풀어 오른다

더운 공기에 시든 푸성귀를 다듬어 목욕시키니

당신의 푸른 미소로 살아난다

저녁상에 상추 쑥갓 담아내니

당신의 잊고 살아온 세월이 떠오른다

인고의 세월 견뎌내며 흙처럼 사신 당신

둥지 떠나 암 수술한 자식을 위해

산수傘壽에도 여전하신 사랑에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이 넘쳐난다

상추 한 잎 입에 넣으니

밭 매시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 가까이 계시나 언제나 그리운 당신

야채처럼 싱싱한 세월을

택배로 되돌려 보내드리고 싶다

 

- 시집 가시나무새의 눈물(문학공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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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전태련

 

컴퓨터 자판기로

별을 치다 벌을 치고

사슴을 치다 가슴을 친다

 

내 수족에 딸린 손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마음은 수십 번 그러지 말자 다짐하지만

남의 마음같이 느닷없이 끼어드는 오타

어찌하랴,

어찌하랴,

입으로 치는 오타는

여지없이 상대의 맘에

상처를 남기고 돌아오는 것을

한번 친 오타 바로잡는 일 이틀, 사흘

그 가슴에 흔적 지우기 석 달 열흘

 

숱한 사람들 마음에 쳐 날린 오타들

더러는 지우고 더러는 여전히 비뚤어진 채

못처럼 박혀있을 헛디딘 것들

 

어쩌면 생은 그 자체로 오타가 아닌가

그때 그 순간의 선택이 옳았는가

곧을 길 버리고 몇 굽이 힘겹게 돌아치진 않았는가

돌아보면

내 삶의 팔 할은 오타인 것을

 

-시집 바람의 발자국(문학의전당,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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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빨랐지 그 양반/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 시집 정말(창비시선,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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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역에서/ 김광규

 

3호선 교대역에서 2호선 전철을

갈아타려면 환승객들 북적대는 지하

통행로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내려야 한다 바로 그 와중에서

그와 마주쳤다 반세기 만이었다

머리만 세었을 뿐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 시집하루 또 하루(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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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 정일근

 

우리나라 어린 물고기들의 이름 배우다 무릎을 치고 만다. 가오리 새끼는 간자미,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 청어 새끼는 굴뚝청어, 농어 새끼는 껄떼기, 조기 새끼는 꽝다리, 명태 새끼는 노가리, 방어 새끼는 마래미, 누치 새끼는 모롱이, 숭어 새끼는 모쟁이, 잉어 새끼는 발강이, 괴도라치 새끼는 설치, 작은 붕어 새끼는 쌀붕어, 전어 새끼는 전어사리, 열목어 새끼는 팽팽이, 갈치 새끼는 풀치, 그 작고 어린 새끼들이 시인의 이름보다 더 빛나는 시인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 어린 시인들이 시냇물이면 시냇물을 바다면 바다를 원고지 삼아 태어나면서부터 꼼지락 꼼지락 시를 쓰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 생명들이 다 시다. 참 착한 시다

 

- <시와 시학> 200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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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야, 여자야, 약해지면 안돼! / 강경주

 

하나. 45세의 노산老産이었다. 위로 줄줄이 딸 넷. 또 딸을 낳았다.

분만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산모는 퇴원을 서둘렀다. 아기는 병원에서 맡아서 처리하란다.

키울 마음도 없고 형편도 어렵단다. 조금 있으니 남편이 나타났다.

50세는 되어 보이는 이 택시기사 아저씨는 한수 더 뜬다. 열이든 스물이든 아들 하나 낳을

때까지 계속 아기를 낳겠단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이 아주머니 또 배가 불룩하니 병원을 찾았다. 아들인지 딸인지 좀 봐달라며 턱을 세우고는 다가앉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설득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가운을 벗어버리고 진료실을 도망쳐 나와버렸다.

더럽고 아득한 절망감이 종일 가시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 30대 후반의 꼽추 아주머니가 조심조심 진료실을 들어섰다. 초음파를 보니 임신 9.

그녀로서는 첫임신이었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기가 안 생겼단다. 자기더러 아기도

못 낳는 병신이라며 동갑내기에 역시 꼽추인 남편이, 술만 마시면 마누라를 폭행하고 구박해

양쪽 고막이 다 터졌단다. 병원을 나간 지 채 10분도 안 되어 돌아와서는 이 아주머니 아기를

없애야겠단다. 그러면서 아기아빠가 누군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며 언제 아기가 들어섰는지

가르쳐 달란다. 리어카에 카세트테이프를 팔던 이 아주머니 옆 리어카의 시계 파는 남자와

눈이 맞았단다. 모든 희망의 말을 섞어 달래 보낸 이 아주머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 15OO여중 3학년 임XX. 이 학생은 나의 단골환자다. 불결하고 잦은 성접촉으로

인한 생식기의 염증으로 두 차례나 입원도 했었다. 어느날 아침 형사들이 찾아와 임XX 학생이 아르바이트하는 업소 사장에게서 성폭행당했다며 진단서를 요구했다. 심야 피자집 아르바이트 일주일만에 그 사장에게 성폭행당했다니 나는 속으로 그 사장님 아직 여중생 꽃뱀이 있는 걸 모르는 모양이라며 기분이 참 씁쓰레했다. 이 멋쟁이 바람둥이 여학생 요즘도 가끔씩 들른다. 때로는 교복을 입은 채로 진찰대를 올라간다.

 

. 아주 희귀성을 가진 30대 중반의 미인이었다. 무심코 진찰하다 깜짝 놀랐다.

Double Vagina(이중질) 기형畸型이었다. 가끔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이 이중질 얘기를 꺼내면

남자들 대부분이 그 남편이 참 부럽단다. ·2부제 운행이 굳이 필요 없으니 기형畸型이라도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며 각자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 같다.

 

다섯째. 예전에는 자궁이 없는 여자를 빈궁마마라 불렀다. 어감이 좋지 않아 어느때부턴가

무궁화無宮花라고 불렀다. 26세 미혼의 아가씨 근종筋腫 크기가 20cm×17cm×12cm.

수술 후 일주일째 퇴원하는 날 혹이 없어진 다행함. 자궁이 없어진 상실감. 무궁화 아가씨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은 채 돌아갔다. 일류 패션디자이너가 꿈인 아직 남자친구 하나 없는

이 아가씨 한 달 뒤 다시 들렀을 때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덩달아 한시름 놓은 그 가족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여섯째. 그녀는 너무 하혈이 심했었다. 혈색소 수치가 7.0까지 떨어졌다. 정상인의 절반이다.

간곡하게 수혈을 권했다. 그녀는 돌아누워 귀를 막았다. 죽었으면 죽었지 수혈은 안 받겠단다.

여호와의 증인이란다. 달래기도 하고 겁도 주고 온갖 작전을 폈지만 실패였다. 생명이 걸린

이 순간에도 신을 믿으며 목숨을 거는 이 여자에게 의사는 그저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일곱. 레지던트 말년차 때의 이야기. 담당환자 중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40대 후반의 수더분한 아주머니 한 분이 있었다. 이 아주머니 어느날 묻지마 관광을 다녀왔고 그로부터 한 달여 뒤 포상기태 임신에 걸렸었다. 물방울 모양의 비정상 임신이었다. 시간이 경과되면서 악성

융모상피세포암으로 변하는 고약한 병이었다. 화학요법이 시작되면서 아내가 구토에 탈모에

갖은 고생을 겪게 되자 그 여자의 남편 아무 영문도 모른채 밤잠을 걸러가며 아내 병수발에

지극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한편 얄밉기도 하고 한편 딱하기도 해서 그 묻지마 관광 사건을

남편에게 꼬아바칠까 말까 하다가 결국 덮어 두었다. 사람 잡는 묻지마 관광이었다.

 

- 시집 나는 꽃핀다(고려원,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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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제주 애월읍 하가리 오줌허벅 진 아낙

 

추억에서/ 박재삼

 

진주 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닷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어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 시집춘향이 마음(신구문화사,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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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법落法/ 권순진

 

유도에서 맨 먼저 익혀야할 게 넘어지는 기술이다

자빠지되 물론 상하지 말아야 한다

메칠 생각에 앞서 패배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훈련

거듭해서 내동댕이쳐지다 보면 바닥과의 화친이 이루어진다

몸의 접점이 많을수록 몸은 안전해지고

나아가 기분 더럽지 않고 안락하기까지 하다

탁탁 손바닥으로 큰소리 장단 맞춰 바닥에 드러눕는 것이

더러는 보는 이에게도 참 흐뭇하다

머리를 우선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 구르니

넘어진들 몸과 마음이 상할 리 없다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모가지에 붙은 힘을

죄다 빼고 헐거워져서야 마음도 둥글어진다

그때서야 엉덩살은 왜 그렇게 두껍게 붙어 있는지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할 생각은 왜 솟아나는지

누운 자세에서 깨달으며 무릎 세운다

 

- 시집 ?낙법? (문학공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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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닦이에 대한 유감 / 이중기

 

요즘은 똥구멍도 호강하는 세월이라고

짜증 섞어 뭉텅뭉텅 신문지를 자르며

할마시는 많이 섭섭한 모양이다

 

빚진 애비 적에는 정낭 구석자리에

새끼줄 걸어놓고 돌려가며 밑을 닦았다

슬픔에 밥 말아먹던 시절 측간에는

물 뿜어 두드린 짚단 세워놓고

그 중 몇 개 겹겹 접어 뒤를 닦았다.

할마시의 분기는 가위에 손을 다친다

 

오늘, 못자리하다말고 똥누러 갔다 온

네놈 짓거리는 가히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냇가의 그 많은 돌멩이 풀들 놔두고

버들치 지느러미 힘을 키우는 맑은 물이며

청개구리 혓바닥 같은 나뭇잎도 버리고

팬티 벗어 닦고는 버리고 왔다니……

, 과타

 

- 시집 밥상위의 안부(창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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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시집저 꽃이 불편하다(창작과비평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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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 한 움큼 / 공광규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식당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 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미운 인심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넘겨져 조서를 받던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 시집 <말똥 한 덩이> (실천문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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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노동으로 / 신동문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내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쓸쓸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 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미련을 되씹는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

 

- 월간 <현대문학> 1967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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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임인식의 1957년 제주 성읍마을 '고목과 아이'

 

陽洞詩篇 2뼉다귀집/ 김신용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현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도 국물이 되어버린

그 뼉다귀를 핥기 위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지요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뼉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

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

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지금은 힐튼 호텔의 휘황한 불빛이

머큐롬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크레인이 환부를 긁어내고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 무크지 현대시사상1(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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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ngwie Malmsteen-Child In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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