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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백기완

by 이성근 2021. 2. 16.

임을 위한 행진곡가사 원작...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

 

묏비나리-백기완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 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아니 그 한발띠기로 언 땅을 들어올리고

또 한발띠기로 맨바닥을 들어올려

저 살인마의 틀거리를 농창 들어엎어라

 

들었다간 엎고 또 들었다간 또 엎고

신바람이 미치게 몰아쳐 오면

젊은 춤꾼이여

자네의 발끝으로 자네의 한 몸만

맴돌자 함이 아닐세그려.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이 썩어 문드러진 하늘과 땅을 벅, ,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시라

 

돌고 돌다 오라가 감겨오면

한사위로 제끼고

돌고 돌다 죽엄의 살이 맺혀 오면

또 한사위로 제끼다 쓰러진들

네가 묻힌 한 줌의 땅이 어디 있으랴

꽃상여가 어디 있고

마주재비도 못 타 보고 썩은 멍석에 말려

산고랑 아무 데나 내다 버려질지니

 

그렇다고 해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거라.

팔다리는 들개가 뜯어 가고

배알은 여우가 뜯어 가고

나머지 살점은 말똥가리가 뜯어 가고

뎅그렁 원한만 남는 해골 바가지

 

그리되면 띠루띠루 구성진 달구질 소리도

자네를 떠난다네

눈보라만 거세게 세상의 사기꾼

협잡의 명수 정치꾼들은 죄 자네를 떠난다네.

 

다만 새벽녘 깡추위에 견디다 못한

참나무 얼어터지는 소리

, , 그대 등때기 가르는 소리 있을지니

 

그 소리는 천상

죽은 자에게도 다시 치는

주인놈의 모진 매질 소리라

 

천추에 맺힌 원한이여

그것은 자네의 마지막 한의 언저리마저

죽이려는 가진 자들의 모진 채쭉소리라

차라리 그 소리 장단에 꿈틀대며 일어나시라

자네 한 사람의 힘으로만 일어나라는 게 아닐세그려

얼은 땅, 돌부리를 움켜쥐고 꿈틀대다

끝내 놈들의 채쭉을 나꿔채

그 힘으로 어영차 일어나야 한다네.

 

치켜뜬 눈매엔 군바리가 꼬꾸라지고

힘껏 쥔 아귀엔 코배기들이 으스러지고

썽난 뿔은 벌겋게 방망이로 달아올라

그렇지 사뭇 시뻘건 그놈으로 달아올라

 

벗이여

민중의 배짱에 불을 질러라.

꽹쇠는 갈라쳐 판을 열고

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

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

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을 몽창 쓸어안고 무너져라.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노래소리 한번 드높지만

다시 폭풍은 몰아쳐

오라를 뿌리치면

다시 엉치를 짓모으고 그걸로도 안 되면

다시 손톱을 빼고 그걸로도 안 되면

그곳까지 언 무를 쑤셔넣고 아......

 

그 어처구니없는 악다구니가

대체 이 세상 어느 놈의 짓인줄 아나

 

바로 늑대라는 놈의 짓이지

사람 먹는 범 호랑이는 그래도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는데

사람을 산 채로 키워서 신경과 경락까지 뜯어먹는 건

바로 이 세상 남은 마지막 짐승 가진자들의 짓이라

 

그 싸나운 발톱에 날개가 찟긴

매와 같은 춤꾼이여

 

이때

가파른 벼랑에서 붙들었던 풀포기는 놓아야 한다네

빌붙어 목숨에 연연했던 노예의 몸짓

허튼 춤이지, 몸짓만 있고

춤이 없었던 몸부림이지

춤은 있으되 대가 없는 풀 죽은 살풀이지

그 모든 헛된 꿈을 어르는 찬사

한갓된 신명의 허울은 여보게 아예 그대 몸에

한오라기도 챙기질 말아야 한다네.

 

다만 저 거덜난 잿더미 속

자네의 맨 밑두리엔

우주의 깊이보다 더 위대한 노여움

꺼질 수 없는 사람의 목숨이 있을지니

 

바로 그 불꽃으로 하여 자기를 지피시라.

그리하면 해진 버선 팅팅 부르튼 발끝에는

어느덧 민중의 넋이

유격병처럼 파고들어

뿌러졌던 허리춤에도 어느덧

민중의 피가 도둑처럼 기어들고

어깨짓은 버들가지 신바람이 일어

나간이 몸짓이지 그렇지 곧은목지 몸짓

 

여보게, 거 왜 알지 않는가

춤꾼은 원래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는 눈짓 말일세

저 싸우는 현장의 장단 소리에 맞추어

 

벗이여, 알통이 벌떡이는

노동자의 팔뚝에 신부처럼 안기시라

 

바로 거기선 자기를 놓아야 한다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의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비로소 한 춤꾼은 비로소 굽이치는 자기 춤을 얻나니

 

벗이여

비록 저 이름없는 병사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어깨를 껴

거대한 도리깨처럼

저 가진자들의 거짓된 껍줄을 털어라

이 세상 껍줄을 털면서 자기를 털고

빠듯이 익어가는 알맹이, 해방의 세상

그렇지 바로 그것을 빚어내야 한다네

 

승리의 세계지

그렇지, 지기는 누가 졌단 말인가

우리 쓰러졌어도 이기고 있는 민중의 아우성 젊은 춤꾼이여

, 우리 굿의 맨마루, 절정 인류 최초의 맘판을 일으키시라

 

온 몸으로 디리대는 자만이 맛보는

승리의 절정 맘판과의

짜릿한 교감의 주인공이여

 

저 페허 위에 너무나 원통해

모두가 발을 구르는 저 폐허 위에

희대의 학살자를 몰아치는

몸부림의 극치 아 신바람 신바람을 일으키시라

 

이 썩어 문드러진 놈의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 ,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다

마지막 심지까지 꼬꾸라진다 해도

언땅을 어영차 지고 일어서는

대지의 새싹 나네처럼

 

젊은 춤꾼이여,

딱 한발띠기에 인생을 걸어라.

 

198012

1954년 스물 두 살 전쟁이 끝난 직후 백기완은 벗들과 함께 <자진학생녹화대>를 결성하여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나무심기운동ㅇㄹ 저극적으로 전개, 7년 동안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강산에 2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다. -사진 통일문제연구소

 

 

 

고통받은 약자들의 영원한 벗 백기완의 마지막 원고 "김진숙 힘내라

한국 진보운동의 거목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세상을 떴다. 정권의 불의에 저항하는 현장, 약자들이 싸우는 현장이라면 마다 않고 발길을 향하던 그를 이제는 볼 수 없다.

 

지난해 1월부터 폐렴으로 투병생활을 해온 백 소장이 15일 오전 서울대병원에서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투사, 사회운동가인 동시에 새내기, 동아리, 달동네 등 수많은 한글어를 만들어낸 우리말 운동가, 소설 <버선발 이야기>,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등을 펴낸 문필가였던 백 소장의 삶을 정리했다.

강경대 열사 1주기에서 발언하고 있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민사연

 

백기완 소장의 어린 시절...분단된 가족, 어려운 형편

백 소장은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해방 뒤 1946, 백 소장은 아버지를 따라 둘째 형, 여동생과 함께 서울로 왔다. 어머니와 큰형, 누나는 은율에 남았다. 그 시절 백 소장의 꿈은 축구선수였다.

 

서울 삶은 녹록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형편 탓에 축구선수의 꿈을 이루기는커녕 초등학교 4학년을 마지막으로 학교에도 다니지 못했다. 대신 백 소장은 독학으로 시, 소설 등 문학작품을 읽었다. 영어사전을 모두 외워 천재소년으로 신문에 나기도 했다.

 

이 시절 백 소장의 선생은 책속에만 있지 않았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거리에서 겪은 일이 그의 선생이었다. 백 소장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서 평소 따르던 가대기(창고나 부두에서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을 하는 사람) 형이 동네 친구들과 주먹질을 하고 이겼다고 으스대던 자신에게 해준 말을 서울역에 시비를 세워 새기고 싶다고 적었다.

 

"싸움이란 말이다. 턱없이 뺏어대는 놈들 있잖아. 그 있는 놈들하고 해야 하는 거라고. 없는 놈들끼리 붙어봐야 서로 코만 터지는 거야. 알겠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난 일도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간 백범 선생의 집에서 선생은 "저렇게 쏘는 눈을 가진 애한테는 무언가를 물려줘야지"하며 백 소장이 들고 간 <백범일지>에 서산대사가 쓴 시를 적어줬다.

 

 

눈이 허옇게 내린

들판을 가드래도

발걸음을 흐트러뜨리지 말거라

왜냐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뒤에 올 사람들의 길라잡이가 되느니라

19506·25 전쟁이 일어나고 남북이 분단되며 가족도 나뉘어 살게 됐다. 백 소장은 이때 부산제5육군병원에서 군 복무를 했다.

 

전쟁 통에 징용된 작은 형이 죽기도 했다. 죽기 얼마 전 작은 형은 백 소장에게 "너희 언니() 이 백기현이는 저 노녘(북쪽) 어머니를 겨냥해서는 단 한 방도 쏠 수가 없구나. 그래서 하늘에 대고만 빵빵 쏘는구나"라고 적은 편지를 보냈다. 전쟁이 끝난 뒤 백 소장은 형의 시체를 찾기 위해 강원도까지 갔지만 찾지 못했다.

 

이같은 가족사는 이후 백 소장이 통일운동에 매진하는 계기가 됐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과 고된 어린 시절도 백 소장이 일생에 걸쳐 노동자, 농민, 빈민 등 약자를 위한 삶을 살게 한 밑거름이었을지 모른다.

195018살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통일문제연구소

 

민주화 운동을 하며 치른 두 번의 옥고

전쟁이 끝나고 1954, 20대의 백 소장은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마음이 맞는 벗들과 함께 '자진농촌계몽대'를 결성했다. 나무를 심는 '자진녹화대'도 만들었다. 백 소장의 이같은 활동은 그 자신의 술회에 따르면, 1961년까지 이어졌다. 이때 만들어진 인연으로 1957년 평생의 동지였던 김정숙 여사와 결혼하기도 했다.

 

백 소장이 한창 사회운동에 매진하던 1960,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이 일어났다. 백 소장은 이때도 거리에 나가 민주화를 외쳤지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서 당시 자신의 행적에 대해 "그 굽이치는 물살에 한 방울 이슬로 깨지지도 못하고 기껏 소리나 지르며 따라다"녔다고 회상하며 부끄러워했다.

 

4·19혁명 이후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백 소장이 재야운동의 전면에 드러난 것은 박정희 정권의 군사독재에 맞서는 싸움을 하면서였다.

 

그 시초가 되는 싸움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백 소장은 당시 을지로 흥사단 강당에서 함석헌, 변영태 등과 함께 "한일협정 깨부수자"고 외치다 검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어 1969년에도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했다.

 

1972년 대통령 직선제 폐지, 대통령 종신 집권 가능 등을 내용으로 하는 유신헌법이 통과됐다. 백 소장은 다시 한 번 박정희 정권에 맞섰다. 1973년 장준하 선생 등과 함게 '유신헌법 개천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조직했다.

 

이듬해인 1974년 박정희 정권은 헌법 비방 행위 금지 등을 담은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동했다. 백 소장은 장준하 선생과 함께 체포돼 긴급조치 1호 위반자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고 다음해 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1979년 박정희가 사망하자 전두환이 10·26 쿠데타를 일으켰다. 백 소장은 이 시기에도 민주화를 위한 싸움을 계속했다.

 

대표적인 사건은 '1979YMCA 위장 결혼식'이다. 가짜 결혼식으로 사람을 모은 뒤 민주화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일이었다. 계엄령 하에서 사람이 모이면 신고를 해야 하지만 결혼식은 따로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백 소장은 이 일로 용산구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몽둥이로 두드려 맞고 무릎을 앞으로 꺾이고 손톱을 뽑히는 등 고문을 당했다. 두 번째 옥고도 치렀다. 이때 자신을 을러대기 위해 쓴 장편시 <묏비나리> 중 일부가 훗날 황석영 작가에 의해 개작돼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에 쓰였다.

 

백 소장의 두 번째 옥살이는 19813·1절 특사로 마무리됐다. 석방 뒤에도 백 소장은 민주화 운동을 계속했다. 80년대 중반에는 문익환 목사가 의장으로 있던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의 부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왼쪽)과 장준하 선생(오른쪽). 통일문제연구소

 

광야에서 비바람을 맞는 사람에게 변함없이 버팀목이 되어 준 사람

 

19876월 항쟁이 일어나고 13대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백 소장은 민중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김대중, 김영상 두 호보의 단일화를 민중의 힘으로 압박한다는 목적에서였다. 백 소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나 설득에 나서기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거 이틀 전 두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며 사퇴했다.

이어 1992년 백 소장은 노동자민중후보로 추대돼 다시 한 번 대선에 출마해 끝까지 완주해 24만여 표(1%)를 받았다. 독자적인 진보정치 시대의 뿌리로 평할만한 행보였다.

 

이후 말년까지 백 소장은 정권의 불의에 맞서고 생존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곁을 지켰다.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 밀양송전탑 반대 투쟁,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 세월호 집회는 물론 기륭전자, 용산참사, 쌍용차, 유성기업, 콜트콜텍, 파인텍, 한진중공업, 태안화력발전소 등 투쟁 사업장에서도 늘 그의 모습이 보였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반대집회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뉴스타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불쌈꾼 백기완>에서 백 소장에 대해 "8, 90년대 많은 재야인사가 노동자들 곁을 떠났지만 백 선생님은 늘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함께 해주신 분"이라며 "광야에서 온몸으로 비바람을 맞는 사람에게 작은 언덕이 돼주신, 존재 이상의 의미가 있는 분이셨다"고 말했다.

 

약자들의 변치 않는 버팀목이었던 백 소장은 지난해 1월 폐렴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병상에서도 그는 약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백 소장의 가장 최근 행보는 지난해 12'연내 중대재해법 제정과 김진숙 복직을 촉구하는 사회원로 기자회견'에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당일 백 소장은 몸이 불편한 탓에 하루 온종일을 들여 쓴 육필 원고를 보내왔다. 그의 원고에는 "김진숙 힘내라"는 여섯 글자가 담겨있었다.

 

백 소장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이다. 발인은 오는 19일이다.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에 마련된다.

2011년 쌍용차 해결 촉구 국민대회에서 발언 중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정택용

2016년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있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채원희

2017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 참석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왼쪽에서 세 번째). 채원희

2019년 고 김용균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의 장례식을 찾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정택용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2015, 여든세 살.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위한 한겨울 오체투지 행진 중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눈물 흘리는 백기완 이정용

 

() 백기완 선생은 평생을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에 앞장선 재야운동가다. 또한 뛰어난 시와 소설을 쓴 예술가이자 민속문화 및 순우리말의 보고(寶庫)였다. 사자갈기 머리와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수십만 청중을 단숨에 사로잡은 명연설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칭·타칭 울보라고 할 만큼 약자앞에서는 눈물이 많은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성격 때문에 말년에는 외로움도 많이 탄 것으로 전해진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백 선생은 노동·통일·민주화운동의 큰 어른이시자 민족 혼을 온몸으로 구현하신 분으로서 1980년대부터 일어난 민중문화운동의 사표(師表)였다나를 비롯해 임진택(창작판소리), 이애주(썽풀이 춤), 채희완(탈춤). 김민기(가수), 주재환(화가), 김정헌(화가), 김정환(시인), 황석영(소설) 등 민족예술 1세대들에게 큰 영감을 주셨다고 말했다.

 

백 선생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 구월산 밑에서 태어났다. 42녀 중 넷째였다. 일제시대 때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대다 일경에 발각되어 고문 끝에 옥사한 백태주 선생이 조부다. 탈옥한 백범 김구 선생을 집에 한동안 피신시키기도 했다. 조부 때부터의 인연이 이어져 백 선생은 1967년 서울 충무로에 백범사상연구소를 열기도 했다.

 

백 선생은 1946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삼팔선을 넘었다. 어머니와 큰형, 누나는 북한에 남았다. 삼팔선을 사이에 둔 어머니가 그리워 선생은 매년 추석이 다가오면 백년설의 어머니 사랑을 부르곤 했다.

 

정규교육이라고는 일제시대 때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닌 게 전부였다. 하지만 독학으로 청계천 중고책방에서 영어사전을 통채로 외워 고등학생 영어과외를 시켰을 만큼 머리가 비상했다.

 

청년시절인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자진녹화대’ ‘자진농촌계몽대를 결성해 전쟁의 상흔을 끌어안고 참다운 민중의식을 세우기 위한 나무심기운동과 농민운동, 빈민운동을 했다. 재야운동가로서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1964한일협정반대운동이었다. 이후 “3선개헌 반대”, “유신 철폐를 외치며 거리투쟁의 선봉에 섰다. 1974년 장준하 선생과 함께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로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75년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979년에는 ‘YWCA 위장결혼사건을 주도했다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여러 달 동안 감금됐다. 살점이 떨어지고 손톱이 뽑히는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백 선생은 생전에 당시 고문으로 10시간가량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후 이렇게 죽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안간힘을 다해 쓴 시가 묏비나리’”라고 밝힌 바 있다. 독방 감옥의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누운 상태로 스스로를 달구질하기 위해 필기도구도 없이 입으로 지어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워 내놓은, 15장으로 구성된 장시(長詩). 황석영 작가가 5·18항쟁 희생자를 추모하며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 임을 위한 행진곡은 실제 백 선생의 묏비나리가 원작이다. 백 선생의 문학적 성취를 꼽을 때 유신의 압제가 절정이었던 1977년 발표한 수필집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를 빼놓을 수 없다. (원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으로 쓴 이 책의 내용 중 특히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황해도에서 구전돼 온 장산곶매의 옛 이야기다. 날짐승 중 으뜸인 매, 그 중에서도 으뜸인 장산곶매가 대륙으로 떠나기 전날 밤새 부리질을 하여 자기 둥지를 부순다는 내용이다. 생사를 결단하고 싸움터에 나서는 전사, 의사, 열사의 전형상을 은유하는 설화다. 이후 장산곶매는 민중의 분노와 결단, 저항과 비상의 표상이 되었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년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된 백기완(가운데). 경향신문 자료사진

 

백 선생은 19876월항쟁 이후 열린 제 13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재야운동권의 독자 후보로 추대됐다. 김대중(DJ)·김영삼(YS) 두 후보가 야권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민중의 힘으로 압박하는 게 목적이었다. 두루마기 차림으로 주먹을 불끈 쥔 채 청중 앞에서 포효하는 그의 모습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만큼 청중을 단숨에 사로잡는 명연설가였다. 당시 대학로 대규모 유세 현장 등에는 대학생 등 10만명 이상의 청중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다. “재야운동가 고 계훈제 선생(1921-1999)이 생전에 몽양 여운형 선생보다 백기완이 더 연설을 잘 하는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은 전했다. 하지만 DJYS의 분열을 끝내 막지 못해 백 선생은 선거 이틀 전 피눈물을 머금고 후보를 사퇴했다. 이후 1992년 제14대 대선에도 노동자민중후보로 추대됐지만 현실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말년까지 그는 노동자, 농민, 철거민 등 이름없는 약자를 위한 집회나 비리 정권에 맞서는 현장이라면 제일 먼저 달려가 맨 앞줄을 지켰다. 박종철(1987·고문치사강경대(1991·백골단에 의해 사망박창수(1991·의문사백남기(2015·경찰의 물대포에 의해 사망) 열사 등 정권의 압제에 의해 아까운 생명들이 수없이 스러질 때마다, 또 용산참사(2009)와 세월호 참사(2014) 때에도 선봉에 서서 목이 터져라 싸웠다. 2011년 해고노동자 김진숙씨가 부산 부둣가 한진중공업 크레인 꼭대기에 올라가 300일 동안 고공농성을 하며 사투를 벌일 때에는 일어나자, 일어나 이 밤을 뚫자라는 피끓는 벽시를 띄우기도 했다. 송경동 시인은 이후에도 쌍용차, 유성기업, 밀양송전탑건설반대, 현대차비정규직 등을 돕기 위해 출발한 희망버스라는 이름의 연대동참이 꼬리를 이었다. 1호차 차장은 늘 백 선생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 때는 단 한번도 빠진 적 없이 광화문 광장을 지켰다. 행여 소변이 마려워 자신이 현장을 흐트러뜨리는 상황이 올까봐 전날이면 아예 물을 안 마셨을 정도다. 백 선생은 그래도 참지 못해 앉은 자리에서 옷을 적신 적이 있었다온몸이 촛불이 돼 현장의 제일선에 서겠다고 한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20179월 백기완 선생이 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 한상균 위원장과 나란히 서서 시위를 하고 있다. 민주노총 제공

 

그는 눈물이 많았다. 생전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언론인 겸 정치인 장준하 선생이 1975년 의문사를 당하자 한 달을 계속 울었고,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보면서도 숱하게 눈물을 쏟았다.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고 문익환 목사와 더불어 재야의 동지였던 계훈제 선생의 기일이면 백 선생은 매년 경기 마석의 묘소를 찾아 막걸리 한 잔을 올리면서, ‘형님, 미안합니다. 좋은 세상 만들어 형님께 보여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내 죄가 많습니다라고 말하며 꺼이꺼이 울었다. 굉장히 인간적인 그런 모습이 내게는 더 인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불쌈꾼(혁명가), 동아리(서클), 새내기(신입생), 새뜸(새소식), 달동네 등 백 선생의 잊혀진 순우리말 사랑과 보급은 쉼 없었다. 그러나 생전 그렇게 바라던 남과 북의 통일을 끝내 보지 못했다. 자본주의를 넘어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을 뜻하는 노나메기세상도 끝내 보지 못했다. 백 선생이 우리 사회에 남겨둔 숙제다.

 

그는 2018427일 남북정상회담 때 판문점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손을 맞잡고 분단선을 서로 넘어서는 장면을 당시 입원해 있던 서울대병원 병상에서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당시 선생은 남북한 최고 지도자가 서로 웃으며 악수한 것은 한민족이 택한 평화와 통일의 아우성을 깃발처럼 날린 장면이었다고 말했다. 앞서 그해 49일 백 선생은 심혈관 질환으로 입원해 12시간에 걸친 긴 수술을 받았다. 이후 폐렴 등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면서도 우리 민중사상의 원형인 <버선발 이야기> 집필에 매달려 이듬해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파인텍굴뚝 고공농성 해결, 고 김용균 청년비정규직 진상규명 등을 위해 사회원로 시국선언을 개최하는 등 눈을 감기 전까지 예술가와 투사로서의 삶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서울대병원 병동에서 생전 그가 마지막으로 육필로 쓴 글도 최근 한진중공업 복직을 촉구하는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34일간의 도보행진을 벌인 김진숙(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힘내라였다. 영원한 투사 백기완의 꿈은 거리와 광장에서 아직 오지 않은 해방을 노래하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스러지는 것이었다.

 

 

주요 저서

* 시집

<젊은 날>(1982, 옥중시·비매품)

<이제 때는 왔다>(1985, 풀빛출판사)

<백두산 천지>(1989, 도서출판 민족통일)

<! 나에게도>(1996, 도서출판 푸른숲)

 

*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1985, 화다출판사·통일문제연구소)

 

* 평론집/ 수필집

<항일민족론> <항일민족시집>(1971)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1977)

<거듭 깨어나서>(1985)

<통일이냐 반 통일이냐>(1987)

<나도 한때 사랑을 해본 놈 아니오>(1991)

<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누가 백성노릇을 할까?>(1992)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1999)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부심이의 엄마생각>(2005)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두 어른>(2017)

 

* 번역서

<앎과 함 문고>

<원저 :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미국 노동운동 비사>(1974~79년 전 5권으로 출간)

 

* 자료집(백범사상연구소 연구 문헌)

<백범어록>

<내가 걷는 이 길은>(바로 잡은 백범일지)

<도왜실기>(해설)

 

* 공저(共著)

<해방전후사의 인식>(1979)

<민족·통일·해방의 논리>(1984)

<가자 민중의 시대로>(1988, 통일문제연구소 편)

<, 통일>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엄씨들의 행진은 이제부터다>

그외 연구논문 다수

 

* 옛이야기

<우리 겨레 위대한 이야기>(1989)

<이심이 이야기>(1991)

<장산곶매 이야기>(1993)

<장산곶매 이야기 완결판>(2004)

<따끔한 한모금>(가제본)(2007)

<하얀 종이배>(초고 완성)(2012)

<버선발 이야기>(2019)

 

* 영화극본

<단돈 만원>(1994)

<대륙>(1995)

<쾌진아 칭칭 나네>(1995)

 

* 계절마다 내는 책

<노나메기> (2000년부터·1~9호까지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