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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게리 스나이더 “함께 머물고 꽃을 배우며 가벼이 떠나라”

by 이성근 2021. 3. 28.

 

게리 스나이더(1930~)

1930년 미국 쌘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광활한 자연과 북미 원주민의 정신세계에 관심을 가지며 자랐다. 리드대, 버클리대에서 문학, 인류학, 동양학을 연구했고, 비트문학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운동에 동참했다. 벌목꾼, 산불 감시원, 선원으로 일하며 자연 속의 노동과 명상을 실천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10여년 동안 선불교를 연구하며 참선수행에 몰두한 후 미국 씨에라네바다에 돌아와 정착했다. 1985년부터 데이비스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희귀생물종 보호와 소수민족문화 보존 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생태주의로의 문명적 전환을 촉구해왔다.

 

주요 작품으로 시집 <신화와 텍스트><거북섬><무성(無性)><산하무한><산꼭대기의 위험> 등과 산문집 <옛 방식들><야성의 삶><지구, 우주의 한 마을> 등이 있다. 미국예술원상(1966), 퓰리처상(1975), 미국도서상(1983), 볼링겐상(1997) 등을 수상했다.

 

 

시에라네바다 산속 집서 홀로 살며

평화·환경운동 실천하는 시인

모든 생물 존중 거북섬 관점제시

20009월 방한 때의 게리 스나이더. <한겨레> 자료사진

 

코로나19로 한달에 한두번 만나던 드문 인연들마저 끊겨 새벽부터 황혼까지 끝없이 변하는 하늘과 구름, 해와 달, 안개와 비, 닭과 개, 꿩과 새, 나무와 채소의 들녘에서 침묵과 노동으로 하루를 지내면 정치나 경제 따위는 물론 세상도 사람도 잊어버린다.

명상이니 사색이니 할 것도 없다. 오로지 고요와 침묵 그리고 일과 땀뿐이다. 묵언수행의 맹세도, 참선의 죽비도 필요 없다. 아무리 고적한 절간이라고 해도 사방이 벽으로 막힌 방은 물론 그 방문을 닫는 자물쇠도 싫다. 부처처럼 사방이 막힌 방이 아니라 사방이 트인 들판에서 홀로 지내며 나를 들판에 오게 한 게리 스나이더의 <야생의 실천>을 다시 읽는 것은 예술도, 사랑도, 불교도 야생으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의식적인 실천일 뿐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올해 아흔한살이지만 캘리포니아 태평양 연안을 남북으로 뻗는 시에라네바다 산속에 집을 짓고 한겨울에도 난방 없이 홀로 사는 스나이더는 자기처럼 사는 사람이 동서고금에 많다고 하면서 별일이 아니라고 해 좋다.

 

1930년 대공황 초기에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태평양 북서부의 농장에서 자라 인디언 신화와 시, 선과 도교를 공부한 그는 개울이 질식하고 송어가 죽고 길이 죽었다며 백인의 인디언 학살과 자연 파괴를 혐오하면서 반세기 이상 산속에서 외롭게 산다.

 

나는 부끄럽게도 청년 스나이더가 미국에 처음 소개한 책을 읽고서야 한산(寒山)을 알았다. 자작나무 껍질을 머리에 쓰고 너덜너덜하게 해진 옷을 입고 나막신을 질질 끌고 다녔다는 중국 당나라의 한산은 체제순응적인 중국 귀족불교를 거부하고 민중불교를 실천하면서 절밥을 짓는 습득(拾得)에게 음식찌꺼기를 얻어먹으며 암굴의 은둔

자로 살았다. 그런 한산을 잇는 스나이더가 쓴 <아미타불의 서원>을 나는 좋아한다.

 

일본에서 선불교 공부

만일 부처로 된 뒤, 내 땅에서 누구라도/ 방랑자 혐의로 감옥에 갇힌다면, 내가/ 최상의 완벽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하소서// 과수원의 들오리들/ 새 풀 위의 서리.” 앞 구절의 방랑자 혐의로 감옥에 갇힌다면가난해서 병들어 죽게 되면등등 세상의 모든 불행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뒤 구절의 들오리나 서리는 서로 연결되는 세상의 모든 생물이나 무생물로도 바꿀 수 있다. 불교에 대해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아니 세상살이에 또 무엇이 더 필요한가? “나무 한 그루만으로/ 족하다/ 아니면 바위나 작은 시내,/ 웅덩이에 뜬 나무껍질 조각만으로도,/ 첩첩이 포개져 꿈틀거리는 산 너머 산/ 얇은 돌 사이로/ 단단한 나무들 빽빽하고/ 그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달이 너무 밝다는 스나이더의 지족에 손뼉을 친다.

 

시인의 임무는 숲을 지키는 것이라 하며 스스로 선택한 벌목꾼, 산불 감시원, 선원 등으로 일한 노동자 시인 스나이더는 1957년 화물선을 타고 일본에 건너가 임제종의 선불교를 공부했지만, 출가가 형식이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1969년 일본에서 돌아와 산속에 들어가 평화와 환경운동에 헌신하며, 동양철학과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1970년부터 20년 동안 자신의 삶을 기록한 <야생의 실천>은 야생과 접촉하고 주변의 들판을 야생 잠재력이 완전히 표현되고 다양한 자신의 질서에 따라 번성하는 생물과 무생물의 다양성의 장소로 살아가는 사회경제적 생활을 추구한 책이다. 지역에서 살며 일해야 문화를 키울 수 있고, 야성을 회복해야 문화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하는 생물지역주의(bioregionalism)를 주장하면서 식물과 동물의 고통을 이해하고 느끼며 모든 생물체에 대한 존중감을 가지는” ‘거북섬의 관점을 제시한다.

 

거북섬이란 인디언들이 미국을 가리키던 이름이다. 인디언적 관점의 생물지역주의는 인간이 자의적으로 구분한 정치적·행정적 지역이 아니라 장소, 가령 분수령이나 산등성이 등과 같은 지형이나 기후 패턴 혹은 식생대에 따라 다시 구분하고, 이런 생태지리적 특성과 그것에 따른 최적의 생활양식을 통해 장소에 헌신하는 재거주(reinhabitation)를 실천하는 운동이다.

 

거북섬에서 재거주하는 삶의 목표는 인디언의 생활방식을 배우며 장소에 헌신하는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면서 장소에 대한 원주민성’(nativeness)을 갖는 것으로, 그것은 후손에게까지 이어져 이상적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 공동체에서 실현하는 자연 생태계와 인간의 이상적인 공존이야말로 환경 위험과 생태계 파괴를 막을 수 있다고 역설하는 그는 <아이들을 위하여>에서 거북섬에서의 재거주가 지속되기를 바라며 후손들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조언한다. “함께 머물고/ 꽃을 배우며/ 가벼이 떠나라.”

 

교수 할 때도 직접 노동

스나이더는 대학 교단에 서기도 했으나 그때도 여전히 노동을 했으니 교수직은 부업에 불과했다. 그 때문인지 대학에 대해 남긴 글이 거의 없고, 사제지간이니 학맥이니 학파니 학회니 학술논문집이니 하는 것과도 무관했다. 그러니 부모나 친구처럼 그도 평생 노동자로 산다.

 

사회주의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사회주의에 기울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본주의하의 노동이 인간을 소외시키기는커녕 소외를 피하는 방법이라고 하면서 인간 중심 사고와 생산성 추구가 문제라고 본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도 생산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저들은 복잡한 것들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를 수천명씩 사로잡아/ 일을 시킨다/ 이 마을과 길로써/ 세상은 엉망이 되어 간다.” 스나이더의 노동관도 선불교에서 말하듯이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 일일부작 일일불식)는 것이다. 그에게 노동은 고전보다 중요하다. “무슨 소용인가, 밀턴,/ 우리의 나락한 조상,/ 과일 먹은 사람들의 실없는 이야기가.” 선불교처럼 노동을 수행으로 보는 스나이더는 나아가 돌길을 만드는 노동을 하면서 그것을 시와 같은 예술의 창작으로 본다.

 

네 마음 앞에 이 단어들을/ 돌을 놓듯이 두어라/ 단단히 맞게, 손으로/ 장소에 맞게, /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마음의 몸 앞에.” 그래서 내가 무엇을 배웠던가/ 내가 몇 가지 도구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 외에 무엇을 배웠던가?” 낫과 괭이와 삽으로 충분한 나도 배울 것이 없다.

 

스나이더는 기술을 거부하지 않지만 인간이 기술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의 규모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점에서 그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쓴 에른스트 슈마허의 불교적 노동관과 통한다. 원자력과 같은 거대산업은 중앙집권으로 지역성을 파괴하고 자연환경과 생명을 파괴하기에 반대한다.

 

스나이더는, 야만적 본능의 분출을 야성적 삶이라고 하며, 성추행을 예술의 일환이라고 오도하며, 세금으로 숲속의 호화빌라에서 공짜로 살면서 권력에 빌붙기도 하는 소위 국민시인이니 하는 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성적 방종은 물론 어떤 권력과도, 문단이나 대학이라는 조직과도 철저히 거리를 두면서 오로지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게 노동하는 시인으로 산다는 점에서, 농부 시인으로 25년을 외딴섬에서 살다 죽은 야마오 산세이의 진정한 친구다.

 

숨지기 4년 전에 30년 지기 스나이더를 찾아간 야마오의 생생한 글은 <여기에 사는 즐거움>에 나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그래서 나는 고향인 도쿄를 버리고 농부가 되었다고 노래하며 잡담을 삼가고 침묵을 지키며 걸을 것을 권한 야마오도 나를 들판의 고요함으로 인도한 좋은 벗이다./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한겨레 21.3.27

이 현재의 순간 /게리 스나이더 시선집/ 역자 서강목|들녘 |2005.05

원제This present moment

 

교토: 3

 

약간의 밝은 눈발

약한 햇빛 속으로 떨어진다.

추위 속에서 새들 우니,

담장 가의 가객이다. 오얏나무

차고 입 다문 봉오리들 곧 피어난다.

처음 달이 떠오르고ㅡ

밤이 오자 희미한

서쪽 조각달. 밤 명상이 끝날 즈음

목성은 중천에

뜬다. 비둘기 활시위

소리로 운다.

새벽 히에이 산은 정상이

하이얗다. 쾌청한 대기 속에

마을 둘러싼 첩첩한 푸른 언덕

날카롭게 다가오고,

숨결이 아려온다. 서리 내린 집들

지붕 밑

연인들 몸 풀어, 이불 아래

따뜻한 살의 얽힘 벗어나고

얼을 깨어 세수하며

잠 깨어 그들 사랑

자식들 손자들을 깨우고 먹인다.

 

 

시는 죽었는가, 아니다.

시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또한 시가 없는 곳에도 시가 있다.

인류의 시작과 함께 있는 시.

인류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질 시.

그리하여 시는 이 지상의 처음과 끝이다.

온갖 슬픔과 기쁨 그리고 어둠과 한 줄기 빛살이 내려오는

모든 곳에서 시는 생명과 영혼은 기호이다.

우리는 이같은 시의 매혹과 존엄 그리고 그 뜨거운 숨결에

동행하기 위해서 현존 세계 시인들의

한 편 한편의 진실에 다가간다.

시는 있다. 시는 살아 있다

 

 

 

이 현재의 순간

 

이 현재의 순간,

오래 살아,

먼 옛날

된다

 

야생의 실천 The Practice of the Wild 저자 게리 스나이더|문학동네 |2015.12

 

출판사 서평

야생의 현자, 게리 스나이더

현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자연시인. 사람들은 스나이더를 이렇게 표현한다. 야성과 자유의 의미를 찾아 평생을 매진해온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얼마 후 북서태평양 연안으로 작은 농장으로 이주했다. 어릴 적부터 눈 덮인 산봉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에 사로잡혀 홀로 여러 산들을 등반하며 자연스레 거친 자연의 풍광에 동화되었다.

 

여러 대학을 거치며 학문에 매진하면서도 벌목꾼, 배수시설 노동자, 산림관리원 등 꾸준히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그는 1956년 일본으로 떠나 교토의 한 임제종 사찰에 머물며 선() 수행을 시작한다. 스나이더는 일본에서 승려로 살기로 결심했고 얼마 동안은 그것이 그의 인생이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수행을 거듭하면서 외적인 형식이 내적인 수행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삭발과 장삼이 그 당시 미국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독특한 이력 덕택에, 잭 케루악은 스나이더를 비트문학의 고전이 된 소설 달마의 후예들의 주인공 재피 라이더의 본보기로 삼기도 했다.

 

스나이더는 자신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이 성스러운 거북섬(인디언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의 모양을 빗대어 붙인 이름)’의 일원이라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영적인 수행에 대해 어릴 적부터 친근함을 느꼈으며, 아울러 자연과 친해지게 되었다

 

이후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 우거진 시에라네바다 구릉지에 손수 집을 짓고 가족과 함께 정착한 스나이더는, 85세의 고령이 된 현재까지도 환경 보호와 세계 평화를 위한 캠페인과 강연을 하는 등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인간에 대한 명상, 모든 생명을 위한 기도

오늘날 사람들은 대개 건물 안에서 천장에 가려진 하늘을 한 번도 쳐다보지 못하고, 자동차를 타고 포장된 도로로만 다니며 흙 한 번 밟지 않고 살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살아 있는 동물의 일부였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도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며, 어떤 풀 한 포기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바야흐로 모든 것이 인공(人工)인 시대. 안락한 삶을 향유하게 해주는 문명에서 살고 있지만, 그만큼 자연과 유리되어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계속 심화되고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희생을 점점 더 크게 담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나이더는 이 팽창 일변도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인류가 자연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과정을 추적해보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일련의 작업들과는 다르게, 정신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야생을 우리가 잃어가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이런 회의(懷疑)는 그로 하여금 불교와 신화에 가닿게 했으며, 하나의 궁극적인 야생 체계를 사유하게 했다.

 

그는 자연이 가진 고유의 장소성과 그곳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인류의 언어, 노래, 춤과 같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나아간다. 이는 인간이 하늘에서 떨어진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전 생명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단지 자연과의 대결이라는 지엽적인 측면에 머물지 않고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체를 동등하게 여기며 전 지구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좀더 통합적이고 신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머니로서의 지구가 우리에게 베푸는 거대한 사랑을 인식하고, 때로는 냉혹하면서도 결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진정한 야생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자연과의 조화이다. 우리는 그의 말처럼 좀더 섬세하게 세계와 조화하려는 신중한 노력을 일관되게,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스나이더가 말하는 실천(practice)’의 의미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그 세련된 사회조직이 가진 견고한 질서의 매력적인 복잡성을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명 이전의 까마득한 고대부터 우리에게 전해내려왔던, 지금은 잊힌 수많은 교훈들과 삶의 기술들을 회복하자는 이야기다. 이미 뛰어난 성취를 이루어냈으며 앞으로도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안의 야생성에 귀기울일 때, 인류는 또 한번 새로운 도약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야성적이고 자유로운.’ 이 미국적인 꿈의 표현은 이제 그 이미지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긴 갈기를 날리며 초원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말, 높은 곳에서 울음소리를 떨구며 V자형으로 떼지어 날아가는 캐나다 기러기, 머리 위 참나무에서 재잘거리며 나뭇가지 사이를 건너다니는 다람쥐. 그것은 또한 할리 데이비슨의 광고 장면 같기도 합니다. 대단히 정치적이고 민감한 위의 두 단어는 이제 소비자들을 현혹하는 눈요기 상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p.28

 

우리는 이곳이 우리가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우리의 후손도 앞으로 수천 년 동안 이곳에서 살 것이라는 사실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 땅의 위대한 오랜 역사, 그 야성에 경의를 표하고, 그것을 배우고, 그것을 지키고, 그리고 이곳에 있는 다양한 생물종과 건강이 손상되지 않은 미래를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유럽이나 아프리카, 아시아가 우리의 조상들이 건너온 장소라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p.90~91

 

책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은유는 정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로운 것이기도 합니다. 세계는 기호들로 충만할 수 있겠지만 집주본 고문서를 가진 고정 불변의 텍스트는 아닙니다. 책에 의지하는 모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역사 기록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주 흥미진진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가정과 더불어 여행합니다. 문자, 기술, 제도는 확실히 사람에게 우위를 제공합니다.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스스로 더 우월하다고 여겨왔습니다. 또 성서를 가진 사람들은 토속 종교의 신화와 의식이 아무리 풍부한 것이라 해도 그에 상관없이 그것을 가진 사람들보다 자신들을 우위에 놓았습니다.--- p.144

 

신대륙 북쪽 지방은 유럽의 과거로 나 있는 창입니다. 켈트족의 신성한 연어, 북유럽 문학에 나오는 갈색곰, 지중해의 돌고래, 수렵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곰 춤, 헤라클레스가 몸에 걸쳤던 사자 가죽이 인간들이 가까이 살았던 야생계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요? 문학과 상상 속에 이 경이로운 생물들이 존속하고 있음은 그들이 우리의 건강한 영혼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줍니다.--- p.152

 

현대인은 사냥할 필요가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여유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다양해서 고기를 피하기가 쉽습니다. 미국 시장에 공급할 쇠고기를 늘리기 위해 목장을 만들려고 열대림이 잘려나갑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는 겉으로는 더 편안할 수 있고 분명히 더 무지할 수도 있습니다.--- p.357

 

서구문명이 미개하고 무질서하다고 부르는 야생은, 실제로는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냉혹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자유롭다. 지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식물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삶, 폭우, 폭풍, 고요한 봄날의 아침, 그리고 어둠 속에서 반원을 그리며 쏜살같이 흘러가는 유성, 이 모든 것은 야생의 실제 세계이며, 우리 인간은 그 세계에 속해 있다.---지은이 서문중에서

 

동양의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 수도승으로 한겨울의 습한 추위와 한여름의 습한 더위의 긴 세월을 견뎌내며 인간과 생명의 궁극을 탐구하고, 그런 후 깨달음에 헌신하기 위해 버리고 떠났던 세계로 다시 진실하게 돌아온 사람, 가장 깊은 숲속 오솔길을 걸어보고, 구름 덮인 드넓은 초원에 핀 들꽃을 사랑하고, 수많은 강의 상류와 지류를 건너고, 북극지대의 마을과 마을을 찾아가본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는 생명의 오의를 싱싱한 입김으로 전해준다. ---옮긴이 서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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