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교산(蛟山) 허균

by 이성근 2021. 1. 3.

 

홍길동전저자 허균은 왜 능지처참을 당했나

허균의 호 교산(蛟山) : ()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뜻함

1569.12.10(음력113) 1618.10.12(음력824), 강원도 강릉 출생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이고 허난설헌의 남동생인 허균,초당 허엽의 아들

허균의 관직 : 3품 동부승지(현재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냈고 최고관직이 정2품 형조판서 (법무부장관)까지 지낸 인물.(2품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 등 자료마다 달라 확인필요)

홍길동전은 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겨 알려지게됨

당색(黨色)은 동인이었으며 북인, 대북으로 활동

손곡 이달과 서애 류성룡의 문인이며 동인의 초대 당수 성암 김효원의 사위

광해군 즉위 108, 1618.08.24.) 능지처참

 

"허균은 천지간의 괴물이다.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것이다 그의 일생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

(광해군일기 1618년 윤429)"

 

허균에 대한 평가

실록 속 허균에 대한 평가 : 괴물(怪物), 금수(禽獸), 요망(妖妄), 적인(適人)을 표현하면서도 허균의 글재주와 천재성은 극찬

허균의 뛰어난 문장은 임진왜란때 명의 사신과의 수창외교에서 명나라 사신들도 허균의

천재성에 감탄하여 선조가 그공을 인정하여 삼척부사로 임명

수창외교(酬唱外交) : 서로 시를 주고 받으며 뜻을 통하는 조선시대의 외교로서 학식이 뛰어 나고 시를 잘 짓는 문사(文士)들이 담당

문학적으로 홍길동전창작 외에도 그전까지의 시를 종합한 방대한 분량의 국조시산(國朝詩刪)’이며. 유배기간, 그동안 잘 먹었던 음식을 그리워하며 팔도의 먹거리를 두루 망라한 도문대작(屠門大嚼)’도 독특하고 의미 있는 저작

"허씨오문장사"로 불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가문

부친은 초당(草堂) 허엽, 이복형 허성, 허난설헌 누나, 허봉이 형

허엽 : 3대 성리학자인 서경덕의 수제자로 선조때 세력을 떨쳤던 동인의 영수

허성 : 선조 때 김성일, 황윤길과 함께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옴, 이조판서 역임 유교칠신중의 한명

 

 

조선은 왜 당대 최고지식인 허균을 비난했을까?

성리학 지배사회에서 불교를 신봉

 

허균은 밥을 먹을 때면 식경을 외고 항상 작은부처를 모시고 절하면서 스스로 부처의 제자 라고 하니 승려가 아니고 무엇인가?(선조실록4055)

사명당과 막역한 사이-사명당 비믄 작성

부처를 섬긴이유로 삼척부사로 취임한지 43일만에 파직되었는데 파직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쓰시게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이루려네"라고 했다

천주교에도 관심을 가짐

1614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무렵은 명나라에 천주교가 도입되던 시기였다.

곤여만국전도 : 1602년 천주교 전도를 위해 중국에 온 이탈리아 신부가 제작한 서양식 세계지도

마테오 리치가 세운 북경 최초의 천주교 성당인 남당에서 기도문 게십이장(偈十二章)과 천주교 찬송가를 들여올 정도로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이 있었다.

당시 조선사신단에게 인기있어던 품목은 비단,골동품이었는데 허균은 책을 구입하여 그때 들여온 서적이 4천여권이나 되었고 그때 당시로서는 불온서적인 이탁오의 서적도 들여왔었다.

** 이탁오(1527-1602) : 명나라 양명학자로 유교적 역사관를 비판하며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해 당대 이단으로 금기시되던 인물

 

당시 지배질서인 성리학에 반기를 든 시대의 반항아 허균

조의제문을 지은 김종직을 비판한 허균

허균은 "그가 조의제문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당했던 화란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하고 교활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한 것이 아닐는지?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형적은 살펴보지 않고 괜스레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치켜 올려 대유(大儒)로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태문에 특별히 나타내어 기록한다."고 하였다

김종직의 학통을 계승한 사림파에게 심하게 공격당하고

당대와 이후에 나타난 온갖 인신공격과 비방의 원인이 된다.

 

허균의 첫 파직과 자유분방함

31살이 되던해인 1599년 황해도사에 임명되나 부임 6개월만에 첫 파직이 된다.

평소 알고지내던 기생들을 한양에서 황해도까지 데려갔다는 죄목이었다.

"허균은 행실도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다(선조실록 32525)"

성리학적 지배질서가 지배하는 조선에서 허균의 자유분망함은 용납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허균은 세간의 비난에 개의치 않았다.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것이요(男女情欲天也), 인륜과 기간을 분별하는 것은 성인이 주신것이니(倫紀分別 聖人之敎也) 나는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어길수는 없다(我則從天而不敢從聖人)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중에도 기생을 끼고 놀아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선조실록160496)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행동이 허균이 비난 받은 이유이나 부모의 상중에의 행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덕적을 용납받기 힘든 행동이다.

 

조관기행(漕官紀行) : 허균이 해운판관이라는 벼슬을 지낼때 쓴 6개월 동안의 일기로서

언제, 어떤 기생(산월, 춘랑, 옥일,낙빈 등)을 만났는지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광산월이 와서 위로하였는데 평생의 즐거움을 나누며 밤을 새웠다(조관기행1601728)"

경박, 경망하다는 기록과는 달리 기생과 정신적 교감을 나누기도 하였다

매창 이계랑(1573-1610) : 전북 부안의 명기로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 3대 여류시인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을 지은 매창 이계랑과 정신적 교우를 맺은 기록도 있다

파직당한 뒤 쓴 시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지키게/나는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룰 테니”[君須用君法 吾自達吾生]

 

서자들과의 교류

39살때(1607) 공주목사로 부임 시 관아에 서자 친구들을 식객으로 거두었다.

서자친구 이재영, 심우영, 윤계영 을 관아에 묵게하여 관아에 삼영(三營)을 설치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이재영은 어머니와 첩까지 데려와 살았었다.

결국 8개월 만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었다.

허균은 20여년 관직 생활 중 6번의 파직을 겪었다.

 

서자출신이었던 스승 이달의 영향

손곡 이달(1539-1612) : 조선의 이태백으로 불린 조선 중기 시인으로 당시(唐詩)를 잘 지어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삼당(三唐)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스승을 통해 적서차별의 문제점을 실감하였을 것이다.

스승을 통해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 모순을 확인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후유증으로 인해 사회적 모순이 분출됐던 시기였는데 나라에서는 약속도 지키지 않고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들이 저술등에 표현된 것이라 본다.

 

 

칠서(七庶)의 난

1613(광해군재위 5) 봄 문경새재에서 은상인을 공격하고 은 700냥을 강탈한 사건 발생

사건의주모자는 여주 남한강변에서 스스로를 강변칠우라 부르던 일곱명의 서자들로 밝혀졌다. 모두 재능은 있지만 첩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힌 강변칠우

이들은 적서차별에 대한 반발로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건을 벌였다고 자백을 한다.

칠서의 난을 계기로 허균에게 위기가 찾아온다.1608년경에 서얼금고 철폐를 요구했지만 거부 당하였다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 : 1415년 태종이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제한한 법

임진왜란 당시 돈을 받고 관직을 팔았는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 자리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서얼들이 느낀 박탈감이 컸었다.

서자출신인 광해군이 즉위하자 가졌던 기대감과는 달리 오히려 서얼금고법이 강화되었다.

칠서의 난 발생 무렵 홍길동을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칠서의 난 무대도 문경새재였고 홍길동전 속 활빈당 주요무대도 문경새재 였다.

단순 강도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은상 살해사건이었으나 대북파 실세인 이이첨이 정치적 사건으로 확대하였다.

고문에 의해 박응서가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하였고 그 중심에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이 있었다고 자백하게 되어 아주 큰 역모사건으로 발전하게 되어 계축옥사로 비화되었다.

계축옥사(癸丑獄事) : 1613년 대북파가 영창대군과 반대세력을 제거 위해 일으킨 옥사

- 인목대비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결국 증살되었다.

- 계축옥사를 계기로 서인, 남인, 소북파등 반대세력을 축출하고 대북파 독점체제 구축하였다.

 

계축옥사 이후 허균

칠서들과 가깝게 지낸 허균은 자신에게 미칠 파장을 예감하고

글방 동문인 대북파 실세 이이첨에게 구원을 요청

이이첨 : 세자책봉 시 광해군을 지지, 왕으로 옹립, 광해군 정권의 핵심인물

당시 광해군의 최대관심은 인목대비 폐모

폐모론 확산을 위한 여론몰이에 허균의 글재주가 필요했던 시기다.

이이첨에게도 문장가 허균의 능력과 직선적인 성격이 필요했다.

허균은 폐모론 확산을 위해

유생들을 동원해 자기집에 숙식을 하면서 상소를 쓰게한다.

이러한 일들로 광해군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광해군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다는 것은 인륜를 끊는 엄청난 행위

대북파인 이이첨이 주도를 하고 허균이 총대를 매고 밀어부치지만

남인, 서인등의 강경한 폐모론에 대한 반대세력의 거센 반발이 있어다.

심지어 대북파인 영의정 기자헌조차도 폐모론에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허균과 기자헌은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허균은 한평생 정도전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동인시문을 뽑을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다.(광해군일기 16171224)"

 

남대문 흉방사건(1618.08.10)

계축옥사가 일어난지 5년 뒤인 1618810일 새벽 남대문에 흉방이 붙는 사건이 발생

흉방의 내용은 백성을 구하고 죄를벌하러 장차 하남대장군이 이를것이다(광해군일기10810)

허균의 조카이자 심복이었던 하인준의 소행

허균의 주변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

허균이 역모를 꾀했다는 자백이 나와 투옥되었다.

남대문 흉방은 허균이 쓴것이 사실일까?

본인은 끝까지 부인했으나 심복들에 의해 주동자로 지목

황정필은 의창군을 추대하려 하였다고 자백하게 되었다.

 

"허균은 애초에는 의창군을 추대하는 것으로 계책을 삼았는데 나중에는 허균이 스스로 하고자하여 결정하지 못했다.(광해군일기1618825)"

 

광해군 10(1618) 824일 창덕궁 인정전 문 앞에서 허균 역모사건과 관련된 살벌한 국문이 시작되었다. 허균의 혐의는 역모였다. 그 내용은 이전에 언급한대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기준격(한 때 허균의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의 아들)의 상소로 시작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유년 겨울에 신의 아비는 외지에 있었고 신만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허균의 집에 갔더니, 신의 아비의 안부를 묻고 이어 말하기를 의창(義昌. 영창대군)은 선왕이 아끼던 자식이었으므로 매번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으나, 너의 아비의 저지로 옹립할 수가 없었다.’하였습니다. 이 말은 아마 이의(영창대군의 본명)가 출생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옹립하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또 신해년 겨울에 신의 아비가 역시 외지에 있었고 신만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허균의 집에 갔더니, 허균이 말하기를 연흥부원군이 나로 하여금 심정세(沈挺世)의 딸을 며느리로 삼도록 윤수겸(尹守謙)에게 청혼해 달라고 하였다. 연흥은 윤수겸이 일찍이 도감의 군사들에게 호감을 샀기 때문에 혼사를 맺고서 큰일을 시행하여 시체 두 구를 끌어내고 대군을 세워서 대비로 하여금 정사를 대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뼈가 저리고 가슴이 막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마 후 두 시체는 누구를 말하느냐고 천천히 물었더니 임금과 동궁이다. 오늘 내가 연흥과 함께 가서 윤수겸을 만나보고 청혼을 했다. 윤수겸이 비록 싫더라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습니다.

 

1) 위 상소의 내용은 허균이 영창대군의 옹립을 시도했으나, 기준격의 아버지인 기자헌의 방해로 실패했는데, 허균이 윤수겸, 연흥부원군(김제남. 인목대비의 아버지)과 인척 관계를 맺고, 함께 영창대군을 복위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국문 과정에서 나온 죄상은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고 익명서를 만들어서 곧 외침이 있을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었다. 이 혐의는 숭례문에 나붙은 한 장의 격문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격문이 허균의 외가 서얼인 현응민의 소행으로 드러나면서 허균은 역모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허균이 냈다는 이 소문은, 허균이 침을 틈타서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혐의와 이어져서 결국 허균은 역모의 죄로 죽음을 맞이했다. 흥미로운 것은 모진 고문 끝에 허균의 역적모의를 인정했던 인물이 허균의 첩인 추섬이라는 점이다.

2)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운궁의 흉격과 흉서, 남대문의 흉방은 허균이 모두 스스로 한 짓입니다. 흉역스러운 일은 현응민과 함께 모의했고, 방을 붙인 사람은 응민이 항상 왕래하였으니 이 사람이 반드시 하였을 것입니다. 추대하려던 곡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의창군(義昌君)을 사람들이 추대하고자 한다.’라고 매양 말했는데, 현응민과 장응기(張應麒) 등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허균이 역모를 꾸민지 이제 3년이 되었는데 밤에 소리를 쳐서 도성 중의 사람들이 다 나가게 한 뒤의 그 계획은 반드시 까닭이 있었을 터인데 그 모의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승군(僧軍)과 포수(砲手)를 이끌고 8월을 기한으로 삼았으며 거사는 15일로 정했다고 하였습니다.

 

3) 특히 서얼과 승려와 어울린다는 것은 허균의 이전 행적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그 예로 선조32(1599) 황해도사에서 파직되면서 받은 여러 혐의중 하나가 무뢰배들이나 창기들과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4) 그런데 이 무뢰배들 가운데 서얼과 승려가 상당수였고, 이 때문에 이전부터 허균은 역적을 모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일종의 요시찰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허균을 둘러싼 역모에 대한 의혹에 대하여 당시 사관은 당시 대북 세력이었던 이이첨과 한찬남이 허균 등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의한 것이라고 기록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쉽지 않다. 허균은 국문 끝에 끝내 사망했고, 허균의 정치적 동지이자 허균을 탄핵한 기준격의 아버지인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죄인의 진술만으로 사형에 처한 죄인은 없으니, 훗날 반드시 허균의 죽음에 대한 이의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5) 허균은 그의 행적으로 인해 기득권 세력에게 눈엣가시로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짜뉴스 하나 때문에 반란의 죄를 얻어 참수 당했고, 이로 인해 그의 많은 저술들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 능력이 출중하지만 당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침없이 비판을 가하는 인물에게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가하는 폭력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1) 광해군일기[중초본]122, 광해 9(1617) 1224일 을묘 6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12024_006

2) 이이화, 허균의 생각, 교유서가, 2014, 59.

3) 광해군일기[중초본]131, 광해 10(1618) 824일 경진 11번째 기사.

4) 김풍기, 허균의 불교적 사유의 형성과 <산구게(山狗偈)>, 국문학연구, 6, 국문학회, 2007, 22.

5) 이근호, 허균-조선중기 사회모순을 비판한 문신 겸 소설가, 인물한국사.

출처 : 투데이신문(http://www.ntoday.co.kr)

 

 

기준격의 비밀상소

허균이 역모를 주동했다는 결정적 증언은 기준격의 비밀상소였다.

기준격은 폐모론에 대해 허균과 대립각을 세웠던 영의정 기자헌의 아들이었다

"허균이 인목대비 아버지인 김제남을 이용해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영창대군을 왕으로 삼은뒤 군권을 잡아 김제남을 제거하고 자신의 조카사위인 의창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예전에 칠서들과도 역모를 꾸미기도 했다"

 

허균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허균을 따르던 하급관리 및 무사, 노비 등이 의금부에 모여들여 항의를 하였다.

허균의 투옥에 분노한 이들은 사회 소외계층이었다.

허균이 누구의 지지를 받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허균의 능지처참

심복들이 자백한지 3일 만에 사형이 집행된 이유?

역모죄임에도 불구하고 변론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허균이 "아직 못다한 말이 있다"라고 외쳐도 들어주지 않고 처형

결국 허균의 자백을 받지 못하고 결안에 서명을 하게하려 하였으나 끝내 거부하여 강제서명

 

"허균은 아직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결안 할 수 없다면서 붓을 던지고 서명하지 않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핍박하여 서명하게 하였다.(광해군일기1618824)"

 

뒤늦게 상황을 인식한 허균은 그때 하고 싶은 말이 있다”[欲有所言]고 크게 소리쳤지만, 국청(鞫廳)의 상하가 못 들은 척했고, 왕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두었다

 

정확한 진상조사 없이 전격적으로 처형되었다.

삼복계(三覆啓)

사형은 초심, 재심, 삼심으로 반복하여 심리를 한 뒤 결정해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형사절차상의 제도

조시시대 기피인물 1호 허균

허균이 죽고 5년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역모사건에 연루된 인물들 대부분 복권되나

허균은 조선왕조 내내 역적으로 남았다.

300여년 이상 다른 가문의 족보에 숨어 살아야 했던 허균의 후손들

kbs 역사저널 그날-15대 광해군(홍길동 저자 허균의 능지처참)

 

 

중세의 모순과 맞서 싸웠던 시대의 이단아

<허균평전>의 저자 허경진이 이름난 집안에서 정실의 소생으로 떳떳하게 태어났지만 스스로 시대의 서자가 되었다

16181012(음력 824), ‘역적허균(1569~1618)의 목이 떨어져 저자 바닥에 내걸렸다. 그는 심문에 끝내 승복하지 않아 마지막 판결문인 결안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였다. 막대 셋을 밧줄로 매고 역적 허균이라는 팻말을 달아 그 막대 가운데에 목을 매달았다.

 

교산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초당 허엽, 허성과 허봉, 허초희(난설헌)가 형과 누이니 그는 당대의 가장 빵빵한 기득권 세력이었다. 당쟁에 따른 부침을 빼면 그는 비교적 수월하게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타고난 시적 재능 덕분에 품계도 승승장구한 편이었다.

 

그는 열일곱에 한성부 초시에 합격한 이래 스물여섯에 문과에 급제했다. 3년 후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해 예조좌랑이 된 이후 출사와 파직을 거듭하던 그는 마흔한 살에 당상관(형조참의)에 올랐으니 가히 출세가도를 달렸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허균은 호민론이나 유재론같은 글을 지어 서얼 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민중 봉기를 경고한, 진보적 인물이었다. 당파적 편견이나 역모 혐의로 처형당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이루어진 폄훼를 고려하더라도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성품이 경박하고 품행이 무절제하다’, ‘요사스럽다는 평가가 이어지는 것은 심상치 않다는 얘기다.

그러나 양반들로부터 받은, ‘미천한 자까지도 자기와 대등한 자처럼 대우했다는 평가는 지배층에게는 경박한 패륜으로 보였겠지만, 민중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지도자로 인식됐다는 증거였다고 할 수 있다.

 

혁명 전후의 정황들을 훑어보면 마치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노회한 정치가처럼 보인다. 그는 자기 딸을 세자의 후궁으로 들였고 이이첨 등의 권신 무리와 정치적으로 함께 어울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도성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했다.

 

허균은 1617년 말부터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로 인해 주변 인물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폐모에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마찰을 빚으면서 기자헌이 유배되자 그 아들 기준격이 부친을 구하고자 비밀상소를 올려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면서 파란이 일었다.

 

그가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 등에 항거하기 위해 서자와 불만 계층을 규합해 혁명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문이 나면서 정치적 동사를 하던 이이첨으로부터도 의심을 받게 됐다. 허균은 상소해 역모와 무관함을 밝혔지만,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해 허균의 딸이 세자의 후궁이 돼 입궐하자 이이첨의 경계는 한층 깊어졌다.

광해군 10(1618) 810,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었다. 816, 이 격서가 허균의 심복 현응민의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허균도 체포됐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그는 할 말 있다고 외쳤으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금부로 압송된 뒤 국문을 받고 824일 한성부에서 능지처참 됐다. 향년 49.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고 훗날 20세기 초에 이르러 선산 근처에 가묘가 조성됐다.

 

그는 심문에 끝내 승복하지 않아서 마지막 판결문인 결안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였으나 처형은 서둘러 이뤄졌다. 뒷날 정적이었던 기자헌조차 예로부터 형신(刑訊)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供招)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라 한 것은 그가 처형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정치적 이유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최후를 예감한 허균은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딸의 집으로 옮겨놓고 다음 날 체포됐다. 그는 도피하라는 지인들의 권유를 거절하고 자신의 저서와 작품들, 누나 허난설헌의 시문들을 모두 손수 장녀의 집에 옮김으로써 그의 저작은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다.

<홍길동전>은 유몽인 등이 자신들의 문집 등에 저자가 허균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그의 작품임이 후대에 알려졌다. 허균의 문집 등은 1668년 외손자 이필진이 간행해 조금씩 알려지게 됐다. 광해군이 쫓겨난 인조반정 이후에는 물론, 정조와 고종 때도 복권 여론이 일었으나 노론의 반대로 무산돼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내용만으로는 실패한 거사의 내용도 뚜렷하지 않으며 거사 이후를 그린 정치·사회적 전망도 모호하다. 그러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의 동지들의 모습이나, 동조자들의 행동은 혁명의 진정성을 환기시키면서 묘한 감동을 연출한다.

 

주모자로 체포돼 압슬형을 당하면서도 자백을 거부한 이들, 허균이 하옥되자 심문을 제대로 못하도록 돌을 던져 국청의 문짝을 깨뜨리거나 형졸들의 머리를 깨뜨리고, 하급 아전과 종들, 그리고 무사들 수십 명이 의금부 감옥 앞에 시위를 벌이는 모습 등은 당대의 모순을 고스란히 짐질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좌절과 절망을 아프게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에서 용인군 원삼면 맹리로 이장한 허균의 시신 없는 가묘

 

그는 역적으로 죽었기에 연좌적몰의 법을 시행했으며 집은 헐려서 연못이 됐다. 그를 따르던 민중들은 장사 지내기 위해 그의 머리를 가져가려다가 이를 말리는 수직 군사와 충돌하기도 했다 한다.

 

허균과 홍길동, 혹은 시대의 한계

허균은 당대의 모순을 치열하게 인식하고 서얼 차별 등 신분제도의 모순과 싸우면서 지배계급으로부터 버림받았으나 400년이 흐른 뒤 공화제 사회에서 비로소 복권됐다. 능지처참 형을 당한 역신으로서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그는 되살아났다. 그의 사상은 호민론유재론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 지금의 백성의 원성은 고려 말보다 훨씬 심하다.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만일 임금과 지배세력이 백성을 업신여기고 착취해서 궁예나 견훤 같은 호민이 나온다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오직 백성을 위해서 정치를 해야 하며 그들의 불만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호민론(豪民論)’ 중에서

서얼이라고 해서 관직을 주지 않고 어머니가 개가했다고 해서 그 자식의 재능이 뛰어난데도 쓰지 않는 것은 하늘이 낸 인재를 쓰지 않는 것으로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는 누구에게나 재능을 골고루 주었는데 남녀나 신분에 따라 차별을 두는 것은 하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다.”- ‘유재론(遺才論)’ 중에서

 

허균은 백성을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항민, 윗사람을 미워하는 원민, 그리고 호민으로 나눴는데 이 가운데 항민과 원민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면서 호민을 주목한다.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흘겨보다가 혹시 그 때에 어떤 큰일이라도 일어나면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 보려는 사람들은 호민이다.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호민이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편을 이용할 만한 때를 노리다가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번 소리를 지르게 되면, 원민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서도 소리를 지르고, 항민도 또한 제 살 길을 찾느라 호미, 고무레, , 창 자루를 가지고 쫓아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호민론중에서

 

https://1boon.kakao.com/ziksir/5da9304055b1f01c7b7a0af0

KBS 한국사전 조선의 자유주의자, 혁명을 꿈꾸다 -허균

 

역적 허균·하인준·현응민·우경방·김윤황을 저자거리에서 정형하다

역적 허균(許筠하인준(河仁浚현응민(玄應旻우경방(禹慶邦김윤황(金胤黃)을 서쪽 저자거리에서 정형하였는데, 그때 백관에게 명하여 차례대로 서게 하였다.허균은 협박하여 공초를 받지 못하게 하고단지 기준격의 전후 소 중에 나타난 흉모의 곡절과, 김윤황을 사주하여 흉격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과, 남대문의 흉방에 대해서 하인준이 허균이 했다고 이른 것, 몰래 승도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한 것, 산에 올라가 밤에 소리쳐서 도성의 백성들을 협박하여 나가게 한 것, 유구(琉球)의 군대가 원수를 갚으러 와서 섬에 숨어있다고 한 설 등이 모두 허균이 한 것이라고 전후의 흉모에 대해 윤황과 하인준이 일일이 승복한 죄인데, 허균은 아직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결안할 수 없다면서 붓을 던지고 서명하지 않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핍박하여 서명케 하였다.

적 하인준은 흉방에 동참한 죄이다.

적 현응민은 역적 균의 이목과 복심이 되어 밤낮으로 함께 거처하면서 무릇 그가 행하는 일은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과 남대문의 흉방을 응민이 썼고 산에 올라 밤에 소리친 것을 응민이 하였다는 설이 허균의 첩인 추섬(秋蟾)의 공초에서 나온 죄이다.

적 우경방은 군목에 같은 당인의 성명을 나열해 쓰고 또 결사 맹문(結死盟文)을 지어 한보길 등과 죽음을 각오한 교유를 맺었다는 것과, 은밀히 흉계를 꾸밈에 있어 적 허균의 지휘를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것, 또 더욱 흉참한 갑자(甲子)를 나무에 새기는 등 역모에 동참한 죄이다.

적 김윤황은 허균의 지시와 사주를 듣고 흉계를 이루려고 흉격을 화살에 싸서 경운궁 안에 던져 넣은 죄이다. 연좌와 적몰, 집을 부수고 못을 파는 일, 그 지역의 수령을 파직하는 일,

그 읍호를 강등하는 일 등을 모두 율문에 따라 시행하였다.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 했다고 한다.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 대한 고찰 -만명 유행 현상과 관련하여-

Study on the Domundaejakby Heo Gyun(許筠): Regarding the culture of the late Ming dynasty

안나미 ( Ahn Nami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許筠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품평서 屠門大嚼을 지어 조선 팔도의 진미에 대하여 산지와 요리법, 명칭 등을 소개하고 음식에 대한 품평을 다루었다. 허균은 <屠門大嚼 引>에서 그 저술 의도를 밝히고 있다. 첫째, 허균 집안에 전국의 많은 음식이 예물로 들어와 그것을 즐길 수 있어 음식을 품평할 수 있었다. 둘째, 중국 何氏食經舒公食單을 보았지만1) 천하의 진미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눈만 현란하게 하는 도구에 그칠 뿐이라고 하며 조선의 음식을 소개하려고 하였다. 셋째, 식욕은 인간의 본성이 라는 점을 강조하여 절제와 금욕을 강요하는 조선 사회에서 허균은 인간의 본성 중에서 가장 큰 욕망의 하나인 식욕을 가지고 억압과 규율에 저항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허균이 도문대작 을 짓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조선사회가 강요하는 예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늘이 내린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는 허균의 사상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晩明 시기는 상업경제가 발전하면서 소비문화가 성행하였다. 이에 음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많은 음식서적이 간행되었고, 강남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문인들의 음식서 저술 활동이 성행하게 되었다. ‘美食에 대한 욕망이 자극되면서 강남 문인들의 문인결사 활동은 詩社에서 시작하여 飮食社로 이동하면서 음식의 풍기를 연구하고 즐기게 되었다.

이때 허균은 명의 서적을 탐독하고 많은 명인과 교류하며 만명 문화의 유행 현상을 감지하였다. 그리고 식욕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면서 도문대작 을 저술하여 음식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고 개성을 존중하는 사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 사회의 억압과 규제에 대한 반항을 인간의 본성인 식욕, 곧 음식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허균은 도문대작 을 통해 미식 그 자체에 탐닉하기 보다는 음식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고 개성을 존중하며 개인의 자유를 발현하는 것을 추구하는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하여 봉건 도덕의 억압과 허위를 반대하고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던 그의 개혁 사상과 창의적 사고가 문학의 개성을 강조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