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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지역과 마을

문경새재 1관문에서

by 이성근 2016. 1. 17.

 

 예정에 없던 문경행이 있었다.  지인이 부친상을 입어 문상을 간 걸음에 인근에 있는 문경새재 냄새만 맡고 왔다. 문경새재와 관련해서는 옛길 -문경새재를 쓴 안태현의 책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 좋다.  새재 들머리 버티고 선 주흘산은 문경으 진산이다. 산의 형세가 그만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주산을 모집했다고 한다. . 많은 산들이 앞다퉈 달려갔지만 결과는 삼각산이 차지했다. 뒤늦게 도착한 주흘산은 자리를 놓친 한이 커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

그래서 나온 시 돌아앉은 주흘산

 

이사람, 한양은 뭐 하로 갈라카노

-디 붙인 곳이 바로 서울 아이가

송악도 자네 가슴팍 자리 틀지 안터나

 

백두대간은 이 땅의 등줄기를 이루는 척추와 같아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 이르러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智異山)까지 이르는 거대한 산줄기로 국토의 근골(筋骨)이다. 이 근골이 태백산에서 서남으로 꺽어지면서 한북정맥과 한남금북정맥, 낙남정맥을 내었다. 그리고 이들 한북정맥과 한남금북정맥 사이에는 한강이, 한남금북정맥과 금남호남정맥 사이에는 금강이, 백두대간과 낙남정맥 사이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중간을 넘는데풍기와 단양을 잇는 죽령(689m), 문경과 충주를 잇는 새재(조령, 632m), 이화령(548m), 계립령(520m)을 이용했다. 이중 계립령과 죽령은 삼국이 각축하던 시대에 개척된 길이다. 새재는 조선시대에 개통된 그 시절 새길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한양을 중심으로 이른바  국도를 만들었는데 모두 여섯개의 길이 있었다. 새재길은 동래와 한양을 잇는 가장 빠른 길로 개척되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를 따라가면 428㎞인데 반해 새재를 통해 충주를 거쳐가면 380밖에 되지 않는다. 조선 초기에 새재를 열고 도로망을 정비하면서 곳곳에 역()과 원()을 설치하였다. 새재 넘어 첫번째에 있는 가장 큰 역은 유곡(幽谷)이었다. 유곡역의 중요성을 조선 전기의 문신 홍귀달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영의 남쪽 60여 주는 지역이 넓고 인구와 물산이 많은데 그 수레와 말들이 모두 유곡의 길로 모여 들어서야 서울로 갈 수 있고, 서울로부터 남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이곳을 지나야 그 갈 곳으로 갈라져 가게 된다. 이 역을 사람에게 비긴다면 곧 영남의 목구멍이라 하겠다.”

 

한편 새재는 하도 험하고 높아서 대낮이라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고 반드시 사람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넘었으며, 날이 저물었을 때에는 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야 다음날 낮에 넘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 험준함 때문에 나는 새도 쉬어간다는 뜻에서 이름이 새재’[鳥嶺]가 되었다고도 하고, ‘새로 난 고개의 뜻으로 새재로 부른다고도 한다. 한편 조령산과 주흘산의 깎아지른 골짜기 로 난 길이라 샛재인데 발음하기 좋게 새재가 되었다고도 한다. 또 경상도에서 라고 부르는 억새가 많아서 새재라 불렀다고도 하는데, 그 이름에 연유하여 한자로는 초점’(草岾)이라고도 했다.

                                                                                                           영남대로 지역의 역도와 도로망

 

전하는 말에 따르면 조선시대 영남의 사대부들이 서울로 가던 길이 세 개가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경주와 영천 안동-영주- 풍기를 거쳐 죽령 넘어 서울로 가던 길과 양산- 삼랑진- 밀양- 대구- 상주- 낙동나루를 거쳐 문경새재 넘어 가는 길 그리고 나머지 한 길이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청주로 해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선택한 갈은 문경새재길이었다. 그것은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이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의 새재를 넘었다.

안태현의 책 '옛길-문경새재' 목차만 봐도 이 길에 스며 있는 사연은 터득할 것 같다.  

 

프롤로그-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문경새재의 유래

문경새재의 자연

조선의 대동맥, 영남대로

대동지지에 나타난 영남대로 구간

조선의 옛길

증보문헌비고를 중심으로 살펴본 조선의 도로망

주막, 고단한 여정의 종착역

주모의 꿈, 다섯 용의 승천

과거 길, 청운의 꿈을 꾸다

한글 편지로 보는 과거 길

엽전 열닷 냥

낙방 길, 좌절을 곱씹다

노비 석을이의 과거 시험

조선통신사가 간다

조선통신사의 국내 노정

조엄의 해사일기에 나타난 조선통신사의 구성

프랑스 인 샤를르 바라가 감탄한 문경새재

밟아야 아름다운 문화재, 옛길

문경새재 사계를 걷는 팁

짚신과 미투리

문경새재와 관방 시설

임진왜란과 제2관문

일제의 왜곡된 역사 기록

병자호란과 제1관문, 3관문

오횡묵의자인총쇄록에 보이는 관문의 명칭

조령산성 수축 제문

조령진의 설치, 산성의 운영

산불됴심비 산불 내는 일과 나무 베는 일을 금지하라

봉산(封山)

신길원 현감 이야기 시퍼런 칼날 아래 빛난 절개

문경새재 아리랑

문경 아리랑의 또 다른 사설들

진도아리랑 속의 문경새재

시인 묵객, 새재를 읊다

주흘산, 우뚝 솟은 묏봉우리

조령산은 없다

낙동강의 발원지 문경새재

관찰사가 나가신다, 교귀정

경상 감사 도임 행차 행렬

용추(龍湫)

문경새재와 신립 장군

문경새재 성황신과 최명길

문경새재 성황당

문경새재 산신령, 호랑이

하초리의 일심각

영남대로의 허브, 유곡역

유곡역과 18개 속역

유곡역과 도로고4대로에 이르는 길

유곡역과 감영·통제영·좌수영에 이르는 길

문경의 원

옛길의 백미 토끼비리

토끼비리의 금석문

나그네는 나무 아래 쉬어가고

돌고개 성황당 상량문

우리나라 최고의 고개, 하늘재

하늘재에서 노래하다

문경 도자기의 생산과 찻사발

 

안태현 학예연구사의 친형인 시인 안도현은 문경 옛길을 이렇게 썼다. 

 

,

가파른 벼랑 위에 길이, 겨우 있다.

나는 이 옛길을 걸으며 짚어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없는 발소리 위에 내 발소리를 들여놓아 보며 얼마나 오래 발소리가 쌓여야 발자국이 되고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쌓여야 조붓한 길이 되는지

그해 겨울 당신이 북쪽으로 떠나고

해마다 눈발이 벼랑 끝에 서서 울었던 것은,

이 길이 벼랑의 감지 못한 눈꺼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형제지간 활동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이는  문경의 복이다.

사실 이날의 문경새재는 그야말로 딱 조령  제1관문 근처만 얼쩡거리다 왔다. 그렇지만 그 풍광은 어디에 견주어도 모지람이 없었다.

새재 초입 옛길 박물관이 있다.

 

 

문경 시내에서 제1관문인 주흘관까지는 약 5km 정도이다. 주봉에서 뻗어 나간 상초리 쪽으로 산자락이 내려와 조령천과 경계한다.  그 산 가장자리 단풍나무의 붉은 움이 하마 봄날을 예약하고 있다.

그리고 주흘산과 어깨를 겨눈 충청도 쪽의 조령산과 계곡을 형성하면서 산세를 아름다이 보여주고 있다.

주흘관에서 내다 봤을 때 우측의 산자락은 백화산 -황학산- 이화령으로 축을 이룬다.

 

 조령천은 두 개의 산줄기에서 흐르다 영강을 만나고 다시 낙동강과 만난다.

제1관문인 주흘관 홍예문은 1708년에 조성됐다.  높이가 3.6m이며 관문의 전체 길이는 5.4m이다. 양옆 석축은 높이 4.5m, 길이는 188m이다

 여기서 임진왜란의 미스터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왜군의 진로 상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진격함에 있어 이곳을 지켜야 할 신립이 이곳을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친 것이다.  그 결과적으로 조선군 8천은  왜군 제 1군 고시니 선봉부대 15천 왜군에게 패했고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야 했다. 임란 후 조정에서는  성벽을 쌓고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세 관문을 세웠지만 전술적 이용은 더는 없었다,  그런데 왜 신립(申砬)은 새재를 포기했든가.  궁여지책(窮餘之策) 이었든가.  휘하 부장과 막료의 반대도 있었다. 여러가지 불리한 조건들에 더하여 신립이 가장  자신있어 하던 기마부대의 운영을 고집함으로써 생긴 사단이 아닐까 싶다.  내가 신립이었다면 어떤 판단을 했을까.

 

 

우측 성벽 아래 개울물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들었고 수구문(水口門)까지 설치했다.  

그런데 성벽의 석축 쌓기가 일관되지 못했다. 왜 

성벽 담 너머로 큰나무의 가지가 성밖까지 가지를 펼쳤다.

 

 

주흘관 성황당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숙종 26(1700)에 세웠고, 헌종 10(1844)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신목은 회화나무로 추정된다. 그리고 뒷쪽 두 그루는 푸조나무였다.

성황당 신은 여신이다. 이 여신과 지천 최명길(崔鳴吉, 1586-1647) 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최명길이 약관일 때에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을 찾아가는 길에 새재를 넘게 되었다.구절양장 같은 험한 산길을 한참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소복단장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따라 오는 게 보였다. 여자의 걸음걸이가 빨라 잠깐 동안에 자신을 앞질러 가는 것을 보고 이를 무엄하게 생각한 최명길이 걸음을 재촉하여 여인의 뒤를 쫓아가도 걸음의 속도가 일정하여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여기고 더 한층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여인이 비명을 지르기에 달려가 보니 여인이 발을 헛딛고 비탈에 구르고 있는지라, 급히 달려가 여인을 부축해 구해 주었다.

 

이런 사연으로 동행케 되어 그 여자에 대해 하나하나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여인은 한참 최명길을 쳐다보더니 말하기를 나는 새재성황신인데 며칠 전에 이 새재를 자주 왕래하는 대상(大商)이 중국비단 치마 저고리 일습을 나에게 바치고 갔는데 어제 안동사는 좌수가 성황당 앞을 지나다가 가지고 가서 자기 딸에게 입혔기에 내가 그 옷을 찾고 그의 딸을 죽일심산으로 안동으로 간다고 했다. 최명길은 속으로 깜짝 놀랐으나 겉으로 태연자약하게 소행은 괘씸하지만 사람을 함부로 해하면 천리(天理)가 아니라고 하면서 조처를 잘하라고 부탁했다. 최명길이 안동에 도착하여 부사인 외숙에게 문안을 드리고 모좌수(某座首)의 집을 물으니 어느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함에 급히 달려가보니 좌수집에서는 아침까지도 건강하던 딸이 갑자기 죽었다고 하여 곡소리가 낭자하였다. 주인을 찾아 수인사(修人事) 후에 내가 댁의 따님을 살릴 수가 있으니 좀보자고 하니 주인이 쾌히 승낙하므로 처녀방에 가보니까 새재 성황당신이 좌수 딸의 목을 누르고 있다가 최명길을 보더니 급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좌수의 딸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주인이 백배사례한 것은 물론이고 신의(神醫)로 우러러 보면서 몸둘 바를 몰라하였다.

 

서울로 돌아 가는 길에 새재성황당을 지나면서 보니 성황당신이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지라, 또 어디를 가려고 준비를 하느냐고 물으니 성황신의 말이 지금 천자(天子)가 만주에서 탄생하여 상제(上帝)께서 천하제신(天下諸神)에게 명하여 천자를 호위하라는 명을 받고 만주로 가려는 참이었는데 때마침 잘 만났다고 하면서 당신은 뒷날 큰 벼슬을 하여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될 것이니 그때에 천자가 우리 나라를 쳐들어 오면 백성을 살리고 종묘사직을 보전하는데 앞장서야 하며 그 길은 화의(和議)의 길밖에 없으니 명심하라고 당부하고 사라져 버렸다. 뒷날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농성할 때 척화파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화의를 성립시켰다

 언급했듯 제1관문 안에 있는 새재성황당은 건립연대나 누구의 손에 의해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여러 차례 중수를 했다고 하는데

 

197512월 중수로 인한 해체작업에서 나타난 상량문에 따르면 이렇게 전한다.

대개 고을의 북쪽에 주흘산 아래에 성황사가 있으니, 사우를 지은지가 백여 년이 넘었지만 신령스럽고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내려진 복이 성하였기 때문이다. , 세월이 점점 오래도어 기둥과 상량이 썩고 무너짐에 이르렀구나! 이에 여러 장인들의 정성을 모아 좋은 때에 소나무 기둥을 세우고 좋은 날에 상량을 올린다.

 

엎드려 원하옵건데 상량한 뒤로는 모든 담들이 안녕하여 육축이 번식하매, 새는 날개짓하고 꼬리 달린 짐승들은 서로 뒤썩여 아름다움을 이루기 바랍니다. 제비도 날아 새로운 상량을 하례하고 묘우(廟宇)의 중건에 인하여 해가 빛나는 것은 복록이 새롭게 구비되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께서 머무는 곳은 남쪽으로 칠십고을의 백성을 진무하며, 당집은 새가 날개를 편 듯 자리잡고 있으니 이에 우리나라 억만년의 아름다움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나는 꽃다운 향기는 오는 사란 가는 나그네가 드리는 정성 때문이며, 초하루와 보름에 나는 향불은 마을의 늙은이와 동네의 아낙들이 매일 비는 기도 때문입니다. 처마에는 10리의 장풍(長風)을 맞아들였고 문()에는 새벽 밝은 달이 빛나고 있네. 윗기둥과 아랫집은 크고 씩씩한 길함에서 취하여 가지런하고 의지하는 것 같습니다.

 

오로지 바람은 풍년을 위탁하는 경사가 지붕위에 있고, 그 지붕 위의 지극하신 신께서 내려오셔서 백성들이 그 복 받기를 원하옵니다. 바로 갑진년 범 2월이다. 도광24(1844)2월 초 10일 기둥을 세우고 같은 달 20일 미시(未時)에 상량을 하다

 

좌측 현판 내용은 광무 8(1904)에도 중수했다는 기록이다.

 

 

 

 

 

 

 

 

 

 

 

 

 

 

 

 

 

 

 

 

 

 


문경새재 - 조미미


한많은 문경새재 - 정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