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동은 내 삶에 있어 어떤곳인가. 청년기에서 시나브로 중년에 이르기까지 아들로서, 장자로서, 지아비로서, 가장으로서 나아가 지역사회에서 활동함에 늘 고향같은 곳이다. 사실 내 고향은 경남 의령이다. 허나 그 고향은 이제 년에 한 두번 찾아가는 의무적 방문지로 전락했다. 삶의 터로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활과 유리된 고향과 달리 이곳 타향 부산 남구 문현동이 고향처럼 여겨진다.
그렇건만 대관절 정나미 없는 것은 뭔가. 그래서 단순한 거주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참 재미없는 곳이기도 하다. 적어도 고향의 산천은 참으로 의구하여 늘 한결같은 얼굴이다. 그래서 늘 고향이 그립기도 하지만 하여 적어도 살면서 흔적은 기록해두고자 함이다. 더욱이 이 부산스럽고 부박한 도시에서 나날이 재개발 재건축 따위로 얼굴 바꾸기가 매일의 일상이다. 집앞 언덕에 또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 앞서 철거가 이루어 질 것이다. 담벼락 마다 붉은 페인트로 휘갈겨 쓴 '철거'란 글자가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발길을 붙든다. 예전 기억들이 교차한다.
어쩌면 이동네는 부산의 전형적 중산층 동네라 할 수 있다. 생성의 역사가 그리 오래도지 않는다. 에나 마을의 형성은 문현 사거리 '연동개'가 훨씬 오래되었다. 문현동의 한자지명 이전에 지개골로 불리웠다.
이 언덕에 본격적으로 집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를 전후한다. 앞에 보이는 통일동산과 이 언덕 사이에는 군부대가 있었다. 그 군부대의 전신은 조선방직 사택이 터잡은 곳이도 하다. 꽤 규모가 큰 편이었고, 그런 영향으로 일대에는 일식건물이 제법 있었다. 다만 제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420-80 번지 한 곳 뿐이다. 1950년대를 전후한 시점에는 미군이 잠시 머물기도 했다. 피난민들은 군부대 철조망 주변 도로변과 언덕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부대가 철수하고 난 이후 이곳은 주거지역으로 탈바꿈했다. 인근 초중고의 배치가 재편되고, 80년대 중 후반 90년대와 2천년대를 거치며 단지형 고층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질적이고 강요된 경관이 만들어 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대는 언덕을 등진 형태로 계단식 입지가 이루졌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몇 몇 집은 같은 학교에 다녔던 동기들의 집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마 거의 대부분 그들은 이곳을 떠났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매매가 이루어져 떠났거나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보상을 받고 떠났거나... 그들이 그 주체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렇게 뿔뿔히 흩어져 제 각기 살았다. 남아 있는 것은 집과 골목, 계단으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 마을도 수명이 다 하여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원하는 사람과 원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원하는 자들은 조합을 만들어 더 많은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이익의 도모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래 사진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Kenneth Lehr씨가 찍은 1952년에 찍은 사진으로 (출처: http://blog.joins.com/fabiano 맨날 추억에 사네 ) 귀한 장면이다. 지금의 돌산공원에서 동쪽으로 대연동으로 향하는 문현고개 길이 보이고 남쪽으로 우암동 장고개도 보인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55보급창과 범일교가 보인다. 문현고개는 해발 200m 높이에 달구지가 겨우 다닐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그 길을 한국전쟁시기 미공병대가 7m 폭으로 확장했고 1965년 신부산 개발과 교통완화를위해 25m로 확장하면서 깍아 냈다.
그 앞 양 사면이 절토된 언덕이 지금 문현동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401~427번지 일원과 삼성아파트가 입지한 곳이다. 서쪽 절개지 아래 구릉을 평탄작업으로 정지해 놓은 곳이 옛 문현초등학교 자리인 문현여중와 성동중학교 터다. 절개지의 흙은 일제 강점기 동천호안정비 및 부산진 매축 때 매립토로 사용했다고 한다, 한동안 이곳을 '흙구디(더기)'라 칭했다.
그리고 동쪽 부대터는 지금의 문현3동 이고 맨 오른쪽 길 소나무가 선 자리가 지금의 메가마트 자리로 추정된다. 다시 돌산공원 주변으로 본다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곳이 지금의 부성고 정도될 듯하다. 사진에 보이는 돌무더기는 가매장 무덤이거나 애장터다.
1946년 미군이 제작한 지도 중 문현동 일원이다. 위 사진이 보여주는 주요 시설들의 배치가 큰 차이가 앖다. 지도에 표시된 영문 Brewery 나 Winery은 양조장으로 대선주조를 말한다. 지금의 문현3동 을 가기 위해선 2개의 다리를 이용해야 했다. 지개골에서 내려오는 길은 부두교로 추정되는 다리로 연결되었다. 포부대는 장고개 뒷편 우암동쪽이다.
어떻게 보면 일제시대 만들어진 도로 노선과 지금의 문현동 주요 도로는 큰 변화가 없다. 그렇지만 처음 그어진 길 그것 말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 바뀌었다. ② 지점은 당시 주둔했던 군부대의 정문으로 지금의 문현동 주 간선도로로서 공동골로 지칭되는 안동네를 경유하여 대연동으로 넘어가는 중심 선이다. 그 입구에 해당되는 곳의 양편에 부산은행과 국민은행이 자리했다. 그 앞서는 병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기억이 가물하다. 그랬든가 1980년 경 138번 버스가 ② 도로를 따라 문현안창까지 들어 왔다.
1960년 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문현사거리를 중심으로 한 일대의 모습이다. 흑백사진은 70년대 초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당시 문현동 사거리 도로변에는 빨래판 공장이나 식료품 , 간장드을 제조한 공장이 있었고 세종그랑시아가 들어선 자리 앞에 대성극장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문현동 일대에는 조선방직 사택과 대선주조(1930 대선양조 > 1945 대선발효공업 > 1964 대광주조 > 1968 대선주조 )공장 등이 있었고, 이들 기업들은 1936년5월 동천의 준설이 계속되지 않아 물동량을 실어 나르는데 장애가 있으므로 속히 준설해 달라는 진정서를 부윤(지금의 부산시장)에게 내기도 했다. 그 결과물이 흙구디였고 동천의 직강화였다.
한편 지금의 문현 4동 일원에는 도축장과 가축시장이 있었다. 도축된 가축의 고기들은 통조림으로 만들어져 만주 등지의 전선으로 공수되었고 남은 내장이 지금의 세종그랑시앙와 대림시티프라자 뒷편에 형성된 문현시장에 공급되었다. 흔히 그것이 문현동 곱창골목의 시초라고 말한다. 내가 궁금해 했고 추적했던 것은 조선방직 사택의 변화과정이다. 그리고 군부대의 흔적이다. 기록이 없었다. 제법 오래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수소문해서 구술을 들었지만 극히 단편적 기억에 불과 했다. 예컨데 1945년 9월16일 에서 1949년 5월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기까지의 기간이다. 특히 문현동에 주둔한 미군부대의 정체다. 폐품창고부대와 중고품 보관소인데 누구도 정확히 아는 이가 없었다. 미군이 철수한 이후 이 곳을 접수하고 관리한 한국군은 후방사단에 속하는 제3사단 (유승렬 대령) 23연대였다.
참고로 한국전쟁 발발 당시 육군의 편재는 전방사단으로 제1사단(문산-대령 백인엽 28세), 제6사단(원주-대령 김종오 29세), 재7사단(의정부-준장 유재홍 29세),제8사단(강릉-이성가 28세)로 구성됐고, 후방사단으로 제2사단(대전-준장 이형근 30세), 제5사단(광주-소장 이응준 60세), 수도 경비사단( 대령-이종찬 34세) 였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대가 사단장이었다니 놀랍다.
아무튼 그렇게 주둔했던 군부대가 1970년대 후반 부대가 철수하면서 일대는 주거지로 변모했다. 그 부대가 어디로 갔는지 알수도 없고, 혹자는 이곳 주둔 부대가 항만사 수송부대라고도하고 ...갑갑했다.
문현동 삼성 휠타워
내노라는 신문사들이 격찬을 하고
나라에서 상도 주었다
누구라도 돈만 있으면 살러갈 거기
좋다 좋다고
그런데 휠타워가 어디에 있지
내 집앞 병풍처럼 서있다
온깆 첨단시설에다 평수 좋고
전망 좋은 거기
언덕을 밀어 버리고
고층화시대에 맞추어
괴물처럼 버티고선 그것을
언론이, 나라가
잘만든 아파트라고
이상,저상 몰아서 주었다 (2000년 봄)
그 자리가 이렇게 변했다.
그 변화는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고 약 40년을 경과면서 낯선 얼굴로 다가올 예정이다.
가옥구조나 살림살이는 마을에서 북쪽 방향 전포동과 경계부의 돌산공원 벽화마을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제 두 곳다 그림을 달리 할 것이다.
회상컨데 70년대 나는 처음으로 소시지란 것을 먹어 보았고, 조방앞 한양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란 것을 타 보았다. 아찔했다. 80년대 초에 가스레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새파랗게 피어오른 그 불이 무서워한 동안 건드리지 못했다. 이 마을 어느 집에선가 난생 처음으로 소시지를 맛보았다.
마을을 돌아 보았다. 누군가 월세나 셋방살이 하던 흔적이다.
범죄·화재…도심 속 방치된 '유령마을' 1.28 JTBC
서울 효창동 주택가 한복판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습니다. 불은 건물을 모두 태운 채 20여 분 만에 꺼졌습니다.
지난해 11월 부산 문현동에서도 비슷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불이 번지면서 인근 특수학교 학생들이 긴급대피하는 소동까지 벌어졌습니다. 이 화재로 마을 20여 가구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두 화재의 공통점은 모두 재개발이 예정됐거나 취소된 빈 집에서 발생했다는 겁니다.
지난 11월 불이 났던 바로 그 빈 집입니다. 불이 난지 두 달 가까이 지났지만 현장은 여전히 그대로 방치돼 있는데요. 다 타버린 캐비닛이 당시 화재가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화재 현장이 그대로 방치되면서 주민들은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인근의 한 가구는 당시 화재로 방 안 천장에 구멍이 뚫리면서 물까지 새지만 수리는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피해 주민 : 눈 뜨고 멍하니 있다가 이렇게 돼버렸습니다. 철판도 전부 덜렁덜렁하고요. 지금 약 먹고 자요. 철판 소리 때문에요.]
타다 남은 폐자재가 날아와 크게 다칠 뻔한 주민도 있습니다.
[피해 주민 : 내가 장애인이라서 다니다가 다치면 어떻게 할 거냐고요. 저기 (화재 현장에) 바람 불면 또 떨어질 게 남아있어요.]
화재가 발생한 마을은 재개발 구역으로 묶여 있었지만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10년째 방치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사이 빈 집이 하나둘 늘면서 '유령마을'처럼 변했습니다. 빈 집 한 곳에 들어와 봤는데요. 벽에는 곰팡이가 가득 슬어있고 방 천장은 모두 무너져내렸습니다. 이불과 냉장고 같은 가재도구도 그대로 버려져 있는데요. 이 마을 빈 집 상당수가 이곳과 비슷한 상태입니다. 화재와 범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주민들이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지만 관할 구청은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산 남구청 관계자 : 원래 땅 주인이 있으시면 개인 재산인데 구청에서 저희가 어떻게 하라고 할 수는 없는 부분이죠. 2016년 안에 정비예정구역 해제를 할 겁니다.]
경기도 안양의 한 마을. 이곳 역시 사정은 비슷합니다. 2004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됐지만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사이 사람들이 떠나가기 시작하면서 골목 여기저기 빈 집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간 골목길은 쓰레기와 풀이 뒤엉켜 방치돼 있습니다. 남은 주민들도 재개발에 묶여 증·개축이 제한되면서 집 수리 등을 제때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마을 주민 : 수리 못 하죠. 이거 바르고 싶어도 못 발라요. 불편한 사람 많죠. 시에서는 여기 묶어만 놓고 개발한다느니 어쩐다느니…]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골목 초입의 주택 담장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곳곳에 금이 가있고 담장이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상태입니다. 현재 경기도와 안양시 등이 재개발 사업을 다시 추진하고 있지만 실현될 지는 미지수입니다.
[김호철 교수/단국대 도시계획·부동산학부 : CCTV 설치 및 집수리 지원 등 지자체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장기적으로는 재개발 구역을 여러 개로 나눠서 순차적으로 정비하는 순환정비방식이 필요합니다.]
무턱대고 추진된 재개발이 중단되면서 흉물처럼 방치된 마을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마을이 방치되는 순간, 주민들의 일상과 안전마저 방치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만에 화로를 보았다.
그 시절 연탄화로와 곤로가 일반적인 취사도구였다.
누군가 차까지 이곳에서 마감시켰다. 번호판을 뗀 저 차량을 타고 다니던 이는 누구였을까 폐차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골목에 팡치된 차량
황령산과 통일동산 사이 펼쳐진 문현1동과 3동, 한 시대의 흔적이 지워지고 있다.
머잖아 저 포크레인 삽날에 담벼락이 무너지고 집의 기둥들이 쓸어지면서 폐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남음이 없음이다.
대신 높다란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설 것이다.
골목이 지워지고 그 길에 오가가던 발길도 지워질 것이다. 참 얄궂다
이 얼마나 쓸쓸하고 씁쓸한 노릇인가. 한 지역의 공동체가 와해되고 흔적조차 남지 않는 다는 것은 참 후진적 도시다.
이곳이 뜯기고 나면 토건 자본이 향할 다음 타켓은 어디인가. 실로 두렵다.
늦은 귀가길 벨 하나로 식솔의 안녕을 확인했던 시절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이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1차 경비가 낯선 외부인을 차단하고 각 동 마다 거주자인식 장치를 설치하고선 그들만의 성(城)에 갇힐 것이다.
어느 집에서 남기고 간 가구들 자개장, 항아리 그리고 크다란 곰인형 아마 3대가 같이 살았나 보다,
일대의 주거 형태는 단층 기와, 단층 슬레이트, 2층 양옥에 더하여 일본목조건물이 있다.
424-80번지는 일대에서 가장 큰 면적(약 183평)을 보유한 주택이다. 조경수로 식재한 향나무며 아왜나무, 동백 등이 제법 키기 커 먼 곳에서도 잘 보일 정도다.
어린이집으로 이용되었는데 마당에 깔아 놓은 디딤돌이 10여m나 되었다. 어린이집 이전의 용도는 주거였을 법 한데 누가 살았을까 궁금하다.
대저택 바로 옆 일본가옥이 온전하게 서 있다. 이 또한 궁금한 일이다. 원주인이 누구였으며 일제가 패망한 후 누가 이 적산가옥을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지
큰 손상을 입지 않고 원형을 간직한 이 집은 지금도 사람이 살고있는 듯 했다. 오가며 늘 주인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이날 껏 그런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일제식믹의 잔재로 그들이 남긴 적산가옥을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군산이나 구룡포, 부산의 경우 초량동이나 대청동 등에 그 흔적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통산 한옥은 상부에 보토 ,적심목, 기와 등을 얹히기 때문 무겁다. 반면 일본은 경량화와 가로부재가 발달하여 지붕의 하중이 덜 미친다. 지붕의 경사도 한옥에 비해 급하다. 그래서 2층이 가능하다, 방 내부는 미딛이문이나 미닫이창을 설치하여 공간을 유연하게 사용하는 장점이 있다. 건물의 외벽은 통풍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이런 차이는 두 나라의 자연과 기후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중국, 일본 동양 3국의 전통건축은 목구조라는 측면에서는 같다. 그러나 한국 전통건축은 중국과 일본과 달리 못을 사용치 않고, 맞춤이나 이음 방식으로 건축하며, 이러한 목가구가 주춧돌 위에 얹힌 형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물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외력은 지붕의 하중으로 견딘다. 또한 우리의 지붕 속은 중국과 일본의 지붕처럼 가볍지 않다. 지붕 속에는 적심이라는 나무토막들과 보토라는 흙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물론 지붕의 하중을 더해 구조적 안정을 괴할 뿐 아니라 지붕의 아름다운 선을 연출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중국 전통건축은 넓은 땅과 다양한 기후에 따라 양식이 몇 가지로 나뉜다. 북부지역은 차고 건조한 대륙성 기후, 남부지역은 비가 많이 오는 해안성 기후이기 때문에 북쪽보다 남쪽지역에서 많은 수목을 조달할 수 있었다. 북부지역에서는 부족한 목재 대신 벽돌이나 흙을 벽체에 쌓는 구조가 발달하였다. 반면 남부지역에서는 강한 햇빛을 막기 위해 높은 벽체를 만들고, 비가 많이 와서 나무 위에 집을 짓는 형식이 발달하였다.
일본의 전통건축은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건축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구별되기 시작하여 중국의 건물은 의자를 사용하는 생활방식이, 일본의 건물은 바닥에 앉는 생활방식이 건축양식에 반영되었다. 일본의 전통적인 가옥은 낮고 넓게 짓는 것이 특징이고 지진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유연성이 있는 목재나 흙, 종이를 주로 사용하였다. 일본가옥의 또 다른 특징은 다양한 지붕스타일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지역 또는 거주자의 직업에 따라 갈대, 대나무, 기와, 돌, 알루미늄 등으로 만들어진다. (kisti과학의 향기 중)
정면에서 본 일본가옥 동백과 오래된 사철나무가 서 있다. 문득 이 집의 마당이 협소하다는 느낌을 들었다. 도로를 내면서 자려 나간 것인지 원래 면적에 도로를 접하고 있는 것인지
마을의 주 도로인 수영로13번길은 문현1동 주만자치센터까지 이어진다. 석연치 않은 점은 도로명이 수영이 붙은 것이다.
너머 삼상아파트 단지 내부 동선에는 전포대로로 덧입혀 졌다. 가만 생각하니 "뭐 이따위가 다 있어"다. 어처구니 없기도 하고 아무튼 한바퀴를 돌아 원래 출발점으로 되돌아 왔다. 마실거리로 채1km가 못된다. 늦가을이면 부산문현교회의 금목서 향기가 진동하는 곳이다. 새롭게 들어설 아파트는 어떤 향기를 낼까
현재 문현동 일대에 계획중이거나 진행중인 다양한 형태의 지구단위 계획들
조만간 지개골에도 변화가 올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한 지역이 탈피를 하는 느낌이다.
지역민의 텃밭이 있는 통일동산 자락에도 아파트 계획이 나돌고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나 붙고있는 작전세력들의 작업들 '이 부근에 빌라를 살려고합니다' 라는 문구는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다.
재개발 재건축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마을 구성원 전체가 동업자가 되어 새집을 짓는 행위다 문제는 여기에서 나는 원치 않는데 주민의 75% 정도가 찬성하게 되면 따라갈 수 밖에 없는 형태이거나 집을 팔고 나가는 것이다.
동업자들은 이 과정에서 대표와 이사들을 뽑고 건설회사와 협력회사를 선정하고 아파트를 짓는다. 전제할 것은 그 75% 구성원은 정말 집이 오래되어 날고 수리가 필요한 참에 잘됐다는 그룹과 아님 참에 남들 말라만 듣던 재산증식을 노리는 부류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인데, 실은 후자가 훨씬 많다는 것이 씁쓸한 것이다. 이른바 투기인 것이다.
원주민으로서 최악의 상황은 조합이 결성되고 사업이 진행되면서 조합원으로서 가입한 원주민에게 강제되는 선택인 분양신청이다. 여러 현장에서 봐 왔지만 최소 열에 반 수 이상은 불만을 토했다. 예컨대 새로 살 집이 얼마인지, 기존에 내 집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결정을 함으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다. (참조: http:// blog.naver.com/toinfinty6/220452960774)
인근 대연6지구의 분양 소식은 재개발 재건축이 이루어지는 세력권내 주민들을 혹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경쟁률이 몇 배였느니 시세차익이 얼마니 따위의 소문과 언론의 방정맞은 입방아는 여전히 재개발, 재건축의 고리를 재생산하는 축이다. 더하여 개발을 통해 취•등록세나 세수, 도로 •공원의 조성으로 이익을 취하는 지자체의 자세 또한 문제다.
차, 포 떼고 본론만 이야기하자면 이런 개발을 통해 누가 이익을 보는가에 답해 본다면 결코 원주민은 아니다는 것이다. 물론 여유가 있는 주민은 사정이 다를 수 있다. 어찌됐건 최종이익은 건축승인 주체인 관할 지자체, 아파트 짓은 건설회사, 그리고 아파트 짓기 전에 철거를 비롯한 건설 중의 다양한 용역업체가 이익의 주체인 것이다. 떨어지는 떡고물은 앞서 주민을 추동하고 조합설립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사람들이 챙긴다.
어쩌면 한탕의 공범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가족이 공유했던 기억의 장소와 단란한 시간이 담긴 멀쩡한 집을 자본에 편성해서 더 많은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박살낸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개발과 재건축의 차이
불이 꺼진 철거예정지역의 마을이 이 겨울 더 춥게 보인다. 더는 휘둘리지 말았으면 한다.
1월20일 정의당에서 용산참사와 관련한 논평을 냈다.
...오늘은 용산참사 7주기이다. 자본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국가 폭력의 잔인함에 온 국민이 몸서리쳤던 참담한 기억이 다시금 떠오른다. 처참하게 짓밟힌 사람은 있으나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그 어떤 해결도 요원한 현실에 고인들께 고개를 들 수 없다.
기가 막힌 것은 당시 살인진압 책임자였던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참사에 대한 사과와 속죄는 커녕 이번 총선에 출마하겠다며 그 뻔뻔함을 과시하고 있고, 참사와 관련해 지탄 받았던 검사 등 공무원들은 승승장구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으로써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모르는 행태와 이를 용인하는 사회가 너무도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박근혜정권은 용산참사의 교훈을 잊은 채,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에 열을 올리며 제2, 제3의 용산참사 재현을 부채질하고 있다.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야만적 민낯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 날의 국가폭력에 대해 이제라도 진심어린 사과의 마음을 가져야한다. 책임질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진실규명에 나서야 한다.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짓밟힌 정의와 생명의 존엄을 바로세우는 일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2009년1월20일 서울 한강로 2가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서 농성중이던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과 경찰의 충돌로 철거민 5명, 경찰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했다. 참사로 이어진 용산 재개발 철거민들의 건물옥상 농성은 철거민과 조합간의 상가 임차인 보상부분의 갈등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서민들은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다.’ 6명의 생명을 앗아간 용산참사의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내걸어야 하는 한국적 도시개발의 굴레가 6명의 아까운 생명을 삼켜버린 것이다. 60년대부터 시작된 이 굴레는 지금도 도시개발의 현장마다 약자인 철거민들의 생명과 생존권을 위협하면서 돌아가고 있다. 말하자면, 세입자인 철거민의 권리를 지켜주지 않은 한국의 반인권적 도시개발방식이 이번 용산참사의 근본 원인인 것이다....사태의 원인을 진단함에 있어서, 우리는 세입자들의 폭력적 저항이나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란 현상에만 매몰돼선 안 된다. 세입자의 권리와 권익을 보장하지 못한 한국적 도시개발제도, 나아가 약자의 권리적 요구를 호도하거나 물리력으로 막으려는 정권의 권력 사용방식에 눈을 먼저 돌려야 한다. 반인권적인 도시개발의 굴레를 멈추기 위해선 기본권의 일환으로 주거권이 보상과 철거과정에서 경제적 가치와 인권으로 올곧게 반영돼야 한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 09.1.23 경향신문 기고
그로부터 수없이 많은 문제제기와 사회적 성찰이 요구되었다.
[특집]“재개발로 고통받는 가정 더는 나오지 말아야” 2016.01.26.ㅣ주간경향 1161호
....막 진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유씨는 온몸이 아프다고 말했다. 진료를 받다 북받치는 마음에 한참을 울었다. 조합으로부터 합의를 받아냈다고 해도 마음의 상처는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지난 10년간 세입자라는 이유 하나로 유씨와 그의 가족이 받아온 고통은 이미 유씨의 삶에 깊이 뿌리내려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됐다.
유씨의 싸움은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유씨와 남편 고 윤용헌씨는 일방적인 재개발 통보를 받았다. 유씨와 그의 남편은 10년 가까이 순화동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름은 ‘미락정’이었다. 1997년에 문을 열었다. 장사는 잘됐다. 단골도 제법 있었고. 1층은 식당이었고 2층에는 손님 맞는 방이랑 살림집이 있었다. 큰아들 친구 엄마가 소개한 가게다. 가서 보니까 위치상 장사가 안 되는 곳이 아니었다. 괜찮다 싶었다. 다만 일반 가정집이었는데 토굴처럼 깜깜했다. 수리를 싹 다 하고 가게 문을 열었다.”
유영숙씨는 356일간의 천막 농성을 마치고 병원에 입원 중이다. / 박송이 기자
1년간의 천막농성 끝내고 병원에 입원
유씨는 음식솜씨가 좋았다. 목이 좋고 음식솜씨가 좋으니 장사가 잘됐다. “친정엄마가 음식솜씨가 좋았다. 엄마가 딸들은 결혼하면 어차피 힘들게 일하면서 음식하고 살아야 한다고 음식 만드는 법을 안 가르쳐 주려 했다.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면 힘들어진다고.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내가 음식장사를 하게 됐다. 처음에는 남편이랑 아동복 파는 장사를 했는데 그건 잘 안 됐다. 그 다음에 닭갈비집을 했는데 장사가 잘 됐다. 그 다음에 시작한 게 미락정이었다.” 주방에 따로 일하는 사람을 두지 않고 유씨 혼자 주방을 도맡았다. 힘은 들었지만 힘이 드는 만큼 돈도 벌었다.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둘째아이가 26주 만에 태어나서 인큐베이터에 있으면서 병원비로 집 한 채에 달하는 돈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두렵지 않았다. 돈은 열심히 살면 벌게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성실하게 남편과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았다.”
2005년, ‘미락정’이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 공고해 보였던 삶의 기반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유씨는 세입자들에게는 아무 권리가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가게를 싹 수리해서 10년 동안 손님을 모았고, 단골을 만들었다. 그런 가게에 감정된 권리금은 고작 1500만원이었다. 인근의 상가 세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1300만원, 1000만원 수준이었다. 그 돈으로 다른 곳에 가서 장사를 시작하기는 어려웠다.
유씨의 남편은 권리를 찾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평생 장사만 해온 남편이었지만 앞장서서 싸웠다. 순화동 철거민 지역위원장을 했다. 용역을 앞세운 건설회사에 밀려 2007년 미락정의 문은 닫았지만 이후에도 남편의 싸움을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투쟁하는 걸 반대했다. 얼마 안 되지만 보상금 받고 다른 데서 다시 시작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권리를 찾아야겠다고 했다.” 남편은 순화동뿐만이 아니라 다른 재개발 지역에도 연대투쟁을 다녔다. 그때만 해도 이 싸움이 10년 동안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을 남편이 아닌, 유씨 자신이 매듭짓게 될 줄도 몰랐다. “2015년 1월 18일에 세입자의 권리를 다시 찾겠다고 천막농성 시작하러 순화동에 들어왔다. 그때 사실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집에서 정리를 다 해놨다. 아이들에게 혹시라도 엄마에게 불상사가 생기면 너희들이 이런 것을 갖춰야 하고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겁나지 않았다. 사실 남편이 너무 보고 싶었다.”
남편은 7년 전에 죽었다. 2009년 1월 20일. 남편이 죽은 곳은 순화동이 아니라 용산이었다. 남일당 강제철거 현장에 연대투쟁을 하러 갔던 남편은 ‘용산참사’ 희생자가 돼 시신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였던 용산4구역 남일당 건물 망루로 떠나기 전 큰아들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니 엄마와 동생을 잘 챙겨.” 유씨의 삶은 뒤집어졌다. 세입자의 권리를 찾겠다고 시작한 일이 유씨의 삶을, 유씨의 가정을 무너뜨렸다. “우리 가족은 너무 행복하게 살았다. 재개발이 가정을 파괴하고, 아직도 국가폭력이 사람을 학살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7년 지나도 진상규명도 제도개선도 없어
남편이 죽고 둘째아이는 충격을 받아 시력을 잃을 뻔했다. “아이가 아빠가 죽고 나서 충격으로 눈이 안 보였는데 그걸 4월에나 알았다. 밥을 먹다가 나무젓가락을 떨어뜨렸는데 아이가 줍지를 못했다. 그때서야 눈이 안 보인다고 이야기하더라. 너무 놀라서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충격을 받아서 눈에 출혈이 왔다고 했다. 수술을 했다. 수술은 잘됐다고 했지만, 또 재수술을 해야 했다.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도 둘째아이는 병원에 다녀야 한다.” 유씨는 자주 남편의 꿈을 꾼다. 생전의 건강한 모습의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시신이 자꾸 꿈에 나온다. “지금도 남편 이야기를 하면 부검 이후 남편의 시신을 확인하던 때가 비디오처럼 머릿속을 지나간다. 괴롭다.”
유씨는 아무것도 털어내지 못했다. 7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이제 6주기, 7주기를 헤아려 보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6주기, 7주기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진상규명이 하나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마다 주기가 돌아올 때면 온몸이 아프다.” 진상규명의 당사자이자 용산참사의 책임자인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오는 4월 총선에서 경주 출마를 준비 중이다. 2010년 10월 20일 지역지인 <경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 전 청장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다. “경찰관이 무고한 시민을 죽게 한 것이 아니라 전국철거민연합이란 단체가 불법폭력으로 자기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웃건물에 불을 지르고, 달리던 버스와 승용차를 향하여 화염병을 던져 무고한 시민이 언제 참변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참사의 책임을 다시 한 번 시위대에 돌리며 자신 또한 억울하게 경찰을 떠나야 했다고 말했다. “용산사고로 인해 나는 30년 몸담은 경찰을 떠나야 했다. 나는 경찰을 그만둔 후에도 그 분들의 명복을 비는 천도재에 참석했다. 다시는 이 땅에 그러한 불법 폭력시위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 고 김남훈 경사를 생각하면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마음이 아프다. 고 김남훈 경사와 용산사고 당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엘리트 경찰에서 1등 CEO로> 중에서)
유씨는 김석기 전 청장을 ‘학살자’라고 부른다. “사람을 죽인 학살자들이다. 그런 사람이 총선에 나와 국회의원이 된다면 그 권력으로 칼자루를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고, 우리 같은 약자들은 다시 또 그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국회에 간다는 것만 봐도 정말 나라가 나라같지가 않다. 지난 총선에서도 선거에 나온다고 했다. 선거 때 경주에 찾아갔더니 돌아가신 분들 천도재를 지내줬다고 하더라. 이해가 안 간다. 공항공사 사장으로 내정됐는데 취임식도 제대로 못한 사람이다. 떳떳하다면 취임식을 왜 못하나.”
2010년 1월 용산철거민 화재참사 유가족들이 남일당 참사현장 앞에서 진행되는 노제를 지켜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도 없었다. 2011년 말 국회에서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을 개정했다. 무리한 개발사업을 추진하지 못하게 하고 추진 중이던 곳을 다시 재정비하게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개정안은 재발 방지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부동산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뉴타운 광풍이 만들었던 개발사업에 출구를 마련해주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19대 국회에서 ‘강제퇴거 금지에 관한 법률’이 발의됐으나 3년째 계류 중이다. 반대하는 측에서는 재산권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권리금도 지난해 법적으로 보장됐다고는 하지만 재개발·재건축일 경우에는 예외로 규정해 실효성이 낮은 상황이다. 동절기 강제퇴거 금지 또한 재개발·재건축을 예외로 두고 있어 세입자들의 최소한의 권리 보장도 어렵다.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이 없다 보니 세입자들은 여전히 유씨처럼 대책 없는 강제철거를 당해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진상규명도 제도개선도 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유씨를 받쳐주는 유일한 심리적 지지대는 종교다. 참사가 일어나고 장례가 치러지는 1년 동안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가장 많이 의지했던 데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었다. “신앙이 없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성당에 다니게 된 건 문규현 신부님 때문이다. 그때 문 신부님이 쓰러졌다. 남편이 죽었는데 우리 때문에 만약 신부님까지 돌아가시게 되면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될 것 같았다. 신부님 쓰러졌을 때 신부님이 다시 살아만 주시면 성당에 가겠다고 기도했다. 다행히 신부님이 일어나셨고 남편 장례 끝나자마자 바로 교리 받고 세례 받았다. 그 힘으로 더 싸울 수 있게 된 것 같다.”
용산참사 이후 순화동 재개발은 잠시 멈추는 듯했다. 그러나 2014년 말부터는 주상복합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유씨는 순화동에 다시 천막을 쳤다. 전기도 끊기고 물도 끊겼다. “천막을 치고 처음 46일 동안은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겼다. 추운 날 밑에서 물이 올라와도 버텼다. 같이 투쟁하던 지석준씨도 먼저 떠나고 마지막 67일은 혼자서 전기 없이 촛불하고 핫팩만 가지고 노숙을 했다.” 그래도 혼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용산에서도 그랬지만 항상 남편이 가슴속에 있었다. 또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순화동에 다시 오기 싫었지만, 많이 고민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내가 권리를 못 찾으면 다른 재개발하는 곳은 더 심해질 것 아닌가. 내가 순화동에서 끝까지 해서 조금이라도 진전된 합의를 내놔야지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들, 재개발한 지역의 철거민들, 이런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순화동은 행복을 주고 또 빼앗은 곳
지난 7년 ‘유가족’은 유씨에게 각인된 정체성이다. ‘유가족’인 유씨의 눈으로 본 한국 사회는 기억을 앓는 곳이다. “어딜 가나 추모제가 많다. 어딜 가나….” 유씨에게는 그 추모의 기억들이 고통스럽다. 세월호 사건이 있고 나서 안산분향소에 다녀온 후 일주일을 앓았다. “용산참사도 국가폭력이 사람을 죽인 것이지만, 세월호는 국가가 산 아이들을 물속에 수장시키는 것을 중계하면서 본 것이다. 그 때 전기가 오는 것처럼 너무 고통스러웠다. 세월호 유가족들 보면서 내가 다시 고통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화동에서의 10년은 그의 삶에서 ‘행복’했던 때다. 그때를 떠올리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남편이 자상했다. 내가 장사를 하니까 주말에 가사일은 남편과 아이들이 도맡아서 하고, 겨울에는 빙어낚시를 하러 갔다. 평범하지만 다시 올 수 없는 행복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순화동으로 오고 싶지 않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행복을 다 빼앗아 간 곳이기도 하다.” 그는 순화동이 아닌 곳에서 삶을 다시 이어나갈 것이다. 아마도 깊게 잠이 들지 못할 것이다. “남편이 떠나고 집에 있어도 잠을 못 잤다. 잠 못 자고 밖을 쳐다보면서 불빛을 세고 있었다. 그냥 앉아서 창 밖을 보면서 밤새우고 불빛 하나씩 꺼지는 것 보고 그랬다. 퇴원하면 일단 쉬고 싶다. 너무 힘들었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재개발로 우리같이 고통 받는 가정이 더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2015년 6월 완성한지 2년만에 개봉된 영화 <소수의견>은 뉴타운 재개발을 위한 강제철거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며 국가권력과 시민 사이에서 벌어지는 진실 공방을 다뤘다. 용산참사를 모티브로 한 손아람 작가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했다.
보다 앞서 2012년 6월 〈두 개의 문〉이 개봉됐다. 영화는 각종 영상을 통해 3년 전 당시의 참혹했던 현장을 재현해 보여준다. 생존권을 호소하며 용산4구역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 올랐던 이들은 불과 25시간 만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내려왔다. 살아남은 이들은 범법자가 되어 징역을 살고 있다.
유가족의 동의 없이 이뤄진 시신 부검, 사라진 3000쪽의 수사 기록, 삭제된 증거수집 영상 등을 차례로 언급하며 그날의 '진실'을 관객들에게 묻는다. 영화는 저항하는 자와 진압하는 자가 똑같이 느꼈던 그날의 '공포'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철거민, 특공대원 모두를 야만적인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양이라고 정의한다.
주민을 위한 주민과 함께하는 도시재생의 길 16.1. 17 한겨레
도시는 사람들이 더불어 살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공간이다. 도시는 인구나 산업 구조, 교통·주거 환경 등의 변화에 따라 쇠락과 번성의 엇갈림이 심한 곳이기도 하다. 도시의 침체는 삶의 황폐화다. 침체에 빠진 도시를 다시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이에 대한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국내에선 자본을 집중적으로 투입하거나 행정력에 의존하는 도시개발을 주로 꾀했다. 그러나 이런 관 주도의 개발경제 방식으로는 복잡다단한 도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이제는 널리 퍼져 있다. 용산참사와 같은 뼈저린 경험에서 얻은 공감대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경제를 통한 도시재생 논의가 요즘 활발하다. ‘자본과 이윤’이 아니라 ‘사람과 공동체의 가치’를 지향하는 ‘도시의 삶’을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안산시(시장 제종길)가 경기테크노파크(원장 윤성균)와 공동으로 지난 12~13일 이틀간 한양대 에리카캠퍼스와 안산 인터불고호텔에서 ‘사회적 경제를 통한 도시재생’을 주제로 외국 전문가 초청 강연 및 포럼을 열었다. 시 승격 3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번 행사에서 국내외 전문가들은 “자율적으로 관리하고, 서로 연대하고, 친환경적이며, 시민이 중심이 되는 지역사회”를 한목소리로 강조했다.
■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소통이 관건 도시재생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피터 비숍 영국 런던대 교수(도시계획학)는 무엇보다 도시재생의 가장 중요한 디딤돌로 ‘참여와 소통’을 꼽았다. 그는 런던 킹스크로스역 주변이 재생사업에 성공해 관광명소가 된 사례를 소개하며, “도시재생은 그 주변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연계성을 갖는지를 함께 고려해 마스터플랜을 짜고 이 과정에서 이해당사자간 소통과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킹스크로스역 재생 프로젝트의 주역이기도 한 비숍 교수는 “실행에 들어가기 전 단계에서부터 지역주민과 이해관계자들 간 기본원칙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고, 이후에도 마스터플랜을 확정하기까지 소통과 합의에 공을 들인 기간이 6년에 이른다”고 소개했다.
안산시 도시재생 방향과 관련해, 비숍 교수는 “대규모 공업단지를 안고 있는 안산시가 환경친화적이고 사람 중심의 도시로 변모하겠다는 의제를 마련한 것은 적절하다. 앞으로 자치단체장의 리더십과 의지, 이에 동의하는 커뮤니티의 활발한 움직임과 소통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다른 영국 사례를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안용한 한양대 교수(건축학)가 “빠른 산업발전에 따른 단기 성과주의가 널리 퍼져 있는 한국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 실용적인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비숍 교수는 “도시재생 마스터플랜은 20년, 30년 뒤의 전망을 담은 것이어야 한다. 실행 이후 역효과가 가져올 경제·사회적 비용을 생각한다면 마스터플랜을 마련하는 데 최소 1년은 걸려야 한다”고 답했다.
■ 도시 재생의 성과는 전체 지역 주민에게 영국에서는 실행 단계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주민참여 사업이 활발하다. 대표적인 모범 사례로, 런던 동부 달스턴 지역에서 활동하는 ‘해크니개발협동조합’(HCD: Hackney Cooperative Developments)이 이번 포럼에서 소개됐다. 1982년 주택조합 형태로 설립된 해크니개발협동조합은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수익을 다시 지역사회로 환원’한다는 목표를 내세워 독특한 방식의 부동산임대·관리사업을 하고 있다.
도미닉 엘리슨 조합 대표는 “도시 내 방치되고 있는 공공소유의 땅이나 건물을 무상으로 장기임대해 신축 또는 개보수를 거쳐 지역 내 상인이나 기업들에 다시 싼 임대료를 적용해 상점이나 사무공간으로 제공한다. 또한 입점 상인과 기업들을 위한 다양한 경영 지원 프로그램도 운영한다”고 말했다. 해크니개발협동조합은 땅이나 건물 매입, 신축 및 개보수 비용은 사회적 금융으로 조달한다. 영국에는 기업의 재무적 성과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창출을 보고 투자를 하거나 대출해주는 사회적 금융이 활발하다. 엘리슨 대표는 조합의 지배구조와 관련해 “조합원들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핵심”이라고 강조하며 “스스로 지역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으며 현재 300여명의 조합원을 두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국판 해크니개발협동조합의 출현 가능성은 없을까? 제도적 지원 여건은 무르익고 있다. 정부는 2015년 기준으로 도시재생 선도지역 13곳을 선정했으며, 서울시도 뉴타운 개발의 대안사업으로 주민참여형 주거환경관리사업 43곳을 지정해놓고 있다. 하지만 행정 주도의 도시재생 사업은 단기에 자금이 대거 해당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지역 임대료가 오르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 사단법인 사회주택협회의 전은호 사무국장은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부터 지역 주민의 삶을 지켜내려면 지방정부와 지역주민, 다양한 지역공동체, 그리고 지역에 기반한 사회적 금융자본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사업 주체가 등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은애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센터장도 “중앙정부나 지자체 단위에서 일방적 개발이 아니라 지역주민이 원하는 방식으로 환경을 개선하면서 지역의 자산을 공동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종길 안산시장은 초청강연과 포럼 참가자들의 토론이 마무리된 뒤 “행정 주도의 도시재생 방식에서 벗어나 지역주민들과의 협치를 통해 지속가능하게 관리하고 재생할 수 있는 방법론을 배우고 영감을 얻는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Moon River - Jacintha
'공존 > 지역과 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구 범일동 830번지 일원 밤과 낮 (0) | 2016.02.11 |
---|---|
문현동 (0) | 2016.02.01 |
문경새재 1관문에서 (0) | 2016.01.17 |
흰여울 마을 포토존 설치하다 -갈매기와 배 (0) | 2015.12.02 |
흰여울 녹색골목 돌아 갈맷길에서 (0) | 2015.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