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졸업 이란 ... 윤석중 작사의 졸업식 1절에 나오는 가사 중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 합니다 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빛나는 졸업식의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 우리집 작은 아들이다. 막내로 불려지는 아들이 초등학교 6년의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따지고 보면 막내의 졸업축하는 이미 설날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막내는 집안에서 손자, 조카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다들 성장과정을 지켜 봐왔기에 병신년에 중학생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축하는 대부분 설날을 통해 전달되었다.
막내가 졸업한 학교는 큰아들 환용으로부터 아이들의 고모들과 아버지인 나까지도 이어진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는 1970년대 초 였다. 학교도 이곳이 아닌 지금의 문현여중 건물이다.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선생은 없다. 그런데 어제 막내 졸업식 후 가족 전체가 몰려간 중국집에서 옛날에 먹었던 중국음식 이야기를 하던 중에 강동순 이란 이름을 떠 올렸던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지만 (솔직히 초중고 12년 12명의 담임중 고3 담임만 기억한다) 그래서 확실히 맞는지 모르겠다만 그때 2학년 혹은 3학년 담임이었던 그 안경 낀 여선생님이 애들 하교 후 중국집에 우동을 시켜 드셨는데, 그때 그 선생님이 먹는 모습을 내가 지켜 보았던 것 같고 선생님은 드시다 말고 나더러 먹어라 하여 맛보았던 우동의 맛은 지금의 그 어떤 우동맛과 비교할 수가 없다. 아무튼 막내의 졸업은 새삼 옛 추억을 더듬게 했다.
그때와 지금의 학교 환경, 교사의 자질은 많이 바뀌었다. 예전보다는 더 민주적이고 학생 중심이다. 학교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가 보여주는 장면 장면이 자신감, 자존, 배려, 협동을 일상화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선생이 없다고 말 한 것은 존경하고 싶은 선생이 없음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한다면 그 시절의 선생들 다는 아니겠지만 내 기억에는 스승으로 기리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내기 스승이라 모시는 분은 대학시절의 지도교수 딱 한분 뿐이다. 반면 초중고시절 마음으로 모시고 싶은 은사 한분 없다는 것은 쓸쓸하고 슬픈 일이다. 어쩌면 내가 조숙했는지도 모른다. 그 느낌은 국민학교 4학년 때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읽으면서 였으니 .. 사실 그때 주인공 뫼르소의 행동은 충격이었다. 그때 이후 수업시간 청 넘어의 세계를 많이 동경하며 상상하였다.
다시 빛나는 졸업이란 것을 생각해 본다. 대관절 무슨 이유로 졸업식 앞에 '빛나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을까. 그냥 졸업식 노래에 그런 구절이 있으니 그노랫말 그냥 따와서 사용하다 보니 시나브로 고착화 됐다면 더는 할 말이 없다. 졸업이 빛나는 것은 입학으로부터 주어진 시간, 3년이나 6년 혹은 4년 성실하고 그 본분에 맞춰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것일까. 아님 어려운 형편속에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학교를 다녔고 나아가 가족 부양까지 해내며 각고의 시간을 보낸 ...아님 교사와 학생이 가슴 아픈 시간을 이겨내며 이 땅의 교육 정책에 한 발자국 앞서 내딛기라도 한 것일까. 문현초등학교 졸업식에서는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이번 아들의 졸업식을 지켜보며 안따까웠던 사실 중의 하나가 어찌되었건 지난 1년간 아이들 담임이었는데 그 담임 한테 누구도 꽃다발 하나 준비한 학부모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도 미쳐 담임선생까지는 생각을 못해 정중히 인사드리며 고맙다는 말로 그 노고를 치하하긴 했지만 이 또한 씁쓸했다. 문득 우리 아들을 가르친 담임은 어떤 선생님이었을까 궁금했다.
아들의 졸업앨범에 실린 아들 사진과 담임선생과 찍은 사진이다.
기억되어져야 할 교사들이 있다. 한참이나 지난 일들이긴 하다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몇 가지 사건을 짚어 본다. 2009년 문현여중에 근무했던 정지영선생이 전교조 부산지부의 통일학교 세미나와 관련하여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했던 글 중의 일부다.
"..지난 연말 서울의 교사 7명이 일제고사 날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파면, 해임된 사건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경악스러운 그 사건에 절대다수 교사들과 국민들은 분노했습니다. 뉴스를 통해 접한 소식중 제가 밤새도록 가슴아파했던 광경이 있습니다. 해직이 되어 교실로 들어올 수 없는 담임선생님을 찾아 학생들이 교장선생님의 호통도 뒤로하고 모두가 교실에서 달려 나와 한겨울 운동장 바닥에서 선생님과 수업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경찰은 학교운동장에 까지 들어와 위협적으로 둘러섰고, 참으로 평범했을 학부모들이 팔짱을 끼고 그 수업을 지켜 주었습니다. 어느 한 아이가 아니라 그 학급 아이들과 학부모 모두가 동의해서 말입니다.
특별하게 구성되었을 리 없는 대한민국의 한 초등학교 6학년 학급의 일입니다. 이 장면은 현재 대한민국의 상식이 국가권력에 의해 어떻게 훼손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사의 평생의무이자 전문영역이기에 오히려 소홀히 했을 때 비판받아야 하는 학술 탐구 활동을 공안검찰이 국가보안법으로 기소하여 재판정에 서게 한 지금 이 자리 또한 대한민국 비상식의 현주소라 생각합니다."
전교조 통일학교 사건으로 기소된 정지영, 한경숙 교사. ⓒ 민중의소리 김보성기자 / 청운초등학교 김윤주 교사의 마지막 수업. "정말 우리를 생각한다면 선생님 나가라고 하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학생들. ⓒ 오마이뉴스
정지영선생이 언급했던 그 사건은 2008년 10월 초등 6학년, 중등 3학년, 고등 1학년을 대상으로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일명 일제고사)가 전국적으로 실시될 때 이 일제고사가 부당하고 옳지 않다고 여긴 일부 교사들이 학부모의 동의하에 체험학습을 선택할 수 있음을 알린 편지와 체험학습이 문제가 되어 해임. 파면 중징계된 사건을 말한다. 해당교사들의 중징계 이유는 '학생들에게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 '이 시험의 선택권을 알렸다는 이유' 그리고 '국가공무원으로서 국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이유' 였다. 지난해 이와 관련한 다큐영화 '명령불복종 교사'가 오랜 제작 시간을 거쳐 상영되기도 하였다.
당시 교사들이 교육부의 이 정책에 저항했던 것은 '학생들의 서열화'때문이었다. 일제고사의 부활(1998년 폐지)이 가지는 문제는 폐지의 근거였던 '전국 학생을 점수대로 줄을 세운다든지 과외를 부추긴다'는 망국적 조치의 일방적 강요였다. 교사들은 이로인해 지역간, 학교간, 학생간, 교사간 끊임없는 경쟁을 강요함으로써 교육의 본분이 실종됨을 우려했던 것이다. 당시 쫒겨났던 최혜원 교사는 2009년3월14일 발행된 '노동자 연대'를 통해 이명박 정부가 일제고사를 계속 밀어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그들만의 리그’를 위해 교육정책 전반을 하나하나 바꾸고 있어요. 예를 들어 보죠. 이명박이 자기 손자를 귀족교육시키려고 사립 초등학교에 보냈어요. 근데 중학교에 보내려니까 평준화가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국제중을 만들었어요. 이제 고등학교에 보내려니까 또 평준화가 있네. 그래서 자사고와 특목고를 쭉 배치한 것이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학생이 고등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 즉 고교선택제를 만들어 놨죠.
“근데 문제는 교사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거죠. 그래서 나온 게 성과급 제도예요. 이걸 일제고사, 교원평가와 연계해서 A등급 나온 교사는 돈 많이 주고, C등급 나온 교사는 돈 안 주고 자른다고 위협하고. 이런 상황에서 교사는 어떻게 할까요? 우선 매일 아침마다 문제풀이 연습을 시키고 쪽지시험을 볼 거예요. 또 틀린 갯수대로 체벌하겠죠. 일제고사 전날에는 애들한테 잘 봐야 한다고 스트레스 주고, 사교육도 하라고 부추길 거예요. 운동부 애들한테는 다음날 학교 오지 말라고 하겠죠.”
“지금의 입시교육 체제는 결코 아이들에게 진정 행복한 삶을 가져다 줄 수 없어요. 애들이 죽기살기로 공부해 봐야 공부에 정만 떨어지고, 그렇게 시험 봐서 대학 가도 등록금 없어서 피 팔고, 대학에서 토익 공부하다 취업 안 돼 졸업 유예하고 … 이런 현실이란 말이에요.
“공교육 판을 뒤집는 고민들이 지금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봐요. 당장 일제고사 문제부터 그래야 해요. 학부모ㆍ교사ㆍ학생 들이 함께 불복종 선언에 나서야 해요. 이렇게 불복종할 의지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아이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하고 체험학습에 나설 수 있을 거예요. 그럴 때, 이런 잘못된 교육의 판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 있을 겁니다.”
당시 신문 만평들
학생들의 미래를 진짜 고민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그들에게 세상은 가혹했다. 그 가혹한 현장은 학교 내부와 동료들의 자세에서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해직교사들은 이 일을 겪으며 학교라는 공간, 교사 조직이 보수적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이들은 전체조회 때 “(지시에 따르지 않고 갈등을 일으켰다는 의미로) 학교에 먹구름을 가져왔다”며 낙인을 찍거나 상부 조직의 하수인 역할을 하거나 모른 척하는 동료 교사들 때문에 더 힘들었다. 해직교사들은 아이들과 학교 밖 공간에서 따로 수업을 진행하거나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의 졸업식에만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학교 쪽 교장·교감은 직접 나서 수업 도중 해직교사더러 교실을 나가라는 등의 행정집행을 했다. 한 학교는 “나라에서 선생님을 너희와 분리하란다”라고 말하며 학교 현관 앞에서 교사를 에워싼 학생들을 직접 떼어내기도 했다.
2009년 12월31일. 서울행정법원은 해직교사들이 서울시교육청을 대상으로 낸 해임처분 취소 행정소송에서 “이전, 이후 사례에 견줘 교사들이 받은 중징계가 징계권 남용”이라고 판결했다. 이후 교육청의 잇따른 항소로 2년8개월여 동안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싸움이 이어졌다. 교사들은 2011년 3월이 돼서야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새삼스러운 아픔이다
한편 전교조 통일학교 사건은 2005년10월 전교조 부산지부 통일위원회 소속 교사들이 북한 바로알기 차원에서 모여 자료집을 내고 토론 한 것을 이적화 시켜 학생들에게 친북 교육 운하며 교사들을 탄압했던 사건이다. 당시 참여 교사들이 인용했던 자료는 국내의 역사학자들의 저술에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는 자료이며, 대학의 학부생조차도 필수로 연구에 참조하는 합법적이고 대중적인 출판물이었다. 더욱이 이들이 열었던 세미나가 학생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한 자료가 아니라 교사들 자체의 토론과 연구 과정에서 북의 주장을 알아보고 토론하는 공개적인 세미나였음에도 9월이나 경과한 뒤에 이를 문제 삼아 마녀사냥을 벌인 것이다.
▲ 2013년도 9월 5일자 교육부 보도자료에 따르면, 현재 학생수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8년간 전체 학생수는 약 127만명이 감소했다. 특히 초등학생 수의 감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공교육비 가계부담 OECD 중 한국이 1위
그로부터 7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학교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교육정책은?
문현초등학교 6학년 졸업생은 7학급 152명이다. 이제 이 아이들도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무한경쟁 레이스에 들게 될 것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시험 성적에 따라 또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그 명암은 바뀔 것이다. 학교도 중고등학교로 올라갈 수록 일류 이류 삼류가 생겨나면서 초 일류를 제외한 전국의 많은 학교는 기피학교로 낙인 찍혀 질 높은 고육을 받기 어려 워 질 것이며, 이의 해소를 위해 각급학교는 아이들을 내몰 것이고 덩달아 학부모들도 사교육시장을 찾을 것이다.. 교육현장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노골화 된다는 것이다.
학생 개개인의 선택과 전망 또한 밝지 않다. 결국 경쟁에서 살아 남지 못한 학생과 학교는 사회에서 방치되면서 그늘이 된다. 그 그늘은 지금도 곳곳에 드리워져 있고 더 확대되면서 짙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고교 졸업자 4명 중 3명이 대학을 가는 현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일류대와 서울에 적을 둔 대학과 지방대로 서열화 되며 또 지방대는 지방의 순위로 서열이 나누어진다. 여기에는 대학 졸업자와 고졸자의 임금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적성에 맞든 안맞든 무조건 가고보자 대학진학이 이루어지게 되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한국 특유의 학벌사회 문화가 자리한다.
현재 대학 진학율은 미국 60%, 일본47%, 프랑스41%, 독일35% 에 비해 세계 최고의 약 80%수준이다. 그나마 2005년 이후 다소 꺽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상위 몇 %를 빼고는 대학을 나와도 뽀죽한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 대학생(재적생) 수는 1만6천여 명에 불과했으나, 1960년에 10만8천여 명,1980년 61만 8천명, 1985년 136만명으로 기하급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대학을 나오기까지 많은 돈이 든다. 어줍잖은 대학을 나오면 출신학교를 숨긴 채 열등감에 시달리며 산다. 그럼에도 그 잘난 대학졸업장을 얻기 위해 보모들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서로 피곤한 인생이 된게 만든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사교육비가 3년 연속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인당 사교육비는 월평균 24만4000원으로 2007년 사교육비 조사 이후 최고치를 다시 경신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교육비 경감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조사 대상 중 사교육 참여율은 68.8%로 나타났다. 사교육 참여자만 다시 분석해 보면 월평균 사교육비는 35만5000원까지 치솟는다. 초등학교는 28만6000원, 중학교는 39만6000원, 고등학교는 47만원으로 고등학교의 경우 무려 2배(23만4000원)의 차이가 난다. 지난해 사교육비 총규모는 17조8000억원으로 전년보다 4000억원(2.2%)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초·중·고 학생수가 전년보다 3.1%(19만7000명) 감소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2.26 경향)
막내 아들이 진로를 결정하게 될 때 나는 아들이 대학을 원치 않고 자신의 길을 가겠다면 밀어줄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
년도별 대학(전문대학, 대학, 대학원) 진학율 (1970~2006)
2021년 막내아들은 고3이 된다. 흔히들 2020 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다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어쩐지 세상은 후퇴한 것 같다. 어떤 희망을 가져야 할 것인가 2020년 그때쯤이면 큰아들은 군대 갔다와서 대학 졸업 후다. 마음에 드는 일터를 확보했을까. 아님 백수로 전전하며 눈치밥을 먹으며 오늘의 20대 청춘이 보여주는 이 빌어먹을 세상을 탓하고 있을까. 6년 후다. 미리 단정지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신세계가 보장될 리는 더더욱 없다. 그리고 그때 쯤 나는 ?
전에 없이 막내의 졸업을 통해 앞을 보니 걱정이 앞선다.
큰아들의 꿈은 과학자였다. 그리고 막내는 사격선수 ? 아마도 즉흥적으로 써 낸 것이리라. 그런데 나의 꿈은 무엇이었든가 . 꿈을 잃어버렸다. 그냥그냥 살고 있는 것 같다. 80년대 후반 죽이 맞아 어울려 다녔던 김석기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때 그와 황령산 바람고개에서 다짐하기를 서로가 생의 목표로 노벨상을 받자고 했는데 그는 노벨물리학상을, 나는 노벨문학상을 받겠다고 서로 다짐하곤 하기도 했다. 부산대 물리학과를 나온 그 친구는 결혼 이후 하와이 무슨 대학으로 가서 여직 소식을 모르고 지낸다.
그리고 두번째 나이 들어서 가진 꿈이 환경연합에서 가진 꿈이었는데 초창기에는 환경부장관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지역에 보다 눈을 뜨면서는 부산시장을 되고 싶다고 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이였든가. 지금의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노동운동을 하던 시절 그가 우리 수련회에 왔었다.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새가지고 왔던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때 환경련 겨울 활동가 수련회였던 것 같다. 전국조직 결성을 앞둔 때였는지 후인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눈발이 날리는 그런 날씨였는데 활동가들이 10년 후 우리가 환경운동을 위해 무엇을 할지 어디에 있을지 발표를 했다. 그때 부산시장이 되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는 노무현정부 시절 실제로 환경부장관이 되기도 했다. 내가 일했던 환경련에서는 역대 공동대표들 중 세사람이 환경부장관 출신이었거나 직을 수행했다. 2000년 대 이후에는 녹색후보로 도의나 시의회로 진출하기도 했고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이제 다시 총선을 앞두고 있다. 환경운동연합(1988~2008)을 본의 아니게 중도하차하면서 후배들의 추천으로 걷고싶은 부산(2009~2012.5)에서 활동하다 지금의 부산그린트러스트(2012.7~)에 이르는 동안 마음의 동요를 가지기도 했다. 선.후배들이 정치권으로 나가는 현상이 나의 앞날일 수도 있어 조심스럽게 스스로를 타진해보기도 했다. 2002년 조직 결정에 따라 시의원 후보로 나섰다 초반에 사퇴하기도 했지만 그때와는 다른 입장에서 나를 위해 조만간 마음의 결정을 해야 할 것 같다. 아니 결정이라기 보다 준비라고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막내 아들은 이제 첫 관문을 통과 했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어떤 세계를 꿈꿀지 기대된다. 아버지로서 그 꿈을 향해 가는데 어떤 역할을 해줘야 할지도 새삼 어깨를 무겁게 한다. 세상에는 축복받을 일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졸업식이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 어머니 옛 이야기 나누신다. 이날 밤 가족밴드를 통해 안 사실이지만 우리 형제들 중 가족들의 졸업축하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동생이 인천 사는 둘째 여동생이었다고 한다. 둘째 동생의 말에 따르면 그때 아버지가 사업 부도를 맞아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던 때였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 혼자 둘째 졸업식에 왔다고 했는데 그럴리가 있냐 며 의구심이 들었는데 본인이 가장 그 당시의 기억에 충실한 반면 나는 반신반의 하면서 그렇나 식이다. 어쨌든 둘째가 시방 몇 살인지 잘 모르겠다. 막내 여동생이 열살 터울이고 첫째 여동생이 이제 오십이니 ...멀리 있고 자주 보자 못하니 ... 아무튼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
막내 여동생의 딸 나정이
큰아들 환용과 막내 준혁을 데리고 김해 김수로왕 놀러 갔을 때 담았던 모습이다. 아마 이때 형으로서 동생을 잘 돌봐주지 않는다며 내게 한소리 듣고 마음이 움추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이렇게 컸다. 그리고 큰 놈에 이어 작은 놈이 졸업을 한다.
준혁이의 어릴때부터 가장 최근까지의 표정을 담아 보았다.
막내 아들의 담임선생이 지켜보고 판단한 행동특성이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일단 착하고 둘째 겁이 많다, 셋째, 엄살이 다소 있다. 네째, 다소 살이 져 몸이 둔한 편이다. 그래서 몸 관리가 요구된다. 그럼에도 한창 성장 때라서 그런지 엄청 먹는다. 그래서 주문 사항이 중학교 가면 운동을 많이 해서 몸 관리를 해야 된다 였다.
2.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 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군이 되겠습니다
3.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 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준혁의 친구들과 가족사진
막내 아들은 누가 뭐래도 막내다. 집안의 귀여움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상대적으로 큰 아들은 매우 엄하게 키워 졌지만 대학 들어가고나서부터는 좀 멋대로다. 올해 가을 군대입대 예정이기에 그럴려니 하고 있다. 거기에는 커면서 너무 엄했던 내 자신의 반성과 성인이 된 큰 아들에 대한 나름의 배려도 있다. 미안하다.
이날 식구들은 마땅히 점심먹을 데가 없어 사무실 근처 중국집 서부의 사나이에서 같이 식사하는 것으로 준혁의 졸업을 축하했다. 이번에는 다른 음식을 시도했지만 미리 예약하지 않은 관계로 이또한 쉽지 않아 이번에도 중국집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봉투를 준비했고 겉면에는 덕담과 격려도 손자에게 남겼다.
졸업식 며칠을 앞두고 아들이 제안해 왔다. 아빠 이번에는 1박2일 가족 여행을 갔으면 한다고 그래서 갈려면 경비가 필요한데 라며 뒷말을 흐리자 아들이 아빠 제가 모아 둔 돈이 좀 있어요 아빠가 조금 보태면 될 거라고 ... 주위 지인들은 아들 말을 따라 여행을 가라고 했지만 그 여행을 위해 돈을 빌릴 수는 없는 일이라 결국 다음으로 미루고 이런 상장으로 대신했다.
Come Back To Me- Mark Dinning -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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