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살살 뛰고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시가 있다. 전북 고창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의 서정주문학관엘 들렀을 때다. 폐교된 선운분교를 살짝 개조해 꾸민 문학관 1층의 전시실 겸 세미나실을 거쳐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 벽면이었을 것이다. 거기 구석진 곳에 운 좋은 사람만 보라는 듯 걸려 있는 시 한 편이 있었다. 제목부터 군침이 솟는 ‘하늘이 싫어할 일을 설마 내가 했을까’.
“연애지상주의파의 한 노처녀가/ 사내인 그대의 사십대 후반기쯤 나타나서/ “나는 줄곳 당신을 혼자서 사모해 왔거던요”/ 한다면,/ 그리고 또 그대가 이미 처자를 거느린 가장이라면/ 이거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하면 좋지?// “너 좋알라, 나 좋알라” 받아들여서/ 사람들 눈 피해서 붙고 노는가?/ 아니면 “참어라 참어라 참어라” 하며/ 멀찌감치 피해서 살아 가는가?/ 우연처럼 참 우연처럼 꼭 한번/ 내게도 이 시험이 사십대 후반엔 왔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침묵함이 좋겠다.// … “하눌이 싫어할 일을 내가 설마 했겠나?”/ 그거나 습용(襲用)하며 침묵함이 좋겠다.”
미당은 부인(방옥숙)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시를 썼을 것이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 볼 생각’(내 늙은 아내)이라고 했던 부인 말이다. 그러나 그 천진한 발설에, 시인 자신의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가지 않았을까? 이젠 용서하시겠지?
이런 고백도 있다. 독자의 가슴에도 상처를 내는 그런 시다. 김수영은 출판사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동대문 허름한 여인숙에 끌려가 낯선 여인과 동침했다고 한다. 잠에서 깬 뒤 얼마나 황망했으면 그는 속옷도 벗어놓은 채 여인숙을 튀어나왔다. 그때 남긴 시가 ‘성’이다.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사실 부인(김현경)은 그의 행적을 짐작하고, 보채는 아이 달래듯 그를 어르는 중이었다. 김수영은 한 달에 한 편 남짓 시를 쓰면 반드시 부인에게 평을 구했다. 그의 안목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려니와, 웬만한 허물은 모두 감싸주리라는 믿음이 컸다. 그런데 ‘성’만은 책상 서랍에 꼭꼭 가둬둔 채 공개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뜬 뒤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야 부인의 눈에 띄었다. 시인이 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 위선을 단호하게 자책하는데, 독자라고 속이 편할 리 없다.
처벌이 크게 강화된 성범죄 관련 법들이 어제 발효됐다. 이제 성범죄자는 피해자의 고소 없이도 처벌을 받게 되고, 피해자와 합의를 했다고 처벌을 피할 수(반의사불벌죄)도 없으며, 대부분 범죄에 공소시효도 적용하지 않는다. 누구나 고발할 수 있어 피해자 신원이 노출될 우려가 커졌다는 게 문제로 지적되긴 하지만, 쌍수로 환영할 일이었다. 그런데 벌을 무겁게 한다고 그런 파렴치 범죄가 줄어들까?
회의가 드는 까닭은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그런 경력을 훈장처럼 붙이고 다니는 자들과, 그런 자들을 중용하는 세태 때문이다. 온갖 추접한 발언으로 여대생들과 아나운서들을 집단으로 성희롱했던 강용석씨는 요즘 종편과 유선방송 덕에 ‘예능 대세’로 떠올랐다. ‘강용석의 고소한 19’(티브이엔)의 진행을 맡았고, 같은 티브이의 <에스엔엘 코리아>와 제이티비시의 <썰전>에 고정 출연한다. 허접한 방송들이 그를 모시기 위해 안달인 것이다. 그러니 누가 성희롱, 성추행을 두려워할 것인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강씨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입심이 달리나 지명도가 떨어지나 허접스럽기가 못 미치나, 그런 방송이 있는 한 인생 역전은 시간문제! 길이 남을 시로 용서를 구했던 두 시인의 고백이 오늘 쓸쓸하다. 한겨레 곽병찬 논설위원, 대기자/2013.06.19
내 늙은 아내-서정주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 주는데,
내가 "아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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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의 부인 방옥숙 씨는 10여년 간 치매를 앓았고, 시인은 부인이 죽을 때까지 곁에서 함께 보살피며 살았습니다. 부인이 2000년 10월에 세상을 떠나자 이후 서정주 시인은 곡기를 끊고 맥주로 연명하다가 2000년 12월 24일 세상을 떠납니다.
[출처] 내 늙은 아내 - 서정주 -|작성자 안정식
밤이 깊으면/ 서정주
밤이 깊으면 숙아 너를 생각한다.
달래마눌같이 쬐그만 숙아 너의 전신을.
낭자 언저리, 눈언저리, 코언저리, 허리 언저리,
키와 머리털과 목아지의 기럭시를
유난히도 가늘든 그 목아지의 기럭시를
그 속에서 울려 나오는 서러운 음성을
서러운 서러운 옛날 말로 울음 우는 한 마리의 버꾹이새.
그 굳은 바윗속에, 황토밭 우에,
고이는 우물물과 낡은 시계 소리 시계의 바늘 소리
허물어진 돌무데기 우에 어머니의 시체 우에 부어오른 네 눈망울 우에
빠알간 노을을 남기우며 해는 날마닥 떴다가는 떨어지고
오직 한결 어둠만이 적시우는 너의 오장 육부, 그러헌 너의 공복 空腹.
뒤안 솔밭의 솔나무 가지를,
거기 감기는 누우런 새끼줄을,
엉기는 먹구름을, 먹구름 먹구름 속에서 내 이름자 부르는 소리를, 꽃의 이름처럼 연거푸 연거푸서 부르는 소리를.
혹은 그러한 너의 절명을
혹은,
혹은,
혹은,
여자야 너 또한 쫓겨 가는 사람의 딸. 껌정 거북 표의 고무신짝 끄을고
그 다 찢어진 고무신짝을 질질 질질 끄을고
억새풀입 우거진 준령을 넘어가면
하눌 밑에 길은 어데로나 있느니라.
그 많은 삼등 객차의, 보행객의, 화륜선의 모이는 곳
목포나 군산 등지 아무 데거나
그런데 있는 골목, 골목의 수효를,
킁란 건물과 버섯 같은 인가를, 불 켰다 불 끄는 모든 인가를,
주식 취인소를 공사립 금융조합, 성결 교당을, 미사의 종소리를, 밀매음 굴을,
모여드는 사람들, 사람들을, 사람들을,
결국은 너의 자살 우에서……
철근 콩크리트의 철근 콩크리트의 그 무수한 산판알과 나사못과 치차를 단 철근 콩크리트의 밑바닥에서
혹은 어느 인사 소개소의 어스컹컴한 방구석에서
속옷까지, 깨끗한 그 치마 뒤에 속옷까지 베껴야만 하는 그러헌 순서.
깜한 네 열 개의 손톱으로 쥐여뜯으며 쥐어뜯으며
그래도 끝끝내는 끌려가야만 하는 그러헌 너의 순서를.
숙아!
이 밤 속에 밤의 바람벽의 또 밤 속에서
한 마리의 산 귀또리 같이 가느다란 육성으로 부르는 것.
충청도에서, 전라도에서, 비 나리는 항구의 어느 내외주점에서.
사실은 내 척수신경의 한가운데서,
씻허연 두 줄의 이빨을 내여 놓고 나를 부르는 것,
슬픈 인류의 전신 全身의 소리로써 나를 부르는 것.
한 개의 종소리같이 전선같이 끊임없이 부르는 것.
뿌랰 뿔류의 바닷물같이, 오히려 찬란헌 만세 소리같이,
피같이,
피같이,
내 칼끝에 적시여 오는 것.
숙아, 네 생각을 인제는 끊고
시퍼런 단도의 날을 닦는다.
(시집 귀촉도 –1946)
김현경 산문집 ‘김수영의 연인
산문집 ‘김수영의 연인’은 2013년 2월에 나온 책으로 시인 김수영(1921∼1968)의 아내이자 문학적 동지였던 김현경 여사가 시인의 사후 45년 만에 처음으로 쓴 책이다. 김수영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40년 넘게 그녀는 문단을 멀리 했다. 그런데 뒤늦게 책을 낸 것은 “김수영의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라고 한다.
2013년 책을 펴낼 당시 그녀의 나이는 86세였다. 책이 나온 지 10년만인 2023년 올해 그녀의 나이는 96세이시다. 1927년 토끼띠인 그녀의 근황이 궁금해 찾아보니, 용인 자택에 사시며 김수영의 책을 늘상 읽으며 소일하는 김현경 여사는 해마다 미국 달라스에 사는 며느리와 두 손녀를 만나러 가서 두 달간 머물다 오는데 혼자서 12시간 30분이 걸리는 비행도 척척 해내실 만큼 정정하게 활동하고 있다(계신다)
그녀는 1942년 처음 시인을 아저씨로, 그저 꿈 많던 한 문학소녀의 선생님으로 맺은 첫 인연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져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굴곡진 삶을 시인과 함께했지만 여러 번의 곡절을 겪으면서도 결코 자신을 놓지 않았던 시인,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나 곁에 없어도 그때 자신을 향하던 당신의 마음이 지금도 부끄럽게 살아 있는 오늘의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고 고백한다.
책에서는 “내곁을 떠난지 어언 45년… 나는 아직 당신과 동거 중입니다”라는 진주황색 띠지에 쓰인 글과 “김 시인은 내게 운명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김 시인과 결혼할 것이다”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그녀의 시인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김수영이 아내에게 느끼는 사랑은 변함이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불안에 떨었던 모양이다. 아래 시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사랑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刹那)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이렇게 시인이 불안에 떨었던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징집되었던 시인이 거제도포로수용소까지 끌려갔다가 겨우 살아 돌아와보니, 전쟁중에 홀로 김수영의 아들까지 낳은 김현경이 자신의 친구였던 이종구와 부산에서 살림을 차린 사실을 알고 찾아가자 단칼에 거절해버려 눈물을 흘리며 돌아나와야 했던 일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중에 '죄와 벌'이란 시에서 비오는 날 길거리에서 지우산으로 아내를 때리고도 아내에 대한 미안함보다 남들이 폭력하는 자신을 알아봤으면 어쩌나, 그보다 현장에 버리고 온 지우산을 아까워하는 자신의 찌질함을 고백하는 내용을 썼으리라.
김현경이 쓴 산문집을 읽으며 전쟁 이후 재결합해 살면서 시시때때로 시인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야 했을 김현경의 속내가 궁금했다. 과연 그녀의 입장은 무엇일까?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함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1963)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김현경의 이야기다.
- 광화문 근처에서 과외 공부를 하는 큰아들 준을 기다리는 동안 당시 조선일보사 모퉁이에 있던 영화관에서 페데리코 펠리니 (Federico Fellini) 감독의 <길 (La strada)>을 보았다. 수영과 나는 좋은 영화가 개봉되면 항상 같이 극장을 찾았다. 그날은 다섯 살 된 둘째 아들 우도 함께 갔다. 영화를 잘 보고 나오는데 수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나를 사정없이 때렸다. 대로변에서, 그것도 어린 아들 앞에서 부인을 때리는 시인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시에다 우산을 두고 온 일이 아깝다고 말하는 시인의 감정에 는 무엇이 섞여 있었을까?
그 일이 있고 한참 후에야 그날, 수영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었다. 일단 장남의 과외 교사가 신통치 않아 수영의 마음이 불편했던 것. 아니 그보다는 배우 줄리에타 마시나와 앤서니 퀸이 남루한 모습을 한 채 방랑하는 야바위꾼으로 나왔던 그 영화 상영 내내 펼쳐지던 황량하리만큼 넓은 영화의 공간. 영화 속 주인공들의 기형적인 사랑과 욕망, 그리고 수영과 나.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수영은 나를 때리고 「죄와 벌」을 썼는지 모른다. 수영은 그날 일에 대해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1958년 가을이었다. -
그날 함께 봤던 영화 속에 나온 주인공들의 기형적인 사랑과 욕망이 자기 사진과 겹쳐보이면서 문득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벌어졌던 일이 떠오른 시인이 아내를 길거리에서 팬 것이다. 시인의 가장 옆에서 오래도록 동고동락한 가족이자, 시인의 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독자의 눈으로 파악한 분이 해석한 창작배경이니 이 말이 맞지 않을까? 어쨌든 시인에게 아내의 일탈은 씻을 수 없는 상처였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인 6.25 전쟁동안 상황에 떠밀려 비록 1년가량 시인을 떠나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았지만, 시인이 떠난 뒤로도 55년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지조를 지키고 살아온 김현경 여사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김현경 여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시인과는 어떻게 만나 사랑을 키웠고, 한국전쟁 당시 이종구와 살게 된 내력도 좀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1927년 종로구 사직동의 부유한 사업가의 집에서 태어난 김현경은 신여성이었다. 문단이란 말도 생소했던 1940년대 이화여대 영문과생이었던 그녀는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폴 발레리의 시를 읽으며 프랑스 문학에 심취했고, 이화여대 교수였던 정지용의 예쁨을 받으며 시경을 배웠다. 김소월의 ‘산유화’에 곡을 붙인 작곡가 김순남이 오촌 당숙이라, 김순남의 집에 놀러가서 자연스럽게 임화 오장환을 비롯한 문인들과 어울렸다. 미와 지성을 겸비한 그녀는 남성 문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는데, 김수영의 선린상고 2년 선배이자 도쿄 유학시절 친구였던 이종구를 통해 1942년 김수영을 처음 만났다. 이듬해 김수영이 귀국하며 둘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1953 이화여대 교정
그러나 그녀에게 김수영은 첫사랑이 아니었다. 이른바 ‘흑인 시’를 쓰던 배인철(1920∼1947)과 사귀었는데, 1947년 남산에서 데이트를 하다 한 괴한이 쏜 총에 애인이 죽는 것을 옆에서 봤다. 그녀도 옆구리에 총을 맞았다. ‘배인철이 공산주의자였다’란 소문이 돌자 함께 있던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났지만 김수영만은 예외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외면했지만 김수영만은 제게 남았어요. ‘네 재주가 아깝다. 너는 문학을 해야 한다’며 저를 다독여줬죠.”
1949년 초겨울부터 동거에 들어간 김수영과 김현경은 1950년 4월 결혼한다. 하지만 둘의 행복은 짧았다. 6·25전쟁이 터지자 김수영은 징집당해 전선으로 갔고, 포로가 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미처 이남으로 피난을 가지 못한 김수영과 그의 가족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김수영은 다른 문인들 과 함께 '의용군'이 되어 인민군에 끌려가고 만다. 가족과 헤어진 김 수영은 유엔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뒤집히자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 께 북쪽으로 행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수영은 행군 도중 전열을 이탈하여 탈출을 결행하고 온갖 죽을 고비를 넘는다(실제로 첫 번째 탈출후 도망치다 북한 내무성 군인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할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반 거지꼴이 되어 남하하던 김수영은 유엔군에 다시 붙잡혀 결국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끌려간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가장 처절한 이념 대립이 있었던 그곳 말이다. 반공 포로 신분의 김수영은 동료들이 친공포로에 붙잡혀 잔혹하게 살해당 하는 장면과 반대로 반공포로가 친공포로를 집단린치하는 장면을 모두 목격한다.
1952년 김수영이 수용소에서 나온 뒤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고, 그녀도 따라가서 부산에 함께 살았다. 그러던 중 수영과의 연애 이후 자연히 왕래가 소원해졌던 이종구가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종구에게 취직을 부탁하기 위해 김수영의 허락을 받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엉망이라 기다리는 동안 청소하고 빨래하고 저녁상까지 차려놓은 김현경을 보고 반색한 이종구는 취직을 빌미로 그녀를 하루 이틀 집에 붙잡아 두게 되었고, 결국 그 집에 1년 넘게 머물게 된다.
그녀를 이전부터 흠모했던 이종구가 김현경을 끝내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6개월쯤 지난 어느 아침 김수영이 이종구의 집에 찾아와 이종구에게 "자네가 나에게 이러면 안 되지."하고 말한 뒤, 김현경을 보고 “가자”고 말했지만 김현경은 먼저 가있으면 곧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그날 돌아가던 수영의 뒷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슬프고 처량하기보다는 당당하고 결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너를 잃고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하략)
서울 환도 후에도 이종구와 함께 살다가, 이종구가 그녀와 정식 혼인을 하고 싶어해서 혼인신고를 하려면 먼저 이혼부터 해야 하니 김수영에게 이혼 도장을 받아 오라며 집착에 가깝게 광적으로 압박을 했다고 한다. 그의 등쌀에 밀려 수영을 찾아간 그녀. 종로 보신각 옆에 있던 주간잡지 ‘태평양’ 건물 2층에서 그를 만나 어렵사리 김수영의 도장을 받아왔지만 차마 이종구에게 전달할 수는 없었다. 도장을 넘겨주면 수영과의 모든 인연이 끊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수영을 만나지 못했노라고 거짓말하고는 탈출계획을 세운 뒤 달랑 핸드백만 들고 그 집을 뛰쳐나왔다.
이종구가 찾을 수 없도록 도피생활을 하다가 서울 성북동에 방을 하나 얻고는 이종구와도 김수영과도 결별하였으니 이제 한 여성으로서 여학교 시절 꿈이었던 소설가가 되기 위해 신춘문예 공모를 겨냥한 습작을 시작했다. 그렇게 밤낮으로 소설을 쓰다가, 몇 달 뒤 '적어도 수영에게 이종구를 떠난 사실은 알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김수영에게 엽서를 보내 삼선교 근처 다방에서 만나자고 한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수영을 떠나 있었지만 결국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그 만남의 자리에서 수영은 별다른 말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이 근처 거리를 천천히 걷다가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렇게 결국 그들은 두 번 헤어졌다 다시 만나 1968년 시인이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함께 했다. 둘 사이에 준과 우 두 아들이 있는데, 시인은 아내의 발가락(네번째 발가락보다 세번째 발가락이 길다고 흉을 보던)을 꼭 빼어닮은 둘째 우를 유독 사랑했다고 한다.
김수영은 번역일도 많이 하고, 서울대와 연세대 강단에도 섰지만 수입이 비정기적이라서 김현경이 생계를 위해 서강 언덕 황무지를 개간해 500여평 채소밭 농사를 지었고, 10년간 양계장을 운영했으며, 바느질과 옷 만드는 솜씨를 인정받아 신문로와 동부이촌동에서 의상실을 경영하다가 이후에는 미술 컬렉터 및 디렉터로 활동했다. 현재는 김수영의 생전 집필실을 용인 자택에 재현해두고 그의 시를 읽으며 김수영 시인의 아내이자 독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왼쪽 끝이 아내 김현경, 앞은 어머니, 가운데는 여동생
그런데 ‘풀’ ‘폭포’를 비롯해 수많은 현대시의 걸작들을 남긴 김수영 시인의 육필 원고 대부분은 김현경의 글씨라고 한다. 시인은 초고를 원고지에 안 쓰고 백지에 썼기 때문에 초고가 완료되면 무조건 아내를 불러 원고지에 정서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저 글씨만 쓰게 한 게 아니라 김수영이 쓴 시를 최초로 읽고 평가하는 독자이자 평론가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출처] 시인 김수영의 아내 김현경의 이야기 '김수영의 연인'|작성자 여행작가 말그미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가 들려주는 ‘백년의 사랑’ (上)
1968년 6월 15일 밤.
술에 취한 중년의 사내가 서울 마포구 구수동 언덕길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버스 두 대가 엇갈려 다가왔다. 언덕을 넘던 버스 기사는 반대편 버스가 올려 쏘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이 부셔 행인을 보지 못했다. 육중한 버스는 그대로 사내의 뒤통수를 쳤다.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풀은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나지만, ‘풀이 눕는다’를 쓴 시인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반백 년도 못 채우고 떠난 김수영(1921~1968) 시인의 최후였다.
그가 산 시간보다 죽은 뒤의 시간이 더 많이 흘렀다. 김수영이 시에서 ‘여편네’라 멸칭하고 때론 ‘아내·처’라 썼던 뮤즈, 1927년생 김현경 여사는 이제 백수(白壽)를 바라본다. 경기도 용인시의 한 아파트에서,
여전히 김수영 시인의 기억을 안고 홀로 사는 그를 만났다.혼자 살기엔 넓다 싶은 50평대 집이지만 곳곳에 책이 들어차 빈 공간은 많지 않았다. 거실 테이블엔 최근까지도 펼쳐본 듯 김수영 전집이 놓여 있었다.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나를 인터뷰하러 오신다길래 내가 김수영 시인 여편네라는 건 아실 텐데, 우리 나이로 98세라는 것도 알고 오시는 건가? 다시 전화해서 내 나이를 알려드려야 하나 하고 생각했어요.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그는 최근 1년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앓느라 체중이 10㎏은 빠졌다고 했다. 3주 전 바지를 갈아입다 넘어져 갈비뼈와 척추에도 금이 갔다고 한다. 여전히 통증이 있다면서도 지팡이 없이 걸어 나와 손님을 맞았고, 의자에 꼿꼿이 앉아 응대했다. 보청기를 양쪽에 끼고 있었으나 눈빛은 형형했다. 그에게 사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100년의 사랑 이야기를.
우리 김 시인하고의 사랑은 좀 이색적이지. 그 양반이 정말 깊은 사랑을 한 것 같아요. 그러나 이야기는 서로 다른 각자의 첫사랑에서 시작됐다.
처절하게 실패한 김수영의 첫사랑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1921년 11월 27일, 김수영은 태어났다. 양반은 아니었으나 구한말을 거치며 상당한 재산을 모은 지주 집안의 셋째 아들이었다. 첫째와 둘째 형은 태어나자마자 숨졌다.
최하림(1939~2010) 시인이 쓴 『김수영 평전』에 따르면 사실상 장손인 그에게 집안 어른들이 기대하는 건 오직 하나였다. 그저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해주는 것. 김수영은 첫돌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으나 타고나길 허약했다.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반 때 장질부사에 폐렴·뇌수막염까지 겹쳐 운신하지 못했다. 내내 전교 1등을 할 만큼 영특했지만 긴 병 앞에 약이 없었다. 1935년, 남들보다 2년 늦게 치른 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선린상업학교 전수과 야간부에 들어갔다. 주경야독하며 은행이나 국책회사 취직을 꿈꾸는 동급생들 틈에서 김수영은 영어와 문학, 미술에 심취했다. 그리고 시를 썼다. 그즈음 가세도 급격히 기울었다.
1931년 작고한 조부와 달리 부친은 이재에 어두웠다. 재산 대신 빚만 불렸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동원체제를 갖추는 통에 형편은 더 쪼들렸다. 김수영네는 집과 살림살이를 헐값에 팔아가며 버텼다.
가족들은 김수영이 취직해 집안을 다시 일으키길 바랐다. 그러나 불가침의 존재였던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사람은 없었다. 선린상업학교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떠났다. 1년 앞서 동경으로 간 첫사랑 고인숙을 찾아서다.
“김 시인은 그때 동경여자전문대학에 다니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 애인이 만나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굉장히 애를 썼어요.”
나중에 이화여대 화학과 교수가 되는 고광호가 고인숙의 오빠다. 김수영은 막역지우인 고광호에게 동생을 만나게 해달라 조르고, 동경여전의 기숙사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고인숙은 매몰차게 외면했다. 고인숙이 김수영을 버린 이유는 알 수 없다. 학벌도 집안도 기울어진 김수영과의 만남을 고인숙의 부친이 반대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김수영은 첫사랑 고인숙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낙타산 밑에서 사귄 소녀가 있었다. 내가 동경으로 가서 얼마 아니되어 그 여자는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내가 오랜 방랑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지금 그 여자는 미국 태평양 연안의, 어느 대도시에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영원히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가 그의 오빠에게로 왔다 한다.’ -김수영 산문 ‘낙타과음’ 부분(1953.12)
두 아저씨를 모시고 문학을 하다
김수영은 일본에서 이종구(1921~2004)의 하숙방에 얹혀살았다. 이종구는 선린상업 2년 선배로 김수영과 나이는 같았다. 부친의 뜻을 꺾지 못해 상업학교에 진학한 터라 상업에 뜻이 없고 영어와 문학에 심취한, 김수영과 죽이 잘 맞았다. 이종구는 후에 건국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며 셰익스피어 전문가이자 번역가·수필가로 이름을 날린다. 경기고 출신 사업가였던 김현경의 아버지는 첩을 둘 뒀다.
그 중 한 명의 동생이 이종구였다.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 ‘수양어머니’의 집을 드나들던 김현경을 이종구는 ‘사랑하는 조카딸’이라며 예뻐했고, 김현경은 그를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다. 이종구는 실연한, 김수영에게 서울에 가면 김현경을 소개해주마, 자랑하듯 얘기했다. 김현경이 진명여학교 2학년이던 1942년 5월의 어느 날. 학교를 땡땡이치고 나왔다. 일본인 교사가 가르치는 공민 시간이 유난히 짜증스러워서였다.
효자동 종점 부근을 걷다 나란히 걸어오던 이종구·김수영과 마주쳤다. 둘은 학비를 조달하러 잠시 귀국한 터였다. 김수영과 김현경의 첫 대면이었다. 그날 이후 김현경은 김수영도 ‘아저씨’라 불렀다.
편지도 주고받았다. 김수영이 보내준 존 러스킨의 연설문집 『깨와 백합』 일본어판을 읽고 감상문을 답장으로 보냈더니 잘 썼다고 칭찬하는 편지가 현해탄을 건너 날아오기도 했다.
“이종구·김수영과 문학 전집을 같이 읽고 토의를 했어요. 두 아저씨를 모시고 문학을 한 거죠. 그러니까 문학 동지 같은 거지, 그땐 이성으로 안 봤거든.” 1944년은 전쟁으로 미쳐 날뛰던 일제의 징용과 징집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일본여대 합격통지서를 받았지만 가지 못했다. 공무원이 되면 정신대(일본군 강제위안부)를 피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교원 시험을 보고 국민학교 선생을 했어요. 집안이 넉넉한데도 자급자족을 했지.”
경기도 이천 부발국민학교 2학년 담임으로 부임한 첫 수업시간. 교과서를 펼치자 제일 앞 장에 일본 국기와 일본 문자인 히라가나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니혼진데스(日本人です)!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소름이 끼쳤다.
‘나는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일본말이 아니라 우리말과 한자이며, 세 나라의 땅이 각기 다르고 국기가 다르 듯 그곳에 사는 사람도 다르다고 가르쳤다. 그 순간 아이들의 눈이 번쩍했다. 매일같이 일본말만 해야 한다고 교육받던 아이들에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나 보다.
현장학습이라는 이름 아래 야외 수업을 나가서도 일본어 대신 우리말로 수업을 했고, 창씨개명을 한 아이들에게는 일본 이름이 아닌 한국 이름을 불러주었다.’ -김현경 산문집 『김수영의 연인』 p.18
이 용감한 초임 선생에게 소집장이 날아왔다. 일제는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을 감시했다. 김현경은 ‘요시찰(要視察)’ 대상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분류됐다. 경찰은 만주에서 온 김수영의 편지, 함흥에서 오는 이종구의 편지 내용을 문제 삼았다. 김현경은 문학을 논한 것이지 사상이 아니라고 설명했으나 경찰이 그걸 이해할 리 없었다. 경찰의 감시와 소집이 점점 심해지자 김현경의 부친은, 트럭을 보내 딸을 서울로 데려온다. 학교와 경찰에는 결혼한다는 핑계를 댔다. 이듬해 이화여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1945년 8월 15일. 눈물겨운 광복이 찾아왔다. 그러나 해방정국은 이내 좌우 이념 충돌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
김현경의 주변엔 걸출한 인물이 많았다. ‘조선의 천재 작곡가’라 불린 김순남(1917~미상)은 그의 6촌 오빠였다. 김순남은 월북하는 바람에 남한에선 흔적이 지워지다시피 했다가 1988년 해금됐다.
김순남의 서울 돈암동 집은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아지트였다. 시인 임화(1908~1953)와 그의 둘째 부인이자 소설가인 지하련(1912~1960), 소설가 오장환(1918~미상), 소설가 김남천(1911~1953) 등이 드나들었다. 김현경도 그 집에서 문화예술인들과 어울렸다. “어느 날 임화 시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더니 처음 보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수입 양복지로 만든 수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었는데, 눈에 띄었지.” 배인철은 중앙고보를 거쳐 니혼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한 수재였다. 1945년 해방 후 인천으로 돌아와 인천중 영어 교사, 해양대에서 영어 교수로 근무했다.
보성전문학교 시절 럭비선수로 출전해 전 일본 대회를 석권한 배인복(1911~1997)의 동생이라기에 김현경은 더욱 호감을 느꼈다. 배인철의 형 배인복은 상하이를 거점으로 두고 무역업을 하며, 독립지사들의 자금을 댄 ‘상인독립군'이었다.(경인일보, 2019.10.10) 임화의 집에서 나오는 길, 배인철은 김현경에게 서울역까지 에스코트를 부탁했다. 김현경은 그러마, 응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서울역까지 갔는데, 인천 가는 차가 끊어졌어요. ‘영등포에 가면 뭐가 있을까?’ 하곤 영등포를 또 갔어. 그런데 영등포에도 차편이 없는 거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걸어서 인천까지 갔어.
걷는 동안 문학과 예술, 사랑 이야기를 했죠. 그때만 해도 배인철이 문학을 안 했거든요.” 인천에 도착하니 새벽 1시였다. 배인철은 김현경에게 한옥으로 된 여관방을 잡아주고, 자신은 집으로 갔다.
이튿날 새벽같이 김현경을 찾아와 다시 서울로 데려다줬다. 언제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둘은 그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났다.
“배인철은 아주 대단한 휴머니스트였어요.”
그는 “아름다움은 모든 것에 앞선다”고 말하던, 눈물 많은 로맨티시스트였다. 길 가다 헐벗은 이를 보면 입고 있던 새 옷을 벗어주곤 했다. 그런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1947년 5월 10일 저녁. 김현경과 배인철은 남산 장충단공원을 산책하며 여느 때처럼 데이트하고 있었다.
탕! 탕! 탕!
총성이 울렸다.머리에 총을 맞은 배인철은 즉사했다. 김현경은 옆구리 관통상을 입었다. 김현경은 첫사랑을 눈앞에서 잃고, 그 자신도 총을 맞은 피해자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손가락질했다.
“그때는 사랑이 범죄였어요…”
김현경의 첫사랑, 배인철 시인
남산의 총격 사건을 다룬 '독립신문' 1947년 5월 13일자 기사. "이화여대 2학년생 김현경양과 남산 뒷산을 통행중 돌연 3발의 총을 맞아 배씨는 즉사하고 김양은 부상을 입었다.
배씨는 민주건국을 위하여 반동과 싸워왔고 때로는 테러들의 납치 ·구타까지 당한 젊은 시인으로서 장래가 촉망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배인철(1920~1947)은 해방 이후 인천에 진주한, 미군부대의 흑인 병사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흑인 노예의 역사에 천착했다.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흑인이나 일제와 미국에 굴욕을 겪는 조선 민족이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배인철이 남긴 시는, 1947년 1월 1일 독립신보에 실린 ‘노예해안’을 비롯, ‘흑인녀’ ‘인종선-흑인 존슨에게’ ‘흑인부대’ ‘쪼 루이스에게’ 등 5편뿐이고, 테러로 짧은 청춘을 마쳤기에 시를 쓴 기간도 반년이 채 안 된다.
그럼에도 ‘흑인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 시인으로 평가된다.
뉴기니, 하와이, 필리핀
누구를 위하여 돌아다니며
짓밟힌 몸이냐
이 땅에서도 우리의 누이를
낯선 이토(異土)에서
원수에게 꺾인 꽃들이
해방이 되었다는 고향에
다시금 창살 없는 우리함(*檻)에 -배인철 ‘흑인녀' 부분
*檻: 난간 함. 난간, 짐승을 가두는 우리, 덫·함정.
※‘백년의 사랑’ 다음 이야기는 6월 14일(금) 발행됩니다.
- 에디터 이경희, 김윤배, 중앙일보 P디렉터 2024.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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