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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인연이 아니라는 말

by 이성근 2024. 5. 1.

인연이 아니라는 말 / 장만호

인도양 / 최준

하관 / 이언주

무장무애無障無礙 / 나혜경-채석강을 읽다 /꼬막 삶는 저녁/낙법의 기술

그랬으면 좋겠네 / 이시하/ 아무도 본적 없는,

목련봉방 (木蓮蜂房) / 신미나/옛일

어떤 출토出土 / 나희덕

바람의 식사법 / 이종섶

우리가 잃어버린 연금술 / 이문재

다방에 관한 보고서 / 유홍준

대설 / 정양

철물점 여자 / 홍정순

소녀, 혹은 소년기 / 현택훈/흐린 명조체의 시

경문經文을 보다 / 김기찬/ 누에

바람의 모습 / 권도중

접촉사고 / 황진성

바람벽 / 이사랑/만두를 빚으며/박꽃

소가 넘어갔다 / 김세형/ 틈새

기타 등등 · 1/ 김경선/기타 등등 · 3-그림자/기타 등등 · 4 방석 놀이

여을 / 남유정

/ 박남희

모과나무 밑 / 김충규

뼈의 기원 / 안병호

오르골 / 이 슬

이팝나무에 비 내리면 / 황종권

차우차우 / 김진기

직선의 방식 / 이만섭

너의 마음이 안녕하기를

사람 때문에 아파하지 마라

모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내 마음 도려낼 것도 애쓸 필요도 없다

몇 사람은 흘러 보내고 또 몇 사람은 주워 담으며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곳곳에 숨어 있는 인간 괴물은 씩씩하게 무시해 주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 돌려주며 사는 것만도

충분히 빠쁜 인생이다

결국에는 모두 지나간다

어떤 기쁨은 내 생각보다 빨리 떠났고

어떤 슬픔은 더 오래 머물렀지만

기쁨도 슬픔도 결국에는 모두 지나갔다

그리고 이젠 알겠다 그렇게 모든 것들은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손님들일 뿐이니,

매일 저녁이면 내 인생은 다시 태어난 것처럼

환한 등을 내 걸 수 있으리라는 걸 ..

죽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도 모른체 지나가게 될 날이 오고

한때는 비밀을 공유하던 친구가

전화 한통 없을 만큼 멀어지는 날이 오고

한때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사람과 웃으면 다시 만나듯이

시간이 지나면 이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더라

변해버린 사람 탓하지 않고 떠나버린 사람을 붙잡지 말고

그냥 그렇게 봄날이 가고 여름이 오듯

의도적으로 멀리하지 않아도 스치고 떠날 사람은

자연히 멀어지게 되고

아둥바둥 매달리지 않아도 내 옆에 남을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서 내 옆에 남아주더라

나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고 아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 시간 내 마음 다 쏟고 상처 받으면서

다시오지 않을 꽃 같은 시간을 힘들게 보낼 필요는 없다

나보다 못난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려 하지 말고

나 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여 질투하지도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김재연 라디오 작가 : 때로는 빛나고 가끔은 쓸쓸하지만

 

인연이 아니라는 말 / 장만호

당신을 보내고

천 년을 살았다는 제주도 비자나무

상록의 활엽을 보네

잎잎마다 바라보는 향이 다르다지만

모두가 젊게 푸르다면 분명 시간의 국경을 넘어온 천 년의 이파리가

저 잎들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혼자서 바라보았을 천 년의 석양과

천 년의 밤하늘과

천 겹의 적막을 생각하며

 

나라는 나라와

당신이라는 나라의 국경을 생각하며

 

인연이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억울한가

우연에 기댄다는 말은

얼마나 쓸쓸한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과장없이 무너져 우는 그늘 속에서

천 년의 이파리가 가만히 그 울음을 듣고 있네

 

 

인도양 / 최준

젖은 모래톱 걸어간 물새 발자국

그 깊이만큼 가벼웠을 영혼의 흔적 따라

걸어가다 보면

새가 날아가는 것

날아갈 수 있게 하는 것

날개만이 아닌 것 같다 아니,

날개가 아닌 것 같다

껍질 깨고 나온 부화의 순간부터

어느 한 곳에도 붙박아 두지 않은 마음

더불어 흔들려야 하는 가지에 매달려

안간힘 쓰고 싶지 않은 욕망

마침내 그거마저 놓아버린 새의 발자국이 더는

지상에 없다 솟구쳐 올라

한 오후 한나절 한때

나에게도 있을 수 있는 착각과 환으로

잠시 기웃거리던 자기 너머 자신을

그 자취를

바람 센 날 물결이 와 지워주기 바라면서

새는,

먹이도 길도 없는 어디로 온몸으로 날아갔나

새의 발자국이 사라진 지점, 아니

그때부터 허공에 찍힌 새의 갈퀴발이

첫걸음 내디딘 자리

다시 시작인 듯, 내 안 저쪽에서

뜨겁지 않은 노을이

붉게 불탄다

 

 

하관 / 이언주

볕 좋은 선산발치

가묘 걷어낸 네 귀 반듯한 방에

아버지를 모신다

하관 밧줄 내리자

흰 국화 꽃송이 가슴에 얹고

상두꾼 올리는 흙밥 받으신다

달구질로 꾹꾹 눌러 쌓아올린 고봉

어머니 자분자분 어루만지니

아버지 두 다리 쭉 펴신다

새로 지은 봉분에 향 피워 혼백 부르고

메 올려 잔 친다

형제들 차례로 줄지어 엎드린다

크고 작은 등 산맥처럼 이어지는

家系 그윽하게 읽고 계시는 아버지

고향동네 내려 보이는 금당 산마루

양지바른 푸른 집에 언제든 다녀가라

갈참나무 가지 흔들어 눈짓 하시고

청솔 누비는 시원한 바람소리에

밝은 잠 드신다

 

무장무애無障無礙 / 나혜경

고창 무장 들판 지나다

어머니와 머우 잎 뜯는다

에미야, 받아라

한줌 뜯어 주신 머우 잎 속엔

거뭇거뭇 반점 박힌 것이 반이다

무장무장 눈이 어두워지는 어머니에겐

싱싱한 잎과 병든 잎이 한가지요

조년早年과 노년이 한마음이니

모든 것이 불이不二요 원융회통圓融會通이다

 

어머니 머우 한 잎 뜯고

나 머우 한 잎 버리고

 

 

채석강을 읽다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했지 한 권도 빼주지 않는

저 수만 권의 전집

한 권 슬쩍 하려다가 열 손가락 손톱 다 빠져버릴라

 

천년만년 정박 중인 비릿함과 무르익은 놀빛과 재탕 삼탕 글 읽는 바다의 소리로 엮었다니

그 이력이 참 새까맣다

 

좀약 한 알 쓰지 않고 멀쩡한

비 맞아 젖어도 못쓰게 된 적 없는

파도 떼의 몰매에도 무너진 적 없는

 

정정한 틈새 각주인 듯 삐죽, 풀꽃 한 송이 달려 있다

 

요철凹凸이 있어 점자책 같기도 하고,

그럼 마음 끝으로 더듬어 읽기라도 했단 말인가

펴 보지 않고도 저 책더미 앞에서 시구를 받아쓰는 사람

여럿 보았다

 

꼬막 삶는 저녁

- 못다 한 말

 

나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려고 하고

그는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려고 한다

 

신경전을 벌이다

내 손톱 끝은 부러지고

그는 혀를 깨물었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한 혀

가만 밀어 넣어주려 해도 꼼짝 않는다

닫힌 마음에 물린 세 치 혀끝에

사나운 슬픔이 살아 있다

마음 찡하다

 

파도처럼,

철썩이며 끓어대는 물에서야

맥없이 입은 벌어지고

 

, 꼬막의 입 속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바다의 말과

잘 익어 고요해진 슬픔,

꺼내어 씹어 본다

 

망설이기만 하다 혀를 깨물고야마는

내 입 속 못다 한 말처럼

눈물겹도록 짭조름하다

 

낙법의 기술

 

산을 내려오다 빙판길에서 미끄러졌는데

크게 다친 데는 없다, 낙법을 배웠냔다

, 나도 모르는 사이 몸에 익힌

낙법? 그거 별거 아니네

하긴 살얼음판 같은 세상,

미끄러지는 일에 이제 이골났다

미끄러질 때마다 가볍게 털고 일어났던 게

날개 없는 삶이 가르쳐 준 낙법의 기술이었다니

 

고양이 한 마리가 음식물통 위에서 두리번거리다

사람을 발견하고 미끄러지듯 땅으로 내려선다

소름끼치도록 사뿐한 반사본능의 저, 낙법

 

꽃잎 한 장 다치지 않고 툭, 동백꽃 떨어진다

 

아프진 않은데 여기저기 멍이라니

놀란 몸은 참았던 아픔을 다 기억하고 있었던 거라

온몸에 물파스를 화끈화끈 처바르며

저 빨개진 동백꽃의 궁둥이에도 파스를 발라주고 싶다

 

 

그랬으면 좋겠네 / 이시하

애인이 빨리 늙어 소처럼 느리고 순해지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느지막이 일어나 찬 없는 밥을 우물우물 먹고 나서 산수유 꽃 피었드만, 그거나 보러 가지, 그랬으면 좋겠네 사람구경도 참 쏠쏠하구먼, 천천히 걷지 뭐, 그랬으면 좋겠네 강 언덕에 시름도 없이 앉아서는 노을빛이 퍽 곱구먼, 그랬으면 좋겠네 주름진 내 손을 슬쩍 당기며 거 참, 달빛 한번 은근하네, 그랬으면 좋겠네

애인이 빨리 늙어 꾀병 같은 몸사랑은 그만두고 마음사랑이나 한껏 했으면 좋겠네 산수유 그늘 아래 누워 서로의 흰 머리칼이나 뽑아주면 좋겠네 성근 머리칼에 풀꽃송이 두엇 꽂아놓고 킥킥거렸으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허허 웃으며 주름진 이마나 긁적거리면 좋겠네 아직두 철부지 소녀 같다고 거짓 농이나 던져주면 좋겠네 한세상 흐릿흐릿 늙어 가는 게 싫지는 않냐 물으면 흥, , 콧방귀나 뀌었으면 좋겠네

 

아무도 본적 없는,

바람의 무릎은 시릴 것이다 무수한 허공의 이력들을 지우느라 새벽처럼 자주 서늘할 것이다 얼룩과 얼룩 사이를 건넌 바람의 무릎은 쓸쓸할 것이다 그늘처럼 깊고 어두울 것이다 초경 치르듯 지나간 봄날의 황망함과 상심 많던 살구나무의 너무 이른 낙화, 어린 물새가 흘리고 간 고단한 발자국과 질기게 울어대던 매미의 푸른 목마름을 지워내며 바람은 자주 숨이 가빴을 것이다 그러다, 그러다가,

어쩌면 몇몇의 소문들은 보란 듯이 남겨도 둘 것이다 어제보다 희망적인 새벽바다의 금빛물결이나 쿨럭쿨럭 터지는 해당화의 향기 짙은 기침소리, 소금꽃 툭툭 털고 연애하러 가는 섬 총각의 발자국 같은 이력들은 슬그머니 지나치기도 할 것이다 허공의 흉터들을 지우느라 제 몸 가득 멍울멍울한 얼룩이 졌을,

바람의 뼈는

온통,

이 들었을 것이다.

 

 

목련봉방 (木蓮蜂房) / 신미나

, 저 꽃봉속에 몰래 살림을 차려 딱 십오촉 밝기로만 살았으면

지붕을 거쳐 굴러간 별구슬 불러다 유년의 앞마당 소란했으면

그릇 부딪히는 소릴 들으며 설거지하고 꽃가지에 이불 널어 너와 나 희게 펄럭였으면

텃밭에는 자잘한 비밀 몇 톨 심어두고 뒤꿈치에 꿀물 묻혀 늙어가는 너의 마른 입술을 적셨으면

깰 줄 모르는 너의 꿈길을 내가 살아 맨 나중까지 배웅하고 혼자 날개 비비며 풀잎처럼 가난한 노랠 불렀으면

그렇게 살아, 고봉밥 비워내고 가지가지 마다 사기밥그릇 매단

이 너무 환해 눈이 시다

 

옛일

해마다 잊지도 않고 공양하나

저 꽃들, 보노라니

 

어쩌나

죽어도 너를 못 잊는다는 내 약속은

거짓이었어라

 

너 없어도 찢어진 살 위에 새살 돋고

밑이 젖는 내 몸 봐라

어쩌나

향불 한 올 피우지 못하고

너는 이제 뜨문뜨문 강가에 던진 돌이나 되었는데

 

내 슬픔만으로 꽃모가지 하나 꺾을 수 있느냐

산비알에 독짝 하나 굴릴 수 있겠느냐

 

내가 너를 어찌 잊어

어찌 잊을 수가 있어

 

지글자글 타는 자갈밭 맨발로 걸으며

울던 내 낯도 옛일, 다 옛일

 

 

어떤 출토出土 / 나희덕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 데 간 데 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 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바람의 식사법 / 이종섶

바람은 흔들리는 것들만 먹고 산다

흔들리지 않으면 죽은 것이라는 감별법에 따라

무엇을 만나든 먼저 흔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끼니때마다 바람의 식탁을 차려야하는 나무는

잎사귀의 흔들림까지 바쳐야 하는 삶이 괴로워

바람도 불지 않고 흔들림도 없는 어두운 땅속에서

어린뿌리들의 두 손을 꼭 잡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떠나라고 재촉한다

가느다란 가지 하나 바람결에 흔들리기라도 하면

탈출계획을 들켜버린 듯 화들짝 놀라는 나무

아무 일 없다는 표정을 간신히 지을 수 있지만

땅속에서는 시커먼 흙을 움켜쥔 뿌리들이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서럽게 울고 있다

입맛을 더욱 돋궈주는 그 소리는

나무 하나 붙잡고 통째로 뜯어먹는 바람의 양념

뼈만 앙상한 나무에 다시 푸른 살이 오를 때까지

기나긴 허기를 달래줄 맑고 차가운 독을 품는다

뾰족한 잎사귀나 딱딱한 잔가지들까지

모조리 핥아먹어버리는 바람의 습성 앞에

발이 묶여있는 나무들이 벌벌 떤다

바람은 흔들림을 먹고 사는 짐승

흰 이빨에 맹독을 키우며 나무를 사육한다

바람의 아가리에 물리면 약도 없어

봄가을로 빨갛게 부어올랐다 가라앉는 자국들

푸른 멍이나 이빨자국을 남기며 아문다

 

 

우리가 잃어버린 연금술 / 이문재

배추는 굵은 소금으로 숨을 죽인다

미나리는 뜨거운 국물에 데치고

이월 냉이는 잘 씻어 고추장에 무친다

기장멸치는 달달 볶고

도토리묵은 푹 쑤고

갈빗살은 살짝 구워내고

아가미 젓갈은 굴 속에서 곰삭힌다

세발낙지는 한손으로 주욱 훑고

 

안치고, 뜸들이고, 묵히고, 한소끔 끓이고

익히고, 삶고, 찌고, 다듬고, 다지고, 버무리고

비비고, 푹 고고, 빻고, 찧고, 잘게 찢고

썰고, 까고, 갈고, 짜고, 까불고, 우려내고, 덖고

빚고, 졸이고, 뜨고, 뽑고, 어르고

담그고, 묻고, 말리고, 쟁여놓고, 응달에 널고

얼렸다 녹이고 녹였다가 얼리고

 

쑥 뽑아든 무는 무청부터 날로 베어먹고

그물에 걸려 올라온 꽃게는 반을 뚝 갈라 날로 후루룩

알이 잔뜩 밴 도루묵찌개는 큰 알부터 골라먹고

이른 봄 두릅은 아침 이슬이 마르기 전에 따되

겨우내 굶주린 짐승들 먹을 것은 남기고

바닷바람 쐬고 자란 어린 쑥은 어머니께 드리고

청국장 잘 뜨는 아랫목에 누워

화엄경을 읊조리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다방에 관한 보고서 / 유홍준

우리나라 다방은 18,536개이다 우리나라 다방 종업원은 29,459명이다 오후 338분 현재, 커피를 주문하는 인간은 5,047명이고 배달 가는 오토바이와 티코는 935대이다 지금 3급 카쎈타 더러운 쏘파에서 배달 나온 다방 레지의 젖을 만지는 놈은 2,304명 팁을 받으려고 치마를 걷어올린 년은 576명이다 시간당 3만원 하는 티켓을 흥정하는 자가 483명 여관까지 가는 2차를 흥정하는 자가 885명이다 여관비+티켓비=? 돈 계산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하는 아빠가 222명 좀 돌려봐 이년아 엉덩이 끌어당기는 여보가 333명 이 새끼 이거 순 변태 아냐! 개의 뺨을 올려붙이며 욕지거리를 퍼붓는 이브가 73명이다 나들이 열 번으로 금목걸이를 해 건 공주가 4.747명 엄마 별일 없죠? 네에 저도 직장 잘 다니고 있어요 그럼요 걱정마세요 타락천사가 1.906명 오늘 보건소 가야 하는 백설공주가 5,401명이다 지금 공주의 썩은 가랑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보건의는 152명 오늘 은퇴하는 왕비가 84명 새로 입궐하는 궁녀가 157명이다 정말로 굉장한, 이 나라의 행사다

 

 

대설 / 정양

마을 공터에 버스 한 대 며칠째 눈에 파묻혀 있다

길들이 모두 눈에 묻혀서 아무 데나 걸어가면 그게 길이다

아무 데나 들어서면 거기 국수내기 화투판 끝에

세월을 몽땅 저당잡힌 얼굴들이 멸칫국물에

묵은 세월을 말아 먹고 있을 외딴집 앞

눈에 겨운 솔가지 부러지는 소리

덜프덕 눈더미 내려앉는 소리에

외딴집 되창문이 잠시 열렸다 닫힌다

잊고 살던 얼굴들이 모여 있는지

들어서서 어디 한번 덜컥 문을 열어보라고

제 발자국도 금세 지워버리는 눈보라가

자꾸만 바람의 등을 떠민다

 

동사자(凍死者) / 송찬호

여전히 사내는 눈의 여왕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방은 거의 빙하로 뒤덮였다 저쪽 방 한구석에서 소주한 병 라면 한 냄비의 보급을 실은 쇄빙선이 몇 번 항진을 시도하다 되돌아갔다

한 가지 불길한 사건이 있었다 난방 배관을 건드린 것인지 방바닥 저 밑을 지나던 잠수함이 기관 고장을 일으켜 수백 미터 얼음 아래 갇혀 있다는 소식이다 아하, 그래서 연탄 보일러가 얼어 터졌구나!

사내는 옷을 몇 겹 더 껴입는다 눈앞에서 환영처럼, 북극의 흰곰이 방을 가로질러 간다 그렇다, 지금은 사냥의 계절! 사내는 자작나무 무늬의 벽지를 두리번거린다 저 숲 간이 피난소 어딘가에 화약과 양초를 숨겨 놓았을 터인데,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벌써 여왕이 들이닥칠 시간이다…… 여왕은 한 방울의 하얀 피를 떨어뜨려 꾀죄죄한 몇 벌의 옷과 곰팡이가 핀 벽지의 방 안 풍경을 순식간에 아름다운 설원으로 바꿔놓는다 사내의 얼굴도 피가 도는 듯하다 여왕과의 키스를 기억하려는 듯 입을 벌리고 눈을 반쯤 뜬 채,

어찌 보면 동사(凍死)란 이 계절의 여왕이 낮게 내뱉는 가녀린 한숨 같은 것일 게다 아무튼 사내의 장례는 청색의 관을 준비해야 한다 요즘 시대 동사자가 생기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죽어서도 부자들은 가난뱅이들과 섞이려 들지 않으니까,

채찍을 휘둘러 마차의 속력을 더 내야겠다 시간 앞에서는 여왕도 늙는다 여왕의 얼굴도 녹아 사라진다

 

 

철물점 여자 / 홍정순

예외 없다 사람 손 가야 비로소 제값 하는

무수한 연장들 틈새에서 시 쓰는 여자가 있다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여덟 시까지

못 팔아야 살지만 못 팔아도 사는 여자

십 년 전 마음에 심은 작심(作心)이라는 볼트 하나

너트로 한 바퀴 더 조여야 하는

사월은 성수기

작업 현장에 연장이 필요하듯

여자에겐 시간이 절실하다

시를 쓰겠다고 한 시간 일찍 나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를

고요 속 새벽이 빨아들인다

뒤란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

흙집을 개조한 철물점 기와지붕엔

아직도 이끼가 끼어 있어

늘 기역자로 만나야 하는 새 소리는

어긋나 포개진 기왓장 틈새에 알 낳고 품었을 그 시간들,

지난 십 년을 생각나게 하는데

용마루 위 일가 이룬 새들의 울음소리에

자꾸만 착해지는 여자

지명 따라 지은 이름 '대강 철물점'

간판 너머엔

적당히 보리밭 흔드는 바람이 불고

멋대로 떨어지는 감꽃도 싱싱하지만

개줄 하나 팔고 앉으면 받침 하나 빠지고

물통 하나 팔고 앉으면 단어 하나 달아난다

오늘도

철물처럼 무거운 시

플라스틱 약수통처럼 가볍고 싶은 시

 

시인은 <대강 철물점>... 단양군 대강면이라는 지명을 그냥 땄다는... 대강 철물점 주인여자입니다.

 

 

소녀, 혹은 소년기 / 현택훈

소녀도 소년이고 소년이기에 소년인 시절에 대해서 쓰자

토끼는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소년들의 오래된 기억은 활과 화살을 만들었다

여우도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무덤가를 지날 때마다 소년들은 겁에 질리곤 했다

지냉이를 잡으려고 바위를 들추면

왜 꼭 지냉이 대신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지

컬러학습대백과사전에서 기어나온 뱀들

농약들이 강한 번식력으로 산경을 덮을 때까지

뱀들이 소년들의 눈 속에 군집을 이루었다

연탄가스가 안개처럼 마을을 덮으면

아침에 늦잠을 자는 사람들이 생기곤 했다

몇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개 속으로 걸어간 사람들

안개 속에는 검은 뱀들이 기어다니고 있을 거다

농협 창고에 농약들이 그득 쌓였다가도

이내 빈 농약병들이 죽은 무당개구리마냥 풀숲에 뒤집어져 있었다

뱀들은 농약을 피해 소년들의 귓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소년들은 허물을 벗듯 유년을 벗기 시작했지만

귓속으로 들어간 뱀들이 심장 밑에 똬리를 틀었다

소년들은 자신들이 소녀이거나 소년임을 알게 되었고

파출소가 증설 됐고

교회가 있던 자리에 공장이 생겼고

공장이 있던 자리에 교회가 생겼다

소년도 소녀이고 소녀이기에 소녀인 시절에 대해서 쓰자

아카시아나무 꽃잎이 진 지 오래였지만

 

흐린 명조체의 시

시립 도서관 벤치 옆에 있는 비파나무엔

올해도 비파가 노랗게 익었을까

당신은 대답이 없다 나도 예전엔

나를 읽고 있는 당신처럼

책 한 권의 오후를 사랑했다

이 창은 기억할까 책을 읽다가

덮어두고 바라보던 창밖엔

태양이 빛나고 있었고, 물에 번진

글자처럼 흐릿한 바람이

창틈으로 불어오곤 했지

구름들이 날아다니다 대열을 놓친

철새처럼 몇 어절씩 빠져나갔고

그날 나는, 가을과 저녁의 페이지에

모음 하나가 되어 한 형태소에 들어갔다

삶이란 서로 가슴에 활자를

새기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조그맣게

허밍을 내는 것을 좋아하던

한 사람을 기억한다 그의

목소리는 비닐표지처럼 반짝였다

그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나는

시를 썼다 바람이 조금 열린

창틈 사이로 불어온다 이제

당신은 창밖이 궁금해질 것이다

어순에 맞게 차례대로 흘러가고 있을

계절들 굳이 비파나무 아래서

시를 쓰지 않아도 형광등은

가르랑거리고, 단음계의 노래를

몇 소절 부르지 않아도

한 페이지가 넘겨지더라

시옷 자음처럼 쓸쓸한,

턱을 괸 당신의 옆얼굴

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경문經文을 보다 / 김기찬

고사포 젖은 모래바닥이었다

몇 가마니는 족히 흩뿌려 놓은 듯 한 저, 서해비단고둥들

꾹꾹, 꾹꾹 눌러 박은 압정들 같다

참 속 터지게 느려빠졌다. 일없이 일없이 배밀이로 무슨 상형의 기호같은 문장들을 또박또박 들춰내고 있다

단 한 줄의 내용도 해독할 수 없는 필적들

빼곡하다, 빼곡한 내소사 전나무 숲을 막 튀어나온 건 커다란 원의 목탁소리 떼였다

,, 구르르르르르르르르 굴러와 스윽, 법화경절본사본*을 펼쳐 보이는 것 아닌가

세상에! 저것들 봐라,

와이셔츠 단추처럼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것들이

77권책에서 빠져나온 경문이라니!

일자일배一字一杯의 글자들이라니!

, 온통 모래바닥이 한 채의 경전經典이로구나

그 앞에 세상 격랑들 다 몰려와 팍, 무릎 꿇고 있었다

무릎 꿇고 납작 엎드린 채 손바닥 펴, 치켜 올리는 것이었다

사랑아,

저런 전심전력全心全力이 없었다면

저런 곡진曲盡함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저토록 큰 말씀을 얻을 수 있었겠느냐

두 손 바짝 들어올린 물손바닥 위로 때글때글한 문자들 구름구들장을 들춰내며

,, 구르르르르르르르 또, 몰려간다.

* 조선 태종15(1415)이씨 부인이 그의 양인 유근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일자일배의 지극정성으로묘법연화정을 필사하여 77권책으로 엮은 습본 보물 제 278호 현재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누에

누에는 기차와 닮았다

한 마리 길다란 누에가 혼신의 힘을 다해

뽕나무 가지를 오르듯

기차는 뽕잎 갉아먹는 소리를 내며

멀리서 레일 위를 밟고 온다

 

실크로드를 향해 가는 동안

()에서부터 오령(五齡)역 까지는 한 달이 걸린다

 

마침내 기차가 어둠의 터널에 들 듯

칸칸마다 투명한 누에는 허공 속 암흑에 든다

 

바람도

흙도

물도

마지막 출구도 없는, 암흑의 껍질은 희고 둥글다

 

갑자기 나는 숙연해진다

저 한 평의 암흑을 짓고

아버지는 83년을 웅크렸다 나비가 되었다

 

바람의 모습 / 권도중

바람이 가다가 맺히면 망울 되고

아름다운 생각마다 피어나면 꽃이다

흘러서 가는 바람은 아픔 속도 지난다

 

사람아

슬퍼 찢긴 갈대밭도 지나왔다

꽃도 울음도 모습 바꾸는 구름처럼

마음 밖 마음 속으로 그 사이를 흐른다

 

생명이 순수할수록

생명이 순수할수록 자주 멍이 들 듯이

사람도 순수할수록 꽃처럼 멍이 든다

 

몸속에 쌓아둔 꽃은 무엇으로 못 지운다

잘 살아 아프지 않고 꽃 지고 철이 가도

못 잊는 세월에는 다친 디엔에이가 있다

상처도 깊은 사랑은 찾아가는 힘이 세다

 

 

접촉사고 / 황진성

 

앞 트럭에 돼지들 가득 실려간다

소풍 가는 아이같이 시끌벅적 떠든다

바깥으로 얼굴 내밀려 서로 밀치며

귀를 세우고 쫑긋거린다

킁킁 세상 냄새를 맡는다

돼지머리에 머우꽃을 달면

머우꽃대 두반장 요리가 되는데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다가,

돼지도 돼지고기는 먹지 않는다던데

모르고 동족을 먹은 돼지

다음부터 굶다가 죽는다던데

잡식성인 사람

닥치는 대로 먹다 소화불량 걸려

병원 가고 경찰서에 잡혀가고,

예쁜 분홍빛 귓바퀴

나도 모르게 쳐다보다가

돼지들의 수다를 엿듣다가

!

운전 경력 이십년 붉은 줄을 그었다

 

바람벽 / 이사랑

누구를 기다리는지

담 너머 골목길 넋 놓고 바라보는 해바라기

고개 아프겠다

가슴 활짝 열어놓고, 녹슨 철대문은

또 누구를 기다리지?

마을회관으로 출근하시는 울 엄니가

하시는 일은 고작,

화투판 한 쪽에서 조용히 주무시는 일

시끄러운 세상이 듣지 말라고 귀를 막았고

어지러운 세상이 보지 말라고 눈을 감긴

당신 소원은 잠자 듯 가는 것

남들은 돈 몇 푼에 핏대 올리지만

울 엄니가 어쩌다 화투를 치면 웃음판이다

잃어주며 즐거운, 욕심 없는 울 엄니

십 원짜리 웃음으로 하루해가 저물면

울 엄니의 속 깊은 친구는 바람벽이다

영감은 참 행복하시겄수

나랑 같이 가지 머시 그리 바쁘다고,

벽에도 귀가 있어 그 말씀 알아듣는다

사람이 그리운 날은 이놈, 이놈!

컹컹 짖어대는 애꿎은 개만 나무라시다

텔레비전 저 혼자 떠들든 말든

바람벽을 마주보고 주무시는,

푸른 양철지붕 아래 울 엄니

 

만두를 빚으며

섣달그믐 날

밀가루 반죽처럼 만두소처럼

찰지게 섞여서 살자며

세 동서가 모여 자기 모습대로 만두를 빚는다

소리 없이 끓는 남자와 살면서 뽀글거리는 여자들

해묵은 불평과 불만 칼도마에 올려 다지고

꼭꼭 쥐어짠 뒤, 팍팍 치대고 나긋나긋 주물러

만두소와 피를 만든다

조심!

흩어진 가족들 뭉치고 섞일 때

가슴에 담고 속 터질 일 없도록, 그래

나를 곱게 접어 전부를 감싸는 일이지

입술은 얌전히 다물고 귀는 정성스레 모아야지

일 년에 꼭 한 번은

나를 반죽하고 다져서 곱게 빚은 다음

푸욱 쪄야 해

암만 그래야지

만두가 수다스런 내 입을 꽉 틀어막는다.

 

박꽃

우리 집 초가지붕 위에는

그믐밤에도 박꽃이 피어 환했다

밤마다 아무도 몰래 하얀 꽃이 피더니

보름달이 딱 여섯 덩이 열렸다

아버지는 산바라지 하듯 정성스레 만삭의 달을 하나씩 따다가

반으로 쪼개면 반달 속에서 박 속 같은 웃음이 쏟아졌다

팔 뻗으면 손이 닿는 처마 밑에는

식솔들이 고드름처럼 열려

대들보에 집을 지은 제비네 식구들과

바람벽을 사이에 두고 한 지붕 아래 살았다

어느 날 아침

첫사랑에 속울음을 울던 언니

베게 맡에 빈 약병 한개 얌전히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들판의 풀들을 손톱이 빠지도록 쥐어뜯었다

그밤 아버지는 달덩이 같은 언니를 달구지에 달달 태우고 가더니

산의 가슴팍에 바람도 모르게 묻었다

이듬해 달씨 받아놓고

달빛을 좇아 총총 떠나신 아버지

해마다 박꽃은 여전히 피고 피고 지는데

계절이 오가는 동안 다들 제 길로 떠난 뒤

매미 껍질처럼 고향집에 혼자 남은 어머니

아직도 가슴을 열고

언니 보듯 하얀 박꽃을 바라보신다

 

 

소가 넘어갔다 / 김세형

소가 넘어갔다

어떤 날은 봄 아지랑이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산등성 너머로 소가 넘어갔다

또 어떤 날은 퍼붓는 장맛비 폭포수를 뚫고 산등성 너머로 소가 넘어갔다

또 어떤 날은 가을볕 따가운 산등성 너머로 소가 넘어갔다

또 어떤 날은 눈발 하얗게 휘날리는 흰 산등성 너머로 소가 넘어갔다

난 그때마다 소 잡으러 소 달음박질쳐 산등성 위로 올라갔으나 번번이 허탕이었다

나의 全生이 온통 견우見牛뿐이었다

소를 처음 놓친 후, 견우牽牛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소가 소를 놓친 고삐 풀린 한심한 세월이었다

내 평생 소가 넘어갔다

내 평생 속아 넘어갔다

난 평생 소가 넘어가는 것을 보며 속아 넘어갔다

한 손엔 늘 고삐 풀린 내 생애만 달랑 들려 있었다

소가 속아 넘어갔다

한바탕 꿈이었다.

 

틈새

세상 모든 틈새에는 틈새가 산다

틈새에 틈새가 숨어 산다

틈새가 틈새의 집이다

그 틈새들마다 틈새들의 여린 날갯짓들로 부산하다

세상의 모든 틈새들을 벌려 놓기 위해서다

세상 모든 틈새들 속에 숨어 사는 틈새들이

어느 순간, 일제히 날갯짓을 하여

저마다 자신들의 틈새를 벌려 놓는 날,

틈새들이 살던 틈새들은 일제히 사라진다

틈새들 속에 살던 틈새들이

구만리장천의 날개를 달고 자신이 살던 틈새들과 함께

구만리장천으로 훨훨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이 태어난 틈새 말고

당신이 언젠간 돌아갈 그 거대한 틈새 없는 틈새를

당신의 마음의 틈새로 들여다본 적 있는가?

 

기타 등등 · 1/ 김경선

그 무리의 일부일 뿐 단 한 번도 지명 된 적이 없는 내 이름은 으깨지고 치대져 반죽이 된다 수많은 기타에 섞인 AB 혹은 C 등등, 나는 아름드리 그늘 뒤에 가려진 잡목, 잡초에 묻힌 들꽃, 언제나 나는 부록이다

한때 주연을 꿈꾼 적 있지만 끝내 만약은 오지 않았다 덤으로 대충 넘어가는 나날이었다 이름 없는 배우의 연기처럼, 이름 없는 가수의 노래처럼, 무명시인의 서러운 시집처럼, 나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어,

누군가 삼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뒤에 내 입은 사라져버렸다 누군가 입을 달아주기 전까지 나는 삼류로 구별된다 무명과 삼류 사이를 오가는 동안 나는 거리를 배회하는 미아, 검색되지 않는 기타 등등으로 요약된다

 

기타 등등 · 3-그림자

작전개시!

나는 그를 따라붙는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종일 미행한다

그가 내 심장을 밟는다

밟혀도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

 

나는,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사철 검은 옷만 입는다

나는 모든 사물을 통과하고

몸을 수시로 늘리거나 줄인다

주위가 어두워지면 투명인간이 되기도 한다

 

그에게 나는,

슬픔도 고통도 없는 존재

내 발소리를 한번도 듣지 못한 그는

나를 봐도 금세 잊는다

내 음역에 들지 못한 그는

내 수신호를 깨닫지 못한다

 

나는 그늘 안에 잠든다

그의 영혼에 세들어 산다

 

그는 단지 내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를 그림자라 부르는 그를

나는 껍데기라 부른다

우리는 서로 착각하며 공존한다

 

늘은 햇빛을 불러 외출을 한다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그가 발걸음을 옮긴

 

기타 등등 · 4 -방석 놀이

어떤 녀석은 많은 돈을 지불하고 낙하산방석이 되었다 힘센 방석들은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 밑에 깔린 방석들 산소부족을 호소한다 긴급 투입된 산소공급기도 맥을 못 춘다 비정규직연구소, 베트남 필리핀 중국 방글라데시에서 싼값에 방석을 다량 수입,

거리, 거리 방석이 넘쳐난다 꽃방석들은 술집과 노래방으로 흩어지고 붉은 머리띠를 두른 낡은 방석들이 광장에 모였다 방석 하나가 제 몸에 불씨를 붙인다 젖은 방석의 매캐한 연기가 목젖을 누르며 타오른다

편파적인 일조량, 적색경보는 해제되지 않는다

물속으로 방석 하나가 던져진다 한강을 찾는 방석들이 늘어나고 둔치에 벗어 놓은 신발이 발견되었다

방석들이 밀거래되고 약삭빠른 방석은 적색 띠를 피해 청색 띠를 어깨에 둘렀다 잠들지 못하는 하청업자들이 조는 틈을 타 카시미론 솜을 취해간 대규모 방석공장은 여전히 성수기다

시인의 말-전복을 꿈꾸며

관념을 뛰어넘어 전복을 꿈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는 주류와 비주류는 언제고 전복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주류와 비주류가 왜 구분이 되어야만 했을까. 나누기 좋아하고 위에 서길 좋아하는 사람들의 관습이 만들어낸 잣대는 아닐까.

어디에서도 검색되지 않는 기타 등등,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이 세상은 주연보다 조연이 많고 조연보다 더 많은 것이 엑스트라이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존재한다면, 소수는 다수의 존재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내게 있어서 시 작업은 관념을 뛰어 넘는 일이었다.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관념에 발목이 잡혀 자유롭지 못했고 틀에 박히고 구태의연한 언어들 속에서 뒹굴었다. “기타 등등을 쓰면서 들이대는 잣대의 원천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발견했다. 세상에는 많은 편견의 잣대가 선악을 가르는 일들을 하는데 모든 관념을 탈피했을 때 사회적 통념을 넘어 비로소 자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 작업은 내게 자유로운 영혼과의 소통을 추구하게 한다. 오늘도 내일도 또 다른 관념은 나의 발목을 붙들겠지만 나는 다시 전복을 꿈꾼다.

 

 

여을 / 남유정

설악을 잘 안다는 사람에게

설악이 가장 아름다운 때가 언제냐고 묻자

몸을 불리던 폭포 소리가 수척해지고

이파리 가장자리가 고요히 붉어지는

여을이라고 했지요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사이

여을

가만 더듬어 보니

골짜기가 서늘히 깊어지는 때도

여을

산사나무 열매가 몰래 붉어지고

당신에게 가는 길 모롱이

여뀌풀숲에서 풀벌레가 우는 때도

여을

 

눈매 가득 강물 소리를 담아 나르는

새들의 날갯짓이 분주한 아침

등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억새를 켜고 지나 한바탕 허공의 현을 울리는

 

, 여을이지요

 

/ 박남희

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직 전하지 못한 편지가 있습니다

너무 길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를 저는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모과나무 밑 / 김충규

부음이 왔다 뼈를 무너지게 하는 어떤 부음에 비하면 견딜만하다

모과나무에 모과가 열리지 않는다 백 년 동안이나

앞으로 백 년이 더 오기 전에 모과나무와 나 둘 중 하나는 사라질 것이다

내가 먼저 죽으면 모과나무가 가장 먼저 부음을 전해들을 것이다

고양이가 자주 모과나무 밑에서 밤을 보냈다

아침에 고양이가 머문 자리에 새털이 널려 있곤 했다

그 깃털을 모으며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까

그 무엇을 누구에게 줄까

부음의 주인에게 마지막 선물로 줄까

하룻밤쯤은 고양이를 품에 품고 잠들어보고 싶은 모과나무 밑,

고양이가 피 한방울 안 튀게 어떻게 작은 새를 처리하는지

물어보고 싶은 모과나무 밑,

그런데 고양이는 한 번도 그 광경을 들킨 적이 없다

고양이에게 날개가 달렸다고 믿는 아침이 늘어갔다

내 무릎 속에서 시큰시큰 앓는 새를 고양이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다

그 새는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올 때면 더 심하게 앓아

그때마다 진통제를 먹어야 했다 다행히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올 땐 고양이도 모과나무 밑에 와

잠을 청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날은 새도 오지 않았으므로

나도 걸음을 걷는 게 힘들어 문을 꼭꼭 닫아놓고 밖을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런 날 고양이는 어디를 서성거리는 걸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날개를 펴고 어둠 속을 날아다니는 걸까

새로운 부음이 왔다 뼛속에 먼지 한 점 얹히는 듯 했으므로

뼈는 무사했고 내 무릎 속의 새가 앓는 소리 대신 퍼덕퍼덕 날개 펴는 소리를 냈다

모과나무 밑, 새를 품에 품고 고양이가 식어 있었다

 

뼈의 기원 / 안병호

문득, 뼈가 시려오면

내 뼈의 아득한 시원을 찾아

눈과 바람의 길을 걸어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이

대체로 나의 문명이지만

그것은 비석에 판각되거나 정의되어진 것만이 아닌

단단한 그 무엇이 내 속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과 말 속에도 뼈가 있다하고

문중의 아재 한 분은

바람조차 투명한 뼈를 지니고 있다하므로

뼈는 삼라만상의 근원이다

모든 족속은 그 조상으로부터

몇 개의 맑고 흰 뼈를 물려받아 사는 동안

또 한 생이 고요히 마감되는 것이다

"뼈가 시릴 적엔 몇 모금 음복술로 덥히면서 오백년 전, 통정대부 할아버지를 만납니다. 삼십대에 무슨 사화로 졸()하신 당신, 처자식은 관노가 되고 그 때 당신의 눈물은 눈발이 되어 사방 백리까지 날렸습니다. 그때부터 당신은 뼈마디마다 수수눈꽃을 피우면서 아버지와 저의 뼈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눈발 속에도 맑은 뼈가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아버지가 졸()하시던 그 때처럼"

아버지는 신발공장 공원에서 출발하여

생의 마지막 즈음 공사판 반장직에 올랐는데

젊은 나이에 병으로 졸()하셨다

그 때 아버지는 뼈만 남은 문양으로

어린 내 손을 꼭 잡은 채, 흐린 물기를 보였는데

물기는 뼈를 타고 흐르다 서서히 결빙되고 있었다

어린 나는 앙상한 뼈의 모습이

너무 무섭고도 생경해 입관 하던 날조차

차거운 뼈를 따습게 데우지 못했다

그 날에도 먼 곳에서부터 눈발이 날려 왔고

 

오래지 않아 강아지처럼 여린뼈를 가진

내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 오늘 밤 수북이 눈이 내립니다. 눈송이 송이마다엔 당신의 눈물이 담겨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북편에서 날리는 눈발에는 종가에 계자로 와 당신 집안은 절손 된 9대조 조부님의 눈물도 보입니다. 저와 아이는 오늘 같은 밤이면 뼈를 살포시 맞대고 세상을 꿈꿉니다. 그래서 눈 오시는 밤은 참으로 마음 따습습니다."

 

뼈가 잘 맞물려서 사계절을 보냈다

펼쳐진 시간 속에서

나의 뼈는 좀 더 유연해지고

아이의 뼈는 좀 더 옹골차졌다

몸속의 뼈들을 가지런히 정돈하여

순하게 낮추는 오늘,

뼈마다 하얀 풀꽃이 피어난다

 

향불을 피우는데 음력 시월 을해(乙亥)

이른 눈이 축문과 함께 투명하게 날린다

 

기서유역(氣序流易)

상로기강(霜露旣降)

첨소봉영(瞻掃封塋)

불승감모(不勝感慕)

근이(謹以)

청작서수(淸酌庶羞)

지천세사(祗薦歲事) (),

()

 

"당신들께서는 하얗게 뿌려지는 눈으로 혹은 투명한 축문의 곡조로 살아오십니다. 맑은 눈발 속 나폴 나폴 떠다니는 어린 것이 또 다른 뼈의 기원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뼈를 추스르며 어린 뼈를 돌보려합니다. 아이를 가만히 껴안아봅니다."

2010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르골 / 이 슬

나무의 뿌리들이 태엽을 감고 있는 시간

누군가 상자뚜껑을 열듯 소리를 쏟아내는 나무들의 춤

소리가 멎을 때까지 흔들리는 일에 한창이다

울긋불긋 어지러운 현기증을 다 털어낸 자리

나뭇가지를 뛰어 다니며 놀던 수액들은 모두 바람이 된다

 

앞뒤를 보여주며

숨기는 것 없다는 듯 보여주는 엽록의 투명한 연주가 길다

잎의 사이사이마다 음계가 반짝 거린다

 

새들이 앉았다 간 나무 밑 마다

불안한 노래가 가득 떨어져 있다

뿌리가 감고 있는 것은 깊은 어둠이다

칸칸의 어둠에 앉았다 날아가는 새들

가끔 잎을 털어내는 환한 시간이면 날아오르는 새들이 있다

 

가장 밝았던 한 때

꽃잎의 치어들을 다 허공에 날려 보내고

나무는 지금 푸르게 비어 있다

꽃의 그늘이 진 자리에 초록의 소리가 가득 하다

 

바람의 흔적이 가득한 나무 속

나이테를 돌아 풀어지는 태엽

평생 춤출 곡이 빙빙 돌아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푸른 치마를 입고 거꾸로 서서 흔들리는 듯

바람이 상자를 닫는 시간

음계들이 떨어진 나무 밑에는 그늘도 다 졌다

나선형의 나이테 그 길이만큼 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10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팝나무에 비 내리면 / 황종권

당신은 육지를 떠나기 전이면 뒤뜰에 있는 이팝나무 아래로 불러내곤 했지요. 이팝나무 한 뼘 위를 회칼로 그으며, 그만큼 자라면 온다고 무슨 굳센 다짐처럼 말하곤 했지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팝나무 아래에서 키를 재어 보았는데요. 키 대신 등짝에 파도소리가 자라곤 했었지요. 해가 기울수록 길어지는 그늘은 내가 미리 살아버린 주름이었을까요. 이팝나무는 꽃을 버릴 때마다 나이테가 늘어갔던 거예요.

먼 바다에서 당신배가 물결을 가를 때마다 일어나는 물살이, 제가 엉덩이 깔고 앉아 있는 포구 끝에도 닿는 것일까요. 하얗게 터지는 물살에선 목욕탕 스킨냄새가 나네요. 바다가 물결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물결이 바다를 그물처럼 가두고 있단 생각을 했어요. 바다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다의 것이었거든요.

어둠이 달을 꽉 가두고 있는 밤은 비가 내렸지요. 어김없이 부엌은 생선 굽는 냄새에 몸살을 앓았고요. 저녁상에 올라 온 민어를 뒤집다가 손등을 얻어맞기도 했어요. 하늘에서도 물고기가 튀는 것일까요. 유리창에 맺히는 빗소리에선 심한 비린내가 나요. 그런 날은 이불속에서 뒤척거리는 일도 조심스러워요. 나는 당신에게 수평선을 그어 주던 아이였을까요.

당신의 주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달의 인력이 오늘밤은 시린 손가락으로 내 발목을 잡는 걸요. 밀물 든 바닷가에선 빗소리가 주저 앉고요. 잃어버린 당신의 키는 언제쯤 만조를 이룰 수 있을까요. 사리*와 같은 당신과 나와의 거리에선 빗소리가 쌓이지요. 비가 오는 밤은 달이 이빨이 아픈 꿈을 꾸는 건가 봐요. 이팝나무에 빗소리를 그어놓으면 우린 한 뼘 지워질 수 있을는지요.

*사리 : 달은 음력 한 달을 주기로 지구 주위를 공전하면서 보름과 그믐에 태양, 지구, 달이 일직선 위에 있게 되는데 이때는 태양의 인력이 합쳐지면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크게 되며 사리라고 한다.

[2010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차우차우 / 김진기

사자개 차우차우

긴 갈기를 바람에 빗질하며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칠장사 참배객의 발길이 어스름을 따라 사라지고

스님의 독경 소리 어둠에 몸을 누이면

티베트에서 온 차우차우

몰래 경내를 빠져 나가 칠현산에 오른다

바라보면 멀리 눈 덮인 고향이 보인다

달라이라마가 포탈라 궁을 버리고 망명길에 오른 이후

그는 이곳으로 흘러왔다

호기심 어린 눈들이 발소리 지우면서 다가오면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듯

괜찮다 괜찮다 가벼이 꼬리 흔든다

꿈속에서나 만나는 그리운 히말라야 캄파라 패스를

이불처럼 두른 라싸 포탈라 궁

누가 구름 위에 백홍의 궁전을 지었나

돌아가는 마니차는 눈빛에 반짝이고 막 피어 올린 향내가

미로 같은 포탈라 경내를 적신다

얼어붙은 티베트 고원을 오체투지, 몇 달을 넘어온 장족이

다리를 질질 끌고 도착할 때마다

차우차우 맨발로 뛰어 나간다

고행을 먹고 사는 것인지

갈라터진 손바닥 무릎에서 흐르는 피, 내세의 제단에 올리면

신은 때때로 길을 비켜 준다

소문은 바람을 타고 먼저 왔는지

칠장사 차우차우가 도착하기 무섭게 라싸 차우차우들이 몰려나온다

부여잡고 얼굴 부비는 뭉클한 안부가 골목에 흥건하다

[2010 경인신춘문예· 시 당선작]

 

직선의 방식 / 이만섭

직선은 천성이 분명하다 바르고 기껍고

직선일수록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는 곧 정직한 내력을 지녔다 하겠는데

현악기의 줄처럼 그 힘을 팽창시켜 울리는 소리도

직선을 이루는 한 형식이다

나태하거나 느슨한 법 없이

망설이지 않고 배회하지 않으며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단순한 정직이다

밤하늘에 달이 차오를 때

지평선이 반듯하게 선을 긋고 열리는 일이나

별빛이 어둠 속을 뻗쳐와

여과 없이 눈빛과 마주치는 것도

직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령,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세우는 일은

직선의 힘을 얻어

허공을 가르며 쏘아대는 직사광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있다

그로 인하여 빨래는

마음 놓고 햇볕에 말릴 수 있을

것이다

바지랑대는 빨랫줄로 말미암고

빨랫줄은 바지랑대 때문에 더욱 올곧아지는

그 기꺼운 방식

[2010 경향 신춘문예 시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