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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금지된 사랑’은 왜 더 뜨거울까

by 이성근 2024. 7. 24.

금지된 사랑은 왜 더 뜨거울까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과 리엑턴스효과

Love Me, Please Love Me (youtube.com)

 

사랑이 절정에 이를 때 눈이 멀고, 귀가 닫긴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주변의 시선은 거리낄게 없고, 어느 누구의 조언도 들리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오직 그고, 들리는 것은 오직 그의 음성이다. 시간은 그렇게 멈춘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소설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에 미쳤다고 해도 좋고, 사랑에 중독됐다고 해도 좋다. 저자는 이 감정을 단순한 열정(Passion Simply)’이라고 표현했다. 이 두 단어는 소설의 제목이 됐다. 사랑이 절정인 단계에서 세상은 단순해 진다. 그가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 세상은 2진수처럼 0 아니면 1만 존재할 뿐이다.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단순한 열정>은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는 한 여자의 러브스토리를 담고 있다. ‘의 의지와 욕망, 행동은 모두 A와 관련된 것 뿐이다.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A와 관련된 것이 아니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A가 걸어온 전화 벨 소리를 듣지 못할까봐 진공청소기도 헤어드라이어기도 사용하가 꺼려진다.

A가 전화를 걸어와서야 비로소 나는 제정신을 찾는다. 한 시간 뒤 그가 올때까지 유리잔을 꺼내놓고 매니큐어를 바르고 집을 정돈하며 기다린다. 화장을 하고 머리손질을 끝낸뒤 A와 나눌 대화와 몸짓을 상상한다. A와 보낼 뜨거운 한나절은 나의 인생에서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죽어도 상관없는 열정

나는 A와의 에로틱한 사랑을 감추지 않는다. A가 떠난 뒤 음식부스러기가 남아있는 접시,담배 꽁초가 수북히 쌓은 재떨이, 방바닥과 복도에 흩어져 있는 겉옷과 속옷, 카펫에 떨어진 침대 시트마저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흔적이다. 나는 독백한다. 그 물건들은 하나하나 어떤 몸짓이나 순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쾌락의 시간이 끝나고, 몽롱한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면 나는 다시 A의 전화를 기다린다.

소설가인 나에게 A에 대한 열정은 한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같다. 몇달에 걸쳐 글이 완성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다한다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자료=픽사베이

하지만 나의 사랑은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대놓고 드러내기 어렵다. A는 외국인, 연하, 무엇보다 유부남이다.

나는 A로부터 꽃이나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때로 행동을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A에게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보내거나 선물을 할 수도 없다. 그 사람이 한가할 때나 만날 수 있다. 그 사람을 만난 뒤에는 나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지 신경쓴다. A에게는 아내가 있다.

아들에게는 A와의 관계를 말했다. 하지만 아들이 나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아들은 엄마를 수고양이를 따라다니는 발정난 암고양이 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들에게조차 떳떳할 수 없는 사랑이다.

리엑턴스효과, 금지된 것을 탐하다

정상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집착이라는 점에서 나의 A에 대한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과 닮았다. 치명적인 사랑 중에는 때로 이루어질 수 없는사랑이 많다. 우리는 왜 금지하면 더 갖고 싶어질까. 이는 심리학과 행동경제학에서 리엑턴스 효과로 설명한다.

리엑턴스효과(reactance effect)란 금지된 것일수록 더욱 소유하고 싶어 하는 심리다. 리엑턴스효과는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위협당을 때 그 제한에 저항하려는 동기를 설명한다.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사랑이 외부요인으로 인해 제약을 받으면 자신의 사랑을 자유롭게 표현하거나 충족하는데 어려움을 갖게 된다. 이때 자신의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해 제한에 저항하며 자신의 감정을 더 강렬하게 느끼고 표현하려는 행동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더 깊은 사랑에 빠지거나 집착할 수 있다.

자료=픽사베이

미국의 심리학자 샤론 브램(Saharon Brehm)은 다른 높이의 벽 위에 장난감 두 개를 놓아두고 아이들의 반응을 관찰했다. 아이들은 손쉽게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낮은 벽 위의 장난감에 대해서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뛰어올라야만 할 정도의 높은 벽 위의 장난감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주변을 맴돌며 만지고 싶어했다고 한다.

백곰효과, 반동효과, 칼리굴라 효과

사회심리학자 다니엘 웨그너(Daniel Wegner) 하버드대 교수의 흰곰 실험도 비슷하다. 그는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A그룹에게는 흰곰을 생각하라고 했고, B그룹에게는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뒤 그들에게 흰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고 했다. 종을 친 횟수가 많은 쪽은 B그룹이었다. 이를 백곰효과 혹은 반동효과(rebound effect)라고 부른다. 어떤 생각을 억제하면 그 생각을 더 많이 하는 현상으로 회피하려는 생각과 억압이 더한 집착을 낳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리엑턴스효과와 닮았다.

금지가 되레 집착을 불러 일으킨 사례는 현실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1979년 미국 보스턴시는 칼리굴라 황제의 생애를 그린 영화 <칼리굴라>의 상영을 금지했다. 폭군으로 알려진 로마제국 제3대 황제인 칼리굴라(본명 가이우스 케사르)의 이야기로 잔혹한 장면과 성적묘사가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시의 상영금지령은 오히려 시민들에게 폭발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상영이 허용된 도시에서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 이 헤프닝은 칼리굴라효과라는 용어도 만들어냈다.

소비사회에서는 금지된 욕망도 마케팅에 이용된다. 선착순 혹은 한정판으로, 혹은 매진임박이라는 문구는 리엑턴스효과를 겨냥했다고 보면 된다. 유명 브랜드를 팔다가 불황으로 문을 닫게됐다는, 365일 폐점 중인 가게도 있다. 앞으로 살 수 없다는 제약은 소비자에게 상품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다.

아니 에르노 소설 <단순한 열정>자료=문학동네, YES24

여러가지 제약이 바로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었다

나의 독백이다. 나 스스로도 자신의 사랑의 원인을 아는 셈이다. 하지만 원인을 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원인에 대한 분석을 지금 상태를 스스로 설득하는데 쓴다. 그 사람이 자신을 욕망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고 한다. 그는 외국인이라 자신과 정서가 다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가 나로 인해 곤란해 지는 것은 싫어 더 배려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그와의 사랑이 이런 상태라도 오래 유지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A는 자신의 고국으로 떠난다. 6개월이 지났다.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에 온몸이 아프다. 그와의 기억 하나하나가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와 함께 있었던 그시간은 삶이 아름다웠던 그 시절이 됐다.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은 그에 대한 사랑을 최고조에 이르게 한다. 이때 그는 <단순한 열정>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자료=픽사베이

써놓은글을 찬찬히 읽다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열정 속에 하루하루 살아갈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들이다.’

나는 A를 통해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삶의 사치란 모피코트를 입거나 바닷가 별장에서 사는 것이 아닌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질문 하나. 만약 외부적 제약이 없는 사랑이었다면 나는 A를 그토록 사랑할 수 있었을까. 나 역시 지난 2년간 행동이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이었다고 고백했다. 사랑은 참 미묘하고 복잡하다./박병률 기자 경향 24.7.24

하나의 사랑 이야기가  잠들었던 감정을 건드렸다.  작가의 마음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면서 묻어 둔   詩들을 다시 꺼내 보았다. 이 시들을 어쩔거나 ...'  두 편의 시와 두 남자 그리고 성 (tistory.com)

 

두 편의 시와 두 남자 그리고 성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살살 뛰고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시가 있다. 전북 고창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의 서정주문학관엘 들렀을 때다. 폐교된 선운분교를 살짝 개조해 꾸민 문학관 1층의

bgtkfem.tistory.com

에서 당대의 시인 두 남자처럼 죽도록 꺼집어 내지 않을수도 있다. 한때 잠시 시집으로 묶어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아마 그리 된다면 스스로가 정직해 질 수 있겠만 그 이면의 波도 각오해야 한다. 현재로선 감당하기 버거워 판단을 보류하고 있다. 추정컨데 이 생각 또한 며칠이 지나면 잡다한 일상에 파묻혀 자동 보류상태로 전환될 것이다. 두 시인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아니 에르노에 가깝다고나 할까 ...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줄거리와  결말, 소살같은 연애 이야기

작년 가을  아니 에르노가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적잖이 놀랐다. 내 기억 속에 그녀는  성적으로 대담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고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견은 내가 아니 에르노가 쓴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자전적인 소설 <단순한 열정>(최정수 옮김, 문학동네, 2001)과 일기를 엮은 <집착>(조용희 옮김, 문학동네, 2004), 단 두 편만 읽은 결과였다.

단순한 열정은 48세였던 작가가 35세였던 파리 주재 소련 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과의 불륜을 그린 연애 이야기이고, <집착>은 그 시기에 그녀가 썼던 일기를 그대로 출판한 책이었다.

당시 두 아들이 있는 이혼녀였던 아니 에르노는 작가이자 교수였고, 외교관 S는 유부남이었다. <단순한 열정> 줄거리에는 프랑스 작가들의 소련 여행을 수행했던 그와 레닌그라드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파리로 돌아와서도 불륜을 이어가고 그가 소련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녀의 내밀하고 고통스러운 연애 감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소설 단순한 열정의 분량은 단 74페이지에 불과하다. 그 짧은 분량에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몸을 관통했던 정욕의 실체를 어떠한 문학적인 미학이나 형이상학적인 은유 없이 사실 그대로만 기록했다. 그것은 놀라운 자기 관찰이었고 자전적 글쓰기의 새 지평이었다.

은밀한 성적 사생활이 날 것 그대로 담긴 단순한 열정은 출판되자마자 프랑스에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나 또한 적잖은 당혹감과 혼란에 휩싸였던 기억이 난다. 문학의 경계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고, 과연 어디까지 쓸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정직하게 바라보고 어디까지 기록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했다.

소설가 아니 에르노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한 열정이 가지는 파괴력이 여기에 있다. 단순한 열정은 허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기도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형식의 소설일 수도 있다.

작가는 억압과 차별, 부끄러움에 맞서는 용기로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썼다. 그녀의 작품에는 대학 시절 원치 않은 임신과 낙태, 천박한 부모, 가부장적 남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단순한 열정과 집착은 그중에서도 자신의 몸을 통과해간 정염을 그녀만의 문장으로 기록해 나간 소설이다.

단순한 열정 줄거리

'올여름에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 소설 단순한 열정의 첫 문장이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성적인 사생활을 기록하는 첫 문장으로 이 문장을 썼다. 작가는 이어서 자신이 본 그 영화를 묘사하고는 이 작품을 쓰는 자신에게, 또 단순한 열정을 읽는 독자들에게 경고한다.

"아마도 이번 글쓰기에서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의 유보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아니 에르노는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고 고백한다.

그 남자는 이브 생 로랑 정장과 세루티 넥타이, 그리고 대형 승용차를 유난히 좋아하는 속물이었고, 출세 지향적인 소련 공산당의 충복이었다. 프랑스 여성 작가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누가 그를 보고 알랭 들롱을 닮았다고 하면 굉장히 좋아하는 미성숙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아니 에르노는 그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화장을 할 때에도, 머리 손질을 할 때에도, 매니큐어를 바를 때에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도 오직 그만을 생각하는 지경에 이른다. 원고를 고친다거나 책을 읽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할 정도로 오직 그 만을 생각하는 나날.

그 남자의 욕정을 충족시키는 방법을 알기 위해 프로노를 보고, <육체적 사랑의 기교>와 같은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그 사람에게는 언제나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희망으로 새 옷이나 귀고리, 스타킹을 거울 앞에서 하나하나 몸에 맞춰본다. 여성 잡지에서 운세란을 찾아 읽으며 오늘은 그가 연락을 해 올까 마음 졸이며 기다린다.

아니 에르노는 그와 불륜의 관계를 지속하며 자신이 매우 소설적인 형태의 열정을 지닌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애인의 아내를 질투하면서도 그와 그의 아내, 셋이서 나란히 앉아 공연을 보기도 하고, 그와 정사 후 그 사람의 몸이나 옷에 자신의 흔적이 나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그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그녀는 자신과 정사를 나누며 보낸 오후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문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고, 그 이유를 찾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제약들이 아니 에르노의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 된다. 그러한 상태에서 작가는 단 한 가지 사실에만 집중한다. 그 사람이 나를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성기를 보면 당장에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진실이었으므로.

단순한 열정 결말

아니 에르노는 그의 전화만 기다리며 고통을 겪는 일이 너무 끔찍해서 그와 헤어지기를 원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럴 때면 그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을 생각하고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와의 만남을 계속한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사라지는 날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그 사람은 6개월 전 프랑스를 떠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새벽 두시면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조자 알 수 없었다. 온몸이 아파왔다.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고통은 도처에 있었다."(49)

그가 떠난 이후 아니 에르노는 하루하루를 시간을 헤아리며 지내게 된다. '그 사람이 떠난 지 이 주일째야, 이제 다섯 주가 지났구나, 작년 오늘은 내가 거기 있었지, 나는 이러이러한 일들을 했어'

아니 에르노는 주말이면 일부러 집안 청소나 정원 손질 같은 고된 육체 일에 매달렸다. 그가 떠난 지 두 달쯤 지난 후부터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에르노는 이제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그 사람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예전처럼 그녀의 일상을 집요하게 차지하고 있지도 않다. 그래도 그 사람에 대한 세세한 기억들이 문득 되살아나는 일이 있다.

그즈음 그가 떠난 이후 처음 전화를 걸어왔고, 그녀는 예전처럼 그가 본 적 없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그를 기다리다 하룻밤 정사를 하고 그의 호텔까지 차로 태워다 준다. 그녀는 낭테르에서 퐁드뇌유까지 가는 동안 빨간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뜨겁게 그를 껴안고 애무했다. 그남자는 다시 만나지 못했고, 그 사람은 사흘 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작가는 그날 저녁 홀연히 왔다 간 그 남자는 예전에 그가 여기 있을 때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람, 자신의 글 속의 그 사람이 아님을, 그 남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아니 에르노 프로필

194091일 프랑스 노르망디 소도시 릴본에서 출생, 이브토에서 가난한 소상공인 부모 아래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루앙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교사가 되었다.필립 에르노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들, 다비드와 에릭을 두었다. 남편과는 1980년대 초 이혼했다. 1971년 현대문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2000년까지 문학교수로 일했고, 이후 프랑스의 국립 원격 교육 센터(CNED)에서 23년 동안 일했다.

1974, 자전적 소설 <빈 장롱(옷장)>으로 등단했다. 1984<남자의 자리>로 르노드상을 수상, 2008<세월들>로 마르그리트 뒤라스 상, 프랑수아 모리아크 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2003, 그녀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상'이 제정되었으며 2011년에는 소설과 미발표 일기들을 수록한 선집 <삶을 쓰다>가 생존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되었다.

작품으로는 <부끄러움>, <한 여자>, <사건>, <단순한 열정>(1991), 일기 모음집인 <탐닉>(2001), <집착>(2001), <사진 사용법>, 대담집 <칼 같은 글쓰기> , <얼어붙은 여자>, <카사노바 호텔>(2020) 등이 있다. 수위가 상당히 센 일기 모음집 탐믹은 아래 링크 글 참조.

 

아니 에르노의 <탐닉>, 처연한 사랑에 대한 각주

<사건><레벤느망>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제78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단순한 열정>2000년 영화화되어 제73회 칸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우라나라에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20221일 개봉됐다.

아니 에르노는 2022"개인 기억의 뿌리, 소외, 집단적 구속을 밝혀내는 용기와 임상적 예리함"으로 프랑스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거주한 파리 교외의 신도시 세르지퐁투아즈에 살고 있다.

by 고니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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