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잔혹사 저자 김동춘|한겨레출판 |2013.01
저자 김동춘은 학생운동을 비롯하여 고교 교사 생활, 군 복무 등으로 20대를 보내다가, 뒤늦게 공부를 계속해 1993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한국 노동자의 사회적 고립」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주류 사회과학자들이 기피하는 노동운동, 한국전쟁 등을 연구해왔으며, 2004년에는 《한겨레》 선정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100인’에 뽑혔고, 2006년에는 제20회 단재상을 수상했다. 《역사비평》 편집위원과 《경제와 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정책위원장,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상임의원으로 4년 동안 활동하면서 우리 현대사의 해묵은 숙제들을 푸는 문제와 씨름했다. 현재는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황해문화》의 편집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독립된 지성은 존재하는가』, 『근대의 그늘』, 『전쟁과 사회』, 『분단과 한국사회』,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 등이 있다.
목차
추천의 글|정의를 모르는 국가에 대한 반격을 꿈꾸며 _박노자(오슬로 대학교 한국학 교수)
머리말|반성하지 않는 한 폭력의 과거는 반복된다
1부 정의롭지 않은 공화국은 가능한가
· 정의로운 자가 불행한 시대의 논리
· 권력에 대한 절대 복종이 국가 범죄로 이어진다
· 자유민주주의는 어떻게 독재와 결부되었나
· 대한민국 공인 소멸사 1: 공적 인간이 빨갱이가 된 불온한 시대
· 대한민국 공인 소멸사 2: '가짜 우익'은 어떻게 탄생했나
· 국가 폭력은 어떻게 사회 폭력으로 전이되는가
2부 군경이 휘두른 폭력 잔혹사
· 시국 치안의 무자비함, 민생 치안의 무능함
· 진압과 소탕의 정치학 1: 공권력에 대항하면 테러 세력인가
· 진압과 소탕의 정치학 2: 산으로 간 빨갱이들, 망루에 오른 철거민들
· 진압과 소탕의 정치학 3: 불법은 엄단하지만 시민의 안전은 모르쇠
· 경찰과 내통한, 배고픈 폭력 용역들
· 경찰 권력, 탈법과 불법에 연루되다
· 군인은 생각 없는 기계인가, 제복 입은 시민인가
· 기무사, 21세기 '군주'를 호위하는 근위병
· 백인 군인은 전쟁 범죄에 자유로운가
3부 국가 폭력에 물든 대한민국의 풍경
· 불경죄는 사라졌으나 그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 사유재산 약탈하는 국가의 폭력
· 사법 정의 없는 정치 재판은 현재진행형이다
· 국가권력의 이면, 불법 사찰의 역사
·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권력의 논리
· 인간 도살, 고문의 세 가지 논리
· 빨갱이는 악이다, 고문도 애국이다
· 평화의 이름 빌려 폭력은 반복된다
· 부끄러움 없는 권력, 공감할 줄 모르는 사회
출판사 서평
정의를 모르는 대한민국,
2012년 대통령 선거 이후, 많은 이들이 대한민국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과거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이는 우리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좀 더 밝은 미래를 기대하는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경제개발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거두긴 했지만, 그 빛나는 성과 뒤편에는 폭력으로 점철된 어두운 과거가 자리하고 있다. 김동춘은 과거를 조망해 국가 폭력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이 그림자가 지금까지도 짙게 드리워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즉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난 65년간 유사한 형태로 국가 폭력이 반복되었으며, 이런 통제와 억압의 분위기를 비단 어제의 일이 아닌 오늘의 일이라고 본 것이다. 세상이 좋아졌다고들 하지만,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의 논리는 여전히 유효하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과거의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다. “과거에 대한 무지가 현재의 이해 부족을 초래한다”는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의 발언과 일맥상통하는 진단이다. 과거사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지 못한 결과 또 다른 부정의가 이어지는 측면에 대한 문제제기인 셈이다. 여기에 덧붙여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국가 폭력이 과거의 방식을 바꾸어 현재에도 교묘하고 은밀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인권침해, 탈법, 부정의를 묵인하는 세태에 대한 따가운 일침이다.
김동춘은 힘이 정의 위에 군림해온 대한민국의 역사를 살피면서, 그 실상을 철저히 파악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으로 우리의 현재를 살핌으로써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국가 폭력의 문제를 냉철하게 진단한다.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폭력의 흔적들을 파헤치는 필자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힘은 곧 정의인가?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여러 논리들
국가가 폭력을 행사할 때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우선 상명하복의 ‘복종’ 논리를 들 수 있다. 명령 자체를 국가와 조직을 위한 것으로 바라봄으로써 벌어진 끔찍한 사건들은, 비단 대한민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수많은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에 자행된 나치의 학살이 그러할 것이고, 한국전쟁 당시 상부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해 군인들이 거창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 자신은 철저히 상명하복 원칙을 지켰으며 조직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고 발언한 이근안의 고문 사례 역시 그러할 것이다.
최근의 경우로, 이명박 정부는 명령 불복종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떤 경우보다 단호하게 대처했다. 비리 혐의로 도피한 국세청장을 비판한 국세청 직원, 전대미문의 금서 조처에 대해 헌법소원을 낸 군법무관 등을 파면한 사례를 보더라도 그러하다. 국민을 위한 치안보다 시국사범을 색출해내는 데 골몰하는 국가권력의 모습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국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국가보다는 조직폭력배 같은 조직에 어울릴 법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들은 과거와 현재를 망라해 우리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두 번째 논리는, 국가에 대항하는 폭력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공권력을 행사한다는 논리이다. 국가는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세력을 위협이자 도전으로 간주한다. 그러하기에 제주 4ㆍ3 사건 같은 민중 봉기는 철저히 진압되었고, 한국전쟁 때 인민군 부역자나 빨치산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도 무자비하게 토벌한 것이다.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명목 삼아 자행되는 이러한 폭력은, 공권력이 무력화된 것처럼 보이는 것을 국가권력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항 폭력에 반하는 공권력의 논리 역시 현재까지 반복되는바, 해외를 둘러보면 조지 부시의 이라크 침략은 테러에 대한 '예방 공격'으로 자행되었으며, 가까운 우리의 예로 생존권 보장을 주장하는 농성자들을 진압하다가 사상자를 낸 용산 참사를 들 수 있다. 망루에 올라갔다가 죽은 용산 농성자들을 한국전쟁 때 산으로 피란 간 빨갱이들과 오버랩시켜 바라보는 것은 과연 지나친 억측일까. 오히려 이들을 테러범이나 빨치산으로 규정한 후 정상 참작도 하지 않은 채 토벌과 진압의 대상으로 삼은 국가를 비판해야 하는 게 아닐까.
더욱 잔혹한 현실은,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이 사회 폭력으로 서서히 전이된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5공화국 시절까지 횡행했던 간첩 신고의 풍토, 국가보안법에 연루된 이들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까지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우리 과거의 어두운 단면들이다. 국가의 감시에 이웃의 감시와 고발이 더해진 셈인데, 물론 이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생명을 보존하려는 전략으로도 볼 수 있다. 이웃을 고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엄청난 위해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을 과연 과거지사로만 볼 수 있을까. 민주화 이후 과거와 같은 방식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중간의 입지를 견지한 이들은 아직 설 자리가 부족하며 이웃의 표적이 된 이들은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왕따’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성찰과 반성의 힘으로 국가 폭력과 결별하기
책의 곳곳에 수없이 등장하는 국가 폭력의 사례들은 잔혹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정의가 사라진 현실 가운데서 패배했지만 역사의 보다 넓은 시공간에서 절대로 패배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사연을 들여다보는 것은 희망의 씨앗이 될 만하다. 또한 대한민국의 지울 수 없는 폭력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반성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정의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반성하지 않는 한 폭력은 반복된다. 이 말은 곧 반성한다면 폭력을 멈출 수 있다는 뜻이다. 국가 폭력으로 스러져간 이들을 기억해낼 때, 그리고 폭력의 과거를 철저히 반성하고 성찰할 때, 비로소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옳은 자를 강하게 하는 일은, 정치의 무대에 누가 서는가, 어떻게 정치를 하는가의 문제다. 그러자면 우선 옳지 않으면서도 힘을 갖게 된 사람들의 이력과 연유를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다가 탄핵당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위로하며, 그들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다. 관심, 앎, 연대, 공감은 옳음에 힘을 부여하는 무기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정치를 힘이 정의로 군림하게 된 한국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하고, 힘이 정의가 된 역사를 반추하면서 정의가 힘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열망해야 한다. ---p.33
유신헌법이 이렇듯 국가를 신성시하며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원칙을 깡그리 무시하고도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라는 내용을 헌법에 집어넣은 사실이야말로 오늘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집어넣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즉 유신헌법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는 ‘자유+민주’가 아니라 ‘자유민주’이고 정확히 말하면 ‘자유(민주)’다. 이 ‘자유(민주)’는 공산 독재는 배격하나 반공 독재와 자본 독재, 더 나아가 파시즘까지 용인할 여지를 남긴다. ---pp.47~48
한국은 국가가 모든 구성원에게 ‘반공주의’라는 하나의 가치를 따르도록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적과 우리를 구분하고, 좌익 혹은 간첩으로 지목된 사람을 인간 취급하지 않도록 공식화함으로써 두려움에 질린 중간지대의 이웃들이 표적이 된 사람을 교류 범위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이러한 국가 폭력은 뒤로 후퇴했으나 사회 폭력, 즉 학교 폭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개인의 소신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 중간의 입지를 견지한 인간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 포악한 권력 앞에서 자기주장을 폈다가는 함께 따돌림을 당할 위험이 있는 전체주의ㆍ집단주의 사회에서 사회 폭력은 창궐한다. ---pp.86~87
망루에 올라가 강제 진압을 당하지 않으려고 화염병을 준비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생존을 위한 버티기를 국가와 국민에게 공격을 가하는 테러 세력의 폭력으로 간주한 사고방식이었다. 폭력 기구로 무장한 채 도심에서 버티는 농성자들은 이명박 정부에는 신속히 제거해야 할 ‘적’이었던 셈이다. 용산 참사는 한국전쟁 전후 시기와 마찬가지로 토벌의 논리,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 후방 영역에 ‘적’을 그냥 둘 수 없다는 생각, 혹은 대항 폭력을 방치할 수 없다는 다급함과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산 농성자들은 비록 정부를 공격하지 않더라도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다. ---pp.108~109
과거의 우익 테러 조직이나 오늘날 파업 현장에 투입되어 농성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용역 직원들의 행동의 동기는 거의 동일하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용역업체에 들어왔다는 한 대학생은 “긴급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살기 위해 봉을 휘두른다”라고 말하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떳떳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을 안 하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라고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토로한다. (……)
예나 지금이나 우익 테러의 명분은 동일하다. 과거의 ‘공산당 때려잡기’가 오늘의 ‘종북 때려잡기’로 변했을 뿐이다. 우익 테러 세력이 이제 합법적으로 설치된 회사의 직원이라는 점이 과거와 달라진 점일까? 사설 테러 조직이 공권력을 대신하는 나라에서 국가란 도대체 무엇일까? ---pp.139~139
군의 특수성은 인정돼야 하고, 군인의 권리 제한은 불가피한 점이 있다. 그러나 제한 조처는 방법이 효과적이고 적절해야 하며,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독일 군인의 지위 및 권리와 의무에 관한 법률은 군인법인데도 “군인은 다른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 권리는 법률에 근거한 의무를 통해 군 직무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제한된다”라고 되어 있다. 의무와 희생만이 유일한 미덕인 양하고 권리 보호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면 군인들이 자긍심과 애국심을 가질 수 있을까. 군인은 ‘제복 입은 시민’의 지위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p.157
불경죄는 사라졌으나 불경죄의 정신은 식민지 전통을 이어받은 권력자나 관료들에게 여전히 살아 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싫어하거나 저잣거리 광대들의 농담조차 그냥 웃어넘기지 못하는 딱딱한 머리의 권력자, 국가 혹은 국가원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국민은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전통시대나 군국주의 시대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한 관료들 말이다. 이 칼은 과거에는 최능진ㆍ장준하 같은 도전자를 잡아서 베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예술가나 소시민의 농담까지 때려잡는 몽둥이로 변신해 살아났다. ---p.188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김득중 저 | 선인 | 2009년 05월
金得中
1965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공부했으며, 논문 '제헌국회의 구성과정과 성격'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여순사건과 이승만반공체제의 구축'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로 재직 중이며,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논문으로는 '여순사건에 대한 언론보도와 반공담론의 창출', '여순사건의 성격', '민간인학살 기록현황과 수집·관리방안', '1980년대 민중의 발견과 민중사학의 성과와 한계' 등이 있다. 저서로는 『죽엄으로써 나라를 지키자』(공저)가 있다. 최근에는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민간인 학살, 제1공화국의 법률과 사법체제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책머리에
서론
1. 왜 여순사건을 연구해야 하는가?
2. '반란'과 '항쟁' 그리고 '사건'
3. 연구사 검토 - '군'에서 '대중'으로
4. 연구의 구성과 자료
제1부 여순사건의 발발과 대중봉기로의 전화
제1장 제14연대 군인봉기
1. 여수 제14연대의 봉기
2. 제14연대 봉기의 배경과 원인
제2장 대중봉기로의 전화
1. 전남 동부 지역으로의 봉기 확산
2. 인민위원회의 활동
3. 해방 전후 전남 동부 지역의 사회운동
제2부 진압과 학살
제3장 정부의 위기인식과 대응
1. 김구 세력에 대한 견제
2. 공산당 음모로서의 여순사건
제4장 국군의 초토화 진압작전
1. 정부군의 진압작전
2. 미군의 개입
제5장 민간인 협력자 색출과 학살
1. 협력자 색출과 학살
2. 공산주의자로 명명하기 - 황두연.박찬길.송욱의 경우
3. 즉결처분과 군법회의 처형
4. 파괴와 재건의 이중주
제3부 반공 국가 '대한민국'의 건설
제6장 '빨개잉'의 창출
1. 언론의 사건 재현과 비인간화 담론
2. 문인.종교사회단체의 '빨갱이'담론
3. '여학생 부대'의 신화 - 유혹하는 공산주의
제7장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1. 국가 조직의 재정비
2. 반공체제의 법제 정비
3. 사회의 재조직화 - 일상적 통제체제의 구축
4. '적의 창출'과 반공 국민의 탄생
5. 반공 텍스트의 재생산과 대한민국 건국의 신화
결론
참고문헌
1. 왜 ‘여순사건’인가?
기존 역사 서술에서 ‘여순반란’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연결을 갖고 남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음모로 이해된다. 이러한 인식은 여순사건 발발 당시, 이승만 정부가 발표하고 언론 매체가 보도한 여순사건 인식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 연계된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고 발표했고, 반란자들이 수많은 인명을 살상 했다고 규정했다. 언론은 정부 발표문을 그대로 받아 보도했고, 더 나아가 여수와 순천이 어떻게 지옥으로 변했는지, 봉기군이 얼마나 많은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는지, 국군은 얼마나 용맹하게 반란 진압에 나섰는지를 상세히 보도했다.
여순사건에 대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거의 변화가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혼란을 일으키는 악마적 파괴자가 되며, 선량한 ‘우리’는 도덕적으로 우월하지만 피해를 당한 사람이 된다. 반란으로 촉발된 ‘혼란’은 그것이 더 하면 더 할수록, 이를 바로잡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강력한 진압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입증한다.
이와 같이 여순사건에 대한 공식 역사는 ‘적’과 ‘아’를 선명히 구별하는 냉전 반공주의적 해석 틀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이 사건을 초래한 사회적 구조와 정치적 갈등의 과정과 성격, 사건의 전개 과정과 반란의 이유, 사건 이후 일어난 체제의 변화와 그 결과, 그 과정에서 무참한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되고 ‘빨갱이’로 낙인찍힌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세월들은 완전히 은폐되었다. 그렇다면 여순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여순사건은 분단 정부수립과 국가 건설 과정의 중요한 성격을 드러내주는 감춰진 기반이자 반공체제를 탄생시킨 한국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다. 따라서 여순사건의 의미에 대한 성찰은 한국의 ‘국가 건설’ 과정과 성격에 대한 이해,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이해, 한국 사회에 그 동안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폭력’과 그 구조에 대한 이해를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여순사건에 대한 공식 역사의 왜곡과 편향, 그리고 역사적 진실과 의의에 접근하길 꺼려하는 태도를 넘어서 여순사건의 다층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이 연구가 주목하는 것은 여순사건 이후 진압 과정에서 ‘빨갱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적나라한 국가폭력을 통해 반공체제가 수립되는 국가 건설과 국민 형성 과정이다. 한국 사회는 언제부터 반공을 제일의 국시(國是)로 삼고, 반공을 애국이라 생각하게 되었을까? 공산주의자가 모든 사회 혼란의 원인으로 여겨져 멸시되고, 심지어 죽여도 되는 비인간, 절멸시켜야 하는 악마적 ‘종자’로 비약해 사회로부터 근본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말하자면 이 연구는 ‘빨갱이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 동안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에 대한 연구와 비판은 충분히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공산주의자를 멸시하고 심지어는 죽일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역사 연구의 답변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2. 한국 사회에서의 ‘빨갱이’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라는 용어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다. 이 용어는 반대자들을 침묵시키며, 정치적 정당성을 일거에 박탈해버린다. 토론과 대화의 정치를 실종시키는 ‘빨갱이’라는 용어는 ‘공산주의자’ 또는 ‘좌익’이라는 용어와는 다른 쓰임새를 갖는다. 일제 시기의 공산주의자는 독립을 가장 앞장서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해방 직후에도 공산주의자는 진보적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좌익세력을 ‘빨갱이’로 지칭하였고, 빨갱이를 죽여야만 애국하는 것으로 바뀌었을까? ‘빨갱이’란 이미지는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1948년 여순사건을 통해서였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 이념의 소지자를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게 되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 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죽음을 당하더라도 마땅한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3. 여순사건과 ‘빨갱이’ 색출
1948년 10월 19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 만에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가 ‘제주도토벌 출동반대’를 외치며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은 여수·순천·광양·구례·보성 등 전남 동부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했고, 군인봉기에 호응한 지역 좌익세력과 학생·주캹들이 합세하면서 ‘대중봉기’로 발전했다. 여수?순천 등지에서는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식량배급, 친일파 반역자 처단 등의 정책을 폈다. 정부와 미군은 진압작전에 나서 10월 23일 순천을, 27일에는 여수를 점령했다. 당시 작전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미군(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작전·인사·보급을 통제하면서 진압작전을 주도했다. 하지만 봉기군은 지리산 등의 산악지대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진압군은 각 지역을 점령한 뒤,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협력자 색출을 시작했다. 우익, 경찰에게 지목된 지역주민들은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 되었다. 중학교 교장, 지방 검사 등은 봉기군을 피해 숨어있었는데도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었고, 한 국회의원은 인민재판에 참가했다는 누명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의 협력자 색출 광경은 국가폭력을 통한 ‘편 가르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적으로 규정된 사람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협력자 색출 과정과 대량 학살은 누가 ‘민족’과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민족 구성원의 자격 심사과정이었다.
반란 주체들이나 ‘주체들로 간주된 자들=협력자’는 정권에 의해 국민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죽음을 당해야 하는 존재, 건전한 사회 건설과정에서 뿌리 뽑혀져야 하는 잡초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다. 계엄법도 없이 선포된 위헌적 계엄령은 주민들에 대한 ‘살인 면허장’이었다. 진압군의 초토화 작전은 전 지역주민을 반란 협조자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여순사건은 단지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으로 규정했다.
봉기군에 죽은 주민들보다 정부 진압군에 의해 죽은 민간인이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좌익은 사람을 마구 죽이는 ‘살인마’로 선전되었다. 이제 공산주의자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진압 작전이 끝난 뒤, 언론·문인·종교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참혹한 학살을 자행한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이며, ‘악마’이자 ‘비인간’이라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자’로부터 ‘빨갱이’로의 전환, 빨갱이를 비인간적인 악마로 형상화 한 계기는 다름 아닌 여순사건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타도할 수 있다는 두려움, 이에 동조한 대중들에 대한 공포 그리고 저항의 가능성을 봉쇄해야한다는 압박은 봉기 지역 주민 전체를 적으로 상정하게 하였다. 폭력의 대상은 공식적으로 설정된 외부의 적(공산주의 집단인 북한)이 아니라 내부의 대중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자를 겨냥하고 있다기보다는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4. 대한민국과 반공체제의 형성
여순사건은 대중 억압 체제로서의 반공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결정적인 계기로 활용되었다. 여순사건에서 경험한 좌익 세력과 대중운동에 대한 공포 그리고 진압과정에서 작동된 국민 형성의 논리는 대한민국을 반공사회로 만들어 가는 주요한 경험과 근거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남한 반공체제의 기본적인 구조와 작동 원리를 제시했다. 대한민국 국민 형성의 실질적인 기반이 된 구체적인 방식은 민주공화제를 규정한 ‘헌법’과 1948년의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아니라, 제주사건과 여순사건 등에서 전면화 된 ‘국가폭력’과 ‘숙청의 정치’였다.
여순사건을 통해 전면적으로 등장한 국가폭력은 ‘빨갱이’를 없애기는커녕 끊임없이 ‘빨갱이’를 만들어냈다. 국가폭력이 작동하기 시작한 순간 그 앞에선 주체들은 모두 잠재적인 ‘빨갱이’로 간주되었고, 폭력의 대상이 된 자가 ‘빨갱이’로 규정되어야만 그 폭력을 정당화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부 수립 초기 대한민국의 국민 만들기는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한 국가폭력의 사용이었다. 두 번째는 국가보안법, 계엄법 등의 법제적 폭력이었다. 세 번째는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삶에 대한 통제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념적 측면과 더불어 신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생활을 재조직하였다. 촘촘하게 구축된 사회통제의 그물망은 반공체제가 계속 유지될 수 있게 한 주요한 원천이었다. 감시받는 존재, 통제받는 존재로서의 대중은 잠재적 적으로 취급되었다. 이승만 반공체제는 사실상 대중 억압 체제였던 것이다.
여순사건 이후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적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은 대한민국 국민이 어떤 국민이어야 하는가를 결정하였다. 반공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기본적인 자격 요건이었다.
대한민국은 국가에 대한 헌신의 증표로써 국민들의 땀만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땀’이 국민으로의 포섭과 충성의 증표라면, 배제된 쪽에는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의 ‘피’가 흘렀다. 대한민국 국민 형성의 역사는 장미빛 대로가 아니었으며, 그 길은 피로 물들여져 있었다.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는 특정한 이념을 국가 정책으로 선택했다는 데 있지 않다. 반공이라는 잣대로 현실에 존재하는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타자의 존재 자체를 무참히 파괴해버리는 폭력을 통해 국민 형성의 진로를 찾아갔다는데 반공주의의 문제가 존재한다.
5. 여순사건이 남겨놓은 미해결의 숙제들
궁극적으로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의 주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사고하게 한다. 제헌헌법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세 달 뒤에 발생한 여순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방식은 모든 권력은 권력자에게 있으며, 권력을 가진 자가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반공체제 속에서 수십 년 간 반공은 의문시되지 않는 가치였다. 반공은 ‘공산주의를 반대 한다’라는 것 이외에는 그 안에 어떤 특정한 이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공허한 울림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공허함과 유동성 때문에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었다.
61년 전에 일어났던 여순사건이 던졌던 문제들은 지금도 온전히 극복되지 못하였다. 우리 사회가 여순사건에서 배우고 반성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순사건에서 나타났던 국가폭력의 문제, 국민 형성의 논리, 반공주의 문제는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기와 결합된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끊임없이 유예되었고, 헌법에 제시된 인민 주권은 언제나 통치권자의 주권에 의해 제약되었다. 여순사건이 역사적 의미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의 정치적 문제를 재검토하기 위해 되돌아가야 근원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순사건이 남긴 유산을 극복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자유롭게 되고 더 민주적인 사회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제노사이드 학살과 은폐의 역사 최호근 저 | 책세상 | 2005년 07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시민혁명 이후 서양의 역사를 전공했다. 3년간 육군사관학교 사학과에서 생도들을 가르친 뒤, 콘라드 아네나워 재단의 지원을 받아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막스 베버의 역사이론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에는 서울대 박사후 연구원을 거쳐, 현재는 부산교육대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600만 대학살에 관한 일곱 가지 질문』과『막스 베버와 역사주의Max Weber und der Historismus』등을 썼고,『독일 역사주의』,『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폴란드의 과거청산』등을 옮겼다.
들어가는 말 : 왜 지금 제노사이드인가
제1부 제노사이드란 무엇인가
1. 제노사이드 개념의 발명 : 라파엘 렘킨
2. 제노사이드의 정치학 : 제노사이드 협약의 성립 과정
3. 제노사이드 협약에 대한 비판과 대안
4. 제노사이드란 무엇인가
제2부 전쟁 범죄, 반인도 범죄, 제노사이드 범죄
1. 뉘른베르크 국제군사법정 헌장
2. 전쟁 범죄
3. 반인도 범죄
4. 제노사이드 범죄
제3부 세계사의 제노사이드
1. 프런티어 제노사이드
2. 문명의 한복판에서 : 나치 독일의 제노사이드
3. 민족과 종교의 학살 이중주 : 남동부 유럽
4. 혁명의 이름으로 일어난 제노사이드
5. 식민화와 탈식민화 과정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
제4부 한국 현대사와 제노사이드
1. 우리에게도 제노사이드가 있었는가
2. 제주 4·3
3. 보도연맹원 학살
나오는 말 : 제노사이드의 예방을 위하여
1. 야만의 세기를 넘어서기 위해 기억되어야 할 역사, 제노사이드
제노사이드Genocide는 특정 집단을 멸절시킬 목적으로 그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를 말한다. 제노사이드는 고대부터 있어왔는데,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 로마에 의한 카르타고의 멸망, 십자군 전쟁 등이 제노사이드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렇듯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제노사이드는 20세기 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집단 학살 방지를 위해 1999년에 설립된 시민단체인 ‘제노사이드 감시Genocide Watch’는 지난 100년 동안의 제노사이드 희생자를 모두 1억 7,500만 명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같은 시기에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가 4,000만 명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엄청나게매우 놀라운 수치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제노사이드를 우리와는 직접 상관없는,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대규모 집단 학살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온 저자는, 제노사이드를 본격적으로 다룬 국내 최초의 저작《제노사이드―학살과 은폐의 역사》에서 제노사이드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님을, 우리에게도 일어났으며, 언제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근대 이후 전 세계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 땅에서 일어난 집단 학살의 성격을 규명하고, 과거에 대한 진정한 성찰을 요구하는 이 책의 작업은 최근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과거사 진상 규명 논쟁에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2. 제노사이드란 무엇인가
‘제노사이드Genocide’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법학자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1900~ 1959)이 처음 만든 용어로, 인종이나 종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genos에 살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cide를 결합한 복합어다. 1944년 출간된 자신의 책《점령된 유럽에서의 추축국 통치Axis Rule in Occupied Europe》(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1944)에서 엄청난 규모의 인종 학살에 ‘제노사이드’라는 이름을 부여한 렘킨은 나치 독일이 저지른 것과 같은 만행을 예방하기 위해 제노사이드를 국제법상의 범죄로 규정하고 제노사이드를 명령한 사람과 그 명령을 집행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노력의 결과로 1946년 유엔 총회에서 제노사이드가 국제법상의 범죄로 공인되었고, 2년 후인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제노사이드에 관한 협약이 체결됨으로써, 제노사이드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와 처벌받아야 할 대상이 정의되었다.
제노사이드 협약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는 “국민·인종·민족·종교 집단 전체 또는 부분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로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집단 구성원에 대해 육체적·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게 고의로 부과하는 것, 집단 내의 출생을 방지하기 위해 의도된 조치를 부과하는 것, 집단의 아동을 강제적으로 타 집단에 이동시키는 것이 포함된다.
3.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를, 왜, 어떻게, 얼마만큼 죽였는가
《제노사이드―학살과 은폐의 역사》는 세계사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제노사이드 가운데 대표적인 13건의 사례를 선택해 다섯 개의 유형으로 나눠 보여준다. 즉 백인에 의한 북아메리카 인디언과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학살을 다룬 프런티어 제노사이드,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집시·장애인·동성애자 학살을 다룬 나치 독일의 제노사이드,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살육과 보스니아·코소보의 인종 청소를 다룬 민족과 종교에 의한 제노사이드, 스탈린 치하의 정치적 반대자 숙청과 캄보디아 크메르루주의 동족 학살을 다룬 혁명의 이름으로 일어난 제노사이드, 프랑스의 알제리인 학살, 르완다의 종족 분쟁,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인 학살을 다룬 식민화와 탈식민화 과정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로의 다섯 개 유형으로 나누고 각 사례의 발생 시기와 지역, 국내외 정치 상황과 조건, 희생자 집단의 특성을 설명한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저자의 명쾌한 기술, 풍부한 사진 자료들은 인간의 잔혹함과 추악함을 어떤 드라마보다 더 생생하게 전하며, 이러한 비극에 눈감았던 우리를 부끄럽고 당혹스럽게 만든다.
4. 우리에게도 제노사이드가 있었는가
그렇다면 과연 한반도는 어떠한가?《제노사이드―학살과 은폐의 역사》에 의하면,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던 우리에게 제노사이드는 남의 일이 아니다. 보도연맹원 학살과 제주 4·3 등 한국전쟁 전후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집단 학살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해방과 혼란, 외세의 개입과 왜곡된 방식의 정치 엘리트 충원, 이로 인한 좌·우익의 대립과 테러, 그 결과로 일어난 대규모 학살은 캄보디아, 동 티모르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일어났다. 내전이나 국가간의 전면전 중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제주 4·3으로 인한 희생자는 당시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이상에 달했으며, 한국전쟁 전후에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수는 학자마다 다르기는 하나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보복 학살 같은 연쇄 살인까지 감안한다면 희생자는 더 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가 제노사이드를 해외 토픽이나 강 건너 불처럼 여겨왔다면, 그것은 우리의 비극과 불행이 작았기 때문이 아니라, 제도적 억압과 지식인들의 직무 유기 때문이다. 유가족들과 일부 학자, 언론인들의 뒤늦은 노력으로 진상의 일부가 밝혀지긴 했지만 이 땅에서 불과 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수많은 집단 학살 사건의 대다수는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비극의 상흔을 치유하고 우리 세대에까지 세습된 사회적 균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런 비극을 우리나라 밖에서 일어난 비슷한 사건들과 비교함으로써 우리 경험의 크기와 의미를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 책은 이를 위한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5. 제노사이드, 예방 가능한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에도 이라크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는 유혈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제노사이드 없는 세기는 불가능한가? 저자는 제노사이드를 예방하는 방법 혹은 예방까지는 아니라도 그 가능성을 현저하게 줄이는 방법을 국제적인 대책과 국내의 대책으로 나누어 제시한다.
먼저 국제적으로는 제노사이드가 일어날지를 예측하고 적절한 대책을 수립할 수 있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조기 경보 시스템을 유엔 내에 설치하고, 제노사이드가 일어났을 때 즉시 개입할 수 있는 항시적인 신속대응군을 창설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제노사이드 관련자들을 고발하고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하는 데 필요한 이행 입법이 조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1950년에 국제 제노사이드 협약에 가입했지만, 협약이 요구하는 이행 입법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제노사이드 협약의 정신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법안 입법이 시급하다. 그러나 이 책이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것은 제도나 장치가 아니라, 제노사이드를 막으려는 의지, 즉 시민적 양심이다. 나도 어쩌면 학살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르완다와 코소보에서 벌어진 일들을 쉽게 남의 일로 단정하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교육을 통해 역설적인 방식으로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듯, 저자는 제노사이드에 대한 교육을 통해 악몽 같은 집단 학살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다랑쉬굴 발굴 10주년 기념 - 다랑쉬굴 발굴과 그 뒷 이야기
김동만 저 / 김기삼 사진 / (사)제주민예총4·3문화예술제 사업단 편 | 각 | 2002년 03월
1968년에 제주에서 태어났으며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사)제주민예총 영상위원회 위원장, 제주생태사진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 무명천 할머니, 유언, 잠들 수 없는 함성 제주 4ㆍ3이 있다.
프롤로그
다랑쉬굴 4ㆍ3 희생자 유해 발견 및 처리 일지
다랑쉬 가는 길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다랑쉬굴을 찾아서
다랑쉬굴에 대한 현장조사
44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다랑쉬굴의 4ㆍ3 희생자 유골
생생한 4ㆍ3 피난민의 유물
유골 및 유물 분포도
다랑쉬굴 학살 사건의 증언
다랑쉬굴의 대토벌 정황
다랑쉬굴의 사망자
다랑쉬굴 희생자는 가족 단위의 민간 피난민
44년 동안 버려진 시신들
경찰과 행정기관의 ‘다랑쉬굴 사건' 역사 왜곡
장례식의 논의과정
파행적으로 치러진 장례식
에필로그-다랑쉬굴 유해 발굴 그 후 10년
민간인 학살 조선 종군 실화로 본 신경득 저 | 살림터 | 2002년 06월
1944년 충복 괴산 출생. 현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저서에 『한국 전후소설 연구』『푸리문학이란 무엇인가』『한민족문학사 상론』등이 있다.
머리말
1. 말머리
2. 종군 실화에 대한 예비적 검토
3. 미군의 폭격과 포격에 의한 민간인 학살
(1) 조선 북반구 전역
(2) 서울 인근 전구
(3) 경기, 충북 일부 전구
(4) 중부 전구
(5) 금강, 대전지구
(6) 영동, 추풍령, 김천 지구
(7) 호남 전구
(8) 진구 전구
4. 미군과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1) 서울 인근 전구
(2) 경기, 충북 전구
(3) 중부 전구
(4) 금강, 대전 전구
(5) 영동, 추풍령, 김천 전구
(6) 낙동강 전구
(7) 호남 전구
(8) 진주 전구
5. 마무리
참고문헌
영문초록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 · 경남지역 김기진 | 역사비평사 | 2002년 05월
김기진1963년 부산 출생. 1990년 부산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전 부산일보 사회부 기자.
제1장 국민보도연맹 결성과 조직
1. 개념
2. 중앙본부 및 전국의 조직
3. 경남도 본부 결성
4. 경남도연맹의 하부조직
제2장 조직확대
1. 포섭공작
2. 자수, 전향자 속출
3. 가입강제 등 변칙가입과 부작용
4. 검거
5. 연맹 탈퇴
제3장 학살
1. 개요
2. 6.25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들의 대응
3. 예비검속
4. 지역별 주요 학살사계
5. 보복학살
제4장 국회의 조사활동
1. 국회조사단 구성과 활동
2. 언론보도에 나타난 국회조사 활동
3. 증언청취 속기록에 나타난 국회조사 활동
4. 국회 진상조사의 한계성
제5장 유족회의 결성과 탄압
1. 개요
2. 혁명재판사에 나타난 우족회 결성과 활동
3. 언론보도에 나타난 지역별 유족회 활동
4. 군, 경과 유족의 마찰
5. 유족회에 대한 탄압
제6장 학살 책임자
1. 학살은 왜 저질렀나
2. 각종 기록에서 드러나는 학살 책임자
3. 지역별 학살자 책임자
4. 우익단체
5. 미국의 책임
제7장 진상규명 노력
1. 6.25 피학살양민 부산, 경남 유족회
2.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3. 통합볍률(안)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김영택 | 사회문화원 | 2001년 08월
한국전쟁과 나주양민학살 신광재 지음, 나주역사문화연구소, 2007.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신기철 지음 / 자리 / 2011
"서울대병원에 16년째 방치된 유골, 부끄럽다"11.03.04 오마이뉴스
[인터뷰]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쓴 신기철 '금정굴사건' 전 진실위 조사팀장
한국전쟁 초기 한강 다리를 몰래 끊고 도망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자기의 "서울을 사수한다"는 말만 믿고 서울에 잔류한 민간인들에게 위로나 사과가 아닌 무자비한 집단학살로 보답한다. 역사에 '적반하장'의 예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람은 이승만일 것이다.
1950년 10월 9일부터 10월 25일 사이, 153명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은 경찰에 의해 고양시 금정굴에서 집단학살을 당한다. 당시 고양시에서만 최소 천 명의 민간인들이 법적 절차도 없이 희생당했다. 희생자들 대부분은 소극적 부역자나 부역과 무관한 그 가족 등이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이승만 정부가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상황에서 인민군이 총을 들이대고 "밥을 달라, 일을 해라" 하는데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었겠나. 그러나 도망갔다 돌아온 이승만 정권은 이런 민간인들을 오히려 '빨갱이 부역자'로 몰아 학살했다. 학살사건 이후에도 희생자 가족들은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국가에 재산을 빼앗겼다. 연좌제로 취업도 어려웠고,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집요하게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95년 금정굴사건 희생자 유족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힘으로 금정굴에서 희생자 유골을 발굴했다. 유골에는 여성과 아이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상당수 있었다. 학살 당시 금정굴에서는 희생자들을 굴 방향으로 무릎을 꿇게 하고 등 뒤에서 사격, 살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 책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금정굴 사건이 저질러지게 된 전국적 맥락 또는 경기도 단위의 맥락이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국내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도 찾을 수 없었다. 고양지역에서도 고양경찰서 외에는 경찰조직이 어떻게 개입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다른 나라 사례를 참고로 몇 가지 시도를 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객관적 사실의 열거 외에 별다른 해석을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욕심이 지나쳤던 것이다."
- 금정굴사건에 대해선 기존에 나온 몇몇 글이 있지만 부역혐의 희생사건의 유형으로는 처음 정리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의의와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이 책을 통해 국가가 사건 발생 직후부터 고양 금정굴 사건을 알고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숨겨왔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검찰 스스로가 200여 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전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60년이 넘도록 직간접으로 희생자들의 가족들을 괴롭혔다. 이건 파렴치의 수준을 넘어서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래서는 국가가 조직폭력배 집단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아직도 좌우 갈등의 문제로 바라보는 편견을 바로 잡고자 했다. 학살에 가담한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원 상당수가 부역자였다. 물론 이들도 전쟁 전에는 대한청년단원, 대동청년단원, 국민보도연맹원들이었다. 반면 희생자들 역시 대한청년단원, 호국군, 마을 반장, 마을 유지들이었다.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전쟁 전에는 모두 한 마을 주민들이었다. 과연 누가 좌익이고 누가 우익이었다는 말인가? 서슬 퍼런 남과 북의 국가권력 앞에선 모두 나약한 개인들이었을 뿐이었다.
이 책은 '부역혐의 희생사건'을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다른 유형의 학살사건도 마찬가지이지만 입에 담기조차 꺼려했던 사건들이다 보니 희생 시기나 희생경위처럼 진실의 기본이 되는 '객관적 사실'조차도 정확하질 않다. '망각'이라는 일종의 자기방어인 셈이다. '부역혐의 희생사건'의 '객관적 사실'을 명확히 한 후에야, 전국에 이와 같은 일이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고양금정굴 사건을 조금 더 자세히 다루었을 뿐이며, 이 정도의 내용은 전국 어느 시·군·구에서도 확인되는 사건이다. 북한 사회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아직도 이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있는 곳이 아주 많이 있다. 이것이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중 하나다."
- 1995년 10월 유족들의 힘으로 금정굴을 발굴했고, 2007년 진실위에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규명했다. 그 후 가해자들의 반성이나 고백이 있었나?
"2008년 경찰청장 명의의 유감 표명은 있었다. 2007년 진실규명 당시 태극단원의 증언이 진실규명에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본인들의 행위에 대해선 모든 진실을 말하진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희생자 유골을 안치하는 데 반대하는 것을 보면 결코 반성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사건에 대한 위령사업을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된 고양시장도 별다른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편견을 넘어서려고도, 더 이상 진실을 알려고도 하질 않는다"
- '학살' 인정을 위한 싸움도 여전히 진행 중인데, 전 고양시장은 국가에서 진실규명한사건 임에도 금정굴 위령사업을 왜 반대했나?
"고양시장이 반대한 이유는 태극단 등 민간단체가 반대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다만 내가 면담한 바로는 이 사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태극단은 그리 크게 반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보훈단체들의 견해였는데 이 단체들은 이 사건 희생자들이 좌익 활동으로 처단된 것이므로 위령사업이 곧 좌익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분들은 자신들의 편견을 넘어서려고도, 더 이상 진실을 알려고도 하질 않는다. 이 영향이 현 시장에게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보도연맹사건 등을 비롯해 한국전쟁 당시 거의 무차별적 민간인학살을 보면 요즘 구제역사건으로 가축을 '무작위'로 살처분, 생매장 하는 것과 너무 유사한 양상이다. 당시 이런 무자비한 민간인학살을 통해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집단이 있었나?
"이승만 집단이었다고 본다. 이승만을 지지했던 정치집단조차도 전쟁 후 배척당하는 것을 보면 가장 큰 이익을 본 집단이 당시 정부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 이승만 일인을 중심으로 한 일개 정치 파벌이 아니었나 싶다. 최근까지 연장해서 본다면 아마 국가보안법과 미국으로 상징되는 초헌법 집단이었겠다."
- 16년 동안 방치되었던 유골의 안치는 가해자 국가가 먼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라고 본다. 진실규명사건임에도 왜 아직까지 희생자유골이 제대로 된 시설에 모셔지지 못하고 병원 창고 같은 임시시설에 보관되어있다고 보나?
"진실화해위원회가 발굴한 유골도 어쩌지 못하고 임시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유족들이 직접 발굴한 금정굴사건 유골이 서울대병원에 보관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인지 모르겠다. 유족들로서는 서울대 이윤성 교수님께 너무 감사드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손된 도리로서 너무 부끄러운 일로 여기고 있다. 어떻게 해보려는 고양시장으로서도 이명박 정부가 기피하고 있는 일을 일개 지자체에서 하려니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본다."
- 그동안 금정굴사건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등의 명예회복과 화해를 위한 국가의 조치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나? 일부 유족들은 2010년 6월 국가배상소송을 했는데 진전이 있나?
"현재 국가배상 소송이 진행 중에 있다. 담당 재판부는 사건의 실체에 대해 다루어 보려고 하는 반면 피고로 나선 고양경찰서 경찰관들은 소멸시효만을 주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 금정굴 외에도 고양시 성석동 등에도 많은 시신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는데, 고양시의 학살 추정지 현황을 이야기하면?
"직접 목격한 분들의 증언이므로 성석동에 20여 구가 매장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현천리의 시신은 봉분이 조성되어 있어 발굴의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한강변 희생지와 화전리는 매장한 것이 아니므로 현재 발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본다."
"문제는 당시의 잣대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 책에서 "학살은 이승만 '정치의 수단'이었고 '집권세력의 광기'에서 발생한 정치적 결과" 였다고 정의했는데 좀 부가해서 설명하면?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이 워낙 잔인하고 비이성적이므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흔히 있었다. 이는 설명할 수 있는 자료에 접근하기도 어렵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희생자 유족 등 증언 가능한 사람들을 면담하기 어려운 사정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지난 5년간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내용이 있다. 이를 근거로 볼 때 이승만 정부는 정치적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학살을 저질렀다고 보는 것이다."
- 2008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울산국민보도연맹사건에 대해 국가차원의 사죄를 했다. 그리고 매년 위령제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해 군과 경찰이 사과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부역자 명부', '처형자 명부'는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나로서는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겠다. 그러니 사과가 말로 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역자나 처형자 명부들은 진실화해위원회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결정적인 자료에 해당하지만 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 책에서, 60년 전보다 시민사회는 진보했으나 이념과 제도는 달라진 것이 없고, 그래서 후손들에게 물려 줄 대한민국은 여전히 위험해 보인다고 했는데, 금정굴사건 조사팀장 입장에서 고양시장과 이명박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념적 관점에서 벗어나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았으면 좋겠다. 흔히 '지금의 잣대로 재지 마라'고들 한다. 그럼 당시의 잣대로라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문제는 당시의 잣대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어쨌든,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와 고양시장에게 건의하거나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잔학했던 국가범죄에 대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사회통합을 위해서 당당하게 관철해 나가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기억, 1950년 경산코발트 (사)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 편 이재갑 사진 / 이른 아침 / 2008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 사건이란?
1950년 여름, 경산 코발트 광산 일대에서는 국민보도연맹원 1,000명과 대구형무소 수감자 2,500명 등 무려 3,500여 명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하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희생자의 대부분은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순박한 농민들로 ‘빨갱이’란 누명을 쓰고 적법한 절차 없이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것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한 슬픔과 고통은 유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경산 코발트 광산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움직임은 일찍이 1960년 4·19혁명 이후 유족회가 결성되면서 시작되었으나 이듬해 일어난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유족회가 해체되어 긴 세월 동안 진실을 말 못하고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1999년 노근리 사건 등 한국전쟁 중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마침내 2000년에 유족회가 다시 결성되어 지금까지 경산 코발트 광산 사건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와 유가족의 명예 회복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행해온 유족회의 활동과 그 성과를 정리하고 사건의 진실을 더욱 널리 알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차원에서 이 사진집을 내게 되었다
산청 함양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 강희근 지음 /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유족회 / 2004 / 비매품
해방 후 양민학살사 김삼웅 지음 / 가람기획 / 1996
1. 10월 대구 양민학살
2. 제주 4.3 양민학살
3. 여수 순천양민 학살
4. 남원 양민학살
5. 문경 양민학살
6. 부산 양민학살
7. 해남, 완도 양민학살
8. 영동 미군 양민학살
9. 고양 금정굴 양민학살
10. 5.18 광주 시민 학살
대부분의 양민학살은 국군과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해 자행된 학살극이었다는 데에 비극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한맺힌 일이다. 6.25 전쟁을 전후하여 한땅에서 군과 경찰.우익단체들에게 의해 학살당한 사람이 자그마치 1백만 명에 이른다. 이들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어갔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고.무관한 양민들이었다.
좌익척결의 이름으로, 공비토벌의 명분으로, 통비분자라는 구실로, 용공이적, 인민군에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1백만 명의 억울한 사람이 희생된 것이다. 젖먹이 어린이도 죽였고 꽃다운 처녀들도 죽였다. 어느 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총살되었고, 어떤 마을에서는 마을에 불을 질러서 뛰쳐나오면 무차별 총질로 학살하였다
6·25 전쟁기 부산지역 민간인 학살[六二五戰爭期民間人虐殺]
역사적 배경
1948년 10월 여순 사건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정부는 남한 내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에 나섰다. 이를 위해 그해 12월 1일 「국가 보안법」을 제정·공포하였고, 이듬해 6월 21일 좌익 세력을 대상으로 한 전향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을 창설하였다. 「국가 보안법」이 강력한 제재 수단이었다면 국민보도연맹은 포섭 유인책으로, 좌익 세력 근절을 위한 강온 양면 전략이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터지면서 이런 반공 시책은 한국사에 전례가 없는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다. 부산에서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은 크게 국민보도연맹 학살과 부산형무소 재소자 학살로 구분할 수 있다.
경과
부산 지구 CIC와 부산 지구 헌병대, 경찰은 1950년 7월 초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 검속에 들어갔다. 체포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지역 경찰서 유치장이나 경찰서 인근의 임시 구금 시설에 감금되었고 일부는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되기 시작하였다. 재판 등 법적 절차도 없이 야산이나 해안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민간인을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중 상당수가 좌익 사상과는 무관한 민간인이었다.
부산 지역에서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신평동 동매산, 금정구 선동 동래 베네스트 골프장, 동래구 반송동 운봉 마을, 금정구 오륜동 회동 수원지, 해운대구 청사포, 오륙도 인근 해상, 서구 암남동 혈청소 인근 해상 등지에서 학살이 이뤄졌고 영도구 동삼동 미니 공원과 중구 영주동 부산 터널 위 야산에는 수백구의 시신이 암매장되었다.
비슷한 시기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도 집단 살해되었다. 당시 부산형무소는 대구, 마산, 진주 등 다른 형무소 재소자들까지 이감되어 매우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목숨을 잃은 재소자는 6·25 전쟁 발발 이전에 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재소자와 전쟁 발발 직후 예비 검속되어 구금된 민간인, 다른 지역 형무소에서 이감된 재소자 등이었다. 군경은 재소자를 끌어내 트럭에 실은 뒤 인적이 드문 야산이나 해안으로 데려가 총살하거나 수장하였다.
부산형무소 집단 학살과 관련해 당시 국군 3사단 군사 고문단 소속 롤링스 에머리치(Rollings S.Emmerich)는 「1950년 6·25 전쟁 초기의 역사」라는 제목의 비망록에서 1950년 7월 1일 23연대장 김종원이 재소자 3,500명을 한꺼번에 집단 살해하려는 것을 저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미군은 인민군이 낙동강에 이르면 부산형무소 문을 열고 기관총으로 재소자를 쏘아 죽여도 좋다는 말을 남겼고 결국 대학살이 벌어졌다.
결과
부산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피해 규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전국에서 피란민이 몰려든 데다 다른 지역 재소자까지 함께 수감되면서 극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 두 사건의 진상을 알려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전쟁기간 동안 많은 기록이 없어졌고 1961년 5·16 군사 정변 세력이 피학살양민유족회를 탄압하면서 남아 있던 다른 기록마저 모두 파기했기 때문이다.
2005년 12월 출범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국민보도연맹 학살과 관련해 희생자가 전국적으로 4,722명으로 확인됐다고 2009년 11월 국민보도연맹 사건 진실 규명 결정서에서 밝혔다. 동 위원회는 이 결정서에서 부산, 동래 지역[동래는 학살 당시 경상남도 동래군이었음]에 최소 700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는 한편 확인된 희생자는 31명이라고 밝혔다.
동 위원회는 부산형무소 학살에 대해서는 최소 1,500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및 예비 검속자가 희생되었다고 추정하고 확인된 희생자는 148명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희생자 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1961년 4·19 혁명 직후 결성된 동래유족회가 발굴한 유골만 해도 713구에 이른다. 오륙도와 암남동 혈청소 인근 해상에서도 엄청난 수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동삼동 미니 공원과 신평동 동매산, 부산 터널 위 등지에는 아직도 수백 구의 유골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 때 부산에서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은 인민군 비점령 지역에서 저질러진 사건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경기도와 충청도 등 북쪽 지역에서는 인민군의 급속한 남하로 국민보도연맹원을 예비 검속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기 때문에 부산, 경상남도에 비하면 피해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다. 부산에서 큰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그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은 것은 바다와 접해 있는 지리적 특성에 한 원인이 있다. 해상에서 집단 학살이 이뤄질 경우 목격자를 찾기 힘들고 증거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과반수가 해상에서 저질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임시 수도로 외지인이 대거 몰려 혼란을 겪으면서 이 사건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한 것도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끝나지 않은 전쟁-국민보도연맹』(역사비평사, 2002)
『한국 전쟁과 집단 학살』(푸른역사, 2005)
『국민보도연맹 사건 진실 규명 결정서』(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9)
『진실화해위원회 종합 보고서』Ⅲ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10)
『진실화해위원회 종합 보고서』Ⅳ 인권 침해 사건(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10)
1) 부산 터널 위 민간인 학살
역사적 배경
6·25 전쟁이 일어나고 전선이 급속히 남하하면서 부산형무소는 일반 범죄자 외에 사상범과 국민보도연맹 회원들로 넘쳐났다. 1950년 7~8월 군과 경찰은 좌익 세력이 인민군에 동조하여 후방에서 봉기할지 모른다는 우려로 부산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 회원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하였다.
경과
당시 부산형무소 간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6·25 전쟁이 시작된 직후 부산형무소 마당 한쪽에 목조 가건물 형태로 교수대가 설치되었다. 여기서 교수형이 이루어졌는데 한 명당 대략 20분이 소요되었고, 시신들은 부산 터널 위 야산 등지에 매장되었다. 그 무렵 부산형무소 인근에 살았던 강 모[2001년 증언 당시 75세] 씨는 “시신을 묻는 날이면 대낮부터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이 삽을 들고 나와 커다란 구덩이를 팠고, 저녁 무렵 시신을 실은 트럭들이 나타나 구덩이 속으로 시신을 쏟아 부었다.”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시신이 묻힌다는 소식이 들리면 주민 수십 명이 나와 이를 지켜보곤 하였다.”면서 “다들 국민보도연맹 회원들이 무슨 죄를 지어 저리도 많이 죽이나 하고 궁금해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하였다.
결과
목격자들은 부산 터널 위 야산에 최소 수백 구의 시신이 묻혔다고 증언하였다. 시신들이 자연사에 의한 것인지, 살해된 것인지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신을 묻는 날이 있었다.”라는 증언을 보면 어느 정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장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민들은 부산형무소 안에서 총 소리를 들은 기억은 없다고 하였다. 이는 교수형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다. 부산 터널 위 민간인 학살 현장은 지금 건물이 들어서고 숲이 우거져 정확한 매장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의의와 평가
부산 터널 위 민간인 학살 사건은 다른 암매장 사건과 달리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는 전 과정이 지역 주민들에게 노출되었다. 매장지가 당시 부산형무소에서 매우 가깝고 또 언덕 위에 있어 쉽게 눈에 띄었다. 시신 매장에 부산형무소 재소자가 동원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2) 청사포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靑沙浦六二五戰爭期民間人虐殺]
역사적 배경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5일 노동 운동 단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이승만(李承晩) 정권에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1949년 좌익 전향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창설되면서 최우선 가입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경과
부산에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산하 조직이 대거 결성되었다. 전국조선노조 부산지부, 전국금속노조 부산지부 등 산별 노조 외에 조선방직회사, 조선중공업회사 등 단위 공장까지 참여하였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활동하였던 노동자들은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고, 이듬해 6·25 전쟁이 터지면서 집단 살해되는 운명을 맞았다.
부산에서 조선금속공업을 경영하던 오 씨는 1950년 7~8월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 헌병, 경찰이 자신의 공장으로 찾아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노동자들을 데려갔고 그중 4~6명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헌병은 부산헌병사령부 부사령관이던 김종원의 부하들이었다고 오 씨는 말하였다. 체포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청사포 인근 절벽에서 돌이 담긴 마대를 다리에 단 채 바다로 떨어져 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과
청사포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조선금속공업 노동자 외에도 상당수 국민보도연맹원이 이곳에서 피살된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 드러난 게 없다. 바다에 수장된 사건이라 현장 발굴을 통한 확인 작업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의의와 평가
청사포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은 공장 노동자들이 살해된 곳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부산 지역 여러 학살 현장 가운데 이처럼 피해자의 직업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예는 드물다
3) 회동 수원지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
역사적 배경
1949년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은 국가 주도로 과거 좌익 경력자들의 교화와 관리를 담당한 단체이다. 그러나 6·25 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을 예비 검속하여 집단 학살하였고, 이때 동래 지역에서도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하였다.
경과
부산광역시 동래구[당시 경상남도 동래군] 지역 국민보도연맹원이 예비 검속된 것은 1950년 7월 초로 동래경찰서 유치장과 경찰서 맞은편 소방서 건물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심야에 7~8명씩 철사에 묶인 채 트럭에 실려 학살 장소로 옮겨졌다. 1960년 송철순, 김세룡, 한원석, 추월량 등이 결성한 동래유족회에서는 동래경찰서 소속 경찰관으로부터 학살 현장을 알아내어 회동 수원지 입구와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 운봉 마을, 해운대구 우동 산기슭 등지에서 모두 713구의 유골을 찾아냈다. 특히 회동 수원지에서는 창이 턱을 뚫고 들어가 정수리로 관통해 나온 두개골이 나와 작업 인부들이 놀라 달아나는 일이 벌어졌다. 또 도장과 가죽 지갑 등 유품 상당수가 발견돼 피해자 신원이 일부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정확히 몇 명이 살해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결과
1960년 동래유족회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만들어 곽상훈(郭尙勳) 국회 의장을 만나 제출하였고, 장면(張勉) 총리로부터 50만 원을 지원받았다. 이 돈으로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 화지산 능선에 합동 분묘를 만들고 10월 28일 합동 위령제를 지냈다.
의의와 평가
동래유족회가 학살 당사자[당국]로부터 학살 현장을 알아내어 일부 피해자의 신원까지 확인한 일은 1960년 당시 유족회 활동의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 준다. 특히 회동 수원지에서 창에 찔린 두개골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현장에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는 증거로, 학살의 방법까지 생생하게 밝혀 준 사례이다
4) 반송동 운봉 마을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盤松洞雲峰-六-二五戰爭期民間人虐殺]
역사적 배경
6·25 전쟁 초기 대한민국 정부는 인민군을 도와 후방에서 이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국민보도연맹 회원들을 체포하여 집단 살해하였다. 해운대구 반송동 운봉 마을도 살해와 암매장된 장소들 중 하나다.
경과
부산광역시 동래구[당시 경상남도 동래군] 지역 국민보도연맹 회원이 예비 검속된 것은 1950년 7월 초로, 이들은 부산동래경찰서 유치장과 경찰서 맞은편에 있는 동래소방서 건물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심야에 7~8명씩 철사에 묶인 채 트럭에 실려 학살지로 이동되어 집단 살해를 당하였다. 이 일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1960년 9월 5일 동래유족회를 결성하여 유골 발굴에 나섰다. 학살 현장인 반송동 운봉 마을은 464m의 운봉산 기슭에 있는 자연 마을로, 학살이 저질러질 당시 인적이 매우 드문 곳이었다. 이는 동래유족회 총무 송철순의 부탁을 받은 부산동래경찰서 소속의 한 경찰관이 알려 주어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과
반송동 운봉 마을 인근 야산에서 유골을 발굴한 송철순이 사망하여 반송동 운봉 마을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 현장의 정확한 위치나 피해 규모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송철순은 2001년 “생각하였던 것보다 많은 수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당시 정확한 지점을 찾지 못하여 발굴을 못 한 곳도 있다.”라고 증언하였다.
의의와 평가
반송동 운봉 마을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 사건은 제대로 조사된 적이 없다. 1960년 유골을 발굴하였다고는 하지만 송철순의 진술이 전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이곳은 조사하지 않았다.
5) 동삼동 미니 공원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東三洞-公園六-二五戰爭期民間人虐殺]
역사적 배경
6·25 전쟁 초기 부산형무소에는 남로당 활동 등을 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좌익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 회원, 제주 4·3 사건으로 형을 선고받은 수감자 등이 한꺼번에 수감되어 있었다. 형무소 내에서 처형이 이뤄지기도 하였지만, 수감자 중 일부는 병에 걸리거나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해 숨지기도 하였다. 시신은 바다에 버려지거나 야산 등에 암매장되었다.
경과
1950년 9월 어느 날 심야에 트럭에 실려 온 시신 200~300구가 동삼동 미니 공원 일대에 암매장되었다. 동삼동의 지역 주민 서너 명이 이를 목격하였는데, 그들 중 일부는 시신을 직접 묻기도 하였다고 한다. 목격자들은 부산형무소에서 싣고 온 시신들로 추정된다고 증언하였다. 시신을 대충 묻어 외부로 신체의 일부가 드러나면 이를 주민들이 흙으로 덮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시신 중에는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고 옷이 완전히 벗겨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처형된 뒤 이곳으로 옮겨졌는지, 아니면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질병 등으로 숨진 시신인지 명확하지 않다. 수백 구의 시신이 한꺼번에 트럭에 실려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사에 의한 시신으로 보기는 어렵다.
결과
1960년 4·19 혁명 직후 피학살자유족회가 결성되면서 전국적으로 유골 발굴이 이루어졌지만, 이곳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암매장 현장 위로 4차로 도로가 설치되어 유골 발굴을 통한 사실 확인이 힘든 상황이다. 암매장 사실을 잘 아는 지역 주민들이 지난 2000년경 현장에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였으나, 관계 당국이 만류하여 주민들은 위령비 대신 솟대 2개를 세웠다.
의의와 평가
동삼동 미니 공원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 현장은 신평동 동매산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 현장과 더불어 부산형무소 집단 학살 사건의 진상을 잘 보여 주는 역사적 현장이다.
6) 오륙도 인근 해상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五六島隣近海上六二五戰爭期民間人虐殺]
역사적 배경
1950년 7~8월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를 집단 살해하기 시작하였다. 학살은 주로 총살과 수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내륙의 야산 등지에서 사살할 경우 눈에 띄기 쉽고 매장도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부산이나 경상남도처럼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에서는 해상에서 사살하거나 산 채로 물속에 던져 수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과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들은 배에 실려 오륙도 근처 해상으로 끌려갔다. 선상에서 사살된 경우도 있었지만, 서너 명이 손발을 한데 묶인 채 수장된 경우도 있었다. 징발한 어선이 동원되었지만 미군 선박이 이용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1950년 7월부터 8월 사이 경찰과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에 소집돼 부산 형무소에 수감된 국민보도연맹원 중 상당수가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결과
오륙도 근처는 조류가 매우 강한 곳이다. 위치에 따라 거센 소용돌이도 일어 이곳에 빠지면 헤쳐 나오기가 불가능하다.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 해안에서 수장된 시신들 중 일부가 일본 쓰시마 섬까지 떠내려갔다.
의의와 평가
오륙도 앞 해상은 바다에서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인 현장이다.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혈청소 앞 바다에서도 보도 연맹원 등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나 피해 규모는 오륙도 현장이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일이라 증거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7) 신평동 동매산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新平洞-六-二五戰爭期民間人虐殺]
역사적 배경
6·25 전쟁 발발 직후 수세에 몰린 대한민국 정부가 남한 내 좌익 세력이 인민군에 협조할 것을 우려하여 부산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의 회원을 살해하였다. 피해자 중에는 6·25 전쟁 전에 남로당 활동 등을 이유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적법한 절차 없이 불법적으로 살해되었다.
경과
1950년 7월부터 9월 사이 사하구 구평동[지금의 신평동] 동매산[독뫼산] 8부 능선에서 부산형무소에서 끌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160여 명이 수차례에 걸쳐 총살되었다. 처형된 시신은 3개의 구덩이에 암매장되었는데, 피살자 중에는 여성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골의 상당수가 현재까지 미발굴 상태로 남아 있다. 피살자들이 사살되기 직전 “반장이 도장을 찍으라고 해서 찍었을 뿐인데 내가 왜 죽어야 하느냐?”고 거세게 항변하였다는 목격자의 증언을 볼 때, 피살자 중 상당수는 부산형무소에 일시 구금되었던 국민보도연맹의 회원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을 취재하던 『부산 일보』 기자가 2001년 4월 8일 암매장지 3곳 중 60여 명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에 대한 유골 발굴을 시도하였고, 수습된 유골 일부가 남구 대연동에 있는 문수사에 보관되어 있다.
결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신평동 동매산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 사건을 공식 확인하였다. 유골 발굴이 시도되었던 현장에 암매장지임을 알리는 표지가 세워져 있으며, 보도연맹유족회가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동매산은 부산 지역에서 발생한 여러 집단 살해 사건 가운데 유일하게 유골을 발굴하여 사실 관계가 확인된 현장이다.
8) 암남동 혈청소 앞 해상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巖南洞血淸所-海上六二五戰爭期民間人虐殺]
역사적 배경
6·25 전쟁 초 대한민국 정부는 남한 내 좌익 세력이 인민군에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하였다. 암남동 혈청소 앞 해상에서도 민간인 상당수가 총살 또는 수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혈청소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광견병이나 천연두 등의 백신을 만들던 곳으로 당시 일반인의 접근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따라서 은밀하게 학살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이었다.
경과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주민 양모[2000년 증언 당시 82세]는 1950년 7~8월 혈청소 앞 해상에서 국민보도연맹원이 총살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형무소 재소자들이 총살된 곳은 혈청소에서 배로 20분가량 떨어진 나무 섬이라고 들었다”면서 “바다 한가운데서 벌어진 일이라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지만 당시 온 동네에 보도연맹원이 총살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양모는 “송도 해안에서 혈청소까지 가는 길이 손수레 하나도 지나기 힘들 정도로 좁은 오솔길이었기 때문에 충무동 분뇨 저장소 인근에서 사람들을 배에 태워 나무 섬까지 간 것 같다”고 설명하였다.
해방 이후 문학가동맹에 가입하였다는 이유로 부산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최모[2001년 증언 당시 80세]도 “3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심야에 모두 끌려 나갔는데 혈청소 인근 해상에서 수장된 것으로 들었다”라고 증언하였다.
결과
혈청소 앞 해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나무 섬이 작은 무인도이기 때문에 시신은 모두 바다에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피살자 중에는 부산 형무소에서 끌려온 좌익 재소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주민 증언에 따르면 총살된 것으로 보이지만 산 채로 수장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의의와 평가
바다와 접한 지역에서는 학살된 시신의 상당수가 바다에 버려졌다. 여러 명의 손발을 한데 묶은 뒤 그대로 바다에 빠뜨린 경우도 있고, 작은 섬이나 선박 위에서 사살한 뒤 바다에 던진 경우도 있다. 암남동 혈청소 앞 해상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이 이 같은 학살의 전형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9) 동래베네스트 골프클럽 터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東萊-六-二五戰爭期民間人虐殺]
역사적 배경
국민보도연맹은 과거 좌익 경력자들의 교화와 관리를 위해 1949년 국가에서 주도하여 결성된 단체이다. 6·25 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 정부가 남한 내 좌익 세력이 인민군에 협조할 것을 우려하여 좌익과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포함된 국민보도연맹 회원들을 예비 검속하여 살해하였다. 이때 동래군에서도 다수의 국민보도연맹 회원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집단 학살을 당하였다.
경과
동래군 지역 국민보도연맹 회원이 예비 검속된 것은 1950년 7~8월경이다. 경찰은 국민보도연맹 회원을 소집한 뒤 곧바로 체포하였으며, 부산동래경찰서 유치장과 경찰서 맞은편에 있는 동래소방서 건물에 구금하였다. 이때 구금되었던 송철순[2000년 당시 70세]은 “당시 소방서 건물에 동래 지역 국민보도연맹 회원 200여 명이 함께 갇혀 있었다.”라고 증언하였다. 이들은 심야에 7~8명씩 철사에 묶인 채 트럭에 실려 나갔다. 20여 일 동안 동래소방서 건물에 붙잡혀 있었던 송씨는 한 경찰관의 도움으로 풀려나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결과
1960년 4·19 혁명 직후 결성된 동래유족회는 유골 발굴에 나섰고, 현재의 동래 베네스트 골프 클럽 인근에서 유골 상당수를 찾아냈다. 동래 베네스트 골프 클럽 터를 포함하여 동래유족회가 발굴한 학살 현장 4곳에서 나온 유골은 713구에 달했다.
의의와 평가
동래 베네스트 골프 클럽 자리는 학살 당시 숲이 우거진 야산이었다. 동래 베네스트 골프 클럽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 사건은 내륙 지역에서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사건의 전형적인 사례로, 예비 검속에서 사살과 암매장까지 전 과정이 매우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집단 살해 장면을 직접 본 목격자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10) 쓰시마 해역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
역사적 배경
6·25 전쟁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수없이 저질러졌는데, 인민군 미점령 지역이던 부산에서는 전쟁 초기 예비 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과 부산 형무소 재소자들이 집단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 특히 부산과 같이 바다를 접한 지역에서는 시신이 바다에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처리가 간단하고 증거를 감추기가 쉽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경과
피해자를 일일이 총살 등의 방법으로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고, 여러 명을 한데 묶어 바다에 던져 살해하기도 하였다. 다른 곳에서 살해한 시신을 바다에 수장하기도 하였는데, 이때는 징발된 어선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살해된 시신 중 일부가 대한 해협 물살에 휩쓸려 쓰시마까지 표류하였다. 한데 묶인 시신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쓰시마 섬에서 발행되는 신문인 『대마 신문』 아카시 마사모[2001년 증언 당시 80세] 사장은 1950년 9~10월께 이즈하라 항구에서 시신 5구가 새끼줄에 손발이 서로 묶인 채 어선 갑판에 놓여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일본 어부들이 시신을 인양해 경찰에 신고하였고 부검을 통해 한국인임이 확인되었다.
결과
일본인들은 인양한 시신을 그대로 매장하거나 화장한 뒤 사찰에 안치하였다. 쓰시마 섬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사찰인 다이헤이사[太平寺]에는 화장한 유골을 안치한 납골당과 비석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대한 해협은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하다. 이런 조건에서 시신이 쓰시마 섬까지 흘러갔다는 사실은 학살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유골의 증언 한겨레21 제1207호 18.4.9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현장을 찾아서…
곳곳에서 부녀자와 아이들 유골 다량 출토
처참하게 학살당한 유해들은 67년 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었다. 무엇이 나무뿌리이고 사람의 넙다리뼈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발굴팀원들이 매장터에서 찾아낸 유해들을 바구니에 담아놓았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의 5차 유해발굴 개토제(뫼를 쓸 때, 흙을 파기 전에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가 열린 2월22일, 아직 언 땅이 녹지 않아 삽으로 흙을 파내기가 어려웠다. 한낮이 돼 햇볕이 내려앉자 땅이 녹아 질퍽거렸다. 박선주 공동조사단 유해발굴 단장(충북대 명예교수)은 “돌아가신 분들의 유해가 여러 겹 켜켜이 쌓여 있어 한분 한분 제대로 발굴해서 모시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부녀자의 것으로 보이는 비녀 여러 개, 일가족으로 보이는 부부와 젖먹이 아이의 유해가 함께 출토됐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90여 개 비녀
한 여인이 소유했던 것으로 보이는 왼쪽 약지 은반지가 어린아이의 뼈와 함께 발굴됐다. 반지를 선물한 이는 누구였을까.
어린아이의 갈비뼈 사이에 작은 구슬이 나왔다. 아이는 저 구슬을 꼭 쥐고 있었을 것이다.
유해 속에서 사용되지 않은 M1 소총용 총알 8발이 클립째 발굴됐다.
참여정부는 2005년 제정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를 만들었다. 그에 따라 1950년 한국전쟁 전후 국가 공권력으로 숨진 민간인을 전면 조사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유해를 발굴해 조사했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전국 168곳의 지표조사를 한 뒤 13개 지역을 발굴하고, 유해 1617구와 유품 5600여 개를 수습했다. 그러나 2010년 이명박 정부에서 진실화해위가 활동을 끝내면서 유해발굴 사업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뜻있는 시민단체들이 공동조사단을 만들어 2014년 2월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일대에서 1차 발굴을 했다. 발굴 사업은 지난해 4차까지 진행됐고,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일대에서 5차 발굴이 시작됐다.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 아산에서 1950년 9월부터 1951년 1월까지 북한군 점령 시기에 부역 혐의가 있거나 부역 혐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민간인 800여 명이 학살됐음이 확인됐다. 민간인을 학살한 이들은 온양경찰 등 국가 공권력과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 태극동맹 등 우익 청년단체였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해의 특징은 여자와 아이의 유골이 많았다는 것이다. 부역자로 지목된 이들은 물론 그 가족까지 붙잡아 학살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선 90개 넘는 비녀가 발견돼 당시의 참상을 전했다.
진실화해위의 2009년 보고서를 보면, 참상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온양경찰서 수사계에서 일한 임○○씨는 “부역 혐의자가 너무 많아 온양결찰서 유치장뿐만 아니라 경찰서 뒷마당에까지 구금했다. 매일 밤 트럭으로 수십 명씩 부역자들을 처형 장소로 실어다 처형했다”고 증언했다. 부역 혐의자들은 주민들의 증언이나 밀고로 체포됐고, 조사 과정에서 구타와 전기고문 등이 저질러졌다. “학살 장소에 주검이 가득했고 어린아이는 하루이틀 울다가 죽었다”(생존자 임○○씨)는 증언도 있다. 진실화해위는 이 학살에 대해 “경찰과 우익단체들이 적법한 절차 없이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행위는 반인륜적 국가범죄”로 규정했다.
연좌제 겁나 뒤늦게 찾은 학살터
어린아이의 뼈와 어른 신발, 그리고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고무신이 발굴됐다.
홍수정 발굴단 상황실장(오른쪽)과 단원들이 발굴된 유해를 아세톤으로 세척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족 대부분은 학살이 일어나고 67년이 지나도록 연좌제가 겁나 부모와 형제가 학살된 매장터를 찾지 못했다. 이날 처음 학살터를 찾은 박주순(82) 할머니는 “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가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그날 부모님과 가족들이 이유도 모른 채 이곳에 끌려오다 엄마, 여동생, 남동생과 기적적으로 대열에서 도망쳐 동네 화장실에 숨었다. 이윽고 굉음의 총소리가 계속 났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당시를 떠올리는 박 할머니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1973년 미국 이민을 떠난 박아무개(75)씨는 유해발굴 소식을 언론으로 전해들은 뒤 한걸음에 태평양을 건너 고향을 찾았다. 박씨는 “바로 위 누님이 최근 숨지기 전 ‘외부 사람은 물론 아이들, 며느리에게까지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절대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세상이 또 바뀌면 우리도 아이들도 죽을 수 있다고 했다”고 전했다. “시골 사람들이 뭘 알았겠느냐. 정치 이념을 모르는 우리 부모님은 북한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국가가 나서서 유족들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 박씨는 “내 이름을 지면에 싣지 말라”고 거듭거듭 당부했다.
유가족인 김광욱(73)씨는 유해발굴 기간에 발굴단을 열성적으로 도우며 현장을 지켰다. 그의 아버지 삼형제가 이곳에서 함께 학살됐다. 집 안 마루 밑에 숨어 지내던 아버지와 콩밭에서 일하던 아버지 형제들을 동네 청년들이 경찰서로 끌고 갔다. 며칠 뒤 어머니가 면회를 갔지만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경찰서 직원이 “(당신 남편은) 금광에 끌려가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지난 3월31일 다시 찾은 현장에서 안경호 발굴조사단 총괄팀장(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40일간의 유해발굴을 종료하며 “여리디여린 아기 갈비뼈와 엄마 신발 속 발뼈와 총탄으로 구멍나고 일그러진 머리들을 확인했다. 이보다 더한 참담함이 어디 있겠느냐”는 심경을 밝혔다.
올해는 제주4·3이 벌어진 지 70년 되는 해다. 제주4·3과 육지에서 일어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대량학살은 사실상 하나의 사건이다. 1948년부터 제주에서 섬 주민 3만여 명을 무참하게 죽인 이승만 정권은 1950년 터진 한국전쟁을 전후로 전국 최소 168곳에서 수많은 이를 집단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 출신으로 소설 <순이 삼촌>을 통해 4·3의 참상을 처음 한국 사회에 전한 작가 현기영은 언론 인터뷰에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서 있는 기념비엔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그 사실을 잊는 것이다. 그러면 홀로코스트가 다시 일어나고 말 것이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고 했다. “(이 내용을) 4·3에 대입해보라. 4·3보다 무서운 것은 국민이 그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기억하고 재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자꾸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려는 건 이같은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가.”
학살지 168곳 중 18곳 발굴 그쳐
안경호 총괄진행 팀장이 매장 추정 지역에서 흙을 파내고 있다.
유족 김광욱씨가 학살당한 아버지가 끌려 올라간, 마지막 길을 걷고 있다.
김소현 발굴단원이 유해들을 정리하고 있다./ 학살터를 처음 찾은 유가족 박주순 할머니가 발굴된 유해들을 살펴보고 있다.
진실화해위가 그동안 밝혀낸 민간인 학살 ‘킬링필드’는 168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정부 차원의 발굴은 13곳으로 끝났고, 공동조사단은 5곳을 발굴했을 뿐이다. 시민들과 유가족, 일부 뜻있는 지방자치단체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정부는 학살된 민간인들의 유해가 모두 발굴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루속히 학살터에서 검은 흙을 거둬내 숨진 이들과 유족들의 한을 풀어야 한다. /아산(충남)=사진·글 김봉규 선임기자
*참고 문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5차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료집>(2018)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자료집>(2017)
Strange Fruit - Billie Holi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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