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료 鄭泰秀
질그릇의 노래 (이행숙)
홍시 (이종현)
질그릇 /尹錫山
두레반 -오탁번
대나무 살강 전숙자
질그릇 톈허
임대료 鄭泰秀
이 몸의 원재료를 거슬러 올라가니
빅뱅(Big Bang)*에 터진 원소 우주를 떠돌다가
지구와 조상을 거쳐 잠시 받은 빚덩이.
한 백 년 빌렸더니 환원(還元)의 날 다가온다
본디 내 건 줄 알고 임대료를 잊었었네
원자재 돌려 줄 그날 무엇으로 갚을까.
질그릇의 노래 (이행숙)
고운 얼굴 단장하고 손님상에 올라앉은
미끈한 본차이나 부럽지는 않았어요.
날마다 당신 손때로 옷 입으며 사는 걸요
무심한 그 손길에 시나브로 금이 가도
흘리시는 눈물마저 내 몸 안에 스미기를
질박한 꿈 하나 담고 부대끼며 살아요.
치유 못한 상처로 내 삶이 깨지거든
가꾸시는 화단가에 맘 한 자락 놓아줘요.
흙 한 줌 눈비에 말아 민들레꽃 키울게요.
홍시 (이종현)
떫은 여름 우려낸 노루 꼬리 햇살들이
감나무에 똬리 틀어 燈 하나 걸어두면
툇마루 채반 속 가득 불 밝히는 어머니.
질그릇
/尹錫山
경주박물관 한 귀퉁이, 조명마저 다소 비켜간 자리
못생긴 질그릇 하나 놓여 있다.
본래부터 그 자리가 제 자리인 양
자리를 잡고 앉은 질그릇.
아무것도 보일 것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그저 그렇게 놓여져 있다.
있는 속,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사는 요즘.
아무리 속 다 드러내놔도
들여다보는 이 하나도 없는,
지지리 못난 질그릇 하나
두레반
-오탁번
잣눈이 내린 겨울 아침, 쌀을 안치려고 부엌에 들어간 어머니는
불을 지피기 전에 꼭 부지깽이로 아궁이 이맛돌을 톡톡 때린다
그러면 다스운 아궁이 속에서 단잠을 잔 생쥐들이 쪼르르 달려나와
살강 위로 달아난다
배고픈 까치들이 감나무 가지에 앉아 까치밥을 쪼아 먹는다
이 빠진 종지들이 달그락대는 살강에서는 생쥐들이 주걱에 붙은
밥풀을 냠냠 먹는다 햇좁쌀 같은 햇살이 오종종 비치는
조붓한 우리집 아침 두레반
대나무 살강
전숙자
대나무 발 엮어 만든 살강
옹기 종기 모여 앉은
검정 뚝배기
하얀 몸에 청띠 두른
사발 대접 보새기
살강 밑에 항아리 집장 익는 냄새
주린 배 부추기고
아궁이 보리집 불을 지피면
툭탁 툭탁 보리집 타는 소리
어머니 삼배 적삼 속 에
땀띠 마저
툭툭 쏘아 붙치네
질그릇
톈허
농부는 밥이 수북이 담긴 질그릇을
양손에 받쳐 들고 있다
생명은 한 그릇의 쌀밥과 함께
이어져 왔다
질그릇에 쌀밥이 담기지 않으면
밥을 먹는 사람은
이제 영원히 밥을 먹지 못한다
질그릇이 엎어지면
그것은 농부의
무덤으로 변해 버린다
- 톈허 시집 『바람이 불었다』, 한국문연
함양 일두고택
시렁 : 물건을 얹어 놓기 위하여 방이나 마루 벽에 두 개의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
살강: 그릇 따위를 얹어 놓기 위하여 부엌의 벽 중턱에 드린 선반. 발처럼 엮어서 만들기 때문에 그릇의 물기가 잘 빠진다.
살강은 부엌의 부뚜막 및 조리대 위의 벽 중턱에 대나무로 발을 엮거나 통판으로 만들어 밥그릇이나 반찬그릇을 올려놓고 쓰기에 편리하도록 기다랗게 드리운 선반을 말한다. 살강은 부엌의 주된 살림살이로 열려있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간이식 선반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살강은 통풍이 잘 되어야만 원래 제 기능을 잘 할 수 있으므로 살강이 부착된 벽면에는 두 개 정도의 구멍을 뚫어서 보다 통풍이 잘 되도록 하였다. 살강을 통판이나 대나무로 엮은 발로 만든 까닭은 씻어 놓은 그릇의 물기가 잘 빠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살강을 판재(板材)로 만들경우 미관상 보기는 좋으나 물 빠짐이 용이하지 못하여 장기간 사용하게 되면 판재의 색상이 변하면서 썩어 들어가는 단점이 있다.
살강은 대부분 1층의 구조로 되어 있지만, 더러 살강 위에 한 개의 선반을 더 얹어서 2층 구조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윗 칸의 선반에는 소반이나 허드렛상을 얹어 놓는 등 부엌의 공간을 보다 넓게 활용하기 위한 수납공간으로 사용하였다. (두산백과)
살강
넓살문 사이로 넘늘거리는 거미줄. 검정 비로도 같은 그을음에 묻힌 정지가 있는 살강에는 언제나 빈 그릇들이 가지런했다.
벽 중간쯤 대나무 쪼가리를 발처럼 촘촘하게 엮어서 드린 살강에 대접이며 접시와 밥그릇들이 새치름하게 엎드려 있다. 엎어져 물기를 말렸다가 때가 되면 밥그릇은 싸라기밥이거나 곱삶은 꽁보리밥이거나 무밥을 담았다. 국그릇은 시래깃국이거나 쑥국도 뜨고 콩나물국이거나 김치국밥도 떴다. 접시는 광대나물이거나 돌나물을 담았다.
부엌 뒷문을 열면 거기 수더분한 장독과 털버덕 주저앉은 옹기들이 있고 달빛이 환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맛깔손이 있고 물 한 사발이 드맑았다. 장독대와 뒷문으로 드나드는 일고여덟 짧은 걸음에도 마음 졸이며 애를 태우는 비손이 있었다.
이월 초하룻날이면 바람할미도 모신다. 대나무 가지에 파랑, 노랑, 빨강, 하양, 검정색 천을 매달아 장독대 옆에 세워 둔다. 햇귀가 솟을 때 새 바가지에 물을 담아 장독 위와 살강에 짚으로 똬리를 틀어 올려놓고 집안의 아무 걱정 없이 바라고 원하는 일을 빌며 소지를 올린다.
어머니는 엇박이 자식들의 끄레발을 거니채고도 주름지고 간간한 치마폭에 품고 어루만지면서 부엌으로 날면들면 하셨다. 도둑눈이 내린 날에도 새벽동자를 짓는 아궁이에 불을 가만가만히 지피셨다.
어느 해 보릿가을 무렵 품삯을 미리 정한 돈내기로 모를 심어주고 번 돈으로 돼지새끼를 사서 우리에 넣었는데 이틀 만에 죽고 말았다. 부엌문을 안으로 지그리고 살강 앞에서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으시던 어머니는 구멍수가 있는 듯 그늑하게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아침상을 차리셨다. 곱삶은 보리밥에 겉절이김치랑 된장찌개가 놓인 쥐코밥상이지만 참 맛났다.
아마도 열서너 살이었지 싶다. 물을 떠먹으려고 사기대접을 내리다가 부엌바닥에 내동댕이치듯 떨어뜨렸다. 대접은 와장창 부서졌다. 어머니는 흩어진 사금파리를 주워 모으며 한 마디 고추 먹은 소리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 뒤로는 저지레를 하지 않으려고 바가지로 물을 떠마셨다.
아버지는 가시고 어머니 혼자 살강에서 그릇을 내려 상을 차리신다. 살강은 어머니의 삶이었다. 손정란 (수필가·경남과학기술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교실 강사)16.4.28경남일보
점, 독(동), 옹 등의 접두어가 말해주는 것, '동막골'은 어디서 온 말일까?
내가 주목한 '한국지명총람'의 지명들은 접두어를 '점', '독(동)', '옹', '사기' 등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점'은 점, 점촌, 점들, 점등, 점토굴, 점곡, 점골들, 점골제, 점골논, 점골보, 점모실, 점앞, 점너메, 점몰, 점텃골, 점골산, 점터새미, 점굴고랑, 점밧골, 점터샘, 점재, 점택굴, 점꿀, 점탯들, 점미테, 점터, 점굴, 점막골, 점등고개 등이다. '독(동)'의 접두어를 가진 지명은 독굴, 독골, 동막골, 독배기, 동락, 독점재, 독점, 독점보, 독정들, 독점굴, 동막, 동막동, 동막리, 독짐재, 독줌산, 독적골, 독짓골, 독구막골, 독구점골, 독적골 등이다. '옹'이라는 접두어를 가진 지명은 옹점, 옹구막, 옹구점, 옹점리, 옹기점터 등이다. '사기'라는 접두어를 가진 지명은 사깃등, 사기점골, 사그점골, 사기점, 사그점 등이다. 이외 백틋골재, 백도재, 백도치 등도 옹기점과 관련된 지명들이다. 이렇게 해서 전남지역 옹기관련 지명이 168개소가 나왔다. 대개 '점'의 접두어를 사용하는 곳이 가장 많다. 들이나 촌, 언덕(등), 산이나 고개, 논이나 들판, 계곡이나 고랑 등의 지형을 토대로 한 토착어로 구성되어 있다. 어디서 들어봤음직한 지명들이지 않은가?
미력옹기 가마 불 때는 모습. 작가 제공
강진군 칠량면 봉황리는 본래 '독점'이라고 부르던 마을이었다. 큰 항아리를 만드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근대 이후에는 주로 '공방'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예술가라는 존중의 의미도 들어있다. 하지만 '독'이나 '옹' 등의 접두어를 가진 지명은 하대 받던 공간으로 인식되기 일쑤였다. 지금 무형문화재로 존중받는 무굿이나 기예능 보유자들이 천하게 취급받던 맥락과 같은 것이다. / 이윤석 인문학 시민기자ㆍ남도민속학회장
고려청자 유행에 밀렸던 ‘질그릇’ 웰빙 바람 타고 되살아나다
정윤석 옹기장은 진흙을 송판처럼 넓적하게 만든 뒤 이를 이어 붙여 옹기를 만든다. 기술과 힘이 필요하다. 그가 만든 칠량 봉화 옹기는 다른 지역의 옹기보다 배가 불뚝하다. 그래서 발효 기능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장독대는 정성의 상징이다. 어머니는 객지에 나간 자식의 건강과 성공을 비는 기도를 장독대에서 했다. 아이를 점지해달라는, 삼신할머니에게 드리는 치성의 무대 역시 장독대였다. 정성 들여 빚은 장과 술이 크고 작은 장독에 담겨 가족들의 삶과 함께했다. 집안끼리 원수가 되면 장독을 깨는 것으로 분노를 표시했다. 장독대가 깨지는 것을 집안이 망하는 징조로 여긴 탓이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술맛이 변하면 나라에 변고가 생긴다고 여겼다. 그런 장독대의 주인공은 옹기다. 자연과 신의 섭리와 도움이 옹기를 통해 인간에 전해졌다.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가 보편화되며 옹기는 한때 일상의 뒤편으로 사라질 뻔했으나 웰빙 바람이 불며 ‘숨쉬는 장독’으로 부활했다.
옹기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은 중요무형문화재 96호 옹기장인 정윤석(73·사진)의 ‘옹고집’ 덕분이 크다. 모두 옹기를 버리고 돌아설 때, 그만은 투박한 진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전남 강진의 칠량면 봉황리는 바닷가 마을이다. 700년 전부터 이곳 사람들은 옹기를 만들어 생활했다. 옹기를 굽기에 적당히 차진 진흙이 천지에 널려 있었고, 만들어진 옹기는 곧바로 마을 앞에 정박한 배로 실어 날랐다. 대대로 옹기를 구워 살았다. 마을 한가운데는 공동으로 쓰는 가마가 다섯개나 있었다. 고려청자가 탄생한 강진은 고려시대의 가마터 17곳이 발견된 곳이다.
정씨의 외가와 처가 모두 옹기를 굽던 옹기장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서 모두 27가구가 옹기를 구웠어요. 89년에는 한곳만 남았어요. 다들 청자를 굽거나 다른 일을 했어요.”
앞서 70년대 후반 정부는 서해안에서 청자 보물선이 발견되자 강진에 청자박물관을 세우며 청자 복원사업에 몰두했다. 너나없이 옹기에서 도자기로 바꿨다. 정치적 바람은 청자 복원지 공사 인부 노릇을 하다가 연줄을 대어 도예가로 변신한 사람이 나올 정도로 뜨거웠다. 수백년 이어온 전통의 특산품을 만드는 일은 천한 짓이 됐고, 천여년 전에 쓰다가 사라진 역사적 복제품을 만드는 것은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고귀한 예술작업’이 된 셈이다.
정씨의 부친은 옹기장이 아니라 옹기를 팔러 다니는 장사를 했다. 가난했던 탓에 그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쉬었다가 16살에야 졸업했다. 중학교 진학도 못했다. 스스로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홀로 서울에 올라왔다.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등포는 난장판이었다. 그는 싸구려 여인숙에서 잡일을 하다가 두달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옹기장이 다른 일에 비해서 많은 품삯을 받는 것을 보고 옹기 제작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외숙부에게 기초부터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빨리 일을 배워 5년 만에 기술자가 되었다. “스무살 때 열 말 넘게 들어가는 큰독을 만들 줄 알았어요.”
하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빚만 늘었다. 옹기를 실어 나르는 선주만 좋은 일을 했다. 매출의 반을 선주가 가져가니 옹기장들은 힘들여 만들기만 한 셈이었다. 그래서 정씨는 직접 판매에 나섰다. 배를 빌려 자신이 만든 옹기를 싣고 남해의 섬을 돌아다니며 옹기를 팔고 다녔다. 중간 유통 마진을 없앤 것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당시엔 옹기를 안전하게 운송하는 데 배가 최적의 수단이었다. 그는 배를 빌려 부산, 마산 등 남해안 일대와 거제도, 제주도까지 가서 옹기를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사정은 나아졌다. 90년대가 되자 건강과 웰빙 바람을 타고 전통 된장·고추장·김치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이 늘어나며, 전통 옹기를 찾는 이도 늘어났다. 옹기가 ‘살아 숨쉬는 그릇’으로 새롭게 알려지며, 통기성 있는 그릇에 발효식품을 저장하고 숙성시키는 원리가 새삼 가치를 인정받게 된 덕분이었다.
그는 진흙을 넓적한 판처럼 만든 타래미(질판)를 쌓아 잇는 ‘쳇바퀴 타래미 기법’을 쓴다. 다른 지역의 옹기는 떡가래처럼 만든 진흙을 돌려 쌓아 만들지만 쳇바퀴 타래미 기법은 옹기를 더 쉽고 빠르게, 그리고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 “칠량 옹기는 가운데 부분이 유독 볼록하게 나온 것이 특징입니다. 튼튼하기 때문에 볼록하게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발효도 더 잘돼요.”
2008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 한국관이 문을 열었을 때 그의 옹기 3점이 들어가 지금도 전시되고 있다.
옹기장이란
신라때 와기전 설치 기와·그릇 구워 조선시대 경공장에도 장인 100여명
장식용 도자기인 청자와 백자는 사기이고, 식기와 쌀독, 간장독 등 일상생활에 쓰인 그릇은 옹기였다. 옹기에는 잿물 유약을 발라 구운 오지그릇과 잿물을 바르지 않고 그냥 구운 질그릇이 있다.
청자는 1250℃ 이상, 백자는 1300℃ 이상 높은 온도에서 굽고, 옹기는 1100℃ 이하에서 굽는다. 높은 온도에서 구우면 더 단단해지지만, 대신 자기처럼 무겁고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신라시대에는 기와와 그릇을 굽는 일을 관장한 와기전을 두었고, 조선시대는 경공장에 옹기장이 100여명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밥을 담아 먹는 하얀 막사발과 함께 질그릇에 흑갈유의 잿물을 입힌 옹기가 생활용기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옹기를 굽는 가마의 땔감으로는 오랜 시간 제 온도를 유지해주는 소나무 장작을 쓴다. 광택을 내는 유약은 납 성분이 많은 유해한 유약이 아니라, 풀을 태운 재와 소나무를 태운 재에 약토를 갠 유약을 만들어 쓴다. 질 좋은 점토를 반죽해서 응달에서 약간 건조시킨 뒤 떡메로 쳐서 판자 모양의 타래미로 만든 다음 물레 위에 올려놓고 돌려가며 타림질(다듬는 일)을 한다. 손으로 빚은 항아리는 그늘에서 15일 동안 말린다. 이 생옹기들이 30% 정도 말랐을 때 유약(잿물)을 바르고 음지에서 20일 이상 건조시킨다. 그런 다음 가마에 넣고 4일간 불을 때 완성한다. 15.6.16 한겨레
Hey There Delilah - Plain White 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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