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박지웅
에스컬레이터/ 최승호
몽실언니/ 박정남
사라진 동화 마을/ 반칠환
우리 시대의 역설/ 제프 딕슨
돈/ 김명인
동네 치킨집을 위한 변명/ 이상국
시의 경제학/ 정다혜
시인 앨범 3/ 김상미
밥알 하나/ 이안
시인들을 위한 동화/ 한명희
씨팔!/ 배한봉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박지웅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
배짱 한번 두둑하다
아예 울음으로 동네 하나 통째 걸어 잠근다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도무지 없다
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
칠 년 만에 받은 목숨
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매미가 울면 그 나무는 절판된다
말리지 마라
불씨 하나 나무에 떨어졌다
- 시집『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문학동네, 2012)
에스컬레이터/ 최승호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건 공짜이다.
부채가 큰 부자이거나
부채도 없이 가난한 사람이거나
천천히 혹은 빠르게 죽음에 인도되기까지
올라가고 또 내려오며
펼쳐지고 다시 접히는 계단들.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건 공짜이다.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든
궁둥이가 큰 바지 입은 사람의 뒷모습을
밑에서 쳐다보거나
고개돌려 저 밑계단의 태아들을 굽어보거나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건 공짜이다.
서두를게 하나도 없다 저승열차는
늦는 법이 없다, 막차가 없다.
- 시집 『진흙소를 타고』(민음사,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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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언니/ 박정남
안동을 떠나오며 꺼내본 부재중 전화 한통에는 안동 조탑리를 꼭 찾아보라고 재촉하고 있는데 저곳이 조탑리인지 조팝리인지 온 들이 조팝꽃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마침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권정생 선생이 종지기 하던 교회가 보이고 댕그랑댕그랑 종소리가 운다 들 가운데 단아한 5층 전탑 하나가 모양을 드러낸다 누가 찾아오면 선생은 옆구리에 불편한 오줌통을 차고 집 뒤 골짜기로 숨어들었다지만 마을 뒤쪽 생이 집 옆 작은 집은 보이지도 않고 수돗가에 앵두나무 한 그루가 서있어 몽실언니가 친정 와서 물 한 그릇을 떠서 아버지께 바치듯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 시집 『꽃을 물었다』 (문학의전당,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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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동화 마을/ 반칠환
더 이상 불순한 상상을 금하겠다
달에는 이제 토끼가 살지 않는다, 알겠느냐
물 없는 계곡에 눈먼 선녀가 목욕을 해도
지게꾼에게 옷을 물어다 줄 사슴은 없느니라
아무도 호랑이에게 쫓겨 나무 위로 올라갈 일이 없을 것이며
나무 위에 오른들 더 이상 삭은 동아줄도 내려오지 않느니라
흥부전 이후, 또다시 빈민가에 박씨를 물고 오는 제비가 있을 것이며
소녀 가장이 밑 없는 독에 물을 부은들 어디 두꺼비 한 마리가 있더냐
이 땅엔 더 이상 여의주가 남아 있지 않나니,
한때 지구 자체가 푸른 여의주였음을 알 턱이 없는 너희들이
삼급수에서 비닐 봉다리 뒤집어쓴 용이 승천하길 바라느냐
자아, 더 이상 철부지 유아들을 어지럽히는 모든 동화책의 출판을 금한다
아울러, 덧없이 붉은 네온을 깜박이는 자들이여
쓸데없는 기도를 금한다
하느님은 현세의 간빙기 동안 취침중이니
절대 교회문을 시끄럽게 두들기지 말거라
너희가 부지런히 종말을 완성할 때 눈을 뜨리라
- 시집『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시와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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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46 _1947 Cecil B White <맨날 추억에 사네>
우리 시대의 역설/ 제프 딕슨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 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작아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어졌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지혜는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있고 너무 지쳐서 깨어나며
너무 적게 책을 읽고, 탤레비젼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하며
거짓말은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가치있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찾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 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 버렸다.
공기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는 더 늘어났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더 나빠졌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시간은 늘어났어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
더 빨라진 고속철도
더 편리한 일회용 기저귀
더 많은 광고 전단
그리고 더 줄어든 양심
쾌락을 느끼게 하는 더 많은 약들,
그리고 더 느끼기 어려워진 행복.
돈/ 김명인
한때 나는 대학 입학금을 마련 못해 사흘 밤낮을
꼬박 울며 지샌 적이 있다
비웃지 마라, 그땐 그게 절박했었다
그렇다. 두 형들이 포기한 대학을
끝까지 마쳤던 것은 돈에 대한
맹목의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선탄부로 가정교사로 마침내 내 대학이 끝이 났을 때
배운 것이야 무엇이든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모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이 되었다
이 나라에서 돈 버는 길이란 투기거나 사기라고
일깨워준 저 7,80년대의 경제를 지나와
내가 집칸이나 장만한 것은 그 길에
밝아서가 아니라 아내의 맞벌이 덕이었다
그러나 돈이 돈을 거둬들인다고 뒤늦게 한탄한 아내여
남편은 백면의 여전히 주변머리 없는 서생일 뿐
무슨 주제로 헐거운 돈을 만났겠는가
그대의 눈썰미가 마련한 방 한 칸 차지하고 난 뒤로는
자주 목이 말랐고 자꾸만 부끄러웠다
그렇게 한번도 널 풍족히 누릴 수 없었다 해도
돈이여, 어느새 너는 내 발목을 잡고 있지만
나는 제게서 철저히 배반당하는 꿈을 요즈음도 꾼다
너를 돈이라 말하면 네가 돈이겠느냐
그게 인생의 목표쯤은 아니라 해도
- 시집『따뜻한 적막』(문학과지성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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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치킨집을 위한 변명/ 이상국
눈이 오다 그치고 어쩌다
한잔 생각이 간절한 저녁,
가게들이 더러 셔터를 내리는 그 시간에
마누라 눈치를 보아가며 기어이
후라이드 반 양념 반을 주문한다면
치킨집 주인도 좋아하겠지
벌거벗은 채 차례를 기다리던 닭들도
얼른 기름 가마 속으로 들어가며 몸을 풀겠지만
저녁 내내 어정거리던 알바 청년은
얼마나 신이 나서 골목길을 달려오겠니
거기다 소주나 맥주 천쯤 같이 시킨다면
초저녁부터 갑갑한 통 속에서
사내들의 오르내리는 목젖과
출렁이는 뱃구레를 그리워하며 그것들은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몸을 흔들겠지
걸그룹처럼 춤을 추며 달려오겠지
-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창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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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경제학/ 정다혜
시 한 편 순산하려고 온몸 비틀다가
깜박 잊어 삶던 빨래를 까맣게 태워버렸네요
남편의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을
내 시 한 편과 바꿔버렸네요
어떤 시인은 시 한 편으로 문학상을 받고
어떤 시인은 꽤 많은 원고료를 받았다는데
나는 시 써서 벌기는커녕
어림잡아 오만 원 이상을 날려버렸네요
태워버린 것은 빨래뿐만이 아니라
빨래 삶는 대야까지 새까맣게 태워 버려
그걸 닦을 생각에 머릿속이 더 새까맣게 타네요
원고료는 잡지구독으로 대체되는
시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시의 경제는 언제나 마이너스
오늘은 빨래를 태워버렸지만
다음엔 무얼 태워버릴지
속은 속대로 타는데요
혹시 이 시 수록해주고 원고료 대신
남편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 보내줄
착한 사마리언 어디 없나요
- 시집 『마지막 출근』 (문학의전당,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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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앨범 3/ 김상미
시를 우습게 보는 시인도 싫고, 시가 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시인도 싫고, 취미(장난)삼아 시를 쓴다는 시인도 싫고, 남의 시에 대해 핏대 올리는 시인도 싫고, 발표지면에 따라 시 계급을 매기며 으쓱해하는 시인도 싫다.
남의 시를 훔쳐와 제 것처럼 쓰는 시인도 싫고, 조금씩 마주보고 싶지 않은 시인이 생기는 것도 싫고, 文化林의 나뭇가지 위에서 원숭이처럼 재주 피우는 시인도 싫고, 밥먹듯 약속을 어기는 시인도 싫고, 말끝마다 한숨이 걸려 있는 시인도 싫다.
성질은 못돼 먹어도 시만 잘 쓰면 된다는 시인도 싫고, 시는 못 쓰는 데 마음씨는 기차게 좋은 시인도 싫고, 학연, 지연을 후광처럼 업고 다니며 나풀대는 시인도 싫고, 앉았다 하면 거짓말만 해대는 시인도 싫고, 독버섯을 그냥 버섯이라고 우기는 시인도 싫고, 싫어…
2004년 마지막 달, 시인들만 모이는 송년회장에서 가장 못난 시인이 되어 시야 침을 뱉든 말든 술잔만 내리 꺾다 바람 쌩쌩한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싫다, 싫다한 시인들 차례로 게워내고 나니
니체란 사나이, 내 뒤통수를 탁 치며, 그래서 내가 경고했잖아. 같은 동류끼리는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고! 벌써 그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까르르 웃어 제치더군. 바람 쌩쌩 부는 골목길에서
- 시집『잡히지 않는 나비』(천년의 시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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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 하나/ 이안
할머니한테 들은 고조할아버지 이야기
얼마나 가뭄이 지독했던지 먹을 게 없었다
어느 날 마루에 놓인 물동이 속에
밥알 하나 가라앉은 게 보였다
가난해도 양반 체면에
밥알 하나만 달랑 건져 먹는 건 욕이 될까 봐
물 한 동이를 통째 들이키셨다는,
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에
밥알 하나 가만히 떠올라 오는 이야기
- 동시집『고양이와 통한 날』(2008,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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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을 위한 동화/ 한명희
아주아주 옛날에는 사람들이 몸으로 글을 썼어요 고호가 귀를 잘라 그림을 그린 것처럼요 사마천이란 사람은 자기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잘라 글을 썼답니다
세월이 흘러흘러 사람들은 도구를 이용하게 되었어요 예세닌은 손목의 동맥을 절단했어요 그리고 거기서 나온 피를 펜에 찍었답니다 그가 쓴 시들은 비린내가 났지요
또 시간이 흘러 글쟁이들은 작업실을 갖게 되었답니다 보들레르는 창녀이자 애인의 방에서 트라클은 여동생이자 애인의 방에서 포는 사촌 여동생이자 아내의 방에서 작업을 했어요 아주 격정적인 작업이었지요
그리고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쟁과 내전, 불신과 검문, 폭력과 폭식, 기상이변에 광주민중항쟁 힌두쿠시 산맥 남쪽에서는 테러가 일어났고 애플은 아이패드를 내놓았지요 두바이유는 자주 백 달러에 육박했어요
요즘은 멀티태스킹이 대세입니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하면서 글을 써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영화를 보면서 글을 써요 짜깁기를 하면서 모자이크를 하면서 글을 써요 사람들이 점점 만능이 되어갑니다
- 계간 《시인시각》 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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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팔!/ 배한봉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그러다 녀석의 공책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방을 살펴보고 씨앗수를 알아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 시집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문학의 전당,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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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lasting Divine Poetry
시와 노래 출처: 詩 하늘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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