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그린트러스트, 부산일보, 부산은행 공동주최 부산공원문화 활성화를 위한 공원탐방 4번째에 앞서 공원아 놀자 전문위원들이 사전 답사를 다녀왔고, 보다 앞서 다녀왔던 기록을 뒤적여 옮겨 놓았다. 2009년과 2010년이었다.
세계에서 한 곳 뿐인 UN묘지 2009.04.19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길, 늘 지나치던 유엔묘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뭐 특별히 추모의 뜻이 있어 간 것도 아니고 그냥 요즘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보니 한번 둘러보자는 차원이었습니다. 어쨌든 매번 가지는 생각이었는데 이곳의 정문이 눈길을 끌게 합니다.
건축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 정문을 김중업선생이 설계한 것이라고 합니다 . 선생은 전통적인 형태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설계에 적용했다고 하는데 그가 생전에 설계했던 주한프랑스대사관,제주대학본관,진주문화회관,평화의 문 등도 그런 모티브를 적용한 사례들입니다.
그의 건축방식은 첫째, 건축몸체와 곡선의 지붕을 분리한다.
둘째, 전통목조건축의 구축성을 강조한다(기둥,곤포,서까래와 같은 구조체를 강조)
세째, 기둥은 보를 떠받이고 바닥은 기둥에 매달다 로 집약됩니다.
정문 현장은 그 말을 확인시켜 줍니다. 김중업선생의 건축적인 가장큰 특성은 바로 살아움직이는 선(곡선)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선은 가우디의 영향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시대와 건축가의 적절한 만남이지 않나 싶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이곳은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UN기념공원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21개국(전투지원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2,300명의 봉안되어 있습니다.
유엔공원은 한국전쟁 당시 개성,인천,대전,대구,밀양,마산의 가매장지에 있던 유해를 1951년 1월18일 이곳으로 이장을 시작하여 1951년 4월5일에 봉납되었습니다. 1955년 대한민국 국회에서 결의하여 묘지가 자리잡고 있는 토지는 무상으로 UN에 영구 기증되었습니다. 우리 영토가 아니면서 비자없이 들어갈 수 있는 외국영토입니다.
애초 UN군 전사자 약 11,000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벨기에,콜롬비아,이디오피아, 그리스. 필리핀, 태국 및 미국인 유해가 그들의 조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현재 관리는 1974년 이래 현재 전사자의 유해가 안장된 11개국으로 구성되는 재한 UN기념묘지관리위원회에 관리하고 있으며, 관리비는 각국에서 분담하는데 우리나라가 전체의 45%를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추모관과 기념관입니다. 이 건물 역시 건축가 김중업씨의 설계로 1964년 건립되어 있으며, 전몰장병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추상성, 영원성을 강조하는 기하힉적인 삼각형태가 특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념관에는 전쟁 당시 유엔군사령부가 최초로 사용했던 유엔기를 비롯히여 조성 당시의 사진과 기념물 각국에 세워진 위령탑 사진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익숙한 것들이라 눈여겨 보지 않았습니다. 지겹도록 주입된 반공교육의 덕택이지 않나 여겨집니다.
하지만 참전국들이 자기나라에다 세운 참전비며 추모비에 대해서는 좀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념관에 대해 안내하고 있는 친절한 아저씨입니다.
기념관을 나와 주묘역으로 가는 길
엄숙한 분위기와 정숙이란 단어를 절로 연상시킴니다.
도열한 가이즈까 향나무들이 이런 묘역에 어울리는 나무란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현재 묻혀 있는 참전국 전사자들의 현황입니다.
터기 여단의 묘역입니다.
이념을 떠나 유엔의 기치 아래 최초로 결의된 구제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이 공간이 오늘 존재합니다만
머나먼 이국땅에서 죽는다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솔직히 잘모르겠습니다.
가족과 살던 사회를 떠나, 비록 전우가 있기는 하지만
유엔묘지
배해수
- 님이시여
가을 하늘은 이렇게도 맑고 고운데
왜 누워만 있나요
님이시여
이념이 무엇이고 사상이 무엇이길래
무참히 피 흘리며
돌아가셨나요.
님이시여
꽃봉오리 같은 젊음을 불살라
보지도 못한채
서럽게 서럽게 떨어졌네요
님이시여
고향의 부모 형제가
애타게 기다립니다
어서 일어 나소서
참전국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습니다.
이곳을 조성할 엄동설한이라 황량한 상태에서 당시 현대그릅 고 정주영회장이 보리를 이식해서 한겨울에도 푸른 묘역으로 단장할 수 있었던 일화도 유명합니다.
무명용사의 길입니다.
일대를 둘러보고 나오며 유엔의자유와 평화를 위한 참전이라는 표현을 존중하고 싶었습니다.
예전에, 하마 80녀대 초니까 . 20 수년 전이겠습니다,
이 버들 아래서 친구와 사진을 찍었는데,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무엇하는지 ? 장소라는 것이 이렇듯 한시절을 기억하게 만드는 창구인듯 합니다 .
매력적인 건축입니다. (역부러 시간을 내어 다시한번 찾아볼 생각입니다)
5월4일 근처를 지나다 다시 한번 둘러 보았습니다. 시립박물관 앞 교차로에 있는 기념탑입니다.
유엔기념공원 정문 지붕의 선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기둥이 마치 사람이 지붕을 들고 서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머리와 두 팔을 이용해 지붕을 받치고 있는 듯...
천장으로부터 자연광이 들 수 있도록 한 것은 참 좋았습니다.
추녀끝과 빗물받이(?)도 ...
추모관에는 홍보비디오가 돌고 있었습니다. 외국인들이 더러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연세) 많은 단체 관광객도 가끔 보였습니다.
멀리 황령산 능선이 보입니다. 여기서 보니 새롭습니다. 산을 에워 싼 아파트며 치솟아 오른 빌딩이 없는 경관입니다.
이 묘지가 이곳을 지킴니다. 어떤 개발도 불가능한 곳으로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묘합니다.
영연방 위령탑 뒷쪽 (영연방<Commounwealth df nations>: 영국,캐나다, 호주,뉴질랜드,남아프리카공화국 )
묘역 전체를 통틀어 영국군 전사자가 가장 많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해외에서 싸우다 전사한 사람은 그곳에 매장한다는 이 나라의 관습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위령탑이 별도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날 외국인 참배객들이 제법 보였습니다. 유족인지 단순 관광객인지는 모르겠지만 ...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
총전사자 40,895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그중 미국이 36,492명입니다. 하도 많아 주 별로 전사자를 새겨놓았습니다. 그들의 죽음과 한.미 관계를 되짚어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전했던 베트남전(1965~1972: 총 4만5천 명 중 전사 5천 부상 1만9천 여명 )도 떠올려 봅니다.
문득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National Mall 한국전 위령탑과 거기 대리석에 새겨진 전사자들의 이름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1995년 12월에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비는 거기 것과 유사하다는 느낌입니다.
21개 참전국 국기들이 분수와 함께 펄럭이거나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그 시절의 유엔군과 요즘의 중동지역에 투입된 유엔군의 정의가 궁금해집니다.
유엔군 위령탑입니다.
비록 묘지공원이지만 부산에 이런데가 있을까 싶습니다.
참 쉴 곳 없는 부산입니다.
1인당 공원면적이 형편없습니다. 광역시 중에 꼴지 입니다. 공원녹지 관련 예산이 쮜꼬리같아 부끄럽습니다.
시민의 삶의 질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득 문현동 금융단지며 부산의 군부대터를 떠올립니다. 비싼 땅값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부지들은 이제 또다른 용도로서 빌딩군이 가득한 답답한 터가 될 것입니다. 공원으로 전환하자던 저의 주장은 '웃기는' 일이 된지 오래입니다.
여유가 없는 도시의 한 단면을 여기서 확인합니다.
UN공원 두번째 방문기 2010.02.21
19차 시민그린워킹 행사후 모처럼 쉬는 일요일 아침, 문득 생각했습니다. 막내가 3월 초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저 역시 바빠질 일정을 생각하니, 둘이서 산책이라도 다녀와야 겠다 싶어 '맛있는 것' 사준다는 조건으로 막내와 유엔공원을 찾았습니다. 전에 눈여겨 보지 못해던 흔적들을 보앗습니다. 예컨데 문화재청에서 UN공원을 대한민국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 등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이곳은 두부모 자르듯 이렇게 반듯반듯 각을 지었을까. 심지어 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일일이 전정을 통해 열병을 받는 군인처럼 보였습니다.
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도운트 수로'라고 최연소 전사자의 이름을 따서 만든 물길입니다. 막내는 그 수로에 노니는 비단잉어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어쨌든 17세의 어린나이에 어떻게 참전하게 되었는지 긍금합니다. 그 나이면 우리집 큰애 보다 한 살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초등학교 입학할 막내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하는 짓이 유치한데, 하긴 그 시절 우리나라에서 그 나이면 제법 어른티를 내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갈 수록 정신적 연령은 이전 시대를 못따라 잡는 것 같습니다. 삶이 처한 조건이 달랐기 때문이기도할 것입니다. 그만큼 먹고 살기는 좋아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또 그 앞전 부모세대들이 그런 것을 대물림해주고 싶어 하지 않는 지나친 보호주의도 작용하리라 보고 ...
올해로 전쟁이 일어난지 60년, 아직도 아물지 못한 상처가 우리 사회 도처에 남아있고, 때로 그것은 눈 뜨고 못 봐주리 만큼 상식을 넘어선 일탈적 행위로 전해져 옵니다.
16개 참전국 중 한국을 빼고 참전국 사상자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참 전 국 |
전 사 자 |
부 상 자 |
미국 |
33,747 |
92,134 |
54,246 (미국방성 자료) |
103,248 | |
영국 |
710 |
2,278 |
터키 |
717 |
2,246 |
오스트레일리아 |
291 |
1,240 |
캐나다 |
309 |
1,055 |
프랑스 |
2,888 |
855 |
태국 |
114 |
793 |
네들란드 |
111 |
589 |
콜롬비아 |
140 |
452 |
이디오피아 |
120 |
536 |
필리핀 |
92 |
299 |
벨기에 |
97 |
355 |
뉴질랜드 |
34 |
80 |
남아프리카공화국 |
20 |
16 |
룩셈부르크 |
7 |
21 |
출처 :http://www.geocities.com 에서 :http:// cafa.naver ((爲國 獻身에서) :http://www.centurychina.com/history/krwarcost.html :http://en.wikipedia.org/wiki/Korean_War_Veterans_Memoria |
우리네 기억속에 각인된 한국전쟁은 마치 태국기의 아래 위 무늬처럼 위쪽 붉은 바탕은 공산군 아래쪽 푸른바탕은 자유대한 처럼 이분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이승복 신화도 생겨났습니다.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 1968년 12월9일 울진.삼척을 통해 침투했던 북한 남파공작원 5명이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오지마을에 숨어 들어가 공산주의를 선전하며, 동조할 것을 요구하다 당시 10살이었던 승복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항거하자 일가족 4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사건으로, 당시 조선일보는 그 말을 헀다는 승복군을 무장공비가 입을 찢겨 죽었다는 보도를 함으로써 비롯된 신화입니다. 그런데 한국기자협회가 발행한 <저널리즘 >1992년 가을호에 의하면 "유일한 목격자인 승복군의 형인 장남 학관씨로부터 얘기를 듣고 작성한 것으로 돼어 있어나, 정작 학관씨는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 기서의 제목은 '잔비, 일가 4명 침살.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항거 입 찢어" 였습니다.
아무튼 이 묘역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분단체제가 지속되는 한 이승복신화는 살아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이국에서 산화한 젊은넋들의 숭고한 희생은 또 다른 의미로 기억되어야 할 듯 합니다.
아직 남아 있는 묘역을 돌아보며 묘비명들을 담아 보았습니다. 막내도 디카에 담았습니다.
본국으로의 이장이 이루어진 터 같습니다.
기념관으로 향해 봅니다.
내부에 있는 자료실입니다. 어느 나라 어디에 참전 기념비가 있으며, UN묘지 조성 과정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쟁 메모리얼입니다. 19명의 야전병사들의 이동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었는데, 거기 이런 글이 바닥에 있습니다 . 미국은 자신들이일지 결코 알지도 못한 나라와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답한 미국의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묘역을 딱고 난 직후의 사진입니다.
1958년 4월 묘역과 주변입니다. 황령산 자락이 말끔합니다.
1951년 4월 구정문에서 바라본 장면으로 이기대 섶자리와 해운대와 해운대의 동백섬이 보입니다.
그런데 찜찜한 것이, 한국전쟁 관련 이 현황판입니다.
의심적은 사실은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에서 참고한 전시 자료입니다. 특히 민간인 피해부분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 할 정도였습니다. 하여 웹사이트 검색을 하다보니 네이버 대표까페로 선정된 '북카페 책책책을 읽읍시다' 에 수록되어 있는 '전쟁과 사회'(조동춘 지음/돌베개) 시대유감의 평을 옮겨 보았습니다.
"...알다시피 한국전쟁은 현재 휴전상태로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공식적인 ‘전면전’은 50년 6월 25일부터 53년 7월 27일까지 진행되었을 뿐이다. 전쟁 이후 대부분 국민들의 경험은 철저히 억압되었고, 일부 지배층과 지식인들의 기억만이 공개적으로 유포되고 공식화될 수 있었다. 뚜렷한 이념이 없었고 따라서 피란을 가지 않았던, 그리고 그 때문에 인민군과 국군의 ‘반동분자/좌익분자 색출’과정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대부분의 민중들의 기억은 억압되었으며, 일부 피란민들과 월북자 그리고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의 기억만이 당시 대부분 민중이 갖고 있었던 기억으로 공식화되었던 것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전쟁은 정치의 연속’ 그리고 ‘전쟁은 적대세력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수단’이라는 전쟁의 정치학적인 정의는 한국전쟁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남한의 이승만은 위기상황의 민중을 위하는 지도자라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만 신경 쓴 마키아벨리적인 정치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전쟁이 발발할 것을 예견했음에도 그것을 방치하였고, 국민들을 속이면서 몰래 남으로 피신하였으며 예고한 것보다 일찍 한강다리를 폭파함으로써 다리위에 있던 수천 명을 죽인 것과 동시에 수많은 국민과 공무원, 국군 병사들까지도 인민군의 수중에 남겨두었다. 후에 서울을 다시 수복했을 때는 전쟁의 책임을 북한과 좌익 세력들에게 돌리고 부역자 처벌에 열을 올림으로써 자신에 주어지는 책임을 회피하고 반공주의로 권력의 강화를 꾀한다. 북한 역시 전쟁의 책임을 남한과 미국에 돌리고 반동분자 색출과 처벌에 열을 올림으로써 김일성 정권의 지배를 강화시킨다. 결국 한국전쟁의 정치적 의미를 분석해볼 때, 전쟁으로 인해 이득을 얻은 ‘승리자’는 바로 남한의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이었고,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남북의 민중은 피해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중 자행된 수많은 학살들이 자행되었고 이는 인민군과 좌익세력 뿐 아니라 국군과 미국 등 연합군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인민군과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만이 공식화되었고, 국군과 미군 등에 의한 학살의 기억은 철저히 억압당했다. 최근에서야 노근리 사건과 같이 미군에 학살 중 일부가 공식화되고, 제주 4·3사건이나 여순사건 등의 학살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국군의 수복과정에서 ‘좌익 부역자’들에 대한 학살 대부분은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그 피해자들은 평생 그 기억을 침묵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아가는 국민으로서 한국전쟁을 제대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공고화된 국가의 반공주의는 국시가 되었다.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의 전쟁에 대한 기억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기억만 공식화되었을 뿐, 일반적으로 느꼈던 당신들의 체험은 묻힌 채로 시간이 흘러왔다. 그리고 우리의 부모세대는 반공주의의 그늘 아래서 당신들의 생각을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해왔다. 또한 현재의 우리까지도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때 ‘빨갱이’소리를 듣기도 하는, 여전히 반공주의의 그늘 속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아직도 진행 중인 한국전쟁의 한복판에 있다. 보이지 않는 전쟁은 은연중에 우리의 삶을 결정지어놓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전쟁을 제대로 아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닐지 생각해본다."
한국전쟁은 전쟁 사상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방어할 능력이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여러 유형의 학살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단체 등에 따르면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최소 200만명의 희생됐는데 이들 중 반 이상은 민간인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민간인 학살은 전쟁초기에 집중적으로 자행됐습니다. 정부 공식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국방부의 자료로 373,000 여명의 민간인 사망자 수치는 역사에 대한 또다른 왜곡으로 해석됩니다. 비록 아픈 역사이지만 사실에 기초하고 객관화 된 수치를 통해 진실을 알게하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어두운 과거입니다. 멀리 황령산이 그때 처럼 사자머리로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막내는 즐겁습니다. 특별히 정숙을 요하는 묘역임에도 어린애들은 천진난만 그 자체입니다.
아들 세대에는 우리시대의 족쇄같은 이데올로기가 그만 죽어버렸으면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뭔가를 남기고자 하는 몸짓과 생각은 끊임없이 재생산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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