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꽃 / 곽재구
대청마루 위
할머니와 손녀
감자 세알이 화안하다
기둥에는 두해 전 세상 떠난
할아버지의 붓글씨가 누렇게 바래 붙어 있는데
山山水水無說盡이라 쓰인
문자의 뜻을 아는 이는 이 집에 없다
할머니가 감자 껍질을 벗겨
소금 두알을 붙인 뒤
손녀의 입에 넣어주는 모습을
마당귀 도라지꽃들이 보고 있다
도라지꽃은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할머니가 시집온 그날도 그 자리에 머물러 꽃등을 흔들었다
도라지꽃에서는 구들장 위 한데 모여 잠을 자는 식구들의 꿈 냄새가 난다
눈보라가 날리고 얼어붙은 물이 쩡쩡 장독을 깨뜨리는 무서운 겨울밤을
할머니는 아가야라고 부른다
도라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대청 위 할머니도 손녀도 감자를 담던 사기그릇도 보이지 않는다
주련의 글귀도 사라지고
먼지가 뿌연 마루 위를
도라지꽃들이 바라보고 있다
옛집 / 고운기
아버지가 이사를 가면서 집도 팔렸다
남은 자들은 서로의 몫을 조금씩 챙기고
거기 흔적들이 남는 게 저어스런 듯이
애써 다음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나는 유대 법정의 판관처럼
내 작은 역사를 그리워해선 안 된다
뒷방에서 먼지 쌓인 물건들이 고스란히 따라왔다가
제 있을 곳 아닌 양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행로行路를 아는 건 저들이 아닐 것이다
그 방에서 대학에 간다고 참고서를 뒤지던 때가 있었다
그 방에서 시를 쓴다고 촛불을 켜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떠나면서
그가 지은 지구의 한 폭이
지붕 위에 걸렸다
- 고운기 시집 <자전거 타고 노래부르기> 2008
여행에 대한 짧은 보고서 / 이화은
사는 일이 그냥
숨 쉬는 일이라는
이 낡은
생각의 역사(驛舍)에
방금 도착했다
평생이 걸렸다
- 이화은 시집『절정을 복사하다』
호박등 / 권대웅
밥을 먹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일 때가 있다
마음의 골목 맨 끝에
우두커니 떠 오르는 집 때문이다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도
머리속 저 어딘가에
자꾸 불을 켜는 곳이 있다.
아직도 그 집을 떠나지 않는 슬픔 때문이다
꺼질듯 꺼질듯,
식구들을 비추기에도 힘들더니만
미련이 남아서일까
후드득,
찬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면
가슴속에 남아 깜박거리는
저 등불 때문에 목젖이 아프다
맨드라미에 부침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 변방의 길 휘어진 저쪽 물끄러미 바라보면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문을 여는 텅 빈 방처럼
후드득 묻어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고독에
울컥 눈물나는 가을
덥수룩한 웃음을 지닌 산도적 같은 사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혹시 서 있다가 아름답도록 아픈 사람을 만나면 불러주십시오.
- 권대웅 시집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2003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다시 남자를 위하여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
싱싱하게 몸 부림치는
가물치 처럼 온 몸을 던져오는
거대한 파도를.......
몰래숨어 헤치우는
누우렇고 나약한 잡것들뿐
눈에 뛸까 어슬렁 거리는 잡종들뿐
눈 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일중에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세상에서
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건 아닐까
핑계대기 쉬운 말로 산업사회 탓인가
그들의 빛나는 이빨을 뽑아내고
그들의 거친 머리칼을 솎아내고
그들의 발에 제지의 쇠고리를
채워 버린것은 누구일까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여자들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
야성의 남자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걸
갈증처럼 바람둥이에게 휘말려
한 평생을 던져 버리고 싶은걸
안토니우스 시저 그리고
안록산에게 무너진 현종을 봐
그 뿐인가 나폴레옹 너는 뭐며 심지어
돈주앙 변학도 그 끝없는 식욕을
여자들이 얼마나 사랑한다는걸 알고 있어?
그런데 어찌된 일이야 요새는
비겁하게 치마속으로 손을 들이미는
때 묻고 약아 빠진 졸개들은 많은데
불꽂을 찾아온 사막을 헤메이며
검은 눈썹을 태우는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멸종 위기네
과적 / 김왕노
어디다 내 짐을 내릴 수 있는가.
한 때 열정으로 너무 많은 꿈을 실었다. 내 몫이 아닌
것마저 챙겨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는 것이 고통이다.
내 것이 많을수록 행복의 지수는 낮아지고 고통에
일그러지는 모순의 길에 들어섰다.
어디서 나의 긴 고통의 여정은 끝나고 내 달아오른
굽을 맑은 물에 담그고 갈증을 없앨 수 있는가.
내 목적지로 삼을 오아시스는 어디서 물 냄새 풍기며
푸르러지는가. 내 영혼의 곳간이 가득 채워지는 것이
내 영혼이 무거워져 꼼짝 달싹 못하는 과적의 길인지
몰랐다.
한 발 앞으로 간다는 것이 고통의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딘가에 내 짐을 내릴 수 있다는 희망 때문, 스스로
등 짐 지웠으나 스스로 내릴 수 없는 혹이 되었다.
가면 갈수록 난 완고해지는 고통으로 가득 채워지는
절망의 집 한 채
지금은 그믐도 끝나 달 푸른 길인데도 저 포구에서
꿈을 하역하고 떠나는 뱃고동 소리 들리는데 가도
가도 땅으로 꺼지는 것 같은 이 침몰의 길, 어디서
검고 탁해져 내 생을 더 무겁게 하는 내 피를 흡혈해
버릴 수 천 수 만 그루의 나무뿌리, 헤아릴 수 없는
나무 이파리가 파닥이고 있는가.
내 생은 오버되었다. 살아갈수록 깃털처럼 가벼워져
약한 바람에도 실려 수 천 개의 산맥도 가볍게 넘어
설산에 이르는 길이 내 길이어야 했다.
과욕이 결국은 과적에 이르는 길이었다. 내가 견딜
수 있는 하중보다 더 많이 싣고 항해하는 것이 위태한
줄 알았지만 노동을 멈추지 않는 내 젊은 나날이었다.
일손을 잠깐 놓고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고 시드는
꽃을 슬퍼하는 것이 죄악인 줄 알았다.
어디서 내가 모로 쿵 쓰러져 내가 내짐을 떠날 수는
없지만 나를 짓눌러오는 무게를 잠깐 만이라도 벗어
날 수 있나, 어디서 내 짐을 부리고 온몸을 부르르 털며
낙타 같은 긴 울음으로 나의 휴식을 예고할 수 있는가.
폭설이 지나간 자리에 보리가 푸르렀다는데 내 지나온
흔적 흔적마다 고이는 것은 결코 마르거나 증발하지
않을 비애
밤새 내가 터벅이며 가는 과적의 길을 아는가.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온몸으로 참회의
길 가기 때문, 이글거리며 떠올라 과일을 익히는 태양도,
들녘을 건너오는 푸른 바람도 다 내게 고통이고 슬픔이
되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가면 갈수록 더 깊이 뼈에 새겨지는 말, 과욕이
결국은 과적에 이르는 길이었다.
계절풍 / 김왕노
널어둔 옷자락이 네 쪽으로 나부낀다.
그립다,라고 중얼거린다.
기울어져도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지는 것이
운명이라 말한 적이 있었다.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슬픈 마음을 다독이다가 한 독백이다.
바람이 분다. 네 쪽으로 나부끼는 하얀 빨래
물기를 털어 대며 더 가볍게 나부낀다.
미치도록 그립다,라고 중얼거린다.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 이제 내가 끝없이 불어간다.
저녁과 밤의 사이에서 / 마경덕
해질 무렵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햇살에 등을 데우던 나무들이 남은 온기를 속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언젠가 어둠 속에서 바라본 강 건너 불빛 서너 개 정도의 온기였다
어린 새들이 둥지에 드는 동안
맨발로 이곳까지 걸어온 저녁은 신발을 고르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저녁의 신발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헐렁한 신발을 신고
저녁이 허리를 펴는 순간,
일제히 팔을 벌리는 나무들, 참나무 품에 산비둘기가 안기고
떡갈나무 우듬지에 까치가 자리를 잡았다
잘 접힌 새들이 책갈피처럼 꽂히고
드디어 저녁이 완성되었다
해가 뚝 떨어지고 숲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저녁과 밤이 이어지는 그 사이를 서성거리며
난생 처음 어둠의 몸을 만져보았다
자꾸 발을 거는 어둠에게 수화로 마음을 건네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더듬더듬 길을 찾는 동안, 자정의 밤은 산꼭대기까지 차올랐다
뻘밭에 빠져 달려드는 바다를 바라보던 망연한 그때처럼
일시에 몰려든 어둠으로 숲은 만조였다
썰물의 때를 기다려야한다
어제와 오늘을 이어 붙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나무들도 한줌 체온을 껴안고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외출이 신발을 신는 것으로 완성되듯이
신발 끈을 조이며 어둠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수척한 밤이 몇 번이나 나를 들여다보고 지나갔다
어둠의 이마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요한 저녁의 시 / 진은영
자 그러니 말해봐 너에게 저녁은 어떻게 오지
길가, 활짝 핀 빨간 꽃들이 자동차 엔진처럼 붕붕거리고
여자애들의 하얀 스커트가 휘날릴 때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눈부신 바람이 소란스럽다
너는 눈이 아프다
꽃들도 빨리 시들고
구름 뒤로 숨는 달과 별처럼
나무들도 어둠의 커튼으로 제 몸을 가려야 한다
오늘 밤은 푹 자야 한다
집들도 창문도 열리지 않고
돌아오다 문 앞에 선 너도
네 집의 문을 두드리지 말고
그 앞에 누워라
달력도 덮고
시계도 맞추지 말고.
끝없이 되풀이될 소란함과 분쟁을 만드시느라
일찍 잠자리에 든
신의 곤한 호흡 속에서 이 거대한 정적
창세기의 첫 일요일 저녁처럼
침묵에서 나온 것들은 모두 침묵으로 돌아간다
별로 건너다 / 위선환
하루는, 산마루에 올랐다가 별에 이마를 부딪쳤다.
묻지 마라. 이마에
별자국이 있다.
나비가 날개를 부수면서 성층권(成層圈)까지 날고
밤새가 지향없이 어둠 속을 나는 것은
오직 나는 것만으로
눈부신 것이니
또한, 내가 별에 닿겠다고 해서
따로 말을 만들 일 아니다.
오는 하루에는 아예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넘고 걸음을
크게 하여
가까운 별자리로 건너가겠다.
알겠는가?
모퉁이 / 위선환
모퉁이는 쓸쓸하다. 모퉁이를 돌아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쓸쓸하고,
모퉁이를 돌아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이 쓸쓸하다.
어느 날은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는 내가 쓸쓸하다. 아침부터 걸었고,
날 저물었고, 이내 깜깜해졌고, 긴 하루 내내 모퉁이에 부딪치고
쓸린 나의 모퉁이 쪽이 허물어지더니, 모퉁이가 드나들게 파였는데,
모퉁이만 하게 비고, 빈 모퉁이처럼 쓸쓸한데, 나는 더듬대며 아직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모퉁이 쪽 빈 옆구리가 한 움큼씩 무너지고,
무너지는 모퉁이 쪽으로 내가 자꾸 꺾이고, 어디쯤일지, 언제쯤일지,
모퉁이는 끝 간 데 없고
거꾸로 가는 생 / 김선우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나이 서른에 나는 이미 너무 늙었고 혹은 그렇게 느끼고
나이 마흔의 누이는 가을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어도
갈래머리 여고생처럼 후르륵 가슴을 쓸어내리고
예순 넘은 엄마는 병들어 누웠어도
춘삼월만 오면 꽃 질라 아까워라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 일곱살배기 아이처럼 졸라대고
여든에 죽은 할머니는 기저귀차고
아들 등에 업혀 침 흘리며 잠들곤 했네 말 배우는 아기처럼
배냇니도 없이 옹알이를 하였네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머리를 거꾸로 처박으며 아기들은 자꾸 태어나고
골목길 걷다 우연히 넘본 키작은 담장 안에선
머리가 하얀 부부가 소꿉을 놀 듯
이렇게 고운 동백을 마당에 심었으니 저 영감 평생 여색이 분분하지
구기자 덩굴 만지작거리며 영감님 흠흠, 웃기만 하고
애증이랄지 하는 것도 다 걷혀
마치 이즈음이 그러기로 했다는 듯
붉은 동백 기진하여 땅으로 곤두박질 칠 때
그들도 즐거이 그러하리라는 듯
즐거워라 거꾸로 가는 생은
예기치 않게 거꾸로 흐르는 스위치백 철로
객차와 객차 사이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는
강릉 가는 기차가 미끄러지며 고갯마루를 한 순간 밀어 올리네
세상의 아름다운 빛들은 거꾸로 떨어지네
그들의 처방전 / 고영서
아프리카에 다녀왔다는 수녀님 이야기다
밀림지역에서 봉사를 하다보면
말라리아는 수도 없이 걸린다는데
한국의 수녀들은 말라리아가 도지면
우리나라 라면을 약으로 생각하고
끓여 먹는단다
밍밍한 그곳 음식만 먹다가
매운맛에 땀을 뻘뻘 흘리고 나면
감기조차 뚝, 떨어졌다는 것
한 번은
에이즈 환자였던 센터의 현지 직원이
거의 죽음을 맞을 때
지금 뭘 해주면 가장 좋겠느냐 물었는데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코리안 수프!”
딱 두 개 남아있던 라면 중 하나를 꺼내어
끓여주었다는데
절반을 맛나게 먹고는 마지막 숨을
거두더라는 것
기력이 쇠해 병(病)조차 이길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약 대신 양손에 쥐어주었다는
달걀 두 개
한 끼 식량으로는 모자라
우리에게는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는
라면과 달걀뿐인 식탁에서 오늘도
성호를 긋는 사람들
백련사에 두고 온 동전 한 닢 / 안상학
누군가 나에게서 떠나고 있던 날
나도 내 마음속 누군가를 버리러
멀리도 떠나갔다 백련사 동백은
꽃도 새도 없이 잎만 무성하였다 우두커니
석등은 불빛을 버리고 얻은
동전을 세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손을 모으게 했을
잘 안 되는 일들의 기록을 살피고 있었다
나도 내 잘 안 되는 일들의 기록을
동전 한 닢으로 던져 주었다, 석등은
내 안의 석등도 오래 어두울 것이라 일러주었다
가질 수 없는 누군가를 버리고
돌아오는 길, 꽃등 없는 동백나무 한 그루
끝끝내 따라와서 내 가슴에 박혀 아팠다
백련사 석등에게 미안했다 누군가에게
너무 오래 걸린 이별을 바치며 미안하고 미안했다
입산한 내가 하산한 너에게 / 이기와
오랜 풍화에 시달려 속살이 벌겋게 드러난
이 정상의 등짝을 보기 위해
마른 산이 내지르는 따가운 침묵 소리를 듣기 위해
텅 빈 시간의 밑바닥에서 부터
넝쿨처럼 기어 올라왔던가
가슴이 붕괴된 벼랑 끝에 매달려
벼랑보다 더 아슬하게 살아가는
저 비탈진 나무들의 뒤꿈치를 보기 위해,
추레한 흔적만 가지 위에 어지럽혀 놓고
어디론가 망명하는 뜨내기 새떼들의
시린 등을 마중하기 위해
칼슘 빠진 기억의 뼈들을 곧추세워 올라왔던가
길 아래로 흐르는 길들을 버리고
한사코 수직으로 깍아지른 절벽을 타고 오르려는
이건 대체 무엇에 대한 집착이란 말인가?
막상 올라와보면
어제의 사진들처럼 허름한 몰골들뿐인데
지상에서 올려다보던 부러운 우상들은
이미 하산하고 없는데
한낱 허공의 이름과 맞닿은 봉우리들 중 하나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정복하기 위해
발밑 저무구한 길들의 가슴팍을 흠집내며
다투어 기어 올라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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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와 시인의 인생살이는 37세라는 나이에 비해 고통과 질곡으로 점철됐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서울 서대문구 굴레방 다리 밑 거적때기 움막에서 해녀 출신인 한 여인의 막내로 태어났다. 언니는 식모살이 가고 오빠는 양자로 갔다. 어머니는 새 아버지를 세번 얻었는데 그 중 두 명이 .죽었다.
“나는 써먹을 데가 없어서 어머니가 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상복을 입고 상 치르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기와 시인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리어카에 텐트를 싣고 다닌 떠돌이 삶 때문에 초등학교를 다니지도 못했다. 어렸을 때 봉제인형·가발공장 등에서 일했고 식모살이와 중국집 서빙 등을 전전했다. 20대 초반엔 포장마차를 거쳐 술 파는 카페와 1급 유흥업소 마담직도 경험했다. 카페에서 책 보며 시를 쓰기 시작한 후 검정고시를 거쳐 24세에 한양여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포장마차에서 꽁치 굽고 곰장어 무치면서 새벽 4시까지 시를 썼다”는 그는 199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지하역’이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는데, 방송통신대 국문과를 거쳐 중앙대학원을 졸업했다. 못 배운 한을 풀었다.
2001년 시집 ‘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를 냈는데 “고통스런 삶의 기억을 치열한 언어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한 시인이 농협에서 집을 담보로 800만원을 빌려 150만원짜리 카메라 텐디(10-D)캐논을 사들고 1년 6개월 동안 詩를 따라 전국을 다녔다.
신경림 시인의 ‘산동네에 오는 눈’을 따라 울며 헤맨 서울 홍은동 산 1번지, 그리고 황청포구, 내장산, 마곡사, 제주, 소록도, 구절리 등을 돌아 다녔다. 그리고 그 여행길에서 터득한 또 다른 삶을 ‘詩가 있는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붙여 산문집을 냈다. 물론 사진을 직접 찍었다.
그의 산문엔 익살과 풍자가 넘치는가 하면 깊은 思惟의 우물에서 길어올린 箴言이 담겨 있다. 구룡사 등산로를 맨발로 사풋사풋 걷는 등산객으로 부터 그는 ‘아프게 걷지 말고 춤추듯 생의 길을 가라’는 법을 배웠다.“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겨 박수를 받기보다는 자연과 친해져 그들로 부터 칭찬받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전국 곳곳을 돌아 다니며 새삼 깨닫고 한 말이다. 과거를 굳이 숨기지도 않고 밝히지도 않으며 지금 김포의 한 농촌에서 살고 있다.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 기형도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落下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 기형도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 1989
하늘로 가는 길 / 김기홍
별을 이고 나온 새벽
함바에 모여
살과 뼈를 갉아먹는 만년 노독
깡소주로 눌러놓고
승강기에 몸을 싣는다.
오늘도 존재할지 모를 상처 많은 꿈도 함께
20층 21층
아직은 사장도 감리도 오르지 못한
창공을 오른다.
하늘로
하늘로
철근을 세운다.
키 낮아 발판을 타고
곰삭은 설움을 타고
더 올라야 할 아파트
옹벽을 이어 세우면
간혹 지표면에서 만나지 못한 비바람
역한 뜨거움도 만나
폭 15센치 난간의 벽을 타고 기둥을 세운다
기울어진 세상
몇 사람 피바다를 이루고 사라진 저 곳
육십 미터 아득한 땅바닥
인부와 기사들의 불협화음
무엇이 이 높이까지 끌어올리느냐
올라도 올라도 달아나는 하늘
합수장군 지고 개간지 오르시다 쓰러진
아버지의 꿈이 그랬을까
빈 하늘 바라보다 별안간
우리는 뛰어내리고 싶다.
목숨 값이 얼마나 될지
식구를 계산하며
이 아파트를 지어 한 몫 챙길 사람들을 생각하며
아서라!
오늘은 하늘로 가는 철근을 이어 세우며
우리들의 끓는 사랑
다가갈 수록 멀어지는 우리들의
상처 많은 꿈도 단단히 엮어 세운다.
- 김기홍 시집 <슬픈희망>
공친 날 / 김기홍
비가 내리고, 전라남도 공문서 뒷면
끊일 수 없는 검은 점 속에서
정숙이가 울고 있다.
어디로 갔는지 그녀의 만년필
진달래가 붉게 붉게 울고 있다.
비에 젖어. 어제는
지방 인부들과 술에 젖어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를 부르고
결리는 몸으로 악을 쓰며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도 멈추지 않던 비는
정숙이 눈물 위에 '부친위독속래요망'
뜨거운 슬픔 한 통을 더 전해준다.
불러라. 목이 터지도록 눈물로 불러
×××을 존경한다는 총무를 묵사발 내고
한국사람은 좆나게 까야 말을 듣는다는 소장을 앞에 두고
놈의 면상보다는 …… 방바닥을 내리쳐, 멍이 들도록
가슴을 쥐어 뜯으며, 뜯으며, 뜯으며
발가락이 잘린 최목수도 머리센 이목수도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진저리나게 하는가
알 수 없다. 가야 할 길에 서서 모처럼
부끄러움 떨쳐버리고 고통마저 사랑하는
이 길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고
어둡고 거대한 벽들이 초라한 목숨 앞에 우뚝 서서
덩치를 키우는데
호남선 완행열차마저 몸을 싣지 못한
오늘을 알 수 없다. 함바 앞 강선 위에
처참하게 죽어가던 아우의
체온만이 취기 속에 다시 살아나고 지금은
망치도 함마도 데코*도 녹슬고 있다.
비는 끝없이 전라남도 공문서 뒷면
끊일 수 없는 검은 점 속
정숙이 울음 위에 노동의 피가 끓어
산천에 훨훨 진달래는 미쳐가고
* 데코: 지렛대
하나뿐 / 김기홍
흘러가도 한참은 흘러갔을 것이다.
하늘을 맴돌던 구름은 풀씨들을 터트리고
마냥 부는 검은 바람을 안고 서서
짊어지던 모랫짐도 시멘트도
푹 퍼진 국수 한 그릇 막걸리 한 사발에 허리를 푸는 인생들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 상처만 눈을 흘기는 자리
죽은 살점을 떼어내며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은 무엇일까
소장이 돌아와
어젯밤 울분으로 팽개친 반도를 세며
부족한 일당에 대해 설명이 없는데
우리는 그저 맹목적인 인간으로 돌아가서
쉽게 오늘을 용서하고
뼈저리게 내일만 꿈꿀 것인가
일어서지 못하는 다리여
외치지 못하는 가슴이여
뭉치지 못하는 노동자여
내일은 또 누구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
어둠은 끝없고 사랑도 끝이 없어
땅을 치며 우는 것은 미칠 것 같은 가슴뿐
텅 빈 벌판 추운 공사장에
언젠간 열이 되고 백이 되고 천이 될
터질 것 같은 사람 하나뿐
- 김기홍 시집 <공친 날>
가공 / 김기홍
철근을 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세.
고집하는 뚝심으로는
목적을 이룰 수 없어.
끝없이 진행되는 압력에는
여유 있게 소화하는 구조가 필요하네.
당겨도 끊기지 않는 인장력
엄청난 무게에도 넘어지지 않는 압축력
그곳에 튼실한 살이 붙으면
완전한 하나의 건물이 되지.
전체의 구조에 맞게 선택되는 고강도의 철근은
직각을 고집해서는 부러지고 말 뿐
강한 힘에 맞설 때는 부드러운 곡선을 살려
큰 각을 이루게.
그들은 모여 얽혀
모든 압력 나누어 거뜬히 삭혀내고
굳건한 뼈대로 설 것이네.
한 세상 굳게 버틸 것이네.
- 김기홍 시집 <슬픈희망>
살아남기 / 김기홍
빚으로 공사하는 회사들 자빠지고
돈맛에 벌여놓은 낙지발 회사도 넘어지고
일 끊겨 돈 못 받는 인부들 속처럼
중단된 공사장 철근도 벌겋게 삭아내려
일 구하기가 사십대 노총각 이십대 처녀 붙들기보다 힘들어
자존심이란 자존심 팽개치고
어쩌다 기별 온 공사장에 우르르 모여든 떼거지들
서로 놀라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푹 퍼진 보리누룽지 빼앗길까
으르렁대며 핥아먹는 똥개들처럼
동지는 어디 가고
콩 한 개라도 나눠먹자는 심보는 어디 가고
앞 눈치에 옆 눈치 뒤꽁지 눈치보기
아따따 이러다가 모가지가 캭! 될라
철근 많이 메고 뛰어다니기
어느 놈이 슬라브에 방석 까냐
엉덩이 바짝 추켜들고 갈쿠리질
갈쿠리 반 바퀴만 돌리며 남의 속도 따라잡기
이러다가 이러다가······
남들 체조하는 일곱 시로는 불안해
은근슬쩍 오야지 눈에 띄게
삼십 분 당겨서 어두울 때 일 시작하기
캄캄해서 손 놓기
그러다가 굶었으면 굶었지 더러워서 못하겄네
떠난 사람 뒤에 안심하기
노임에 불만 없기
집에 가면 허리가 끊어질락말락
어쩔겨 묵고 살아야 쓴디
동지가 밥 멕여주간디
양심이 돈주간디
나중에 어쩔갑세
어서 나가 어서 나가
눈치보기 뛰어다니기 양심구기기 오줌참기 똥참기
점심 먹고 안 쉬기
그러다가 오늘도 떠나가는 사람
에라이 똥개 새끼들아 잘 처묵고 잘살아라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 모냥이여
지독한 놈들
쓴 소주 나발 불고 굵은 소금 한 입 물고
소득없이 떠나가는
떠나가는 의리지기
송홧가루 날리는, 아버지사진 한 장 / 함민복
선녀가 하늘나라로 데리고 올라간 자식들
나무꾼 아버지 그리워
햇살 편지
저리 붉게 꽃피는 봄
내게도 기적처럼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네 초등학교 다니는
누이 둘과 어린 내가 깔깔대며 오르고 있네 대나무 바지랑대
어깨에 걸쳐 맨 아버지와 함지박 머리에 인 어머니가 뒤따라
오시며 길이 갈라질 때마다 손사래와 고갯짓으로 길을
이끌어 주시네 아랫녘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으로
동네 초가집들이 아른아른 멀어지네 산등성이를 다 오르자
불꽃처럼 푸른 강물처럼 푸른 소나무밭이 펼쳐지네 어머니는
함지박을 내려놓고 양은 이남박을 꺼내 누이들에게 주네
누이들은 햇살 퉁기는 이남박을 머리 높이께까지 들고
작은 소나무 가지를 톡톡 터네 노란 송홧가루가 폴폴 나네
아버지 어머니는 더 커다란 소나무 가지 휘어놓고 힘을 합해
송홧가루를 터시네 나는 아직 덜 성숙해 꽃이 피지 않은
송화 꽃송이를 따먹네 살이 통통 오른, 대추씨만한 송화에서
나는 소나무 향내, 달착지근한 즙에. 잠시 눈을 감고.
아버지가 송홧가루 털러 가기로 점지한 날은 부지런한
봄바람도 낮잠을 자 송홧가루 날리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고마워 신바람 나시네 우뚝, 커다란 소나무에 송화가
만발하여, 태양이 꽃들을 호명하듯 아버지가 가족을 불러
모으시네 어머니와 누이들이 준비해 간 이불 홑청으로
소나무를 에워싸고 아버지는 바지랑대로 소나무 가지를
터억-터억-, 치시네 이불 홑청에 내리는, 노란 안개,
송홧가루, 송홧가루. 송홧가루 쏟아지는 재미에 몰두하다
보면 아버지 어머니 머리에도 누이들 단발머리에도
내 상고머리에도 온통 노란 물감이 드네 그 모습이 우스워
서로를 보고 웃는 웃음소리가 소나무밭을 송홧가루처럼
환하게 들어올리네
어떤 부엌 / 함민복
방 안에 부엌이 있다니
조개껍질 열 듯
전기밥솥 뚜껑을 열고
밥을 짓는다
동거자 金은 남가좌동으로 책 만들러 가고
남가좌동에 사는 詩人 함성호가
먹이 물러 양재동까지 지하 땅굴을 날으는 시각
김이 나고
쌀 익는 냄새가 방 안 가득하다
방 안에 있는 냉장고의 내장을 꺼내놓고
간장에 날김밥을 먹는 아침
서른 넷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친구방에 머물러 있는 지방간
그래도 방안에 있지만 부엌이 있고
그 부엌은 밤새도록 노란 불 켜고
보온이라고 따듯한 말 잊지 않으니
저 작고 소꿉장난 같은 부엌이
나의 어머니다
따뜻한 눈물이다
우표 / 함민복
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
마음 무거워 버스는 빨리 오지 않고
집으로 향하는 길만 자꾸 눈에서 흘러내려
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
다가온 우편배달부 아저씨
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 숨막힌 날
다방으로 데려가 차 한 잔 시켜주고
우리가 하는 일에도 기쁘고 슬픈 일이 있다며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
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
손목 잡아주던
자전거처럼 깡마른 우편배달부 아저씨
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마음에
따뜻한 우표 한 장 붙여주던
낚시터에서 생긴 일 / 함민복
댐에 도착한 변경철씨는 작은 목선을 하나 빌렸다
달빛 출렁이는 수면을 가르며 노를 젓는 변경철씨
곁에는 등산복 차림의 누이가 낚시 가방을 껴안고 있고
어머니는 흔들리는 달 그림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배를 멈추어라 여기쯤 될 것 같다 어머니가
닻을 내리자 배는 스르르 멈추었다 누이가 삼키고 있던
울음이 수면에 잔잔하게 깔리고 어머니가 누이를 보듬었다
변경철씨는 낚시 가방에서 각진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흰 장갑을 끼며 누이에게도 장갑을 끼워주었다
잠시 후 달빛을 받으며 변경철씨 매형의 뼛가루는
싱싱한 물비린내 가득한 강물 위에 흩어졌다
관리인에게 들키면 큰일난다고, 서울 낚시꾼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수몰민인 매형의 유언에 따라, 고향 마을 깊은 하늘 위에,
- 함민복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1996
달빛 / 신경림
밤 늦도록 우리는 지난 얘기만 한다
산골 여인숙은 돌광산이 가까운데
마당에는 대낮처럼 달빛이 환해
달빛에도 부끄러워 얼굴들을 돌리고
밤 깊도록 우리는 옛날 얘기만 한다
누가 속고 누가 속였는가 따지지 않는다
산비탈엔 달빛 아래 산국화가 하얗고
비겁하게 사느라고 야윈 어깨로
밤 새도록 우리는 빈 얘기만 한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이런 기억도 사랑이라네 / 이사라
다시 봄날이 지나고 흰 눈도 녹고
풀이 나무가 되기도 했던 기적 같은 시간들도 떠나가고
그럴 즈음이었다네
담장을 쓰다듬는 햇살 속
소곤거리며 기어오르는 넝쿨순을 기억하며
낡은 집은 더 낡아갔다네
나의 벽이 드러나는 집 한 채
오똑 벗은 시간의 몸을
나는 모르는 체했다네
벽이 흐물흐물해질 무렵
떠나가는 시간들이 드리우는
음영이 긴 철골 기둥 하나가
슬그머니 나의 허리께를 뚫고 들어와
빈 몸에 내벽 세우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심 딴청 부렸다네
돌아올 시간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시 봄날이 회생하고
또다시 흰 눈이 쌓이고
내벽과 나의 벽이 사랑을 나누어 가진 것을
기억할 수 있다네
그가 나를 밀어내기 전까지
나의 몸이 거울 밖으로 쏟아져 한 줌 파편들이 될 때까지
함께한 날들이 사랑이었다고
기억할 수 있다네
나 또한 우연하게라도 우리들이 지녔던 사랑의 힘을
부인하지 않으려 하네
녹슨 못들이 남기고 떠난 녹슨 무늬의 추억이지만
언제라도 나를 쫑긋 세울 수 있어
조금 더 조금만 더
어느 날 촛농처럼 흘러내릴 때까지
이런 기억도 사랑이라네
- 제17회 2003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2002
조선문창호지 / 이면우
이 호숫가 오두막의 첫밤, 여편네는 내내 뒤척였다
조선문창호지 너머 물결도 꾸룩대는 농병아리 일가를 품고
함께 잠 못 들어했다 눈 쌓인 밤은 세상 빛다발 모두어
조선문창호지 그대로 등이다 이마 시린 등이다 가을날은
문살마디 묵은 때 벗겨 산갈대, 마른 수레국화, 은행잎을
새 창호지에 박아넣었다 그 겨울저녁 일제히 수면을 차고
오르는 청둥오리 그 요란한 날개짓에 여편네는 때없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오메, 저 통닭 좀 보소 해쌓더니만
봄이 되자 아예 배가 불렀다 추녀는 세 뺨 가웃, 때때로
구름 그림자 옅은 그늘 끄을고 머물다, 찢긴 문풍지 북풍에
놀란 말되어 울다, 지나는 여름소나기에 조선문창호지
아랫도리 다 젖다, 밤안개 새벽이슬에 젖다, 해 뜨면 또
팽팽해졌다 섬에 일군 고구마밭에서 쪽배를 저어 돌아오는
어스름 ,일찍 불켠 우리 오두막 조선문창호지는 그대로
등대다 자꾸 보며 눈시린 천촉광의 등대다 저 그믐밤,
아홉달배기 아들놈이 혼자 깨어 조선문창호지 너머
반딧불따라 첫발자국을 떼다 호수 자옥이 비내리면
기저귀 걸린 방안에서 우리는 함께 젖었다
- 이면우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2001
행복한 산책 / 노혜경
한밤중 숲으로 난 작은 길을
난 걸어갔네
내 뼈에서
살점들이 잎사귀처럼
지는 소리를 들었네
무엇이 남았는지는 모르지
아직도 뛰는 심장소리 들리지만
난 한없이 걸어 여기
너무, 너무 와 버렸으므로
펄럭이는 넝마, 덜거덕거리는
오래된 절간의 목어처럼
걸려 버렸으므로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좋았네
그저 한없이 걸었다는 기억
기억 속의, 수많은 발자국과 그림자들
찬란히 빛나는 검은 뼈
어둔 밤 숲속 길을
밝히는 오래 묵은 인광
그랬었네
아마 전생의 산책이었는지도 모르지
길이 끝난 것 같은 곳에서
난 내게 전화를 건다
이젠 길이 끝난 것 같다고
펄럭이지 말고
후두둑
무너지라고
파라다이스 폐차장 / 김왕노
폐차들
시루떡같이 겹겹이 쌓여 있다.
질주의 끝이 이곳이라는 것을
우리는 몰랐다는 것을
온몸으로 항변하다 벌겋게 녹슬기도 하고
다 이제 해체되기를 기다린다.
늘 죽음 쪽으로 쏠릴 때마다 균형을 잡아 달렸는데
기어코 도달한 곳이 차의 거대한 무덤
압착기에 전신이 짜부라지는 무시무시한 순간이
기다리는 곳
과속을 할 때마다 헐떡이며 절정에 도달했을 때
그때쯤 그만두어야 하는데
따지면 무얼 그만두어야 하는지 마땅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는데
결국은 속도의 끝이 정지라는 것
늘 달렸지만 정지 쪽으로 살이 당겨지는 것
우리가 가진 관성이라는 것도 죽음에게로 기울어가려는 것
길을 빗나간 차든지
곧장 떠난 차든지
결국은 이곳에서 만날 운명이었다는 것을
이곳에 모인 폐차들
어이없이 서로의 찌그러진 몰골을 바라본다.
정신없이 달릴 때 서로 알아봤어야 했다면서
추월하여 뒤꽁무니를 보일 때
이미 결론이 나 있었던 것이라며
폐차들 참회의 모습으로
지금은 차디찬 비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다
사칭 / 김왕노
나는 사람과 어울리려 사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꽃과 어울리려 꽃을 사칭하였고
나는 바람처럼 살려고 바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늘 사철나무 같은 청춘이라며 사철나무를 사칭하였고
차라리 죽음을 사칭하여야 마땅할
그러나 내일이 오면 나는 그 무엇을 또 사칭해야 한다
슬프지만 버릴 수 없는 삶의 이 빤한 방법 앞에 머리 조아리며
- 김왕노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
꽃 팬티 전설 / 김왕노
꽃 팬티 안에는 꽃이 숨어 있다. 그 꽃을 꼭꼭 숨기고
싶거나 그 꽃을 위로하여 꽃 팬티를 이 땅의 여자들은
즐겨 입는다. 나도 한때 꽃 팬티 안에 숨겨진 꽃의 씨방
안에 살던 꽃씨였다. 그래서 꽃씨를 심던 그날 밤이라는
노래도 있다. 시골 난전이나 도시 화려한 가판대에
꽃 팬티는 있다. 어머니 꽃 팬티 몇 장 사와서 장롱 깊이
꼭꼭 숨긴 것도 꽃 팬티 안의 꽃을 꼭꼭 숨기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꽃 팬티 즐겨 입으시는
것도 때로는 팬티의 그 뭇꽃을 벗겨내면서 당신에게
숨겨둔 꽃, 아버지 눈에 가만히 읽히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남자가 쌍방울표 팬티를 즐겨 입고 쌍방울 달랑거리면서
젊은 수말처럼 뜨거운 입김 내뿜을 때 여자는 꽃 팬티를
소리 없이 내리는 것이다. 꽃 앞에서 수말처럼 히힝거리던
남자는 울음으로 일획을 그으며 여자의 몸을 건너 그믐의
밤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지금도 은근히 인기 좋은 꽃 팬티,
봄 오면 불티나게 팔리기도 하는 꽃 팬티, 꽃 팬티의 전설은
이 땅에 다래로 머루로 해마다 주렁주렁 열리는 것이다.
어느 날의 열차표는 역방향이다 / 이해리
ktx 타고 간다
역방향에 앉아
차창 밖을 보며 간다
모든 다가오는 것이 지나간 것이다
지나간 것만 보고 간다
보이는 게 한 물 간 것 뿐인데
새로운 것을 목표하며 간다
악조건이다
같은 시간 같은 목적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좌석이 생이라면
나의 생 출발부터 누군가에게 밀렸음이다
오, 차별 받은 내 좌석, 불리한 내 여정
이건 자연스레 피 돌리는 내 박동과는 다른 일
여학교 때 단체로 맞춘 교복 중에
내 것에만 나있던 흠결과도 다른 일
방향이란 원래 누구의 점유물이 아닐진대
누군가 차지하고 남은 방향
내자리라 하고 간다
남들이 눈으로 세상을 볼 때
등으로 세상을 더듬는 자리
내 자리 비좁고 속 울렁겨려도
순방향으로 꾸고 싶은 꿈 하나는
고속레일보다 뜨거워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며 가지만
도착하면 그 뿐, 누가
타고 온 방향을 묻겠는가
지구 최후의 날 / 남진우
지구 최후의 날
지구는 오히려 평안하다
인간들이 모두 외출해버린 땅 위에
풀과 나무들 짐승들이 정겹게 어울리고 있다
넘치도록 따사로운
햇살 아래 졸고 있는 미풍
옛 책에 이르기를,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들소떼와 춤을 / 남진우
1.
어머니가 재봉틀을 돌리신다
소란스럽게 흔들리는 벽과 창문 흩날리는 빛살들
귀먹은 어머니의 재봉틀에서 들소 떼가 쏱아져 나와
마루를 가로지른다
일제히 삐걱이는 마루 바닥 딛고 사방에서 쿵쿵 몸을 부딪치는 들소떼
선반 위에 얹혀진 가난한 살림이
금방이라도 쏱아져내릴 듯 흔들린다
2.
들소 떼가 우리 집 낡은 지붕을 밟고 지나간다
성난 물소떼가 비스듬히 기운 우리 집 담벼락을 마져 무너뜨리며
골목을 지나 신작로로 달려나간다
뿔을 치켜들고 일시에 비좁은 우리 집을 빠져나가
우우우 지평선으로 가라앉는 둥근 해를 향해 몰려간다
모래들판 너머
구름처럼 일어나는 먼지 속에 문득 떠오르는 푸른 목초지
3.
어머니가 재봉틀을 돌리신다
일당 몇 푼 쌓여가는 옷감에 하루 해를 넘긴다
재봉틀 소리 가득한 집안은 들소들이 내뿜는 거친 숨결로
달아오르고 식당 세탁소 문구점 목욕탕 편의점
모두 문을 닫은 텅 빈 거리
전단지 달라붙은 전못대 밑을 지나
식식대며 어디론가 무작정 내달리는 들소떼
재봉틀이 흔들거리며 평원을 달려나간다
4.
사냥꾼도 원주민 전사도 다 사라진
도시의 황혼을 들소떼가 내달린다
가로수를 들이받으며 상점진열장을 부수며
무릎을 꺾고 지쳐 쓰러진 들소들 위로 다시 들소들이
뿔을 세우고 내달린다
걷어찬 돌멩이도 건너갈 강도 없는 막막한 길 저편에서
어머니 홀로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
5.
달리는 길의 끝
낭떠러지 밑으로 들소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시름겨운 어머니 한숨 속으로
들소떼가 꺼져들어간다
경을 찾아서 / 남진우
느릿느릿 읽어나가던 경을 덮는다
한 나라가 마침내 무너지고
다시 한 나라가 일어선다
창 바깥을 내다보면
모래언덕 넘어 낙타를 몰고 서역으로 가는 사람들
사거리 붉은 신호등 앞에 잠시 섰다가
밤하늘 별자리를 헤아리며 떠나는 무리가 보인다
일어남이 누움과 같고
무너짐이 다시 세움과 다르지 않으니
한가로이 지붕 위를 흘러가는 흰 구름 따라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찾아오고
물이 그리운 낙타는 길에 울음 운다
아득히 신기루처럼 손짓하는 모래언덕 너머 먼 바다
허리춤에 찬 표주박에 찰랑이던 물 다 마셔버리고
잠시 쉴 곳을 찾는다 내가 넘기는 책장 따라
무수히 많은 나라의 탄생과 몰락이 있었으니
경을 구하러 떠난 사내들의 소식 끊기고
창 바깥은 부연 황사 먼지뿐
어두운 동굴 속에서 한 소금 졸다
해골에 고인 물 달게 들이키고
다시 돌아누워 잠을 청한다
닫힌 경을 펴들고
내가 가야 할 나라를 묻는다
갠지스 강 / 정희성
구역질을 했네
주검 타는 냄새
어슴푸레 밝아오는 갠지스강
비좁은 사원 골목을 총총히 빠져 나오며
죽음에게 붙잡힐까 뒤도 돌아보지 않았네
오직 죽기 위해 갠지스에 온 노인들이
내 발목을 잡고 빈손을 내밀었네
눈앞 아득한, 허기진 손들의 숲
그들로부터 도망쳐 나오며
차마 하늘을 볼 수 없었네
한때
민중의 좋은 벗이 되리라 다짐했던 나
아버지의 안경 / 정희성
돌아가신 아버님이 꿈에 나타나서
눈이 침침해 세상일이 안 보인다고
내 안경 어디 있냐고 하신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나는
설합에 넣어둔 안경을 찾아
아버님 무덤 앞에 갖다놓고
그 옆에 조간신문도 한 장 놓아 드리고
아버님, 잘 보이십니까
아버님, 세상 일이 뭐 좀 보이는게 있습니까
머리 조아려 울고 있었다
액자가 있던 자리 / 황영선
어머니는 오래된 액자를 가지고 있다
어머니의 방 가득한 액자들
어머니의 액자 속엔 오래된 흑백사진이 들어있다
여든이 된 어머니는 요즈음 부쩍
묵은 사진 속에 들어가 있곤 하는데
오래된 옛길을 길도 잃지 않고 내왕하신다.
어머니는 가끔씩 살구꽃 피는 봄을 들고 나오시기도 하고
수틀을 들고 나와 한 나절 수를 놓고 계시기도 한다
바깥 출입도 잊어버린 채
어머니는 어디로 길을 내고 계신 것일까?
어머니의 방 가득한 저 못 자국들
어머니는 우리가 못을 박을 때마다
액자를 하나씩 걸고 계셨구나
어머니는 날마다 누구랑 놀다 오시는 걸까?
누구랑 얘길 나누시는 걸까?
어머니가 액자 속으로 들어가 아주 나오시지 않으시면
그 땐 어떻게 할까?
탄생 / 박현수
먼 길을 걸어
아이가 하나, 우리 집에 왔습니다
건네줄 게 있다는 듯
두 손을 꼭 쥐고 왔습니다
배꼽에는
우주에서 갓 떨어져 나온
탯줄이
참외 꼭지처럼 달려 있습니다
저 먼 별보다 작은
생명이었다가
충만한 물을 건너
이제 막 뭍에 내렸습니다
하루 종일 잔다는 건
그 길이 아주
고단했다는 뜻이겠지요
인류가 지나온
그 아득한 길을 걸어
배냇저고리를 차려 입은
귀한 손님이 한 분, 우리 집에 왔습니다
참새에 대하여 / 박현수
이제 참새에 대하여 이야기할 시간이다
떼를 지어 어수선하게 날아다니던 참새들이
둥근 향나무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우르르 솟아오른다
안개가 숲을 지나듯
저녁연기가 탱자울타리를 빠져나가듯
초록 바늘잎에 깃 하나 닿지 않는다
어느 하늘을 다녀온 것일까
참새의 깃털엔 낯선 향기가 묻어 있다
떼를 지어 어느 먼 별자리를
옮겨놓고 돌아오는 길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집들 처마에 새로운 별이 보이는 때도 이 무렵이다
허공에 쌓인 겹겹의 벽을 뚫어
새로운 길을 내고 다니는 참새들이
갈색 옷을 입은 영혼이 아니면 무엇인가
부드러운 안개 입자들,
전자의 궤도를 빠져나가는 휘파람,
뼈를 지닌 에너지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둥근 향나무에 스며드는 참새가 있어
그림자 지닌 것이
모두 슬픈 건 아니라 말할 수 있으니
이제 초월에 대하여 이야기할 시간이다
생의 저녁이 오면 / 문정영
시간은 정차되지 않은 기차라서,
순간 타지 않으면 저 만큼 가 버린다
표를 예매하고 조금 일찍 기다리는 것이 좋다
플랫홈의 주변은 바람이 일며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
시간은 기다릴 줄 아는 승객을 태우는 기차라서,
익지 않은 열매를 따는 손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함께 갈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시간이라는 기차가 도착하기 전이다
종착역은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다
환하게 종착역을 맞는 사람은 오래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나무를 바라볼 줄 아는 이다
시간이 종착역에 저녁이 오면 함께 타고 온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는가가 불빛으로 밝혀질 것이다
산그리메 집 / 한석호
뽀얀 먼지 내뿜는 완행버스가
내 추억 속 시간들을 도토리 굴리듯 내려놓고
등 굽은 미루나무가 쭈그러진 잎 가리며 웃는 그 마을에
나, 달려가고 있네.
달파란의 ‘달콤한 인생’을 흥얼거리며
점자책을 읽듯 꿈의 옛 자락을 더듬어
삼갈래길 가운데 서서 침점을 쳐 보네,
침점을 치며 까르르 웃던 그대의 그때를 떠올려 보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집들 보며
영혼들이 머무는 저녁의 호숫가 나즈막한 언덕에 앉아
나 그대에게 오랜 안부를 전하네.
식구들을 위해 둥근 저녁상 차리고 있을
굴뚝이 아담한 집 키다리 안주인을 생각하네,
그 집에 들면, 거칠 것이 없어
옥수수 하모니카를 불며
밤새 봉인된 옛 기억들이 문을 열고 나와
서운했고 미안했던 마음들을 내려놓고
서로를 따스하게 포옹하도록 주선하려 하네.
밤은 깊어가고 천지는 이제 흐벅진 꽃밭이네.
나는 평상 위에 내 허기들과 함께
아이처럼 누워 밤하늘 꽃들과 미팅을 하네.
사자, 황소, 전갈, 이런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달려들어도 나는 동요하지 않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마음을 건네주듯
낮고 그윽한 소리로 시를 읽어주고 있네.
두드리면 바위처럼 냉정하지만
맘속 깊은 곳에서 꺼낸 진심의 손으로 노크하면
다정히 문을 열고 나와 맞아주는 집,
그러나 내비게이션에는 나오지 않아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집에서, 나, 불러보네,
세상에서 휜 내 등뼈 어루만져 줄 그대를.
한 알의 꽃씨가 마당을 쓸고 산그리메가 물을 길어오는,
꼬리에 대하여 / 김영서
흔들고 지나는 것이 꼬리의 생이라면
물살에 휘말려 넘어지는 것이 사내의 명이다
꼬리치는 여자를 조심하라
저년은 아홉 개나 된다
그녀가 지나간 마을마다 전설이 생겨났다
꼬리라는 말에 설레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흔들지 않으면 사랑도 없고
흔들기 위하여 고난을 견디는 나라가 있지 않은가
강아지도 흔드는 것을 최고의 예로 안다
날개는 퇴화하고 꼬리는 진화될 것이다
살다살다 안 되면 꽁지 빠지게 도망갈 것이다
닭장 밖을 서성이는 털 빠진 닭을 본다
희망을 버리라는 말보다
오늘을 포기하라는 말이 더 아프다
차마고도 - 말과 나 / 권정일
오래 걸어보지 못한 자의 길은 험준하다 고도를
지나는 사람들이 간 마런의 눈빛과 마주치면 방울이
흔들린다
세상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우거진 길을 접어두고
새와 쥐가 겨우 다닌다는 조로서도의 차마길을
꾸불꾸불 말과 나 간다
말은 걷고 나는 앉았다 말은 생땅을 보았고 나는
허공을 보았다 송진같은 준령인데 초리로 채근하지
않기를···나는 말을 말은 말을 따라
고삐와 몸을 섞어야만 갈 수 있는 메리설산을
별빛에 두고 고도는 겨우내 교역을 한다
객잔客棧에 몸을 누일 끝없는 순례의 배후가 되어
행려, 입적하고 나는 고도를 내려가는데 말은
차茶를 구하지 않았다
늙은 호박을 밟은 적 있다 / 백상웅
가끔 있다, 노력해도 이룰 수 있는 삶은 없다는 걸
인정하는 저녁이.
마흔이며 쉰 너머의 한계가 보이는
늙은 호박 같은 저녁이.
퇴근길에 고향 친구랑 한 십 년 만에 통화하다가,
스물 넘고서부터 패배한 날들을 알린다.
둘 다 부족해서 여자에게 한두 번씩은 차였다.
너는 공무원 시험, 나는 신춘문예에
수 해 죽만 쑤다가
다 때려치우고 가끔 마른 넝쿨처럼 울었다.
취업하고 첫 월급 받아보니 그 끝이 아찔하니
이미 그른 것 같았다.
미처 따지 못하고 늙어버린 저녁이었다.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계절 바뀌어 폭설에 파묻힌
얼어붙은 저녁이 와도,
내가 무능해서, 인생 내가 잘못 살았다고
자책하는 날이 왔다.
네 아버지 내 아버지도 그렇게 하는 수 없이
늙어갔을 텐데, 하며
수긍하는 저녁이 굴러왔다.
아비들의 그런 텅 비고 주름진 저녁에 바람은 좀 불었을까,
늙은 호박을 부러 밟은 적 있다.
벚나무는 건달같이 / 안도현
군산 가는 길에 벚꽃이 피었네
벚나무는 술에 취해 건달같이 걸어가네
꽃 핀 자리는 비명이지마는
꽃 진 자리는
화농인 것인데
어느 여자 가슴에 또 못을 박으려고.....
돈 떨어진 건달같이
봄날은 가네
배경이 되는 기쁨 / 안도현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주는 일이다.
별을 더욱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꽃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
함께 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연어떼처럼
절 / 신지혜
엎드려 절해보니 알겠다
낮게 엎드려 내 이마에 흙 묻혀보니 알겠다
먹이 한 덩이 찾아 기어다니는 미물들,
한 뼘 땅을 밀고 당기며 지구 굴리는 것들,
나를 떠받친 대지가
이리 많은 것들 한 품에 끌어안고 키우며 출렁였다는 걸
엎드려 절해보니 알겠다
들풀의 마음을, 꽃의 마음을, 나무의 마음을,
흙이 목숨의 뿌리 잡아주지 않았다면
이것들 척추 세우고 포효하듯 움터 올랐을까
내가 대지보다 더 마음 낮게 엎드려보니 알겠다
지구의 무량 겁 은혜,
눈뜨면 당연하다는 듯 여겼던 이 지구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불가청 데시벨 굉음소리,
그도 얼마나 애써 숨 몰아쉬고 있었다는 걸
엎드려 절해보니 알겠다
더 낮게 낮게 나를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래야 저 캄캄한 구심(球心)아래
지구 한 알 공손히 받들고 있는 허공의 큰 얼굴 보리니
집 / 정용주
새들의 집은 얼마나 아늑한가
새집을 볼 때마다 찬탄하는 것인데
유독 산비둘기 집을 볼 때 싱겁기 짝이 없다
늙은 소나무 삭정이가 떨어지다
대충 쌓인 것 같기도 하고
파전의 대파 줄기처럼 숭숭하기도 한데
까치집으로 따지면 바닥 공사만 하다
부도라도 난 것 같은 이 집을 보면 픽
웃음이 나기도 하고 혹 알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한데
걱정 말라는 듯 새끼 기르고 산다
가느다란 가지에 얹힌 한 움큼의 거처가
산 넘고 하늘 날아다니는 자유로움의
모태가 될 수 있다니
자유는 얼마나 단순하게 태어나는가
- 정용주 시집 <인디언의 女子> 2007
불멸의 사랑 / 정용주
이제 눈으로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차라리 그것이 나은 것이다
아픈 날들이었다
눈으로 사랑을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병들게 한다
나는 이제 어느 시인의 싯구도 인용하지 않으며
어떤 폐인의 절망도 동조하지 않고
사랑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천사가 되는 자와
광인이 되는 자와
노예가 되는 자의 이름은
다만 하나일 뿐이고
그것의 이름이 나였다
심장을 재로 바꾼 그의 영혼에
내 육신을 순교한다
이제 눈으로 다시는 사랑을 보지 않는다
그 저녁에 대하여 - 못골 19 / 송진권
뭐라 말해야 하나
그 저녁에 대하여
그 저녁 우리 마당에 그득히 마실 오던 별과 달에 대하여
포실하니 분이 나던 감자 양푼을
달무리처럼 둘러앉은 일가들이며
일가들을 따라온 놓아먹이는 개들과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들에 대하여
김치 얹어 감자를 먹으며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목소리 우렁우렁하던 수양고모에 대하여
그 고모를 따라온 꼬리 끝에 흰 점이 배긴 개에 대하여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겨운 졸음 속으로 지그시 눈 감은 소와
구유 속이며 쇠지랑물 속까지 파고들던 별과 달
슬레이트 지붕 너머
묵은 가죽나무가 흩뿌리던 그 저녁빛의
그윽함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저녁의
퍼붓는 졸음 속으로 내리던
감자분 같은 보얀 달빛에 대하여
- 송진권 시집 <자라는 돌> 2011
티벳에서 / 이성선
사람들은 히말리야를 꿈꾼다
설산
갠지스강의 발원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생의 꽃봉우리로 오른다
그러나
그 산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생의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지고 이 고생이다
휴대폰 속에는 해인도가 들어있다 / 최길하
웅덩이에 떠 있는 버들잎 한 장
그 위에 탑재 된 정교하고 세련된 도시
고장난 휴대폰을 열고
확대경으로 回路판을 판독할 때
그곳은 맨허턴이나 홍콩의 빌딩숲이었다.
빽빽히 솟은 빌딩숲과 크고 작은 건물들
교통량을 골고루 분산시킨 도로와 교차로
허파로 숨을 쉬게 한 듯 푸른 숲속에
이 도시를 디자인한 사람은 누구일까?
초록 세라믹판 위에
크고 작은 부속들의 정교한 배열로 이루어진 도시는
시공 밖 어느 먼 우주의 UFO본부, 질서와 평화의 나라
블록과 블록 사이를 잇는 로드는 빛나는 光線.
사람은 다니지 않고 오직 소리와 영상만이 주파수에 실려 오고갈 뿐이다.
내가 이 버들잎 한 장 속에 갇혀 있었다니
별처럼 아득히 먼 시간의 옛사랑과
파동의 오작교가 놓이는 사이
조금씩 조금씩 화소가 밝아지는 사이
이렇게 갇히고 길들여졌다니
回路, 맴돌이의 길
나는 이 고장 난 로드맵 속에서
사라진 시간을 찾아 떠도는 미아가 되었다
늙은 나귀의 연자매처럼 가도 가도 그 자리
돌아도 돌아도 미로
선재동자는 海印圖를 끝없이 돈다
마지막 선지식에 걸려버린 華嚴의 미로
칩과 칩 사이를 끝없이 헤맨다.
물에 빠진 버들잎 도시를 열어 말리며
아직 어딘가 맴돌고 있을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찾는다
사랑의 여운과 이별의 파문을 찾는다
숫자로만 기억했던 향기와 호홉
귓전을 뜨겁게 달구던 회로의 접점마다
해인도의 골목골목 꺾인 가지마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버들잎 속으로 들어가 삼매에 든다.
나의 세상이 다시 이 버들잎 속에 기억되고 저장되기를.
폐가 / 송기흥
집에도 생이란 게 있겠다
신창 재개발 지구 외딴집
목련나무 살구나무 다 파가 버리고
문짝 뜯어내고 세간 드러내니 온갖
잡풀들이 토방까지, 마루까지 올라선다
숫제 안방까지 들어가서 없는 집의
멱살이라도 잡고 어찌해 볼 참이다
무장해제의 한 생, 정신을 놓아버린
말기 암 환자의 임종 직전의 몰골 같다
죽는데 전념하느라 정신이 없어
세상에 대하여 미련도 염려도 없겠다
죽음이란 저렇듯 삶이 너덜너덜 닳고 닳아서
죽는 게 더 편하겠다 싶을 때 찾아오는
피치 못할 그 무엇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
어느 날 불도저가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퀭한 눈동자며 얼룩덜룩 곰팡이 핀 신음들.
행방불명의 생각들마저 깡그리 무너뜨릴 것이다
재차 죽음을 정리하는 파죽지세의 자리에
그리하여 새로운 생의 호흡이 있겠다 그런데
왜, 저 다 된 시간을 얼른 치워버리지 않고
놔두고 있는지 엉뚱한 조바심을 놀래키는
뀡. 퀑, 먼 산에서 건너오는 소식 한 통에
솔깃 귀를 쫑그려보는 죽은 짐승의 시신
주위가 아연 고즈넉하다
불갑사 본존불本尊佛을 향하여 / 송기흥
불갑사 대웅전 앞뜰에 아름드리
목백일홍 한 그루 꽃송아리 만발이다
그 무슨 비밀한 소원이 있어
해마다 찾아와 백일 기도를 하나
사방팔방으로 입술이 타도록 발원을 하나
둘러보면 세상사 이뤃 게 너무 많아
무엇을 빌어야 할지, 나도 누구한테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본 적 있던가
그런데 가만, 저 황홀한 손끝으로
부처님 코앞에서 꽃보시를 하는 저
나무보살의 속내를 어찌해야 할지
복전함에 지전을 넣고 오체투지
절을 해대는 아지매보살 할머니보살들은
또 저 주름살 탱탱하게 펴지도록
무슨 복을 내려줘야 할지 지그시
눈꺼풀을 당기는 본존불의 상호에
진땀이 배어 나는 듯하다 아무렴,
바람이나 쐬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우리도
사는 게 이마에 땀나는 일이기야 하지만
산문 밖 소식도 흉흉한 터에
파업이라도 할 참인지 오뉴월 땡볕에
이래저래 부처님 노릇도 고역일 터
그 눈치를 챘는지 저 목백일홍 보살님도
제 몸을 뒤틀어 한 소끔의 꽃비를
흩뿌려 보는 여기는 이런, 불경한 생각
들 법도 한 폭폭 찌는 복날의
인적 뜸한 절간이지 않은가
- 송기흥 시집 <흰뺨검둥오리> 2005
안쪽을 위하여 / 정윤천
소싯적엔 신발 바깥쪽에 신경을 쓰곤 했던 것인데
요즘 들어서, 발가락에 자주 땀이 차는 걸 느끼면서
어쩌다 그렇게 신발의 안쪽을 들여다보게도 되었다
큽큽한 발 냄새가 먼저 와서 들키는가 싶더니
끌고 온 길들의 요철, 지난 시간의 버짐 같은 기억들이
껌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을 마주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신발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
한때는 그렇게 바깥쪽을 향하여
온전히 빛이 나기를 바랐던 열망의 반대쪽에 자리한
순식간에 코를 싸쥐게도 하는 그것이
신발을 더더욱 신발답게 하는 안쪽의 일이었음을
유심한 마음으로 느껴보기도 한다.
옛집 마당에 / 정윤천
바람도 한바탕 씽씽 불어라
세차도록 칼칼히 시원스레 불어
우리들 뛰놀았던 대숲 언저리
죽순 같은 희망으로 뾰족한 그리움으로
흔들어 들깨울 것들 죄다 깨워라
할머니의 텃밭 가득 토란은 살쪄 알이 굵고
마늘은 여물고 상추꽃은 쇠어서
허옇게 허옇게 머리 풀고 날려라
굴뚝엔 연기 오르고 사랑엔 등불 밝혀서
그날 밤 뒤란 가득 탐스런 감꽃들도 수북이 쌓이거든
쓰러진 토담벽 울타리를 넘어
수심 서린 잔별들도 총총히 밝고
주름 많은 빨래를 펴던 어머니의 방망이질 소리
당신의 깊은 한숨 소리에 마당도 한쪽 폭삭 꺼져라
부엌에는 도둑고양이 마루 밑에 새앙쥐
뒤주 아래 두꺼비 확독 곁에 씨암탉
싸움도 한판 설크러지고
풀기 없는 오랜 고요를 깨워 앞산도 쩡쩡 이마를 쳐라
어수선한 대청마루 신발 흐트러진 토방 끝까지
성가신 애기들의 울음소리가
사립짝 울바자 위에 소란스레 울리고
옛집의 너른 마당귀 해마다 화들짝 피던
허연 살구꽃 그늘, 그 아래 여린 풀잎 한 잎도
다시금 남김없이 푸르름 들어라
빗방울, 빗방울 / 나희덕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 나희덕 시집 < 어두워진다는 것 > 2001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 나희덕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밸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칼날을 베고 잠들던 날
탱자꽃 피어 있던 고향 집이 꿈에 보였다.
내가 칼날을 키우는 동안
탱자나무는 가시들을 무성하게 키웠다
그러나 꽃잎도 함께 피워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가 환했다
꽃들을 지키려고 탱자는 가시를 가졌을까
지킬 것도 없이 얇아져 가는 나는
내 속의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는데
탱자 꽃잎에도 제 가시에 찔린 흔적이 있다
침을 발라 탱자 가시를 손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어린 시절
바람이 와서 탱자 가시를 가져 가고 살을 가져 가고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나는 탱자 꽃잎보다 얇아졌다
누구를 벨지도 모르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구두가 남겨졌다 / 나희덕
그는 가고
그가 남기고 간 또 하나의 육체,
삶은 어차피 낡은 가죽 냄새 같은 게 나지 않던가
씹을 수도 없이 질긴 것,
그러다가도 홀연 구두 한 컬레로 남는 것
그가 구두를 끌고 다닌 게 아니라
구두가 여기까지 그를 이끌고 온 게 아니었을까
구두가 멈춘 그 자리에서
그의 생도 문득 걸음을 멈추었으니
얼마나 많이 걸었던지
납작해진 뒷굽, 어느 한쪽은 유독 닳아
그의 몸 마지막엔 심하게 기우뚱거렸을 것이다
밑 모를 우물 속에 던져진 돌이
바닥에 가 닿는 소리
생이 끝나는 순간에야 듣고 소스라쳤을지도 모른다
노고는 길고 회오의 순간은 짧다
고래 뱃속에서 마악 토해져 나온 듯한
구두 한 컬레, 그 속에는
그의 발이 연주하던 생의 냄새 같은 게
그를 품고 있던 어둠 같은 게
온기처럼 한 웅큼 남겨져 있다 날아간다
흐린 날에는 / 나희덕
너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길 위에서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땅 끝 / 나희덕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넸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나 서른이 되면 / 나희덕
어둠과 취기에 감았던 눈을
밝아오는 빛 속에 떠야 한다는 것이,
그 눈으로
삶의 새로운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 입술로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려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가을비에 낙엽은 길을 재촉해 떠나가지만
그 둔덕, 낙엽 사이로
쑥풀이 한갓 희망처럼 물오르고 있는 걸
하나의 가슴으로
맞고 보내는 아침이 이렇게 눈물겨웁다.
잘 길들여진 발과
어디로 떠나갈지 모르는 발을 함께 달고서
그렇게라도 걷고 걸어서
나 서른이 되면
그것들의 하나됨을 이해하게 될까.
두려움에 대하여 통증에 대하여
그러나 사랑에 대하여
무어라 한마디 말할 수 있게 될까.
생존을 위해 주검을 끌고가는 개미들처럼
그 주검으로도
어린것들의 살이 오른다는 걸
나 감사하게 될까. 서른이 되면.
그를 위하여 / 나희덕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제일 하고 싶은 일은
그가 먹는 밥을 짓는 일입니다
그를 위하여
한 소금 가슴 부풀어 오르는 일입니다
쌀알처럼 깔깔했던 나의 마음도
그에게로 가서 살이 될 수 있다면
밥을 짓는 동안
뜸들이듯 기다리며 익어가지요
삶의 허기가 찾아드는 저녁
그를 위하여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따뜻한 밥 한솥 짓는 일입니다
그리고 함께 먹는 일입니다
그와 마주 앉아 밥 한 술 뜨면
창밖에 보름달이 뜨고요
거리의 출출한 사람은
아무나 불러다 먹이고 싶어집니다
난 건달이 되겠어 / 장석주
그동안 너무 오래 일만 하면서
살았어
흰 손 흰 얼굴은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데도 말이야
책 읽는 것도 신물이 나
망상은 줄지 않고
미친 피는 잠들지 않아
구름 구두를 신고
카페에 나가 에스프레소를 마셔야지.
카페 통유리 너머로
사람들과 흘러가는 구름과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후의 한 때를 보내야지.
줄을 세운 바지를 입고
젊은 여자를 향해
휘익 휘이익 휘파람을 불어보겠지.
그러면 여자가 돌아볼테지.
눈웃음 치며 그 여자에게
시간이 있느냐고,
나와 함께 춤출 시간이 있느냐고.
100년 후의 일기 / 임보
며칠 전엔 내 증손자의 증손자들이
내 유택에 찾아와 시제를 지내고 갔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어보니
기상천외,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다
모든 공장은 자동화시스템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농업과 어업도 로봇들에게 맡겨 운영한다
노역에서 해방된 인간들은 오락이나 즐기며 빈둥거리고
자동차 대신 수륙병용의 작은 헬기로 나들이를 한다
회사원도 출근하지 않고 재택 근무
학생들도 가정에서 영상수업을 받는다
세계연방 정부는 투표를 하자고 켐페인을 벌이지만
입후보자도 유권자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화가 음악가 시인들이 세상의 존경을 받는 귀족들이다
전시회 연주회 시낭송 모임들이 매일 곳곳에서 열리는데
낭송 가운데서도 낭창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다
삼각산 밑에 덩그렇게 임보문학관을 만들어 놓았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어 관리인은 늘 낮잠이다
내가 소장했던 수석 한 점이 1억 달러에 낙찰되고
내가 그린 시화 한 점이 5억에 거래된다는 소문…
서리가 내린 초겨울 아침
검은 가마귀 한 마리
마른 나무 우듬지 위에서
몇 번 울다 날아간다
내소사 / 도종환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
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
백의관음보살좌상 눈부처로 있었으므로
단청 지운 맨얼굴을 사랑하였으므로
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
깊고 긴 숲 지나
요사채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
능가산 품에 깃들여 고즈넉할 때는 나도
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
다 안다고 말하곤 했다
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
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그의 오래된 내상(內傷)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
그가 왜 적소폭포 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곁에 사월 꽃등 행렬 가득하였으므로
그의 기둥과 주춧돌 하나까지 사랑스러웠으므로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해 기울면 그의 그리움이
어느 산기슭과 벼랑을 헤매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서
포(包)* 하나가 채워지지 않은 그의 법당이
몇백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의 흐느낌 그의 살에 떨어진 촛농을 모르면서
* 공포(栱包)처마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북벽 연대기 / 윤의섭
점은 늘 북반구로 향한다 자성에 이끌리듯이
그곳에 거대한 절벽에 서 있다 시간을 뚫고 솟은 망각의 벽
한 귀퉁이에 강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은하를 탁본하여
남에서 북으로 천구를 가로지른 삼백 억의 태양이 흘러간 흔적이 새겨 있다
나는 안다 북벽의 뿌리와 마천루 사이는 고단한 영혼으로 채워야 할 여백이라는 것을
작은 틈바구니에 겨우 둥지를 튼 이 간빙기가 단 한 줄 그어진 퇴적층인 것을
북벽을 생각하면 이미 북벽에 이른다
미래를 꿈꾸자 모든 과거가 생겨나듯
1. 고생대
새벽에 일어난 P씨는 밭으로 나가 살충제를 뿌렸다
벌레는 죽여야 할 존재였다 P씨는 새참을 먹고 다시
흙을 다져주었다 오후에는 텔레비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P씨는 연립주택에 살고 있다 반지하에 사는 동생네가
반찬거리를 갖다 주었다 P씨는 밭을 김매다
죽은 배추벌레를 발견했다 저녁에 동생네 집에서 반주를 걸친
P씨는 어두운 계단을 걸어 현관 앞에 섰다
감지기로 자동 점등된 백열구 불빛이 P씨에게
뿌려졌다 신화 시대에서 그리 멀리 오진 않았다
2. 성스러운 시간
그녀를 안고 깊은 잠에 빠진다
삼십 년 전에도 그녀의 품에서 잠든 적 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천 년 전에도 그녀와 깊은 잠에 빠진 적 있다
그녀와 잠든 순간만큼은 언제나 똑같다
깨어나보면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아침에 늘 혼자 깨어난다
하루 동안 새하얗게 늙어도
아침이면 생의 처음으로 돌아와 있다
늘 그녀의 품에서 죽었다 살아난다 불멸의 시대다
3. 미래계
산 너머 깊은 골에 손바닥만 한 땅뙈기가 있다
약초를 심어놓고 가끔 찾아간다
지나가는 바람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장소에
갈 때마다 영혼을 조금씩 떼어놓고 온다
비 피할 움막을 지어놓고 책도 한 권 갖다 놓았다
심심할 때 읽으라고
내 모든 기억까지 옮겨지면
거기서 느릿느릿 산보하라고
서툰 산길을 다져놓았다
하루는 땅뙈기가 조금 움직인 듯했다
땅은 어디론가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긴 여정이 끝나는 날
세상엔 손바닥만 한 땅뙈기만 남을 것이다
영혼이 거니는 신전만 남아
잊혀진 인류를 명상할 것이다
늙은 까마귀가 날아오길래 나는 약초 잎을 부리에 물려준다
4. 先캄브리아기
ㅡ지구의 나이는 대략 47억 년 정도인데, 최초의 생명체가 야트막한
웅덩이 속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27억 년 전이다.
광합성 작용을 하는 식물의 가장 오래된 화석은 약 25억 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의 헝클어진 머리는 가장 진화한 형태의 前頭葉이다
오랜 사색의 결과로 나무는 지층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로 결정했다
태어난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나무의 몸을 입는다 나무는 죽음 이후에도 산다
25억 년을 그렇게 온통 빛을 빨아들이며
자신의 존속에 대해 계절마다 해탈하며
바람이 스치는 게 아니라 바람 속을 헤엄치는 거라네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몸속에선 억겁이 흐르고 있다네
5. 天長地久,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옥상에 올라 불타는 노을을 본다
옥상에 올라가 불타는 하루저녁에 몸을 담근다
옥상에는 시들어 죽은 화초가 박제된 채 화분에 꽂혀 있다
불사조처럼 죽어야 사는
불사조처럼
*
당신은 별빛의 화석이다
별은 죽을 때 가장 반짝이고/당신은
가장 빛나며 가장 먼 저편으로부터 간신히 찾아온
지울 수 없는 상흔이다/그러나 슬퍼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의 화석이므로
연암을 필사하다 / 서안나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넜다
젖은 말 잔등에 올라앉아
연암의 뒤를 따라간다
연암의 두려운 눈동자와 시끄러운 귀를 지나
내 손가락들이 먼저 강물에 젖는다
젖은 필체 끝에서
쏟아져 내리는 시뻘건 강물
사나운 강물을 가로 지르는 사이
소란스러운 마음은 강을 쉽사리 건너지 못하고 있다
젖지 않는 것들은 생각 뿐이며
젖는 것 또한 생각 뿐이라고 연암이 말을 건넨다
전화 속 친구의 목소리는 혀가 풀려있었다
친구의 뺨을 세게 때렸다
내 몸이 다 얼얼했다
친구를 짐짝처럼 택시에 구겨넣었다
응급실에서 그녀가 뱉어내는
한 주먹의 수면제와 알약들이
상처처럼 퉁퉁 불어있었다
강물로 땅을 삼고, 몸을 삼아*
연암은 자신을 아홉 번 건넜지만
하룻밤에 나는 나를 천 번이나 건넌 적이 있다
건널 때마다 내 몸으로 흘러드는
삶과 죽음을 넘나들던
허우적거리던 친구 손아귀의 힘
힘줄처럼 뻗어간다
내 눈귀가 너무 소란스럽다
연암이 이국의 낯선 강을 건너고 있다
*박지원(朴趾源)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나의 서역 - 비망록 / 김경미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 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선천적으로 수줍고 서늘한 가을인 듯
오직 그것만이 생의 한결같은 그리움이고
서역이라니
민물 / 고영민
민물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약간 미지근한
물살이 세지 않은
입이 둥근 물고기가 모여 사는
어탕집 평상 위에
할머니 넷이 나앉아 소리 나게 웃는다
어디서 오는 걸까, 저 민물의 웃음은
꼬박 육칠십 년,
합치면 이백 년을 족히 넘게
이 강 여울에 살았을 법한
강 건너 호두나무 숲이 바람에 일렁인다
긴 지느러미의
물풀처럼
어탕이 끓는 동안
깜박 잠이 든 세 살 딸애가
자면서 웃는다
오후의 볕이 기우는 사이,
어디를 갔다 오느냐
이제 막 민물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아가미의 아이야
나는 상처보다 흉터를 사랑한다 / 강영란
강물이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상처는 아물기도 하고 잊히기도 하지만
흉터는 내 몸의 성좌
무덤까지 간다
그러니 나는 상처보다 흉터를 사랑한다
가시연이 베어져 열리면 꽃이 되듯
칼에 베인 손 피가 꽃이 되는 순간
내 몸에 저의 생을 기록하는 일에 몰두한
칼의 바깥
잘못 든 길은 상처이거나 흉터를 남긴다
애초에 너는 나의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지나갈 너와 다가오는 너 사이에 있는
상처이거나 흉터는
아프고 있거나 아팠었거나의 문제이다
너덜너덜 / 이시하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너덜너덜해졌다 서로를 물어
뜯을 때마다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지나치게 몰두했고 터무니없이 용감했다
아주 가끔, 위로의 소주잔을 건네며 밤늦도록 질기고
맛없는 문장들을 씹었으나 깨어나면 어제보다
불결한 구토가 입술을 더럽혔다
철학책 같은 시집들을 구겨 밑을 닦았다 꽃그림이
그려진 퍽 도덕적인 시집은 밑줄을 그어 가출한 소녀에게
선물했다 좀처럼 해독하기 힘든 몇몇의 시집들은
어학사전 옆에서 낡아갔다 길들여지지 않는 낯선
모국어들이 무럭무럭 썩어갔다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너덜너덜해졌다 다시는 장미를
꿈꿀 수 없게 서로의 흉터를 후벼 파고 덩굴식물을
심었다 우리는 기꺼이 상처입고 담담하게 앓아누웠다
아주 가끔, 어린 새처럼 즐거이 휘파람을 불었고 봄바람처럼
근심없이 웃었으나, 깨어나면 어제보다 창백한 슬픔이
발밑에 흥건했다
그랬으면 좋겠네 / 이시하
애인이 빨리 늙어 소처럼 느리고 순해지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느지막이 일어나 찬 없는 밥을
우물우물 먹고 나서 산수유 꽃 피었드만, 그거나 보러
가지, 그랬으면 좋겠네 사람구경도 참 쏠쏠하구먼,
천천히 걷지 뭐, 그랬으면 좋겠네 강 언덕에 시름도
없이 앉아서는 노을빛이 퍽 곱구먼, 그랬으면 좋겠네
주름진 내 손을 슬쩍 당기며 거 참, 달빛 한 번
은근하네, 그랬으면 좋겠네
애인이 빨리 늙어 꾀병 같은 몸사랑은 그만두고
마음사랑이나 한껏 했으면 좋겠네 산수유 그늘 아래
누워 서로의 흰 머리칼이나 뽑아주면 좋겠네
성근 머리칼에 풀꽃송이 두엇 꽂아놓고 킥킥거렸으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허허 웃으며 주름진 이마나
긁적거리면 좋겠네 아직두 철부지 소녀 같다고
거짓 농이나 던져주면 좋겠네 한세상 흐릿흐릿
늙어가는 게 싫지는 않냐 물으면 흥, 흥, 콧방귀나
뀌었으면 좋겠네
세상의 길가 / 김용택
내 가난함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배부릅니다
내 야윔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살이 찝니다
내 서러운 눈물로
적시는 세상의 어느 길가에서
새벽밥같이 하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생각이 많은 밤 / 김용택
생각이 많은 밤이면 뒤척이고 뒤척이다
그만 깜빡 속은 것 같은 잠이 들었다가도
된서리가 치는지 감 잎이 뚝 떨어지는 소리에 그만
들었던 잠이 번쩍 깨지는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에 매달리어
또 그 생각에 매달리기 싫어서
일어나 앉아 머리맡에 새어 든 달빛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는
더듬더듬 불을 켜보지만
그 생각들이 달아나기는커녕
새로운 생각들이 더 보태지는 것이다
그런 밤이 가고
풀벌레 우는 새하얀 아침이 오면
마당 한구석 하얀 서리 속에 산국이 노랗게 피어
향기가 더 짙고
집 앞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떨어진 잎들은
천근이나 만근이나 된 듯 흰 서리에 속이 젖어
땅에 착 달라 붙어 있는 것이다
마루에 나와 우두커니 서서 이상없이 어제와 똑같이 흐르는
강물이며 그냥 그대로 다 있는 텃밭에 김장배추라든가
알몸이 파랗게 거의 다 솟은 무라든가
배추밭 구석진 곳에 심어져 쪽 고르게 자란 쪽파에 내린 흰 서리라든가
하얀 서리밭을 걸어오시는 나이가 드실대로 다 드신
이웃집 큰아버님의 허리 굽은 걸음걸이라든가
앞산 산 속 참나무 밑이 헤성헤성 보이는 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개운해지고
텅빈 마음 안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또렷이 보이는 것이다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까닭도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고
그런 것들이,
그러한 것들이
투명한 유리알 저쪽처럼 손에 잡힐 듯 환하게 보이고
마음에 와 그림같이 잠기는 것이다
- 김용택 시집『그 여자네 집』1998
Staring at a Mirror - Fariborz Lach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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