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함께사는 길 08.1 [지역 Hot & Issue 1] 낙동강 하구, 잃어버린 20년 되찾기
하구둑은 낙동강의 흐름을 근원적으로 차단함으로 인해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다.
쉽게 말해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 못하는 뱃속의 고통을 강제했다. 그리고 20년이 경과했다.
고려되지 못했던 가치들이 제기되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낙동강 하구둑은 1987년 11월16일 완공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경과한 2007년, 부산에서는 10년 전 환경단체와 소수 전문가들의 주장에 불과했던 둑의 해체를 통한 복원이 핵심적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낙동강 하구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려했던 문제가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고 고착화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이 상태가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너진 삶의 터전, 그리고 사라진 생명들
총연장 2.4킬로미터의 하구둑은 당시 부산시민의 80퍼센트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의 폭압적 국토개발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하구둑이 건설되기 전 을숙도에는 90세대 389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고, 이웃한 일웅도에는 48세대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월 평당 2000원씩 사용료를 물며 땅을 일구며 살았다. 그들이 사는 집은 번지도 없었으며, 가옥 등기도 되어 있지 않았다. 갈대 이엉을 엮은 움막 같은 집에서 전기도 없이, 여름이면 모기떼에 겨울이면 시린 바람 앞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들은 물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먹을 물이 없어 하단에서 배로 마실 물을 날라다 먹었다.
하구둑의 건설은 이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 같은 일은 을숙도나 일웅도 주민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부산시 수협소속 어민(1700명)의 절반(1100명) 이상이 하구 일원의 5개 어촌계 소속이었다. 그들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한 강바닥’을 통해 당시 월 소득 평균 40~50만 원의 고소득을 누리고 있었다. 하구둑의 건설은 어족의 상실을 의미함과 동시에 내일에 대한 불확실한 세계를 의미했다. 그 외 비어촌계 어민으로 일대 어민의 80퍼센트가 “12만 원이라는 목돈이 없어 어촌계에 가입하지 못했고 무지해서 허가를 안내도 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등록 같은 것은 전혀 없이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직업상 어민임에는 틀림없지만 증명할 아무런 근거가 없어 보상에서조차 제외되었다.
“뭐라꼬예, 맛을 인자는 못 잡게 된다꼬예? 아이구 이를 우짜노. 안됨니더. 맛 못 잡으몬 우리는 다아 굶어 죽심더. 내 평생 맛만 잡아가꼬 아버지 없는 우리 새끼들 여섯을 다 먹이고 공부시킷다 아이가. 올해는 맛이 또 얼매나 마이나 났는지(많이 생겨났는지) 강에 나가 보면 송신해서 보도 못 한다카이.”(『뿌리 깊은 나무』중) 이처럼 낙동강 하구에서는 자기 노력만 있으면 밥을 굶을 일이 없었다. 특히 명지 하신부락 신전어촌계의 경우 어민 78명이 전부 해태 양식에 종사했는데 연평균 400만~1천만 원의 소득을 올려, 명지 일대의 제일 부자마을로 소문이 났었다. 이 외 하단~장림 갯벌에서 갯지렁이를 채취하여 낚시미끼로 하루벌이를 하던 사람들은 1일 7천 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다. 금곡동(동원마을)에서는 장어구이가 유명했다. 약 80세대의 주민이 낙동강에서 무동력선으로 장어를 잡았다. 개구리를 미끼로 주낙을 놓아 잡았는데 주로 5~8월이 성수기였다. 엄궁동 일원 주민들은 재첩을 생계로 살았다. 남자들이 모래를 뒤져 재첩을 채취하면 여자들은 밤늦도록 삶아서 까고 간을 맞추고 양념해 이튿날 새벽 시내 곳곳으로 팔러 나갔다. 당시 재첩은 남자 어른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것만 재첩으로 쳐줄 만큼 크고 싱싱하여 부산의 명물이기도 했다.
전설이 되어버린 이런 이야기들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을까. 하구에서 어류나 패류만을 채취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일대의 생산력이 그만큼 뛰어나고 생물종 다양성이 풍부했다는 것의 반증이었다. 이제 낙동강 하구에서 재첩은 가망 없다. 섬진강에서 종패를 사와 뿌려도 살지 못한다. 살아날 수 있는 환경이 안 되기 때문이다. 장어들은 둑에 막혀 부상하지 못한 채 실뱀장어로 포획된다. 강을 회유하거나 소상하던 어족들은 목록에서 지워졌다. 둑이 들어서고부터 수질의 악화는 현실화되었고 각종 수질오염사고는 연례행사처럼 벌어졌다. 여름의 녹조와 겨울의 갈조가 되풀이되었다. 저서생물의 경우 하구역 갯벌 전역에서 대량 서식했던 점갯고둥, 오디짜부락고둥, 참게, 징거미새우 등은 하구에서 발견되지 않거나 사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라진 생물 목록과 복원의 모색
하구둑은 낙동강의 흐름을 근원적으로 차단함으로 인해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다. 쉽게 말해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 못하는 뱃속의 고통을 강제했다. 지구상 그 어떤 생태계도 이런 일방적인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강 하구를 유지하던 시스템 교란이 필연적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20년이 경과했다. 고려되지 못했던 가치들이 제기되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낙동강 하구 해역은 인간경제활동의 기반이기 이전에 풍부한 자연환경으로 형성된 생태계다. 무기물에서부터 철새를 비롯한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각각의 보유량을 산정한 결과 낙동강 하구 해역의 생태, 경제적 가치는 단위 헥타르 당 연간 29만 달러로 평가됐다. 동일한 분석법(에머지)으로 평가된 국내 다른 지역 섬진강 하구(2만5천), 강화갯벌(1만8700),새만금갯벌(간척사업 이전 1만900)에 비해 10배 이상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수치는 하구둑의 존재를 전제한 값이다. 그렇다면 하구둑이 해체되고 이전의 조건으로 되었을 경우는 그 값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주요 국가하천의 꽁무니를 틀어막을 무렵 유럽은 포도주의 병마개를 뽑듯 강을 살리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프로젝트의 핵심단어는 범람이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근교 라인강 하구 하링플리트 하구언의 변신은 우리가 주목할 대상이다. 이 일대는 1953년 겨울 북해에서 몰려온 해일로 인해 1800명이 수해로 사망한 뒤 하구둑이 건설됐었다. 이후 흐름이 막힘으로 인해 나타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0년 5월 네덜란드 국회와 정부는 2005년부터 개방을 결정했다. 150만 명이 식수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둑을 허물고 범람 속에서 지하수의 이용을 도모했다. 동시에 하천유역 농지 10퍼센트에 해당하는 5천 헥타르 농지를 자연으로 되돌렸다. 향후 10년 내 30~40퍼센트의 농지를 추가적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 파밭을 수로와 갈대밭으로 복원시키듯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생산과잉으로 남아도는 농지의 문제와 80년대부터 대두된 자연보호운동이 토대가 되긴 했다.
그렇다면 낙동강 하구는 그럴 가능성이 없는가. 한국수자원공사 부산권관리단에서 2007년 들어 전면 수문을 개방한 것은 지난 7월 11일 제4호 태풍 마니 때문이었다. 상류로 유입되는 물을 빼내기 위한 조치였다. 이 외 일상적으로 10개의 수문 중에서 양쪽 끝머리 수문을 부정기적으로 열어둘 뿐이다. 수자원공사는 이 통로를 통해 어류들이 이동한다고 했지만 어림없는 말이다. 그리고 담수가 을숙도를 거쳐 해수와 만나는 일도 아직은 미미한 양이다. 실제 을숙도 남단의 복원한 수로 가장자리 갈대밭에는 아직 이렇다 할 생명체의 활동은 눈에 띄지 않는다. 결국 완전한 개방이 아니고는 시늉에 그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국제강네트워크(IRN)〉에 의하면 지난 2000년 이후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약 100개의 댐이 해체되었다고 한다. 이중 동부의 메인주 켄느벡강에 있던 ‘에드워즈 댐’이 1998년 해체되었는데, 지난 160년 동안 단 한 마리도 볼 수 없었던 청어가 수백만 마리나 회귀했다. 나아가 멸종위기에 처한 대서양 연어, 줄무늬 농어, 코짧은 철갑상어 등이 돌아와 지역민들을 흥분시키기도 했다. 위스콘주 바라부강도 댐을 없애자 11종에 불과했던 어종이 24종으로 증가했다. 낙동강 하구둑을 해체하거나 상시수문개방이 이루어질 경우 하구둑 설치 이후 사라진 생물상의 복원은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질 것이다. 문제는 의지이자 발상의 전환이다. 하구둑의 철거나 상시수문개방을 목표로 한다면 모든 화살은 개방을 통해 가능한 방향으로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나, 지금처럼 현상유지 차원의 하구둑 유지가 계속된다면 그만큼 기회요인을 상실할 뿐이다.
경부운하와 낙동강 하구 복원
2006년 12월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는 담수와 해수의 소통을 위해 △상시 방류를 함으로써 둑 바깥의 기수환경 조성 △둔치에 여수로를 뚫어 담수와 해수소통 방안을 제시했다. 여수로의 설치가 낙동강 하구에서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일대의 지형적 특징과 다양한 조건이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하구둑을 열고 하구를 복원하기 위한 ‘물꼬’로서는 적절하다고 본다.
분명한 사실은 어떤 하구역도 흐름이 중단되고 지속적인 유량의 공급 없이는 하구는 더 이상 하구가 아니다. 더 이상의 인위적 통제는 중단되어야 한다. 나아가 어불성설의 경부운하 계획은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낙동강 하구를 복원하기 위함이라면 우선적으로 경부운하 계획부터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2008년 경남 람사르회의며 하구둑 해체논의는 코미디이며 나아가 부산시의 하구역 일원에 대한 개발에 돛을 달아주는 꼴이 될 뿐이다.
문화재구역까지 개발하려고?
하구둑의 건설 이후 하구 일대 주민들의 삶은 위축과 소외로 점철되었다. 하구역 16개 어촌계 중 어촌계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획량이 부진할 뿐 아니라 고기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구둑 건설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새들과 어족자원에 대해 다투는 우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구개발은 달리 큰 소득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에서 개발을 통해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를 야기했다. 때문에 이들은 환경단체가 서낙동강권에 대해 개발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최근 부산시는 용지난을 이유로 하구의 한 축인 서낙동강 일원에 그어져 있는 문화재보호구역의 절반 이상을 해제하는 형상변경안을 문화재청에 일방적으로 제출했다. 이에 불복해 〈낙동강하구 관리민관협의회〉 소속 위원 7명 중 6명이 탈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구관리협의회는 ‘명지대교’라는 사회적 갈등을 겪으며 만들어진 협의체다. 부산시 스스로가 하구 조례를 만들어 규정하고 있는 위원회나 결과적으로 부산시는 협의회의 정신과 비전을 농락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부산시는 이번 민간위원의 탈퇴로 인해 하구 관리에 치명적 결함을 스스로 야기했다. 하구 관리 및 보전의 행정에 구멍을 낸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 점을 직시해야 한다. 만에 하나 부산시와 문화재청이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문화재구역을 해제하고자 한다면 그야말로 낙동강을 ‘오리알’로 만들어 버리는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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