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바람대로,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온 것일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김남주 정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 통일을 위한 민족문학의 밤에서 시 낭송하는 김남주 시인ⓒ 연합뉴스
공동추진위원장, 고문, 자문위원, 추진위원들이
흡사 대한민국 전체 지역과 부문을 넘쳐난다.
기금 걷는 비용이 기금액을 넘기는 사례는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지만 김남주 기념홀
건립계획 보고회 팸플릿이 벌써 김남주 기념홀
아닌가. 그는 죽을 때까지 고향 농부처럼 얼굴이
새까맣고 심성이 순박했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옛날 유행가를 즐겨 불렀다. 혁명적 사상 실천과
그 사이로 주옥같은 시 몇 편이 가능했다. 기적
같은 작품이었다. 단 몇 편만 가능한.
- '김남주 기념홀 건립계획 보고회 팸플릿'[1], 김정환
죽은 이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살아있는 느낌이다. 그런 죽은 이들 세계의 물성이 없으면 로마도 폐허에 지나지 않는다. 평생 제자리를 지킨, 있을 자리에 반드시 있던 시인의 죽음은 빈번히 제자리 자체를 결석으로 만든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혁혁하지만 김남주는 30년에 걸쳐 살아생전처럼 정다운 시인으로 우리 곁을 맴도는 희귀한 사례가 되었다.
그의 모뉴멘탈리티에는 세월의 영웅-신화적 각질이 전혀 없다. 이는 살아남은 선배 동료들의 애정 어린 배려가 담긴 증언과 무엇보다 가장 혁명적일 때에도 한국적 처음의 농촌 모더니즘('꽃이다 피다 / 피다 꽃이다', 김남주 '잿더미' 중)을 심화하는 그의 시의 가장 친근한 공동체 정신('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김남주 동제목 시 중) 덕분이다.
시는 총체의 찰나를 담고 김남주 30주기를 추모하는 이들은 30년을 젊어질 흔쾌한 의무를 갖는다. 김남주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를 재점검해 볼 수 있고 그것이 또한 김남주 30주기 추모의 물성을 이룰 것이다. 실로 다양하고 발랄하고 참신한 '김남주 이야기'들이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김남주 생가는 김남주보다 작고 김남주
얼굴보다 새까맣다. 내부는 좀 낫다. 김남주
초상화 걸리고 유품의 생계가 김남주보다
밝다. 옥중시 적힌 교도소 화장지 아직도
똥 냄새 나고, 칫솔 갈아 우유갑 안쪽 면에
새긴 것은 그때도 지금도 묘비명 김남주.
상투적인 예찬으로 혁명적 시 정신의 진을
빼는 기념의 완성이 여기 없다. 사진 속
고은, 백기완, 송기숙, 문병란, 황석영, 박석무,
윤한봉 젊다. 김남주 가장 젊고 최권행,
이영진, 이승철 거의 어리다. 실내라도
실내의 내부가 내부의 내부가 중요하다.
- '그 후', 김정환
[1] 2019년 김남주의 모교인 전남대학교에 건립된 '김남주 기념홀'의 건립계획 보고회를 위한 팸플릿을 말한다.
윤석열 정부 시대에 이 시인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2024, 지금 김남주] 우리가 이 시대에 김남주를 다시 호명하는 이유
80년대 초, 나는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후배들과 시를 공부하면서, 비로소 '광주 5·18'과 '김남주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누가 어떻게 가져왔는지 모를 김남주의 '옥중시'를 필사하고 읽으면서 우리는 '시와 혁명'을 꿈꾸었다.
"학살의 원흉이 지금 / 옥좌에 앉아 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 외적의 앞잡이이고 / 수천 동포의 학살자일 때 /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곳 / 그곳은 어디인가 / 전선이다 감옥이다 무덤이다"라고 노래한 '학살' 연작과 '살아 남은 자들이 있어야 할 곳' 같은 시를 읽을 때면 머리가 쭈뼛거리고 온몸이 오싹했다.
당시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무조건 이적행위로 간주되었고, 당연히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그 시절 김남주의 시집은 금서요 불온서적이었다. 그런데도 문학을 공부한 사람뿐만 아니라 80년대 이후 소위 지식인으로서 '먹물'을 먹은 사람이라면 김남주의 시적 자장(磁場) 안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졸업 후 교직에 들어가 "민족과 역사 앞에 떳떳한 교사로 살겠다"는 다짐을 하고 전교조 활동과 참교육 실천운동에 뛰어들었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후, 복직 투쟁과 참교육 운동의 전선에서 거리의 교사로 살아가던 어느 날, 김남주 시인의 부음을 들었다.
그날, 1994년 2월 16일 오후 5시,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5월 광장에는 고 김남주 시인의 노제를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수십 개의 만장이 바람에 펄럭이고 땅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들은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날, 빈 하늘에서는 김준태 시인이 쓴 만장시 '황토비(黃土碑)'가 절규하고 있었다.
"아들아, 1백년전 / 우리에게는 김남주라는 / 혁명전사-온몸이 사랑과 불꽃으로 뭉쳐진 / 그런 시인이 있었단다 … 우금치 피바다 산마루를 넘어 / 끝끝내 끝끝내는 '조국은 하나다!' / 우리 모두의 철조망을 뚫어버린 / 김남주라는 가슴 벅찬 시인이 / 아들아, 우리에겐 있었단다."
그리고 그날, 황지우 시인이 울먹이며 낭송한 조시(弔詩)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기만 하다.
"한 시대의 창공을 후려치는 채찍질처럼 뇌성번개쳤던 그대 생애를 우리는 / 차마 따라가지 못했으며 다만 피뢰침 아래 웅크린 채 / 겁대가리 하나도 없는 그대의 '함성'을 들었다 / … 아아, 이 아무도 못말리는 꼴통이여, 통큰 강도여, 혁혁한 전사여, 혁명가여, / 그러나 끝끝내는 시인이여, 이 저주받은 대지를 노래한 시인이여"
그날, 그렇게 우리는 5월 광장에 모여 한평생을 '민중해방', '조국통일' 전선에서 펜을 무기 삼아 싸우다가 '조국의 별'이 된 혁명 시인을 가슴에, 망월동 묘지에 묻었다.
'조국의 별'이 된 혁명 시인
▲ 1989년 열린 '통일을 위한 민족문학의 밤' 행사장에서 노태우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 사례를 거론하며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김남주 시인ⓒ 아트앤스터디
그리고 이제 30년이 지난 오늘, 철조망이 가로막힌 분단 조국의 푸른 하늘 아래서 '조국의 별'이 된 혁명 시인 김남주를 다시 불러본다. 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 나간 전사(戰士)요, 혁명가였던 시인 김남주! 일찍이 염무웅 선생이 '70년대의 한국문학을 김지하가 버텨냈다면 80년대를 버티고 있는 것은 김남주'라고 지적했듯이, 그는 80년대 우리 민족문학의 한 정점이었다.
그의 시가 우리 문학사의 전통 위에서 빼어난 점은 1980년대라는 한 시대를 대표하면서도 동시에 고난에 찬 우리 역사로부터 민중적․민족적 전통을 올곧게 이어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용운, 이상화, 심훈, 이육사, 윤동주 등 식민지 시대의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시인들의 유산을 소중한 것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물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 시대의 /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한 시대의 아픔을 / 온몸으로 한몸으로 껴안고 /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 중략 //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 가장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 /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 -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중에서
이 시는 김남주 시인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추모하며 쓴 시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면 늘 전봉준과 김남주 시인의 생애가 오버랩되곤 한다.
김남주는 1945년 10월 16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30여 년 동안 남의 집 머슴이었고, 어머니는 그 아버지가 머슴을 살던 주인집의 딸이었다. 훗날 시인이 된 김남주는 정직하게 자신의 가계를 시로 썼다.
그는 이름 석자도 쓸 줄 모르는 무식쟁이였다 / 그는 밭 한 뙈기 없는 남의 집 머슴이었다 / 그는 나이 서른에 애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되 / 그것은 보리 서너 말 얹어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 - '아버지' 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세상으로부터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농민들의 가장 큰 꿈은 자식 중 누군가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김남주가 "뺑돌이 의자에 앉아 펜대만 까딱까딱하고도 / 먹을 것 걱정 안 하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김남주는 끝내 아버지가 바라던 그런 사람과는 너무도 먼 길을 선택했다. 호남의 명문이라는 광주제일고 2학년 때 오직 일류대를 가기 위한 전쟁터 같은 학교가 싫다는 이유로 덜컥 자퇴서를 내버린 것이었다. 그 후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후, 3선 개헌 반대투쟁, 교련반대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72년 대학 4학년 때.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친구 이강과 함께 전국 최초로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 배포하여, 세칭 '함성'지 사건으로 구속되어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이 사건으로 전남대에서 제적당했다.
"내가 처음 / 시라는 것을 써 본 것은 / 감옥에서였다 / 연필도 없고 / 종이도 없고 / 둘러보아 사방이 벽뿐인 / 그 벽에 하얀 벽에 / 나는 새겨 놓았다 / 이빨로 손톱을 깨물어 / 피의 문자로 새겨 놓았다" - '그 방을 나오면서' 중에서
혁명을 꿈꾸며 전사의 길을
김남주는 1974년 석방 후 해남으로 낙향하여 농사일을 거드는 한편 옥중생활에서 겪은 가혹한 고문 체험과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쓴 '진혼가'·'잿더미' 등 8편의 시를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러나 김남주는 시를 쓰는 일로 만족하지 않고 1977년 지역활동가들과 광주에서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하여 '사회문화운동'의 구심 역할을 하다 수배되었다. 1978년 서울에서 도피 생활 중 당시 가장 강력한 반유신 지하조직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한다.
이때부터 김남주는 혁명을 꿈꾸며 전사(戰士)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 1979년 10월 80여 명의 동지들과 체포되어 60일 동안 가혹한 고문 수사를 받고, 이듬해 1980년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후, 1988년 12월 전주교도소에서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될 때까지 9년 3개월 동안을 감옥 안에서 '전사 시인'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과 문학은 세상의 불의와 불평등을 상대로 한 치열한 싸움으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김남주에게 있어서 '싸움'의 대상은 정치적 독재와 반통일, 착취, 외세 따위였다.
시인이여 /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 시인이여 /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 압제자의 가슴에 꽂히는 / 창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 '시인이여' 중에서
김남주에게 감옥은 창작의 산실이자 투쟁의 현장이었다. 감옥은 김남주 시의 출발점이었으며 옥중시가 그의 대표시가 되었다. 그는 칫솔을 못처럼 갈아서 우유곽 안의 은박지에 시를 새겼으며, 교도관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밑씻개용으로 나오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똥색 종이에 볼펜으로 쓰기도 하고, 인쇄되지 않은 책의 페이지를 뜯어서 그 위에 시를 썼다.
김남주는 생전에 모두 51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360여 편이 옥중에서 쓰인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쓴 시들은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화 교재가 되었고, 노래패는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냈다. 암울했던 시대, 그의 시만큼 강한 무기는 없었다. 그의 시는 가장 선동적인 격문이었고 가장 투쟁적인 노래였다.
시가 물리적 힘으로 전환되는 신화를 탄생시켰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어느새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죽창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자유' 등은 이때 쓴 시들이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 꽃이 되자 하네 꽃이 /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 녹두꽃이 되자 하네 // 중략 //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노래' 중에서
어두운 밤하늘 빛나는 별처럼
▲ 1989년 1월. '남민전 사건'으로 9년 3개월의 옥고 끝에 석방된 김남주 시인이 작가회의 신년 하례식 모임에 참석했다. 왼쪽부터 정희성, 이시영 시인, 현기영, 강승원 소설가, 김남주, 고은 시인, 백낙청 평론가, 문익환 시인.ⓒ 아트앤스터디
김남주는 감옥에서 나온 후 옥중에서 얻은 지병(췌장암)으로 투병하다 1994년 2월 13일, 향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민중이 해방되기를 바라는 혁명의 노래를 남긴 채 그는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김남주의 생애는 "부당한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촉 같은 자유인"이었으며, "피로 씌어진 언어의 화살"인 그의 시에는 '피묻은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가 감옥 안에 있건 밖에 있건 그는 우리 시대의 중심에서 타는 가장 뜨거운 불이었다. 그의 시가 힘을 갖는 것은 바로 꾸밈없는 그의 순결성과 정직성 때문이었다. 우리가 김남주를 통해 배울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김남주가 제기하고 투쟁했던 문제들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전히 우리 앞에 거대한 담론으로 살아 있다. 재빠른 변종과 개종으로 얼굴을 바꾸고 있지만, 그가 싸움의 대상으로 삼았던 적들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더욱 교묘하고 교활하게 '신자유주의'의 얼굴로 분장하고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는 형국이다. 남북분단이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의 모순이 그대로 살아 있는 한, 김남주의 시는 여전히 우리 앞에 칼날로 살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시대에 김남주를 다시 호명하는 것은 단지 그를 '기념비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시와 혁명의 통일을 온몸으로 실천했던 한 인간의 순결한 고투를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다.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곳 /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김남주의 '자유와 해방'의 노래가 어두운 밤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우리의 길을 비추어 줄 것이다.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 (중략) 사람들은 맨날 /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 제 자신을 속이고서. - '자유' 중에서
김경윤 / 1957년 전남 해남. 시인 현재 김남주기념사업회 회장
"이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 불온한 시인의 진심
혁명가로서의 시인은 아직 가능한가
시란 인식의 전환을 끌어내는 일이어서, 좋은 시를 접하면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는 그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야 만다. 그것을 일종의 혁명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그렇기에 과거에는 시인이 일종의 혁명가적 기질을 가진 자들을 의미했다. 시란 머물기를 거절하는 일이고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일이다. 그것은 시인이 각 시편의 시 쓰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 격렬한 변화와 갱신은 각 편의 시 내부에서 스스로 이뤄지는 법이다. 생명이 긴 시란 세월과 더불어 계속 새로워지는 시이며, 그 세월 속에서 독자와의 화학반응을 통해 이전과는 달리 읽힐 힘을 얻는 시를 가리킨다. 가령 김남주의 시처럼.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피가 보이지 않는다
꽃은 어디에 있는가
피는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피가 잠자는가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잿더미> 부분
김남주의 이 시를 그의 절창 가운데 하나로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시를 처음 읽으며 전율하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때는 대학생이었고, 대체 시가 무엇인지 한참 고민하던 때였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어, 이런 걸로도 되는구나.'
이런 것이란 이토록 추상적이고 많은 것이 생략된 말하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된다는 것은 그 생략된 말하기가 지극히 구체적인 현실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꽃과 피라는 지극히 단순한, 심지어는 낡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저 은유가 맥동하는 리듬과 더불어 실체를 얻어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끔 하고, 그것이 우리의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하며 우리의 삶으로 틈입해 온다.("죽음의 불길 속에서/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파도의 심연에서/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잿더미>) 관념이 육체와 영혼을 얻은 뒤 도달하는 곳은 '보리'와 '잡초', '누룩'과 '죽순', 그리고 '죽창' 등으로 표상되는 구체적 삶의 자리다. 이 자리에서 구분되어 있던 '피'와 '꽃'은 하나가 되어, "꽃속에 피가 흐른다"는 전기적인 선언이 도출되는 것이다.
리듬을 통해, 그리고 육체와 영혼을 통해 손에 잡히지 않는 관념의 자리에 선명한 삶의 현장이 자리 잡고, 다시 그 현실은 시적 승화에 힘입어 더 나은 내일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감각이었다. 형식적인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날 선 감각이 마주하는 순간, 그 순간 가능해지는 놀라운 경이로움, 그런 것이 김남주의 시에는 있었다.
감탄 뒤에 오는 곤란함
그것은 김수영이 말하는 '온몸으로 밀고 가는 시'와도 통하는 것이었다. 본디 길항할 수밖에 없을 시와 현실이 시인의 육체를 경유하여 모순적인 합일에 도달하고야 마는 것이 김수영의 '온몸의 시학'이라고 한다면, 피와 꽃의 은유가 육신과 영혼을 경유함으로써 피가 꽃이 되고, 또 꽃이 피가 되는 저 시적 도약의 순간이야말로 '온몸의 시'가 탄생하는 순간이라고 말해야만 하리라.
김수영이 후대에 던진 저 질문을 오래 간직하며 고민하던 나에게 김남주의 시는 일종의 통쾌한 답안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의 시를 접하면서 시에 대한 인식 자체가 크게 바뀌고야 말았으니까. 진은영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첨예하게 미학적이면서 치열하게 정치적인 시'라는 아주 예외적인 순간이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인지, 그 단초를 김남주의 시가 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남주의 시는 나에게 오늘날 시가 처한 어떤 불가능을 실감하게 만드는 두터운 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김남주의 시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고, 뒤이어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 그런데 이걸 지금 어떻게 할 수 있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김남주의 시대는 많은 이들이 혁명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던 시대였다. 그렇기에 시인은 일종의 혁명가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는 옥중에서 시를 쓰며 그 자체로 감옥인 우리의 현실을 초월하는 혁명적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그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혁명을 꿈꾸는 이가 그 혼자만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그의 옥중 시의 상당수가 동료와 이웃을 떠올리고 말을 거는 식이었던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외칠 때, 그는 '우리'의 실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우리'가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라 강하게 믿고 있었다. 요는 많은 이들이 혁명의 꿈을 꾸는 시대였기에 그러한 시 또한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인이 그와 같은 혁명가적 기질을 가질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제 어느 누구도 작가를 지식인이나 혁명가, 혹은 불온분자 비슷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예술은 예술의 자리에 한정되어 생산되며 소비되고 있을 따름이고, 어지간히 도발적이고 문제적인 예술 작품 또한 결국 예술 시장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상품이 되었을 따름이다. 그것이 이 시대의 시인으로서 내가 느끼는 가장 큰 곤란함이다.
▲ 시 <잿더미> 등이 수록된 김남주 시인의 시집 <사랑의 무기> 겉표지ⓒ 창비
오늘날의 작가-독자 관계는 생산자-소비자 관계에 보다 가까우며, 이러한 관계 안에서 '우리'라는 감각을 갖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세계를 개변하리라는 꿈을 갖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이제 불온한 예술이라는 것은 좀처럼 존재하기 어렵고, 설령 그처럼 예외적인 작품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독특한 취향의 상품으로서 유통될 뿐이다.
그런 상황이니 김남주의 저 허리 곧은 시구를 읽으며 할 말을 잃을 수밖에. 그 어떤 시를 써도 감옥에 가지 않는 오늘날의 시인은 시 쓰기 자체가 불온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의 시인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뼈아픈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김남주의 시라는 이야기다.
김남주의 꿈, 우리의 꿈
그러나 시인으로서 여전히 나는 시가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그리하여 세계 자체를 전혀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매체라고 믿는다. 또한 그 세계 인식의 변혁은 한 명의 시인이 해내는 일이 아니라, 시가 독자와 만나 그 의미가 확장되고 갱신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노라 믿는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는 것은 저 '우리'의 재건과 확장이다. 김남주의 시대에 가능했던 그 혁명의 꿈이 다시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우리'의 재건이 절실할 테니까.
창비에 실린 시를 보고
이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 싶어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시라는 것을 써보았다
나의 칼 나의 피에 실린 나의 시를 보고
이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 싶어 보면서
노동자와 농민이 또는 전사가
시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보았으면 한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보람이고 나의 자랑이다
-<이 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 부분
다시 김남주의 시를 읽는다. 모든 이들이 시를 쓰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말하자면 만민의 시 쓰기를 주장하고 소망하는 시라고 할 수 있겠다. 김남주는 어째서 노동자와 농민, 나아가 전사까지 시라는 것을 써보기를 원했던 것일까. 시인으로서 그에게 필요했던 것이 그의 시를 읽고 깨달음을 얻을 수동적인 독자였다면 그가 이런 만민의 시 쓰기를 주장하지는 않았으리라.
그가 진정 바랐던 것은 민중이 실천적이며 능동적인 시 읽기로서의 시 쓰기를 수행하고, 그리하여 민중들 각자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시 읽기가 우리의 인식을 개변하는 행위라면, 시 쓰기를 통한 시인 되기는 그 개변을 적극적으로 촉진하는 한편 스스로 자기 변화를 이뤄내는 능동적 주체가 되는 일이다. 그는 민중을 계몽하기를 소원하지 않았다. 그가 바란 것은 민중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각자의 '우리 사는 꼴'을 발화하는 것, 그리하여 각자가 개별적인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만들어지고 또 갱신되는 것이다.
나는 김남주의 꿈으로부터 오늘날 사라져가는 '우리'를 회복할 방법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시인이,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모두가 등단을 목표로 시를 써야 한다거나, 무슨 시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시를 통해 우리 삶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리라는 결심을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시의 독자-소비자로 여기지 않고, 시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바뀔 수도 있겠지. 물론 그것은 한참 허황된 꿈과도 같은 것이리라. 그러나 시란 다름 아닌 꿈 꾸는 일 아니겠는가. 김남주가 꿨던 그 꿈을 21세기의 우리가 이어서 함께 꿀 수 있기를 바란다./ 황인찬(mirion1)
감옥 편지지에 써내려간 김남주의 시... 아내의 한마디
김남주와 함께 걷기
첫눈 내리는 날, 김남주는 걷고 있다. 걸어가는 것은 그의 글, 가지런한 행을 이루는 글자들이다. 앞서가는 자음을 모음이 뒤따른다. 자음이 첫걸음을 내디디면, 모음도 그만큼 나아간다. 모음 뒤에 다른 자음이 오지 않으면, 모음은 그 자리에 단단히 발을 딛고 멈춘다.
마치 꽝꽝 언 고드름처럼, 모음 'ㅓ'와 'ㅣ'의 모양이 곧다. 이윽고 자음은 모음을 닮는다. '시리도록'과 '끼치도록'을 완성하는 받침 'ㄱ'도 망설임 없이, 올곧은 형태로 등장한다. 자음과 모음의 걸음으로 한 행을 마친 김남주는 아래 행으로 내려온다. 그가 걷는 땅은 편지봉투이다.
▲ 편지봉투에 쓴 시ⓒ 김남주기념사업회
편지보다 중요하겠냐마는, 봉투만 이미지로 접한 본 필자로서는 이 봉투가 참 귀중하다. 편지를 감싸고 있는 봉투는 편지가 온전히 수신인에게 도달하도록 하는 보호재이자, 편지의 지리적, 시간적 정보를 담은 이력서이다.
이 편지는 김남주의 친동생 김덕종씨가 고향 집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535'에서 김남주가 수감되어 있던 '광주시 북구 문흥동 광주교도소'로 보낸 것이다. '해남 86. 9. 3 573'이라는 소인을 통해 짐작건대, 그의 동생은 무서운 여름 더위가 차츰 그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던 9월 3일, 형에게 편지를 보냈다. 반유신 지하조직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으로 1979년 체포된 후로 구금된 지 햇수로 9년 일 때이다.
편지가 전해지려던 참에 형 김남주가 광주교도소에서 전주교도소로 이송되면서, 편지도 수신인을 따라 광주에서 전주로 이송되었던 것 같다. 빨간 펜으로 적힌 '전주교도소이송'이 말해준다. 김남주는 86년 9월 초에 부친 편지를 가을이 완연해지던 어느 날 이 편지를 받지 않았을까, 추석 전이긴 했을까. 달을 따러 나온 아이들이 그려진 우표를 보고 그는, 잠깐이나마 외출했을까.
자음과 모음으로 걸어 나가는 그
김남주의 손에 들어온 편지봉투는 양면의 시전지(詩箋紙)가 되었다. 편지의 정보면 왼쪽에 위아래로 한 편씩, 두 편의 시가 담겼다. 그가 감옥에서 걷는다. 봉투의 상단을 차지한 시는 '돈만 있으면'이다. '니기미' 전라도 욕을 던지며, 그는 돈으로 뭐든지 부리는 오만한 인간이 되어 분단국가 남한을 지켜준다는 미국의 이중성을 비판한다. 부의 불평등, 나라 안팎의 부자유에 차마 흐린 눈을 하지 못한 그에게 비친 세상은 온갖 어둠이었을까.
뭐라고! 미군 물러가라고!
미군 물러가면 38선은 어떡하고!
거기서는 돈이 맥을 못추고 니기미
여자도 사고 팔 수 없다던데
무슨 재미로 살아! 무슨 낙으로 살아!
- '돈만 있으면' 부분 (<김남주 시전집> 2014, 염무웅·임홍배 엮음, 창비, 900쪽)
자조적 반어법의 시 아래에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첫눈이 깔려 있다. '첫눈'이다. 겨울 어느 날 내린 첫눈을 보고 그는 이 시를 썼을 것이다. 고봉밥처럼 하얗고 뼛속까지 시린 눈 밭에서 그는 무릎을 꿇는다. 온갖 착취와 침범의 세태 속에서도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드는 눈 앞에서, 그는 여전히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든 눈 앞에서 숨죽여 굴복한다. 눈 앞에서 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처절하다. 세상을 하얗게 뒤바꿀지 아는 눈에 힘을 얻고, 이 눈에 굴복할 따름이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빈 들에
첫눈이 내리는 날은
캄캄한 밤도 하해지고
밤길을 걷는 내 어둔 내음도 하해지고
소리없이 내려 금세
고봉으로 쌓인 눈 앞에서
눈의 순결 앞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시리도록 내 뼛속이
소름이 끼치도록 내 등골이
- '첫눈' 전문 (<김남주 시전집> 2014, 386쪽)
자음과 모음으로 걸어 나가는 그는 영락없는 시인이다. 마음을 자신의 몸에 가득 채운 시인이다. 마음이 아무리 자유를 외쳐도 장시간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없이 갇혀있던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연 그대로의 사람, 김남주이다. 그를 가장 잘 아는 한 사람, 아내 박광숙씨의 말에서 그의 시 전체를 꿴다.
"그 사람 기질이 어떻게 보면, 어디에 메이지 않는, 억압되지 않는 그런 기질이 참 많은 것 같애요. 그러니까 일차적으로 너무 인간성이 억압된다는 것 속에서 저항운동을 하게 되고 자유를 추구하게 된 거지, 어떤 원칙을 정해 놓은 건 아니었겠죠.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참 자유인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그 사람 본성이 그랬는데, 이 사회가 격돌하는 치열한 의식을 요구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불평등이 없고 서로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지향했던 거죠. 어떤 부라든가, 억압이라든가 그런 것들은 하나의 제약이니까 그런 것들을 깨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런 거였겠죠."
- 박광숙 여사 인터뷰 (목포MBC 1999년 다큐멘터리 <나는 시인이 아니라 전사다.. 민족시인 김남주> 연출 이재왕. 강조는 필자)
김남주는 전사, 투사, 민족시인이기에 앞서 저항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를 끊임없이 걷게 만들었던 것은 어떤 원칙이 아니라, 그의 걸음을 막는 돌부리가 아니었을런지. 그는 사회의 지배에 반응할 힘을 갖고 있던 사람, 사방이 꽉 막힌 곳에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공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딘가 갇히게 되었을 때, 감금에서 헤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로막힌 땅, 폭염, 옥죄어오는 괴로움,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의 한가운데에서 자음과 모음의 걸음 사이로, 이들이 남기는 행을 켜켜이 쌓아 길을 만든다면... 오늘, 김남주의 시를 따라 걷는다.
김솔지 / 1980년대 후반 광주에서 태어났다.홍대앞 문화예술 공동체이자 사업체 '홍우주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
김남주에게 배운 대로... "살아남을 것이다 존엄하게"
[2024, 지금 김남주] 아름다움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얼마 전 경주 불국사 템플 스테이에 다녀왔다. 고등학생 때 불국사로 다녀왔던 수학여행에서는 석굴암이 한창 보수 공사 중이어서 제대로 본 기억이 없었다. 석가탑과 다보탑 역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뭐 사진도 그럴싸하게 찍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보수 공사가 끝난 석굴암 내부에서 예불을 드릴 수 있는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이 한 달에 한 번 열린다니, 신청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나 싶었다. 마침내 삼복염천에 경주 불국사에 도착해서,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내가 또다시 떠올리고 만 것은 어째서 서정주 시인이 신라 정신에 매료되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예전엔 그저 모르겠다 혹은 안타깝다 정도의 감상이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서정주 시인은 역사의식, 시대에 대한 첨예한 대결 의식을 잃은 채 신라, 혹은 영원성에 매료되었고, 나는 그와 같은 현실을 잊은 아름다움에 매료됨이 그가 친일을 하고 독재정권에 부역한 선택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추론에 이르렀다. 아름다움과 영원을 추구하는 모든 작가가 반드시 서정주와 같은 선택을 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영원한 아름다움에의 추구가 그의 죄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고 여긴다. 덧붙여 추구하는 아름다움에 따라 추구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의 행보에 면죄부를 주고 싶지 않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더라도 그와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여하간 개인의 수행 정진을 강조하면서도 타인 그리고 이웃에 대한 연민의 마음, 보살들이 열반에 이르는 대신 중생을 구제하려 현세에 남는 마음에 깊이 감동 받았지만, 지상에서의 고통이 이 지상에서 해결될 일이 요원하다는 점에서 마음 깊이 반감이 일었다.
법사님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삶의 고단함을 이겨내는 방법을 들으며, 상사의 부당한 요구나 위정자의 부정 등에 대해 내가 참고 보살의 마음으로 연민할 것이 아니라 투쟁하고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고 경질을 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치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한낱 중생으로서 과거 현재 미래를 통달해 도를 깨닫지 못하고, 현재를 바꾸려고 덧없는 고통을 불러들이는 그런 상태가 된 것만 같았다.
짧은 시간이었고 불교의 묘리를 내가 다 이해한 것이 아니기에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템플 스테이라는 대중적 프로그램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랬다. 모든 사람에게(최악의 독재자와 살인마, 고문관에게도) 불성이 있음을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불성이 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믿기 때문에 서로를 해치지 않도록 지금 이 세상을 애써 바꾸려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한낱 미물도 서로를 해하는 것보다 상생하려 하는데 인간이라면 응당 서로를 위해야 하는 것 아니냐 버럭 외치고도 싶었던 것이다.
시의 언어로 보여준 인간의 존엄
김남주 시인이라면 내 의견에 동의해 주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김남주 시인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대단히 어렵고 힘든 방법을, 그러면서도 지극히 그 자체로 아름다운 길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지난한 물음, 시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이란 물음, 시가 삶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혹은 있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김남주 시인만큼 전심전력으로 답한 이가 있었는가 싶다.
김남주 시인을 제대로 꼼꼼히 읽은 것은, 부끄럽지만 작년 즈음이다. 최근 한국 근현대문학사를 다시 훑어보며 김남주 시인을 다시 만났다. 나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소위 순문학파 위주의 작품을 주로 읽고 그런 작품들의 작품성만을 문학적 성취라고 배워왔다.
맞다. 핑계다. 얼마든지 찾아 읽을 자유가 있었음에도(나는 해금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 나고 자랐다) 김남주 시인을 찾아보지 않았다. 삶으로 시를 갈음한 시인 정도로, 존경할 만한 시인 정도로, 다소 관념적으로 명예의 전당에 올려두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김남주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내가 그려왔던 그리고 내가 알고 있던 아름다움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나 그간 내가 좋아해 왔던 시와 시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설픈 나의 신념 탓이라고 / 모두가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고 / 나는 지금 쓰고 있다 / 주먹밥 위에 / 주먹밥에 떨어지는 눈물 위에 / 환기통 위에 뼁끼통 위에 / 식구통 위에 감시통 위에 / 마룻바닥에 벽에 천장에 쓰고 있다 /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쓰고 있다 / 발가락이 닳아지도록 쓰고 있다 / 혓바닥이 쓰라리도록 쓰고 있다 // 공포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캐는 가장 좋은 무기이다라고"(시 '진혼가' 부분)
가공할 만한 폭력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존엄을 잃는지 이렇게 엄격하고 신랄하게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독자로 하여금 그대로 체험하게 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연민이나 자기방어에 취하지 않은 이의 단단한 언어가 내게 준 것은 충격과 감동이었으며, 그것은 곧 아름다움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으리라.
내가 그에게 진정 감동한 것은 그가 파괴되지 않은, 인간의 존엄을 시의 언어로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그 어떤 추구에도, 압력에도 부서지지 않는 인간이 있었다는 것에 더해, 그것을 그 자신만의 목소리로 발화해 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대체 불가능한 한 예를 보여준 것이라고 느껴진다.
나더러 김남주처럼 써보라고 하면 나는 절대 쓸 수 없을 것이다. 시대나 권력에 불화하기보다 잘 융화되기를 권장하는 세상이다. 김남주 시인이 살아가던 세상 역시 그랬다. 김남주 시인과 다른 시대에, 즉 나는 김남주 시인이 일궈놓은 시대, 적어도 국가 폭력이 한 개인을 향해 난사되지는 않으리라 믿기는 시대(실제로 그러한가 물으면 그 답은 다를 것이다)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나더러 김남주처럼 쓰지 말라고 하면 나는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냐고 화를 낼 것이다. 나는 김남주 시인의 언어를 그대로 베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남주 시인의 존엄에의 추구는 베끼고 싶다. 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방식을 내 식으로 소화하고 싶은 것이다.
김남주 시인에게 배운 것
▲ 김남주 시인ⓒ 김남주기념사업회
김남주 시인을 알기 전에 불국사에서 내가 본 것은 다보탑, 석가탑의 아름다움, 부처의 세상, 그러니까 지극히 아름다운 지상 이상의 지상을 이루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꿈이었다. 불국사 경내에 뜬 보름달과 스님들 독송의 어우러짐이 주는 신성함에의 경배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김남주 시인을 알고 난 후에 불국사에서 내가 본 것은 돌을 깎는 석공들의 지난한 노동이었고, 경내를 말끔히 청소하고 잔일을 도맡아 하는 보살님들(주로 중년의 여성들)의 울력이었다.
"노동이 있기에 / 자연에 가하는 인간의 노동이 있기에 / 꽃 피고 새가 우는 봄도 있다네 / 산에 들에 내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 산에 들에 쟁기질하는 총각이 있기에 / 산도 있고 들도 있고 / 꽃 피고 새가 우는 봄도 있다네"(시 '나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봄도 있다' 부분)
아름다운 모든 것에, 우리를 이루는 모든 것에 노동이 있다. 김남주 시인은 이 노동하는 뭇 범인들의 존엄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김남주 시인의 근간에는 인간 존엄에의 추구가 있다. 그것만이 모든 시대를 통틀어 요청할 수 있는 시급한 사안임을 배운다.
나는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부 출신이다. 광주 민주화 항쟁 이후 전라남도 지역 태생 사람이라면 아마도, 비슷한 교육을 받아왔지 싶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인이 박히도록 들어온 것은, 데모하지 마라, 함부로 이름 적지 마라, 앞에 나서지 마라 등등이었다. 종합하자면 '눈에 띄지 마라'였다. 다시 말하면, '참아라'였다. 그리고 덧붙는 말이 있다. '살아남아라'.
산다는 것이 곧 참는 것과 동의어가 되어 버려, 참는 게 인이 박혀버렸다. 하지만 살수록 점점 더 '참으면 안 됨'……을 알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점점 더 못 참겠음, 이대로는 안 됨을 체험하는 과정이었다.
문제는 '어떻게'다. 단박에 온갖 곳에 참여하고 모든 일에 참지 않는 사람이 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꾸준히 참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다. 그래서 "살아남을 것이다. 존엄하게." 이것이 내가 시인으로서 아름다움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김남주 시인에게 배운 것이다./김복희
김남주는 자신의 시가 이곳에서 불릴 줄 알았을까
자유
▲ 1983년 서울 종로구 낙원동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세월이 지나며 변하지 않은 것 무엇이랴. 탑골공원 뒷골목 허름한 냉면집은 어느 날엔가 고깃집이 되더니, 내 나이 또래 젊은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맛집으로 소문이 났다. 그렇게 반짝하더니 개발 이슈인지 무엇인지, 뒷골목 터줏대감이던 옆 가게와 함께 문을 닫았다. 확장 이전했다는 소식과 함께.
오래된 도시에는 어김없이 사랑받아 마땅한 구석진 골목이 있다. 세월을 머금고 변하지 않을 것처럼 찬란한 오래됨을 뽐낸다. 구석진 곳을 닮아 그늘진 사람들이 머물 곳이 된다. 주머니 가벼운 이들의 친구로, 늙은 자영업자의 터전으로, 공허한 이들을 채워주는 언어로 제 몫을 다한다. 그 구석진 골목도 변했다.
시인의 시간이 끝나고 삼십 년, 자본은 도시 곳곳을 재편했다. 종로는 여전히 종로라 불리지만 피맛골이 사라졌고, 을지로에는 을지면옥과 을지오비베어가 쫓겨났다가 가까스로 돌아와 새로운 장소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그이가 그토록 사랑했던 민중들의 가난한 삶터들은 철거당했다.
모두가 아파트에 살게 된 것도 아닌데, 그 자리에는 우후죽순 아파트가 솟았고, 지금도 솟고 있다. 불타는 용산 남일당이 있었고, 홍대의 두리반과 서촌의 궁중족발이 있었다. 재개발과 재건축, 젠트리피케이션이 가난한 이들과 그이들의 공간을 흩었다. 그렇게 민중시인의 시가 읽혀질 공간들도 사라졌다. 기념 시비에서 그의 흔적을 찾지만 공허하다. 그이의 시는 그렇게만 읽힐 게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의 시를 동아리방에서 만났다. 기타를 퉁기던 선배는 '자유'를 맛깔나게 불렀고, 신입생인 나는 그의 시를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 있는 낭독, 그 육성으로 매일 같이 들었더랬다. 당혹스러울 만큼 단순했다. 낭독은 날카롭고, 이해는 어렵지 않다. 그 새빨간 단순함이 좋았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그늘진 사람들 사이의 언어
그렇게 읽은 시를 철거 현장에서 부르며 다녔다. 키를 두 개 정도 낮춰서, 조금 더 부르기 편한 음정으로. 그렇게 시는 철거 당해 쫓겨난 세입자의 천막에서 불렸다.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의 업장에서, 무산자의 몸 누일 집 앞에서 불렸다. 고작 서너 명, 많아봐야 십 수 명 되는 연대문화제에서, 작가들의 낭독회에서, 끝 모를 뒤풀이에서 불렸다.
건물주가 월세를 네 배나 올려 쫓아내겠다고 족발집에 윽박지를 때, 장사를 하는 상인을 용역 깡패가 끌어내 손이 크게 다쳤을 때, 열두 번의 강제집행을 막아내며 끊임없이 상생을 얘기할 때, 그 때 외치길 "궁중족발이 쫓겨나면 모두가 쫓겨난다!" 모두가 쫓겨나지 않기 위해 이 가게를 지키겠다는 다짐. 그러니, 그 작은 가게를 지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대한 대의 없이도 구석진 곳의 그늘진 존재들과 함께였다.
그이의 시는 그런 곳에서 읽힐 때 비로소 제대로 읽힌다. 만인을 위해 함께 싸울 때 비로소 자유, 단 한 사람의 억압 앞에서도 몸부림치며 괴로워할 때 비로소 자유, 말이 아니라 몸으로 서로를 동여맬 때 비로소 자유라는 그 단순한 진리를, 조금 더 복잡해진 세상이지만, 있는 그대로 살아내는 이들 사이에서.
이 얼마나 자유로운 도시인가? 돈 좀 있는 사람들은 평생의 터전을 사들이더니 종이 한 장의 권리로 사람을 짐짝처럼 드러낸다. 밑바닥에서는 전세사기가 판을 치는데, 아직도 재개발을 외치고 아파트가 솟아나는 걸 누구도 막지 않으니 얼마나 자유로운 도시인가? 이 얼마나 자유로운 광장인가? 다른 세상을 향한 숱한 약속들이 책임 없이 내뱉어지고 그 누구도 주워 담지 않아도 규탄 당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자유로운 세상인가? 자영업자 폐업률과 서민 부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데 한편에서는 여전히 집값이 오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자유로운 세계인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침략하는 이들과 이익집단에 아무 말 얹지 못한 채 다가올 전쟁을 넋 놓고 바라보는 세계가. 이 얼마나 자유로운 인간종인가, 결국 제 살을 깎아 먹는 지속불가능한 세계를 만들어 놓고 아직도 각자도생을 외치고 있으니. 제 자신을 속이는 이들 앞에 싸구려 자유만 굴러다니는 시절이다.
시인도 구석진 곳을 사랑했을까. 삼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을 사랑했을까. 그리 많지 않았던 그의 서정시에서 그 흔적을 찾는다. '옛 마을을 지나며'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그의 시가 나무 끝에서 불리길 바랐다. 도시의 구석진 골목, 그늘진 사람들 사이의 언어로 불리길 바랐다.
글쓴이 이종건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쿠팡 과로사 기사에 달린 충격 댓글... 김남주 처방 절실
'증오의 벽'을 무너뜨리는 '사랑의 기술'에 대하여
▲ 김남주ⓒ 김남주기념사업회
입추가 지났지만 무더운 날씨가 밤낮 계속 이어지고 있다. 8월 9일, 오늘도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열대야에 관한 기획 기사를 보도하였다. 열대야가 가장 길었던 1994년과 기록을 비교하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물론 여름이면 언제나 덥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땅이 꺼질 듯 폭우가 내리는 모습을 몇 차례 보게 되었더니, 언젠가 주워듣게 된 인류세니 기후위기니 하는 낱말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빈도가 잦아진 것 같다.
최근 포스트휴먼이니 객체지향존재론 같은 것들이 인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 까닭 역시 인간이 이 지구에 저질러놓은 잘못을 이제 피부로 체감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때문에 오늘날 김남주의 문학을 다시 생각하는 일에 관한 글쓰기의 주제로 이참에 그와 같은 담론과 엮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차에, 인터넷에서 열대야 등의 키워드를 검색했기 때문인지, 유튜브를 보던 중 한 편의점에 이온 음료를 사러 들어온 남성이 쓰러진 일에 대한 뉴스 보도를 만나게 되었다.
해당 뉴스는 8월 9일 업로드 된 유튜브 JTBC 뉴스 채널의 "[자막뉴스] '이게 대한민국 현실' 모두가 충격...이온음료 찾다 끝내"라는 제목의 보도이다. 뉴스에서 전한 내용을 다시 옮겨 전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 남성이 편의점 냉장고에서 이온 음료를 꺼내던 중 몸을 떨며 쓰러졌고, 신고를 받은 119 구조대원들이 도착해 들것에 실어 차에 태웠다. 남성은 집이 바로 앞이라며 데려다 달라 하였지만, 집에 도착하고 보니 돌봐줄 사람도 없고 환자가 쉬기에 적당치 않은 환경이었던 것이다. 소방은 병원 이송을 결정하였으나, 의료 파업의 여파 탓인지, 열네 군데 정도의 병원에 연락을 하였으나 모두 수용 불가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남성이 쓰러진 때로부터 두 시간 정도 흘러서야 국립중앙의료원에 도착하였는데, 너무 늦은 탓이었는지 열사병 진단을 받은 직후 숨지고 말았다. 뉴스 보도에서는 추가로 남성이 기초생활수급자였으며 "스스로 건강을 돌볼 여유도 없었고, 술에 의지해 살았"다고 전하였다. 이어서 "폭염은 이런 취약계층에게 더 잔인합니다"라는 말로 보도의 취지를 분명히 하였다.
깊게 뿌리 내린 신자유주의의 방식
재난은 평등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기후이상으로 인한 재난은 사회적 취약계층에 특히 더 위험하게 다가온다. 폭염과 같은 재난을 이제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회적 재난으로 고쳐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앞서 소개한 남성의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홀로 기초생활수급을 하는 환경에서 폭염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해당 소식을 전한 영상의 댓글에는 여러 좋지 않은 상황이 맞물려 결국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하게 된 이의 사연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그러한 가운데 뉴스에서 전한 "술에 의지해"라는 대목에 방점을 찍어, 폭염으로 인한 죽음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세우는 댓글과 그에 동조하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사회적 취약계층에 일어난 안타까운 소식뿐만 아니라, 산업재해 등과 같은 사건들을 전하는 기사에서, 우리는 그 책임을 피해를 입은 당사자 개인의 몫으로 전가하는 목소리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곤 한다.
사례를 하나 찾자면, MBC 뉴스 유튜브 채널에 7월 30일 올라온 "[단독] 제주 쿠팡 노동자, 2주 전 '업무 과중' 통화"라는 영상의 댓글을 살펴볼 수 있겠다. 해당 영상은 물류센터 노동자의 과로사 사건을 다루는 보도 내용이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라든가 '누가 일하라고 협박했나'라는 식으로, 노동 환경보다는 개인의 노력이나 선택 등을 문제 삼는 댓글들이 게시되어 있었다.
노력과 선택, 아울러 앞서 소개한 사례에서와 같이 '술'을 거론하며 금욕을 문제 삼는 등의 모습은 기이하게도 어딘가 퓨리턴과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력과 선택을 중요한 척도로 여기는 사고는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와 그에 따른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가치관을 드러낸다. 자유에 따른 결과의 책임을 엄격하게 묻기에 이는 자연스레 금욕적인 윤리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유의 태도라든가 가치관을 적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이념들 가운데 하나가 신자유주의이다. 앞서 '기이하게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청교도적 사유의 태도를 오늘날 한국인이 남긴 인터넷 댓글에서 만나게 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생활양식이나 사유의 습관에 신자유주의의 방식이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노동자보다는 기업가에 보다 더 동질감을 느끼며 또 표현하고 있다.
다시 사랑의 기술을 펼치기 위해선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권장할 만한 윤리적 가치로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타자에 대한 공감이나 연대와 같은 감정이 희박해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특히 사회 구조적인 조건들을 외면한 채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노력과 선택에 따른 것으로 환원해 버린다면, 인간을 개인으로 원자화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벽으로 가로막는 현상들 역시 계속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의 인간관은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경영하는 기업가로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한다. 기업가 정신은 타인뿐만 아니라 기존의 자신과도 무한히 경쟁하도록 함으로써 자기 발전을 추구한다. 이는 경제 발전의 강력하고도 유용한 원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하였지만, 타자와의 상호의존에 대한 인식이나 협력에 대한 태도를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여러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곁에 있는 이들 혹은 우연히 조우하게 되는 타인까지 은연중에든 의식적으로든 잠재적인 경쟁상대로 여기도록 함으로써 '벽'을 세우도록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벽을 일컬어 시인 김남주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이웃 몰래 침 발라 돈을 세는 소유의 벽
이데올로기에 눈이 먼 허위의 벽
자본과 권력이 쌓아올린 계급의 벽
벽을 보면 나는 치고 싶다
주먹이 까지도록
벽을 바라보면 나는 들이받고 싶다
이마가 깨지도록
- '벽' 중에서
소유의 벽, 허위의 벽, 계급의 벽. 이러한 벽들을 두고 시인이 "주먹이 까지도록" 나아가 "이마가 깨지도록" 치고 들이받고 싶다고 하는 까닭은,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고 인간을 개인 안에 가두는 '증오의 벽'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미워하도록 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싫어하고 이해하지 않도록 만드는 담벼락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벽들이 타자의 처지를 공감하는 일을 비롯해 함께 하는 삶에 대한 가능성을 상상하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에서 고통을 표현하는 목소리에 귀를 닫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증오의 벽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무한한 경쟁을 부추김으로써 자기 자신의 생존에만 골몰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타인을 향한 연대의 감정을 앗아가고, 공동체의 내일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빼앗는다.
증오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김남주 시인은 우리에게 '사랑의 기술'(<사랑의 기술>)을 노래한 바 있다. 사랑의 기술은 "증오의 벽 무너뜨리는 기술"이자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하는 기술"이다. 아프다 말하는 목소리를 모두가 듣도록 함으로써, 모두가 누려야 할 마땅한 몫을 되찾아오도록 하는 움직임이다. 빼앗겼던 몫을 "제 것으로 찾아갖고"(<우리 시대의 사랑>) 오도록 하는 일이다.
이 땅에 다시 사랑의 기술을 펼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는 벽을 우선 무너뜨리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또한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벽도 함께 무너질 수 있게 하는 연습도 필요할 터이다. 김남주가 노래한 '사랑의 총공세'(<'지금 이곳'에서의 시는>)를 펼치기 위해선 바쁘게, 그리고 기쁘게 연습해야 할 것 같다.
글쓴이 김태선 문학평론가
퇴직금도 없이 잘린 아버지가 미웠다, 이 시를 읽기 전까진
덧붙이는 글 | 김남주 시인에게 던지는 질문 "평화주의자는 어떤 무기로 싸울까요?"
1997년. 뉴스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기업들의 부도 소식이 들렸고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함께 나왔다. 대낮의 오락실과 공원, 공공도서관에 갈 곳 잃은 양복 입은 중년 남성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도 같다.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아빠도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 회사에 가지 않았다. 아빠 회사도 부도가 난 거냐고 물었는데 부모님은 한사코 아니라고 대답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그 정도의 거짓말은 알아챌 눈치가 있었다. 아빠는 하루아침에 부도난 회사에서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일자리를 잃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던 나는 종합반을 그만두고 단과반 수강을 했지만 동생은 모든 학원을 그만둬야 했다.
어느 날엔가 아빠에게 전화가 왔는데, 택시비가 없으니 돈을 가지고 집 앞으로 내려오라는 거였다. 학원비가 없어서 동생은 학원을 그만뒀는데 술에 취해 택시비로 몇만 원을 쓰는 아빠가 너무나 미웠다. 아빠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이해하기엔 나는 어렸고,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어른들과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만 너무나 컸다. 이 세상은 다 글러 먹었고, 점진적인 변화는 불가능하고, 확 갈아엎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종합반 학원을 그만두니 방학에 할 일이 없었다. 좁은 집이 답답해 독서실을 등록했는데, 독서실 책상 또한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공부하는 시늉만 하다가 만화대여점에서 빌린 만화책 몇 권 읽다 오락실 들렀다 집에 와서 밥 먹는 게 반복되던 어느 날, 집에 가며 라디오를 듣는데 안치환의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흘러나왔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다 망해버린 세상에서 그 노래만이 어쩐지 나를 위로해 주는 거 같았다. 그 길로 동네 음반 가게에 가서 안치환의 앨범을 사서 듣기 시작했다. 노랫말이 유독 귀에 쏙쏙 꽂히는 노래들이 있었다.
'희망이 있다'(원작시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아이고 I GO'(원작시 '날마다 날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은 아냐'(원작시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은 아냐') 모두 작사에 "김남주 시"라고 쓰여 있었다. 김남주? 김남조 시인의 시는 문제집에서 본 적이 있었고 배우 김남주는 텔레비전에서 본 적 있지만 시인 김남주라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호기심에 시집을 사려고 동네 서점에 갔는데 김남주 시집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백화점에 있는 큰 서점에 가서 시집을 사 왔다.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저 창살에 햇살이>(김남주, 창작과비평사, 1992)란 시집이었는데 '김남주 옥중시전집'이란 부제가 독특했다.
▲ 1997년 잠실 롯데백화점에서 산 김남주 시인의 옥중시전집ⓒ 이용석
시인이 왜 감옥에 가는지, 왜 감옥에서 시를 쓰는지 궁금한 마음을 붙잡고 시집을 찬찬히 읽어가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수능 공부하면서 만난 시들과는 너무나 달랐고 시에 대한 시인의 말도 너무나 생경했다.
김남주 시인은 "왜곡된 역사와 현실을 바르게 설정하고 지배계급의 허위 이데올로기를 폭로하여 진실을 밝히기 위한 방편으로 나는 시라는 무기를 잡았다. 다시 말해서 나는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시를 썼다."( <저 창살에 햇살이> 머리말 중에서)고 말했다.
"지배계급의 허위 이데올로기",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 같은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 사람이 시를 무기 삼아 혁명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시가 혁명을 위한 도구라니. 자신이 시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이 나의 길이고 그 길을 가면서/부러진 낫 망치 소리와 함께 가면서/첨으로 시라는 것을 써보게 되었다고/노동의 적과 싸우다 보니 농민과 함께 노동자와 함께/피흘리며 싸우다 보니/노래라는 것도 나오더라고 저절로 나오더라고"('시의 요람 시의 무덤' 중에서).
세상에 이런 시도 있구나 싶었다. 팔딱팔딱 살아있고 입에 착착 감기는 단어와 표현들이, 자본가와 정치인들과 경찰들을 향해 이글거리는 분노가, 패배한 혁명전사의 절규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상과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을 설명할 언어가 없던 나에게 김남주의 시는 마치 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열심히 일한 우리 아빠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야 하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니 뭐니 해도 재벌집 사람들은 흥청망청 돈 잘 쓰고 사는 이따위 세상을 확 갈아엎고 싶던 나는 김남주처럼 시인이 되어, 아니 혁명가가 되고 싶었고, 혁명가가 되기 위해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김남주 다시 읽기
그러니 대학에 입학해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다. 김남주뿐만 아니라 박노해, 백무산 같은 시인의 시도 열심히 찾아 읽었다. 그러다가 조금 김남주 시인의 시와 거리감이 생긴 것은 병역거부를 결심하면서부터다. 돌이켜보면 나는 태생적인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병역거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평화주의자가 된 사람이었다.
세상과 권력자에 대한 분노는 여전했지만 싸움의 방식에 대해 생각이 달라져 갔다. 병역거부자가 되어 가는 과정은 저항이 폭력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었고, 폭력을 수반하지 않은 다양한 저항의 방식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더 이상 "조직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전사1' 중에서) 같은 구절에 가슴이 설레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태도가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조직 문화를 만드는 거라는 비판적인 생각이 먼저 들기도 했다.
물론 어떤 시들은 그전보다 더 탐독하게 되었다. 특히 감옥생활을 읊조리는 시들이 그랬다. 나는 병역거부로 고작 1년 6개월 실형 선고를 받았고 내가 살았던 2000년대 감옥은 김남주에게 종이와 연필조차 주지 않았던 군사독재 시절의 감옥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겠지만, 감옥이라는 속성상 속절없는 고립감과 외로움이 불쑥 찾아오는 날들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친구들의 편지를 꺼내어 읽는 일과 김남주의 시를, 김남주를 통해 알게 된 브레히트, 네루다 같은 시인의 시를 읽는 일뿐이었다.
인천구치소에서 군산교도소로 이감 갈 때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이 가을에 나는' 중에서) 김남주 시인의 마음을 따라 읽었고, 독방에서 누군가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조그맣게 새어 들어오는 햇살을 보면서 김남주의 시 '창살에 햇살이'에 안치환이 곡을 쓴 노래를 조용히 부르곤 했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은 따스해졌다. 그렇게 감옥에서 만난 김남주는 전투적인 혁명시인의 얼굴보다는 따뜻한 온기를 품은 서정시인에 가까웠다.
오랫동안 김남주의 시와, 아니 시 자체와 멀리 떨어져 살았다. 드문드문 시를 읽더라도 예전처럼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챙겨보지는 않는다. 그러다 문득 올해가 김남주 시인의 30주기라고 해서 고등학생 때 산 시집을 다시 꺼내 읽어봤다.
김남주 시인의 시를 처음 봤을 때 나는 혁명가가 되고 싶었다. 그때의 내가 생각했던 혁명과 지금 평화활동가인 내가 생각하는 혁명은 아주 많이 다르다. 이제 나는 혁명이라는 말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이 전쟁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걸 혁명이라고 부르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또한 지금의 나는 김남주를 통하지 않더라도 나의 생각과 감정을, 분노와 열정을 표현할 언어가 있다. 김남주는 그대로일지 몰라도 내가 달라졌기 때문에 1997년 내가 만난 김남주는 이제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평화활동가로서 다시 김남주의 시를 읽으면서 시가 그의 싸움의 무기였다는 것에 눈길이 간다. 김남주 시인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만큼 비폭력적이면서도 치명적인 무기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세상이 달라졌고, 시대가 바뀌었고, 착취의 방법이 달라졌지만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사람 죽이는 전쟁도 불사하는 세상이라는 건 그대로다. 그 세월 동안 한국은 민주주의를 억누르기 위해 총칼을 휘두르던 나라에서 돈벌이를 위해 총과 칼을 다른 나라에 파는 나라로 바뀌었다. 폭력의 양상도 내용도 바뀐 시대에 과연 평화활동가들의 무기는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 김남주의 시는 여전히 내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용석: 평화운동단체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팔리지 않는 책만 팔았던 책방 주인의 정체
존속 가능한 사회를 향해
얼마 전 뱃속에 아이가 생겼다. 처음으로 육안으로 아기집을 확인한 날, 아직 눈에 보이지도 않을 세포에 불과한데 벌써 집을 지어놨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이가 생기고 나니 세상의 것들이 달리 보인다. 세상의 무엇도 허투루 태어나는 법이 없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꽃과 벌처럼, 혹은 더 복잡한 방식으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명체는 연결되어 살아간다.
내 뱃속이지만 아기가 나름대로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있는 것이, 나와는 또 다른 생을 굴려 갈 준비를 하는 것이 신비하게 느껴진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태어나고 또 살아가느라 애를 쓰고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명을 품고 나니 저마다의 생을 꾸려가는 타인의 구체적인 삶이 더 잘 보인다.
무더운 날씨 탓인지 무거운 뉴스가 연일 들려오는 요즘이다. 폭염이 내린 날씨에 에어컨을 설치하던 20대 기사가 열사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얼마 전 지하철 1호선 구로역에서는 선로 보수 작업을 하던 코레일 직원 2명이 다른 점검 차량과 부딪혀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인접 선로의 운행을 막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사고였다.
대중교통 없이는 출퇴근을 할 수 없고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여름인데, 모두의 안전하고 매끄러운 일상을 위해 일하던 누군가는 죽음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고 안타깝다.
막을 수 있었던 사고, 살릴 수 있었던 이들의 죽음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폭염이 갈수록 심화되어 올해가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말도 들려온다. 물놀이를 즐기던 해안가에는 이제 해파리가 들끓는다. 화재가 빈번해지고 폭염에 코로나가 겹쳐 재난이 점차 일상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 여름을 김남주 시인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을 끼고 드문드문 펼쳐 읽으며 지났다.
좀처럼 희망을 가지기 힘든 시대
기다려라 기다려라 기다려라. 오! 세월이여. 지금 시의 흐름, 인생의 흐름이 막혀 있지만 언젠가 제방이 터져 격렬하게 흘러내릴 때가 있을 것이오. - 김남주, 옥중연서
김남주 시인은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투옥된 와중에도 우유 갑 안쪽에 몰래 시를 쓰거나 편지를 남겼다. 그는 옥중에서도 희망을 품었던 것이 분명하다. 더 좋은 시대가 오리라고,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고. 가장 어두울 때 가장 큰 빛을 올려다볼 수 있는 용기가 저 짧은 문장 안에 집약되어 있다.
나는 묻고 싶다 그들에게 / 굴욕처럼 흐르는 침묵의 거리에서 /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 엉거주춤 똥 누는 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 (…) /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 없이 /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 - 김남주, 시 '나 자신을 노래한다' 부분
자유와 투쟁을 외치는 그의 시는 뜨겁다. 시대의 절망을 들여다보는 게 시인의 과제라면, 그는 정말이지 열렬하고 뜨거운 시인이었다. 그의 시를 읽으며 현대미술관 과천에 사진전을 보러 갔다. 'MMCA 사진 소장품전: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라는 제목의 전시에는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도심을 원경으로, 때로는 근경으로 찍은 사진이 즐비했다. 포장마차에서 퇴근 후 뜨끈한 어묵에 맥주를 즐기는, 입을 벌리고 지하철에서 잠든 시민의 모습이 친근했다.
군부독재 시절을 지나 자유화, 민주화 이후 시민들의 일상을 찍은 사진을 찬찬히 보았다. 무수한 건물이 지어졌다 허물어지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도시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와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그의 시를 읽고 있으니,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그 시대의 희망과 절망이 지금 시대의 희망과 절망과 중첩되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위해 투쟁하며, 무엇을 위해 시를 쓸 것인가? 그의 시의 뜨거움이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희망을 가지라 한다 / 시인은 서재에서 시를 쓰면서 / 이를테면 이렇게 쓰면서 / 시는 분노가 아니나니 신의 입김이나니 / 희망을 가지라 한다 / 선생은 학교에서 군자를 가르치면서 / 이를테면 이렇게 가르치면서 / 수신제가하야 치국평천하하고 / 희망을 가지라 한다 - 김남주, 시 '희망에 대하여 1' 부분
희망을 가지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과 달리, 그가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좀처럼 희망을 가지기 힘든 시대이다. 올여름엔 자주 다니던 동네 책방이 문을 닫았다. 자본의 논리에 밀려 골목의 조그만 책방이, 식당이, 가게가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폐업 신고를 한 사업자는 약 98만 명으로, 2006년 이래 역대 최대라는 기사를 보았다.
높은 임대료와 물가, 불경기 속에서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하나둘 사라지거나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책방이 마지막으로 문을 열던 날, 공간을 메우고 있던 커피머신과 책상, 의자, 책, 무엇보다 모여들어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던 사람들이 전부 빠지고 난 텅 빈 공간에 서자 기분이 묘했다.
김남주 시인의 정신 이어받아
김남주 시인은 1975년 광주에 '카프카'라는 이름의 서점을 열었다고 알려져 있다.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서점이자 사회문화 운동의 거점이었던 곳. 하지만 이 서점은 2년을 채우고 금방 문을 닫는다. 그가 잘 팔리지 않을 만한 책들을 팔고, 책을 팔기보단 투쟁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텅 빈 책방에 서서, 김남주 시인은 책방을 열고 닫으며, 또 감옥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했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논리에 나름의 저항을 하던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 씁쓸했다.
어떤 비는 살며시 왔다가 / 채전을 촉촉이 적시어주지만 / 가을비는 김장하는 아낙네의 벌어진 / 손바닥을 아물게 하지 않는다 // 어떤 비는 당돌하게 왔다가 / 젊은 날의 언덕을 망가뜨려 놓지만 / 비의 계절에 미쳐버린 나의 / 영혼을 어루만져주지 않는다 - 김남주, 시 '비' 부분
한편으로는 시인의 이처럼 모던한 시는 비 그 자체, 내리는 비의 물성을 실감하게 한다. 시인이 살던 시대와 지금 시대를 관통하여 내리는 비를 느낀다. 조금 선선한 저녁이면 산책을 나간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천천히 걸으면서, 허리를 펴고 호흡하면서 자연과 사회의 일부, 거대한 자연의 순환 원리 속 일부임을 깊숙이 느낀다. 우리는 세상을 이루는 아주 작은 일부이자, 세상의 전부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살아간다. 가족으로, 이웃으로, 친구로, 동료로 가까이 만나고 연결된다. 김남주 시인이 살던 시대로부터 멀리 지나온 지금, 그가 품었던 희망은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는 또 어떤 희망을 품어야 할까? 생명이 귀한 시대인 만큼, 이례적으로 낮은 출생률과 높은 자살률의 나라라는 오명을 벗고 살아볼 만한 사회가 된다면 좋겠다.
살기 위해 일하면서 죽음을 경험하는 사회가 아닌, 최소한의 안전망이 보장된 나라, 각자도생하는 사회가 아닌 서로 연결되어 돕고 사는 사회를 향해 나아간다면 좋겠다. 약한 이들을 돕고 무너진 곳을 함께 일으켜 세우며 우리의 삶이 더 나은 쪽으로 변화해 가기를 소망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뿐 아니라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존속 가능한 사회,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김남주 시인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런 희망을 꿈꾸어 본다./주민현(greenhatcloud)
죽음 앞둔 '김남주의 목소리'에 담긴 메시지
시인 김남주가 오늘의 우리에게 전하는 말
1994년 2월 13일 새벽 2시 30분. 시인 김남주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두어 달 전인 12월 4일 새벽 4시 30분 그는 이런 일기를 썼다.
어머니 아버지 노동으로 먹고 자라고 학교도 다녔다.
광주에서 학교 다닐 때는 친구나 선배의 집에서 먹고 자고 했다.
감옥에 다녀와서는 글 몇자 쓰고 1만원도 받고 5만원도 받고 말 몇마디 하고 3만원도 받고 30만원도 받고 하면서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나는 이날 이때까지 다른 사람의 신세만 지고 산 셈이다. 아주 쉽게, 노동의 고역도 없이.
앞으로 내가 건강을 되찾는다면, 그리하여 내 손으로 노동의 연장을 들고 논과 밭에 설 수 있다면 열심히 일해서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받아먹고만 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베풀면서 사는 그런 사람이.
기압의 영향 때문인가? 꼭 밤이면 등의 통증이 오기 시작해서 날이 샐 때까지 이어진다. 밤이 무섭다.
(후략)
- 김남주 유고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창비, 1995) 중에서
밤이 무섭다, 라는 문장을 여러 번 되뇌어 읽었다. 그도 사람이구나. 잠 못 드는 통증의 시간 속에서 그가 염원한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제 몸을 써서 일하고 베풀면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검은 불 자국을 남겼다. '혁명 전사'로 불리는 이가 꿈꾸던 해방 세상이 그제야 호미나 낫처럼 손에 잡히는 것도 같았다. 따지고 보면 지금 여기 우리가 소원하는 바도 바로 일하며 베푸는 삶이 아닌가.
'거울 앞에 선 자'가 되도록 하는 시
▲ 고 김남주 시인ⓒ 해남군
김남주의 작고 10년을 맞아 출간된 시선집 <꽃 속에 피가 흐른다>(창비, 2004)에 게재된 연보에 따르면, 그는 1946년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태어나 삼산초등학교와 해남중학교를 거쳐 광주일고에 입학하지만, 획일적인 입시 교육에 반하여 자퇴한 후 검정고시를 거쳐 1969년(23세) 전남대 영문과에 진학한다.
대학 1학년 때부터 3선개헌 반대운동과 교련 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앞장선 그는 1972년 친구 이강과 함께 전국 최초의 반유신 투쟁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하여 전남대·조선대 및 광주 시내 5개 고등학교에 배포했고, 이듬해 2월 전국적인 반유신투쟁을 전개하고자 역시 친구 이강과 함께 지하신문 <고발>을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김남주는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로 8개월간 수감됐다가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전남대 제적), 1974년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농민 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는다. 그리고 그해 계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진혼가> 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그가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자퇴 이후 '함성'과 '고발'을 거쳐 '잿더미'와 '진혼가'로 이어진 그의 삶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어떤 연유로, 무엇을 위하여 시인이 되고자 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잘 알려진 대로 이후 김남주의 삶과 문학은 자신이 뜻한 바에 따라 농민, 민중, 민족, 혁명과 해방을 향하여 돌진한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항상 선봉에 선 그의 삶과 시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제는 다소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저 일련의 단어들이 상징하는 삶을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부당한 현실에 대입해도 전혀 이상함이 없기 때문이다. 수년 전, 우리가 이룩한 바 있는 '촛불혁명'은 민중의 함성과 고발이었고, 진혼가가 울려 퍼지는 잿더미와 같은 현실을 더는 견딜 수 없던 시민들의 혁명이었다.
김남주는 여러 글과 시에서 '농민'으로 대변되는 민중이 그들의 논리에 따라 이미 혁명의 주체임을 밝히며 자신의 시를 그들에게 바친다.
농민들은 본능적으로 혁명적이다. 누가 자기편이고 누가 자기들 적인가를 본능적으로 알아내고야 만다. …(생략)… 내 시는 근본적으로는 이들 농민들에게 바쳐진다. 농민들의 자식이고 동무인 노동자들에게도 바쳐진다. 노동자와 농민과 어깨동무하고 '우리'가 되어, '나쁜 사람들' 노동의 적 자본가들을 향해 전진하는 혁명전사들에게도 바쳐진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내 시의 내용은 맑은 공기, 깨끗한 물, 따뜻한 불, 밥이며 집이며 옷이며 학교며 노래며, 이런 것들을 갖고 싶어하되 그것을 제 뼈와 살의 노동으로 만들어내는 노동자 농민에 대한 애정이고, 기본적인 그런 것들 갖고 싶어하면서도 그것을 남의 노동의 댓가를 착취함으로써 독점하려는 자들에 대한 증오이고, 증오의 대상 '나쁜 사람들'을 찾아 무기를 벼르는 사람들에 대한 찬가이다.- 시집 <사랑의 무기> (창비, 1989) 중에서
내 삶과 시가 무엇에 관한 증오이며 누구에 관한 찬가인지 차분히 살펴본 적 없다. 나의 삶이나 시를 누구에게, 무엇에 바칠지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최근 나는 '거울'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시 한 편에 "그런 적 없는 일. 그것이 우리를 되비춘다"라는 문장을 적었다. (옛) 시인의 시가 오늘에 와 우리에게 하는 역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거울 앞에 선 자가 되도록 하는 것.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을 생각하도록 하고, 꿈꿔본 적 없는 것을 꿈꾸도록 하며, 증오의 대상에 맞서 어깨동무하고 '우리'가 되도록 하는 것.
우리가 어깨동무 해야 하는 이유
▲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지난 7월 18일 오후 동성 동반자로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한 가운데 해당 소송의 당사자인 김용민·소성욱 부부가 기자들과 만나 재판에서 이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유지영
언젠가 '노동과 시'를 연결하는 글을 쓰면서 나는 그것에 관해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사랑이라는 보금자리에, 차별이라는 힘에 닿게 된다고 썼다. 모든 사랑이, 혼인이 평등하지 않은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18년째 교제 중인 동성 파트너와 함께 실평수가 10평 정도 되는 임대아파트에 오랫동안 거주 중이다. 바깥-사람, 안-사람이 되어 한 사람은 정규직으로 임금노동을 하고 또 한 사람은 가사노동을 주로 맡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사랑은 자주 공공연할 수 없고, 우리의 혼인신고는 합법이 아니며, '정상 가족'이 아니라는 우리는 신혼부부 주거 지원 혜택 같은 사회적 보장을 받을 수 없다. 한때 뿌리 깊은 환멸에 힘입어 나는 이성애자이며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성애자의 목소리로 드러나는 '노동자'의 언어, 이성애자들이 외치는 '노동 해방'에 신물이 난다고, 일하는 동성애자의 이야기, 그들이 꿈꾸는 혁명과 해방이 문학적으로 더 흥미롭다고 적었더랬다. 그 마음 한쪽에는 억압과 불평등에 반대하고 해방을 외치는 이들의 민중 속에 과연 성소수자는 있는가? 라는 의문도 얼마간 있었다.
그리고 김남주의 삶과 시의 파동에 힘입어 이제 와 나는 성소수자들이 농민들의 자식이며 동무이고 노동자이며 어깨동무하고 우리가 될 이들이라는 말로 그때 그 글의 마지막을 다시금 적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그건 비단 김남주의 삶과 시 때문만이 아니다. 거울로 삼을 만한 "자신의 몫의 희생을 자기 시대의 역사에 아낌없이 헌납(염무웅)"한 시인과 시가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고공 투쟁 중이던 김진숙과 연대하며 진은영 시인이 적은 아래의 시는 1994년 2월, 죽음을 앞둔 '김남주의 목소리'를 빌려와 역사에 부치는 화두를 던진다. "서로 다른 풍경 뒤에 놓인 동일한 원인." 우리가 어깨동무해야만 하는 이유를.
거짓 없는 흰 발로 올라선 나의 양동이가 차이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작은 수첩에 적은 말은
해방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모든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이보시오 영리한 아가씨
당신은 서로 다른 풍경 뒤에 놓인 동일한 원인을 잘 알고 있다오
- <Bucket List-시인 김남주가 김진숙에게> 시집 <훔쳐 가는 노래>(창비, 2012)
글쓴이는 김현 시인
왜 이들에게는 온 국민이 자본가 행세를 하나
김남주여 응답하라
▲ 고용허가제20년 기자회견 고용허가제 실시 20년, 고용허가제 폐지하라. 이주노동자의 권리 보장하라.ⓒ 이재산
지금 대한민국은 1. 반값 노동자
사장님,
당신의 냄새가 배어 있는
당신이 준 낡은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
말보로 담배가 수없이 구멍을 낸
당신의 낡은 노스페이스 재킷을 입고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에게 준
당신의 가죽 모자를 쓴 후에
자존심의 거울에서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채
나는 허수아비가 되었답니다
러메스 사연, <허수아비> 중에서
2023년 국회의원 조정훈이 최저임금 적용을 받지 않는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을 외치며 법안을 발의했다. 월 100만 원 이하로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어, 저출생 및 여성 노동자의 경력단절 완화에 도움이 될 거라고 주장했다.
최저임금 배제는 차별이라는 비판에 막혀 법 제정이 무산되자, 서울시장 오세훈이 나서서 6개월 시범 사업으로 최저임금 적용 받는 외국인 가사노동자 100명을 초청했다. 오세훈은 이들의 임금을 월 100만 원으로 후려칠 방안을 계속 찾고 있다.
대통령 윤석열도 끼어 들었다. 가정 내 고용(개별 가구가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면 최저임금 제한을 받지 않는다며 국민을 꼼수의 세계로 꼬드겼다. 삼겹살도 아니고 대파도 아니고, 노동자를 반값에 사고 싶다는 사악한 욕망이 어떻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는 걸까. 이주노동자를 차별하여 국익을 도모한다는 기괴한 인식을 가진 이들이 국회의원, 서울시장,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으니 무참한 일이 너무 쉽게 벌어진다.
반값노동자가 전에 실제 있었다. 외국인연수생들 이야기다. 외국인산업기술연수생제도가 1994년 옹골찬 차별 시스템을 갖추고 시작했다가, 연수생들의 농성투쟁이라는 강력한 항의를 받고 뒤늦게 근로기준법 일부를 적용했는데 그중 하나가 최저임금이다. 당시 연수생들의 절규에 온 나라가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연수생제도를 폐지시키고 도입된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만 20년을 맞았다. 고용허가제 또한 만들어질 때부터 비판 받아 왔다. 노동자에게서 직장을 옮길 권리를 빼앗아 사실상 강제노동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바꾸려 두 차례나 헌법소원을 했지만 매번 결과는 '이 차별은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빼앗아야 고용주가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고, 그것이 곧 국익이라는 논리다. 차별이 정당할 수도 있는가? 적어도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그렇다. 메롱한 국익을 내세우면 처절한 차별도 정당해 진다.
지금 대한민국은 2. 더 빨리, 더 많이
햇살이 문틈으로 비치면 재빠르게 일어나서
순응하듯 일터로 간다
가능하다면 기계보다 더 빨리 일을 하려 하고
차는커녕 물 마시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개미가 집을 지을 때도
참새가 둥지를 틀 때도
저렇게 열심히 하지는 않으리라
써꾼 아수, <외국에서 만난 동생> 중에서
업종을 막론하고 노동력 부족을 호소하며 외국인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호응하기 위해 정부는 외국인 고용 허용 업종을 확대하고 고용허가제 신규 도입 규모를 2021년 5만 2천 명에서 2024년 16만 5천 명으로 대폭 늘렸다.
농업 부문도 마찬가지다. 농번기가 시작될 때마다 '더 빨리, 더 많이' 외국인을 데려오라 아우성이다. 농어업 분야에서 활용하는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은, 한국 지자체가 계약을 맺은 외국 지자체의 주민을 추천받아 초청하고, 법무부가 비자를 발급하는 형식이다.
한국 지자체가 노동자를 보내줄 외국 지자체와 연계가 있을 리 없으니 브로커가 끼어들었다. 브로커들은 외국 지자체와 깊게 연루되어, 한국 지자체와 계약을 주선하고 노동자 선발과 이동, 관리 권한을 행사하며 온갖 전횡을 일삼는다.
최장 8개월까지만 일하고 돌아가야 하는 계절노동자는 임금의 절반 정도를 브로커에게 갈취 당하기도 한다. 갈취를 피하고 더 나은 수입을 얻기 위해 계절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탈'밖에 없는데, 브로커는 또 '이탈'에 연대 책임을 지운다. 언니가 '이탈'하면 동생을 강제로 돌려보내는 식이다.
다른 문제도 싹트고 있다. 계절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한 농민이 말했다. "왜 외국인돌보미만 반값이야? 농민들도 힘들어. 우리도 반값에 쓰게 해줘야지!"
지금 대한민국은 3. 이주노동자에게 몰아주는 임금체불과 죽음
그리고
'RIP'
명복을 빕니다
딜립 반떠와, <내일> 중에서
배터리 제조 회사 아리셀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로 많은 이주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번 사건으로 위험한 사업장에 이주노동자를 몰아넣고 있음이 또 증명되었다. 이주노동자는 작업환경이 열악하고 위험에 대한 대비가 부족한 50인 미만 사업장들에 주로 고용되어 있는데다, 언어를 핑계로 안전교육도 소홀하니 산재 앞에 총알받이로 내몰린 셈이다.
2017년에서 2021년 사이 전체 산재 사망사고 비율은 꾸준히 감소했지만, 연간 이주노동자 사망자 수는 90명에서 102명으로 늘어났다. 죽도록 일하고 임금을 못 받은 이들도 많다. 고용노동부는 2022년 이주노동자가 받지 못한 체불임금액이 1223억원이라고 밝혔다. 미등록체류 등 여러 이유로 행정기관에 진정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이 상당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4. 외국인이 아닌 국민이 일할 수 있게 합시다
내 심장의 한 조각 같은 아들은
내 행복을 위해
낯선 나라에서 땀을 팔고 있단다!
서로즈 서르버하라, <아들의 주소> 중에서
'국민세금으로 짓는 건물은 외국인이 아닌 국민이 일할 수 있게 합시다'라고 적힌 민주노총 건설노조 명의의 현수막이 지난 6월 서울 거리에 내걸렸다. 내국인 노동시장 보호를 요구하는 건설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했을 뿐 혐오가 아니라 변명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 혐오가 명백하다.
건설노조는 이전에도 미등록노동자 단속과 추방을 요구해서 비판을 받았다. 민주노총은 내부에서 반복되는 이주노동자 혐오에 대하여 '이주노동자를 공동체 일원으로 존중하고 대안이 될 수 없는 혐오를 중단해 모든 노동자를 위한 민주노총이 되도록 구체적이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위원장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5. 불법 자경단
나는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산다
입조심 몸조심 행동조심
조심, 조심, 조심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해서 또 조심
스스로 내 생각을 부정하고 묻어 두고
스스로 내가 가진 자유를 포기하고
이렇게 사는 나 정상인가
오늘도 또 묻는다
로넬 차크마 나니, <스스로에게 묻는다> 중에서
자국민보호연대라는 단체가 있다. 이 불법 자경단 조직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삼단봉과 가스총으로 위협하여 연행하고 돈을 갈취했다. 금반지도 빼앗았다. 경찰에 붙잡힌 일당은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 단체의 대표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난민법 폐지, 한국인 임금의 절반만 지급하는 산업연수제 부활 등을 주장하며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겼다. 수상한 시절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6.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라면 온 국민이 자본가 행세
오 노동자여 그 노동으로
인간의 새벽을 열었던 대지의 해방자여
자본의 세계에 와서 그대는
말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구나
그 도구가 자본가의 배를 채워주는 동안에만
그대의 목숨은 붙어 있게 되었구나.
김남주, <사료와 임금> 중에서
김남주 시인은 상상이나 했을까.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라면 온 국민이 자본가 행세를 하는 2024년 대한민국을. 시인이 살아 이 세상을 본다면 그 마르고 거친 목소리로 이렇게 일갈할 테지.
머리 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피를 토하고
사지를 쭉쭉 뻗으며 뒈져갈 놈!
김남주, <흡혈귀 같은 놈> 중에서
글쓴이 이란주 르포작가
김남주와 노회찬, 그리고 김진숙... 절박할 때 읽는 시
김남주처럼 쓰려면 김남주 같은 전사가 되어야 한다
시를 읽지 않은 지 오래됐다.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의 언어를 나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비유와 상징으로 장식된 시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왜 이렇게까지 직관적이지 않은 언어로 무언가를 노래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온통 주의, 주장과 정치 언어로 가득한 나로서는 도저히 익숙해 지지가 않는다.
그럼에도 언제나 시의 언어를 선망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싶었다. 글로써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다. 내가 구사하는 직관의 언어는 늘 설득에 실패했고, 사람들은 비유의 언어에만 감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2013년부터 대학교에서 운동권으로 활동했고, 2019년부터 정치와 사회를 소재로 칼럼을 썼다. 2024년 6월부터는 정의당에서 공보업무를 맡아 각종 주제에 관한 입장문을 작성하고 있다. 언제나 비주류적인 무언가를 주장하는 입장이었고, 대체로 경청할 의지가 많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써야 했다.
원외정당이 되어 마이크를 잃어버린 지금, 나는 설득하는 언어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있지만 끊임없이 실패한다. 이해할 수 있도록 직관적으로 쓰되, 다가갈 수 있도록 비유적으로 써야 했다. 나에겐 불가능한 과제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것은 노회찬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직 직관적인 언어로 읽는 자에게 다가갈 방법이 있다면 누가 내게 좀 알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너무나 절박할 때면 김남주 시인의 시를 찾아 읽는다. 그는 내게 위로였다. 그의 시어는 비유와 상징보다는 직관과 직설에 가까워 보였다. 그의 시는 비유와 상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정확히 이해할 만큼 쉬웠고 직관적이었다. 그는 그런 시어로 세상을 흔들었다. 그는 시를 썼고 나는 칼럼과 입장문을 썼지만 그와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본질적으로 같았다.
▲ 전주교도소 정문 앞에서 출소 소감을 밝히는 김남주 시인ⓒ 출처 불명
그의 시는 노래가 됐고, 사람들은 노래가 된 시를 함께 부르며 결기를 다졌다. '들불과 반란과 죽창이 되자'고 선동하는 시(<노래>)는 사람들에게 전의를 불어넣었고,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라면 서로 일으켜주며 함께 가자'고 격려하는 시(<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는 사람들에게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주었다. 비유하지 않아도, 부러 장식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가 해낼 수 있다면 나도 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내 그의 시에서 그만이 해낼 수 있고 나는 혹은 우리는 아직은 해낼 수 없는 명백한 근거를 발견한다.
시를 써보겠다는 생각은 아예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네 벽에 가득 찬 것은 어둠뿐인 이곳에서는
(...)
시가 무슨 신성한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펜이 없고 종이가 없고 형편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흙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흙과 노동이 빚어낸 생활의 얼굴이 없기 때문입니다
밝음을 위한 무기 싸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
내가 한 줄의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가뭄을 이기는 저 농부들의 두레에 내가 낄 때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내가 있고
그들과 더불어 내가 사고하고
그들과 더불어 내가 싸울 때
그때 나는 한 줄의 시가 됩니다
(김남주, <편지 1> 중에서)
펜을 들었다고 해서, 종이가 있다고 해서, 형편이 좋다고 해서 모두가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흙이 있어야, 노동이 있어야, 흙과 노동이 빚어낸 생활의 얼굴이 있어야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들과 더불어 사고하고 싸울 때라야 한 줄의 시를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문장을 얼마나 멋지게 만들어 내느냐가 아니라, 구성을 얼마나 감동적으로 해내느냐가 아니라, '현장'과 '삶'이 얼마나 풍부하게 있느냐가 글의 밀도와 온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는 아직은 그런 글을 써낼 수 없는 것이다. '남민전 전사'로써 온 삶을 투쟁과 혁명에 바친 김남주 시인과 같은 뜨거움을 가져본 적 없으니까. 현장에 발 딛고 거기서부터 글을 끌어올리지 않고, 공중에 머물며 관망하듯 글을 던졌으니까. 내가 정의당 공보담당자로서 쓰는 글의 힘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당의 활동과 열정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간명한 사실을 이제는 안다.
늘 불꽃처럼 타오르던 김남주 시인의 언어에 비관이 깃들기 시작한 건 출소해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되찾은 때부터였다. 군사독재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자유의 시대이기도 하다. 몸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모두 얻은 셈이지만 도리어 그는 좌절에 빠진다. 췌장암을 선고받기 직전 쓴 시(<근황>)에서는 아예 '배가 터지도록 부어오른 이 거리에서 나는 아무짝에도 쓰잘 데 없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최영미 시인은 김남주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밤이 대낮처럼 발가벗고, 배가 터지도록 부어오른 / 휘황한 거리에서 할 일이 없었던 어제의 전사 / 당신의 시가 피와 칼만이 아니라 나뭇잎에 부서지는 / 햇살과 풀잎에 연 이슬을 노래할 즈음, 당신은 갔습니다.
(최영미, <김남주를 묻으며> 중에서)
밤이 대낮처럼 발가벗고 거리는 배가 터지도록 부어올랐으니 직관과 직설로 쓴 시의 시대는 끝났는가. 그럴 리 없다. 김남주 시인이 쟁취하고 싶었던 시대는 이미 도착했을지 몰라도, 또 다른 시인들이 쟁취하고 싶었던 시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 시인들의 이름은 노동자다. 여성이다. 성소수자다. 장애인이다. 이주민이다.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가장 김남주 같은 시를 쓰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김진숙씨다. 한진중공업에서 해고된 뒤 37년을 투쟁해 2022년 복직하고 정년퇴직을 이룬 노동자. 며칠 전 공개된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노래 '음악만세'를 듣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강렬한 연주로 구성된 5분 25초짜리 노래의 한중간에 1분 정도 김진숙씨의 퇴직 연설이 삽입되어 있다.
▲ 2022년 2월 25일 HJ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열린 복직 행사에 참여해 연설하는 김진숙씨ⓒ 김보성
여러분들은 미래로 가십시오 / 더 이상 울지 않고 더 이상 죽지 않는 / 그리고 더 이상 갈라서지 않는 / 그 미래로 거침없이 당당하게 가십시오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세월 / 37년의 싸움을 오늘 저는 마칩니다 /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해고의 위기 앞에 선 대우버스 동지 여러분들 힘내십시오 / 끝까지 웃으면서 끝까지 투쟁
(단편선 순간들, <음악만세> 중에서)
이것은 왜 시가 아니란 말인가. 김진숙씨의 말에는 꾸밈이 없지만 그 말은 청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의 말은 37년 복직 투쟁이 밀어올린 것이기 때문이며, 그가 37년간 연대해 온 현장이 끌어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김남주 시인의 30주기, 나는 더 이상 언어를 갈망하지 않는다. 다만 현장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갈망할 뿐이다. 김남주처럼 쓰려면 김남주와 같은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덧붙이는 글 | 공동주최 : 김남주기념사업회·한국작가회의·익천문화재단 길동무
강남규(slothlove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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