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홍 / 밥무덤/ 신기료장수 길을 꿰매다
성기완 / 잠
김상배 / 면벽(面壁)/욕심 /코딱지/신문을 보다가/배알도 없지
김정원 / 비
박종빈 / 겨울밤에 쓰는 한 통의 편지
김신용 / 달/ 오동꽃, 오동나무
정바름 / 그 하느님은 어머니다
최세라 / 카운트 업
이경철 / 봄이 오는 소리/팽이에게
윤수천 / 슬픈 일/ 바다로 나가는 이유/ 따뜻한 사람 하나 있으면
백무산 / 정지의 힘
김봉식 / 기묘한 시/ 목련꽃을 보면 양변기가 생각 난다
박명보 / 붉은 지붕이 있는 간이역/바람의 신부*
김상백 / 사라진 책
홍관희 / 내가 그대에게 다가가듯
조창규 / 불안한 상속/북촌
김기찬 / 멀리 달을 보는 사람/찻잔에 매화가 오면/ 선퇴(蟬退)/ 미끈도마뱀
조윤희 / 모정 비각과 해은정
https://www.youtube.com/watch?v=DTPQ-SceP-0
송창식 '밤눈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가만히 눈 감고 귀 기울이면
까마득히 먼데서 눈 맞는 소리
흰 벌판 언덕에 눈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못듣는가 저 흐느낌 소리
흰 벌판 언덕에 내 우는 소리
잠만 들면 나는 거기엘 가네
눈송이 어지러운 거기엘 가네
눈발을 흩이고 옛 얘길 꺼내
아직 얼지 않았거든 들고 오리다
아니면 다시는 오지도 않지
한 밤중에 눈이 나리네 소리도 없이
눈 내리는 밤이 이어질수록
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
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
-소설가 최인호(1945~2013)1964년초 作
정연홍 시인 / 밥무덤
다랭이 마을에 밥무덤이 있다
손바닥만한 논뙈기, 식구들 배불리
먹게 해달라고 해마다
밥무덤에 하얀 쌀밥을 묻는다
무덤이 넙죽 밥을 받아 먹는다
나도 나에게 매일 밥을 올린다
솥무덤에서 지은 밥
숟가락무덤으로 퍼서
나에게 먹인다
내가 무덤이다
무덤이 밥을 먹고 자란다
구멍 속으로 들어간 양식들
다시 세상에 뿌려진다
날 닮은 인간, 얄팍한 지식
내가 싼 똥
다 무덤에서 나왔다
오늘도 집무덤으로 퇴근한다
신기료장수 길을 꿰매다
시내버스 정거장 한 켠 신기료장수
앉은뱅이 의자 위에 하루의 굽은 등 묶어 두고
상처 난 신발들 꿰매고 있다
때 절은 공구통 연장들이
살아온 날들의 흔적처럼 어지럽게 널려 있다
바늘을 뽑아 올리는 부지런한 손길에서
길들의 아픈 부위가 하나씩 아물어 간다
사십년 고단한 얼룩의 날들,
그의 손을 거쳐
다시 새 길을 얻은 수많은 사람들의 길
튼튼하게 박음질 된 그 길을 따라간
하동 구례 광양 5일장을 따라
평생을 떠돌았을 낡은 구두
누구도 꿰매 주지 않던 그의 상처 난 길들이
이제는 시장 뒷켠으로 밀려나 있다
간간이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소문처럼 찾아 주는 이곳
더 이상 꿰맬 길 없는 누더기 인생들이
서성거리는 오일 장터
아직도 그를 기다리는 구멍 난 길들이
수군거리고 있다
성기완 시인 / 잠
누워 있는 인형이 사람같아 보이는 것은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고
누워 있는 사람이 시체같아 보이는 것은
눈을 감고 있어서다
실로그는 자고 있다
죽음은 문밖의 잠이고
잠은 문을 열지 않은 죽음이다
기억할 수 있는 꿈은 생활의 거울이고
기억할 수 없는 꿈은 죽음의 그림자다
흩어지는 구름에서 찰랑이는 소리가 나는 것은
몸과 마음이 삶과 죽음처럼
믿음과 배반이 사랑과 증오처럼
노력과 방탕이 뼈와 살처럼
오해와 이해가 피고름처럼
욕설과 교성이 타이어와 콘돔처럼
이것과 저것이 모든것과 nothing처럼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수갑을 차고 동행하는 형사와 죄수의 운명은
장가방과 아랑드롱의 그 것처럼 결국 같아진다
사람의 옷은 동물의 거죽보다 단연코 보잘 것 없다
다다다 단연코
강아지에게 시달린 양인형은 진짜 양처럼 온순하다
인기척을 느끼고 개가 벌떡 일어나면
공기는 그 냄새를 맡고 도망질을 친다
공기는 고양이처럼 쉬고 있었던 거다
개가 연방 드센 기세로 어둠을 향해 짖는 이유는
달아난 공기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됨됨이와 관계 없이 시인인 이유는
니가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니가
나의 이유다
김상배 시인 / 면벽(面壁)
키 작고 귀여운 아내가
십년이 넘도록 과외교습을 해서
우리네 식구는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어젯밤 꿈 속에 그녀가 나타나
이제는 나이 먹고 힘이 들어서
이 일을 그만 해야 될까 보다고
잔뜩 허세를 부리는 듯하였으나
나는 혹시, 정말 그만 둘까해서
마음이 생선찌개 국물처럼 졸아들었다
꿈인 줄 알았더라면
꿈 속에서만이라도
당장 그만 두라고
큰 소리 한 번 쳐보는 건데
나는 애간장을 바싹 태우며
빈 벽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욕심
나무들이 제 먼저 알고
스스로 잎새를 지우는
깊고 깊은 가을밤에
아우 부부와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먼저 취한 아우가
마음을 비우고 싶다고
오싹한 소리를 했다
그때 제수씨가
마음을 비우려는 욕심이
어디 보통 욕심이냐고
아우를 핀잔했다
나는 제수씨의 빈 잔에
얼른 술을 채웠다
코딱지
한 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들과 함께 전단을 뿌린다.
민주, 자주, 동지 투쟁의 함성이 실린 그 시절의 불온전단이 아니라 아내가 운영하는 글쓰기 학원의 광고 전단을 아파트 현관에 남몰래 돌리다가 그만, 아들의 친구를 만났다.
아들은 괜찮다고 부끄럽지 않다고 했으나 거의 일을 마칠 무렵에는 조금 부끄러웠다고 코딱지만큼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는데 바로 그때 아내의 친구와 마주치게 되었다.
나도 코딱지만큼 부끄러웠고 그래서 아들의 코딱지가 얼마나 큰 코딱지였는지 알게 되었다.
신문을 보다가
출근하여 신문 이 면 저 면을 기웃거리다가 문화면의 베스트셀러 난을 펼친다. 베스트셀러가 좋은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오늘은 <S일보 집게 베스트셀러 10>코너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도서명과 작가와 출판사를 순위대로 찬찬히 훑어보고 있으면 나도 베스트셀러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저번 출판사만 제대로 만났더라면 떴을 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들지않는 바는 아니지만, 두 번째 시집까지 출판을 기꺼이 맡아준 황사장이 내 심정을 모르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점이다.
배알도 없지
보리차가 끓고 있는 주전자 뚜껑이
가스렌지 위에서 저 혼자 들썩거리고 있는 겨울방학 때
나는 혼자 점심을 차려 먹는다
아내는 학원을 경영한다
우리끼리 말을 할 때는 학원이라 하지만
정확한 명칭은 교습소다
주로 글쓰기를 지도하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내가 돈을 번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월급이 줄어들어서
금년부터는 보너스가 없는 달이 네 번이나 된다고 했고
내년부터는 여섯 번으로 늘어날 거라는 소문도 있지만
아내가 돈을 버는 나로서는 별 걱정이 없다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다가
물 묻은 손으로 전화도 받는다
김정원 시인(담양) / 비
수직은
곧장 수평이 된다
수평은 동무가 참 많다
-시집 『아득한 집』, 《푸른사상》
박종빈 시인 / 겨울밤에 쓰는 한 통의 편지
1 모두 잠들고 그대 먼 기억이 눈발로 지워지는 밤, 세상은 창틀 풍경 속에서 조용한 밤입니다 내 방의 불빛은 꺼질 줄 모르고 희디흰 불면은 종이 위에서 더욱 깨끗하여 몸서리 쳐집니다 꽃들의 기억, 비릿한 풀내음, 슬슬 우리의 옆구리를 간지럼 치며 흐르던 시냇물, 이러한 것들을 대숲 아래 몰래 묻어두고,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애써 외면했던 얼굴들, 추억의 발자국들을 편지 한 장에 담아봅니다 그러다 찢어버리고,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 새파랗게 비명 지르며 나뒹구는 댓잎 몇 개 책갈피에 끼워 넣기도 합니다
2 그리움에 지쳐 쓰러지면 눈발이 되고 눈발이 쌓여 무너지면 사랑이 되는 것을, 도로는 끊어져 있고 그대 얼굴마저 지워지는 폭설의 밤, 일어설 줄 모르는 언어, 일어설 줄 모르는 사물들, 조금씩 살 비비며 서로의 체온으로 잉크를 녹여내는 지금, 어둠은 밤이 될 수 없습니다, 어둠은 이제 밤만의 차지가 아닙니다 내 가슴속 불빛이 더 이상 눈물이 아니듯 새벽은 한발 한발 지상의 불빛을 점령해가기 시작합니다 맨몸으로 일어서는 언어, 눈 위로 잉크처럼 푸르게 번져나가는 그리움, 그래요 기쁨의 몸속엔 항상 슬픔이 내재해 있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처럼
김신용 시인 / 달
―두곡 시첩
달이다. 슈퍼문이란다. ‘세상에서 제일 큰 달’이라고 말하면 우스울까?
타원 궤도의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다가 온 것이지만
내 눈에는 그냥 ‘세상에서 제일 큰 달’로 보인다.
만월이라는 우리네 말로 하면 묵은 장맛이 나겠지만
슈퍼문이라고 하면 피자나 햄버거 냄새가 날까?
“달을 본 지도 참 오래 되었다” 이 구절이 언제나 마음속에
멍울처럼 박혀 있다. 달을 보면서도 달을 못 본 것은
내가 캄캄한 밤이었기 때문이지만, 내가 캄캄한 밤이었으므로
달이 내 등 뒤에 멍울처럼 박혀 있었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또 그런 밤이면 나는 멍울을 꺼내 얼굴을 비쳐보는 날도 있었지만
어떤 무늬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표정은 흐린 입김처럼 뿌옇게
거울에 서렸다. 표정 없는 달의 건널목지기 같은 얼굴
한 생을 관통해 온 오랜 공허의 건널목―.
그런데 이 밤, 지나가는 것은 달인데 왜 자꾸 커다랗게
얼굴이 떠오를까? 기억이, 월행(月行) 같아서일까?
달이 떠서 질 때까지의 족적(足跡)―,
그 사이, 저 둥그런 만월―. 멍울이지만 지워지지 않는 얼굴―.
어제, 유모차에 의지해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할머니가
혼자 산길을 타박타박 걷는 것을 보았다.
유모차에는 굽은 허리로 캔 봄 산나물이 소복 담겨 있었다
그리고 오늘 재래시장 장날, 산나물 한 움큼이 담긴
바구니를 앞에 놓고 장터 한 귀퉁이에 오두마니 앉아 있었다
달이다. 그래, 슈퍼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큰 달―.
년간 『화성작가 』 2022년 겨울 발표
오동꽃, 오동나무
―두곡 시첩
오동꽃을 보면서도 무슨 꽃인지도 모른 채 한 해를 보내고
올봄, 길바닥에 뚝뚝 떨어져 있는 보랏빛 꽃을 보며
이 꽃은 무슨 꽃일까? 궁금한 낯빛만 지었는데
오늘, 오동나무 밑을 지나다가 낡은 보행기에 의지한 채
굽은 허리 더 굳지 않게 아그작 아그작 걷는 연습을 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물으니
무심한 눈길로 ‘이 나무는 오동나무여’ 하신다. 예? 오동나무요?
놀란 눈빛으로 반문을 하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다시
‘아 봉황이 날아와 산다는 오동나무도 몰러?’ 하는
웃음 섞인 핀잔을 던진다. 그 웃음이 너무 정겨워 보여
그러면 이 나무도 할머니 시집올 때 심은 거예요? 하고 농담을 건네자
‘그려, 이 시골구석으로 시집와서 첫 딸애 낳자말자 심은 거여!
그러나 세월이 하 야속혀서 나무 베어 궤짝하나 못 맹글고
지나 나나 이렇게 늙어만 가고 있는 거여!’ 하며 다시 활짝 웃는
할머니의 눈매에도 오동꽃빛이 물들어,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
오동꽃을 닮아 보여, 할머니의 살아온 날들은 폐가처럼 허물어져 보이지만
그 폐가에서 숨 쉬고 있을 젊은 날의 시간은, 저렇게 높게 자란
고목이 되어서도 흐드러지게 보라 보랏빛 꽃을 피우는 오동나무처럼 보여
굽은 뼈 더 굳지 않게 폐가가 다 된 집에서 아그작 아그작 걸어 나와
산모롱이 길 걷는 연습을 하는 할머니의 어깨며 무릎에서도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보랏빛 물든 꽃들을 뚝뚝 떨어트리는
그 지워지지 않는 시간의 발자국들이 보여―
정바름 시인 / 그 하느님은 어머니다
"몇 푼 위로도 되지 못하는
만 원짜리 몇 장 슬그머니
병든 어머니 손에 쥐어드린다
평생을 쏟아 붓고도
가난한 자식 보기 안됐는지
한사코 손을 내젓는 어머니
나는 이제 늙었으니
네 식구나 돌보거라
부끄런 손 접고
눈물 삼키며 돌아서는데
어머니 가슴에 설핏
하늘이 안겨져 있다
평생을 헤매도 찾지 못했던
하느님
거기 앉아 계셨다“
최세라 시인 / 카운트 업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며
언제까지라도 걸어가기로 약속한다면
달까지의 거리는 38만 킬로미터
몇 발자국일까
우리를 스쳐가는 빛의 보폭은
너와 함께 욕조에 들어앉고 싶어
서로 모자를 바꿔 쓰고
욕조 가득 거품을 채운 채로
물은 조금씩 식어가고
거품이 사라지지
우리 믿음처럼
꺼져드는 것들
약속은 어그러지기 위해 있는 것 같고
자꾸만 눈꺼풀이 부서지는 나는
때가 탄 욕조에 들어앉아 물에 코를 박곤 한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며
숨을 참으며
원래의 자리에 없는 것들을 별이라 불러 본다
떠난 빛 하나가 길을 잃어도
그것은 그것대로 별
네가 있어도
내가 없으면
우리는 이별하지 않아도 된다
이경철 시인 / 봄이 오는 소리
마른 땅 붉은 먼지 적시며툭, 툭, 탁, 탁
비 내리는 소리
살가워라
산에 들에 어린 식구들
밥 넘기는 소리
참새들 부리로
오동통한 꽃망을 쪼면
발갛게 터져나는 꽃 소리
환해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마른 가슴에 물꼬 트는 소리
팽이에게
우리의 사랑도
그대처럼 꼿꼿하게 설 수 있다면
채찍을 받아서라도
그대처럼
한 번 멋지게 돌 수 있다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그대처럼
노래할 수 있다면
온몸을 뜨겁게 달구면서
불덩이같은 몸짓으로
그렇게 노래할 수 있다면
윤수천 시인 / 슬픈 일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 역시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
원숭이들이 좁은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데 반해
사람들은 조금 넓은 도시 안에
갇혀 있다는 게 다를 뿐
비스켓을 좋아하는 것까지도 비슷하지
먹는 입 모양을 보면 쏙 빼닮았어
그러나 정작 슬퍼할 것은
원숭이들은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거야
바다로 나가는 이유
바다에서 살던 사람은
육지에서는 살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오래
정박당하지 못한다
풍랑과 파도를
헤쳐 나가는 쾌감
그 쾌감에 한 번 빠져본 사람은
죽음까지도 쾌감이다
더구나 망망대해에서
누군가를 그리워 본 사람은
또 바다로 나가야 한다
그 최상의 고독을 접어두고 살 수는 없다
따뜻한 사람 하나 있으면
겨울바람이 제아무리 차다 해도
따뜻한 사람 하나 있으면
춥지 않네
털장갑 같은 사람 하나 있으면
세상이 제아무리 쓸쓸하다 해도
따뜻한 사람 하나 있으면
외롭지 않네
그리운 편지 같은 사람 하나 있으면
사는 일이 제아무리 힘들어도
따뜻한 사람 하나 있으면
웃으며 살아갈 수 있네
등받이 같은 사람 하나 있으면
아, 추운 날 털장갑 같은 사람
외로울 때 그리운 편지 같은 사람
힘들 때 등받이 같은 사람
그런 사람 하나 있으면…
백무산 시인 / 정지의 힘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김봉식 시인 / 기묘한 시
단골로 다니는 까페가 있었다 까페조명이 희미한 구석자리 낡은 탁자 앞에 그는 항상 앉아 있었다 돋보기 너머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국적을 알 수 없는 두툼한 원서 속 페이지마다 처음 보는 화학구조식과 수학공식이 잔뜩 들어있었다 八자 모양의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까페 여사장이 말하길, 그는 화학교수가 아니라 전업시인이라고 했다 어느 날 궁금증에 수척해진 나는 그 노인에게 물었다 노시인은 특수한 잉크를 연구하는 중이며, 필생의 시상들을 정리한 한 권의 시집을 곧 출판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 시집의 초판인쇄는 지금 연구 중인 특수한 잉크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노시인은 빙그레 웃으며 내가 원한다면 시집의 초판 인쇄본 한 권을 기꺼이 선물하겠노라고 했다 나는 생업에 쫓겨 한 동안 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몇 년 후 그 까페를 다시 찾았을 때, 팔뚝에 흰 토끼 문신을 새긴 멋진 콧수염의 그 까페 여사장은 내게 얇은 시집 한 권을 전해주며 말했다 그 노시인은 불과 몇 달 전에 작고했으며, 죽기 얼마 전 자필서명의 시집 한 권을 내게 남겨놓았다고 했다 그 시집 속의 시들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전율을 느낀 아주 매혹적인 것이었다 내가 그 시집을 다 읽은 후 책장을 덮었을 때는 이미 먼 동이 튼 뒤였다 그 시집 속의 시어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고혹적인 이미지들과 낯선 이미지들 간의 폭력적인 결합과, 파괴적인 형식으로 뒤섞인 문법과, 기이한 메타포들에 매료된, 나는 이윽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꿈 속의 세상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았다 며칠 뒤 그 시집을 다시 펼쳤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시집 속의 모든 페이지들은 검은 색 잉크 활자들이 사라진 채, 흰 여백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으며, 그 시집의 맨 뒷 장에는 노시인의 푸른색 자필서명만이 또렷이 남아있었다 (부언하자면, 지금 쓰여지고 있는 이 시는 내가 간신히 기억해 낸 그 시집 속 시의 일부이다)
- 월간 모던포엠 2022년 12월 호 -
목련꽃을 보면 양변기가 생각 난다
목련나무들이 자위를 했다
돌돌 뭉쳐진 크리넥스 티슈가 발에 밟힌다.
발정난 저 놈들, 밤새도록 방문 걸어 놓고
가려운 제 성기를 벅벅 긁었나 보다
달큰한 향내가 아파트 단지에 그득하다
성기가 몸보다 먼저 자라는 것들은
사춘기의 격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저 변성기의 목련나무들은 낄낄대며,
미끈한 두 다리 쭉 뻗고 잠든 분홍철쭉의
흐트러진 춘화를
밤새도록 돌려보았을 것이다
쓰다버린 크리넥스 티슈가 나뭇가지에 여기저기 걸려있다
문득, 오래된 서랍 속에 감춰 둔 내 사춘기가 그리워진다
첫사랑의 그 여자가 떠오른다
사랑을 잃고 휴지처럼 구겨져 떠돌던
청량리가 떠오른다
4월의 목련꽃을 주워다가
양변기에 넣고 물을 내린다
박명보 시인 / 붉은 지붕이 있는 간이역
소소해서 눈에 드는 것들이 있다
그 작은 간이역처럼
낡은 것들만이 지니는 온화함을 아는 듯
그곳엔 속도에서 비켜난 사람들이 머물다 가곤 한다
간혹 늦은 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리거나
길 바깥을 기웃거린 어린 꽃잎들이
귀환을 거부하는 여린 병사의 몸짓으로 날아들기도 했는데
그 역사의 지붕이 왜 붉은지……
ㅡ 붉은 우체통은 너무 상투적이야
당신은 말하겠지만
거창하게 납득시킬만한 이유가 아니라도
어느 레일위에도 몸 싣지 못하고,
어느 곳에도 도착하지 못한
거주불명의 밤들이 있는 것이다
진부해서 그리운 아날로그
그 밋밋한 이마를 만지고 있을 때
불안을 거처삼은 내 안의 누군가
이 몸도 간이역이라고,
오래된 아픔을 불러내듯
우체통, 그 캄캄한 입속을 자꾸 들여다보는 것인데
-<시와사람> 2010. 겨울호
바람의 신부*
오스카 코코슈카*
때로 사랑은 절망과 이음동의어이지
난간에 서 있는 자의 잠은 자주 위태롭네 푸릇푸릇 날 선 칼날을 신고 허공을 건너는 밤 해독되지 않는 불안이 임파선처럼 퍼져나가네 상상은 착지를 모르지 운명이라 믿었던 것들도 궁극의 자서에서 찢어낸 한 장의 파지일 뿐, 누구의 내부도 되지 못한 자 스스로 벼랑이 되지
알마 밀러*
우리 모두 바람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죠
별이 탄생하던 그 순간부터 (포효하는 광휘 속에서 하나의 빛이 폭발할 때) 우주의 행간을 떠돌던 낱말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호로 몸에 새겨져 있는 걸요 모든 별들의 고향은 허공이며 어둠이죠 편편하고 둥근 시간의 띠 그 어디쯤 산재해 있을 어머니의 아버지의 어머니의 아버지의…… 어머니인 미립자들, 먼지는 먼지를 혼돈은 혼돈을 음악은 음악을 파동은 파동을 부르고 모으고 흩어지고 영원한 허기로 결박되는 꿈, 을 생이라 불러도 되는 건가요? 우리 모두 이 세계의 뮤턴트, 지워진 길에서 길을 찾는 하나의 이미테이션, 이라 생각해본 적 없나요? 당신의 몸을 빠져나와 거리를 활보하는 퓨마의 영혼을, 또아리 틀고 있는 뱀의 적의를, 포르노의 밤에 대해서 이야기하진 말아요 그 모든 것들 위로 솟구치는 비명을, 말하고 싶은 거에요 쇤베르크의 불협화음에 대하여 클림트의 해체에 대하여 랭보의 파괴로서의 구원에 대하여....
투명한 벽에 갇힌 모든 영혼들에 대하여
수수억년 전 내장된 바람의 빛깔과
우리 피 속을 떠도는 갈망에 대하여
익명이며 불구인
그 필연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거에요.
*빈 사교계의 여왕인 알마밀러와 헤어지기 전 코코슈카가 그린 그림의 제목.
'2011 젊은 시' (문학나무)에서
박명보 시인 / 벗꽃 지다
대개는 답신이 없는 편지였다
멀어진 날들에 봄 꽃 한 잎 부치는 날
-이게 다예요
변명처럼
아니, 길 끝의 비명처럼 벗꽃이 지고
자꾸만 그를 잡고 흔들어대던
바람의 우듬지는 제 안의 천공으로 길을 낸다
만개한 벗꽃나무 아래, 사람들은 떠나지 않는다
꽃 지고
주름진 검은 몸피 드러날 때쯤에야
그 상처 뒤로 하고 자리를 턴다
바람이 변주하는 봄의 소나타
낮은 음계로 날아오르는 결별의 화음앞에서
보내야 할 때
한 번도 아름다운 적 없었던
늑골의 허기를 누른다
점묘법으로 걸어오는 어둠
낡은 풍경을 찢고 나온 듯 뒤늦게
분주한 어린 꽃의 뺨을
저녁의 푸른 손이 감싸 쥔다
창백하게, 단단해지는 꽃향기
허공이 품은 씨앗이다
-『열린시학』2012, 봄호
김상백 시인 / 사라진 책
좀만 한 마음이
태산만 한 글자들을 갉아먹고
꾸벅거리며 존다
한 권의 정원을 거닐며
삼천대천세계는 드넓고도 크구나
나프탈렌 냄새 펄펄 나는
화장실 같은 세상
어느 날 갑자기
집게손가락만 한 행과 불행이 닥쳐와
짓눌러 죽인다 해도
오늘도 좀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행간을 건넌다
좀이 버린 뗏목이 글의 홍수에 떠내려가자
말과 뜻을 버린 좀은 책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활자만 무수한 세상
오래된 책도 없고 묵은 생각도 없이
쓰레기 같은 책들이 양장도 없이 날뛰는 세상
좀이 슬어 삭은 책
좀은 없고
책마저 사라져 버렸다
홍관희 시인 / 내가 그대에게 다가가듯
내가 그대에게 다가가듯
그대가 내게로 다가온다면
무엇이 우리를 더 가로막겠느냐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우리의 소망이 길을 가듯
보이지 않는 그대가
보이는 내게로 달려온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가 아니겠느냐
어둠속에서도
길이 제 갈 길을 가듯
우리가 얼지 않는 물이 되어
서로를 향해 뜨겁게 흐른다면
사랑이 어찌
아득한 메아리로 놀고
우리가 어찌
수평선으로 만나지 않겠느냐
내가 그대에게로 다가가듯
그대가 내게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마침내 하나의 길이 되어
더욱 빛나는 그리움을 걸을텐데
끝모를 새벽길 밝힐 수 있을텐데.
조창규 시인 / 불안한 상속
초승달은 지구의 공전이 깎아 놓은 손톱
할아버지는 매해 굴속에서 자식들을 낳았다
그의 핏줄을 따라 가계의 불행은 대물림되었다
갑상선암이나 탈모 같은 불안한 의혹들이
쑥쑥, 나의 안쪽에서 자랐다
볼록한 허물은 누눈가 잠시 머물다간 집
나는 긴 장화 속에 새알을 숨기고 입구를 나뭇가지로 덮어 놓는다
알 속에 구겨진 부리는 바깥을 여는 열쇠
아비의 출신은 자식에게 신분증이었다
지구에도 이상한 상속이 있다
붉은 사막에 내리는 하얀 폭설
代가 끊기지 않는 지진, 전쟁
떠도는 계절의 종자들은 어느 기후의 혈통을 잇고 있다
아프리카의 겨울이 추울까, 시베리아의 여름이 더울까
나는 지구의 공전 방향과 반대로 도는 사람
죽은 할아버지는 내게 땅꾼인 아버지를 물려주었다
부어오른 목에서 부화한 새의 울음
1월에 낙엽이 지는 적도의 나무들
깨진 유리창을 X 자 청테이프가 붙들고 있는데,
알 껍질만 버려져 있는 불안한 그늘
삐-익, 나는 손가락 휘파람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뱀들을 불러 모은다
-『신춘문예 당선시집 』 (2015년)
북촌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남인이었어요
남산골샌님이었던 고조할아버지는 종구품이었지만
북촌 어느 대감댁 소나무는 정이품송이었죠
예나 지금이나 정치 일번지인 북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도성 안 최고 길지인 이곳엔
예부터 대궐 같은 집들이
대대손손 자손들에게 사대부 가문을 물려주며 살았고
말단 공무원이었던 고조부는 아랫마을 남촌에서 살았어요
북두칠성도 북천을 중심으로 둥글게 돌았고
월남전에서 전사한 아버지는 어깨에 별 하나 다는 게 소원이었는데
초가지붕을 삿갓처럼 쓴 옛 조상집은
행여나 북쪽 하늘에서 큰 별들이 우수수수 떨어질까 북쪽 동네를 망보듯 서 있었어요
병인박해 때였던가, 우리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고
그 후로 가난한 순교자 집안이 되었죠
가난한 자에게는 저승 복이 있어서
천주쟁이였던 증조부가 살아생전 가진 걸 다 팔아서 산
시골의 어떤 밭뙈기가
토지대장을 살펴보니
신이 인간과 보물찾기를 하려고 천국의 금은보화를 감춰놓은 밭이었어요
믿음이 가장 큰 유산이라던 할머니는 그 밭을 애비 없는 나에게 물려줄 거라는데
어릴 적부터 내 머릿속에 보물섬처럼 둥둥 떠 있는
할머니의 손바닥만 한 텃밭을 밤새 파 봐도
묵직한 금덩이 같은 왕감자와 고구마뿐이라서 나는 허탈해요
가문에 부끄럽게 살았던 나도 이제, 대역죄로 순교한 증조부처럼
그림 속의 떡을 믿음의 눈으로 먹어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자포자기한 마음
지구에서 삼십억 광년 떨어진 북천 어딘가에 천국 마을은 있다는데
가난했던 우리 할아버지도 노잣돈 뱃삯이 없어 황천 강을 헤엄쳐 건너가
마침내 북쪽 마을에 도착하면
저승에서 대궐 같은 집에 사는 증조부가
젊었을 때 할아버지를 알아보고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입 맞추며 안아주실까요
북촌의 집들은 다 검은 머리였는데 그건 기왓장을 지붕에 얹어서 그렇고
마음만큼은 부자인 나도 어느새
저세상에 대한 소망이 희끗희끗 새치처럼 돋아나요
오늘도 많은 우주선들이 북극성을 향해 날아가요
부자동네인 저 낙원은 대역죄인들만 갈 수 있는 곳인데
시도 때도 없이 망자들이 드나드느라 북촌의 솟을대문은 문턱이 닳아 없어졌죠
밤하늘엔 할머니가 깔고 주무실 칠성판이 이부자리처럼 펼쳐져 있고
여러 차례 가판대 떡을 훔쳐 달아난
허기진 내 유년의 낙원동 골목을 지나면
한때 장안 제일 부촌이었던 북촌이 나와요
계간 『백조』(2021년 가을호)
김기찬 시인 / 멀리 달을 보는 사람
그믐이던 마음이 보름 달빛이나 보자 하여 월명암에 오릅니다 한 발 앞서가던 산새도 숨이 가쁜지 호로록 쪽쪽 호로록 쪽쪽 오체투지로 오르다 쉬고 쉬었다 다시 오릅니다
삶을 견딘다는 것은 마음을 닦는 일과 같겠지요 가슴에 맺힌 혈을 풀고 심신을 안정시키자면 맛이 쓰고 성질이 찬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언젠가 방약합편(方藥合編)이 일러줬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오래도록 탕약을 달이듯 멀리 달을 바라보는 사람은 지금 아픈 사람이거나,유독 상처가 많아 누구를 아프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겠지요
다혈질인 나는 독초로 보자면 마땅히 천남성이거나 각시투구꽃의 눈빛일 텐데요 오늘만은 약으로 쓸 것 같은 달빛에 빨대를 꽂고 호로록 쪽쪽 호로록 쪽쪽 빨고 싶은 밤입니다
첩첩산중 꿈틀거리며 꼬물거리며 배어든 달빛이 성미가 따뜻하고 독성이 없는 사람 품 같아서, 병든 몸뚱이 말갛게 씻어주는 향(香) 같아서 그믐이던 마음이 열나흘 흐벅진 달빛이 되어
찻잔에 매화가 오면
마음을 다치고 맘조리 하느라
몇 년째 눈 시리게 매화를 들여다보지 못했다
한 사흘만 딱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일어나려 했으나
서너 알의 이빨이 사리처럼 쏟아졌다
그러는 사이 많은 것들이 안팎으로 나를 다녀갔다
뼈아픈 절망이 갔고,
치욕이 왔고,
증오가 갔고,
다시 악에 받친 분노가 치밀어 왔고,
손가락이 길어질 대로 길어진 세상은 나를 죽일 놈으로 내몰았으므로
해변에 밀려온 통나무처럼 마르거나 젖은 채로 한 시절을 견뎌야 했다
한번 상한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란
한 주먹의 모래알을 씹기보다 한 말의 소금물을 마시기보다 어려웠으므로
여러 해가 지나갔고 내색은 안 했지만 그녀의 말도 아프게 잊혀졌다
내 안의 침묵에 또 하나의 침묵을 더하는 동안에도
번쩍하고 등짝에 드릴이 지나갔고 전신에 마비가 찾아왔던가
아픔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늙기만을 바랐다
그때마다 삶과 죽음 사이를 겉돌 듯 찻잔에 매화가 오면
정말이지, 내 안의 야성의 피가뜨거워져 자주 짐승이 되곤 했다
시시때때로 핏발선 눈을 수평선에 헹구는 동안에도
몇 번의 봄날이 조개껍데기로 해안가를 뒹굴며 지나갔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눈 뜨고 죽어 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마음을 고쳐먹던 날들이었다
봄은 피었다 지는 일이 계속되었지만
바다를 건너는 나비처럼 봄날의 깊이를 다 건너기 위해서는
더는 비열해지지 말자고,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나는 나에게 주먹가슴질을 해대며 쌍시옷의 욕을내 뱉어야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루머에 멱살 잡혀 정말이지,
아물지 않은 상처에 썰물밀물 철썩거리는 봄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픔이 더 아플 때까지
선퇴(蟬退)
누군가 7년 막장의 긴 터널을 뚫고 날아간 흔적, 눈물겹다
아름드리 허공을 기어오르다 미루나무 둥치에 걸어둔 저,텅 빈 울음집
말랑말랑한 속울음이 솟구칠 때마다 차곡차곡 쟁여 넣어 차돌처럼 단단해졌을,
뭉툭한 새끼발가락 같다
울지 않은 생은 없다고 마침내 그가 운다
띄 엄 띄 엄 반벙어리 첫울음을 울다가 갑자기 온몸에 쥐가 났는지 쥐어짜듯 막 악을 써댄다
누가 이 삼복염천의 한낮에 저리 쇠사슬을 끄는가
아스팔트 길이 패이도록 쇠사슬을 끌며 저 깊디깊은 허공 속울음을 퍼내고 또 퍼내는가
말도 마라, 그 울음소리가 나뭇가지를 잡아 흔들더니, 그 진동이 둥치를 타고 내려가 실뿌리까지 매치더니, 냄비 끓듯 천지사방이 들썩인다
미루나무 열 평의 그늘에다 열 양동이 눈물을 자지러지게 쏟아붓고서야 잠시 멈춘 그 생울음을 나는 모를란다
아무래도 저 질기디질긴 울음 끝은 내 생의 밑바닥에 가닿을 것이다 거기, 내 울음집인 어머니 지금도 거적때기 몸으로 바싹 풍화되어 있을 것이다
미끈도마뱀
낯선 나와 마주치자 제 꼬리를 스스로
뭉툭,
자르고 달아났다
순간, 동력이 끊긴 꼬리는 놀랍게도
선풍기 날개 돌듯 핑핑핑핑 잘도 돌았다
단박에 모든 걸 잃어버린 막막함 때문이었겠으나
한참을 지난 시간을 되감다 멈춰 섰다
꼬리 어디에 저런 힘이 내장되었던 것일까
몸과 꼬리는 한 몸이었으니
피가 도는 길도 한 길이였을 터
몸통도 꼬리를 잃고 한동안 중심이 흔들렸으리라
나도 그랬다,
행복과 슬픔이 한 몸이었던 나의 사랑 중에
어느 날 갑자기 사랑의 동력이 끊긴 날
불 나간 빈집 같은 캄캄한 마음 때문이었겠으나
나는 추억의 안팎을 바람개비처럼 돌고 돌아주었다
내가 나를 돌아주었을 때 삶도 사랑도
다 제 살점 떼어내는 아픔이란 걸 알았다
잠시 허기진 마른 입술로
나를 살다 간 맨몸의 그녀는
등짝이 유난히 반짝이던 미끈도마뱀이었다
조윤희 시인 / 모정 비각과 해은정
해의 날개 자락이 드리운
비탈진 언덕 쪽에는
하늘을 담고 구름으로 채워
흐르는 세월 유유히 그려낸
화포천의 물길 바라보고 선 채로
속살 드러낸
큰 배롱나무들이
겨울을 안고 섰다
*마을을 지킨다는 당산나무 아래는
연꽃 단청 단장한 모정비각과
해은정의 모습이
잊힌 세인들의 역사 속에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찬 바람만 오가는
낙동강 마을 한쪽 하늘은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지나간다
배롱꽃 가득 찰 어느 날을
꽃 꿈꾸며
겨울이 흐른다
*해은정(海隱亭) : 병자호란 때 인조가 당한 굴욕에 분함을 삭히지 못한 광주노씨 해은 노한석 공이 은거하면서 세운 정자.
*모정 비각 : 1909년에 그 내력을 적어 세운 공의 유허비에 용과 연꽃 단청의 비각.
*여기에서 마을이란 모정마을을 말한다.
*모정마을의 유래 : 금관가야 2대 거등왕과 혼인하기 위해 왕비가 배를 타고 와서 내린 지역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을 왕비의 이름을 따서 모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인조 때 증이조판서를 지낸 해은 노한석 공이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마다하고 모정마을로 옮겨와 살면서 마을에정자를 짓고 명나라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기린다는 의미로 마을 이름을 모정이라고 했다고도 전해진다. 정마을이 있는 한림면 금곡리는 광주 노씨의 4백년 세 거지 이기도 하다.
잘 살기 위해 잘 헤어지는, 이별의 기술
헤어짐에 관한 표현이 많다. 잠깐 헤어지는 ‘작별’이 있고, 영원히 헤어지는 ‘고별’이 있다. 작별 인사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만, 고별인사는 마지막 단 한 번뿐이다. 헤어짐의 강도에 따라서도 담담하게 갈라서는 ‘이별’, 애틋하게 헤어지는 ‘석별’, 단호하게 끊어내는 ‘결별’이 있다.
돌아보면 수없이 헤어졌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헤어졌고, 고등학교 때 만났던 첫사랑 여학생과 헤어졌고, 내가 모셨던 김우중 회장,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과도 헤어졌다. 사람들과 헤어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소중했던 학창 시절, 직장생활과도 헤어졌고, 오래전에 고향과도 헤어졌다. 헤어짐이 이토록 애틋하고 그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내 인생에서 헤어질 것들을 만났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이고 감사한 일이었는가.
잘 헤어져도 절반은 성공한 인생
삶은 헤어짐의 연속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만나면 결국 헤어지게 돼 있다. 영원한 관계는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이별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일상 안에 들어 있다. 인간사가 헤어짐의 연속이라면 만나는 모든 것과 잘 헤어지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인생일 것이다.
이별은 그 대상에 따라서도 여러 경우로 나뉜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이나 배우자와의 이혼, 죽음으로 인한 이별 등. 이런 상실은 우리네 삶의 단계에서 시나브로 찾아온다. 이별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해서 분가하고, 유학을 떠나고, 가족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모두 이별이다.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를 찾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의 이별이다. 따라서 이별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도 대상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우선 사귀던 사람과의 이별을 이야기해 보자. 강렬했던 첫사랑의 감정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것처럼 만나지만, 시간이 흐르면 마음도 변하고 죽고 못 사는 관계도 변한다. 소중한 인연, 소중한 감정도 세월이 흐르면 변하고 퇴색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연인 사이에서는 관계의 유한함을 늘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이 아닌 내일 헤어질 것같이 그날그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별해야 한다면 좋은 이별을 해야 한다. 특히 ‘안전이별’이라는 단어가 생겨날 정도로 잘 헤어지는 것이 중요해진 요즘, 좋은 이별을 준비하는 일은 건강한 만남을 위해서도 필요해 보인다.
먼저, 헤어지자는 말은 얼굴을 보며 해야 한다. 헤어지는 마당에 잠시라도 다시 보고 싶지 않겠지만, 그럴수록 만나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해야 한다. 내 표정이나 말투, 분위기를 통해 진심을 전할 수 있고,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문자나 e메일, 메신저로 전하게 되면 이별 통보를 받는 처지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 글의 행간을 잘못 해석해 억측을 낳기도 하고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 이건 도리가 아니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가 없는 것이다. 이별에도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다. 마지막까지 성의를 다하지 않는, 이런 이별은 좋은 이별이 될 수 없다.
헤어지는 이유도 분명히 얘기해야 한다. 에둘러서 표현하면 미련만 남긴다. 상대가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줘야 한다. 상대는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겠는가.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자신의 마음이다. 헤어진 후 이별을 후회하거나 이별을 번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 후 이별을 통보해야 한다. 아울러 그렇게 신중하게 내린 결론이라면 헤어진 후 다시 오는 연락에 대해서도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좋은 이별은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별을 잘해야 새로운 만남에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헤어지고 나서 가끔은 ‘그 사람은 잘 지내고 있을까?’ 생각해볼 여유도 생긴다. 그게 내 인생의 중요한 토막 하나를 허비하지 않는 일이 될 것이며, 내 인생을 지탱해 나갈 추억이 될 테니까 말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사별엔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이별을 맞는 때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게 죽음이다. 소설가 김훈 선생은 <연필로 쓰기>(문학동네·2019)에서 “죽음은 경험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죽음에 개입할 수 없고, 죽은 자들은 죽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설명해 줄 수 없다”라고 했다.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알 순 없지만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고통은 잘 안다. 누구에게나 소중했던 관계를 끝내는 일은 참 힘든 일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두려움과 불안, 외로움을 부른다. 미국 워싱턴 의과대학 토마스 홈스 박사 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배우자의 사망 혹은 이혼, 별거 등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라고 한다.
얼마 전 자살자 가족 모임에서 강의한 적이 있다. 자살자 가족 모임의 유족 대부분은 자신들을 ‘자살생존자’라고 부르며 가족의 죽음을 자책하고 그들을 떠나보내지 못하며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오래도록 남은 자의 마음에 깊은 상실감과 아픔을 준다. 이런 사별은 당사자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발생하며, 살아가며 반드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아픔이다.
피할 수 없다면 견뎌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충분한 애도(哀悼)의 시간이 필요하다. 슬픔을 안으로 삭이지 말고 슬퍼해야 한다. 꾹꾹 눌러 삼킬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애도 기간이 너무 지나쳐도 안 된다. 삶에 지장을 줄 정도가 되는 것은 결코 떠난 사람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옛 어른들의 말처럼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살아 있는 사람의 도리다. 애도하고, 살아남고, 잘 지내야 한다. 나이가 들면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세상을 떠나거나, 병으로 거동이 어렵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얼굴 보기 힘들어진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다.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끝으로, 자신과도 시시때때로 이별해야 한다. 자기의 나쁜 버릇, 잘못된 생각과 결별해야 하고, 때로는 아름답고 평온했던 과거와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또 어떤 경우는 자신이 저질렀던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들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들과 화해하며 그 모든 걸 떠나보내야 한다. 나아가 내 삶과 영원히 고별하는 순간을 상기하며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만남에는 반드시 헤어짐이 따른다. 그 헤어짐은 때로는 느닷없이, 때로는 안개처럼 스멀스멀 다가온다. 헤어짐을 알고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의 삶이, 만남이, 인연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 현재 경험하는 세상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알려거든 그들과 당장 헤어지는 걸 상상해보자.
헤어짐은 또 다른 시작이다. 끝이 없다면 새로운 시작도 없다. 헤어져야 할 순간이 오면 그동안 관계했던 것들에 감사하고,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자. 헤어지는 대상의 안녕을 빌어주고 장래를 축복해주자. 그리고 새롭게 출발하자. 잘 헤어져야 잘 살 수 있고, 잘 살기 위해 잘 헤어져야 한다.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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