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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그런 사람이 있었네

by 이성근 2025. 1. 10.

동해 남부선 / 김 현      화양연화’ - 김사인      하이패스- 임희구/소주 한 병이 공짜

비워내기 정진규         '俗離山(속리산)에서' - 나희덕/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고목(古木) -김남주    여수 ㅡ 김명인       ! - 문인수        귀대 도종환

나무와 새 김영삼   건망증2 정양     바람에도 길은 있다 천상병

하루 또 하루 - 김광규      그곳 오은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 이근화

12- 강연호       울산바위 김창균      별 하나 김용택

누나의 손 유자효    가을비- 신경희      겨울산 날은 저물고

오탁번    그리운 등불 - 이준관     나는 그 저녁에 대해 고영민

사랑니 정양/꿈 다 잊으려고 /내 살던 뒤안에 ​       한통 이준관

꽃 피는 아이 천양희/ 가난       시월 오세영     그림 신경림/밤차를 타고 가면서

겨울산 김태정     구두 뒷굽을 갈며 윤수천    가을 정호승

마중 허림         기억의 향기 이우걸     초가을소식 고재종

그런 사람이 있었네 주용일            저녁 9시 무렵에 그 사내 윤석산      머위 - 문인수

아침 황유원       저 안개 속에 스며 있나니 피천득     어느덧나무 심재휘

아득한 한뼘-권대웅     고백-최문자    기억하는가 최승자

마음 박경리     바다 옆에 집을 짓고-한기팔(1937~2023)     밖에 더 많다 - 이문재

 

https://www.youtube.com/watch?v=OD_hIhzicpg

 

동해 남부선 / 김 현

저무는 수평선을

차창에 걸어 놓고

 

바다가 그려 놓은

해안을 따라 가면

 

열차는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옛날로 가고 있다

 

지나는 정거장마다

한 세월이 스쳐 가고

 

갈매기

날개 속으로

어둠을 접는 포구

 

불빛은

멀어질수록

별이 되어 가고 있는데

 

초승달 시그널이

가리키는 별 하나

한 소절 노래로

거리를

재어 가면

 

열차는

옛날로 가는 것이 아니라

네게로 가고 있다

 

화양연화’ -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 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리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하이패스- 임희구

외곽고속도로를 규정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속도가 많이 줄어든 것이다 속도를 버리니

가야 할 곳의 멀고 가까운 개념이 없어졌다

급한 것 다 버리고 살아야겠다 생각하며 달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버스가 내 앞을 가로질러 간다

꽁무니에 근조라고 써 붙인 황천 행 버스다

살아오는 동안도 숨 막히게 바빴을 것인데

싸늘한 시체가 된 고인의 세상 마지막 길을

급하게도 모셔간다 앞차들을 추월하여 톨게이트를

하이패스로 통과한다

사는 것만큼이나 저승길 문턱도 하이패스다

라고 빠르게 보여주며 달려간다 쌩쌩

 

소주 한 병이 공짜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 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비워내기 정진규

우리 집 김장날 내가 맡은 일은 항아리를 비워내는 일이었다 열 동이씩이나 물을 길었다 말끔히 가셔내었다 손이 시렸다 어디서나 내가 하는 일이란 비워내는 일이었다 채우는 일은 다른 분이 하셔도 좋았다 잘하는 짓이라고 신께서 칭찬하셨다 요즘 생각으론 집이나 백 채쯤 비워내어 그 비인 집에 가장 추운 분들이 마음대로 들어가 사시게 했으면 좋겠다 이 겨울을 따뜻하게 나셨으면 좋겠다

 

'俗離山(속리산)에서' -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고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막다른 기슭에서라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무언가 끝나가고 있다고 느낄 때

산이나 개울이나 강이나 밭이나 수풀이나 섬에

다른 물과 흙이 섞여들기 시작할 때

 

당신은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발을 멈추고 구름에게라도 물었어야 했다.

산을 내려오는 산에게

길을 잃고 머뭇거리는 길에게 물었어야 했다

 

물결에 몸이 무작정 젖어드는 그곳을

우리는 기슭이라고 부르지

 

산이나 짐승과 마주치곤 하는 산기슭

포클레인이 모래를 퍼올리는 강기슭

풀벌레 날아다니는 수풀기슭

기슭이라는 말에는 물기나 소리 같은 게 맺혀 있어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생겨난 비탈 끝에는

어떤 기슭이 기다리고 있는지

 

빛이 더 이상 빛을 비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지막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그래도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무서움의 시작 앞에 눈을 감지는 말았어야 했다

고목(古木) -김남주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주름살투성이 얼굴과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저곳을 보라.

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 년

쉽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어 주고 싶다.

 

여수 ㅡ 김명인

여수, 이 말이 떨려올 때 생애 전체가

한 울림 속으로 이은 줄 잊은 때가 있나

만곡진 연안들이 마음의 구봉을 세워

그 능선에 엎어놓은 집들과 부두의 가건물 사이

바다가 밀물어와 눈부시던 물의 아름다움이여, 나 잠시

그 쪽빛에 짐 부려놓고서 어떤 충만보다도

돌산 건너의 여백으로 가슴 미어지게

출렁거렸다, 밥상에 얹힌

꼬막 하나가 품고 있던 鳴梁

어느 바다에 가까운 물목인지

 

밤새도록 해류는 그리고 빠져 나갔을까, 세찬

젊음만으로도 몸이 꽁꽁 굳어지던

그런 시절에는 써늘한 질문에 갇히고, 우리가

누구인 줄 자꾸만 캐물어 마침내 땅 끝

에 가닿는 절망조차 함께 나누었던

그 여정으로 나도 한때 아름다운 진주를 품었다

칠색 자개 얹어 동여매던 저녁 나절의 무지개여,麗水

旅愁여도 좋았던

 

상처의 시절은 단단히 기억하지, 밀려온 진눈깨비조차

참 따뜻한 나라라고, 적시자 녹아 흐르는 눈이

녹슨 철선이 발하는 고동으로 어느새 푸석푸석한

노을에 칠갑되기도 했느니

 

마음이 헐어가고 시절이 더욱 쓸쓸해지면 누군들

그걸 잊을까, 휠체어에 실려 C병동 쪽으로

옮겨지던 맥막은 희미하게

되살아나 그곳이 마지막 희망임을

어렴풋이 알았을 그때에도 아득한 낭하 같던 시간들

 

여수, 거기 누가 있어 골목 끝 빈집을 두드리랴

두드려 여직 우리의 이름을 나눠 부르랴

그때에도 우리는 기억하지

담 너머로 번져오르는 동백꽃, 그 붉음에 취해

단 한번 내다 건 紅燈 가까이 얼굴을 비춰

눈 가장이에 덧낀 주름으로 세월을 헤아릴지

 

!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 ,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 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 !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귀대 도종환

시외버스터미널 나무 의자에

군복을 입은 파르스름한 아들과

중년의 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꽂고

함께 음악을 듣고 있다

 

버스가 오고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빼고 차에 오르고 나면

 

혼자 서 있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아들도

어서 들어가라고 말할 사람이

저거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도

오래오래 스산할 것이다

중간에 끊긴 음악처럼 정처 없을 것이다

버스가 강원도 깊숙이 들어가는 동안

그 노래 내내 가슴에 사무칠 것이다

곧 눈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흐릿한 하늘 아래

말없이 노래를 듣고 있는 두 사람

 

 

나무와 새 김영삼

지나가다 생각나서 잠시 들러보듯

지빠귀가 휘젓던 날개를 접고 감나무에 내려앉네

 

어린 가지는 익숙한 듯 신나게 출렁거리고

새는 체중을 실어서 있는 힘껏 발을 구르고

이윽고 흔들림이 멎자, 일상처럼 모두 덤덤하네

 

나무는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는 인심 좋은 집 같고

새는 아무 때나 편하게 드나드는 오랜 이웃 같고

 

나는 본 적이 없네

부러지는 나뭇가지에 날아와 앉는 새를

 

찾아오는 새를 가려서 받아 주는 나무를

본 적이 없네

앉을 자리에 앉는 슬기와 차별 없는 넉넉한 품이 부럽네

 

새는 움츠려 쉬면서 나무의 잔근육을 키우고

나무는 그 힘으로 열매를 달고

마침내 열매는 세계에 온몸을 바치며 상생하네

 

건망증2 정양

벼 이삭 익어가는 들길에

새 쫓는 소리가 평평

최루탄 터지는 소리 같다

 

깜짝 놀라고 깜빡 잊어먹는 새들이

논자락에 내려 왔는다

깜박 잊어먹고 깜짝깜짝 놀라는 새들이

푸른 하늘로 흩어진다

 

다시는 두근거리지 말자고

놀라고 난 뒤끝마다 다짐하지만

평평 터질 때마다 새들처럼

나는 놀란다 번번이

알고 당하는 것이 허망하다

 

놀라는 뒤끝을 비집고

잊어먹는 통증을 비집고

여기져기 헛총질에 쫓기는 새들

속고 당하고 다짐하고 잊어먹은

짓밟힌 꿈들이 해묵은 아우성들이

초가을 하늘을 떠돌고 있다

 

바람에도 길은 있다 천상병

바람에도 길은 있다.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하루 또 하루 - 김광규

느닷없이 암 진단이 떨어진 날부터

우리의 건강한 동료 이선생이

유기수가 되었습니다

 

육개월 남짓

기한만 채우면

출옥합니다

갑갑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지요

뒤에 남은 무기수들

조만간 출옥할 가망도 없이 우리는

계속 복역합니다

억지로 견디는 것이지요

버드나무 붙들고 울던 사람들

불쌍하게 되새기면서

헛된 희망의 세월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우리는

하루 또 하루

습관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곳 오은

거울이 말한다

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마라

형광등이 말한다

말귀가 어두울수록 글눈이 밝은 법이다

두루마리 화장지가 말한다

술술 풀릴 때를 조심하라

 

수도꼭지가 말한다

물 쓰듯 쓰다가 물 건너간다

 

치약이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변기가 말한다

끝났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라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 이근화

할머니는 이제 없지만

엄마의 몸속에 할머니가 다시 살고 있는 것 같다

엄마가 나를 낳아

내 몸속에 엄마가 다시 산다면

내 몸속에는 할머니도 있고 엄마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 눈빛은 나만 보는 것이 아니고

내 목소리는 나의 목소리만은 아닐 것이고

내 팔다리에도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 엄마들이

함께 웃고 울고 하는 것 아닐까

 

외로워도 외로운 게 아니다

혼자이지만 혼자일 수가 없다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12- 강연호

그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마른 삭정이 긁어 모아 군불 지피며

잊으리라 매운 다짐도 함께 쓸어 넣었지만

불티 무시로 설마설마 소리치며 튀어올랐다

동구 향한 봉창으로 유난히 風雪 심한 듯

소식 갑갑한 시선 흐려지기 몇 번

너에게 가는 길 진작 끊어지고 말았는데

애꿎은 아궁이만 들쑤시며 인편 기다렸다

내 저어한 젊은 날의 사랑

눈 내리면 어둠도 서두르고 추억도 마찬가지

멀리 지친 산 빛깔에서 겨워 자불음 청하는

불빛 자락 흔들리며 술기운 오르던 허구헌 날

잊어라 잊어라 이 숙맥아, 쥐어 박듯이

그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울산바위 김창균

햇볕 쨍쨍한 가을날

큰맘 먹고 울산바위 오르는데

낙엽이 먼저 올라

몸 식히고 있습니다.

 

나는 일찍이

저렇게 긴 세월

가슴에 발을 품고

걸어가는 자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현달 위로 깊은 어둠이 담기는 밤에도

큰 덩치의 몸을 밀며 걸었을

이 바위를 생각하면

여기서 내 사랑은 다시 써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내 그리움도 너무 가벼운 것이어서

동해 바다 오징어 먹이로나 던져줘야겠습니다.

 

별 하나 김용택

당신이 어두우시면

저도 어두워요

당신이 밝으시면

저도 밝아요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있든 내게

당신은 닿아 있으니까요

힘 내시어요

나는 힘 없지만

내 사랑은 힘 있으리라 믿어요

내 귀한 당신께

햇살 가득하시길

당신 발걸음 힘차고 날래시길 빌어드려요

그러면서

그러시면서

언제나 당신 따르는 별 하나 있는 줄 생각해 내시어

가끔가끔

하늘 쳐다보시어요

거기 나는 까만 하늘에

그냥 깜박거릴께요

 

시인이 사는 마을

나는 강가에 있는 작은 마을에 태어나고 자라 산다. 나의 조상들이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란 와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두 살 때 전쟁이 일어났다. 집은 불태워지고, 그때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를 잃었다. 피란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재만 남은 집터에 초가삼간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세 번째 집으로 1962년에 지으셨다. 아버지는 나무와 풀과 햇살과 흙과 바람으로 집을 지으셨다. 나도 그렇게 바람과 햇살과 흙과 나무로 시를 쓰며 그 시 속에서 살고 싶었다.

마을을 만들어 살면서 사람들은 마을의 질서를 위해 법을 만들어 갔다. 불문율이다.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막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도둑질을 하다 들키면 추방당하거나 스스로 마을을 떠나야 했다. 거짓말을 하면 평생 신용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은 사는 게 공부였다. 배우면 써먹었다. 자연이 하는 말을, 자연이 시키는 일을 잘 알아서 농사와 삶의 근본을 삶았다. 삶이 예술이었다. 평생 농사를 지었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싸워야 큰다.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고 했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마음을 곱게 써야한다는 말이었다.

삶 속에서 만들어진 마을 법을 지키며 사람들은 같이 먹고 같이 일하면서 같이 놀았다. 일과 놀이가 하나였던 마을 사람들의 삶을 사람들은 마을 공동체라 했다. 공동체라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이고 인문적인 이 아름다운 말은, 실은 이 작은 마을 문화에서 만들어졌다. 마을에는 별로 소식이 없었고, 쓰레기가 강물로 나가지 않았다. 가난을 무시하지 않았다. 가난은 남모르게 서로 돌보는 것이라고 나는 배웠다. ‘마을에서 살아남으면 어디 가서도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다.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어렵고도 아름다운 말이다. 마을은 인간을 가르치고 양성하는 학교였다.

스물한 살 때 초등학교 선생이 된 나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 31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는데 그대로 되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 인생이 늘 더 잘 되어 있어서 나는 놀란다.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일을 늘 새로워했고, 신비로웠고, 감동적이었다. 초가을 햇살을 날개에 실은 잠자리들이 날아다니는 운동장에서 나는 아이들과 뛰어놀았다. 아이들은 나의 아름다운 스승이었다. 교육은,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는 자기 교육이었다. 초등학교 6, 선생으로 31년 동안 드나들던 모교 교문을 나올 때 나는 부끄럽고 괴로웠다. 아이들에게 잘못한 일들이 되살아나 나는 부끄러웠고, 아이들에게 가르친 대로 살지 못해서 괴로웠다. 교육은 미래를 어루만지는 일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다. 그대로 살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논밭으로 오가던 길, 학교와 직장을 걸어 다니던 그 강길을 지금도 나는 걷고 있다. 강물을 거스르고 따르는 일은 내게 수긍과 거역을 가르쳤다. 박힌 돌에 물은 거세게 부딪치고 부서지며 흘렀다. 시정이 넘치는 이 작고 소박한 강은 내게 그리움을 실어다 주고 외로움과 태어난 땅에 사는 아픔을 가져갔다. 어느 날 누군가가 언제 어디서 시를 쓰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달이 다닌 길에서라고 했다. 나는 달이 다니는 길을 따라다니며 강길에 앉아 시를 썼다. 마을은 나의 학교였고, 해 아래 나무들은 나의 새 책이었으며, 새로 쓰는 시였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로, 참나무가 참나무로 평생을 우람하게 사는 나무들의 하루는 나에게 마르지 않는 상상력과 시적인 영감을 주었다. 자연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그 말로 씨를 뿌려 곡식을 가꾸어 거두는 농부들의 일상은 나의 시가 되었다. 나는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 나는 새와 바람과 달과 별들이, 나무들이 아침 강물과 저문 강물이 하는 말들을 달빛으로 공책에 받아 적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나 강을 건너오라고 부르지 않는다. 달이 뜬 밤 나락을 짊어지고 징검다리를 건너와 달빛이 깔린 마당에 짐을 부리고 허리를 펴던 고단한 아버지들의 하루 곁에 서 있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어찌 내가 잊고 살까. 나는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사랑하였다./김용택(시인)

 

누나의 손 유자효

누나의 손은 따뜻하다.

천지에 흰 눈이 덮이던 날, 책 보따리를 허리에 두르고 꽁꽁 얼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동구 밖까지 나와서 기다리다가 눈투성이 코흘리개의 손을 잡아주던 누나의 손은 따뜻했었다.

공부를 한다고 호롱불 밑에서 코밑이 까맣게 그을려 졸고 있으면 사탕이며 과자 몇 개를 살며시 쥐어주던 누나의 손은 따뜻했었다.

감나무 위에서 까치가 울던 누나가 시집 가던 날 아침, 잠꾸러기의 머리맡에 종이돈 몇 장을 손수건에 싸서 놓아두고 이불을 여며 주던 누나의 손은 따뜻했었다.

이제는 장성한 딸을 시집 보내는 누나의 장년,

"먼데서 뭐할라꼬 왔노?" 화들짝 놀라며 가방을 받아드는, 어느새 어머니를 빼닮은 누나의 손은 아직도 따뜻하다.

 

가을비- 신경희

당신은 어디쯤에서

걸어오고 계십니까

 

당신은 어디쯤에서

길을 잃고 계십니까

 

당신 찾아

숨가쁘게 달려와

 

, 여기에

기다리고 있건 만

 

당신은 어디쯤에서 이렇게도

더디게 오고 계십니까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소리

오늘도

당신은 보이지 않고

 

가을비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습니다

 

겨울산 날은 저물고

이름 모를

어린 새 한 마리

겨울산을 넘는다.

 

가파른 벼랑

쉬지도 못하고

꺼이꺼이 울며

장군처럼 버티고 선

겨울산을 넘는다.

 

집집마다

꽁꽁 문은 잠기고

대추나무 끝에

찢겨져 연이 울 뿐.

 

어깻죽지로

간신히 어둠을 밀어내며

빚더미처럼 쌓인

겨울산을 넘는다.

 

이고 지고 빈손

사십 한평생

울다 간 울 엄니

해 다 진 겨울 저녁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빈 겨울산을 홀로 넘는다.

 

오탁번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뚜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그리운 등불 - 이준관

그리운 사람을 기다릴 때면

대문에 등불을 걸어두었다.

별빛을 머금고

빨갛게 타오르던

그리움의 심지

그런 밤이면 개들이 유난히 짖어대고,

개들이 짖을 때마다

노오란 살구 같은 별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리움만으로도 힘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던 시절

하찮은 들거미도

저녁이면 제 몸에서 맑은 실을 뽑아

그리움의 별자리를 짜서

풀섶에 걸어두었다.

그리울 일도

슬퍼할 일도 없는

오늘,

나는 노을빛 싸리비로 대문 앞을 쓸고

부엉부엉 울어대는

부엉새 같은 등불을 걸어두고 싶다.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며.

 

나는 그 저녁에 대해 고영민

저녁 무렵

대문 앞에 와 구걸을 하던 동냥아치가

마당에서 놀던 어린 내게

등을 내밀자

내가 얼른 그 등에 업혔다고

 

누나들은 어머니 제삿날에 모여

그 오래된 얘기를 꺼내 깔깔거리고

내가 맨발로 열무밭 앞까지 쫓아가

널 등에서 떼어냈단다

 

오늘도 어김없이 남루한 저녁은

떼쓰는 동냥아치처럼 대문 앞에 서서

나를 향해 업자, 업자

등을 내미는데

 

정말 나는

크고 둥글던 그 검은 등에

덥석,

다시 업힐 수 있을지

 

사랑니 정양

어쩌자고 늙발에 사랑니가 난다

새로 나는 게 아니고

숨어 있던 게 드러나는갑다고

치과의사는 잠시 어이없고 나는 뭘 들킨 것처럼

욱신거리는 것도 계면쩍다

가슴에 묻어둔 눈물이 하늘에

별처럼 글썽거리는 밤도 있었거니

숨기고 감추고 묻어두어도

마침내는 이렇게 드러나는가

이거 드러나면 말썽만 피우는 거라

언젠가는 뽑아버려야 한다며

젊은 간호원은 핀셋으로 톡톡톡

남의 사랑니를 아무렇게나 두드린다

 

꿈 다 잊으려고

밤마다 꿈을 꾸어도

아침마다 대개는 잊어버리고

어쩌다 한 토막씩

말도 안 되게 남아 있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잊어도 좋은 꿈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고, 꿈꾸며 살 날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잊었나

사는 게 잊어버리는 연습이라면

말도 안 되게 남은 꿈들은

언제 다 잊을 것인가

 

그 꿈 다 잊으려고 아침마다

잠이 모자라나보다 아침마다

말도 안 되는 몇 토막 그리움으로

모자란 채로 나는 남는다

 

내 살던 뒤안에

참새떼가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감꽃들이

새소리처럼 깔려 있었다

 

아이들의 손가락질 사이로

숨죽이는 환성들이 부딪치고

감나무 가지 끝에서 구렁이가

햇빛을 감고 있었다

 

아이들의 팔매질이 날고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치잉칭 풀리고 있었다

햇살 같은 환성들이

비늘마다 부서지고 있었다

 

아아, 그때 나는 두근거리며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었던가……

꿈자리마다 사나운

몰매 내리던 내 청춘을

몰매 속 몰매 속 눈감은 틈을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햇살이, 빛나는 머언

실개울이 환성들이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익은 흙담을 끼고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가뭄 타는 보리밭 둔덕길을 허물며

팔매질하며 아이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감나무 푸른 잎새 사이로

두근거리며 감꽃들이 피어 있었다

 

 

한통 이준관

아픈 데는 어떠냐고

걱정스레 묻는 친구의

전화 한 통

 

보고 싶다

단 한 줄 적혀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 한 통

 

인생에서

그 한 통이면

충분하다

물 한 통처럼

저녁 - 이준관

연기가 오른다.

그러나 나무보다 더 높이

오르지 못한 연기들은

그만 내려와 어스름 저녁이 된다.

 

그 저녁을 아이들은 와와 몰고 가지만

저녁은 슬그머니 빠져 나와

어머니의 고달픈 주름살과 함께

닭장으로 부엌으로 김치독으로

부지런히 옮겨 다닌다.

 

그러다 아이들이 돌아올 때쯤

밥에 뜸을 다 들이고 이제는

바쁜 허리를 조금 조금 펼 때쯤

 

저녁은 팽나무 위로

빨간 달을 올려 보내고

자꾸만 칭얼거리는 벌레들은

풀밭으로 놓아 보내고

바삐 바삐 뒷산으로 넘어 간다.

 

오래된 가을 -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억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꽃 피는 아이 - 천양희

언덕길 오르다가 아이가 내 손을 잡는다

구름 한번 더 쳐다보고 가자

구름이 꽃처럼 피었네

 

바쁘다고 하늘 한번 쳐다보지 않은

나는 부끄러웠다

 

마을로 들어서다 아이가 또 내 손을 잡는다

저 초가집 꽃들 좀 봐

꽃이 구름처럼 피었네

 

가난도 때로 운치가 있다는 걸 몰랐던

나는 부끄러웠다

 

아아, 아이가 피고 있다

이 세상에

눈부신 꽃이 있다

 

가난

행복지수가 1위인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 입니다

가난 때문에 불행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까뮈도 말했습니다

 

시월 오세영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입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은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있을 뿐이다

낙과(落果)!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 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림 신경림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맨 채 시적시적

걸어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주막집도 들어가 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풂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때가 있다

 

밤차를 타고 가면서

밤차를 타고 가면서 보면

붉고 푸른 빛으로 얼룩진

어둠이 덮은 산동네는 아름답다

밤차를 타고 모두들

그 아름다움에 취해 간다

어둠을 한겹만 들추면 있는

고달픈 삶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하지 않는다

괴로움 속에 뒤엉켜 있는

사람들의 깊은 말도 모두 잊었다

밤차를 타고 어둠이 덮은

아름다운 산동네에 그냥 취해 간다

거기 살던 사람까지도

거기 살고 있는 사람까지도

 

겨울산 - 김태정

한시절 붉고 노란 단풍으로

내 마음 끝없이 일렁이게 하더니

내 마음 일렁여 솔미치광이버섯처럼

내가 네 속을 헤매며

네가 내 속을 할퀴며 피

흘리게 하더니

이제 산은 겨울산이다

너는 먼빛으로도 겨울산이다

 

어느 결에 소스라치게 단풍 들어

네 피에 내가 취해 가을이 가고

무성했던 열애가 가고

이제 우린 겨울산이다

마침내 헐벗은 사랑이다

추운 애인아

누더기라도 벗어주랴

목도리라도 둘러주랴

 

쌀 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 서서 바라보면

배고픈 애인아

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

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

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

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

겨울을 살자

이 겨울을 살자

 

구두 뒷굽을 갈며 윤수천

비스듬히 닳은 구두 뒷굽을 갈면서

내 인생도 저렇게 비스듬히 닳은 것을 깨닫는다

, 이럴수가!

 

내 딴에는 똑바로 걸어갔다고 생각했느데 그게 아니다

뒤뚱거리지 않았으면 생기지도 않았을

저 흠집

 

등 뒤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웃었겠지

저 사람 좀 보게나, 저 사람 좀 보게나 하면서

손가락질을 했겠지

 

비스듬히 닳은 구두 뒷굽을 갈면서

내 인생도 저렇게 비스듬히 닳은 것을 깨닫는다

, 이럴수가! 이럴수가!

 

가을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마중 허림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말 한마디 그리운 저녁 얼굴 마주하고 앉아

그대 꿈 가만가만 들어주고 내 사랑 들려주며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기억의 향기 - 이우걸

배웅하기 위해서 역에 나갔다가

 

그대 가는 뒷모습 쓸쓸하고 아쉬워

그 기차 입석을 구해 함께 타고 갔었지

 

어디쯤 가서 내릴 생각도 못한 채

마냥 얘기 주고받다가 서울역에 도착하고

 

또 다시 대구행 표를

끊어서 내려왔던

 

차창 밖은 그날따라 질정없이 비가 내렸고

새로 돋던 그리움 빗줄기에 섞으며

하행선 밤의 선로는 내 상상의 여백이었지

 

초가을소식 고재종

처서 지나고 구월이다 누이야

장독대 뒤 돌담 위에

호박덩이며 샘가엔 넙적넙적

토란잎들이 한창인데

 

넌 이즈음에도 먼지 풀풀 날리는

방직 공장 시끄런 직조기 앞에서

행여 고향 텃밭의 붉게

익어가는 고추랑

헛간 옆 불근불근한

석류알은 기억는지

문틀 밑 귀뚜리 울음도 낭낭한 밤

이렇듯 너 그려 황토빛

가슴이다 누이야

 

의무교육 겨우 채우고 허기진 고향

뒷삼밭 콩대 거두다

보따리 쌌던 너

어언 십 년 세월에 공복은

어찌 다 채우는지

 

네가 매달 보내주는

소액환으로 막내는

지금 골방에서 글 읽는 소리로

드높고 샛터들 찬물고지

몇 자락 논에

목도열병 벼멸구 잡으러

농약 친 하루

아버지는 이 가을 들어

신경통 다시 도진갑다

 

진종일 뒷산 더터 캔

삽주뿌리 달여

어머닌 이 밤에도 아버지

봉양이 눈물겨운데

 

다만 나는 지난 여름

그 무더운 여름

휴가도 없이 괴로왔을 네가

못내 그리워

여기 고향소식 몇 자 적나니

누이야 쪽문 열고 바라보는

대숲 넘어 하늘엔

저렇듯 똑똑한 별들 천리만리

트였구나

 

우리의 가난 속에 핀

정정한 눈물꽃들

이제 너를 향한 그리움 되어

한껏 빛나는구나.

 

그런 사람이 있었네 주용일

목숨을 묻고 싶은 사람이 있었네

오월 윤기나는 동백 이파리 같은 여자,

지상 처음 듣는 목소리로 나를 당신이라 불러준,

칠흑 같은 번뇌로 내 생 반짝이게 하던,

그 여자에게 내 파릇한 생 묻고 싶은 적 있었네

내게 보약이자 독이었던 여자,

첫눈에 반한 사랑 많았지만

운명처럼 목숨 묻고 싶은 여자 하나뿐이었네

사내라는 허울 버리고

그 가슴에 생때같은 내 목숨 묻고 싶었네

생의 전부이자 아무것도 아니었던,

지금도 생각하면 기쁘고 서러운 여자,

나를 처음 당신이라 불러주고

내 흙가슴에 제 목숨 묻은 여자,

언젠가 그 여자에게 나도 내 목숨 묻은 적 있었네

 

저녁 9시 무렵에 그 사내 윤석산

저녁 9시 무렵

전철 경로석에 앉아 졸고 있는 그 사내

60은 족히 넘었고

그래서 70을 바라보는 나이

그러나 아직은 가장으로 그 의무를 지녀야 할 나이

기쁨도 슬픔도 없는 표정으로

다만 경로석 한 구석이나 차지하고 앉아

흔들리는 전철에 몸을 맡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9시 무렵

잊혀버린 한 덩어리 컴컴한 어둠이 되어

꾸역꾸역 잠이나 몰아가는,

덩그마니 비추는 전철 불빛 아래

고단한 주름살 더없이 깊이 패어만 가는데.

나 언제부터 저 자리에 앉아

저렇듯 흔들리고 있었는가.

전철은 온몸 덜껑이며, 알 수 없는 어둠 속 달리고 있는데

 

머위 - 문인수

어머니 아흔 셋에도 홀로 사신다.

오래 전에 망한, 지금은 장남 명의의 아버지 집에 홀로 사신다.

다른 자식들 또한 사정이 있어 홀로 사신다. 귀가 멀어 깜깜,

소태 같은 날들을 홀로 사신다.

 

고향집 뒤꼍엔 머위가 많다. 머위 잎에 쌓이는 빗소리도 열두 권 책으로 엮고도 남을 만큼 많다.

그걸 쪄 쌈 싸먹으면 쓰디쓴 맛이다. 아 낳아 기른 ,

다 뜯어 삼키며 어머니 홀로 사신다.

 

아침 황유원

네팔의 라이족은 손님이 떠난 후 비질을 하지 않는다

흔적을 쓸어낸다 생각해서

손님은 떠나기 전 직접 마당을 쓴다

자기가 남긴 흔적 스스로 지우며

폐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

깨끗한 마당처럼만 나를 기억하라고

쓸어도 쓸어도 쓸리지 않는 것들로

마당은 더럽혀지고 있었고

어차피 더럽혀지는 평생을 평생

쓸다 가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듣기 좋은 건

아침에 마당 쓰는 소리

언제나 가장 좋은 건

자고 일어나 마시는 백차 한잔

산중에 휴대폰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정지용 인동차, “산중에 책력도 없이/삼동이 하이얗다.” 변용

 

저 안개 속에 스며 있나니 피천득

바닷가 모래 위에

그 이름 썼느니

 

파도는 그것을 지우고

나는 또 쓰고

 

질화로 사윈 재 위에

그 이름을 썼느니

 

지우고는 또 쓰고

밤이 깊어가는데

 

세월이 흐르고

이제 그 이름은

 

재 보다 더 고운

저 안개 속에 스며 있나니

 

어느덧나무 심재휘

작고 붉은 꽃이 피는 나무가

있었다

 

어김없이

꽃이 진다고 해도 나무는

제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어김없이 어느덧

흐릿한 뒤를 돌아보는 나무

제가 만든 그늘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어느덧나무 어느덧나무

제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러보는 나무를

떠나간 사랑인 듯 가지게 된 저녁이 있었다

 

출가한 지 오래된 나무여서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은 이름밖에 없었다

 

매우 중요한 참견 박성우

호박 줄기가 길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있다

느릿느릿 길을 밀고 나온 송앵순 할매가

호박 줄기 머리를 들어 길 바깥으로 놓아주고는

짱짱한 초가을 볕 앞세우고 깐닥깐닥 가던 길 간다

 

아득한 한뼘-권대웅

멀리서 당신이 보고 있는 달과

내가 바라보고 있는 달이 같으니

우리는 한 동네지요

이곳 속 저 꽃

은하수를 건너가는 달팽이처럼

달을 향해 내가 가고

당신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이 생 너머 저 생

아득한 한 뼘이지요

그리움은 오래되면 부푸는 것이어서

먼 기억일수록 더 환해지고

바라보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꿈속에서 꿈을 꾸고 또 꿈을 꾸는 것처럼

달 속에 달이 뜨고 또 떠서

우리는 몇 생을 돌다가 와

어느 봄밤 다시 만날까요

 

고백-최문자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끼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기억하는가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기억의 집(문학과지성사, 1989)

 

마음 박경리

마음 바르게 서면

세상이 다 보인다

빨아서 풀 먹인 모시 적삼같이

사물은 싱그럽다

 

마음이 욕망으로 일그러졌을 때

진실은 눈멀고

해와 달이 없는 벌판

세상은 캄캄해질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욕망

무간지옥이 따로 있는가

권세와 명리와 재물을 쫓는 자

세상은 그래서 피비린내가 난다

 

 

바다 옆에 집을 짓고-한기팔(1937~2023)

바다 옆에

집을 짓고 살다 보니까

밤이면

파도소리, 슴새 울음소리 들으며

별빛 베고

섬 그늘 덮고 자느니

그리움이 병인 양 하여

잠 없는 밤

늙은 아내와

서로 기댈

따뜻한 등이 있어

서천에 기우는 등 시린 눈썹달이

시샘하며 엿보고 가네.

 

밖에 더 많다 - 이문재

 

내 안에도 많지만

바깥에도 많다

현금보다 카드가 더 많은 지갑도 나다

삼년 전 포스터가 들어 있는 가죽 가방도 나다

이사할 때 테이프로 봉해둔 책상 맨 아래 서랍

패스트푸드가 썩고 있는 냉장고 속도 다 나다

바깥에 내가 더 많다

내가 먹는 것은 벌써부터 나였다

내가 믿어온 것도 나였고

내가 결코 믿을 수 없다고 했던 것도 나였다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안데스 소금호수

바이칼 마른 풀로 된 섬

샹그리라를 에돌아 가는 차마고도도 나다

먼 곳에 내가 더 많다

그때 힘이 없어

용서를 빌지 못한 그 사람도 아직 나였다

그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한 그 사람도 여전히 나였다

돌에 새기지 못해 잊어버린

그 많은 은혜도 다 나였다

아직도

내가 낯설어 하는 내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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