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ellia japonica 차나무과
상록활엽 소교목으로 밑에서 가지가 갈라져서 관목으로 되는 것이 많다. 키는 약15m 직경 50cm 정도로 자란다. 나무껍질은 회백색이며 겹눈은 선상 긴 타원형이다.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 또는 긴 타원형이다. 잎가장자리에 물결 모양의 잔 톱니가 있고 윤기가 있으며 털이 없다. 꽃은 이른봄 가지 끝에 1개씩 달리고 적색이다. 꽃잎은 5∼7개가 밑에서 합쳐져서 비스듬히 퍼지고, 수술은 노란색으로 약 90~100개 정도로 많으며 꽃잎에 붙어서 떨어질 때 함께 떨어진다. 암술대는 3개로 갈라진다. 열매는 10월 경 삭과(蒴果)로 맺히는데 둥글고 지름 3∼4cm로서 3실이며, 검은 갈색의 종자가 들어 있다.
꽃의 형태와 색깔에 변이가 많다.
꽃잎이 수평으로 활짝 퍼지는 것을 뜰동백(var. hortensis)이라 하며 많은 품종이 있다. 백색 꽃이 피는 것을 흰동백(for. albipetala), 어린가지와 잎 뒷면의 맥 위 및 씨방에 털이 많이 나 있는 것을 애기동백(C.sasanqua)이라고 한다.
동백은 '冬柏' 또는 '棟柏'을 표음한 것이다. 동백은 한자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 말이다. 이 꽃은 겨울에 꽃이 핀다 하여 동백(冬柏)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그 가운데는 봄에 피는 것도 있어 춘백(春柏)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학단(鶴丹)으로 불리는 것은 그 꽃색이 붉음에 있고, 학정홍(鶴頂紅) 또는 내동화(耐冬花)로 불리는 것도 글자 그대로의 뜻이 있는 까닭이다.
동백을 중국에서는 해홍화(海紅花)라고도 불렀다. 《이태백시집주(李太白詩集注)》에는 "해홍화는 신라국(新羅國)에서 들어 왔는데 대단히 드물다"라고 적혀 있고 또 《유서찬요(類書纂要)》에는 "신라국에서 온 해홍은 즉 '천산다(淺山茶)'로 12월에서 2월까지 매화와 동시에 꽃이 피는데 일명 다매(茶梅)라고도 한다"라고 적혀 있다. 중국의 식물이름에 '해(海)'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것은 해외에서 들어온 식물의 명칭이다. 즉 수입식물이나 귀화식물이란 뜻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동백은 신라 때 이미 중국으로 건너가 많은 시인과 문사들에게 애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동백나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산다는 남쪽지방에서 나는 가목(佳木)으로 《유양잡조(酉陽雜俎)》라는 책에는 "산다는 키가 높고 꽃의 크기가 치를 넘으며 색깔은 붉고 12월에 핀다"라고 되어 있다. 《본초강목》에는 "산다는 남쪽에 나고 잎은 차나무와 매우 닮았고 두터우며 한겨울에 꽃이 핀다"라고 하였다. 소식(蘇軾)의 시에 "불꽃같은 붉은 꽃이 눈속에서 핀다(爛紅如火雪中開)"라고 하였다. 내가 강진에 있을 때 다산(茶山)에 많은 산다를 심는 것을 보았다. 그 화품은 적으나 잎은 겨울에도 푸르고 꽃이 많이 달린다. 열매로 기름을 짜서 머리에 바르면 윤기가 나고 아름답게 보이므로 부인들이 소중히 여긴다. 정말 훌륭한 꽃나무이다. 그런데 조선사람들은 산다를 동백이라고 부르고 있다. 봄에 꽃이 피는 것을 춘백이라 하는데 대둔산에 이 꽃이 많다. 동백을 전에는 취백(翠柏) 또는 총백(叢柏)이라 했고 한청(漢淸)의 문감(文鑑)에는 강오(岡梧)라고 했다.
이처럼 동백의 이름이 옛날에는 몇 가지로 혼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동백으로 통일하여 부르고 있다. 그런데 산다화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동백과 흡사한 다매(茶梅)를 산다화로 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동백과 다매는 흡사하기 때문에 이를 혼동하며 우리는 둘 다 동백이라 하기 쉽다. 다매는 일본이 원산지이다. 다매의 꽃피는 시기는 가을에서 겨울까지이며 꽃모양도 조금 다르다. 이 꽃은 수술이 넓게 벌어져 있고 꽃이 질 때 동백처럼 송이째 떨어지지 아니하고 한두 잎씩 따로 떨어지며 잎도 동백보다 좁으므로 쉽게 구별된다.
동백과 다매(애기동백)는 분명히 별개의 식물인데도 그 호칭에 혼동이 일어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첫째로 이 두 종류의 나무가 비슷하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이 두 종류의 나무가 엄밀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옛날 문헌에는 동백과 다른 다매라는 종류의 나무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당시에는 다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안평대군의 〈비해당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에는 〈설중동백(雪中冬柏)〉과 〈반토산다(半吐山茶)〉의 시제가 들어 있는데 이 두 시제를 선정하면서 왜 그 나무 이름을 동백과 산다로 달리 표현했느냐 하는 데 대해서 의문이 없지 않지만 이를 각각 별개의 식물, 즉 동백과 다매를 지칭한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둘째로 우리의 이웃나라에서 사용하는 이들 식물의 한명(漢名)이 혼동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즉 중국에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동백의 이름은 산다(山茶)이다. 또 옛 문헌에는 더러 다매(茶梅)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동백을 쓰바끼(椿)라 하고 다매를 사산카(山茶花)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도 옛날의 문헌에는 동백을 산다화로 기록하고 있는 것도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사전이나 식물도감에는 동백과 산다화를 같은 식물로 표시하고 있는 것도 있고 별개의 식물로 보아 다매를 산다화로 표기하고 있기도 하고 또 다매를 애기동백으로 구분하여 표기하고 있는 것도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글에서 산다화라는 이름이 나올 경우 그것이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옛 문헌에 나오는 경우에는 동백으로 보고 요즈음의 글에 등장하는 경우는 다매로 보면 큰 착오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백의 일본 이름은 쓰바끼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한국말의 동백에서 전화(轉化)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쓰바끼는 한자로 '춘(椿)'자를 쓰는데 이것은 봄에 꽃이 피는 나무라고 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이 '춘(椿)'자는 일본에서는 동백을 뜻하지만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전혀 동백이란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 중국에서 '춘(椿)'자는 멀구슬나무(전단, 栴檀)과의 향춘(香椿)이라고 하는 낙엽교목으로서 동백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수종이라고 한다.
강원도와 함경도지방에서는 이른 봄에 노란 꽃이 피는 생강나무를 동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의 마지막 장면에는 '노란 동백꽃'이 등장한다. 이것은 동백이 아니라 생강나무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노란 동백은 이 세상엔 없는데다 그는 강원도 춘천 출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문헌에서 동백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전집》의 시에서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강희안의 《양화소록》에서 설명이 나오고 그의 〈화목구품〉에서는 4품으로 등급을 매기고 있다. 또 《화암수록》의 〈화목구등품제〉에서는 3등으로 품열시키고 선우(仙友)라고 했다. 그리고 화암은 그의 〈화품평론〉에서는 동백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평하되, 도골선풍(道骨仙風)이 속세를 벗어나 사람 무리를 떠나는 기상이다. 총론(總論)하되, 날개가 돋친 새는 뿔이 없는 법이니 조물주가 본디 어떤 한 물건에만 편사(偏私)하지 아니하거늘 치자와 동백은 청수한 꽃을 지니고 또 빛나고 윤택한 사시(四時)의 잎을 겸하였으니 화림(花林) 중에 뛰어나고 복을 갖춘 것이라 하겠다.
동백은 장수(長壽)할 뿐만 아니라 사계절 진한 녹색이 변하지 않는 데다 겨울에 꽃을 피운다. 윤기가 흐르고 광택이 있는 진한 녹색의 잎 사이로 붉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에 옛사람들은 자연히 신비함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었을 것이다. 《꽃의 문화사》의 저자 피타 코트는 "동백은 향기가 없는 것 등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아름답다"고 하고 있다. 화암도 그와 비슷한 화평(花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동백 - 들어가는 말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3.10, (주)넥서스)
동백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한시에 있어서는 조선 초기에 안평대군의 〈비해당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에 〈설중동백(雪中冬柏)〉과 〈반개산다(半開山茶)〉의 시제가 포함돼 있어 이후 많은 문인들이 이 시제를 이어받아 시를 지었기 때문에 동백을 소재로 한 시가 상당수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고시조에 있어서는 단 한 수만이 보일 뿐이고 가사에 등장하는 경우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민요에 있어서는 몇 편이 보인다.
이와 같이 동백꽃을 읊은 문학작품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동백꽃이 결코 명화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주로 남해안이나 서해안에만 자라고 있어서 이 꽃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백꽃을 볼 수 있었던 지방에서는 이 꽃을 극찬하고 있는 글을 흔히 볼 수 있다.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이육(李陸)이 《청파극담(靑坡劇談)》에서 쓴 다음 글도 그러한 예의 하나이다.
동래의 동백정은 동국에서 이름을 독차지하였다. 주위 몇 리까지 모두가 동백나무, 곧 화보(花譜)에 이른바 산다화이다. 눈속의 푸른 잎이며 붉은 꽃잎이 화려하고, 동남에 큰바다가 가로놓여 뛰어난 절경은 비길 데 없다.
한시에서 최초로 동백을 읊은 시인은 고려시대의 이규보이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나라의 문헌상에서 동백이란 식물의 이름이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복사꽃 오얏꽃 비록 아름다워도 桃李雖夭夭
부박한 꽃 믿을 수 없도다 浮花難可恃
송백은 아리따운 맵시 없지만 松柏無嬌顔
추위를 견디기에 귀히 여기도다 所貴耐寒耳
여기에 좋은 꽃 달린 나무가 있어 此木有好花
눈속에서도 능히 꽃을 피우도다 亦能開雪裏
곰곰 생각하니 잣나무보다 나으니 細思勝於栢
동백이란 이름이 옳지 않도다 冬栢名非是
- 이규보, 〈동백화(冬栢花)〉, 《동국이상국전집》
도리화(桃李花)는 처음부터 동백에 비할 바가 못된다. 송백은 추위를 견디어 낸다는 점에서는 동백과 같이 귀하게 여길 만하다. 그러나 송백에게서는 결코 겨울에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동백은 눈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렇다면 동백은 잣나무보다는 더욱 사랑받아야 할 한 단계 위의 귀중한 나무인데도 불구하고 잣나무와 같은 서열로 인식되기 쉬운 '동백=겨울 잣나무'란 이름을 붙였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동백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것이다.
이규보는 이 시에서 도리(桃李)와 송백을 동백에 우회적인 방법으로 비교함으로써 동백의 뛰어난 모습을 상찬하고 있다.
고아하고 조촐함은 매화보다 낫고 高潔梅兄行
아리따움은 너무 지나칠 정도인가 嬋娟或過哉
이 꽃이 우리나라에 많으니 此花多我國
봉래라는 이름이 마땅하도다 宜是號蓬萊
- 성삼문, 〈설중동백(雪中冬栢)〉, 《성근보집(成謹甫集)》
위 시는 〈비해당사십팔영〉의 시제에 따른 성삼문의 〈설중동백〉이란 제목의 시다. 동백꽃을 읊은 시 가운데는 이와 같이 눈속에서 피어나는 동백꽃을 상찬하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이 시에서도 동백을 사군자의 하나인 매화에 비유하여, 그 고고하고 아리따움에 있어서는 오히려 매화에 앞선다고 상찬하고 있다.
진(秦)나라 시황은 불로장생의 약으로 불로초와 함께 동백기름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불로초의 산지로 알려진 봉래산에 보냈다는 전설이 있다. 우리나라 제주도에는 동백나무가 많으니 제주도를 봉래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동백이 반이나 피어 고아한 모습 들어냈는데 山茶半吐守孤芳
아직 세모라 봄빛을 받지 못했도다 歲暮春光所未嘗
이는 으레 자연의 순리에 따른 것이지만 正是自然天性晩
풍상을 겪고서도 맑은 자질 뽑냄이 없어라 非衿淑質傲風霜
- 신숙주(申叔舟), 〈반개산다(半開山茶)〉, 《보한재집(保閑齋集)》
세모에 아직 봄빛의 도움을 받지 못했는데도 풍상을 이겨내고 붉은꽃을 반이나 피워냈으면서도 전혀 오만스럽게 뽐내지 않고 고고한 모습을 지닌 동백꽃의 모습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다음 시조는 고시조 가운데 동백을 읊은 유일한 시조이다.
어와 보완제고 선사님 보완제고
저러틋 고은 양자 헌 누비의 이였는고
납설중(臘雪中) 동백화(冬柏花) 가지가 노송(老松) 속에 들미라.
- 작자 미상
스님의 고운 얼굴이 누비에 싸여 있는 모습을 노송 속에서 납설에 덮여 있는 한 가지의 동백꽃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에서 납설은 납일, 즉 동지 뒤에 셋째 술일(戌日)에 내리는 눈을 말한다.
고려가요에 〈동백목(冬柏木)〉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충숙왕 때 채홍철(蔡洪哲)이 지은 것인데 작품은 전하지 않고 노래의 내력만이 《고려사》 〈악지(樂志)〉 '속악조(俗樂條)'에 전해지고 있으며, 그 일부가 《증보문헌비고》 〈악고(樂考)〉에 옮겨져 있다. 작자가 죄를 짓고 먼 섬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충숙왕을 사모하여 〈동백목〉을 지었다고 한다. 왕이 이를 듣고 그날로 소환하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 전부터 이 노래가 있었는데 작자가 그 가사를 고쳐 자기의 뜻을 붙였을 것이라고도 한다. 작품의 내용은 동백을 소재로 하여 임금을 사모하는 내용일 것으로 추정된다.
동백화 피온 꽃은 눈속에 붉어시니
설만장안(雪滿長安)에 학정홍(鶴頂紅) 의연(依然)하다.
어끄제 그런바람 간밤에 이런눈에 높은절 고은빛을 고침이 없어시니
춘풍도리화(春風桃李花)는 도로혀 부끄럽다.
- 윤선도, 추자도 유배지에서
고산 윤선도가 유배지 추자도에서 읊은 노래이다. 동백꽃이 눈속에 피어 있는 남해 고도(孤島)의 정경이 잘 그려져 있다.
다음에는 민요를 보자. 동백을 노래한 민요는 동백꽃 피는 섬이나 바닷가에서 자란 처녀의 애환어린 노래가 대부분이다.
동백꽃 향기롭다 바구니 옆에 끼고 / 이 강산 이 섬 속에 봄이 왔네
동백꽃 필 무렵 다시 오마 하더니 / 꽃지고 열매 딸 때도 오지를 않네
- 울릉도 민요, 《전통문화의 맥》
울릉도는 아주 좁은 지역이다. 이 좁은 지역에서 자란 처녀 총각들은 아침 저녁으로 만나는 사이에 객지 구경을 할 사이도 없이 사춘기에 접어들고 무엇엔가 의지하고 싶은 심정이 애정의 표시로 변한다. 그 중에는 결혼에 성공한 경우도 많았겠으나 실연의 아픔도 맛보아야 했는데 위의 노래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또 동백을 노래한 민요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붉은 댕기 밤물치마 삼단머리로 / 동백따는 아가씨 고운 아가씨
동백따서 단장하고 시집갈라나 / 택일단자 받아놓고 동백을 따니
에헤라 달밝은 밤에 / 뒷동산 동백꽃이 에헤라 좋구나
- 임동권, 《한국민요집》
1. 물새울고 파도는 치는데 섬 새악시 노래 소리
2. 아침마다 피는 동백꽃을 한아름 안아다가 저 금강산에 심어보자
(후렴) 가세 가세 동백따러 가세.
- 임동권, 《한국민요집》
민요 〈동백타령〉에서는 동백이 열면 여인들이 바람이 난다고 했다. 옛 여인들은 동백기름으로 머리카락을 단장했고 동백이 열 때는 춘삼월이어서 여인들 가슴이 설레이는 절기인 데서 온 표현일 것이다.
아주까리 동백아 열지를 마라 건넛집 숫처녀 다 놀아난다.
- 강원도 지방
아주까리 동백아 열지를 마라 산골에 큰애기 떼난봉난다.
열라는 콩밭은 아니 열고 아주까리 동백은 왜 여는가
- 청량지방
현대시에서 동백꽃을 읊은 시는 피맺힌 가슴의 한이나 정열적인 사랑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동백꽃이 처절하도록 붉은 데서 오는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목놓아 울던 청춘이 / 꽃피어
천년 푸른 아래 / 소리없이 피었나니
그대 위하여서는 / 다시도 다시도 아까울리 없는
아, 나의 청춘의 피꽃
- 유치환, 〈동백꽃〉(제1절)
동백꽃은 푸른 하늘아래 피빛처럼 붉게 피어난다. 붉게 타는 듯한 동백꽃은 정열을 다 받쳤던 청춘의 화신이다. 동백꽃처럼 불타는 사랑을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백설이 눈부신
하늘 한 모서리
다홍으로
불이 붙는다.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그 뉘를 사모하기에
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 피는가
- 정훈, 〈동백〉
김유정(金裕貞)의 단편소설에 1936년 발표된 〈동백꽃〉이 있다. 향토색 짙은 농촌의 배경 속에서 인생의 봄을 맞이하여 성장해가는 충동적인 사춘기 소년 소녀의 애정을 해학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있는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기서의 동백꽃은 '노란 동백꽃'으로 나와 있어 진짜 동백이 아니라 생강나무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1938년에 세창서관에서 간행된 《동백꽃》의 표지에는 붉은 동백꽃이 그려져 있다.
한편 서양문학에 있어서의 동백도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동양의 꽃 동백은 서양에 가서도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불란서의 루시앙 교 피엘 지바세는 그의 《꽃의 역사》란 책에서 동백이 유럽에 상륙한 이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나무를 18세기 말에 아시아에서 가져온 사람은 예수교의 선교사였던 카멜(Kamall)로 알려져 있다. 처음 들어온 것은 홑잎의 꽃이었으나 겹잎의 꽃은 1794년과 1810년 사이에 들어왔다. 그로부터 동백의 '아름다운 치세(治世)'가 시작되었다. 대유행은 19세기와 함께 일어났다. 그 최성기에 우리나라의 해안지방에서 겨울의 제전(祭典)의 여왕은 열광자와 숭배자를 만들었다. 문학에서는 A.뒤마의 1848년의 소설과 1852년의 희곡 《동백 아가씨》[일본에서는 '춘희(椿姬)'라 하였음]에서 이 식물을 불후(不朽)의 것으로 만들었다.
위 글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동백나무는 동양의 꽃나무이지만 서양에 소개되어 많은 인기를 모았고 그 정열적인 붉은 색깔의 꽃은 많은 노래와 시와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뒤마(Dumas fils)의 소설 〈동백 아가씨(La Dame aux Camélias)〉와 이를 변형하여 오페라로 한 베르디(G. Verdi)의 〈라 트라비아타〉이다.
마르그리트는 1840년대의 아름다운 프랑스의 창부 마리 디플레시를 모델로 한 소설 〈동백 아가씨〉의 주인공 이름이다. 19세기 초에는 동백꽃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었으므로 뒤마는 그 소설을 쓰면서 여주인공을 위하여 동백꽃을 선택했던 것이다. 마르그리트는 향기 있는 꽃을 가지면 기침이 나기 때문에 항상 향기 없는 동백 꽃다발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한 달 중 25일간은 흰 동백꽃을, 그리고 나머지 5일간은 항상 붉은 동백꽃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뒤마는 "이렇다 할 이유는 없지만 이것이 나 자신인 증거예요"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리하여 당시의 불란서 사교계에서는 동백꽃 붐이 일어났다. 동백꽃 붐이 〈동백 아가씨〉를 낳게 했는지, 아니면 〈동백 아가씨〉가 동백꽃 붐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동백꽃 붐은 바로 제정(帝政) 러시아로 흘러들어 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白痴)〉에서는 소설 〈동백 아가씨〉를 읽고 무도회용(舞蹈會用)으로 동백꽃을 구하고자 광분하는 상류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동백꽃과 문학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3.10, (주)넥서스)
동백꽃
- 문정희 -
나는 저 가혹한 확신주의자가 두렵다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
지상의 어떤 꽃도
그의 아름다움 속에다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
함께 꽃피우지는 않았다
모든 언어를 버리고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단호한 참수
나는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겠다
전 존재로 내지르는
피 묻은 외마디의 시 앞에서
나는 점자를 더듬듯이
절망처럼
난해한 생의 음표를 더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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