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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스크랩 또는 퍼온글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1

by 이성근 2017. 5. 3.

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1) 17.2.20 중앙 이코노미스트

| 동물들의 겨울나기] 5g짜리 작은 새가 혹한을 이겨내는 비결

겨울은 혹독한 생존의 시험대

 

사실 박새뿐만이 아니라 겨울은 모든 생명체들에게 위기의 계절이다. 숲과 들판에 가득했던 것들이 사라지면서 온 세상이 텅 비는 시공간이 되고, 눈이라도 내리면 하얀 사막으로 변해버리는, 말 그대로 위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에 생명체들은 보통 세 가지로 대응한다. 추워서 못 살겠으니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고(철새), 춥고 먹을 게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최고라는 듯 겨울잠(동면)을 선택한다(개구리와 곰). 마지막으로 드물지만 정면으로 겨울을 돌파하는 녀석들이 있다. 박새 같은 텃새들이 이런 녀석들인데 겨울을 이겨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박새들은 다른 새들보다 더 높은 체온(42)으로 겨울을 이겨낸다. 문제는 이 체온을 유지하려면 다른 새들보다 더 잘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겨울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런 궁금증을 일찌감치 가진 사람이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생물학과 교수를 지내다 모든 걸 뒤로 하고 미국 동부의 숲 속으로 들어간 베른트 하인리히라는 학자다. 울창한 숲 속에 통나무집을 짓고 사는 그는 몇 년에 한 번씩 신선한 충격을 담은 연구 결과를 책으로 내놓는 현대판 헨리 소로이기도 하다.

 

어느 겨울, 숲 속을 탐색하던 그에게 문득 궁금증 하나가 날아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숲 속을 열심히 뛰어다니는 작은 상모솔새들이 어떻게 겨울을 날까,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보통 영하 20를 오르내리고, 한겨울 밤에는 영하 30까지 내려간다. 눈보라에 매서운 바람까지 불면 체감온도는 영하 50가까이 내려간다. 이뿐인가. 작은 햇볕이라도 쬘 수 없는 밤이 15시간 이상씩 계속 된다. 더구나 상모솔새는 박새보다 더 작다. 10cm 정도의 길이에 무게는 5g 정도이니 딱 어른 엄지만 하다. 더 의아했던 건 얼음장 같은 밤을 보낼 따뜻한 보금자리(둥지)를 짓지도 않고 겨울을 난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결국엔 연구 과제가 되었다. 그는 이 내용을 담은 책 [동물들의 겨울나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겨울이라는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놀랍고 독창적인 전략을 진화시켜온이 작은 새는 겨울 세계의 표상이다.” 이 새들만의 비결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에 적용되는 베르그만의 법칙을 무색하게 하는 상모솔새의 첫 번째 비결은 누구보다 촘촘한 깃털로 단열 공기층을 확보하는 것이다. 깃털을 잔뜩 부풀려 덩치를 키우면 따뜻한 공기층을 조금이라도 더 크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날기 위한 깃털보다 단열을 위한 깃털을 4.5배나 더 많이 갖고 있다. 체중의 7.4%를 단열에 투자하는 것이다. 묘한 건 하인리히가 자신이 숲 속을 돌아다닐 때 입었던 겨울 장비, 그러니까 옷과 신발을 측정해보니 수치가 비슷했다는 점이다.

 

이걸로 혹독한 추위를 이길 수 있을까. 턱없이 부족하다. 추워지면 이 작은 몸은 상상을 뛰어넘는 열 손실을 시작한다. 영하 34일 때 최소한 1분에 13칼로리를 열로 발생시켜야 살아있을 수 있는데, 체감온도가 낮아진다면 열 손실은 더 커진다. 작은 몸으로 겨울을 이기려면 남들이 가지지 않는 것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 녀석들도 박새처럼 높은 체온 전략을 쓴다. 다른 새들보다 3정도 높고 박새보다 1~2높은 43~44나 되는 체온이다. 몸집이 작으니 체온을 더 올리는 것이다(인간이 이 정도 체온이 되면 살아있을 수 없다).

 

베르그만 법칙 무색케 하는 상모솔새

 

문제는 박새들이 그렇듯 영양가 높은 먹이를 많이 먹어야 이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녀석들은 이른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숲을 뛰어다닌다. 추위와의 격전을 치르고 난 아침에는 칼로리가 거의 바닥난 상태라 한두 시간만 먹지 못해도 죽을 수 있다. 마치 월급을 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 다시 죽어라 뛰어다녀야 하는 중소기업 사장들처럼 말이다. 측정을 해보니 1분에 평균 45회나 뛰고 날고 있었다. 1, 2초에 한 번씩 뛰고 나는 것이다. 그것도 하루 종일!

 

하지만 겨울은 텅 빈 공간. 나무 열매는 다 떨어졌고 눈은 두껍게 쌓였는데 뭘 먹는 걸까. 위장 속을 확인해보니 생각지도 않은 내용물이 들어있었다. 땅속에서 겨울을 난다는 자벌레 유충들이었다. 알고 보니 이곳 자벌레 유충들은 겨울을 보내고 있었고 숲 속을 부지런히 탐색하던 상모솔새들이 이걸 찾아낸 것이었다. 유충들은 아주 작은데다 나무와 구별이 안 되게끔 완벽하게 위장을 해서, 우리는 눈앞에 두고서도 얼른 찾아내지 못할 정도다. 콩알만한 녀석의 뇌를 분석해 보니 설득력 있는 증거가 있었다. 전체 몸무게에서 뇌가 차지는 비율이 6.8%나 됐다. 동물계에서 전체 몸 대비 뇌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분수라고 할 정도로 큰 우리 인간(1.9%)보다 훨씬 높다. 혹한이라는 위기를 이겨내려면 보통 머리 쓰기로는 힘들다는 걸까. 이 좋은 머리를 가졌는데 왜 비용 대비 효과가 좋은 따뜻한 보금자리(둥지)를 만들지 않을까. 아침이면 칼로리가 바닥을 드러내다 보니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데 급급해 둥지를 지을 시간조차 없는 걸까.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새끼를 키울 때 녀석들은 둥지를 짓는다. 문제는 이 둥지에는 덮개가 없어 쌓인 눈이 깃털을 적실 경우 그렇지 않아도 덩치가 작은 녀석들이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겨울에는 사소한 것이 생사를 결정하는 일이 많은데 깃털이 젖으면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녀석들은 결점이 있는 둥지를 포기한다. 마치 고정비용을 아끼려는 회사가 사옥을 갖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15시간이 넘는 긴긴 밤을 이겨낼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잠을 잘 때 체온을 낮춘다. 물질대사를 낮추는 휴면이다. 대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가 추울 때 덜덜 떨어 체온을 조절하는 것처럼 격렬한 몸 떨림을 밤새 견뎌야 한다. 녀석들보다 좀더 큰 북미쇠박새들도 다른 새들보다 높은 체온(42)를 갖고 있는데 잘 때는 30~3210~12정도 낮춘다. 우리로 치면 허리띠를 졸라매는 식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혹독한 겨울 밤을 이겨낼 수 없다.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겨울 숲을 뛰어다니는 녀석들이 항상 두 마리에서 다섯 마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 알래스카 에스키모들이 엄청나게 추운 날 썰매를 끄는 허스키 개들과 함께 껴안고 자듯이 다 같이 함께 모여 온기를 나누는 것이다. 녀석들이 하루 종일, 단 몇 초도 조용히 입을 다물지 않는 것도 넓고 울창한 숲에서 난로 역할을 해줄 동료가 밤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주는 마법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연에 맡길 문제가 아니니 낮부터 서로 끊임없이 의사를 확인하고 위치를 확인해서 헤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무리지어 겨울 밤 버텨

놀라운 것은 겨울이 되면 같은 종뿐만 아니라 종이 다른 새들끼리도 무리를 이루어 같이 지낸다는 것이다. 상모솔새는 자기네들보다 조금 더 큰 북미쇠박새와 함께 무리를 이룬다. 무리를 이루면 눈이 많아져 포식자를 빨리 발견할 수 있는데다 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겨울 숲에서 벌레를 잡아먹고 사는 새들에 이런 현상이 많은 것은 서로 먹는 먹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종 업종 협력의 전제 조건은 어디서나 같은 듯 하다.

 

그럼에도 이 작은 새가 겨울을 무사히 보낼 확률은 높지 않다. 순백색의 아름다운 겨울 숲은 보기와는 달리 불확실성이 워낙 크고 위험천만한 곳인 까닭이다. 녀석들은 이런 손실을 종 차원에서 보전하는 생존전략을 갖고 있다. 다른 새들과는 달리 번식기에 두 집 살림을 한다.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라 한 부부가 두 개의 둥지를 만들어 차례로 8~11개의 많은 알들을 낳는다. 생존의 한계점에서 살아야 하고 단열과 보온 효과는 뛰어나지만 무거운 깃털 코트로 인해 높아지는 사망률을 높은 출산율로 상쇄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작은 새들은 마법의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고 독창적인 여러 능력을 개발한 덕분에 위기를 뜨겁게헤쳐나가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끝없이 뛰고, 날고, 먹이를 찾아다니는 상모솔새를 볼 때면 그 엄청난 열정에 전염되는 것 같고 삶에 대한 크고 한없는 열정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게 없이는 그 가혹한 세계를 살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물리학의 법칙을 거부하며 놀라운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상모솔새라는 단어 대신 중소기업 사장을 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살아가는 원리는 같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이라는 위기는 역설적으로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혹독한 환경과 먹고 사는 문제,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사라진다. 생과 사가 아주 짧은 시간에 결정되기에 어떤 생명체의 세상을 살아가는 힘, 다시 말해 생존능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간결하고 명료하게 드러난다. 겨울이야말로 생존의 진정한 시험대이다. 이 작은 새들은 자기만의 능력을 끊임없이 터득한 덕분에 겨울이라는 위기를 이기고 봄을 맞는다. 올해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어떤 나만의 능력으로 이 혹독한 겨울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박스기사] 상모솔새는 어떻게 혹한을 견딜까

- 촘촘한 깃털. 보온용 깃털에 많은 투자를 해서 기본적인 온기를 확보한다.

- 뜨거운 체온. 다른 새들보다 뜨거운 피로 1초도 쉬지 않고 하루 종일 뛰어다닌다.

- 엄청난 뇌 크기. 신체 대비 뇌 비율이 6.8%나 된다. 우리 인간의 뇌 비율은 1.9%.

- 함께하는 따뜻한 밤. 밤이면 공동 숙소를 만들고, 팀워크를 위해 끊임없이 의사소통한다.

- 두 집 살림. 개체 차원의 손실을 높은 출산율로 보충하는 종 차원의 전략을 갖고 있다.

/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

 

 

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2) | 313 중앙 이코노미스트

기생충 제국] 개미가 스스로 먹잇감이 되는 이유? 생태계 막후 실력자 기생충때문

상상을 초월하는 흡충·열원충의 생존 전략... 누군가에게 조정 당한다면 리더의 자격 없어

 

흡충(사진 아래)은 개미의 뇌를 조종해 풀잎 끝에 매달려 풀을 뜯는 소나 양에게 먹히게끔 한다.

개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한다. 하지만 야근은 거의 없다. 해가 뜨면 출근해 먹이를 찾으러 다니다가 해가 지면 퇴근한다. 퇴근한 샐러리맨들이 빌딩 숲을 줄지어 빠져나가듯 개미들도 풀숲 사이로 줄지어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 대열을 이탈해 옆에 있는 풀 줄기로 올라가는 녀석들이 있다. 올라가서는 집게 턱으로 줄기 끝이나 이파리 끝을 꽉 물어 대롱대롱 매달린다. 하루 피로를 스릴 있게 푸는 걸까?

 

사실 이것은 자살 행위다. 지나가던 소나 양이 풀을 뜯다가 함께 삼켜 버릴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이상한 일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난다. 알다시피 쥐는 고양이 눈에 띄어봐야 좋을 일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든 고양이 눈에 띄려고 하고, 고양이가 나타나면 마치 골리앗에게 다가가는 다윗처럼 대담하고 여유롭게 다가가는 녀석들이 있다. 역시 자살 행위인데 말이다.

 

 

개미의 뇌를 조종하는 흡충

 

간이 웬만큼 붓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이런 행동을 하는 녀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도 모르게 한다는 것과 이걸 조종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조종간을 잡고 있는 존재는 바로 기생충들이다. 아니, 별것 아닌 기생충들이 생명체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고? 그렇다. 녀석들은 생각보다 훨씬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예를 들어 개미가 풀잎 끝에 매달리는 것은 머릿속에 들어앉은 창형흡충 때문이다. 이 기생충들은 마치 스파이처럼 여러 삶을 건너다니며 산다. 3막으로 된 녀석들의 삶은(생물학적 용어로는 생활사라고 한다) 배고픈 달팽이가 소나 양들의 배설물을 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 달팽이 창자 속으로 들어간 알들은 안전하고 따뜻한 그곳에서 부화한 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어느 정도 크면 떼로 허파로 몰려가 난리를 친다. 견디지 못한 달팽이가 재채기를 하게끔 말이다. 끈적끈적한 액체와 함께 세상으로 튀어나오면 바라던 바다. 그래야 2막을 열어주는 개미들에게 갈 수 있다.

 

이 덩어리를 발견한 개미들이 기쁜 마음으로 꿀꺽한 후 집으로 가져갈 때 개미의 창자 속으로 들어간 녀석들은 이번에도 여기저기를 유람한다. 그러다 어느 때가 되면 다들 개미의 머리로 간다. 희한한 건 여기 모인 녀석들 중 한두 녀석만 남고 다들 개미의 창자로 가 주머니(포낭) 같은 걸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어떤 녀석()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남는지 모르지만 남는 이유는 명확하다. 특별 임무가 있다. 해가 질 때쯤 집으로 돌아가는 개미의 뇌를 조종해 풀잎 끝에 꽉 매달려 풀을 뜯는 소에게 먹히게끔 한다. 최종 숙주가 소나 양이기에 개미를 희생양 삼아 약속의 땅으로 가려는 것이다. 소에게 먹히면 소의 간으로 가서 죽을 때까지 영양분을 훔쳐 먹으며 산다. 그렇게 살다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배설물에 실어 밖으로 내보내 달팽이에게 먹히게 한다.

 

풀잎 끝에 매달려 있는데 소가 먹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대안이 없다면 탁월한 능력이라고 할 수 없다. 녀석들은 세상 모든 일이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소기의 목적이 수포로 돌아가면 특별 임무를 띤 녀석()은 개미를 깨워 제정신이 들게 한 다음, 집으로 가게 한다. 정상 생활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해가 질 때쯤 다시 조종을 시작해 풀 줄기로 올라가게 한다. 언제까지? 소에게 먹힐 때까지!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는 쥐 또한 톡소포자충이라는 기생충에게 조종 당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심리 조절능력을 갖게 됐을까. 앞을 보는 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눈에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데 어떻게 이런 정밀한 공포를 만들어낼까. 지구 생명체 중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인간 중에서도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분투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별것 아닌기생충들이 만들어내는 물질이 무엇인지, 어떻게 눈도 없는 녀석들이 달팽이에서 개미로, 개미에서 소로 갈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냈는지 아는 게 별로 없다. 녀석들은 수억 년 전부터 활동해오며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축적해왔지만 우리는 기껏해야 30여 년 전쯤부터이 녀석들의 위력을 파악해오고 있을 뿐이다. 창형흡충만 해도 세 곳이나 되는 서식지를 옮겨 다니는데다 그때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얼마 전까지 이 녀석들이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도 몰랐다. 당연히(?) 지금까지 기생충 백신 같은 걸 개발할 수도 없었다(바이러스와 박테리아 백신은 몇 개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녀석들의 생존전략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여서, 그것이 훔쳐 먹는 것만 아니라면 충분히 삶의 교훈이 될 만하다. 지금 말한 심리 조종만 해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우연에 의지하거나 요행에 기대지 않고 적극적으로 되게끔 만들고 있지 않은가?

 

희생양을 디딤돌 삼는 기생충

 

 

또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기 때문에 괴롭지만, 모기 입장에서도 먹고 사는 일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두꺼운 피부를 뚫어야 하고, 혈관을 찾아야 하며, 찾아서 빨대를 꽂았다 해도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는 순간 한 점 핏자국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이뿐인가. 빨대를 꽂는 순간, 혈소판이 몰려와 애써 뚫어놓은 피를 응고시켜 구멍을 막아버린다. 부드럽게 흘러들어와야 할 음료가 끈적끈적해지면 식사는 힘들어진다. 응고가 되지 않도록 하는 물질을 갖고 있지만 어쨌든 판단과 행동의 신속 정확함에 목숨이 달려있다. 그래서 어렵다 싶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런데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열원충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기생충은 알을 낳는 곳이 모기여서 어떻게든 모기에게 가야 한다. 모기가 사람 피를 빨아야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근데 모기가 포기해버리면 어떨까. 생의 목표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녀석들은 모기가 자신에게 오게끔 최선의 환경을 만든다. 인체의 혈소판 활동을 방해해 피가 응고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모기로 건너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녀석들은 다시 사람에게 건너오기 위해 자신들이 도하준비를 마칠 때까지 가능한 한 사람의 피를 많이 빨지 못하도록 한다. 하는 일이 못된 짓이기에 그렇지 노력 하나만 보면 가상할 정도다.

 

녀석들은 이렇듯 자신의 생존을 위해 희생양을 디딤돌로 삼는다. 개미를 풀잎 끝에 매달려 있게 하는 창형흡충처럼 여러 생명체를 건너다니는 녀석들은 특히 중간 숙주를 가차 없이 제물로 바친다. 대신 최종 숙주에는 최소한의 피해만 가게 한다. 숙주가 살아야 자신도 살 수 있고,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간신들이 무수한 국정 농단을 하면서도 왕조를 뒤집지는 않는 것과 비슷하다.

 

한 번만 이용하고 버려도 되는 숙주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떤 기생벌은 배추벌레의 몸에 알을 낳는데, 알에서 나온 새끼들은 배추벌레의 내장을 먹고 자란다. 그런 다음 배를 뚫고 나와 배추벌레가 깔고 앉은 잎사귀에 번데기를 짓는다. 포식자들에게 들키지 않게끔 말이다. 이때 내장이 다 먹히고 배에 구멍이 숭숭 뚫린 배추벌레가 눈을 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그물을 짠다. 다시 삶을 시작하는 보루를 만드는 걸까. 아니다. 유충들의 방패막이로 최후를 마치려는 것이다. 기생벌이 어떻게 이런 마술을 부리는지는 모르지만 배추벌레는 죽는 순간까지 철저히 이용당한다.

 

 

생태계에 막강한 영향력 행사   

녀석들이 흔히 쓰는 생존전략 중에는 치고 빠지는 소모전도 있다. 예를 들어 수면병을 일으키는 파동편모충은 곧잘 우리 인체로 진입하는데 우리 면역계도 보통이 아니어서 보통 일주일 안에 소탕 작전을 벌인다. 이때 거의 모든 녀석들이 죽는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소탕이 거의 끝나갈 무렵 새로운 녀석들이 나타난다. 이 기생충들은 1만 번에 한 번 정도로, 원래 있던 유전자를 하나 빼낸 후 가지고 있던 수천 개의 예비 유전자 중 하나를 그 자리에 넣어 돌연변이를 만드는데 바로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녀석들이다. 인체 면역계가 특정한 군복’(외피)을 인식, 공격하는 걸 알기에 군복을 바꿔 입고 나타나는 것이다. 면역계가 이 새로운 군복을 알아차려 공격을 개시할 때쯤 되면 녀석들은 그 사이에 또 다른 제3의 군복을 입은 녀석들을 만들어 미친 듯이 분열한다. 소모전이 수백 번씩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지친 면역계가 과도한 흥분 상태가 되어 우리 자신을 공격하면 게임은 끝난다. 환자 사망으로 말이다. 아예 우리 면역계가 인식하지 못하게끔 교묘하게 위장, 은신하는 투명 존재전략도 녀석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우리 주변의 조직 속 기생체들도 똑같이 한다).

 

뉴질랜드의 생물학자 커티스 리블리의 연구에 의하면 기생충들은 번성한 생명체를 선호한다. 찾기 쉽고 기대 수익이 높기 때문이다. 번성하고 있기에 조용히 스며들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어쨌든 이런 적응력 덕분에 녀석들은 번성 중이다. 포유류가 4000여 종인데 반해 촌충만 해도 5000여 종이 넘고 매년 새로운 종이 밝혀지고 있다. 이뿐인가. 기생하는 말벌은 20만 여종이 넘고, 식물에 기생하는 곤충 역시 수십만 종이다. 지금은 포유류의 시대라고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력 역시 막후 실력자를 방불케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 늪지에 사는 기생충(흡충)은 이곳에 사는 송사리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송사리들에게 춤을 추게 한다. 물속에서 천천히 맴돌다가 갑자기 돌진하게 하고 배를 드러내놓고 헤엄을 치게 한다. 정상적인 송사리들보다 30배나 더 새들의 눈에 띄게 하는 이런 노력 덕분에 최종 숙주인 새들은 먹고 사는 게 편해진다. 그런데 만약 이 송사리에게 구충제를 먹여 이 못된 녀석들을 다 처치해 버리면 어떨까. 송사리는 번성하겠지만 새들은 멸종될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30배나 더 노력해야 살 수 있는 환경을 견뎌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남의 것을 축내는 존재들인데 이들이 없어지면 생태계가 무너지는 이상한 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보이지 않는 손이다.

 

우리 인류은 어떨까. 미국 미시간대의 생물학자 보비 로의 연구에 따르면 기생충이 많은 곳일수록 일부다처제 경향이 강하다. 건강한 남성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수탉의 붉고 멋진 벼슬이 건강함의 상징인 것처럼 이런 곳에서는 덥수룩한 턱수염과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가 인기다. 오랜 경험 상 이런 남성들이 건강하고 잘 살았기에 생겨난, 알고 보면 기생충이 만든문화다. 이런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살아 있어도 죽은 리더

기생충은 나쁜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것처럼 적에게서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출신의 동물행동학자 로빈 던바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언어가 이 기생충 덕분에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영장류는 보통 하루 10~20%의 시간을 털 고르기로 보낸다. 벼룩 같은 기생충들이 하도 못살게 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털 고르기를 해주는 일이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발전했는데 무리 규모가 커지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상대가 너무 많아 다 해줄 수가 없었던 것. 유대감 강화 수단이 없어지면 불안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다시 규모를 줄여야 할까. 이때 등장한 게 언어라는 것이다. 기생충이 진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사실 요즘 과학자들도 이 기생의 역설에서 강력한 동기를 부여받고 있다. 숙주의 면역계를 파악하고 교묘하게 피하는 기생충들의 기술과 물질을 알아내면 자가면역질환 같은 병들을 획기적으로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치료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생물체 같은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다시피 기생의 원리는 어디서나 같아서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조용히 성과를 축내거나 모든 걸 무너뜨린다. 알아야 예방할 수 있고 제거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리더의 마음을 조용하고도 집요하게 노리지 않은가?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영양의 일종인 임팔라 무리의 우두머리는 진드기투성이가 되는 일이 많다. 틈만 나면 덤비는 도전자들을 상대하고 포식자들을 경계하다 보니 너무 바빠 내부 관리에 소홀한 탓이다. 암컷의 6배나 될 때도 있는데, 그깟 진드기쯤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놔두면 우두머리 자리에서 밀려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나날의 연속인데 지속적으로 피를 빼앗기게 되면 조금씩 무기력해지게 되고 그러면 힘 있게 싸울 수 없다. 별것 아닌 내부의 적에 당하는 것이다.

 

기생충의 조종을 받아 풀잎 끄트머리에 매달린 개미를 개미라고 할 수 있을까? 없다. 고양이에게 겁없이 다가서는 쥐들도 마찬가지다. 그건 살아있는 죽음이다.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으니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장악당해 자기도 모르게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다 그럴 줄 몰랐다” “나도 속았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리더라고 할 수 없다. 공동체의 운명을 책임진 리더는 어쩌다 보니 그럴 수도 있는 일반인이 아니다. 그가 조종 당하는 건 공동체 전체가 조종 당한 것과 같다.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 조종 당했다는 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 역시 살아있는 죽음이다. 자격이 없는 것이다.

 

 

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3) | 3. 27 증앙 이코노미스트

자연의 봄 맞이] 어느 날 갑자기 핀 꽃은 없다

봄을 맞는 동식물의 치열한 준비 나무는 꽃 피우기 위해 플랜B와 또 다른 대비책 마련

 

삶과 경영과 자연은 불확실성의 연속

다행스럽게도 이런 고민은 살아있는 생명체들에겐 아주 흔한(?) 것이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건 언제나 불확실성 속에서 헤매야 하는 것이라, 그때 그때 최선책이 있을 뿐 정답이란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온 세상을 자신들의 색깔로 바꾸고 있는 풀과 나무들도 그렇다. 잎을 틔우고 꽃을 펼쳐낼 를 알지 못하면 사는 게 힘들어진다.

 

우리는 싹이 돋고 꽃이 피면 봄이 왔구나하고 말지만, 풀과 나무들에 봄은 즐기는 시간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하는 격전의 시간이다. 무엇보다 잎과 꽃을 내야 하는 때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제대로 포착하지 않으면 한 해 성장은 끝이나 다름없다. 남들이 하는 걸 보고 따라 하면 좋겠지만 그러면 뒤처지기 쉽다. 일찍 시작한 주변의 경쟁자들이 먼저 잎을 펼쳐내 햇빛을 다 받아버리면 낭패 아닌가? 또 꽃을 늦게 피우면 벌과 나비처럼 수정을 해주는 중매쟁이를 다 빼앗겨 후세를 남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먼저 시작하는 건 어떨까. 별 일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꽃샘 추위 같은 한파가 몰아치면 성급하게 내놓은 가녀린 꽃과 잎들은 오들오들 떨다 꼼짝없이 얼어 죽을 수밖에 없다. 나무의 동사(凍死)가 겨울보다 봄에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황이 이러니 언제 잎과 꽃을 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창밖을 보며 서성거리는 CEO와 다르지 않다. 말은 쉽지만 너무나 어려운 최적의 시점을 골라야 한다. 풀과 나무들에 봄은 사업가들에게 호경기와 같은 것. 이들은 봄이 오는 걸 어떻게 알까. 입춘이나 우수 같은 절기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봄을 선언해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미국의 식물학자 윌리엄 버거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초원에서 희귀한 난초를 발견한 그는 호기심이 동해 줄기 하나를 떼어 연구실로 가져와 키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가혹한 건기와 우기가 오가는 거친 야생에서 사는 이들 난초는 보통 우기가 시작되는 5월에 꽃을 피운다. 필요한 물이 충분히 주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온실에서 1년 내내 물을 충분히 주는데도 매년 5월에만 꽃을 피웠다. 꽃을 피우게 하는 게 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알고 보니 난초들은 낮의 길이, 즉 해가 비치는 시간을 기준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버거가 정작 궁금했던 것은 이곳은 적도 근처라 일 년 열두 달 동안, 특히 12~6월까지는 낮의 길이가 거의 비슷한데 어떻게 5월을 콕 집어내 꽃을 피웠을까 하는 것이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이 난초는 몸속의 생체 시계(biological clock) 라는 기능을 통해 언제 꽃을 피워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생체 시계가 뭐기에 이 중요한 걸 가능하게 할까. 생체 시계란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몸속에 갖고 있는, 언제 활동을 시작하고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알람 시계 같은 신체 리듬이다.

 

대부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지만 제대로 쓰는 건 시계를 갖고 있는 존재에게 달렸다. 태엽으로 돌리던 시계처럼 날마다 기준 시간에 맞춰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식물은 대개 추위나 온도, 그리고 낮의 길이 등을 종합해 언제 꽃을 피우고 잎을 낼지 결정하지만 보통 낮의 길이를 표준 시간으로 삼아 날마다 자신의 시계를 맞춘다. 낮의 길이를 표준 시간으로 삼는 건 기후는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면서 생기는 낮의 길이는 거의 일정한 까닭이다. 뱃사람들이 북극성을 기준으로 방향을 잡는 것처럼 말이다. 버거가 가져온 난초가 제철에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다. 놀라운 건 당시 버거가 거주했던 곳은 12월부터 6월까지 낮의 길이 차이가 채 한 시간도 나지 않았는데 정확하게 제 때를 감지했다는 것이다.

 

동물들도 같은 시계를 쓴다. 예를 들어 야행성인 다람쥐는 하루 내내 어둠 속에 있어도 해가 질 때쯤 활동을 시작하고 해가 뜰 때쯤 활동을 중지한다. 체내에 있는 시간 조절 장치를 통해 언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해야 할지 아는 것이다. 이런 녀석들을 낮의 길이를 알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곳에 넣어 두면 어떨까. 녀석들의 생체 시계는 날이 갈수록 제각기 달라진다. 어떤 녀석은 빨라져 24시간보다 적은 23시간 30분이 될 수 있고, 다른 녀석은 24시간이 넘은 24시간 40분을 하루로 인식한다. 업데이트를 하지 못하고 어림짐작으로 지내다 보니 들쭉날쭉해지는 것이다. 하루를 다르게 인식하니 행동 개시와 종료 시각이 달라지고 한 달쯤 지나면 12시간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낮의 길이를 알 수 있는 곳에 두면 녀석들의 시간은 곧 같아진다. 생존을 결정하는 낮의 길이, 정확하게는 낮이 끝나는 시점을 기준으로 자신의 시계를 재조정한다(야행성은 해가 지는 걸 기준으로 시간을 맞추고, 주행성은 해가 뜨는 걸 기준점으로 한다).

 

제때를 알게 하는 생체 시계

 

모든 동식물은 '제때'를 아는 생체 시계를 갖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변하는 낮의 길이에 맞춰 몸속의 신체 리듬을 재조정하는 것은 귀찮기도 하고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값비싼 일이다. 그런데도 하나같이 이걸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살아가는 일에서는 언제 시작하고 끝내야 할지를 아는 시간 감각, 더 나아가 변화 감지가 중요한 까닭이다. 예를 들어 주행성 동물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와야 하고, 야행성은 반대로 해야 한다. 밤눈이 어두운 주행성 동물이 밤에 돌아다니는 건 밤눈에 밝은 포식자에게 나 여기 있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빛이 없는 깊은 동굴 속에 사는 박쥐가 저녁 때를 모르면 어떨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동굴 밖으로 나가 를 살피고 들어와야 할 것이다.

 

수많은 생명체들에게 이런 생체 시계가 있는 것은 제때라는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서 행동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모르면 좋은 일은 남의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위험해진다. 이들에게만 그럴까. 일해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몰라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몰라 파국을 맞은 사람들 또한 한 둘이 아니다. 제때를 아는 시간 감각은 살아가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해야 할 일을 대충하면 결과도 대충 돌아오게 마련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환경을 부단히 몸속에 축적하다 보면 빅데이터가 그런 것처럼 미세하게 다가오는 계절을 감지하는 감각까지 얻을 수 있다. 언제 잎을 내고 꽃을 피워야 하는지 포착할 수 있다. 물론 판단은 나름이다. 줄줄이 서 있는 같은 나무, 같은 풀이라도 서로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시기가 다른 게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판단이 한 해를 결정짓는다. 어쨌든 이 덕분에 철새들은 수천 킬로나 되는 여정을 정확하게 시작할 수 있고(어떤 철새들은 오차범위가 15분 이내라고 한다), 곤충은 때에 맞춰 번데기로 변할 수 있고, 개구리는 동면 준비에 착수할 수 있다. 이런 분명한 이점이 있어서 그런지 기생충들까지 생체 시계를 내장하고 있을 정도다.

 

봄은 어디서 오는가? 계절이라는 봄은 바깥에서 올지 몰라도 생명체가 누리는 봄은 내부로부터 온다. 변화하는 세상을 제대로 포착하려는 하루하루의 노력, 그 시간의 축적이 봄을 만들어낸다. 그렇다. 봄은 그 누군가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식물들도 생체 시계를 풀가동하면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면?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뭔가 다른 게 필요하다.

 

 

봄은 어디서 오는가?

봄을 제대로 맞기 위한 나무들의 두 번째 노력은 먼저 준비하는 것이다. 먼저 준비하면 먼저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우내 찬바람을 묵묵히 맞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 겨울눈이라는, 눈곱만한 걸 가지에 달고 있는데 이게 바로 나무들이 봄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이 겨울눈은 봄이 되면 꽃이 되고 잎이 되는 나무의 희망 캡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놀라운 건 이 겨울눈을 겨울이 아니라 1년 전에 미리 만들어둔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것이 풍요로운 늦은 봄이나 여름, 늦어도 가을이 되기 전까지 말이다. 여력이 있을 때 미리미리 미래성장동력을 만들어두는 삶의 지혜다.

 

나무들이 1년 전에 준비하는 이 희망 캡슐을 열어 보면 봄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나무들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겨울눈의 겉은 여러 겹으로 된 겉껍질과 보송보송한 솜털로 덮여 있다. 갑옷에 외투를 걸친 것 같은 이런 장비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함이다. 이 안에 눈이 있는데, 조심스레 가운데를 잘라 보면 화창한 봄날에 선 보일 잎과 꽃들을 가지런히 차곡차곡 포개놓고 있다. 봐도 봐도 감탄하게 되는 질서정연한 수납이다. 나무들은 이렇게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로 겨울을 묵묵히 견디며 봄을 기다린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무들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뭇가지를 보면 가장 최근에 생긴 가지 끝에 가장 큰 겨울눈이 달려있다. 봄이 오면 잎이나 꽃으로 키울 제1 후보 정아(頂芽). 경영에 빗대면 정식 후계자다. 이상한 것은 이 정아의 양 옆에 이보다 작은 옆눈(측아側芽)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건 뭘까? 만에 하나 정아에 일이 생겨 제대로 자라지 못할 경우 그 자리를 승계할 예비 후계자, 즉 세컨드 플랜(Second plan)이다. 보통 하나의 줄기로 곧게 자라는 나무와 달리 중간에 두 갈래나 세 갈래로 갈라져 자라는 나무들이 바로 이런 경우다. 정아에 문제가 생겨 옆눈이 자라난 것이다. 그러면 이 옆눈에도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할까. 꽃샘 추위가 한 번 더 오거나 배고픈 동물이 새순을 뜯어 먹어 버릴 수도 있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해야 할까.

 

나무들은 이런 일을 한두 번 당한 게 아닌 듯 이에 대한 대비책까지 마련해두고 있다. 옆눈 옆에 잠아(潛芽)라고 하는 제3 후보군을 더 작게 준비해놓고 있거나 나무 줄기 껍질 속에 만들어놓고 있다. 이런 걸 다 준비하자면 몇 배의 힘이 들겠지만 삶을 포기한 것보다는 나은 까닭일 것이다. 덕분에 화창한 봄이라는 기회가 어느 날 갑자기 몰려오거나 꽃샘 추위라는 예기치 않은 위기가 닥쳐도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다. 꽃 피는 봄날이란 이런 보이지 않는 숨은 노력들이 밖으로 표출된 날이다. 봄이면 새순과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핀 꽃은 없다.

 

지난 2월 말 봄이 오는 길목에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회장이 미국 ABC뉴스와 눈길을 끄는 인터뷰를 했다. “30년 이상 매년 이탈리아를 방문하면서도 늘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비로소 때가 왔다고 직감했다.” 슐츠 회장은 지난 1983년 이탈리아의 커피 문화를 접한 후 스타벅스를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 하지만 정작 이탈리아에는 진출하지 못했는데 이제 때가 왔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그도 어둠에 쌓인 창 밖을 보며 수없이 흔들리는 마음의 저울을 겪었을 텐데 이제 확실한 감을 잡았다는 말일 것이다. 궁금하다. 그는 어떻게 그걸 포착했고 어떤 준비를 했을까. 그는 새로운 봄을 맞을 수 있을까.

 

 

 

[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4) | 4.10

생사의 조건, 노련함] 노력해야 노련하고, 노련해야 살 수 있다

포식자이건 피포식자이건 상황 판단이 생사 갈라 결정적 순간 위한 준비는 고통스러운 법

 

몽골에서부터 중앙 아시아 초원까지 넓게 퍼져 사는 들쥐의 일종인 마멋은 덩치가 토끼만하다. 하루 종일 허허벌판에서 먹이를 찾아야 하는 매에겐 둘도 없는 사냥감이다. 매는 5.0이나 되는 시력에 송곳 같은 발톱을 갖고 있어 마멋을 발견하는 즉시 그대로 들이치면 될 듯하다. 그러나 이 초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매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급강하할 때 매는 고정되어 있는 한 점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목표를 향해야 한다. 자신이 들이치는 속도와 사냥감이 이동해 가는 속도 및 방향을 감안한 제3의 지점을 덮쳐야 한다. 문제는 이 지점 공략이 어긋날 때다. 평균 시속 240km로 들이치다 보니 맨땅에 발톱이 부딪혀 그대로 부러지기 일쑤다. 힘과 속도가 전부가 아닌 것이다. 마멋이 예상과 달리 다른 곳으로 가버리거나 순발력 있게 그 순간을 피해버릴 때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이곳 매를 보면 발톱이 부러져 있는 경우가 꽤 많다. 이런 매는 결정타가 약해져 살아가기가 그만큼 힘들다. 이런 사고를 피하기 위해 노련한 매는 차별화된 기술을 구사한다. 목표물을 급하게 들이치지 않는다. 신중한 관찰을 통해 타이밍을 잘 설정하는 기술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들이치는 순간이다. 마음이 급한 매는 목표물에 이르는 순간 오로지 두 발을 쭉 뻗는 속도로만 승부를 하려고 하지만 노련한 녀석은 다르다. 순간적으로 왼쪽 발톱을 먼저 내밀어 마멋의 엉덩이 쪽을 툭 잡아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란 마멋이 엉겁결에 몸을 휙 돌리게 되는데, 이럴 때 오른 발톱으로 등을 확 움켜쥔다. 세로로 놓인 마멋을 가로로 놓이게 한 다음 꽉 움켜쥐는 것이다. 묵직한 사냥감이라 두 발로 단단히 잡지 않으면 날아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승리의 법칙 노련함

 

그러면 마멋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는 없는 걸까?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지 않는다면 가능성이 있다. 매는 한쪽만 움켜쥔 채로 날아오르기 힘드니 힘겹게 퍼덕거릴 것이고 움켜쥔 발은 아직 헐거운 상태라 빠져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좀더 노련한 녀석은 한 술 더 떠 근처 덤불이나 키가 큰 풀이 있는 곳으로 매를 끌고 들어간다.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커다란 날개가 상하거나 깃털이 뽑힐 수 있으니 움켜쥔 발톱을 풀 수밖에 없다. 상대가 바라는 대로 해주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 특히 민첩하게 움직여야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에게 꼭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노련함이다. 노련함이란 말 그대로 오랫동안() 갈고 닦은() 경험에서 나오는 능력이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겨도 살아날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에서 매는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능력이 노련함이고, 마멋은 상대가 만들어가려는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 손자병법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승리의 법칙이 여기에도 있다.

 

최선을 다하면 좋은 날이 올 거야.”

악으로 깡으로 버티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실패한 이들에게서 많이 듣는 말이다, 최선을 다해 휴대폰이나 자동차를 만든다고 세계 제일이 될까. 아닐 것이다. 세계 제일이 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개발하는데 최선이라는 의지를 적용해야 한다. 위기가 닥쳤을 때 무조건 악으로 깡으로 버틴다고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닥쳐온 위기를 제대로, 그리고 잘 넘길 수 있는 구체적인 능력이 있을 때 악이나 깡도 효력을 발휘한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사소한 재치가 막연한 의지보다 낫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프리카 남쪽에 사는 미어캣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라이언킹'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아주 수다스럽게 나왔지만 실제로는 귀여운 편이다. 그런데 이들 역시 이곳에 사는 초원수리의 공격을 수시로 받는다. 이럴 때 보통 두 가지로 대응한다. 우선 보초병을 세운다. 언제 어디서든 망을 보는 녀석이 있다. 하지만 초원수리도 만만치 않아서 기민하게 대응한다. 보초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쏜살같이 날아드는 것이다.

 

이 혼비백산의 순간에서 경험이 많은 녀석과 초보가 드러난다. 노련한 녀석은 무조건 도망가지 않고 아주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먼저 상황을 파악한다. 어디로, 어떤 속도로 피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무조건 뛰는 것보다 낫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고, 일단 뛰는 게 급선무라고 먼저 뛰는 녀석은 엉뚱한 곳으로 갈 수 있다. 수시로 비슷한 위기를 당하는 얼룩말이나 사슴에게서도 같은 상황을 볼 수 있는 건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상황 판단에서 살아있음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 어디로든 달아날 수 있는 목표물을 공략해야 하는 사냥꾼에게도 이런 능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호랑이는 대개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다 사슴이 눈에 보이는 순간 득달같이 쫓아가 단번에 성공한다. 밀림의 왕 호랑이답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무엇보다 사냥 성공률이 10%밖에 안 된다. 열 번 쫓아가면 한 번 성공하는 것이다. 달아나는 사슴도 죽기 살기로 뛰니 쉽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 호랑이는 제대로 된 기회를 만들기 위해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여섯 시간까지 사슴을 은밀하게 뒤쫓으며 자신이 바라는 상황을 만든다. 기회는 상황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200kg이 넘는 커다란 덩치가 이만한 시간을 가지고 미행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려 다 된 밥이 어그러질 때도 있고, 나무 위의 원숭이들이 소리를 질러 산통을 깨기도 한다. 사슴 또한 미심쩍은 존재가 계속 따라다닌다는 걸 아는 순간 일제히 경계 경보에 해당하는 소리를 질러 호랑이의 존재를 온 숲에 알린다. 이럴 때 호랑이의 인상적인 연기가 일품이다. 멋쩍은 듯 먼산을 쳐다보며 나는 너희에게 관심 없어라는 척을 한다. 모든 증거가 완연한데도 오리발을 내미는 발 연기. 밀림의 제왕 호랑이도 이렇게까지 노력해야 살아갈 수 있다.

 

호랑이의 사냥성공률 10%

 

왜 이런 능력이 중요할까. 어떤 행동을 언제 어떻게 시작하고 끝내야 할지 아는 게 생존을 좌우하는 까닭이다. 시작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 기다려야 할 때와 뛰쳐나가야 할 때를 아는 것, 이것이 생사를 가른다. 언제 어디서든 가장 위험한 상황은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를 때아닌가. 상황을 잘 알수록 맥을 잘 짚을 수 있고 승부수 또한 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다.

 

세계 최대 초원 중의 하나인 아프리카 동부의 세렝게티 초원에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마라강이 있다. 이 초원에 사는 초식동물이 일 년에 두 번씩 건너야 하는 죽음의 강이다. 수많은 나일악어가 일 년에 두 번뿐인 이 대목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 여정 끝에 강에 도착한 수많은 초식동물은 선뜻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가를 서성댄다. 서성거리다 보면 뒤에서 밀려드는 녀석들 때문에 초만원이 되고 무리는 딜레마에 휩싸인다. 뛰어들자니 위험하고 그대로 기다리자니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온 터라 굶어 죽을 판이다.

 

결정적 순간을 위한 긴 인내

 

그런데 이럴 때 용감하게 강으로 뛰어드는 녀석이 있다. 무리의 우두머리일 수도 있고 용기 있는 녀석일 수도 있고 성질 급한 녀석일 수도 있다. 어쨌든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강에 뛰어들었으니 이제 녀석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을까. 의외로 이런 녀석들이 공격받는 일은 많지 않다. 왜 그럴까? 악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나 저제나 기회를 기다리던 중 가장 먼저 뛰어드는 녀석을 공격한다면 어떨까. 눈앞에서 이 광경을 빤히 보고 있는 수많은 초식동물은 아마 며칠 동안 강을 건널 엄두도 내지 않을 것이고 악어들은 그만큼 굶어야 한다. 다른 곳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 이건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래서 경험 많은 악어는 기다린다. 건너가도 괜찮다는 걸 확인한 얼룩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기다리다 줄지어 건너가는 상황이 되면 그때 중간을 공격한다. 시작해야 할 정확한 타이밍을 잘 만들다 보니 승률이 좋을 수밖에 없다. 우악스럽게 생겼다고 사는 것까지 그렇진 않다. 그러니 2억 년 넘게 살아오고 있을 것이다.

 

악어는 단순히 기다리는 게 아니다. 이 순간을 위해 몇 달 동안 자기네끼리 토너먼트를 치르며 결정적 순간을 준비한다. 토너먼트를 통해 각자 서열에 맞는 자리를 차지한 후 물속 지형을 면밀하게 탐색해둔다. 이 기회를 잘 살려 포식을 하게 되면 6개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되니 이 대목은 중요하다. 그래서 그런지 노련한 녀석일수록 사전 준비에 각별히 공을 들인다.

 

이런 살아있음의 원리는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영하 40~50의 눈보라가 몰아치는 동토의 왕국에서 살아가는 북극곰과 바다표범은 쫓고 쫓기는 관계다. 북극곰은 500kg을 넘나드는 거구이고 상대는 10분의 1밖에 안 되지만 일방적인 승부는 없다. 북극곰은 덩치가 크다 보니 보통 멀리서 신중하게 관찰한 후 한발 한발 조심조심 다가간 다음 이때다 싶은 순간 급습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하지만 바다표범 또한 하도 많이 당해온 터라 열에 아홉은 미리 파놓은 얼음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실패일까?

 

아니다. 1라운드가 끝났을 뿐이다. 바다표범은 포유류라 20~30분마다 한 번씩 밖으로 나와 숨을 쉬어야 하는데, 주변은 온통 얼음이라 숨을 쉴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얼음 구멍뿐이다.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다시 나올 수밖에 없으니 이때부터 2라운드가 시작된다. 북극곰은 얼음 구멍 옆에서 숨 죽인 채 기다린다. 언젠가는 나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얼음 구멍이 한두 개가 아니다. 보통은 서너 개, 많게는 10개가 넘는 얼음 구멍이 있다. 바다표범이 만들어 놓은 숨구멍이다. 이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바닷속으로 들어간 바다표범이 어디로 나올지 어떻게 알겠는가. 구멍이 3개라면 곰에게는 33%의 가능성이 있지만 10개라면 가능성은 10%밖에 안 된다. 그래도 곰은 이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기다려야 한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 예민한 바다표범은 그 진동을 감지할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보통 한두 시간, 많게는 서너 시간 동안 언제든 덮칠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언제 올지 모르는 희망이 불쑥 솟아나오기를 꼼짝없이 응시하고 있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한 준비는 언제나 길고 고통스러운 인내다.

 

노련함으로 가는 길

 

바닷속으로 피한 바다표범은 어떨까. 녀석 또한 전전긍긍일 수밖에 없다. 20~30분마다 한 번씩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어느 구멍 옆에 북극곰이 발톱을 세우며 기다리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저 자기가 파놓은 구멍 중 하나를 임의로 선택할 수밖에 없고, 그때마다 그 선택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 순간 녀석의 목숨은 평소에 얼마나 구멍을 많이 뚫어 놓았느냐가 좌우한다. 많이 뚫어 놓을수록 녀석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커지고 북극곰의 성공률은 반대로 적어진다. 하지만 보통 두께가 50cm가 넘는 얼음에 구멍을 뚫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다 뚫어 놓았다고 해도 금방 다시 얼어버리기 때문에 많은 구멍을 얼지 않은 상태로 관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곰이 안 올 수도 있으니 안 해도 되겠지하는 생각과도 싸워야 한다. 평소에 어떤 노력을 했느냐가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교토삼굴(狡兎三窟), 노련한 토끼는 굴을 세 개 만든다는데, 바다표범은 그 세배 이상의 노력을 해야 내일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커진다.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생명체에게 한없이 차갑고 가혹한 세상의 특성은 북극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노련한 곰은 기다리던 희망이 다른 곳으로 올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노련한 바다표범 또한 자신이 선택한 곳에서 불행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아니까 더 노력하는 것이고, 미리 노력하는 것이다.

 

얼마 전 사업을 시작한 지 35년이 되었다는 한 사장의 뜬금없는 푸념을 들었다. “이 나이가 되었는데도 왜 사업을 하는 게 익숙해지지 않을까?” 항상 지나고 나서야 왜 더 잘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든다는 것이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역시 변화무쌍한 사업을 하는 데 어찌 익숙해질 수 있을까. 어제 하던 일을 오늘도 하고, 오늘 하는 일을 내일도 하는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게 사업이다 보니 푸념이 나올 수밖에 없고 노련함에 대한 마음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안이 될까 싶어 자연의 노련함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살아가는 일이 다 똑같군요!” 그렇다. 어디서든 노련함으로 가는 길은 하나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노련해질 수 있다.

 

 

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5) |

철학이 늑대를 만났을 때] 늑대와 춤을 출 준비가 돼있는가?

어느 날 지역 생활정보지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이런 문구를 봤다면 어떨까. ‘96% 늑대 분양’.

 

늑대? 아마 키우겠다는 생각은 안 할지라도 눈길이 한동안 머물 것이다. 그런데 이 문구를 보자마자 당장 달려가 집안에 들여놓은 사람이 있었다. 생후 6주라는 새끼 늑대의 순혈도가 사실은 96%가 아니라 100%라는 말이 호기심을 더 증폭시켰다. 녀석의 부모는 알래스카와 그 아래쪽의 툰드라 지대에서 자란 늑대들이었고 96%라는 수치는 정부에서 그 이상의 순혈 늑대를 팔지 못하게 한 것 때문이었다.

 

‘100% 순혈 늑대라.’ 어릴 적부터 덩치가 산만한 개들과 뒹굴며 자라온 터라 낯설지는 않았지만 궁금했다. 늑대는 어떤 녀석이고 늑대와 함께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궁금증이 현실화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녀석은 집에 도착한 지 2분 만에 거실의 커튼을 몽땅 잡아당겨 바닥에 좍 늘어놓았다. 망가진 커튼을 수습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더 큰 사고를 쳤다. 에어컨과 실외기를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관을 몽땅 물어뜯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게 뭔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야생의 본성을 즉시 실천했던 것이다. 그렇게 만난 지 한 시간 만에 녀석은 120여 만원(1000달러)이나 되는 거금을 쏟아 붓게 만들었다. 500달러는 자신의 몸값으로, 나머지 500달러는 에어컨을 고치는 수리비로. 물론 녀석의 정체성 드러내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호기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이 되었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개들과는 차원이 다른 게 분명했다. 이 녀석과 어떤 관계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빨리 설정해야 했다.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대를 18개월 만에 졸업하고 미국 앨라배마대 철학 교수로 부임한 마크 롤랜즈는 혼자 사는 적적함을 달래려다 생각지도 않은 늑대를 만났다.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깨달았듯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문명의 상징인 철학이 거친 야생의 상징인 늑대를 초대한 것이니 말이다. 어느 날, 촉망 받는 철학자의 삶에 들어온 야생의 늑대와의 만남, 철학이 늑대를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음 보는 순간 새끼 사자처럼 생겼다는 생각에 브레닌‘(brenin)’이라는 이름을 선사했는데 녀석은 딱 그대로 행동했다. 브레닌은 영국 웨일즈 말로 이라는 뜻인데, 진짜 사고뭉치 왕이 되었다. 녀석은 야생에서 살아온 존재의 후손답게 지루한 걸 참지 못했다. 집에 놓고 외출하는 순간 집안은 녀석의 호기심 천국이 되었고 곧 엉망진창이 되었다. 뭐든지 물어뜯어 어질러놓아 남아나는 게 없었다. 당연히 함께 살기 위한 제1 규칙을 서둘러 정해야 했다. ‘항상 어디든 같이 다닐 것!’

 

순혈 늑대를 길들인 철학자

 

어린 새끼 늑대. 귀여운 모습 속에 굴복시킬 수 없는 야성이 숨어 있다.

 

한눈에 봐도 보통 개와 다르게 보이는 녀석을 사람들에게 좀 특별한 혈통의 개라고 소개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강의할 때 강의실 한쪽에 조용히 엎드려 있어야 하는 것 같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규칙을 익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늑대는 웬만한 조련사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만큼 길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녀석들이었다. 그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어린 시절 자기보다 더 덩치가 큰 개들과 같이 살아본 경험으로 말이다. 하지만 녀석은 그동안 경험했던 개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우선 녀석은 지프 뒷좌석 자기 자리에 누워 편히 잠을 잘 수도 있었지만 절대 눕는 법이 없었다. 1300km나 되는 장거리 출장에서도 항상 창 밖을 주시했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야생에서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어떻게 눈 감고 편히 잘 수 있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녀석은 또 강아지처럼 사람을 따르는 편이 아니었다. 애교 같은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예를 들어 개가 보는 앞에서 나무 막대기를 저 멀리 던지면 개는 신이 나서 물어온다. 하다가 그만두면 더 하자고 졸라댈 만큼 사족을 못 쓴다. 뭐든 더 시키라고 보채기까지 한다. 녀석은 달랐다. 막대기를 저만큼 던져주면 그를 이상하게 보곤 했다. 마치 이런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어오라고요? 왜요? 필요하면 직접 가져올 것이지 왜 나를 시켜요? 다시 가져오게 할 거면 애당초 왜 던졌어요?’

 

녀석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자기 생각이 있었다. 당연히 길들이는 법도 달라야 했다. 그는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의미를 준 이 과정을 [철학자와 늑대]라는 책으로 남겼는데 사실이 책은 다른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누누이 말하듯 앞으로는 늑대 같은 조직, 늑대 같은 인재가 필요한데 알다시피 이런 야성적 인재들은 조직 친화적이 아니다. 새끼 늑대 브레닌이 문명을 낯설어 하듯 이들은 구획되고 위계서열 가득한 문화에 숨막혀 한다. 남다른 일을 알아서 해내고, 그러기 위해 모험적이며 끈질기고 강력한 힘을 가진 이들은 결국 떠나버리고 만다. 바로 이런 문제, 그러니까 늑대 같은 인재를 어떻게 조직에 적응시켜야 하는가 하는 과정이 이 책에 있다.

 

젊은 철학자가 늑대와의 접점을 만들어갈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녀석에게 다가가는 방식, 즉 마음가짐에 있었다. 요즘 개를 키우는 사람이 많은데 조금이라도 말을 듣지 않는다 싶으면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거야?’ 하는 식으로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명령하고 너는 따라야 한다는 이런 방식은 상대의 굴복을 전제한다. 누가 굴복을 원할까. 아무리 상대가 개라고 해도 이런 방식은 악화된 관계를 만들어, 좋은 성향을 갖게 하기 힘들다. 성공한다 해도 기계적인 지배-복종관계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 창의가 필요한 순간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너무 흔한 보상과 칭찬도 마찬가지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예쁘다” “잘했어하면서 맛있는 걸 무작정 주고 칭찬을 남발하면 개는 으레 그러려니 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보상이 주어지는데 왜 애써 뭔가를 하겠는가? 안 한다. 더구나 먹이보다 흥미로운 게 나타나면 그쪽으로 가버린다. 어떻게든 좋을 걸 주려고 하고 칭찬하는 사람이 은혜도 모른다고 화를 낼 만하다. 사실은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면서도 그걸 모르니 개를 탓하고 화를 낸다.

 

롤랜즈는 다르게, 그러니까 늑대의 관점에서 시작했다. 저 녀석은 왜 내 말을 들어야 할까? 왜 훈련을 받아야 할까? 주인이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이 상황을, 아니 이 상황이 최선이라는 걸 받아들여 이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걸 이해시키려고 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새끼 늑대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그는 세상이 녀석에게 뭘 원하는지 알려주는 걸 자신의 역할로 삼았다. 녀석이 살아가야 할 곳은 야생이 아니라 생존의 법칙이 완전히 다른 인간 사회라고 말이다. 훈련이라는 것은 굴복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게 아닌가?

 

지배-복종프레임 아닌 늑대의 관점에서 접근

 

청년 스티브 잡스는 조직에 순응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 늑대 같은 존재였다.

이 과정에서 깨달은 게 있었다. 개들과 다른 늑대에게는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방식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들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활용하기도 하지만 늑대는 그렇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문이 닫혀 있으면 개들은 사람을 쳐다본다. 문을 열어달라는 것이다. 자꾸 쳐다보는데도 자신을 봐주지 않으면 짖거나 다가가 옷을 물어 당겨서라도 주의를 끈다. 이뿐인가. 개는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 인간의 표정을 읽는다. 사람이 부르면 개는 자신을 부르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을 보고 그게 뭘 의미하는지 해석한다.

 

늑대는 달랐다. 사람의 표정을 읽을 줄도 몰랐고 읽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야생에서는 그런 게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늑대를 훈련시키는 방법은 하나였다. 녀석에게 뭐가 필요한지 그들의 언어와 방식으로 알려주어야 했다. 예를 들어 다른 개들과 마주쳤을 때 공격적인 상황이 조성될 때가 있다. 이럴 때 보통 개들이라면 말로 하거나 목줄을 잡아당기면 된다. 하지만 녀석에게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목덜미를 양손으로 쥐고 고개를 들어올려 시선을 자신에게 맞추게 하는 것이다. 야생의 늑대 무리에서 이건 확실한 언어다. ‘하지 말라. 정 하려면 나하고 하라!’ 우두머리가 하지 말라는데 하는 건 우두머리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즉시 멈춘다.

 

물론 아는 것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녀석을 이끌려면 실제로 우두머리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 헬스장에 가서 피나는 운동을 해야 했다. 2년 만에 어깨 높이가 90cm 가까이 되고 몸무게가 70kg 가까이 나가는 녀석을 힘으로 통제하는 우두머리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였다. 이런 녀석에게도 목줄과 같은 통제수단이 필요했을까? 물론이었다. , 복종을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효과적인 통제와 정확한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쪽으로 가야 하는데 저쪽으로 가려고 하면 목줄로 잡아당겼고 앞서서 걸으면 무릎으로 옆구리를 툭 쳤다. 야생에서 이것은 구성원이 우두머리에게 지켜야 하는 예의. 상황을 판단하고 무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보스의 고유 역할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보스가 그런 것처럼 어떤 감정도 담지 않았다. 조용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차분하고 단호하게 녀석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쳤다.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먼저 보였다. 녀석은 그럴 때마다 어떻게든 자기 방식으로 행동하려고 했지만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본 결과 협조하는 게 가장 좋다는 걸 알고는 순순히 따랐다.

 

늑대 같았던 청년 잡스와 그를 알아본 부쉬넬

 

마크 롤렌즈가 쓴 <철학자와 늑대> 원서.

 

그 순간 둘을 강제적으로 연결하는 목줄은 더 이상 필요성을 잃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확실하게 알았는데 왜 그게 필요하겠는가. 야생의 무리에서 늑대들은 상대를 속이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규율을 지키면 그 외에는 자유다. 롤랜즈는 조련사들조차 포기하는 진짜 늑대와 11년을 같이 살았지만 한 번도 소리를 치거나 때린 적이 없었다(녀석은 천수를 누리고 떠났다). 이뿐인가. ‘지배-복종이 아니라 삶을 공유하고 교감하는 관계를 만든 덕분에 녀석의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야성적 사고의 진수를 배울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철학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었다.

 

이제 세상은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다. 많은 첨단기술이 우리의 눈을 현혹하지만 이 물결의 핵심은 사람이다. 불확실성 속에서 남다른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조직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사람은 이런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야성적 사고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가진 인재는 조직에 순응적이지 않다. 그러니 조직을 미래로 이끌어가는 리더는 어떻게든 이런 이질적 인재를 품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찾아내야 한다.

 

언젠가 웬 히피 같은 복장을 한 젊은이가 제법 규모가 큰 게임회사를 찾아와 일을 하겠다고 했다. 인사 담당자의 대답은? 말할 것도 없이 (No)’였다. 그런데도 떼를 쓰며 소란을 피우자 이를 본 사장이 한 번 해보라며 말단 기술직으로 채용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출근 첫날부터 문제를 일으켰다. 회사에서 자겠다는 것이었다. 보안 책임자의 대답은? “규정이라 안된다!” (No)였다. 하지만 사장은 규정을 바꿔 그렇게 하게 했다.

 

2년 후 이 회사는 그가 만든 히트제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고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이제는 전설이 된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다. 무작정 찾아와 떼를 쓴 야성적 인재를 알아본 잡스의 첫 보스 놀란 부쉬넬은 “(잡스의) 눈이 달랐다고 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일하도록 해주었고 덕분에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혹시 우리 조직에 이런 인재들을 끌어오려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 진짜 늑대를 키워 본 철학자가 한 애정 어린 충고가 있다. “녀석들은 개와 다르다. 그래도 정 키워야겠다면 그때부터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변해야 늑대와 함께 춤을출 수 있다는 말이다.

 

박스기사] 개와 늑대, 누가 더 똑똑할까? | 불확실한 상황에선 늑대가 해결 능력 뛰어나

유전적으로 사촌인 개와 늑대. 개는 인간과 함께 살아오고 있고 늑대는 야생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누가 더 똑똑할까? 많은 연구에 의하면 이런 질문은 사자와 악어 중 누가 이길까, 하는 것과 같다. 사자와 악어의 싸움은 어디서 싸우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물에서 싸우면 악어가 이기고 뭍에서 싸우면 사자가 이긴다. 개와 늑대도 마찬가지다. 똑똑한 분야가 서로 다르다. 개는 사람과 함께 살아왔기에 정해진 상황이나 지시를 수행하는데 뛰어나다. 막대기 던지기 놀이처럼 말이다. 그렇게 훈련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개는 가장 먼저 사람을 쳐다본다. 주인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 위함이다. 반면에 늑대는 야생에서 살아왔기에 불확실한 상황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뛰어나다. 야생에서는 아무도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6) | 17.5.8

꿀벌의 민주적 의사결정] 1억 년을 버틴 집단지능의 힘

여왕벌은 군림하지 않고 집단 운영 체제 유지... 개방적이고 공정한 경쟁 통해 가장 좋은 결정 내려

 

육지에서 가장 덩치가 큰 동물은 코끼리다. 그 중에서도 아프리카 코끼리 수컷은 5t이나 나간다. 덩치가 클수록 짝짓기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포식자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기에 가능한 한 덩치를 키우는 쪽으로 진화를 해온 덕분이다. 초원의 제왕인 사자도 슬슬 피할 뿐 덤비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이 코끼리들이 아주 무서워하는 존재가 있다. 덩치로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꿀벌들이다. 웬만한 크기의 아카시아 나무를 무 뽑아내듯 하는 게 코끼리들이지만 그 나무에 벌집이 있다 싶으면 건드리지 않는다. 벌집이 비었든 아니든 무조건 피하고 본다. 영국의 생물학자 루시 킹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코끼리들은 벌들이 내는 붕붕소리만 들어도 줄행랑을 친다. 달리면서 주변 코끼리들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경고까지 한다. 사자도 어쩌지 못하는 코끼리들의 취약 부위인 눈, 코 뒤, 귀밑 등을 사정없이, 그것도 죽을 때까지 끈질기게 공격하니 그 큰 덩치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걸 잘 아는 까닭이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이런 생존력은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와 같다. 사실 우리도 가능하면 벌통을 건드리지 않지 않는가? 꿀벌의 이런 능력은 물론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닐 것이다. 꿀벌의 기원을 아주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무려 1억 년 전, 그러니까 공룡들이 이 지구를 어슬렁거리던 시절까지 간다. ‘내력 있는 가문이라는 건데, 생태계에서 한 종이 이렇게 오랫동안, 그것도 번성한 상태로 살아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지시하고 통제하는 존재 없이 상호 소통

꿀벌 집단은 거의 대부분 한 여왕벌과 일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벌들은 모두 여왕의 딸이자 서로는 자매들이다. 그러니까 모두 한 가족인 혈연사회다. 그래서 기계적일 정도로 헌신적인 협력을 이뤄내는 걸까.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맞지만 전부는 아니다. 많은 연구에 의하면 꿀벌의 헌신적인 협력에는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이 한 몫 한다. 민주적 의사결정이라고? 가장 똑똑하다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도 아직 완전히 해내지 못하고 있는 걸 이 작은 꿀벌들이 하고 있다는 말인가?

 

일단 답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그것도 아주 효과적인 직접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집단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내린다. 꿀벌 공동체의 운영 방식은 인간과는 다르다. 여왕벌은 필수 존재지만 통치하지 않는다. 여왕벌이 하는 일은 한 가지, 쉴 새 없이 알을 낳아 개체 수를 늘리는 일이다. 권한이 많은 것도 아니다. 페로몬을 뿌려 다른 일벌들이 알을 낳지 못하게 할 뿐인데 이유일한 권한은 각각 다른 후손을 만들어낼 경우 집단의 분열이 생기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알 낳는 일이 쉬운 건 아니다. 하루 1500개에서 2000개나 되는 알을 낳아야 하는데 이건 암탉이 하루 50개의 알을 낳는 것과 같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일이다. 그 외의 집단 운영은 모든 일벌들이 알아서 꾸려간다. 역할 분담이 확실하다. 지시하고 통제하는 존재 없이 상호 소통을 통해 집단을 운영한다.

 

그런데 1년에 서너 번 정도 꿀벌 집단엔 커다란 구조조정의 바람이 몰아친다. 여왕벌이 쉴 새 없이 알을 낳다 보니 개체 수가 너무 많아져 집단을 분리(분봉)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지시하고 통제하는 존재가 없는데 누가 떠나고 누가 남을까? 사실 꿀벌들에게도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많은 연구 결과 분가해 새로운 곳에 정착한 꿀벌들은 그 중 75~76%가 겨울이 끝나기 전 죽는다. 반면 기존 벌집에 남아있는 꿀벌의 80%는 살아남는다. 분가한 꿀벌의 사망률이 높은 건 대개 식량 때문인데 거주지를 옮기느라 식량 비축을 많이 못하는 탓이다. 그러니까 떠나는 게 아주 위험하다는 얘긴데 누가 떠날까? 아직까지 떠나는 일벌과 남는 일벌이 어떻게 가려지는 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떤 여왕이 떠나는 지는 밝혀졌다. 꿀벌 집단엔 여왕이 필수이니 기존의 여왕이 떠나든가, 아니면 새로 옹립되는 여왕이 떠나든가 해야 한다. 누가 떠날까?

 

우리들의 상식으로 보면 아마 새로운 여왕이 아닐까 싶다. ‘새로운 곳으로 가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라!’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꿀벌들의 세상에서는 반대다. 오랜 터전을 새로운 여왕에게 주고 기존의 여왕이 떠난다. 아마 새 여왕보다는 세상 경험이 있는 기존의 여왕이 떠나는 것이 전체 종의 생존 차원에서 더 바람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여왕은 구성원의 3분의 2(보통 수천~1만여 마리)을 데리고 어느 날 일제히 정든 터전을 날아오른다. 다 같이 날아올라 근처에 모인 벌들은 이제 정말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새로운 터전을 구하는 일이다. 무리 없이 구한다 해도 구성원의 75%가 죽을 정도니 새로운 거주지 선정은 집단의 생존에 절대적인데 어떻게 할까? 여기에 꿀벌 지혜의 진수가 있다.

 

 

새로운 터전 정하기 위한 치열한 과정

 

새로운 터전 구하기는 먼저 정찰벌들의 주변 지형 탐색으로 시작한다. 우리로 치면 나이가 많아 경험 많은 일벌이 주로 탐색에 나서는데 미국 코넬대 토머스 실리 교수에 의하면 꿀벌들이 선호하는 집터가 있다. 지상으로부터 약 6.5m 정도 되는 높이에 있는 나무 구멍이 그곳인데 내부 크기가 높이 150cm, 지름 20cm쯤 되면 적격이다(양봉 벌통보다 약간 작다). 무엇보다 구멍 내부는 좀 작더라도 입구가 좁아야 한다. 그래야 포식자들을 막기 쉽다. 6.5m의 높이 또한 이쯤 되어야 쉽게 발견되지 않는 까닭이다. 오랜 세월 살아오며 터득한 지혜일 텐데 편리함보다는 안전 중시를 우선한다. 햇빛이 잘 비치는 남향도 필수다. 추운 날 에너지를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찰벌들은 괜찮은 곳이라고 여겨지면 마치 처음 집을 마련하는 사람처럼 구멍 안으로 들어가 샅샅이 조사한다.

 

수백 마리의 정찰벌들이 주변 5km 정도를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탐색을 시작한 지 몇 시간쯤 지나면 돌아온 정찰벌들의 보고가 시작된다. 보고는 춤으로 이루어진다. 춤이 그들의 언어인 까닭이다. 정찰벌들은 이제는 유명한 ‘8자 춤으로 자신이 적당한 후보지를 발견했다는 걸 알린다. 8자 춤이란 꿀이 있는 꽃이나 새로운 거주지를 발견한 벌들이 이를 동료에게 알리기 위해 숫자 8과 같은 모양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추는 춤이다. 물론 단순한 춤이 아니다. 춤에는 적당한 후보지가 어디에 있는지(방향),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거리), 그리고 얼마나 좋은지(적합도) 같은 정보가 들어있다.

 

문제는 다들 자기가 발견한 곳이 괜찮은 곳이라고 내세운다는 점이다. 당연히 정찰벌들 사이에 경쟁 오디션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보통 10~20개의 후보지들이 치열하게 경쟁한다(관찰 사례 중에는 많게는 34개의 후보지가 나온 경우도 있었다). 정찰벌들은 확신이 있을수록 더 강하고 빠르게, 그리고 더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마치 대선 주자들이 열변을 토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열정이 투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꿀벌 집단엔 한바탕 춤 잔치가 벌어진다. 자신이 발견한 곳이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정찰벌의 열정확신을 지지하는 벌들이 그 춤 대열에 합류하는 까닭이다. 인상적인 건 춤으로만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춤이 가리키는 현장을 직접 가 보고 난 후 지지를 결정한다. 그 누구도 강제하지 않고 반대 의견을 억누르는 일도 없다. 오로지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온몸으로 투표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시간이 갈수록 중구난방인 듯하던 혼란에서 조금씩 질서가 생겨난다. 괜찮은 후보지를 주장하는 춤에는 갈수록 지지자가 늘어나는 반면 그렇지 않은 곳의 지지자는 줄어들다가 없어진다. 되는 쪽으로 몰아준다.

 

물론 순탄한 과정만 있는 건 아니다. 첫날 열 개가 넘는 후보지 중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선택된 듯 보였던 곳도 다음날 강력한 후보지가 나타나면 뒤집힐 수 있다. 결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더 좋은 곳을 결정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지 판도가 변하면 지지자가 줄어든 쪽은 조금 더 좋다고 판단되는 쪽으로 합류한다. 이 과정에 벌들의 또 다른 지혜가 있다. 초기에 한 후보지를 강하게 주장했던 정찰벌이나 열광적인 최초의 지지자들이 일정 시점이 지나면 차례로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오전 10시에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던 벌들은 오후 1시면 물러나고, 오후 1시에 그런 벌들은 오후 4시쯤 그렇게 한다. 왜 그럴까? 아마 이들이 2선으로 물러날수록 합의에 이르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지지자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꿀벌들은 이런 과정을 몇 시간씩, 아니 며칠씩 하면서 결국 후보지를 하나로 좁혀간다. 격렬한 토의를 방불케 하는 이 과정은 길게는 4일 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끝장 토론인 셈이다. 그렇게 모두가 참여하는 만장일치를 만들어낸다. 여왕벌은 그 어떤 간여도 하지 않으며 모든 꿀벌은 오로지 자유 의사에 따라 소신 있게 투표한다.

 

물론 항상 만장일치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마르틴 린다우어가 관찰한 17개 꿀벌 집단 중 합의에 이르지 못한 집단은 2개였다. 지지자들이 딱 절반 정도로 나뉘는 바람에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 중 한 집단의 벌들은 끝까지 의견 일치가 되지 않자 각자 두 무리로 나뉘어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는 실력 행사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의 비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왕벌을 모셔가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100m쯤 갔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150m를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공방을 계속했지만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이러는 동안 여왕벌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결국 꿀벌들은 다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대부분의 꿀벌은 이 과정을 거쳐 대체로 가장 적합한 거주지를 선택한다. 모두가 참여해서 가장 좋은 가능성을 찾아내는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최선의 선택을 만들어낸다. 요즘 갈수록 중시되는 집단 지능의 많은 사례이자 꿀벌들이 지금까지 오랜 시간 번성하고 있는 비결 중의 하나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들에는 이유가 없는 게 없다. 꿀벌의 만장일치 의사결정 시스템도 효과가 없었다면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이다. 꿀벌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신이 보낸 전령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우리에게 뭘 알려주고 있을까. 모든 생명체는 자신이 선택한 행동을 가장 활동적으로 실행한다. 집단의 구성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선택이 집단의 선택이 되는 참여도가 높을수록 헌신도 또한 비례한다. 직접 민주주의가 효과적인 이유다. 꿀벌들은 이걸 이미 오래전에 터득해 본능적으로 실행할 정도로 시스템화하고 있다. 토머스 실리 교수의 표현을 빌면 개체들에게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모두 활용, 개방적이고 공정한 경쟁을통해 가장 좋은 결정을 내린다. 우리 회사, 우리 사회는 어떨까? 모두를 위하고 모두의 헌신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통해 최선의 선택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박스기사] 꿀벌 방식을 택한 미 항공우주국(NASA) - 올바른 선택엔 올바른 과정이 있다

 

디스커버리호.

20092월 초,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발사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설왕설래를 하고 있었다. 원래 발사일은 219. 그러나 연료 공급 밸브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버렸다. 강행했다가 챌린저 호 폭발 사고 같은 참사가 일어나면 어쩔 것인가?

 

비행검토팀은 안전 발사를 위해 3단계의 과정을 시작했다. 우선 50개의 소규모 팀이 분야별 회의를 통해 모든 잠재적 문제를 찾아내기로 했다. 그런 다음 경험 많은 전직 직원들까지 150명이 넘는 관계자들이 모여 전체 회의를 열었다. 이 과정을 주도한 우주사업본부장 빌 거스턴마이어는 기술적 결함이라는 불확실성을 자유로운 논의라는 개방성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모두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했고 회의가 지루할 정도로 이어져도 중단시키거나 시간 걱정을 하는 행동으로 심리적 압박을 주지 않았다. 물론 발사 일정이 여유로운 건 절대 아니었다.

 

만족할 만한 결정이 나오지 않자 거스턴 마이어는 원점에서, 그러니까 1단계로 돌아가 모든 과정을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1000명이나 되는 팀원들이 모든 사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다행히 결함 가능성을 정확하게 테스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덕분에 세 번째 전체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발사일자를 결정할 수 있었다. 디스커버리호는 2009315일 멋진 불꽃을 내뿜으며 무사히 우주로 날아갔다. 챌린저호 폭발 사건 후 기술 결함만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의 결함을 고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결과 도입한 의사결정 과정 덕분이었다.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얼굴을 맞대고, 직급에 상관없이 의견을 나누도록 했던 것이다.

 

꿀벌 집단과 나사의 의사결정이 묘하게 닮은 게 우연일까? 꿀벌은 꿀벌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각자 더 나은 걸 찾은 건데 결국 같은 답을 찾은 이런 사례를 생물학에서는 수렴진화라고 한다. 올바른 선택을 위한 올바른 과정이 분명 있다는 방증이다 

01. So Deep Is The Night - Lesley Garrett

02. Walk Away Renee - Jim Wilson

03. Chagall Duet - Jon Anderson

04. La Sete Di Vivere - Alessandro Safina

05. Naturaleza Muerta - Mario Frangoulis

06. L'amour De Moi - Mediaeva Baebes

07. The Best Of Me - Deborah Sas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