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위해 친구의 죽음을 이용했던 남자 416 미디어오늘
[프레임 전쟁] 1화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청년들의 사회변혁 열망을 “운동권의 자살방조” 사건으로 덮다
“사건번호 2014도2946 피고인 강기훈. 검사 상고를 기각한다.”
저 한마디를 듣기 위해 싸웠던 시간이 24년이었다. 사법부의 치욕이자 언론의 치욕으로 남은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그렇게 허탈한 마침표를 찍었다. 강기훈은 대법원 무죄확정판결이 난 2015년 5월14일 언론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1991년 사건 당시 그를 취재했던 김의겸 한겨레 기자가 강기훈에게 전화를 걸어 왜 안 나왔는지 물었다. “그냥…들러리 서기 싫어서….” 1991년 5월 김의겸 기자와 인터뷰에서 “승리는 진실로 무장하고 있는 우리의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던 이 청년은 이제 간암투병으로 쇠약해진 중년이 됐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체제는 역설적으로 반동적인 노태우정부와 함께 시작했다. 노동운동·통일운동진영이 노태우정부의 폭압에 맞서 연일 투쟁수위를 높여가고 있던 1991년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백골단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했다. 공권력의 과잉진압은 전국적 분노를 일으켰다. 대학생들이 연달아 분신했다. 6월29일까지 스스로 목숨을 던진 이만 13명이었다. 노태우정부 반대시위는 87년 이후 최대 규모로 이뤄졌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있었다. 노태우정부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 국면을 떠올리며 노심초사했다.
▲ 1991년 5웡5일자 조선일보 김지하 칼럼.
그 때 조선일보와 시인 김지하는 구원투수처럼 등장했다. 시인 김지하는 5월5일자 조선일보 1면 칼럼을 통해 “젊은 벗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고 외쳤다. 이 시인은 “그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출발점”이라고 강조하며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 열사호칭과 대규모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군부독재와 싸웠던 시인의 칼럼은 역설적으로 노태우정부의 다급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5월8일 오전 8시쯤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몸에 불을 붙인 뒤 노태우 퇴진을 외치고 투신했다. 옥상에선 유서 두 장이 발견됐다. 동아일보는 사건을 목격한 서강대생 증언을 토대로 “어떤 사람이 갑자기 옥상위에서 혼자 팔을 치켜들고 구호를 외친 뒤 갖고 있던 라이터로 온 몸에 불을 붙이고 곧바로 뛰어내렸다”고 보도했다. 검찰은 준비나 한 듯이 이 사건이 계획됐다는 프레임을 곧바로 들고 나왔다. 김지하 칼럼이 운동권의 비인간성을 주장하는 선언이었다면, 검찰수사는 선언을 뒷받침하는 과정이었다.
조선일보는 5월9일 지면에서 “강경대군 치사사건 이후 일어난 4건의 연쇄분신사건이 방법이 유사하고 호남-영남-경기-서울 분포를 이루고 있다”고 전하며 “검찰이 분신사건에 적극적으로 수사에 착수한 것은 이들 분신사건이 우발적이라기보다 계획적일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보도했다. 물론 조선일보는 “검찰이 분신사건의 계획성에 수사의 초점을 맞출 경우 운동권을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자초할 소지도 크다”고 덧붙이며 검찰의 의도 또한 눈치 채고 있었다.
정구영 검찰총장 등 검찰 관계자는 5월8일 기자들과 만나 이 사건이 계획적일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한겨레 5월9일자 지면에서 대검 관계자는 “시위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운동권에서 내부적으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자살을 기도한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8일 박홍 서강대 총장의 발언과 묘하게 이어졌다. 박홍은 “우리 사회에 죽음을 선동·이용하는 반생명적 세력이 분명히 있다”며 “이 세력의 정체를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홍은 끝내 배후세력에 대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론은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썼다. 조선일보는 5월10일자 사설에서 “교육자다운 용기 있는 발언”이라며 박홍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 당시 언론보도.
제도언론은 검찰발 기사 쓰기에 급급했다. 5월9일자 조선일보는 <분신현장 2~3명 있었다 : 목격교수 진술, 검찰 자살 방조 여부 조사>기사를 실었다. 그런데 같은 날 동아일보에는 <옥상엔 혼자 있었다 : 서강대 운전사 경찰에 밝혀, 목격 교수들 “2~3명 있었다고 말한 적 없다”>라는 정반대의 기사가 실렸다. 바로 다음날인 10일자에서 조선일보는 문제의 목격교수인 윤여덕 서강대 교수의 반박을 담았다. 윤 교수는 맞은 편 본관 옥상에서 흰 점퍼자림의 누군가를 봤는데 정황상 사건 직후 옥상에 올라가 상황을 살펴본 서강대생들이었다. 검찰 주장을 철썩 같이 믿었던 조선일보가 망신을 당했다.
하지만 대다수 언론은 검찰 뜻대로 움직였다. 박홍 발언에 무게감을 얹고 사건에 미스터리를 주입하는 식이었다. 예로 5월9일자 중앙일보는 “분신직후 다른 사람이 즉시 유서를 공개하거나 현장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본관 5층 옥상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전날 저녁부터 잠겨있었음에도 외부인인 김씨가 올라갈 수 있었다”며 외부인의 ‘조력’ 가능성을 강조했고, 박홍 총장의 발언에 대해선 “검찰은 사회민주화에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진보적 지식인 박 총장이 자칫 재야운동권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민감한 발언을 한데 대해 주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남대생 윤용하는 김기설에 이어 5월10일 분신을 시도하며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누가 분신을 배후조종한단 말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그 누가 버리라고 한단 말인가.” 잇따른 청년들의 죽음은 노태우정부에 의한 엄연한 타살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국면을 자살방조사건으로 몰고 가며 운동권의 메시지를 패륜으로 덮어버리려 했던 노태우정부는 서서히 안도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내놓은 카드는 ‘유서 대필’이었다.
국민일보는 5월18일자 지면에서 “검찰은 김씨가 남긴 유서 필적이 자필과 다른 사실을 밝혀내 유서를 대신 써준 사람을 찾아내는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계일보는 5월19일자 지면에서 “검찰이 자살방조혐의의 유력한 용의자로 전민련간부를 지목하고 신병확보에 나선 것은 잇따른 분신사건에 배후세력이 있다는 가설을 입증해주는 것이어서 전율을 느끼게 한다”고 보도했다. 언론은 이 소설 같은 상황에 깊이 몰입했다. 전민련측 반박은 검찰 주장과 비교할 수 없이 작게 처리됐다.
▲ 1991년 5월, 강기훈씨(가운데)가 유서대필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필체를 보여주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조선일보는 19일 미국 뉴욕타임스에 한국의 연쇄자살 사건이 크게 실렸다며 기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요지는 이랬다. “젊은이들의 자살이 그 어떤 경로를 통해 중앙에서 명령을 받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으며 일부 사람들은 이 지령이 실의에 빠지고 고립된 북한으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은밀히 암시하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지령이 운동이 점점 무력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급진주의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사보다 창작에 가까운 대목이었다. 조선일보는 뉴욕타임스의 권위를 빌려 독자를 흔들었다.
이 신문은 “만약 자살의 의도가 87년처럼 한국의 중간계층을 다시 한 번 거리에 끌어들여 급진파 학생들의 말처럼 전정권보다 나을 것이 없는 정부를 쓰러뜨리는데 있다면 자살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노정권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안전한듯해 보인다”고 전했다. 너희가 아무리 목숨을 바치더라도 노태우정부는 안전하다고, 언론이 대신 대변한 꼴이었다. 당시 언론사가운데 오직 한겨레만이 검찰발 주장을 반박하며 강기훈측 주장을 중점적으로 보도했다.
검찰은 박홍 기자회견 사흘 뒤인 5월11일 김기설 필적이 있는 업무일지 제출을 전민련 측에 요구한 뒤 13일 김기설의 애인 홍아무개를 불러 100시간 넘게 조사했다. 그리고 16일 강기훈을 유서대필 혐의자로 지목했다. 5월21일자 조선일보는 “강기훈이 김기설 분신직후 수사에 대비하기 위해 김기설의 애인 홍아무개를 만나 수첩에 김기설이라는 글자와 전민련 전화번호를 써줬다”고 보도했다. 자신의 필적을 김기설의 필적으로 제출하게끔 했다는 것이었다. 전민련측은 “홍아무개를 만난 건 사실이나 수첩에 글씨를 써주진 않았다. 검찰의 강압수사에서 (홍아무개가) 착오로 진술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 1991년 6월22일 언론과 인터뷰중인 강기훈씨(가운데). ⓒ연합뉴스
하지만 강기훈을 향한 마녀사냥은 멈추지 않았다. 언론은 강기훈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며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자 공권력이 실추됐다고 강조했으며, 강기훈에게는 “결백하면 수사에 응하라”고 주장했다. 강기훈을 대변했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향해서는 “과잉옹호”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5월25일, 검찰은 전민련이 제출한 김기설의 수첩이 조작됐으며,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했다고 공식발표했다.
검찰은 김기설 필적과 유서 필적을 감정한 결과 필적이 다르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결과를 핵심근거로 내세웠다. 그리고 강기훈이 1985년 경찰서에서 쓴 자술서와 유서가 동일필적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한겨레만이 “사설감정기관에 의뢰한 결과 전민련이 제출한 김씨 수첩과 유서가 동일필적으로 나타나 국과수 감정결과와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 “문제의 수첩에는 숨진 김씨밖에 쓸 수 없는 내용이 다수 들어 있다”며 ‘고군분투’했지만 수사결과를 바꿔놓지 못했다.
김기설의 필체를 찾아다니며 강기훈의 억울함을 풀고자 했던 김의겸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김기설의 새로운 필체가 나타날 때마다 ‘이제는 검찰이 수사를 끝내겠지’하고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매번 좌절이었다. 검찰은 어떤 증거가 발견돼도 다 조작이라고 했다. 특히 김기설이 쓰던 전민련 수첩이 발견되었을 때가 그랬다. 수첩은 누가 봐도 유서와 같은 필적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검찰이 ‘수첩의 절취선이 맞지 않는다’며 그 수첩마저 강기훈이 급하게 조작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검찰은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를 앞세워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7월12일 기소했다. 7월13일자 한국일보는 “결정적 증거 없이 이 빠진 공소”라고 지적했고 세계일보 또한 “검찰도 (강씨를) 연행한 이후 수사에 진척이 없다고 인정했다”며 “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이 유일한 증거”라고 보도했다. 검찰은 대필 일시와 장소도 밝히지 못했다. 대신 검찰은 1심 첫 공판에서 “혁명을 위해선 자신의 아버지도 죽일 수 있는 것이 공산주의자”라며 강기훈이 친구의 죽음을 혁명을 위해 이용했다는 식의 논리를 폈다. 이후 8월12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추가됐고 법원은 강기훈에게 징역3년형을 선고했다.
▲ 1992년 3월26일 구속수감된 강기훈씨가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연합뉴스
법원은 판결문에서 “김영형 등 감정인들이 검찰 의도대로 감정했다는 증거가 없고 변호인이 김기설의 필적이라 제출한 자료는 많은 부분 조작된 흔적이 있다”며 “체제타도를 목적으로 자살을 방조하는 것은 엄벌에 처해 마땅하지만 대필경위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중형을 선고하는 것은 어렵다”고 밝혔다. 필적감정논란과 법적 다툼으로 지면이 채워지며 다른 주요 사건들은 묻혔다. 무엇보다 노태우정부 비판여론이 지면에서 크게 줄었다.
당시 권영길 언론노조위원장은 “김씨가 전민련의 부추김에 의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선동적이지도 않은 짤막한 유서까지 남에게 대신 쓰게 해가며 선전효과도 적은 아침 8시에 범행을 벌였는지 하는 정반대 의심이 오히려 가능하다”고 반박하며 “검찰에는 대필이 입증되지 않으면 사건을 미궁에 빠뜨려 책임을 피하고 시국냉각이라는 정치적 효과에 만족하는 퇴로가 있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당시 강기훈 변론을 맡았던 이석태 변호사는 훗날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건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던 동료가 죽으려고 마음먹었을 때 말리지 않고 유서를 대신 써줄 수 있는 조직으로 국가가 전민련을 몰면서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불신감을 깊이 드러낸 것”이라고 밝혔다. 언론은 대필의혹이 밝혀져야 한다면서도 검찰의 무리한 기소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는 소홀했다. 의도적으로 소홀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른다.
이 와중에 조선일보는 5월27일자 지면에서 김기춘 신임 법무부장관을 두고 “깔끔한 외모에 업무처리가 빈틈없고 치밀해 완벽주의자라는 평을 듣는다”, “검찰의 위상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도했다. 박홍 총장은 이 무렵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어둠의 세력은 실존단체가 아니라 죽음을 선동하는 사회적 분위기”라고 밝힌 뒤 “목적을 위해 생명을 도구화하는 영혼의 그늘은 단호히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재야운동의 도덕성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 1991년 5월24일자 중앙일보 기사.
이런 가운데 국과수의 김기설 유서 필적감정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MBC보도가 1992년 등장했다. 당시 홍순관 MBC기자는 6개월간의 취재 끝에 국과수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이 수많은 문서를 허위감정 해왔다고 보도하며 국과수의 신뢰도에 큰 타격을 줬다. 하지만 MBC는 해당 기사를 축소시켰다. 김형영 구속이 임박했던 2월14일 MBC <뉴스데스크>는 이 사건을 14번째 아이템으로 배치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단순한 뇌물수수사건으로 몰고 갔다.
강기훈은 김형영의 구속사실을 교도소에서 접했다. 그는 훗날 1994년 8월17일 만기 출소한 뒤 언론노보와 인터뷰에서 “(국과수 필적감정조작이) 예상대로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또 한 차례 언론에 대한 불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의 언론은 권력의 눈치를 보는 나약한 존재였지만 지금은 하나의 권력이 되어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하다”고 비판한 뒤 “이제 상품가치가 없는 나를 신문들이 찾겠나”라며 씁쓸해했다.
이 사건은 잊혀졌다. 하지만 강기훈 본인만큼은 이 사건을 잊을 수 없었다. 2007년 참여정부 진실화해위 조사를 통해 진실이 드러났다. 국과수 감정결과는 조작된 것이었다. 김기설의 필적이 담겨 있던 노트를 분석한 결과 국과수 및 7개 사설감정기관은 김기설 유서의 필적과 동일하다고 판단했다. 노태우정부의 유서대필조작사건은 김형영이 진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강기훈은 2009년 9월 서울고법에서 재심 개시결정을 받을 수 있었다.
2014년 1월16일 법정 최후진술에서 강기훈은 말했다. “지난 20여 년 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꿈속에서도 무한 반복되는 장면으로 고통을 겪었다. … 누구를 욕해야 할지 모르겠다. … 끝없이 지속됐던 불면의 나날과, 여러 사람들을 저주하며 보냈던 시간과도 이별하고 싶다.” 그해 2월13일 서울고법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고법은 강기훈의 필적과 유서 필적 중 ‘ㅎ’과 ‘ㅆ’의 필법이 다른 점에 주목했다. 유서의 ‘ㅆ’은 제2획이 없는 독특한 글씨체였지만 강기훈 글씨는 그런 특징이 없었다. 23년 전에도 누구나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2015년 5월14일 대법원의 무죄확정판결이 난 다음날,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증거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재판부마다 다를 수는 있다. 궁극적 진실은 강씨 본인이 아는 것이다”라며 엉뚱한 주장을 폈다. 이 신문은 “모든 법관은 자신들의 판단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다는 사실을 무겁게 봐야 한다”고 적었다. 어디 법관뿐이랴. 검찰 측 주장을 확대재생산하며 한 인간의 삶을 망가뜨린 공범치고는 예의가 없었던 사설이었다. 모든 언론은 자신들의 기사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다는 사실을 무겁게 봐야 한다.
▲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확정판결을 받은 뒤인 5월27일, 1991년당시 전대협 집행부들이 광화문 광장 앞에서기자회견을 열고 조작사건 관련자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조작사건이 국과수 김형영 개인의 일탈이었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언론이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파헤쳤다면 아마 노태우는 대통령 임기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을 수 있다. 1992년 대선에선 김영삼이 당선되지 못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아무 죄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이 지금처럼 처참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청년들의 죽음이 가리켰던 ‘사회 변혁’의 열망을 ‘유서 대필 공방’으로 몰고 가며 체제유지에 가담했다. 언론은 이 거대한 사기극의 공범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수십 년 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894년 프랑스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군사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유배를 당했다. 드레퓌스는 결백을 주장했으나 프랑스 군 검찰은 필적감정 결과를 조작했다. 하지만 작가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 한다>란 글을 통해 드레퓌스가 누명을 썼고 군 고위층이 범죄를 은폐했다고 주장했고 드레퓌스는 1906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한국사회는 이 조작사건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법무부장관 김기춘은 박근혜정부 ‘왕실장’으로 불리며 2017년 촛불이 등장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건재했다. 곽상도 검사는 2013년 민정수석이 되어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만나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자식 관련 정보를 넘겨 국가정보원 대선개입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조작사건에 가담했던 이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했다. 언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 1991년의 과거로 되돌아갈 순 없다. 청년 강기훈의 눈빛이 우리에게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다.
프레임전쟁
뉴스의 시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의제(어젠다·agenda)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언론의 이데올로기적 여과를 거친 의제는 복잡한 이슈를 찬반 양자택일 구조로 형성하고 여론이 기술적이고 감정적인 문제에만 몰두하게 했다. 또한 언론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할 힘조차 미화시켜 역사적 국면마다 흉기로 둔갑하곤 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미디어오늘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체제 3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史에서 언론·국가·자본권력이 첨예하게 갈등하거나 야합했던 주요한 사회적 모멘텀(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거나 바꾸는 장면)을 제공했던 사건들을 프레임(개념 틀) 전쟁이란 관점에서 14회에 걸쳐 연속으로 소개할 계획이다. 언론의 바람직한 모습을 성찰하고 되짚어볼 수 있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겠다. <편집자주>
남북분단 씨앗은 동아일보 기사였다
[프레임전쟁] 2화 찬탁은 없었다, 반탁운동은 반공운동의 뿌리·친일파는 반공프레임 덕분에 애국자로
194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란 기사는 거짓이었다. 12월16일 모스크바에서 소련·미국·영국 3국외상이 만나 조선 문제를 논의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전하는 해당 보도는 실제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를 소련이 제안한 것처럼 왜곡했다.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해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떤 결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해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관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해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 동아일보 1945년 12월27일자 1면기사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왜곡보도는 한국 언론사(史)에서 좌우이념이 대립한 최초의 사건이다. 동아일보는 당시 친일파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한민당)의 핵심 김성수가 창간해, 송진우가 사장으로 있었고 ‘한민당 기관지’로 불렸다.
한국인들은 신탁통치를 ‘제2의 식민지’로 생각해 격렬히 반대했다. 반탁열풍은 시위·동맹휴학 등 대중운동으로 확대됐다. “전 민족이 투쟁하자”(김구), “전국이 결의 표명”(이승만), “최후까지 투쟁하자”(송진우) 등 성명서가 쏟아졌고, 임시정부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했다. 자연스럽게 반탁운동은 신탁통치를 제안했다고 알려진 소련에 적대적인 성격을 보였다.
실제 모스크바 3상회의 내용은 동아일보 보도와 달랐다. 신탁통치안은 소련이 아닌 미국의 구상이었다. 미 대통령 루즈벨트는 1943년 테헤란회담에서 소련 수상 스탈린에게 “한국민은 40년의 훈련기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했고, 2년 뒤 얄타회담에서 ‘한반도는 소련·미국·중국 등에 의해 20~30년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루즈벨트 사망 이후 대통령이 된 트루만은 신탁통치에 소련 영향력을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소련은 미국 제안에 대해 신탁통치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는 입장이었다.
3상회의 결정의 핵심은 조선의 독립민주정부 수립이었고, 이를 위한 신탁통치가 논의됐다. 다만 3상회의 결정에 신탁통치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신탁통치가 소련이 제안한 게 아니라 미국이 제안했다는 사실과 신탁통치의 목적이 제2의 식민지가 아니라 조선의 독립에 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전달돼야 했다. 합의문 1항이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위한 “임시적인 조선민주정부 수립”이다. 이를 위해 2항에서 “남조선의 미군사령부와 북조선의 소련군사령부의 대표들로 공동위원회를 설립”하고 “그 위원회는 조선의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해야 한다”고 했다. 신탁통치 내용이 담긴 3항 “조선 독립의 달성을 위해 협력·원조할 수 있는 방책 작성”은 부수적이었다.
반탁운동 확산, 친일파는 애국자·좌익은 매국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건 ‘조선의 민주적 독립정부 건립’을 지지하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3상회의 결정을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로 왜곡하면서 ‘3상회의 결정지지’가 ‘찬탁’으로 변질됐다.
▲ 해방 이후 박헌영(왼쪽)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여운형은 조선인민당 당수를 맡았다. 이 사진은 반공서적에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로 묘사되며 많이 실렸다.
좌익세력은 사실을 파악하는데 우선했다. 국내에는 30일부터 3상회의 결과가 보도됐다. 여운형은 조선인민당 선전국장 김오성에게 “이번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것은 논리상으로 따지면 임시정부를 세우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소”라며 “원색적인 감정은 눌러두고 냉철해야지, 임시정부 수립에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요”라고 말했다. 46년 1월3일 좌익 최대세력인 조선공산당은 ‘3상회의 결정지지’ 입장을 밝혔다.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은 ‘3상회의 결정’을 곧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로 봤기 때문에 좌익을 ‘찬탁세력’으로 몰았다. ‘찬탁’표현이 처음 나온 건 1월4일, 한민당은 ‘조선공산당이 반탁 대신 신탁통치를 수락했다’고 발표했다. 좌익이 찬탁을 주장하지 않은 사실은 1월7일 한민당·국민당·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이 모여 ‘자주독립과 민주정부 수립’에 동의한 ‘4당 코뮤니케’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1월7일 이승만이 “탁치(신탁통치)가 강요된다면 열국의 종속민족으로 우리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타인에게 맡겨놓은 격이 될 것”이라며 반탁입장을 밝히자, 8일 한민당은 ‘4당 코뮤니케’를 번복했다. 앞서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동아일보 사장)가 3상협정안을 확인하고 이를 지지하자 45년 12월30일 새벽 한현우·유근배 등에게 암살당한 사건도 영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에 근거한 합리적 판단이 마비된 시기였다. 미군정의 하지 중장, 장택상, 조병옥 등은 송진우 암살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해방 직후 가장 중요한 이슈는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이었다. 당시 미군정이 실시한 조사에서 서울시민이 선호하는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로 나타났다. 주로 좌익이 진정성 있게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열세에 놓인 우익, 특히 친일파들은 동아일보 왜곡보도로 분위기를 뒤집었다. 친일청산과 토지개혁은 ‘반탁 프레임’으로 바뀌었다. ‘반탁=반소=반공=애국’과 ‘찬탁=친소=용공=매국’으로 구분됐다.
왜곡보도의 배후세력은
동아일보 왜곡보도 출처는 ‘워싱턴 25일발 합동’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조선에 대한 결정’이 공식 발표된 시각은 12월28일 정오, 한국시각 28일 오후 6시, 워싱턴 시각 28일 오전 4시였다. 주한미군사령부가 3상회의 결과를 워싱턴에서 통보받은 시각은 29일 오후였다. 동아일보는 공식발표 전에 이런 중대한 내용을 잘못 보도한 것이다.
미군정의 ‘신탁통치’라는 보고서에서 동아일보 기사 출처로 지목한 곳은 ‘합동통신사’, ‘성조기’, ‘태평양성조기’였다. 동아시아 미군들을 상대로 도쿄에서 매일 발행된 ‘태평양성조기’ 27일자 내용이 동아일보 왜곡보도와 내용이 똑같다. 필자는 UP통신의 랄프 헤인젠 기자였다. 헤인젠 기자는 30년대부터 유럽에서 활동했고, 동아시아와 별 인연이 없었다. 동료들 사이에선 ‘악명 높은 날조전문가’로 평가받았다.
정리하면 3상회의 공식 발표 이전에 신뢰가 떨어지는 필자가 쓴 도쿄의 ‘태평양성조기’에 실린 글이 하루 만에 ‘합동통신사’를 거쳐 서울의 동아일보에 실린 것이다.
합동통신은 일제강점기 ‘도메인통신’을 미군정이 1945년 11월에 접수해 합병 등을 거친 곳이다. 합동통신 주간 김동성은 이승만 정권 초대 공보처장을 맡을 정도로 이승만과 친했다. 이승만과 김동성의 힘만으로 도쿄와 서울에서 동시에 왜곡보도를 낼 순 없다. 일본과 한국의 여론을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곳은 미군정(주한미군)과 맥아더의 도쿄 극동군사령부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남한 내 언론을 검열하고 있었다.
당시 미군정은 반소·반공 여론이 필요했다. 일본 항복 이전부터 소련이 한반도 북쪽에 주둔했고, 미군은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38선을 그었다. 38선 이남 민심마저 좌익에 우호적이었고, 신탁통치 반대나 친일청산 요구가 거셌다. 미국 본토 정부에 비해 태평양 주둔 미군은 남한 여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신탁통치가 남한 정국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 신탁통치 계획 수정을 미 국무부에 요청하기도 했지만 거절당했다.
▲ 1945년 12월27일 동아일보의 왜곡보도 이후 반탁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미군정청 공보부는 12월29일자 ‘정계동향’에 “미국이 즉시 독립을 원한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합동통신사(KPP)의 기사배포가 강력한 반소감정을 일으켰다”고 기록했다. 왜곡보도로 남한 내 우익과 미군정은 반소·반공을 고리로 여론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박헌영 기자회견 왜곡, 미군정의 좌익 죽이기
뉴욕타임즈 통신원 리처드 존스톤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의 기자회견을 왜곡한 건 ‘반탁=반소·반공’ 프레임을 만든 또 하나의 사건이다.
1946년 1월5일 박헌영은 내·외신 기자들과 영어로 소련의 신탁통치와 소비에트 연방 가입가능성 등을 묻는 기자회견을 했다. 존스톤은 박헌영이 소련 신탁통치를 찬성했고, 소련 가입 의사를 명백히 밝혔다고 기록했다. 뉴욕타임즈에 실리지 않은 이 내용은 열흘 뒤인 1월15일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알려졌고, 16일 동아일보·대동신문 등 우익 신문들이 인용하며 박헌영을 공격했다.
17일 조선공산당은 존스톤의 왜곡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18일 존스톤은 회견 취소를 원한다면 뉴욕타임즈에 항의하라고 발언했다. 당시 뉴욕타임즈에 박헌영 인터뷰가 실리지 않은 사실을 국내에서 확인하긴 쉽지 않은 점을 악용해 거짓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날 미군정은 존스톤 기사에 왜곡이 없다고 발표했고, 조선공산당의 존스톤 추방요청을 거절했다. 박헌영 기자회견 직후 미군정의 하지 장군이 존스톤의 메모에 대해 흥미롭다고 주의를 환기한 사실은 ‘박헌영-존스톤 사건’ 배후가 미군정이라는 의심에 무게를 더한다.
박헌영 같이 노회한 정치가가 기자들 앞에서 조선공산당을 소련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미군정의 여론공작 결과 박헌영의 정적들은 그의 목에 현상금 30만 엔을 걸었고, 박헌영은 좌익들 사이에서도 ‘구제불능의 친소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소련의 반격, 미군정 여론통제
소련은 남한 내 상황을 파악하고 46년 1월22일 ‘타스통신’을 통해 ‘미군정이 남한 내 반소선전을 허용하고 3상회의 결정 반대를 자극한다’는 평양발 급보를 냈다. 미국 정부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고, 맥아더 장군 대변인만 타스통신을 비난했다.
타스통신은 24일자로 미국이 신탁통치를 제안한 사실을 공개했다. 미군정이 남한 내 언론을 통제해 타스통신 보도가 전달되지 않자,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 스티코프는 26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타스통신 보도 전문을 발표했다. 그때도 미국 정부가 아무런 대응을 못한 것은 미군정이 반탁·반소 선전을 허용한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 정부 수립 경축식에 참석한 한미수뇌들. 왼쪽부터 미진주군사령관 하지, 태평양미육군 총사령관 맥아더, 한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 연합뉴스
미군정의 언론통제로 좌익의 목소리는 묻혔다. ‘해방일보’는 46년 4월29일 박헌영을 인용해 “조선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는 식민지 민족해방과 독립을 보장하는 유일하게 옳은 국제적 원칙”이라고 보도했고, ‘노력인민’은 47년 11월20일 “파쇼희랍화하려는 조국을 구하자”라는 글에서 3상회의를 “조선민족을 위해 참으로 유리한 진보적 결정”이라고 했다.
좌익 언론을 보면 미군정이 ‘3상회의지지’를 어떻게 ‘찬탁’으로 몰아 한국인을 탄압했는지 알 수 있다. 46년 1월27일 3상회의를 실현하기 위해 입국한 미소대표단 환영대회에 악기를 가지고 나간 구실로 전남 종연방직 공장장은 노조간부 손만기를 해고했다. 이곳 사장은 미군정의 관리였다.
2월 경성 철도노동자들이 3상회의 실천을 위해 미소대표단 환영회에 참여하려했다. 이를 간부들이 강제로 막았는데 당시 철도국장이 미국인이었다. 노동자들이 서울운동장으로 향하자 정체불명의 테러단이 습격했고, 철도노조간부 김재완·방준표·박성순·임종한 등이 검거돼 전원 실형을 선고받았다.
13일자 해방일보는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미소대표단을 환영하자는 시민대회에 참여하려는 우리들에게 무슨 까닭으로 철도국장(미국인)은 참가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테러범은 왜 석방하고 테러받은 우리들은 무슨 이유로 구금하는가”라며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길행 간부 등이 지난 1월12일 반탁데모 때 폭력으로 우리를 강요 참여케 했음에도 그들은 어찌하여 미군이 단호 처단치 않는가”라고 비판했다. 미군정이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국민을 ‘찬탁’세력으로 몰아 폭력을 이용해 해산시킨 내용이다.
반공으로 갈라진 좌우
▲ 1945년12월과 46년1월 신탁통치, 3상회의 관련보도. 자료출처=김영희, 미군정기 신문의 보도경향
1945년 12월~46년 1월 두 달 간 3상회의·신탁통치 관련 보도 중 동아일보는 다른 자유주의 신문들에 비해 신탁반대 논평·시위 관련보도 비중이 높았다. 동아일보는 신탁반대 보도비율이 47.6%로 조선일보(31.9%)·자유신문(27.1%)·중앙신문(26.4%) 등에 비해 높았다. 반면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내용은 한 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3상회의·신탁통치에 대한 정당관련 기사 역시 우익정당 반응은 64건을 보도했지만 좌익정당 반응은 11건밖에 보도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46년 5월11일자 사설에서 소련을 “우리에게 탁치를 강요하는 나라”라고 비난하는 등 3상회의 결정내용을 파악한 이후에도 반공프레임을 강화했다. 미군정의 여론조작결과 해방 후 첫 3·1절 기념식이 분열됐다. 좌우익은 서울운동장과 남산에서 각각 3상결정기념식과 반탁기념식을 열었다. 3000여명의 3상결정지지자 중 일부는 반탁을 외친 50여명에게 기습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좌우대립이 남북분단으로 이어졌다. 이승만은 세달 뒤인 6월3일 정읍에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이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다”고 말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바라는 중대발언으로 패전·전범국인 일본 대신 한반도가 남북으로 찢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승만은 1919년 미국에게 위임통치를 요청해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인물이다. 그가 해방 이후에 신탁통치를 반대한 이유는 미군정의 뜻대로 소련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익들은 ‘3상회의 결정’의 사실관계도 무시한 채 반탁을 외치며 이승만과 친일파에게 이용당했다. 45년 8월15일 일본 항복이후 4개월이 지나서야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3상회의가 열렸다. 해방 이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동아일보 왜곡보도로 좌우익 갈등이 극심해졌다. 3상회의 결정을 위해서는 미국과 소련이 적극적으로 만나 조선의 민주독립정부 수립을 준비해야 했다.
반탁운동은 46년 3월 1차, 47년 5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결국 같은해 9월17일 한국의 독립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됐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조치였다. 48년 5월10일 38선 이남에서 총선거가 실시됐다.
▲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절차를 토의하는 양국대표들 왼쪽은 미국대표 하지 중장 오른쪽은 소련대표 스티코프 중장
같은해 12월 이승만 정부는 사실상 좌익 숙청이 목적인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분단정부 수립이후 첫 3·1절 기념사에서 이승만은 “해방 이후로 반탁운동과 반공운동에 우리 전 민족이 목숨을 내놓고 싸워서 태산 같은 방해를 다 물리치고 오늘까지 성공하여 온 것”이라고 선언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무산과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 숙청·국민보도연맹 학살 등은 동아일보 왜곡보도 이후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정보를 조작하고, 그 정보를 믿은 대중의 행동결과만 역사적 사실로 남는 이 무서운 상황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고 있다.
※ 참고문헌
김삼웅, 곡필로 본 해방 50년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박태균, 반탁은 있었지만 찬탁은 없었다
윤해동, 반탁운동은 분단·단정노선이다
김영희, 미군정기 신문의 보도 경향-모스크바 3상회의 한국의정서 보도를 중심으로
정용욱, 역비논단-1945년 말 1946년 초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미군정의 여론공작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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