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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44

인혁당과 이수병 4. - 역사와 진실의 편에 선 사람들 미 선교사 28년 간직한 금반지 사연은 02.10.16 오마이뉴스 74년 '고문조작' 인혁당사건 구명운동 나섰던 미국 성직자들 ▲ 민주화기념사업회 주최 간담회에 참석한 조지 오글 목사(오른쪽)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 ⓒ 오마이뉴스 손병관 "그날(1974년 12월14일) 오후5시쯤 경찰관이 찾아와서 '5.. 2016. 3. 20.
인혁당과 이수병 3 - 언론은 공범이었다. 이진석: 강심장-인혁당 조작사건 길을 찾아서] 민청학련 조작사건 공범은 언론 14.3.5 한겨레 1974년 4월 중앙정보부가 터뜨린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명분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 조작 사건이었다. 사진은 민청학련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이철·강구철·유인태’에 대해 현상금 200만원을 내건 수배 전단(왼쪽)과 ‘여정남’을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해 인혁당과 연계시켜 그려놓은 조직 체계도.(오른쪽) 자료사진 1974년 4월4일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을 터뜨린 박정희 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이미 3월28일의 서강대 시위 때 서중석·최병두·이종구·김국주 등을 연행했고, 4월9일에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이직형 총무, 안재웅·정상복 간사, 나상.. 2016. 3. 18.
인혁당 사건과 이수병 2 -무죄, 그러나 불귀의 원혼 발생시기 주요사건 1964년 6월 박정희 정부, 비상계엄령 선포. 대대적인 반정부세력 검거 시작.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 인민혁명당을 조직해 국가 변란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 등 41명을 검거하고 16명을 수배. 1964년 8월 17일 피의자들이 검찰에 송치,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조사가 이루어져 57명의 구속·수배자 가운데 13명이 기소됨. 적용 혐의는 '반국가단체 찬양·고무·동조’에 관한 반공법 4조 1항 위반으로 바뀜. 1965년 1월 20일 서울지방법원, 13명 중 도예종과 양춘우에 징역 3년과 2년, 나머지 11명에 무죄 선고. 1965년 5월 29일 서울고등법원,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 선고. 1965년 9월 21일 대법원, 2심 재판의 형량 확정. (1차 .. 2016. 3. 17.
인혁당 사건과 이수병 1, “어, 많이 컸네. 많이 컸네.” 2012년 한겨레 신문 토요판에 김형태 변호사가 만났던 사람들의 기록이 있다. 그 아픈 삶의 기록들 중에 인혁당 사건의 이수병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마지막회에는 연재를 통해 다루었던 숫한 죽음과 사람들에 대해 김변호사가 회고하듯 글을 써 내려 갔다. 2013년 6월 김형태 변호사는 연재했던 글을 묶어 이란 책을 발행했다. 인혁당 사건과 이수병에 대한 남겨진 기록을 위해 김형태 변호사의 글을 먼저 옮겨 보았다. 이 카테고리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 객관성을 위해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중심으로 그 참혹한 시절을 담아 놓는다. 이수병(李銖秉, 1937년 1월 15일 - 1975년 4월 9일)은 인혁당 사건 희생자. 1937년 1월 15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손오리 출생. 1953년 부산사범학교에 .. 2016.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