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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인혁당 사건과 이수병 1, “어, 많이 컸네. 많이 컸네.”

by 이성근 2016. 3. 12.

2012년 한겨레 신문 토요판에 김형태 변호사가 만났던 사람들의 기록이 있다. 그 아픈 삶의 기록들 중에 인혁당 사건의 이수병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마지막회에는 연재를 통해 다루었던 숫한 죽음과 사람들에 대해 김변호사가  회고하듯 글을 써 내려 갔다.

 

<착한 교도관의 배려로 서대문구치소 마당을 가로질러 가던 남편에게 등에 업힌 딸 얼굴만 겨우 보이고 돌아선 세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 ‘인혁당사건의 이수병이 던진 딱 두 마디 말. “, 많이 컸네. 많이 컸네.”

 

어느 만화가가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렸다. 작년 추석 시집간 딸이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이 만화를 보고는 눈물을 글썽이더니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린애 둘러업은 채 감옥 마당에서 한마디 말도 못 건네 보고, 남편과 영원한 만남, 아니, 영원한 이별을 했던 이수병의 처 나이가 지금 내 딸 나이다. >

 

20136월 김형태 변호사는 연재했던 글을 묶어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 이란 책을 발행했다. 인혁당 사건과 이수병에 대한 남겨진 기록을 위해 김형태 변호사의 글을 먼저 옮겨 보았다. 이 카테고리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 객관성을 위해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중심으로 그 참혹한 시절을 담아 놓는다. 

 

 

이수병(李銖秉, 1937115- 197549)은 인혁당 사건 희생자.

 

1937115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손오리 출생.

1953년 부산사범학교에 입학

1954년 사회과학 학습 모임 일꾼회를 조직하고, 그 뒤 암장으로 바꾸었다.

1956년 부산대학교 교육학과 입학

1959년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2학년에 편입 (58학번)

19604·19 혁명 이후 경희대학교 학생민족통일연맹 위원장.

19615·16 군사정변 이후 구속, 혁명재판에서 15년형 선고, 7년 복역.

1971년 경락연구회을 만들어 활동.

1974418일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당시 삼락 일어학원 강사.

19754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대통령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49일 사형집행(당시 39), 경남 의령군 신반리에 안장.

2007221일 경희대학교에서 명예졸업장 수여

 

 

 

 

 

까까머리 고교생 넷 긴급조치 4호에 덜덜   12.7.13 한겨레신문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인혁당·민청학련 재심()

 

어떤 이가 비노바 바베에게 물었다. “당신은 당신 앞에 있는 등불을 보듯이 그렇게 분명하게 하느님(브라만)을 느끼십니까?” 그는 이리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아주 분명하게 하느님을 확신합니다. 하지만 내 앞에 놓여 있는 그 등불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군요.”

 

인도 힌두교 전통에서 브라만계급은 절대로 막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똥 치우고 옷감 짜고 목수 일을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하느님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내가 내 주변에서 보는 갖가지 살아 있는 피조물들과 인간 존재들은 하느님이 몸 입고 나타나시고자 하는 많은 형상들이다.’

 

비노바 바베는 6년 동안 인도 시골 이 마을 저 마을을 걸어서 다니면서 지주들을 상대로 땅 없는 농부들에게 기부를 해달라고 호소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양 아흔아홉 마리 가진 사람이 한 마리 가진 사람 걸 차지해서 백 마리를 채우려는 게 사람의 본성이거늘 그의 호소를 들은 지주들은 무려 400만에이커, 스코틀랜드만한 땅을 내놓았다.

 

헌법을 바꾸자는 것도 범죄행위라니

모든 사람들이 이기심의 벽을 치고 있지만 그래도 어느 한구석에는 선함이라는 문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행한 결과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결점을 비판하면 벽에 제 머리를 부딪치는 것이니 그 사람의 좋은 점, 선한 문을 찾아 열라고 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그래서 돈이 주인이 된 이 시절에 사람들의 착한 마음을 기대하는 건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은 일이긴 하다. 근본적으로 제도를 확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이나 종교인들이 이 정도 꿈은 보여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저 잘 먹고 잘사는 게 꿈인 이 시절의 시작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아닌가 싶다. 그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서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창 시절 내내 대통령이었으니 나에게 대통령 하면 박정희였고 다른 대통령이란 내 머릿속에 상상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잘 먹고 잘사는 것도 꿈의 하나가 아니라, ‘잘 먹고 잘사는 게 꿈의 전부라고 시대의 정신을 바꾸어 버린 지도자.

 

나는 40년 가까이 오래된 그의 행악을 요즈음 치우면서 돈도 벌고 덧없는 이름도 얻고 있다.

이 재판 기록에 나오는 고등학생 김형태가 변호인석에 앉아 있는 김 변호사 맞소?” 2006년 서울형사지방법원 법정에서 부장판사가 나에게 물었다. 1974년에 벌어졌던 인혁당, 민청학련 재판을 수십년 만에 다시 하는 자리였다.

 

1974118일자 내 일기장에는 지금 읽어보면 좀 유치하고 젠체하는 글이 적혀 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 있어도 그 과정에 눈곱만큼도 악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혹시 지금 내가 무모하게 일을 벌이다가 잘못되어서 정말 감옥에서 한 15년 있는 것보다 좀 더 참았다가 실력을 키워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좋은 목적에 섞여 있는 악은 아닐까?”

 

그 열흘 전인 18일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를 발표했다. 어린 고등학생이 보기에도 이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개정을 주장하거나 이에 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는 법관 영장 없이 잡아다가 군법회의에서 최고 15년 징역에 처한다. 헌법을 바꾸자는 것도 범죄행위라니.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이 긴급조치를 잘못된 거라고 말해도 똑같이 처벌한다니.

 

독재정치였지만 경제는 잘했다? 독재란 그저 정치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존중하느냐, 그저 한낱 수단으로 생각하느냐. 이건 박정희가 내세운 잘 먹고 잘사는 문제 이전에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개인과 사회의 온 삶이 걸려 있는 문제다. 남의 물건을 빼앗아서라도 잘 먹고 잘살면 되나.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건 이기심만을 잔뜩 북돋우는 악이다. 고등학교 2학년짜리 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이어지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주제에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편 징역 15년이 무섭기도 했다.

 

73년 겨울방학 때부터 친구 몇몇이 함께 고등학교 선배인 대학생들을 몇 번 만났다. 3학년에 막 올라간 744월 초 나는 라디오에서 박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는 걸 듣고 정말로 간이 콩알만해졌다. ‘작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전개하는 적화통일을 위한 이른바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불법활동 양상이 대두되고 있어서 이를 뿌리뽑는다면서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4호도 1호 못지않게 가관이었다.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동조한 자, 심지어 학생의 정당한 이유 없는 출석,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도 사형에 처할 수 있고 학교는 폐교시킬 수 있다는 거였다.

 

정당한 이유 없이 학교 안 가도 사형?

지난겨울에 만났던 대학생 선배들은 민청학련으로 다 잡혀갔을 터였다. 어린 마음에 엄청 무섭고 고민이 되었다. 긴급조치 4호 제4항에는 이런 문구도 있었다. ‘금한 행위를 한 자는 197448일까지 그 행위 내용의 전부를 수사, 정보기관에 출석하여 남김없이 고지하여야 한다.’ 까까머리 넷이 모여 분개하고 선배 몇 번 본 게 전부인데 이거 큰일났네.

 

그 뒤 이철이란 주모자 서울대 학생이 고등학생 교복 입고 도망 다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소식도 라디오에서 들었다. 그는 나중에 쓴 글에서 어떻게 변장을 할까 고민하다가 스님이나 신부보다는 신분증 제시가 필요 없는 고교생이 되는 게 제일 낫겠다 싶어 그랬다고 했다.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친구들은 결국 학교 선생님에게 불려가 이실직고하고 한 친구가 진술서를 써서 수사기관에 제출하고 우리들은 벌벌 떠는 정도로 일이 마무리되었다. 자술서를 썼던 친구는 그 충격으로 문과에서 진로를 바꾸어 이과로 옮겨 갔다.

 

2006년 민청학련, 인혁당 재심사건 변호를 하면서 30년 전 고등학생 때 내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다. 

까까머리들이야 그저 어린 시절 이야깃거리 정도로 넘어갔지만 이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사형당하고 감옥살이하고 그 뒤 삶이 완전히 바뀌어 변변한 직업도 없이 노년에 이르렀다. 학생 2천명이 잡혀가 180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민청학련 관련 학생들은 잡혀간 지 석 달여 만에 1심에서 사형 7, 무기징역 7, 징역 2012, 징역 156명의 선고를 받았다. 대학생들은 이듬해 2월 대개 석방되었고 졸업한 이들만 4, 5년 옥살이를 했다. 인혁당 관련자는 23명이 기소되어 사형 8, 무기 7, 징역 204, 징역 154명이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선고 다음날 박정희 정권은 8명을 사형 집행했다.

 

2002년 재심을 시작하는 데는 나와 이 사건 간에 또 하나의 인연이 있었다. 1998년 무렵 문정현 신부 주선으로 인혁당 사형수 부인들이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찾아왔다. 그분들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이들의 가족들 모임에 가도 눈치가 보였다. ‘빨갱이니까. 천주교 인권위원회로서는 그런 어려운 처지를 도와줄 뾰족한 수가 없었지만 천주교라는 종교의 특성상 빨갱이들을 도와도, 같은 빨갱이로 몰릴 위험이 덜하니 다른 단체보다는 상대적으로 운신의 폭이 좀 있었다.

 

아이고,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빨갱이 타령.’ 사실 빨갱이의 출발은 권력을 틀어쥔 돈의 횡포에 맞서 가난한 이, 소외된 이, 약자들을 돕자는 좋은 뜻에서 비롯된 거 아닌가. 애초의 이 뜻을 제대로 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또다른 억압 세력이 된 건 아닌지 잘 따져 볼 일이지, 그저 무턱대고 빨갱이로 몰아댈 일이 아니다.

 

어찌되었건 1998년 무렵 종교는 빨갱이 타령에 희생된 이들을 품어줄 수 있는 일종의 소도(蘇塗)였다. 인권위는 그저 이 어머니들과 같이 아파하고 같이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모 모임을 주선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펴내고, 이런저런 일을 하는 동안 그래도 계속 아쉬웠던 건 민청학련, 인혁당 수사·공판기록을 찾는 거였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수많은 전설 같은, 그리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있지만 정작 공식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재판기록이 없었다. 인권위는 백방으로 기록의 존재를 수소문했다. 기록의 보존은 최종적으로 검찰 소관이다. 10년이 지나 모든 기록이 폐기되었다는 게 법무부 공식 입장이었다. 기록이 없다는데야 뭐라고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1999년 무렵 한 군종 신부로부터 이 기록들이 군의 모처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박정희는 왜 일주일에 두번이나 보고를 받았나

그리고 그 뒤 국가적으로 과거사 사건을 정리하는 기회를 통하여 이 기록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2002년 재심을 시작하면서 재판과정에서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조사자료를 받아보니 참으로 놀라웠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이나 인혁당을 조사도 하기 전에 이미 각본을 다 짜 놓았다. 사람들을 잡아들이기도 전인 197443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건 전체를 암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민청학련이 어떤 단체인지 조사도 하기 전에 긴급조치 4호라는 대통령이 만든 법을 통하여 범죄단체로 규정해 버리니 재판은 법률적으로 전혀 필요가 없는 절차가 되고 말았다.

 

1974421일자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수사초점에는 이렇게 수사하라고 지침을 내리고 있다. ‘관련자, 특히 주동자는 공산주의 사상의 보지자임을 입증하고, 가족 중 부역자, 혁신계 등을 찾아내어학교 선배, 교수, 교우, 또는 사회인으로부터 정부전복을 교사받은 사실을 입증하고종국에 가서는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내용으로 조사하라고 지시하여 수사도 하기 전에 이미 사건 내용을 만들었다.

 

당시 일본인 기자 두명이 한국 학생운동을 취재하러 와서 서울대 학생 유인태를 만났고 취재 사례비로 7500원을 주었는데, 지금 돈으로 10만원쯤 되려나? 중정은 이 두 기자를 일본 공산주의자라며 공작금을 준 것으로 몰아갔다. 수사지침에 이런 대목이 있다. ‘조서를 정리할 때 지난번 부장님 발표문을 참조하여 거기에 맞도록 체제를 갖추어 정비하고7500원을 유인태에게 준 것을 취재에 대한 사례비조로 받았다고 한 것은 진실에 반하는 것이니 폭력혁명에 애쓰고 있는데 자금이 없어 라면으로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고 교통비도 없다는 사정을 말하였더니적은 돈이지만 폭력혁명을 수행하는 자금에 보태어 쓰라고 하기에 마지못해 받은 것으로 표현하라고.

 

이 수사를 책임진 이용택 중정 6국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때 고 박정희 대통령도 인혁당 사건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창 수사가 진행중일 때는 1주일에 두번꼴로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보고를 드렸다.”

 

아이고, 비노바 바베는 힌두교식 표현을 빌려, 주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하느님이 몸 입고 나타나시고자 하는 많은 형상들이랬는데.

 

 

남편과의 1, 지상에서 가장 짧고 영원한 만남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인혁당·민청학련 재심()

 

197549일 서대문구치소에서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때 남편을 떠나보냈던 처는 지난 40년 세월의 외로움을 이렇게 애절하게 표현했다.

 

외로운 거는, 난 외롭다는 말 자체를 안 써요. 사람들 많은 속에서 길 걸어가다가 더 외로울 때도 있잖아. <킬리만자로>란 영화에서, 그렇게 비가 오는데 주인공 여자가 막 죽어가면서 자기 애인 만나게 해달라고 그러는데, 만나잖아.

 

애 아빠, 그렇게 가고 난 뒤, 나도 그렇게 그 양반 보고 싶다고 그러면 나타나려나. 그렇게 비 오는 날 걸어다니고 그런 적도 있는데안 나타나지. 그런데 거기서는 만나잖아, 죽기 전에. <킬리만자로>, 많이 봤어요.”

 

이제는 인혁당 어머니들로 불리지만 그분들도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내의 여인이었을 것을. 여덟 사내들을 억울하게 보낸 그녀들은 남은 세상을 허위허위 살았다.

 

징역 15년형을 받은 고등학교 선생님의 처는 스스로 삶을 마쳤다.

1983, 무기징역형 등을 받았던 15명이 감옥살이 8년 만에 풀려나자 1975년 남편이 사형당한 또 다른 이는 다시 마음의 병이 도졌다. “저분들은 다 살아나오는데 내 남편은 살려만 뒀으면 살아나왔을 거 아녜요.”

 

세종대왕에게 이성계를 묻지 말라고?

2002년 민청학련·인혁당 재심을 시작하면서 나는 혁신계의 역사와 박정희의 수차례에 걸친 헌법 유린 과정을 공부하게 되었다. 19615·16 군사정변이 박정희 헌법 유린의 첫 시작이었다. 얼마 전, 박정희 대통령의 딸에게 5·16에 대해 묻는 것은 세종대왕에게 할아버지인 이성계의 고려 멸망을 어찌 생각하는지 묻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대한민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국임을 잊은 걸까?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이라는 소리는 왕조시대에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소위 성공한 쿠데타는 정치적으로 판단해야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런 주장은 1997년 대법원 전원 합의체에서 명백히 배척되었다.

 

내란을 통하여 폭력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61년 민주당 정권과 국회는 헌법에 의해 구성된 헌법기관이었다. 박정희가 탱크와 총을 들고 이를 유린한 건 명백한 내란이고 나중에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를 통치해 왔다 해도 내란이 내란 아닌 걸로 되는 건 아니다.

 

두번째 헌법유린은 쿠데타에 반대하는 학생, 지식인, 혁신계 등을 억누르기 위해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국회도 아닌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만든 것이었다. 어떤 행위를 할 당시 법에 처벌규정이 없다면 나중에 소급 법을 만들어 과거 행위를 범죄로 처단할 수는 없다. 이 형벌 불소급의 원칙은 헌법의 핵심 원리다. 박정희는 19616월로부터 36개월 전 행위에 대해서도 소급해서 처벌하는 위헌 법률을 만들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도 이 법으로 사형을 당했다. 이들에 대한 재심이 수십년이 지난 요즈음 한창 진행중이다.

 

세번째로 박정희는 197112월 헌법을 무시하고 대통령에게 국가 긴급권을 발동할 권한을 주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었다. 이 법 역시 19946월 헌법재판소에서 헌법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반입헌주의·반법치주의 위헌법률이라고 판정했다.

 

네번째로 197210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헌법 일부조항 효력정지, 비상국무회의의 국회권한 대행 등을 골자로 하는 유신선언을 했다.

 

다섯번째로 개헌안에 대한 찬반토론을 금하고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수 있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추천하는 내용의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이를 근거로 긴급조치 1, 4호를 발동하고 박정희의 끊임없는 헌법유린에 반대하는 세력의 싹을 자르려고 민청학련·인혁당 사건을 꾸며낸 거였다.

 

 

수사검사조차 훗날 조작을 두려워했다

한두번도 아니고 집권기간 내내, 툭하면 국민이 뽑은 국회와 헌법을 무력화시키는 내란죄를 범한 장본인이 거꾸로 헌법을 지키려는 국민들을 내란죄로 잡아다가 사형까지 시켰다. 그 잘못은 이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판결 그리고 최근 법원 재심과 국가배상을 통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인혁당과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2007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그 뒤 국가로부터 손해배상도 받았다. 그런다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올 리도, 빨갱이로 몰려 살아온 지난 세월이 다시 물려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2009년 인혁당 유가족과 복역자들은 죽은 이들의 핏값이요, 살아남은 이들의 일생과 바꾼 국가배상금을 모아 수십억원 규모의 ‘4·9통일평화재단을 설립했다.

 

인혁당이 비록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긴 하지만 관련자들은 오랜 세월 박 정권의 독재에 끈질기게 저항해 왔고, 이 나라의 자주적인 통일과 평화를 위해 애써온 것은 분명했다. 이들의 뜻을 지금 여기서 실현시키려는 게 재단의 목표였다. 나는 재단 상임이사를 맡아 민청학련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겹겹의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애초 19641차 인혁당 사건을 열심히 수사했던 장아무개 검사는 훗날 인터뷰에서 이랬다. “우리는 증거를 찾아내려 애썼지. 하지만 결론은 더이상 할 수 없다는 걸로 당시 공안검사 4명이 완전 의견 일치를 봤다. 그래서 기록 보따리를 전부 갖고 사표 써서 주머니에 넣고 검사장 방으로 갔다. 당시 기록을 몽땅 사진을 찍어 땅에 묻어 두었다. 나중에 조작했을 때 우리 공안검사들이 거꾸로 (1차 인혁당) 동조자로 몰릴 위험성도 거론되었지.”

 

박 정권이 얼마나 무서웠기에 수사를 한 공안검사들조차도 무혐의 결론을 내면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워 조작에 대비해 기록을 몽땅 사진 찍어 땅에 묻어 두었다는 건가.

 

세월이 훨씬 무서워졌으니 1974년 당시 수사 검사들에게 10년 전 선배 검사들만큼의 양식과 자긍심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을까. 그들은 검찰청도 아니고 중정에 앉아 피의자신문을 하다가 부인을 하면 중정 수사관들을 불러 전기 고문, 물고문을 지시했다. 이아무개 검사는 직접 구둣발로 밟고 찼다.

 

무기징역을 받았던 전창일은 재심 법정에서 증언했다. “수사가 다 끝난 후 이아무개 검사가 구치소로 찾아와 담배를 권하면서 이랬습니다. ‘여러 가지로 미안하다. 국가안보를 위해 한 일이니 이해해 달라. 당분간 세상을 잘못 만났다 생각하고 감옥에서 성경공부 많이 해서 착실한 기독교인 되어서 건강한 몸으로 나와 달라.’ 그런 악행을 한 사람이 어찌 나에게 설교를 하는가.” 중정에서 미리 그림을 그려 놓고 사람들을 끼워 맞추다 보니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삶과 죽음도 종이 한장 차이로 갈렸다.

 

애초 중정은 소위 인혁당 서울 지도부 멤버로 6인을 배당해서 조서를 꾸몄다. 전창일 등을 윽박질러 모임 참석자를 6인으로 맞추어 놓았다. 그런데 그중 박중기, 김달수 두 사람이 그 무렵 다른 건으로 이미 구속되어 있어서 원천적으로 모임에 나올 수 없었던 사실이 드러나자 나중에 이들을 빼면서 동료가 빠지면 좋은 거 아니냐는 식으로 둘러댔다. 만일 두 사람이 이미 구속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 비중으로 보아 아마 억지로 인혁당 사형수 대열에 끼었을지도 몰랐다. 마침 그들이 다른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었던 건 하늘이 도운 거였다.

 

전창일의 경우는 그가 다니던 극동건설이 중정의 모든 공사를 도맡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여서 회장 빽으로 제거 대상에서 무기형으로 급이 내려왔다는 거였다. 이성재는 6월이 다 되어 검거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4월에 잡혀가서 중정이 이들을 상대로 그림을 다 그린 뒤에 붙잡혔기 때문에 고문도 상대적으로 덜 했고 무기형급으로 낙착되었던 걸로 여겨진다.

 

 

박정희, 후회의 눈물은 사실일까

인혁당 가족들은 가장들이 붙잡혀 가서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 면회 한번 못했다. 이수병의 처는 당시 아직 서른이 채 안 된 젊은 나이였다. 그녀는 어린 딸 둘러업고 아들은 걸려 매일 서대문구치소에 출근했다. 그러곤 문틈 사이로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어쩌다 남편이 이동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대법원 선고를 일주일 남겨둔 어느 날, 젊은 새댁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마음 착한 교도관의 배려로 꿈에 그리던 남편을 한 1분쯤 볼 수 있었다.

 

이걸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두 손 부여잡고 울기는커녕 말 한마디, 눈길 한번 제대로 맞출 수 없었던 만남이었다. 그 착한 교도관이 문을 열어주어 구치소 마당에 들어설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남편과 아는 내색을 했다가는 그 교도관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젊은 새댁은 아이 업고 서 있고 저쪽에서 남편이 변호사 접견하러 호송 교도관과 함께 마당을 가로질러 왔다. 새댁은 말도 못 붙이고 그저 남편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눈이 나쁜 이수병은 바짝 다가와서야 처자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어린 딸을 보고는 딱 두마디. “많이 컸네. 많이 컸네.” 영문을 모르는 호송 교도관은 , 집에 있는 애 보고 싶어서 그래?” 하면서 빨리 가자고 독촉을 했고 남편은 웃으며 지나쳐 갔다. 1!

 

세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

일주일 뒤 남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 허무하게, 그리 빨리 갈 줄 알았더라면 그때 아무 말이라도 한번, 그냥 누구 아빠하고 한번 불러라도 볼 것을.

 

대법원은 197448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민청학련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로 감형된 유인태는 그날 구치소 마당에서 운동을 하다가 김용원을 만났다. 그는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더란다. 그날 낡은 수갑을 단단한 걸로 바꿔 채웠다는 거였다. 이건 사형집행 전에 하는 조치인데 어찌 선고 날에 벌써.

 

정말로 선고 후 만 하루도 지나기 전에 처형이 끝났다. 30년 세월 뒤 나는 재심 재판을 하면서, 입수한 사형집행 관련 공문서들을 보고 전율했다.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기도 전인 48일 새벽 3시에 이미 군법회의 검찰부에 사형선고 통지가 접수된 걸로 표시되어 있었다. 선고도 나기 전에 사형 통지라니. 그리고 사형을 집행한 구치소에는 집행 후인 4915시에 사형선고 통지가 왔다. 통지도 오기 전에 집행을 한 거였다.

 

윤보선 전 대통령도 민청학련에 돈을 대 준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1982년 석방되어 인사하러 간 김종대에게 박정희 측근으로부터 들었다며 그분이 전한 이야기가 사실일까? 박정희가 술만 마시면 인혁당사람들 죽인 걸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곤 했다는 게.

 

 

 

인민혁명당사건[ 人民革命黨事件]

 

 

 

 

 

요약: 196070년대 중앙정보부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을 결성했다'고 발표하여, 다수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이 검거된 사건. 2007년과 2008년 사법부의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1차 인민혁명당 사건

1961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거세지자 19646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렸다. 같은해 814일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조직해 국가 변란을 기도했다며,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 등 41명을 검거하고 16명을 수배하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은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한의 노선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포섭, 당 조직을 확장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것이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건 피의자들은 817일 검찰에 송치되었고,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에서 사건의 기소를 담당했다. 하지만 증거가 충분치 않을 뿐 아니라 중앙정보부의 조사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로 사건의 실체가 과장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기소 과정에서 일선 검사들과 검찰 고위층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그래서 이용훈 부장검사 등 담당검사 4명이 모두 공소 유지 불가능을 이유로 기소를 거부했으며, 그 가운데 3명은 사표를 내기도 하였다. 결국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재조사가 이루어져 57명의 구속수배자 가운데 13명만 기소되었는데, 적용 혐의도 반국가단체 결성에 관한 국가보안법 위반에서 반국가단체 찬양고무동조에 관한 반공법 41항 위반으로 바뀌었다.

 

196512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1심 선고공판이 열렸는데, 13명 가운데 도예종(都禮鍾)과 양춘우(楊春遇) 2명만 징역 3년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나머지 1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해 529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 재판은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하여 도예종과 양춘우 외에도 박현채(朴玄埰)를 비롯한 6명에게 징역 1, 나머지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해 921일에 대법원은 2심 재판의 형량을 확정했다.

 

민청학련사건[ 民靑學聯事件]

19738월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에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되어 반유신체제운동이 일어났다. 9월 개학과 더불어 대학생들의 시위사태는 점차 반독재·반체제 움직임으로 성격이 바뀌면서 전국 고등학교에까지 파급 ·확대되었으며, 일부 야당인사·지식인과 종교인들은 민주헌정의 회복 및 공화당정부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면서 본격적인 개헌서명운동을 벌였다.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197418일 긴급조치 1, 2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였으며, 위반자를 심판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학생들의 운동은 교내에서 지하신문 발행과 동맹휴학 등의 방법으로 계속되었고, 종교계 일각에서는 일부 지식인과 교회에서 시국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비밀 개헌서명운동을 추진하였다.

43일 박정희는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확증을 포착하였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제4호가 선포된 후 1,024명의 위반자를 조사하였고,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180명을 구속·기소하였다. 기소장에 의하면, 이들은 197312월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민혁명당계의 지하공산세력, 재일조총련 계열, 불순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용공세력, 국내의 반정부인사 및 그리스도교인 중 일부 반정부 세력과 결탁, 43일을 기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4단계 혁명을 통하여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하였다는 혐의였다.

 

구속된 180명은 비상군법회의에서 인혁당계 23명 중 8명이 사형을, 민청학련 주모자급은 무기징역을,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를 각각 선고받았다. 이 사건의 변호사 강신옥은 "피고인석에서 그들과 같이 재판을 받고 싶은 심정"이라는 요지로 변론을 하다가 세계 사법사상 처음으로 변론중인 변호사가 법정구속되기도 하였다. 수감자들은 1975215일 대통령특별조치에 의하여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른바 유신정권에 의한 대표적 용공조작 사건으로 꼽히는 이 사건에 대하여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에 재조사가 이루어져 2005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는 "민청학련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라고 발표하였고, 20099월 사법부는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하여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하였다. 2010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사건의 관련자와 가족 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가해자가 돼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며 국가가 520억여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하였다.

 

 

 

2차 인민혁명당 사건(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44월 민청학련사건이 발생하면서, 도예종 등 1964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구금하여 다시 수사하였다. 527일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 추가 발표를 하면서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발표하며, 도예종여정남 등 23명에 대해서는 내란 예비와 음모 등의 혐의를 추가하여 기소하였다.

 

1974711일에 열린 비상보통군법회의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78일 군 검찰부가 구형한 그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3명 가운데 서도원(徐道源)김용원(金鏞元)이수병(李銖秉)우홍선(禹洪善)송상진(宋相振)여정남(呂正男)하재완(河在琓)도예종(都禮鍾) 8명에 대해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이태환유진곤전창일이성재김한덕나경일강창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에 대해서는 징역 20년을 선고하였다.

 

그해 97일에 열린 비상고등군법회의 선고공판에서도 도예종 등 8명에 대해서는 사형이, 김한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정만진이재형조만호김종대 등 4명에게는 징역 20, 전재권황현승이창복임구호 등 4명에게는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197548,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상고를 기각하여 이들의 형량을 확정하였다.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판결이 확정된 지 18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197549일에 서도원김용원이수병우홍선송상진여정남하재완도예종 8명에 대한 사형이 서울구치소에서 집행되었다. 당시 이들의 선고통지서가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있기 전에 군 검찰에 접수되었으며, 서울구치소에서도 선고통지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형을 집행했다는 정황이 문서로 드러났다.

 

국제엠네스티는 다음날인 410일에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도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이 사법 살인이라며, 사형이 집행된 19754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군사정권 시대에 국가의 폭력으로 발생한 의문사 사건들을 밝히기 위해 200010월에 대통령 직속기구로 구성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해 20029월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해 과장조작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해 12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서울중앙지법에 이 사건의 재심을 청구하였다. 재심은 200512월에 시작되었고, 2007123일 서울중앙지법은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이 집행된 8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리고 2008123일과 918일에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도 무죄가 선고되었고,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무죄가 확정 판결이 되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이수병 평전> 05. 4.8 오마이뉴스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계의 관점이 구명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인권문제와 재심청구 등 명예회복과 복권운동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면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가 펴낸 <이수병 평전>은 이들의 죽음을 단순한 희생이 아닌 해방 이후부터 민족통일운동과 민주변혁운동에 오랜 기간 투신해온 과정에서 일어난 필연적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이수병선생 기념사업회 지음 / 출판사 - 지리산 / 초판일 - 1992

 

발간사 이수병 선생 일대기를 펴내며 / 김봉우 = 9

헌시 이수병 동지여! / 문익환 = 11

서장 새날을 여는 후배들에게 = 19

 

1장 어린 시절

1. 식민지 조선의 아들 = 27

2. 어느 민족지사와의 만남 = 33

3. 피로 물든 낙동강 = 35

 

2장 큰꿈, 내일을 위하여

1. 시골뜨기 고학생 = 43

2. 또 하나의 학교 '암장' = 48

3. 사회에 내디딘 첫발 = 56

 

3장 통일로 가는 길

1. 꿈과 희망의 대학에서 = 63

2. 4월 항쟁의 중심에 서서 = 68

3. 떠오르는 청년세대 = 72

4. 통일운동의 주역이 되어 = 78

5. 연대투쟁의 깃발을 들고 = 82

6.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 88

7. 1차 피검 = 95

 

4囚人이 되어

1. 옥중투쟁 = 103

2. 깊은 수양, 넓은 전망 = 109

 

5장 격랑의 세월

1. 원대한 포부를 안고 다시 첫 걸음 = 123

2. 소중한 보금자리 = 127

3. 전선전야 = 132

4. 회오리속의 정국 = 141

 

6장 어둠속 횃불이 되어

1. 革命緖戰 = 149

2. 해방전사가 되어 = 156

3. 한 여름의 태풍 = 162

4. 작은 행복, 큰 사랑 = 169

5. 오욕의 시대 = 177

 

7장 조국에 바친 의연한 죽음

1. '인혁재건위' 조작사건 = 191

2. 거짓과 진실의 법정 = 199

3. 밖에 남은 사람들 = 206

4. 죽음을 넘어 = 210

5. 열사의 주검을 안고 = 241

 

후기 = 218

부록 = 224

 

이 책에서는 해방공간의 좌우 대립에서부터 이승만 독재정권과 4월혁명, 5.16 쿠데타와 유신정권의 암흑기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변치 않는 자주 민주 통일에 대한 열정과 투쟁을 청년 변혁운동가 이수병의 삶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추적 복원하고 있다. 책의 끄트머리에는 인혁당 사건의 운동사적 의의를 분석한 보론도 실려 있어 사건의 전모와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국제법학자협회''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의 대법원 판결일인 19754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결정하였다. 그 날 확정판결 이후 20여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이 사건 연루자 8명을 전격적으로 '사법살인'에 처한 49일은 한국사회의 인권이 마지막 조종을 울리며 유신체제가 정점을 향해 치닫던 시점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조작으로 점철된 이 사건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수병! 그는 가장 엄혹한 시절 가장 강고한 조직을 준비하고자 했던 치열한 활동가의 삶을 살다 갔다.

 

국제법학자협회 "인혁당 사건, '사법사상 암흑의 날'"

변혁운동가 이수병의 생애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그는 반독재운동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던 4월항쟁을 혁명으로 승화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당시 그의 민족통일운동에 대한 기여는 실로 선구적인 것이었다.

 

학원민주화운동, 7.29총선 혁신계 후보 지원, 계몽강연회 등 다각적인 활동과 접촉을 벌여나가던 이수병은 운동을 한 단계 진전시키기 위하여 민족통일운동을 구상하고 실천하게 되었다. 19601112일 경희대 민족통일연구회를 발족시켜 수차에 걸쳐 세미나와 대강연회를 개최, 통일문제에 관한 인식을 넓혀가는 한편, 민통련(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의 전국조직 결성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민족통일운동의 구체적 방안으로서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대 민통련의 주요 책임자들과 회동한 이수병은 민족모순에 대한 관심을 일거에 제고시킬 수 있는 실천운동으로서 남북학생회담에 관한 견해를 제출하여 참석한 학생대표들의 동의를 받았다. 그의 제안은 196153일 민통련이 남북학생회담 개최를 결의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강연회와 정치집회에 단골 연사로 초청받을 정도로 언변이 뛰어났던 그였지만 특히 기억에 남을 명연설은 1961513일 서울운동장에서 경찰추산 4만 인파가 몰린 가운데 개최되었던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학생대표로 행한 연설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수병은 '남북학생회담을 환영한다'라는 연제로 열변을 토해 청중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날 연설에서 그가 외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사자후는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통일운동의 상징 구호가 되었다.

 

이수병, 반독재운동 수준의 4월항쟁을 혁명으로 승화시키는데 일익

앞서 이수병은 변혁운동의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언론을 주목하고 4월혁명기 최대의 진보적 언론인 민족일보 기자 공채에 응시하였다. 혁신적 기치를 내걸고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이었던 민족일보는 창간 당시 기자들을 모두 외부의 진보적인 인사들로 충원하였다.

 

예외적으로 단 한번의 공채가 실시되었는데 각 대학에서 몰린 지원자가 500명을 넘어섰으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유일하게 합격한 이가 바로 이수병이다. 5.16 쿠데타 후 군사정권에 의해 사형당한 조용수 사장이 그의 출중한 능력을 인정하여 채용하였다고 한다.

 

군사정변 직후 검거된 이수병은 혁명 검찰부에 의해 학생으로서는 유일하게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1962년 실형 15년이 확정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다른 민통련 관련자들이 형집행면제로 풀려난 반면, 그는 특A급으로 분류되어 중형을 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민통련 활동뿐만 아니라 민족자주통일협의회, 민족민주청년동맹, 통일민주청년동맹 등 협동전선운동과 전위적 청년운동에 관여한 점, 혁신계 언론이었던 민족일보 기자 경력 등 대중선동가와 이론가로서 그의 잠재적 역량에 대한 군부파쇼의 평가 때문이었다.

 

기나긴 옥중생활은 일부 교도관들이 감화될 정도로 모범적이었다. 그는 영어의 시간을 자기 수양의 기회로 이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역량을 축적하는 시기로 설정하였다.

 

병이 든 혁신계 재소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자신의 일처럼 항의하여 징벌방에 수감된 정의감, 선배 운동가들에 대한 겸허한 자세, 맹렬한 학습과 정진 등은 출옥 때까지 한결 같아 주위 사람들의 경탄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시기 그는 수많은 변혁운동의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 이론과 실천에 필수적인 소양과 품성을 길러나갔다.

 

옥고... 교도관 감화될 정도로 모범적

1968417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이수병은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변혁운동에 뜻을 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은밀한 접촉을 재개하게 된다. 독서회, 강좌를 통하여 혁신계를 비롯, 학생, 노동자 등 제 민주세력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대중적 조직활동을 전개해나가는 한편 '경락연구회' 등 비합법 지도부의 구성원으로서 비밀 지하활동을 펼쳐 나간다.

 

유신체제가 기승을 부리던 1974, 잔혹한 독재정권이 요주의 인물로 주목하고 상시적인 사찰을 하는 열악한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그에게 숙명적인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전국적인 반독재 저항조직인 '민청학련'의 배후 상층부로 지목된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불법적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그는 일년 동안 혹독한 고문과 협박으로 일관된 조작 수사를 받고, 197549일 결국 변혁운동의 도상에 하나뿐인 목숨마저 내놓게 된다.

 

그를 포함한 8인 열사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양심을 지닌 많은 이들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만행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문익환 목사는 처음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었으며, 법정스님은 '붓을 꺾고 은거의 길을 걸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심리적 파장이 컸다.

 

독재정권의 모순을 국가권력에 의한 사법살인으로 모면해보려던 극악한 유신정권의 의도는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지진이 지나간 땅에도 샘은 솟고 태풍이 거쳐 간 들에도 꽃은 핀다'는 잠언을 증거 하듯 8인 열사의 헌신을 밑거름 삼아 유신의 동토를 뚫고 민주화의 싹은 자라나고 있었다. 부마항쟁과 10.26, 그리고 서울의 봄. 철옹성만 같아 보였던 거대한 악의 제국 박정희 정권은 단말마를 지르며 역사 속으로 무너져 갔다.

 

인혁당 사건 본 문익환 "하느님 의심", 법정 "붓 꺾고 은거"

이수병. 그는 변혁운동에 대한 열정과 웅대한 포부를 한껏 펼치지 못하고 떠났지만, 수난과 저항으로 일관된 그의 생애는 민족민주통일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수병 평전>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증언한다. 고귀한 가치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고 지키려고 하는 자만이 떳떳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희생의 대가라는 사실을<이수병 평전>은 거듭 되묻는다. 이수병과 그의 동지들이 변혁운동의 선상에서 죽음으로 보위한 민족자주 조국통일을 향한 의지를 누가 이어 갈 것인지를.-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KBS 인물현대사 이수병선생편

내가 죽는 이유는 민족민주운동을 한 것뿐이다

방송일시 : 200541() 101TV   담당연출 : 박진범 PD

 

숨겨진 진실, 피맺힌 죽음

 

사형집행 기록 최초공개- 당시 입회목사가 들려주는 생생한 증언

취재진은 당시 사형집행 기록을 입수, 최초로 공개한다. 사형집행 명령부에는 당시 집행자와 입회자의 이름과 사형집행에 걸린 시간, 이수병의 최후 진술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취재진은 사형집행부의 기록을 추적하여 당시 입회목사인 박정일 목사를 어렵게 만났다. 그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사형집행 당시의 상황을 들어본다. 국제법학자협회는 19754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바로 이날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지 불과 20여 시간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혁신운동의 분출을 염원하며- 혁신운동의 새로운 씨앗, 암장

이수병은 고교시절부터 김종대, 김정위, 김금수, 이영호, 최종국, 박중기 등과 함께 암장이란 서클을 조직하여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 자신이 직접 지은 암장이란 이름은 땅속에 녹아있는 마그마란 뜻으로 화산처럼 혁신운동의 분출을 염원하는 뜻이었다. 이후 대학에 진학한 이수병은 당시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단체들과 접촉하게 된다. 이어 서울로 상경하여 암장의 서울시대를 열었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성격을 지닌 4.19를 기점으로 공개활동을 시작한 암장은, 4.19를 민족통일운동으로 전환하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수병은 학원민주화운동, 7.29 총선시 혁신계 후보지원, 계몽 강연회 등 다각적인 활동과 접촉을 벌여나갔다. 또한, 학생운동세력이 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평소 학내에서 진보적 의식을 가진 학생들과 민족통일연구회를 발족시켜 수차례의 세미나와 대강연회를 개최, 통일문제에 관한 인식을 넓혀간다.

 

 

혁신계의 잔혹사

19565, 평화통일을 주장한 혁신계 인사 조봉암이 대통령 선거에 나와 216만 표를 획득한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혁신계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정권은 조봉암을 처형으로 응수한다. 조봉암 처형은 혁신 정치세력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 후, 민족일보 입사를 토대로 이수병은 학생신분을 벗어나 활동가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5.16 쿠데타는 일거에 통일운동을 잠재웠다. 민통전학련, 민자통, 통합예정이던 민민청, 통민청 해체, 민족일보 종간이 이어졌다. 북한의 활동을 고무·동조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사장 조용수 외 12명이 기소된 민족일보 사건은 결국 사장 조용수를 사형시킨다. 이로 인하여 4.19 이후 떠오르던 혁신계의 통일운동은 군부 쿠데타로 인해 철퇴를 맞는다. 당시 피검된 이수병은 학생으로서는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구형 받고 7년 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다른 민통련 관련자들이 형집행면제로 풀려난 반면, 이수병은 특A급으로 분류되어 중형을 받게된 것이다.

 

 

정권연장을 위해 필요했던 희생양- 그들은 독재의 재물이었다.

석방 후 이수병은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변혁운동에 뜻을 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한 접촉을 재개한다. 독서회, 강좌를 통하여 혁신계를 비롯 학생, 노동자, 민주세력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활동을 전개해가던 이수병은 1974년 민청학련 상층부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연행된다. 인혁당 사건은 군사정권 아래의 사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고문 조작사건이다. 이수병을 비롯하여 총 23명이 구속된 이 사건 관련자들은 내란예비 음모 및 내란 선동이라는 혐의로 기소되어 대법원은 197548일 주요 관계자 8명에 대해 사형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판결이 난 바로 다음날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다. 공안관련사범이라고해도 사형선고 이후 적어도 3,4년은 집행을 미루는 관행에 비춰 극히 이례적인 이 날의 사형집행은 조작의 전모가 밝혀지길 두려워한 박정희와 중정에 의한 폭거였고, 우리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비극이 되고 말았다.

 

 

이수병을 비롯한 그들은 반외세 자주화, 반독재 민주화, 평화통일 등을 주장하며 꾸준히 혁신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격동의 시대, 극한적 반공이데올로기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혁신운동의 명맥을 유지해온 이수병. 인물 현대사에서는 사법살인 30년을 맞이하며, 이수병의 행로를 통해 광복 이후부터 70년대까지 우리 현대사에서 혁신계 세력의 이상과 노선, 그리고 그들의 한계와 좌절을 조명해본다

 

 

 

 

 

 

 

 

 

 

 

 

 

 

 

 

 

 

 

 

 

 

Let It Be - Nana Mousko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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