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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인혁당과 이수병 3 - 언론은 공범이었다.

by 이성근 2016. 3. 18.

 

 

 

 

                                                                                                                                                    이진석: 강심장-인혁당 조작사건

 

길을 찾아서] 민청학련 조작사건 공범은 언론 14.3.5 한겨레

19744월 중앙정보부가 터뜨린 민청학련 사건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명분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 조작 사건이었다.

 

 

 

사진은 민청학련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이철·강구철·유인태에 대해 현상금 200만원을 내건 수배 전단(왼쪽)여정남을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해 인혁당과 연계시켜 그려놓은 조직 체계도.(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197444일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을 터뜨린 박정희 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이미 328일의 서강대 시위 때 서중석·최병두·이종구·김국주 등을 연행했고, 49일에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이직형 총무, 안재웅·정상복 간사, 나상기 등 26, 서울대 공대 학생회장 이종원 등 6, 한양대 이우회·이상익, 전남대의 문덕희·이학영·윤한봉·박형선·김상윤 등이 줄줄이 연행되고 413일에는 수백명이 수배되었다. 경찰은 유인태·이철·강구철 등에 대해서는 현상금 200만원과 1계급 특진을 내걸었다. 수사당국은 최종적으로 모두 1024명을 연행해 203명을 구속시켰다.

 

4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중간 수사발표를 하자, 언론은 일제히 민청학련학생들이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일본 공산당원 및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의 사주를 받았다고 받아적었다.

 

<동아일보>(편집국장 고재욱)527일치 1면 머리로 학원 내 적화기지 구축 획책, 비상군법회의 검찰부 민청학련 54명 구속기소라는 기사를 싣고 바로 뒤이어 민청학련, 인혁당이 지원, 일 공산당과 제휴, 김지하 등 자금 지원이라는 해설기사를, 4면과 5면을 털어 민청학련 사건 공소장 요지를 실었다. 검찰이 제공한 조직도표까지 실었다.

 

그러면 중정은 민청학련 사건을 어떻게 조작해냈는가? 앞서 말한 대로, 중정의 끄나풀 조직휘의 주선으로 이철을 인터뷰한 <주간현대>의 다치가와는 인터뷰 사례비로 7000엔을 주었다. 당시 동아일보사 기자인 내 월급이 약 7만원이었으니 요즈음 시세로 환산하면 한 50만원 정도나 될까? 중정은 이 사례비를 혁명자금으로 꾸몄다. 문제의 곽성문도 그렇다. 스스로 이철을 찾아와 학생회장을 하고 싶다고 했던 그가, 이철로부터 진짜로 공산주의 폭력혁명을 지시받았다면 왜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않고 뒤늦게 중정의 증인으로 나타났는가?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인사 7명은 또 어떤가? 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때 재판받은 12명 중 2명만 반공법 위반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내내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사찰·감시했음에도 7명 중 누구도 민청학련 학생들과 접촉한 사례는 없었다. 다만 경북대 법정대 학생회장을 했던 여정남(64학번)72년부터 같은 대구 출신의 인연으로 이철·유인태와 간혹 어울린 정도였다. 중정도 처음에는 이철·유인태가 여정남에게 대구지역 시위를 지시한 것으로 사건을 꾸미려다가, 민청학련 상부 조직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그려 넣고자, “인혁당의 지령을 받은 여정남이 두 사람 등에게 공산폭력혁명을 교사·지령했다고 줄거리를 바꾸었다.

 

그런데 수사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학생들이 유신반대 전국대학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활동자금을 주로 윤보선 전 대통령과 지학순 주교 등 재야와 종교계 인사들로부터 지원받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의 돈은 고 이우정 선생을 거쳐 박형규 목사, 고 나병식을 통해 전달되었고, 지 주교의 지원금은 김지하를 통해 주었다. 학생들은 애초 박 목사와 김지하를 보호하기 위해, 안재웅의 결혼 축의금을 끌어다 쓴 것이라 둘러대었다. 하지만 중정이 사건을 자꾸만 인혁당과 결부시켜 공산폭력혁명 기도로 몰고 가자 하는 수 없이 털어놓았던 것이다. 윤 전 대통령과 지 주교를 공산주의자로 몰 수는 없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박 정권은 그 상식조차 배반했다.

 

박 정권은 민청학련사건에 대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이라는 비밀지하당과, 또 다른 통로로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일본 공산당 계열과 조총련계가 공산폭력혁명을 사주하고, 이를 위한 거사 자금은 한국의 전직 대통령·개신교·천주교 쪽에서 대고, 또 이 폭력혁명을 시민민주주의자 김동길·김찬국 교수가 촉구·선동하고, 개신교의 많은 젊은 교역자들이 함께했다는 누더기 공소장을 발표했다.

 

이 해괴한 공소장으로 인해 수백명이 고문을 당하고, 기소자 수십명이 합계 1800여년의 천문학적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인혁당의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이수병·우홍선·김용원 등 7명과 여정남은 하나뿐인 목숨을 사실상 재판도 없이 잃어야 했다.

 

민청학련 조작 사건당시 한국 언론은 명백한 공범자였다. 언론은 중정이나 군검찰, 군사법정, 포괄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총체적 공안몰이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채 그들의 발표문을 도배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그 발표를 사실로 오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왜 언론의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는 것일까-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청년 8명 사형당한 그날, 조선은 유언 조작 14.11.19 미디어오늘

[조선일보 대해부 3] “박정희 유신은 조국 앞날에 가장 알맞은 조치

새로운 권력이 들어설 때마다 권력을 찬양하던 조선일보 역사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때도 이어졌다. 이승만을 지지하던 조선일보는 그를 무너뜨린 4·19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자 태도를 바꾸었다.

 

1961516015분경 육군소장 박정희 일행이 서울 영등포 문래동의 6관구사령부에 도착하면서 쿠데타가 시작됐다. 해병여단 1개 대대, 포병단, 공수단이 서울시내를 점령했다.

 

조선일보는 이 사건을 처음에는 쿠데타라고 명명했다가 이틀 뒤인 18일에는 사설 <혁명에 바치는 찬사>를 싣는다. “우리는 세 가지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첫째는 군사혁명이 무혈혁명의 전격적이었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군사혁명위원회가 발표한 혁명공약에서 발견할 수 있고, 셋째로는 국내외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중앙정보부가 개입된 증권파동, 워커힐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 빠찡꼬사건 등 4대 의혹 사건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조선일보는 중정 간부들이 법원이나 군법회의에 재판을 받는 일에 대해 보도하지 않았다).

 

196610월 박정희가 광화문에 탱크를 동원해 비상계엄령을 내린 후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키는 헌정쿠데타 유신을 선포했을 때도 찬양했다. 조선일보는 사설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에서 오늘 우리에게 부닥친 안팎의 모든 정세를 살펴보며 조국의 앞날의 걸어가는 길을 내다볼 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로서 이를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맨 왼쪽).

 

이 시기의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이유는 단순히 박정희를 찬양하고 독재·유신을 미화해서가 아니다. 박정희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납치하고 사법살인을 저지르는 만행을 저지를 때 진실을 보도하지 않으며 침묵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틀 후인 518일 전국의 매체 912개 중 82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폐쇄하는 언론탄압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날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와 논설위원 송지영 등 간부 10명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으로부터 자금을 들어와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는데 일조했다는 혐의로 구속했다. 박정희는 1221일 오전 조용수에 대한 사형 집행을 확인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송지영 등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사형집행은 그날 오후 바로 이뤄졌다.

 

조용수 사장 구속부터 군사정권의 앵무새구실을 충실히 했던조선일보는 사형이 집행되자 <혁명재판 판결의 확인과 집행의 교훈>에서 오히려 박정희를 찬양했다.

 

“5명의 사형수에게 사일등을 감한 박 의장(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관대한 처분은 그들의 가족·친지에게는 물론 개인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인에게도 가슴 흐뭇한 느낌을 주었으며 숙연한 혁명과업 완수 과정에 최고 통치 당국의 온정이 그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1973년 일본과의 외교문제로도 비화된 김대중 납치사건에서도 조선일보는 대체로 침묵을 지켰다. 이 사건은 유신독재 시절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이후락이 이끄는 중앙정보부 공작원들에 의해 살해를 목적으로 납치한 정치테러사건이다.

 

박정희의 최대 정적인 김대중이 실종됐지만 조선일보는 12단짜리 기사에서 한국말을 사용하는 5명의 남자들에 의해 사라졌다고 전할 뿐이었다. (<조선일보 대해부>(3)는 조선일보가 납치 사건 당시 쓴 기사 제목을 인용하며 위 기사들의 공통된 특징은 제목의 활자가 아주 작고 내용을 좁은 지면에 빡빡하게 채워 독자의 눈에 잘 뜨이지 않도록 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에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사설이 실린 적도 한 차례 있었다. 조선일보 972면 통단 사설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요즘 우리의 심정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몹시 우울하고 답답하다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중앙정보부가 계획한 납치사건 당시 김대중.

 

하지만 이는 조선일보 입장이 아니라 일종의 해프닝에 의한 사건이었다.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주필 선우휘가 김대중 남치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최고위층의 결단을 촉구하는 사설을 써서 발행인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한밤에 집어넣는 일이 발생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박정희는 1974년 유신 말기 급기야 민청학련 및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조작한다. 대학생들이 유신독재에 맞서 저항을 시작하자 43일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며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유신정권은 민청학련이 북한 공산집단의 이른바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조직으로 이 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아래 우리 정부를 전복하려는 국가변란의 음로를 꾸며 학원의 일각에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조선일보는 이날 <불순세력에서 학원·사회 보호/긴급조치 4호 선포의 배경과 목적>이란 기사에서 정부 발표를 그대로 받아 썼다. 조선일보는 민청학련을 반정부집단으로 매도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공산계열의 불순세력이 우리 학원에 침투해우리 학원의 불행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인혁당재건위 조작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이들

 

중앙정보부는 425일 민청학련의 배후가 조총련과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라는 수사 결과를 추가로 발표했다. 민청학련이 인혁당 세력, 조총련, 용공불순세력, 반정부적 인사, 기독교인 등과 함께 반정부연합전선을 형성해 전국에 유혈 폭력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종교계는 목요기도회, 인권회복기도회 등을 통해 구속자 석방을 촉구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이를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711일 사법부는 민청학련 및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 판결했다. 관련자 23명 가운데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대완, 도예종 등 8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무기징역이 7, 징역 20년이 12, 징역 15년이 6명이었다. 이들은 항소했으나 기각됐다. 이들이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한 최후진술은 물론 변호인의 변론 내용은 일절 조선일보에 보도되지 않았다.

 

197548일 대법원은 7명의 사형을 확정했다. 그리고 하루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유신정권은 이들의 시신마저 유족들에게 인도하지 않고 화장해 어딘가에 뿌렸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선포했고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한겨레 2007124일자 기사

 

조선일보는 이 소식을 어떻게 전했을까. 411도예종은 조국이 공산주의 아래 통일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고, 다른 7명도 자신의 사상적 신념과 연관된유언을 남겼다고 비상군법회의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지만 이 내용은 사실무근의 작문으로 판명됐다.

 

 

 

 

 

세계 최악의 사법살인, 조작부터 사형까지 박정희 작품

김정남의 증언, 박정희 시대 인혁당 재건위 사건 <>11.11.14 한겨레

 

 

 

1964년 8월 중앙정보부에 의해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의 배후세력으로 몰려 구속된 이른바 ‘1차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도예종·박현채(앞줄 맨 오른쪽과 둘째), 박중기(뒷줄 왼쪽 둘째) 등 12명이 반공법 위반으로 실형을 받았지만 ‘인혁당’의 실체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19641차 인혁당 사건 정권 퇴진운동 일자 용공조작 검사들 양심상 기소 못해

 

10년 뒤 민청학련 배후올가미 대법판결 18시간 만에 8명사형 재심기회 뺏고 진술 조작고문흔적 감추려 주검 탈취도 그 배후엔 박정희 있었다. 박정희 극형에 처할 수 있다수사과정도 직접 보고받아 훗날 술 취해 후회했다기록 ‘197549’,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했다. 이날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도 가장 어두웠던 하루, ‘야만의 날이었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정권의 살인행위가 벌어진 날이다. 도예종 · 여정남 · 김용원 · 이수병 · 하재완 · 서도원 · 송상진 · 우홍선, 무고한 사람들을 여덟 명씩이나 서둘러 처형한 이 장면은 차라리 찢어버리고 싶은 역사의 한 장이다.

 

20년이 지난 954, 한 방송사의 근대 사법제도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현직 판사 315명이 인혁당 사건을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꼽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느 누구 하나 공개적으로 그 잘못을 반성하거나 그 수치를 고백한 적은 없다.

 

강신옥 변호사의 사법살인예언

7548일 오전 10, 대법원 전원재판부(재판장 민복기)는 피고인은 물론 변호인조차 출석하지 않은 가운데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 등 39명에 대한 판결문을 10분 동안 읽은 뒤 상고를 기각한다는 주문으로 재판을 끝내고 퇴정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법살인은 이렇게 간단히 확정됐다. 한순간 어안이 벙벙했던 방청석의 가족들 사이에서 분노와 비통의 절규가 쏟아졌고, “전부가 조작이다” “이것이 재판이냐는 항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때 법정에서 본 피고인들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74711, 강신옥 변호사는 여정남 등이 관련된 민청학련 사건 결심공판에서 변론을 통해 사법살인을 예언했다. “법은 권력의 시녀, 정치의 시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나, 본인은 법의 임무는 정의를 실현시키는 데 있는 것이라는 이상주의적 견해를 믿어왔습니다. 이번에 이 사건에 관여하면서 본인은 법의 기능에 대해 크게 실망하였고, 과연 법은 정치나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느끼게 되었습니다.지금 검찰관들은 나라 일을 걱정하는 애국학생들을 내란죄,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등을 걸어 빨갱이로 몰고 사형이니 무기징역이니 구형하고 있습니다. 증거도 없이 형식적 절차만으로 피고인들에게 사형까지 구형한다면 이는 우리의 기초적인 법 감정인 정의의 이념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재판이어서 결과적으로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법의 이념으로 처단하려는 사법살인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197548일 학생운동조직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돼 구속된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상고심 공판에서 민복기 대법원장이 8명사형, 무기 9명 확정판결문을 읽고 있다.

 

 

 

이 변론 때문에 강 변호사가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 몇 달 뒤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이 전격 집행되는 충격적인 사태가 진짜로 벌어진 것이다. 사실 대법원 판결 이전부터 피고들에 대한 사형집행 계획은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인혁당 사건을 수사 지휘한 당시 중정 6국장 이용택은 훗날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곧바로 (사형)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이미 국방부에 전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서울구치소의 교도관들도 48일부터 퇴근하지 못하고 대기했고, 수감자들 사이에는 다음날 처형당할 것 같다는 예감이 번지고 있었다. 이수병 등 8명은 이튿날 아침 49일 전격 사형 당했다. <보도사진연감>

 

박정희 정권은 피고인들의 재심 기회를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유언(사형집행 때의 최후진술)조차도 위조했다. 도예종은 조국이 하루속히 적화통일 되기를 바랄 뿐이라 했다고 보도됐지만, 입회 교도관은 통일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한마디만 했다고 증언했다. 8명 모두가 종교의식을 거부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교도관들은 그런 이야기를 그 누구한테서도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천주교계의 구명운동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변조한 것이다. 정권은 주검까지 빼앗았다.

경찰은 사형집행 다음날인 75410, 연미사를 올리기 위해 함세웅 신부의 응암동성당으로 향하던 송상진의 주검을 탈취하려고 녹번동 삼거리에서 4시간20분 동안 승강이를 벌이다, 크레인까지 동원해 영구차를 강제로 끌어가 일방적으로 화장 처리했다.

 

이를 막으려던 문정현 신부는 영구차 바퀴에 깔려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고 지금껏 장애를 겪고 있다. 서도원의 가족도 응암동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올리려 했으나, 경찰에서 관을 실은 차를 고향 창녕으로 몰고 가는 바람에 허사가 됐다. 이수병의 주검은 손톱·발톱·발뒤꿈치와 등에 시커멓게 탄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을 함 신부가 흑백사진으로 찍어 외신에 공개했다. 경찰의 주검 탈취 소동은 이런 고문 흔적을 감춰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장례미사 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인혁당 사건 조작 의혹의 증폭과 국민적 항의를 차단·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일·최고의 범죄자는 박정희

1, 2차 인혁당 사건은 모두가 정권 차원의 조작사건이었다. 64년의 1차 사건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박정희 군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위기를 느낀 정권이 63일 계엄령을 선포한 데 이어 814일 검찰총장 신직수가 북괴의 지령을 받고 있는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이 학생들을 조종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고 발표함으로써 비롯됐다.

 

하지만 41명이 구속된 이 사건을 송치 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 장원찬 · 최대현 검사는 95일 증거불충분으로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며 공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이에 신직수는 당직검사 정명래를 통해 이 가운데 26명을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로 기소했고 이에 반발해 이용훈 · 김병리 · 장원찬 검사는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에서도 고문에 의한 조작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면서 검찰은 재수사를 통해 12명만 국가보안법이 아닌 반공법으로 재기소함으로써 애초의 발표를 뒤집었다. 사실상 반국가단체로서의 인혁당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런데 10년 만에 인혁당 사건이 다시 등장했다. 64년 사건을 지휘·주도했던 검찰총장 신직수와 중앙정보부 수사과장 이용택이 각각 중정부장과 수사6국장으로서 인혁당 재건위사건을 조작해낸 것이다. 2차 사건의 조작은 1차 때 실패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강했다. 전 중정부장 김형욱의 회고록에도 재건위 사건을 박정희와 이후락의 지령을 받은 신직수 그리고 그의 심복 이용택은 10년 전에 문제 되었다가 증거가 없어서 석방한 사람들을 다시 정부 전복 음모혐의로 잡아넣었다고 적고 있다.

 

 

 

19641016일 당시 검찰총장 신직수가 ‘1차 인혁당 사건’ 14명에 대한 공소 취하를 밝히고 있다. 주임검사들의 서명 거부로 구속에 실패한 그는 744월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또다시 인혁당 재건위사건을 조작해냈다741010일 목요기도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오글 목사는 설교를 통해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도 아무도 그들을 구출하려 하지 않는다.’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이 설교로 인해 바로 이튿날 중정에 연행당해 조사를 받았고, 그 전말을 <중앙정보부 연행기>에 고스란히 남겼다.

 

아래층에 있는 이용택 이라는 사람의 사무실로 나를 데려갔습니다. 그는 64년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으며, 인혁당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됐으나 정보부가 그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할 증거를 잡지 못했다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또 74년에 다시 그들이 인혁당을 조직,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고 했습니다. 미스터 리(이용택)는 방향을 바꾸어서 왜 한국 정부가 이 8명을 처형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장광설을 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공산당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공산당과 전쟁 중이며 싸움터에서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공산당과 싸우고 있으며 인혁당은 공산당이기 때문에 죽여야만 합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토론을 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용택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인혁당 사건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어서 한창 수사가 진행 중일 때에는 신직수 부장과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보고를 드렸다고 털어놓았다. 박정희 역시 75221일 문화공보부를 연두 순시하는 자리에서 ‘2·15 조치로 풀려난 사람들에 대해 격앙된 목소리로 공개적인 탄압지시를 했다. “이들은 긴급조치가 아니더라도 국가보안법으로 극형에 처할 수 있는 자들인데도 감옥에서 개선장군처럼 만세를 부르고 나왔다”, “민청학련 사건은 이들(인혁당)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 명백한데도 일부 정치인들은 이를 부인하고 이들을 동지니 애국인사라고 하는데 이렇게 해도 법에 안 걸리는가, 법무부와 중앙정보부는 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합법적인 정부를 뒤집어 엎으려 했다면 내란음모죄이고 이는 어느 나라 법에서든지 극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등등등.

이로 미뤄볼 때 인혁당 사건 조작과 탄압을 주도한 것은 신직수와 이용택의 중정이었지만, 그 배후에서 사법부에 대한 압력과 전격적인 사형집행을 지시한 것은 바로 박정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운데)가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서 개최된 박정희 대통령 제막식에 참석했다.(사진=경북도 제공)

 

그런데 박정희는 애초부터 인혁당이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최근 우연히 민청학련계승사업회에서 펴낸 <19744>(2004·학민사)에서 박정희가 만년에 술만 취하면 울면서 인혁당 관련 8명을 사형시킨 것을 후회했다는 기록을 읽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구명에 앞장섰던 생전의 윤보선 전 대통령이 박정희 측근한테서 들었다는 얘기다. 만약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곧 그가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럼에도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여 사법살인을 강요하고, 서둘러 사형집행을 지시했다면 인혁당 사건의 유일 · 최고의 범죄자는 박정희라 할 수 있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 사회수석]라고 끝을 맺고 있듯이,

이로써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 대한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고,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되면, “과연, 그 새로운 시대가 진정으로 밝고 맑은 시대가 될 수 있겠느냐?”하는 것이다. 해서, 필연적으로 밝고 행복할 유구한 미래를 맞을 것인가? 그에 반하여 암울한 시대를 그렁저렁 살다가 인류의 종말을 맞을 것인가라고 하는 양대 기로에서도 변함없는 행보로 과거와 같은 패악한 정치행보를 답습하려는 박근혜 에게 그가 자신이 뇌까리듯 진정으로 새로운 시대를맞이하고 싶고, 그 스스로가 내 뱉은 말들이 추호도 거짓이 없다면, 그에게 정치인으로써가 아니라, 이 시대에서 희망차고 활기차게 격동적으로 발전될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하여 유일무이한 중재(仲裁)인으로 살아감으로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과오를 씻어내는 동시에 새 시대로의 장을 엶에 있어 한 획을 굵게 긋는 족적으로 남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 간절히 권고하는 바이다. 이 시대야 말로 급격하게 달려드는 격동의 시대를 마치 노련한 윈드서핑(windsurfing)선수가 서핑(surfing)을 하듯 순간순간에 몸의 중심을 잘 잡아 기기묘묘한 테크닉(technic)으로 사회에 널려 있는 발달의 상한점에 다다른 문물들을 응용조합 함으로, 오늘날의 인류수명을 100세 시대라고 하고 있으나, 그건 불과 몇 년도 이어지지 못할한시적인 시대상임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에 의학 발달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인류를 100세 시대로 이끌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겨우 간난 아기가 눈을 뜨려는 시추에이션(situation)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오늘에 민주주의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종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범부들로서는 감히 넘겨다볼 수 없는 방대한 량의 육법전서라는 것으로 개개인에 권익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 걸고 있으나, 이 얼마나 교활하고 간특(姦慝)하기 이를데 없는 구실인가? 사실 육법전서(六法全書)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잘 짜여 진 거미줄에 불과한 것이지 인간의 삶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들의 통행이 빈번할 수밖에 없는 길목에 드리워진 것으로 접착력이 매우 강력한 거미줄로 그 것을 보지 못한 이는 어김 없이 걸려들 수밖에 없는 먹이사슬에 지나지 않는 올가미와 같은 거미 줄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활함에 있어 보다 편하게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법제라고 한다면 남녀노소, 지식을 많이 알고, 모르고를 막론하고 일반적인 상식이 통함은 물론이려니와 그 누가되었든 법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어야 비로써 올바른 법제이지, 국민들을 고도에 지식을 함양한 법조인으로라도 만들 요량이 아니라면, 구태여 저렇듯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법제로 지었다고 하는 것만 보더라도 힘 있는 자와 가진 자들을 위한 보호막이 아닌가? 뭐야? 의회정치? 참으로 그럴싸하게 들려지는 어구가 아닌가? 그렇듯 미혹되어 오늘의 어려움을초래하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같은 것들의 모체인 민주주의를 말살하여야 하는 것이다. 허나 문제는 이것만으로 끝날 수없는 것이, 이 같은 방패와 우산을 뒤집어쓰고 이제까지 온갖 비리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단죄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 같은 것들을 해결하자면육법전서만큼이나, 그 량 또한 방대하겠는가? 그러하니 국가와 국민을대상으로 저지른 행보만큼은 철저하게 규명하고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미래에 또다시 답습됨을 원천봉쇄하는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일벌백계의 차원으로 다뤄져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필히 거쳐야 미래의 행보가 그 누가 되었든 간에 순탄하게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것이며, 오늘과 같이 위정자들로부터 야기되어오던 제2 3 에 불협화음은 더 이상 발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래에 기고된 내용과 같이 기고한 글에서와 같은 과오를 어떤 모양으로든 산뜻하게 청산하지 않고, 덮어 버리고 지나친다고 한다면, 정작 우리나라의 유구하여야 할 미래는 결코 밝고, 맑은 국가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고 하는 또 하나의 진리라는 사실을 진솔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독일 학자가 4대강을 비유하여 한 말 가운데 한번 미친 짓을 하면 계속 미친 짓을 하게 된다라는 말과 같이 선대가 저지른 비리로 얻은 재산을 사수하느라, 아래 [<부산일보>사태 확산, 사장이 윤전기 세워 인터넷 판도 폐쇄, 노조 "정수재단, 실질적으로 사회 환원해야"

 

 

 

인혁당 사건 대법원 판결문 일반에 첫 공개

올해는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처형된 지 30주기가 되는 해다.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은 197548일 선고가 내려진 다음날 바로 사형 집행에 처해졌다.

 

30년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인혁당 재건단체 및 민청학련 사건>에 관한 대법원 판결문이 지난 48일 대법원 홈페이지(http://www.scourt.go.kr) 종합법률정보에 공개되어 누구나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우연히도 선고가 내려진 지 딱 30년이 되는 날에 공개된 것이다.

 

대법원 판결문은 보통 전원합의체 선고 직후 판례공보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는 데 법원은 그 판결문을 “1975421자 법률신문 제1104호에 전문개재 되었으므로 본보에는 게재치 않음이라며 그해 발간된 <법원 판례공보>에 싣지 않았다. 대법관 전원이 합의에 참여한 전원합의체 판결을 공보에 싣지 않은 것은 관례를 벗어나는 일이다.

 

늦었지만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대법원은 이 판결문을 포함하여 1973년부터 1982년 사이에 선고된 전원합의체 판결문 가운데 <법원 판례공보>에 실리지 않은 판결문들을 이번에 추가로 공개했다. 법원도서관은 전자 데이터베이스화 과정에서 우연히 누락분이 발견된 것을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내부 협의를 거쳐 공개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지난 2002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은 중정의 각본에 의한 조작이라고 발표하면서 고문사실을 증언한 수사관과 교도관의 진술을 공개했다. 유족들은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신청했지만 2년 반째 아직 재심 여부조차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국가정보원은 올 2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이 사건의 재조사에 착수했다.

 

대법원은 이 판결문에서 [대통령긴급조치위반 · 국가보안법위반 · 내란, 예비, 음모 · 내란, 선동 · 반공법위반 · 뇌물공여] 등 혐의로 기소된 서도원씨 등 피고인 38명중 36명이 낸 상고를 이유 없다며 기각했다.

 

1975421일자 <법률신문> 11045~12면에 대법원판례 특집으로 인혁당 재건단체 및 민청학련 사건판결문 전문이 실렸다. <법률신문>이 소수의 관계자들만 보는 전문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인혁당 관련한 판결문 전문이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대법원 1975.4.8. 선고 743323 판결

대통령긴급조치위반 · 국가보안법위반 · 내란, 예비, 음모 · 내란, 선동 · 반공법위반 · 뇌물공여

판시사항인혁당 재건단체 및 민청학련 사건

전 문

피고인,상고인서도원 외 37

변 호 인변호사 조성기 외 9

원심판결비상고등군법회의 1974.9.7. 선고 74비고군형항제 14, 15,1 6 판결

주 문원판결중 피고인 김영준, 같은 송부호에 대한 부분을 파기하고 이 부분을 비상고등군법회의에 환송한다.

 

나머지 피고인들의 상고는 이를 모두 기각한다.

 

피고인 김종대, 같은 황현승, 같은 이창복, 같은 전재권, 같은 조만호, 같은 정만진, 같은 이재형, 같은 임구호, 같은 황인성, 같은 서중석, 같은 이근성, 같은 정윤광, 같은 이강철, 같은 정화영, 같은 임규영, 같은 김효순, 같은 유근일, 같은 정상복, 같은 이직형에 대한 상고후의 구금일수는 이를 전부 위 각 피고인에 대한 징역형에 각 산입한다.

 

이 유(제목만 소개하고 내용은 생략

1. 헌법위반의 주장에 관하여

2. 법률위반 내지 법리오해의 주장에 관하여

3. 비공개재판의 위법성에 관하여

4. 공판심리절차상 위법이 있다는 주장에 관하여

5. 증거조사절차에 위법이 있다는 주장에 관하여

6. 채증법칙 위배의 주장에 관하여

7. 이유불비의 위법이 있다는 점에 관하여

8. 심리미진, 석방권불행사, 공판중심주의 및 자유심증주의 위배의 위법이 있다는 점에 관하여

9. 양형부당의 점에 관하여

10. 상고이유 중 피고인들이 주장하는 부분으로서 피고인들은 본건으로 인하여 구금된 이후 변호인등과 접견도 할 수 없고 교통권을 금지 내지는 제한을 받았으므로 이와같은 상황에서의 재판의 심리는 법률위반으로 따라서 원판결은 파기를 면치 못할 것이라 주장하므로 이점에 대하여 판단한다.

 

I. 대법원판사 양병호, 대법원판사 김윤행의 보충 의견

II. 군법회의법 제425조에 관한 대법원판사 이일규의 의견

III. 대법원판사 임항준의 보충의견

대법원판사 민복기(재판장)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경남 의령군 부림면 손오리 866(손오로236 )

 

인혁당 피해자 헌쇠박중기 선생 12.9.15 민족21

 

 

 

인혁당 사건 핵심 피해자인 '헌쇠' 박중기 선생과 12일 여의도 한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극심한 고문으로 양쪽 고막이 다 터져버린 사람도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박중기 선생.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인혁당 관련 발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12일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인혁당 관계자들과 유가족들이 규탄 기자회견을 가졌다. 영정을 든 부인들의 뒷줄에 조용히 서 있던 한 노신사의 표정도 한없이 어두웠다.

 

헌쇠박중기(78) 선생. 19641차 인혁당 사건 당시 7명의 수형자 중 한 명이었고, 2차 인혁당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 당시 혈육 같았던 동지들을 떠나보내고 천행으로 목숨을 건진 뒤 유족들과 함께 긴 침묵의 세월을 견뎌온 4.9통일평화재단 이사이다. 헌쇠는 고 이돈명 변호사가 고철 사업을 하던 시절 붙여준 선생이 아끼는 호다.

 

지난해 ‘4.9통일열사 36주기 추모제이후 <통일뉴스>와 첫 인터뷰를 가졌던 선생은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관련 발언에 우려를 표하며 이날 새누리당 당사 앞 기자회견에 앞서 여의도에서 두 번째 인터뷰에 응했다. [첫 번째 인터뷰 보기]

 

무엇보다 박근혜 후보가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한 대목에 대해 그는 그것은 아마 4.19세대 후기에 들어온 박범진일 것이라며 강령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며 당시 정황을 설명했다.

 

그는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이 41명이고 참고인 조사도 여러 명이 받았지만 강령이나 선서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 때는 무자비한 때이니까 별별 짓을 다해서 무슨 건덕지라도 찾으려고 했을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견디다 못해 자결한 사람도 있고 완전히 늑골이 나가고 양쪽 고막이 다 터져버린 사람도 있고, 자결하려고 자해행위한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이 많다.

 

그럼 거기서 무슨 정강.정책이든 비슷한 말이라도 하나 나왔어야 되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만 유일하게 선서를 했다, 뭐 정강정책이 있었다 하는데 나는 모를 일이다.

 

그 사람이 무엇인가 착각을 했든지 자기네들 서클 안에 있던 무슨 일들을 다르게 해석한 건지 아니면 들은 이야기를 침소봉대했든지 그런 거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지 않느냐.

 

또 하나, 검찰 취조를 할 때 20일간을 꼬박 밤샘을 하다시피 했는데도 검사가 하나도 그런 비슷한 근거를 못 찾아내니까 기소를 못 하겠다 했고 사표까지 내던졌다. 2, 3중 걸렀는데도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과장됐다는 거다.”

 

그는 “41명 중 최종적으로 형을 산 것은 도예종 선생을 비롯해 7명이었다강령을 모른다. 판사도 이 사람이 무게가 있다 싶어 41명 중에서 실형을 줄 만큼 그때 중심핵에 속했던 나도 모르는데 알 사람이 별로 없다고 확인했다.

 

1차 인혁당 사건 핵심 관계자의 입을 통해 당시 인혁당에 강령이나 조직가입 선서가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4.9통일평화재단 등이 12일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개최한 규탄 기자회견 모습. 박중기 선생도 참가했다. 뒷줄 왼쪽 노란 중절모.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그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중정)에 의해 어떻게 엮여졌는지, 특히 2차 인혁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들이 왜 사형에까지 처해지게 됐는지를 당시의 시대 상황과 혁신계 진영의 흐름을 통해 상세히 설명했다.

 

4.19혁명으로 분출한 민주화의 열망을 짓밟고 들어선 5.16쿠데타 세력은 당시 꿈틀거리던 혁신계를 짓밟았고, 중정은 그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이들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엮어 기소했지만 검찰이 사표를 내며 무죄를 주장할 정도로 유죄를 입증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중정의 고문사실이 폭로돼 국회 진상조사단이 감옥으로 그를 찾아오는 등 사회 문제화 됐고, 톡톡히 낭패를 본 중정은 벼르고 있다 2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이들을 사형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2차 때도 조직을 만들거나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구체적으로 조직이 없다. 2차도 1차와 같다무모하게 누가 그래 조직 만들어 이름 붙이고 강령 만들어 알리겠느냐. 그건 합법적일 때 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보복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혁당이라는 조직이나 강령은 없었지만 4.19 공간에서 확인됐던 핵심 활동가들이 5.16 군사쿠데타로 구속되고 피신했지만 6.3사태 등을 계기로 연계망이 형성돼 활동했다는 증언도 덧붙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까 선거 때 좀 자유스럽게 왕래하면서 AB를 알게 되고 BC있는 곳을 알게 되고 CA하고 다시 연결되고, 그렇게 하다 보니 4.19 공간에 알았던 사람들이 다 거점을 알아서 서로 소통이 됐다. 모이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뭣이고 이렇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면, ‘지금 정당규제가 풀리고 나면 우리는 정당을 했을 때 어떤 노선을 해야 하냐이런 이야기를 한 거다. 앞으로 나아갈 길, 민족이 살아가야 될 노선 이야기를 한 것이다.”

 

언론과의 인터뷰도 피한 채 동지들의 남겨진 가족들을 챙기며 침묵의 바다를 건너온 그는 2002년에야 비로소 열사들의 제사장이 되어 민족민주열시.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의장으로 첫 공식활동을 시작했고, 2008년 무죄 판결과 국가 배상을 받은 유가족들의 출연금으로 설립된 4.9통일평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그는 죽 한 그릇 있으면 그것도 같이 나눠먹는 것이 도움이지, 내가 돈 벌어서 같이 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그걸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서... 애들이 헐벗고 그러는데 옳게 도와주지도 못했다고 눈시울을 붉히고 옳게 도와주기나 했으면 모르지만 그 양반들이 작은 걸 가지고 자꾸 고마워라 하면서 그걸 이야기하고 다닌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못했다고 오히려 미안해했다.

 

3차례 체포돼 고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실신했다는 그는 당시 중앙정보부가 보복성 매타작으로 사람을 못 쓰게 만들었다면서도 나도 거기에 끼어들어 갈런지 모르겠다. 나는 내 이야기 못하겠고라고 시종 자신을 낮췄다.

 

그러면서도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사건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류의 발언을 한데 대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공주같이 자라 가지고 세상일은 모르고 아버지 하는 것은 모조리 옳은 것으로 알고만 살았는데 그래도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이라고 격분했다.

 

그는 이번에 답한 것은 박근혜라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것이다. 얼마나 무식한지를. 이런 사람을 대통령 된다고 해서 뒤에서 미는 사람들 모두 같은 사람 아니겠나, 나는 그렇게 본다. 참 불쌍한 사람들이고, 우리 백성들 잘못하며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우려를 표했다.

 

지난해에 이어 헌쇠 박중기 선생과의 두 번째 인터뷰는 12일 낮 여의도 한 사무실에서 진행됐으며, 인터뷰 내용 중 당시 시대상황 설명 일부를 제외하고 가급적 모든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중심핵에 속했던 나도 모르는데 알 사람이 별로 없다

인혁당 사건이 정치권에서 쟁점으로 떠올랐다. 어제 박근혜 후보가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언론에서는 대체로 박범진 전 의원의 증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은 아마 4.19세대 후기에 들어온 박범진일 것이다. 서울대 문리대 안에 4.19전부터 학생들끼리 청조회라든지 여러 서클 비슷한 게 존재했는데, 그 인맥을 타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오병철, 서정복, 황건 이런 선배들과 접한 게 있었던 걸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나도 안다. 깊은 속내는 모르고 그저 성실한 사람이고 또 나중에 조선일보에 있고 민정당으로 가서 국회의원을 한 것으로 안다. 서울신문에 가서 논설위원을 맡았다가 민자당에 가서 지역구 출마해서 당선되고 그러면서 차츰 사람이 변한 것 같다.

 

박범진 전 의원이 1차 인혁당에 강령과 규약이 있고 자신은 입당선서도 했다고 주장했다.

자기네들끼리 작위적으로 한 지는 모르겠는데 강령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왜냐하면,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게 처음에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이 41명이다. 그런데 41명 뿐 아니고 거기에 관계되는 여러 사람들을 참고인으로 불렀다.

 

그 때는 무자비한 때이니까 별별 짓을 다해서 무슨 건덕지라도 찾으려고 했을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견디다 못해 자결한 사람도 있고 완전히 늑골이 나가고 양쪽 고막이 다 터져버린 사람도 있고, 자결하려고 자해행위한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이 많다. 그럼 거기서 무슨 정강. 정책이든 비슷한 말이라도 하나 나왔어야 되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만 유일하게 선서를 했다, 뭐 정강정책이 있었다 하는데 나는 모를 일이다. 그 사람이 무엇인가 착각을 했든지 자기네들 서클 안에 있던 무슨 일들을 다르게 해석한 건지 아니면 들은 이야기를 침소봉대했든지 그런 거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지 않느냐. 또 하나, 검찰 취조를 할 때 20일간을 꼬박 밤샘을 하다시피 했는데도 검사가 하나도 그런 비슷한 근거를 못 찾아내니까 기소를 못 하겠다 했고 사표까지 내던졌다. 2, 3중 걸렀는데도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과장됐다는 거다.

 

641차 인혁당 사건 때 연루 됐나? 41명 중 한 명이었나?

그렇다. 나는 들어가서 형을 1년 살았다. 다 나가고 최종 기소된 사람이 13명인데 11명이 무죄를 선고받고 나왔고 그때 나도 나왔다. 그리고 고법에 항소한 게 뒤집어져서 유죄가 돼 법정구속이 돼서 7명이 형을 살고 나머지 6명은 집행유예로 나왔다. 41명 중 최종적으로 형을 산 것은 도예종 선생을 비롯해 7명이었다.

 

그러면 7명 중의 한 명이었던 선생은 강령을 보거나 입당선서를 한 적이 없었나?

강령을 모른다. 판사도 이 사람이 무게가 있다 싶어 41명 중에서 실형을 줄 만큼 그때 중심핵에 속했던 나도 모르는데 알 사람이 별로 없다.

 

선생님도 고문을 많이 당했나?

그때는 6.3 때니까 계엄령 상황이어서 살벌할 때다. 그리고 군사정권이 옷만 바꿔 입고 들어섰으니 수사기관의 무자비함은 말할 수가 없다. 중앙정보부에 갔다면 죽은지 산지 잘 모를 때고 무법천지일 때다. 그 시절에 우리가 잡혀들어 갔으니. 대형사건이다. 도예종 선생이 내가 자취하던 방에 와서 한 일주일 묵기도 했다.그때는 (생명이) 갔다왔다 했다. 졸도도 하고, . 나는 세 차례 갔는데 두 번은 졸도를 몇 차례씩 했다. 그걸 당한 사람들은 대개 옳지(온전치) 않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2차 인혁당 사건은 8명이 사형까지 당했는데 과연 2차 인혁당 사건의 실체가 있느냐? 사실 이번 두 번째 인터뷰도 이 문제에 대해 듣고 싶어서이다.

그전에 1차 대담할 때도 약간 비쳤는데, 우리가 기준을 두는 것은, 가치를 두는 것은 4.19였다. 이미 분단사회가 돼서 60년대니까 15년 후 아닌가. 군정 3년을 제하고 난 뒤에 대한민국 분단정권을 세운 게 이승만이다. 그간에 6.25 치르고 하면서 10여년 집권했는데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게 지상에서 가장 질 나쁜 나라, 하등한 나라로 사람이 사는지 야만이 사는지 모를 정도였다. 4.19가 나서 민족 자존심을 찾은 거다. 그런데 그 중심이 학생이지 그걸 이끌 정당은 9개월 전에 조봉암이 죽고 진보당은 깨져버렸으니 혁신계의 구심점이 없었다. 그래서 중심이 되는 게 혈기왕성한 청년단체다.

 

어른들을 모시고 밤낮없이 뛰었다. 4.19가 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남쪽을 재건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고 정신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혼신을 다했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나자 모두 에누리 없이 단속을 해버렸다. 우리만 외톨이 되고 고립됐다. 하나 없이 다 잡혀 들어갔다. 나 같은 사람은 도망갔다. 당시 우리가 합법적으로 했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 그래도 그걸 모두 10, 15, 20, 사형 뭐 이래서 다 가뒀다.

 

, 오늘 우리 사형 받았어

 

2차 인혁당 사건 때도 핵심으로 찍혔나?

내가 그때 주변에 장훈고등학교에선가 선생하고 있던 이재오니 이런 젊은이들이 좋다고 찾아오고 나도 간혹 그들 집에 갈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감시를 받고 있는 차인데 너무 분다하게 나한테 오는 게 좋지 않아서 수원에 있는 김정태라고 서울대 농대를 다니다가 4.19때 들어가서 감옥 살고 나온 사람인데, 이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른 짓을 하다가 들통이 난거다. 경찰을 치고 도망가다가 김정태가 권총에 발목을 맞았다. 발포를 할 정도니까 사건이 커진 거다. 잡혔는데 캐물으니까 나도 관계가 있고, 나는 이미 전과가 있는 사람이 돼 놓으니 내가 무슨 지휘자로 되어 있었다. 저쪽에서 그렇게 오해한 거다.

 

여러 날 감시하다가 날 끌어간 것 같다. 남산 치안본부 대공분실, 지금은 치안본부지만 그때는 치안국이다. 대공분실에 끌고 갔는데 느닷없이 사람을 하체를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는 거다. 내가 못 서니까 자기네들이 업고 다니면서 화장실도 다니고 나중에는 옷을 가지고 와 바지가 벗어지지 않으니 가위로 잘라내서 벗기고 집에서 가져온 풍덩한 바지를 입고. 내가 뭐 일하러 다니던 것도 중도파직 돼 버렸고.

 

9월 하순인지 10월 초순인지 끌려갔는데 경찰에서 20일 가까이 있다가 검찰로 넘어갔는데 그 때 이한동이가 공안부장을 했다. 나중에 민정당 원내총무도 했던. 그래 가지고 6개월 꼭 채우고 집행유예로 나온 거다. 그때는 걸려 들어가면 조사 끝났다고 내주지 않고 어쨌든 16개월을 채우고 나서 내주니까. 6개월 만에 나온 게 419일 저녁이었다. 아침에 김용원 선생, 이수병 선생 들어가고 나는 저녁에 나오고 그랬던 거다. 그 사람들을 2차 인혁당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발표를 그렇게 안했고 민청학련이라고 했다.

 

당시는 수감자가 원체 많으니까 내방에도 독방인데 임시로 도둑놈, 잡범을 집어넣었다. 학생들은 따로 넣고. 그래서 바깥 소식이 자꾸 들어오는 거다. 학생들이 오늘은 몇 명이 나가고 뭐 어쩌고, 백기완 들어오고 장준하도 들어왔다고. 나중에 들으니까 지학순 주교도 들어온다 하고.

 

내가 나와 가지고 아흐레인가 열흘이 채 못 되는 시간에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다시 잡혀들어 갔다. 잡혀 들어가서 1차 조사를 받는데 너무 심하게 해가지고 내가 거기서 졸도를 해서 앰블란스가 오고 난리를 쳤다. 그런 사고까지 안에서 있었는데, 나중에 감이 오는 게 처음에 조서를 받은 것은 완전히 무시되고 새로 하는 거다.

 

불려 다니다 보니 이상하더라. 전혀 조서 꾸미는 것도 조서도 아니고, 수사관들끼리 하는 얘기가 이놈들 내줘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완전히 그걸 해야 한다”, “이번에는 느그 나갈 생각 하지 말라이런 식이다. , 죄가 없는데 저희가 해봐야 뭘 하겠나 싶어서 그랬는데. 나중에는 부르지도 않고 놔두다가 두 달 조금 넘어서인가 어느 날 저녁에 저녁 먹고 짐 챙겨 나오라고. 나오니까 남산으로 데려갔다. 다른 사람 조서 꾸민 걸 보여주면서 왜 너는 안했다고 하느냐?”, 말이 안 되지 않나. 나는 여기 들어앉아 있었는데 어떻게 12월에 지도부 회의를 하느냐하고. 6개월 감옥에 있어서 공백이 있으니 이제 안 맞는 거다. 그래서 나중에 어긋나겠다 싶으니까 빠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어떻든, 하루는 기다리고 있는데 구형받고 들어오더라고. 김종대 선생이 , 오늘 우리 사형 받았어”, 장난삼아 하는 거다. 복도를 지나가면서. 아무리 계엄령이고 협박이지만 사형이라는 게 말이 끔찍하잖나. 복도에서 서로 아는 체 하고 통방을 못하게 돼 있으니까. 건성으로 , 걱정하지 마라”, 그랬거든. “그래 못한다. 어떻게 사람들을 마음대로 그래 하냐”. 그리고 모두 방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리고 구형을 받고 며칠 후에 우리는 나왔다.

 

학교 다닐 때 담임까지 수사를 다 했으니까

2차 인혁 관계자들을 잘 아실텐데, 그 분들이 조직사건으로 엮일만한 게 있었나?

63년에 박정희가 정권을 쥐고 들어와서 군인들이 옷 벗고 들어오니 나라살림에는 등한할 거 아니겠나, 잘 모르니까. 힘을 가지고 관료들만 두드려 조지는 거다. 중앙정보부라는 절대권력이 나는 새도 부를 정도로 힘이 쎘으니까. 한일회담 문제가 나오자 그해 가을 방학 전에 기동을 하다가 3월달 개학되자 문제의 시작이 김종필이가 오히라 메모를 써가지고 구체화됐다. 64년에 학교는 개학하면서 계속 농성만 하니까 문이 닫혔다.

 

그때 김중태, 김도현, 현승일이라는 학생 3인방이 있었다. 3개 신문 톱에 맨날 이 세 사람이 오늘 서울광장에서 무슨 연설했다 그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까 선거 때 좀 자유스럽게 왕래하면서 AB를 알게 되고 BC있는 곳을 알게 되고 CA하고 다시 연결되고, 그렇게 하다 보니 4.19 공간에 알았던 사람들이 다 거점을 알아서 서로 소통이 됐다. 모이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뭣이고 이렇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면, ‘지금 정당규제가 풀리고 나면 우리는 정당을 했을 때 어떤 노선을 해야 하냐이런 이야기를 한 거다. 앞으로 나아갈 길, 민족이 살아가야 될 노선 이야기를 한 것이다. 거기에 가령 내가 남정현이란 사람을 안다면 남정현은 고향 후배가 있을 것이고 서울대학교 친구도 있을 거고, 또 문인이니까 문인세계에 가서 자기 평소에 친한 사람한테는 이야기를 하니까 자꾸 퍼져가지고 동의를 받는 거다.

 

그러던 중 도예종 선생이 5.16때 지명수배가 내리는데 집에서 잡히지 않고 서울에 와서 기피를 하고 있었는데, 학생 민통련 속에 조금은 티나게 한다고 하는 김정강의 불꽃회에 김정남이 있다. 김정남이 몇몇과 핵심이 되서 학습도 하고 이랬던가 본데, 처음에 잡으러 갔을 때 도망을 갔는데 하숙집에 가 뒤져보니까 일기책이 압수된 걸 읽어보니까 도예종 이름이 나온 거다.

 

존경하는 선생님은 이럴 때 어떻게 판단하실까?’, 이런 게 나왔다. 그래서 도예종이 지시했다고 5백만원인가를 걸고 지명수배했다. 김정강이 하고 둘을. 그런데 근처에 있을 것 같은데 수사관들이 감이 있지 않나. ‘, 이게 옛날 서류 압수한 민민청(민족민주청년동맹), 통민청(통일민주청년동맹) 이놈들이 박혀있는 것 보니 이 계통 수사해야 한다’. 그래서 뒤진 거다. 뒤지다가 인맥을 찾아서 모조리 찾아 걸린 게 중심인물 41명이다.

 

나머지는 얼만지 모른다. 친척 뭐 해가지고 다 뒤져내는 거다. 학교 다닐 때 담임까지 수사를 다 했으니까. 부지기수다. 그렇게 잡히고 한 게 1차 인혁당이다. 구성을 해보니 긴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가면 개성이 다르니까 약한 사람은 뺨도 한 대 안 때려도 미리 겁을 내 다 불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친구 잘못 불다가는 망신시키니까 그런 피해 안 입히려고 고문을 더 받아야 되고. 안다고 해서 공무원 하는 친구들은 옷 벗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또 똑같이 고문을 받는데도 인간적으로 미운 사람이 있지 않겠나? 그 사람은 반쯤 죽이는 수도 있고. 병신 되기도 하고. 그랬던 게 1차 인혁당 모습이다.

 

자기네들 하자는 대로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아니다그러면 두드려 맞으니까, “그렇다 하소”. 어떤 사람은 아무리 두드려 패도 고집을 피우고 안하니까 저희들 맘대로 하고 도장 찍으라고 하니, “내가 왜 거기 도장 찍어하면서 조서 몇 시간 꾸민 걸 확 쥐어 뜯어내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런 별별 사람이 있었는데, 그래서 1차 인혁당도 사형은 안 시켰지만 희생도 많았고 평생을 지병을 가지고 병신된 사람도 있다.

 

대표적으로 사망하거나 큰 지병을 얻은 사람은 누가 있나?

송상진 선생도 옳지 않았고, 서도원 선생은 그 후에도 세 차롄가 들락날락했으니 저 사람은 분명 자기네들한테 거슬리는 사람인데 구체적으로 증거가 없으니까 온 김에 혼이나 나라일종의 보복 매타작을 해서 보내는 거다.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 거다. 나도 거기에 끼어들어 갈런지 모르겠다. 나는 내 이야기 못하겠고.

 

돌아가신 강무갑 선생은 양쪽 고막이 다 터져버리고 늑골이 나가 가지고 병원에 입원도 안 시켜주고 그 안에서 자연치유 돼 가지고 나와서 그 뒤로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인혁당은 저거 죽여야 된다생각했겠지

 

 

 

새누리당 규탄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수병 선생의 부인 이정숙 여사를 위로하고 있는 박중기 선생.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1차 인혁이 그렇다면, 2차 인혁은 조직적 실체가 있었나?

그건 자기네들 보니까 통민청 민민청이 혁신계 주류라고 알았는데 사회에 알려져 있는 명사들이 진짜가 아니고 그 사람들은 이름만 있고 실제 움직인 사람은 이렇다는 걸 5.16 나고 나서 알았다. 수사 속에서 알았는데 잡힌 사람이 몇 사람 안 된다 말이다.

 

그런데 (1차 인혁당 관계자) 잡아보니 그 사람들인 거다. 자기네들은 노다지 캤다고 생각한 거다. 신원확보만 한 것도 큰 성과다. 그 과정을 설명하면 조금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중앙정보부에서 조서를 꾸며서 의견서를 만들어서 자기들의 조사부()를 검찰에 넘기는데, 검찰에서 20일간을 아침 9시에 문을 열면 밤 1, 2시 어떨 때는 4시에 들어가고 그랬다. 대기실에서 졸고 밤 야식을 빵을 사다 넣어주고 이랬는데, 그리 조사를 해도 안 됐잖느냐.

 

그때는 검찰이고 뭣이고 모든 게 중앙정보부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검찰로서는 이 똥대가리 같은 놈들이, 아무 법도 모르는 놈들이 완전히 깡패짓을 하고 있거든. 검찰 공안부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그냥 그 권위도 인정 안하고 달려드니까, 아마 자기네들도 알력도 있었을 것이다.

 

모조리 서울대 교수니 각 대학교 경제학 교수니, 합동통신사 외신부장이니 다 있으니까 중앙정보부에서 조서를 꾸며보니 도대체 수준이 무엇을 물어도 대답을 하는 걸 알아들을 수 없는 거다. 도둑놈 잡아다 두드려 패고 옛날 빨갱이라고 수틀리면 죽여버리고 하던 그런 놈들이 수사를 하고 앉아 있으니.

 

검찰이 와서 하나하나 해보니 이 사람들은 대단히 수준 높은 사람들이다. 정치를 해도 날라리 정치가 아닌 옳은 정치를 할 사람들이다라고 존중도 받았다. 그때 신직수가 검찰총장인데 부장이 가서 기소를 할 수 없습니다”, “도장이나 찍어. 책임은 내가 질테니”, 검찰총장도 (중정에) 꼼짝을 못하니까. 그렇게 다투다가 3명이 사표냈다는 것 아니냐. 12시가 넘으면 영장 시효가 넘어 모두 내줘야 하니까 숙직검사가 공소자가 되서 기소를 한 거다. 쇼도 보통쇼가 아니다. 나라 운영에 그런 게 어디 있느냐? 똥칠할 수 있는 건 다한 거다.

 

그게 신문에 막 터졌다. 그때는 조..동이 지금처럼 안 그랬다. 그래서 국회에서도 발칵 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숨죽이고 있는데 야당에서 살판이 났다. 명분이 생겼으니까.

 

국회조사단을 꾸며가지고 조사단이 와서 우리 고문 조사하러 왔는데, 어떻게 고문했느냐?”, 맞은데 보자고 바지를 한번 벗어보겠냐고. 벗어보니 시커멓게 이게 보였다. 그래서 고문 흔적이 맞다”. 요즘처럼 칼라사진이 있으면 딱 좋았을 텐데, 그렇게는 못하고 눈으로 여러 사람이 본 걸 확인해서 국회에 보고서를 낸 거다.

 

그래서 정식으로 중앙정보부 해체해야 한다고 했다. 소위 혁명정부 구조가 무너지는 꼴이 되니까 이 사람들한테는 인혁당은 저거 죽여야 된다생각했겠지. 그런 사람들이 2차에도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들로 구성이 돼 있으니까 죽인 거다. 보복이라고 본다.

 

2차 때도 조직을 만들거나 하지 않았나?

구체적으로 조직이 없다. 2차도 1차와 같다. 그 무모하게 누가 그래 조직 만들어 이름 붙이고 강령 만들어 알리겠느냐. 그건 합법적일 때 하는 이야기다.

 

도예종 선생과 이수병 선생이 특별했던 관계인 것으로 아는데, 소개해달라.

특별한 관계는 이런 것이다. 이수병은 5.16 나고 학생 민통련으로 조선일보에 있던 류근일하고 똑같이 취급받아 (감옥)살았다. 그 사람들은 그래 가지고 68년에 나오는데 도예종 선생은 재판에서 3년형을 받아서 안양교도소로 내려가 나머지 잔여 2년 형을 살았다.

 

도예종 선생이 가보니까 이수병이라는 사람이 거기 있었다. 나이가 차이가 많으니까 서로 이야기를 한번 해보니 참 대단한 사람을 만난 거다. 그래서 거기에 혁신계 사람들이 같이 살면서 도예종 선생이 가 가지고 여때까지 했던 분위기와 전혀 다르게 분위기가 혁신이 돼 버렸다.

거기는 아마 형을 살면서도 방에 꼭꼭 가둬놓는 것이 아니고 적당한 운동시간에 잔여시간 한두 시간 화단에 가서 화초도 기르고 야채도 기르고 한다. 거기서 두 사람이 내내 붙어 있더라는 거다. 두 양반이 거기서 만나서 특별한 우정을 쌓고 자기 속에 있던 회포, 나라의 앞일,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 이런 걸 한 2년동안 논의하고 친해졌다고 하니까.

 

도 선생이 나머지 2년만 살고 이수병 보다 먼저 나왔다. 그래서 도 선생이 나를 한번 찾아왔다. 오셔서 점심을 자기가 사면서, “왜 자네는 그리 가까운 사람을 학대해?”, “왜요?”, “다른 사람이 책을 넣어주고 그러는데 책이라도 부지런히 넣어줘야지. 읽을거리가 없어서 책을 굶주리는데 그러느냐”, “, 알겠습니다”.

 

그전에 한 달에 한 번씩 꼭 가서 영치금 넣고 면회를 했는데, 그때는 김금수 선생 나, 김달수 선생 셋이서 형 살고 나와서 제재소를 했다. 그때는 형무소 아침에 가면 하루 걸린다. 안양 내려가는 교통도 안 좋고, 형무소 가면 대기해야 했다. 면회를 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고 그랬는데,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다.

 

선생과 이수병 선생도 함께 산 걸로 아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암장이라는 서클을 같이 했으니까.

감옥에서 도예종 선생이 선생 이야기를 많이 들었겠다.

그래도 내가 미더우신지 대구에서 찾아오셔서 나를 좀 보자 해서 이야기 하고.

 

그 이후에도 도예종 선생과 자주 만났나?

대구에 내려가신 후에는 자주 만나지 못하고 그 전에는 서울에서는 만나고 최종적으로는 나한테 한 열흘 숨어 있다가 나갔다. 내가 나가서 약속시간에 집에 안 들어오니까 문을 안에서 따고 나갔다. 나중에 잡혀 들어가서 (도 선생 구속 사실을) 알았지.

 

사형 당한 여덟 분과 다 친했나?

다 친하지. 여정남이만 모른다. 여정남이는 나하고 차이가 많아서.

 

 

 

박근혜라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것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고 역사의 판결에 맡겨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어린애라고 생각한다.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공주같이 자라 가지고 세상일은 모르고 아버지 하는 것은 모조리 옳은 것으로 알고만 살았는데 그래도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는 거다. 새누리당에 지금 붙어서 좋다고 하는 사람은 출세하기 위해서 줄 선 사람이지 나라 일을 위해서 아니면 박근혜가 경륜이 있어서 이 사람은 분명히 나라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고 믿고 그 사람을 따른 사람이 아니라고 본다.

 

그 사람한테 붙으면 국회의원도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고 출세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거기에 따르는 거지, 그 사람 스스로를 헤아리면 인격이나 뭣을 알고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이번에 답한 것은 박근혜라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것이다. 얼마나 무식한지를. 이런 사람을 대통령 된다고 해서 뒤에서 미는 사람들 모두 같은 사람 아니겠나, 나는 그렇게 본다. 참 불쌍한 사람들이고, 우리 백성들 잘못하며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든다.

 

2차 인혁당 사건 이후 선생의 삶은 유족들 뒷바라지 하고 살았나?

뒷바라지라고 할 게 있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죽 한 그릇 있으면 그것도 같이 나눠먹는 것이 도움이지 내가 돈 벌어서 같이 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려울 때 같이 나눠먹는 걸로 생각하고 그저 벌면 같이 먹는 걸로 생각했다.

 

그걸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서... 애들이 헐벗고 그러는데 옳게 도와주지도 못했다. 내가 돈을 번 게 몇 푼 되나? 거기다가 돈을 벌면 쓸 때는 그처럼 많더라고. 옳게 도와주기나 했으면 모르지만 그 양반들이 작은 걸 가지고 자꾸 고마워라 하면서 그걸 이야기하고 다닌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못했다.

 

 

인혁당 피해자 가족들도 고통의 세월12.9.13 경향

감시·미행·빨갱이 낙인, 일터 쫓겨나 이사 전전

 

 

 

인혁당재건위 사건 뒷이야기

인민혁명당재건위사건은 사형을 당했거나 수십 년의 징역형을 받은 피해 당사자들은 물론 그 가족들에게도 모진 고통을 가져다줬다.

 

법원행정처가 사법부 출범 60주년(2008) 기념으로 2009년 발행한 <역사속의 사법부>에는 인혁당재건위 사건 판결 이후 사건 당사자 가족들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책을 보면 이 사건으로 사형당한 송상진씨의 부인 김진생씨(82)1975년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피고인들이 공산주의자이고, 구명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강요받았다. 한복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김씨는 경찰들이 항상 주변을 감시해 빨갱이로 소문이 났다이웃들이 일감을 주지 않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고 책을 통해 회고했다.

 

무기징역을 받았던 강창덕씨의 부인은 경북 영천의 한 초등학교의 분교로 근무지를 옮겨야 했다. 20년형을 선고받았던 김종대씨의 부인은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둬야 했다고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15년형을 받았던 임구호씨의 동생 임진호씨는 형의 석방을 요구하며 민주화운동을 하다 투옥됐다. 임씨의 아버지는 남의 하늘(일제 치하) 아래 살아도 이것보다 더 혹독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황현승씨의 부인 안보형씨는 사건 직후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가 1981년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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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행정처가 사법부 출범 60주년(2008) 기념으로 2009년 발행한 <역사속의 사법부>에는 인혁당재건위 사건 판결 이후 사건 당사자 가족들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책을 보면 이 사건으로 사형당한 송상진씨의 부인 김진생씨(82)1975년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피고인들이 공산주의자이고, 구명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강요받았다. 한복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김씨는 경찰들이 항상 주변을 감시해 빨갱이로 소문이 났다이웃들이 일감을 주지 않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고 책을 통해 회고했다.

 

무기징역을 받았던 강창덕씨의 부인은 경북 영천의 한 초등학교의 분교로 근무지를 옮겨야 했다. 20년형을 선고받았던 김종대씨의 부인은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둬야 했다고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15년형을 받았던 임구호씨의 동생 임진호씨는 형의 석방을 요구하며 민주화운동을 하다 투옥됐다. 임씨의 아버지는 남의 하늘(일제 치하) 아래 살아도 이것보다 더 혹독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황현승씨의 부인 안보형씨는 사건 직후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가 1981년 세상을 등졌다. 책에 언급된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나머지 피해자 가족들도 하나같이 고통으로 점철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사형 피해자 이수병씨의 부인 이정숙씨(67)는 남편을 마지막으로 봤던 197541일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돌을 갓 지난 딸을 업고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는 이씨를 딱하게 여긴 서대문구치소 교도관이 몰래 남편과 만나게 해줬다. 교도관은 이씨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내 목이 달아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이씨는 남편을 보고 한마디도 못했다. 이씨는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으면 달려들어 무슨 말이라도 했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수병씨는 그로부터 8일 후인 4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무기징역을 받았던 이성재씨(86)는 인혁당 사건으로 아들을 잃었다. 1975년 당시 이씨를 체포하려던 중앙정보부는 이씨의 소재를 알기 위해 이씨의 아들을 고문했다. 이 고문으로 이씨의 아들은 충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이씨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아들을 치료하려 했다. 하지만 적응하지 못한 아들은 한국에 혼자 돌아와 2001년 자살을 선택했다.

 

남편 하재완씨가 사형을 당한 이영교씨(76)는 인혁당 사건으로 지금도 외롭게 지낸다고 털어놨다. 남편이 사형을 당한 뒤 이웃과 친척들은 이씨를 멀리했고 이씨는 10번 이상 이사를 다녀야 했다. 이씨는 한 많은 인생을 살다보니 지금도 다리가 떨린다이웃과 친척들이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인지 내게 연락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형 피해자 김용원씨의 부인 유승옥씨(74)1975년 남편을 잃고 난 뒤부터 중앙정보부의 감시에 시달렸다. 사복을 입은 중정 요원 2명이 유씨의 집을 지켰고, 유씨가 집을 나서면 유씨를 미행했다. 유씨는 그들은 내가 버스를 타면 버스를 탔고, 걸으면 따라 걸었다어딜 가든 나를 따라다녔다고 회상했다.

 

19648월 중앙정보부에 의해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의 배후세력으로 몰려 구속된 이른바 ‘1차 인혁당 사건피고인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도예종 · 박현채(앞줄 맨 오른쪽과 둘째), 박중기(뒷줄 왼쪽 둘째) 12명이 반공법 위반으로 실형을 받았지만 인혁당의 실체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인혁당 아내 죽어서 돌아온 남편 시신 손발톱 다 빠져 12.9.12 한겨레

 

 

 

인혁당 사형 이수병씨 부인 이정숙씨

 

당신 아기 얼굴 좀 봐요, 얼굴. 이만큼 컸어요. 얼굴 좀 봐요.’

돌을 갓 넘긴 어린 딸을 등에 업은 28살의 젊은 아내는 속으로만 되뇌었다. 197541일 서울 서대문구 서울구치소 안마당. 멀찌감치 남편의 모습이 보이자 아내는 등을 돌려 필사적으로 딸의 얼굴을 보였다. 1년 만에 본 남편이지만 소리내어 말을 걸 수는 없었다. “남편을 만나게 해준 것이 알려지면 내 목이 달아난다. 아는 척도 말을 걸지도 말라고 교도관은 신신당부했다.

 

속으로만 외친 아내의 말을 들었을까. “많이 컸네. 많이 컸네.”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묶여 변호인 접견실로 끌려가던 남편이 말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는 아내가 들은 남편의 마지막 육성이 됐다. 학원강사였던 남편 이수병(당시 38)씨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4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이튿날인 9일 새벽 형장에 끌려가 세상을 떴다.

 

그렇게 빨리 죽일 줄 알았으면, 그때 붙잡고 무슨 말이라도 했을 텐데.” 이수병씨의 아내 이정숙(65)씨는 12<한겨레>와 만나 37년 동안 쌓인 한을 토해냈다.

 

생전의 남편은 통일운동가였다. 19615·16 쿠데타가 있기 사흘 전인 513일 서울에서 열린 통일촉진궐기대회에 참석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유명한 연설도 했다. 이 일로 쿠데타 직후 7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 수립 이후 인혁당 재건위사건을 조작해 이씨를 비롯한 8명을 사형에 처했다.

 

그들을 구속한 직후부터 1·2·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유신 정권은 단 한 차례의 가족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다. 교도관의 도움을 받은 덕에 오직 이씨만 수감중인 남편의 얼굴을 잠깐이나마 보았다. 사형당한 나머지 7명의 유족은 그런 행운조차 누리지 못했다.

 

법정에서도 뒷모습밖에 못 봤어요. 아빠들 옆에 선 헌병들이 뒤도 돌아보지 못하게 했어요.”

 

환갑이 넘은 아내 이씨에게 죽은 남편과 그 동료들은 여전히 아빠.

사형은 새벽에 집행됐지만, 시신은 오후 6시가 지나서야 넘겨받았다. 죽은 이의 몸뚱이에는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등이 다 시커멓게 타 있었어요. 손톱 10, 발톱 10개는 모두 빠져 있었고, 발뒤꿈치는 시커멓게 움푹 들어가 있었어요.” 그날을 회고하던 아내 이씨는 당국이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어버린 다른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며 치를 떨었다.

 

이후 37년이 넘도록 매년 49일이 되면 이씨는 경남 의령에 있는 남편의 산소에 갔다. “박정희 살인마, 내 남편을 살려내라며 울었다. 남편이 죽을 때 5살도 채 되지 않았던 어린 아들 둘과 딸도 엄마를 따라 이유도 모른 채 울었다.

 

그에게 박정희박근혜는 같은 이름이다. “(박근혜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 볼 수가 없어요. 꺼야 해요. 한동안 텔레비전에 안 나올 때는 살 것 같았어요. 요즘은 텔레비전을 거의 못 봐요.”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남편이 사형당했던 그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 지금껏 언론에 나선 적 없는 이씨가 12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한겨레> 인터뷰에 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재심 무죄 판결로 조금이나마 위안받나 했는데, 대통령 나온다고 우리를 들먹여도 되는 건가요? 또 우리를 이런 데까지 나오게 해야 하는 건가요?”

 

박 후보의 발언에 대한 심경을 묻자 이씨는 그만 울어버렸다. “아아, 박정희가 내 남편을 죽였고, 박근혜는 우리 자식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손에 쥔 휴지로 눈물을 닦아낸 이씨는 이 말은 꼭 하고 싶다며 꼭꼭 힘주어 덧붙였다. “박근혜는 자기 아버지 때문에 이만큼 됐지만, 자기 아버지 때문에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을 겁니다.”

 

 

 

 

: 법원행정처 출판사 : 사법발전재단발행 : 2009

 

대법원이 13일 사법부 60주년을 총정리한 <역사 속의 사법부·사진>를 발간했다. 1948년 해방 이후 60년간 사법부가 밟아온 영욕의 역사를 기술했다. 하지만 내용에 과거 사법부가 행한 잘못된 판결들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반성은 들어 있지 않았다.

 

반성 없는 단순한 사건 소개’=형사사건 재판들에 대해 모두 편년체식 서술방식을 동원했다. 권위주의 정권의 압력을 받아 내렸던 시국·공안사건 판결 등 법원의 부끄러운 과거가 드러난 재판마저 무미건조하게 시간 순으로 단순 기술했다.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비판받은 인민혁명당 사건과 최근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동백림·민청학련 사건 등의 시국 사건 대부분은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고 검찰 기소 과정과 법원 선고내용을 전하는 선에 그쳤다. 사건과 재판에 대한 역사적 의미와 평가, 반성은 없었다.

유신정권 당시 긴급조치 관련 판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정권은 비상군법회의를 따로 설치해 일반인들을 마구잡이로 기소, 실형을 내렸다. 일례로 술을 마시던 중 농담으로 정권을 비판했다가 징역 5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를 막거나 바로잡지 못했다. 법원은 이에 대해서도 사실만 기술했을 뿐 자체 평가와 반성은 내놓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들도 백화점식으로 정리했을 뿐이다. 한승헌 변호사가 여성잡지에 쓴 수필 어떤 조사-어느 사형수의 죽음 앞에서가 사형이 집행된 간첩을 애도했다며 반공법·국보법 위반으로 구속기소돼 징역 16월을 선고받고, 1977년 리영희 교수가 미국·일본 학자들의 중국 기행문을 단행본 <8억인과의 대화>로 발간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형을 받은 사실 등을 기술했다. 하지만 당시 판결이 옳은 판단인지 잘못된 판단인지에 대한 평가는 없었다.

 

용두사미식 과거사 정리=이 대법원장은 취임 초기 사법부의 과거사를 반성하겠다며 재조사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법원의 60년사에선 그 같은 정신이 실종됐다. 대법원은 유신정권과 5공 정권 때인 1972~87년 이뤄진 시국·공안 사건 중 불법 구금과 고문 등 재심 사유가 있는 사건을 수집해 224건을 추려낸 뒤 과거사 정리 작업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작업 내용의 공개나 발표가 부적절하다고 주장해오다 이번 책을 내며 형사재판의 역사부분에 과거사 부분을 끼워넣는 수준으로 마무리했다.

 

대법원 사법사편찬위원회 이진성 위원장(법원행정처 차장)은 발간사에서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지금의 시각으로 손쉽게 과거의 잘못을 매도하고 단죄하는 것은 역사를 대하는 옳은 길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박근용 팀장은 이 대법원장의 사과가 반쪽짜리 사과에 그친 셈이라며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났는데도 진정어린 사과와 문제 인식이 없는 것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과 교수도 국민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단순한 역사 서술은 의미가 없다철저히 반성해 사법부의 신뢰를 제고하고 재발 방지에 나서야 한다 고 지적했다.-경향신문

 

 

 

문학으로 기록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인혁당은 애초부터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군사독재 정치의 연장을 위해 조작되었기에 나는 무죄하다. 그러므로 나를 비롯한 이 사건의 연루자들은 오직 그 희생양으로 선택되었을 뿐이다.

 

이 나라의 참다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고뇌해 왔다는 것이 죄가 된다면 달게 받겠지만, 나를 북측 지령을 받고 공산주의 폭력혁명을 선동한 간첩으로 몰아 극형에 처함은 천만부당하다."(315)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7549, 박정희 군사정권이 강요하는 복종의 자유와는 다른 자유를 꿈꿔 온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은 군사독재로부터 국가전복세력이자 인민혁명당의 수괴로 '지목'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최소한의 인권조차 유린하며 일사분란하게 진행된 이들의 사형 집행은 세계의 법학자들을 놀라게 했던 바, 제네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 사상 치욕의 날'로 선포했다.

끊임없이 조작시비, 고문시비가 벌어지던 이 사건은 이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우선 조사대상으로 선정해 30년만에 조사에 착수했다.

 

이러한 상황에 때맞추어 분단문학의 중진인 김원일씨가 이 사건을 문학으로 기록해 출간했다. 희생당한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의 삶을 연작 6편으로 구성한 <푸른혼>이 그것이다.

 

 

'인혁당 사건' 정면으로 다룬 <푸른혼>

 

 

 

 

20052/ 이룸/ 404/ 신국판 양장 2005 서상일

 

 

<푸른혼>은 담담한 필체로 풀어나가는 소설이다. 그러나 작가의 태도에서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식의 당참이 보인다. 따라서 작가는 우회의 방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은유와 상징의 방법을 사용하기보다는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선다.

 

여섯 편의 연작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은 희생자들의 삶을 유년부터 청년기의 활동, 동무의 우정, 고문의 고통, 사형수의 절망, 유족의 회상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려내고 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을 꿈꾼 이들의 삶과 고뇌, 그리고 어딘가로 끌려가서 가혹한 고문을 받다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과정을 여러 형식과 다양한 측면에 초점을 두고 담아낸 것이다.

 

고 송상진의 삶을 다룬 <팔공산>은 팔공산 자락을 떠도는 송상진의 죽은 넋이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이어 고 이수병, 고 김용원의 삶을 다룬 <두 동무>는 둘의 '운명 같은 우정'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가장 젊은 나이인 29살로 희생당한 고 여정남의 삶을 다룬 <여의남 평전>은 열정적인 민주투사의 삶과 고뇌를 복원한다.

 

<청맹과니>에서는 고 서도원의 삶을 그리고, <투명한 푸른 얼굴>은 처형의 순간을 앞둔 사형수의 내면적인 고통과 절망을 세심히 묘사한다. 마지막으로 <임을 위한 진혼곡>은 희생자의 아내가 남편(고 하재완)에게 쓰는 편지 형식을 통해 재판 과정의 부당함을 옮겼다.

 

죽어서야 자유로운 '푸른혼', 다양한 측면에서 그려내

이렇게 연작소설은 작품마다 각기 형식과 내용의 중심을 달리 하고 있다. <팔공산>은 회고 형식, <여의남 평전> <청맹과니>는 일대기 형식, <임을 위한 진혼곡>은 편지 형식이다. 각 작품마다 내용의 중심도 각기 다른데, 특히 <투명한 푸른 얼굴>은 사형수의 고통스런 심정을 세심히 묘사해 빅토르 위고의 <사형수 최후의 날>을 연상시킨다.

 

또 이 작품은 환상소설기법을 이용해 희생자들이 혼령이 되어 만나고 회포를 푸는 장면을 그려낸다. 이들은 자신들을 왜 그렇게 급하게 사형시킬 수밖에 없었는지 시국을 토론하기도 하고, 서로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해준다. 이로서 이들은 각자의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어내고 '씻김'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소설집은 전체적으로 일대기를 중심으로 하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에는 역사적 사실들과 시대가 함께 녹아들어 무게가 느껴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배경도 박정희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즉 주인공들의 아버지 세대 이야기부터 주인공의 어린 시절, 일제시대, 해방공간, 한국전쟁, 이승만정권, 604월항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큰 그림을 그려낸다.

 

예를 들어 <팔공산>의 경우, 작가는 고 송상진이 자라나고 묻힌 팔공산을 "해방 전후부터 여태껏 죄 없는 무수한 넋을 품에 안았으되 침묵 속에 장엄하게 버텨선 넉넉한 산"(90)으로 그려낸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팔공산을 통해 일제시대와 해방공간, 한국전쟁을 거쳐 한국 현대사의 궤적과 함께 고 송상진의 삶을 담아내는 것이다.

 

"49, 그들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

인혁당 사건을 문학만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풀어내고 기록한 이 작품은 의미 있는 문학적 성과이다. 그리도 동시에 이 작품은 작가 김원일의 개인적 씻김굿이기도 하다. 인혁당 희생자 8명 중 4명이 대구가 연고이며 그들은 대구 팔공산 자락에 묻혀 있는데, 작가 김원일의 연고지도 대구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는 민청학력 사건에 연루되어 당국이 조작한 인혁당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당한 여덟 분 중 대부분이 내가 청소년기를 보낸 대구가 연고지였고, 그분들이 자주 만나 회포를 풀었던 약전골 일대가 우리 가족이 전쟁 후 한 세월을 힘들게 넘겼던 동네여서 옛 기억을 떠올리는 한편, 그분들의 고난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꿈속에서나마 그분들의 설움에 찬 얼굴을 대면했고, 그분들이 그제야 고백하는 진정한 목소리를 들었고, 그분들이 당했던 고난을 간접으로나마 체험해온 나날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 인권이 철저히 유린당한 대표적 사례가 1975년 인혁당사건"이며, "이 사건이야말로 군사정권이 저지른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악"이라고 지적한다.

 

희생자들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연장을 위해 간첩으로 '지목'되었고, 그들은 꿈꿀 자유마저 빼앗겨 죽어서야 자유로운 '푸른혼'이 되었다. 제명대로 살지 못한 이들의 억울한 영혼은 지금도 팔공산 자락을 떠돌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여정남'을 아십니까? 16.1.7 노컷

 

'사법살인'의 희생자 여정남은 박정희 정권 시절 경북대 학생운동의 상징과도 인물이었다. 유신독재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744, 그는 소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197548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그는 그 다음날로 '인혁당 사형수' 7명과 함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는 유일하게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 이들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던 날,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4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올해는 여정남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꼭 40년이 되는 해다.

'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는 불과 31세에 생을 마친, 불꽃같은 그의 치열했던 삶과 생애에 대한 첫 탐구서이다.

 

또한 이 책은 여정남 개인사는 물론이요, 그가 활동했던 박정희 정권 시절 최대공안사건으로 불린 소위 '민청학련 사건''1·2차 인혁당 사건' 등을 총망라해서 다룬 최초의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나아가 1960~70년대 경북대 학생운동권의 면모, 대구지역 혁신계 인사들의 활동과 계보까지 밝히고 있다.

 

이 책은 경북대 학생운동권 후배들이 그의 사후 40년을 맞아 편집위원회를 구성, 추진해온 첫 성과물이다. '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는 그를 죽음으로 내몬 민청학련 사건과 그가 중간고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제2차 인혁당사건(인혁당 재건위사건)의 수사와 재판기록을 최초로 분석했다.

 

4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이 자료들은 재심 과정에서 일부가 공개됐을 뿐, 그간 일반인에게는 공개된 적이 없다.

 

당시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자신들이 북파한 간첩 김상한이 이미 북한에서 사망하여 이 세상에 없음을 알면서도 그가 다시 남파되어 인혁당을 만들었다고 각본을 짰다. 이어 관련자들에게 엄청난 고문을 가하여 받아낸 허위진술서를 근거로 사건을 조작하고 관련자들을 사형시켰다. 그리고 여정남에게도 상상도 못할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고문을 가하여 인혁당과 민청학련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다는 허위진술을 받아내고 민청학련 관련자로는 유일하게 여정남을 사형시켰다.

 

저자는 집필과정에서 이 자료를 입수하여 두 사건의 수사 개시에서부터 군법회의 재판, 대법원 확정판결, 사형집행에 이르는 전 과정을 꼼꼼히 분석하여 이를 반영하였다.

 

특히 긴급조치 2호로 설치된 비상군법회의 재판의 불법성, 가혹한 고문 실상과 허위진술서 작성 경위, 사형 집행 과정의 의혹 등을 소상히 밝혀내 기록한 점이 돋보인다.여정남의 삶과 사상을 온전하게 기록, 복원하기 위해서는 문헌자료만으로는 부족하다.

 

저자는 여정남의 유가족을 비롯하여 경북대 학생운동권의 선후배들, 이철·유인태 등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 그 외 관련 재야인사 등을 두루 인터뷰하였다. 이를 통해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두 사건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한 여정남의 존재와 활동상을 비롯해 그간 논란이 돼온 많은 사실 등에 대해 재확인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의 주축은 "한강 이북은 서울대, 한강 이남은 경북대"로 불릴 정도로 경북대는 학생운동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그간 학생운동사 역시 서울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경북대의 학생운동사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는 정사회-정진회-한풍회로 이어지는 경북대 학생운동권의 계보를 관계자의 증언과 자료들을 통해 복원해냈다.해방 후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혁신계(더러는 좌파) 인사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특히 대구지역은 한국전쟁 때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아서 혁신계 인사들의 맥이 이어져온 땅이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으로 장면 정권이 들어선 후 통일논의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오던 이들은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한 후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소위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은 대개 혁신계와 관련됐던 사람들로 박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는 이들에게 용공혐의를 씌워 죽음으로 내몰거나 혹은 오랜 감옥살이를 강요했다. 인혁계는 과연 공산주의자였는지, 소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는 과연 실존했는지, 그리고 '경락연구회'는 과연 인혁계의 위장조직이었는지 등을 자료와 증언을 통해 밝혀냈다.

 

아울러 인혁계의 인맥과 계보도 증언을 통해 그려냈다.

수사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받아낸 허위진술서, 제대로 된 심리도 없이 불법적으로 진행된 군법회의와 대법원 재판, 유언 조작 등 형 집행 과정에서의 의혹 등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은 그야말로 불법 투성이였다.

 

그러나 역대 정권하에서 명예회복이나 재심은 입 밖에도 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유가족들과 사회단체의 줄기찬 노력 덕분에 20051227일 서울지법은 사후 30년만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을 결정하였다.

 

이로부터 1년여 만인 2007123일 법원은 '인혁당 사형수' 8인에 대한 재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이들에 대한 응당한 국가배상이 뒤따랐으며 이를 토대로 추모사업이 추진돼 오고 있다. 여정남 등 인혁당 사형수 8명의 명예회복과 재심, 추모사업 등 그간의 과정을 추적하여 소상히 기록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발간사 · 민청학련·인혁당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정화영

추천사 · 변호사 한승헌 / 변호사 강신옥

 

1: 청년 여정남

 

·신부가 최후에 부른 이름들 ·20

·인혁당 사형수 8·24

·대처승의 셋째 아들 ·30

·순박하고 쾌활했던 학창 시절 ·33

·불운했던 대학생활 ·37

·2·28 학생의거 ·40

·가출 ·45

·박정희 맏사윗감 이야기 ·49

·해인사서 수학한 부친 여이섭 ·55

·옛 본적지 예천’ ·61

 

2: 학생운동과 1960~70년대 상황

 

·5·16 군사쿠데타와 박정희의 등장 ·66

·정치외교학과 진학과 정만진과의 인연 ·70

·4·19 전후 경북대 학생운동의 흐름 ·75

·박용목과의 만남 ·79

·1960~70년대의 경북대 이념서클 ·87

·한일회담 반대 ‘6·3항쟁’ ·92

·6·4 투쟁과 정지 조건부 퇴학 ·97

·박정희의 장기집권 길 틔운 3선개헌 ·105

·3선개헌 반대투쟁 후 활동 ·110

·총학생회장 직선제 쟁취 투쟁 ·116

·전태일 열사 추도식 추진 ·123

·등록금 인상 반대투쟁과 어용 총학’ ·128

·교련 강화 반대투쟁 ·133

·정진회 필화사건 ·138

·‘필화사건재판과 재심의 무죄선고 ·147

·‘위수령으로 대학서 쫓겨나 ·152

·한풍회 창립과 포고령 위반사건 ·157

·혁신계 사람들 ·162

·서도원과 하재완, 그리고 이재문 ·170

 

3: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 ‘오적민수협결성 ·174

·하재완 장남 가정교사로 입주 ·180

·박정희의 영구집권 음모 ‘10월 유신’ ·183

·첫 유신 반대, 서울대 ‘10·2투쟁’ ·188

·전국으로 확산된 11월 투쟁 ·192

·경북대 ‘11·5 투쟁결행 ·195

·개헌청원운동과 긴급조치 1호 선포 ·207

·이재문과의 충돌 ·212

·전국적 학생조직 결성 위해 상경하다 ·218

·유인태 등과의 인연 ·223

·‘강창모임과 경북대의 ‘3·21’ 투쟁 ·229

·4·3 투쟁의 태동과 3·3·3 원칙 ·249

·서울 부산 대구 오가며 ‘4·3’ 준비 ·254

·4·3 투쟁과 긴급조치 4호 선포 ·260

·검거선풍 불구 ‘2선 조직시도 ·268

·하숙집 나온 뒤 3일 만에 검거돼 ·276

·용공 혐의 덧씌운 민청학련 사건 ·286

·고문으로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 ·294

 

4: 군사재판과 전격적인 사형집행

 

·박정희 정권 꼭두각시군사법정 ·300

·민청학련계 징역 240·304

·인혁계, 사형 7명 무기징역 8·309

·피고인 진술도 없이 끝난 항소심 ·315

·“피고인석에 앉고 싶다” ·319

·인혁계는 과연 공산주의자였나? ·325

·하재완의 평양방송 청취 노트 ·335

·‘민청학련명칭의 탄생 ·343

·인혁당 재건위, 과연 실존했었나? ·348

·경락연구회 ·355

·용두사미로 끝난 1차 인혁당 사건 ·360

·몽둥이질에 물고문, 전기고문도 ·368

·협박·고문의 산물, 진술서 ·375

·조작된 공판조서와 유죄 선고 ·382

·기각당한 항소·상고이유서 ·387

· “무덤가에 진달래 심어달라” ·396

·10분만에 끝난 대법원 재판 ·405

·‘설마 하루만에’...전격적 사형집행 ·415

·사형집행명령부 조작과 시신 탈취 ·425

·대구 출신들의 피해가 왜 컸나? ·433

 

5: 재조사, 재심, 그리고 명예회복운동

 

·민주정부 출범과 과거사 청산 ·438

·‘인혁당 대책위발족 ·441

·‘의문사위민주화보상위원회출범 ·444

·의문사위, ‘장석구 사건직권조사 ·447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청구 ·452

·재심, 인혁당 사형수 8인 무죄 ·458

·‘김상한 간첩사건과 재심 승소 ·463

·뒤늦게 시작된 인혁열사추모사업 ·473

·여정남 추모·기념사업과 논란들 ·477

 

*추모시 · 그대 이름만으로도 밝은, · 이하석

*일지

*작가의 말 · 정운현

 

음악가져온 곳 : 다음 블로그 아우렐리우스의  명상곡

김현성 - 쉼을 위한 국악 명상 [그대 그리운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