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먼저-고증식
우금치-박제영
반란을 엿보다-서동인
가방을 찾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박제영
장돌뱅이 우리 할매 생전에 술만 자시면 들려주시던 보릿고개 이야기
장돌뱅이 우리 할매 생전에 술만 자시면 들려주시던 환장 이야기
나무도 자살을 한다-유용주
백 미터-전윤호
죽었다 살아난 남자-김완
화가 이중섭이 시인 구상에게-이승하
물고기 여자와의 사랑 1-김왕노
무어라는 것-허림
녹두꽃― 김지하
엄니와 데모꾼-김종수
화花
요리사가 된 시인-김승하
하루에 적어도 세 편-박기동
노새 혹은 쇄빙선에 대하여
잡탕밥-박수서
임실슈퍼
신탄역에서
무엇보다 그리운-박기동
거시기-박제영
하류에서-전윤호
소쩍새-김영삼
빗소리에 대한 오해
물방울같이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어-이홍섭
심퉁이
측백의 저녁
공중에 떠돌던 말
사랑, 이라는 말이 있다
비밀의 비밀처럼
억양
때때로 아버지-강재남
모를 일이다- 위선환
자코메티의 언어로 -조현석
어느 악기의 고백 -김효선
폭포-김수영
젖이라는 이름의 좆-김민정
쨍-권선희
이름을 기억하는 방식들-성은주
봄날은 간다 -김용택
펄펄-노혜경
캄캄
놓다
스며들다 1
사랑은 왜 야만인가
이발소에서-정일남
폐병쟁이 내 사내 /허수경
허공-황규관
가난의 변주곡
기도
사랑의 가동
정오가 온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
폭염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폭설
빙의
어느 날 스타벅스에서- 이상국
이해인 수녀님의 동백가지 꺾는 소리- 손택수
내 일상의 종교-이재무
붉은 나무-정훈교
염소 브라자-공광규
옜다, 물 한 바가지-차승호
정신 사나워도 그게 잘 되능가?
벅벅
누가 그려?
엄마의 연애
꿈, 바람을 밟다
백송(白松)
밥 할
아버지
시인박멸-박정대
아버지를 쓰다 /문정영
위대한 남편-양정자
1950년대 부산 황령산에서 매혜란 혹은 매혜영
가슴이 먼저-고증식
딸아이와 한바탕하고
가방 싸서 집 나간 엄마
그래 나 없이 어디 잘살아 봐라
되는대로 몇 자 적어 놓고
참말이지 삼대 구 년 만에
훌쩍 친정집 기차 탄 엄마
나쁜 가시나
돈 처들여 키워놨더니
따박따박 따지고 들기나 하고
사과 안 하면 내 절대 오나 봐라
딸도 엄마도 며칠째 신경전인데
가시내야, 그게 아니란다
니들은 머리로 엄말 대하지만
엄만 가슴이 먼저란다
늘 그게 먼저란다
- 『얼떨결에』(걷는사람, 2019)
우금치-박제영
그때는 다 동학이었네라
누구라 할 것도 없네라
왕과 양반들 친일 모리배들 빼고는 죄다
남자고 여자고 애고 어른이고
조선 사람이믄 죄다 동학이었네라
저 무너미 고개 넘어 곰나루 돌아
우금치에서 다 죽었네라
몽둥이 들고 죽창 들고
왜놈들 신식총과 맞섰으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네라
우금치 마루는 시체로 하얗게 덮였고
시엿골 개천은 아흐레 동안 핏물이 콸콸 흘렀네라
준자 봉자 최준봉
녹두장군 모셨던 할배도 게서 죽었네라
니는 우금치가 낳은 씨알이네라
우금치를 잊으면 사람이 아니네라
반란을 엿보다-서동인
광릉내 도화 밭, 저 꽃사태
땅의 피 뿌리로 수혈 받은 반란 앞에
어질어질, 한 사내 수음을 한다
지 혼자 꼴리면 되었지
왜 꽃들을 미치게 하는가
뿌리 끝 꽃향기 날리는 사내,
가슴이 짜릿한
환장할 봄날에
꽃들이 수런거리는 소리
미친 놈, 미친 놈
가방을 찾습니다
1.
초가집 마루에 내려앉은 봄 햇살이 간혹 말을 걸어왔지만 혼자 놀기엔 심심했어요 누나의 빨간색 책가방을 기다리던 아이는 햇살이 덮어주는 봄이불, 두 발로 걷어찼지만 깜빡 잠들어 버렸어요 그런데, 꿈에서 만난 누나 책가방을 찢어버렸죠 학교에서 배급받은 건빵이 없었거든요 배고파 낮잠을 깬 그 아이, 엉엉 울어버렸죠 (꿈은 꿈이라고요?) 하굣길 누나는 빈손으로 돌아왔어요 건빵 담은 책가방을 잃어버렸다나요
2.
책가방과 인연을 끊어버린 누나 찾아 가방을 내팽개친 그 아이, 서울에서 옷공장 다닌다는 소문 들으셨어요? 자양동 가방공장으로 옮겼다고요? 툭툭 끊어지는 실밥 게워내던 지하 공장 남들 책가방만 박음질하던 아이는 뒤늦게 산 책가방, 자주 잃어버린다나요 꿈에서도 가방을 찾는 그 아이, 고향 바닷가 언덕 위의 家房마저 매미라는 독종에게 빼앗겼다는데 거, 누구 없어요? 그 아이 가방, 家房 좀 찾아주세요
시집 『가방을 찾습니다』(리토피아포에지) 2008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박제영
― 전윤호 시 창작반 수강생 모집공고
시를 쓰고 싶다 이 말이쥬? 역마살에 시마(詩魔)까지 들어서 달마는 아니고 동가식서가숙하는 시발당주(詩醱堂主)가 있는디 그 냥반 함 보러 갈튜? 그 냥반 딴 건 몰러두 시는 그리 용하다쥬 못 믿겠음 그 냥반하고 했던 얘기 함 들어볼튜?
시인이슈?
몰라 그냥 시발(詩醱)놈이야!
시 쓰는 방법 좀 가르쳐 주실래유?
따라해 봐, 시발(詩醱)!
놀랬잖유 근데 객도 없이 왜 혼자 술을 마셔유?
보면 몰라 시를 발효(醱酵)하는 중이잖아!
중이셨슈?
어머 시발! 술이나 한 잔 걸치고 가!
워때유? 시발당주 그 냥반이 춘천에서 끄적당인가 뭔가를 새로 채렸대는디 시판인지 술판인지 궁금하면 함 가볼라유? 여그서 가찹다는디 오츠케 나랑 한번 가볼튜?
장돌뱅이 우리 할매 생전에 술만 자시면 들려주시던 보릿고개 이야기
하모! 질다질다 황천길보다 질었네라
감꽃 핐다 지믄 느그 할배 져다 묻고
소쩍새 울다 그치믄 느그 아재 져다 묻고
마카 묻고는 재우 보릿고개 늠었네라
보릿고개 재우 넘기니 하마 한 생이 갔네라
저승고개가 떡 하니 코앞이네라
저 한 고개만 늠으면 됐니라
감꽃 한 번만 더 피믄 이제 됐니라
장돌뱅이 우리 할매 생전에 술만 자시면 들려주시던 환장 이야기
니 아나 자석 죽으믄 얻다 묻는 줄 아나
느그 아재를 이 할매가 얻다 묻은 줄 아나
어미 뱃속에 묻는 기다 할매 뱃속에 묻었네라
자석 앞세우믄 그래서 환장하는 거네라
뱃속에서 자석이 썩어가는데 창자가 남아나겠노
자석이 뒤집어논 오장육부가 우찌 말짱하겠노
느그 아재 그 잡것이 여즉도 지랄하니 환장하니라
할매는 환장한 년이네라 뱃속에 난장이 섰네라
나무도 자살을 한다-유용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공원의 나무들이 말라 죽었다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나무도 자살을 한다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나무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 『어머이도 저렇게 울었을 것이다』(걷는사람, 2019)
※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다
나는 이렇게 깨달았다,도 아니고, 나는 이렇게 보았다,도 아니고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말. 듣는다는 것은 자기를 낮춘다는 것이고,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모든 만물이, 처처곳곳의 사람들이 다 부처 아니겠나.
백 미터-전윤호
마침내 말 한 번 걸어보려
검은 교복 입고 뒤쫓던
역전 다리 위 백 미터
어두운 공설운동장에서
한 시간 미리 도착하고도
딱 그만큼 달아나버린 정신줄
목사님이 신자가 아니면 사귀지 말래
저주처럼 붉은 십자가에
돌팔매질하던 거리
나이 먹고 친구로 만나도
같이 마시고 함께 취해도
저만치 앞서 걷는 그녀와의 사이
작심하고 달려도 평생 건너지 못한
아우라지 건너편 솔밭 같은
백 미터 그 지긋지긋한
부탁받은 척 흰 봉투 들고
망설이며 서 있는 장례식장 안내판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별과의 거리
- 『정선』(달아실, 2019)
죽었다 살아난 남자-김완
-회진 일기4
김완
증례: 남자 45세
위험 인자: 흡연, 중증 음주(하루 소주 2~3병)
45세 젊은 남자가 아침 7시경 죽을 것 같은 흉통으로 장성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병력은 상기와 같은 위험 인자를 갖고 있었고, 생명 증후는 혈압, 맥박 정상에 의식도 명료했다 응급으로 검사한 심전도상 전벽 ST절 상승 급성심근경색증이 진단되어 3차 병원으로 후송 중 구급차 안에서 심정지가 발생했다 3차 병원까지 가지 못하고 거리상 가까운 내가 근무하는 병원 응급실로 심폐소생술을 하며 내원했다 의식이 불명이었고, 혈압과 맥박이 잘 잡히지 않았다 응급실 심전도 모니터는 지속적인 심실빈맥과 심실세동을 보였다 수차례 심실제세동기를 사용했다 곧바로 혈관조영술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심페소생술을 하며 관상동맥조영술을 시행했다 응급 약물을 투여하며 관상동맥에 철선을 들이밀자 환자의 심장은 이내 동성 리듬을 회복했다 생명 증후도 되살아났다 주요 관상동맥은 모두 정상이었다 최종 진단은 과음 후 새벽녘 관동맥 경련에 의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내려졌다
중환자실에서 흉벽에 남아 있는 수많은 심실제세동기 자국을 보며 환자에게 '술과 담배를 반드시 끊어야 한다'라고 말하니 환자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먹고살려면 장사해야 하니 오늘 중으로 나갈 수 있느냐'라고 되묻는다 오늘도 죽음과 삶을 경험한 환자에게서 문밖 세상의 절절한 고통을 배운다
김완- 『바닷속에는 별들이 산다』(천년의시작, 2019)
화가 이중섭이 시인 구상에게-이승하
상常이
보고 싶구려
사흘만 안 봐도 보고 싶으니
우리는 전생에 형제였나 부부였나
집을 갖고 싶었지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살 집 한 채면
나 먹지 않아도 배부를 수 있고
마시지 않아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지
50년 10월 송도원의 집 폭격으로 불타고
부산 범일동의 창고에 살면서
낮이면 부두에서 하역 작업
무얼 짊어져도 자식 굶기는 아비였지
제주시까지는 배편으로 서귀포까지는 걸어서
게 잡아먹고 조개 캐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넓고 넓은 바닷가의 오막살이 집 한 채
쌀 사 먹을 길은 막막하였다
다시 범일동으로 범일동 판잣집으로
자네는 집이 있지 가족이 있지
아, 하늘 아래 나는 집이 없구나
장남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노는 상이! 洪홍이!
具常兄前 李仲燮弟*
* 구상형전 이중섭제具常兄前 李仲燮弟 : 이중섭은 구상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시인의 인품을 높이 사는 의미에서 늘 '형'으로 불렀다. 구상 시인의 장남 이름이 구홍이었다.
이승하- 『생애를 낭송하다』(천년의시작, 2019)
1970년대 초 해운대 해안선
물고기 여자와의 사랑 1-김왕노
나 그 여자 몸속에 들어가
그 여자를 사랑하였다
그 여자의 생을
가시로 콱콱 찌르며 사랑하였다
사랑은 마취제여서
그 여자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내가 그 여자의 전생을 관통하고 있는지
나도 몰랐다
나 그 여자 속의 가시였다
유선형 몸을 지탱시켜주던 가시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먼 훗날 독이란 걸 모르고
나 그 여자 몸속의 가시였다
내가 살을 녹이고
살은 가시를 버리고
냉정하게 되돌아섬을 모르고
모순의 장난을 눈치도 못 채고
생의 한철 내내
나 그 여자의 몸속에 들어가
그 여자를 사랑하였다
그 여자의 생을 콱콱 찌르면서 보냈다
무어라는 것-허림
무어라도 돼라
그게 엄마의 좌우명이었다
콩나물 키워 열두 가지 반찬 만들고
아구든 아귀든 강냉이든 옥씨기든 올갱이든 고디든
먹도록 만들어 상 위에 올리는 것
그게 엄마가 할 줄 아는 전부였다
노상 소핵교만 졸업했어도
무엇이든 됐을 거라는 말
게우 소핵교 이학년도 다니다 말고
부엌떼기로 들어섰다가
위안부 소녀들 공출해 간다고
한동안 도광동에 숨어 살면서도
콧구멍이 새까맣도록 고골에 불을 피워 상을 차렸다는
그 먼 날들을 들려주며 뭐든 돼라 했는데
돌아보니 온 길도 없고
내다보니 갈 길도 아물거려
주저앉고 말았다
시인은 되는 게 아니라고
엄마는 말할 뻔했는데
뭣 땜에 그랬는지
엄마가 간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엄마도 생각이 참 많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허림- 『엄마 냄새』(달아실, 2019)
녹두꽃― 김지하
빈 손 가득히 움켜진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 소리 사라져 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잘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 타네
별푸른 시구문 아래 목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조선 말기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5~1908)
湖南三月李花飛(호남삼월이화비) 호남땅 삼월, 오얏꽃이 날리는데
保國書生解鐵衣(보국서생해철의) 나라를 구하고자 한 서생이 갑옷을 벗네
山鳥何知時事急(산조하지시사급) 산새는 어찌하여 세상일 급한 줄 모르고
終銷喚我不如歸(종소환아불여귀) 밤새도록 불여귀를 나에게 들려 주는가
엄니와 데모꾼-김종수
고분고분하지 말고 일부러라도 틱틱거려야
데모꾼 자식 둔 엄니들은 가끔 그게 익숙할 때가 있어야
그래야 아이구 저늠 승깔 하곤 딱 지애비 닮아서리
하믄서 먼저 죽은 남편 생각하는 거라야
헌디 이늠아 제발 이늠아 넘 앞장서다 다치지 말구 중간만 해라잉 그라시지
그라믄 아구 아구 알았다닝께 또 그라시네 허지
참 그 소리 들을 날도 얼마 안 남았제
그케 생각하믄 눈물 나야
화花
매운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어
이른 저녁 한 끼 때우고
나른해질 즈음 화투패를 보던
이월 매화, 구월 국화, 오월 난초
임도 보고 술도 먹고 뽕도 따겠네
횡재수라며 환해지던
어스름 녘 세 평 대기실
삶이 나를 속여 슬픈 게 아니라
내가 삶을 속여 노여운 거라고
낡은 액자 속 푸시킨의 넋두리가
기운 배처럼 출렁이던
어스름 녘 세 평 대기실
청춘의 한때가 저물거나 다시 피거나
그때 그 꽃들 붉게 번지는
어스름 저녁이 있다
요리사가 된 시인-김승하
그는 한때 칼보다 펜이 강하다는
신념을 갖고 열심히 시를 쓴 적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딸에게는
칼보다 강한 이 펜으로 꿈을 심어주는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와 함께 만년필을 선물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펜을 믿지 않는다.
그가 다시 펜 대신 칼을 잡았을 때
칼보다 더 강한 것이 밥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꿈꾸고 가슴속 뜨겁게 타오르던 불꽃들,
이제는 차갑게 식어 냉동된 언어들
양념도 없이 요리하고 있다.
하얗게 얼어붙어 서리 낀 이미지들,
뜨겁게 달아오른 팬 위에 쏟아 붓고 있다.
하루에 적어도 세 편-박기동
하루에 적어도 세 편
을 써야 한다고 다짐하는 시인들
모처럼 만난 김창균이를 통하여 이문재의 전화 당부를 엿듣는다.
동해의 파도를 향하여 이런 자기 다짐을 하는 이문재 시인의 안쓰러움을 엿보는 것이다.
열흘에 세 편
정도는 가당키나 했던가?
한창 젊을 적엔 나도 시인이었다. 누구 못지않은 시인이었다.
지금은 물론 아니다. 동인지에 낼 원고도 밀려서 포기할까, 사정할까
하루 열흘이 아니라 일 년에 세 편이라도 건져 올리면
그야말로 문단말석에서라도 시인이겠다.
노새 혹은 쇄빙선에 대하여
1. 쇄빙선에 대하여
누가 앞서서 쇄빙선이 되겠습니까? 운전이 미숙했을 때, 고속도로에서 버스를 따라가듯이 내 눈길 지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마음속에서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지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갈 때, 처음 나선 이들을 ‘이슬떨이’라고 부른다지요. 쇄빙선은 말이 없습니다. ‘이슬떨이’들도 말이 없습니다. 묵묵하게 자기 일만 하는 거지요.
그러나 뒤따르는 여러 사람들에게, 몸으로 덕을 뿌립니다. 언제나 쇄빙선은 존재합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없을 것만 같아도 여전히 쇄빙선은 나타납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어디를 가더라도, 있을 것 같지 않더라도 어김없이 쇄빙선은 나타납니다. 나 말고 누가 내 운명의 쇄빙선이 될 수 있을까요?
2. 노새에 대하여
노새는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에 태어납니다. 미국과 프랑스, 중국 등에서 많이 보인답니다. 후세는 대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노새가 한 마리만 등장하는 게 아닙니다. 두 마리, 세 마리 혹은 여러 마리. 노새들이 여럿 모여 합창을 합니다. 노새들의 합창…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과 대비됩니다.
지난 겨울 소치올림픽 때 나는 노새 여럿을 보았습니다. 김연아, 이상화 그리고 안현수까지.
잡탕밥-박수서
여기 잡탕밥 둘!
사는 게 뭐라고
그까짓 인생이 뭐라고
섞고 볶다 보면 그게 그거 아니겠어
새우의 갑옷을 벗기고,
오징어를 칼등으로 으깨고,
해삼을 능지처참하고,
전복을 비응도飛鷹島 우럭처럼 날리고,
소라의 어깨를 긁어
고추기름, 식용유, 대파, 마늘, 간장, 굴소스가
떡 하니 입 벌려 날름 밥을 받아먹고
뒹굴다 보면 잡탕밥 아니겠어
사는 일이 짬짬하고 싱거울 때
삶의 날것들을 모아 채썰기라도 하여
모아두면, 아니 이 삶과 저 삶 위에 달걀 하나 툭,
까 올려 비비고 볶아 본다면 알겠지
사는 일이 뭐라고
지지고 볶으며 날마다 날마다
잡탕밥을 짓고 있는 일이라고
임실슈퍼
전주에 유명한 것이 비빔밥만이 아니다
순대국밥, 콩나물국밥, 초코파이가 다가 아니다
가게 맥주 마셔 본 적 있는가
병맥주를 마시며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오순도순 입방아를 찧다
명태포를 기승전결로 찢어 본 적 있는가
대가리는 숙주와 함께 탕으로 올리고
이빨이 델 만큼 뜨겁고 단단한 명태포를 씹어본 적 있는가
어느 날 씹다 만 포를 삼키다
명태보다 가시가 많고 통으로 씹기 어려운 것이 무얼까 생각하다
삶은 권태!
이것을 어찌 씹어 삼킬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라
작정하면 권태쯤 부드럽게 요리할 수 있다
당신 뚝배기에 육수 우러나면 대파 크게 썰어 넣고
권태를 아무도 모르게 한번 익혀 올려놓으면 될 일이다
신탄역에서
톱밥 같은 눈이 내리는 새벽
목각 인형처럼 대합실에 앉아 있는 노인은
꾸벅꾸벅 새처럼 졸다, 기적 소리에 눈을 뜨네
그의 눈은 파란 하늘처럼 맑았으나
구름 떼가 울음을 몰고 오네
눈물이 언 땅을 녹이고
세상도 봄처럼 팔 벌려 꽃밭이 되네
원산행 기차에 몸을 실은 노인은 눈을 감고
철로의 울림에 낮게 귀를 내려 자장자장 달리네
고향의 풀, 나무, 돌, 산을 지나
새소리 우렁찬 개울가에 닿네
피라미를 잡다 무럭무럭 올라오는 밥 익는 연기에
고무신보다 먼저 집으로 달려가네
잘 익은 김치가 입안에서 아삭 아삭 꼬리짓하네
배부른 소년은 아궁이 앞에서 입 벌리고
고양이털처럼 잠드네
주먹밥처럼 폭설이 내리는 폐역에서
꽁꽁 언 저수지처럼 텅 빈 대합실에서
노인이 말 떼를 몰고 북으로
북으로 달려가네
기차가 다시 말처럼 달리네
무엇보다 그리운-박기동
지난밤에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바닷가에 가 보았다.
감청 빛의 파도 그 하얀 이마
바다의 안색은 태연했다.
튀어 오른 얼치기 몇 마리가
잘못 살았다고 죽는 시늉이다.
얼치기의 삶 얼치기의 길
길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서나
사라진다.
무엇보다 그리운
사람 사는 길 위에 엎드렸다.
거시기-박제영
거시기한 맛이 읍서야
긍께 머랄까 맥업시 맴이 짠~해지는, 거시기 말이여
느그 시는 그기 읍당께로
이 고들빼기 맹키로 싸한 구석이나 있으믄 쪼매 봐줄라나
그것도 읍잔여
한마디로 맹탕이랑께
워따 가스내 맹키로 삐지기는
다 농잉께 얼굴 피고 술이나 마시뿌자
내 야그가 그로코롬 거시기 하면 서안나가 쓴 동백아가씨란 시가 있어야
낸중에 함 보라고 겁나게 거시기 할텡께
“장사이기가 오늘은 내 서방이여”
이 대목에선 워매, 가심이 칵!
환장해분당께
아지매, 무다요 술이 읍서야
지금 거시기해부렸응께 싸게 갖구 와야
하류에서-전윤호
내 고향은 도원읍 무릉리
바퀴로 갈 수 없는 골짜기에
탄광의 갱도보다 깊은 동굴이 입구였지
아주 어렸을 때
뗏목에 실려
이곳으로 떠내려 왔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면서
항상 궁금했지
여름이면 홍수가 나고
익숙한 초가 지붕들이 떠내려 왔어
가끔 반짝거리는 황쏘가리 비늘도 건졌지
그런데 지금 그곳에서 쫓겨난 자들을 위해
댐을 짓는다네
입구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가야 할 텐데
내 고향은 도원읍 무릉리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야
금강산
소쩍새-김영삼
어둑어둑한데 소쩍새가 울어 댄다
숨이 넘어가는 사람이 한사코 찾아 쌓는 이름이듯
서쪽…, 서쪽…, 서쪽…
한 이름만 부르다 부르다가 고요해진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그쪽이 당도하였는지
한마디 유언도 없이 끝내 눈을 감고 말았는지
캄캄하고 잠잠해진 숲 속 사정이야 알 도리 없지만
저 부름이 왜 명치끝에서 알싸하게 번지어 가는가
서쪽……
빗소리에 대한 오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은
스스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한다
누군가 탕탕 제 몸을 때려 주어야
그때야 비로소 쌓인 울음 쏟아 낸다
빗방울이 호두나무를 두들긴다
나뭇잎이 훌쩍훌쩍 소리 내어 운다
빗방울이 지붕을 마구 때린다
기왓장이 꺼이꺼이 목 놓아 운다
뒤란에선 깡통이 엉엉 울어 댄다
먼 데서 벙어리 길손이 마실에 찾아와
오도 가도 못하는 것들 울음보 터뜨렸다
물방울같이
그냥 물도 좋지만
물방울같이
겉도 없고
속도 없고
말랑한 몸이 투명한 말인
물방울같이
토란이나 연잎이나
살아도 푸른 세계에서나
굴러온 흔적 없이 살아온
살아온 흔적 없이 굴러온
물방울같이
가도 낮은 데로, 낮은 데로만
또르르 달려가 기꺼이 네가 되는
너 속에 더 큰 내가 되어 반짝이는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어-이홍섭
나는 이제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었다 // 몸으로 밀고 간 산골짜기 끝에는 모난 돌이 하나 / 마음으로 밀고 간 언덕 너머에는 뭉게구름이 한 점 // 노래와 향기가 흐른다는 건달바성은 멀고 // 내 손바닥 위에는 / 구르는 돌멩이 하나와 / 흩어지는 뭉게구름이 한 점// 내가 부른 노래는 구름과 함께 흘러가버렸고 / 내가 맡은 향기는 당신이 떠나면서 져버렸다 // 나는 이제 정녕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었으니 /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
심퉁이
우리 동네 바다에는 심퉁이라는 고기가 산다 / 심퉁하게도 생긴 이놈은 / 만사가 심퉁이라 무리를 짓지 못하고 / 저 홀로 심퉁한 입술을 바위에 대고 산다 // 내 마음의 바닷가에도 심퉁이라는 고기가 산다 / 심퉁하게도 생긴 이놈은 / 세상과의 불화가 끝이 없어 / 심퉁한 입술을 돌덩이에다 붙이고 하루해를 보낸다 // 하루에도 열두 번/ 심퉁한 입술로 돌덩이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모란 위 옥탑방-민왕기
항구에 옥탑방을 하나 얻어, 둘만 아는 시를 쓰고
세상은 없다 그리고 기절하는 햇살만 있다
찬거리를 사오는 오후에도 당신 어깨 위 모란은 황홀하고
하루 종일 이 햇살의 햇살 속을 걸을 수 있다
세상에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을 때만, 가질 수 있는 삶이 있다
너의 어깨, 모란 같은 사소한 인정으로도 문학적일 수 있다
바다 끝 하늘에는 닿을 수 없는 태초의 무료함이 있고
그 끝에 아무것도 없어서
당신 어깨 위에서 어느 날은 종일 걷고 어느 날은 종일 쓴다
무료해지면 무료한 섹스 끝에 서로 안고 적막해지고
모란 위에 귀를 대고 기다린다 잠잠하라,는 바람소리가 난다
측백의 저녁
측백나무 사진을 얻어다 거실에 내려놓으면
측백이라는 말의 푸른 그늘로 저녁이 열리겠지
밤만 갖고 사는 어두운 집, 아프지 말라고 측백을 들여놓고
숲의 향이 나는 나뭇잎을 당신의 이마에 얹어놓겠네
나무들 무성한 곳으로 나가자고 이제는 보챌 수 있도록
어둠은 측백나무 그늘이 슬며시 데려가고
저녁이 오면, 비로소 살 만한 빛 하나 얻을 수 있겠지
선한 그늘 아래 놓여 무릎을 펴고 쉬어보며
뭇별 오는 길에 앉아 있는 것도 빛의 조금을 얻어보는 일
깜깜한 사람을 석양으로 데리고 나가, 밖을 보여주겠네
그늘처럼 선선한 삶이 조금씩 조금씩 어둠을 밀고
아픈 사람, 측백나무 그늘 아래 저녁을 슬쩍 만나볼 수 있도록
엷은 그림자 하나 측백에 들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도록
공중에 떠돌던 말
해안의 긴 밤으로 도망가 같이 살아줄 수 있나요
말이 입에 돌면 사람은 간절해져 사모하게 된다는 걸
나는 여러 번 혼잣말을 해보며 알게 되었다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 나는 바다에게도 말하고
그 말이 가면 물이 솜털을 적셔 내게로 오곤 했다
해변의 모래 한 줌에게 내 모래가 되어줄래요, 하면
그 모래를 두고 가기 싫고 언젠가 만나러 와야 할 것 같았다
이 생에 한 번은 내어보고 싶었던 말을 참고서 혼자 부르는 이름들
세상이 시시하니까, 혼자 하는 연모로 눈시울은 붉어지곤 한다
그 말들은 누구나 오래전부터 다 한 번씩은 되뇌어 보았던 말
혼자 밥을 먹거나 촛불을 켜거나 시를 읽는 사람들이
다 한 번씩 해보았던, 공중에 떠돌던 말
나와 당신도 모르게 만나, 서로 기대어 있었던 말
사랑, 이라는 말이 있다
꿈마다 만나는 은밀한 여자가 있다
어젯밤엔 틉, 이라는 이상한 열매를 주었고 오이보다 달고 참외보다는 달지 않은 외였다
외의 움푹한 씨방 쪽을 베어 먹다가 점점 가를 씹으니 닭고기 맛이 나는 외였다
여자는 누구인데 아름답고 틉, 이라는 외를 먹으며 웃고 있나
뱀 한 마리 스르륵 지나가는 풀밭에 누워서
열매 맛은 닭고기 맛, 여자가 꼰 다리 사이의 무수한 슬픔들을 추억한다
꿈 밖에서는 착하기만 한 당신이 자고 있는데, 아무도 우리를 부르지 않는다
이 방과 꿈 사이의 거리는 나와 거울 속 나 사이의 거리
잠든 당신의 이마를 짚어주고 헛것인 거울 속은 어두워지기로 한다
거울의 눈물샘이 어룽인다 꿈마다 만나는 여자가 있다
포구의 방안에 파도가 친다
추방된 자들의 몫으로 해변 하나 가지고, 기다려 본다
검은 책을 펼친다 사랑, 이라는 말이 있다
비밀의 비밀처럼
목련이 지는 아주 짧은 생일지라도 사랑은 사랑으로 피어났다
거기, 내가 비파를 켜면 달 뜨는 모래톱이 바람을 켜고
또 한 바다 너머 비파반도가 있다는 황해도 쪽으로 개밥바라기별, 적적한 뭇별들 밤을 켰다
엉덩이를 까고 우리가 처음 사랑했을 때처럼 달은
환한 봉우리를 켰고 계절이 다 가버리도록, 그대를 기다려 나는 찬 우물을 켰다
물개 떼들이 야옹거리는 소리 들리는, 염소 떼가 구름염소가 되고
나뭇가지들이 저녁에 황금가지가 되는 그곳에서 나는 기억을 흐리고 불을 켰다
섬을 돌다가는, 이 섬에선 낮배도 타고 밤배도 탄다는 아낙들의 말에
웃었다 산수유꽃처럼 웃던 당신을 떠올렸다
목련이 지는 아주 짧은 생일지라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바꿀 수 있었다
비파곶 하늘에 일곱 개의 비파가 떠오른다는 물목이 되고 싶었다
나를 향해 무엇도 쏟아지지 않는 이 나라에도 빛은 오고
너를 향해 무엇도 쏟아질 것 없는 세상에도 별은 있고
나무가 버린 목련의 한 잎, 두 잎처럼
무심한 이 세계를 둘만의 바다로 삼고, 비밀의 비밀이 되고 싶었다
민왕기-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달아실, 2019)
억양
남에서 북으로 목련이 피어나는 순서처럼 나와 당신의 억양이 다르다
중부에서 온 나는 밥 먹었어요, 라고 요를 올려 물었고 남부에 사는 당신은 밥 먹었어요, 라고 어를 더 올려 물었다
당신은 내 억양이 차갑다고 했고 나는 당신의 억양이 따숩다고 했다
밋밋한 내 말씨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아서 어디쯤 시간이 흘러야
남해유원지 해변포목점 주인처럼 목화 같은 말씨를 가질 수 있을까
북에서 남으로 눈이 흩날리는 순서처럼 나와 당신의 억양이 다르다
추운 곳에서 온 나는 아직 슬퍼요, 라고 말했고
따뜻한 곳에 사는 당신은 슬퍼봐야 뭐 해요, 라고 말했다
남쪽에 오니 바람이나 햇살의 억양도 달라져서 반나절씩 해변을 쏘다니다가
비로소 목련이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의 억양을 몰래 흉내 내며 좋아한다는 말 대신
아이 낳고 살까요, 라는 더 따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아늑』(달아실, 2017)[출처] 민왕기 시집
때때로 아버지-강재남
외롭지 않기 위해 종일 빈둥거렸다 밖에는 한낮이 숨죽이고 무성한 햇빛이 여름을 관통하고 있었다 덩굴장미가 제 목을 꺾는 광경을 침묵으로 일관하며 나는 목덜미를 쓸었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생살을 뚫고 나온 장미 가시를 다시 삼키는 일, 덩굴장미에서 새가 피었다 새는 당신이라는 이름의 다른 족보, 이승의 가장 낡은 울음으로 사다리를 엮었다 한 사내가 사다리를 오르고 있었다 한 사내는 한 사내를 동반하고 있었다 한 사내가 동반한 한 사내가 한 사내와 동행하고 있었다 동일한 관습으로 옷을 입은 사내가 동일한 관습으로 주문을 외는 사내들 속에 묻혔다 형체 없는 형상이 기묘했다 가능하면 바닥에 앉히거나 뉘었으면 싶었다 그러면 같은 이유로 이름 불러보는 날이 줄어들 거라 믿었다 그런 당신을 저항 없이 맞아줄 의무를 찾다가 미처 챙기지 못한 감정을 서투르게 꾸겨 넣었다 그리하여 옛집으로 돌아올 당신을 기다리기로 했다 여름과 한 사내 사이에서 방황하는 당신이 보였다 여름과 덩굴장미와 여름과 침묵이 친밀해진 한낮이었다 무더위가 우거지고 있었다
- 『이상하고 아름다운』(서정시학, 2017)
모를 일이다- 위선환
김가를 찾아가서 술 한 잔 했다
아주머니의 무덤을 열었더니 아주머니는 없고
삭은 흙무더기뿐이어서
흙 한 삽 떠 옮기고 이장移葬을 마쳤다고,
서른 해를 서 있던 그림움도
선 키대로 묻어두고 왔다고, 울었다
울고,
허물리듯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나는 모른다
그리움이 얼마나
오래도록
키를 키우며 살을 벗는지
적막한 어느 발밑을 허물고 있는지
돌아오는 길에는
별도 없었다 깜깜한 돌멩이 하나
걷어찼다
모를 일이다
나도
아래가 무너졌다
- 『나무 뒤에 기대면 어두워진다』(달아실, 2019)
자코메티의 언어로 -조현석
출근 후 컴퓨터 바탕화면의 작은 모래시계만 응시한다
작은 구멍 비집고 빠져나가려는 비만의 모래들
언제 멈출지 모를 셀 수 없는 불안 하나하나 헤아린다
잔혹한 햇살, 배려 없는 그늘, 뜨거운 바람의 채찍이여
땡볕 속 지치지 않고 말라갔으니 나 죽기 직전이다
온 뼈마디마다 살려 달라, 고왔던 청춘 돌려달라 소리지른다
모래가 다시 돌아올 날 기다리며 은하수 위에서 노를 저었다
그 사이 숨 쉴 틈 없이 돌아나가는 회오리의 생각을 나무란다
하루의 청춘 홀랑 태워 뼈만 남은 퇴근길은 지독하게 아득하다
말라비틀어진 생각 하나가 살찐 몸뚱어리를 측은해한다
- 『검은 눈 자작나무』(문학수첩, 2018)
어느 악기의 고백 -김효선
첫눈이 온다고 했을 때 눈을 감았다
비가 내린다고 했을 때 귀를 닫았다
오후 다섯 시부터
태양은 매일 자신이 죽는 곳으로 인간들을 인도한다*
이 세상에 우연이 없다고 생각해?
줄을 튕기면 바다거북의 심장소리와
염소가 내지르는 비명과
산양의 창자에서 쏟아지는 핏물
12월이면 나는 사라진다
수수께끼처럼 휘파람을 불며 나는 공기의 모든 것
늦게 오는 눈물이 있다
기다림 끝에 더 긴 기다림이 있을 거라는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달은 사라진다
살점이 아직 무릎뼈에 붙어 있다
죽는 것도 죽지 않는 것도 아닌
잊지도 못하고 놓지도 못하는
이 세상에 영원히 없다고 생각해?
이별할 때 버드나무를 꺾어주었다는
사람의 눈빛으로 소금을 켠다네
지르는 비명은 달콤하다
17년 땅 속에서 버틴 대가는
고작 두시간 동안 치른 정사
네 목소리를 들은 건 일주일이다
물론 옷을 벗고 있었다는 건
나만 아는 비밀
*파스칼 키냐르
- 제2회 시와경계 문학상 수상작
폭포-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태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젖이라는 이름의 좆-김민정
네게 좆이 있다면
내겐 젖이 있다
그러니 과시하지 마라
유치하다면
시작은 다 너로부터 비롯함이니
어쨌거나 우리 쥐면 한 손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빨면 한 입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썰면 한 접시라는 공통점
섹스를 나눈 뒤
등을 맞대고 잠든 우리
저마다의 심장을 향해 도넛처럼
완전 도-우-넛처럼 잔뜩 오그라들 때
거기 침대 위 큼지막하게 던져진
두 짝의 가슴
두 짝의 불알
어머 착해
쨍-권선희
방울이 할머니댁 돌복숭아나무, 새끼를 다닥다닥 달았다
“아고야, 이기 그래 좋다네요”
“올갠 마캐 쌍둥이다”
“무르팍에도 직빵이라 카데예”
“내는 고븐 꽃 실컷 봤다. 열매는 니 하그라”
배냇귀 잡순 할머니 말씀, 샛길로 날려도 직진이다.
- 『내일을 여는 작가』, 2016 상반기
이름을 기억하는 방식들-성은주
(연필장)
지도를 그렸더니 함께 여행 가자 말하고,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니 무슨 날인지 묻고, 책에 밑줄 그었더니 고갤 끄덕여 주고, 일기를 쓰니 안 보는 척하다가 얼굴 어루만져 주고, 이름을 썼더니 보고 싶으냐 말 걸고,
당신을 그리면 당신이 나올까
나무를 입고 깡마른 육체가 아주 가늘게 종이에 흘러
온몸을 떨며 피는 넋
충분한 피부에 충분한 혈액으로
알몸을 전시해도 이 절정의 순간에 바라만 본다
피부가 이렇게 검었던가
(사진장)
낯을 많이 가렸는데 유쾌하게 모두와 눈 맞춘다
당신의 색감에 어울리는 물감들, 그들과 섞여 지내다 보니 성격이 변했나봐 살짝 벌린 입술로 목소릴 토해내 줘
평온한 얼굴로 우두커니 있다가 좋은 일이 생길 듯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어지는 표정
이젠 당신을 만져도 되는지
무거운 질문이었을까
대답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초록색으로 변하는 특별한 신호를 보내줘 물감 튜브를 만지며 난 계속 당신을 기다릴 거야
액자가 가득 걸린 카페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주 보는 생동감을 기억하고 싶지만
사실, 당신의 뒤통수가 등뼈가 더 그리워
(산호장)
내륙보다 해저를 좋아하는 당신은
아마 전생에 물고기였을 거야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낮은 온도로 떠날 때
바다의 풍경을 더듬어 달라는 부탁, 산호로 둘러싸인 리프볼에 들어가 조그만 구멍들 사이로 인사하고 싶다며
남쪽 바다로 간다 했지
물결 따라 일렁이는 기러기의 반복은 강박이라서
순해지려 맘먹고 배불리 약을 먹었어
생선 비늘처럼 반짝이는 것들이 환幻을 품고 격렬히 키스해
머릿속에서 귓속에서 화음이 들려 맥박 소리가 들려
바다를 보면 싱싱한 당신이 보여
(폭죽장)
흰 작약 꽃가지가 좁고 기다란 바닥에 누워 꽃잎을 늘어뜨린다 우린 오늘 어디서 이별해야 화려해 보일까 마지막 통로에 당도한 색채의 잔해는 어떤 빛깔일지 궁금해진다
지금, 여기, 도피하듯 쪼개지는 형상들
분리되지 못한 감정을 숨기는 동안
창백한 작약은 그림자를 버렸다 버려지거나 버리거나
글쎄, 나도 이렇게 똑같은 식으로 멀어질지 몰라
당신은 말을 건네고 떠날 준비를 하고
내 얼굴에 책임지고 싶어 공중에서 너와 다정하게 헤어질래
우린 서로 비워내기 위해 불을 껐지
탁― 탁――― 곱씹는 뜨거운 놀이를 갖는 거다
(우주장)
머리카락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헛보여도 좋을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때
다시, 바람이 푸르러서 눈을 감아
쓸쓸한 잠을 자듯 감아
두통이 쏟아지는 오후
어딜 가도 독백, 으로 어지러운 진단들
펄럭이는 구름을 뚫고 멀리까지 날아간
당신은 어느 행성에서 신발 끈을 묶고 있을까
귀가하지 않는 우리의 언어엔 마른 잎들이 타는 냄새가 난다 살기 위해 까치발로 걷는 연습을 하다가 지구를 껴안고 울었어 이토록 불온한 서커스를 보면서
-《시와시학》(2011년 가을호)
내금강 주막
봄날은 간다 -김용택
진달래
염병헌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어지러워라 환장허것네
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불겄다 시방
찔레꽃
내가 미쳤지 처음으로 사내 욕심이 났니라
사내 손목을 잡아끌고
초저녁
이슬 달린 풋보릿잎을 파랗게 쓰러뜨렸니라
둥근 달을 보았느니라
달빛 아래 그놈의 찔레꽃, 그 흰빛 때문이었니라
산나리
인자 부끄럴 것이 없니라
쓴내 단내 다 맛보았다
그러나 때로 사내의 따뜻한 살내가 그리워
산나리꽃처럼 이렇게 새빨간 입술도 칠하고
손톱도 청소해서 붉은 매니큐어도 칠했니라
말 마라
그 세월
덧없다
서리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다마는,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에 봄날은 다 갔니라
펄펄-노혜경
눈도 펄펄 내리고
열도 펄펄 끓는다
당신은 화도 펄펄, 내더라
펄펄
펄럭이는지 펄떡이는지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뱃고동 불어와
잠깐 사이에 세상의 앞면 뒷면을 바꾸는
들끓음
왜 그것의 이름은 펄펄일까
눈 내리듯 세상이 지워질 때
열병은 정신을 한복판에서부터 지워내기 때문일까
알 수 없는 일들 때문에 마음이
다친 생선처럼 펄펄 뛰기 때문일까
소복소복 내리는 눈
눈이 내리감기는 미열
사이로 은폐되어 가는
조용한 거짓말들이 있기 때문일까
펄펄
끓어오르는 희디흰
캄캄
바람이 불어온다
불어오는 바람은
무슨 생각으로 불어오는 걸까
어떤 언어도 없이
어루만지면서 불어오는 바람은
벌써 목련꽃잎을 너무 벌려놓았다
더 활짝 피어
스스로 더 갈 데가 없을 때까지 피어
터져 나오는 목숨으로 피어, 라고 말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듣는 걸까 낙화라고
캄캄한 봄날이 더 캄캄해진다
*
놓다
'놓다'는 동사가 아니다. '놓아드리겠습니다'는 동사가 아니다.
그건 두려움을 드러내는 상태의 서술어. 이젠 내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아는 자의 절규.
해가 떨어진다.
어두워지기 전에 어두워질 것이라고 말하는 일과 같다.
초승달 다음 보름달이 오고 열매 뒤에 죽음이 온다고
말하는 일과 같다.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그림자가 잠시 후 따라 떨어지는 일과 같다.
놓아버리면
떨어지는 것과 같다.
*
스며들다 1
환기시키는 힘을 강렬하게 지닌 언어가 있기 때문에
시는 늘 무언가에 대한 시가 되려 한다.
그러나 나는 늘 똑같은 시를 쓰고 싶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대신 내 앞으로 가지고 오는 시.
그려내고, 정지시키고, 순간이란 없을 것처럼 늘여내는 시.
이 균열을 따라, 방금 내가 만들어놓은 이 텅 빈 장소로 당신을 데려다 놓는 시.
촉수를 뻗어 당신의 잠든 밤을 어루만지고 영혼을 빼앗고 불안을 흩뿌리며
다시는 오지 않을 내일을 오지 않게 하려는 전쟁을 준비하며
스며들어, 모든 밤을 고정시킨다 못 박는다 이렇게.
*
사랑은 왜 야만인가
-우리들의 사랑법 7
꽃은 시들면서 생각한다
내 사랑은
열매 맺고자 하는 거라고
열매는 썩으면서 생각한다
내 사랑은
싹트고자 하는 거라고
새로 싹트는 아기들
세상의 첫 번째 결실
첫 번째 꽃잎이 피어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할
사랑을 위해
[노혜경시집]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실천문학 2015
이발소에서-정일남
예리한 칼을 든 사나이에게
하나 뿐인 모가지를 맡긴다
믿을 세상이 이발소 안에 있다
비누를 문대 뭉게구름을 만들어 목에 슬슬 문댄다
사나이는 능숙한 칼솜씨로 구름을 밀어낸다
모가지서 걷혀진 구름이 땅에 뚝 떨어진다
나는 구름 위에 떠서 노근한 잠에 빠져든다
세상 모르게 잠의 감미로운 도취에 한 세기를 보낸 것 같다
내가 시를 쓰는 서투른 음객임을 사나이는 알 턱이 없다
내 신분이 드러날까 두렵다
사나이는 머리카락을 정교하게 다듬는 예술가
나는 난잡하고 불필요한 언어를 제거할 가위를 갖지 못했다
늘 이발소에 와서 느낀다
시를 들고 이발소에 와야 했는데 늘 이발소에 와서 후회한다
사나이는 구만 개의 머리카락을 다듬는 예술가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이 거울 속에 잘 보인다
나도 시에서 언어의 구두쇠가 되어야겠다
폐병쟁이 내 사내 /허수경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실천문학, 1988)
허공-황규관
아직껏 내가 가져보지 못한 것 중에
가장 찬란한 것은 허공이라네
갓난아기가 꼭 쥐고 놓지 않는 것
차마 먼저 돌아서지 못하는 어머니의 눈빛 같은 것
마지막 구호를 삼켜버린 망루의 불꽃 같은 것
모든 신앙은 미신이지 주기도문도
허리를 분질러버리는 삼천배도
모두 허공에 대한 경배 아니던가
가장 나중까지 매달려 있는 이파리가
동틀 무렵 잠깐 증명하는 것을
나는 아직까지 갖지 못했네
바람이 지나가고 아무 형식도 없는 탄식이
낙오된 기러기처럼 뒹구는 허공,
어쩌면 끝내 내가 되지 못할
내 싸움이 지향했던 13월 같은 것
대신 끝나지 않는 책을
나는 허공이라 부르겠네
내 몸이 다 녹아 파도로 돌아가는 순간이 허공이라고
오직 저 나비의 귀에만 속삭이겠네
가난의 변주곡
지금껏 가난하게 살아왔는데
빚더미 가득한 집 싱크대는 아직도 줄줄 샌다
나는 그 원인을, 막힌
배수구에 버린 물이 역류하는 것이라
추측은 하면서도
속수무책이다
역류하는 건 고작 구정물뿐일 테니까
가난에도 문양이 있는 법이다
지금 겪는 이 시간은
어두컴컴하게 막힌 배수구와도 닮았지만
내 심장은 꺼지지 않은 사랑이
아직 움켜쥐고 있다
가지 못한 길이 남아 있는 오늘 밤에도
꽃잎은 바람에 흔들리지만
번민은 목마른 가뭄에도 우북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쁨이 내게는 있다
아침마다 꿈에서 울고 가는 새여
떠나버린 음악이 남긴 상흔에 드는 비용을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가난한 걸음으로 강가를 걷기로 했다
혼자만 듣는 신음을 더 앓기로 했다
기도
만일 우리가 빵을 굽는 시간을 잃는다면
노란색은 어디에서 올까
입맞춤 없이 붉은 노을이
지상에 내려올 수 없듯
얼굴을 묻어주던 가슴이 떠나면, 마당에 핀
저 꽃은 불가능이듯
냇물 복판에 서 있는 바위 말고
졸졸졸 음악을 틀어줄 수 있는
존재는 없는 것
사랑이여,
잎사귀 같은 눈빛을
내 무너진 어깨에
머물게 해다오
번진 물결이
저 하얀 무릎에 가닿게 해다오
그리고 암전-
사랑의 가동
가시덤불 같은 꿈을 개고
창을 여니 눈 세상이다
밤새 불면이 저리 가득했던가
머나먼 당신의 노래가
하얀 내재율이었던가
사랑은 마음이 가장 헐벗을 때 시작되고
함박눈은 중심을 버릴 때 쏟아지는 것
가장자리에서 침묵을
오래 고집했던 기억이 내게도 있지만,
목장갑이 어디 있더라?
신발장 뒤적여 운동화를 꿰어 신고
온기가 조금 남은 집을 나섰다
동통이 가시지 않은 어깨를, 얼어붙은
길에게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안을 버리니
밖이 안이 되고
황량한 안은
밖이 되었다
더운 입김이
허공을 구성하는 순간이었다
정오가 온다
숙청과 학살 다음에 뜨는
해는, 빛이 한가득이다
정수리에 불이
쏟아지는 시간은
꽃이 피는 순간이 아니다
저항과 봉기의 왼편에서
떨리는 입맞춤이 없을 때
타락이 오고 물가에는 물잠자리가
사라져버린다
그림자가 가장 길 때
노래는 정오를 가리킨다
그래서 정오는 언제나
우리의 얼음장이다
바닥에 떨어진 목숨이다
사랑 너머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
가만히 있으라는 말, 우리 몸에 굴종을
새겨 넣는 말, 명령의 말, 국가의
아가리에서 쏟아진 거짓말,
훈육의 채찍 같은 말, 가만히,
있으라는 말, 우리의 영혼을 미라가 되게 하는 말,
결국 착취의 말,
쓰고 버리기 위해
흐르지 말고 고여 있으라는 말,
금기의 말, 사랑을 통치하는 말,
기도에 못을 박는 말, 가만히
있으라는 말, 행진도, 저항도, 광기도
끝내 썩어버리라는 말,
저 봄 들 대신
황무지를 가슴에 품으라는 말,
원망을 분배하는 말,
강물 쪽으로 흐르는 울음을
가로막는 말,
가만히 있으라는 말,
이제 그만 멈추라는 말, 안 보이는
상류를 품으라는 말,
물새의 가는 발목으로 물결을 일으키는 말,
강물이 바다 쪽으로 몸을 굴리며 내는
주문 같은 말,
먼 바다를 저물도록 바라보게 하는 말,
다시 해가 뜨도록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 같은 말,
눈물이 돌의 침묵으로
변하게 하는 말,
흘러내리는 피의 말,
가만히 있으라는 말,
가만히 있으라는 말,
번개를 가진 비구름을
이곳으로 부르는 말,
폭염
계란판 겹겹이 실은 짐자전거
아스팔트 내리막에서 기우뚱
와르르르르 허물어진다
그늘에서 꿈쩍 않던 개들
어슬렁어슬렁 모여들더니
슬금슬금 혓바닥 내밀어
날름날름 바닥 핥고 있다
땀에 찌든 자전거
털썩 주저앉아 망연자실 눈이 흐린데
개새끼들
참, 눈치 없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지천명 코앞에 두고
가파르게 달려온 지난날 돌아본다며, 이 선생
강원도 어느 절에 템플스테이를 신청한 것인데
승복으로 갈아입으면서
담배나 MP3, 휴대폰은 절대 금지, 라는 스님 말씀에
MP3는 그렇다 치고, 담배는 양말에
휴대폰은 진동으로 하면 되겠지 싶어
스리솔짝 꼬불쳐두었던 것인데
저녁 공양 마치고
백팔배 이어 면벽참선하는데
뒤가 마려워 해우소에 엉덩이 까고 앉아
꼬불쳐둔 담배 꺼내려는 찰나
바지 주머니 휴대폰이 그만, 철푸덕
통시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인데
허, 그거 참
쪼그려 앉아 담배 연기만 날리고 있는데
누구일까?
해우소 바닥까지 좇아와 저리도 간절하게 나를 부르는 이
누가싸랑을아름답따핸는가아아아아아아
누가싸랑을아름답따핸는가아아아아아아
폭설
다음은 오일장, 오일장이우다
노리컬랑 혼저 앞더레 나옵서양
오늘은 무사 영 늦읍디가
질레서 얼어 죽는 중 알아수게
첨, 할망도 곱곱한 소리 맙서
저 동펜인 가난 질레 눈이 고득허연
큰 차나 족은 차나 빌빌빌빌
서펜인 가난 질 가운디 땀뿌추럭이
탁 걸러전 누어부런 어떵헐 말이우꽈
그거 무신 말? 시상에
게나저나 이거 무신 눈이라, 콸콸콸콸
노릴 때 맹심헙서양
미끌락허민 그땐 진짜로 죽어짐니다
히여뜩한 소리
세경 바레지 말앙 운전이나 멩심헙서
할머니를 내린 버스가
찰그락찰그락 눈길 속으로 멀어진다
빙의
옛말 고르커메 들어보라
느네 성할망은 느네 아방 낳고 소박맞앙 여든 나도록 촌집에 혼자 살아시네 어느 날 집에 강보난 우영팟엔 검질이 왕상 정지엔 거미줄이 고득허연 아이고, 영허당 죽어져도 모를고로나 싶언 옷가지 몇 개 이불 보따리에 싼, 집으로 모셩와신디 온 지 얼마 아니 되연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헌거라
느네 아방은 성할망신디 술은 절대 먹지 말렌 불호령을 해노난 말벗 어신 촌 할망 오죽이나 곱곱해실거라? 보기에 하도 딱허연 아방 모르게 점방에 강 할망 좋아허는 흰 술도 사고 붉은 술도 사고 찬장에 곱져둠서 흰 술 한 잔 붉은 술 한 잔 드려나시녜 느네 아방 모르게
성안에 온 지 두 달 보름 만에 할망이 오꼿 죽으난 정성치성으로 영장 치르고 왕강징강 구왕풀이도 허고 사십구재도 허연 저승 상마을로 잘 인도해 드렸주
일 년 만에 소상 치르고 닷새 정도 지나신가 이모한테서 전화가 온 거라 영장 때영 소상 때 부지런히 부름씨해준 진수 어멍이 꼭 할망 씌운 거 닮덴 허멍
이거 무슨 일인고 허연 와랑와랑 달려간 들어보난 소상날 밤부터 빌빌빌빌 아프기 시작허여신디 누워둠서 허는 짓이나 소리가 영락없는 죽어분 할망이렌 허는 거 아니라?
내가 봐도 할망이 돌아온거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물이 숨딱허연 손목 심엉 솔솔 달래멍 고랐주
-아이고 어머님아 무사 이제도록 아니 갑디가? 구왕풀이에 사십구재에 소상까지 동그랗게 촐령 보내신디 무신 청원헌 일이 이선 죄 어신 진수 어멍 몸에 의탁을 헙디가?
-곧고 싶은 말 곧젠 해신디 몸은 진토가 되어부런 잠시 잠깐 놈의 몸에 의탁을 해시난 고라지민 바로 가켜
-경허걸랑 고릅서 어머님아
-고마웁다 메누리야 흰 술 받아줜 고마웁고 붉은 술 받아줜 고마웁다 메누리야 흰 술 한 잔만 받아도라 붉은 술 한 잔만 받아도라
-아이고 우리 어머니 막 기리와났구나게 걸랑 그리헙써 와랑와랑 슈퍼에 달려간 소주 한 병 콜라 한 병 사단
-흰 술 한 잔 받읍서 붉은 술 한 잔 받읍서, 허멍 드리난
-고마웁다 메누리야 고마웁다 메누리야
닷새 동안 거동도 못허던 진수 어멍 소주 한 잔 쭈우욱 콜라 한 잔 쭈우욱 허연게마는 '아이고 시원허다, 이젠 살아지켜, 나 감져'
벽장더레 돌아눕자마자 소르륵 자는 거라, 죽은 사람고치
다음 날 아침 그 어멍 '아이고 잘 잤져' 허멍 펀드룽이 일어난 세수허고 로션 바르고 루즈 칠허고 십 년 넘게 다니는 사무실에 출근허연 이십 년 넘게 더 다니단 사오 년 전엔가 죽었덴허여, 여든다섯에
어느 날 스타벅스에서- 이상국
나에게는 이제 남아있는 내가 별로 없다
어느새 어둑한 헛간 같이 되어서
산그늘 옛집에 살던 때 일이나
살이 패리도록 외롭지 않으면
어머니를 불러본지도 오래 되었다
저녁 내 외양간에 불을 켜놓고
송아지 나올 때를 기다리거나
새벽차를 타고
영을 넘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거의 새 것이다
그동안 많은 것을 보고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아닌
나는 저 산천의 아들 혹은
강가에 모래 부려놓고
집으로 가는 물처럼
노래하는 사람
나에게는 지금 내가 아는 내가 별로 없다
바퀴처럼 멀리 와
무엇이 되긴 되었는데
나도 거의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그 사람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 《미네르바》2014년 가을호
내금강 삼불암-뉴욕공립도서관
이해인 수녀님의 동백가지 꺾는 소리- 손택수
어떤 꽃가지들은 부러질 때 속 시원하게 부러진다...
가지를 꺾는 손이 미안하지 않게
미련을 두지 않고 한번에 절명한다
꺾는 손이나 꺾이는 가지나
고통을 가능한 한 가장 적게 받도록
아니, 기왕에 작심을 하였으면
부러지는 소리가 개운한 음악소리를 닮을 수 있도록
아무도 모르는 급소를 내어준다
광안리 성베네딕도 수녀원
65년부터 여기에 있었다고
얼마 전 영정사진을 찍어놓았다고
암투병 중인 수녀님이 선물로 동백가지를 끊는다
뚝,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마치 오랜 동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단번에 가지 꺾이는 소리,
세상 뜰 때 내 마지막 한마디도 저와 같았으면
비록 두려움에 떨다가도 어느 순간
지는 것도 보람인 양
가장 크고 부드러운 손아귀 속에서 뚝,
꽃보다 진한 향을 뿜어낼 수 있었으면
-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창비, 2014)
내 일상의 종교-이재무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던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실천문학, 2014)
붉은 나무-정훈교
당신은
어느 종족에도 속하지 못한 붉은 나무입니다
바람 불면
몇 잎의 꽃들이 아우성입니다
당신은
쓸쓸하기도 하거니와
허공을 지우며
발아래 물 아래 다녀가는 종족이기도 합니다
붉은 음색을
사위에 깔며 더디 가는 당신
우우우
곧잘 바람이 되곤 합니다
무너지는 침묵을
길 위에 펼치는 당신은
봄밤
오래된 나무
당신은
개화에도 자유롭고
낙화에도 자유로운
붉은 나무
- 『또 하나의 입술』(시인동네, 2014)
염소 브라자-공광규
북쪽에서는 염소가
브라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웃으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먹어야 하니까
젖을 염소 새끼가 모두 먹을까봐
헝겊으로 싸맨다는 것이다
나는 한참이나 심각해졌다가
그만 서글퍼졌다
내가 남기 밥과 반찬이 부끄러웠다
- 『담장을 허물다』(창비, 2013)
옜다, 물 한 바가지-차승호
평소에는 뭔가, 지집애 마냥
낯간지럽기도 하고 체질에 맞지도 않아서 뭔가 말랑말랑한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다가 알싸한 술기운에 그것도 효도랍시고
어머니, 제발 덕분 오래오래 들판 지키셔야 되유
어머니라는 보통명사엔 뭔가 복받치는 게 있는가 말하다 보니 울컥해져, 팔십 구십까지 사시란 얘기 에두르느라 핸드폰 쥔 손 비장하게 떨리는 것이었는데
이런, 씨불알 중생을 봤나
염천에 고추 따느라 삭신이 다 녹아내리능구먼 그게 시방 늙은 에미헌티 헐 소리여
마음먹고, 효도(?)의 말 한마디 건네면서 뭔가 다감한 말씀 기대에 부풀었던 것이었는데,
아닌 밤중에 참 뒤통수 얼얼해지는 것이
소주 두 살짜리 술이 확, 깨더먼유
정신 사나워도 그게 잘 되능가?
여게들, 저 너머 우리 밭 있던 자리 있잖어
여관인지 모텔인지 여하튼 집 놔두고 한뎃잠 자는 물건 들어슨 거 봤능가?
밤마다 반짝반짝하는 그 물건?
암만, 저그번 도로 난다고 보상받고 자투리 땅 남은 거 분당인가 워디 사는 이한티 좀 받긴 받었넌디, 고얀히 팔었다니께 지나댕길 때마다 비위짱 상하는 게 한마디 따지고 싶은디 뭐라고 해야 한다나?
글시, 테레비 보면 인구 줄어들어 다들 걱정이라든디 젊은것덜 인구 늘리느라 부지런떠는 걸 뭐라 한다나
그전 같으면 애들 교육상 안 좋다지만 요새는 핵교 댕기는 애들도 드물고 늙은이뿐이니 늙은이 교육상 안 좋다고 허나 늙은이 교양상 안 좋다고 해야 허나
늙은이 교육이나 교양이나 밤새 치는 고스톱밖에 더 있으까
그러지 말고, 들판에 심어놓은 작물들 본보고서 고추낭구는 고구마 매달고 고구마 넌출은 호박 키우면 책임질 거냐고 따지능 건 워뗘
따지긴 뭘 따져, 난 밤마다 불이나 좀 꺼줬으면 좋겄더먼 도무지 밝아서 잠이 와야지 그렇잖아도 삭신 쑤셔서 제대로 자지도 못하는 판에, 씨불알늠으거
이 사람 승질은, 그것보다 지붕이고 처마 끝이고 창문틀이고 테두리마다 반짝거리던디,
정신 사나워도 그게 잘 되능가?
벅벅
평생 드나든 화장실 찾지 못하고
실수한 노인네 목욕탕으로 모시면서
서글픈 생각 들기도 하였지만
현상이 관념보다 힘센 탓인지
냄시가 생각을 밀어내는 상황인 거라
고장 난 뱃속이 문제인 세상에
소화 잘 시킨 거 보면
뱃속은 문제없는 것 같아 한편 안심하고
수돗물 콸콸 틀어 냄시부터 털어내는데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 쓰이는 자리, 노인네 거기
구석구석 비누칠하고
씻어내느라 모르는 체 했지만
알몸 희멀겋게 묵은 때까지 벗기는 동안
고개 돌릴수록 자꾸 눈이 가는 거라
나이 든 아들이라도 부끄러운지
달팽이처럼 움츠르는 老軀
술 취해도 표시 없는 얼굴 붉어지는 것 같아
짐짓 대수롭지 않은 듯
아버지, 거기 좀 씻어봐
따지고 보면 별스러울 것도
무안할 것도 없지만
선뜻 손 가기는 민망한 거라
아버지, 자꾸 조몰락거리지 말고
거기 좀 시원하게 씻어보라니께, 벅벅
누가 그려?
형님, 듣자니께 우리 동네가 개발구역 지정으로 잘 살게 됐다던디유?
누가 그려? 몇 푼 안 되는 보상금 때문에 집집이 쌈박질에 대가리 터지너먼 형제끼리 남매끼리 지랄하는 통에 동네가 다 시끄럽구먼
누가 그려?
엄마의 연애
사십에 과부된 엄마는
정말 단 한 번도 바람을 피우지 않았을까
아버지 이후로 한 번도 남자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을까
엄마에게는 애인이 없어야 당연한 것
그런 잔인한 도덕 누가 만들어 냈을까
슬픈 멜로 드라마를 보다
눈물을 흘리던 엄마의 늦은 겨울 밤
코 골며 자던 고단한 엄마의 젊은 몸
엄마의 캄캄한 몸짓을 사춘기의 나는 불안하게 바라봤다
항아리 속의 고인 물도 문 여는 기척에 출렁이는데
엄마는 내일 아침 나가야 할 행상에
모르는 척 뒤척이고
종일 차가운 바람 몸 안에 가득 채우며
모르는 척 뒤적이고
밤새 눈이 온 날
구멍 난 털신을 신고 방학동으로 화장품 행상 나가시던 엄마
여섯 식구 다 키우시며 삼양동에 집까지 장만하셨다
엄마 몫까지 연애질만 해대는 딸년들을 향해
엄마의 모든 것, 생활력 하나만은
똑부러지게 가르치셨다
- 살아 있어야 연애도 하지
꿈, 바람을 밟다
마흔이 되면 죽겠다던 나는
아직도 죽지 않고 사네
사랑 없이는 한순간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사랑 없이도 하루 중 다섯 번 이상은 웃고 지내네
늙지는 말고 젊은 얼굴로 제 명까지 살다
어느 한순간 생을 마감했으면 좋겠다던 나는
생리가 늦어지던 그 나날 중에
까마득하게 멀어지던 애인들을 떠나보냈네
나의 애인은 뜨거워 견딜 수 없는 내 마음
나의 애인은 바람을 밟는 내 발바닥
나의 애인은 사랑이 심하여 어느 경우에도 끝까지 가 보는 맹렬함
나의 애인은 끝도 없이 밀려왔다 쓸려 나가는 우울
모르는 척 모르는 척, 아 언제부터 나의 이기심이
내 애인들을 다 잡아 먹었나
훗날 훗날에 애인들이 나에게 돌아오는 날이 있다면
그때, 밥이라도 지을 기운이 남아 있다면
봄볕 아래 정성스럽게 밥상 차려 놓고
애인아 먹자
밥 숟가락에 햇살 한 조각 올려 주고
바람 밟으러 나가자
말하고 싶네
백송(白松)
그대, 미안하다
청춘의 징검다리였던 그대
종점 다방까지 뛰어온 그대는 다리에 쥐가 났었다
그 모습 이리 생생한 것을 보면
난 징검다리 위에서 가장 평화로운 연애를 한 것이다
내 생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기 시작한 그때
그대 그 길목에서 길을 잃었다는 소식
나는 그대에게 끝까지 이기적이었다
지조 없는 년에게도 이유 없이 속 편한 날이 왔을 때
내 안에서 소나무 향이 진동을 했다
막다를 골목을 먼저 빠져나온 나보다
오래 머물다 길을 잃은 그대
줄기에 흰 줄을 두른
은빛 소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밥 할아버지
시인 할아버지는
매일 식당에 오셨습니다
한 조각의 빵으로 아침을 드시며
시간 반 동안 읽기도 하고 쓰기도 하십니다
그 시간이 점점 줄더니
오는 횟수도 점점 줄더니
오시지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만난 그는
더 이상 운전도 못하고
책도 읽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귀만 조금 들려"
CD를 들고 조심조심 걸음을 놓습니다
한 편의 시가
저물어 갑니다
시인박멸-박정대
어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에 들어갔다
훌륭하다. 어떤 시인은 제목 없이 시를 쓴다
역시 훌륭하다. 그러나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시가 있듯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삶도 있다
제목이 부실하다는 것은 삶이 부실하다는 것
오늘은 그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삶의 제목으로 삼아라
삼나무에서 삼나무 이파리 자라듯
제목으로부터 삶이 자란다
고독이 분란을 일으키는 삶은
선반 위에 올려두어라
싸늘한 겨울 오후
난롯가에서 그대 시를 쓴다면
제목을 커피와 담배라고 하자
그 모든 성분은 삶으로부터 온 것일지니
커피와 담배의 시는 삶의 시다
담벼락과 마주한 그대 삶의 시를 보아라
처음부터 완성된 시는 없나니
―《시인수첩》(2014. 여름호)
아버지를 쓰다 /문정영
아버지는 집 앞 강물로 쓰면 싱겁고
한낮의 햇빛으로 지우면 파랬다.
이른 저녁이면 뜨거워진 공기가 은어들처럼 파닥거렸다.
아버지는 조용히 흔들리는 물결을 2층 옥상에서 바라 보셨다.
가문 날에 아버지를 부르면 독한 담배 냄새가 났다.
어린 나는 아버지와 익숙해지지 못했다.
아버지를 배워 아버지가 되었으나
그 사이 강가의 돌멩이들은 혼자 머무는 법을 익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얼굴이 검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아버지와 몸이 닿아도 아픈 곳이 먼저 닿았다.
초봄에 붉은 저녁이 걸려 있던 오동나무를 잘라냈다.
잘린 밑동에서 자라는 새잎처럼 나는 키가 커갔다.
누군가를 가려줄 수 있도록 넓어지라고 하셨으나
마음은 금이 간 사기그릇처럼 소심했다.
아버지는 거름을 준 텃밭의 단감나무였다.
무언가를 더 줄 수 있다는 듯 주렁주렁 해를 매달았다.
아버지를 쓰고 싶었으나 읽는 법을 알지 못했다.
- 《포엠포엠》 2013 가을호
위대한 남편-양정자
지난 밤 우리가
미친 짐승처럼 얼크러져
부끄러운 살의 장작불을 활활 태운 그 이튿날
그대는 갑자기
안면 싹 바꾸려 한다
밥상에 반찬 시원치 않다
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졌다
용돈이 너무 적다는 둥
목소리도 당당하게 위엄 떤다
지난 밤 흠씬 짓눌리고 짓뭉개진
행복해진 그대 마누라
다시 한 번 정신나게 짓밟으려 한다
그지없이 가련하고 귀엽도다
내 하나뿐인 사내 그대여
내 겉으로는 그럴 때, 그대
가장 위대한 사내로 여겨주리라
- 『아내일기』(화남, 2004)
"니기미, 한다한다 항께로 너무 하구망? 아무리 쓰잘데없는 예펜네라고 역불러 지집 사추리에다 뀌어댈 것은 므시여!"
"도깨비 같은 지집년하고는, 이잉- 쯔읏 쯔읏. 이녁도 모르게 새는 방구를 믓헌다고 니년 사추리에다 대고 내갈긴다냐? 속창아리가 고렇게 배배 꿰싸먼 못쓰능 거여."
"그래도 기분상으로 틀린 문제제잉.... 너머하구망. 한정놓고 시피봉게로 그라제잉. 헤앰-."
"내 방구 고렇게 유식이 분별허지는 못항게로 안심놓더라고. 쌀매들년아, 한칸 셋방 속에서 방구 불은 자리가 으디 따로 있다냐? 에잉, 즘생같은 지집년하고는!"
"아, 알았어, 알았당게 그만 나불대도 다 안다고..... 한방이면 또 몰라. 아 그저 풍풍 몇십 방을 불어내냔 말여? 뱃가죽이 다 얼얼하당께."
"주둥이 봉하라는디도 저년이? ...... 아니 그래, 냄편 잠결 방구가 그리 드럽고 절통하냐? 참말? 엉?"
"음마? 으째 소락대기를 치고 이 난리라냐? 드럽다는 것이 아니여. 사람을 너머나 무시해뿐다 이거여."
"니기미 쓰발녀언- 쫑알대는 택아지를 한방 받아뿐질라!"
아내가 옆방에서 들려오는 돼지집 부부의 역정 소리를 듣고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 흘깃 살펴보니 눈꼬리는 벌써 살큰 심술을 달았다.
- 천승세, 『오동추야』 서두